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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7.12 15:4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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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book] 계몽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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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가 예술이 종료를 대체해야한다고 하더니 점점 예술의 용처가 많아 지는 것같아 찝찝하다.  예술의 잉여성에 호오를 넘나드는 발언들을 좋아했는 내 개인적 취향을 생각하면 비극일 수도 암튼 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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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글검색













20세기 등장한 가장 독창적인 사상은 아마도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벤야민, 하버마스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일 것이다. 1924년, 노동운동의 역사를 연구하는 '사회연구소'로 설립되었다가, 호르크하이머가 2대 학장이 되면서 '비판이론'이라 불리는 체계를 정비했던 이들은 독일 관념론의 토대 위에서 마르크스 이론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을 결합시켜, 근대의 강박적 병리성을 탐구하였다. 매우 독자적이었던 만큼, 비판도 컸다. 학파의 강령서라 할 수 있는 『계몽의 변증법』(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공저)은 1944년 첫 출간 후 거의 잊혀져 있다, 1960년대 이르러서야 주목받을 수 있었다. 인류의 역사가 파괴적이고 주술적인 신화적 체계로부터 합리적 이성을 발전시켜 온 계몽의 역사라면, 왜 계몽이 정점에 이른 현대 사회에 이르러 인류 해방이 아닌,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극단적 야만이 도래한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계몽의 파국


아도르노가 보기에, '계몽'이란 인간이 압도적인 자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신과 자연이 맺고 있는 유기적 관계를 끊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모든 차이를 없애고 하나의 틀 속에 만물을 포섭시키는 '동일성의 원리'가 흐르고 있다. 이는 갈수록 확장되어 '외적 자연 지배'가 공동체 속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지며 '사회적 지배'를 낳고, 끝내 인간의 감정과 본능마저 장악하는 '내적 자연 지배'로 전락한다. '사회적 지배'의 대표적인 예가 화폐이며, '내적 자연 지배'의 전형이 문화산업이다. 상품이 질적 가치가 아닌,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평균 노동시간에 따른 양적 가치, 곧 '금액'으로 통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디오와 TV가 주도하는 '대중문화'는 은폐와 기만을 통해 획일화된 인간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를 '웃으면서 내뱉는 주체의 자기경멸'이라 했던 거북할 정도로 극단적인 그의 발언은, 이처럼 후기 자본주의 대중 예술을 나치즘에 준하는 인류의 재앙으로 보았던 데 기인한다. 인류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이성, 개념, 일반화가 등가성의 원칙에 따른 일종의 폭력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충격, 그 자체이다.

자기 보존을 위한 계몽이 자기 파멸을 이끄는 아이러니! 나치즘은 불운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계몽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동일성의 원리는 왜곡되고 뒤틀린 어떤 '잉여'를 남기는데, 이 잉여가 해소되지 않고 남아 문명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인류는 신화를 극복하고자 계몽을 시작했지만, 사실 신화 자체에 이미 절대자가 인간과 자연을 억압하는 지배의 원형이 내포되어 있었다. 즉, 신화는 이미 계몽이며, 계몽은 결국 야만과 폭력의 새로운 신화로 돌아간다는 것이 『계몽의 변증법』의 골자이다. 이러한 자기 파괴적인 계몽의 역사 속에서는 자연의 몰락, 사회의 몰락, 주체의 몰락밖에 없다. 철학은 결코 희망을 말할 수 없다. 보편적 사유에 해당하는 철학이 '개념 비판적 사고' 혹은 '비개념적 인식'을 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 책을 가리켜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 했다.

철학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예술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희망과 행복이 과연 가능할까? 철학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자연과의 화해,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것 - 그것은 오직 예술이다. 예술만이 현실에 존재하되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 특히 음악은 비재현적이고 비서술적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예술보다 위대하다. 따라서 미학은 아도르노 철학의 정점에 위치한다. 그는 그러한 예술의 본령을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에게서 찾았다.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이상을 마치 존재하는 것인 양 내세우는 전통을 답습하고 있다면, 쇤베르크의 모더니즘은 음악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여겨져 온 조성마저 버린 '무조음악'을 선보였다. 나아가 특정 음이 의도치 않게 부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음과 온음을 동등하게 나열하여 어떤 음도 '나머지 음이 모두 등장하기 전까진 반복될 수 없다'는 '12음 기법'을 창시하기도 했다. 화성, 조성,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쇤베르크의 음악은 대중 취향의 달콤한 멜로디가 아닌, 불협화음 속에서 현대인의 우울과 분열 그리고 시대의 파국을 보여주었다.

아도르노, 미적 가상이 이루어 낸 유토피아

극단적 이분법의 냉전 시대에 '타자'와 '객체' 그리고 '차이'에 집중했던 아도르노-그는 완전한 '통일'을 위한 헤겔의 '변증법'을 '해체'를 위해 사용했던 셈이다. 분단 시절의 서독에서 '의사소통을 통한 생활세계의 건강함'을 주장한 하버마스가 국가의 양심으로 부각되는 동안 아도르노의 음울한 철학은 경시되었으나, 냉전이 종료된 통일 독일에서 예술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미학은 이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예술의 미적 가상은 대리만족을 통해 실질적인 현실 개혁 의지를 무디게 만드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세계가 지금과 다르게 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통로다. 헤겔이나 블로흐가 명확하고 희망에 찬 유토피아를 꿈꿨던 것과 달리, 비개념을 추구하는 그의 유토피아는 구체적일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을 부정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다시 말해 수수께끼처럼 애매모호하고 안개처럼 흐릿한 것임은 물론이다.


참고문헌 『미학의 문제와 방법』(미학대계간행회,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Written by cowgirlblues (cowgirl@artnstud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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