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are stranger when you are stranger
글쓴이
내용

zabel

  • 작성시각: 2011.12.02 15:44:19
  • 총 작성한 글타래: 56 개
  • 총 작성한 댓글수: 141 개
  • 가입일: 1970/01/01
  • 포인트:
  • 레벨:
  •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글 제목: [펌]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 - 최성만
(
'.
사진담론에 대해 근자에 몇가지 체크 중.  스크랩
.'
)
  + + +



출처 I 詩我一合雲貧賢 >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 - 최성만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론*
최 성 만 (이화여대 교수)


I. 미메시스 일반에 대해

고대 희랍에서 유래하는 “미메시스 Mimesis”라는 말은 정신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생소한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로 예술 및 문학이론의 분야에서만 거론되어 왔다. 미메시스는 개념사적으로 볼 때 라틴어로는 imitatio, 독일어로는 Nachahmung, Nachbilden, Nachmachen 등으로 번역되어 주로 模倣의 의미로 쓰여왔다. 예술철학이나 미학의 역사에서 미메시스개념 자체는 담론의 중심테마로 다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아도르노 Theodor W. Adorno에 의해 그 개념은 미학에서 뿐만 아니라 인식론에서 중심적 카테고리로 부각되었다.[1]) 물론 이 개념이 중요해진 것은 계몽주의 이래 강단철학을 동반해온 이성비판 Vernunftkritik의 전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루카치 Georg Lukacs는 『美的인 것의 특수성 Die Eigenart des Asthetischen』 (1963)에서 미메시스개념을 미적인 현상을 기술하는 핵심개념으로 사용한다. 부분적으로는 미메시스적인 것이 이미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분야에서 산발적으로 언급되긴 했다 (vgl. George Frazer, Helmut Plessner).

하지만 그 개념이 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서 주목받게 된 것은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Max Horkheimer/ Th. W. Adorno의 『계몽의 변증법 Dialektik der Aufklarung』(1944)에 이르러서이다. 어쨌든 미메시스는 서구의 계몽의 역사에서 소홀히 되었거나 억압받아온 현상들 가운데 하나로 재발견되어 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2) 고전 문헌학의 개념사적 연구에서는 미메시스가 주어진 어떤 대상을 단순히 비생산적으로 모방한다는 뜻을 넘어 “표현 Ausdruck” 혹은 “敍述 Darstellung”의 의미를 띠게 되는데, 가령 콜러 Hermann Koller는 이 개념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사용된 흔적을 문헌학적으로 추적하여 그러한 명제에 도달하였다.3) 문학이론 및 문학미학적 방향에서는 프랑스의 르네 지라르 Rene Girard나 라꾸-라바르뜨 Philippe Lacoue-Labarthe와 같은 학자들이 최근에 미메시스문제를 다룬 사람들로서 두드러진다.4) 영어권에서는 미메시스이론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문학적 논의들을 해설하고 학계적 연구의 결과들을 수집하여 발표한 학자로서 스파리오수 Mihai Spariosu와 같은 사람을 들 수 있다.5) 스파리오수는 특히 문예학적 담론들에서 미메시스적인 것이 상상력, 유희, 허구성 등의 현상들과 갖는 다양한 관계들을 밝히려고 시도하였다. 이밖에도 사회심리학, 인종학, 인류학적 연구들에서도 미메시스가 갖는 실천적 의미들이 묵시적, 명시적으로 강조되었고, 적지 않은 경우 미메시스는 “동일성 사고 Identitatsdenken”에 의해 이끌어지는 이론적 지식에 대립하는 실천적 지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vgl. Pierre Bourdieu).

이처럼 미메시스적인 것은 역사적으로 합목적적 사고에 의해 억압되어 왔으며 인간의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조건 conditio humana”으로 재발견되고 있다.6) 우리는 미메시스의 현상에서 새로운 차원을 밝히려는 이러한 시도들, 원래 지녔었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사라져 버린 의미들을 되찾으려는 이 시도들 이면에 특정한 인식적 관심이 숨어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이 때 이 관심은 현재 학문의 체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식론적 모델들 내지 방법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연관되어 있다. 이 경우 사람들은 모방이라는 단순한 의미를 지닌 라틴어나 독일어 대신 원래의 미메시스라는 말을 번역없이 그대로 쓰기를 선호한다.7)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있다. 즉 미메시스개념은 그것이 보조개념으로든 중심적 카테고리로든 그때 그때의 인식적 관심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이 야기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아우어바하 Erich Auerbach는 그의 저서 『미메시스. 서구문학에 나타난 현실 Mimesis. Dargestellte Wirklichkeit in der abendlandischen Literatur』 (1946)에서 미메시스개념을 사람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시대마다 그때 그때 다르게 파악된 현실의 서술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다. 그는 여기서 미메시스개념의 특징적 의미들을 설명하거나 그것의 전승된 의미를 논의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우어바하에서 미메시스는 樣式이나 리얼리즘과 같은 개념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미메시스개념에 역사적으로 부과된 의미론적 확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미메시스개념의 옛 의미를 되찾거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메시스에 대한 플라톤의 존재론적 비판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일은 이런 의미에서 필요하다. 다른 한편 우리는 그 개념을 그것이 서 있던 원래의 장소로 끊임없이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 개념의 전승된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럼으로써 그 개념에 대한 논의가 허공에 뜬 논의가 되거나 개념이 엄밀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개념의 확장 Begriffserweiterung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개념의 의미를 분명히하는 작업 Begriffsprazision일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과제의 의미에서 - 이는 동시에 이중적 난점을 표현해주기도 하는데 - 본인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미메시스론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의 구상을 오늘날의 미메시스를 둘러싼 토론의 연관 속에 비판적으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은 이 소논문에서 부분적으로만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작업은 장차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고, 본인은 이 소논문을 그 작업을 위한 하나의 준비단계로 이해한다.

II. 연구상황 및 문제제기

벤야민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그의 미메시스론이 그의 전 사상체계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을 강조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들로서 메닝하우스 Winfried Menninghaus, 슈바르츠 Ullrich Schwarz, 마이페르트 Torsten Meiffert의 논문을 들 수 있다.8) 사람들은 인간의 미메시스능력 das mimetische Vermogen이나 유사성에 관한 벤야민의 구상이 그의 사상세계에 대해 갖는 중요한 의미를 간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달한 인식들은 대개 미흡한 수준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의 총체적 측면이 체계적으로 조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지 미메시스의 몇몇 양상만을 드러냈을 뿐이며, 그것도 그렇게 밝혀낸 양상들을 그의 사상의 다른 맥락에 짜맞춰 넣는 바람에 미메시스에 관한 그의 원초적 구상을 왜곡시키고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메시스에 대한 벤야민의 원초적 구상은 이중적 성격으로 특징지워진다. 하나는 인간학적 성격 anthropologischer Charakter이고 다른 하나는 비판적-역사철학적 성격 kritisch-geschichtsphilosophischer Charakter이다. 또한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의 “읽기”의 개념이나 “언어적 마술 Sprachmagie”의 개념 역시 이중적 성격을 띤다. 벤야민은 미메시스의 이중성을 스스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지 않지만, 미메시스적 과정의 변증법적 구조에 대해서는 적어도 암시적 언급을 하고 있다.

인식론에서 관례가 되어 있는 주체-객체의 분리상태를 극복하는 것이 그의 오랜 철학적 관심이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사유의 특징인, 낭만적 내지 초현실주의적이라고 칭할 수 있는 “상호침투 Durchdringung”라는 사고像은 「미래철학의 프로그램 Uber das Programm der kommenden Philosophie」에서 그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인식적 의식의 주관적 성격을 제거”하려는 그의 노력에 상응한다 (II, 1, 161). 어쩌면 그의 사유에는 아도르노가 지적한 적이 있듯이 “지극히 낭만적인 요소”가 숨어있는 지도 모른다. 아도르노는 「보들레르론」(제 1 판)에서 벤야민이 취하고 있는 방법론에 대한 자신의 의혹을 그와 같은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벤야민에게서 미메시스적 방식이 의미하는 것을 그러한 낭만적 도취경험의 도식에 따라 보려고 하거나 미메시스적인 것의 지각을 주체가 자연과 조화로운 합일상태에 있는 어떤 “우주적 경험 kosmische Erfahrung”과 동일시하려고 한다면 그의 미메시스 구상을 잘못 파악한 셈이다.

또한 그의 미메시스론에서 인간학적 요소들 혹은 유토피아적 잠재력만을 읽어내려는 시도 역시 일면적이다. “의미론적 잠재력 semantisches Potential”이라는 표현을 도입한 하버마스 Jurgen Habermas가 특히 이러한 일면적 해석을 주도했다.9) 이와는 달리 우리는 벤야민에게서 마술적인 것과 미메시스능력을 구별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각론적 내지 인식론적 차원에서 유사성의 현상방식을 분석하는 대신 미메시스를 하나의 활동 Praxis으로 보고 그것이 갖는 실천적 차원을 인식할 때 비로소 벤야민에게서 미메시스능력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본인이 내세우고자 하는 명제들 가운데 하나를 미리 선취하자면, 미메시스적 과정에서 “전복 (顚覆) Subversion” 내지 “변증법적 轉回 dialektischer Umschlag”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캔 Michael Cahn은 아도르노의 비판적 해석방식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미메시스의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작용을 “전복적 미메시스 subversive Mimesis”라는 말로 특징지웠다.10) 본인은 이것이 벤야민에게도 해당한다고 본다. 벤야민의 해석자인 티데만 Rolf Tiedemann 역시 벤야민적 변증법에서는 “매개 Vermittlung” 보다는 “전회 Umschlag”의 요소가 두드러지고 화해적 요소보다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요소가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11) 미메시스능력의 최고의 사용형태가 언어이고 이 언어에서 미메시스능력은 마술을 제거 Liquidation der Magie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내지 발전해야한다)는 벤야민의 사상에서 바로 이러한 전회의 사고상이 암시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찌기 인식되지 않은 것은 자료의 부족에도 그 원인이 있다. 벤야민은 미메시스라는 주제에 관해 두 편의 짤막한 프로그램적 논문을 썼을 뿐이다. 하나는 「유사성론 Lehre vom Ahnlichen」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수정판인 「미메시스능력에 대해서 Uber das mimetische Vermogen」로서 둘 다 1933년에 쓰여졌다. 이 두 소논문 - 이하 구별없이 미메시스-논문이라 칭함 - 이외에 미메시스라는 말은 그의 전 저작을 통해 산발적으로만 등장할 뿐이다. 숄렘 Gershom Scholem의 보고에 따르면 벤야민은 위의 두 논문에서 정초한 미메시스론을 발전시켜 뭔가 큰 것을 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12) 하지만 그의 유고를 살펴보면 이 약속이 지켜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벤야민은 미메시스론을 그에게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특유의 모티브들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전개시키고 있다. 읽기, 기억, 언어적 마술, 경험 등의 모티브가 그것이다. 미메시스적인 것은 이러한 모티브 내지 개념들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등장하기 때문에 그의 사상세계에서 미메시스 하나만을 떼어놓고 고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는 미메시스능력을 인간이 지닌 어떤 특정한 심성능력에 종속되는 능력으로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미메시스능력을 인간의 직관, 오성, 상상력 등 모든 심성능력에 작용하는 능력으로 보았다.13)

미메시스개념이 이것의 對개념인 이성과 긴장관계에 있는 아도르노에서와는 달리 벤야민에게서는 미메시스적인 것에 대치되는 개념적 반대심급이 결여되어 있다. 만일 미메시스적인 것을 제한하는 그러한 반대심급이 벤야민에게 있다면 그것 역시 미메시스적 성격을 띨 것이다.14) 여기서 미메시스의 상승적 구조 Steigerungsstruktur가 암시된다. 벤야민에게서 오성을 통해 파악가능한 유사성에서 시작하여 “비감각적 유사성 unsinnliche Ahnlichkeit”에까지 이르는 유사성의 스펙트럼은 무한하다. 그에게서 미메시스는 유사성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한계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의식의 어떤 성찰-담론적 척도에 따라 제한받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척도 자체를 의문시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는 사고에게서 미메시스가 아닌 것, 非미메시스적인 것을 도발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이 비미메시스적인 것이 그가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 혹은 진리나 구원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우리는 미메시스적인 것을 신화적인 것과 대결시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신화와 미메시스의 관계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벤야민의 사고의 노력이 특히 대상의 비판적 구제 kritische Rettung를 지향하고 있고, 이때 비판은 그의 구상에 따르면 주로 신화에 대한 비판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신화적인 것과 미메시스적인 것의 관계는 단순히 대립적인 관계도 아니고, 또 미메시스적인 것은 신화적인 것의 한 특질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벤야민은 미메시스능력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예전에 다양한 신화의 세계를 構築하도록 한 힘을 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나중에 역사시대에 신화를 극복하고 그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다면 인간은 그것을 똑같은 미메시스적 능력에 힙입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의 사유방식이 아무리 미메시스적 특징을 띤다고 해도 그의 사상세계의 전 면모를 미메시스적인 것으로 환원시킬 수는 없음은 자명하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사유 및 그 사유대상에 들어있는 미메시스적 요소들을 드러내어 그에게서 미메시스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밝히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의 전 저작에서 미메시스적 요소를 찾아내어 미메시스에 대한 그의 구상을 규명하고 더 나아가 현금의 미메시스에 대한 토론에 생산적으로 기여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본인이 기대하는 것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미메시스에 관한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다룰 도구를 개발해 내는 일이다.15)

III.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의 언어이론적 정초

짤막한 논문인 「유사성론」을 벤야민은 자신의 “새 언어이론”이라고 말했다.16) 벤야민이 애초 발표할 생각이 없었던 이 논문은 언어이론에 관한 그의 두번째 논문으로 알려져 있다. 첫 논문은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Uber Sprache uberhaupt und uber die Sprache des Menschen」라는 1916년에 쓴 논문을 가리킨다. 몇 달이 지난 뒤 그는 이 두번째 논문을 약간 수정하여 「미메시스능력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17) 수정의 동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 논문의 가능적 독자에 대한 고려가 작용한 듯하고 더 나아가 내용에 대한 그의 숙고도 작용한 듯하다. 어쨌거나 둘째 판에서는 첫째판에서보다 언어신비주의적 요소가 눈에 띄게 줄었는데, 전체의 기본틀과 어법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언어의 마술적 측면 magische Seite der Sprache”이라는 귀절에서 “마술적”이라는 단어가 둘째판에서는 삭제되었다. 그대신 다른 내용이 추가되었는데, 가령 “마술을 제거”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귀절에서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의 내적 긴장관계가 암시되고 있다.

어쨌든 벤야민은 미메시스-논문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숄렘에게 전하기를, 『베를린의 유년시절 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을 쓰다가 착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어린시절의 기억의 단편은 나중에 “Die Mummerehlen”임이 밝혀졌다.18) 그리고 그의 언어이론의 중심사상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와 『독일비극의 기원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1925)의 「인식비평서론 Erkenntniskritische Vorrede」에서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거쳐 이 미메시스-논문에 이르는 선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들 이외에 벤야민의 언어이론에 관한 글로서 논문을 두 개 더 들 수 있는데, 보들레르 Charles Baudelaire의 『악의 꾳 Fleurs du mal』 가운데 「파리의 풍경 Tableuaux parisiens」 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서문으로 썼던 「번역자의 과제 Die Aufgabe des Ubersetzers」(1923)가 그 하나이고, ‘사회연구소 Institut fur Sozialforschung’에 기고한 「언어사회학의 문제들 Probleme der Sprachsoziologie」(1934)이 다른 하나이다. 이 다섯 개 외에 1916년 부버 Martin Buber에게 보낸 편지에 “언어적 마술”에 관한 글이 있는데, 이것은 첫번째 언어이론을 쓰기 몇 달 전에 쓰여졌고 이것의 모태로 알려져 있다.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은 언어라는 현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로서 앞서 언급한 『베를린의 유년시절』의 “Die Mummerehlen”에 나오는 특징적인 귀절은 다음과 같다:

유사성을 인식하는 능력은 비슷해지고 또 비슷하게 행동해야 하는 옛 강압의 잔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강압을 내게 가해온 것은 말들(언어)이었다. 그것도 나로 하여금 어떤 모범적인 예의범절 따위가 아니라 집, 가구, 옷가지 등에 유사해지도록 한 말들이었다. (IV, 1, 261)

첫 문장은 미메시스-논문에 글자 그대로 인용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벤야민에 있어 미메시스는 기억을 통해 언어와 매개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어린애가 언어의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과정은 미메시스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언어세계에는 좁은 의미에서의 언어만이 아니라 “색채”라든지 “구름” 혹은 그밖의 다른 여러 지각과 경험의 대상들도 포함된다. 또 역으로 이 어린시절의 기억에서 발전시킨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은 그의 언어이론뿐만 아니라 그의 경험이론 및 지각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 그의 미메시스론은 그가 전개시킨 여러 이론모델들 가운데 하나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세계 전체에 뻗쳐있다는 것을 뜻하고, 그 미메시스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전의 언어이론들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의 전 이론체계에 대한 통찰이 어느 정도 전제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그의 미메시스론은 그의 이전의 언어이론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준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의 변화, 즉 언어에서 미메시스에로의 시각의 변화, 또 그에 따른 개념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언어철학적 기본구상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우선 그 기본구상 중의 하나는 언어의 “매체 Medium”적 성격 (즉 언어는 의사소통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의 각별한 어러움이자 동시에 그 독특성은 그에게서 미메시스적인 것이 형이상학적-신학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미메시스론을 현금의 미메시스에 관한 이론들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부딪치는 난관은, 그에게서 윤리이전적이고 성찰이전적 개념인 미메시스가 “순수언어 reine Sprache” 혹은 “표현할 수 없는 것 das Ausdruckslose”과 같은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함의가 담긴 개념들과 연관되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미메시스론을 다룬다는 것은 신학적 개념의 과격한 범속화를 전제한다. 다른 한편 그의 미메시스에 관한 구상은 흥미롭게도 미메시스적 현상을 지금까지처럼 근본적으로 신학적 영역과 분리시켜 고찰하는 대신 좀 더 개방된 시각을 가지고 고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얼핏 보면 우상숭배금지 Bilderverbot적 사상이 근본에 깔려있는 신학적-형이상학의 영역과 감각적-상적인 것 das Sinnlich-Bildhafte에 관련되는 미메시스의 영역은 서로 상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모순적 사정이 연구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면 줄수록 벤야민의 사상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 두 요소가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만큼 더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탐구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 전 면모를 밝히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미메시스에 대한 논의 일반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IV. 벤야민의 미메시스에 대한 구상

  1. 미메시스적 활동의 변증법적 기능

벤야민에게서 미메시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은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들 - 사람이든 사물이든 - 에 자신을 유사하게 만들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더 나아가 미메시스는 유사성을 지각하고 생산해내는 행위를 지칭한다. 하지만 행동방식으로서 혹은 지각방식으로서 미메시스의 의미는 주어진 어떤 대상의 비생산적인 모방 내지 감각적으로 파악가능한 유사성관계의 지각이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벤야민은 자연주의적 모사의 의미로 이해되는 미메시스를 거부한다. 미메시스의 의미는 서술 (나타냄)이나 표현의 의미에 까지 닿아있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그랬듯이 벤야민은 미메시스의 기원을 플라톤시대가 아니라 선사시대 Prahistorie에서 찾는다. 그는 제의적 춤들, 별들의 위치 혹은 동물의 내장을 읽어내는 행위들이 인간이 행한 최초의 미메시스적 행위들이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는 17, 18세기 식자층, 문인들 사이에서 토론되었던 모방론, 즉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명제를 둘러싼 논의에 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미메시스론을 거론한 귀절이 단 하나 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가 미메시스를 금지시킨 플라톤에 대해 한번도 언급함이 없이 오히려 플라톤적인 기억 Anamnesis의 이론에 자신의 이념론 Ideenlehre을 접목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모상 Vorbild”이 아니라 “원상 Urbild”이 희랍비극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학 일반에서 미메시스의 대상이다 (II, 1, 249). 고대 비극에서 그와 같은 원상은 그 당시 전래되어 왔던 설화 Sage들이었는데, 이 설화들이 비극작가들의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vgl. ebd.). 역사시대의 예술에서는 사실적으로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관철되어 온 자연, 즉 “자연사 Naturgeschichte” 내지 “운명”이 미메시스의 대상이다 (ebd.). 바로크비극에서는 따라서 “몰락한 자연 gefallene Natur”이 미메시스적 서술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바로크시대의 사람들은 바로 역사를 이러한 영원히 몰락한 자연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이처럼 자연으로 화한 역사가 바로크비극의 알레고리적 형식에서 의미심장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이 연관에서 특기할 점은 미메시스의 변증법적 기능이다. 즉 고대비극에서 전승된 설화가 비극에 의해 재구성되었고 nachgebildet, 그로써 그 설화에서 지배적인 운명의 질서가 栽可 (=승인 Sanktion)되었다면, 그와 동시에 그 질서가 의문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를 “모사 Abbildung”하는 가운데 그 신화 자체를 “수정 Revision”하는 희랍비극에서 미메시스의 변증법적 구조가 드러난다 (I, 1, 295). 똑같은 구조가 춤이나 유희 (=놀이 Spiel)에서 관찰된다. 벤야민은 “춤을 해석할 때 그 춤이 지닌 역동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그 역동적 dynamisch 측면은 춤추는 사람의 미메시스적 태도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을 것이다”고 쓰고 있다 (II, 3, 957). 유희의 경우 벤야민은 그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를 “경험의 충격적인 과정에서 공포의 요소를 완화시키는” 작용에서 본다. 그는 무서운 원초적 경험들을 수정하고, 그 경험들을 마치 어떤 불편한 텍스트를 베끼는 사람이 그 텍스트를 변형시키는 것처럼 위조하려는 시도와 같은 측면을 유희에서 지적한다 (VII, 2, 814). 아이들은 무서운 충격적 경험들을 유희를 통해 무디게 하거나, 무모하게 불러내는 일, 파로디 등을 통해 그 공포에서 벗어나려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유희를 반복함으로써 승리의 쾌감을 집중적으로 맛보기도 하는데, 바로 여기서 마술을 벗겨내고 신화적 공포를 극복하는 미메시스의 변증법적 기능이 암시된다 (vgl. ebd.). 그리고 벤야민은 프루스트, 카프카, 보들레르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해석할 때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이러한 미메시스의 변증법적 기능을 드러내고 있다.

미메시스적 태도는 동물의 세계에서 특히 “擬態 Mimikry”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또 어린아이들의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관찰할 수 있다 (II, 1, 204). 벤야민은 앞서 언급했듯이 미메시스를 예전에 인간에게 가해졌던, 주변세계와 “비슷해지고 또 비슷하게 행동해야 하는 엄청난 강압”에서 연원한다고 본다 (II, 1, 210). 이 강압 혹은 자기보존욕구가 나중에 유사성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벤야민에게는 미메시스의 유용성문제가 중요하다. 즉 무엇을 위한 미메시스능력인가?라고 그는 묻는다 (II, 1, 205).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는 일단 미메시스능력을 종족발생적 차원에서 인간학적으로 정초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을 미메시스능력이 가장 뛰어나게 발달한 존재로 규정하고 선사시대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원칙적으로 “모방가능 Nachahmbarkeit” (II, 1, 206)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의 인간학적 전제들로서, 그는 이 전제들을 깔고서 나중에 자신의 미메시스론에 비판적-역사철학적인 방향을 부여한다.

선사시대에 밤하늘의 별자리와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 사이의 유사성이 “비감각적” 유사성이었던 것처럼 각 경험적 언어들 사이, 혹은 낱말과 이 낱말이 지칭하는 사물 사이의 유사성 내지 “근친성 Verwandtschaft”의 관계는 기호와 의미 사이의 등가적 관계나 개념적 종속관계만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여기에 바로 그가 말하는 “비감각적 유사성”(II, 1, 207), 그리고 “읽기 Lesen라는 말이 갖는 이중적 의미” (II, 1, 209)가 근거한다. 일정한 기호를 기호학적-의미론적으로 해독해내는 작업으로서의 읽기와 종합적-미메시스적 “읽어내기 Herauslesen”가 읽기라는 개념에 동시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후자, 즉 미메시스적 읽기는 “옛날에는 투시력 Hellsicht의 토대였는데” 벤야민의 가정에 따르면 역사가 흐르면서 전자의 범속한 읽기에 밀려 점차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그러한 능력을 훨씬 적게 소유하고 있음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의 객체의 경우 주체의 미메시스능력의 이러한 위축과정에 상응하는 것은 “지각세계 Merkwelt” 의 점차적인 소멸현상이다 (II, 1, 206). 그러나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실은 소멸이나 대체의 현상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일 따름이다. 미메시스적 현상들은 “자연적 상응 naturliche Korrespondenzen”의 영역에서 “언어”의 영역으로 철수해 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에 따르면 언어는 그 속에서 “사물들이 예전처럼 더 이상 직접적으로 어떤 예견자나 성직자의 정신에 따라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精髓, 지극히 민속하고 지극히 섬세한 실체들, 사물들의 독특한 香 Aroma들이 서로 만나는” 하나의 “매체”가 된 것이다 (II, 1, 205).

이로써 “비감각적 유사성”의 또 다른 특질이 언급된 셈인데, 그러한 유사성이 하나의 像으로서 현상세계에 나타날 때의 “순간성 Fluchtigkeit”이 바로 그것이다. 선사시대에 별들의 만남 Konstellation이나 별자리를 읽는 일이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었듯이 모든 읽기의 과정에는 시간의 요소가 들어있다. 이러한 순간적 읽기에 상응하는 미메시스적 태도를 벤야민은 “정신집약 Geistesgegenwart”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언어 이외에 그와 같이 “쓰여있지 않은 것 das Ungeschriebene”의 번득이는 상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그 상의 읽기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매체로서 기억 Erinnerung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메시스의 대상으로서의 魔述的인 것 das Magische과 읽기의 미메시스적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이 미메시스적 읽기 과정에서 대상은 마술적인 성격을 잃게된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 Berliner Chronik』 에서 체험한 삶은 유한한 반면 기억되는 삶은 무한하다고 쓰고 있다. 이는 물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의 프루스트에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다. 망각의 어두운 창고 속에 마술에 걸려 갇혀있는 자아의 과거는 프루스트적인 “非恣意的 기억 unwillkurliche Erinnerung”이라는 역시 마술적인 기술을 통해 마술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언어를 찾게 되는 것이다.19)


  2. 미메시스론의 역사철학적 구상
벤야민에게 미메시스-논문을 쓰도록 직접적 동기를 준 것은 『베를린의 유년시절』을 집필할 구상을 하면서 되살린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얻어진 체험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의 미메시스-논문은 시기적으로나 구상의 측면에서나 프루스트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고 있음은 자명하다. 자신이 “擬態 Mimikry의 천재”로 특징지운 프루스트에 대한 에쎄이(Zum Bilde Prousts, 1929)를 쓰기 전후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다음의 메모에서도 벤야민은 프루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무엇보다 “희극성 Komik”이라는 말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vgl. II, 1, 315).

모방은 마술적 행위일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모방자는 자연의 마술적 성격을 벗겨내는데, 그것은 그가 자연을 언어에 근접시키기 때문이다. 자연을 언어에 근접시키는 것이 바로 희극성의 본질적 기능이다. 웃음이란 일종의 표현의 混沌이다. (II, 3, 956)

미메시스적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脫마술화과정 Entzauberungsprozeß에는 역사의 차원에서 “마술의 (변증법적) 극복” 내지 “신화의 극복”의 과정이 상응한다. 여기에서 벤야민은 미메시스능력이 역사적으로 발전해가는 숨겨진 목표이자 동시에 그 발전의 과제를 보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벙어리 언어를 보다 더 높은 언어인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바로 그 미메시스의 과정을 나타낸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번역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신의 창조에 모상을 둔 인간의 “자발성 Spontaneitat”이나 창의력 Kreativitat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벤야민은 오히려 인간 정신의 그러한 자발성과 생산력은 미메시스적 “감수성 Empfangnis, Rezeptivitat”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능력이나 미메시스능력은 사물의 세계 - 자연 혹은 현실 - 에서 無言의 언어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聽取 vernehmen하고 이 청취된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에 그 본질이 있다. 벤야민은 그의 번역가-논문과 미메시스-논문에서 언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즉 그는 역사를 언어발견의 과정 Sprachfindungsprozeß으로 보고 있다. 선사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의 별자리를 읽고 또 다양한 신화의 세계를 창출하도록 한 미메시스능력은 나중에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화적 상들이나 언어가 인간에게 가한 질곡을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도록 한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처럼 벤야민은 언어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긍정적으로 규정하고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이 역사가 진행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어능력으로 “변형”되었다는 명제를 제시하는데, 이러한 긍정적 시각은 그가 자신의 언어이론의 첫 논문에서 “과다명명 Uberbenennung”20), “수다 Geschwatz” 혹은 “추상화 Abstraktion”과정으로 기술하고 있는 언어타락의 부정적 현상들과 대조된다. 미메시스-논문에서 벤야민의 긍정적 시각을 나타내는, 미메시스능력의 발전에 대한 역사철학적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언어는 미메시스적 태도의 최고의 단계를 나타내고 비감각적 유사성이 결집된 완벽한 書庫 Archiv가 되었다. 언어는 그 속으로 이전의 미메시스적 생산과 파악의 힘들이 남김없이 변환되어 들어간 매체가 되었고 결국 그 힘들은 마술의 힘들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II, 1, 213)

여기서 언어논문에서의 벤야민의 언어발전에 관한 부정적 규정들이 마술의 소멸 Liquidation der Magie 내지 “마술의 극복”이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미메시스-논문에서의 그의 긍정적-인간학적 규정과 어떤 관계에 있고 또 그것이 어떻게 서로 매개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매개의 문제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의 종족발생적 발전에 대한 벤야민의 구상이 언어가 자동적으로 긍정적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보는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일면적 해석은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의 인간학적 규정의 측면만을 강조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와 반대로 미메시스-논문에서 우리는 실제로 벤야민의 비판적-역사철학적 어조를 분명히 함께 읽어낼 수 있다. 선사시대 별자리의 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범속한 읽기에도 적용되는 순간성의 성격은 “비감각적 유사성”의 순간적 현상방식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동시에 “위험의 순간”이라는 함의도 담고 있다. 진정한 미메시스적 태도로서의 “정신집약”을 벤야민은 한 귀절에서 설명하기를, “정신을 집약시킨다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자신을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뜻한다

Geistesgegenwart haben heißt: Im Augenblick der Gefahr sich gehen lassen”고 했다. 어떤 대상을 읽는 사람이 읽기에서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대신 뭔가를 건지고자 한다면 그는 그에게 밀려들어오는 기호들의 “빠른 흐름”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읽기에서 이러한 템포에 적응하는 능력을 벤야민은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에서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미메시스론에서 언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비감각적 유사성의 완벽한 서고”가 되었고, 또 언어는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의 최고의 단계를 나타낸다는 명제만을 확인한다면 그의 구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미메시스적 읽기를 하나의 요구 Forderung, Postulat로서 모든 독자에게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번역”을 언어의 역사적 변천의 한 요소로서만 아니라 하나의 “과제 Aufgabe”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때 벤야민은 인간의 언어능력을 미메시스적 읽기와 범속한 읽기의 “융화”과정으로 특징지워지는 오늘날의 시대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연성을 위한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혹은 쓰여지지 않는 것을 신비론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역사의 공간에서 번역을 통해 풀어내는 일 Eliminierung이 미메시스의 목표이다. 넓은 의미의 번역과 미메시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벤야민 자신이 두 활동의 구조동일성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해설과 번역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관계는 樣式과 미메시스가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단지 다른 시각에서 본 똑같은 현상들일 따름이다. 성스러운 텍스트라는 나무에서 그들은 영원히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이고, 범속한 텍스트의 나무에서 그들은 제때 익어서 떨어지는 열매들이다. (IV, 1, 92)

좁은 의미에서의 번역은 벤야민에 따르면 “원본의 언어를 번역자의 언어로 재현하는 reprasentieren”데 그 의의가 있다 (VI, 160). 대체 ersetzen가 아니라 보충 erganzen,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 sich anbilden, 그리하여 언어들이 서로 친척관계에 있고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 더 나아가 그 원전의 언어를 모국어로 동화시키는 대신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그 낯선 원전의 언어를 향해 확장시키는 일이 바로 번역의 진정한 의미이자 동시에 번역의 과제이다.21)

미메시스의 중요한 구조적 특질들, 언어와 기억이 갖는 매체적 성격, 미메시스적 과정이 갖는 실천적 의미와 변증법적 기능 (Subversion)은 벤야민의 사유에서 관건적 역할을 하는 다른 개념들, 즉 비평, 번역, 지각 혹은 상상력에도 적용된다. 그의 미메시스 구상에 따르면 미메시스능력은 인간의 심성능력의 어떤 특정분야에 귀속시켜서 다른 분야와 대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또한 미메시스적인 것은 아우라적인 auratisch 지각과 동치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아우라의 쇠퇴에 관한 그의 명제는 미메시스능력의 “변형”에 관한 명제와 상층하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이 점을 전혀 간과하고 벤야민이 언어의 역사를 언어타락의 역사로 파악하고 있다고 잘못보고 있다.) 이 변형의 명제는, 바로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언어 속으로 자리이동을 했다는 명제이다. 미메시스적 특성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 특정한 태도 혹은 성찰과정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행동과 지각과정의 모든 단계를 포괄한다. 복제기술의 발전은 아우라의 쇠퇴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유희공간 Spielraum의 확장을 가져왔다는 그의 시각 역시 미메시스와 아우라의 개념적 상이성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3. 예술적 미메시스의 대상

미메시스에 관한 이론적 논의 일반에서 중요한 것은 미메시스의 대상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모사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나타내는 natura naturata (das Hervorgebrachte)와 자연에 내재하면서 자연을 생성시키는 힘을 뜻하는 natura naturans (das Hervorbringende, Entelechie)의 구별은 중세이래 이루어져 온 미메시스에 관한 논의에서 잘 알려져 있다.22) 벤야민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술 Darstellung”의 대상, 혹은 그보다는 “표현 Ausdruck”의 대상이 미메시스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그의 명시적 정의에 따르면 “원상 Urbild” (II, 1, 249), “이름 Name” (V, 2, 1038)23) 혹은 “죽음 Tod” (I, 2, 587) 등이 미메시스의 대상을 이룬다. 암시적으로는 “상징 Symbol”이나 “전세 Vorwelt” 내지 “전세적인 것 das Vorweltliche”과 같은 것이 미메시스의 대상으로 작용한다.

특기할 것은 예술적 미메시스의 경우 그 미메시스적 서술의 대상이 무규정적 unbestimmt 내지 非대상적 gegenstandslos이라는 점이다. 「보들레르론 U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의 한 각주에서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照應 correspondances에 관해 논의할 때 아름다운 假像의 논리적 해명불가능성 Aporie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발레리 Paul Valery의 말을 인용한다. “아름다운 것은 사물에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맹종적으로 모방할 것을 요구하는 지도 모른다. Das Schone fordert vielleicht die servile Nachahmung dessen, was in den Dingen undefinierbar ist.” (I, 2, 639)24) 벤야민은 “예술의 대상”을 “충실하게 모사되어야 할 ein treulich abzubildender” 어떤 것으로 정의하고, 아름다운 것을 “베일 속에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어떤 것”, 예술작품에서 “모사하는” 어떤 것 das Abbildende으로 정의한다. 아름다운 것의 논리적 해명불가능성 (아포리아)은 그것의 가상적 성격을 가리키며, “우리의 경탄이 향하는 대상을 작품 속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벤야민은 美를 정의하기를 “유사함의 상태에서의 경험의 대상 Gegenstand der Erfahrung im Stande des Ahnlichseins”라고 한다.

유사성관계가 현상으로 나타나는 영역은 벤야민에게는 예술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예술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이지 예술에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다. 유사성관계는 모든 경험에서 만날 수 있으며, 특히 꿈의 세계와 어린아이들의 경험세계에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유사성의 체험을 벤야민은 그의 어린시절의 기억을 통해 보여준다. 가령 “양말 Strumpfe”의 마술적인 경험이 그것인데, 이 양말은 어린 벤야민에게 “(선물로) 가져온 것”인 동시에 이 선물을 담은 “주머니”로서 지각된다 (IV, 2, 977 f.). 이 경험은 그에게 “형식과 내용, 베일과 베일 속에 싸인 것이 하나”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 주관적 경험에 매료되는 어린아이는 그 놀이를 되풀이한다. 이러한 놀이가 그 어린애에게 주는 효과는 그것이 아이의 소원 Wunsch의 상을 반영해 준다는 데 있다. 상상력 Phantasie의 세계도 이런 세계와 유비된다. 벤야민은 판타지를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뭔가 아름다운 것’이 주어질 수 있는 어떤 소원들을 들어주는 능력”으로 파악한다. 사람은 판타지를 통해 특정한 대상들에 자신의 소원들을 투영하는데, 그때 그는 아름다운 것의 경험을 선물로 받게되며, 이 경험은 또다시 같은 소원들을 키운다.

한 그림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아무리 바라 보아도 질리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자신의 원천으로 투영되는 소원을 충족시켜주는 무엇인가가 그림 안에 들어있다면, 이 무엇은 바로 똑같은 소원을 끊임없이 키워낸다. (I, 2, 645)

벤야민은 예술에서 미메시스의 대상의 모사불가능성 Nicht-Abbildbarkeit을 기술하기 위해 또 다른 곳에서는 “상징”의 개념을 사용한다. 경험과 인식의 칸트적인 구별, 즉 “경험의 인식 Erkenntnis der Erfahrung”과 경험 자체를 서로 혼동하는 것을 비판하는 귀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경험은 경험의 인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의 인식은 인식의 연관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은 이러한 인식연관의 상징이며 그에 따라 인식연관 자체와는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한다. 어쩌면 상징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할 지 모른다. 상징이라는 말은 여기서 단지 질서들의 상이함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인데, 이 상이성은 다음과 같은 비유적 상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즉 한 화가가 어떤 풍경 앞에 앉아서 그 풍경을 우리가 흔히 얘기하듯이 베껴 그릴 abmalt 경우, 이 풍경 자체는 그가 그린 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풍경을 기껏해야 그 상의 예술적 연관의 상징으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상 자체보다는 그 상징에 더 큰 위엄을 부여할 것이고 또 이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VI, 36f.)

벤야민의 견해에 따르면 상징적인 것은 풍경이 현상으로 나타나는 세계에 경험적으로 주어져있고 예술적 미메시스의 대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때 상징은 감각적으로 파악가능한 대상으로서 혹은 자연주의적으로 복제할 수 있는 무엇으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징의 예로서 벤야민은 괴테의 “근원현상 Urphanomen”을 든다. 미메시스적 서술이 갖는 이러한 대상의 모사불가능성이라는 특성에 바로 예술작품의 비밀적 성격도 바탕을 둔다.

미메시스의 대상문제의 또다른 중요한 측면은 우상숭배금지의 모티브이다. 이 모티브는 벤야민이 잠깐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술적 미메시스의 비대상성과의 연관을 암시해준다. 벤야민이 예술을 “완성시키는 미메시스 vollendende Mimesis”라고 정의했을 때 이 정의는 미메시스의 전통적 의미의 顚倒를 암시해준다. 자연 (혹은 경험적 현실)이 예술의 모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모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는 유물론적 후기사상의 대표작인 「기술복제가 가능한 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을 구상하면서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근본적 성찰을 하고 있다.

예술은 자연에 대한 改善提議 Verbesserungsvorschlag이다. 그것은 따라하는 행위 Nachmachen이기는 하지만 이 행위의 가장 내밀한 본질은 먼저 해보이는 행위 Vormachen이다. 달리 말해 예술은 완성시키는 미메시스다. (I, 3, 1047)

믈론 이는 자연에 대한 예술의 모범적 성격이 인간의 창의성에서 연유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창의력은 앞서 언급했듯이 수용적-미메시스적 능력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25) 예술을 무언의 사물언어를 상위의 언어로서의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로 본 벤야민의 초기사상이 여기서도 엿보인다. 인간의 미메시스능력은 관념론적인 철학에서 말하는, 객체 위에 군림하는 주체의 정신이나 천재성으로 대체된 것도 아니고 예술행위의 본체는 예나 지금이나 미메시스이며 이 때 미메시스는 주어진 대상의 복제, 사실적 모사, 모방의 의미를 넘어서 오히려 선취 내지 “Vorahmung”으로서 생산적 기능을 갖는다. 요컨대 벤야민의 미메시스 구상은 예술활동 뿐만 아니라 인간의 언어활동, 정신활동 일반의 구조를 밝히는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의 철학이 동일성의 원칙에 바탕을 둔 인식에 비하여 유사성의 원칙에 바탕을 두는 지각, 경험을 항상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미메시스 구상과 한 연관 속에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d. I-VII. Unter Mitwirkung von Theodor W. Adorno und Gershom Scholem hrsg. v. Rolf Tiedemann und Hermann Schweppenhauser, Frankfurt a. M. 1972-1989.

* 벤야민의 저작들을 본문에서 인용할 때 로마숫자는 전집의 권수, 그 다음의 아라비아숫자는 쪽수를 나타낸다. 그밖에 다음의 편지집에서도 인용하였다.
Walter Benjamin: Briefe. 2 Bde. Hrsg. u. mit Anmerkungen versehen v. Gershom Scholem u. Theodor W. Adorno. Frankfurt a. M. 1978. Zuerst 1966. (= Br.)

Walter Benjamin/Gershom Scholem: Briefwechsel 1933-1940. Hrsg. v. G. Scholem. Frankfurt a. M. 1985. Zuerst 1980. (= Briefwechsel)

Adorno, Th. W.: Uber Walter Benjamin (neue Auflage). Frankfurt a. M. 1990. revidierte und erweiterte Ausgabe (1. Ausg.: 1970).
____ : Negative Dialektik. Frankfurt a. M. 1975 (Zuerst 1966).
_____ : Asthetische Theorie. Hrsg. v. Gretel Adorno u. Rolf Tiedemann. Frankfurt a. M. 1977 (Zuerst 1970).
Aristoteles: Poetik. Griechisch/Deutsch. Ubersetzt u. Hrsg. v. Manfred Fuhrmann. Stuttgart 1986.
Auerbach, Erich: Mimesis. Dargestellte Wirklichkeit in der abendlandischen Literatur. Bern; Stuttgart 1988. 8. Aufl. (1. Aufl.: 1946).
Cahn, Michael: Subersive Mimesis. T. W. Adorno and the Modern Impasse of Critique. In: Spariosu, Mihai (Ed.): Mimesis in contemporary theory: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Vol I: The Literary and Philosophical Debate. Philadelphia/Amsterdam 1984. S. 65-108.
Fruchtl, Josef: Mimesis. Konstellation eines Zentralbegriffs bei Adorno. Wurzburg 1986.
Gebauer, Gunter/Wulf, Christoph: Mimesis. Kultur - Kunst - Gesellschaft. Reinbek bei Hamburg 1992.
Gebauer, Gunter u. a.: Historische Anthropologie. Zum Problem der Humanwissenschaften heute oder Versuche einer Neubegrundung. Reinbek bei Hamburg 1989.
Habermas, Jurgen: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d. 1: Handlungsrationalitat und gesellschaftliche Rationalisierung. Frankfurt a. M. 1988 (Zuerst 1981).
_____ : Bewußtmachende oder Rettende Kritik, in: Siegfried Unseld (Hrsg.): Zur Aktualitat Walter Benjamins. Frankfurt a. M. 1974, S. 173 - 223.
Horkheimer, Max/Adorno, Theodor W.: Dialektik der Aufklarung. Frankfurt a. M. 1969 (Zuerst 1944).
Jay, Martin: Dialektische Phantasie. Die Geschichte der Frankfurter Schule und des Instituts fur Sozialforschung 1923-1950. Frankfurt a. M. 1981.
Koller, Hermann: Die Mimesis in der Antike. Nachahmung, Darstellung, Ausdruck. Bern 1954.
Lacoue-Labarthe, Philippe: Typography: Mimesis, Philosophy, Politics with an introduction by Jacques Derrida, edited by Christopher Fynsk. Cambridge, Massachusetts/ London, England 1989.
_____ : L'imitation des modernes: Typographies II. Paris 1986.
Menninghaus, Winfried: Walter Benjamins Theorie der Sprachmagie. Frankfurt a. M. 1980.
Platon: Der Staat. Hamburg 1989.
Scholem, Gershom: Walter Benjamin - Die Geschichte einer Freundschaft. Frankfurt a. M. 1976 (Zuerst 1975).
Schwarz, Ullrich: Rettende Kritik und antizipierte Utopie. Zum geschichtlichen Gehalt asthetischer Erfahrung in den Theorien von Jan Muka?ovsky, Walter Benjamin und Theodor W. Adorno. Munchen 1981.
Spariosu, Mihai: Literature, Mimesis and Play. Essays in Literary Theory. Tubingen 1982.
_____ (Ed.): Mimesis in contemporary theory: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Vol I: The Literary and Philosophical Debate. Philadelphia/Amsterdam 1984.
Tiedemann, Rolf: Dialektik im Stillstand. Versuche zum Spatwerk Walter Benjamins. Frankfurt a. M. 1983.
Unseld, Siegfried (Hrsg.): Zur Aktualitat Walter Benjamins. Aus Anlaß des 80. Geburtstags von Walter Benjamin. Frankfurt a. M. 1972.
Valery, Paul: Windstriche. Aufzeichnungen und Aporismen (Franzosisches Original: “Tel Quel” I u. II, Paris 1941 und 1943). Frankfurt a. M. 1959.
Winckelmann, Johann Joachim: Gedanken uber die Nachahmung der griechischen Werke in der Malerei und Bildhauerkunst. Stuttgart 1969 (Zuerst 1755).
--------------------------------------------------------------------------
[1]) Vgl. Theodor W. Adorno: Asthetische Theorie. Hrsg. v. Gretel Adorno u. Rolf Tiedemann, Frankfurt a. M. 1977 (zuerst 1970). 아도르노의 미메시스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석가들로 특히 호프만과 프뤼히틀을 들 수 있다: Rainer Hoffmann: Figuren des Scheins. Studien zum Sprachbild und zur Denkform Theodor W. Adornos, Bonn 1984; Josef Fruchtl: Mimesis. Konstellation eines Zentralbegriffs bei Adorno, Wurzburg 1986.
[2]) Vgl. Gunter Gebauer/ Christoph Wulf: Mimesis. Kultur - Kunst - Gesellschaft, Reinbek bei Hamburg 1992; Gunter Gebauer u. a.: Historische Anthropologie. Zum Problem der Humanwissenschaften heute oder Versuche einer Neubegrundung, Reinbek bei Hamburg 1989. Gebauer/Wulf의 책은 말미에서 미메시스의 개념사 등을 위시한 미메시스의 제 양상에 대한 근래의 연구에 관한 書誌도 소개하고 있다.
[3]) Vgl. Hermann Koller: Die Mimesis in der Antike. Nachahmung, Darstellung, Ausdruck, Bern: 1954. 콜러에 의하면 서구 과학사에서 미메시스개념이 좁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에 그 일차적 원인이 있다. 그는 플라톤 이전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미메시스라는 말은 모방의 의미만을 담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춤으로 표현한다”는 뜻을 기원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측면은 플라톤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국가론 Politeia』 제 3권에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학파에 속하는 다몬 Damon의 음악 및 춤에 관한 전문적 이론들을 끌어 들이면서 자신의 미메시스론을 개진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미메시스의 긍정적 측면, 특히 교육적 효과를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미메시스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처럼 좋은 행위의 미메시스는 허용, 권장하고 좋지 않은 행위의 미메시스는 거부, 금지하는 것은 그가 미메시스의 힘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는 무엇보다 미메시스의 강력한 전염적 성격때문에 나쁜 행위의 미메시스를 무제한 허용한다면 그 결과는 통제하기 어렵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국가론』의 제 10권에서는 미메시스개념을 예술과 시문학의 분야에 국한시키려고 시도하면서 특히 호머 Homer를 공격한다. 여기서 그는 미메시스를 주로 模寫 Abbilden의 뜻으로 사용하면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무엇보다 자신의 이데아說을 배경에 깔고서 미메시스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이데아설에 의하면 진리의 영역은 모사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철학적 관조의 대상일 뿐이다. 현상세계는 그 이념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그 현상세계를 모사하는 문학이나 예술은 한 단계 더 이념의 영역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모사된 현상을 보여줄 따름인 예술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인을 이상국가에서 추방시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세계를 흐리게 하는 그러한 미메시스의 해악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시문학의 장르들도 세분화하여 서사시나 비극 등은 폄훼하면서 찬가 Hymne 등은 유용한 미메시스로서 허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의해 평가절하된 미메시스를 『시학 Poetik』에서 구제하는데, 여기서 그는 비극 Tragodie을 신화의 미메시스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그는 미메시스를 시학 내지 미학의 영역에만 한정시킴으로써 철학의 대상인 진리의 영역에서 완전히 분리시키는 전통의 발판을 마련하는 이중적 역할을 하게 된다.
[4]) Vgl. Rene Girard: Mensonge romantique et verite romanesque, Paris 1961; ders.: Das Heilige und die Gewalt (= La violence et le sacre, Paris 1972), Zurich 1987; ders.: Das Ende der Gewalt (= Des choses cachees depuis la fondation du monde, 1978), Freiburg i. Br. u. a. 1983; Philippe Lacoue-Labarthe: Typography. Mimesis, Philosophy, Politics. With an Introduction by Jacques Derrida. Ed. by Christopher Fynsk, Cambridge u. a. 1989; ders.: L'imitation des Modernes. Typographies 2, Paris 1986. 지라르의 경우 미메시스는 문학의 영역을 넘어 - 祭儀的 희생의 메카니즘 등 - 종교라든지 더 나아가 인간 사회 일반의 역사적 진행과정의 본질적 구조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꾸-라바르뜨는 미메시스개념이 전승되어 온 플라톤적 전통의 내적 顚倒 Inversion를 시도하는데, 그 전통의 해체는 미메시스가 탈존재론화된 로고스 Logos를 대체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러한 극단적 비판은 그 비판의 인식론적 기반마저 의심스럽게 만들고 결국 불가지론 Agnostizismus에 이를 위험이 있다.
[5]) Mihai Spariosu (ed.): Mimesis in contemporary theory: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Vol I: The literary and philosophical debate, Philadelphia/Amsterdam 1984; Ronald Bogue (ed.): Mimesis in contemporary theory: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Vol 2: Mimesis, semiosis and power, Philadelphia/Amsterdam 1991; M. Spariosu: Literature, mimesis and play. Essays in literary theory, Tubingen 1982.
[6]) G. Gebauer/ Ch. Wulf: Mimesis, a. a. O., S. 9.
[7]) Vgl. Friedrich Tomberg: Artikel "Mimesis", in: Hans Jurgen Sandkuhler (Hrsg.): Europaische Enzyklopadie zu Philosophie und Wissenschaften, Hamburg 1990, Bd. 3, S. 418.
[8]) Vgl. Jorg Leinweber: Mimetisches Vermogen und allegorisches Verfahren. Studien zu Walter Benjamin und seiner Lehre vom Ahnlichen, Marburg 1978; Ullrich Schwarz: Rettende Kritik und antizipierte Utopie. Zum geschichtlichen Gehalt asthetischer Erfahrung in den Theorien von Jan Muka?ovsky , Walter Benjamin und Theodor W. Adorno, Munchen 1981; Torsten Meiffert: Die enteignete Erfahrung. Zu Walter Benjamins Konzept einer "Dialektik im Stillstand", Bielefeld 1986.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을 그의 언어이론적 시각에서 조명한 해석으로서 특히 메닝하우스 Winfried Menninghaus: Walter Benjamins Theorie der Sprachmagie, Frankfurt a. M. 1980 를 들 수 있다.
[9]) Jurgen Habermas : Bewußtmachende oder rettende Kritik - die Aktualitat Walter Benjamins, in: Siegfried Unseld (Hrsg.): Zur Aktualitat Walter Benjamins. Frankfurt a. M. 1974, S. 173-223.
[10]) Michael Cahn: "Subversive Mimesis: T. W. Adorno and the Modern Impasse of Critique", in: Mihai Spariosu (ed.): Mimesis in contemporary theory, a. a. O., S. 27-64. 벤야민 역시 「프루스트論 Zum Bilde Prousts」에서, 비록 미메시스적 측면과의 명시적 연관에서는 아닐지라도, 프루스트 저작의 한 측면을 특징지울 때 “전복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vgl. II, 1, 315).
[11]) Rolf Tiedemann: Dialektik im Stillstand. Versuche zum Spatwerk Walter Benjamins, Frankfurt a. M. 1983, S. 36.
[12]) Gershom Scholem: Walter Benjamin - Die Geschichte einer Freundschaft, Frankfurt a. M. 1976, S. 260: "Es handle sich eben um eine Aufgabe, die er noch nicht bewaltigt habe, von der er sich aber große Dinge versprach."
[13]) Vgl. II, 1, 204: "유사성을 생산해 내는 최고의 능력을 소유하는 존재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 갖고 있는 상위의 기능들 가운데 미메시스능력이 관여하지 않은 기능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Die allerhochste Fahigkeit im Produzieren von Ahnlichkeiten aber hat der Mensch. Ja, vielleicht gibt es keine seiner hoheren Funktionen, die nicht entscheidend durch mimetisches Vermogen mitbestimmt ist."
[14]) 제이는 벤야민의 사유의 이러한 독특성을 유비적 사유라고 불렀다. Martin Jay: Dialektische Phantasie. Die Geschichte der Frankfurter Schule und des Instituts fur Sozialforschung 1923 - 1950, Frankfurt a. M. 1981. (zuerst 1976), S. 242.
[15]) Gebauer/Wulf 의 책이 주로 역사적으로 억압되어 온 미메시스를 복권시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인은 이러한 구상을 수용하면서 그 개념의 윤곽을 확실하게 하는 데 촛점을 맞추고자 한다.
[16]) 이 「유사성론」은 Siegfried Unseld (Hrsg.): Zur Aktualitat Walter Benjamins, Frankfurt a. M. 1972, S. 23-30에 최초로 발표되었다.
[17]) 이 축소된 둘째 판은 Walter Benjamin: Schriften. Hrsg. v. Theodor W. Adorno und Gretel Adorno unter Mitwirkung von Friedrich Podszus, 2 Bde., Frankfurt a. M. 1955 에 처음으로 발표된다. 「유사성론」을 쓴 뒤 벤야민은 자신이 17년
추천 스크랩 신고

태그 없음

첨부파일

Powered by GR F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