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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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9.24 22:4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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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인간은 발전하나 삶은 쇠락한다.

남겨진 흔적


정선아展 / CHOUNGSUNAH / 鄭先娥 / painting   2012_0926 ▶ 2012_1001 / 9월30일 휴관


정선아_marks lef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0

초대일시 / 2012_092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9월30일 휴관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1159 gallery.hwabong.com

벽은 건축에 있어서 공간을 구획하고 경계 짓는 역할을 한다. 벽은 외부로부터의 차단과 보호라는 부정과 긍정의 이중적 역할로, 벽에 의한 공간은 가족과 타 집단의 관계갈등에 대한 표현이었으며 벽이 갖는 이중성은 갈등 안에서의 침묵의 역할을 대신한다. 침묵은 소통에 대한 외면과 동시에 방어의 수단이다. 이는 아무런 통로나 출입구 없이 벽돌들로 막혀진 공간과 건물 이미지로 환원되어 반영된다.
정선아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0
정선아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0

"남겨진 흔적" 전시의 작업들에서는 벽돌들로 채워지거나 비워진 사각의 면, 벽돌이 빠지고 남은 얇은 시멘트 구조물, 벽면을 뒤덮은 녹색 면 뒤쪽에 새겨진 벽돌들의 자국들, 실재했던 집의 영역을 나타내는 점선들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 흔적의 형상들을 보여준다. 또한 깨진 유리 조각이나 칼날과 같은 물성을 통해 '위험·접근금지'의 언급과 같은 '공격적·방어적' 내면의 상태를 암시한다.
정선아_marks lef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0
정선아_vestig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106cm_2010

내게 흔적의 의미는 눈에 보이는 표시나 자국들, 또는 존재했던 것의 증거로서 남아있는 일부분처럼 실체적인 것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집을 중심으로 관계 맺어진 관계 내에서 벌어지는 충돌의 지점에서 겪었던 여러 층의 감정이나 갈등과 관련되어진 것, 폐쇄적 태도나 막연한 불안과 염려 같은, 무뎌질 수 있지만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내면의 상태나 기억까지 남겨진 흔적에 포함된다.
정선아_무제_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80.3cm_2011
정선아_vestige_ 캔버스에 아크릴, 깨진 유리_53×45.5cm_2011

집과 벽은 이러한 '추상적 흔적'에 대한 나의 관념이 투사된 대상으로, 실제의 건축물이나 그것의 부분과 같은 구체적 형상으로 때론 육면체, 평면 등의 기하학적 도형과 같은 단순화된 형상으로 작업에 가시화된다. ■ 정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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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he story ends


김진욱展 / KIMCHINWOOK / 金鎭旭 / painting   2012_0926 ▶ 2012_1017 / 월요일, 공휴일 휴관


김진욱_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17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95×14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514g | 김진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2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공휴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김진욱의 회화는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에 대해서 자유롭다. 선으로 끝없이 연결된 화폭은 서로 얽혀있는 선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인체로 치환되기도 하고, 때로는 유기적인 선들이 치밀하게 이어져 식물로 자라나거나, 의자 혹은 그네와 같은 구조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동식물이나 인체의 부분적인 이미지들 만이 그의 풍경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인 부분이다.
김진욱_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19_장지에 먹, 아크릴채색_95×280cm_2011
김진욱_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20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200×160cm_2012

그 풍경의 전개는 무척 감각적이고 신비로운데, 전체적인 이미지를 구상한 뒤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흐름을 타고 손이 가는대로 맡기는 그의 작업 방식에서 「Inside and outside landscape」 시리즈는 말그대로 그의 내면과 그가 보는 세계에 관한 풍경이 된다. 무의식을 따라 두 세계를 엮어나가는 풍경이 선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것은 동양화를 전공했던 그의 이력을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인체와 자연의 이미지들은 마치 중요한 단서가 아닌 것 처럼 엷게 채색된 풍경 속에 나직히 감추어져 있다. 화면 안의 충분한 여백은 선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우연히 숨이 트이는 자리에 놓여 있고, 마치 캔버스 너머의 풍경과 연결되어 있는 듯, 새로운 여정에 대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김진욱_Inside and outside of landscape-21-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40×200cm_2012
김진욱_Inside and outside-black mirror-캔버스에 목탄, 아크릴채색_120×185cm_2012

회화 작업이 일종의 퍼즐처럼 시선을 따라 숨겨진 이야기를 맞추어 나가야 하는 데 반해, 상자를 이용한 작업에서는 그가 제시하는 풍경이 보다 쉽고 명료하게 나타나있다. 고요한 수면을 연상시키는 에폭시로 채워진 상자의 표면 아래, 의식의 선들이 잠기어 있고 회화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자연이나 인체의 형상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 상자는 주로 보관의 용도로 쓰인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으로 소중한 것을 보관하거나, 당시의 기억이 머무르는 작은 공간이 되기도 한다. 김진욱은 작업을 할 때 즉흥적으로 소재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그가 상상하는 풍경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물감을 놓고 쓰던 접시나 주변인들의 이야기, 당시의 사건이나 작업실 안에 놓여 있던 상자 등 일상의 단서들을 그의 작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김진욱_Inside and outside-Islets4_혼합재료_94×125cm_2011

김진욱이 보여주는 세계는 관객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음으로 극대화 된다. 그는 추상을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간극을 무력화 시키고 완전한 세계를 향한 바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풍경은 그 곳으로 향하는 비밀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독일 유학 시기 부터 꾸준히 계속되었던 상자 작업에서 볼 수 있듯, 그 세계는 일견 닫혀 있어 열어야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회화 안에서는 숨은 그림을 찾고, 이야기를 발견하는 영민함을 필요로 한다.
김진욱_Inside and outside-the abducted moon_혼합재료_122×195cm_2012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나 전편에서 후편으로 이어지는 내러티브는 시간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진실은 주관적이며 하나의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는 한편으로 진실을 진실되게 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장치가 된다. 김진욱의 세계를 둘러싼 그 모든 환상적인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관객은 보여지는 그대로의 풍경이 자신의 눈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어떤 추측이나 해석과는 관계없이 김진욱의 세계는 그 때 비로서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 정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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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Me


리멤버 미展   2012_0908 ▶ 2012_1014 / 월요일, 추석 당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908_토요일_05:00pm 오프닝 퍼포먼스 / 2012_0908_토요일_05:30pm 참여작가 이승택 (Seung-taek Lee)_정서영 (Chung Seoyoung) 아이 웨이웨이 (Ai Weiwei)_리우 딩 (Liu Ding) 루카 부볼리 (Luca Buvoli)_시몬 드브뢰 묄러 (Simon Dybbroe Møller) 관람시간 / 화~일요일_10:00am~06:00pm / 월요일, 추석 당일 휴관 갤러리 현대 본관, 신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82.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두가헌 갤러리 서울 종로구 사간동 108번지 Tel. +82.2.2287.3551 www.galleryhyundai.com 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16 www.16bungee.com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는 다시 미래를 낳는다. 개인의 기억, 역사적 사건, 사회 시스템 등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현재 삶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고,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또 다른 현재(혹은 미래)를 잉태한다. 그 과거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시발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더 큰 행복과 자유를 제약 받게 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인간 삶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 온 자본주의 시스템이 빈부 격차와 함께 여러 사회 갈등을 낳았고, 급속한 산업화는 전 세계적 부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자연 파괴와 함께 오늘날 심각한 환경 문제와 기후 변화를 낳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도 모르는 채 현재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 이다. 안다 하더라도 어디서부터 이를 해결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주어진 현실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리멤버 미 Remember Me』에 포함된 여섯 작가들은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이와 같은 상호 연관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있음을 그들 작품의 시작점으로 삼는다. 그들의 작품은 미적 완성도와 시각적 즐거움을 창조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각각의 관점으로 우리의 현재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그것의 구조를 드러내는 시도이다.
아이 웨이웨이_258 Fake_7677 images (2003-2011) and 12 monitors_가변설치_2011_부분
아이 웨이웨이_258 Fake_7677 images (2003-2011) and 12 monitors_가변설치, 갤러리 현대_2011
아이 웨이웨이 ● 아이 웨이웨이는 다양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재정의 하는 것"에 그의 모든 활동의 핵심을 둔다. 그는 자신이 특정 오브제나 영상을 만드는 작가라기 보다는 삶 속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사람이며, 바로 이것이 예술가의 역할이자 존재라고 생각한다. 테이트 미술관의 터바인 홀에 전시되었던 「해바라기 씨 Sunflower Seeds」 작품이 지닌 큰 의미는 그 장대한 스펙타클이 아니라 이 작품을 완성하면서 그가 일자리가 없는 가난한 중국인들에게 3개월 동안의 일자리와 보수를 제공했다는 사실일 것 이다.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트위터 사용자인 아이 웨이웨이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치, 사회, 문화, 일상 전반에 대한 그의 견해를 전 세계에 드러내는데, 이는 그가 언론을 통제하고 사회 문제들은 숨기며 가상의 중국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국 내부에서 활동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나는 다음 세대가 나와 똑 같은 투쟁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아이 웨이웨이의 언급에서도 볼 수 있듯 작업을 포함한 그의 모든 활동은 그가 속한 그리고 우리가 속한 현실에 대한 응시이자 그것의 드러내기 이며, 이를 통한 현실의 재정의 이다.
이승택_실험 미술 사진_1957~95
이승택_지구 행위 퍼포먼스_사진_갤러리 현대_1989
이승택 ●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이승택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것은 "부정의 전략"이다. 1950년대 한국의 조각계는 구상적 조각이 일반적이었다. 작품은 좌대 위에 놓여져야 하였고, 예술은 설명될 수 없는 숭고한 미적 가치를 지녀야만 했다. 이승택은 이와 같은 당시의 고정 관념을 넘어서는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들을 고민하였고, 그 결과 그는 자신만의 비조각(non -sculpture) 영역을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발전시키게 된다. 일상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물들을 가져와 그 활용을 탈각시키고, 그것이 보여지는 문맥을 바꾸는 이승택의 작품들은 예술가의 개입으로 인해 일상적 사물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구현하고자 했던 한국 최초의 개념미술 이라 할 수 있다. 비조각의 추구 속에서 형태가 중심이 아닌 작품, 좌대와 프레임 안에 갖혀 있지 않는 작품에 대한 그의 탐구는 일상적 사물들, 바람, 불, 연기 등을 소재로 삼으며 비물질적 요소를 지닌 설치, 퍼포먼스, 대지 미술 작품들로 발전되었다.
정서영_지금이 바로 그때_나무, 철재책상, 유리_180×143×134cm_2012
정서영_갤러리 현대_2012
정서영 ● 정서영 작가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일상의 부조리함을 직시하고, 그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정신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의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과장되었거나, 비논리적이거나, 두터운 속임수이거나, 잊어버렸거나, 억압 때문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알 수 없는 상태로 침묵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궁금해 하며,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에서 높이가 조금 다른 두 책상 위에 놓여진 유리는 작은 나무 판에 의지해 수평을 이루고 있다. 겨우 수평이 맞추어진 그 순간, 그 예민한 수평은 정서영에게는 이 부조리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자 바로 그 순간 이다. 사소한 주변을 바라보며 그 안에서 작은 틈새를 찾아내어 그 간격을 자신만의 유머, 상상력, 혹은 작은 기재들로 채워 넣는 것, 그렇게 정서영의 작품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맞선다.
시몬 드브뢰 묄러_The Loud Speaker_HD 비디오, 사운드_00:03:55_2012
시몬 드브뢰 묄러_갤러리 현대_2012
시몬 드브뢰 묄러 ● 유머는 덴마크 출신의 작가 시몬 드브뢰 묄러 작업의 핵심처럼 보인다. 1970년대의 개념미술들이 상당한 측면 이론적 견고함과 모더니즘적 남성성에 기반한다면 오늘날의 작업들이 보여주는 참고와 비틀기는 마치 가벼운 농담과 같다. 「캐치 페인팅 Catch Painting」의 흰색 캔버스 위에 펼쳐진 그물은 모더니즘 회화 속 숭고한 선과 색이 그 무거움을 떨쳐 버리고 캔버스 밖으로 뛰쳐 나오는 듯, 혹은 그 힘을 잃고 늘어진 듯 하다. 모더니즘 미술사를 환기시키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비틀어 놓는 드브뢰 묄러의 작업 속에서 모더니즘 미술사의 핵심 개념들, 숭고, 남성성, 심각함, 단일성 등은 그 권위를 상실한다. 「The Roman Two」라는 소제목을 가진 이번 전시는 로마 숫자 "II"가 두 개의 상반된 "I"로 구성되어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드브뢰 묄러는 캐치 페인팅, 맥주와 소변을 담아 놓은 유리컵을 찍은 사진, 말과 맥주 자판기의 기이한 연결 등을 이 전시에서 보여준다. 우리의 일반적 사고 속에서 같다고 여겨지는 요소들-색, 무게 등-을 지니지만 전혀 다른 두 가지의 공존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보는 이를 혼돈시키고 우리의 안정적 현실을 흔든다.
리우 딩_Evidence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리우 딩_갤러리 현대_2012
리우 딩 ● 최근 20여 년간 중국 사회는 덩 샤오핑의 개혁 개방이 낳은 부조리, 그 결과로서의 천안문 사태, 그리고 그것이 낳은 중국 사회 전체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깊이 숨긴 채 급성장 해오고 있다. 정치적으로 미국과 맞서는 초 강국 중국이라는 이미지 뒤에는 빈부 격차, 정치적 부패, 소수 민족의 억압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이 존재한다. 인위적으로 선별된 역사, 가공된 현실, 그 와중에 급속도로 유입되는 자본주의와 그것을 향한 대중의 열망은 무언가 어그러져 있다. 그리고 리우 딩은 이와 같은 현실을 조심스럽게 접근해간다. 이번 전시에 보여지는 설치 작품 「증거」에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중국 미술학교의 서양미술사 수업 시간에 보여지는 슬라이드 이미지들과 1978년부터 1990년 사이 발간된 미술 잡지들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 시기 로컬 작가가 그린 작품과 작가가 1980년대에 그린 작품도 공존 한다. 이 설치 작품은 왜곡된 서구 미술의 유입이 중국 현대 미술에 미친 영향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등 전분야에 걸쳐 아시아에 무분별하게 유입된 서양문물과 그 영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외에도 그는 급성장한 동시대 미술 마켓을 바라보며 미술 작품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프로젝트도 지속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리우 딩은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 가치, 현실에 대하여 그 구조를 들여다 보고, 현실을 비틀며 우리가 당연시 받아들이는 가치와 현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루카 부볼리_Trophy - I Remember (Triangular Spiral - Turquoise and Orange)_ 강화 폴리우레탄, 폴리에스테르수지, 금속, 에나멜 페인트, 나무, 플라스틱 관, 플렉시글라스_ 83.8×25.4×35.6cm_2012
루카 부볼리_갤러리 현대_2012
루카 부볼리 ● 제 이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부모님의 전쟁에 대한 기억은 이번 루카 부볼리 전시의 핵심 이다. 이차세계대전이 우리 부모 세대에 남긴 정신적 트라우마, 파시즘 속에 담겨 있던 영웅주의와 그 결과적 실패가 담고 있는 우울함,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영웅주의와 성공을 향한 열망이 도달할 수 밖에 없는 허무함이 루카 부볼리 작품 전반에 깔려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리적 요소들은 미래주의와 아르테 포베라의 조형적, 재료적 특성들과 결합되며 시각화 된다. 「메타-미래주의 Meta Futurism」라는 제목을 통해 그의 작품 속에 담긴 미래주의와의 연관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번 전시는 지나간 과거와 그것이 지녔던 허무한 열망을 통해 우리 지금, 여기의 또 다른 열망을 되새겨 보게 한다. ■ 갤러리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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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 You & Me


심아빈展 / SHIMAHBIN / 沈雅彬 / painting.video.installation   2011_0428 ▶ 2011_0529 / 월요일 휴관


심아빈_You & 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50cm×7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729g | 심아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42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토_10:00am~06:30pm / 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지와이엠프로젝트 GYMproject 서울 강남구 청담동 네이처포엠 311호 Tel. +82.2.3443.9276 www.gympr.co.kr

이번 전시는 심아빈의 세 번째 개인전으로 회화, 영상, 설치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삶과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솔직하면서도 냉소적으로 표현하여 관람객에게 유희와 공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심아빈 작품의 핵심은 작품 안에서건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서건 그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어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는 사람들 간의 관계성을 도식화한 작품들이 소개된다. 전시작 대부분은 여러 개의 캔버스들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이룬다. 이것은 마치 그림책처럼 장면들이 하나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는 것 같다. 작품에는 '너'를 상징하는 세모와 '나'를 상징하는 동그라미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두 개체는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마치 저울추와 같은 모습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세모와 동그라미는 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가 확대되어 보이거나 축소되어 보이지만, 최종적으로 그 둘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대등한 관계임을 드러내며 결말을 낸다. 다른 작품에서는 세모와 동그라미가 결합되어 있는 원뿔을 가지고 '너'가 없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심아빈_너와 나 / You & Me展_지와이엠프로젝트_2011
심아빈_Getting Ol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틸_40×40cm×7_2011
심아빈 작품의 간결함과 단순함 속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이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 시간의 개념을 넣어 일종의 삼각관계를 구현한 'You, Me & Time(너, 나 그리고 시간)'이라는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간은 마치 새총의 고무줄에 묶인 듯, 혹은 줄다리기를 하는 듯이 팽팽히 사람들의 관계에 묶여 은근한 긴장감을 유발하며 관계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이면서 지배적인 시간의 성향이 표현되어 있다.
심아빈_You & Me_비디오 설치, 사운드, 추, 모니터, DVD 플레이어_가변설치_2011
심아빈의 작품은 미니멀하여 다소 차가워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감성적이기도 하다. 세모가 '너'이고 동그라미가 '나'라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누구나 자신과 그 누군가를 각 사물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감정이 이입될 것이며 더 이상 세모와 동그라미는 단순한 도형이 아닌 각자의 의미가 부여된 가치 있는 것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생각을 전환시켜 새로운 시각으로 '너와 나'를 바라볼 수 있게끔 관람객들을 유도한다. 이는 사람간의 소통에 대한 새로운 방법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그에 대한 적절한 모색이 될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상을 단순화하여 그 근본을 찾고자 하는 작가의 고찰이 반영되어 있다.
심아빈_You, Me & Ti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틸, 고무밴드_ 캔버스 45.5×60.6cm, 32.7×46×77.6cm_2011
심아빈(1976년 생)은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영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스코틀랜드 던컨 오브 조단스톤 컬리지 오브 아트 & 디자인에서 타임 베이스드 아트와 일렉트로닉 이매징을 전공해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로워 포에 갤러리(스코틀랜드) 그리고 2006년 갤러리 팩토리(한국)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주요 해외 단체전으로는 2003년 영국 피터버러 미술관과 2004년 던디 컨템포러리 아트에서의 전시가 있고, 비디오 작품 상영 전시로는 백업 인터내셔널 필름 페스티벌(독일), 히로시마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일본) 그리고 허드슨 벨리 컨템포러리 아트 센터(미국)에서 있었다. 2005년에는 일본 삿포로 초대 입주작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다. 작가는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 지와이엠프로젝트
심아빈_Encount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나무상자_캔버스 20×60cm, 나무상자 17×60×15cm_2011
GYM project pres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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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란展 / PARKSUNGRAN / 朴成蘭 / painting   2012_0927 ▶ 2012_1014 / 월요일 휴관


박성란_이종1_종이에 콘테_116.7×72.7cm_2011 박성란_이종_종이에 콘테_116.7×72.7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21a | 박성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2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가비 GALLERY GABI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2층 Tel. +82.2.735.1036 www.gallerygabi.com

Different stories ● 지난 해 겨울, 못다 읽은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장인(Craftsman)』이라는 책의 프롤로그 제목은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다. 이 제목은 현대미술에서도 통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미술이 손을 배제한, 적어도 손의 흔적을 애써 감추려는 일에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알기 때문이다. 기계를 이용하여 손의 노동을 의도적으로 지운 것이나 혹은 지독한 그리기라고 말하는 극사실주의류의 그림도 기계처럼 인간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미술의 진정한 아이덴티티(Identity-그런 게 있다면)는 손과 머리가 하나로 작동하면서 생각이 동시에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는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을 상정한다. 손의 능력 회복으로 자신의 사고와 주장이 드러나는 작품을 평가하고 들먹이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을 보면 이런 소리도 전혀 뜬금없는 것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박성란_이종_종이에 콘테_193×112cm_2012
박성란_이종_종이에 콘테_73×52cm_2012

박성란의 작품은 종이에 콘테로 그린 것이다.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렸다, 지웠다 그리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그것도 일반적인 작품 크기보다 크게 그린다. 그녀가 주로 다루는 소재는 꽃처럼 보이지만, 실은 꽃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품을 조합하여 꽃처럼 형상화한 것이다. 언뜻 보면 그녀의 그림은 커다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검정색 꽃 그림처럼 보이는 박성란의 작품은 손으로 그린 흔적을 애써 지우거나, 기계의 부품을 물건으로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고와 손이 일치되어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라는 소박한 아이덴티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녀가 선택한 소재가 기계부품인데, 이것이 썩 괜찮아 보인다. 결국 미술이란 물질에 대항하는 정신이고 또 하나의 물질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나는 박성란을 추천한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이 작가를 추천한다') ■ 임창섭
박성란_이종_종이에 콘테_108×79cm_2012
박성란_이종_종이에 콘테_108×79cm_2012
Different st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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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flection of my life


김남현_송유림_정효영展   2012_0914 ▶ 2012_092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91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 컴퍼니 긱 Art Company GIG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30번지 Tel. +82.2.323.7395 www.artcompanygig.co.kr

1950년대에 사회심리학자 에릭슨Erikson, E. H.은 「The problem of ego identity(1956)」라는 논문에서 정체성이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을 심리사회학적으로 확장한다. 자기정체성이란 자기 자신의 독특성에 대해 안정된 느낌을 갖는 것으로, 행동이나 사고, 느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인가를 일관되게 인식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아정체감은 4개의 기본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개인은 인간이라는 느낌,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느낌, 각 개인은 독특하다는 느낌, 시간 경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람이라는 인식 등이 그것이다. 안정된 정체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신체적·성적 성숙, 추상적 사고 능력의 발달, 정서적 안정이 선행되어야 하며 동시에 부모나 또래 집단의 영향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자아는 "아동기 동안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동일시를 선택적으로 강조하고, 자기-이미지들을 점진적으로 통합해냄으로써"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낸다. 자아 정체성은 "개인 안에 지속적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타인과 지속적으로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동기 이후 청소년기에 걸쳐 발생했던 다양한 추억들이 현재 우리들의 삶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이미지와 추억의 파편들이 현재 자신의 자아를 형성케 하며 자기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작가들에게 있어서 자아란 무엇인가. 모더니즘 이후 파생된 포스트모던이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전통적 의미의 자아는 해체되기에 이른다. 유럽 대가들의 초상화 속 인물들을 동시대 아프리카 계 인종으로 그려 넣는다거나 여자의 얼굴에 남자의 얼굴을 섞고 각종 유색인종의 특징을 부분 부분 합성하는 디지털 작업들이 범람한다. 이에 반해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작가들은 이러한 인종, 민족, 섹슈얼리티의 관점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자기정체성을 파고들며 창작을 한다. 정효영, 김남현, 송유림 이 세 작가들에게 있어 자아는 현재 자신을 반추하는 과거의 추억이자 기억의 편린이다. 자아는 거울처럼 반영되는 미지의 반사체이다. 잘 살펴보라, 내 모습 어딘가의 다른 무엇이 다른 누군가에게 다른 모습으로 반영되기 마련이다.
김남현_Solitude_혼합재료_130×55×90cm_2012
김남현_Untitled_혼합재료_220×180×180cm_2012
김남현_Equipment #1_사진_52×39cm_2010
김남현_Equipment #2_사진_50×42cm_2010
김남현자아는 하나의 폐쇄된 개체이다 김남현 작가에게 자아란 거대한 심리적 틀 안에 갇힌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solitude"에서 보여주는 작품성이야 말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상정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할 수 있다. 한 명의 사람이 좌우 반전되어 있고 의자가 되기도 한다. 얼굴에는 후드가 뒤집어 씌워져 있어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실내에서 무언가를 응시하는 사람인 것 같은데 결벽증환자처럼 손과 발에는 새하얀 양말과 장갑이 가지런하게 존재한다. 작가에게 자아란 자기만의 규범이자 틀이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대화의 창구이다. 자가발전을 통한 자아실현은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Equipment" 시리즈의 경우, 쌍둥이의 자아 또는 하나의 개체로 표시된 자아가 스스로의 대화와 규범과 프레임을 창조한다. 억압받는 개인의 모습을 재창조하여 그 속에서 자신만의 자아를 찾아가는 작가의 모습이 굳건하다.
송유림_가시방석 a replacement_실크에 잉크, 자수, 프레임, 알루미늄 판_22×26×2.2cm_2012
송유림_Figure 가시방석 a replacement_설치_2012
송유림_할머니 혹은 엄마찾기 the missing_실크에 잉크, 자수, 프레임, 알루미늄 판_ 각 22×20×1.6cm_2012_부분
송유림_할머니 혹은 엄마찾기/the missing_실크에 잉크, 자수, 프레임, 알루미늄 판_2012_부분
송유림자아는 유희를 빙자한 놀이의 연속이다 송유림 작가의 작업은 일종의 놀이와도 같다. 어릴 적 우리들은 수많은 놀이들을 즐기며 살아왔다. 그 놀이 속 주인공들은 서로를 숨기며 그것을 찾는데 재미있는 보상을 내걸었다. 보물찾기에 성공했을 때, 그 기쁨과 희열을 기억하는지... 송유림작가는 작품속에 교묘하게 숨겨놓은 장치들을 숨박꼭질의 유희를 느끼듯 풀어넣는다. 시간을 들여 한땀 한땀 수를 놓고, 한코 한코 액자들을 만들며, 작가는 시각적 모티브의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다소 신경질적이고 섬세한 일련의 수많은 실들은 하나하나가 풀어헤쳐쳤다가 다시 캔버스위에서 모여들어 어머니이던 할머니이던 작가의 무의식 속 수많은 타자를 형상화해간다. "소리없이 인사하기""가며오며 마음주고" 즐거웁게 모여앉아" 등 가족의 따뜻함을 연상시키는 텍스트를 이용한 작업에서도 인연의 실타래는 보여지고 있다. 작가는 역설적으로 폐쇄된 자아가 아닌 여러 무리속의 자아를 찾는 정체성의 작업을 통해 자아의 소중함을 더욱 더 발현하고자 한다.
정효영_Afternoon in yard_인조가죽에 바느질, 실, 코튼, 와이어, 베어링, 완구, 모터, 타이머, 센서_ 설치_2012
정효영_Afternoon in yard_인조가죽에 바느질, 실, 코튼, 와이어, 베어링, 완구, 모터, 타이머, 센서_ 설치_2012
정효영_afternoon in yard_종이에 연필, 색연필 드로잉_79×54cm_2012
정효영_moment_종이에 연필 드로잉_65×80cm_2012
정효영자아는 기억의 파편과 조합이다 정효영 작가는 자아를 기억으로 이루어진 파편의 조합으로 본다. 작품 면면을 들여다보면 자아의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기에 쉽게 납득이 되지 않을 만큼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며 육감에 치우쳐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이 오히려 상상력의 나래를 타게 한다.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감각, 습관 등의 모티브를 작업 시에 엄청난 에너지로 최대한 끌어올려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낸다. 정효영 작가의 작품에는 실, 촉수 등의 오브제가 많이 보인다. 작가에게 있어 "실"은 아마도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억의 실마리이고 "촉수"는 그 기억을 현재의 동력으로 끌어올리는 중간매개체가 아닌가 싶다. "Supersensible clash"에서는 어릴 적 놀이공원의 모티브를 한껏 이용했고 "The really monument"에서는 어릴 적 소녀가 꿈꾸던 동화 속 왕자님의 모습이 촉수를 타고 올라와서 꽈리를 튼다. 정효영 작가의 작품의 백미는 "모빌"이라는 점이 크다. 드로잉을 제외한 대부분의 설치작품이 키네틱 아트이다. 작품 속에 움직임을 묘사하려는 작가의 시도는 과거 자신의 몸 하나 하나에 기억되어 있는 영감을 현실 속 작품으로 육화하고자 하는 작가정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 21세기 들어 전통적 가치가 해체되고 자아가 강조된 사회, 문화 인프라가 생성된다. 전통적 가족의 해체, 산업정보의 해체 등등...우리가 가져가야 할 가치의 영역이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파생되고 있는 이질감 속의 세계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움직일까. 본 전시 "The reflection of my life"는 이러한 동시대의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더욱 더 두드러지는 자아관을 다룬다. "6070"의 기억중에 아련히 자리잡은 추억의 팝(POP) 중에 전시의 동명의 타이틀인 marmalade의 노래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회귀의 본능이 있는데, 이 "reflection of my life"는 그러한 인간 내면의 자아성찰과 자기인성회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베트남전 즈음에 발생된 히피문화의 파생성이기도 하지만 칸트나 쉘링이 언급한 무제약자(스스로 존립하여 아무것에도 제약을 받지않는 존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인지하고 이제는 인간 자아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성이 노래에 실려있는 것이다. "나의 모든 비애, 나의 슬픈 미래... 그 모든 것이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줄 거에요. 울고 또 울부짖고, 죽도록 울어야 나는 나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김지환, marmalade의 『reflection of my life』가사말 중) ● 관계에서 오는 충돌들은 익숙해져만 간다. / 나 자신과의 충돌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 그러나 평온하다. ■ 김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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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w+ing


2012_0927 ▶ 2012_1002 / 월요일, 추석당일 휴관


정명근_매트 드로잉_종이에 연필_29.7×21cm_2012

초대일시 / 2012_0927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권민지_김미정_김주영_김혜나_노경화 이규연_임희조_임장환_정명근
기획 / 동국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전공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추석당일 휴관
갤러리 동국 GALLERY DONGGUK 서울 중구 필동 3가 26번지 동국대학교 문화관 B1 Tel.+82.2.2260.8752 www.dongguk.edu

『draw + ing』를 타이틀로 하는 본 전시는 '드로잉의 범주가 어디까지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드로잉이란, '결과보다 과정', '개념보다 상상', '완성보다 실험'에 초점을 맞춘 창조적인 작업이다. 또한 모든 장르를 포함함과 동시에 장르의 구분이 없는 탈장르적 개념이기도 하다. 미완성의 아이디어 뿐 아니라 완성된 작품에 이르기까지의 육체적 정신적인 창조활동을 가늠케 하는 모든 생산물을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 이처럼, 드로잉은 실험적인 생각을 구체화시키는 '과정(process)'을 중시하므로 이전까지의 서구적 교육으로 인한 '결과'위주의 사회 풍토를 개선시킴과 동시에, 더 나아가 창의적 발상과 독창적 표현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드로잉의 연구는 미술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간 행위의 기초로서 그 범위를 확대시킬 수 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권민지_무언의 공간_종이에 혼합재료_18.8×28.5cm_2011
김미정_드러난 공간_종이에 펜_21×29.7cm_2012
김주영_서울역, 북두칠성, 껌에 의한 별자리_디지털 프린트_18.7×27.2cm_2012
김혜나_무제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72.7cm_2012
노경화_늘어지고 압축되는 것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0.9cm_2012
이규연_나를 위한 드로잉_종이에 혼합재료_65×48cm×3_2012
임장환_空間_종이에 잉크_21×29.7cm_2008
임희조_각종사물02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2

드로잉의 고전적인 인식은 종이위에 표현되는 밑그림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과정(process)'에 있는 모든 미술표현을 드로잉으로 보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석과 범위가 굉장히 광범위하다. 개념적 차원에서 벗어나 '과정'이라는 말은 항상 경계가 없고 무한하다.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과정으로써의 드로잉'의 범주는 달라진다. 하지만 드로잉은 회화와 구분되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드로잉의 기존 특성으로 단순성과 즉흥성 그리고 동시성이 적용되며 재치 있고 순발력 있는 가벼운 표현으로 이미 정형화 된 양식이 되어 진다. 우리는 이미 장르화 되어버린 드로잉의 개념을 확장하기 보다는 '과정으로써의 드로잉'이라는 범주 안에서 또 다른 표현으로 드로잉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다. ■ 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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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형展 / LEEJOONHYUNG / 李俊亨 / painting   2012_0927 ▶ 2012_1020 / 일요일 휴관


이준형_Untitled_리넨에 유채_61×7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30i | 이준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27_목요일_06:00pm
2012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유진갤러리 EUGEAN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6-7번지 Tel. +82.2.542.4964 www.eugeangallery.com
육체의 유체역학 ● 이준형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반듯하지 못하고, 대부분 이런저런 방식으로 엉클어져 있다. 그들은 정상보다는 비정상이,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강조되어 있다. 모노톤으로 처리된 중성적인 바탕 한가운데 한자리 씩 차지하는 인간은 추락과 해체, 뭉개기와 터트리기라는 수난극의 주인공들이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액션이 취해진 형상들은 개체를 개체이게끔 하는 응집성을 원천 봉쇄당한다. 대상의 정확한 외곽선과 고유색은 변질되며, 얼룩지고 흘러내린다. 얼굴이나 인체의 조직화된 기관 속에 있어야할 체액들은 참조대상으로부터 탈주를 꾀하는 물감과 한데 엉켜 범벅이 된다. 이 모호한 선과 색채들은 어떤 극한의 감정 상태에 있는 인간의 객관적 재현이면서, 응축 또는 발산된 감정과 공감을 유도하는 주관적 표현이고, 동시에 칠해진 또는 흘려진 물감의 흔적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서는 결정불가능성만이 결정적이다. 모호함 속의 강렬함이라는 특징은 그의 작품을 그로테스크, 언캐니, 앱젝션, 위반, 낭비, 오염, 전염, 엔트로피, 카오스모스 등과 같은 우리 시대의 키워드들과 근접시킨다. 그러한 키워드들은 공통적으로 경계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관계된다.
이준형_Untitled_리넨에 유채_61×73cm_2012
이준형_Chapter11_리넨에 유채_163×131cm_2010_부분

이준형의 작품은 그 중에서 가장 민감한 경계를 이루는 몸과 얼굴을 대상으로 했다. 몸과 얼굴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다가오기에, 어떤 작은 경계의 위반도 두드러질 수 있다. 전시장으로 개조된 청담동의 주택 3개의 공간에는 다이빙하는 사람들과 얼굴들의 형상이 있는 작품들, 그리고 그것들과 짝을 이루곤 하는 추상적 작품들이 걸려있다. 그는 실제를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사진을 보고 변형시켰다. 육안보다 더 정확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사진적 시점의 모호성을 더욱 강조한다. 대부분 등신대의 다이버들은,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한 시간 속에 마찬가지로 몸을 싣고 있는 그림과 마주한 이를 거울처럼 비춘다. 다이빙 선수나 포르노 여배우들처럼 인터넷에서 수집된 사진들은 자유분방한 붓질과 튀는 색채로 변형되어 있으며, 혀를 빼물고, 고함치고, 찡그리고 파안대소하면서 적나라하게 그들의 감정을 배출한다. 심리적이고도 육체적인 배설은 비천함(abjection)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낳는다. 초상과 나란히 배치된 추상적 화면들은 초상의 색, 터치, 세부 등과 연관성이 있다.
이준형_Chapter11_리넨에 유채_163×131cm_2010_부분
이준형_Chapter11_리넨에 유채_163×131cm_2010

형상을 고수하는 이준형의 그림에서 대상, 특히 인간은 언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가능하게 하고 풍부하게 해주는 원천이 된다. 무의식적 충동의 원천이 되는 인간은 기존의 언어를 변형시키는 동인이다. 다이빙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섹스 오브제로서의 포르노 여배우들은 인간인지 기계인지도 알 수 없다. 얼굴과 몸의 구멍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질척한 체액/물감들은 와해를 보여준다. 그는 젖은 재료로 젖은 인간을 그림으로서 소재와 방법 면에서 모두 경계의 해체를 꾀한다. 작업에 대한 이준형의 성향과 태도가 잘 드러난 이 전시는 고정된 주체가 아닌, 과정 중의 주체에 대한/의한 작품을 보여준다. 얼굴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라고 간주되지만, 전래된 신학의 변형에 불과한 인간주의의 선입견을 배제한 냉정한 관찰은 보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형상을 펼칠 수 있게 한다. 이준형의 작품에서 인간은 어떤 심오한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거칠게 그어진 선과 튄 얼룩, 그리고 무언가 들고나는 구멍들로 이루어진 인간은 깊이가 아니라 표면들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표면들마저도 서로 부딪히고 깨져나가며 녹아내리는 중이다.
이준형_Chapter11_리넨에 유채_163×131cm_2010_부분
이준형_Untitled_리넨에 유채_73×61cm_2012

그의 얼굴들에는 하얀 바탕 면이 그대로 방치된 부분도 발견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공백 또한 얼굴이라는 가장 긴밀한 영역을 차지하는 요소이다. 빈 공백은 제자리를 잃은 선과 색채가 운동할 수 있는 무대가 된다. 상반될 수도 있는 극한의 감정이 하나로 보일 수 있는 것은 몸 자체가 '뫼비우스 띠같이'(엘리자베스 그로츠) 연결된 하나의 표면이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요동치는 '리비도적인 표면'(리오타르)들은 고체적인 명료함이 아니라 액체, 또는 기체적인 유동성으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유동성 자체가 인간의 열망과 갈망을 표현한다. 이준형의 작품 속 인간들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떨어지거나 깨지는 등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는 변화의 와중에 있으며, 작품을 제작하는 빠른 속도 또한 변형을 생성과 중첩시키기 위한 것이다. 상이한 배치를 통해 경계 위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이행의 과정에 몰두하는 그의 작품에서, 체액과 물감을 구별 지을 수 없는 장은 '힘의 무상 유출이자 대가없는 지출'이 행해지는 '육체의 유체역학'(알폰소 링기스)이 작동되는 장이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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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 Fort


하지훈展 / HAJIHOON / 河芝勳 / painting   2012_1011 ▶ 2012_1102 / 월요일 휴관


하지훈_Beach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04i | 하지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토요일_11:00am~07:00pm / 일요일_01:00pm~07:00pm / 월요일 휴관
TV12 갤러리 TV12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1번지 B1 Tel. +82.2.3143.1210 www.television12.co.kr

비연대기적 풍경 ● 동화 속 자연은 수동적이지 않다. 눈 깜짝할 새에 하늘을 뚫고 자란 '콩나무'처럼 하지훈이 펼친 풍경은 인간의 눈으로 재단한 에덴의 동산과 같은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회화 속 자연은 짐짓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딘가를 재현한 듯 하지만 실상은 개인적 기억 속에 저장된 자연의 파편을 화면 안으로 이식한 가상의 자연이다. 잠들어 있던 파편이 밖으로 나오자 수동적이었던 기억은 스스로 진화하면서 기이한 풍경으로 자라난다. 이는 동양의 산수처럼 관념적이지도 서양의 풍경화처럼 웅장한 비장미를 선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미아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묵시록적 세계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훈_Blue Fores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27×182cm_2012

하지훈은 어린 시절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러 부대로 이사하며 성장했다. 이후 독일 유학까지 우연의 일치이지만 비교적 자연과 가까운 생활을 했다. 생활 이외에도 자연으로부터의 영향은 잡지, 신문, 영화 및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억 속에 저장된다. 회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은 기억의 편린이 조합된 '콜라주 된 풍경'이라 부를 수 있겠다. 대개의 풍경이 그로테스크하거나 괴기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이 풍경이 실경이 아닌 상상의 파생물이란 단서를 주기 위해서이다. 하지훈은 리얼리즘 계열의 재현된 풍경화, 그리고 그 안에 부여된 상징과 의미를 거부한다. 이런 접근은 이른바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 시대착오적인 사람, 연대기 오류)으로 불리는 1990년대 회화의 종말이란 선언 이후 나타난 역설적 움직임으로 '지금과 여기'라는 근대적 사상으로부터 벗어난 과거-현재-미래의 연대기적 질서가 무너지고 되레 과거로 회귀하려는 문화현상과 닮아있다. 이 같은 움직임을 이끈 대표적인 현대미술가는 피터 도이그, 필립 거스통 등을 들 수 있다. 하지훈 역시 위의 작가들로부터의 영향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국적, 인종, 성의 차이와 무관하게 대표적인 동시대 작가들의 영향을 받는 것은 전 지구화에 의한 보편적 문화 현상이다. 그가 제시한 가상의 풍경에서 독일과 최근 유행하는 화풍이 떠올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시대착오적 낭만주의 화풍의 이미지는 시간을 거슬러 19세기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놀드 뵈글린(Arnold Böcklin)의 심리적 뉘앙스를 풍기는 풍경의 형태로도 나타나는 듯하다. 나는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왜 주변의 풍경은 보이지 않나요?"라고. 그는 현재의 상태도 나중에 작업으로 나타날 것이라 답했다. 시대착오적인 현상은 단순히 쓰여진 역사 속에서만 진행되지 않고 개인의 삶 속에서도 발현되는 것이란 사실을 그는 내게 알려 주었다.
하지훈_2trees_캔버스에 유채_146×112cm_2012
하지훈_Individual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15×150cm_2011
하지훈_Forest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2

그럼에도 약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서구 예술가들의 조형적 실험과 신선한 스타일이 등장하는 데에는 축적된 미술사 연구와 그 계보 안에서 그들의 시도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작업은 나름의 논리와 담론화에 의해 설득력을 보장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비서구권 작가들이 서구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작업으로 발전시키는 데에는 틀림없이 더 많은 고민과 이 고민을 뒷받침할 이론적 배후가 필요하다. 하지훈은 이 같은 한계를 잘 알고 있는 작가처럼 보였다. 한국의 현대미술에서 풍경은 특히 리얼리티라는 사상적 관성 속에 얽매여 있었다. 초기 민중미술도 그러하였고 진경산수와 같은 한국화의 개념 또한 실재와 재현의 관계를 사회주의적 사상에 연결 짓는 경우가 잦은 게 사실이었다. 최근 젊은 작가들은 가상과 실재 사이의 양극에서 방황 중이다. 한국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만큼 이를 거부하는 세계적 보편성의 미술을 좇는 부류도 많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하지훈_Es Trenc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32×162cm_2012
하지훈_Individual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0×70cm_2012 하지훈_Individual 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70×70cm_2010

하지훈은 작업 노트에서 자신의 기억을 반영하는 이미지로 조합된 풍경은 실제 자연보다 더 명확하게 자연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자연은 풍경이 아니다. 풍경은 자연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을 드러낼 때 비로소 나타난다. 즉 풍경은 해석된 자연임을 지시한다. 그리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원이나 공원은 해석된 자연을 인공적으로 배치한 이상향의 표본과 같다. 정원의 스타일이나 질서가 시대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면 하지훈의 풍경화 이면에는 어떠한 세계가 숨어 있을까? 작가는 자신의 풍경은 다른 공기와의 충돌에 의해 생성된 기이한 생명체라고 설정한다. "요새" 연작이나 "개체적 풍경" 연작 모두 동화적 세계를 반영하는 일종의 연극적 상태, 비현실적 실재를 재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하지훈이 고민해야 할 것은 그의 몽환적인 풍경이 기억의 집합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자연과 문명, 인공과 자연, 실재와 가상 등 세계를 구성하는 바탕으로 확대되기를 바란다.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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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unch Pad


김원화展 / KIMWONHWA / 金元禾 / mixed media   2012_0921 ▶ 2012_1014 / 월요일 휴관


김원화_Priapis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306i | 김원화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Kumho Young Artist 2012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B1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김원화는 현대사회의 건축, 우주공학 등에 대한 천착과 그 사회학적 결과들에 집중해서, 이들을 은유적으로 풍자해온 작업들을 선보여왔다. 김원화는 작가 현창민과 함께「김과현」이라는 듀오 그룹으로 협업이나 공동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고, 각자 개인 작업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회화를 전공했지만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뉴미디어와 설치작업들을 주로 보여왔다.「김과현」의 작업은 두 작가가 공감해온 현대도시의 초고층빌딩과 광장의 모뉴먼트, 그리고 바나나맛 우유가 내포하고 있는 한국현대사의 이면들을 자신들의 서사와 접합해서 관객들에게 위트있는 작업으로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 이러한 듀오 활동의 맥락과 함께 김원화는 특히 현재의 한국 사회의 도심개발, 정책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더욱 구체한 프로젝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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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most Home






이종건展 / LEEJONGGEON / 李宗建 / sculpture.installation 2012_0921 ▶ 2012_1014 / 월요일 휴관




이종건_A Room of a Room_혼합재료, 벽에 프린트_가변크기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804f | 이종건 개인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Kumho Young Artist 2012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3층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이종건 작가는 해외체류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이질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역사적 건축물이나 기념비들이 본래의 장소로부터 이탈하였을 때 발생하는 문화적 의미의 상실에 주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유학을 위해 2008년부터 미국 동북부 지역에 머물면서, 작가는 주거 공간에서부터 공공장소의 기념비까지 다양한 건축물과 양식(style)들이 미국이 아닌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지어졌음을 인지하고, 문화적 이동의 경험을 담고자 건축물과 건축구조, 혹은 문양 등을 조각이나 설치작품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뉴잉글랜드 콜로니얼 양식의 주거 공간의 일부분을 재현한다거나 그리스 기둥의양식을 차용하고, 뉴잉글랜드 지역의 버려진 집에서 수거한 앤틱 마룻바닥에 페르시안 카페트 문양을 새기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장소나 문맥으로부터 이전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양식(style)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이종건_A Stage_포플러, 참나무, 합판, 석고_100×100×20cm
이종건_Bridge of Paradise_앤틱 하드우드 마루에 새김_8×274×243cm
이종건_Bridge of Paradise_앤틱 하드우드 마루에 새김_8×274×243cm_부분
이종건_Diary_석고, 바닥에 프린팅_38×38×29cm
이종건_notes from in between 01
이종건_notes from in between 02

이번 전시『Almost Home』은 집이라는 주거공간과 작가 본인의 내밀한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면서, 크게 두개의 공간으로 나눠 구성된다. 그리스 기둥의 일부를 제작하여 표면에 초등학교 때 일기내용을 조각하고 종이에 찍어낸 작업「Diary」는 어렸을 적 미국에서 거주 후 한국에 돌아와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미국 뉴욕에서 살던 집의 벽면을 전시장 한쪽 벽면에 롤러를 굴려 컬러로 새긴 작업은 거주지에 대한 기억과 향수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고백을 행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전시장 중앙에 놓인「Bridge of Paradise」작업은 앤틱 마룻바닥 위에 17세기 페르시안 카페트의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정원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뉴잉글랜드 콜로니얼 양식의 주거 공간의 일부분이자 건축적 요소들 예를 들면 계단, 탁자 반 토막, 벽 모서리 등이 전시장에 재현된다. 공간의 극히 일부분만 재현함으로써 본래의 공간을 연상시키는 방식이나 종이나 벽면 위에 문양과 글씨를 새기는 '스탬프' 형식은 모두 완벽하고 확실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기억에 의해 재편집된 이미지이자, 원래의 문화적의 의미와 상징을 잃어버린 공간으로 상정된다. 이는 작업의 과정에서 기둥, 창문, 마룻바닥 등 건축적 요소들은 그 기능과 용도를 상실되며, 결과적으로 각각의 작업들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분리된 공간에 대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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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 Valeurs Personnelles






이호섭展 / YIHOSEOP / 李昊燮 / painting 2012_1001 ▶ 2012_1023 / 일요일 휴관




이호섭_LOV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9



초대일시 / 2012_1006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Les Valeurs Personnelles ● 작가 이호섭에게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 혹시 생각해둔 제목이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 생각해둔 건 'Personal Value'였는데", "정해주시는 대로 하려고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죠." 2통의 문자메시지 답장이 연달아왔다. personal value, 사적인 의미, 개별가치, 몸소 체험한 개인적인 의미라. 소통과 통섭, 융합이 21세기 이 시대에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지금 말이다. 속으로 "이 양반!"하는 순간, 스치는 마그리뜨의 작품 하나가 2001년 이호섭의 작업실을 처음 방문했던 당시의 작업들과 겹쳐지며 지난 십여년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평행 공간을 그리며 지나간다. ● Les Valeurs Personnelles. 작가 이호섭이 언급한 제목의 불어식 표기로, 르네 마그리뜨의 1952년작이다. 카펫이 깔린 나무 마룻바닥 왼쪽 한 켠에 일인용 침대와 오른쪽 한 켠에는 거울달린 옷장이 놓인 누군가의 방, 지극히 사적인 일상공간이다. 화면 중앙 전면에 목이 긴 청색 유리잔과 그 양옆으로 알약과 성냥개비, 침대 위에 세워 놓인 빗과 옷장 위의 솔 등 뜬금없는 조합이긴 하지만 그 형태와 질감과 문양까지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특정대상을 지시함이 분명한 형상들이다. 오히려 확대된 크기로 방안 가득 채운 개별사물들의 형상은 지극히 사적인 의미를 지닌 사물들로 채워진 침실을 구성한다. 그림은 지극히 사적인 일상공간이자 동시에 누군가를 알 수 없는 익명의 공간이다. ● 2001년 기획전시 준비로 처음 이호섭의 작업실을 찾았던 당시, 그는 그리드 분할된 배경을 바탕으로 몇몇 개별형상들을 조합한 작업에 한창이었다. 해와 달, 별, 하늘의 구름, 커튼 달린 창문, 피아노건반, 시계탑, 과녁과 화살표, 물고기와 고뇌하는 듯한 인간 남녀 등. 뚜렷한 윤곽과 과감하고 강렬한 색면으로 깔끔하게 처리한 형상들은 윤곽선을 따라 음영을 표현하거나 자연광이나 인공조명을 연상시키는 방사형 형상들과 더불어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하였다. 사실적인 묘사보다 대상을 더욱 명료하게 지시하고 있음에도, 개별형상들의 수수께끼 같은 조합은 명확한 의미파악을 명분으로 그에게 설명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사적인 개별사물들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도, 빤히 다 아는 대상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어야만 하는 상황이 조금은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 작가 이호섭은 학부부터 당시 대학원 1차 학기까지의 작업들을 포트폴리오 앨범을 펼치며 일일이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전시 준비하는 동안 마음껏 봐도 된다며 작가노트까지 끼워 건네준 앨범 속 작업들은 가정사와 고등학교. 대학교 교우관계, 군대이야기, 좋아하는 무협지며 만화, 비틀즈와 마이클 잭슨 등 자신의 취향까지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사적인 시공간을 압축한 타임캡슐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특정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작가가 몸소 체험한 동시대인들의 현재적 과거 혹은 또래문화의 아이콘으로서 아련한 기억과 향수, 고독 등의 멜랑콜리한 감정과 정서를 자극했다.
이호섭_APRI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9
이호섭_One Day-The Ban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3cm_2012

그의 작업스타일은 그 형태와 질감과 문양까지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끊임없는 그림의 역전과 모호한 의미의 여운을 남기는 마그리뜨를 연상케 한다. 앞서 소개한 마그리뜨의 그림은 배경과 옷장 거울에 비친 하늘과 구름, 그리고 창문과 커튼은 그림이 실내인지 실외인지 아리송하게 하며, 천정의 금색 액자틀은 순간 우리가 보는 그림이 액자 안인지 밖인지 마저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그림의 역전은 작가 이호섭에게서는 바탕면과 형상면의 관계에서 나타나며 모호한 감정들을 유발한다. 그는 2004년과 2006년 선보인 개인전『Rising Memory』과『Figurative/Unfigurative Images』에서 기존의 그리드를 좀 더 치밀하게 구획하여 반복하는 기하학적인 추상 공간과 내면의 기억과 감정의 형상 공간을 더욱 섬세하게 결합시켰다. 그리고 기하학적 추상공간을 진하고 선명하게 하고, 형상공간의 채도를 떨어뜨려 바탕면과 형상면의 역전으로 조화로운 색감과 리드미컬한 운동감을 전면에 내세웠다. 현재적 감흥에서 출발하여 아련히 빛바랜 추억으로의 진입, 그리고 이 둘이 상호교차하며 결합된 화면은 과거와 현재, 그림과 기호화된 이미지 실재, 작가와 관람자의 시공간을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그림은 관람자는 감각적이면서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울림들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생동감 있는 현재를 체험하게 했다. 즉 작가의 사적인 개별 형상들을 동시대인들이 몸소 체험한 일상이자 익명적 기억으로서, 정서적인 울림을 통해 작가와 관람자가 상호 교감하는 대면을 연출하였다. ● 한편, 이러한 대면은 작가 이호섭에게 현재라는 시간에 대한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공간적 인식과 이들 간의 갈등과 충돌, 교감과 조화라는 동시대인들의 사회적 고민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동년배, 혹은 선후배 작가들이 이러저러한 명목으로 새로운 방식의 사회 참여적 작업과 전시방식들을 시도하는 듯했다. 매스미디어나 영상, 설치, 퍼포먼스 등을 이용한 소위 컷팅-엣지한 형태로 소위 전문미술계에서 회자되는 작업들, 극사실과 팝의 유행과 일명 뜨거운 추상 등 미술시장에서 선호되는 작업들로 사회를 향한 소통과 발언을 표방하면서 말이다. 작가 이호섭은 다양한 시류와 시도들 속에서 참으로 미련하고 답답하리만치 형과 색, 그리고 이들의 조화로운 그림에 대한 신념을 우직하게 지켜왔고, 2009년 개인전에서 수직, 수평의 색 스트라이프와 나란히 색조합을 공유하는 개별형상들로 동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이야기했다. 작가에게 사적인 의미를 갖는 개별형상들은 점차 전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들고, 그 종류와 수, 형태도 점차 단순하고 정련되어지면서, 익명의 아이콘화 되었다. 하지만 훨씬 절제된 집중된 배치는 오히려 전체 색 스트라이프의 흐름 안에 다양한 뉘앙스와 진동, 울림들을 파생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군가 마그리뜨에게 그림의 의미를 묻자 "당신은 저보다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라는 대답처럼 관습화된 의미 외에 다양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바로 그 지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호섭의 'Personal Value'는 자신의 개인적인 의미들을 점차 배제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유행의 빠른 스침속에서 익명화된 고독한 인간과 몸소 느끼고 사유하는 주체로서 개별존재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호섭_One Day-The Ban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62cm_2010
이호섭_Aur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12
이호섭_Aura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12

2001년부터 딱 한 십이지(十二支) 간의 시간이다. 처음 이호섭의 작업실을 방문했을 즈음, 그는 "저는 마그리뜨처럼 작업하고 싶습니다. 제 집에서라도 의복을 갖추고 나인 투 파이브(am9~pm5) 하루 8시간씩 그렇게 작업하고 싶습니다." 라며 예술가로서 자신의 로망을 밝혔다. 주체할 수 없는 끼와 개성를 무한히 발산하는 자유로운 괴짜 영혼들, 작업시간과 양이 예술성을 담보하는 양 자랑처럼 떠들어대는 이들, 이러나저러나 별 세계에 사는 사회부적응아를 당연한 숙명처럼 여기는 예술지망생 동기들 사이에서, 평범한 생활인을 작가로서 자신의 예술가상으로 당당히 밝히던 그가 오히려 신기했다. ● 작가 이호섭은 여전히 "그림쟁이가 뭐 있습니까? 그림 그려야죠."라며 캔버스와 손맛을 고집하며, "그림이 뭐 있습니까? 예쁘면 되지. 내 보기 좋고, 같이 놓았을 때 서로 잘 어울리면 되지요."라고 말한다. 한결같이 "저 숨기는 거 하나도 없어요. 저 다 아시잖아요. 알아서 하세요." 하고는 능청스럽게 자신의 뜻을 은근히 관철하는 작가 이호섭의 스타일이다. 'Personal Value' 사적인 의미와 가치, 신념을 지칭하는 제목과 그림들로 작가이기 전에 생활인으로서 몸소 체험한 내 이야기를 이야기할까 하는데요.'라며 툭 던지고는 또 그런다. 알아서 하시라고 말이다. 차이와 다양성, 소통과 통섭, 융합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디지털이미지시대, 그의 뚝심있는 형상사유의 시간궤적들의 조화가 딱 한 간지나는 그림이다. ■ 조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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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






유경화展 / YUKYUNGHWA / 柳?和 / painting 2012_1001 ▶ 2012_1031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40×4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유경화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11:50pm

갤러리 현 Gallery Hyun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5번지 Tel. +82.2.722.0701 www.galleryhyun.com




태양 가까이 우뚝 선 소나무는 보색대비로 자신을 뽐내고 있다.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40×40cm_2012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53.2×72cm_2012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50×73cm_2012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45.5×53cm_2012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27.2×35cm_2012
유경화_소나무는 아름답고 향기롭다_장지에 채색_45.5×53cm_2012

노랗게 표현된 꽃가루와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를 나타내고 작가의 눈에 비춰진 소나무는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롭게 느껴진다. ■ 유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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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rfect Repose 불완전한 휴식






박종성展 / PARKJONGSEONG / 朴鍾聲 / photography 2012_1003 ▶ 2012_1009




박종성_Imperfect Repose No.1_파인아트페이퍼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2.5×40inch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종성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0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경인미술관 Kyung-In Museum of Fine Art 서울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 제6전시관 Tel. +82.2.733.4448 www.kyunginart.co.kr






나무는 편안함의 상징처럼 사용된다. 그래서인지 나무를 소재로 작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떠오른 단어는 '휴식'이었다. '그래 편안한 나무 사진을 찍어보자...' 작업은 그렇게 큰 고민 없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내가 모아온 나의 나무들에는 편안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편안함을 찍으려고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골라놓은 어떤 사진들에는 불편함만 가득했다. 사진들을 띄워놓은 모니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 이게 나의 휴식이지...' ● 나는 직장인이다. 새벽 2시에 집에 들어와도 새벽 6시에 다시 출근하는 직장인이다. 잠들기 전에는 내일아침 알람소리를 못 들을까 걱정하고, 일 년 만에 떠나는 가족여행 전날에는 행여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못 받을까 핸드폰 충전기부터 챙기는 직장인이다. 휴가 첫날에는 나 없이 회사가 잘 돌아갈까를 걱정하고 휴가 마지막 날에는 나 없이도 회사가 너무 잘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1+1행사처럼 휴식과 함께 따라다닌다. 서글프지만 이것이 나의 휴식이다. ● '휴식'이라고 적어놓은 전시제목을 멍하니 바라보다 앞에 단어 하나를 더하고는 또 쓴웃음 짓는다. '불완전한 휴식' ■ 박종성

박종성_Imperfect Repose No.5_파인아트페이퍼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2.5×40inch_2012
박종성_Imperfect Repose No.7_파인아트페이퍼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2.5×40inch_2012

박종성의 첫 개인전『Fear in My Mind』가 물을 대상으로 삼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소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섬세한 계조(gradation)를 통해 달성한 공감각, 즉 눈을 통해 더듬어지는 촉감(texture)이었다. 또한 이 '물 사진'은 작가 스스로 시간을 제어, 조절함으로써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의 형태를 추상적(이면서 무서운) 이미지로 그려낸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피사체로 삼은 나무는 고정된 자리에 서서 흐르는 시간을 감내한다는 식의 통념과 더불어 누구라도 나무로서 인지할 뚜렷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측면에서 물과는 반대 지점에 있다. 사진을 하나씩 살피며 조형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자 했던 글의 방향을 바꿀 필요를 느낀 것은 포트폴리오와 함께 전해 온 몇 줄의 글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직장인 박씨'의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작업 노트'로 돌아가자. "휴가 첫날에는 나 없이 회사가 잘 돌아갈까를 걱정하고 휴가 마지막 날에는 나 없이도 회사가 너무 잘 돌아갈까 봐 걱정이다." ● 이러한 현실은 올해 화제가 되었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가 이야기한 성과사회의 일면을 언뜻 떠올리게 한다. 타자의 강요가 없어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강제하게 되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혹은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게 되는 성과주체"의 서글픈 현실. 어쨌거나 그는 평소에는 너무 분주해서 눈치채지 못했던 자신의 삶을 휴가지에서 반추하게 되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전시의 제목인 '불완전한 휴식'은 이러한 깨달음에서 연유하는데 그의 고백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사진 중 어지럽게 겹쳐진 나무로 앞이 꽉 막혀버린,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숲의 모습과도 중첩된다. 나무하면 흔히 떠올리는 '휴식'의 느낌과는 한발 떨어져서 오히려 평온해야 할 숲 속 사진에서 어떤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휴가 기간 중에 자신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본 순간, 마치 휴식을 취하러 들어간 숲 속 깊은 곳의 미로와 마주한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박종성_Imperfect Repose No.20_파인아트페이퍼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2.5×40inch_2012
박종성_Imperfect Repose No.22_파인아트페이퍼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8×21inch_2012

최근 나무와 계곡을 찾아 산으로 휴식을 즐기는 등산이 큰 붐이 되고 있다. 경쟁적으로 등산복을 사고 주말이면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고 느끼는 강박적 현실. 일찍이 니체는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사색적인 삶'을 위해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무 사진 앞에서 내부에 내재된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일깨워 봄 직도 하다. '물' 연작이 셔터와 조리개의 조작과 같은 기술적 장치를 통해 작가가 절취한 시간을 제공했다면, 이번 '나무'의 경우는 사진을 마주하는 이가 몸소 '잠깐 멈춤(pause)' 버튼을 눌러 시간을 제어해 볼 차례다. ■ 최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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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Bridge






박영택 기획展 2부 2012_1003 ▶ 2012_1023 / 월요일 휴관




김진관 호두와 노란콩_한지에 채색_57.5×43.5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3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진관_백진숙_성경희_신하순_양유연_정세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릿지갤러리 Bridg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82.2.722.5127 www.bridge149.com




회화는 종이와 캔버스의 표면, 피부위에서 서식한다. 사진 역시 인화지라는 물질, 피부위에 도포된 이미지다. 그곳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지시하는 한편 관념적인 공간이 떠오르고 소멸되기도 한다. 따라서 회화의 표면은 기이한 장소다. 서구전통회화가 그 내부로 하염없이 들어갔다면 모더니즘은 평면성이라는 물리적 조건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했다. 반면 오늘날 회화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표면'에 주목하는 것 같다. 그 표면성은 모더니즘과는 조금 달리 안과 밖의 경계에서 간절하게 생을 영위한다고나 할까. 그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사고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표피성, 껍질에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새삼 그 표면을 거점 삼아 새로운 회화, 회화에 대한 회화, 아니 회화를 넘어서는 회화(메타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회임하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도 보게 된다.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표면에 대한 독자한 인식과 상상력 및 해석, 그리고 그것을 외화 하는 붓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표면에 부려놓는 '감각의 구현'에 의해 그런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미술이란 결국 감각이 구현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부단히 환생하고 새로이 호명된다. 개별 작가들의 몸과 감각에 의해 표면과 물질이 순간순간 갱신되고 또 다른 생을 부여받으면서 마구 거듭나는 것이다. 새삼 오늘날 회화는 이제 저마다 그 표면에 저마다의 방법론, 매너로써 기술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라는 게 단지 기발하고 낯선 재료의 사용이나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를 넘어서는 이질적 재료들의 접목으로 전개되는 이전의 방법론(70, 80년대 미술계에서는 흔히 '새로운 방법론'이란 제목의 전시들이 곧잘 이루어졌었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번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 많은 작가들이 그림의 내용, 주제보다는 방법론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다소 막연한 언어와 현학적인 개념을 빼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붓질을 할 것인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망막 중심적인 미술, 이미지 작업이 아니라 몸 전체가 관여하고 감각이 편승하며 촉각적이고 통감각적인 것, 그러니까 작가의 몸이 느끼는 사물의 피부질감, 그 감각을 붓질을 통해, 이미지를 통해 온전히 전달하려는 데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작업은 결국 작가들의 감각이 세계를 보는 프레임, 표현하는 방법론, 미술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매너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백진숙_空園(공원)_장지에 먹과 분채_64×94cm_2011
성경희_친숙한 경험들_장지에 혼합재료_85×69cm_2010

생각해보면 미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물질을 가공해서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마술과도 같다. 자신이 다루는 물질의 바닥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자, 그 물질에 마음과 혼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다. 물질은 한 작가의 육체와 정신에 의해 변형되고 변질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만남과 접촉은 불가사의하고 기이하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의 일상적인 사물이나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엇이라고 호명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명명命名의 체계를 흔들고 교란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존재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 낯설음은 기존의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습화된 안목에 회의를 갖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어쨌든 그것은 그들이 오랜 시간 다루고 애무한 연장과 물질, 감각의 차이를 통해 발화된다. 더불어 작가에게 있어 손은 온 몸과 감각의 총화이자 그것이 전적으로 외화 되어 나오는 마지막 통로에 해당한다. 따라서 손은 단순한 기관이나 특정한 육체의 한 부위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 손이란 한 작가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핵심이다. 손이야말로 작가의 얼굴이고 몸이다. 작가들은 그 손으로 특정 물질을 애무하고 그것을 현란하게 변환시키고 성형하며 또 다른 존재로 환생시키는가 하면 이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손/지문으로 물질을 소진시키는 일을 반복한다. 미술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그것은 한 작가의 손으로 인해서이다. 감각으로 길들여지고 결국 그 감각이 빠져나와야 하는 마지막 출구 같은 손이다. 영상과 테크놀로지의 발달, 다양한 매체와 현란한 기술적 수단들이 압도되어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손의 노동과 감각이 존재하는 한 미술은 죽을 수 없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 작품을 본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육체, 몸의 놀림, 손의 흔적, 감각의 총화를 만나는 일이다. 한 개인의 몸과 감각이 물질과 연장의 힘을 빌어 응고된 결정이 결국 미술작품인 것이다. 미술이란 그 손맛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그것으로 마감되는 장르라고 말해볼 수 있다. 따라서 작가들의 손은 몽상하는 손, 꿈꾸는 손, 노동하는 손이자 물질과 뒤섞여 일체가 되는, 무척이나 감각적인 손이다.
신하순 새해를 맞으며_장지에 수묵담채_145×76cm_2010

그러니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외부 세계/대상과 작가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림은 주어진 매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매체를 작가들이 어떻게 대하고 점유해나가며 해석하느냐라는 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그간 다소 폄하되거나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재 우리 미술계에서 저마다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방법론들이 없는 게 아니다. 정작 아쉬운 것은 미술에 대한 개별적인 사유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그 사유에 따른 방법론의 모색이나 창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생김새가 다르듯 다른 몸과 감각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최근 한국 미술은 일종의 공예이고 인테리어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작가들마다 회화를 대하는 자신만의 사유, 그리고 그에 기반 해 자기 식으로 그림을 뜯어 먹는 방법론, 매너에 대한 독자성이 요구된다. 그만의 품성, 사유, 몸놀림과 재료 해석과 고도의 연마가 물씬 거리는 그림말이다.
양유연_제 3자의 공간_장지에 채색_100×100cm_2008
정세원_안아주세요_장지에 먹, 담채, 색연필_141×72cm_2012

인사동에 자리한 브릿지 갤러리가 개관1주년을 맞이했다. 그 1년 동안 이 갤러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 본 작가 18명을 한 자리에 모았다. 회화와 사진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다. 평면, 표면에 천착하면서 기존 미술계의 관습적인 언어, 획일적 감각과 방법론에 저장잡히지 않으려는 작가들을 선별해본 전시다. 특정 주제로 강제하거나 동일한 매너로 수렴하는 대신 동시대 현대미술이 보여주는 상투적 이미지와 클리세에서 벗어나는 통로를 찾는, 그 '다리'를 건너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을 생각해본 전시다. 김진관, 백진숙은 자연과 생명체에 대한 미시적이고 탐닉적인 시각을 보여주며 신하순, 양유연, 정세원의 일상에서 접하는 자신의 심리적인 서사와 수묵채색과 선염이 맛을 극화하는 동양화 작업, 그리고 자발적인 모필의 선이 이루는 추상의 세계를 선보이는 성경희의 수묵담채가 전시된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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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錄精神 - 현실을 직시하다




최현석展 / CHOIHYUNSEOK / 崔玹碩 / painting 2012_1004 ▶ 2012_1017 / 월요일 휴관



최현석_임진년 현대미술관화재도 壬辰年 現代美術館火災圖_마(麻)에 수간채색_131×97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신(新) 풍속화의 탄생 - 1. 궁중 기록화의 계승 ● 조선시대는 왕실의 연회와 행사의 모습을 궁중기록화로 남기고 있다. 궁중 기록화는 궁중 화원들이 그린 그림으로써, 절차와 형식을 그림과 글씨로 기록한 의궤도(儀軌圖)와 그림으로 남긴 궁중행사도가 있다. 이러한 궁중 기록화는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안녕, 치세의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국가 행사의 기록이며, 사진이 없던 시대의 엄격한 기록으로서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당대 최고 왕실의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고도로 성숙한 필(筆), 왕실의 건축, 의복, 장엄 등의 풍속을 보여주는 격조 높은 풍격의 풍속화라 하겠다. 따라서 기록성, 예술성, 역사성을 모두 확보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격조 높은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것이다. 최현석은 이러한 궁중 기록화의 내용, 구도, 상징을 밀도 높게 주목하는 작가이다. 그는 현대의 사건과 풍속들을 기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궁중 기록화 가운데 의궤는 왕실의 역사적 기록들을 가장 엄정한 법칙과 절차로 그려내는 그림으로, 작가는 의궤도가 가진 구도와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무자년 엠비산성촛불시위도, 2010」,「무자년 광화문행렬도, 2010」,「신묘년 외규장각의궤환원도, 2011」,「조(弔) 경인년 천안함침몰도, 2010」,「신묘년 독도수호도, 2011」등과 같은 일련의 작품들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장소성과 역사성을 보여주는 현대 의궤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의궤도가 가진 부감법(俯瞰法), 몇 개의 이야기와 행위를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구성법, 스토리의 역사성, 의궤를 비롯한 궁중 회화의 모티브의 직접적 사용과 같은 회화적 장치를 볼 수 있다.
최현석_노들섬한강대교 정체도 老乭島 漢江大橋 停滯圖_마(麻)에 수간채색_130×112cm_2012
최현석_독도수호도 獨島守護圖_마(麻)에 수간채색_61×73cm_2011

2. 부감법(俯瞰法)과 고전의 몇 가지 방식 ● 작가는 대표적인 동양 회화의 구도법이라 할 수 있는, 상공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을 적극 사용하고 있다. 부감법은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그 행위의 범위를 극적으로 화면 내에 끌어들이는 구도법으로서, 하나의 스토리가 아닌 여러 개의 이야기를 구현할 수 있는 정신적인 구도법이라 하겠다. 사실, 이러한 구도법은 시각이 정신적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구도법이며, 고정된 화면에서 움직이는 극적인 화면으로의 변환, 영화와 같은 연속적인 화면을 구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최현석이 연출하는 화면에는 스펙타클한 사건의 확장된 구성과 동시적이고 순환적인 화면이 포착된다. 그 속에서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들과 사건들이 새로운 역사적 인식과 사고로서 드러나고 있다. 사실, 그의 고전에 관한 계승과 해석은 그가 표현하는 간략하게 도안화 된 산의 형태, 구름, 반달형의 반복적인 물결무늬,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형태에서 볼 수 있다. 이들은 국왕의 치세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일월오악병(日月五嶽屛)과 같은 궁중 장식화의 모티브들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이들의 도상(圖像)은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이미지들로서, 길(吉)과 복(福)을 상징하고 염원하는, 오래되고 근원적인 상징인 것이다. 이로써 최현석의 작품들이 더욱 고전의 직접적 계승을 확인하게 되며, 현재의 시간을 강력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으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제왕(帝王)의 장식화에서 느끼는 힘 있고 웅혼한 아우라의 감동까지 동반하고 있다. 이는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과 도상뿐만 아니라 안료의 배합으로 정재 시킨 마본(麻本)에서도 간취된다. 마본은 올이 굵어, 불교회화와 같은 대형화면의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도상들을 거침없이 그려나가기 위해 조선후기에 주로 사용된 바탕이다. 마의 굵은 올의 거침과 안료의 스며듬과 번짐이 내적으로 숙성된 고전의 시간성을 더해주고 있다. 그 속에 펼쳐지는 군중과 사물과 사건들은 고전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다시 역사로, 사건에서 기록으로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최현석_신묘년 구제역매장도 辛卯年 口蹄疫埋葬圖_마(麻)에 수간채색_91×73cm_2011
최현석_신묘년 구제역순환도 辛卯年 口蹄疫循環圖_마(麻)에 수간채색_194×112cm_2011

3. 역사 그리고 정체성: 풍속화의 탄생 ● 어느 미술사학자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함께 과거의 미술사적 양식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데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현대 미술에서도 과거의 민화를 순수조형으로써 대거 차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고전으로의 환기와 역사적 기록은 순수조형으로서의 차용을 넘어서는 작가가 궁중미술문화의 예술적 완성도와 성취에 관한 감동, 한국 미술문화가 가진 내용의 본질적 성격에 관한 고민과 섬세한 역사적 음미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전이 가진 역사적 범주와 내용, 상징과 의미들을 통찰하고, 깊이 있는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작품행태가 고전의 계승과 변모에 관한 하나의 충분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사실 작가의 역사적 기록성은 궁중 기록화가 가진 화가의 가치판단이 제거된 현상으로서의 역사화와는 구별된다. 이는 사진이 없는 시대의 기록화와 순수한 예술로서 지위를 확보한 현대미술 속에서의 기록화와의 차이인 것이다. 이것이 작가의 작품을 독창적이고 생명력 있는 화면으로 구별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건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으로서의 화가의 눈이 개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역사적 사건의 비판적 기술은 공간상에 벌어지는 역설적이고 풍자적인 이야기의 서술로 끌고 나간다. 즉, 새로운 풍속화로서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경인년 쥐십이도, 2011」의 정치권력의 모순,「노들섬과 한강대교 정체도, 2012」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의 모순된 정체적 구도,「이판사판개판똥판, 2012」의 욕망으로 뒤덮인 인간 군상들의 풍자들에서 비판적 역사인식과 확장된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속에는 인간군집들의 우의적이고 풍자적인 모습들이 가시화 된다. 이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작가의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함축되어 있다. 역사는 자아가 존재하는 위치와 가치, 정체성에 관한 뚜렷한 인식 위에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자신이 위치한 한국사회에서의 정체성, 작가로서의 정체성, 한국화의 정체성에 관한 고민들을 제시하고 확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와 역사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비판적 시각으로서의 역사 바라보기, 문화 바라보기의 시도는 세계에 관한 탐구의 시각을 확립해 나가고 자신의 자아성찰과 정체성을 견고하게 확립해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시도인 것이다. 이 시대의 사건들이 작가의 시각에서 새로운 기록으로 정립되며, 그 속에서 작가가 시도하는 극적이며 연속적으로 연출되는 역사적 비판의 내용들을 감지하게 된다. 또한 현재 회화의 예술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이를 위해 고민하고 탐구하는 자세로 새로운 기록화, 풍속화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최현석_이판사판개판똥판 理判事判犬判便判_마(麻)에 수간채색_65×130cm_2012

미술사학자 강관식이 조선후기의 풍속화들에 관하여 "김홍도와 이인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매우 당대적이고 시정적(市政井的)인 취향의 현실성과 사실성을 강하게 보여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역사적이고 고전적인 풍격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듯이, 작가의 작품 또한 현실성과 사실성, 고전성을 동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최현석의 작품세계는 인간의 시간이 이루어낸 사건과 이야기들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가 그려내는 새로운 풍속화들에서 역사의 재구성, 문화의 재확인 그리고 고전과 현대의 새로운 만남과 모색에 관한 변모하는 이야기들을 볼 수가 있다. (2012.9) ■ 박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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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Out




김건희展 / KIMGUNHEE / 金建希 / painting 2012_1004 ▶ 2012_1031 / 월요일 휴관



김건희_Searchligh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미디움, 목탄_130×19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205g | 김건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04_목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풀 ART SPACE POOL 서울 종로구 구기동 56-13번지 Tel. +82.2.396.4805 www.altpool.org



아트 스페이스 풀은 2012년 풀 프로덕션 다섯 번째 전시로 작가 김건희(1969년 생, 서울)의 개인전『White-Out』(10.04-10.31)을 선보인다. 전시에는 오두산전망대와 도라전망대, 임진각 평화누리, 적군묘 일대 등 파주 일대에 작업실을 둔 작가가 마주쳐 온 풍경을 다룬 신작 회화 15여점이 소개된다. 김건희의 작업은 풍경의 외관에 내제한 사회의 중층적 기호들을 보여주면서 그 이면에서 미세하게 전개되는 개인의 사적 기억과 심리적 반향들을 드러낸다. ● 지난 2010년 열렸던 개인전『Together and Apart』展에서 작가 김건희는 창 밖에 난립하는 근린시설 간판과 부동의 정적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실주의 화풍의 흑백 목탄 회화「그림」시리즈를 발표한 바 있다. 이는 작가가 집안과 밖, 바깥 현실과 가정, 집단과 개인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직시하면서도, 일상집기들의 위치가 미세하게 변해가는 화면을 반복 배열함으로써 실내에 감도는 하우스 주체들의 미세한 심리적 행위의 흔적과 밀도의 긴장을 추적하는 그림들이었다. ● 풍경의 가시적 외연과 비가시적 내연을 동시에 아우르는 작가의 작업 태도는 이번 작업에서도 유효하지만 이번 시리즈에서 작가는 상호 교차, 불일치되는 풍경의 외연, 이른바 국가주의 경계들이 다층적으로 산재한 경계선들의 난립 자체를 응시하고 있다. 파주 일대에서 그는 비대해진 영토주의와 국가주의 경계 기호들이 과잉 난립하는 풍경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전망대에 줄지어 선 망원경들, 육안으로 보이는 풍경 앞에 일렬로 설정된 포토라인들, 임진강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보듯 만든 모형 바로 옆 전망대 유리창에 비닐시트로 조악하게 표시된 북방한계선들에서 볼 것을 지시하고 볼 것만 보라고 감찰하는 이른바 시지각의 지시선, 시선의 경계선들과 마주쳤다. ● 작가는 이 무수한 경계선들이 하나같이 국가주의 서사의 기제들이라는 점 보다, 이들이 서로 '난반사'를 일으켜 보는 이들의 다양한 시선에 혼란과 피곤함을 가중시킨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각종 국가주의 경계 기호들이 과잉 중첩되면서 서로 난반사를 일으킬 때, 풍경에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의 구멍과 황망한 간극이 드러난다. 객관을 가장한 집단서사적 풍경이 이렇게 거대한 틈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공허한 충격을 받지만 어쩌면 그 공허한 간극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기억과 인상으로 풍경을 채워가는 것이다.
김건희_Photoline_캔버스에 미디움, 목탄_33×46cm, 33×41cm, 27×41cm, 27×41cm_2011
김건희_발견,시추요망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미디움, 목탄_55×46cm_2012

강요되는 시지각의 풍경의 그 공허한 간극을 개인의 기억과 인상으로 채워나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 작가의 작업 태도를 통해 작가의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KAL 858 폭파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을「54번」시리즈 (No. 54, 2012, acrylic, medium, and charcoal on canvas)에 담음으로써, 강요된 시지각의 풍경에 우선하는 개인의 기억을 역설하는가 하면, 특히「54번」시리즈 중 13번째 작품(No.54, #13, 2012, acrylic, medium, and charcoal on canvas, 259x194cm)에서는 공중에서 곧 사라질 풍선을 강요된 시지각의 풍경 속에 배치함으로써 농담적 태도를 취한다. 또한, 작가는「'발견, 시추 요망'」(2012, acrylic, medium, and charcoal on canvas, 46x55cm)에, 관리되는 시지각의 경계선들이 난반사를 일으켜 생겨난 실제 서사를 담음으로써 자기비판적 의식과 헛웃음을 동시에 일으킨다. 보는 이들의 다양한 시선에 혼란과 피곤함을 가중시킨 이 '난반사'를 대할 때 가능한 다양한 태도로서, 자기비판적임에 동시에 농담적인 태도를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혼란과 피곤함이 가중된 우리의 시야의 구제 가능성을 「Searchlight」(2012, acrylic, medium, and charcoal on canvas, 195x130cm)의 쌍둥이 격으로 배치한 작품(Searchlight, 2012, acrylic, medium, and charcoal on canvas, 55x46cm)에 담았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스스로 자기 색깔을 발광하는 객체는, 관리되는 시지각의 풍경 속에서 이미 주체적이며, 객관을 가장한 집단서사적 풍경에 대해 개인의 기억이 우선함을 주체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이상의 작품들은 서로 중첩되면서 자기비판적 시선과 농담적 시선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긴장상태를 보여주는데, 이는 또 하나의 시지각의 경계선으로 매몰될 가능성으로부터 도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김건희_54번 #1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미디움, 목탄_259×194cm_2012
김건희_서치라이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미디움, 목탄_55×46cm_2012
ⓒ 김건희_Light 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미디움, 목탄_55×46cm_2012

작가는 이번 전시제목을 White-Out 백시 白視현상이라 하였다. '눈 앞이 하얗게 된다'는 표현 그대로, 백시현상은 강력한 빛의 공격에 의해 시야를 순간적으로 상실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매체를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사건의 이름과 몇 개의 숫자 외에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하면서 명징한 현실로 도열한 파주의 적군묘처럼, 김건희의 작업에 담긴 풍경들은 공허한 공백이고 정신적 공황이면서 동시에 주체화된 기억으로 다시 짚어가는 풍경의 시작이기도 하다. ■ 김희진_최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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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 Moment of truth




신형섭_최수환 2인展 2012_1004 ▶ 2012_1030 / 월요일 휴관



신형섭_Unbreakable_수채화종이_60×80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4_목요일_05:00pm_네이처포엠 B1

주최 / 청담미술제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후 ART SPACE WHO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201호 Tel. 070.8874.4848



올 해로 22회를 맞이하는 청담미술제에 올해 개관한 아트스페이스 후 에서는『결정적 순간(Moment of truth)』기획 전시를 마련하였다. 10월4일(목) 청담동 일대 갤러리들의 오프닝을 기점으로 총 열흘에 걸쳐 이번 행사가 진행되며 아트스페이스 후에서는 10월 30일(화)까지 이번 전시가 지속된다. 이번 전시는 시각적 착시를 통한 사람들의 시각을 교란시키는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두 분의 작가는 평면 작품 및 설치 그리고 LED 설치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 중 신형섭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사실보다 더 사실적인 작품으로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하며 이 작가는 2010년 미국의 저명한 Pollock-Krasner 재단에서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현재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한국과 미국에서 다수의 전시를 개최하였다. 또한 최수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그동안의 라이트 드로잉(Light Drawing) 작품의 연작 시리즈를 발표하며 빛에 의한 형상이 우리의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 낸다. 이번 전시를 통해 두 작가의 작품이 대중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대면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코자 화이트&블랙 작품의 느낌으로 연출되어졌다. 이번 전시는 매년 개최되는 청담미술제 행사와 그 뜻을 같이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신형섭_Before math_비닐 판유리_79×79cm_2012
신형섭_Unbreakable_수채화종이_60×80cm_2012
신형섭_Before math_비닐 판유리_79×79cm_2012

이번 전시『결정적 순간』展은 사람의 시각 이미지의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자 한다. 사람의 눈으로 보는 이미지가 실제와 비 실제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계가 우리의 육안으로 식별 할 수 없는 모호함에 봉착하면 우리는 자신이 보는 것에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실제보다 더 실재 같다고 느끼는 경우 단순히 눈의 착시 현상이 아닌 진정 우리가 보는 대상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 시각의 망각화는 실제보다 비실제적 이미지가 더 사실적으로 드러날 때 자신이 보고 있는 허상이 실제 보다 더욱 극명하게 자신의 뇌리에 각인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의 착시적 현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의 시신경 체계를 흩트릴 수 있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하였다. 인공의 빛(LED)에 의해 이미지의 형상이 사진과 같이 표현 된 최수환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테크닉을 보여주며 그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 실로 엄청난 과정을 반복 재생해야 한다. 또한 깨어진 유리 조각의 파편들이 형상화 되어 보여진 신형섭 작가의 작품은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실제가 아님에도 그 작품을 마주하는 대상들은 누구나 깨어진 유리조각 이라고 착각하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 이번 전시에서는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이 과연 실제인지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의 시각적 판타지인지 살펴보고자 하며 이러한 판타지적 요소를 담은 최고의 작품만을 엄선하여 그 정수만을 선보이고자 한다. ■ 이진영
최수환_Emptiness_bw_LED 플렉시글라스_124×124×3cm_2012
최수환_Emptiness_red eye_LED 플렉시글라스_103×103×3cm_2010
최수환_Emptiness_golden frame_LED 플렉시글라스_72×85×9cm_2007
최수환_Emptiness_FMB_LED 플렉시글라스_84×84×3cm_2011


나의 작품(light drawing)은 손으로 직접 검정색 아크릴판(plexi-glass)이나 종이(museum board)에 수천개의 구멍들을 뚫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구멍들은 공간(space)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빔(emptiness)을 의미한다. 빛(형광등 혹은 LED), 아크릴 판(plexi-glass), 종이(museum board)등으로 이루어져있는 나의 작품에서 빛(light)과 수천 개의 구멍들은 빔(emptiness)을 의미하는 동시에 형상(image)을 나타낸다. 관객들의 움직임과 빛의 어른거림 그리고 구멍의 다양한 크기들로 인해 평평한 작품표면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신비한 시각적 현상을 관객들은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관객들은 내 작품에서 사과(apple)의 형상을 보았다고 믿을 수 있으나 사실은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천 개의 구멍들을 통해 비추어지는 빛들만이 존재한다. 관객들의 사고는 실제하지도 않는 본질에 대해 너무나도 강요당하거나 혹은 고정되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빛(light)은 이러한 모순성에 있어 가장 실제적인(substantial) 동시에 가장 비실제적인(non-substantial) 공간(space)이다. 나의 작품은 관객들을 차분하게 혹은 평온하게 만드는 명상적 미(meditative aesthetic)를 그리고 관객들 자신의 의식작용, 시각적 환영을 형성하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실재(real)라고 여기고 있는 실제공간의 빔(emptiness)에 대한 인식의 견고성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수반한다. ● 최근 작품들을 통해 미의 물질성 보다는 본질의 실체성을 다루는 것에 더욱 주목하는 나는 인공의 빛(artificial light)을 통해 보여지는 사진같은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빛은 우리들에게 형상(image)을 파악하게 함과 동시에 빔(emptiness)을 볼 수 있게 한다. ■ 최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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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감六感_숲속의 산책






유중창작스튜디오 제1기 입주 작가 보고展 2012_1004 ▶ 2012_1031 / 일,공휴일 휴관




김은영_이어가다_동선, 용접_200×200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유중아트센터, 유중갤러리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 유중빌딩 3층 Tel. +82.2.599.7709 www.ujungartcenter.com




유중아트센터 3층에 위치한 유중갤러리 전시장에서는 오는 10월 4일부터 31일까지 유중창작스튜디오 제1기 입주 작가 보고전인 『육감六感_숲속의 산책』展을 개최한다. 전시 제목인 '육감'은 전시에 참여한 여섯 작가들의 각기 다른 형태의 조형적 감성과 시각적 언어를 의미한다. 부제인 '숲속의 산책'은 녹지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서초구의 지역적 특성을 살린 것으로서, 도심 속 힐링 스페이스인 유중아트센터가 마련한 이번 전시를 통해 전시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마치 숲속을 산책하는 듯한 심적 평화와 안정을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판화, 서양화, 동양화, 조각, 영상 등 각기 다른 조형 매체를 통해 작업하지만, 이들의 작품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치유'와 '공감'이다.
김지혜_City space2_Sublimation Transfer on fabric_60×80cm_2012

김지혜는 판화 설치를 통해 '도시'라는 주제로 거대한 에디션을 완성하여 '변화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를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경하_swimming in the sea1_캔버스에 목탄, 유채_97×97cm_2012

이경하는 끊임없이 존재의 의미를 갈구하는 작업을 통해 '삶의 본질'과 인간의 '욕망'과 '이상'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 있다. ● 김은영은 파편화된 조각의 나열을 통해 인간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기억의 편린들을 치유하는 과정을 끝이 뾰족한 금속 재료를 용접행위로 녹여 표현해 내고 있다.
최성훈_은하수 Galaxy_비디오 설치_00:01:20 (Looping)_2012

최성훈은 '픽셀'의 의미와 연관성을 확대, 축소, 또는 재배치의 과정을 시각언어로 담은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박상희_swim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80×130cm_2012

박상희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도약'과 '추락'이 반복되는 인간의 모습 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단편화 시켜 그려내고 있다.
노신경_sewing machine_사진에 바느질_58×72cm_2011

노신경은 개개인의 기억을 재구성하며 치유와 공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바느질'이 라는 매체를 통해 천과 장지를 사용하며 서정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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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짓기 프로젝트 The mating project 2011~2012




오화진展 / OHHWAJIN / 吳和珍 / sculpture.drawing   2012_1005 ▶ 2012_1011



오화진_GPS animal_훌라후프, 울혼방, 솜 등에 바느질_170×110×9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420d | 오화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05_금요일_05:00pm

Project Ⅰ : What's the figure ?      Project Ⅱ : The fate of The object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 10월11일_10:00am~01: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1관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짝짓기 프로젝트는 2011년부터 현재까지 약 20개월 동안 진행해왔던 프로젝트입니다. 그 동안 2번의 전시를 통해 프로젝트의 일부 진행과정을 발표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발전시킨 일련의 모든 과정을 한자리 모아 발표를 합니다. 짝짓기프로젝트는 본인이 향후에도 관심을 갖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이번 전시는 장기간 지속될 이 프로젝트의 첫 결과 보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짝짓기 프로젝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화진_Able man_플라스틱 의자, 울혼방, 솜 등에 바느질_100×59×110cm_2012
오화진_Foursome_옷걸이, 울혼방, 솜 등에 바느질_130×51×47cm_2012

작업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작품에도 인생과 마찬가지로 운명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나는 내 운명과 작품의 운명적인 만남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나는 절대 스케치를 하거나 계획을 하지 않고 시작한다. 매순간 작품과 나는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며 작업을 시각화 시켜간다. 작품과 나의 운명을 결합시키며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이라고 판단되는 형태가 내 눈앞에 있다. ● 처음부터 나는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그 완성품이 내게는 발견과도 같다. 그리고 그 작품의 품생(品生)에는 내가 함께했다는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고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스토리를 짓는다. 작품의 생(生)을 상상하며 글을 짓는 것이다. 마치 원래 그렇게 계획 되어 있는 인생처럼 교묘히 짜 맞춰 진다. 작품의 이 주어진 운명의 스토리는 창조자의 인생의 흐름과 사소한 기분에 영향 받아 좌지우지 당한다. 혹시 신이 있다면 우리를 이렇게 창조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 진짜 창작 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나에게 있어서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 어떤 이는 자연에서, 어떤 이는 적(enemy)에서, 또 어떤 이는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는다. 모두 의미 있는 창작이겠지만, 나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계획되지 않은 순전히 본능적인 타고난 감각에 의해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영감의 원천도 최대한 내 스스로에게서 뽑아내고 싶다. 그 영감의 원천이 살아온 나날의 경험과 겹쳐 비록 진부한 아이디어가 나올지라도 스스로에게 있어서 충실했다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다. 본능적이고 운명적인 작업을 하고 싶다. ●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 바로 '짝짓기 프로젝트' 이다. 『짝짓기 프로젝트』는 드로잉과 섬유소조(塑造) 2가지 표현 방식으로 진행 하였는데『What's the figure ?』와『The fate of The object』이 그것이다. 『What's the figure ?』는 무 작위적으로 오려내어 창작한 도형이 창작자의 어느 순간과 만나느냐에 따라 형태가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젝트이고,『The fate of The object』는 기존의 오브제와 창작자의 인생의 순간이 겹치면서 오브제의 외적인 형태가 바뀌게 되고, 이를 보고 영감을 받아 운명의 스토리를 짓는 프로젝트이다. ● 도형이든 오브제이든 '오 화진'과 어느 순간에 운명의 짝짓기가 되느냐에 따라 生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화진_Hulahoop man_훌라후프, 울혼방, 솜 등에 바느질_135×108×94cm_2011
오화진_영감포착포식자 Inspiration predator_오래된 촛대, 울혼방, 가죽, 솜, 종이 등에 바느질, 드로잉_70×60×40cm_2011

짝짓기 프로젝트 Ⅰ : What's the figure ? ● 여기 0000년 00월 00일 00시 00분 ! 무작위로 내키는 대로 잘래내어 만든 도형이 하나 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냥 종이 한 장에 불과했던 것이 한 순간에 '창작의 원천이 되는 역할'로 살아갈 figure가 되어버렸다. 이 종이의 운명이다. ● 무작위로 잘라낸 도형들 중 오늘 따라 끌리는 게 하나 있다. 운명처럼 선택받은 도형은 창작자 '오화진'의 어떤 시간, 기분, 상황 등의 조건과 짝짓기 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어 진다. ● "What's the figure ?" 같은 도형이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아이의 얼굴로 되기도 하고, 인간의 배가 되기도 하고, 사과가 되기도 한다. 다 운명이고 인연이다.
오화진_Figure 20-The earphone_종이에 과슈, 펜_35×35cm_2012
오화진_Figure 21-수액측정기 Sap analyzer_종이에 과슈, 펜_35×35cm_2012

짝짓기 프로젝트 Ⅱ : The fate of The object ● 여기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오브제가 하나가 있다. 이 오브제는 '오화진'이라는 한 사람과 만나면서 손 가는대로, 느낌가는 대로 무작위적 변형을 당해 하나의 조형물로 변해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완성이라고 판단되는 형태와 서로 마주하게 된다.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그 완성품은 발견과도 같다. 이 오브제의 운명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 하나의 오브제는 시간과 창조자의 기분과 어떻게 짝을 맺느냐에 따라 외양, 기능, 조건 등의 운명이 결정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짝짓기 이다. '짝짓기'란 탄생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전초전이지 않은가 ! ●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보고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스토리를 짓는다. 작품의 생(生)을 상상하며 글을 짓는 것이다. 마치 원래 그렇게 계획 되어 있는 인생처럼 교묘히 짜 맞춰 진다. 작품의 이 주어진 운명의 스토리 역시 창조자의 인생의 흐름과 사소한 기분에 영향 받아 좌지우지 당한다. (* 작품의 생(生)의 스토리는 전시장에 오시면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오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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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展 / YIINSUN / 李仁善 / painting   2012_1005 ▶ 2012_1011 / 월요일 휴관



이인선_Power Ga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펠트, 자수_73×117×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인선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05_금요일_06:00pm

갤러리빔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빔 GALLERY BIIM 서울 종로구 화동 39번지 Tel. +82.2.723.8574 www.biim.net



미싱대 위의 상징 정치학 ● 미싱은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관련한 애잔한 정서를 상기한다. 그것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저 유명한 노래 「사계」에 나오는 '빨간 꽃 노란 꽃 꽃밭가득 피어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청춘을 바쳐 열악한 노동현실을 견뎌온 한국사회의 누나들을 떠오르게 한다. 미싱은 근대산업사회의 상징인 기계장치를 이용한 대량생산 체제를 대변한다. 미싱을 통해 생산된 공예품들은 규격화하고 도식화한 이미지들일 가능성이 높다. 숙련된 기술을 이용해서 짧은 시간에 다량의 제품을 생산해 내려는 합목적성이 우선하기 때문에 그것의 개성과 독창성은 그다지 문제시 되지 않기 때문이다. ● 컴퓨터자수와 미싱자수, 손자수 등의 형태로 남아있는 이 자수 기법은 지금은 사향산업화 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저임금 노동에 밀려 특수한 경우 소량생산에 머무르고 있다. 이인선은 파주에서 수십년동안 '오바로꾸(Over Lock)' 일을 해온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영감을 받고 2007년부터 서울여성센터에서 2년간 직업교육을 받았다. 이후 꾸준히 기술을 익혀온 결과 이인선은 미싱대 위의 예술가로서 기법상의 완성도를 갖췄다. 기실 예술을 한다는 것이 기술적 완성도를 높여나가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인선이 선택한 방법은 그다지 효율적인 것은 아니었다. 익숙한 것이 아닌 낯선 것으로부터의 출발은 그러나 작가 자신에게는 새로운 선택이었다.
이인선_Power & Lov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펠트, 자수_73×117cm_2012
이인선_Death March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펠트, 자수_73×117×5cm_2011

전문적인 숙련공의 손길에서 나오는 미싱자수 기법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은 잊혀져가는 문화로 남아있다. 그것은 군사문화의 일종으로 하위문화로 각인되어 있는 한편 그 독특한 기법과 이미지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편이다. 엘리트 미술제도 속의 예술가 이인선은 잊혀져가는 기술을 자신의 작품 제작 방법으로 채택했다. 그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도전이었다. 이인선이 채택한 이 기법은 누구나 다 알만한 이미지 조작술을 이용하여 독특한 문화적 편린을 연출하면서 작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알맞은 방법이다. 오랜 시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여기 펼쳐놓은 이인선의 미싱 자수 예술은 기술적 의제를 넘어 예술적 성찰의 단계에 도달했다.
이인선_십장생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펠트, 자수_145.5×89.5×5cm_2012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시각예술가 교육을 받은 이인선이 미싱 자수 기법을 새로 배워서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시켰을 때는 각별한 뜻이 있다. 그것은 엘리티즘이 견고하게 구축한 방법론적 우위, 가령 근대적 시각을 가진 회화술 같은 것들을 넘어서는 이인선 자신만의 개별 언어를 채택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엘리트 예술가들이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미싱자수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대중적인 친숙함을 얻어내는 동시에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하위문화의 도상들을 끌어들여서 친숙함을 이용한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그 메시지는 역동하는 사회와 문화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포함하여 역설과 블랙유머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 심플한 구도의 이 작품들은 좌우 또는 상하로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칭구도는 화면의 안정성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도상의 반복을 통하여 이미지의 힘을 배가하며, 그 역으로 완벽한 대칭의 부분적인 변형에서 오는 흥미로움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인선의 화면에는 오버록 이미지들이나 문신 이미지와 같은 하위문화의 요소들을 비롯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문양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도상들이 등장한다. 이인선이 이렇듯 익숙한 도상을 이용하는 것은 익숙한 것을 이용한 비틀기 기법이다. 다만 그것이 고상하고 우아한 것들이 아니라 대중적이기는 하지만 이질적이고 키치적인 것들이라는 점이 그의 도상 정치학의 포인트이다.
이인선_웰컴 Welcom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펠트, 자수_89.5×145.5×5cm_2012

이인선은 미싱자수 기법으로 다양한 도상들을 박아 넣는다. 공판화 기법으로 찍은 배경 화면 위에 그는 나방과 양귀비와 해골, 惡(악), 樂(락) 등의 도상들로 하위문화적 요소들을 결합한다. 대결, 파워게임, 데스, 매치 등의 문구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호랑이와 용과 핵폭탄의 버섯구름, 파워(Power) 러브(Love), 악어, 목단, 하트 무늬, 역(力)과 애(愛) 등이 공존하기도 하며, 호랑이, 뱀, 뭉크, 목단, 나이트매어 그리고 월식 등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 모든 작품들에는 정연한 질서와 혼돈의 세상을 은유하며 뒤섞여 있다. 이인선이 그리고 있는 이 질서와 혼돈은 세계의 모든 이원론적인 요소들을 포괄한다. 이인선이 펼치는 미싱대 위의 상징 정치학은 양극단의 요소들이 공존하는 세계에 대한 긍정과 부정 너머의 예술적 성찰이다.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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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bage Potential




반달展 / Vandal / graffiti.painting   2012_1005 ▶ 2012_1021 / 월요일 휴관



반달_seoul city_캔버스롤에 스프레이페인트_1.6×9.2m_2012_부분


초대일시 / 2012_1005_금요일_06:00pm

그래피티 라이브 페인팅, 비보이 공연 / 2012_1013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3층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반달의 개인전 『GARBAGE POTENTIAL』展이 열린다. 전시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쓰레기의 가능성', '쓰레기의 잠재력'이라니. 반달은 전시장 전체를 거대한 쓰레기더미로 만들 심산이다. 그리고 그 쓰레기더미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들이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경제적으로 힘든 집안 환경 등으로부터 비롯된 현실적 책임과, 금지된 것에 대한 소망 혹은 호기심 사이에서 늘 갈등하던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그래피티에 빠져들어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쏟아 부었고 그것은 곧 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삶이 되어버렸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 금지된 것을 소망한 십 수년 간의 그의 삶은 'garbage'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들이 갖는 가치를 극대화했으며 그 시간 속에 내재해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따라서 이번 개인전은 그래피티와 함께 해온 십 수년 간에 걸친 작가의 삶의 흔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달_드로잉연작-broken face
반달_드로잉연작-political star
반달_폐건물작업

그는 자신의 예술이 무엇인가로 규정되고 정의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의 작품들은 순수한 즐거움의 소산일 뿐 무언가에 대한 표현, 혹은 무언가에 대한 발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피티는 정치적 풍자나 저항의 메시지를 지닌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대해서도 그는 고개를 갸웃 한다. "그래피티를 비롯한 힙합문화는 즐거움 그 자체이며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완벽한 놀이문화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그는, 외부에서 그래피티에 덧씌우는 저항성이나 정치성을 경계한다. 그에게 있어 예술의 동기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순수한 놀이'뿐이다. '순수한 즐거움'보다 더욱 강력한 예술적 동기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서는 강력한 에너지와 필력이 느껴진다.
반달_coffedrawing_종이에 연필, 커피_29.7×42cm×2_2012

그는 절대적 권위를 내세우는 예술, 철저한 공식과 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 복잡한 관념 속의 예술, 전시실에 박제되어 버린 예술을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자신의 삶에 대한 정직하고 원초적인 태도이며 숨막히는 현실과 촘촘한 시스템으로부터 신나게 탈출하는 빠른 발이다. 우리가 항상 옳은 것, 나은 것, 바른 것이라고 배워온 것들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것들이 지닌 가치를 조명하는 반달의 작품은 이 답답한 세상의 환기구에 다름 아니다. 반달의 일회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입의 드로잉은 강렬한 움직임으로 자유롭게 표현된다. 그 폭풍과 같은 에너지는 창조적 열망으로 충만해 있다. 이번 첫 개인전에서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에너지를 통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는 전시를 기대한다. ■ 이도영
반달_wild eyeflower_캔버스에 스프레이페인트_162×130cm_2012
반달_young and general will_캔버스에 스프레이페인트_116×91cm_2012


나는 이태원 스트릿키드(street kid)다. 태어나고 자라온 이태원이라는 동네는 점잖은 것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어른들이 내게 경계시켜왔던 온갖 불량스러워 보이는 저급한 욕망들이 내겐 금기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내 안에서 새로운 양분이 되어 나를 키워왔다. 저급한 욕망과 성스러운 영혼의 차별은 의미가 없다. 예술을 통해 내가 더 불량스러워지고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하고 갑갑한 현대인의 삶에 약간의 일탈이라도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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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TA WENDERS Photography

            갤러리잔다리(02-323-4155)
            2012-08-30 ~ 2012-10-26
부재의 현전. (By Mark Gisbourne)
부재는 시간을 초월해 있거나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고독의 순간들을 일깨우면서 존재를 드러낸다. 또 이 순간들은 보편적인 차원에 머무는 한에서 공유될 수 있다. 도나타 벤더스의 사진들은 결정론적 시공의 한계를 넘어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내면 세계를 드러낸다. 이미지는 시간적으로 고정돼 있지 않지만 선명하게 감상자의 마음 속에 떠오른다. 어느 비평가는 이 이미지가 50년대나 60년대처럼 보이고, 거기에 그 때의 기억들을 불러오는 것 이상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회상하기를 말 그대로 시간을 통과하는 전환이 아니라 단지 회상하는 행동으로 본다면, 인과적이고도 고지식하게 내적인 회상의 순간들을 이해하는 일이 아마도 성급한 사람에게는 무용하게 느껴질 것이다.
유추(analogy)가 진실은 아니지만 그것은 가끔 드러난 장소에 관해서만 위치 특정적으로 공유되는, 본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들의 일치다. 유추는 그 출현의 원인이 이전부터 보여져 왔을 것이며, 따라서 어떤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의 평행적 유사성 이상이 아니다. 분명 작가가 ‘침묵의 섬들(islands of silence)’로 부르는 순간들,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드러나는 감정들이나 직접적인 충동들을 막을 필요는 없다. 이런 유추된 결과를 살펴보면, 작가의 분명히 무시간적 특성을 지닌 사진들은 모델들이 그녀의 존재를 완전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작가가 관찰하고, 기다리는 데서 비롯된다. 거기엔 결코 그녀가 마치 우연히 있는 것 같은 착각이나, 미디어를 바탕으로 한 사변적인 기록의 의도가 없다. 반대로 신중한 자세나, 인위적으로 연출하고자 하는 의도도 보이지 않는다. 작가의 숙련된 흑백사진은 서술적인 순간들의 채색된 양식을 벗겨내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흑백필름은 색채의 사용이 항상 요구하는 관계적 요소의 구성과 편견을 비운다. 이는 독특한 푼크툼이 생성되는 결정적 순간의 가능성을 발산시키고, 드러낸다. 롤랑바르트에 따르면, 한 사진작품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사건이다.(또한 나를 부수고, 나에게 호소한다)
작가의 접근은 이른바 최소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그녀의 네 가지 표현적 구성 요소는 흑과 백, 빛과 시간이다. 모든 삶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장애물들이나 불필요한 서사적 요구들은 제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아의 내면으로 침잠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사로잡힌다. 우리는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특정의 순간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사고와 자기성찰의 느낌들의 공유로 확장되는 데 놓여 있다는 사실에 매료된다. 이런 소중한 ‘부재들’은 우리에게 매우 의미 있고, 그 언어적 특질은 관련된 망각의 단어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그것은 심리학상의 혼란기로 잘못 비춰진 깊이와 인간적 필요를, 무시되어 온 일상의 요구에 대한 관심의 열의로 확대함으로써 바람직하게 묘사한다. 따라서 약간의 놀라움은 종종 창의적인 상상의 순간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여인들은 사진적 환기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과 수단이 된다. 초반의 개인적인 몽상들이나 그들 스스로의 생각 속에 갇혔던 것에서 벗어난 여자들의 초상들은 결국 사회적 공간에서 깨닫게 되는 침잠의 순간이나 존재의 증발로 연결된다.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거나 혹은 존재의 실존적 영역을 건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여성적 공감대가 강하게 존재한다. 하바나 발레 학교에서 찍은 한 여자가 생각을 잊은 듯 열심히 바닥을 닦고 있고, 이는 곧 뒤 따라올 어리거나, 매우 마른 발레 댄서들을 대조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사진들이 있다. 두 경우에서 실루엣으로 남은 인물들은, 분명 글자 그대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예지적 대비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은 지워진 과거 사실들의 주요한 의미를 이끌어낼 필요 없이 단지 보여지는 것으로 화한다. 이런 경우들은 항상 변경된 시간과 공간의 맥락 안에서 재현될 수 있다. 따라서 도나타의 이미지들에서 피할 수 없이 환기되는 연상들은 특정하다기 보다는 보편으로 보여질 여지가 많다. 그녀는 일단의 연상된 감정들의 공유를 드러내는 것으로 개개의 개성을 과도하게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벤더스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이는 우리 모두에 의해 공유되는 느낌이다.

거장 화가 발튀스, 안무가 피나 바우쉬, 영화 스타 제시카 랭, 앤디 맥도웰과 그 외 많은 명성과 관련 있는 사람들은 작가의 세계적인 위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피해 온 일이다. 그리고 역시 파리나 그 밖의 곳에서 찍은 아름다운 여인들 연작도 우리가 특별하게 패션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연상시키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녀들이 아름답더라도, 작가가 포착하고 표현하고자 찾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적인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문성의 표출이나 개인적 동기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기 노출의 여린 순간들로, 오로지 사진으로 포착할 수 있는 일시적 효과들, 찰나들이며 현재화된 부재의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그 개입적인 특성에 힘입어 통찰을 주는 능력을 지닌 사진의 마법적, 예언적 힘을 지시한다. 모델들에 대한 섬세한 접근 작가의 섬세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있는 하나는 그녀가 천사의 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상의 개인적인 약점을 폭로해 침공하거나 의도적으로 공격하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없다. 하지만 약점들이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 결합될 수 있는 실제의 존재와 공유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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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길 사진전 [질료들의 재배치]     

            
            갤러리 나우
            2012-10-17 ~ 2012-10-23
            2012-10-17 오후 17시
민병길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안개가 뒤덮인 산천의 풍관은 기계복제시대에 동야의 수묵화를 해석한듯하다. 수묵화에서 보이는 여백의 미가 흑백필름을 통해 잔잔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독특한 인화과정을 통해 제작한 실험적인 사진작품은 복제품으로서 사진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서 아우라(aura)를 함유한다.

수묵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은 대체로 안개로 쌓인 신비하고도 애매한 빈 공간이 하늘로 혹은 바다로 존재한다. 그는 실제 사물들(나무나 제방, 새 등)을 화면에 아주 미세하게 부분적으로 포치시켜 놓는다. 텅 빈 공간. 그것은 민병길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이는 감성과 이성의 틈새를 가로지르고,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유희의 공간이다. 하늘과 바다로 이루어진 텅 빈 공간은 수평만을 명시적으로 열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물’ 과 ‘’안개‘라는 대상을 앞세워 그것의 지평에 대한 탐색을 지속하게 하여 되가져오게 한다. 일시적 시간의 얼개 구조 속에 과거의 수평이 시야에 들어오고, 이 시각이 열린 채 유지됨 으로써 기존의 수평에 대한 인식에서 벗어난 수평선이 재생산된다.

더구나 안개로 뒤덮인 아스라한 빈 공간은 이성으로 파악하고 분석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그 시원성(始原性)조차 가늠하기 어렵고 그 끝을 예측하기조차 힘들다. 그가 담아내는 흔적(안개, 물, 하늘, 대지)들은 현전(現前)하는 공간이 아니다. 민병길의 작품에 드러나는 이 빈 공간은 존재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 대해 열려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창조를 위한 유희의 이 빈 공간은 존재자를 열어 개방시킨다. 안개로 쌓인 하늘과 대지, 물로 그려진 이 빈 공간은 분해되고 이전되고, 또한 다른 것을 지속적으로 지시한다. 민병길이 채집한 흔적들은 운명적으로 처 할 수밖에 없는 고정된 소멸의 공간 이 아니라, 존재와 세계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형성하는 불멸의 공간이다.

현 존재가 존재의 의미를 만날 수 있는 본래적 공간, 주어진 의미나 이해에 머물지 않고 창조의 존재성을 위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하강과 은닉에 자신을 기꺼이 열어두는 공간. 굳어진 것과 고정된 것 에 그 경계를 허무는 유희의 공간. 기존의 존재에 대한 고착된 이해를 벗어 던지고 체험하게 되는 경이로운 공간, 이것이 민병길이 텅 빈 공간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김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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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문 Double Doors










신학철_김기라 2인展 2012_1004 ▶ 2012_1020 / 월요일 휴관






신학철_한국근대사-관동대지진(한국인 학살)_캔버스에 유채_122×200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전통적 개념의 2인전으로 묶일 수 없는 두 작가의 독특한 동행 ● 이 전시는 동질성을 앞세우는 일반적인 2인전 개념으로는 묶일 수 없는 두 작가를 한 자리에 세운다. 신학철과 김기라는 30년이라는 세대 차이뿐만 아니라 표현 방식에도 상당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두 작가는 모두 현실 세계의 모순성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작가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이번 전시에 과감하게 초대되었다. ● 자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예술적 서바이벌 게임 신학철과 김기라는 각각 자신이 속한 세대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작가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전시는 소위 '원로 작가와 신진 작가의 예술적 결투'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명실 공히 한국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신학철은 포토리얼리즘의 기법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형상화하는 평면 작업을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한편 김기라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억압 구조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파헤쳐 온 주목받는 신예 작가이다. 두 작가 모두 역사적 사건과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다루지만 표현방식과 주제 선택에서 흥미로운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74년생 김기라는 팝아트적인 대중기호에 대해 보다 개방적이면서 세계화된 시선을 버리지 않는다. 44년생 신학철의 무거운 캔버스와 신세대의 확산적 사고의 병렬적 대립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 역사를 향한 두 개의 다른 문. 그러나 그 종착지는 모두 참혹하고 괴기스럽다 신학철과 김기라 모두 작품의 생산의 기초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두 작가는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두 작가 모두 파편화된 이미지를 통해 자기 시대에 대한 전체상을 조심스럽게 찾아 나가고 있는데, 이 두 작가의 시선에 의해 구축된 시대적 자화상은 안타깝게도 암울해 보인다. 두 작가가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암울할 정도로 모순된 우리 시대의 이미지 증언록이 두 작가에게 국한된 개성의 문제인지 아니면 우리사회의 일면을 두 작가를 통해 드러낸 역사적 진실성의 문제인지에 대한 판단 여부는 관객들의 몫이 된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초 관동대지진의 흑백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작가의 분노와 죽은 이들에 대한 추모가 30년 동안 응축되어 형상화된 강렬한 유화 작업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국민들의 동요와 소란을 잠재우고자- 일본 거주 한국인들에게 무차별한 살인을 자행했던 '한국인 학살' 사건을 신학철 작가는 흑백사진을 통해 목격하였다. 작가는 쓰레기처럼 엉켜져 쌓여있는 시체 사진의 시각적 충격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몸에 지니고 있다. 이 사진을 두고 언젠가는 그려야겠다, 되뇌었던 작가는 2011년에 이 작업을 착수해 2012년 검은색 유화 작업으로 '관동대지진' 신작을 완성하였다. 또한 사진적 체험은 작가의 실제 시각적 경험과도 맞닿아있는데, 작가는 시체사진과 함꼐 대학교 시절 여의도에서 보았던 수많은 쓰레기더미, 이 쓰레기를 파먹고 있는 까마귀, 시체 등 자신이 실제 보았던 현장을 연결시킨다.

신학철_한국현대사-망령_합판에 종이 콜라주_110×60cm_2011

2003년 이후 거의 근현대사 작업을 진행하지 못 하고 있던 작가가 현 정권 하에서 대거 등장한 '뉴라이트'의 행렬을 보고,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근래 다시 등장한 극우보수 세력을 목격한 작가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근현대사에 점철된 친일 세력들의 모습을 꼴라주하고 맨 위에 해골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올려두었다. 여기서 해골은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라 수십 년간 민중미술의 대표작가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독점재벌과 군사독점을 끝없이 파헤쳐온 작가의 무의식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신학철_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no.1-8_합판에 종이 콜라주_80×104cm×8_1998

「한국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 사진 꼴라주는 화가 신학철이 그림으로 쓴 최초의 한국 민중사의 밑그림들이다. 사진을 오려붙여 꼴라주하고 화면을 구성해가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게 사진 꼴라주는 '실재' 그 자체이며 객관적인 세계와 작가의 무의식이 세계 밖으로 최초로 드러나는 압도적인 순간들이다. 사진 꼴라주의 좌우로 쭉 뻗은 거대한 길이만큼이나 파노라마 안에는, 독점자본과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에너지를 내뿜는 민중의 파란만장한 시련과 정치적 사건들의 단서가 있다.
김기라_Specter_Monster Series_original collage_46×31cm×4_2011

「Specter」라 불리는 김기라의 괴수들은 전 세계의 각종 신앙 아이콘들을 콜라주 한 연작이다. 작가가 수년간 수집한 우상 이미지의 절합으로 만들어낸 일련의 이단적 몬스터들은 모든 것을 사적 소유와 권력의 신화 안에 수렴하려는 자본주의의 종교성 속에 존재한다. '망령'이라는 뜻의 스펙터는 온갖 기원과 염원의 과부하처럼, 빼곡한 우상의 파편들로 빚어져 인간 근원에 내재된 욕망의 교리를 형상화한다. 그리고 그 교리 안에는 한 사람이 타인이나 사물에 가하진 복종의 경제학이 새겨지며,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보이지 않는 손으로 움직이는 김기라의 망령들은 이 시대의 토템이 된다.
김기라_Hitl-Maria as a Continent of History_FRP에 조각, 우레탄 코팅_250×200×90cm_2009

히틀러의 얼굴을 한 성모 마리아의 입상인 「Hitl-Maria as a continent of history」는 선(善), 정의, 휴머니즘과 같은 말들로 윤색되는 공허한 상징과 권위가 현실에 가한 폭력의 역사를 표상한다. "정치는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 갔지만 종교는 그보다 열배는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는 영국의 극작가 션 오케이시(Sean O'casey)의 말이 떠오르는 이 작품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고착된 신화의 허상을 집요히 드러내려는 작가의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김기라_Sant Marx with a Loef of Bread as Human Being_캔버스에 유채_115×90cm_2009

신화화된 우상의 이미지에 흠집을 냄으로서 그것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김기라의 작업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의 상징인 마르크스주의 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 만화 속의 비밀스런 영웅처럼 녹색 가면을 쓴 맑스의 초상 「Sant Marx with a loef of bread as Human being」은 그 존재 자체가 역사상 큰 사건으로 평가되는 한 사상가의 이미지를 희화하고, 후광을 둘러 신격화된 지성의 소비와 맹신을 꼬집는다. ■ 양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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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926_수요일_06:00pm

주최,주관 / 대안공간 루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8:00pm

대안공간 루프 ALTERNATIVE SPACE LOOP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5-11번지 Tel. +82.2.3141.1377 www.galleryloop.com










이창원 개인전 『Other Selves』는 대안공간 루프의 '후반작가 지원전'으로 기획됐다. 후반작가 지원전은 데뷔 후 일정한 경력을 쌓은 미술가의 프로모션을 위한 전시다. 미술계 안에는 이미 이름을 알리고 의미 있는 작업을 축적해 왔음에도 아직 크게 주목받지 못한 작가들이 있다. 대안공간 루프는 이런 작가를 재조명하고 지원하기 위해 신진작가 공모와는 별도로 후반작가 전시를 마련해 왔다. 이창원은 2000년에 독일의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10여 년간 학업과 더불어 작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독일과 한국, 일본 등에서 가진 10여 회의 개인전을 포함해 국제적으로 많은 전시에 참여해 왔다. 이번 전시 『Other Selves』는 그런 작가가 적잖은 시간 천착해 온 작업의 결과에 다시 주목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대안공간 루프

이창원_Parallel World_거울, 조명, 디지털 프린트, 좌대_가변설치_2012_부분

평행한 세계를 위하여 ● 이창원의 근작 '평행 세계(Parallel World)'는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꾸준히 인지도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모리미술관의 맘 프로젝트(MAM Project)의 17번째 작가로 선정되어 국내외에 비상한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 행보는 이미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이창원 작가의 여러 가지 작업 프로세스는 독일에서 활발히 활동할 무렵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그렇다면 일견 보기에도 경쾌하고 재미있기 그지없는 작가의 작업세계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인가? 이창원 작가는 1972년생이다. 80년대의 뜨거운 분위기가 아직 확실하게 시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90년대 초반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회에 팽배하지 않았던 무렵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누구나 그랬듯이 작가는 점토나 화강석이나 오석과 같은 석재, 그리고 나무재료, 철과 석고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 주지와 같이 이러한 작업을 학생시절에 탐구해서 얻어지는 결과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재료의 물성(物性)에 대한 성찰이 그것이며, 또 하나는 형식주의적 탐험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존재하기 위한 타당한 토대가 마련되기 위해서는 어째서 순수성(purity)이 중요한 문제이며 예술에 있어서 본질주의(essentialism)가 예술의 역사 내부에서 어떠한 각고의 노력과 투쟁의 담론을 거쳤는지 확실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토대에 대한 성찰 없이 형식 자체에 매몰되었던 작가를 목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창원_Parallel World_hands across time_거울, 조명, 디지털 프린트, 좌대_가변설치_2012

한국의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1985년은 아주 의미 있는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이 당시 어떤 특정한 이벤트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해외유학과 여행의 자율화가 이루어지던 시기라는 점에서 미래를 향한 잠재적 씨앗이 배태된 상징적인 한 해였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 시기 미국은 사회분위기가 70년대의 사회정의나 반전, 인종차별 철폐를 통한 자유의 실현 등을 기치로 내걸었던 진보적 분위기로부터 대적적(對敵的)으로 전환되어버린다. 대외적으로 강권정치를 펼치는가 하면 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내세우고 엔터테인먼트를 육성하면서 우민화 정책을 시행하는 등 급속한 우경화로 바뀌어갔다. 당연히 현대미술이라는 장르도 스펙터클하며 장려(壯麗)한 미감에 사로잡히게 되면서 본질주의나 예술의 철학적 사고를 지양하게 된다. 보편적 가치체계의 설정보다는 특수한 미감 자체를 즐기는 설치미술과 미디어 예술이 줄을 잇고 탄생했다. 우리의 미국 유학파들이 받아들인 내용들은 안타깝게도 이러한 시대분위기였다. 이 시절의 유학생들이 90년대 대거 귀국하면서 한국미술을 이끈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그랬겠지만 이러한 학습분위기 속에서 이창원 작가도 90년대 후반까지 결코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작가는 1999년에 독일 뮌스터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뮌스터라는 도시는 조각의 도시로 유명하다. 온갖 재료와 물성, 그리고 형식적 아름다움이 내뿜는 도시 분위기에서, 그리고 미술사를 잠식(蠶食)하는 빅네임들의 아우성 속에서 작가는 압도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더 이상 형식주의와 물성에 매진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작가는 당시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 거장 기욤 바일(Guillaume Bijl)을 만났다. 작가는 이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사사 받으면서 인식의 대전환을 모색할 수 있었다. 기욤 바일의 철학적 대전제는 실재와 가상의 구분 및 경계 설정이었으며 또 이 경계를 애매하게 조장함으로써 우리의 인식과 지식이라는 확실성의 체계에 대해서 회의적 질문을 가하는 반성적 성찰에 있다. 당연히 작가도 이러한 인식적 훈련에 감화되었을 것이다.
이창원_Parallel World_부분

서구의 인식론과 동양의 인식론의 근원적 차이점을 찾으라면 그것은 당연히 다이커터미(dichotomy)에 있을 것이다. "성인은 초월적 세계가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가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등장한다. ("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莊子』「齊物論」) 눈에 분명히 보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일상의 현실 이외에는 논하지 않겠다는 고대의 합리주의적 사고관이다. 그러나 서구의 인식론은 파르메니데스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압도한 이래로 세계를 현상계(phenomena)와 본체계(noumna)로 나누어 파악한다. 현상계는 가시세계(可視世界)일 것이며 본체계는 가사세계(可思世界)일 것이다. 여기서 가시세계는 또다시 일상의 대상과 그림자의 환영으로 구분될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이미지는 바로 그림자의 세계이며 이것은 아주 부정적 맥락으로 쓰였지만, 어쨌든 이미지에 대한 인류 최초의 사유일 것이다. 독일에서 작가가 벌였던 최초의 프로젝트 작업은 이 가시세계의 두 가지 요소로써 자신이 파악하는 세계의 가치체계를 표명하는 방법론이었다. 이때 작가는 3차원적 캔버스를 발명했다. 사방이 견고한 직사각형 프레임의 내부에 평행한 직선의 판을 순차적으로 병렬시킨 다음 그 직선 판 위에 코코아나 옥수수 가루, 차나 커피를 올려서 환영을 구축하는 방법론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인체 전신상이나 해바라기, 다중의 초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일상의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장려한 스펙터클의 미감이 압도적으로 즐거운 작업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퇴색해버리는 차의 아로마 향기나 커피 내음의 일시적 허무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 시리즈는 더 나아가 현상계가 지니는 일시성(transiency)의 덧없음(ephemerality)을 떠나서 세계에 대한 '진리의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 자체가 부질 없으며 인간은 오로지 세계가 어떻게 생겼다는 '믿음의 체계'만을 구축해왔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그랜드 프로젝트였다.
이창원_Parallel World_제작과정

위에서 이야기한 프로젝트에서 진일보한 작가의 연구 방법은 2009년 무렵에 더 할 나위 없이 성숙했다. 작가는 빛 자체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신작의 방법론에 대해서 플라톤 역시 언급했었던 동굴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연상했다고 발언한다. 상식이 전하는 바 빛은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모든 것을 비추는 복음이다. 로고스에 있어서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무차별의 평등이며 기쁨의 원천이다. 작가는 참으로 기발한 발상을 한다. 탁자 위에 일간지 신문 1면을 장식하는 헤드라인 기사를 올려놓는다. 이때 작가는 아주 특별한 장치를 설정한다. 르몽드나 알게마이네 차이퉁, 환구시보, 아사히 신문, 조선일보의 일면기사의 내용은 정치적 테러나 환경 재앙, 금융위기, 글로벌리즘의 승리와 좌절, 국가의 홍보, 국내외의 불유쾌한 사건들로 채워지기 일쑤이다. 진정 작가의 테이블은 인간사 모든 문제의 끝없는 나열로 채워진다. 그러나 작가는 특정 부분을 칼로 오리고 그 면에 거울을 장착시킨다. 이때 테이블 위의 LED 조명은 거울에서 반사되는 이미지를 공간의 저편으로 부유시킨다. 경쟁주의와 온갖 사건들이 난무하는 현대생활과 대조적으로 빛이라는 로고스는 우리의 태초적 환희의 경험을 소환해낸다. 마티스의 댄스, 동굴벽화를 연상시키는 동물들의 환영, 새들의 비행, 비행기와 선박의 여행 등 인류가 지속해야만 하는 희망의 예시들이 환영처럼 빛을 발한다.
이창원_Parallel World_제작과정

나는 작가의 이 기념비적인 작품 시리즈의 원천은 2005년의 '성스러운 빛(Holy Light)'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종이 뒷면에 온갖 토드리(tawdry)한 플라스틱 생활용품들을 방사형으로 설치한다. 형형색색의 목욕용품과 가사용품은 일상의 진부한(commonplace) 세계일 것이다. 여기 뒷면에 강한 빛을 비춘다. 그리고 이내 관찰자가 바라볼 의미 있는 앞면의 모습은 스테인드글라스의 성스러운 빛의 세계로 변모한다. 물질의 속성을 완전히 변모시키는 작업으로부터 의미의 완전한 형질변경을 이루는 것이 작가 세계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의미의 형질변경을 수행함으로써 작가가 이루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해방(liberation)'이다. 부박(浮薄)한 플라스틱이라는 개념, 일상이 지루하다는 편견을 타파시키는 것, 속계(俗界)라는 울타리에 갇혀버릴 운명의 진부한 모든 것들을 해방시키려는 의지야말로 작가가 진정으로 가슴 속에 품는 지향성이다. ■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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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미술축제










제22회 청담미술제展 2012_1004 ▶ 2012_1013






사공우_Power_한지, 캔버스에 혼합매체_112×162cm_갤러리 미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청담동 미술축제 페이스북으로 갑니다.

개막식 / 2012_1004_목요일_05:00pm_네이처포엠 B1

주최 / 청담미술제 운영위원회

후원 / 강남구청_문화체육관광부_한국문화예술위원회_한국미술협회_한국화랑협회

협찬 / CHRYSLER_국순당_ST Dupont_사랑의 전화 비프렌드

관람시간 / 10:00am~07:00pm

박여숙화랑 PARKRYUSOOK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306호 Tel. +82.2.549.7575 www.parkryusookgallery.co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미 Gallery MI 도쿄도 신주쿠구 요쯔야 4-4-10 동경 한국문화원 Tel. +81.3.3357.6074 www.koreanculture.jp/korean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세인 GALLERY SEIN 서울 강남구 청담동 76-6번지 한성빌딩 2층 204호 Tel. +82.2.3474.7290 www.gallerysein.co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비전아트갤러리 Vision Art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빌딩 B103 Tel. +82.2.511.2227 www.visionartgallery.co.kr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살롱 드 에이치 Salon de H 서울 강남구 청담동 31-2번지 신관 1,2층 Tel. +82.2.546.0853 www.artcompanyh.co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후 ART SPACE WHO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201호 Tel. 070.8874.4848

관람시간 / 10:00am~07:00pm

JJ 중정갤러리 JJ Joong Jung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118-17번지 네이쳐포엠 305호 Tel. +82.2.549.0207 www.jjjoongjung.com blog.naver.com/galleryjj

관람시간 / 10:00am~06:00pm

청화랑 CHUNG ART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1번지 Tel. +82.2.543.1663 www.chungartgallery.com

관람시간 / 월~금_10:00am~06:30pm / 토_10: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카이스 갤러리 CAIS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7-16번지 Tel. +82.2.511.0668 www.caisgallery.co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사우스 PYO GALLERY SOU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B112호 Tel. +82.2.511.5295 www.pyogallery.co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일요일 휴관

필립강 갤러리 PHILIPKANG GALLERY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3-13번지 (가로수길) 부강빌딩 3층 Tel. +82.2.517.9014.9015 www.philipkanggallery.net






1991년을 시작으로 22회째를 맞이하는 청담미술제가 10월 4일부터 13일까지 청담미술제 운영위원회 주최로 청담동 일대 갤러리가 참여하여 개최된다. 매년 가을이면 청담동에 위치한 갤러리가 국내외 수준높은 미술작품들로 다양한 기획전시가 마련되어 청담동 일대를 미술축제의 장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이영호_환원소성 1260°_백자볼_11×13×13cm_갤러리 세인
이재효_0121-1110=1100212_나무_250×250×9cm_박여숙 화랑_2010 이재효_0121-1110=112089_나무_43×110×110cm_박여숙 화랑_2012
김경렬_Harmony Jesus, Buddha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박영덕 화랑_2012
무라카미 다카시_Flowerball-Kindergarten_석판 오프셋_71×71cm_비전아트갤러리_2011
장종완_another romance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살롱드 에이치_2012
신형섭_Unbreakable_수채화 용지_203.2×203.2cm_아트스페이스 후_2012
최영돈_scsg-c-03_피그먼트 프린트_105×75cm_인사갤러리C_2012
솔르윗_#1_유리섬유_91.44×106.68×60.96cm_쥴리아나 갤러리_2001
최영욱_Karma_캔버스에 혼합매체_180×155cm_JJ 중정갤러리_2012
이혜민_봄_캔버스에 유채_40×80cm_청화랑_2012
위영일_The Eighteen Symbols of Longevity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카이스 갤러리_2011
윤성필_Chaos, Cosmos and Circulation_리넨에 철강 분말_200×200cm_표갤러리 사우스_2012
김대관_물위의 빛_플로트유리에 채색_186×186cm_필립강 갤러리_2012
이상남_Light+Right S 023_패널에 아크릴채색_55×40.2cm_PKM 트리니티 갤러리_2011

청담, THE STATION OF ART ● 청담미술제는 기획된 전시와 각 갤러리가 가진 공간적 예술의 미가 가미되어 전시관람과 함께 청담동 갤러리가 가진 건축적인 가치 또한 청담미술제 관람참여의 묘미가 된다. 또한 청담미술제에 참여하는 화랑마다 기획하는 전시가 달라 도보로 가능한 거리의 갤러리들이 다양한 전시를 마치 아트빌리지의 정거장인 갤러리에 지도를 보면서 찾아가는 소소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촉망받는 신진작가부터 중진작가와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으로 기획된 전시까지 풍성하고 다채로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멋진 기회이다. 또한 회화에서 조소, 팝아트, 사진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전시되어 같은 형태의 공간이 아닌 각기 다른 분위기의 갤러리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청담미술제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번 청담미술제에는 15개의 청담동 소재 갤러리가 참여하는데, 각 갤러리의 기획전시는 다음과 같다. ■  




□ 장 소 / 청담동 일대 15개 갤러리 갤러리 미_『초록가을, 온 세상이 붉게 물드는 가을, 초록을 만나다』 展(10/4~13) 각기 다른 의미의 초록색을 사용하는 작가 9명의 작품을 소개 갤러리 세인_『중견도예가의 힘-이영호?이인진 2인』 展(10/4~27) 전시특별주제 'Refreshment'를 오전 11시, 오후 3시 차와 다과를 나누는 컨셉으로 준비하여 차와 테이블셋팅 전문가의 디스플레이와 강의 진행 박여숙화랑_『이재효 개인, 원점으로의 반복』 展(9/11~10/11) 다양한 재료 즉, 나무, 못, 강철 막대로 구나 반구, 원통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로 조화를 이루어내는 가구작품을 전시 박영덕 화랑_『김경렬』 展(10/4~20) 고전적이고 무거운 리얼리즘이 아닌 과거의 영웅들과 현재의 아이콘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여 우리 시대의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팝리얼리즘(Pop Realism)'을 선사 비전아트갤러리_『가을맞이』 展(10/4~20) 쿠사마 야요이, 정현숙, 무라카미 다카시등 국내외 유명작가의 작품과 초대작가 강승현의 작품을 전시 살롱 드 에이치_『김병주, 이은선, 이승민, 장종완』 展 전시를 통한 작품소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과 방식으로 아트마케팅을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소개 아트스페이스 후_『결정적 순간』 展(10/4~13) 신형섭, 최수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며,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이 과연 실제인지 실제와 똑같은 이미지의 시각적 판타지인지에 대한 판타지적 요소를 표현 인사갤러리 C_『콘라드 빈터』 展(10/10~11/16) 자동차 도료를 사용한 콘라드 빈터의 회화작품이 전시 쥴리아나 갤러리_『더 메스터스(The Masters)』 展(9/24~10/30) 앤디워홀, 솔르윗, 안토니 타피에스 등 세계적인 작가 12명의 작품 전시 JJ 중정갤러리_『잔치(festa)』 展(10/1~10/31)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최영욱, 최준근, 홍동희, 이상용, 정우창, 최순민, 손지연, 송유림, 박진희 작가의 작품 전시 청화랑_『그리움』 展(10/4~10/13) 어린시절, 그 누구에게나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고향의 그리움을 담은 이혜민 작가의 작품 전시 카이스 갤러리_『기네스 욕망(Guinness Desire)』 展(9/11~10/13) 위영일 작가의 작품 전시, 일상 이상의 무엇인가를 과도하게 바라는 인간의 욕망인 '기네스 욕망'(작가가 현실을 투시해 구조화한 7가지 욕망 중 하나)을 표현 표갤러리 사우스_『윤성필 신진작가, 질서,혼돈 그리고 순환』 展(9/11~10/13) 표갤러리 31주년 기념 신진작가 공모전 대상수상자인 윤성필 개인전 필립강 갤러리_『김계완, 김근중, 김대간, 송은영, 이만익, 엠마최, 최만린, 황호섭』 展 젊고 유망한 작가 발굴 및 지원을 앞장서며, 『한국의 힘 100』 展을 통하여 한국의 대표작가 100인을 정리하는 장기 기획 시리즈 전시회 개최 PKM 트리니티 갤러리_『이상남, Light + Right(Three Moons)』 展(8/24~10/12) 2008년 이후 약5년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으로 신작 회화와 드로잉 중 약 40여점의 작품을 전시 □ 문 의 / 02-549-7575 (http://www.facebook.com/Cheongdamart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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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ing Testing 1.2.3










송은문화재단 소장품展 2012_1008 ▶ 2012_1211 / 일요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008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고석민_김주리_박자현_박홍순_서윤희_신정룡_안두진_이선민 이원철_정보영_정용국_조인호_천성명_최은경_최해리_한경원 데미안 허스트_로버트 인디아나_로이 리히텐슈타인_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무라카미 다카시_신디 셔먼_앤디 워홀_제프 쿤스_짐 다인_톰 웨슬만

주최 / 재단법인 송은문화재단 기획 / (주)로렌스 제프리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송은 아트스페이스 SONGEUN ARTSPACE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2번지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재)송은문화재단의 모기업인 주식회사 삼탄의 창립 50주년 기념 해를 맞이하여 재단의 소장품 중 일부를 선별하여 한국작가 소장품전과 외국작가 소장품전으로 묶어 2012년 컬렉션 전시로 선보인다.
안두진_The Cave_캔버스에 유채_97.5×146cm_2010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젊고 유망한 미술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고자 설립된 송은문화재단의 설립 취지와 국내외 현대미술의 다양한 현장을 소개해 온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 앞으로의 재단 활동 방향을 더욱 견실히 다지고자 한다. 전시 제목인 "Testing Testing 1.2.3"는 마이크를 통해 무엇인가를 공표하기 전에 마이크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일컫는다. 이처럼 이번 소장품전은 1989년 재단 설립 이래 송은문화재단의 23년과 송은미술대상 12주년 그리고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의 2년의 기간 동안 펼쳐온 활동들을 내부적으로 되돌아 보고, 국내 미술계와 언론 그리고 대중을 향해 국내작가 지원과 해외미술 교류에 집중하는 재단의 취지를 다시 한번 알리고자 기획되었다.
천성명_그림자를 삼키다_합성수지, 천, 전구, 전선, 의자, 아크릴채색_가변설치_2008

전시는 총 2부로 나뉘어 구성되며 1부에서는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2부에서는 외국 작가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제1부 한국 작가 소장품전은 재단의 소장품 중 송은미술대상 귀속작품 일부와 올해 새롭게 소장된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된다. 송은문화재단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송은미술대상과 송은 아트스페이스 운영을 통해 신진작가들의 발굴과 지원, 그리고 국내 작가들의 역량 성장에 주력해왔다.
김주리_휘경동 39번지_흙, 물, 유리상자_57×45×38cm_2010
이선민_수정과 지영-on the mountain_C 프린트_100×121cm_2009

지난 12년간 송은미술대상을 통해 재단에 귀속되었던 작품들 중 대상 수상작들은 수상 발표 등을 통해 공개된 바 있으나, 그 외 수상작들은 여러 해 동안 대중에게 공개될 기회가 없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국내 작가 작품전은 송은문화재단의 주요 관심사와 그간의 활동들을 잘 보여주면서도 과거와 현재, 현실과 이상, 기억과 실제, 세대와 세대 간의 간극과 차이에 대한 서로 다른 관심사와 고유한 표현방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원철_Circle of Being_C 프린트, 디아섹_120×180cm_2008
서윤희_기억의 간격 108_삼합지에 채색_135×205cm_2007

이에 송은미술대상 귀속작품들 중 박자현, 이원철, 최해리 등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작가들 및 김주리, 최은경 등 대상 수상자들의 작품들을 선정하여 소개하며,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던 안두진, 천성명과 송은 아트큐브를 통해 발굴된 한경원, 고석민의 작품들도 소장품에 새롭게 추가되어 함께 선보여진다.
한경원_Ash 20_목판에 혼합재료_120×200cm_2011
고석민_The Square 02_종이에 잉크_74×112cm_2010

제2부 외국 작가 소장품전에서는 송은문화재단이 소장한 다수의 해외 작품 중, 특히 미국 팝 아트에 속하거나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선별하여 전시한다. 팝 아트는 1960년대 초기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화단을 지배했던 구상회화의 한 경향으로 일상생활 속에 범람하는 신문의 만화, 상업디자인, 영화의 스틸컷, 텔레비전 등 대중사회 속에서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를 주제로 삼는 것이 특징이다. 그 대중성과 추상성으로 인해 팝 아트는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유럽과 한국 젊은 작가들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현재도 순수 미술계를 넘어 디자인 분야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데미안 허스트_Lost Memories and Dreams Forgotten_스테인리스 스틸, 유리, 큐빅_ 183×274×10cm×2_2008~9

이번 전시에서는 팝 아트를 대표하는 톰 웨슬만,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등의 작품들과 팝 아트의 영향 아래 직접적으로 속하는 것은 아니나 지극히 평범한 것조차도 미적,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는 팝 아트의 기본 경향과 현대의 대중문화 및 매스미디어에 대한 예술적인 관심을 공유하는 작가들인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등의 작품들이 함께 소개된다.
신디 셔먼_Untitled, Balenciaga Series_컬러 사진_153.7×121.9cm_2007~8

본 전시 "Testing Testing 1.2.3"는 송은문화재단이 꾸준히 이어 온 국내 작가 양성과 지원 활동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양질의 해외 작가 작품의 소장을 통하여 국내 미술문화 지원의 범위와 수준을 한층 끌어올리는 한편, 재단의 향후 작품 소장 방향을 제시하고 공유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송은 아트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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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레모토 토시마츠展 / Toshimatsu Kuremoto / ?本 俊松 / sculpture 2012_1009 ▶ 2012_1018





구레모토 토시마츠_참을성많은 남자Q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11×11×11cm_2012




초대일시 / 2012_1009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월~토요일_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 10월18일_12:00pm~01: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갤러리 담에서는 가을을 맞이하여 일본 오사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구레모토 토시마츠의 조각전을 기획하였다. 오랫동안 평면작업을 해온 구레모토는 근자에 들면서 입체작업에 관심을 가져오고 있다. 2011년 갤러리 담에서도 보여준 바와 같이 구레모토는 현대인의 고독과 괴로움을 묵묵히 이겨나가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작업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나무 위에 함석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조각조각 내어 이어가는 작업에서 비롯하여 사람형상을 석고 페이스트로 만들어서 다시금 조각 칼로써 형상을 다듬어내고 있는 모습에서 샐러리 맨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작은 조각칼의 칼자국은 일상에서 받는 상흔과도 같다. 작가는 작은 사람형상의 얼굴에 서로 다른 눈을 그려서 양면에서 볼 때 다른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는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다. 구레모토 토시마츠는 오오사카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작가의 열 아홉번째 전시로 이번 전시에는 「내가 아니야」, 「신호를 기다리다」, 「포기하지 않는 남자」, 「겨우 보이다」를 비롯하여 신작 17여 점이 보여줄 예정이다. ■ 갤러리 담
구레모토 토시마츠_본적도 없는 경치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21.5×18×17cm_2012
구레모토 토시마츠_내가 아니야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47×13.5×13.5cm_2012
구레모토 토시마츠_겨우 보이다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18.5×12×13.5cm_2012
구레모토 토시마츠_귀가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48.5×23×15cm_2012

내 조각에 등장하는 세일즈맨은, 실제로 대범하고 서글서글한 사람은 아니다. 돌아오지 않을 날들을 그리워하면서 혼자서 연기를 하면서 놀고 있는 세일즈맨, 그것을 바라다 보는 나. 고독과 꿈을 가까이에 끌어들여, 재생의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 구레모토 토시마츠
구레모토 토시마츠_휴일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46×17×20cm_2012
구레모토 토시마츠_제멋대로인 남자_나무, 함석, 모델링페스트_36×21×12cm_2012




私の彫刻に登場するセ-ルスマンは、?におおらかで特別な存在ではない。?らぬ日?を?かしむように、?り演じて遊ぶセ-ルスマン。それを?き見る私。孤?と夢を身近に引き寄せ、再生の物語へと進んで行く。 ■ ?本 俊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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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렬展 / KIMKYOUNGYEOUL / 金敬烈 / painting 2012_1009 ▶ 2012_1020





김경렬_2ne1_유채_91×116.8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경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09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0:00am~06:00pm

박영덕화랑 Galerie Bhak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0번지 갤러리빌딩 B2 Tel. +82.2.544.8481 www.galeriebhak.com





김경열의 '팝 리얼리즘'-근작 「뚜르 드 코리아」와「K-팝」에 관하여1. 작가 김경열이 1980년대 중반이래 다루었던 자연에서 인간의 삶을 관조하는 리얼리즘을 떠나 인간과 인간이 부딪히는 투기장 같은 삶의 현장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8년이었다. 고흐, 워홀, 다윗, 모나리자, 피카소, 달리, 체 게바라, 아인슈타인 등 익히 알려진 미술사와 세계사의 인간상을 등장시키면서 이들의 얼굴을 특화시킨 캐릭터에다 비보이의 다이나믹한 춤사위를 합성시켜 하이브리드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화를 다루었던 게 그것이다. ● 이 가운데서도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는 그가 선호하는 으뜸 캐릭터였다. 이들이 모두 현대 미술사의 거장들이기에, 그에게는 이들을 비보이 패러다임으로 패러디하는 데는 각별한 뜻이 있었다. 그건 과거의 미술사를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옮겨 낯익은 것들을 낯선 것으로 변용하려는 데 있었다. 정확치밀한 근육질에다 코믹한 터치가 돋보이는 제스처, 번뜩이는 눈, 굴절이 심한 반면영상(半面影像)의 역동적인 동체는 당연 볼거리를 가중시킨 바 있다.
김경렬_bigbang_유채_80.3×116.8cm_2012
김경렬_원더걸스_유채_91×116.8cm_2012

그는 이번 근작전을 이 맥락의 연장선에서 다룬다. 그는 전시의 변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껏 우리의 삶의 모습을 기록하는 데 몰두해왔다. 예전에는 풍경과 정물에서, 이후로는 나무를 통해서, 지금은 우리가 즐기는 것들을 통해서 삶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하나의 방법으로서 옛 것 위에 현재의 것을 섞는다. 새로움 혹은 낯설음을 방법적으로 붙잡아내기 위해서다." (작업노트 2012) ● 그는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변함없이 인간의 삶을 기록한다. 옛 것의 이미지에다 현재의 그것들을 섞어 새롭고 낯선 걸 그린다. 그가 근작들에 등장시키는 캐릭터는 예수 붓다 달라이라마 교황 링컨 윤두서 송시열 김수환 어사 박문수 달마 김구 안중근 유관순 미켈란젤로 법정 모나리자 간디 같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다. 여기에다 '원더걸스' '레디가가' '투웨니원' '슈퍼 주니어' '2pm' '소녀시대'를 추가하고 작가 자신을 당당히 추가한다. ● 그가 이들을 주제로 뚜르 드 코리아(tour de Corée)와 K-팝을 다루는 배경에는 지난 시대의 영웅 현자들이 자전거용 헬멧과 의상을 걸치고 현실로 귀환해서 대중을 이끌거나, 우리시대의 팝 아이콘들을 트렌드 메이커의 선두에 세우기 위해서다.
김경렬_harmony-jesus, buddha_130.3×97cm_2012

2. 그가 근작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등장시킨 '뚜르 드 코리아'와 'K-팝'의 씬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현대인들이면 누구나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이미지들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면서도 진솔하다. ● 지금은 모두 웰빙을 원한다. 웰빙의 으뜸이 자전거 주행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 부쩍 자전거가 대 유행을 하고 있다. 자전거가 세계적으로 생활화된지 오래지만, 바퀴달린 이동 수단으로 인간을 엔진으로 사용하는 건 아직 자전거가 유일하다. 나는 자전거를 이 시대의 웰빙을 이끄는 아이콘으로 부각시키려 한다. (작업노트 2012)
김경렬_racing-Tolstoy
김경렬_toul de korea-Einstein, duseo-Yun, Lennon, Picasso

그는 표면상 자신의 웰빙 담론을 그림으로 옮기고자 한다. 과거사와 현재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특정 캐릭터들을 회화의 페이스메이커로 등장시킨 건 이 일환이다. 티벳의 독립을 위해 테레사와 교황이 자전거를 타고 달라이라마에 힘을 실어준다 든지, 달마가 자전거 위에서 신통력을 발휘하는가 하면, 조선의 윤두서와 우암 송시열이 역대 위인들과 경기를 같이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씬을 등장시킨다. 작가는 이 이외에도 주체를 상실한 시대에 소신 있는 정치가의 표상으로 링컨을,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기위해 어사 방문수를, 이념의 갈등과 대결을 완화하기 위해 예수와 부처를 가상적으로 현재의 시공간으로 불러낸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정치적 사유의 편린이 여기서 드러난다. 표면상의 웰빙을 빌려 지상의 유토피아를 꿈꾸고 현실을 상징적으로 이상화하고자 한다는 데 작가의 뜻이 있음을 알린다. ● 이 점에서, 김경열의 근작 리얼리즘은 현실개조를 위한 리얼리즘을 시도한다. 자연의 리얼리즘을 떠나 대중문화의 현실에 존재하는 리얼리즘을 시도하고 대중적 주체들의 현실개조의 의식을 고무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해 고전적이고 무거운 박물관 속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대중들이 즐길 수 있고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팝 리얼리즘을 선사한다. 이는 다분히 연극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회화는 가상무대의 성격을 갖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리얼하지만 코믹한 연기자로 분장하고 등장한다. 이는 캔버스를 하나의 가상무대로 해석하려는 데 뜻이 있다.
김경렬_삼총사-김구, 유관순, 안중근_유채_130.3×162.2cm_2012

궁극적으로, 김경열의 근작들은 '팝 리얼리즘'(Pop Realism)을 시사한다. 그의 팝 리얼리즘은 리얼리즘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매너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캐리커춰럴하기 마련이다. 풍자와 유머가 매력적이다. 이는 과거의 팝아트가 지녔던 앤디 워홀 류(類)의 심각성을 해체할 뿐 아니라, 뉴욕 극사실주의 같은 리얼리즘을 뛰어넘는다. 19세기 말 오노레 도미에가 자신의 리얼리즘을 3등 열차에 실어 캐리커춰럴한 터치로 대중화하려던 선례를 상기시킨다. ● 김경열의 팝 리얼리즘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 그린 리얼리즘이 아니라 우리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의 소비성향을 담은 리얼리즘이다. 그는 연극 연출가가 캐릭터를 다루듯, 과거의 영웅들과 현재의 아이콘들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소비한다. 그의 방식은 지난 날의 팝아트와 리얼리즘을 합성시켜 만인이 즐길 수 있는 우리시대의 팝 리얼리즘을 창조하는 데 있다. (2012, 8) ■ 김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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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UMENT




정지현展 / JUNGJIHYUN / ??? / photography 2012_0920 ▶ 2012_1012



정지현_MONUMENT展_갤러리 水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송파구 전시지원공모 당선작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水 서울 송파구 신천동 32번지 석촌호수 내 Tel. +82.2.2147.2810, 3813 www.songpa.go.kr



민낯을 드러낸 벌거벗은 기능주의 ● 정지현의 사진은 기념비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앞 다투어 솟아올라 기념비 아닌 기념비가 되어버린 도시의 경관들, 그리고 이러한 공간적 정복이 어떻게 시간의 시험을 거치는 지를 주시한다. 전시는 전쟁의 폐허 후 우리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950년에서 60년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변형시킨 『모뉴먼트』 시리즈와 대단지 아파트 공사장을 찍은 『공사장』 시리즈로 이루어진다. 등록 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는, 또는 그에 준하는 건축물을 찍은 『모뉴먼트』 시리즈는 계속 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애초의 용도가 변경된 건축들이 대부분이며, 100년도 채 안된 근대 건축이 얼마나 낯설게 다가오는 지를 강조한다. 우리의 대표적인 주거 문화의 단면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공사장』은 현재 진행형의 역사지만, 『모뉴먼트』 시리즈에 나온 낡은 건축들만큼의 수명도 보장받지 못할, 가속화된 생산과 소비의 주기에 속해 있다. 양자는 모두 시간의 시험대에 오른 공간의 폐허 같은 모습을 강조한다. 모뉴먼트와 공사장의 면모는 화려한 도시 스펙터클의 이면이나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그 핵심을 찌르고 있다. ● 정지현의 사진은 우리의 환경과 관련하여 많이 생각하게 하는 대상을 소재로 하지만, 대상에 대한 건조한 기록이나 애틋한 향수, 도시적 현실에 대한 어떤 강한 주장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는 대체로 지시대상에 충실한 사진의 어법을 따르지만, 작품은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변형을 야기 시키는 재배치는 지금여기의 지배적인 삶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위한 거리두기이다. 전시 제목과 일치하는 『모뉴먼트』(2011) 시리즈의 작품 제목에는 장소에 대한 어떤 정보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볼 이 건물들은 결코 기념비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뉴먼트라는 제목은 매우 풍자적으로 들려온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건축들은 대부분 웅장하게 보이려는 욕망으로 가득하여, 과도한 파사드와 열주들로 이루어진 시멘트 덩어리들이 많다. 당시로서는 멋진 건물이었음에 틀림없었을 대학 건물과 아파트, 상가는 최소한의 현실을 남겨 놓고 낯설게 다가오는 부분을 더욱 낯설게 배치하였다. 기능주의에 충실했을 당시의 건축들은 지금은 그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모호한 부분이 종종 있는데, 그는 그러한 부조리한 기능들을 강조한다.
정지현_MONUMENT展_갤러리 水_2012

다른 것이 첨가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요소로 재구성하는 몽타주는 한 술 더 뜨기 전략에 해당한다. 그는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건물의 일부를 과장하거나 삭제하고 겹치는 방식으로 변형을 가함으로서, 기능주의의 부조리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근대의 패러다임이기도 했던 기능주의에서, 기능이란 결코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역사주의의 끝에서 역사의 마지막 판본을 연출하려했던 근대의 야심 찬 기획들은 무척이나 역사적이다. 역사를 넘어 신화가 되려하는 그의 기념비 컬렉션들에서, 근대의 헐벗은 기능주의는 근대가 극복하려 했던 신화의 시대를 다시 불러들이는 듯하다. 모 대학의 낡은 건물을 소재로 한 작품 『Monument 02』에서 관객은 고대의 신전 같은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2009년부터 시작한 공사장 시리즈는 지난 역사가 아닌, 지금 형성되고 있는 공간을 소재로 한다.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공사장 시리즈는 75×100cm로, 모두 같은 크기인데, 그것은 장소가 달라도 현장을 규정하는 구조는 비슷하다는 것을 샘플처럼 보여준다. 지금은 완공되어 삶의 터전이 된 곳들도 있는 공사장들은 막 지나간 현재이며,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이 중첩된다. 현재의 폐허는 곧 다가올 폐허의 전조인 것이다. ● 작품 속 공사장은 분당 일대의 판교 신도, 인천의 청라 신도시, 서울 신내 택지 개발지구 처럼 아파트 공사장이 대부분이며, 대한주택공사의 협조를 얻어 현장에서 세트를 갖추어 놓고 찍은 것이다. 그는 기본 골조가 되어 있는 거의 완성된 텅 빈 공간들을 탐사한다. 작품에는 그곳이 어느 동네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건축 전문가가 아니고선 아직 무엇에 쓰이는지 알 수 없는 공간과 구조적 장치들은 기능의 낯선 모습을 보여주며, 현장에 있는 물건들을 전시장에 오브제를 놓듯이 재배치한 후 찍은 사진들은 '기능성에 반대되는 행위를 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의도를 예시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시적인 동영상은 상상이 아닌 탐사와 발견의 성과물이다. 태아의 발생으로 치면 아가미처럼 얼굴이 형성되는 단계의 구조들에서 기능의 간극은 넓어진다. 『city project』(2009)는 작가가 찍은 건물 사진을 붙여 도시 모형을 만들어 전자레인지나 식기세척기, 또는 잔디 위 같은 곳에 배치한 것으로, 소비적 기능에 충실한 도시문화를 축소모델로 보여준다. 『city project』는 얼마 전 과거와 현재의, 또는 다가올 미래의 폐허는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짧은 생산과 소비주기에 기인한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정지현_MONUMENT展_갤러리 水_2012

도시는 개발주의의 노선에 따라 대량 생산되어 사용되고 버려질 것이지만, 자연은 이를 얼마만큼 수용해 줄 것인가. 정지현의 작품은 도시의 확장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폐허의 확장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러나 있다. 아파트에서 태어난 세대들 역시 환경이 재개발되는 현장을 보고 자랐으며, 그들의 눈에도 시공간의 간극은 크게 다가올 수 있다. 우리를 둘러 싼 공간은 시간에 저항하는 상대적인 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가차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정지현은 얼마 안가서 또 역사가 될 현장을 담는다. 변화무쌍한 시공간을 담아내는데 사진은 회화보다 날렵한 도구이지만, 그는 무거운 대형 필름 카메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작업한다.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공사현장에서 하루 종일 찍어도 5장 밖에 찍지 못하는 꼼꼼한 작업 방식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광적으로 질주하는 시대의 속도를 거스르는, 그의 말대로 '수행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기계의 힘을 빌어서 도시를 빠르게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면밀한 감식자의 눈으로 시공간을 천천히 탐사한다. ● 이러한 탐사는 맹목적 질주를 끝내고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 되돌아볼 시점을 겨냥한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를 거스르는 그의 작업방식 때문인지 몰라도, 피사체들은 당장 사라질 것 같은 임의성이 아니라, 묵직한 실재감을 가진다. 고도성장을 위해 스스로 뿌리를 잘라낸 과도한 활기의 사회가 세우고 쓰러뜨리기를 반복했던 건물들은 그의 사진에서 기념비로 재탄생한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상징이었을 근대 건축물과 곧 고가의 상품으로서 완성될 아파트 공사장은 고고학적 탐사의 대상이 된다. 막 지나간 과거와 곧 다가올 미래를 한 묶음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둔다. 분칠한 듯 화려한 도시의 스펙터클은 민낯을 드러내고 벌거벗겨진 채 '역사적 깨달음을 주는 단편'(벤야민)으로 다가온다. 작품 속 도시는 인간이 아닌 구조에 의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구조는 역사와 인간, 그리고 그 양자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사회를 싫어한다. 오늘날 가장 큰 구조는 자본이며, 그것은 자기만의 메커니즘을 고수, 확대재생산 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다. 진보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에 의하면, 자본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성장을 이루어내며 새로운 욕망을 창조하고, 인간의 노동과 희망의 가능성을 착취하며 생활 속도를 가속화시킨다. 자본은 과잉축적의 문제를 낳는다.
정지현_MONUMENT展_갤러리 水_2012

인간이 빠진 구조로서의 도시는 유기적으로 통합될 사이도 없이 파편으로 뭉쳐 있다가 다시 파편으로 사라진다. 특별한 조작 없이도 그자체로 충분히 몽타주적인 현실에 약간의 변형을 꾀한 정지현의 작품은 어딘지 모를 이물감을 준다. 성장의 상징인 새로움은 더 빨리 낡은 것으로 변하며 폐허로 향한다. 아직 간간이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의 기억과 관심에서 거의 사라진 근대 건축물들과 그보다 더 빨리 사라질 공사장들은 덧없음이라는 알레고리가 새겨진 유적지의 면모를 띈다. 발터 벤야민은 현대적인 것에서 폐허를 발견한 선구적인 도시 역사 연구자이다. 그램 질로크는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에서, 벤야민에게 사물의 진짜 알맹이는 사물이 본래 위치해 있던 맥락이 사라지고 난 후, 즉 대상의 표면이 부수어지고 소멸의 가장자리에 남아있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몰락, 즉 사물 표면의 부서짐은 그 안에 담긴 비판적이고 유토피아적 계기를 풀어놓는다. 상품의 유토피아적 요소들은 상품의 쇠퇴에서 드러난다. 유행에 뒤떨어진 물건은 유행의 현실을 폭로한다. 벤야민이 보기에 현대적인 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 오직 회고적으로만, 점차적인 소멸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대상의 참된 성격이 나타난다. 소비자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상품을 진열하고 수용하기 위해 부르주아가 건설한 건물에 대한 벤야민의 관심은 그것이 급속히 시대에 뒤떨어져 낡은 것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벤야민과 메트로 폴리스』에 의하면, 벤야민은 19세기에 파리의 첨단 건축이었던 파사주를 '꿈 세계의 잔여물'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현대성의 특징이 순간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이라면 현대성의 진실은 오래 끄는 자취 속에 있다. 현대의 폐허를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시선은 한 시대의 꿈을 다루며, 건축의 신화적 표면과 대상 속에 묻혀 있는 희망과 약속을 발굴한다. 사소한 것, 혐오스러운 것, 어처구니없는 것은 해독해야 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며, 구조해야 하는 귀중한 사물이다. 도시의 고고학자는 신화 속에 담긴 유토피아적 계기, 즉 꿈꾸는 집합체의 참된 욕망들을 포착하여 신화, 즉 강제, 반복, 물신성을 종결시키려 한다. 정지현에게도 대상의 참된 내용은 소멸될 때 나타난다. 그에게 폐허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역사를 말해주는 의미 있는 단편이 된다.
정지현_MONUMENT展_갤러리 水_2012

그의 작품 속 곳곳에 포진한 쇠퇴의 기호는 현대성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의 사진에서 자주 발견되는 버려진 공간이나 용도 변형, 또는 용도 불명의 사물에 내재한 수수께끼는 초현실주의적이다. 그 묵직한 실재감이 주는 신비와 침묵 속에서 현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근대건축이나 건설현장이 모두 폐허처럼 나타나는 작품들은, 기념비가 만들어지자 마지 곧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현대의 속성을 압축한다. 정지현의 작품에서 기념비는 시대의 상징을 담는 중심이 되지 못한다. 그것의 기원과 목적은 모호해진다. 굳이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다면 시간의 시험에 투항할 수밖에 없는 취약함 또는 덧없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기념비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이기 보다는 신화로 다가온다. 그램 질로크에 의하면 기념물은 이중으로 신화적이다. 기념물은 한편으로 거짓된 역사를 환기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영속성을 스스로 선언한다. 기념물을 화석화된 신화이다. 도시는 끊임없이 쌓인 과거의 잔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련의 기념물이다. 망각과 기억을 교직하는 도시는 과거를 정의하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화적 형식과 인공물을 만나게 한다. ● 제임스 영은 『기억과 기념비』에서 기념비들은 기억을 위한 공통 공간을 창조함으로서, 공통의 기억이라는 환영을 선전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공공기념물, 국경일, 공유된 일정들은 결국 모두가 그 주변에 표면적으로 공통의 민족적 동일성이 만들어지는 공통의 장소를 창조하기 위하여 작동한다. 기념비들은 오랫동안 기억을 위하여 귀속화 된 장소를 제공해 왔다. 기념비의 몰락은 지역과 공동체의 사라짐과 관련이 있다. 공통의 경험과 기억,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특별한 장소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기념비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된다.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 국가라는 것이 형성되었던 시대에 선전을 위해서 수없이 만들어졌던 잡다한 역사주의 풍의 기념물을 야만적이고 범죄적인 장식이라고 간주하고 싹 쓸어버리려 했던 모더니즘 역시 또 하나의 쇠락한 기념비로 다가온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기념비는 부활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뿌리 없는 스타일의 유희였을 뿐이다. 모든 것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코드가 되어버린 마당에 무엇은 호출이 되지 않겠는가. ● 제임스 영은 루이스 멈포드를 인용하면서, '근대의 기념비라는 것은 명백히 모순된 것이다. 그것이 기념비라면 근대적일 수 없고, 그것이 근대적인 것이라면 기념비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멈포드는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시대에, 기념비들이 한때 표상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보편적인 상징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지현이 포착하고 변형시킨 근대의 기념비들에서 쇠락의 기운이 역력히 느껴진다면, 그것은 기념비를 중심으로 한 시대를 관통했던 그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합의 불가능성일 것이다. 성장에 대한 강한 지향이 근대 한국 사회에 편재했던 모순들을 봉합해왔지만, 그 헐거운 봉합선들이 하나둘 터지고 있다. 기념비성에 대한 거창한 수사학은 대중을 볼모로 한몫 챙기려는 정치가와 사업가의 어법일 뿐이다. 사회의 중심이나 안쪽이 아니라, 경계 및 바깥에 서있는 작가는 시간보다 더한 시험대 위에 기념비들을 올려놓는다. 정지현은 시간의 흐름을 가장 극적으로 증거 할 수 있는 사진을 이용하여, 새로움의 이데올로기를 폐허로 만든다. 여기에서 폐허는 기념비의 흥망성쇠가 일어나는 장이다. 폐허 위의 이 기념비들은 곧장 반기념비(counter-monument)로 전화한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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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Artist




김기태展 / KIMKEETAE / 金岐泰 / painting 2012_1010 ▶ 2012_1016



김기태_Unknown Artist-Sep 19th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005h | 김기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바움아트갤러리 BAUM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원서동 228번지 볼재빌딩 1층 Tel. +82.2.742.0480 www.baumartgallery.co.kr



내가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어느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나무들을 옆으로 두고 지게를 메고 걸어가는 농부를 올려다보며 역광으로 찍은 사진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어린 나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심지어 나는 그 사진을 수채화로 그리기까지 했는데(농부는 없이 나무와 휜 구름에 푸른 하늘만으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마도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었지만 자연에 대한 어떤 숭고함(지금은 존재의 가치에 대한 의미 있는 배경으로서)에 매료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그때의 그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김기태_Forgotten Garden- Oct 11th 12

나의 작품에 있어서 사진은 현실로서, 실재로서 그곳을 증거하고 그림은 내 의식 속의 그곳으로 이끌어 가는 역할을 한다. 나는 언제나 내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그곳을 그린다. 그 곳의 풍경은 전혀 특별하거나 새롭지도 않고 그저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인, 어쩌면 그래서 더욱 초현실적인 그런 곳이다.
김기태_Forgotten Garden- Dec 23rd 12
김기태_Unknown Artist- April 22nd 11

부드럽고 상쾌한 바람이 내 머리 속을 스치고 내 주위를 가만히 지나가면 밝은 빛이 소리 없이 바람에 일렁인다. 이제는 잘 떠오르지도 않는 오래 전의 그 감정들은 삶의 층위 여기저기에 가지런히 쌓여있다 가녀린 한줌의 바람에 빛으로 변했다 저 높이 올라 하늘거리며 사라져갔다. 어찌 보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한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어린 시절 아마도 교과서에서 읽었을 이 시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첫 구절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내가 그다지 많은 시를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이 구절은 내 작품 속의 그 무엇과 상통하고 있는 듯하다. ● 무명의 어느 사진작가, 롤랑 바르트, 샐리 만, 마르셀 푸르스트 그리고 시몬느 드 보브와르 이들은 나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 김기태
김기태_Unknown Artist- Aug 24th12
김기태_Unknown Artist- July 3rd 12


When I was a young boy, I found a photo in a magazine that I don't remember exactly what it was. It was a photo of a walking farmer carrying a frame on his back by tall trees in a row pointing to the deep blue sky, white cloud from an angle that looking up against the light. For some reason, it gave me so young very deep impression. Even I drew it in water color(only landscape, no farmer, any way I lost it) I was too young to understand the feeling, I think I was fascinated by the feeling, probably it might be the sublimity to the nature(now it is a meaningful background for value of existence in my painting). Several decades later, I found myself drawing the emotions. ● In my work, photography proves the place as a reality, and painting leads it to the place where is in my consciousness. I always draw the place where is in between my consciousness and unconsciousness. The scene of the place is neither looking special nor something new but only coldly realistic. So it might be the reason that can call it surrealistic. ● A fresh and soft breeze blows my hair and passes me quietly, bright lights are calmly ruffled by the wind. The old emotions that are not remembered quietly well spread on the layers of life. They are turned into lights and have gone up to the sky with trembling by the breeze. Maybe 'it is the soundless shouting' 'it is eternal handkerchief of nostalgia waving for the deep blue sea.' The first phrase of this poem that I read when I was a boy has kept staying in my mind with no specific reason. For all this paying due regard to my poor knowledge for poem, it seems to have a good understanding with something in my work. ● The Unknown photographer, Roland Barthes, Sally Mann, Marcel Proust, Simone de Beauvoire, these are my great source of inspiration. ■ Kim, Kee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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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Vanished Season




마루展 / MARU / photography 2012_1010 ▶ 2012_1024 / 일,공휴일 휴관



마루_Vanished Season 2012, part-1 #1_C 프린트_50×50cm_2012


초대일시 / 2012_10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빈스서울 갤러리 Beansseoul gallery 서울 마포구 대흥동 50-2번지 Tel. +82.2.706.7022 www.beansseoul.com



"창들은 비스듬히 열린 채 바깥으로 내다보이는 싱싱한 풀밭을 배경으로 하얗게 윤이 났다. 풀은 자라서 얼마쯤은 집 안까지 밀고 들어올 지경이었고, 가벼운 바람이 방 안으로 불어오자 커튼이 한 끝은 안으로 또 한 끝은 밖으로 나풀거렸는데 그 품이 흡사 새하얀 깃발과도 같았다. 이것들이 끝내는 비비 꼬이며, 설탕을 뒤덮은 결혼식 케이크 비슷한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다가, 이번에는 다시 포도주 빛깔의 양탄자를 굽어보며 살랑살랑 물여울 같은 그림자를 빚어내곤 했는데, 그건 꼭 바다 위를 넘실거리는 바람 같았다."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마루_Vanished Season 2012, part-1 #2_C 프린트_50×50cm_2012
마루_Vanished Season 2012, part-2 #1_C 프린트_50×50cm_2012
마루_Vanished Season 2012, part-2 #3_C 프린트_50×50cm_2012
마루_Vanished Season 2012, part-3 #5_C 프린트_50×50cm_2012
마루_Vanished Season 2012, #1_C 프린트_50×50cm_2012
마루_Vanished Season 2012, #2_C 프린트_50×50cm_2012

진저리를 치듯 자신을 들여다보는 모호함의 틈으로 빠져든다. 그 곳, 가치와 의도가 사라진 텅 빈 의식으로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이자 존재와 부존재의 경계에서 자아는 스스로를 해체한다. 혼돈 속에서 자아는 상실을 경험하며 그 자리를 현상으로 채움으로 '나'는 무기력하게 박제가 되어 굳어져 간다. ■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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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철展 / JISEOKCHEOL / 池石哲 / painting 2012_1010 ▶ 2012_1025



지석철_부재(Non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92×64.4cm_2011


초대일시 / 2012_1010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노화랑 RHO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3번지 Tel. +82.2.732.3558 www.rhogallery.com



지석철-순간의 삶에서 마주한 부재의 자리 ●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내 앞에 무수한 존재들이 있다. 나를 비롯해 내 앞에 있는 저 존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의 이름, 생김새와 재질 등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존재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기에 여전히 낯설고 모호하다. 익숙하고 친근하다가도 문득 모든 존재/사물들은 느닷없이 이질감과 두려움을 안겨주는가 하면 수많은 상념을 부풀려준다. 그러니 모든 존재는 신비하고 더러 구멍 같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힘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이미지나 사물들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올 때, 나는 그것들을 수집하거나 소중히 간직하려는 습관이 있다. 선택된 대상들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이들은 돌연 비일상적이 되기도 하며, 보여 지는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존하는 존재가 되어 인식의 대상으로 의미를 부여한다.&(지석철) ● 지석철은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한 존재(대상)가 이상하게 가슴과 의식 속으로 찌르고 들어와 형성된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언어화하기는 어렵다. 내가 마주한 저 존재로 인해 생겨난 정서, 아우라는 언어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간다. 다만 막막한 느낌으로 덮친다. 그것을 그린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스쳐지나가는, 무시될 수 있었던 사물들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어 특별한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작가란 존재는 무엇보다 바라보는 자이고 반성하는 자이자 자신과 마주한 존재와 함께 몽상에 사로잡히는 이들이다. 그 바라봄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동시에 작가 내부로 파고든다. 결국 모든 그림은 대상을 빌은 작가 내면의 초상인 셈이다. 작가가 응시한 대상이 화면에 들어오는 순간 매우 평범한 저 일상적 사물은 시각적인 의미를 지닌 특별한 그 무엇이 된다. 프레임에 담기면 그것은 단지 정지된 사물이 아니라 감정이 깃든 사물로서 삶의 단면을 내포하고 그 이미지들이 모여 모종의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곧 작가 자신의 삶의, 정서의 풍경이 된다.
지석철_부재(Non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62.5×78.7cm_2012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성의 현장을 지목하는 것을 이른바 현존이라고 한다. 흔히 실재라고도 한다. 그래서 현존이야말로 삶을 근본적으로 설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지금 여기'는 절대적인 삶의 한계인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 현존을 가장 강력하게 구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현존한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 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순간의 삶에서 작가는 무엇인가를 보았다. 바다를 보았고 작은 돌멩이와 파도에 의해 무수히 문질러지고 있는 모래를 보았다. 주변에 놓여진 작은 화분과 엔틱 카메라, 장식용 조명기구와 주름진 천, 그리고 가죽 소파의 피부에 주목했다. 또한 외국 여행지에서 마주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나 해안가 풍경, 뉴욕의 마천루들이 솟구친 풍경 등을 응시했다. 순간 그 존재들과 자신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생겨난 '비일상적 상상'(지석철)이 번져나갔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다가와 상처 같은 것을 남겼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선명한 감정의 파문을 그려놓은 것의 자취를 따라가 본다. 공들여 그려본다. 그러나 그것을 재현한다고 해서 그 감정과 느낌을 오롯이 형상화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암시하기 위해 상황을 연출한다. 서정적인 느낌이 들도록 의도적인 연출을 했다. 그 결과 풍경과 사물 속에 작은 의자를 배치했다. 이 뜬금없는 의자의 출현은 익숙한 풍경의 맥락을 흔들고 배경과 의자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면서 모종의 이야기를 만든다. 의자가 마치 사람처럼 다른 사물을 응시하고 마주하고 있는 듯한 상황이 생겨난 것이다. 의인화된 의자이자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는 매개가 되었다. 작가에 의하면 의자는 본인이기도 하고 한 개인 혹은 인간 군상이 되기도 한다. 무수한 의자들은 미미한 인간의 존재를 투영하고 아울러 애틋하고 쓸쓸함, 그리고 그 의자에 앉았다 사라진 숱한 사람들의 부재를 확인시켜주는 매개가 된다. 작가는 그 부재가 &시간이든 추억이든 회상이든 간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내면적 풍경을, 의자라는 메타포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한다. &의자는 현실이며 일상을 의미하고, 커다란 돌이나 황량한 바닷가의 정경들은 현실을 초월한 자연이다. 미니의자와 자연과의 만남은 분명 현실 저편, 심연의 것에 대한 갈망이며, 고독한 삶의 환희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지석철)
지석철_부재의 기억(The memory of non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50×38cm_2012

바닷가 모래위에 흩어진 돌멩이와 작은 나무의자, 파도가 쓸려가면서 남긴 모래위의 주름들, 길들은 부재를 떠올려준다. 그가 70년대 후반에 그렸던 소파의 쿠션 역시 부재를 암시했다. 의자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몸이 앉았다 떠난 빈자리, 그의 살과 근육을 받아주고 기꺼이 눌렸다 튀어 올라 현재라는 순간에 긴장감 있는 탄성을 유지하고 있는 가죽 질감의 주목이나 의자를 사람이 사라진 바닷가 백사장 위나 여자의 볼록한 배 앞, 헝크러진 침대의 주름진 천위에 놓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모두 지난 시간, 기억을 회상시키는 통로들이다. 누군가 있었다가 사라지고 난 빈 자리다. 그/그녀의 흔적을 강하게 부감시키는 구멍들이다. 그것은 일종의 상실감, 부재의 자리를 부추킨다. 그런데 이미지는 실체의 부재를 전제한다. 이미지 자체가 이미 부재의 증거다.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한 소소한 대상들을 통해 자신의 취향, 기억을 환기한다. 그 사물을 통해 몽상을 한다. 순간 의도하지 않았던 모호한 생각의 고리들이 마구 이어진다. 그것을 연출한 장면을 만들고 이를 다시 공들여 그린다. 그로인해 저 일상의 무의미해 보이는 사물들이 순간 유의미한 존재가 되어 다가오면서 말을 건넨다. 따라서 그림은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사진으로 담아두고 그 사진 안에 작은 의자를 재구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사실적인 재현을 해 나갔다. &나는 언제나 회화의 재현을 생각할 때 눈과 손이 옮기는 정치한 묘사력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 대상과 이미지를 응시하는 개인적인 취향을 바탕으로 어떻게 각색되고 연출되었는가에 재현의 의미를 두고 싶었다. &(지석철)
지석철_부재의 기억(The memory of 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92×62.7cm_2012

사전적 의미의 재현은 묘사, 상징, 구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대상의 현존을 전제로, 그것을 다시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재현이란 단어는 '다시 나타나다 혹은 다시 보여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재현은 표상이기도 하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울 수 없는 거리를 상정한 후, 주체가 대상에 대해 갖는 인식이 다름 아닌 '표상'이다. 그러니까 재현이란 '이미 있는 것을 다시 있게 하는 것이고 보았던 것을 다시 보여주는 행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존재하는 대상을 연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해준다. 즉 재현이라는 말에는 현상에 대한 부정, 그리고 현상 뒤의 어떤 실체나 본질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더불어 그것은 항상 부재를 환기하는 안타까운 상실감의 정서를 간직하면서 진행된다. 지석철에게 재현이란 단지 눈앞에 자리한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 그 자체로 귀결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재현된 존재들로 인해 환기되는 정서나 느낌의 고양에 있다. 주어진 대상의 즉물적인 묘사 너머의 무엇인가를 환기시키는 작업이란 얘기다. 그러니 다분히 관념성이 강한 그림이다. 결국 취향이란 그가 태어나고 살던 고향의 원초적 체험과 그로부터 배태된 경험에서 자유롭기 힘들고 이후 체득된 미술교육이 또한 그렇다. 서정성이 감도는 이 같은 연출은 지석철 개인의 취향이고 정서이자 동시에 그 세대 작가들의 공유성이기도 하다. 지석철의 경우 고향 마산에 대한 추억, 70년대 서구미술의 강력한 영향(미니멀리즘), 한편으로는 아카데믹한 교육을 통해 습득된 뛰어난 소묘력 등이 결합되어 이룬 그림이 '미니멀적인 극사실'과 '모노톤의 재현회화'로 스타일화 되었고 그 안에 고독이나 상실, 부재 등의 심리적 상흔을 삽입한 것이다. 일루젼이라는 구상적 이미지와 평면이라는 추상회화의 전제를 모두 사실이라는 개념 속에 포용하고 있는 것이 당시 극사실주의인데 그 위에 지석철은 자신의 취향과 정서의 세계로 변별성을 유지하고자 한다. 의자는 그렇게 해서 호출된 매개이자 그만의 도상(오브제)이다. 그 의자로 인해 촉발되는 부재의 느낌이나 아련한 회상과 추억, 인간 존재가 지닌 근원적인 상실감을 환기하려는 시도가 자신의 취향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덧 지석철 회화의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이 한 개인의 독자적인 취향과 감정의 세계를 어디까지 밀고 나갈 수 있으며 또한 그만큼 풍부한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문제는 그 역사 앞에 던져진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 박영택
지석철_부재의 사연(The Story of a Non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62×83cm_2011


인간 존재를 은유하고 의미하는 의자, 부재(不在)라는 명제가 역설하는 존재에 대한 기억과 소중함, 만남과 이별,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밀려오는 고독, 그 존재가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들, 그리고 지난 세월의 속내 깊은 흔적들에 대한 애착과 연민… 그렇게 나의 '의자'는 오랜 시간 "의자가 아닌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도 좋을" 존재의 표상으로 읽혀지고 다가가기를 원했다. 그것은 분명 내가 가진 서정(抒情)의 감성을 함께 공유하고픈 작의와 무관치 않으며, 그러한 정서로부터 나는 아직 멀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석철_부재의 사연(The story of non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25×30.2cm_2010


일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발생하고 스러지는 그 곳- 별 관심 없이 지나칠 수도 있을 사물들의 이미지와 나의 '의자'가 만나게 되고 교감하면서, 새로운 사연들은 비로소 화면에 자리를 잡는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장면이 연출되고 또 다른 연상을 자극하는 나의 화면은 다양한 내러티브를 엮어내는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며 무언의 대화 속으로 빠져든다. 존재의 생생한 현존과 비일상적 상상들과의 아주 특별하고 애틋한 마주침이다.

지석철_시간, 기억 그리고 존재(Time, Memory and Existence)_캔버스에 유채_100.7×159.7cm_2012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작품의 조건을 기술하면서, "의미는 어떤 식으로든 물질적으로 작품 속에 구현되어야하고, 사물이 작품으로 변형되는 것은 해석을 통해서"라고 적은바 있다. 나는 언제나 회화의 '재현'을 생각할 때 눈과 손이 옮기는 정치(精緻)한 묘사력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 대상과 이미지를 응시하는 개인적인 취향을 바탕으로 어떻게 각색되고 연출되었는가에 '재현'의 의미를 두고 싶었다. 그리고 사물과 이미지에 얽힌 이야기들은 잔잔한 모노톤(Monotone)의 힘을 빌어 간결하게 제시되고, 낯선 조합과 이질적인 것들의 돌연한 공존을 통해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곧 기억의 윤회 속에 우리를 머물게 하는 유의미한 순간의 발현이며, 애잔함이 묻어나는 절실한 나의 몸짓이다. ■ 지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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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 Trace




이형구展 / HYUNGKOO LEE / sculpture 2012_1011 ▶ 2012_1123 / 월요일 휴관



이형구_Face Trace 002_레진, 인공치아, 스테인레스 스틸 와이어, 아크릴채색, 알루미늄 플레이트, 볼트_ 31×20×23cm_201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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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개인전 개최 작가인 이형구의 개인전『Face Trace』가 갤러리 스케이프에서 열린다.「Face Trace」는 이형구 작가가 2년여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으로서, 인체 골격의 관상학적 연구에서 기인한 조각 작품이다.
이형구_Face Trace 001_레진, 인공치아, 스테인레스 스틸 와이어, 아크릴채색, 알루미늄 플레이트, 볼트_ 36×22.4×23cm_2012
이형구_Face Trace 012_레진, 인공치아, 스테인레스 스틸 와이어, 아크릴채색, 알루미늄 플레이트, 볼트_ 34.5×20.6×22.9cm_2012_부분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다양한 표정으로 복제하여 의도적으로 분할시키고 이를 관상학에 입각하여 전혀 새로운 인물들로 재조합 한다. 여러 인종의 두개 골격과 작가의 다양한 얼굴 표정의 부분들이 겹쳐져 창조된 "Face Trace"는 과학수사에 사용되는 '복안법'과 유사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이형구_Face Trace 010_레진, 인공치아, 스테인레스 스틸 와이어, 아크릴채색, 알루미늄 플레이트, 볼트_ 31.4×18.5×20.7cm_2012
이형구_Face Trace 006_레진, 인공치아, 스테인레스 스틸 와이어, 아크릴채색, 알루미늄 플레이트, 볼트_ 24×18.5×21.6cm_2012_부분

스스로 창조자이자 피조물인 창조의 절대권력자로서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도 실재에서 기인하여 가상으로 종착되었지만 다시 실재 존재할 법한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제작 과정의 엄숙함과 진지함이 현명하게 조절된 이번「Face Trace」시리즈는 불완전과 완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형구의 작품 전반의 기저에 있는 유머와 위트를 내포하고 있다. ■ 갤러리 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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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우展 / LEEGANGWOO / 李康雨 / photography 2012_1011 ▶ 2012_1027 / 일요일 휴관



이강우_템페스트 Tempest_피그먼트 프린트_106×15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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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_10:00am~05:00pm / 10월13일_10:00am~12:00pm / 일요일 휴관

리씨갤러리 LEE C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128번지 Tel. +82.2.3210.0467~8 www.leecgallery.com



바다 Seascape ● 이제까지 나는 사회학적 속성이 강한 주제의식으로 형상이 뚜렷한 것들을 많이 다뤄왔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에 선보일 바다 시리즈는 성격을 적잖게 달리한다. 사진은 형상의 외피(Style)나 그것들로 연출된 특정한 상황을 좇는다. 나와 카메라 앞에 펼쳐진 바다. 과연 바다의 형상은 무엇일까? 혹시 그것을 규정짓거나 전형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아마 그 일은 쉽지 않을 듯하다.
이강우_거제도 Geojedo_피그먼트 프린트_114×171cm_2012

형상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는 상당히 모호하기 짝이 없다. 내게 바다는 빛으로 그 존재가 일깨워지며, 그러자마자 쉼 없는 파동으로 자신의 모습을 일순간 드러내거나 허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액체로 가득 찬 공간이다. 또 그 표면을 투명한 대기가 감싸고 있으며, 그곳을 안개나 비정형의 구름들이 쉼 없이 부유한다. 그처럼 바다는 단순한 요소들로 구성된 꽤 미니멀한 공간이다. 그래서 바다는 어떤 형상이라기보다 그 자체가 바로 질료이지 않을까? 지금 나는 그렇게 여기고 싶다. 내게 바다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않은 형상이전의 단계로서 언제라도 형상을 수렴하고 태동시킬 수 있는 물질로 이뤄진 공간이다. 바다는 그런 자신을 앞으로도 계속 고수해나갈 것이다.
이강우_제주도 Jejudo_피그먼트 프린트_106×159cm_2012
이강우_제주도 Jejudo_피그먼트 프린트_106×171cm_2012
이강우_제주도 Jejudo_피그먼트 프린트_90×135cm_2012
이강우_제주도 Jejudo_피그먼트 프린트_90×135cm_2012
이강우_제주도 Jejudo_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2

바다에도 팩트(fact)가 있다. 나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진 어떤 정황이나 사건 말이다. 그것은 매순간마다 다르다. 이번 전시의 바다이미지들은 나의 눈, 의식, 호흡, 신체가 그 순간들을 주시하면서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결정체들이다. 빛이 물화되고 찰나가 현시된 인덱스(index)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이-종전과 달리 모호한 대상을 다루고 의미를 많이 비워내고 있다하더라도-사진에 여전한 본성의 한 측면을 들춰보는 즐거운 과정으로 비춰지길 바란다. 아울러 거기에 담긴 구성감각, 점선면의 운율, 농담의 변화, 그것들이 지펴 올린 기운과 정취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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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ythmos




라유슬展 / RHAYOOSEUL / 羅愉瑟 / painting 2012_1011 ▶ 2012_1111 / 월요일 휴관



라유슬_흘러가라흘러가라흘러가리라-바티칸_혼합재료, 바니쉬_130.3×193.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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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 Gallery BK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155번지 1층 Tel. +82.2.790.7079 gallerybk.co.kr



라유슬 개인전 2012 리드머스 라이프 ● 흐른다. 멈춰있는 순간조차도, 만물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흐름 속에 내맡겨진다. 바람이 그렇고 시와 음악의 운율이, 세월의 흐름이 그렇다. 이러한 변화는 생성의 흐름을 통한 방향성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머뭇거리면서 혹은 과거를 향해 되돌아보기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희랍의 옛 철학자 헬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말한 것처럼, 판타 라이(panta rhei), 세상 만물은 유전하겠지만 문제는 그 유전(流轉)의 감각들, 구체적인 동학을 느끼고 아는 것이다. 변화의 미세한 감각의 흔들림과 미덕의 앎을 모르기 때문에 매순간이 기대되고, 설렐 것이다. 그래서 인지 라유슬 작가의 미세한 감각상의 떨림이 전하는 감각상의 작용들도 흥미롭지만, 작업 변화의 차이화 과정(différance)을 거쳐 생겨나는 존재론적인 무게감 때문에 더욱 시선이 머물게 된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고민했음 직한 이번 전시의 화두인 리드머스(rhythmos)의 느낌이 제법 묵직하게 다가온다.
라유슬_흘러가라흘러가라흘러가리라-gortz_캔버스에 유채, 바니쉬_116.8×91cm_2012

작가가 주목한, 리드머스는 흐름을 의미하는 동사 'rhein'을 어원으로 하는 희랍어 'rhythmos'에서 유래한 말이고, 오늘날의 '리듬'을 의미한다. 음악적인 것들을 작업의 주요 동학으로 작용하는 작가이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작업의 안과 밖, 그러니까 작업의 내적인 형식과 내용은 물론 작업 자체는 늘 변화에 놓여 있고, 변화를 위해 달라져 왔기 때문에 모두 적용 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어디 작업뿐일까. 작가 자신도 그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내맡겨져 있을 터,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변화란 그저 달라지는 것일 뿐이지 어떤 방향을 굳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작은 차이가 때로는 큰 변화 못지않은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과거를 향한 소급과 성찰을 통해서도 달라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번 전시가 그렇다. 앞으로만이 아닌, 과거를 돌이켜 보기도 하고 머뭇거림을 통해 지금의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라유슬_두사람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라유슬_바다가 시작되는 소리_캔버스에 유채, 바니쉬_80.3×116.8cm_2012

그간 작가는 중첩된 색들이 일으키는 시각적인 파장으로 화면에 음악적 리듬감과 시간성을 입혀내는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형태가 겹쳐지고 그렇게 점진적인 색의 변화에 의한 시각적 움직임과 리듬감, 파동을 통해 감각상의 공명을 작동시켜온 것인데 그 효과가 꽤나 눈길을 요할 만큼 독특한 감성적인 공감을 전달해 왔다. 그리고 그 꾸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시각상의 스타일마저 구축해 왔다. 색과 형이 빚어낸 시각적 효과의 측면에서 추상 회화의 범주에서 작가의 작업을 논할 수 있지만, 새로운 시각상의 효과나 스타일로 변별성을 획득함은 요즘 시대의 회화적 감수성을 그대로 담고 있기에 동시대 회화의 다변화된 흐름 속에서 작가의 작업이 읽혀지기도 한다. 작업을 통해 작가의 내적 심상이나 심리적인 변화를 투영하고 가시화시키고 있다는 점, 특히 추상이 하나의 전통이나 문법이 아니라 우연하고 필요에 의해 선택된 화면상의 효과라는 점에서 이전의 추상의 흐름과는 분명 다르다. 또한 개념적인 역동성이나 자유로운 태도, 화면 속에서의 음악적인 리듬감과 공간감의 효과를 위해 추상이라는 (재변형된) 문법을 차용한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위상 지워질 수 있다. 작가의 내적인 심리상의 변동을 담아내거나 시간의 흐름을 입혀 내는 화법(畵法)이 그렇고, 작업에서 시간과 운동, 공간감의 효과가 창출되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형태와 색감이 만들어내는 시각 효과가 안정적인데다 닿을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비가시적인 것들을 드러내려 한다는 면에서 오래된 회화의 그것과도 유사한 측면들이 있다.
라유슬_또 다른 신화를 찾아서_캔버스에 유채, 바니쉬_162.2×130.3cm_2012

이번 전시에서 크게 눈에 띄는 점은 공간이 더 작업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가득 차 있으면서 비어있는 것들', '또 다른 신화를 찾아서' 등의 그림에서는 공간적인 효과로 인해 화면상에서의 입체감이 더 분명해지고 깊숙해진 느낌이다. 한옥을 연상케 하는 집, 창틀, 그림자 같은 잔상 이미지 등이 드리워지기 때문이다. 음악적인 리듬감이나 운동감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작업들이 평면성의 틀 안에 묶여 있었던 점에 비춰볼 때, 이는 상당히 눈길을 끄는 변화이다. 작가의 말처럼 다른 차원의 공간을 잇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종종 그림을 통해 세상을 둘러싼 삶의 단상들,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들이나 복잡하기만 한 사유의 속내들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것들, 혹은 그림자 지워진 자신의 내밀한 삶을 가시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라유슬_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구나_캔버스에 유채, 바니쉬_116.8×72.7cm_2012

생의 긍정은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또 다르게 고민했던 화두인 '리가토legato' 개념으로 이어진다. 리가토는 이어서 연주하기,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라는 악보기호를 의미한다. 다른 것들과의 연결접속을 통해 더 넓은 삶으로 확장해가는 것이리라. 다른 차원의 공간에 끼어듦으로서 부단히 그 접촉 부위를 넓혀가면서 낯선 새로움들과 만난다. 이러한 연결은 현재, 미래는 물론 과거도 예외가 아니기에, 과거를 현재에 연장시키는 연속적인 생으로 본다는 점에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지속 개념 또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작가 역시 종종 지나간 과거를 소급, 성찰하는 사유를 이어간다. 이 또한 리드머스일 것이다. 이렇게 지속된 기억은 생의 그것이거나 예술에서의 창조의 과정과 같다. 그렇게 작가는 분절된 시간의 흐름이 아닌 부단히 흘러가는 연속적인 시간, 지속의 시간을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작가 역시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의 한 순간을 담아낸 것이 이미지라 본 베르그송처럼 그 매순간에 대한 충일된 의식을 담아 회화로 드러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림에 공간이 들어온 것 역시 더 완숙해진 삶의 존재를 드러내는 변화의 한 징후로 보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라유슬_하늘그림자_캔버스에 유채, 바니쉬_97×162.2cm_2012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리드미컬한 움직임도 어쩌면 그저 화려한 빛깔의 파장이 아닌 작가의 정신적 번민이 녹아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화사한 색채감 속에서도 불안함이 느껴졌던 것이고, 밝고 따스해 보이는 색감 속에서도 어둡고 차가움이 공존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흘러가고 이어가리란 생에 대한 주문은 (여전히 이러한 고민들이 사라지지 않고는 있지만) 무언가 달라질 것만 같은 어떤 변화를 읽게 한다. 그렇게 초연해지고 여유 있어지는 것이리라. 여전히 가득차 있으면서 비워있는 것이라 말하지만, 그 비워있음은 없음으로서의 무가 아닌 존재함으로 가득 찬, 공간의 비워있음일 터이니, 작가의 그림 속에 드리워진 공간감은 분명 예전의 작가와 달라졌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작가는 색을 통해서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넘어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세상사의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사유들을 드러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유의 전개는 모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명확하고 분명한 것들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작가의 작업은 다시 오래된 추상의 어떤 태도와 겹쳐진다. 존재하긴 하지만 닿을 수 없고 비가시적인 어떤 근원적인 것들을 부단히 가시화시키려는 그리기라는 행위의 차원에서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기억의 저 깊은 곳에서 아우성대는 감각을 중첩시키고, 부단히 이어지는 사유의 자락들을 겹치고 포개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추상회화는 지금 시대의 젊은 작가들의 감성의 화용론을 갖고 있되, 오래된 추상이 지향하려는 바의 어떤 방향과도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도달할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생의 근원을 향한 벡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완숙해진 삶에 대한 여유마저 엿보이니, 자유롭게 흘러가고 그렇게 마디마디 삶을 이어가면서,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저 흘러가는 세월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민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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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eam in Silence 고요 속의 외침












강형구_강영민_이명호展 2012_1003 ▶ 2012_1022













초대일시 / 2012_101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갤러리그림손에서는 2012년 4주년 개관 기획프로젝트 『Scream in Silence』를 마련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각 분야(회화,사진,설치)의 정상에 있는 미술계를 대표할만한 작가들(강형구,강영민,이명호)을 모아 그들 자신에게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지, 현시대에의 미술의 역할과 그 방향에 대해서 심도있게 들어보고자 한다. ● 예술가는 작품을 만듦에 있어 '이것이 예술이다.' 라고 예술의 목적과 역할를 정의 짓는다. 이것은 내면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고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하고자 하는 작가의 명확한 외침이며 응집된 에너지를 표출하는 감탄사일 것이다. 이 작업은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며 작가의 명상(고찰)과 고요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작가의 작품에는 작가의 모든 것이 녹아나 있다. ● 그들의 땀방울, 작업과정 들이 파생되어 결과적으로 완성된 작품으로써 보여지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작업)으로 이야기 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얘기하길 원한다. 그들은 소리는 없지만 내면과 다투고 갈구하면서 고요 속에서 외치는 것이다. ● 이번 전시에서는 단순히 창작의 결과물만이 아닌 작업도구, 작업영상, 인터뷰를 통해 한 작품이 완성 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좀더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부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들의 고요한 외침의 소리에 귀기울여 주길 바란다.
강형구_self 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1
강형구_self Portrait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12

Part1. 강형구-시대를 초월하는 명품작가의 외침 ● 우리는 자기의 성격을 형성하듯이 자기의 얼굴을 만들어 나아간다. 강형구 작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인물을 주로 그린다. 그러나 그 인물은 단순히 묘사로 그쳐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얘기하고 있다. 아브라함 링컨은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듯이 얼굴은 그 사람의 정신사의 표현이요, 생활사를 기록하는 중요한 키워드 이다.
Scream in Silence 고요 속의 외침展_갤러리 그림손_2012

이번 강영구 작가의 섹션에서는 작가의 자화상이 디피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업도구들이 전시장 한곳에 어지럽게 놓여져 있고, 작품에 영감을 준 물건들까지 함께해 작품을 완성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줄 예정이다. 질서정연한 전시장의 모습 대신 작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공간도 보여주며 작품들과 함께 마련된 작업마닥 위에는 작업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함께 관객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림도구들이 놓여진다.
이명호_Tree... #2_종이에 잉크_78×114cm_2012

Part2. 이명호- 자연을 닮아가는 맑은 영혼의 소리 ● 단순한 개입(하얀 광목 천)하나만으로 평범한 나무를 사진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놓은 이명호 작가... 작가는 너무 평범하고 흔한 나무라는 소재를 통해 모든 잊혀진 존재들에 대한 가치들을 일깨워준다. 그로써 관객들에게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도 만들어준다. 이명호 작가에 있어 예술은 '무엇인가를 창조해 내는 것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의 한 지점을 들추어내고 환기시켜 다시 보게 하는 도구'라고 말하고 있다.
이명호_Sea #4_종이에 잉크_119×185.6cm_2012

그의 작품들(바다시리즈와 나무시리즈)은 공통적으로 예술의 근본을 파고드는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현실과 비현실 드러냄과 감춤, 쉽게 읽히는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의 상반됨을 가지고 있다.
강영민_아파트 스트램블_스티로폼, 디지털 사진, 설치_2012

Part3. 강영민-사회적 이슈를 던지는 작은거인의 메시지 ● 강영민은 이번 전시에서 그의 작업에서 모티브가 되는 취미의 도구들을 함께 선보임으로써 그간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사회/문화적 문제에 관한 그의 접근방식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을 제공한다. 그는 하나의 문제를 광범위한 사회전반의 문제 그리고 개인의 사적경험과 연결시켜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획득하는데 이번 전시에는 음향장비와 전기부품 등을 한데 묶은 취미의 도구들을 통해 에너지와 사회의 관계성을 바라보는 그의 방식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강영민_취미의 이삿짐_피규어, 앰프, 기타, 음향장비, 설치_2012
Scream in Silence 고요 속의 외침展_갤러리 그림손_2012
Scream in Silence 고요 속의 외침展_갤러리 그림손_2012

본『 Scream in Silence 고요 속의 외침 』展은 작가의 작업을 함께 공유하며 작업에 대해 우리의 상상력으로서 예술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고요한 외침이 시각적 울림이 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작은감동으로 다가오길 기대하는 바이다. ■ 원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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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Man's View










서기환展 / SEOGIHWAN / 徐起煥 / painting 2012_1015 ▶ 2012_1021






서기환_사람풍경-Date_장지에 채색_72.7×90.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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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서초동 700번지) Tel. +82.2.580.1300 www.sac.or.kr






서기환의 금번(今番) 채색 화법은 그만의 창조적이며 독창적 시원함이 어우러 도시화와 기계화에 찌든 현대인에게 새로운 감정의 너울을 주고 있다. 서기환의 최근 작업 "사람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마음이 쉽게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지고 그가 원하고자 하는 그림이 보인다. 사실 모든 예술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예술이 아니다 라고도 명제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린 쾌적한 여러 관계에 대한 감각이 미감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즉, 미란 쾌감을 주는 것이다. 그 반대는 불쾌감일 것이다. 금번 서기환의 미술작업은 쾌감을 준다. 상대방의 의식이 이해를 하게 만든다.
서기환_사람풍경-Sunday_장지에 채색_130.3×162.2cm_2012
서기환_사람풍경-Bathroom to Heaven_장지에 채색_72.7×60.6cm_2012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예술을 보면 모든 현상의 내면적인 본질, 즉 의지 자체를 표현하고자 하는 편이고 선율을 거론한다. 선율은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분명히 설명 할 수 없다. 달리 보면, 예술이 우리들의 가슴 속에 움직이고 있는 의지의 몸부림을 표현하면서도 우리는 여러 사정이나 처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선율이라는 빛에 드리워진 우리의 그림자를 그려나갈 뿐인데, 서기환의 금번 그림에 대한 첫인상은 상쾌하다. 시원하다. 짜임새가 있는 것은 물론 인물화의 진수가 되어가고 있다. 심지어는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해학적 즐거움과 선율을 주고 있다. 작가의 그림에 오랫동안 멈추어 서게 되고, 평자입장에서도 형식, 사회적 위치, 이해관계가 아닌 좋은 작가의 작품 글 쓴다는 것이 평자는 행복하다.
서기환_사람풍경-Husband and wife_장지에 채색_65.1×90.9cm_2012
서기환_사람풍경-Coffee Holic_장지에 채색_30×30cm_2012

그의 그림을 보면서 먼저 거론하고 싶은 것은 인물의 기술과 진수가 보인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대체로 오랜 세월에 걸쳐 붓으로 생각하고 글씨와 그림을 그려 왔다. 눈앞의 대상물과 머릿속의 이미지는 모두 점과 선으로 구성하고 호흡과 억양, 숨결, 마음의 도움으로 표현을 해왔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은 거기에 드러나 있는 내용이나 의미하고는 다른 광경을 보고 낚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서기환의 관리된 일상의 소재들이 상대방에게 무감각하고 부담 없이 포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작가의 호흡과 내용이 일치되어 더욱 특별스럽고 즐거운 너울이 자리한다. 또한, 작가의 시원함과 즐거움은 작가가 화면에 그려낸 채색 인물의 진수들로 인한 긴장감과 교차하여 여유와 해학으로 나타난다.
서기환_사람풍경-Bungee Jumping_장지에 채색_68.6×60.6cm_2012
서기환_사람풍경-Girl pollen_장지에 채색_33.3×24cm_2012

"사람풍경"에서는 도시의 풍경모습만으로 표현되어지던 발걸음을 결혼이란 인생에서 새로운 삶의 장을 맞아 작가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의 삶속에서 일탈을 꿈꾸듯 그려지는 풍경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작품을 보는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식상한 일상이 아니라 유쾌하고 유머가 있는 일상의 모습을 꿈꾸게 하고자 하였다. 처음 마음을 졸이며 함께 하는 데이트의 연인, 일요일 늘어지게 잠자며 즐기는 여유에 반해 그 모든 여유를 청소기로 밀어버리고 싶어 하는 와이프, 15층 아파트에서 즐기는 번지점프,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마시는 한 잔의 커피 등을 Date, Sunday, Bungee Jumping, Coffee Holic, Husband and wife, Bathroom to Heaven 등의 제목으로 18세기 풍속화에서 보여 지는 해학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게 유쾌하게 풀어 보았다. 그의 금번 작업들은 즐거움, 솔직한 표출행위, 섬세하면서 아기자기한 율동감과 흐름, 그러면서 자유스러우면서도 절제된 그의 작업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가의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은은한 청량감이 생겨난다. ■ 안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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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생각하기










이택근展 / LEETAEKKEUN / 李澤根 / installation 2012_1015 ▶ 2012_1025 / 월요일 휴관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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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15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시뮬라크르의 공간을 직조하는 조각적 설치 - 하나의 풍경 ● 전시장에 첫발을 내딛는 관객들은 그곳에서 가득한 풍경 하나를 만난다. 그것은 우리가 문명의 일상에서 흔히 보아온 도시의 한 단편이다. 더 정확히는 보도블럭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인도와 횡단보도가 있는 아스팔트 차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의 한 단면이다. 그것은 일상의 공간으로부터 통째로 전시장이라는 예술의 공간으로 옮겨져 있다. ● 이 '조형물 아닌 조형물'은 사실 작가의 작업실로부터 옮겨진 것이다. 이택근은 전시장에 딱 들어맞는 크기의 바닥 구조물을 위해서 30cm x 30cm 크기의 350여개의 보도블록을 여름 내내 땀을 흘리며 만들어내야만 했다. 거기에 덧붙여 실재와 같은 보도블럭과 아스팔트의 표면질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화선지 위에 톱밥, 종이죽, 숯, 먹 등을 배합하면서 연금술사와 같은 실험을 지속해야만 했다. 그가 모든 설치물의 조각조각을 주문제작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표면방수, 샌딩조차 일일이 수공의 육체적 노동으로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그의 이번 '조각적 설치' 혹은 '설치적 조각'에는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의 땀과 손길이 오롯이 담겨있다 할 것이다. ● 여름부터 가을까지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왜 이러한 무모해보이기조차 한 노동을 실천해왔을까? 나무틀 위에 '진짜 같은 가짜 아스팔트와 보도블럭'을 만들어 전시장에 옮기면서 그가 성취하려는 예술창작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의 전시가 어떠한 대답을 내리고 있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매우 단순한 유형으로-그러나 복잡한 과정을 거친- 어떠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음을 안다. 그것의 하나는 분명코, 진짜/가짜, 실재/가상, 실재/허구와 관련한 예술의 오랜 전통인 미메시스(mimesis)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 바닥으로부터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들이나 한쪽 벽면에 투사되는 불꽃 영상들이 유추하게 만드는 메시지처럼 관객과의 어떠한 소통에 관한 것이다.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사물의 재현과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 ●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러한 대답을 찾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이택근의 이전의 작업들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독일 유학 동안의 조형 연구를 마무리하는 2002년 졸업전을 거쳐 귀국한 이후, 여러 차례 가졌던 개인전에서 사물의 재현과 그것에 관한 존재, 인식, 의미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해왔다. 때로는 시멘트조각, 숯, 선인장 같은 사물들을 진짜같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눈속임으로 '실재와 허구'의 문제를 탐구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동전을 채워 넣은 작은 나무박스와 거대한 철궤가 균형을 이루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해냄으로써 '허구적 사물'에 부여된 중력의 의미를 탐구하기도 했다.(2005, 브레인팩토리) 한 없이 가벼운 재료로 감쪽같이 만들어낸 '거치대에 걸려있는 역기'(2005)나, 말려 있거나 테이블 위에 걸쳐져 있는 녹슨 철판, 그리고 천장에 매달려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2007, 쿤스트독)이 실재의 역기, 철판, 콘크리트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관객은 '실재/허구'에 대한 대비적 존재 및 인식에 대해서 던지는 작가의 질문을 비로소 곱씹어보게 된다. 이처럼 작가 이택근이 만들어내는 '가짜 사물들'은 존재, 인식론에 관한 어떠한 대답도 유보하면서 그의 작업이 실재/허구에 대한 회의 자체로 비롯되고 의문제기로 종결되고 있음을 우리게 알려준다. ● 조각의 언어로서 탐구하는 '사물의 재현'과 그것에 대한 의문제기로 지속되어 온 그의 작업이 새로운 방향성을 만나게 된 것은 이것에 끌어들인 공간성에 관한 화두였다.(2009, 쿤스트독 컨테이너). 그것은 작가 이택근으로 하여금, '진짜 같은 가짜 만들기'라는 '사물의 외적 재현' 혹은 '사물의 표면적 재현'에 집중해온 조형언어로부터 한 단계 확장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공간 탐구'는 단순한 사물의 재현과 나열이라는 응축된 창작언어로부터 탈피하게 하면서 그의 작업을 '조각에 방점이 찍힌 설치적 조각'으로부터 '설치에 방점이 찍힌 조각적 설치'로 이동하게 하는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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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가 직조하는 공간 ● 이택근의 '조각적 설치' 언어는 그간의 그의 '설치적 조각'을 시뮬라크르(simulacre)가 직조하는 공간, 즉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공간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 주지하듯이, 시뮬라크르란 플라톤이 이데아로부터 모방된 감각의 세계에 하등의 질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2구분 중 '원본의 복제'에 대한 최저급의 개념으로 고안된 '복제의 복제'로부터 기원했다. 이후, 이 개념은 들뢰즈에 의해 전복되고 보드리야르에 의해 새로운 해석으로 전개되어 왔다. 시각예술의 차원에서 검토할 때, 플라톤에게서 시뮬라크르는 '복제(현실)에 대한 복제(예술)'로 이데아를 논할 가치조차 없이 거리감을 갖게 만드는 하급의 존재였다면, 들뢰즈에게서 그것은 '자기 동일성'이 없는 '차이의 반복'을 무한히 생성시키는 존재의 원동력으로 부상한다. 플라톤과 달리, 들뢰즈에게서는 모방해야 할 원본의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아 보드리야르로부터 허무주의적 사유의 근원지로 검토되기까지 시뮬라크르는 그 모습이 재정의를 거듭해 왔다. ● 그렇다면, 이택근의 '설치적 조각'이 유발하는 시뮬라크의 세계는 과연 무엇일까? 플라톤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코 시뮬라크르이며, 그 중에서도 '진실한 모방'으로 풀이되는 에이콘(eik?n)이기보다는 '사물성을 왜곡하는 외형의 모방'만을 시도하는 회화와 같은 판타스마(phatasma)의 세계이다. 이택근이 조각적 설치를 통해서 가짜 인도와 차도를 실재처럼 보이도록 눈속임 기법을 총동원해서 외형적 이미지를 마법(goêteia)화하는 만큼, 그의 작품세계는 피상적으로는 회화의 오랜 전통인 미메시스를 충실히 원용하는 듯이 보인다. ● 아서라! 그러나 정작 가짜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의도를 깊이 들어다본다면, 그의 작업세계를 플라톤의 판타스마로 정의하는 일이란, 그의 작품의 본질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택근의 조각적 설치가 시도하는 모방론이란 시뮬라크르에 대한 들뢰즈의 긍정적 해석과 보드리야르의 회의적 해석 사이에 걸터앉아 있거나 그 둘 사이를 왕래하는 그 무엇으로 정초된다. 즉, 그가 시도하는 복제의 대상인 '오늘날 도시의 단면'이란 더 이상 원본이 없는 복제물임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차이만이 동일성을 지니는' '같은 것 하나 없는 다름들'의 '사건들'이 지속되는 이질성(hétérogénéité)의 공간이자, 보드리야르식으로 말하면 '실재(réalité)보다 더 실재 같은 초실재(hyper-réalité)'의 공간이다. ● 그가 모방한 아스팔트나 보도블럭은 창성동의 것도, 삼청동의 것도 아닌 아스팔트 도로(실재)의 보편적 유형학(이미지)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느 것 하나도 복제의 대상과 같은 것이 없는 이질성들만이 지속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생멸(生滅)하는 우리 인생의 사건들처럼 '시뮬라크들이 창출하는 즐거운 사건들'의 연쇄들이다. 설치 구조물 맞은 편 벽에 투사되는 '불꽃놀이 영상'은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의 이질성과 더불어 '생성/소멸'의 공존이라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꽃놀이가 만들어내는 '생성'의 불꽃들이 상호 비슷해 보이지만 어느 것 하나도 같은 모양으로 산포(散布)하고 소멸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이택근_무제_MDF에 종이, 먹물, 톱밥_가변크기_2012_부분

시뮬라시옹에 대한 재성찰 ● 이층으로 올라가자. 거기에는 전시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계단식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 앉아보자. 이곳에서 우리는 아래에 펼쳐지는 아스팔트길과 보도블럭이 '진짜 같은 허구적 실재'인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였음을 확증하게 된다. ● 이층의 전망대 장치는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트가 만들어내는 시뮬라시옹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 동안의 좁았던 '수평적 시각'을 반성하게 하면서 비로소 '부감적 시선'과 같은 드넓은 방식의 새로운 시선을 요청한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아스팔트길에 그려져 있던 일방통행 기호(sign) 또는 지표(index)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회의 구조틀에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구겨 넣으며, 허겁지겁 살아왔던 우리의 그간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반성케 하는 지점이 된다. 즉 이곳은, 모든 사물들이 기호로 대체되어가는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 없이 기호를 소비해왔던 우리 스스로를 반성함과 동시에 그 기호를 재성찰하는 지점이 된다. ● 이곳에서는 아래층에서 보았던 높은 벽면에 부착된 창문이 기실 폐쇄된 벽에 덧붙여진 가짜 창문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또한 이곳은 바닥으로부터 벽을 타고 올라가는 파이프들을 올려다보던 시선으로부터 이탈시켜 비로소 그것들을 굽어보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에서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황혼기를 추체험케 하는 미래적 시공간의 장치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층의 전망대 공간이 불꽃놀이가 만개하고 있는 벽면의 상징적 공간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도 이러한 이층 전망대의 상징적 위상을 강화시킨다. ● 그런 면에서 이 공간은, 관객들이 저마다, 허무주의적 사유로 점철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라는 오염된 현실계로부터 잠시나마 탈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전지대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곳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가 이택근이 문제제기한 시뮬라크르의 세계에 대한 미래적 처방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명상소(冥想所)가 되기에 족하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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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성展 / BAEJOONSUNG / 裵俊晟 / painting 2012_1017 ▶ 2012_1107 / 월요일 휴관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Phantom of Museum O , sketch girl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290.9×197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330c | 배준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산책자 배준성. 그림 속을 거닐다. ● 배준성은 비닐 레이어 작업과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렌티큘러 작업 그리고 최근에 선보인 에니메이션 영상작업까지 표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전개해왔다. 관람자들로 하여금 작품을 수없이 들춰보고 움직이며 상상, 변형할 수 있는 여지를 작품에 두어왔고 이는 늘 재미있는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현 시점에서 그가 사용하는 매체의 표현 방식이 새롭고 독특한 무엇이 되지 못할지라도 배준성의 작업들은 작품에 드러나는 도발적 이미지와의 상승효과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우리는 늘 본다는 행위를 통해 보여지는 것들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대화 중에 곁들여지는 손놀림과 표정, 초상화에 그려진 의복 혹은 포즈로 인하여 드러나는 어떤 인물의 권위와 사회적 위치, 정황 묘사를 통한 시간적 복선,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 라고 선언하는 어떤 전복적 사고까지,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은 주장하고 함축하고 예언한다. 이어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경청하게 하며 이미지의 정의는 일원화되고 고정되어 불변한다. 이처럼 이미지의 역사는 의미하기와 의미 강요하기의 역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Museum R, legs left 3_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81.8×290.9cm_2012

현대의 이미지는 조금 더 진지하고 집요한 이해를 요구하며 중첩된 베일 속에 그 실체를 미루어둔다. 진의(라고 추정하는)가 드러나는 순간의 지적 쾌감은 증폭하였고 이런 성취감을 이미지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상정하며 점점 더 치밀한 개념과 암시를 설계한다. 배준성의 이미지 또한 언뜻 보기에 일련의 탈 맥락적 구성 때문에 그 역시 어떤 개념의 코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물음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의 작품들은 그 동안 보여준 다양한 표현형식의 변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원작과 재해석하는 작가 그리고 이를 관람하는 관람자의 '상호성'을 염두에 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상호성은 예측 가능한 어떤 인과적 결과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늘 우발적이다. 이러한 공통분모 속에서 우리는 그가 제시하는 거창한 시대정신이나 이데올로기적 코드를 발견할 수 있을까?
배준성_Tazan of Balzac Musuem (발자크 미술관 _ 여경)_캔버스에 유채, LED 패널_193.9×259.1cm_2012

작가가 모종의 기획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기획의 본래 의도는 오해 받고 변질되기 십상일 것이다. 자크 라캉 (Jacques Lacan)의 저서 『에크리』 (ecrit-글모음집)는 저술 과정에서부터 특이한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에크리』는 읽히지 않기 위해서 쓰였다고 라캉 스스로도 고백하였고 실제로 쉽사리 읽혀지지 않는다. 심지어 독해의 난해함은 차치하고라도 그저 읽어 내려가기 조차 힘들다. 왜냐하면 라캉은 글 또는 언어라는 상징(the Symbolic)을 통해서는 상상(the Imaginary)과 실재(the Real)에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겨 글쓰기 자체를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로 치환하지 않고 자신이 인식하기 좋은 형태로 비틀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방식을 통해 견고한 의미로 가득한 세상의 차이와 반복을 무수히 언급함으로써 간혹 그 견고한 틈을 비집고 실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도한다. 집중해서 탐독 할수록 진의를 파악하기 힘든 『에크리』처럼 배준성의 현재 작업도 초기의 화가의 옷(The costume of Painters) 시리즈의 우발적 재배치를 통하여 해석 불가능한 어떤 지점으로 관찰자를 인도한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hadow of Museum Ka , J.J.Lefevre odalisque ds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93.9×259.1cm_2010

"Museum" 시리즈가 이러한 시도의 초기 형태라고 가늠해 볼 수 있다. 과장된 농담을 가미하자면 이렇다. 애국주의에 경도 된 한 인물이 화가의 옷 시리즈가 자리잡은 서양의 미술관을 보고 '한국계 동양 미술가의 서양문화 정복'이라는 표면적 해석을 가한다면 그 해석은 우스꽝스럽게 작가의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내릴 것이다. 하긴 실로 어떤 종류의 해석이든 마찬가지 결과일 것이다. 한 기사에서 작가가 "Museum" 시리즈를 놓고 언급한 코멘트의 말미가 눈에 들어온다. "내 작업의 모티프는 명화다. 렌티큘러 작품이 명화가 걸린 유명미술관 벽면에 걸리고, 그것을 작품 속 관객이 보고 있고, 그 그림을 지금 한국관객이 또다시 보는 상황이 흥미롭지 않은가." 배준성은 렌티큘러를 그곳에 위치시키는 행위와 주변의 정황적 변화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Peeling Wall_Window , Landscape Forest 2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81.8×259.1cm_2011

"Peeling Wall_Window" 시리즈에서 이런 우발적 정황이 더욱 두드러짐을 포착 할 수 있다. 김 서린 투명 유리창 너머의 장소. 그는 그리스 유적이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호텔에서 그 너머를 바라본 것 일까? 사실 작가는 투명 유리창이 아닌 욕실의 흐려진 거울에서 작품이 기획되었다고 말한다. 손으로 지워낸 너머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이 아닌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바라본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till Life with mirror in shoe shelf_115.3×80cm_2012

"Still Life" 시리즈는 표현하는 대상에게 목적 없음의 성향을 띠는 그의 이런 태도를 강하게 대변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미술사를 통해 우리는 정물화(Still Life)가 작가의 의도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 혹은 생활환경, 생각을 드러내는 그림이며 박제된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샘 테일러 우드(Sam Taylor Wood)의 "Still Life"는 영상기술을 통해 기존의 정물화의 속성 중 한가지인 고정된 순간을 변화하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부패하며 변화되는 토끼의 신체 혹은 과일 등은 북유럽 정물화에서 나타나는 바니타스(Vanitas: 세속적인 삶이 짧고 덧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그림, 해골, 타 들어가는 촛불, 엎어진 접시 등의 대상이 등장)의 패러디 혹은 극적인 효과증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정'에서 '변화'를 찾는 키워드는 유사하나 배준성의 정물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연관 관계의 단서를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 변화를 통해 일종의 메시지를 던지는 샘 테일러 우드의 정물과 다른 점이다. 꽃으로 변하는 책과 강아지로 변하는 구두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 - Still Life with toy in bookcase, a square_렌티큘러_80×80cm_2012

이처럼 배준성은 자신의 회화가 탄생하고 보여지게 되는 여정을 통해 생성되는 수많은 오해와 의미의 변화를 온전히 전하고 설득하고자 하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종종 인용하는 산책자(Flâneur)의 시선으로 주변에 산재한 오판을 예감하고 방치함으로써 어떤 동일화 되지 않은 각성을 기도한다. 종합하자면 그의 표현이 가지는 의의는 이미지의 역사가 수행해왔던 의미 '명명하기' 또는 '해체하기'를 통한 숨겨진 진리 드러내기에 그치지 않고 행위 자체에 그 뜻을 둔다는 것에 있다. 작가는 부지불식간에 행하여지는 수많은 행위를 통해 이미지가 암시하는 기존의 의미망에서 벗어나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뒤이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어떤 감각을 통해 지금껏 감지되지 않은 창조성의 근원을 기다린다. ● 그의 작업에 대한 이런 해석적 시도 역시 우스꽝스런 역설을 담고 있음을 에둘러 설명하려 하는 것은 무작위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이 글의 논리 전개만큼 허망한 일일 것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 앞에서 흔들거리고 있을 관람자의 몸짓이 그것을 증명하듯, 오늘도 그의 그리기는 의미화의 폭력성에 유쾌한 회화적 제스쳐를 드러내며 항거 중이다. ■ 방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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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10.19 10: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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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남동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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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ANDSCAPE






임태규_장승효 2인展 2012_1019 ▶ 2012_1108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019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C 공간 INTERALIA ART COMPANY SPACE C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a Landscape : 새로운 형식의 풍경 ● I. 풍경화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리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회화 장르가 아니다. 미술사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를 그것의 주제로 삼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등장하는 건축물이나 인간, 사건 등이 주제인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우리가 분류하는 독립적인 풍경화, 이를테면 그린이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만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그려진 순수한 의미로서의 풍경화는 17세기에 이르러서야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정의 내려졌다. 이후 풍경화라는 장르는 자연주의 화가들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고 19세기에 와서는 인상파의 영향으로 근대 풍경화의 개념에 맞는 독립적인 장르로서 정착하기에 이른다. 종교화나 역사화의 한 부분에서 출발한 풍경화가 개별 장르로서 분류되기 시작하던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근대적 의미로서의 미술시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지점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또한,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종교의 권위나 정치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일부 기득권 세력의 지시와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생산품이 아닌 그야말로 작가 스스로가 생각하는 어떤 가치나, 혹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예술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보여지는 지점이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미술계가 변화하기 시작한 이유는 이 시기에는 왕족이나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에서도 집에 그림을 걸어놓는 것이 유행처럼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이상 필요에 의한 예술이 아닌 미적 접근으로서의 예술이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라 봐도 좋을 것이다. 이는 화가들이 직접 고객을 찾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그림만을 그려주는 주문제작의 형태에서 벗어나 더욱 개성 있게 작가 스스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완성해 놓고 그것을 고객이 찾아와 구입하는 방식의 '화랑'의 개념이 도입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임태규_Fly away home #30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38×173cm_2010~11
임태규_Fly away home #33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03×146cm_2012

그러나 이렇게 미적 기준에 부합하기만 하는 풍경화의 제작 방식은 이후 특별한 변화 없이 지루하리만큼 비슷한 형식으로 지속되었다.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야만 올바른 것인지, 삼원법을 실천했는지, 빛의 각도나 세기에 따라 색감 표현은 제대로 되었는지 등을 따지고 분석하느라 정작 예술의 근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철학과 시대정신에 대한 논의는 배제되어 버렸다. 결국 풍경화라는 장르는 미의식의 표출에 근거한 표현방식에만 집착하여 다른 회화양식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발전상을 보여주게 된다. 근대에 와서야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를테면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은 자연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그 자연을 있게 한 어떤 에너지, 그리고 공기와 빛, 바람 등의 가시적 영역에서 벗어난 것들에 대해 우선 언급되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의 풍경화는 철학적 개념이 도입되며, 그것이 지난 4세기 간 과학적 영역에 기대어 있던 것에서 벗어나 형이상학적 형태로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현대미술에 있어서 풍경화의 개념은 수 세기에 걸쳐 돌고 돌아 다시 그것이 시작되기 이전의 지점으로 회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17세기에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정착하기 훨씬 이전, 예컨대 석기시대에 더 많은 수렵을 기원하며 암벽에 들소를 그려 넣었던 그들의 신앙과도 같은 정신성에서 비롯된 풍경화와 궤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본 전시는 오로지 미적 기준에 부합시키기 위해 17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비슷한 형태로 제작되고 있는 풍경화의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아가 현대미술에 있어서 정신성이 강조된 풍경화란 과연 무엇인가를 짚어 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임태규_Fly away home #35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43×74cm_2012 임태규_Fly away home #37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43×74cm_2012
임태규_Desperado #6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74×143cm_2012

II. 표면적으로 보면 전혀 달라 보일지 모를 두 작가를 굳이 '풍경'이라는 포괄적 제목을 부여하며 함께하게 된 이유는 이들의 작품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몇 가지 근거들에서 기인한다. ● 첫 번째로 이들은 그간 예술가들이 오랜 세월 천착해온 전통적인 매제를 여전히 사용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람자에겐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비추어 진다는 특성이 있다. 임태규는 가장 오래된 회화 재료인 지필묵을 사용하고 있고, 장승효는 조각의 가장 전통적인 형태인 콜라주를 이용해 작품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이 전혀 진부해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현대적인 이미지만을 소재로 내세우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만의 표현 기법을 새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지는데 예를 들어, 임태규의 경우 화선지의 표면에 직접 선을 긋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뒷면에 먹물을 머금고 있는 화판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 화선지를 살짝 얹혀 놓은 상태에서 끝이 뾰족한 무언가로 재빠르게 드로잉을 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이것은 그간 화선지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화선지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문인화에서는 속도감이 있는 얇고 날카로운 선을 절대 표현할 수 없다던가, 필획의 속도가 화선지의 수분을 빨아 들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여 캔버스 작업에 비해 밀도 있는 디테일 작업이 불가능했던 단점들을 보완했다고 보여진다. 기존의 전통적인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장승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는 조각이 가지고 있는 문제라 할 수 있는 배경의 부재와 사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인 입체성의 부재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해 왔다. 사진의 조각들을 콜라주로 활용하면서 이러한 단점들을 동시에 보완하였고, 나아가 그는 다양한 시간대의 공간을 한 화면에 모아 제시하면서 사진이 담지 못하는 시간성, 예컨대 찍는 순간 하나의 지나간 과거가 되어버리는 사진의 한계에 다양한 시간대와 공간성을 부여하여 작품 내에서 시간의 흐름과 새로운 공간의 탄생을 동시에 실현해 내었다. 이들의 태도는 과거 미술사에 등장하는 선배들의 경우와는 사뭇 다른데, 저들이 기존 작품과의 차별성에만 주안점을 두어 단순히 재료와 기법의 변주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작품이 보여지기 위한 필요에 의해 새로운 기법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
임태규_Marginal Men in Erehwon #6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73×138cm_2012
임태규_Fly away home #36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43×74cm_2012 임태규_Fly away home #34_한지에 오리엔탈 컬러, 먹_143×74cm_2012

두 번째로 이들 작품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실현 불가능한 거대담론 투성인 당대의 미술계에서 소소한 자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을 통해 개인의 넋두리만을 늘어놓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결국 사회를 이루는 것은 집단이고, 그 집단을 이루는 것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대다수의 젊은 작가들이 개인과 집단을 뛰어넘고 사회에 대한 거창한 이야기만을 펼쳐낼 때 관람자는 그것들을 바라보며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주변의 일상적 소재를 가져와 그려내며 매 순간 일탈과 방황을 꿈꾸는 임태규의 작품과 현실에서 항상 마주하는 풍경과 기억의 잔상을 한 화면에 동시에 제시하며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고 있는 장승효의 작업은 상당부분 닮아 있다.
장승효_Fantastic Cave-Europe 2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60×90cm_2012
장승효_Secret Garden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90×60cm_2012

세 번째로 이들의 풍경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하고 객관적인 풍경(The Landscape)이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과 상상력의 편린들이 모여 응집된 지극히 주관적인 그들만의 풍경(a Landscape)이라는 점이 공통적이다. 이 부분이 바로 서두에 언급했던 정신적 영역의 풍경이라 말 할 수 있을 텐데, 망막과 시지각에 의지하여 비친 풍경이 아닌 작가의 주관적 정신이 만들어 낸 어떤 장면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형태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시각이 아닌 정신성의 요구로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는 방식은 사실 그리 특별한 시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접근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앞서 말한 새로운 기법의 도입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밀도 있게 압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임태규와 장승효의 작품을 풍경이 아닌 일종의 상상의 영역으로 인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경험하지 않은 사건이나 목격한 적 없는 가상의 대상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각자의 삶에서 기인한 이미지들의 조합이라는 면에서 단순한 상상화의 갈래로 분류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어쩌면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이처럼 상상보다도 더 비현실적인 형태로 다가왔을 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장승효_Old Landscape-Korea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90×180cm_2012
장승효_Old Landscape-Europe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90×180cm_2012

III. 그 동안 풍경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와 가치가 수세기에 걸쳐 변해 왔던 것처럼, 표면적인 결과물에만 열광하던 관람자들의 태도 또한 시대에 맞게끔 변해야만 한다. 예술의 출발선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철학, 그리고 그것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개념에 좀 더 무게를 싣고 있는 현대미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처지에서 보면 당연한 노력이겠다. 물론 이것은 비단 풍경화라는 장르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예술 전분야에 걸쳐있는 당연한 흐름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야 말로 바로 예술의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 임태규의 작품이 일러스트적 요소를 근간으로 한 희화화 된 소재들의 총집합이라 하여, 정작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처절한 이면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나아가 주제와는 상반된 가벼운 표현방식으로 인해, 특정 집단에 소속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맴돌고 있는 주변인으로서의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작가의 주제의식이 외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되겠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즐거운 군상들과 묵직한 주제의 큰 간극은 현대인의 불안과 외로움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여지를 제시한다는 면에서 묘한 긴장감 마저 불러일으킨다. ● 장승효의 작품 또한, 사진과 조각의 결합, 그리고 표면을 감싸고 있는 전혀 새로운 매체로 인해서 관람자가 표면의 하이브리드적 메커니즘만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 역시 안될 일이다.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들과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이 남긴 삶의 역작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미래를 보고자 하는 행위, 그것이 장승효가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해 나가는 매우 중요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이러한 관계성의 기원을 '사랑'이라는 감정에서부터 출발하여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는 또 어떤 방식으로 변하게 될 것인지 기대할 수 밖에 없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승효_Old Love-China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90×180cm_2012
장승효_City of Love 1_3차원 이미지 콜라주, 피그먼트 프린트_51×120cm_2012

다시 한번 강조하면, 시각적 영역으로만 한정 지어 이들의 작품을 읽어 내려 간다면, 그 옛날 17세기 유럽인들이 규정지어 놓은 풍경화의 평가 절하를 재차 되풀이 하는 일 밖에는 되지 않는다. 임태규와 장승효는 작업을 통해 관람자에게 현대인을 비판하거나 혹은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고 있음을 억지로 주입시키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예술가로서 경험한 삶과 현실, 그리고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일기를 써 내려가듯 담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그들의 일기를 곡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읽어줘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 기존에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던 고정적인 관념들을 모두 내려놓고 천천히 작가의 삶을 들여다 본다면 분명 이들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장면이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풍경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윤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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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 THing 존재와 사물 存在와 事物






한문순展 / HANMOONSOON / 韓文順 / photography 2012_1020 ▶ 2012_1028




한문순_Frazer 1_피그먼트 프린트_110×90cm_2011



초대일시 / 2012_1020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스페이스 라디오 엠 SPACE RADIO M 서울 종로구 삼청로 2길 37-2(소격동 127번지) B1




춤추는 감각 ● 책장 후미진 곳에서 삼십년 가깝게 자리를 지킨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의 1984년 초판 번역본 『예술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책 내음에 코가 반응한다. 오래된 책 내음, 그 독특한 향의 생성과정을 난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 내음의 화학적 발화 과정을 자세히 분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를테면, 눈물이 왜 흐르는지, 눈물의 구성요소를 현미경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육체에서 분비된 느낌의 반응으로만 헤아리고 싶을 뿐인 것처럼. 춤 또한 그러하다. 코가 반응하듯, 눈물이 흐르듯, 랭거는 무용(춤)이야 말로 최초의 참다운 예술이라 했다. 고전 발레에서부터 브레이크댄스까지 수백 종의 춤과 형식들이 시대를 이어 즐비하지만, 여전히 막춤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타고난 몸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춤이란 형식의 틀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던 원초적인 몸의 반응, 나아가 아이스테시스aisthesis의 원형이자 현현이기 때문이다.
한문순_Francis 1_피그먼트 프린트_81×70cm_2010

한문순이 선택한 오브제들은 그 용도가 다해 폐기를 목전에 두거나 폐기당한 것들이다. 그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의자는 길거리에 버려진 것들이고, 인테리어용 율마와 국화, 절화 백합은 생명을 다해 말라 비틀어진 상태다. 토르소 위에 얹혀진 조화가 그렇고 유행이 지난 구두가 그렇다. 이렇게 용도 폐기된 오브제를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길 없지만 단순하게 그녀의 작업을 정크아트Junk Art로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바니타스Vanitas적 정물이라고 하기엔 더더욱 난감하다. 정크아트는 폐기물을 이용한 일련의 작가들이 노린 문명의 비판과 거리를 두고, 바니타스에 함축된 인생의 허무나 덧없음과는 더 멀리 떨어진 한문순의 작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문순_이색 2 李穡 2_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0
한문순_Hermes_피그먼트 프린트_120×80cm_2011

한문순의 작업을 다소 거칠게 표현하자면 '감각적으로 반응하기'이다. '감각적으로'란 작가가 선택한 오브제와 작가의 시선이 만날 때, 눈은 오브제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어루만진다. 생각하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 이러한 가상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떨림. 그것이 한문순이 체험한 감각이다. 떨림의 진동은 동공을 통하여 뇌와 심장을 거쳐 사지로 펴져간다. 거기에 코를 통해 감각한 오브제의 내음은 떨림을 증폭시키는 앰플리파이어다.
한문순_Roy_피그먼트 프린트_60×50cm_2012

'반응하기'란 생겨나고 증폭된 떨림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한문순의 작업에서 나는 춤을 본다. 다시 말해 사진기법으로 완성된 2차원 평면의 이미지에서 넘실거리는 춤사위와 마주한다. 찰나와 연속이 교묘하게 결합된 이미지는 춤의 속성인 운동력, 중심과 방사, 갈등과 합화, 고양과 하강을 보여준다. 무의식적으로 떨림에 몸을 맡기는 감각적 반응은 카메라 쉐이킹shaking기법을 통하여 드러난다. 오브제를 수용하는 행위가 촬영이고 촬영이 그녀만의 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춤은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막춤이다. 요컨대 아이스테시스의 또 다른 현현인 셈이다. 또한 한문순의 작업은 드러내기와 지우기의 경계를 허문다. 드러내기는 수천분의 일초 즉, 찰나의 순간광으로 나타나며, 지우기는 장노출과 쉐이킹을 결합한 연속된 시간의 누적으로 이미지는 사라진다. 그렇게 드러나고 지워진 이미지는 스며들 듯 합체된다. 찰나의 합이 연속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문순_Verronika_피그먼트 프린트_53×70cm_2011

그러나 한문순의 작업이 모두 감각적으로 반응한 결과만은 아니다. 영악하게도 앵포르멜Informel의 지향점중 하나인 단일 의미의 탈피, 형이상학적 재현의 붕괴를 가져온 유사와 상사, 마그리트가 천착했던 ~이다 ~아니다, 고흐의 낡은 구두를 해석학에서 해방시킨 해체Deconstruction, 그리고 복제에 대한 원본의 우월적 지위를 무너뜨린 시뮬라크르simulacre와 교묘하게 관계시킨다. 예를 들면, 작품 「프란시스Francis Ⅰ~Ⅲ」에서 등장한 의자는 일반인이 사용했던 의자에서 출발하여 멀리 17세기 벨라스케스가 재현했던 교황의 의자로, 다시 프란시스 베이컨의 의자로 의미의 선회곡선을 그리며 단일 의미를 탈피한다. 원본과 복제의 닮음을 포기한 상사처럼 원본과 전혀 다른 프란시스의 의자로 둔갑하며,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텍스트로 강조한 마그리트의 주장과 달리 텍스트가 생략되어도 한문순의 의자는 의자이면서 이미 의자가 아니다. 또한 의자는 본래의 형상을 간직하듯 지워지며 해체되고 이윽고, 의자는 원본의 의자가 가진 지위를 탈취하여 원본을 능가하는 위상을 획득한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과연 한문순은 이러한 넘나들기의 사유체계 속에서 작업을 전개하였을까?
한문순_홍화 청화 紅花 靑花_피그먼트 프린트_120×80cm_2011

지적잠입이 감성적 도약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선결조건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오늘도 잠입중이다. 그리하여 작품은 부재하고 철학은 넘쳐난다. 지적잠입이 명쾌한 관통으로 이어지지 못한 때문이고, 잠입에만 몰입하여 엉성한 흉내내기에 급급한 까닭이다. 기이하게도 잠입으로부터 관통하는 여정을 거스르는 한문순의 작업은 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는 이미 관통 저편에서 이편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랜 공백 끝에 드러낸 한문순의 작업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노작勞作으로 자리하려면 지속적인 떨림의 춤추기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질서와 합리적 판단을 횡단하며 자유로움이 넘쳐나는 감각의 춤추기. 무엇이 두려우랴. 이미 리좀Rhyzome으로 부터 응원의 박수를 받고 있지 아니한가. ■ 안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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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근당 예술지상 2012


회화, 실재의 창조와 해석 그리고 치유展   2012_1020 ▶ 2012_1107



초대일시 / 2012_1020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 / 윤상윤_이우창_이혜인

주최 / 한국메세나협의회 주관 / 아트스페이스 휴 후원 / 종근당

관람시간 / 11:00am~09:00pm / 주말_11:00am~06:00pm

갤러리 팔레 드 서울 gallery palais de seoul 서울 종로구 통의동 6번지 Tel. +82.2.730.7707 www.palaisdeseoul.net


『종근당예술지상 2012』는 한국메세나협의회와 함께 (주)종근당과 대안공간 아트스페이스 휴와 매칭한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의 대안공간 지원 및 신예작가 지원을 통해 한국현대미술문화의 발전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윤상윤_Sub bike 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2
윤상윤_Sub bike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2

"로베르토가 병이라도 난 것일까... 여행이라도 떠난 것일까..." (움베르토 에코,『전날의 섬』) 1. 실재의 창조와 해석 ● 회화는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지만 이미 경험한 세계를 다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정신은 회화의 미래나 비전 보다는 오히려 회화를 처음 접한 오래전 과거로 날아가기 일쑤다. 우리 모두는 한번 쯤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본 적이 있거나 동네 교회또는 유치원 등에서 조악하지만 알록달록한 크레용을 선물로 받았던 기억이 있다. 비록 상이나 상품을 받아보지 못했다하더라도 한번쯤은 형제자매나 친구가 그렸던 그림에 감동한 기억도 있는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미술반에 한번쯤 기웃거리지 않은 이가 드물었고, 남녀상열지사의 시대에 접어든 소년소녀들의 달뜬 열정과 촉각은 시와 문학, 철학과 함께 회화가 주는 환타지와 마법으로 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 후 좀 더 머리가 굵어진 대학생 형님누나가 되면 비상하는 정신과 감각을 채워줄 미술관과 세상을 순례하였고 수많은 과거의 대가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작품과 교감하며 더 높은 성숙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영혼의 여행이자 성장통이었다. ● 이런 경험은 원형적인 것이고 나이가 들어도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숨 쉬는 기억이 된다. 사람들이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해서 환타지가 현실이 되고 시각적 현란함이 자연스러운 시대에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내는 회화에 공감하며 반복해서 돌아가는 힘은 미래의 환타지가 아니라 과거의 환타지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엄마의 뱃속에서 보내던 가장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절의 향수처럼 존재의 연속성이다. ● 새로운 매체가 범람하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회화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회화에는 인류의 역사와 똑 같은 정도의 시간과 역사가 있고 또한 그 만큼의 공통의 기억과 전통이 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오늘날 일반적인 회화의 관념을 형성한 것은 최근 100년간에 형성된 것이다. 19세기 말의 근대 또는 현대예술의 시대에 만들어진 이 관념은 거대한 전통이 되었다. 그런 현대예술을 이끈 회화의 모험은 이미 알려진바 인간의 발견이자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앎이었다. 자기 존재와 세계의 경계를 감각하고 인식하며 완전한 앎으로 만든 것에서 영웅적 근대 화가들과 그의 동료들이 성취한 것이다. 그들의 업적은 황폐한 세계와 영혼의 탐색이며 운명의 천둥번개에 저항하는 피뢰침과 같은 것이었다.
이우창_874-62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09
이우창_품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80cm_2012

이제 이런 영웅적 거인들의 시대는 오래전 사라졌다. 오늘의 더 많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뒤를 이어가지만 그들과 비견할 만한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고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자체의 변화에 따른 요인이 더 크다. 대중의 출현과 근대의 정신과 예술이 임종한 이후 회화는 점점 더 이상한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은 그 불가능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고심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 이것이 회화가 다른 어떤 매체나 형식보다도 인간의 존재 문제와 가까이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주요 화가들의 관심사나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를 둘러싼 이야기의 최종 국면이 매번 존재론의 문제로 귀결되어 버린다. 우리는 숨 쉬고 있으며 타자와 관계를 맺고 함께 공존하고 있음으로 해서 회화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새로운 모험가였던 백남준 또한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사실 그의 미디어 작품에는 수많은 드로잉과 회화가 스며있던 것이다. ● 최근 귀천한 이만익이나 영국의 루시앙 프로이드는 물론 회화의 신이 되어버린 고흐나 피카소,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들은 실상 어떤 조형적 기술이나 매력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과 존재에 가 닿는 것이다. 회화는 단지 조형과 감각의 축제가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향연인 것이다. ● 그러나 세상은 인간이 이미 도달한 높은 수준의 성찰과 경험을 망각하곤 한다. 더욱더 화려하고 기술적인 이미지들의 쾌락은 끝없이 우리의 시각을 향해 달려들고 마치 시간도둑처럼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의 존재를 성찰할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우리가 그 이미지들을 향해 절박하게 달려들게 되었다.
이혜인_구르는 별 A rolling star_패널에 유채_22×27.4cm_2010
이혜인_Factory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0

2.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치유 ● 회화는 어떤 기술적이거나 물리적이고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을 향한다. 그러므로 실상 우리가 미술관에서 만나는 대가들의 회화들은 관객을 향해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회화의 뒷모습이기 십상이다. 회화는 매번 등 돌린 채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기에 회화의 진짜 얼굴을 보기가 어렵다. 우리가 회화라고 보았고 보았다고 주장한 것은 회화의 얼굴이 아니라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난 이미지라 하더라도 결국엔 회화의 뒷모습이다. 천공의 별이 수백억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바로 지금 눈앞에 현현하듯,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전날의 섬처럼 바로 지척에 어제의 섬이 보이는 것처럼 회화의 이미지는 어떤 환타지를 현실로 우리 앞에 내어 놓는다. ●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囚人)처럼 벽에 아른거리며 새겨지는 이미지들, 실재의 그림자들을 보고 또 보면서 어떤 감각을 키워나간다. 그것은 시장이나 극장에서 나타나는 이미지이지만 동시에 영혼의 극장(Museum)에서 자란 이미지이다. 회화가 진실에 다가가는 창이고 삶과 진실의 은유라면 가장 감각적인 회화조차 궁극엔 어떤 실재에 도달한다. 감각적인 것이 궁극엔 개념적인 것과 만나고 가장 개념적인 것이 결국엔 감각과 조우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마치 연금술의 진행처럼 질적 비약과 함께 더 생생한 감각과 접촉하게 된다. ● 이번 종근당 예술지상에 선정된 윤상윤, 이우창, 이혜인의 회화는 이러한 회화의 본질적인 성격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한 작가들이다. 그들의 회화에서 우리의 마음에 어떤 가능성과 열림을 촉발하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윤상윤의 회화는 마치 영혼의 나눔을 보여주듯 제례적 포즈의 인물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우창의 작업은 가장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자아를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이혜인의 회화는 현대를 사는 이들의 복잡한 심사와 심정이 일종의 심리극처럼 연출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용하는 물리적 한계와 재료의 특성을 매우 적합하게 사용하는 숙련과 함께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성실하다. 그들에게 회화이미지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의 가능성을 찾았다는 데에 이번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의 주제와 부합하였다. ● 오늘날 신진 작가란 한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자 타자인 것이다. 시장의 이데올로기와 각박한 전자계산의 세계에서 이토록 오래된 형식과 주제에 몰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그 많은 명멸한 예술가들 가운데 몇 명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또 얼마나 세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 몇몇 예외적이 예술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예술가는 세계의 침묵과 마주한 삶을 마치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의 세평이며 세속의 시선일 뿐이다. 여전히 고해성사하듯 자신과의 고독한 대화와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 모색하는 삶이 주위의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그 예술가 자신 뿐 아니라 그와 촉하고 있는 주위 모든 이들에게도 하나의 영적 치유이다. 예술이 그 기원으로부터 가져온 실재(實在)와 접촉하는 제의성(祭儀性)을 비록 현대예술의 시대에 벗어던졌다 하더라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숙명적으로 그것을 되찾는 것이다. ● 이번에 선정된 작가들은 불가항력적인 선택과 배제의 인정시스템을 거쳤다. 선정된 작가들 뿐 아니라 심의과정에 검토되었던 더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이 전시와 그 성과는 오롯이 이 프로젝트가 실현되는데 도움 주신 분들의 것이다. 감사드린다. ■ 김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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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9 10:44:27 / Good : 360 + Good

zabel

  • 작성시각: 2012.10.20 10:3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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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진의 미학_타나토스 郭晋的美?_??托斯






궈진展 / Guo Jin / 郭晋 / painting   2012_1019 ▶ 2012_1108 / 일,공휴일 휴관




궈진_Nightfall No.5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9



초대일시 / 2012_1019_금요일_05:30pm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궈진의 미학_타나토스 郭晋的 美?—天?同事 Guo Jin's Esthetics_Thanatos트리스탄 : "사랑의 밤이여,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잊게 해다오." 이졸데 :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 (바그너의 악곡 – 트리스탄과 이졸데 中) 1. 시각 언어든 문자언어든, 일반적으로, 언어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약속 체계이며, 우리의 사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매개물이다. 문학작품에서 언어란 예술적 표현을 도모하는 도구로서 하나의 매개물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특히 시에서 두드러지는 언어의 함축성과 상징성은 언어의 힘을 글의 문맥적 구성에 의해 충분히 발휘시켜 완전히 새로운 가상적인 생의 비전을 표현해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화에 있어 구도와 드로잉 색채와 재질 그리고 소재는 작품이 가지는 함축적 의미를 표현해 주는 중요 요소로 작품의 의미를 부여해 주며, 또한 작가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내밀한 감정과 그의 사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술작품에서의 함축적, 상징적 기표들은 때로 형식적인 측면에서 혹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의적인 의미를 초래한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궈진_#6 I want to be a child that have the right to choose_캔버스에 유채_42×32cm_2000 궈진_#7 I want to be a child that have the right to choose_캔버스에 유채_42×32cm_2000

필자는 궈진의 작품을 이해하고 읽어 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 형식의 문제가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의 독특한 표현기법은 단순히 기호와 지칭물 간의 이항관계를 넘어서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작가의 세계관이 내포된 다항관계로 이루어진 기표로 이해되며, 이는 사회,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함축적, 알레고리적인 기표로 이해되어, 궈진이 예술에 있어 추구하고자 하는 "과거에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이상주의적 아름다움"과 "나는 여전히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술의 책임과 진심을 믿는다."와 같은 예술에 대한 이상주의적 표상의 과정이 아도르노의 예술사회학적 입장, 즉 예술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근거를 사회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끊임없이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부정하여 특정상을 형성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은 채 나아감을 주장하는 예술작품들의 유토피아적 특성과 유사함을 논하려 한다.
궈진_#18 On the tree No.2_캔버스에 유채_100×70cm_2011 궈진_#19 On the tree No.3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2

2. 일반적으로 시어는 산문과 비교하여 그 의미의 테두리가 명료하지 못하고 몽롱하게 나타난다. 싸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시인은 시속에서 정열이 흐를 때, 그것을 재인하는 것을 중지한다… 그리하여, 감동은 사물이 되고, 사물은 불투명성을 지닌다. 감동은 자기가 그 속에 갇혀있는 그 모호한 특성에 의해 흐려진다."라고 언급했듯이, 우리는 시어가 가진 함축성과 상징성으로 인하여 이미지를 은근하게 비쳐 보여주는, 그러나 결코 전부가 아닌, 마치 한 작가의 번뇌와 고통, 즐거움과 기쁨이 그대로 작품에 표명되지 않고 감추어서 보여주는 논리하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투명성이란 사물과 도구를 가르는 중요한 말로서, 이것은 실존철학에서 즉자(속이 단단히 차 있는 충만한 존재로 우리의 시선이 거기에 가 부딪치는 것, 즉 불투명한 속성을 지님)의 성질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 중 하나였다. 우리가 쉽게 접근했을 때 이는 중의성(ambiguity)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 이와 같은 문자언어에 있어 시어와 같은 특성은 마찬가지로 시각 이미지에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현상은 형상과 구도, 색채와 명암 그리고 재질감에 의해서 표현된다. 즉 원근법의 무시로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물을 동등하게 나열하여 평면화하는 것과, 색채에 있어 명도와 채도의 차이를 거의 없애서 이미지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것, 또한 재질감을 표현하는데 있어 대상물에 맞는 표현이 아닌 하나의 동질적인 표현방식으로 이미지를 더욱 애매하게 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들의 예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 「Mona Lisa」의 얼굴표현에서 입가와 눈가의 처리기법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일명 "스프마토(sfumato)"기법이라 불리 우는 레오나르도의 표현기법인데, 이는 한 형태가 다른 형태로 녹아드는 듯하게 하는 흐릿한 윤곽과 부드러운 색채로 보는 이에게 항상 상상의 여지를 남기게 한다. 레오나르도는 눈가와 입가를 흐릿하게 남기고 그것들이 부드러운 음영으로 융합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Mona Lisa」가 우리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결코 확정 지을 수 없게 한 부분으로 그녀의 표정은 항상 우리의 시선을 빠져나가는 것 같이 느끼게 만들었다.
궈진_#16 Siren_캔버스에 유채_150×200cm_2011

서설이 길었지만, 궈진의 작품에 있어서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는 키워드는 바로 그의 독특한 표현기법 즉 "불투명한 녹슨 듯한 기법"에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마주하고자 한다면, 분명 시간의 개념을 잊게 하는데 이는 그의 끊임없는 부정의 부정을 거듭하는 그의 붓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그의 기법상의 특징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궈진이 작업을 완성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캔버스에 바탕을 완전하게 깔고서 그리고 싶은 인물이나 사물들을 아주 정확하고 완벽하게 그린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다시 형상을 모호하게 뭉개듯이 덧칠을 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또 완벽한 형상을 덧붙이고, 또 다시 녹슨 듯이 물감을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작품을 완성시킨다. 이는 마치 시간이 흐르면서 쇠붙이가 녹이 쓰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때를 계속 붙이기를 반복하면서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상을 추구하고자 한다.
궈진_#23 Child with his cap No.2_캔버스에 유채_145×115cm_2008 궈진_#22 Child with his cap No.5_캔버스에 유채_145×115cm_2008

3. 기법상의 이러한 특이점은 사실,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다음의 예술상에 다다르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국의 50-60년대 출생 작가들과 다르게, 작가 궈진은 자신의 사상과 예술의 관점을 표현기법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즉 직접적으로 사회상이나 개인적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을 배제하고, 그의 부단한 부정의 붓질을 통하여, 다사다난 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그리고 자신의 예술관을 표현해 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그의 그림을 보고 아동이라는 소재와 영웅주의 등을 그의 작품의 주요 키워드로 읽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 부분에서보단 그의 기법적인 면이 조금 더 은밀하고 내밀한 예술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즉 아이란 소재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가 작품에서 무한 시간의 굴레로 파고 들며 인류와 역사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은 아마도 그의 이러한 기법상의 특징 때문이지 않을까! 그의 화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아마도 어느 시간 때인지를 줄곧 망각하게 된다. 즉 과거의 혹은 꿈속에서 어떤 비현실적인 순간의 몽상이 화석화된 느낌이랄까! 한 순간의 경험이나 사건들을 고정화시켜 시간이 그 순간에 멈추어져 있는 느낌이 들다가도, 100년 혹은 200년 그 이상의 몇 겁의 년을 품고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는 물론 중국의 근대화의 시기 그리고 격동의 발전기 등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이 하나의 역사적 표상이랄지, 혹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의 등장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다. 즉 그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 사회전체는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고, 자신은 중국인으로 중국에서 나고 자랐으며 사회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와 아이의 꿈, 영웅이 되는 것을 통해 중국의 일체 교육 등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고 한다. 그가 아이를 소재로 해서 아이의 꿈과 영웅이 되기 등을 그린 것은 다다르고자 함에 사실 다다르기 어려운, 그래서 인간의 꿈일 수 밖에 없는 이러한 희망 반복의 기제가 우리의 삶과 즉 인간의 역사와 닮아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는 편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그의 표현기법의 과정과 결과물로 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사회와의 연관을 피할 수 없고 작가 궈진 역시 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이러한 면은 사실 모순적인 상황 설정, 역설적인 표현기법으로 나타난다.
궈진_#25 A guardian of Buddhism No.1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궈진_#28 A guardian of Buddhism No.4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초기의 작품에서는 이상과 환상, 그리고 몽상적인 부분이 조금 강했다면, 이제 그의 작품은 자신에 대한 생활, 그리고 생존에 대한 것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전에 보단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사고를 하고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의 기조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나 있는 부정 반복의 붓질은 이제 어느덧 숙련을 더 하고 있음이다. 그가 언급한 시지프스의 신화 속의 시지프스의 숙명적인 운명의 굴레는 이제 점차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조금은 추상적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청년기의 그림은 아무래도 희망과 약속의 봉인 즉 이상주의의 봉인으로 보여지는 부분이 강하다면, 현재의 그의 작품에서는 한 없이 펼쳐져 있는 무한 반복의 변주의 주름 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는 여전히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심리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은 이상주의에 관한 것인데, 내 생각에 이러한 것들은 하나의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즉 그것들이 거기에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것은 매우 모호하며, 명확하지 않은 어떤, 즉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최근의 궈진의 작업에서는 이전의 아이들의 이상과 꿈, 무한의 열망과 야망 그리고 동경에 대한 표현보다는 꿈속의 몽상적 시간의 표현과 같은 한밤중의 혼란스런 상황이나, 새벽녘의 신비스런 빛을 머금고 있는 자연물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즉 이제 그의 형식의 해방, 즉 녹슨 기법을 통해 사회적 해방과 위안을 체화시키기 시작한 듯하다. 다시 말해 피안에 대한 알레고리가 충만한 그림으로, 형식의 해방, 형식의 함의, 함축에 의해 작품세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궈진_#1 The Cosmic Tiger_캔버스에 유채_129×193cm_1995

4. 서두에 인용한 바그너의 악곡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사를 통해 우리는 인류의 오랜 사랑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리스탄이 외쳤던 사랑의 밤 즉 가장 절정의 순간에 살아있음을 잊게 해달라는 말은 사실 끝도 없는 죽음의 실타래 속에서 멈추어져 있길 바람이며, 이졸데의 "무의식 속에서,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여!" 역시 죽음과 무의식 그리고 쾌락을 동일선 상에서 바라보면서 쾌락을 얻고자 하는 말이다. 궈진의 작품에서 역시 시간의 개념은 이상 추구를 향한 텅 빈 시간의 형식을 말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에서 시간은 기억의 구축과 파괴를 통해서 펼쳐졌고, 다시 세워졌으며 궁극의 형태를 취한다. 그 궁극의 형태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미로로서 볼 수 없는 끝없는 미로로, 빗장이 풀린 텅 빈 시간 즉 타나토스이다. 이 죽음본능은 에로스와 더불어 어떤 하나의 일환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다만 일정한 수명의 생명이 물질 앞에서 겪는 제한에서 오는 것도, 불멸의 생명과 물질 사이의 대립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차라리 문제 틀의 마지막 형식이고, 문제와 물음의 원천이며, 모든 대답 위에서 문제와 물음들이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표지라 할 수 있겠다. 궈진은 이러한 그의 미학적인 입장을 그의 형식적인 틀을 통해 구축하고 파괴한 작가라 할 수 있겠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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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적 몸의 언어






오원배展 / OHWONBAE / 吳元培 / painting   2012_1018 ▶ 2012_1111 / 월요일 휴관




오원배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혼합 안료_364×381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원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1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회화적 몸의 언어 (The Nature and Characteristics of Body in Painting) ● I. 이번 가을 금호미술관은 오원배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작가로서의 어느 정도 연륜도 쌓였거니와, 지금도 청춘처럼 그림에 임하는 화가의 모습에서 새삼 신선한 기운(氣運)을 느끼면서, 필자도 제의 받은 작품평을 새롭게 써보려 노력한다. 화가의 기존 작품들과 비교하여 이번 개인전의 작품들은 대작 위주의 스케일과 극단적인 위, 아래의 시점을 적용하여 표현적인 강도를 높였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원근의 의식적인 왜곡이 몸짓과 함께, 주제와 형식에 임하는 작가의 회화적 태도를 더욱 치열하고 돋보이게 한다. 때문에 작품에 밴 그 열정의 강도는 화가의 나이나 과거와 비교하여 더욱 거친 에너지를 발산한다. 말을 머금은, 혹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의 실존을, 아니면 어느 현실의 절정에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의 언어 같은 것? 즉, 몸이 언어를 대신해 표현의 강도를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회화적 전략 같은 것이 작가가 추구한 이번 전시의 핵심일 것이다.
오원배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혼합 안료_194×259cm_2012

이렇게 생각하니 오원배의 화두는 늘 인간이었다. 그것도 돌이켜보니 항상 어둡고 칙칙한, 일그러져 왜곡된 형상의 인간들이었다. 때로는 가면 같고, 어떤 때는 투명 인간처럼 윤곽선(outline)으로, 그러나 왠지 토종의 다듬지 않은 순수함의 모습으로 몸부림친다. 한편, 이 몸부림은 어둠과 허무의 단순한 발광이 아닌 듯. 오히려 어둠과 허무를 넘어, 투쟁과 고뇌를 감내한 이 시대, 우리의 토종적 "짜라투스트라" 같은 강인한 생명력의 발현이다. 마치, 어둠과 허무 너머의 원천적인 "생의 환희"를 마음으로 읽어내기를 바라는 듯, 화가가 그린 인간은 자신의 "몸"을 뒤틀어 "몸의 언어"로 말하려 한다.
오원배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혼합 안료_259×386cm_2012

II.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포함하여,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몸"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발현자(發現者)로서의 주체적인 또는 대상으로서의 객체적인, 그것의 정신적인 또는 물리적인, 혹은 그 둘의 측면들이 혼합된 무엇이든 간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해부학상의 구조와 조직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Hómo sápiens)로서 우리의 몸에 관한 관심은 범세계적이며,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몸의 표피적인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인종(人種)으로서 다른 동물들과 다른 우리의 서로를 인식해 왔다. 그러나 몸을 둘러싼 서로 간의 인식은--그 바탕이 주관적/객관적, 감성적/이성적, 과학적/비과학적, 동양적/서구적이든 간에--자신(自身)과 타자(他者)와의 관계에서 발생한 엄청나고 복잡한 경험의 역사를 형성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오원배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혼합 안료_259×594cm_2012

이러한 경험의 역사는 사회적인 수정과 변경의 결과로 빚어진 인위적인 문화에 둘러싸인 인간의 몸이 적응/반응하면서 이루어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토대로 무수히 갈라진 인식론적인 지식들을 동원하여 인간의 몸에 관하여 끊임없이 알고 싶어 한다. 때문에 우리의 몸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적응/반응하는 물리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인 자원과 역량, 무수한 사회적 구성인자들이 상주하고 있는 일종의 저장탱크이자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의 몸은--그 스스로, 또는 인식론적인 지식들에 관련하여--거의 동시적으로 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생각하기에 우리와 친숙한 것 같지만 위험스럽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신비스럽고, 상징적이면서도 직접적이고, 지극히 물질적이지만 신성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오원배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혼합 안료_318×381cm_2011

인간은 그들 몸과 관련된 인위적인 문화를 스스로 만들면서도, 이미 형성된 인위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거부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사회에 노출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몸을 시각적으로 치장하기도 하고, 언어와 행동 같은 보편적인 경험을 습득해감으로써 그들이 속한 사회와 문화의 일원으로서 활동한다. 이러한 활동은 인간의 몸을 단순히 생물학적이나 문화적인 영역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관련하여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개성(個性)'이라는 또 다른 영역과 만나게 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몸'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는 예술과 관련한 좀 더 직접적인 주제의식을 갖게 된다. 즉, '개성'을 가진 '나의 몸'은 내가 속한 그룹, 민족, 인종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표현하는 장소이자 도구이기도 하다. 육체적인 또는 문화적인 한계 내에서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나의 신체와 더불어 '나' 자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때문에 '나'의 몸은 내 경험의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내 경험의 매체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오원배가 그린 인간의 몸은 그 스스로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오원배_드로잉_60×42cm_1996

III. 그렇다면 "몸"의 주제적 일관성에 대한 작가의 집념과 끈기는 무엇일까? "몸"을 선택한 화가의 태도를 거창한 형이상학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화가와 가까운 불교적 심성이 근간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실존과 현실의 문제로서 한국현대사의 정치, 사회, 문화적 격동기를 감내한 그 세대 한 작가로서의 표현적 성찰이 "몸"으로의 긴 여행을 떠나게 한 것은 아닐까? 실존의 벽이 두꺼우면 두터울수록 작가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이율배반적일 수 있다. 아마도 이 "여행"만큼은, "몸"의 풍경화를 제작하는 시간만큼은, 작가는 자신의 실존을 치유하는, 이상과 현실의 벽을 허무는, 유일하게 시공간을 초월한, 마음의 전략으로서 "몸"을 상정했을 수도 있다.
오원배_드로잉_60×42cm_1997

그러나 최근 작가의 지극히 개인적인 실존의 명암과 순환의 경험 속에서, 과거 하나의 대상(인간)을 표상했던 "몸"의 표현적 성찰이 자기와 세계를 분리시킨 관점이었다면, 지금은 자신 속에 "몸"이, "몸" 안에 자신이 함께 실존하고 있음을 화가는 체감하는 듯하다. 작가는 우리의 삶이, 몸에 기대와 절망, 또는 생성과 소멸의 양면성이 공존함을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화가가 궁극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은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인간이 잠시 "몸"에 머물다 사라지는 "허무"의 존재라는 인식과 함께 도달하는 생명에의 또 다른 원천이었을 것이다. 이제, 작가에게 "몸"은 그의 실존을 달래주는 은둔의 휴식처도, 표현적 성찰이 완결되는 이상(理想)으로서의 대상도 아닌, 자신의 삶 그 자체일 것이다. ■ 정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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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DEOCRACY






육근병展 / YOOKKEUNBYUNG / 陸根丙 / mixed media 2012_1019 ▶ 2012_1209 / 월요일 휴관




육근병_Survival is History, 1995_스틸 프레임, 빔 프로젝터, DVD, 리어 스크린, AMP_ 04:33:01, 230×230×600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육근병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18_목요일_05:00pm

관람료 / 성인 2,000원 / 청소년 1,000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일민미술관 ILMIN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제1,2,3전시실 Tel. +82.2.2020.2060 www.ilmin.org




정지된 화면과 화면 사이에는 경험과 생각과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정지된 화면이 모아져 연속적으로 활동하는 그곳에서 비디오에 의한 정치(Videocracy)가 시작됩니다. ● 설치형식을 빌어 비디오 조형작업을 해온 육근병에게 1992년 한국 미술계에 생소한 카셀 도큐멘타의 초대는 분수령이자 딜레마였습니다. 백남준을 잇는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호평을 받으며 카셀 이후 크고 작은 다양한 작업을 펼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육근병이 오랜 기간의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 올해 열린 2012 카셀 도큐멘타에는 육근병 이후 20년 만에 2팀의 한국 작가들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육근병이 2013년 뉴욕의 UN본부 외벽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작가의 지난 궤적과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전시는 단지 한 작가의 개인전에 제한되는 일이 아니라 한국 미술의 세계로의 확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육근병_Transport, 2012_ 나무 박스, 빔 프로젝터, DVD, 리어 스크린_48:00:00, 215×85×488cm
육근병_Nothing - 01 02, 2012_LED TV 모니터, USB_10:00:00, 106.3×62.2cm×2

일민미술관이 마련하는 육근병의 개인전『VIDEOCRACY』는 1995년 리옹비엔날레에서 발표되었으나 한국에서는 처음 공개되는「Survival is History, 1995」와 함께「Transport, 2012」,「Messanger's Message, 2002-2012」,「Apocalypse, 2012」,「Nothing, 2012」등 최근의 5개 오디오비주얼 설치작업audiovisual installation을 중심으로 전시가 이루어지며, 이들에 관한 드로잉, 영상, 사진 등 아카이브적인 작업들로 구성됩니다. ● 또한 이 전시에는 동시대적 고민인 위안부를 영상화한 다큐멘터리「훈 할머니」도 소개됩니다. 이 작업은 예술가가 사회와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을 보여줄 것입니다. 육근병 개인전을 마련하면서 본질적이며 시대적 주제들을 영상미학으로 풀어 전달하는 작업들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보냅니다.
육근병_Messenger's Message, 2002-2012_빔 프로젝터, DVD, 리어 스크린, AMP, 스피커_ 06:00:02, 270×1200cm
육근병_Apocalypse, 2012_파티션 벽, 빔 프로젝터, DVD_12:00:00, 가변크기
육근병_VIDEOCRACY展_일민미술관_2012

작가는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이를 영상과 음향의 복합적 스펙터클로 보여줍니다. 작품에 깃든 삶 혹은 생명(ankh 앙크)의 순환고리에는 한(恨)과 업보(業報)에 대한 작가의 무의식이 담겨있습니다.「Transport, 2012」는 생명의 무의식을 전시를 위한 작품이동과 연결 지은 작업입니다. 전시할 작품을 완성해서 운송용 나무박스(크레이트 crate)에 포장해 보내 해외의 전시 장소에서 작품과 다시 만나 박스를 해체하고 작품을 전시한 후, 다시 포장하여 같은 여정을 반복하는 과정을 삶과 연관시킨 것입니다. ● 작가가 말하는 한(恨)은 부정적인 뜻이 아닌 긍정의 시선이자 육근병 식 정치입니다. 종말을 뜻하는 단어 '아포칼립스 Apocalypse'도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生)의 씻어냄을 뜻합니다. 따라서 작가가 현재까지 이룬 작업의 매듭이라 여기는「Apocalypse, 2012」는 시간의 거스름을 통해 새롭게 회복하려는 생의 철학을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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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초상






정강展 / JUNGKANG / 鄭江 / photography 2012_1023 ▶ 2012_1029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22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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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3_화요일_05:00pm

2012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지원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공근혜갤러리 GALLERY K.O.N.G 서울 종로구 삼청동 157-78번지 Tel. +82.2.738.7776 www.gallerykong.com




얼굴 없는 얼굴 위로 부유하는 주체의 기호들 ● Long_Moment(2007). 긴_순간. 모순어법이고 역설이다. 주체란 일관성을 가지고 지속되는 전체나 총체 같지만 사실은 분절된 순간들의 무분별한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사는 일상 역시 그렇게 분절된 우연한 순간들의 무한반복일지도 모른다. Live Project_Looking at yourself(2009). 거울과 모니터와 같은 재현장치를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현장치가 재현하는 자기와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와의 사이엔 차이며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음을 실감한다. 재현장치에도 불구하고, 혹은 재현장치라서 오히려 더 주체는 주체 그대로 재현되지도 복원되지도 않는다는 역설적 상황논리를 다룬다. face, face, face(2010). 얼굴 없는 초상을 통해서 얼굴을 재현한다는, 역시 역설적 상황논리를 다루고 있다. ● 뭔가 공통점이나 최소한 일관된 주제의식이 발견되지 않는가. 정강은 사진과 영상을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일련의 작업들에서 주체를 주제화한다. 그리고 주체를 재현하면 할수록 주체가 복원되기는커녕 오히려 차이와 간극을 확인할 뿐이라는 역설에 빠진다. 그리고 역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 그 사이엔 주체가 재현되는 방법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재현되는 양상이며 상황논리에 따라서 주체는 주체의 실체에 근접할 수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 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하한 경우에도 주체를 실체로서 거머쥘 수도 순수한 개념으로 경험할 수도 없다. 개념화된 주체 곧 주체의 개념 속엔 여전히 주체의 흔적이 묻어있기 때문이고 그 흔적이 매개되지 않은 주체(주체의 개념)는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계와 세계의 개념은 다르다. 하이데거 식으론 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엄밀하게 세계와 세계의 개념, 존재와 존재자는 서로 다른 영역이며 별개의 범주에 속한다. 세계를 개념화한다고 해서 세계가 복원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재현한다고 해서 세계가 복원되지도 않는다. 개념장치는 개념장치일 뿐. 재현장치는 재현장치일 뿐.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20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11

그렇다면 재현장치가 재현한 재현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모조리 실재의 이미지들이며 허상들이다. 그렇다면 재현장치는 자신이 철저하게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주체를 주체로서 경험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주체를 재현하고 복원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체와 주체의 개념 사이엔 주체를 재현하는 방법의 지평이 펼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재현하기에 따라서 주체의 실체에 근접할 수 있다고 했다. 주체를 실체로서 거머쥘 수는 없지만 실체를 실감할 수는 있다. ● 정강의 사진 영상작업은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의 상호반영과 연동 가능성에 대한 형식실험으로 정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처럼 주체를 재현한다는 기획은 결국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며 결과로 연이어진,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재현불가능성을 이미 예측하고 있는 역설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래에는 주체와 재현된 주체 사이에서 공과 허와 무에 직면하는 일이며(질 들뢰즈는 주체를 그저 주체라고 부르는 막연한 습관일 뿐이며, 실체가 없는 허명이라고 했다), 결여와 결핍, 과잉과 잉여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일일지도 모른다(자크 라캉에게 주체는 오브제 곧 대상화할 수 있는 영역과 오브제a 곧 대상화할 수 없는 범주와의 결합이며 총체이다). 주체를 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모순율과 역설적인 상황논리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고 인식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이런 연유로 작가는 사진과 영상이라는 세련된 재현장치를 도구로 어쩌면 세련과는 거리가 먼 원초적인 영역이며 불가능한 기획을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24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11

작가의 시리즈 작업 중 특히 얼굴 없는 초상 작업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얼굴을 소재로 취한 것은 적어도 외관상 혹은 통념상 얼굴이 주체를 대변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얼굴을 재현함으로써 주체를 재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으로 작가는 얼굴을 재현해보지만 덩달아 주체가 재현되거나 복원되지는 않는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사진에서 얼굴을 삭제해보기로 했다. 그러면 주체도 덩달아 지워지는가. 그렇게 작가는 주체를 재현한다는 프로젝트를 포기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얼굴이 삭제된 사진에서 사진의 다른 부분이, 사진의 다른 부위가, 사진의 구석구석이, 심지어는 사물마저 얼굴을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 작업에서 작가의 작업은 좀 더 좁혀진다. 주체를 재현한다는 열린 관점에서 얼굴을 재현한다는 상대적으로 좁혀진 관점으로 이동한 것. 관점이 좁혀진 만큼 작가는 과연 얼굴을 재현할 수가 있고, 그렇게 재현된 얼굴(어쩌면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 주체가 재현되는 것을 볼 수가 있을까. 주체가 오롯이 복원되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을까. 작가는 이런 문제의식을 밀어 올리면서 현재에 이른다.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23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11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엽서가 흥미롭다. 얼굴이 잘린 초상사진 아래쪽에 윗부분이 잘려나간 활자로 얼굴 없는 초상이란 전시주제가 기입돼 있다. 위쪽의 사진과 아래쪽의 활자의 운율을 맞춘 것인데, 묘하게도 활자는 윗부분이 잘려나갔는데도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아마도 더 많이 잘려나가 밑동만 남겨지면 그 의미는 오리무중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윗부분의 사진이 힌트를 제공해 얼추 정확한 의미를 복원하고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활자는 기호(라캉 식으론 상징 언어)다. 기호는 웬만큼 훼손돼도 얼추 그 의미를 전달할 수가 있다. 언어용법 곧 말의, 언어의, 기호의 쓰임새에 딸린 문법이며 관성이며 항상성 탓이다. 더욱이 형식으로나 의미론적으로 유사한 다른 기호와의 비교를 통해서 그 의미는 더 뚜렷해진다. 사진도 기호다. 롤랑 바르트 식으론 스투디움(그리고 푼크툼)에 해당한다. 사진 속 얼굴_기호가 훼손되면 덩달아 주체_기호도 훼손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얼굴이 없는데도, 혹은 얼굴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갔는데도 다정다감한, 쓸쓸한, 부끄러워하는, 무심한(혹은 무심한 척 하는?) 호감과 교감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호감과 교감을 주체가 재현되고 복원되는 단서며 계기며 요소로 봐도 될까. 그 호감과 교감은 사진 속 주체에 속한 것일까. 혹 사진을 찍는 사람 아니면 사진을 보는 사람이 자기 인식과 마음속에서 불러낸 것은 아닐까(프로이트 식으론 역전이). ● 사진 속 얼굴(혹은 얼굴 없는 얼굴)은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가. 말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가. 사진의 소통체계는 겉보기와는 달리 꽤나 복잡하고 미묘하다. 한쪽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쪽에 찍히는 사람이 있다. 찍는 사람의 시선과 찍히는 사람의 응시가 교차돼 찍는 사람에도 찍히는 사람에도 완전히 속해져 있지는 않은 제 3의 의미영역이 생성된다. 자기연출사진도 예외일 수는 없는데, 자기(아이덴티티)와 또 다른 자기(페르소나)가 분리된다. 어쩌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런 분리를 경험하고 확인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사물 초상화에서도 이런 응시와 시선의 교환은 어김없이 일어난다(심지어 발터 벤야민은 사물이 사람을 업신여기고 배반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찍든, 자기를 찍든, 사물을 찍든 사진을 읽는다는 것, 사진 속 기호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제 3의 의미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일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는 일이다.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13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09

분명한 것은 얼굴이 없는데도 그 혹은 그녀의 됨됨이(이 됨됨이를 그대로 주체의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문제일 것)를 읽어내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며, 얼굴이 없으면 몸이 그리고 때론 사물마저 얼굴 역할을 대신한다는 사실이며, 때론 얼굴을 찍은 사진보다 얼굴 없는 얼굴을 찍은 사진이 그 혹은 그녀의 됨됨이에 대해서 더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이다. 얼굴이 없으면 몸이 때론 사물이 얼굴을 대신한다고 했다. 정면성의 법칙이며 항상성의 법칙이다. 정면성이란 포즈가 정면을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나 우연적으로 실패한 사진(이를테면 얼굴이 잘려진 사진)을 실패로 보지 않고 그 자체를 자연스런 사실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관성을 말한다. 그리고 항상성의 법칙은 여하튼 사진 속 기호를 특정의 사람이나 사물이나 상황이나 사건으로 읽으려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어내는 관성을 말한다. ● 여기에 몸이 얼굴을 대신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로 몸_언어이며 무의식_언어이다. 라캉은 우리는 언제나 실제로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고 했다. 몸 뒤편의 무의식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작가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얼굴 뒤편의 몸이 말을 하고 심지어는 사진 속 사물(이를테면 아마도 소녀가 껴안고 있는 인형. 여기서 아마도란 것은 실제로나 정황적으로 얼굴이 삭제돼 있음을,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정황으로 봐서 소녀임을 알아볼 수 있음을 의미)이 말을 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굴 없는 얼굴이 얼굴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부재의 미학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보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존재다움을 더 잘 드러낸다고 했다. 비어있으면 암시가 그 공간을 파고들어 채우는 법이다. 여백도 같은 이치이다.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이며 부재를 통해서 말하는 방법이다. 소극적으로는 빈 곳을 채우려는 관성이 되겠고, 적극적으로는 암시를 언어용법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되겠다.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28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09

여하튼 그래서 사진 속 주체는 재현되고 복원되는가. 다시 라캉으로 돌아가 보면, 오브제a 즉 여전히 대상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부분이 있다(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상징 언어로 환원되지 않은 실재?). 그리고 사진 속 기호를 속속들이 캐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스투디움 곧 사회적 기호며 관습화된 기호의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리고 주체가 이런 사회적 기호며 관습화된 기호로 한정되거나 환원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앞서 살폈듯 이렇게나마 캐낸 기호 중 상당부분이, 어쩌면 결정적인 부분이 역전이의 결과(사진을 읽는 사람의 욕망 혹은 착각 혹은 오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하튼 이런 연유로 얼굴이 주체를 재현해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도 역시 주체를 재현하는 것은 요원한 일인가. 아마도 부분_재현이며 부분_복원에 만족해야겠고, 무엇보다도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기꺼운 사실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처럼 주체의 재현불가능성을 기꺼운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작가의 작업의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주체는 지층이고 지평이다. 얼굴을 통해서건 얼굴 없는 얼굴을 통해서건 주체를 재현하는 행위는 결국 그 지층이며 지평 중 주체의 차이와 간극의 지점들을 캐내고 발굴하는 일이다. 캐내지 않으면 캐내지지 않을 일이다.
정강_얼굴 없는 초상, Untiltled #18_디지털 C 프린트_120×120cm_2011

속된 표현에 찍히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사진에 관한한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고 진실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죽음이라고 했다. 사진은 현실을 찍을 수가 없고 존재를 증명할 수가 없다. 사진을 찍는 순간 현실은 과거 속으로 편입되고 존재는 부재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사진의 아우라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하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될 일이다. 사진은 핍진성 곧 영락없는 닮은꼴이 함정이며 매력이다. 정강은 때론 얼굴을 포함한 초상사진으로 그리고 더러는 얼굴 없는 얼굴을 찍은 초상사진으로 주체라는 함정을 더듬는다. 그 더듬이는 다름 아닌 함정을 더듬는 것이어서 매력이 있다. 소재를 옮겨가면 모를까, 작가가 사람을 그리고 얼굴을 소재로 찍는 한 주체는 더 두터워질 것이고 주체라는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과정에서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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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잉 위드 나이프 - 새로운 종합Ⅲ




송계영展 / SONGGYAEYOUNG / 宋桂英 / installation 2012_1024 ▶ 2012_1030



송계영_키메라 Chimera_한지에 흑연가루, 핸드컷팅_220×90cm_2011


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5:00pm

Drawing with the Knife - New Synthesis Ⅲ展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프랑켄슈타인 공장」에게 던지는 물음 ● 『타임 Time』지 100대 영문소설 및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고 영화로도 제작된 가즈오 이시구로(Kazuo Ishigruro)의 소설『나를 보내지마 Never Let me go』는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된 주인공들은 인간이 미래의 자신을 위해 마련한 일종의 살아있는 장기 저장고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배양되는 살아있는 생체인간,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장기를 뺏길 수 있고,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인간이면서 동물인 단지 인간의 몸뚱아리를 지닌 복제인간들은 존재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주인공들이 복제인간인 자신을 인식하고 과감히 현실을 탈출하는 것에 비해 『Never Let me go』의 복제인간들은 인간을 위한 생명저장창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기에 더욱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만약 병든 장기를 위해 우리들의 DNA를 이용한 생명공학 장기를 보관 중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삶을 연장하기 위해 복제인간에게서 장기를 뺏어 올 것이다. 이것이 단지 영화의 이야기인 것인가? 1996년 복제양 돌리의 탄생에 인류는 환호하였고, 유전공학 분야의 가능성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이후 수많은 실험들이 행해졌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의학, 식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전자 조작과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전공학을 넘어 생명공학의 시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온전한 자연 그대로의 삶인가? 과연 우리는 유전자 조작, 복제의 환경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송계영_식물세포공장 Plant Cell Factory_한지에 흑연가루, 핸드컷팅_143×106cm_2011
송계영_S.P.F 소년-2 S.P.F Boy-2_한지에 흑연가루, 핸드컷팅_174×57cm_2011

작가 송계영의 작품은 이러한 물음들을 끊임없이 생성시킨다. 그녀는 바이오테크놀로지(생명공학)에 관심이 많은데 동식물의 유전자, 염색체, 세포 등을 인간이 작위적으로 변형하는 것에 주목한다. 자연적 상태에서 변형된 유전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 새로운 삶을 요구한다. 송계영은 바로 이 지점 '유전자 조작이 과연 새로운 종의 탄생을 축하하는 차원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녀는 인간을 위한 자연 질서의 변형 혹은 변경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최선의 길인가, 아니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연의 길인가에 대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혁명 이후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수없이 쏟아져 나온 대량생산의 제품처럼 21세기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몸뚱아리를 제품으로 생산하고 있다. 오이와 고추를 이종 교배한 식품이 식탁 위에 올려지고 있고, 돼지의 세포에서 단백질을 추출하여 인간의 의료용으로 사용하며, 인간의 장기가 실험실 유리관에서 배양되고 있다. 그뿐인가? 빨간색 프리지아 꽃에 행복해하고, 수박만한 사과에 허기를 달래며 유전자변형 옥수수를 동물의 사료로 주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생명공학의 눈부실 발전 덕분이다. 대량생산의 메커니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이미지화하여 무한복제로 마구마구 찍어낸다. 송계영은 이를 21세기 '생명체 공장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공장'은 식물과 동물, 인간 종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수용하고 생산한다. 복제는 이제 수단이 아니라 방법이 되었다. 상품가치가 변형과 복제를 결정한다.
송계영_나비 Butterfly_한지에 흑연가루, 핸드컷팅_110×150cm_2011
송계영_재조합된 DNA–여자 Recombinant DNA-Woman_한지에 흑연가루, 핸드컷팅_78×57cm_2011

그녀는 「식물세포공장」, 「동물공장」, 「프랑켄슈타인」 등 유전자재조합기술(Recombinant DNA technique)에 의해 탄생한 유전자변형생물체(GMO)를 작품으로 선보였다. 작품은 한지를 컷팅하여 표면에 흑연을 도포한 것인데 이는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유전자 변형의 개념과 맞닿아있다. 그녀에게 한지는 매우 특별한 재료인데, 종이의 응축력, 긴장과 이완, 강도 등 자연의 살아 숨 쉬는 유기적 섬유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유기적 구조를 가진 종이 자체에 왁스나 기름, 흑연 등을 바름으로써 자연 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상태, 즉 현대사회의 생산품이 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종이의 인위적인 상태는 바로 유전자 조작과 같은 비자연적인 상태로의 이행과 같다. 흑연을 입힌 유전자 변형의 이미지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비자연의 상태, 환원 불가능한 비유기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녀의 「식물세포공장」은 돌이킬 수 없는 유전자 조작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각종 식물세포들의 셀이 합쳐진 거대한 식물덩어리는 미래 자연환경을 구성하는 나무와 숲이 될 것이다. 이제껏 자연계에 없었던 생명체를 '프랑켄슈타인 생명체'라고 부르듯이 그녀의 작품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뒤섞여 거대한 '괴물'이 되고 있다. 「SPF(specific pathogen free)동물」, 「키메라(chimera)」 등 실험용 동물이나 접목을 통한 변형된 생명체의 운명은 복제를 통한 소멸로 향한다. 여기서 소멸이란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파괴의 다른 말일 뿐이다. 새의 날개와 곤충, 뱀과 기능만 살아있는 살덩어리인 다리, 내장과 장기, 식물과 동물 등 모든 생명체들의 집합소인 「복제공장」에서 각각의 생명덩어리는 완전한 개체가 아닌 단지 부분으로만 작용한다.
송계영_합성유전자 배양 cultured synthesized gene_한지, 흑연파우더_76×53cm_2011
송계영_깨어진 호메오 박스 Broken Homeo Box_한지, 흑연파우더_78×54cm_2011

송계영은 오랫동안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파괴적인 행위에 대해, 특히 동물에게 행해지는 몹쓸 실험들에 대해 연구해왔다. 왜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길고도 지루하게 평면의 종이 한 장을 끊임없이 자르고 뚫고 있었던가? 그녀가 칼로 종이를 오리거나 바늘로 구멍을 뚫고 기름이나 왁스를 바르는 행위는 단순히 유전자변형의 이미지를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비자연적인 행위에 대한 물음을 몸소 체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유전자변형이 인간에게 해로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자 모든 만물의 중심에 서서 인간 이외의 것들, 아니 타자화 된 인간의 몸뚱이까지 통제하고 조정하려는 인간 의지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경고하기 위함이다. 자연을 대하는 데카르트적인 사고방식은 과학이라는 미명아래 가혹하지만 공인된 폭력을 가하면서 그것이 사랑이요, 인간애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래사회 복제인간들이 자신의 주체를 주장하면서 우리들 자신을 복제 몸뚱아리로 규정짓는다면 우리는 과연 그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가 둘 달린 뱀에게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바보스러움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복제인간인가요? 아니면 단지 이미지인가요? "Never Let me go"를 외치며 우리들 스스로를 인정받고자 하는 소리침이 단지 메아리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은 「프랑켄슈타인 공장」을 의미 있게 반성해야 한다. 송계영의 종이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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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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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두 번째 이야기 Soom(Breath)-The Second Story








이운갑展 / Gap Lee / 李云甲 / painting 2012_1024 ▶ 2012_1030





이운갑_숨 - Piermont NY Ⅴ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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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1층 제1전시실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숨-두번째 이야기』, 증발하는 시뮬라크르 풍경 -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 II들숨 - 가라앉는 이미지 세상의 끝을 가정하는 사람이 매 순간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숭고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적막한 심정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기에 그러므로 남아있는 삶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세상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남으려는 의지를 표현해 낼 것이라 믿어진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 '숨'이라 명명하게 된 이운갑의 작업이 또 다른 '호흡'을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숨' 전시에서의 바닷가재나 땅강아지의 은유적 변신이 작가 내면의 정체성이자 생명이 지닌 숭고함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숨고르기인 이번 전시는 현재의 삶을 반영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구성된다. 전자에서 일탈을 성취한 인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처절한 고독과 상처를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번에는 그간 아픔을 밀어내는 심정으로 멀리하던 풍경을 명상적으로 보여주면서 삶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닷가재의 욕망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던 이운갑은 이제 특별한 감성을 통해 의식과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 최근의 작품들은 주체와 대상이 불명확하므로 지시와 환원이 어려운 환상성을 확보한다. 다소 심심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너무 익숙해서 상념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일 테지만 낯선 조합에서 오는 생경함마저 평이한 느낌으로 편입해버려 의도가 불분명해질 우려가 없지 않다. 사실 세상을 이끄는 진리나 지혜로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매우 익숙한 것에서 출발하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이 당연한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곤혹이 따르는 것처럼 일련의 인식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운갑_숨 - 2012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2

이처럼 이운갑의 작업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풍경을 주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까운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풍경을 맨 먼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가 선택한 사소한 소재들은 선입견적 판단으로는 평범해 보이다가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확대되면서, 그것이 곧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태도임을 이해시키려고 감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 리듬감 있는 깊은 호흡은 우리의 정신 상태를 어김없이 반영한다. 이운갑은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호흡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감성을 재분배하고 이중으로 분할하여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낸다. 이중의 풍경을 통해 자아 위에 또 다른 자아를 반영하는 이것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방법일 것이지만, 그림으로 깊은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의 여정은 이어질 것이므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정화된 풍경은 실재의 삶과 마음속의 삶이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된 풍경이므로 상하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다. 생명을 유지하는 리듬 그 자체인 '숨'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매 순간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이운갑의 풍경 또한 바라보고 있다는 의식의 끈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감각적인 대상과 관념적인 대상과의 연결에서 오는 낯선 풍경인 탈(脫)이미지, 초(超)이미지가 데페이즈망의 어긋난 형식과 닮아 있는 그의 그림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이운갑_숨 - 2012 Ⅱ_캔버스에 유채_91×65.2cm_2012

날숨과 들숨 - 몽상적인 시뮬라크르 이미지붓끝에서 태어난 풍경이 자신이 헤치고 나온 가시밭길처럼 슬픔과 위로가 깃든 경건한 분위기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막함은 모든 인간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일 테지만, 자연의 황폐함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가 함께 내장 된 곳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분노를 포함하고 있음이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 화면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규칙적이고도 촘촘한 들숨과 날숨으로 직조되어 있다. 들숨의 현실적인 재현과 날숨의 내재적인 풍경은 호흡을 통해 현재의 순간을 몽상적인 풍경으로 만드는 근원이다. 그에게 풍경은 이처럼 과거도 미래도 아닌 환영적 호흡을 통해 현실과 교감하면서 시작되는데, 세포 내에서도 호흡이 이뤄지는 것처럼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감각을 통한 간접적 인식이자 영적인 리듬과 울림의 반영이다. 발음은 구강에서 만드는 외재적인 표현수단이고, 소리는 단전을 돌아 나오는 내재적인 것이다. '마음의 자리, 견성의 자리는 단전에 있다'는 달마대사의 말처럼 소리는 호흡을 따라 깊은 곳에 도달하여 나오는 것이다. 갓 태어나는 아기가 배로 호흡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호흡을 통해 몸이 열려 악기가 되고 그 열린 공간에 울림이 만들어지는 이치이다. 이운갑의 그림은 이러한 호흡의 원리와 유사성을 지닌다. 때문에 외적 호흡이 반영된 그림은 새롭고 깊은 들숨으로 인해 몽롱해질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이운갑_숨 - 2012 NJ_캔버스에 유채_91×65.2cm_2012

작가는 습성적으로 황량하고 허망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둔다. 반영된 이미지는 바로 서기도 거꾸로 서기도 하는 위반으로 의도적인 불편함을 만들고, 그리고는 서서히 증발한다.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희미한 효과와 상호충돌로 빚어지는 '낯설게 하기'는 비밀을 반 정도만 드러내는 다중성을 추구한다. 메마른 풍경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은 미지의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느낌으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냉동고에서 말라가는 것처럼 차갑게 와 닿는 것은 자연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눈을 감고 만나게 되는 자아의 일부는 타자화를 거부한다. 탈색으로 실재가 결여되고, 메아리에 묻어 되돌아오는 그리움처럼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보편적 고뇌로 다가온다. 경험의 재구성이자 기호로서의 풍경은 이처럼 실재와는 유사성이 없는 시뮬라르크로서 성장과 쇠락의 교체가 연이어 이뤄진다. ● 반영이 적용된 공간은 신비로운 주술과 생명의 희망을 담은 가상의 환영적 공간으로 전환되어 은밀히 부활을 꿈꾸거나 희망의 서정을 드러내고 시적 상태의 재현을 도모하게 한다. 신경정신의학에서는 의식적으로 트랜스(환각) 상태에 들어가면 엔터옵티크(enteroptic)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작가 또한 특별한 경우를 통해 이러한 시각적 환각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에서 자신의 정서와 결합하는 요소를 인지하고 대상과의 결합이 지각의 복합체가 되어 물적 이미지 생산을 도왔을 것이다. 관찰자로서 그리고 조작하는 사람으로서의 이중적 의미는 예술가 본연의 자세이다. ● 이운갑 풍경에서의 전체적인 느낌은 중얼거림이다. 주체와 대상이 숨겨져 있거나 사라지고 없는 화면에서는 들뢰즈의 '익명적 중얼거림'처럼 사소한 중얼거림이 두런두런 들려온다. 나를 이송하던 나룻배도 자동차도 멈춰있는 풍경에는 비밀스러운 상처를 간직한 듯 '있었던 세계'와 '있는 세계'가 함께 소통한다. 미켈란젤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같은 시간이라도 어떤 때는 기꺼이 환각에 눈이 멀 수 있고,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을 관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증언한다. 이운갑 또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인들에 의해 수시로 달라지는 가변적 지각이미지를 자신의 조형언어로 활용한다. 배경은 혼미하기는 하지만 허약하다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에 침묵하면서 아직 발을 사다리에서 떼지 못한 채 망설이는 주체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충실해 보인다. 배를 타거나 사다리를 오른다고 해서 끝이 나는 건 아니다. 배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동이 완성된다.
이운갑_숨 - 여름이 오기 전...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2 이운갑_숨 - 여름 그리고...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2

날숨 - 증발하는 이미지이운갑의 풍경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신비함이 있다. 두 세상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만들고 삶을 통해 죽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모순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포용한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어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 어떤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에는 그 일을 통한 변화의 조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림의 객관성 또한 어떤 상황의 관찰에 의한 결과인데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처럼 감추면서 드러내는 방식에는 여전히 어떤 상황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한 심려가 느껴진다. 녹슨 펌프는 폐기될 수밖에 없음에도 잃어버린 현실의 부재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태도는 앞의 일이 뒤의 일보다 덜 아프다는 전제와 연관이 있다. 묘사에 치중하는 것과 사실을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겪는 작가의 체험이 진정임을 알고도 감상자는 작가 자신처럼 불안하다. ● 친화력을 가지고 엄숙한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삶의 태도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더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서 잘 드러난다. 작가의 섬세함은 갇혀 있는 기적을 사물 속에서 열어내는 무기이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쓰라린 정경 앞에서 좌절을 겪을 때마다 예술에 대한 생생한 그리움이 그를 엄습했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정신이 메마를 때는 아무 말이나 써놓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독려한다. 이제야 비로소 슬픔의 시간이 사라지고 멈추지 않은 열정과 깨어있는 정신으로 진정한 자신의 힘이 내장된 곳을 향하는 그에게 비현실적 이미지는 의미이며,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
이운갑_숨 - 강원도 Ⅱ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1

미세한 조짐을 반복해서 바라보다 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전보다는 좀 더 현실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구체성을 검토 중인 그를 파악할 수 있다. 모파상(G. de Maupassant)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면 어느 것이건 충분히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여 살핌으로써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어떤 모습을 거기서 발견해 내는 것이다"라는 말로 누적된 인식의 진전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풍선을 가득 채운 것이 바람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형식화되지 않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무의식적 표현에 대한 불안정 때문이다. 의식을 뒤로 두고 상투적인 풍경을 앞세우는데, 언급했던 대로 이러한 형식은 지향했던 바를 이루거나 관객을 그림 앞으로 이끌기에는 다소 힘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을 특별한 회화적 이미지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작가 특유의 깊고 긴 호흡을 한 단계 더 거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 미세한 감성의 자아가 빠져나간 풍경은 서정적이지만 상투적이며, 자유롭지만 모호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작가의 모습은 사라진 곳 멀리에서 간혹 비춰진다. 당도 높은 과일이 벌레에 갉아 먹혀 상처가 나고 썩게 되는 법이다. 삶은 안에서 들여다보고 외부세계로 적극 표출되어야 하며, 품고 있으면 안 되는 달콤해진 독들은 토해내야 한다. 일전에 예술 작품의 이미지가 허구의 세계이지 세상을 바꾸는 실천적인 힘이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렇다고 세상을 반영하지도 제시할 수도 없는 무기력의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 감각의 상실은 의식이 낮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쇠락을 의미한다. ■ 주성열
이운갑_숨 - 땅강아지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2




S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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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GREENS








곽아현展 / KWAKAHYUN / 郭雅賢 / painting.drawing 2012_1024 ▶ 2012_1031





곽아현_Greens Bouqu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8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225f | 곽아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3: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서초동 700번지) Tel. +82.2.580.1300 www.sac.or.kr





나의 시야에 들어와 남달리 각인되는 사물이나 사람 혹은 막연한 느낌들까지도 이 모든 것들은 나를 통해 더욱 특별한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 무정한 시간의 흐름은 눈에 보이는 생명을 살리기도 소멸시키기도 하는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외적 소멸의 단계에 접어든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중에 하나이다. 자연스레 내적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사건들은 내게 눈여겨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하고 굳건하던 사고의 바탕을 뒤흔들어 놓기도 했다.
곽아현_G-Bunch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46×53cm_2012
곽아현_G-Heart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60×72cm_2012

이것은 우연과 필연을 동반하며 나 자신으로서 만나게 되는 사소한 듯 특별한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이야기하면서, 티끌만큼의 공감이라도 유도해내려 고군분투하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적기시(適其時)의 상황과 인연은 이제 더 이상 그저 흘러가게 두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못내 아쉬워하며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의 것임을 처절하게 경험하게 된다.
곽아현_G-House 1_람다프린트, 디아섹_60×84cm_2012
곽아현_G-House 2_람다프린트, 디아섹_76×102cm_2012

"Ode to Greens": 공기를 마시듯 당연하게 펼쳐져 있는 녹색식물들에 대한 경의와 찬양, 공경과 우러름은 신선하고 건강한 빛의 에너지를 상상하게 한다. 그들의 생명력은 나를 자라게 하고 나의 지친 심신을 다독여 치유로 이끈다. ● 어느 날 문득 스러져가는 자신을 발견한 후, 스스로를 한 발 물러나 바라보며 소소한 일상에서부터의 변화를 갈구하는 심정에서 시작된 현실적인 "Ode to Greens"는 우선 '채식에 대한 동경'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나의 인생은 작품이나 환경의 변화에 앞서 가장 직접적인 나 자신의 변화부터 시도하게 된다.
곽아현_G-Parthenon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_80×100cm_2012
곽아현_Ode to Green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11

먼저 '나'라는 공간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내가 모여 둘이 되고, 셋이 되며, 여럿이 되어 더 큰 공간으로의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기적적인 상상이 결국 나를 살려내는 것이다. 나를 살리고자 시작된 '채식'이라는 하나가 생명력을 가득 품은 불사신이 되어 나와 친구들, 그리고 우리들의 공간 구석구석까지 온통 붉게 물들이게 될 것이다. ■ 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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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row light








박강우展 / PARKKANGWOO / 朴康愚 / photography 2012_1024 ▶ 2012_1101 / 월요일 휴관





박강우_Borrow light, #01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4×110cm_2012




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온 GALLERY O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82.2.733.8295 www.galleryon.co.kr





Borrow light ● 내가 일을 하는 홍대부근의 거리는 하루중에 대부분의 시간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인하여 붐비는 서울의 명소이다. 어느사람 하나 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은 없을터이나, 이곳에서 지켜서 보고 있노라면 어찌되었든 특정한 곳으로 모이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고, 어느 순간에 인가 그러한 상황들을 멀찌감치서 습관적인 관찰을 하게 되었다.
박강우_Borrow light, #06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4×110cm_2012

클럽으로 향하는 사람들, 친구나 애인을 만나러 나오는 사람들, 놀다간 자리를 청소하는 아저씨들, 커피나 술을 파는 사람들, 아침까지 술에덜깬 사람들... ● 나는 같은 장소에 각자의 목적으로 찿아오는 이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그곳에 움직이는 빛들을 잠시빌려와 사진속에 담아보게 되었다. 사진의 시작은 담아 남길것을 꾸준히 지켜보면서 그 구체적인 작업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고 보는것만 으로는 사진이 될 수 없으니 사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떤도구를 사용해서든 표현을 하여야만 할 것이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종이라는 매체에 표현하게 되었고 원하는것을 담는 과정에서 왜곡없는 원초적인 빛이 이곳에는 어울릴 것 이라는 생각에 그 빛을 잠깐씩 빌어다 쓰게 되었다.
박강우_Borrow light, #11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4×110cm_2012

내가 느끼는 홍대주변의 분위기는 긍적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내가 담아보고자 했던것은, 평범하게 일상에서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관찰자외의 또다른 타자의 시선이었다. 보는 것 만으로는 심상에 담길뿐 기록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흘러가는 빛 외에는 최소한의 것만을 관여시키려 하였다. 담는 도구에 있어서 최소한의 원초적인 것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고, 가급적이면 잠깐의 시간 보다는 오랜시간 흘러가는 빛을 담아보고 싶었다.
박강우_Borrow light, #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4×110cm_2012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부정적인것과 긍정적인것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나타내 보고자 미니어쳐등을 이용한 제 3자의 시선을 표현하게 되었다. 나의 작업에는 4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대상물이되는 피사체들의 시선, 사진속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만들어진 시선, 긍정과 부정을 선을 그어가면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작업을 보고있는 관람자의 시선... ● 나는 빛을 빌어왔다가 돌려놓았고, 그것들로인하여 생산된 것들을 관객들에 의하여 그 빌려온 빛이 의식과 인식으로 재생산 되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 박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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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사견 Drawing






음영경展 / EUMYOUNGKYOUNG / 陰永暻 / painting 2012_1024 ▶ 2012_1030




음영경_drawing6_장지에 펜_20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314l | 음영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아트사간 GALLERY ART SAGAN 서울 종로구 삼청로 22 영정빌딩 3층 Tel. +82.2.720.4414 www.artsagan.com




0.3 밀리미터의 집적 ● 작가는 우선 길이3.84자(116.36cm)×넓이2.88자(87.27cm)의 장지(壯紙)를 재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물론 두 손 바닥을 잇댄 크기만한 드로잉 북에는 각 작품마다의 여러 장 밑그림이 고민의 시간을 품고 있다. 작가가 정해진 크기와 형태로 제작된 장지를 각기 다른 비율로 재단하는 이유는 0.3mm 볼펜이 긁어 낼 세계와 보류한 세계 사이의 동적균형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은 힘겨워 보이는 필적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지는 먹물(또는 유색 물감)에 발묵의 미덕을 발현케하는 최고의 재료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한지의 전통적 쓰임을 포기하고 0.3밀리미터 볼펜과의 투쟁적 관계를 시도하고 있다. 수성의 먹물이 흘러갈 길에 유성의 잉크가 들떠 흩날리고 있다. 0.3mm 볼펜 끝에 있는 쇠구슬은 마치 자갈밭을 힘겹게 쟁기질하는 황소 같다.
음영경_drawing5_장지에 펜_50×50cm_2012

미세한 먹가루를 품은 빗물이 제각기 헤쳐모여 대지 위를 소요하면 물줄기는 때로 가늘게 때로 굵게 때로 급박하게 때로 온유하게 성질을 부리지만 결국 어미가 아이를 품듯 종이는 먹물과 붓질의 성깔을 하나도 버림 없이 우려낸다. 그렇지만 한지 위에 떨어진 볼펜은 산비탈 자갈밭 위에 거칠게 생채기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수성의 한지는 볼펜의 유성 잉크를 힘들어한다. 볼펜이 한지를 힘겨워하는 것 역시 매한가지다. ● 한지 위의 볼펜은 깊은 맛을 만들어 내기 쉽지 않다. 게다가 한 번의 쟁기질로는 고랑이 쉽게 생기지도 않는다. 흐리다. 그래서 작가는 고랑을 만들기 위해 0.3밀리미터의 쟁기로 갈고 또 간다. 쟁기질은 몇 날 며칠을 두고 수고를 한 다음에야 길이 나고 고랑이 깊어진다. 인내가 묻어나는 겹침과 집적이 힘겹지만 비로소 한지와 볼펜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음영경 작가의 화면은 이질적 존재간의 힘겨운 집적의 장소가 된다.
음영경_drawing2_장지에 펜_75×60cm_2012

작가의 작품은 마치 이렇게 저렇게 실타래를 풀어 놓은듯하다. 그 실타래는 이야기를 풀어 놓고 귀를 기울려 달라고 한다. 작품 「drawing2」에서 작가의 나무는 중력의 방향으로 순진한 물길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나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지표 면 위와 아래가 뒤집혀 있는 것도 같고, 태양이 당기는 힘이 너무 거세서 곁눈질 할 조금의 자유도 허용치 않거나, 아니면 작가의 나무는 너무도 유약하여 자유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 같다. 그저 보이지 않는 힘이 당기는 대로 힘없이 간신 표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성장하는 모양새가 마치 실을 뽑아 만든 전돌을 쌓아 올린 탑처럼 보인다. 작은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언제라도 휘뜩하니 휘청거릴 것만 같다.
음영경_drawing4_장지에 펜_50×105cm_2012

작품 「drawing4」에는 수직방향으로 무성하게 밀집한 풀숲이거나 혹은 가냘픈 나무로 빽빽이 이루어진 나즈막한 구릉과 수평방향으로 촘촘히 쌓여 한 오라기의 빛마저도 놓치지 않고 가두어 버린듯한 호수이거나 혹은 바다가 너무도 고운 그래서 발자국마저 순식간에 흡수해 버릴 듯한 모래해안을 사이에 두고 그 위로는 눈시리게 휑한 허공을 이고 있다.
음영경_drawing1_장지에 펜_60×150cm_2012
음영경_drawing3_장지에 펜_70×200cm_2012

작품 「drawing1」 등은 마치 산을 담은 풍경처럼 보인다. 작품 「drawing3」는 통영 앞바다에 흩어져 있는 섬 같기도 하다. 이들 작품에는 앞의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볼펜의 염불과도 같은 반복의 궤적이 주는 질감과도 다르고 장지 표면 질감과도 다른 에나멜의 반짝임이 부가되어 있다. 그것은 조악한 집의 모양을 닮았다. 그 집들은 담장이 되어 볼펜 잉크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아니면 헝클어지고 혼돈스런 볼펜의 궤적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다. 언제라도 집들을 무시하고 터져나갈 듯하지만 의외로 검은 실선들의 집적체를 완강하게 움켜쥐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는 텅 빈 공간은 일견 아무 것도 없는 듯하지만, 꽉 다문 옥니처럼 굳게 결집한 집들의 사슬이 보여주는 완강함의 정도에 반비례하여 가늠할 수 없는 해소되지 않는 욕구가 그 아래에 숨어있는 것 같다. ■ 박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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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lection






안소윤展 / ANSOYUN / 安素潤 / painting 2012_1024 ▶ 2012_1031




안소윤_염원_장지에 채색_193.9×97cm_2012



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00pm

갤러리 예담 컨템포러리 Gallery yedam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삼청동 26-2번지 Tel. +82.2.723.6033 www.galleryyedam.com




경계의 안정과 불안정 사이에서 ●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속에 깊숙이 담그고 검고 아득한 물 아래로 들어간다. 들어가고 들어가다 어둠을 만나면 순간 방향을 바꿔 물에 아른거리며 밝게 비치는 하늘을 바라본다. 해가 뜨지 않은 미명에 뛰고 또 뛴다. 숨이 차고 차올라 얼음처럼 차가운 새벽공기를 거칠게 들이킨다. 거친 숨에 목은 아프지만 어둠속에서 나는 맑고 또렷하다. 그러다 일출로 점차 밝아지는 주변에 나는 사라지고 눈을 감는다. 그대는 이곳을 버리고 저곳으로 가겠습니까? 아니면 저곳이 아닌 이곳에 남아있겠습니까?
안소윤_갈등_장지에 채색_91×91cm_2012

세상에 절대적인 한 상태로만 유지되는 것은 얼마나 있을까?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차가움과 뜨거움 등 우리는 이곳과 저곳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며 살아간다. 이런 경계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가 한순간 흐트러지고 혼란기를 겪는 자에게 '경계'는 오히려 그 불안 요소를 더 크게 키우고 막연히 어느 한쪽으로 기울여진 상태를 바라게 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끊임없이 맴도는 기억, 크고 작은 현실의 욕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같지만 다른 마음. 이런 여러 가지 고리들로 엮이고 얽힌 것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그 고리가 얽히고 뭉치면 결국 정신은 혼탁해지고 육체는 욕망과 탐욕만으로 가득차서 그 주인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경계의 불안정적인 상황인 것이다. 안소윤은 이러한 경계에서 얽히고 뭉쳐진 불안정적인 고리를 화폭에 풀어내고 떨쳐버린다.
안소윤_숲 시리즈_756-1_디지털 이미지_2012
안소윤_숲 시리즈_583-2_디지털 이미지_2012

대체로 이성적이면서도 가라앉은 감성의 색이라고 여겨지는 푸른색(BLUE)은 안소윤에게 있어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대변하는 색이다. 화면의 푸른색들은 모든 걸 다 담아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감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바탕에 그려진 다리와 발은 마치 모든 행위의 마지막 장면인 듯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은 어떠한 주저함이나 거리낌 없이 화폭 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통과 직전의 그의 발끝만을 확인하게 된다. 경계의 혼란을 겪는 감상자에게는 그림의 화자가 경계의 평화로운 유지가 아닌 한쪽 방향을 택하였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오히려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린 자의 마지막을 의식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경계의 유지를 더 강화하려는 메시지를 보내주든 듯하다. 최근작에 나타나는 그릇이나 컵, 연꽃, 산수, 여러 손 등은 사실 화면 안으로 들어가거나 감춰지기보다는 오히려 화면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려는 의식들의 표상처럼 보인다.
안소윤_황망 judgemental_장지에 채색_91×91cm_2012
안소윤_하강_장지에 채색_180×270cm_2012
안소윤_능선_장지에 채색_112.1×145.5cm_2012

지난 몇 년간의 안소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시간적 흐름은 욕망과 탐욕의 육체를 화폭에 내던지는 행위를 통해 육체로부터의 벗어남, 껍데기만 남은 육체의 죽음을 알리려는 의도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작에 들어서는 점차 '상징적인 죽음' 이후의 '정화, 재탄생'으로의 이향에 대한 메시지가 많이 느껴진다. 사실 작가가 원하는 최종의 목적지는 경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본다면 이런 변화의 과정은 점차 자신이 찾은, 혹은 찾아가려는 새로운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이차적 단계로의 진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 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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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중각성 夢中覺醒






이정웅展 / LEEJEONGWOONG / 李正雄 / painting 2012_1025 ▶ 2012_1125 / 월요일 휴관




이정웅_Anemone Blues_캔버스에 유채_112.2×193.9cm_2012



초대일시 / 2012_1025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12_102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16 www.16bungee.com




이정웅의 작품은 '꿈'으로 가득 찬 세상을 표현한다. 시공간은 서로 뒤섞여 있고 이미지들은 서로 일관적인 내러티브를 거부하듯 부유하며 떠돈다. 작가가 구축한 화면은 독특한 공간구획으로 2009년 아트스페이스 휴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인 '몽상'과 연장선상에 있다. 이전의 공간처리에서도 이런 레이어드(layered)가 엿보였지만, '몽중각성'으로 묶인 작품들은 마치 두 개의 필름을 겹쳐둔 모양으로 다른 시공간이 연극적인 무대처럼 등장한다.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이중적이다. 이는 꿈속인데도 현실처럼 느껴지는 '각성'적 순간을 의미하며, 반대로 현실에서는 꿈처럼 좋은 순간, '이것은 꿈인가'하고 생각하는 지점을 '몽중각성'에서 느낄 수 있다. '몽중각성'은 꿈과 현실에서 경험하는 데자뷔(Déjà vu)가 발현된 시공간이다. 꿈속에서 깨어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든, 꿈처럼 생생한 것을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든, 그의 작업에는 꿈과 현실의 세계, 무의식과 의식,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상반되는 개념들은 서로 이분법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양 경계를 오가며 동떨어진 시간과 공간을 묘하게 희석시킨다. '그림에서처럼 시에서도(Ut pictura poesis)'라는 말처럼, 이정웅의 작품은 문학과 회화의 매체적 특징을 끌어들인 '복합예술(composite art)'을 혼용한다.
이정웅_Clytie_캔버스에 유채_193.9×112cm_2012

이정웅의 작업에는 라파엘전파 화가인 로렌스 알마-타데마(Sir Lawrence Alma-Tadema)의 붓 터치, 상징주의 화가들이 보여준 시적이고 문학적인 구조, 리얼리스트들이 보여준 동시대성과 일상성의 반영과 같은 다양한 특징이 혼재한다. 홍대 앞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볼 수 있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Ilya Repin)에 관한 책은 이정웅이 상당히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을 참조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해석적 차원으로 번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구 작가들의 작업은 이정웅이라는 젊은 작가에게 하나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알레고리적인 내러티브를 지양하고, 과거의 기억과 시점을 환기시키는 행위를 통해 꿈을 매개로 현재와 과거를 중첩시켜, 초현실주의적인 화면으로 그림을 재구성한다. 즉, 그는 여러 개의 화면을 몽타쥬처럼 재조합하여 그가 경험한 현실을 꿈으로, 그가 꾼 꿈을 현실로 '꼴라주'식으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퍼즐처럼 '완벽하게' 들어맞는 '몽중각성'을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역설적으로 만남과 사랑, 이별 등 꿈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의 깊이와 폭을 이미지로 전환시킨다. 그의 그림은 인간과 인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와 말 대신에, 침묵을 선택한다.
이정웅_Healing Time_패널에 유채_41.5×60cm_2012

16번지에 전시되는 10여점이 넘는 그의 작업에는 공통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그 어느 작업도 관람자를 직시하거나 응시하는 회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연극 무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눈을 비켜 오히려 내면을 향한다. 등장인물들은 내적 비전과 심리적인 몰입에 다가감으로써, 현상학적인 지점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적인 지층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심리적인 잔상효과는 과거와 현재의 기억과 연관된 이미지를 '필름 몽타주'와 같은 방식으로 펼쳐두는 독특한 화면 구성덕분이다. 이정웅의 작업은 전체를 보고서도 전체를 말할 수 없으며, 일부를 보았으면서도 전체를 예감할 수 없는 모호한 화면을 의도적으로 구성한다. 「Silently Parade」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정웅의 이번 전시는 2009년 첫 개인전에서 제시되었던 개념과 과히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처음 등장했던 죽음과 이별이라는 주제는 작가 스스로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경험들이 즉물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오히려 알레고리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2012년 근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남성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Silently Parade」에서는 한 사건을 진행하는 캐릭터로 작가 자신이 출현하지만, 주인공이 아닌 이 사건을 보완해주는 가이드로서 존재한다.
이정웅_Monkey Magic_캔버스에 유채_72.5×117cm_2012

이러한 작업은 한 편의 연작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모호한 불협화음도 존재한다. 작가는 뚜렷한 내러티브를 만들기를 거부하면서도 사건을 인도하는 가이드처럼 자신을 등장시키며, 현세가 아닌 다른 세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타난다. 자신을 연출자로 규정하면서도 인터뷰에서 검정색 옷을 입은 인물이 '저승사자'라는 언급한다. 그러나 무서운 모습으로 인간의 영혼을 뺏어가는 서구의 저승사자가 아닌, 때로는 해학적인 인물로 때로는 인간적인 인물로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던 메신저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멜랑꼴리한 자화상 왼쪽에는 동시대 복장을 한 여성이 춤을 추고 있다.
이정웅_Silently Parade_캔버스에 유채_193.9×390.9cm_2012

「아네모네 블루스(Anemone Blues)」에서도 같은 여성과 갓을 쓴 자화상이 동시에 등장한다. 바람의 신인 제피로스가 사랑했던 시녀 아네모네는 제피로스의 부인인 플로라의 질투로 꽃이 되어 사랑의 괴로움이란 꽃말로 사람들 입에서 회자되어 왔다. 전경에는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무관한 누드상이 배치되어 있으며, 일본풍의 머리스타일을 한 남성이 동시대 복장을 입은 여성을 안고 달래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오른쪽의 인물은 우연한 사건인 듯 가장자리가 크로핑(cropping)되어 이 모든 것은 계산적이면서도 우연적인, 친숙하면서도 낯선 양가성을 지닌 화면을 보여준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연극 무대의 속성이다. 전경을 프리즈(frieze), 부조화처럼 수평구조로 만들어 '연극적인' 무대를 연출하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연극적인 액팅이고, 이 액션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묻어있는 무대이자, 마스커레이딩(masquerading)이 진행되는 가상공간이다. 무릎을 꿇어앉은 인물도, 여성을 달래는 남성도 결국 그들이 쓴 가발을 벗고 나면 자화상과 똑같은 인물로 변신한다.
이정웅_그릇이 작다_캔버스에 유채_97×193.9cm_2012

「클뤼티에/(Clytie)」라는 작품도 역시 이러한 '기다림'과 '바니타스(vanitas)'를 해바라기와 해골이라는 알레고리적인 모티프를 통해 전달한다. 물의 요정이었던 클뤼티에는 태양신 아폴로와 사랑을 나누지만, 그에게서 버림받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발가벗은 채 9일 동안 자신을 버린 아폴로를 바라보았다. 9일이 지난 후 클뤼티에는 해바라기로 변해버렸다는 그리스 신화를 보여주듯, 그림 속의 여성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왼쪽을 직시한다. 이정웅의 작품 속에는 아네모네, 해바라기 외에도 연꽃, 백합, 타래붓꽃 등도 등장해 알레고리적인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그러나 꽃말이 전달하는 희망과 절망, 사랑과 비애의 감성은 쉽게 해독될 수 없는 이미지들의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직설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Monkey Magic」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이 쓴 어사화(御史花)로 장식된 모자를 쓴 인물(자화상)이 등장하지만, 의자에 앉은 여성은 남성의 제스처와는 전혀 다른 무관심을 표명한다. 작가는 오리엔탈리스트(Orientalist) 화가들이 많이 구사했던 이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해 이러한 사건이 지금, 여기가 '아닌' 형식으로 제시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몽중각성'은 꿈과 침묵으로 말을 던지는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과거의 형식을 통해 지금, 여기를 이야기 한다.
이정웅_타래붓꽃 Iris Lactea var.chinensis(Fisch.)Koidz_캔버스에 유채_91×117cm_2012

이정웅은 이야기에 저항하지만 이미지로 존재하는 알레고리와 이야기를 거부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는 스케치에 시나리오를 정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에 들어서는 이미지와의 '대화'를 통해 그림을 완성해나간다. 이러한 과정은 그림그리기에 많은 시간을 요하며, 꼼꼼하게 채워진 화면은 대화의 흔적이 오간 시간성을 보여준다. 이미지는 시간성의 흔적이자, 그리기라는 노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작업실에 붙어있는 사진 속 여성과 자화상은 인물과 세팅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드로잉과 같은 사전 작업에 해당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이번에 전시되는 「Healing Time」이라는 작업이 알려주듯이, '치유의 시간'으로 와 닿는다. 파편화된 이미지의 꼴라주로 배치된 신화와 꿈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만나면서 과거와 현재가 의미가 없어진 새로운 시공간을 형성한다. 즉, '각성'은 단순히 '깨닫는다'라는 의미를 넘어 사물과 관념의 탈신화화(脫神話化)로 전치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정웅의 꿈은 비로소 세상과의 두 번의 조우(개인전)를 통해 탈신화화 된다. 그렇게 본다면, 이정웅의 '몽중각성'은 꿈과 현실(실재)이 서로 맞닿아 있는 호접지몽(胡蝶之夢)으로 가는 첫 출발점이다. ■ 정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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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ull's Eye






폴케르트 더 용展 / Folkert de Jong / sculpture.drawing 2012_1025 ▶ 2012_1209 / 월요일 휴관




폴케르트 더 용_The Balance_스티로폼, 폴리우레탄, 페인트_350×700×235cm_2011



초대일시 / 2012_1025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 ARARIO GALLERY SEOUL samcheong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gallery.co.kr




네덜란드 작가 폴케르트 더 용의 개인전이 10월 25일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열린다. 폴케르트 더 용은 1999년 첫 개인전 이 후, 독특한 재료를 사용하여 인간사에 대한 깊은 고찰을 드러내는 다양한 조각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는 이미 서구 미술계에서 그 역량을 인정받은 폴케르트 더 용의 작품을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시간으로 신작 4점을 포함한 조각 8점과 드로잉 작품 4점, 총 12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폴케르트 더 용_The Thinker_스티로폼, 폴리우레탄, 페인트_151×140×120cm_2011

조각가이자 설치 미술가인 폴케르트 더 용은 건축이나 영화 산업에서 주로 쓰이는 부자재인 스티로폼, 폴리우레탄과 같은 재료를 이용한 독창적인 미술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더 용은 이 재료들을 사용하여 화학 산업, 석유 경제, 동시대 정치, 제 1,2차 세계대전, 공포 영화, 미술사 등 다양한 주제의 작품을 연출한다. 더 용이 소재로 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과학의 남용, 환경문제, 정치적 불찰, 전쟁과 재난 등 인간의 '비도덕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이 실물 크기의 조각들은 거칠게 잘리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표면에 원색의 페인트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있다.
폴케르트 더 용_Black Lincoln, Pink Hat_폴리스티렌_160×60×60cm_2011

더 용은 스티로폼, 폴리우레탄 등의 원재료가 가지고 있는 분홍, 초록, 파랑 등의 색을 그대로 노출하여 보여주는데, 그 색상들은 각 화학산업 회사들이 제작한 제조 스티로폼의 고유한 색들이다. 더 용은 이러한 화학 물질들이 2차 세대 대전 당시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으며, 쉽게 부패되지 않아 환경에 매우 위험하고, 소량의 원재료를 이용해 40배나 부풀려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는 인간의 부도덕함, 환경 문제, 대량 소비와 시장 경제를 극단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다.
폴케르트 더 용_Smoke Double Shirley_폴리스티렌_140×50×50cm_2011

밝은 색상의 그로테스크한 형상에 과장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각들은 혐오와 어두움과 같은 주제와 대비를 이루며, 과거의 금지되어 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은유적이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 예를 들어, 2010년 작 「The Balance」는식민주의에불공평하게이루어지던거래에대한내용을담은작품이다. 17세기 네덜란드 인 페터 더 미누이트(Peter de Minuit)을 소재로 한 조각 설치 작품으로, 페터 더 미누이트은 당시 인디언들에게 $24 상당의 장신구와 구슬, 거울 등을 주고 맨하탄 땅을 사들인 불공정 거래의 대명사 격인 인물이다. 이 작품 속 등장 인물들은 드럼통과 나무 판 위에 앉거나 서서 당시 인디언들에게 거래의 대가로 전달된 진주 목걸이와 창 등을 들고 웃고 있다. 폴케르트 더 용은 이와 같은 불공정하고 부당한 거래들이 단지 과거 만의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역사와 함께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폴케르트 더 용_New Realm_종이에 루모 컬러 마커_59.5×42cm_2011

더 용의 조각들은 보는 이들에게 고통이나 죽음을 맞닥뜨려 느끼게 하며, 불변하는 인간의 부도덕함에 대한 각성을 일깨워 준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폴케르트 더 용의 『The Bull's Eye』는 12월 9일까지 진행된다. ■ 아라리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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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DNA : 한국 현대미술 연속 기획전






첫 번째 이야기-김정욱_배준성展 2012_1025 ▶ 2012_1230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일주학술문화재단_선화예술문화재단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_서울문화재단_태광그룹

관람시간 / 11: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일주&선화 갤러리 ILJU&SEONHWA GALLERY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226번지 흥국생명빌딩 3층 Tel. +82.2.2002.7777 www.iljufoundation.org www.seonhwafoundation.org




『황금DNA』展 ● 세계 현대미술의 무대에서 한국 문화예술의 역량을 빛낸 작가들을 모아 일련의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전시 작가들을 통해 '우리 유전자 속에 잠재된 뛰어난 문화의식의 발현'을 보여주고자 『황금DNA』라는 이름의 연속 기획전을 준비했습니다. 하나의 주제하에 두 명의 작가를 모아서 이인전(Duo Show)형식으로 구성하고, 이 주제들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써 나가려고 합니다.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63×94cm_1999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64×94cm_1997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75×72cm_1997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62.5×93.5cm_1998
김정욱_무제_한지에 먹, 채색_94×64cm_1998

첫 번째 이야기 : 김정욱과 배준성 ● 21세기에 우리의 전통을 묻다.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을 한데 모아서 차례로 보여 드리겠다는 기획은 필연적으로 한국미술의 정체성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한 국가의 정체성은 다른 국가와의 차이에 의해서 정의되며 서구 중심의 세계체제 하에서 비서구권의 정체성은 서구라는 주류와의 차이로 정의됩니다. 호미바바(Homi K. Bhabha)에 의하면 후기식민사회의 주체는 대개 '과거에 대한 낭만적 숭배'나 '부정적 차이의 인식으로 인한 자기비하'라는 두 개의 범주 중 하나에 속합니다. '후진(後進)'이라는 굴레는 필연적으로 '선진(先進)'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을 초래하고, 이에 따른 자기비하를 달래기 위해 '자기 것', 즉 전통에 대한 회귀와 집착을 유발합니다. 한국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항상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은 이런 낭만적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입니다.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C.Lacroix 031018_사진에 비닐, 비닐에 유채_215×305cm_2003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Vermeer 050330_사진에 비닐, 비닐에 유채_221×154cm_2005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W.house 060322_사진에 비닐, 비닐에 유채_225×154cm_2006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museum L, new still life with peach_ 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259.1×193,9cm_2007
배준성_The Costume of Painter-Museum R, Legs_캔버스에 유채, 렌티큘러_193.9×259.1cm_2008

그러나 '후진'이던 우리가 어느덧 주류의 문화와 논리를 자기화하면서 '선진'과 주류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제 일정부분 주류와 동일시되었고, 전통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미래지향적 전망 하에서 재해석된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 김정욱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후 조선시대 전통 초상화 기법과 재료를 이용하여 현대적 인물화를 그립니다. 반면 작가 배준성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서양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 이미지를 차용한 '화가의 옷(Costume of Painters)' 시리즈 작업을 합니다. 지금 이 두 작가의 전시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전통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새삼 돌아보는 것은 이러한 경직된 구분을 넘어 21세기 우리가 새롭게 창조해 나갈 전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 일주&선화 갤러리
modified at 2012.10.24 21:13:17 by zabel
2012.10.23 14:21:53 / Good : 366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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