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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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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4.01.07 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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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 누가 어른이냐는 것. 나이먹은 젖먹이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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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 검색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한겨레






















자신을 ‘조명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을 연말인 12월23일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 안에서 만났다. 채 이사장은 “쓴맛이 사는 맛”이라며 “요즘처럼 절망적일 때 신명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거부’였지만 유신시절 ‘양심세력의 보루’였던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지는 않았다…노인 세대를 절대로 봐주지 마라”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며칠씩 신문을 보기 싫을 때가 있다. 상쾌한 표정으로 조간신문을 펼쳐 드는 건 신문사 광고에나 나오는 장면이다. 신문을 펼치는 게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큼 불길한 나날들, 불빛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을 만나면 “어른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될 수 있을까. 격동의 시대에 휘둘리지 않고 세속의 욕망에 영혼을 팔지 않은 어른이라면 따끔한 회초리든 날 선 질책이든 달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현국 선생에 대한 기록은 변변한 게 없다. 출생연도 미상. 대구 사람. 서울대 철학과 졸. 부친인 채기엽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며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거부였던 그는 유신 시절 쫓기고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언론인 임재경의 회고에 따르면 채현국은 <창작과 비평>의 운영비가 바닥날 때마다 뒤를 봐준 후원자였으며 셋방살이하는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사준 “파격의 인간”이다. 김지하, 황석영, 고은 등 유신 시절 수배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여러 민주화운동 단체에 자금을 댄 익명의 운동가, 지금은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 효암고를 운영하는 학원 이사장이지만 대개는 작업복 차림으로 학교 정원일이나 하고 있어 학생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던 채현국 선생을 지난 12월23일 조계사 찻집에서 어렵사리 대면했다. 검은 베레모에 수수한 옷차림, 등에 멘 배낭은 책이 가득 들어 묵직했다. 노구의 채현국은 우리 일행에게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깍듯이 존대를 했다. “독지가라 쓰지 말라”는 인터뷰 조건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시나?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탄광사고는 다른 탄광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게 결국은 내 책임이지. 자연재해도 아니고….” 흥국탄광이 설립된 것이 1953년. 열일곱 살 때부터 채현국은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하며 부친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10여 년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도계에 내려가 73년까지 회사를 운영했다. -젊어서는 큰 기업가였고 현재 학원 이사장인데, 어르신 70 평생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평전이나 자전에세이 같은 것도 없고. “절대 쓰지 않을 거다. 주변 사람들한테도 부탁했다. 쓰다 보면 좋게 쓸 거 아닌가. 그거 뻔뻔한 일이다. 난 칭찬받으면 안 되는 사람이다.” -죄송하지만 연세도 잘 모르겠다. 몇 년도 생이신가? “호적에는 1937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35년생이다. 올해 일흔아홉.”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쓴 글에 보면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는 대목이 있다. “하하하… 거지란 소리지.” -어쨌든 주류 모범생은 아니신 듯하다.(웃음) “근데 시험을 잘 치니까 내가 모범생으로 취급되고. ‘저러다 언젠간 출세할 거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0여 년 전부터 내게 성을 내는 친구들이 있다. ‘이 새끼, 출세하고 권력 가질 줄 알았는데 속았다’고….(웃음)” -출세는 안 하신 건가, 못 하신 건가?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채현국 선생과의 인터뷰는 긴 실랑이 끝에 몇 가지 약속을 전제로 성사되었다. “절대로 자선사업가, 독지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것” “미화하지 말 것” “누구를 도왔다는 얘기는 하지 말 것.” -도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도운 사실을 숨기나?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왜 안 되나? “그게 내가 썩는 길이다. 내 일인데 자기 일 아닌 걸 남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 된다.” -한때 소득세 10위 안에 드는 거부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신가? “난 여섯번 부자 되고 일곱번 거지 된 사람이다. 지금은 일곱번짼데 돈 없는 부자다.(웃음) 돈은 없지만 학교 이사장이니까. 개인적으론 가진 거 없다. 보증 불이행으로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탄광업에선 완전히 손 떼셨나? “73년도에 탄광 정리해서 종업원들한테 다 분배하고 내가 가진 건 없다.” -어떻게 분배를 했나? “광부들한테 장학금 주기 시작해서 그 자식들 장학금 주다가 병원 차려서 무료 진료하다가… 마지막에 손 털 때는 광부들이 이후 10년씩 더 일한다 치고 미리 퇴직금을 앞당겨 계산해서 나눠줬다.” -73년이면 오일쇼크로 탄광업이 황금알 낳는 거위였을 텐데 왜 기업을 정리했나? “경기 좋을 때였다. 근데 72년도에 국회 해산되고 유신 선포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곤 ‘이제 더 이상 탄광 할 이유가 없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군사독재 무너뜨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을 해왔는데….” -그럴수록 돈을 벌어서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업을 해보니까… 돈 버는 게 정말 위험한 일이더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돈 쓰는 재미’보다 몇천배 강한 게 ‘돈 버는 재미’다. 돈 버는 일을 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이 더 벌릴지 자꾸 보인다.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자꾸 끌려드는 거지. 정의고 나발이고, 삶의 목적도 다 부수적이 된다.” -중독이 되는 건가? “중독이라고 하면, 나쁜 거라는 의식이라도 있지. 이건 중독도 아니고 그냥 ‘신앙’이 된다. 돈 버는 게 신앙이 되고 권력이, 명예가 신앙이 된다. 그래서 ‘아, 나로서는 더 이상 깜냥이 안 되니, 더 휘말리기 전에 그만둬야지’ 생각했다.” -부친이신 채기엽 선생도 중국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독립운동가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신 걸로 알고 있다. 큰돈을 만지면서 돈에 초연하기는 부친한테서 배우신 건가? “우리 아버님도 일제 치하 왜곡된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성공 자체를 그리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부끄러운 시절에 잘산 것이 자랑일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과거 얘기를 나한테 하신 적이 없어서, 내가 아는 것도 다 남한테 드문드문 들은 거다.” 대구 부농의 독자였던 부친 채기엽은 교남학원 1기 졸업생으로 시인 이상화 집안과 교분이 깊었다. 이상화의 백형인 이상정 장군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걸 알고 상하이(상해)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중국에 잔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트럭운송업, 제사공장, 위스키공장을 하며 손대는 일마다 크게 성공했다. 독립운동가들을 먹이고 재우고 돈 대준 대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도 46년 귀국할 때는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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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적인 인간과 산파적인 인간 -일제하 지식인 중에 사회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어떠셨나? “아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사상이나 이념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셨다. 아버님도 나도, 지식이나 사상은 믿지 않는다.” -서울대 철학과까지 나오신 분이 지식을 안 믿는다니?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썼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반드시? “반드시!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옳은 소리에는 반드시 오류가 있는 법이다.” 부친이 큰 사업가였지만 채현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지 못했다. 사업은 부침이 심했고, 부친의 종적이 묘연할 때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가계를 꾸린 적도 적지 않았다. 위로 형이 한 분 계셨는데 휴전되던 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서울대 상대 4학년이던 형은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우린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 한마디뿐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채현국은 열일곱 살에 집안의 11대 독자가 되었다. -서울대에 입학해서 연극반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한 게 아니라 만든 거다. 그때 이순재가 철학과 3학년이고 내가 1학년이었는데 순재더러 ‘우리 연극반 하나 만들래?’ 해서….” -이순재씨가 선배라면서 왜 반말을 쓰시나? “나이로는 순재가 나보다 한 살 많은데. 내가 중학 때부터 후배한테는 예대(禮待)하고 선배한테는 반말했다. 나랑 친구 할래, 선배 할래? 물어보고 친구 한다고 하면 반말로…. 후배한테 반말하는 건 왜놈 습관이라, 그게 싫어서 난 후배한테 반말하지 않는다.” -원래 조선 풍습은 후배한테 반말 안 쓰는 건가? “퇴계는 26살 어린 기대승이랑 논쟁 벌이면서도 반말 안 했다. 형제끼리도 아우한테 ‘~허게’를 쓰지, ‘얘, 쟤…’ 하면서 반말은 쓰지 않았다. 하대(下待)는 일본 사람 습관이다.” 도계에서 흥국탄광 운영하는
거부였지만 유신 시절 쫓기던
양심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파격, 파격, 파격, 파격의 인간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아비들도 처음부터 썩진 않았지
노인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어쨌든 사업하는 집안 자제로 일류대까지 갔는데 왜 연극을 할 생각을 했나? “교육의 가장 대중적인 형태가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글자를 몰라도 지식이 없어도, 감정적인 형태로 전달이 되고. 지금도 난, 요즘 청년들이 한류, 케이팝 하는 거 엄청난 ‘대중혁명’이라고 본다. 시시한 일상, 찰나찰나가 예술로 승화되고… 멋진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채현국이 선택한 직업은 중앙방송(KBS의 전신) 공채 1기 연출직이었다. 그러나 입사 석달 만에, 박정희를 우상화하는 드라마를 만들라는 지시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침 흥국탄광도 부도 위기였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연 360%의 사채를 쓰며 겨우 위기를 막고, 이후 10여 년간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일군 사업인데, 아깝지 않나? “아깝지 않다.” -기업을 제대로 키워서 돈을 벌어 좋은 일에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거 전부 거짓말이다. 꼭 돈을 벌어야 좋은 일 하나? 그건 핑계지. 돈을 가지려면 그걸 가지기 위해 그만큼 한 짓이 있다. 남 줄 거 덜 주고 돈 모으는 것 아닌가.” -기업가가 자기 개인재산을 출연해서 공익재단을 만드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흥분한 어조로)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재단은 무슨…. 더 잘 쓰는 사람한테 그냥 주면 된다.” -그렇게 두루 사회운동가들에게 나눠주셨지만 개중에는 과거 경력을 입신과 출세의 발판으로 삼거나 아예 돌아서서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돈이란 게 마술이니까… 이게 사람에게 힘이 될지 해코지가 될지, 사람을 회전시키고 굴복시키고 게으르게 하는 건 아닐지 늘 두려웠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다. 비겁한 게 ‘예사’다. 흔히 있는, 보통의 일이다. 감옥을 가는 것도 예사롭게, 사람이 비겁해지는 것도 예사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운하거나 원망스러운 적 없으신가? “모든 건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보통 선생 연배에 이른 분들을 뵈면, 4·19에 열렬히 참여하고 독재에 반대했던 분들이 나이 들며 급격히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의제든 종북이냐 아니냐로 색칠을 해서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시하는데, 이런 세대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나? “세상엔 장의사적인 직업과 산파적인 직업이 있다. 갈등이 필요한 세력, 모순이 있어야만 사는 세력이 장의사적인 직업인데, 판사 검사 변호사들은 범죄가 있어야 먹고살고 남의 불행이 있어야 성립하는 직업들 아닌가. 그중에 제일 고약한 게, 갈등이 있어야 설 자리가 생기는 정치가들이다. 이념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다. 남의 사이가 나빠져야만 말발 서고 화목하면 못 견디는…. 난 그걸 장의사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깨진 돌에 쓰인 “쓴맛이 사는 맛” -그럼 산파적인 직업은 뭔가? “시시하게 사는 사람들, 월급 적게 받고 이웃하고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들…. 장의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실제 장의사는 산파적인 사람들인데. 여하튼 갈등을 먹고 사는 장의사적인 사람들이 이런 노인네들을 갈등 속에 불러들여서 이용하는 거다. 아무리 젊어서 날렸어도 늙고 정신력 약해지면 심심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는다. 심심한 노인네들을 뭐 힘이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가지고 이용하는 거다. 우리가 원래 좀 부실했는데다가… 부실할 수밖에 없지, 교육받거나 살아온 꼬라지가…. 비겁해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었고 야비하게 남의 사정 안 돌봐야만 편하게 살았는데. 이 부실한 사람들, 늙어서 정신력도 시원찮은 이들을 갈등 속에 집어넣으니 저 꼴이 나는 거다.” -젊은 친구들한테 한 말씀 해 달라. 노인세대를 어떻게 봐달라고….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요즘 청년들이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시나? “아주 고마워! 젊은 사람들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날조 조작하는 이 언론판에 조종당하지 않고 그렇게 터져 나오니 참 고마워. 역시 젊은 놈들이 믿을 만하구나. 암만 늙은이들이 잘못해도 그 덕에 사는구나 하고….” -정약용 같은 사람은 죽기 훨씬 전에 자기 비문을 썼다는데, 만일 그런 식으로 선생의 비문을 스스로 쓴다면 뭐라고 하고 싶으신가? “우리 학교에 가면 ‘쓴맛이 사는 맛’이라고 돌멩이에 쓰여 있다. 원래 교명을 쓰려고 가져왔는데 한 귀퉁이가 깨져 있었다. 깨진 돌에 교명 쓰는 게 안 좋아서 무슨 다른 말 한마디를 새겨볼까 하다가 그 말이 생각났다. 학생들한테 ‘이거 어떠냐?’ 물었더니 반응이 괜찮더라. 비관론으로 오해하는 놈도 없고.” -그 말이 비관론이 아닌가? “아니지. 적극적인 긍정론이지. 쓴맛조차도 사는 맛인데…. 오히려 인생이 쓸 때 거기서 삶이 깊어지니까. 그게 다 사람 사는 맛 아닌가.” -그럼 비문에 “쓴맛이 사는 맛이다” 이렇게? “그렇게만 하면 나더러 위선자라고 할 테니 뒤에 덧붙여야지.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하고.(웃음)” -“쓴맛이 사는 맛이다… 그래도 단맛이 달더라.” 뭐가 인생의 단맛이던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같이 바라고 그런 마음이 서로 통할 때…. 그땐 참 달다.(웃음)” 당분간은 쓴맛도 견딜 만할 것 같다. 선생과 함께한 시간이 내겐 “꿀맛”이었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바디우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 서용순 info@ilemonde.com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조직한 코뮤니즘 컨퍼런스의 제4차 세션이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고,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바디우와 지젝이라는 이름의 무게로 인해 코뮤니즘 컨퍼런스라는 행사가 조금은 덜 부각된 것이 사실이지만, 바디우의 첫 한국 방문을 통해 그동안 꾸준히 소개되었던 바디우의 철학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높아졌고, 그가 말하는 정치의 윤곽 역시 더 확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방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던지고 떠난 이방인이고, 남겨진 우리의 현실에 집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과제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이 향해야 하는 지점은 우리 자신이지, 바디우라는 대륙의 반대편 끝에서 온 철학자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바디우의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시도들에서 우리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한 영감을 얻을 뿐이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보편성은 항상 특수한 맥락에서만, 특정한 실천 속에서만 드러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맥락이고, 이에 대한 사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몫이다. 그런 연유로 필자는 우리가 바디우를 왜 읽어야 하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막연하게 바라는 것처럼, 우리가 바디우에게 왜 열광해야 하는지 설명할 생각도 없다. 그저 약간의 호기심만을 가진 사람들에게 ‘열광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촌스러운 일인가? 다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가능성, 불가능하다고 치부되던 또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어떤 철학자가 있다고.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몇 년에 한 번씩 투표장에 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게으름뱅이들을 흔들어 깨우기를 원하는 실천적인 철학자가 있다고 말이다. 사건이 끊이지 않는 나라, 한국 필자가 보기에 바디우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한국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나름대로 한국 사회의 특성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한국이란 어떤 나라였을까? 바디우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 “한국은 나라 전체가 ‘사건의 자리(evental site)’인 듯하다.” 엄청난 말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돌발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이야기다. 수많은 금지의 조항들, 지나치게 유동적인 사회적 불안정성, 법과 현실의 이율배반 등으로 점철된 나라가 한국이라면 이 말은 정확하게 맞다. 사실 우리 한국인들에게 그런 상황은 익숙하다. 날이면 날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나라, 수많은 사건, 사고와 스캔들, 여러 엽기적인 논쟁과 억지스러운 비방이 신문의 정치·사회면을 장식하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신문만이 아니다. 뉴 미디어라 불리는 인터넷과 SNS에서의 많은 이슈는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대립과 불화의 양상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운 한국 사회의 난맥상이 말하는 것은 이 나라가 근원적인 불안정성과 비일관성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칙)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태들은 언제나 곳곳에서 목도된다. 국가 권력과 금권이 법을 무시하는 일은 흔하디 흔하다. 현실과 법의 괴리가 모든 일탈을 합리화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법의 바깥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법의 횡포로 압사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쌍용자동차와 용산 참사 그리고 지금의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등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는 사태들이다. 사건을 긍정하는 주체성이 필요 이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은 강자에게 지나치게 너그럽고, 약자에게 지나치게 엄격하다. 강자의 일탈은 너무 쉽게 용서되고, 일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약자들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여러 정당한 파업과 저항들은 불가능한 것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탄압당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무엇을 하든 보호받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현실은 이 사회를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거대한 폭탄으로 만든다. ‘나라 전체가 사건의 자리’라는 말은 한국 사회 전체가 새로운 투쟁이 언제든 출현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드러낸다. 모든 불가능의 규정을 거스르는 투쟁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이 한국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구조와 법칙의 틈이 드러나고, 그 틈을 더욱 벌어지게 하는 사건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능성이 반드시 사건으로 연결되고, 그 사건을 통해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바디우 자신이 말하듯이 사건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한 사건이라 해도 자동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사건들을 통해 미래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주체성이다. 사건을 긍정하는 주체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사건은 그 어떤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것을 가능의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주체성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사건을 긍정하는 것은 이미 확립된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사건에 대한 긍정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로 나아가는데, 이는 기존 상황을 지배하는 법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배적 법칙에 대항하여 지속적이고 끈질긴 투쟁을 불사해야만 한다.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대한 긍정의 힘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의 원동력이다. 어떠한 타협도 없이 그 긍정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주체성, 포기를 모르는 실천적 주체성만이 사건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그 주체성이 없다면, 사건은 그저 의미 없는 에피소드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은 바로 그러한 주체성의 출현과 실천을 통해 드러날 것이고, 그때 비로소 바로 바디우가 진리라고 부르는 새로운 부분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 주체성이 일시적인 의견의 흐름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향하는 주체성은 확신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확신에 기대는 강력한 실천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실천적 주체성이야말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동시에 가장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주체성이다. 이 사회에서 새로운 가능성의 추구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변화에 대한 열망은 있으나, 그 열망을 지탱하는 확신과 그 확신에 입각한 실천적 주체성은 사실상 없다. 사람들이 믿고 기대는 것은 그저 의견의 지배로서의 의회민주주의일 뿐, 사건에 대한 확신으로 나타나는 주체성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를 둘러싼 오늘의 정치적 딜레마가 있다. ‘불가능’으로 치부되는 새로운 가능성 이 시대의 유일한 정치적 형식으로 간주되는 의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타협의 체제이다. 다양한 의견의 대립을 외관상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소시키는 이 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그저 유한의 테두리에 갇힌 수의 논리이다. 소수는 다수에게 복종하고, 다수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그 의견이 어떤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견이 갖는 가치는 사실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가 악을 원한다면, 그 악은 옳은 것이 된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은 이러한 수의 법칙이다. 중요한 것은 의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체제는 화폐라는 추상성이 지배하는 경제적 체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추상적인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만이 가능하다. 그것에 대립하는 모든 것을 불가능한 것, 범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완전히 같은 논리로 움직인다. 그렇게, 의회민주주의 이외의 다른 어떤 정치적 대안도 있을 수 없다.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상은 그 자체로 끔찍한 범죄로 치부된다. 경제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는 가장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체제로 간주된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경쟁하는 것은 전체 사회를 풍요롭게 하는 길이고, 공적인 부분의 역할은 사적 이익의 추구와 공정한 경쟁을 보증하는 수준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한 체제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가해지는 제약과 통제는 불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오늘날의 자본-의회주의를 움직이는 지배적 담론이라는 점은 새삼 재론할 필요가 없다. 주체성을 잃은 아우성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의 주체성이란 이러한 자본-의회주의적 담론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으로 접근하는 실천적 주체성이다. 말하자면, 이 주체성은 기존의 모든 지배 논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게 하는 실천적 동력인 것이다.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하루하루 살기 바쁜 이 마당에 무슨 다른 생각을 하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여전히 지배 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바디우의 철학이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은 정확하게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의회주의적 논리와 일치한다. 이 실천적 주체성은 열성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저 몇 년에 한 번 투표장에 나가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고, 곧 실망하고 마는 자본-의회주의의 정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실천의 지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는 순전히 게으름뱅이의 정치다. 이것저것 귀찮고, 살기 바쁘다. 정치는 그냥 정치인이 해라. 그렇게 사람들은 직업 정치인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다음 선거를 기다린다. 또 투표하고, 또 실망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된다. 대의제 정치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구조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변화는 오늘날의 대의제 정치라는 유일한 가능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다른 가능성을 찾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다른 가능성은 오늘날 불가능한 것으로 낙인찍힌 것에서 나온다. ‘당 없는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다 당과 국가의 결합을 파괴하라 사람들은 그저 참신한 정치인을 기다리기만 한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은 이런 과정의 반복 속에 놓인 작은 계기일 뿐이다. 어느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인물, 기성 정치인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를 가진 어떤 인물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기대를 건다. 나 대신 뭔가 잘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대를 얻은 그는 정치판에 들어간다. 곧이어 그는 기성 정치의 논리에 완전히 휘말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끝났다.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한 문국현과 안철수, 대통령이 되어 실패한 노무현,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 이명박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가능성,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바디우의 실천적 규정은 그 가능성을 ‘당 없는 정치’에서 찾는다. 이는 분명 오늘의 자본-의회주의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가능성, 자본-의회주의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가능성이다. 20세기 이래로 모든 정치는 당-국가의 패러다임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사회주의 정치와 파시즘/나치즘은 모두 단일 정당에 의한 정치였고, 자본-의회주의는 다수 정당의 권력 교체를 통한 정치였다. 양상은 달라보일지 몰라도, 모든 정치가 당과 국가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다. 이 모든 정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는 철저하게 당과 국가의 결합을 파괴하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이 언급은 오늘날 정치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자 가장 약한 고리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모든 새로운 정치인들, 과거의 정치와 단절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 세력이 좌초한 지점은 바로 당이었다. 당의 정치적 독점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디우가 우리에게 던져준 여러 가지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리라.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그는 지극히 원칙적인 수준, 보편적인 수준에서 그런 문제를 던졌을 뿐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일은 그가 아닌 우리의 몫이다. 그를 섣부르게 흉내 내거나, 그의 주장을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지적 사대주의로 전락하는 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실천들이고, 그 실천을 창안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바디우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불가능한 것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주체성, 객관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실천적 주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기력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스스로의 일이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서용순










modified at 2014.01.07 23:04:24 by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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