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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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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춤] 죽음과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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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즉 무용은 인류가 절멸하는 시기에,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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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검색


불온한 신체의 안무 : 나는 왜 빨간 구두를 사랑하게 되었는가


송주호_공연예술가
‘빨간 구두’는 물론 안데르센의 저 유명한 저주의 구두를 말한다. 어린 카렌이 예쁜 구두를 탐하다 발목이 잘린다는 《빨간 구두》의 섬뜩한 이야기는 대중 문화예술의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통해 차용되며 여러 해석과 풀이로 변주되어 왔다. 권력으로부터 강요받는 속죄와 세계를 향한 저항의 두 갈래 상징체계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빨간 구두’의 상징성을 도구 삼아 심리적 원리의 활동을 설명하려는 인문학적 관점은 발목을 자르고 나서야 춤의 저주에서 풀려난 이 시대의 카렌(들)에게 꽤 야속한 위로일 것이다. 이 글은 맨발의 안무가에게 보내는 빨간 구두 샘플인 셈이다.


빨간 구두를 신으며

줌인 송주호 관련 사진


《빨간 구두》를 모티브나 소재, 내러티브 등으로 단순 차용하는 방식의 무용 공연을 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관습적인 창작 방식에 물음표를 던지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은유로서의 빨간 구두를 신는 걸 목격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동시대의 예술이 새빨간 구두와 함께 진보해왔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진보적인 예술가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로서도 진취적이었던 로이 풀러(Loie Fuller)와 마리 뷔그만(Mary Wigman)을 떠올려보자. 이들이 화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구시대 예술에 저주-축복을 내릴 수 있던 것은 어느 한 예술가의 ‘춤’으로만 한정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시에 ‘뱀’과 ‘마녀’를 환대할 수 있는 한 사회의 진보적 관점도 함께 작용한 것이다. (로이 풀러는 1886년 <뱀의 춤>을, 마리 뷔그만은 1914년 <마녀의 춤>을 발표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한데 모일 때 뱀과 마녀의 춤이 비로소 ‘안무’로서 성립하게 된다. 춤이 한 개인의 내재성을 끄집어낸다고 할 때, 개인은 어디에 내재하여 있는가. 개인이기 이전에 근대의 ‘여성’이었던 두 예술가가 남성 시선의 권력의 대척점에서 안무의 새로운 개념을 수놓기 시작했다면, 안무 자체를 재고하는 제롬 벨(Jerome Bel)은 무대 위 무용수가 아니라 관객에 빨간 구두를 신기기 시작했다.


불온한 신체라는 임계 값

제롬 벨의 <장애극장>은 비-무용수를 출연시켜 논란이 됐던 공연이다. 그냥 비-무용수가 아니라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비-정상인들을 무대에 세웠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서 이들은 반-무용수로 변환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환의 주체가 퍼포머가 아니라 관객 집단이라는 점이다. 직접 안무를 하는 대신 춤과 관련한 사례와 징후를 무대 위로 불러오는 ‘초청’의 개념으로 유명한 반-안무가 제롬 벨답게 퍼포머가 아닌 관객에게 빨간 구두를 신겨준다. 장애인이 출연하는 대부분의 공연이 갖는 태도가 '편견 없이 이들을 보라' 혹은 '함께 해요' 와 같은 시혜 의식이 대부분이라면, 제롬 벨은 이들을 선입관의 틀로 보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줌인 송주호 관련 사진
제롬 벨, <장애극장>, Photo ⓒ Michael Bause



선입관으로 장애인의 춤을 관람한다는 것은 그들의 댄스 테크닉에 앞서 관객의 관람 테크닉부터 따지게 한다. 통상적인 공연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가 편견의 일종인데, 이는 관객 개개인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영역이라는 인식 때문에 생긴다. 장애는 어디에 발생하는가. 이로써 <장애극장>은 무대를 보는 관객에 의해 안무가 될 가능성을 시험한다. 즉, 필수적으로 윤리적 인지와 논란을 통과해야만 그들의 춤을 볼 가능성이 생긴다. 이들은 당연히 다운증후군을 재현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다. 다운증후군 환자는 중추신경의 선천적 기형으로 인해 일상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구사하게 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부를 때 일반적인 몸짓으로 상체만 살짝 돌리지만, 다운증후군 환자는 몸 전체의 방향을 180도 돌린다. 이렇게 움직이는 출연진이 각자 장기자랑의 목적으로 준비한 춤은 섬세함과 거리가 멀고 투박하거나 거칠다. 이것이 결국 퍼포머와 관객을 포함하여 움직임의 발화자로서의 모든 일반적인 주체의 차이점을 떠올리게 하고 비교를 위한 구조를 제공한다. 동시에 재현 윤리의 문제와 개념에 대한 질문을 역설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즉, 관객은 장애인 퍼포머를 대상화함으로써 재현의 일종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유도하는 것이 관객 각자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 공연의 형식 그 자체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관객으로부터 동정과 시혜 의식이 발생하는 것을 인지하는 관람의 방법론은 <장애극장>의 원제인 “disabled theater”에 잘 나타난다. 시선의 권력을 발생시키는 극장 자체가 장애를 가졌다는 것이다.


안무가 발생하는 임계점

한편, 21세기 <봄의 제전>은 안무에 대한 가장 회의적인 방식으로 빨간 구두의 죽음을 애도한다.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의 <봄의 제전>(2013)에는 무용수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무용수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다만 죽은 무용수의 잔해라 할 수 있는 분쇄된 소 뼛가루를 흩뿌리는 기계 여러 대가 무대 위 천장에 매달린 채 등장한다. 이미 프로그래밍 된 작동에 의해 기계다운 건조하고 차가운 움직임으로 안무가를 대신한다. 거꾸로 매달린 분수 쇼의 뼛가루 분사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분수 쇼가 자본과 산업의 한복판에서 근대적 구경꾼을 위한 것을 떠올려보자. 그와 연계하여 과거에 도살장이었던 공연장에서 행하는 봄의 제전은 마찬가지로 산업 시장에 의해 쉽고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희생된 75마리의 소의 분쇄된 뼛가루로 현전할 뿐이다. 이는 이데올로기를 가리거나 착시하게 하는 스펙터클의 이미지가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인 쇼의 형태로 발현한다. 뼛가루처럼 소거될 대로 소거된 이 봄의 제전은 기약 받아야 하는 봄의 도래조차 순진한 낭만주의로 만든다.


줌인 송주호 관련 사진


로메오 카스텔루치, <봄의 제전> , 사진출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이미 죽은 것의 춤은 천장의 기계가 분사하여 공중에 잠시 흩뿌려지고 하강하는 것으로 미약하게나마 춤의 형태를 띠지만 이는 사실 죽음의 흔적의 운동일 뿐이다. 무용의 방법론을 채택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곳은 자본과 기계에 의한 죽음을 춤보다 그저 뼛가루의 흩날림만으로 표현하는 것이 최선인 장소이다. 신의 영역으로 도약하기 위해 높이 뛰어오르던 춤은 신의 죽음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생명의 존엄성 부재로 하강한다. 자본과 예술의 섹스는 죽음보다 차갑다.


빨간 구두를 벗으며

빨간 구두를 신은 카렌의 비극은 어느 유명한 시의 한 구절처럼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춤을 추다가 발생한 안무의 비극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의 눈은 안무가 아닌 춤을 쫓기 때문이다. 불온한 신체는 그 스스로 선택한 정치적 주체보다 사회적 온당함과 함께 충족되는 반-정상으로서 항변하는 객체일 것이다. 어쩌면 불온한 신체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출 수 있는 건 숱하게 잘려나간 발목 덕분일 테다. 이쯤에서 빨간 구두를 천사-사회의 저주가 아니라 안무가의 지독한 ‘스코어’로 달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송주호_공연예술가 공연 연출과 안무를 하고 있다. 공연작으로, 슬랩스틱 모노드라마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들춰본 <밝은 곳에 나홀로>(2016, 문래예술공장), 춤을 위한 제의적 공간과 춤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장소를 겹쳐 놓아본 〈응원 세포〉(2016, 국립현대무용단), 미술관 퍼포먼스 전시로 훗날 극장 공연 가능성을 점쳐본 〈Future Hands Up-봄의 제전 편〉(2015, 인사미술공간), 메타 비평적 관점으로 무용을 따져본 〈유익한 수난〉(2015, 국립현대무용단), 무용연습실에서 공연 예술가의 탄생을 자축해본 〈계속해서 팽창하는 우주를 따라 커지는 지루함〉(2015, 서울무용센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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