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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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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3.03.07 19: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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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論} 발터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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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역사의식 - 몰락의 반전으로서의 구원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하고 좌익 토론모임의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열정적이었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교수자격 취득을 위해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이라는 논문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제출한다. 독일에서 고미술품상을 하던 매우 부유한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업가가 되지 않고 철학공부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부친의 "교수가 되면 금전적 지원을 계속하겠다"는 제안 때문에라도 논문 통과는 그에게 절실했다. 그러나 17세기 독일에서 부흥했던 바로크 비애극을 독창적으로 분석한 이 야심 찬 논문은 심사를 맡은 교수로부터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조롱 섞인 비난을 받고 만다. 결국, 탈락될 것을 우려한 벤야민 스스로 논문 철회를 하면서 그의 가난에 찌든 자유문필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문화비평, 역사이론, 유물론, 언어이론, 신학, 마르크스주의 등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전무후무한 '벤야민이라는 드라마'가 본격화된 것이다.

상징 VS 알레고리

그렇다면 퇴짜를 맞을 정도로 난해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과연 어떤 텍스트인가? 우선, 이 논문은 바로크 비애극의 예술형식인 알레고리 및 그에 대조되는 것으로서의 상징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파괴한다. 상징(symbol)이란, 전통적으로 기의와 기표,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결합되어 있어 순간적으로 파악 가능한 신적 필연성의 형태를 뜻한다. 이와 달리, 알레고리(Allegory)는 '다른 것(alles)을 말하기(agoreuo)'라는 어원에서 보듯, 지시하고자 하는 바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단어를 통해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수사법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겉으로는 동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솝 우화』가 실상은 인간 사회에서의 권력 암투를 풍자하듯 말이다. 기표가 뜻하는 기의가 오직 하나인 상징과 달리, 알레고리는 느슨하고 자의적 관계이기에 다양한 의미를 함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조화로운 총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은 이성 중심의 계몽시대를 거치는 동안 위대한 예술형식으로 칭송받은 반면, 알레고리는 저속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괴테가 "특수에서 보편을 이끌어내는 것은 '시 정신(포에지)' 그 자체지만, 보편 자체를 목적 삼아 특수를 이용하는 알레고리는 결코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알레고리가 '이념'이 아닌 '개념'의 표현에 그치는 단순한 오락거리라 폄하했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러한 선입견을 해체하고, 고정된 중심 밖의 타자, 변두리, 소외되고 배제된 것들을 담론의 한 가운데 배치하는 알레고리의 잠재성에 주목한다. '하트 무늬'를 보고 직관적으로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상징이라면, '피 흘리는 하트' 혹은 '찢겨진 하트와' 같은 알레고리를 통해 '하트≒사랑'이라는 일변도를 벗어나 의미의 확장을 꾀한 것이다.

알레고리를 재평가한 벤야민의 역사의식

그런데 알레고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벤야민의 평생 화두인 '역사의식'의 참된 형식이라는 점에 있다. 레오폴트 폰 랑케식의 진보사관은 세계가 질서에 따라 발전해 왔다고 보지만, 벤야민이 보기에 그러한 역사란 폐허 속에서 아우성치는 고통을 은폐한 '승리자들의 역사'에 불과하다. 어떠한 고귀한 문화재도 무명 군중의 희생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는 결코 합리적으로 운행되는 것이 아닌, 돌고 도는 쳇바퀴처럼 흥망성쇠가 순환되고 있다는 것 - 이것이 벤야민의 역사의식이다. 그리고 이 절망의 역사를 포착할 수 있는 형식은 존재하지도 않는 총체성을 추구하는 상징이 아니라, 다의적이기에 파괴와 승리라는 상반된 의미를 동시에 지칭할 수 있는 알레고리뿐이다. '표현의 관습'이라 무시 받아 온 알레고리야말로, 당대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관습의 표현', 즉 '알레고리(관습)의 알레고리'라 하겠다.

파국의 시대에 어떻게 구원을 약속할 것인가?


그런데 벤야민은 왜 하필 17세기 독일 비애극에 주목했던 것일까? 30년간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죽음과 악마, 지옥을 주제로 한 비애극이 자연스레 부흥했던 17세기 독일이 자신의 시대와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1차 대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나치 집권 직전의 독일에 거주했던 유대인 지식인이었던 그에게 진보사관이 주장하는 희망찬 미래란 불가능했다. '몰락의 반전으로서의 구원'을 약속하는 알레고리적 역사의식만이, 합리적 역사진행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던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그가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아니 반드시 붙잡아야만 했던 형태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이는 온전한 비관주의는 결코 아니다. 독일 비애극은 단순한 비극이 아닌, '슬픈 자들 앞에서 벌어지는 유희'를 담고 있었다. 벤야민이 '역사의 천사'라 이름 붙인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bus>(1920)는 수북이 쌓인 잔해 위에서 꼼짝달싹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역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흉측한 시체 더미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구성으로서의 역사'! 절망 속에서도 언제나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역사라면, 중요한 것은 그것을 구성해내는 행동이다.


벤야민의 변증법


끝으로, 알레고리적 역사의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벤야민의 독자적인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반-합'을 통해 대립이 완전히 해소되는 헤겔식 변증법과 차원이 다른 그의 변증법은 반대체계가 양 극단에서 동등한 힘으로 맞물려 있으면서, 그 긴장관계에 의해 서로를 존속하게 하는 '공시적 정지의 변증법'이다. 따라서 완전한 대립이란 없다. 몰락이 구원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참고 도서: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참고 강좌: 강수미 교수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 텍스트 읽기를 통한 '이미지-의미'의 생산>    
Written by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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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ified at 2013.03.07 19:25:40 by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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