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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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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6.01.07 16:3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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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理論] 『므네모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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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것도 많지만 알아야 될 것도 많다. 젠장=_=.  생각보다 많은 수의 철학이 작금에 있어 완전에 가깝게 무용하나, 무수히 많은 책들도 아직 해석되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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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검색


https://namu.moe/w/%EC%95%84%EB%B9%84%20%EB%B0%94%EB%A5%B4%EB%B6%80%EB%A5%B4%ED%81%AC



아비 바르부르크, 『므네모시네』 머리말


http://myobo.egloos.com/2891549

『므네모시네』 머리말<sup>1)</sup>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A


  자 기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것은 아마 인류 문명의 근원적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세계 사이 공간이 인공적인 형상화의 기초가 될 때, 이러한 거리 의식이 지속적인 사회 기능으로 작용하는 선행 조건이 충족된다. 여기서 사회 기능은 물질 속으로 들어가고 절제를 향해 빠져나오는 리듬을 통해 비유적 우주론과 기호적 우주론 사이의 순환을 표현한다. 이 우주론들이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정신적 도구로서 제 역할을 하는가, 그러지 못하는가, 이것이 곧 인간 문화의 운명을 뜻한다.


  이 렇듯 종교적 세계관과 수학적 세계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예술적인 인간에게는 집단적 개인성의 기억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억 또한 도움이 된다. 이때 기억은 보다 넓은 사유 공간을 창출하지는 않지만, 정신적 태도의 양극단에서 고요한 관조나 열광적인 몰두로 향하는 경향을 강화할 것이다.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은 기억에 의해 생겨난다. 하지만 일차적 보존 경향 때문은 아니다. 격정적이고 공포증에 기인하며, 종교적 신비에서 깊이 감동받은 신앙적 개인성의 전체 무게가 예술 작품 속에서 새로운 양식의 표현을 이끌며 관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록하는 학문이 자신의 율동적인 구조를 퍼뜨리는데, 이 구조 속에서 환상의 괴물들은 미래를 규정하는 삶의 인도자가 된다.


  이 러한 과정의 결정적인 단계들을 꿰뚫어보기 위해 필요한 보조 수단, 즉 안으로 들어가는 환상과 밖으로 나오는 이성 사이에서 이뤄지는 예술적 형상화의 양극적 기능에 대한 인식은 구상적으로 형상화된 증거물들을 바탕으로 하는 사료 해석 전반에서 아직 활용되지 못했다. 분주하게 대상을 더듬어 찾는 행위는 상상적 포착과 개념적 관찰 사이에 자리한다. 여기에는 조형적 혹은 회화적 반영이 뒤따르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반영을 곧 예술 행위라 부른다. 반(反)카오스적 작용(예술적 형상화는 어떤 대상을 선택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제시하므로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과 숭배처럼 뿌리박혔으며 관찰자에게 눈대중을 요구하는, 우상들에 대한 몰두 사이의 이와 같은 이중성은 정신적 인간이 처한 당혹으로부터 생겨난다. 분명 이 당혹은 동인(動因)과 행위 사이 공간에 대한 예증된 심리적 역사를 연구 주제로 선택했을 문화학의 본래 대상일 것이다.


  공 포증적으로 각인된 인상의 유산을 탈마성화하는 과정(이는 감동 상태의 전체 단계, 즉 무기력한 몰두부터 잔인한 식인까지를 몸짓 언어로 포괄한다.)은 방종한 축제의 양극 사이 단계에 있는 인간의 운동 역학, 즉 싸우기, 걷기, 달리기, 춤추기, 붙잡기에도 섬뜩한 체험의 틀을 각인한다. 중세 교회의 계율 속에서 성장한 르네상스 교양인은 그러한 틀을 고삐 풀린 무신론자들만이 돌아다닐 수 있는 금단의 영역처럼 보았다.


  『므네모시네』는 그림 자료를 통해 이 탈마성화 과정을 예증하려 한다. 이 과정은 요동치는 삶을 표현할 때, 앞서 각인된 표현 가치들(Ausdruckswerte)을 내면화하는 시도로서 특징지어질 수 있을 것이다.


 


B


  『므 네모시네』는 덧붙은 도해서가 보여주는 복제된 그림 자료를 토대로, 우선은 고대 양식을 모방하는 앞선 각인들의 목록이 되고자 한다. 이 앞선 각인들은 증명된 것처럼 르네상스 시대 새로운 양식 형성에 함께 하며 요동치는 삶을 표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분야에는 특히 체계적으로 총괄하는 선행 연구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 관찰은 소수 주요 예술가 유형의 전체 작품을 연구하는 데에 한정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심층을 파고드는 사회적, 심리학적 연구를 통해, 기억에 의해 보존된 표현 가치들의 의미를 심오한 정신 기술적 기능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필요했다.


  게르만어의 보충형에 대한 오스트호프<sup>2)</sup>의 저술은 1905년 이미 저자의 이러한 시도에 도움을 주었다. 오스트호프는 형용사와 동사의 비교 또는 활용에서, 변화한 기본형이 형식적 동일성을 잃는다 하더라도, 특성이나 행위의 에너지적 동일성이라는 관념은 훼손되지 않은 채 어간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총괄하여 증명했다.


 필요한 부분을 수정한다면, 예술을 형상화하는 몸짓 언어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의 춤추는 살로메가 그리스의 마이나데스<sup>3)</sup>처럼 등장할 때라든지, 기를란다요<sup>4)</sup>의 과일 바구니 나르는 여종이 로마 개선문에 있는, 완전히 의식적으로 모방된 승리의 여신처럼 서둘러 올 때가 그런 경우다.


  방 종한 집단적 감동의 영역에서 각인 작업을 발견할 수 있다. 각인 작업은, 몸짓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한, 내면적으로 가장 크게 감동받은 상태의 표현 형식들을 기억에 강하게 때려 박음으로써 격정적인 경험의 인상들이 유산으로 보존되어 모범적으로 윤곽을 결정하도록 한다. 몸짓 언어의 최고 가치들이 예술가의 손을 통해 형상화되어 세상에 드러나려 할 때, 예술가의 손은 즉시 이 윤곽을 만들어 낸다.


  쾌락을 추구하는 유미주의자들이 그러한 형식 교체를 보다 크고 장식적인 선에서 느끼는 즐거움으로 설명할 때, 이들은 예술을 향유하는 대중에게 쉽게 동의를 얻는다. 매우 아름다우며 좋은 향기를 풍기는 식물의 플로라<sup>5)</sup>가 만족을 줄지는 몰라도, 순환과 수액 상승에 관한 식물 생리학은 플로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땅속뿌리의 생명을 연구하는 자만이 식물 생리학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 손들이 이교 석관에 있는 방종한 수행원들의 도취한 행렬에서 디오니소스를 봤을 때, 그리고 로마 개선문에 있는 최고 사령관의 승전 행렬을 봤을 때처럼, 고대가 조형적으로 예견한 현존의 승리는 삶의 긍정과 자기 부정이라는 진동하는 전체 대립 속에서 후손들의 영혼 앞으로 나아간다.


  두 상징에는 지도자를 추종하는 군중의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마이나데스가 디오니소스를 기리기 위해 광란 속에서 갈기갈기 찢긴 어린 염소를 흔든다면, 로마 군단 병사들은 야만인들의 잘린 머리를 마치 질서 잡힌 국가 체제의 만기된 공물처럼 카이사르에게 넘긴다.(부조 속 황제가 역전의 용사들에 대한 황제의 배려를 나타내는 대리물로서 칭송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물 론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콜로세움은 인간을 재물로 바치는 근원적 본능이 이교 시대 로마에서 자신의 신전을 강탈해 냈다는 것을 중세와 르네상스의 로마인들에게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로마에는 최고사령관의 월계관과 순교자라는 섬뜩한 이중성이 남아 있다.


  이 후 추가된 부조 줄무늬들에 의해 정당화되어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웅적 행위들이 콘스탄티누스의 외투 아래 보존될 수 없었더라면, 황제 신격화에서 무자비한 적을 경험했던 중세 교회의 계율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같은 기념물을 파괴했을 것이다.


  교 회 스스로도 단테에게서까지 아직 남아 있던 전설을 통해 트라야누스 부조의 영광스러운 독단을 기독교적으로 변형했다. 정의를 간청하는 과부에 대한 황제의 연민(Pietà)을 그린 유명한 이야기에서 아마도, 에너지적으로 전도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최고 사령관의 파토스를 기독교적 경건함으로 바꾸려는 가장 섬세한 시도가 일어났을 것이다. 내달려 나와 한 야만인을 말굽으로 짓밟는 내부 부조 속 황제는 과부의 아이가 로마 기사들의 말발굽 아래로 떨어졌다는 이유로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정지하라고 명하는 법관이 된다.


 


C


  고 대의 복원을 새로 대두되는, 역사성을 강조하는 사실 인식의 결과로, 그리고 양심에서 자유로운 예술적 감정 이입의 결과로 특징짓는 것은 불충분한 서술적 진화론에 그칠 뿐이다. 켜켜이 쌓인 자료를 가지고 충동적으로 헝클어진 인간 정신의 심층으로 내려가는 시도가 함께 감행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심층에서야 비로소 이교적 감동의 표현 가치들을 주조하는 각인 작업이 인식된다. 이교적 감동은 열광적인 근원 체험, 즉 디오니소스의 티아소스<sup>6)</sup>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니체 시대 이래로는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공존하는 이중 헤르마<sup>7)</sup>의 상징 속에서 고대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더 이상 혁명적인 태도가 필요치 않다. 이 대립성 이론을 피상적으로 일반화해 그대로 적용하여 인간이 지닌 표현 의지의 극한값들이 각인될 때 절제와 무아경이 양극적 기능을 하면서 유기적 통일성을 이룬다고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이교의 예술 형상물을 관찰하는 데 방해가 된다.


  특 히 소아시아에서 도취 신의 수행원들에게 나타나는 것과 같은 육체적 표현 운동의 해방은 무기력한 몰입에서부터 피에 굶주린 도취에 이르기까지 동적으로 감동받은 인간의 전 단계를 포괄한다. 그리고 걷기, 달리기, 춤추기, 붙잡기, 나르기, 들기처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모방 행위들은 저 고대 예술 작품들 안으로까지 들어가 격정적인 몰입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이 예술 작품들은 비록 고대 예술가 정신 고유의 절제를 보여 주기는 하지만 신비로운 감동의 문화권에 속한다.


  이 탈리아 르네상스는 독특한 분열 속에서 이 공포증적 인상들의 유산을 내면화하려 했다. 한편으로 이 유산은 세계로 향하는 기질을 지닌, 해방된 새로운 자들에게 환영받는 격려자였다. 이것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이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전달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이 격려가 기억의 작용으로서 일어났기 때문에, 즉 앞서 각인된 형식들을 통해 이미 한 번 예술적으로 형상화됨으로써 정화되고 포괄되었기 때문에, 복원은 충동적인 자기 포기와 의식적이고 제어하는 형식적 형상화 사이에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사이에서 예술적 창조력에 정신적 자리를 지정해주는 행위로 머물렀다. 하지만 예술적 창조력은 이곳에서 자신의 가장 개인적인 형식 언어가 독자적으로 주조되도록 할 수 있었다.


 


D


  앞 서 각인된 표현 가치들(이것들은 과거 혹은 현재로부터 비롯할 것이다.)의 형식 세계와 씨름해야 한다는 압박은 자기 개성을 관철하려는 모든 예술가에게 결정적 위기를 뜻한다. 유럽 르네상스의 양식 형성에서 이러한 과정이 지금까지는 간과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통찰이 바로 『므네모시네』의 시도를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므네모시네』는 그림 자료들을 토대로, 증명할 수 있는 앞선 각인들의 목록이 되고자 한다. 앞선 각인들은 이렇듯 이중으로 밀려오는 많은 인상을 포기하거나 내면화할 것을 예술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요구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나타나는 기념비적 양식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단계는 이교 시대와 기독교 시대 이래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형상과 연관된 예술 작품들 속에, 오직 실제 역사만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명료하게 반영된다.


  콘 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단 개선문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부조들 중 단지 몇몇 부조 줄무늬만이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 것이긴 하지만, 그 부조들로부터 최고 사령관의 파토스가 나온다. 이 파토스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능변으로 먼 후손들의 몸짓 언어에도 세계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물론 이탈리아의 눈이 만들어 낸 가장 섬세하며 선도적인 작품들은 이 가치 앞에서 지속적인 주도권을 잃었다. 아레초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콘스탄티누스 전투 그림(이 작품은 인간의 내적 감동을 위해 표현 형식의 새로운 비수사적 위대함을 발견했다.)은 말하자면 거친 군대(이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승전을 핑계로 방 안 여러 벽에서 내달려 들어올 수 있었다.)의 말발굽 아래서 짓밟혔다.


  라 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이웃에서 어떻게 예술적 형식 언어의 그런 공회전이 가능했을까? 고대 조각상의 훌륭한 몸짓에서 느끼는 기쁨이 고고학적 진품에 대한 동감하는, 다시 깨어나는 감각과 만남으로써 역동적인 고대풍 파토스 형식의 그토록 성가신 지배를 낳았다는 주장은 격렬한 과정을 단지 미학적으로만 설명할 뿐이다.


  이교적 형상 세계의 새롭고 격정적인 몸짓 언어는 섬세한 예술가의 눈, 그리고 동감하는 정선된 골동품 취향의 단순한 동의하에 아틀리에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 교 세계를 형식이 뚜렷한 올림포스의 거장으로 특징짓는 것은 오히려 강력한 저항의 시기에 얻어진 생각이었다. 저항은 서로 완전히 다른 두 힘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 두 힘은 그 야만적 반고전성에도, 겉으로는 고대 유산의 충실하고 권위 있는 보호자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리스 신 세계의 저 인간다운 뚜렷한 윤곽을 가리는 이 두 가면의 근원은 아주 이질적이다. 곧 이 가면들이란 헬레니즘 점성술의 잔존하는 기형적 상징들, 그리고 무언극과 복식(服飾)에 관한 동시대의 기괴한 사실주의로 나타나는 프랑스풍 고대의 형상 세계였다.


  헬레니즘 점성술의 기법들 아래에서 그리스 판테온의 밝은 자연스러움은 기괴한 형상들의 무리로 뭉쳐졌다. 이 형상들이 운명의 일그러진 상형문자라는 불투명성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에게 믿을 만한 것이 되도록 소생시키는 일은 한 시대의 강력한 요구였음에 틀림없다. 이 시대는 고대의 재발견된 말을 따르자면, 이제 외적 현상에서도 양식에 따른 유기적인 조망 가능성을 요구했다.


  사 람들이 이교 고대에 요구한 두 번째 가면 벗기는 겉보기에만 더 무해한 가장, 즉 프랑스풍 복식 사실주의를 겨냥했음이 틀림없다. 이 복식 사실주의와 관련하여 오비드풍 마력이나 리비우스의 로마 위인들은 플랑드르 태피스트리 또는 책 삽화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예술사는 동양의 실제적인, 북구의 궁정적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적인 고대 개념을 새로운 양식 형성 과정에서 똑같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구성 요소들로 총괄해 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 자신들의 아부 마샤르<sup>8)</sup>를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의 충실한 전승자로 아주 정확히 인식한 점성술사들이 스스로가 전승의 극도로 충실한 보존자라고 주관적으로 타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실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발루아 왕조 문화권에서 태피스트리 직공과 세밀화 화가 들의 박식한 고문들(이들은 훌륭하거나 형편없는 고대 작가 번역들을 앞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이 스스로가 고대를 극도로 충실하게 다시 부활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고 대 양식을 모방하는 몸짓 언어가 등장하며 보인 힘은 그러니까 이중으로 요구된 이러한 반동적 에너지로부터 간접적으로 설명된다. 이 에너지는 윤곽이 뚜렷한 고대 표현 가치들을 동질적이지 않은 전승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해 복원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양식 형성을 그러한 표현 가치들의 교환 문제로 이해한다면, 이 과정의 역학을 교류 수단의 기술과 관련지어 연구하라는 불가결한 요구가 생겨난다.


  피 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와 라파엘로파 사이 시기는 북쪽과 남쪽 간 집중적이고 국제적으로 그림 이동이 시작된 때다. 이 그림 이동의 본질적인 힘은 그것이 낳은 충격뿐만 아니라 이동 지역의 범위 면에서도, 유럽의 양식사가들에게는 로마 전성기 르네상스의 공식적인 ‘승리’에 가려 있었다. 플랑드르 태피스트리는 자동화된 그림 이동 수단의 첫 유형으로 여전히 비중이 엄청나다. 벽에서 풀려난 이 그림 이동 수단은 이동성에서뿐만 아니라 그림 내용을 복제 재생산하는 기술에서도, 그림이 인쇄된 종이, 즉 동판화와 목판화의 선구자다. 이것들은 유럽 양식 형성의 순환 과정에서 북쪽과 남쪽 간 표현 가치들의 교환에 처음으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북쪽에서 수입된 이 그림 운반자가 얼마나 강하고 폭넓게 이탈리아 팔라초<sup>9)</sup>로 침투했는지를 보려면 한 가지 예로 충분하다. 원시 시대와 현대의 요동치는 삶이 표현된, 약 250미터 길이의 플랑드르 태피스트리들이 1475년경 메디치가의 위풍당당한 의사당을 장식했다. 태피스트리는 사람들이 고대하던 궁정적이며 군주적인 화려함의 광채를 이 건물에 선사했다. 하지만 이때 이 태피스트리 옆에 보다 눈에 띄지 않는 예술 장르 하나가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예술 장르는 저렴한 캔버스 그림을 통해 겸손하게 등장함으로써, 양식을 형성하는 힘으로서 자신이 지닌 내적 우월함을 아직 숨길 수 있었다. 캔버스 그림은 재료 가치에서 부족한 것을 참신한 표현 방식으로 대체했다. 어떤 부르고뉴 기사 무장도 무거워하지 않는, 폴라이우올로<sup>10)</sup>의 무언극은 매혹적인 고대풍 열광에 빠진 헤라클레스의 행위들을 그러한 캔버스 그림 위에서 보여 주었다.


  이 교적 종교성의 근원 영역에 뿌리박은, 복원을 향한 깊은 동경이 여기에 덧붙는다. 인간을 물질로 되돌려 놓는 오비드의 동화들이 저승에 대한 황홀을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헬레니즘의 별자리들은 하늘에 나타난 종말적인 황홀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몸짓 언어의 뚜렷한 윤곽을 복원하려는, 단지 겉보기에만 순수하게 외적이며 예술적인 경향은 스스로, 즉 끊겨버린 족쇄의 내적 논리에 따라, 형식 언어를 낳았다. 이 형식 언어는 파묻힌 비극적, 스토아적 고대에 알맞은 것이었다.


 


E


  이탈리아에서는 평범한 인간 눈의 경이로운 작업을 통해 영혼의 똑같은 진동들이 단단한 고대 석조물 속에서 수백 년을 견디며 후손들에게도 살아남아 있었다.


  몸 짓의 그림 언어는, 귀로도 향하는 말의 언어를 새긴 각명(刻銘)에 의해 거듭 강화되어, 건축 작품(예를 들어 개선문, 극장)과 조형 작품(석관에서 주화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그러한 기억 관련 작용을 통해, 즉 표현 각인의 파괴할 수 없는 힘을 통해 수동적인 인내에서 능동적인 승리감에 이르기까지 비극적인 전체 양극성 속에서 인간의 감동 상태를 추체험하도록 강제한다.


  이교 관들에 부조된 전설들이 인간 영혼의 승천을 둘러싼 필사적인 싸움을 신비로운 상징들 속에서 내보였던 것과는 달리, 승전 조형물에서 삶에 대한 긍정은 호화로운 형식으로 스스로를 기념했다.


  저 열두 개가 넘는 줄지은 석관들은 이러한 교회 적대적 요소들이 얼마나 강하게 기억에 남을 수 있었는지를 증명해준다. 구제할 길 없는 이교적 마력의 금지 구역에서 나온 환상 같은 이 석관들은 아라코엘리의 산타 마리아 성당 계단 측면부에 끼워 넣어져 교회로 올라가는 경건한 순례자와 동행할 수 있었다. 겉으로 표현된 자의식의 이러한 모순은 중세 말기의 물질적 관찰 방식으로 하여금 이교적-투쟁적 개인성 감각과 기독교적-몰입적 개인성 감각 사이에서 평행하고 윤리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트 라야누스 시대의 고대적이고 승리감에 찬 개별 행동들이 보이는 극적인 뚜렷함이 콘스탄티누스 모방자들의 불분명한 대중 서사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감지된다. 뿐만 아니라 이 우월함은 격동하는 인간적인 삶을 표현하는 과제가 대두되자마자, 전범적인 파토스 형식으로서 직접적인 모범이 되어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르네상스의 형식 언어 속에 퍼졌다. 이는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의 특유한,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인문예술잡지 F 9호>



1) Aby Warburg, “Mnemosyne Einleitung”, Werke in einem Band, Martin Treml, Sigrid Weigel and Perdita Ludwig(ed.),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10, pp. 629~639.

2) Hermann Osthoff(1847~1909). 독일 언어학자.

3)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를 시중드는 여자들. ‘광란하는 여자들’이라는 뜻이다.

4) Domenico Ghirlandajo(1449~1494). 이탈리아 화가.

5) 로마 신화 속 꽃과 봄의 여신.

6) Thiasos. 신을 추종하는 집단, 모임.

7) Herma. 고대 그리스에서 숭배 대상이었던 각진 기둥. 기둥 위에 여러 신의 두상이나 흉상이 조각되어 있다.

8) Abu Mashar(787~886). 페르시아 출신 점성술사.

9)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귀족들을 위한 살림집.

10) Antonio Pollaiuolo(1432?~1498). 이탈리아 미술가.



modified at 2016.01.07 16:50:09 by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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