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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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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3.05.02 20: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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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연극] 로메오 카스텔루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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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신만큼 예술의 재료로 소비/낭비된 소재도 없으리라.  신의 거론 자체가 초월적 증후의 발로일 터, 그가 필요하지 않은 삶이 가장 이상적인 시간이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실상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아닌, 종교의 상황으로 인해서 도출/도륙되는 여러 삶들과 관계들의 텍스트는 어마어마할 수 밖에.
문제는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나타내고 명료화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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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검색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로메오 카스텔루치, 죽은 신과의 눈싸움
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 사진저작권 © KLAUS LEFEBVRE 사진제공: 페스티벌봄




#1. “아버지,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2. 땅이 흔들리고 해가 가려졌던 것은 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순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이었다. 신이 신 자신에게서 버림받았음을 고백하는 소리였다. (체스터턴, <정통> 중에서)

*-*

지난 베니스 비엔날레의 주빈으로서 유럽 컨템퍼러리 아트의 총아로 마침내 등극한 이태리의 연극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는 이제 종교의 작동방식을 이 몰락해가는 지구의 운명에 맞춰서 새롭게 보여주는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를 들고나왔다. 이 선택은 필연으로 보이는데, 그의 <신곡> 시리즈에서 거의 저 깊은 무의식의 폭력에서부터 미래의 SF 판타지까지 엄청난 간격의 널뛰기하며 종교의 감응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종교를 건드리는 것은 대체로 그 상징이나 모티브를 취하는 방식이다. 뒤샹의 <주어진 것>이 다빈치나 라파엘로의 암굴 모티브를 사용한다거나 백남준의 가 TV 모니터를 거울처럼 바라보는 붓다의 상징을 사용하는 식이다. 그런데 카스텔루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아주 정공법이다.

쉽게 말해서 얼핏 봤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할까. 근본주의적 시선을 가진 관객이라면, 카스텔루치가 “똥 싸는 치매노인”을 ‘아버지’로 두고, 그 노인의 시도 때도 없는 배설물을 헌신적으로 치우는 청년을 ‘아들’로 설정한 것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본다고 해도 이것은 신성을 암시하는 아버지와 아들이다.

무대는 온통 하얗다. 순백의 공간은 말 그대로 신성의 순수를 암시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 공간은 구체적으로는 집 안의 거실과 침실로 표현된다.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백색으로 싸인 TV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일상이 침투할 틈도 없이 곧 자기제어가 되지 않는 배설이 시작된다. 노인은 머리를 싸매고 ‘미안하다’를 연발한다. 순백의 양복을 입은 아들이 나타나 기저귀 사이로 비어져나온 배설물을 치우기 시작한다. 사실 이 공연의 대부분은 아버지가 똥을 싸면, 아들이 그 똥을 치우는 것이다. 한 시간이 안되는 공연 동안, 45분은 똥의 냄새가 객석까지 훅훅 끼치고 오염된 백색의 공간으로 아버지가 자신의 배설물을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미안하다’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웬만큼 공연을 봐온 관대한 관객이라고 해도 무대에 등장한 배설물 소동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무엇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 끊임없는 소동의 반복이 정면 벽 전체를 차지하며 내걸린 그림 아래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더욱 당혹스러움을 자극한다. 그 그림은 나중에야 알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예수 초상화라고 한다. 말하자면 신의 얼굴이 무대 전체를 감당하면서 관객들을 굽어보는 것이다. 이 그림의 특징은 유난히 선한 눈매의 응시이다. 쌍커풀이 짙고 눈꼬리가 처진 신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내려다보듯 그렇게 보고 있다.

이렇게 카스텔루치는 종교적 감응의 새로운 설정을 위해 삼위일체를 불러내어 버렸다. 신의 응시라는, 2차원 평면에 그려졌기에 어디에서나 보이고, 심지어 도망쳐도 달처럼 끝까지 따라오는 응시의 형식으로서 신의 응시라는 환경이 그 삼위일체를 완성한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삼위일체가 탄생했던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자기부인의 순간을 다시 호출하는 듯하다. “아버지, 아버지시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체스터턴과 지젝에 따르면, 이 반문의 순간은 “신이 한순간 무신론자로 보였던” 순간이다. 신이 무신론자가 된다? 해괴한 말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신도 고난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반란자가 언제나 내세울 수 있는 자랑이다” 라는 평가를 받기까지 한다. 신도 자기부인을 할 수 있으며, 전능하다는 이유로 불완전할 수도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이 온전히 신이 되기 위해서는 왕이 돼야 하는 동시에 반란자가 돼야 한다고 느꼈던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라고 ‘정통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카스텔루치의 이 겉보기의 신성모독은 단순하지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의 주체할 수 없는 오물 소동은 곧바로 신의 위상에 얼룩을 만드는 것 같고, 그로 인해 무대의 조명이 시시각각 달라질 때마다 정면 예수의 눈빛이 측은지심에서 시비지심으로, 다시 나몰라라 하는 체념적 시선으로 달라지는 것 같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아무리 그런 겉보기 등급의 추함이 여과없이 충격적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여전히 신의 응시는 다음 순간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심지어 그런 추함으로부터만 성스러움과 숭고함이 느껴질 것 같다는 역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바로 체스터턴과 지젝이 자기부인하는 십자가 위의 실존적 퍼포먼스가 어떤 작동을 하는지 설명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신의 응시는 타락한 세상을 늙어버린 신의 초상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이는 죽은 신이 자신의 죽음을 미처 통보받지 못하고, 심지어 육화된 신이 죽지않고 인간됨-미셸 앙리에 따르면, 신의 인간됨은 인간의 신됨과 맞물려 있다고까지 한다-의 늘그막으로 나타나는 것에 관객을 연루시키는 것이다. 응시라는 것은 힘이 세다. 깡통조각이 빛을 받아 번쩍 하는 순간, 그 사물이 ‘나’를 찌르듯이 본다는 표현이 가능할 만큼 응시는 힘이 세다. 정면에 자리잡은 신의 응시는 관객들에게 전 인격의 투신으로서 이 공연에 공모되기를 강권한다. 이것은 놀라운 제안이자 강요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카스텔루치는 이 응시의 끝에 다시 한번 신의 위상에 타격을 가한다. 수 명의 아이들-죄가 없다-이 나타나 그 그림에 수류탄 세례를 퍼붓고, 캔버스 너머의 강렬한 빛과 악력 그리고 그 표면을 찢는 힘으로 찢어버린다. 마치 이정표처럼 “주는 나의 목자시니” 라는 문장은 “not”이 첨부되어 부인된다.

그렇다면, 이 공연은 카스텔루치가 좌파적 전통이 강한 이태리의 현실에 비추어 유럽의 몰락-과거 슈펭글러부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출몰했던 이슈-을 삼위일체의 작동불능으로 현시하고자 한 것일까. 총리 베를루스코니의 후진국적 추태와 그럼에도 국민들의 파시즘적 선택에 예술가로서의 반카톨릭적 저항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재호출에서 느껴지는 것은 신의 수난극이 언제나 부활을 예비하고 있다는 새삼스런 깨달음이다. 신은 모욕당하면 당할수록 형언하기 힘든, 그래서 더욱 숭고해지는 어떤 기제가 발동된다.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해서 “쉽게 말을 꺼내기엔 너무도 어둡고 두려운 문제”(체스터턴)로 계속 돌아오는 것일까. 이 점이 어쩌면 연극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관하여>에서 죽은 신과의 눈싸움에서 관객들이 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지도 모른다. 결국 신의 수난은 끝내 관객들이 이 오탁악세의 현실 속으로 자신들 각자의 응시를 옮겨야 하며, 그 응시 속에서 신과 눈싸움을 했던 그만큼의 강도로써 참여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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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안무비평가. 2002년 제9회 무용예술상 무용평론 부문 당선과 함께 무용평론 활동. 2003년 무용 월간지 <몸> 편집위원을 거쳐 2006년 퍼포밍 아트지 <판> 창간 및 편집위원.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역임. 2011년 국립극단 선임연구원으로 <백남준의 귀환>,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편저 및 편집 출간. <계간 연극> 창간과 함께 편집장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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