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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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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23.06.13 20: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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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인디고 메일링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그 때 읽을 수 있는 글.




=-=-=


여든아홉 번째 인디고 러브레터
삶을 위한 글쓰기


최근 강의를 많이 나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한동안 대면하지 못했는데, 마스크도 벗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학생, 교사, 학부모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한가득입니다. 그중에서도 <인디고잉> 77호(2022년 겨울)의 주제였던 “읽다, 새로운 세계를 열다”로 강의를 가장 많이 합니다. 최근 제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고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 기획을 하는 일을 하는 저와 인디고 서원의 동료들은 늘 ‘인문학의 쓸모’에 대해 고민합니다. 점점 세상은 나빠지는 것 같은데 인문학은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까, 우리의 일이 의미 있고 가치 있으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는가…. 자칫 무기력해지기 쉬운 상황 앞에,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제게 채찍질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번 <인디고잉>에 실은 글들이 바로 그 이야기들입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러브레터’ 지면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영화 <더 웨일>입니다. 주인공 역을 맡은 브렌든 프레이저가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더 주목받은 영화였습니다. 저도 뒤늦게 극장에 찾아가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알 수 없는 감정에 북받쳐 한참을 울었습니다. 영화를 한 번에 다 이해하기가 어려워 두세 번을 더 보고서야 용서와 구원이라든가, 가족의 사랑이든가 하는 주제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만, 영화를 볼 때마다 더욱 제 마음속에 깊이 들어온 건 바로 ‘글의 힘’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찰리’는 에세이 강사입니다. 그는 과거에 한 자기 행동에 스스로 벌을 주려는 듯, 폭식을 통해 270kg가 넘는 거구의 몸을 갖고 세상과 단절한 채 오직 집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사건들이 그의 숨통을 조여올 때, 그를 다시 숨 쉬게 해주는 것은 『모비 딕』을 읽고 쓴 누군가의 짧은 에세이입니다. 산소호흡기처럼 그 글을 읽고 되뇌며 그는 다시 세상에 숨을 내뱉습니다. 영화 내내 찰리는 카메라를 가린 채 온라인으로 강의하는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글을 쓰라”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는 딸을 향해 무엇이든 써보라며, 너의 글은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찰리는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다시 세계에 연결됩니다.


찰리에게 숨을 불어넣어 준 그 에세이는 딸 엘리가 8살 때 『모비 딕』을 읽고 쓴 것입니다. 소설을 읽고 줄거리와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기 생각을 쓴 평범한 에세이인데, 찰리는 이 글이 자신이 읽은 에세이 중 최고라고 말합니다. 저는 에세이에 나오는 “고래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들이 유독 슬펐다.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 걸 아니까”라는 구절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비 딕』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소설은 읽어내기가 힘듭니다. 평생을 모비 딕을 죽이기 위해 바치는 아하브도, 그의 광기에 끌려가는 선원들도,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고 목숨을 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모비 딕도,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며, 모순 투성이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이해하기가 어렵고, 상황은 더욱 납득이 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결과는 허무합니다. 그런 『모비 딕』이 가진 특별한 점은 사건과 인물을 설명하는 챕터들 사이 고래에 대한 세밀한 묘사 글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자세하고 정확해서, 한동안 이 소설이 고래학 코너에 있었다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입니다. 비평가 중에서는 허먼 멜빌이 자기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장황하게 고래 설명을 넣었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지만, 영화 속 엘리는 이것을 독자를 위한 배려라고 말했습니다. 옳고 그름이 없고 이해관계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잠시 위안을 얻은 독자는,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더 웨일>에 나오는 사람들 역시 『모비 딕』의 인물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얽히고설킨 관계, 도무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구원하고자 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실패…. 그런데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던가요? 매번 문제는 반복되거나 더 심각해지고, 무엇이 잘못인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기도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란 힘들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마음이 헛헛하고,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고, 허무함을 느끼는 때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점점 자극적이고 파괴적인 형태의 것들에 나를 노출시킵니다. 마치 미친 듯 먹어대는 찰리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삶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을 버텨내고 이겨낼 힘을 줄 삶의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모비 딕과 같은 거대한 시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고래 그 자체와 바다가 주는 장엄한 생명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각하는 방법으로 ‘글’을 선택했기 때문에 <더 웨일>을 보는 내내 눈물이 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부단한 의지를 가지고 읽어야만, 솔직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고 써야만 읽고 쓸 수 있는 것이 ‘글’입니다. 그래서 읽기와 쓰기는 인간의 삶을 닮았습니다. 진심을 다해 읽고 쓴다면, 우리는 보지 못했던 세계를 이해할 힘을 갖게 되고, 지치고 힘들어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인간 역사에 남겨진 수많은 이야기가 말합니다. 세계대전이나 식민지배, 극심한 독재 탄압이나 차별을 당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인간다움’ 혹은 ‘아름다움’에 대한 글을 더 많이 썼던 것도 바로 그 이유일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남긴 글은, 잔인한 시대에서도 존엄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잡지인데, 여전히 <인디고잉>을 만들어야 할까요? 정기구독자가 10년 넘게 그대로인 이 잡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처음 <인디고잉>이 만들어진 2006년부터 청소년 기자로 글을 썼고, 지금은 편집장으로 활동하는 제가 매번 잡지를 만들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답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엄청난 대의를 갖고 만들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책 한 권 읽기조차 버거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과 정말 어렵게 <인디고잉>을 만드는 것은, 숨쉬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잔인하고 가혹한 시대이지만, 분명 우리에게는 숨을 쉴 수 있는 아름답고 존엄한 것에 대한 언어의 바다가 필요합니다.

<인디고잉>에는 그런 글을 담고 싶습니다. 『모비 딕』의 고래 묘사 챕터처럼 때로는 장황하고 이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의아해지는 글일 수도 있습니다. 책 읽은 것 자랑하려고 만든 잡지인가, 하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지만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있음을 말하는 글이 여기 있다는 것을, 그런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외롭고 고독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좀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마음껏 누릴 권리가 청소년들에게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글로 여러분에게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참았던 숨을 뱉어낼 수 있는 그런 글이기를 바랍니다. 엘리가 써낸 최고의 에세이처럼, 솔직하고 정직한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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