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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7.30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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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8월 전시

TRICKLING WALL 흐르는 벽


요시타카 이와모토展 / Yoshitaka Iwamoto / 岩本吉隆 / installation   2012_0801 ▶ 2012_0807 / 월요일 휴관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 오버헤드 프로젝터_설치_2011
초대일시 / 2012_080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버튼 Gallery Button 서울 성북구 창경궁로 35길 83(성북동 1가 103번지) 1층 Tel. +82.70.7581.6026 www.gallerybutton.com

요시타카 이와모토의 작품들은 서로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킨다. 작가는 투명 아크릴 박스에 스포이드와 유리 안료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는데, 아크릴 박스 위에 도포된 유리 안료는 빛을 투사할 수 있을 만큼 얇고, 투명하다. 흰 벽이 아니라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한 페인팅 작품들은 종종 다른 작품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버헤드 프로젝터 위에 올려 놓은 요시타카의 페인팅 작품이 벽이나 바닥에 투사되어 단순히 아크릴 박스 위의 페인팅이 아니라, 설치 작품의 일부가 되거나 사진 작업의 오브제로 새롭게 사용되는 것이다. 비단 페인팅 작품 뿐 아니라 그의 조각 작품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설치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_30×42×5cm_2012
장르가 다른 작품들이 한 작품의 일부로 설치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요시타카 이와모토가 각각의 장르에 투명 아크릴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작가가 투명 아크릴을 사용하는 이유를 궁금해 해야 한다.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_30×42×5cm_2012_부분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_30×42×5cm_2012_부분
요시타카 이와모토의 작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이고, 답이다. 투명함에 대한 그의 고민이 결국 그를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만, 결국 눈에 뻔히 보이는 물질'로 이끌었다. 요시타카의 작품 대부분이 투명 아크릴 박스를 이용하게 된 것은 모두가 투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물체가 빛을 잘 통과시키는 데가 있다'라는 투명함에 대한 물리학적 정의는 그저 물리학적 정의로 끝날 뿐, 실상은 너무나 확연히 눈 앞에 보이고 있다는 것.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_30×42×5cm_2012_부분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_30×42×5cm_2012_부분
그는 '투명한 것은 비가시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뒤집어, 우리가 투명하다고 하는 것 대부분이 가시적이며 동시에 비가시적이라는, 형질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가 투명 아크릴 박스를 이용한 작업에 몰두하게 된 것은 이 애매한 투명성이 공간과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관심과 고민 때문이다. 관람객이 투명하다고(혹은 비가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브제가 벽에 투사되거나 디스플레이 되어 가시적인 상태로 보여질 때, 일반적인 인식과 예술의 표현방식의 확장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요시타카 이와모토 Yoshitaka Iwamoto_Untitled_아크릴 보드에 유리 안료, 오버헤드 프로젝터_설치_2011
곧 관람객으로 하여금 하나의 사물이 다양한 방식을 통해 예술적으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요시타카 이와모토 작업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람객들은 희고 단단한 전시장의 벽이 작가의 고민을 만나, 색을 입고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디스플레이 되는 과정을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 갤러리 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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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Der Zwang zur Tiefe


홍승희展 / HONGSEUNGHEE / 洪承希 / installation.photography   2012_0802 ▶ 2012_0828 / 일요일 휴관


홍승희_Der Zwng zur Tiefe-#13_130×268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승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02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트렁크갤러리 TRUNK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8-3번지 Tel. +82.2.3210.1233 www.trunkgallery.com

그의 "오브제"가 만든 흔적의 '깊이'에 관하여-심리적 시간- ● 오브제가 어떤 곳에 놓여있다. 우리는 그 놓인 상태를 본다. 그 '보여진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흐름'이다. 그 흐름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또 보고 있는 사람의 '의식의 흐름'이기도 하다. 의식은 시간에 의해 발전하기 마련이다. 순간 순간이 만들어 내는 홍승희의 '의식', 그 '마음의 상태'가 변화하며 보여지는 현상, 그 '흔적'에 그는 관심을 갖는다. 그 '흔적'이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 '흔적'은 '깊이'를 형성한다. 홍승희의 작업은 '흔적의 깊이'에 관한 이야기 이다. 홍승희는 그 오브제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 그 움직임이 만드는 흔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깊이로 변하는, 다시 말 하면, 그 오브제가 그 공간에 가하는 '흔적의 깊이 형성'을 재현 해 내겠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흔적의 깊이가 발전 하는 '현상'을 보았던 것 같다. 물론 그 현상은 착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흔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 발전하는 '깊이'에 자신이 끌려 이 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말 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본 것 일까?
홍승희_Der Zwng zur Tiefe-#14_160×233cm_2012
사진발명 이전의 '회화'에서는 '공간의 재현'만이 가능했고 '시간의 재현'은 불가능 했었다. '움직임' 이란 그 어떤 대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상의 위치변화 과정이 형성되는 '현상'이다. 그 공간의 위치변화의 흔적을 우리 눈은 정확이 볼 수 없다. 하여 재현이 불가능 했다. 우리 눈이 '본다'는 것은 대상이 반사하는 빛이 우리의 망막에 닫아 그 닫은 빛을 시 신경이 반응하고 기억 해 내어야 드디어 본 것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 대상의 움직임이 매 순간 반사한 그 빛의 흔적을 기억하는 것, 그 기억한 시간을 재현하는 것이 '동감'이다. 하여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린 것은 눈이 보지만 그 현상의 과정을 다 기억하지 못 함으로 보지 못 한 것 이 된다. 그러기에 재현이 불가능 했던 것 이다. 그런데 현대 과학인 사진의 필름은 125분의 1초라는 짧은 시간에 아니 오늘날에는 8000분의 1초로 그 빠른 초음속 비행동체도 기록 가능하다. 필름 면의 은 입자의 화학작용이 우리 눈이 보지 못하는 그 짧은 순간(시간/운동성)에 반응, 기록 해 낼 수 있게 되었다.
홍승희_Der Zwng zur Tiefe-#12_160×354cm_2012
홍승희는 순간에 집착하고 있다. 매우 심리적인 작업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는 도전이다. 책장 속의 책들의 반란을 재현한다. 책들의 반란, 가지런히 꽂혀만 있으라 한 책들이 마구 제 멋대로 움직인다는 것. 어떤 해방감,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어쩌면 제도에 대항, 그것들이 그를 억압하고 있다고 하는 그러기에 그것들에 대한 몸부림 같은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안타까운가 싶다가 통쾌해 지기도 하다. 책장 속의 책을 움직인다. 그렇게 연출시킬 수 없어 그는 그 움직임, 반란을 형태로 재현, 사진으로 시각화 시켜 냈다. 또 다른 도전이다. 시간과의 싸움이고, 불가능에 대항이다. 아니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 박영숙 -----

적극가담자 - 방관자


이승민展 / LEESEUNGMIN / 李昇珉 / painting   2012_0802 ▶ 2012_0831 / 일,공휴일 휴관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194×388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423h | 이승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02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번지 B1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살롱 드 에이치 Salon de H 서울 강남구 청담동 31-2번지 신관 1,2층 Tel. +82.2.546.0853 www.artcompanyh.com

사이보그의 탄생 그리고 타자의 소멸 ● 성별, 피부색, 키, 몸무게, 나이 등 신체적 조건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해석은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몸을 물리적인, 생물학적인 구조가 아닌 문화적인 개념 혹은 사회적인 욕망으로 바라보는 시점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1818년 메리 쉘리 (Mary Shelley)의 프란켄슈타인, 1963년 마블 코믹스의 엑스맨, 1984년 제임스 카메룬의 터미네이터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인간의 모습과 조금만 달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괴물이라고 부른다. 죽은 시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실험, 돌연변이 변종인류의 증식, 기계인간의 반격 등은 하나 같이 타자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소외감, 상실감, 부적응을 소설, 만화, 영화로 반영한 결과물이다.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50×120cm_2012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50×120cm_2012
이는 제어를 벗어난 테크놀로지, 과학, 사회 현상,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포와 다르지 않다. "인간을 위한" 기계, 시스템, 약품을 만들겠다는 최초의 좋은 의도가 언제든지 예상치 못한 폭력성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은 미래로 다가갈 수록 그 농도가 짙어질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실제 인간의 존재까지도 대치할지도 모른다. 인류가 만들어 놓은 덫에 인류가 빠져버리는 패러독스는 반복, 확대, 재생산의 과정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50×50cm_2012
폭력성을 냄새에 비유해 몽환적인 화면을 만들었던 이승민의 이번 신작들은 기계인간의 모습으로 진화한다. 스스로 학창시절을 악동으로 묘사하며 개인적인 기억의 파편에 의존했던 방법론이 사회를 관찰하는 네러티브로 바뀌어, 파편화되고 기계화된 사회구조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점은 1964년 출간된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 The Extension of Man』와 동일선 상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컨텐츠가 아닌 그것을 전달하는 테크놀로지 미디어 자체의 특성이 서로 다른 국가, 정체성, 이데올로기를 쉽게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변화된 환경을 지적하고 그 변화된 구조가 만들어낼 미래성을 읽어내고 있다. 신문, 잡지처럼 텍스트와 메세지가 비록 없다고 해도, 전구가 발명되어 밤을 빛의 공간으로 재탄생 시켰고, 그 빛 아래서 다양한 텍스트와 메시지가 생산되고, 결국 밤이라는 시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바뀔 수 밖에 없었던 맥락을 끄집어 냈던 맥루한의 철학적 관점이 이승민의 작품과 오버랩되고 있다. 전구가 눈의 기능을 연장 시킨 것이다. 이처럼 기계와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연장시키며 결국 정체성의 범위까지도 확장 시키고 있다. 기계에 의존하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닌 기계의 전자감각 장치들이 인간의 촉수가 되어 세상을 읽어내고 나를 정의하는 분리할 수 없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224×194cm_2010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기계장치는 여전히 공포스런 대상이다.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부속품이어야 안심할 수 있고, 될 수 있으면 사람을 닮지 않아야 혐오감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여러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승민의 기계들은 사람을 닮았고, 인간의 부품으로 머무르려 하지 않고, 인간 자체의 모습을 기계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손, 발 등 뇌의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수동적인 부속이 아닌 인간의 머리를 기계로 보여주며, 관객이 바라보는 인물이 진짜 인간인지 아니면 기계부속품의 결합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의 제어에서 벗어난 기계인간 혹은 인간의 의식까지도 지배할지 모르는 사이보그를 탄생시킨 것이다. 일종의 오랜 금기를 깨버린 불경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승민의 사이보그는 사람들의 편견처럼 결코 공포스런 대상이 아니다. 그는 순수한 모습의 어린 아이들의 두상 이미지를 기계부품과 결합시켰다. 어린 아이의 평온한 이미지와, 사이보그 만화에 열광했던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점의 이동은 기계가 내포하고 있는 잠재된 폭력성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주체와 타자의 섞이지 않는 충돌을 극복하고, 친근한 소통까지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을 바라보는 정의, 즉 현대사회 속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외연이 확장되는 시각경험을 사이보그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의 시점을 인간의 신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과 기계 사이 정중앙에서 양쪽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인간에게 부족한 기능을 보안하는 신체의 연장선이 아닌 "인간성" 자체에 대한 외연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읽어내게 만든다.
이승민_적극가담자-방관자_캔버스에 유채_120×500cm_2011
이처럼 이승민의 사이보그는 기계에서 태어났는지, 인간으로부터 자라났는지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래서 인간과 신체기관들, 물리적인 재료와 비물리적인 정보,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들의 이원론적 인식체계를 전복시킨다. 흥미롭게도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 기계, 사이보그의 경계를 만들어낸 테크놀로지가 시간이 흐르면서 역으로 그들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장치가 되었다. 이질적인 것들의 집합이 하나로 이어 붙여 그려낸 이승민의 프란켄슈타인을 보고 사람들은 괴물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이보그란 타자가 탄생시켰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이 알고 있던 타자에 대한 개념은 해체되었다. 익숙했던 인식의 대상이었던 신체의 문제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것이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미리 알 수는 없지만 미래의 질서를 미리 구성해 보려는 반복된 시도가 결국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승민의 그림은 그런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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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 Boy


홍삼展 / HONG3 / painting 2012_0803 ▶ 2012_0819 / 월요일 휴관


홍삼_Ahahah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82×91cm_2012

초대일시 / 2012_0803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3층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홍삼은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른바 X세대들이 이끌어온 힙합문화에 영향을 받은 '힙합 키드'이다. 힙합문화에는 4가지 요소가 있다. '디제잉', '랩', '비보잉'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라피티'. 그는 십대 중반까지는 랩핑(Rapping)에 심취하였지만 예술고 미술과에 진학하면서 동시에 '힙합을 그리는 행위'인 그라피티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힙합이라는 문화를 두고 90년대 중반의 다양한 언론 매체에서는 일종의 '흑인중심 하위문화'임과 동시에 '저항'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 힙합은 흑인뿐만 아니라 라틴계 이민자의 2세들과 푸에르토리코에서 유입된 히스페닉 등의 다양한 인종이 뉴욕이란 대도시 속에서 뒤섞이며 만들어낸 '놀이문화'에 가깝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작가는 힙합에 매료되어 지금까지도 그 문화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런 '놀이'적 요소 때문이라고 말한다.
홍삼_H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130.3cm_2012
홍삼_IBT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2

그라피티아트는 마커와 스프레이를 가지고 작가 자신의 별명을 거리에 '쓰는 행위'에서 출발하여 점차 구체화되고 대형화 된 슈퍼그래픽을 닮은 만화적 이미지로 발전해갔다. 여기까지가 70~80년대 그라피티의 양상이며 작가가 20대까지 쫓고자 하던 것들의 원류라고 한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주는 압박감 속에서 힙합_그라피티라는 놀이를 통해 경쟁하고 자아를 표현했던 뉴욕의 아이들과 IMF시절을 이겨내며 길거리를 누비던 힙합키드였던 십대의 홍삼은 어느 정도 닮아있다. ● 2006년, 홍삼은 대한민국 젊은이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한 홍대거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마크를 본격적으로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름을 개성 있게 새기는 행위'를 벗어나 자신만의 캐릭터나 아이콘을 그리는 행위가 그라피티 계의 큰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새로운 트렌드에 관심을 가졌다.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트릿컬쳐(street culture)를 대표할 만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후드와 모자 그리고 운동화는 스트릿컬쳐의 아이콘임이 분명했고 나머지는 유일무이한 그만의 매력이 문제였다. 작가는 캐릭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개성을 부여하기로 결심했고 후드티셔츠라는 패션아이콘을 강하게 부각하여 '스트릿보이'만의 외형과 감성을 다듬어가기로 하였다.
홍삼_Keep walking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162.2×130.3cm_2012 홍삼_Party and Bull Shit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116.7×91cm_2012

얼굴이 없음으로 인해 보는 이 모두가 자기화가 가능한 캐릭터 '스트릿보이'는 도시인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의 단면이다. 그의 옷차림새는 길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얼굴을 보여줄 수 없기에 그가 보여줄 만한 거라고는 오로지 몸짓뿐이다. 몸의 언어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스트릿보이'가 가진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홍삼_Playground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162.2×130.3cm_2012
홍삼_Untitled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60.6×50cm_2012 홍삼_Untitled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60.6×50cm_2012

홍삼의 작업은 스트릿컬쳐라는 가장 현대적 문화코드를 기반으로 보편적 감성에 대한 제고를 제시한다. 이 전시는 한국현대미술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배경의 작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 홍삼
홍삼_Wizard of Graffiti_패널에 스프레이페인트_130.3×486cm_2012

2006년 겨울, 그래피티를 통해 세상에 나를 알리고 싶었죠. '길거리', '고독감' 등이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후드티셔츠를 쓴 캐릭터의 옆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 '스트릿보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 거리에 '그'를 선보인지 1년 남짓 되었을 때 즈음, 차츰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름 모를 행인이 따라 그려놓은 스트릿보이를 보게된 경우나 누군가 개의 주둥이를 그려넣어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사라진 일도 있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얼굴이 없다는 점과 후드티셔츠라는 패션코드가 지닌 스트릿보이 만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스트릿보이에 자기 자신을 투영시킬 수 있고 그것을 넘어서 상상이나 변형을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사실, 그에게 얼굴이 없는 이유는 그 누구도 보고싶지 않아서 후드를 깊이 눌러 쓰고 다니던 나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입니다. 얼굴 없는 그 모습이 마치 몰개성의 표상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 변화는 길거리와 갤러리에서 경험한 '대중과의 호흡'을 통한 것인데요. 요즘은 스트릿보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그 누구도 너를 규정할 수 없다!"라고요. ■ 홍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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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세대와 소통하다.


80-89 감성이미지展 2012_0804 ▶ 2012_081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804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총 88명) 강승지_강지웅_강정훈_고세림_고영준_고준상_김남은_김남현_김다혜 김동환_김미내_김민재_김상숙_김새롬_김성호_김수현_김영현_김유진 김윤지_김은총_김준호_김지연_김지현_김지희_김하린_김희앙_나지영 노미랑_모소현_민나림_민소영_박락승_박상준_박수지_박유연_박원표 박진영_박찬국_백나래_백현_서대균_서진아_석한_성은지_송인호_송재종 신동화_신수연_신혜진_여준환_오문섭_옥경래_원지연_유기호_윤지예 윤희선_이선희_이소정_이승민_이승연_이유진_이은실_이재욱_이지혜 이현구_이현규_이화영_이희묵, 장은영_장은혜_전종국_정문정_정주연 정지숙_정형규_조민지_조민혁_조진규_주희_지승민_지인_진효선 천보경_최예송_최유민_한도연_허나래
주최 / 국민대학교 후원 / 성곡미술관
관람료 / 5,000원 / 학생 4,000원 7세 미만 어린이 및 65세 이상 무료관람 (까페이용 별도) * 20인 이상 단체_1,000원 할인 / 사전 전화문의_Tel.02.737.7650 *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단체관람료 적용 * 1관 전시 관람료 포함
관람시간 / 10:00am~06:00pm / 매주 목요일_10:00am~08:00pm 연장개관 / 월요일 휴관 * 종료시간 30분 전까지 입장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2.737.7650 www.sungkokmuseum.com blog.naver.com/sungkok33

80년대생 관찰하기 ● 박정희 정권이 끝나고 탄광 노동자 파업, 전국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탄생한 제 5공화국. 쿠데타로 성립된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시대를 배경으로 태어난 이들이 바로 80년대생들이다. 부정부패, 민주화운동탄압, 고문 등의 인권유린행위가 무자비하게 일어났던 시대였으나 80년대생들은 이러한 일들은 전혀 모른 채 부모님 품 안에서 마냥 행복한 유아시기를 보냈다. ● 88서울올림픽이 열렸을 때는 올림픽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TV 앞에서 어른들과 함께 열심히 선수들을 응원했었다. 채널을 바꾸려면 반드시 텔레비전 앞까지 가서 손으로 직접 돌려야했고, 채널이 넘어갈 때에는 지지직 소리가 나는 채널을 꼭 지나야 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리모콘이 있는 텔레비전으로 바뀌었고, 비디오도 집에 들여놓아 집 근처 비디오 가게에서 만화영화를 빌려 보곤 했다.
강지웅_Ecce Homo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우레탄_162.2×130.3cm_2011
김수현_Overlap cityⅡ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1

당시에 다니던 학교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으며 물체주머니와 모양자, 책받침, 종합장은 1학년 들어가자마자 늘 가지고 다녀야 했던 필수 준비물이었다. 방학이 되면 라디오 교육방송을 들으며 탐구생활을 공부했고 그림일기장에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그리느라 무척 힘들었었다. 공상과학 그림그리기를 할 때는 우주에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장면이나 바다 속 해저터널의 모습을 그렸고, 작은 문방구 앞에 있는 백원 넣고 돌리는 뽑기는 거의 매일 마다 했던 것 같다. 무엇이 나올까 설레였지만 타원형 구 모양의 플라스틱 케이스를 반으로 쪼개 열어 확인하고 나면 항상 허탈하고 실망하는 마음 뿐 이었다. 덤블링이라고 불렀던 트램폴린도 많이 탔고, 그 옆에서 파는 달고나도 많이 먹었고, 종이인형놀이, 컴보이 게임, 엄마놀이, 마루인형놀이, 탈출놀이, 요요, 치토스 따조 모으기, 미니카,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롤러스케이트 등 수많은 놀이들을 쉬지 않고 했다. 과학상자를 갖고 있으면 남들보다 더 많은 과학적 능력을 갖고 있는 듯 했는데 특히 몇 호를 갖고 있는지가 참 중요했다. TV 프로그램은 피구왕 통키, 슛돌이, 만화잔치, 천사들의 합창 등을 즐겨 보았다.
송재종_홀로 들어선 순간_합성수지에 유채_265×110×100cm_2011
신혜진_Humming_고서(Old Books), 동, 은_6×4×8.5cm_2012

조금 더 자랐을 때, 서태지, 김원준, 유승준, 룰라, HOT, 영턱스클럽, 듀스, 잭스키스, 클론 등의 가수들이 참 좋았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넷츠고 등으로 접속한 채팅은 너무나 신기하기만 했다. 다마고치를 죽이지 않고 잘 키우기 위해 학교에 항상 가지고 다녔고, 쉬는 시간에는 열심히 다이어리를 꾸몄는데 이것을 장식하는 필수품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체육시간 후 교실로 들어오면 땀이 뻘뻘 나고 더워죽겠는데 선풍기는 단 두 대 뿐이어서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하면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고 선생님이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들은 틈만 나면 운동장으로 나가 농구를 했는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97년 IMF 는 어린 마음들에게 상처를 가득 안겨 주었을 텐데 당시 주변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는 친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자존심 때문인지 아무도 티를 내지 않았나보다. IMF때 힘들었었다는 얘기는 어른이 된 후에야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이지혜_조합형 부적을 위한 장식 그래픽 시스템 연구_디지털 프린트_118.9×84.1cm_2011

대학교 다닐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핸드폰을 들고 다녔고 수강신청, 성적확인 등 거의 모든 행정적 절차는 인터넷을 이용했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데이트 하고, 술 마시고, 엠티가고... 놀기는 참 잘 놀았다. 그때는 정말 돈이 없었는데 어떻게 매일 놀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에서처럼 대학의 낭만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선배들에게는 잘 뭉치지 못한다, 개념이 없다, 등의 말을 종종 들었는데 개인주의가 강한 우리는 군대와 같은 생활을 강요하는 선배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요즘 체벌하면 큰일 나는 초, 중, 고등학교를 보면 우리가 청소년인권이 짓밟힌 마지막 세대임을 느끼며 안타깝기도 하고 억울한 마음도 든다. ● 전쟁이나 기근 등의 역사적 시련을 경험하지 못하고 비교적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성장해 온 세대, 틈만 나면 자동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기 때문에 잠깐의 공백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세대,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의 철학을 생각하고 논할 시간이 없어서 깊지 않아 보일 것 같은 요즘 젊은이들. 그러나 인터넷 망, 스마트 회로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공간을 가지고 놀 줄 알고, 순발력이 뛰어나며 디지털 도구를 참 잘 쓰는 세대, 아날로그를 기억하면서 디지털과 사이버를 완벽하게 체득한 80년대 생들은 이제 결혼하고 아이를 출산하기 시작한 사람부터 대학교 갓 졸업한 사람들까지로 구성되었다. 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사회초년생이 된 것이다.
지승민_관계_백토_40×40×40.5cm_2011

『80-89 감성 이미지』展은 1980년에서 1989년 사이에 태어난 88명의 회화, 조각, 도자공예, 금속공예, 시각디자인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이다. 여러 장르의 작품들은 시각예술의 다양함을 선사하여 관람객에게 흥미를 제공하고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으로 예상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향후 활발히 활동할 우리나라의 잠재된 유망 작가들이다. 이 전시는 작가들로 하여금 프로작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게 하고 재능 있는 작가를 발굴 및 육성하게 될 것이다. ● 88명의 적지 않은 작가들 감성을 들추어 낸 것은 지금시대 젊은이들의 마음과 사고, 집단무의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80년대에 태어난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 세대의 정신과 생각, 특징 등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전시를 통해 80년대생들끼리는 기억을 공감하고, 타 세대들과는 감성으로 소통하여 진정한 세대 간 대화의 장이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 주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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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내부자의 풍경


권인경展 / KWONINKYUNG / 權仁卿 / painting 2012_0806 ▶ 2012_0831 / 주말 휴관


권인경_내부자의 풍경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65×9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14e | 권인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00am~04:00pm / 주말 휴관
대우증권 역삼역 갤러리 YEOKSAMYEOK GALLERY/ DAEWOO SECURITIES 서울 강남구 역삼동 679-5번지 아주빌딩 3층 대우증권 WM Class 역삼역 지점 Tel. +82.2.568.8866 www.sisoa.com

권인경은 한지에 수묵채색과 고서(古書)꼴라쥬의 기법을 사용하여 현대의 도시와 도시풍경들을 작품에 담아낸다. 여러 풍경들은 마치 하나의 장면처럼 화면 속에 펼쳐진다. 건물과 공간들은 작가에 의해 가로로 또는 세로로 첩첩히 쌓여져 재조합되어, 현실을 벗어난 세계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2005년의 첫 개인전『도시-일상의 삶』에서의 작품들이 수묵을 위주로 실제적인 도시건물들이 중첩된 공간을 보여주었다면, 두 번째 개인전『도시-변화 그리고 반영』(2006)부터는 고서꼴라쥬를 사용해 도시의 고층 건물과 아파트들의 풍경들을 표현했다. 이어지는 작품들에서, 권인경의 작업들은 점차 사실적인 공간처리에서 마치 몽타주와 같이 하나의 화면 속에 다양한 시간과 장면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화해왔다. 2011년 이후부터 최근의 작업들에서는「보이다, 보여지다」(2011),「보다, 보이다」(2012)와 같이 '그림 속 그림' 형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여백의 공간은 확연히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하지만 시점은 변함없이 다양하게 교차하면서 건물의 외부와 내부, 측면과 정면들을 표현한다. ■ 김동현
권인경_조망의 풍경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70×109cm_2011
권인경_정감화된 공간_한지에 고서꼴라쥬_36×58cm_2011
권인경_내부자의 풍경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53×45.5cm_2012
권인경_보다, 보이다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30.5×41cm_2012
권인경_내부자의 풍경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16×22cm_2012

"이러한 풍경은 인간이 자연에서의 위험요소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안식처의 공간(자아의 깊은 영역)을 제공함과 동시에 바깥세계를 조망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일종의 창문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즉, 나의 모습이 노출되지 않도록 하며 외부를 바라보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자신만의 은신처인 공간에 깊숙이 파고들며 또한 외부 세계를 눈으로 거닐며 그 안에서 이상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태도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의 경로에 따른 시선으로 도시를 관조하기도 하고 또한 내부로 육박해 들어가 철저히 내부자로 도시를 경험하며 이를 나만의 공간으로 구축하려는 것이다." (작가노트「내부자의 풍경」中에서) ■ 권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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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ent Paintings & Drawings


후버 세이블展 / Hubert Scheibl / painting.drawing 2012_0807 ▶ 2012_0923


후버 세이블 Hubert Scheibl_THIS IS A VERY NICE DRAWING, DAVE...(2001: SPACE ODYSSEY)_ 리넨에 유채_240×190cm_2009~10

초대일시 / 2012_0807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30pm
우손갤러리 WOOSON GALLERY 대구시 중구 봉산동 134-12번지 Tel. +82.53.427.7736,7,9 www.woosongallery.com

우손갤러리는 오는 8월 7일부터 9월 23일까지 오스트리아 현대 회화 대표 작가인 후버 세이블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작가의 최근 회화와 드로잉 작품 4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후버 세이블은 80년대 후반, 작품성을 인정 받으면서 국제적인 전시에 참가해왔으며 세계 정상급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 갤러리의 소속 작가이기도 하다. 유럽과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이지만 국내에서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이나 영화 등 다른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작업을 하는 후버 세이블의 작품을 통해 오스트리아 미술과 현대 회화 매체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후버 세이블 Hubert Scheibl_CLAVICEPS PURPUREA_종이에 혼합재료_107×78cm_2011~2

1952년 오스트리아 그문덴에서 태어난 후버 세이블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빈의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에서 수학하며 막스 봐일러(Max Weiler, 1910-2001)와 아르놀프 라이너(Arnulf Rainer, 1929-)의 가르침을 받았다. 80년대 중반, 그의 작업은 그 당시 우세했던 신표현주의에 대한 의미심장한 반응으로 인정받고 난 후 국제적으로 전시를 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간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여했으며 세계 정상급 갤러리인 Galerie Thaddeus Ropac를 비롯해 뉴욕의 Toni Shafrazi Gallery, 헬싱키의 Galerie Forsblom 등 세계 유명 갤러리 소속 작가이다. 현재 그는 빈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 오스트리아 현대 회화의 대표 작가로서 후버 세이블은 신표현주의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세대에 속하며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추상의 위대한 전통을 다시 잇는다. 그는 추상·감각적(abstractive-sensitive)이고 행위 집약적(gesture-intense)인 회화의 대표 인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세이블은 작품에서 대단히 복잡한, 숨겨진 내러티브를 발전시켰는데 그 내러티브에서는 가장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들이 특정 문화적, 하위문화적인 주제 및 도상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는 영화, 사진, 회화 등 다양한 시각 언어 체계가 섞여있는 어떤 절충적인 회화적 어휘들을 만든다. 다수의 같은 세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후버 세이블 또한 사진과 비디오를 가지고 작업하는데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캔버스의 천과 종이의 표면을 영화스크린처럼 여기고 작업한다. 또한 작품의 제목에 있어서도 코엔 형제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같은 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감상자들이 자신의 비구상 작업을 다르게 바라보도록 한다.
후버 세이블 Hubert Scheibl_THIS IS A VERY NICE DRAWING, DAVE...(2001: SPACE ODYSSEY)_ 리넨에 유채_240×150cm_2010~1

우손갤러리는 이번 전시에서 후버 세이블의 최근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20년 이상 주로 단색화 를 그려온 세이블은 최근에는 다양한 색상을 이용해 작업을 해오고 있다. 여러 색상으로 층을 이룬 회화와 드로잉 작품들은 팔레트 나이프로 긁은 흔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는 여러 해에 걸쳐 꾸준히 드로잉이 주가 되는 회화를 제작하며 바탕을 대개 흰색으로 덮은 다음 스크래치를 통해 이 층을 다시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여러 층으로 된 회화의 깊이에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적 흔적의 자취는 세이블 작품의 특징이다. 대형 작업에서 작가는 캔버스를 가로질러 리드미컬한 풍부한 몸짓을 그림으로써 몸 전체로 그 자신을 작품에 긍정적으로 새긴다. 페이퍼 작업 역시 풍성하고 감각적인, 신경과민적 요소들을 나타내며 그림 그리는 행위의 속도와 신속성을 드러낸다. 그의 드로잉과 회화에서 드러나는 몸짓의 신속성은 어느 정도는 잭슨 폴록의「떨어뜨리기(드리핑, dripping)」에서 이어받은 것이다.
후버 세이블 Hubert Scheibl_PLANTS AND MURDERS_리넨에 유채_290×200cm_2012

작가의 최근 작품은 풍경의 재현을 떠올리게 하는 회화적 구조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비재현적인, 전적으로 추상적이고 물질주의적으로 재료를 다룸으로써 사실상 세계를 낭만적이고 범신론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회화 작품은 항상 거의 사물과도 같이 압축된 재료를 특징으로 한다. 후버 세이블의 현재 모든 작업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삼는다. 자연은 엄청나고 근본적인 힘인 동시에 삶의 원천이다. 자연 재해는 자연의 힘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다. 세이블은 회화와 페이퍼 작업에서 이러한 자연의 양가성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다루고 있다. 작품의 시간을 초월하는 특성은 그림 표면 뒤의 깊은 공간감을 양성하는 내밀한 빛을 포착하는 작가의 놀라운 기량에 기인한다. 이 부분이 바로 감상자가 자신도 모르게 행위망(matrix of gesture)과 색에 매료되는 지점이다. 그림이 자신만의 시공간감을 정의하면서 세이블의 작품은 이러한 감성이 분출되는 느낌을 준다. 그의 페이퍼 작품 또한 절묘하고 명료한 방식으로 동일하게 작용한다.
후버 세이블 Hubert Scheibl_NO GINGER_종이에 혼합재료_170×240cm_2009~10

최근 작가의 주요 전시로는 빈의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에서의 전시(1999), 잘츠부르크 Museum der Moderne에서의 전시(2006), 볼로냐 Rocca Sforzesca di Dozza에서의 전시(2008), 데젠돌프 Stadtgalerie im Stadmuseum에서의 전시(2009), 라이프치히 Museum der Bildenden Künste에서의 전시(2012)가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많은 개인 컬렉터들과 전 세계의 공공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스트리아 빈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d, 오스트리아 빈 Albertina,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Museum der Moderne, 프랑스 파리 Centre Pompidou, 프랑스 생테티엔 Museé d'Art Moderne de Saint-Étienne Métropole, 독일 프랑크푸르트 Sammlung Deutsche Bank, 독일 뒤셀도르프 E.ON Energie AG, 이스라엘 Ashdod Museum, 중국 샹하이 Shanghai Art Museum, 중국 베이징 National Museum Beijing을 비롯한 기관에서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우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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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






Image and Text - Ut Pictura Poesis展 2012_0809 ▶ 2012_0823 / 월요일 휴관




송상희_엽서_앞/뒷면_종이에 펜_10×15cm×2_2012



초대일시 / 2012_0809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성은_권경환_김영은_김실비_박보나 옥저호_이정_안정주_송상희_한상혁

후원 / 서울문화재단_원앤제이 갤러리 기획 / 글과 그림 프로젝트 기획팀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 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번지 Tel. +82.2.745.1644 www.oneandj.com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지속적인 연구와 논평을 해온 미술사학자 강태희는 오랫동안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소재와 맥락을 통해서 폭 넓게 연구해왔다. 이 프로젝트는 강태희의 저술 중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점검한 "글과 그림"이라는 글을 토대로 하여, 미술의 역사에서 고찰되어 온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작가들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하고 활용한 작업들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미학, 미술사, 미술비평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들인 강수미, 고동연, 이임수가 새로운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들의 연구 논문은 전시와 함께 출간되는 책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이정_영어 학교 #1_C 프린트_51×72cm_2005
김영은_9 Great A_악보, 종이에 수채, 연필, 사운드_48×37cm, 00:01:46 loop_2012

강태희는「글과 그림」(『한국예술종합학교 논문집』제1권, 한국예술종합학교, 1998, 37-50)에서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한 미술사적인 논의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에 의하면, '우트 픽투라 포에시스(Ut pictura poesis)'라는 말이 표방하듯이 흔히 회화는 말없는 시, 시는 눈먼 회화라고 일컬어진 것처럼 미술사에서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는 시와 그림의 관계로 대변되어왔다. 그러나 기호로서의 글과 그림의 관계를 살펴보면 글과 그림은 상호 해석, 번역, 도해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존하는 기호이자 도상이며, 강태희는 궁극적으로 글과 그림의 기표와 기의로서의 경쟁 관계는 둘 다 흔적(trace)이라는 점에서 공존하는 관계라고 보았다.
안정주_무궁화 Rose of Sharon_서예_180×40cm×5_2012
강성은_Oak Valley Discovery 5_종이에 연필_54×78cm_2011

강태희의 글이 미술사학자로서 통시적인 고찰이라면, 이 전시에 참여하는 젊은 작가들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직접 작업의 화두로 삼거나 작업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성은은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만 오롯이 존재하는 작업을 통해 말없는 시와 같은 이미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한상혁의 드로잉은 글과 그림이 상호 해석하고 도해하며 기표와 기의로서 협력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세상에서 기표로서 존재하지만 미처 이름지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다가감이기도 하다. 김실비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어긋남, 그 미끄러짐을 통해 스스로 발화하지 못하는 주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영상 작업으로 푼다. 박보나는 단순한 연결로 발화되는 텍스트가 우리들의 문화적 고정 관념에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것을 영상으로 실험했다. 언어, 소리, 음악, 기호, 스토리를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사용하는 김영은 역시 활자를 초월하여 사운드의 영역에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실험하고 있다.
권경환_2870호 전문 조수 12조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김실비_스테이트먼트들_3채널 영상설치, 컬러, 사운드_loop_2007

권경환은 숫자나 문자 나열을 조합해서 만든 암호를 특정 상대에게 전달하는 비밀스런 난수방송을 이용해서 암호와도 같은 흥미로운 작업을 펼쳐낸다. 옥정호는 요가를 소재로 삼아 정신적 영역에 도달하려는 수행과 뜬금없는 배경을 충돌시켜서 코믹한 효과를 노린다.「접경」,「아포리아」시리즈를 통해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에 관해 깊이 천착해온 이정은 이들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영어학교 시리즈를 선보인다. 여기에는 유학 시절 작가가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언어에 대한 이질감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동양화를 전공한 후 현실비판적인 다양한 비디오 작업을 선보인 바 있는 안정주는 오늘날 슬로건이 사회 곳곳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질문했다. 송상희는 향과 균이 널리 퍼진다는 속성을 엽서, 우표와 연결시켜 인류의 역사와 문화사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정복과 침탈의 구조를 드러낸다. 향항(香港), 즉 홍콩에서부터 시작하는 엽서는 네덜란드, 미국, 화성에까지 연결되면서 강대국과 대기업의 침탈과 패권주의, 그리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조류독감과 같은 질병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송상희가 엽서와 우표를 이용해 이미지와 언어를 교차시키는 놀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정의에 눈을 감아버린 우리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박보나_차이니스 멜랑꼴리_단채널 영상_00:00:54_2010
옥정호_태양 예배 자세_단채널 영상_00:05:15_2012
한상혁_수평선 예찬_자작시, 종이에 연필_55×40cm_2005

이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서양미술사학 1세대 학자인 강태희의『글과 그림』이라는 에세이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가 지적한 '이론과 현장' 혹은 '텍스트와 이미지'라는 문제는 여전히 젊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에게도 예민한 문제이다. 전시를 통해서 우리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언어와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들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작가들과 진행한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서는 비평과 작품이라는 서로 다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문제가 어떤 식으로 수용, 해석되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가 이론과 현장, 선후 세대간의 발전적 연구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 이성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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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To Be Done?






지니 유展 / Jinny Yu / painting 2012_0810 ▶ 2012_0817 / 월요일 휴관




지니 유_Title_벽에 잉크_2012



초대일시 / 2012_0810_금요일_05:00pm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2관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본 전시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국제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재 입주해 있는 국외단기입주작가의 전시입니다. 현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2개의 스튜디오를 국외작가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으며 매해 입주신청과 심사를 거쳐 입주작가를 선발합니다. 입주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입주기간 중의 성과를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성과보고전을 개최하며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지니 유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녀는 입주기간동안 그녀의 공간과 매체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였으며 그 결과물들을 난지갤러리에 설치합니다. 지니 유는 한국에서 출생, 캐나다로의 이민 이후 콩코르디아 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요크 대학에서 회화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캐나다의 오타와와 이탈리아 베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지니 유_Non-Painting Painting_알루미늄에 유채_50×41.5×32cm_2012_부분

자신의 작품에서 지니 유는 회화의 관습을 면밀히 조사하는 동시에 그 매체에 내재한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려고 한다. 추상회화와 오브제의 영역을 오가는 작가의 작품은 회화적 공간을 넘어서는 회화의 측면을 추구한다. 즉 작가는 이미지 이상의 것을 묘사하고자 노력하며 실행으로서의 회화가 갖는 제스처라는 측면을 신중히 드러내려는 것이다. 작가는 종종 알루미늄 위에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데, 알루미늄의 반 반사 표면이 회화적 공간을 이룬다. 이러한 재료의 선택은 작가의 예술적 실행이나 개념적 숙고에 필수적인 요소다. 알루미늄의 회화적 공간은 물질적인 사실, 다시 말해 아직 그려지지 않은 표면이 이미 존재하는 상태이며 이렇게 선재하는 회화적인 표면 위에 그림으로써 지니 유의 작품은 회화가 종종 끝나곤 하는 지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다.
지니 유_Non-Painting Painting_알루미늄에 유채_45×45×5cm_2012_부분
지니 유_Non-Painting Painting_알루미늄에 유채_58×58×32cm_2012_부분
지니 유_Non-Painting Painting_알루미늄에 유채_45×45cm_2012_부분

지니 유는 캐나다 오타와와 이탈리아 베니스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캐네디언 아티스트다. 오타와 대학교에서 회화를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한 그녀는 뉴욕, 브루클린, 런던, 베니스, 오타와 등 각지에서 폭넓은 전시회를 치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온타리오 아트 재단으로부터 2012년 Laura Ciruls Painting Award를 수상한 바 있고 Pulse Prize New York 2011의 최종 후보자이기도 했다. 캐나다 예술 진흥위원회(Canada Council for the Arts) 및 퀘벡 예술 문학 진흥위원회 (le Conseil des Arts et des Lettres du Quebec) 에서 창작 지원금을 수여 받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 몬트리올에 있는 Galerie Art Mur 과 토론토에 있는 General Hardware Contemporary 에 소속되어 활동중이다.? ■ 지니 유
지니 유_Non-Painting Painting_알루미늄에 유채_60×48cm_2012_부분



In her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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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다, 숨 그리고 쉼






한중회화교류展 2012_0809 ▶ 2012_0830 / 일,공휴일 휴관




何先球(허 시엔 치우)_夢유자_70×70cm



초대일시 / 2012_0809_목요일_06:00pm

한국 참여작가 1부 / 2012_0809 ▶ 2012_0818 구본아_김성희_김선형_신하순_이현열_차동하_정용국_홍지윤 2부 / 2012_0819 ▶ 2012_0830 구인성_노신경_박능생_박영길_이세정_이영수_임택_홍주희 중국 참여작가 ?思?(천 스 위엔)_何先球(허 시엔 치우)_李菁(리징) 丁?(딩홍)_?心泉(리우 신 추엔)_趙盼超(자오 판 차오) 胡勤武(후친우)_李?(리 시아오)_高平(가오 핑)_金娟我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유중아트센터, 유중갤러리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 유중빌딩 3층 Tel. +82.2.599.7709 www.ujungfoundation.org www.ujungartcenter.com




한중회화교류전 『숨쉬다, 숨 그리고 쉼』展은 한국화와 중국화의 중견작가들을 섭외하여 전통과 시대담론을 포괄한 새로운 표현들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모색해 보기 위하여 일상에서 쉽게 쓰는 우리말의 의미를 전시담론으로 삼아서 진행하고자 한다. 금번 전시를 통해 전통과 시대의 이야기들이 일상의 층위에서 어떻게 사고하고 호흡하는지를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의 예술체험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 『한중회화교류전 숨쉬다, 숨 그리고 쉼』전은 우리말 '숨쉬다'란 말에서 아이디어를 시작하였다. 인간은 일생동안 구억번 정도 숨쉰다고 한다. 숨쉬는 것 자체가 숨을 들이쉬고(살고) 내쉬는(죽는) 것이란 사실을 자각한다면 인간은 구억번 살고 죽음을 반복하는 셈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들숨, 날숨의 무한한 생명의 힘이 들어왔다 나간다. 또한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생명이 숨쉬는 양상을 반복하고 있음을 본다면 삶과 죽음의 무한반복이 거대한 생명 에너지로 넘치는 세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趙盼超(자오 판 차오)_窓前風景系列之三_종이에 잉크_75×75cm_2011
李?(리 시아오)_THE GAZE 2011 NO.5_캔버스에 유채_60×40cm
高平(가오 핑)_小院_紙本水墨_48×36cm_2012

숨쉼의 모든 양상을 색채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삼라만상의 이미지를 구성한다면 대략 숨에는 흑과 백 그리고 단색조 이미지를 배치하고 쉼에는 꽃상여 같은 화려한 색채 이미지를 구성하여 인간사의 희노애락이 우리가 숨쉬고 반복하는 삶과 죽음, 영원과 찰라, 빛과 어둠의 영속이자 단절이라는 것을 시각이미지로 구성하고자 한다. 이 시각이미지 속에서 작가들이 하는 일상의 예술행위의 숨과 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추해 봄으로써 생명호흡의 리듬과 순환이 예술에 접목되는 순간을 포착하고자한다. 전통의 동양화가 내세운 기운생동의 논리가 숨쉼의 거대한 얼개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시를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전시의 기획의도이다.
김선형_GARDEN BLUE_170×137cm_2012
신하순_Mina Restaurant_장지에 수묵담채_76×145cm_2010
이영수_등산하는 할아버지 꼬마영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00×80.5cm_2011

금번 전시는 전통과 시대담론의 교착이 구체적인 생활과 일상의 말과 호흡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생각아래 우리말의 구성과 논리, 일상의 체험을 예술의 지평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시이다. 따라서 언어와 그것의 구체적인 양상과 의미에 대한 접근을 시각화 한다는데 의미가 있다. 언어철학의 전변(轉變)을 통한 전시는 계속 있어왔던 것이지만 그것을 가장 쉬운 우리말에서 끌어내고자 함이 본 전시의 지향이고, 쉬운 우리말의 구성이 새로운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있다.
차동하_축제 11#5_닥종이에 채색_50×63cm_2011
홍주희_화려한 활주로 The Luxurious Runway_한지에 수묵, 채색_112×145cm_2008
홍지윤_아무것도 아닌 꽃 Nothing flower_수묵채색, 장지_210×150cm_2009

전시를 통하여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삶의 언어와 이야기를 우리말 철학에 근거한 사고로 전환하고, 우리말의 철학과 서사, 자유로운 표현들을 촉진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일상의 숨쉼과 예술행위로서의 실천이 수묵이라는 구성속에 어떻게 녹아있는지를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에게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 류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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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N - Threesome






김다솜_김예지_남지은展 2012_0810 ▶ 2012_0904 / 일요일 휴관




김다솜_girl_캔버스에 유채_72.7×116.8cm_2012



초대일시 / 2012_081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마크 GALLERY MARK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0-23번지 Tel. +82.2.541.1311 www.gallerymark.kr




갤러리 마크는 3인조 젊은 작가전을 선보인다. 회화라는 동일한 매체를 사용하나 그 매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작품세계는 뚜렷이 다른 3인의 작품을 통해 그들이 바라보는 일상적 사고와 가능성을 소개한다. 김다솜, 김예지, 남지은은 Asyaaf 2011에서 크게 주목 받은 작가들이며 늘 함께 호흡하고 예술적 사고를 교환하는 삼총사이자 홍익대학교 대학원(서양화전공) 친구들이기도 하다. 전시 의미를 하나의 범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젊은 작가들의 작업의 본질과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기획전시이며, 이번 전시의 주제는 삶과 욕망과, 대중문화의 현상에 관한 것들이다. 작가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작가이자 여성, 각자 개인으로서 느낄 수 있고 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회화의 틀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김다솜_girl_캔버스에 유채_90.1×116.8cm_2011

김다솜은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를 통해 자신의 어린 내적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선과 의견, 관계 속에서의 상처를 변형과 미장으로 꾸미고 있다. 상징과 은유를 통해 변모된 이미지로 조합된 유리처럼 맑고 투명한 순수함을 가진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과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안타까운 현실을 벗어나고자 비현실적이고 신비스러운 이미지로 변형되어 진다. 희뿌연 안개 같은 화면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눈물을 머금고 있는 고양이 같은 불안한 눈빛의 응시는 내면존재의 불안감을 상징한다. 솔직한 자기의 감성, 묘한 분위기의 이미지, 그리고 쉽게 깨지기 쉬운 색감에 뭔가 가득한 고민을 감추려 듯 덮혀 있는 꽃 머리카락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유리알 같은 눈, 거기에 비하면 조금 거친 인간의 피부 등 깔끔하고 예쁘게 느껴지지만 감상하다보면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인간들 사이에서 고뇌하고 불안해하는 요정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작가는 작품들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고난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고 싶어 한다.
김예지_cake2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김예지_Fusion Donuts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김예지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이 구성 된다. 이는 현대 사회의 성인들이 각박한 경쟁 사회에 진입 하면서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을 구입 하거나 수집 하거나 향유 하는 현 시대 문화의 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화면 속에서 본인은 크게 보여 지는 하나의 달콤한 이미지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안에서 보여 지는 디테일에 관심을 가진다. 화면 속에서 찾아지는 사물들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나타나며, 흐릿하게 남아있는 과거 기억의 잔상과 현재의 욕망이 한데 뒤섞이고, 의미 없는 물건과 상상 속의 이미지를 함께 나열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일기를 보는 듯 한 느낌을 준다. 작업 과정은 어린 시절 물건과 정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느끼면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치열한 현대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 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본인의 작업을 통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과거 향수를 불러 일으켜 정서적인 안정감과 내면의 치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지은_empty frame_캔버스에 유채_80.3×80.3cm_2011
남지은_uselessness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2

다른 사람이 나를 보므로 나는 나 자신을 본다 는 남지은은 2011년 과 최근 작품을 선보이는데, 이는 시기적인 구분이나 사회적인 문제 보다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고자 한다. 개인은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인가에) 시선을 보내며 또 누군가의 시선의 대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타인의 시선은 작가에게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개물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내가 존재하고 그에 맞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인의 시선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나의 혹은 타인의 시선 속에는 욕망이 존재한다. 그것을 깨닫고 있는 개인들은 이 사회 속에 편입되어 욕망을 추구하는 혹은 부추기는 구성원이 되어간다. 이 끝없는 욕망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 인지 인식하기 힘들게 되어 우리가 본질적으로 추구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시선에 존재하는 욕망에 대한 생각과 그에 대한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이 작가의 작품이며, 여기에는 시선에 의해 생산되는 욕망이 있다. ■ 갤러리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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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ID DREAM




나영展 / NaYoung / 羅煐 / painting 2012_0808 ▶ 2012_0817



나영_몽중경(夢中景)_혼합재료_118×18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나영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위로와 치유, 소통을 담은 숲. ● 나영은 나무를 그린다. 그녀의 숲에는 나무들이 뿌리를 깊게 내려 안착하고 있다. 그곳에는 치유와 위로를 담은 소통의 언어들이 존재한다. 나무는 변화된 계절과 시간, 앞으로 펼쳐질 삶의 흐름을 인정하고, 그 자리에서 피고, 맺고 지는 이 모든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생과 사가 반복되는 인간의 타고난 운명처럼, 나무는 인간의 삶과 너무도 흡사하게 닮았다. 그렇다. 나무는 사람(人)이고, 숲은 완전한 세계(世界)인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라는 추상적인 상념에 빠지곤 한다. 내면과 외면의 경계에서 본질은 잊은 채 방황한 시간들은 외로움, 슬픔, 적막감을 안겨주고, 절망을 남겼을 것이다.
나영_Portrait_한지에 먹_170×130cm_2012
이 모든 번뇌의 시간들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진정한 아름다움, 그것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함께 소통할 때 발현(發現)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홀로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렇다면, 작가가 염원(念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존과 상생이다. 그녀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갈망하며 늘 허기가 진 듯 더 아름다운 것에 시선을 옮기며 고뇌의 시간들을 홀로 겪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자연과 대면하고, 본질을 인정하여 그 안에 속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붓끝으로 나무를 화폭에 심어 마침내, 투명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숲을 펼쳐 놓았다. 이렇듯, 그녀의 작업은 치유의 의미이자, 감성을 담은 소통의 도구이며 생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나영_몽중경(夢中景)_혼합재료_16.5×24cm_2012
나영_몽중경(夢中景)_혼합재료_148×213cm_2012

그녀의 작품이 평온하며, 아름다운 이유는 필묵(筆墨)을 사용해 때론 거칠고도, 섬세하게 무채색으로 최대한 절제된 기법으로 차분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색조의 작업은 진중한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적합하다. 이러한 작업방식은 안락함을 주는 동시에, 마치 오래 묵은 때를 벗어낸 듯 느낌으로 후련하게 다가온다. 작가(나영)는 지난 전시 『TIMBUKTU』전에서 동양화의 기법을 바탕으로 평면회화뿐만이 아니라 입체 작품을 통해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다. 환상의 숲을 그려낸 전시는 전작을 기반으로 하여, 신작 『Lucid Dream』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그녀의 상상으로 화폭에서 재현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치열한 세상에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숲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그녀의 환상의 숲 『Lucid Dream』, 그 안에서는 숲이 존재하고 우리가 실재하고 있다. 작가는 숲에서 개개인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닐까? ■ 배은혜
나영_몽중경(夢中景)_혼합재료_33.5×36.5cm_2012


몽중경(夢中景) - Lucid dream ●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끝없이 펼쳐진 숲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꿈...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라던 아름다운 풍경은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화 속 파랑새처럼, 나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신비로운 광경에,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한 조각 꿈인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는 화폭에 아름다운 풍경을 재현해내기 위해 어디 있을지 모를 아름다운 풍경을 갈구하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두 눈을 감고, 내안의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그곳을 향하여 모든 감각을 집중하면 만날 수 있다. 나는 내 마음속 그 풍경을, 나만의 안식처인 그 숲을 '팀북투(TIMBUKTU)'라고 이름을 붙였다. 나의 자각몽(自覺夢) 속 팀북투 숲이 누군가에게도 위안처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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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de Narrative




캐스퍼강展 / CASPER KANG / painting 2012_0809 ▶ 2012_0831



캐스퍼강_TETRA LIFE_Edition of 10_framed lenticular holograms_105×10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캐스퍼강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09_목요일_06:00pm

오픈 축하 공연_인형극 / 2012_0809_목요일_07:00pm 연출 / 김충환(국립국악원 단원)

기획 / 어바웃아트(www.aboutartcompany.com)

관람시간 / 10:00am~09:00pm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307번지 동광빌딩 3층 Tel. +82.2.2.2246.0071 www.ai1.or.kr



『Inside narrative』展은 캐나다 교포 캐스퍼강(casperkang.com)의 개인전으로서, 인간 본연의 내적 이야기에 귀기울여 보고자 기획하였다. 갤러리 차, 갤러리 이마주에서 선보였던 그의 작품세계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새롭게 선보이는「TETRA LIFE」는 렌티큘러 홀로그램 변형작으로 강렬하고 더욱 화려해졌다.
캐스퍼강_BANISHMENT IV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크린 잉크_116×91cm_2011
캐스퍼강_DISILLUSIONMENT 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스크린 잉크_65×90cm_2012

아이원이라는 문화예술나눔터의 내부 갤러리는 한국적인 기둥과 지붕이 장식되어있어 그의 작품 시리즈「BANISHMENT I, II, III, IV, V」와 잘 매치된다. 수원화성을 보고 그린 이 작품은 푸른 계열과 붉은 계열이 남과 여, 선과 악의 대결구도이자 애정 또는 애증의 구도를 이루어 내는듯 보이며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캐스퍼강_PEGASUS_캔버스에 디지털 피그먼트, 스크린 잉크_40×40cm×30_2010
캐스퍼강_STARLESS NIGHT SKIES_Edition of 10_framed lenticular holograms_48×48cm_2012

그의 내면의 대화가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나있어 연극적인 소재와도 앙상블을 이뤄낼 것으로 보인다. 한달 여간의 전시중, 수원화성의 시리즈에서 나온 Self Dynasty의 이야기에서 착안한 다양한 인형극 시리즈도 공연을 통해 선보이고자 한다.
캐스퍼강_Inside Narrative展_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_2012
캐스퍼강_Inside Narrative展_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_2012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www.ai1.or.kr)는 동대문구 장안동에 위치하며 지역구민의 쉼터이자 소통의 장으로 올해 7월 18일에 개원하였다. 개관전에서는 40명의 작가의 작품이 단체로 선보여졌던 이래, 캐스퍼 강의『인사이드 네러티브』展은 아이원 최초의 기획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성에 있어서 최고를 지향하지만 대중에게 보다 쉽게 설명해내려는 기획자의 의도가 본 전시 공간에서 체험학습, 강연, 연극, 창극 등으로 펼쳐질 예정이다. 어려운 고급문화라는 예술의 입지가 지역구의 시민들과 어디까지 소통이 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 손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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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a Normal Person




박새롬_최지선 2인展 2012_0810 ▶ 2012_0826 / 월요일 휴관



최지선_Tidy Obsession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서울시_GL Associates_streetworks

관람시간 / 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한빛미디어갤러리 HANBIT MEDIA GALLERY 서울 중구 장교동 1-5번지 Tel. +82.2.720.1440 www.hanbitstreet.net



서투른 삶에 대한 위로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의 성격발달이론에 따르면, 방어기제의 생성은 자신을 속박하는 불편한 상황의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무의식적 욕구에서 시작 된다고 말한다. 현대는 무의식을 의식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성적 제어의 빗장을 단단히 채우는 것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또한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미래의 감춰진 시간 앞에 우리 모두 서투른 존재가 된다. 서투른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스스로 완전한 존재임을 가정하는 것은 자기 위로의 한 방식이다. '정상normal'이라는 자기 위로를 통해 우리 모두는 완벽한 존재가 된다.『Just a Normal Person』展은 이러한 존재의 성찰에 대한 전시이다. ● 이번 전시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미디어 사진을 통해 무의식적 정신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내면의 풍경을 탐구하는 신진 사진작가 2인 전으로 기획되었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의 연속성에서 순간을 분리하고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변환시킨다. 형태를 부여 받은 시간은 과거를 증언해 주며, 기억에 대한 기념물이 된다. 다시 말해서 지나간 과거를 환기 시키는 기억은 사진이라는 실체가 되어 다시금 시간 속에서 보존된다. 이렇게 사진은 인간의 기억을 간직하는데 기여하는 도구로써 인간의 눈과 인식작용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미디어가 감수성의 확장을 가져왔는가? 19세기 후반, 기계문명이 폭발적으로 발달한 시기에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사람들의 본성과 행태를 본질적으로 바꿔놓았다. 기계문명의 빠른 성장속도는 인간의 내면을 보살필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갔다. 새로운 환경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계속 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집착이나 강박적 행동으로 진심을 왜곡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신의 보호막은 영적인 내면의 집중과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박새롬_The climbing Monkey #13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07

박새롬의 사진 속 공간에는 나무와 작가만이 존재한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이 꽤나 위태로워 보이지만, 작가는 카메라 밖의 세상을 의연하게 관조하고 있다. 작가는 나무에 오르는 행위를 자연에 대한 예찬이며, 노련한 나무를 닮기 원하는 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나무에 오르는 일종의 의식을 통해서 자연과 같은 삶의 영위를 기원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촘촘한 경험의 순간들은 의식 속에서 간직되거나 잊혀지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점진적 기억의 소멸을 방임하지 않고 현존을 기록하며 '지금 여기'의 순간에 집중한다. 그러한 현존의 기록물은 비밀로 감춰진 내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단서로 남게 되고, 경험된 순간을 기록하는 작가의 행위는 정체성의 탐구로 귀결된다. 작가는 찬연한 자연에 기대어 생명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기록하며, 진중하게 존재의 본질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작가는 우리에게도 내적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을 조심스레 안내한다.
최지선_Compulsive collection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1

최지선의 사진은 현실과 픽션의 틈 사이에서 우리 스스로가 감춰 두었던 상처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는 현실과 픽션의 상반된 체계의 끈을 교환하여 개인의 열등감이나 불쾌한 억압의 감정을 실재상황이 아닌 새롭게 연출된 공간에서 재회를 유도한다. 최지선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정서가 불안정해 보이는 사진 속 작가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방어기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묵인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 되어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오게 된다. 사진 속 그녀의 모습처럼 말이다. 즉, 방어기제는 방어가 아니라, 회피인 것이다. 작가는 강박적 행동에 마취된 사람들에게 그리고 작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내면과 만날 수 있는 공간과 화해의 시간을 마련해 준다. 이제, 관객은 관찰자가 되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비춰보게 될 것이다.
박새롬_The climbing Monkey #25_잉크젯 프린트_60×60cm_2007

사진을 찍는 다는 행위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활동이지만, 박새롬, 최지선 작가는 자신이 피사체가 되어 그 사건 안에 관여한다. 낯선 세계를 향한 흥미로운 관망이 아닌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불안과 공포에 대한 방어기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적극적인 자아의 '드러내기'는 내면의 진정한 자유를 부여하고 세상에서 잘 거주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Just a Normal Person』展은 서투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고하는 위로가 된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던 왜곡된 행동은 전시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낯선 만남은 성숙한 자신의 보호막이 정신적 세계와의 화합에 있음을 밝혀준다. 영적인 충만한 자유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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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_오버데코레이션




project_OVERDECORATION展 2012_0811 ▶ 2012_092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811_토요일_06:00pm

참여작가 시각예술 / 양진우(한국)_이단(한국) 사운드 퍼포먼스 / Jerry Gordon(미국) 댄스 퍼포먼스 / Yangjah(일본)

퍼포먼스 2012_0811_토요일_07:00pm 2012_0812_일요일_03:00pm 2012_0817_금요일_07:00pm 2012_0818_토요일_06:00pm 2012_0819_일요일_03:00pm 2012_0826_일요일_03:00pm

신도림예술공간 고리 SHINDORIM ART SPACE GORI 서울 구로구 구로동 33-1번지 Tel. +82.2.867.2202 www.artgori.or.kr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장식 裝飾 │ 활용〔장식만[-싱-]〕[명사] 1 옷이나 액세서리 따위로 치장함. 또는 그 꾸밈새. 2 그릇, 가구, 옷 등에 쇠붙이·헝겊·뿔·돌 따위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다는 데 쓰는 물건. 3 어떤 장면이나 부분 따위를 인상 깊고 의의 있게 만듦. (국립국어원 발행,『표준국어대사전』중) ● 장식,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쓸데없는 것'을 지칭함이다. 더 부연하자면, 본질과는 관계가 다소 먼, 부차적인 것이다. 이는 '장식'이라는 용어가 태생적으로 어떠한 대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 대상의 본래 목적 외에 추가되어, 그 존재를 강조시킴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식'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으로 부차적인 것, 부질없음 등의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장식'이 역설적으로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쓸모있음, 즉 그 가치를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이 장식은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그 본질에 대한 개인 혹은 집단의 사유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무형의 감정을 유형의 양식으로 재창조시키며, 이것은 또 하나의 '스타일'을 낳으며 종적 ? 횡적으로 인류의 '문화'와 '역사'의 축을 생성하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본질과 부차적인 것의 전도(顚倒)이며,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소비자의 환상을 충족시켜 그 체제를 유지시키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
양진우_Decorative aquirement_오브제와 혼합재료_200×350×250cm_2010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지점은 단순히 이러한 현대 사회의 장식, 그리고 그 '화려함'이 아니라, 대량 생산되어 그 '화려함'을 흉내낸 '과도함', 그리고 거기에 깔려있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그리고 대리만족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 '오버데코레이션'의 양상이 전지구적으로 흡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교하지 않은 그리스풍의 조각이나, 실제로 금이 아니기에 더더욱 싸구려처럼 보이는 금칠, 실제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프로방스 풍' 인테리어 등, 유래나 신념, 취향을 알 수 없어 더더욱 '싸보이는' 장식들은 대도시 어디에나 포진하고 있다. 이제 로마나 이집트의 궁전을 흉내낸 화려한 호텔들은 라스베가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빠칭코 클럽, 한국 도심의 모텔이나 웨딩홀 등, 실제로 '그것을 얻지 못하기에' 더욱더 과장된 장식들은 오히려 그 '센스없는' 어색함으로 인해 희극적인 풍경까지 낳고 있는 것이다.
정교한 일상 An Elaborate Ordinariness_바늘 3000개, 천, 부모님의 결혼사진, 가구 등_가변설치_2010

작가들은 이러한 '좌절된 욕망'들에 대해 주목하며, 이를 '경계'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실제로 '장식'이라는 것은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해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틀이며, 더 나아가 '그렇게 되고 싶음', '그곳에 속해 있음'을 '주장'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즉, '장식'이란 넓게 말해 욕망의 분출인 동시에 '경계에 대한 시각적 구현'이라는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여러 층위의 '경계'들이 대조적으로 뒤섞인 모습을 제시하고, 이들을 확장과 융합을 통해 해체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다.
양진우_Decorative acquirement(장식된 기능)_혼합매체_350×600×244cm_2011
이단_뭉치면죽는다 united, we die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0
Yangjah_퍼포먼스_2011
Jerry Gordon_퍼포먼스_2012

이 프로젝트에서 '경계'는 작품 내 상충되는 개념들 뿐 만 아니라 작품 간의 경계, 그리고 나아가 작품과 관객과의 경계 역시 내포한다. 일례로 작품들은 '밖(외양)'과 '안(실체)'의 개념들이 대조를 이루며 혼재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도 관객들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거나,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완성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또한 전시는 병렬식으로 작가들의 작품을 나열하는 '단체전'에서 벗어나, 작품들 간의 경계를 없애고 공동 제작하는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제작된다. 경계가 없는 것은 시각 예술품만은 아니다. 실제로 프로젝트는 시각 예술품이 설치된 전시와, 소리와 몸짓이 합쳐진 퍼포먼스 공연은 물론, 전시가 이루어지는 주변 환경과 관객, 심지어는 행인까지 모두 유기적으로 포함되어 완성된다. 그러므로 이 프로젝트에서 '관객'은 또 하나의 축이며, 이는 관람객을 능동적인 주체로 전이시키며 경계를 허무는 또 하나의 작업인 것이다.
Yangjah_퍼포먼스_2012
Jerry Gordon+Yangjah_퍼포먼스_2011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과잉의 누적에 의해 역설적으로 '무취향'이 되어버린 '오버데코레이션'의 모습에 우리의 자화상을 투영시켜보면서, 우리가 인지하고 수용하는 경계는 무엇이며, 자신이 주변을 '장식'하고 행위를 통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묻고자 한다. 장식들은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쓸모가 있어졌지만, 선택의 여지를 갖지 못해 마비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취향과 감각은,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하고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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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대1






제3회 우리시대 리얼리즘展 2012_0809 ▶ 2012_0819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810_금요일_04:00pm

참여작가 강기욱_강성봉_강행원_곽영화_김석주_김천일_김태순 김은숙_김종도_김정헌_김윤기_김영중_김영진_김종례 민정기_박진화_박흥식_박영균_박야일_박장근_박용빈 박은태_박혁용_박흥순_송효섭_신은영_서수경_성낙중 송문익_안광준_양상용_양호일_유연복_위종만_이현철 이상권_이인_이구영_이종근_이정순_이상구_임옥상 이말다_이진석_이영학_이종희_이안수_이홍원_조신호 조한주_정수연_정세학_주재환. 천호석_탁영호_함종호

주최 / (사)민족미술인협회 서울지회 주관 / 제 2회 우리시대 리얼리즘전 전시 기획 위원회 후원 / (사)민족미술인협회_서울문화재단_(사)민족예술인총연합_통일뉴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SeMA Gyeonghuigung of Seoul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새문안길 60(신문로2가 2-1번지) Tel. +82.2.723.2491 seoulmoa.seoul.go.kr




1980년대 중반에 이 땅의 필연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민중미술은 그간 여러 시기를 거치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후 미술인들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미술적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삶의 구석진 곳에서 들려오는 시대의 메시지를 미술 언어로 재해석하는 일을 예술인의 책무로 여겨 왔으며, 이를 시대를 초월하는 불변의 법칙으로 여긴다. ● 금세기에 들어 세계는 더욱 단일화 되고, 이에 따른 자본의 투기와 욕망은 커져만 간다. 반면에 기층민들의 피폐함은 삶의 희망마저 꺾이게 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민중은 무엇을 위한, 어떤 삶을 목적으로 이어가야 하는가. 비정규직과 이에 따른 인권의 문제는 누구의 책임인가. 모든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대안은 과연 없는 것인가. ● 우리는 오늘의 현실을 미술이라는 작업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외진 곳의 작은 소리와 소외의 단초를 이끌어내어 상생의 시선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아울러 소비문화의 만연 속에 우리가 진정으로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 가치와 미래관을 리얼리즘적인 관점에서 평화와 공존의 시각으로 시민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보다 더 건설적인 대안과 함께. ■ 이구영
경제칼럼 -「Book & Life」1%를 향한 99%의 분노, '월가를 점령하라' 78 대 22 ● 유대인의 중심 사상 중에 '78 대 22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공기 중 질소와 기타 원소의 비율이 78 대 22 정도가 되며, 정사각형 안에 내접하는 원의 면적과 나머지의 비율이 78 대 22 정도가 되고, 우리 몸에서 수분과 기타 성분의 비율도 78 대 22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두 가지 이상의 요소로 구성된 집단에는 가장 많은 구성 요소가 78% 정도가 되고 기타 요소가 22% 정도로 크게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사의 여러 측면에서도 이러한 비율로 나타난다고 유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돈을 빌려주려는 사람과 빌리려는 사람은 78 대 22의 비율로 구성돼 있고, 보통사람과 부자의 수도 78 대 22가 되며, 소수인 부자가 소유한 부의 크기와 보통 사람 모두가 소유한 부의 크기의 비율도 대체로 78 대 22 정도가 된다는 것이다. ● 자연의 구성이 그렇고, 수학적 도형의 원리가 그렇고, 인간의 구성 요소의 원리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스러운 세상 구성의 원리라고 믿는 것이다. ● 이 원리를 적용하면 세계 자원의 78%를 22%의 소수 인구가 소비하고, 매출액의 78%는 22%의 고객에게서 나오며, 생산량 중 78%는 22%의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지고, 78%의 가치는 22%의 직원에 의해 창출된다는 것이다.
80 대 20 ● 이와 비슷한 구성의 원리를 제시한 사람으로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를 들 수 있다. 파레토는 인간의 만족을 나타내는 '효용'의 개념을 양적 측면보다 선호 측면을 강조했고, 무차별 곡선을 바탕으로 두 사람 이상의 수요자가 유한한 자원을 나누어 가질 때 다른 사람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는 상태에서 또 다른 사람의 효용을 최대로 해 결과적으로 구성원의 효용을 최대로 하는 분배 상태를 추적해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이라는 배분을 도출해냈다. ● 이 파레토 최적은 그 뒤에 케네스 애로(Knneth Arrow)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공리를 근거로 성립된 이론이기 때문에 '불가능의 정리'라고 비판하면서 재정리했지만, 지금도 여전히 후생경제학의 이상적 배분 상태를 제시한다. ● 또한 파레토는 사회적 부의 분포에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1895년 수많은 나라에서 수집한 소득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소위 '파레토 분포(Pareto Distribution)'라는 특이한 분포를 발견했다. 이 파레토 분포는 소위 '80 대 20'의 규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전체 부의 80% 정도를 20%의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포는 여러 나라에서 여러 시기에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것으로 앞에 언급된 유대인의 사상과 흡사하다. ● 놀라운 사실은 80%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 20%의 소수 구성원을 따로 분리해 시간을 두고 관찰하면 그 속에서도 다시 80 대 20으로 구성이 나누어진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 간의 소통과 신뢰다 ● 에릭 바인하커(Eric Beinhocker)가 쓴『부의 기원』(The Origin of Wealth)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요약하면 우파는 이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의사결정을 할 자유가 있으며 시장은 경쟁적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사람과 경쟁적인 시장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는 도덕적으로 건전한 것이다. 시장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 예를 들어 노동, 책임, 절약, 혁신, 위험 감수 등을 보상한다. 사람이 불운한 사람에 대해서 동정심을 가질 수 있고, 온정을 표할 수도 있지만 자원을 배분하는 데 시장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 시장이 경제를 조직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시장의 결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 이에 대해 좌파는 이렇게 주장한다고 한다. 시장은 사회적 산물로서 인간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든 사회적 기술의 산물이다. 시장경제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라면, 시장이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사회 구성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 더욱이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지는 결과가 반드시 선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다. ● 출생이라는 복권제도, 특히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지적 능력, 사회적으로 물려받은 부, 외모, 인종, 출생지 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요소들과 같이 그것이 그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운 또는 한 개인의 통제할 수없는 외적 요소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결과를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장의 결과가 도덕적으로 반드시 옳다고 추정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 이 두 주장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좌와 우'라는 말은 1789년 혁명 와중에 만들어진 프랑스 국회의 의석 배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3계급(평민)인 혁명 세력은 왼쪽에 앉았고, 제1계급인 보수 세력은 오른쪽에 앉았다. 당초 '좌'라는 말은 사회 진보를 위해 투쟁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었으며 유토피아적 냄새를 풍겼다. ● 마찬가지로 '우'라는 말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고 사회 안정과 자연적, 점진적 발전을 신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은연중에 사회의 기득권과 권력층을 비호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이러한 좌우 이분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에 의해 구체화됐고 1세기 이상 긴 투쟁이 지속되다가 지금은 진보와 보수라는 가면 속에 얼굴을 가리고 사라졌다. ●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대립 개념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좌우대결의 철학적, 역사적 내용 속에는 인간 본성의 두 가지 모순된 측면, 즉 이기적 본성과 이타적 본성이 깔려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좌파에 대한 비판과 우파에 대한 비판이 차례로 나타나서 이제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타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인간이란 '조건부 협력자'이자 '이타적인 응징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구성원 간의 소통과 신뢰라는 것이다. 국민의 65%가 서로 신뢰한다고 답한 노르웨이, 60%가 서로 신뢰한다고 대답한 스웨덴처럼 신뢰도가 매우 높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페루는 국민의 5%만이, 브라질은 국민의 3%만이 서로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신뢰와 경제적 성과 사이에는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점을 주목해야 한다.
99 대 1 ● 지난해 9월 17일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 아래 수백 명이 모여 시작한 시위는 워싱턴DC, 로스앤젤레스(LA), 시카고, 보스턴 등과 유럽 및 아시아, 우리나라로까지 확산됐다. ● 이 분노의 뿌리는 매우 오래 됐겠지만, 가까운 원인은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월스트리트의 은행과 기업들은 수조 달러의 구제금융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 혜택은 1%의 부자들에게 돌아가고, 실업은 계속 늘어만 갔다. 지난 30년간 미국 상위 1% 부자의 소득은 3배 오른 데 비해 최하위 계층은 18%, 중위 계층은 40% 증가하는 데 그쳤다는 통계가 나오자 드디어 99% 다수의 분노가 터지고 만 것이다. 종전에 20% 속에 있던 19%조차 돌아서서 이제 99 대 1이 된 것이다. ● 단일 지도부도, 통일된 요구사항도 없는 이번 99%의 시위는 이 때문에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억눌린 다수의 무서운 저항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특히 20%에 속해 있던 19%의 등 돌림을 유의해야 한다. ●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구조적 변화와 1% 소수 부자들의 자발적 반성과 함께 구성원 간의 소통과 신뢰를 쌓아가야 할 것이다. ■ 전진문


전시구성 1부 : 오늘 우리의 삶은 행복한가? 대한민국 사회를 구성하는 99%의 국민이 1%의 기득권층에 지배되는 현실을 풍자적으로 묘사한다. - 작가 25명 참여, 창작 작품 40점 2부 : 신자유주의의 노래. 국가를 초월하는 자본의 구조와 그 본질을 다양한 미적 실험을 통하여 고발하고 상업화 된 사회의 단면을 분석한다. - 작가 25명 참여, 창작 작품 40점 3부 : 나를 위한 99% 이야기 어려운 현실을 딛고 희망으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희망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 작가 25명 참여, 창작 작품 4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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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속, 그 완전함...






이수진_해련 2인展 2012_0813 ▶ 2012_0921




해련_74.1도_캔버스에 유채_112×162 cm_2011



초대일시 / 2012_0813_월요일_12:30pm

후원,협찬 / 샘표식품 주식회사

관람시간 / 월~금_09:00am~05:00pm / 토,일요일 예약 관람

샘표스페이스 SEMPIO SPACE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231번지 Tel. +82.31.644.4615 www.sempio.com




세상은 끊임 없이 변한다.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할 것 없이 영원하기 쉽지 않다.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낡아지거나, 새롭게 단장 되어지거나 또는 무너지거나.. ● 이 모든 변화, 흔들림, 불완전 속 인간은 안정 -완전함- 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기원'(혹은 자아의 정체성_근원) 에 대한 환상의 끈을 놓지 않는다. ● 주체 없이 오로지 주입되는 자본의 명령 –구조주의적 사상에 의한- 만을 주체적이라고 느끼면서 사실은 반주체적인 '불구의 자발성'으로 그 자본에 대한 욕망을 좇음으로 생긴 상처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발생하는 현상들인 것이다. 욕망이 주입하는 '불구의 자발성'을 주체라고 착각할 뿐, 자기 삶의 진실한 지도는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로고스적 중심주의에 비롯, 타락한 낙원에 대한 인식으로 현대인들은 불안정 속 상처를 '기원에 대한 탐구'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채택한다. ●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대한민국은 '힐링 신드롬' 바람이 불고 있다. 여러 매체, 방송 영화 등 모든 곳에서 힐링 열풍인 요즘이다. ● 이 시점에서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한 진정한 힐링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현 상황들을 직시하고자 샘표 스페이스는 '해체 속 , 그 완전함..' 전시를 기획하였다. 직접적으로 치유법을 제시하기보다 구조주의 속 무너짐, 해체 속, 소용돌이 치는 작품 이미지 속, 그리고 일상생활인 듯 보이지만 그 낯설고 수상한 풍경들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 그것이 혹시나 개선방안이 있는지 사유의 한 방법으로써 고찰하고자 한다. ● 시간을 통제하기보다는 시간에 끌려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타의 시선을 의식하여 쌓아온 내 주변에 쌓아 올린 벽들로 인하여 세상과 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벽들을 허물고 해체하며 '그 완전함'이란 내게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전시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 김연희
해련_공중누각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12
해련_As time goes by_캔버스에 유채_80.1×116cm_2011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아는 것은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만들어낸다. / 어려움은 쉬움 속에 태어난다. / 긴 것은 짧은 것으로 인해 정해지고 높은 것과 낮은 것으로 인해 결정된다. / 앞과 뒤는 서로 함께한다.(『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웨인다이어의 노자읽기』중 나무 생각) ● 내가 부여잡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사물, 사람, 기억, 시간... 그 어느 것 마저 내 곁에 그대로 있지 않다. 나의 주위를 둘러싸는 모든 것들은 결코 멈추어 있지 않는다. 나 또한 멈추어 있지 않다. 변하지 않는 완전한 것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들은 결국 파괴되어 지고 사라지고 망가지고 무너진다. 영원히 존재 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물이라는 대상과 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들은 늘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었고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들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생성을 내포 하고 있다는 것에 새롭게 주목하게 된다. 단절, 불안, 파괴, 해체와 같은 것과 같이 불완전한 것들과 상반되는 완전한 것들과의 세계는 이분법적으로 분리 되어 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양날의 칼날 속에서 항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무한성을 자각하면 유한하고 싶고 무한성을 자각하면 유한하고 싶은 지각의 틀 속에 있을 뿐이다. 그 안에 너와 내가 있고 우리는 그 여정을 함께 한다.

해련_Cruise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해련_House Shake2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09



- 어느 날에는 삶이 있다. 우리에게는 죽음, 우리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사실밖에 남지 않는다. 죽음. 삶이 멎었다. 그리고 삶은 어느 순간에도 멎을 수 있다. - 물건들은 활성이 없어서 이용하는 사람이 살아 움직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그 삶이 끝나면 물건 또한 비록 그대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바뀐다. 거기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소속될 데가 없는 세상에 잔존하도록 선고받은 실체적인 유령들... 그러면 갑자기 보고 싶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 드러난다. 물건들이란 그 자체로는 어느 사라진 문명의 취사도구들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은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생각과 의식의 자취로서, 한 남자가 자신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 고독의 표상으로 거기에 남아 우리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다. -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리고 한때 거기에 있던 모든 것의 공허는 죽음이다. (『고독의 발명』, 폴오스터 지음, 열린책들) ● 고독의 발명이라고 폴 오스터가 쓴 책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쓴 자서전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위의 대목에서 나는 목이 메이도록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물건의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의 주인은 나도 아니고 너의 것도 아니게 된다. 주인이 없어진 물건이 되어버린 그것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채, 그렇게 덩그러니 세상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나를 지독하게 몸서리치게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나도 모르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존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사물, 기억, 시간과의 관계 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2009년 초기의 작업들은 이러한 불투명한 불안함을 무너지는 집의 이미지에 대상화하여 물질의 대상이 완전 할 수 없는 이미지를 가지고 사유의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해련_House Shake1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09
해련_Empty Place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1



일반적으로 집이라는 공간은 안식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엄마의 뱃속에서와 같이 자신의 생을 연장하게 하는 제 2의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나에게 이러한 집이라는 대상은 실제적인 가시공간이기도 했지만 선험적으로 아주 완벽하고 완전한 가상공간 같은 비가시적 존재로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대상으로 인지되어있었다. 나를 대변하는 완전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선험적 인지 공간이 영원할 수 없으며 붕괴 될 수 있다는 정신적인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외부로 부터 나를 보호 해 줄 것 같았던 완전한 공간의 실제는 무너져버린 것이다. ● 물질의 존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의 감정, 기억뿐만 아니라 생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의 변화를 인지하고 심상의 풍경을 만들어왔다. (살아)없음이라는 존재의 불완전함에서 시작하였지만, 노자의 사상과 같이 (살아)있음을 만들어 내는 치유와 치환되는 다른 풍경을 펼쳐 보고자 한다. ■ 해련

이수진_야간기습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1
이수진_불가항력 같은 것_캔버스에 유채_100×80.3cm_2011



수도관 공사를 빌미로 집 앞 길가에는 커다란 구멍이 시커멓게 뚫렸다. 공사현장의 육중한 기계가 흡사 괴물처럼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등장한 반듯한 새 건물은 이전에는 자리해 있었으나 지금은 온데간데 없는 건물을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만든다. 도로변 비쩍 마른 가로수는 팔을 쑹덩쑹덩 잘린 채로 가만히 서있다.

이수진_주인없는 연기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0
이수진_괜찮겠지_캔버스에 유채_31.8×31.8cm_2010



이따금 이게 과연 현실이 맞는지 의심할 만한 일들이 생기곤 했다. 가깝게는 내 안에서 터져 나온 일을 비롯해 나와 연관된 일, 혹은 직접적으로 영향 끼치지는 않을 테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일, 그리고 그 스케일이 압도적이어서 감히 뭐라 언급할 수 없는 일까지. 그러다 간혹, 이 모든 상황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수진_쾅!_종이에 연필_21×29.7cm_2011
이수진_안녕하세요_종이에 연필_21×28cm_2011
이수진_남은 것들2_종이에 연필_21×28cm_2011



하릴없는 순응과 미약한 저항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하던 나는 어느덧 관찰자적 태도를 갖게 되었고, 지나치는 일상에서 걸음을 멈춰 사소하고 별것 아닌 것들을 새삼스럽게 여기는가하면,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의 기이함을 문득 특기할 만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 이를 바탕으로 모종의 이야기를 꾸며낸 뒤 화면에 던져 넣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장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아무데도 없는 장면들이 된다. 나는 이들을 묶어 '발견된 풍경'이라 부르기로 했다. ■ 이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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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OCI YOUNG CREATIVES






김은형_임주연展 2012_0814 ▶ 2012_0902 / 월요일 휴관




김은형_제1곡:난쟁이 / No.1 Gnomus(Latin, The Gnome)_종이구조물에 연필, 먹_25×25×5cm_2012



초대일시 / 2012_0814_화요일_05:00pm

김은형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 Curated by Moussorgsky' 임주연 'Ski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작가 김은형 작업에 대한 매우 주관적인 감상 ●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김은형은 이번 OCI 미술관 전시에서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을 한다. 무소르그스키는 그의 친구인 화가 하르트만이 그린 10개의 드로잉으로부터 음악을 만들어냈다. 작가 김은형은 이 음악을 다시 시각 이미지로 그려낸다. 하르트만이 그린 10개의 그림은 각각 다른 스토리를 가지며 서로의 연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소그르스키는 이 다른 이야기의 그림들을 전시장을 거니며 관찰하는 방법적 시점에서 음악으로 이어 붙여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만들어냈다. '프롬나드(promenade)'라고 하는 개념을 음악에 도입하여 그것을 전주나 간주의 형식으로 사용하면서 각 열 개의 다른 스토리의 음악을 통일성 있게 연결하는 고리로 사용한다. ● 리얼리즘 음악의 대표적인 곡인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과 같이 무소르그스키는 전람회에 출품된 여러 그림들, 난쟁이, 고성, 병아리, 마녀, 지하의 묘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이미지들을 관객들이 음악을 통해 연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가는 그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속에서 보고 감응한 느낌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프롬나드 부분은 스토리 표현을 위한 리얼리즘 기반의 멜로디가 아닌 매우 주관적이고 스토리와는 상관없는 음악이다. 그렇다고 다른 에피소드들을 연결 하기위한 형식적인 기능만으로 작곡된 것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기 다른 스토리의 그림들을 묘사한 곡들이 의식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프롬나드 부분은 무소르그스키 자신이 지닌 무의식의 영역에서 잠겨있는 하르트만과 관계에서 생성된 이미지들을 표현한 것이다. 즉 프롬나드는 갤러리를 거닐며 각기 다른 그림들을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친구인 하르트만과의 관계에서 나온 독자적인 창작 가치를 지닌 것이다. 이로써 무소르그스키는 단지 그림 이미지들을 음악화 시킨 것이 아니라 그의 친구 하르트만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유작전 작업들 몇몇 단면들을 가지고 말이다. 전람회의 그림은 무소르그스키에게는 하르트만에 대한 의미를 인식하며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치유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들을 되새기며 말이다.
김은형_전람회의 그림_종이구조물에 연필, 먹, 아크릴 코팅_50×125×5cm_2012

김은형은 이번 작업에서 무소르그스키가 표현한 10개의 음악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회화작업으로 묘사한다. 대상을 시각을 활용하여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고 청각으로 받아들여 감응하고 이를 다시 시각으로 전환시킨다. 감각과 감각의 전환 과정은 뇌의 인식의 단계에 간극을 만들고 그 사이에 무의식 세계에 있는 주체적인 원초자아가 개입되어 간섭을 일으킨다. 작가는 단일 감각의 반응을 통한 뇌의 인식이 아닌 공감각들을 통한 몸과 마음의 감응을 시도 하려 한다. 의식적이고 논리적인 묘사가 아닌 내면의 무의식적이고 원초적인 주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무소르그스키가 작곡한 음악을 즉흥적이고 순발력 있는 브러쉬스트로크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작가는 음악의 멜로디처럼 계획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은 매우 자유로운 선들을 활용하여 흑백의 이미지들을 창출한다. ● 그림을 그린 작가 하르트만, 그림을 음악화한 작곡가 무소르그스키, 다시 그 음악을 그림으로 재창작해낸 김은형 이 세 사람은 다른 시간대에 존재하고 다른 표현 매체를 사용한 창작자들이다. 하르트만과의 무소르그스키와 관계성에는 음악이 있다. 김은형과 무소르그스키 사이에는 그림이 있다. 김은형은 개인과 타자, 자신과 사회 간의 관계 사이에 존재론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활용한다. 단지 관계의 미학이나 음악과 회화의 변환과 융합이라는 새로운 형식적 시도를 넘어서 말이다.
김은형_프롬나드(Promenade)_종이구조물에 연필, 먹, 아크릴 코팅_33×66×33cm_2012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기억들 ● 김은형은 자신의 과거 작업인 Designing egos에서 사적인 기억의 이미지들을 의도적 기술이 아닌 즉흥적 발상에 의존하여 그려냈다. 그는 무의식적 상황에서 자아 내면에 가라앉아 있는 이미지들을 의식의 수면위로 부상시킨다. 이는 무의식 세계의 본질을 엿보고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많이 사용했던 자동기술 automatism 즉 의식이나 의도가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무의식적 상태로 대할 때 거기서 솟아오르는 이미지의 분류를 그대로 기록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무의식 세계의 이미지를 끌어내려했던 초현실주의자와 다르게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본능의 영역인 원초자아(무의식의 세계)와 자아 사이에 머물러있는 자신의 기억들을 끌어낸다. 그가 그려낸 흑백의 이미지들은 무념무상의 수행이 아닌 유념유상의 수행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세상의 순리와 본질을 이해하려했던 자수화풍의 수행과도 매우 흡사해 보인다. 즉 무념과 유념, 무의식과 의식 경계에서 그려지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 아래서 구성된 내러티브와 비선형적 시간 아래서 파편적으로 구성된 이미지들의 경계에서 모호한 상황의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추상적 이미지와 구상적 이미지가 교차하는 정리되지 않은 혼돈적인 이미지들에 원초자아와 자아의 중간계에 자신의 창작 세계를 삽입시키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기억의 혼돈에서 정리하고 찾고자 하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긴 획을 그어내는 브러시스트로크는 이러한 경계성의 모호함을 더욱 강화시킨다.
김은형_Enchanged Island의 상자_종이구조물에 연필, 먹, 아크릴 코팅_25×25×5cm_2012

무의식의 기억들을 인식하기 위한 구조적 조형화 ●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영역에서 뽑아진 이미지들은 이차원적 나열에서 다차원적 공간의 형상으로 재구조화된다. 작가는 창작의 순발력에 기인한 무의식적인 평면 드로잉과는 달리 이 조형작업에서는 정교하고 계획적인 공간구성을 시도한다. 조형물들은 예측 가능한 삼차원 구조의 도형으로 구성되지 않고 유기성을 기반으로 비구조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굴곡이 생기고 다차원적 주름이 생겨난다. 마치 많은 웜홀들을 통해 시간의 제약 없이 기억의 파편들을 연결시키며 시공을 넘나드는 것처럼 김은형의 조각 작업은 삼차원 공간의 x와 y축을 벗어나 공간과 시간을 왜곡하는 중력장과 결합한 듯하다. 다차원적 주름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작가의 기억들은 뒤섞이며 시간과 공간은 뒤얽혀버린다. 이 얽힘은 매우 계획적으로 장면과 장면을 연결시키며 자신의 모호한 사적 기억들을 보다 의식적으로 객관화시킨다. 작가는 뇌에서 이 작업의 형상을 가져왔다고 했다. 인간의 뇌는 무한한 복잡성의 영역이며 하나의 작은 소우주와도 같다. 삼차원적 영역이 아닌 다차원적 시공의 영역인 뇌를 모티브로 자신의 뇌에서 나온 기억들을 다시 물리적으로 구형화 시킨다. 스스로 가진 무한의 복잡성을 이성적 의식 영역에서 구체화시키는 작가는 평면 작업에서 무의식적 드로잉을 나열한 이후 조형 작업에서 논리적인 재구성을 시도하여 기억의 번뇌를 안정화시키고 타인과의 공유를 시도한다.
김은형_The Brain Factory_벽화, 애니메이션, 종이구조물 설치_500제곱피트(ft²)_2011

자신과 타자의 동일화 ●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마치 동일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스토리와 다른 시공에 존재하지만 작업에서는 같은 시간대와 같은 사회의 영역에서 온 동일인물과 같이 표현된다. 작가는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동일화 과정을 통해 타자와 자신의 구분을 없애 버린다. 개인과 타자의 관계는 자신과 자신을 반사시켜 나타내는 거울과 같은 의미이며 개인의 정체성은 타자에 의해 평가되고 규정지어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동일기제를 통한 인간의 집단화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규정지을 때보다 타인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 받을 때 더욱더 큰 만족감을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과 모든 이들과의 관계를 연결시켜가며 고립된 상실감을 해체하고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타인에 의해 찾으려한다. ● 작가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혼돈적 기억들을 끌어내어 평면 위에 나열하고 펼쳐진 자신의 기억들을 타자와의 관계성 안에서 재조립한다. 자아 영역에서 구체화 된 자신의 기억들은 보다 객관화된 이미지로 정리되어 대중들에게 전해진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과정은 정신과 의사 J.L.모레노가 창시한 심리요법 사이코드라마(심리극)이 취하는 방법과 흡사하다. 일정한 대본이 없고 등장인물인 환자가 생각나는 대로 연기를 하게 하여 그의 억압된 감정과 갈등을 표출한다. 타인이 자기를 보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며 스스로를 통찰하기 위한 수단인 심리극은 사회 적응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다. 극의 주제가 공적인 문제를 주제로 할 때 소시오드라마(sociodrama)라고 하는데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타인과의 관계성을 전제로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사회적 집단 아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와 맥이 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성적 억압 없이 자신의 내면에 가라앉혀 있는 기억들을 표출하고 그 이미지들을 타인의 시각과 연결시켜 객관화하는 드로잉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한다. 이러한 수행적 되새김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미래를 그려 나아가고 있다. ■ 서진석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2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의 주름 ● 임주연은 지난 10년 동안 '사진의 재현성'과 '영상의 시간성'을 자신의 회화 작품에 적극 끌어들여 왔다. 특히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의 개인전 『Extremely Ordinary』(2009년), 『Banalscape』(2010년), 『Return』(2011년) 등에서는 사진의 방법론을 회화에 적극 동원하는 작품에 집중했다. 작가 자신이 내세운 전시 주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이, 임주연의 작품은 지극히 평범한(혹은 따분하거나 시시한, 덧없는) 일상사에서 포착한 자신의 신체를 구상 양식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이번 개인전은 『Skim』이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역시나 '스치듯 지나가는' 삶의 한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이번 개인전에서도 이전의 작품 방법론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1)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몸을 감쌌던 외피(옷)를 벗는다. (2)그 탈의(脫衣) 장면을 카메라 셀프타이머를 이용해 연속적으로 찍는다. (3)그렇게 찍은 여러 사진 중 일부를 선택하여 캔버스에 확대해서 그린다. 임주연의 작품 제작 은 결코 새롭거나 대단한 발상이 아니다. 문제는 이 평범한 발상을 비범한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조형 능력일 텐데, 임주연 작품의 비평에서 터치해야 할 핵심도 바로 이 대목이다. 임주연에게 사진은 아이디어 스케치 혹은 밑그림 역할을 맡고 있다. 더 큰 의미로 작품의 기초 설계요, 뼈대 구성이라 해도 좋다. 그의 작품은 자신의 신체 움직임의 한 찰나를 정지된 이미지로 붙잡은 사진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임주연은 사진 촬영을 통해 몇 가지 흥미로운 형상을 얻어낸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첫째, 사진을 찍은 결과는 찰나의 정지 이미지이지만, 신체와 옷의 형상이 천태만상이다. 옷을 벗는 동작에도 긴장과 이완, 에너지의 강약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이나 팔 다리, 다른 신체 부위가 적극 개입되는 격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용히 단추를 여미는 정도의 온순한 동작도 있다. 둘째, 그 사진이 마냥 정적으로만 보이지도 않는다. 신체 움직임의 앞과 뒤에는 언제나 유동적인 시간이 안착할 여백 혹은 틈이 있다. 그래서 옷을 벗는(혹은 입는) 동작과 바로 그 다음 동작, 그리고 그 다음의 시간과 상황 전개를 예감해 보는 즐거움이 크다. 실제로 작가는 인물 형상의 연속성을 확연히 드러내는 2면 혹은 3면의 연작 회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셋째, 미리 구도를 고려하지 않고 찍은 사진이어서 오히려 파격의 프레임이 탄생한다. 대체로 옷을 벗는 행위에 집중되어 있어 목 위의 얼굴 부위는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 '얼굴 없는 신체'가 묘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카메라의 눈은 시간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예컨대 형상이 빠르게 휙 소리를 내면서 스쳐 지나가듯 흐릿한 이미지를 담는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사실상 작품의 골격은 이 사진에서 결정된다. 그 다음 과정으로 임주연은 캔버스에 사진을 크대 확대해서 그린다. 그렇다고 사진 원본을 그대로 베끼지는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그의 작품은 숨이 착 가라 앉은 포토리얼리즘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마침내 회화 기법의 미덕이 적극 동원된다. 임주연은 카메라의 눈으로 포착한 이미지에 적극 기대면서도 손의 표현, 요컨대 수공(手工)의 특성을 결코 잃거나 잊지 않는다. 엉뚱하게 잘려나간 화면의 프레임, 느닷없이 절단된 신체 부위의 야성, 과감한 클로즈업의 임팩트, 미끄러지며 꿈틀대는 붓 자국, 우연인 듯 뚝뚝 흘러내리는 물감의 얼굴, 흐릿한 색채의 알 수 없는 불안, 옷 주름의 팽팽한 긴장….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임주연은 이제 캔버스 위에서 '회화의 잔치'를 펼친다. 우선 사진 작업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 일체의 회화적 행위는 단순히 형태를 만들고 색을 칠한다기보다는 카메라에 찍힌 정지된 과거 자신의 한 순간을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진으로는 이미 완결된 시간, 갇힌 시간을 회화의 힘으로 활짝 해방시키는 작업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몸을 그려대는 이 현재화 작업을 통해 임주연은 회화 공간을 '진행형'의 영원한 미완의 시간으로 끊임없이 밀어 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더 이상 미래라는 시간이 탈각된 박제된 버전이 아니라 꿈틀대는 살아있는 생명으로 우리 앞에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그 숨결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이야말로 회화의 진정한 매력이요 또한 회화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 우리가 미술의 그 어떤 장르보다 회화를 갈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수공 작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인간의 손이 효용을 점차 상실해 가는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회화는 첫걸음에서부터 마지막 완성까지 작가 스스로의 신체 작용이 지배하는 예술이다. 이 점에서 회화는 장르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있다. 회화에 대한 갈망은 근원적으로 사물에 대한 애정, 즉 페티시즘(fetishism)에 기인한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라캉은 페티시즘의 근원을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분리된 이후의 끊임없는 상실감, 무의식의 기아감에서 찾지 않았던가. 바로 이 수공의 특성이 캔버스 화면과 충돌하며 부싯돌 같은 섬광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임주연의 작품은 "나는 회화다!"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하여 사진으로는 온전히 걷잡을 수 없었던 사물에 대한 애정을 회화라는 손으로 따뜻하게 애무하는 것이 아닐까?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신체, 붓과 물감이 서로 거친 호흡을 주고받으며 일궈내는 화면 위의 수많은 질료의 이랑은 시간의 주름을 직조해 간다. 그 촉각의 감성으로 불러내는 페티시즘이야말로 사진이나 영상의 평면(superflat)과는 질적으로 다른 회화 표면의 감동이 아닌가. 이렇듯 임주연은 회화와 뉴미디어의 조형적 순환을 자연스럽게 포용하면서도 회화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지켜가고 있다. 달리 말하면, 회화가 회화여야 함을 부르짖으면서도 시각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임주연의 작품은 '사진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회화'라고 해야 할까? ● 임주연의 최근 작업은 신체 동작보다는 옷의 형상 자체를 더욱 부각시키는 변화를 보인다. 신체의 일정 부위가 대형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되어, 이전 작업에서 보이던 인물의 동작은 크게 약화되었다. 얼핏 보면 인간의 신체와 무관한 미시세계의 한 부분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역동적인 필치와 구성을 대하는 느낌이다. 신체 움직임이 빚어내는 미묘한 옷의 표정은 또 다른 알레고리적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임주연_무제_캔버스에 유채_194×150cm_2012

임주연은 왜 하필 옷을 그릴까? 옷은 몸을 감싸는 '제2의 피부'다. 옷은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공적 언어다. 또 누군가가 말했다. "옷은 가장 작고 사적인 은밀한 공간이다." 그러니까 옷은 '나(주체)'와 '타자(세계)'가 만나는 경계다. 옷은 주체의 마지막 껍질이요, 타자와 소통하는 최초의 장소다. 임주연은 자신의 은밀한 방에서 옷을 벗는다. 타자의 공적인 시선에 머물러 있던 '보이는 나'에서 속옷과 속살까지를 드러내 보이는 '보는 나'의 사적인 세계로의 노정이다. 그리고 '보는 자(촬영자)'와 '보이는 자(피사체)'와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고, 다시 이 양자를 선택하고 번역하는 또 하나의 '해석자(작가)'를 통해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이 이어진다. 임주연의 옷은 나와 세계와의 유무형의 경계, 혹은 '스치듯 지나가는' 그 경계의 애매모호한 시간의 겹을 파고든다. 옷은 인간 실존의 다른 이름이다. ■ 김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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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Surface'




김계옥展 / KIMKYEOK / 金桂玉 / installation 2012_0815 ▶ 2012_0821



김계옥_second surface 1209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130c | 김계옥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1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 Tel. +82.2.734.1333 www.insaartcenter.co.kr



주얼리, 세컨드스킨에서 인사이드스킨으로 ● 보통 장신구라고 하면 반지와 팔찌,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브로치 정도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목록은 말 그대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그 자체로는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담론을 생산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광의로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즉 포괄적으로 장신구는 입고 걸치고 걸고 쓰는 것 일체 곧 몸에 착용하는 것 일체를 의미할 수 있다. 몸 자체를 제외한 것 일체, 나아가 가면과 가발처럼 현저하게 몸꼴을 닮은 것(일종의 유사 신체?) 일체, 심지어는 문신처럼 사후적으로 몸의 일부가 된 것 일체를 아우르는 것. 몸에 착용하는 것으로 치자면 옷이 가장 전형적인 경우에 속하고, 따라서 장신구는 옷처럼 입고 걸치는 일종의 작은 옷이랄 수 있다. 김계옥이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즉 입을 수 있는 것, 착용할 수 있는 것에서 주얼리의 존재방식이며 표현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진 정의며 표현이며 형식은 주얼리에 대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며 표현이며 형식의 경계를 넘어선다. 의미론적으로 주얼리와 몸, 주얼리와 정체성과의 관계문제를 아우르고, 형식적으로 주얼리의 경계를 넘어 조각과 공간설치작업, 나아가 빛과 흔적처럼 상대적으로 그 실체감이 희박한 매질을 아우르는 탈조각 내지 비물질조각으로 확장된다. 여하튼 주얼리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얼리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일종의 메타 주얼리의 한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 이를테면 작가는 제2의 피부로 주얼리를 정의한다. 피부는 전형적인 주얼리보다는 옷에 그 속성이 가깝다(부모님이 물려주신 가죽옷이라는 군대의 우스갯소리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속성은 허물과 껍질과 고치와 같은 상대적으로 더 가변적이고 유기적인 소재와 매질을 아우른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은 피부(주얼리)를 매개로 몸 안쪽으로 파고들고, 몸 바깥으로 확장된다.
김계옥_second surface 1204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은 어떻게 몸과 상호작용하고, 더불어 그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주얼리가 제2의 피부로서 존재의미를 획득하는가. 일반적으로 주얼리의 의미체계는 닫혀있다. 그 자체 닫힌 체계인 완제품을 일방적으로 착용하고 소비할 뿐, 주얼리와 주얼리를 착용하는 주체 간에 이렇다 할 의미교환이 일어날 개연성은 별로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작가의 주얼리가 일반적인 주얼리와 구별되는 분기점이 된다. 즉 작가의 작업에서 주얼리는 몸과 상호작용하고, 그렇게 상호 작용된 과정이며 흔적을 몸에 남긴다. 몸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과정을 통해 주체에 영향을 미치고 주체의 일부로서 스며든다. 이를테면 그 표면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린 주얼리 내부에는 미세 LED 전구가 장착돼 있다(Aurora). 그래서 주체가 그 주얼리를 착용하면 그렇게 뚫린 구멍을 통해서 은근한 빛이 흘러나온다. 신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유기적이고 가변적인 빛의 패턴이 마치 제2의 피부처럼 신체 표면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신체의 동작을 강조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 빛의 패턴을 빛의 드로잉으로 극대화하고, 오브제를 끌어들여 공간설치작업으로까지 확장한다(오로라 샹들리에). 그리고 작가는 장신구를 마치 롤러처럼 사용한다(Laced Trace). 장신구의 표면에 조성한 미세요철문양을 이용하는 것인데, 그 표면에 잉크를 묻혀 신체 부위에 그 패턴이며 이미지를 프린트하는 것. 이로써 일종의 유사문신이랄 수 있는 또 다른 제2의 피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계옥_second surface 1211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

그런가하면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경우로 (Like your voice)를 들 수 있다. 안쪽에 자잘한 톱날 같은 텍스트를 새겨 넣은 반지나 팔찌를 착용한 후 벗으면 신체 표면에 그 텍스트가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흔적이 점차 사라져 없어지는, 흔적의 관점으로 봤을 때 일종의 무형의 장신구를 만든 것이다. 예로 반지를 소재로 한 이해인의 시를 텍스트로 새겨 넣었지만, 독백 수준의 주관적인 텍스트, 주체와 타자를 매개시켜주는 관계적인 텍스트, 공공연한 메시지를 탑재한 사회적인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출처의 텍스트가 도입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텍스트가 달라지면서 주얼리가 속하고 읽히는 의미맥락도 덩달아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는 흔적이 시적이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시적이다. 사라지면서 사라지지 않는 것, 무의식이며 침묵으로 남아 맴도는 무언의 언술이, 그 언술의 고집스런 흔적이 시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남겨진 흔적 자체는 일종의 트라우마에 대한 유비적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 작가의 주얼리는 애와 증이 교차되는 이중적인 매개 장치며, 가학과 피학이 교환되는 양가적인 매개 장치로도 읽힌다. 반지는 사랑의 증표이면서 구속의 증표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주얼리를 매개로 신체 표면에서 길을 잃고 부유하는 빛의 패턴이며, 지울 수 있는 문신, 그리고 최소한의 흔적으로 남아 맴돌다가 사라지는 무언의 언술처럼 그 실체감이 희박한 것들을 부각한다. 여기서 정작 주얼리 자체는 이 일련의 비물질 매질을 드러내는 매개에 머문다. 주얼리를 제안하는 전혀 다른 용법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인데, 작가의 초점은 아마도 주얼리 자체보다는 주얼리가 몸에 남긴 흔적이며 존재에 미친 영향과 같은 무형의 실체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무형의 실체는 비누로 만든 반지가 발하는 향기라고 하는 또 다른 무형의 매질을 아우른다(Fragrant). 한갓 장신구가 빛으로 전환되고, 문신으로 전환되고, 무언의 언술로 전환되고, 향기로 전환되는 것. 감성적인 경험을 매개시켜주는 감성적인 오브제로 그 존재방식이 변환되는 것. 그 과정에서 드러난 전환과 변환은 일종의 변태에 해당한다.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이 상황논리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그 태를 바꾸고 그 꼴을 바꾸는 비정형적이고 비결정적인 존재의 생리를 말한다. 그리고 그 생리에 대한 작은 실험이 일종의 변형오브제를 도입한 (Art chair)에서 모색되고, 마침내 근작에서 본격적으로 실현된다. 이를테면 작가는 근작에서 진즉에 꿈꿔왔던, 그리고 상당할 정도로 실제로 짚어내기도 했던 입을 수 있는, 착용할 수 있는 주얼리에 대한 발상을 본격적으로 풀어놓는다. 그 어감도 그렇지만 이렇게 풀어낸 주얼리는 주얼리의 전형적인 형식보다는 일종의 옷에 가깝고, 그 옷들을 공간에 풀어놓은 공간설치작업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가녀린 구리선이나 철선을 실처럼 사용하는데, 일일이 코바늘로 뜨개질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와이어 망들의 연쇄로 이뤄진 유기체적 형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유기체적 형상을 공중에 매달기도 하고, 독립된 형상을 제시하기도 하고, 형상과 형상을 짜깁기해놓거나 한다.
김계옥_second surface 1217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

이렇듯 형상과 형상이 어우러져 친근하면서도 낯선 풍경 내지 초풍경을 연출한다. 그 풍경이 친근한 것은 어떤 닮은꼴에 연유한 것인데, 이를테면 옷 같기도 하고, 이슬람 지역 여성들이 착용하는 차도르와 히잡 그리고 부르카 같기도 하고, 그물 같기도 하고, 파충류가 벗어놓은 허물 같기도 하고, 고치 같기도 하다. 이로써 작가는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나마 여성적 감수성이며 정체성을 반영하고, 유기체적 형상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리고 그 풍경이 낯선 것은 그 형상들이 이렇듯 다만 00 같이 보일 뿐(그 자체를 결과보다는 과정에, 의미가 결정되는 지점보다는 의미의 지점들을 옮겨 다니는 운동성에 초점을 맞춘 질 들뢰즈의 00 되기 철학에 대한 공감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정작 그 지시적 의미가 암시적이고 명료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 그 형태도 의미도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다.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다. 그 망들의 연쇄는 임시적이고 임의적으로 멈춘 것일 뿐, 사실은 무한연쇄를 향해 열려있다. 이렇듯 무한연쇄를 향해 열린 망들의 연결고리가 네트워크를 연상시키고,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를 연상시키고, 불교의 연기설을 연상시킨다. 망들은 말하자면 인연의 고리며 사슬을 연상시킨다. 흔히 인연은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물에 비유되고, 그 실체를 헤아릴 수 없는 모래에 비유되고, 그 실체가 무한 연속된 고리에 비유된다. 그만큼 아득하고 멀고 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도 의미도 사실은 비결정적이고 비정형적이라 했다. 정해진 형태도 의미도 따로 없다. 시작도 끝도 없다. 아무데서나 시작할 수 있고 아무데서나 끝낼 수 있다. 그렇게 모든 시작과 끝이 임의적이고 임시적인, 잠정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망이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았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공간 속에다 임의적이고 임시적인, 잠정적이고 잠재적인 의미들을 풀어놓는다. 하나의 의미가 또 다른 의미를 불러들이고, 하나의 형태가 또 다른 형태와 들러붙는 그런 의미망이며 형태의 집을 열어놓는다. 비록 작가의 시작은 주얼리지만 그 과정에서 주얼리의 경계를 벗어난다. 주얼리의 형태며 기능이며 의미를 심화하고 확장하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고, 자기를 표현하는 전망이며 스펙트럼의 한 지점으로 주얼리를 한정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작가의 자기표현의 영역이며 범주는 넓다. 주얼리의 경계를 넘어설 만큼 넓다. 그 넓은 경계가 그렇게 넓혀진 폭만큼 주얼리의 정의며 존재의미를 확장시켜줄 것이다. 아마도 입을 수 있는 주얼리, 착용할 수 있는 주얼리에서 이미 그 확장의 계기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세컨드스킨으로서의 주얼리를 짚어내고, 향후 인사이드스킨의 형태를 예고한다. 세컨드스킨이 확장을 향했다면, 인사이드스킨은 심화를 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실현될 형태가 궁금해진다(어쩌면 근작이 그 생각을 실현해주는 단서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아가 아예 근작 자체가 이미 그 실현의 유비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 고충환
김계옥_second surface 1225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


『Second surface』는 초현실적이지만 엄숙한, 즉 성스러운 착각 속의 공간을 보여주려 한다. 그 착각 속의 공간은 환영적인 고요한 공간 속의 자각과 감동을 말한다. 그것은 망(net)으로 감쳐진 형상 속의 존재와 부재 사이의 미묘한 겹침으로, 선들의 꼬임과 엉킴으로 그려진 빛과 어둠을 통해 보인다. 또한, 선들의 긴장감을 통한 제2의 표면은 창백하고 성스러운 풍경을 연상시킨다. 인체 피부의 표면을 재해석한 질감의 패턴은 인체와 공간의 구조와 표면 사이의 감성적 공간으로 확장되고, 스킨 텍스쳐(skin texture)로 싸인 공간은 또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어 표면과 구조 사이의 공간 속을 세포 분열하듯이 연결한다. 가변적으로 짜이고 엉킨 선들의 부드러운 긴장으로, 착각 속의 풍경을 펼치며 제2의 표면에 암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 김계옥

김계옥_second surface 1225_조명, 동선, 혼합매체_설치_2012_부분


『Second sur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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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depression 憂鬱症






이정철展 / LEEJUNGCHUL / 李政澈 / painting 2012_0815 ▶ 2012_0821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116a | 이정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 제1특별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繪畵를 통해 탐닉하는 현대인과 인간의 존재감 - 1. 현대 한국화의 시대적 의미 ● 오늘날 현대 한국화는 전통의 수용과 탈장르에서 비롯된 새로운 도전 속에서 자유로운 매체의 사용과 표현방식으로 신선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과거 지필묵으로 표현되어졌던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이던 전통한국화의 '시각적 미학'과 '한국적 정체성'이 이제는 실험적이고 다각적인 조형언어로 재구성되어져 진정한 한국의 '회화정신'을 담는 새로운 그릇으로 거듭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화단에서 '한국화'라는 명칭이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로 여겨진다. 종래의 동양화를 한국화로 고쳐 부른 배경에는, 일제시대의 잔재를 그 이름에서부터 청산하고 조선회화의 전통적 맥락에 주체적인 연계를 가지려는 고심이 숨어 있으며 한국적인 회화정신과 양식을 재정립하려는 의지가 뒷받침 되었다고 본다. 한편 서구의 미학적 사고와 재료를 이용해 표현하는 '서양화'가 이 땅에 들어 온 지도 이미 백년이 넘었다. 우리화단에 면면히 내려온 전통미술이 서구미술을 수용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제는 한국미술이라는 정체성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게 현실로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성을 계승하고 현대적 감각에 맞는 회화양식을 찾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의 진지한 노력과 실험적 시도들은 새로운 미학적 표출로 이어지면서 그 가능성과 화단의 변모를 모색하는 새로운 주체가 되고 있다. ● 오늘날 대부분의 현대 한국화가 들에게 '매체에 관한 창작의 부단한 실험과 주제에 관한 전통에의 접목'등은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형식 실험에의 과도함을 거부하려는 시도는 화면 내부의 이미지의 독자성 확보에 관한 고민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추상화 이미지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창작자의 캐릭터 화된 인물을 일상의 풍경을 배치한 배경 사이에 개입시키는 내러티브(Narrative)적 서정성, 혹은 설화적 형식으로 접근은 한국적 원형 탐구와 내러티브 환경 속에 실존하는 우리들 인간상에 대한 재해석으로 표현되어지기도 했다. 아울러 자연주의적 소재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치밀함 혹은 그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내면적 해석은 조형화 작업과 연결되어져 전통 화제(畵題)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한다. 대부분의 현대 한국화 작가들의 작업이 제각기 다른 주제 탐구와 매체 사용을 통해 실험적 모색을 거치고 있음에도 모두가 한국화 전통의 최소화 조건을 버리지 않으면서 한지나 장지 안의 이미지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여겨진다. 한국화의 매체적 한계를 그들 스스로 끌어안고 그 한계 내에서 작업을 천착(穿鑿)해 오고 있는 것은 우리 미술계에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여겨진다.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91×116.8cm_2011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현대 한국화는 우리전통의 철학적 사고와 미감에 뿌리를 둔 한국화의 자양분을 흡수하여 동시대 시각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내려하고 있다. '현대미술은 곧 서구미술'이라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현대미술을 이해하고 규명 짓는다면, 서구미술과 한국미술과의 변별력은 자연히 약해져 한국미술이 가지는 시각적 한계점을 초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미술은 어떤 다른 용어로 불려도 별도 구속되진 않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한국화는 그 폭이 매우 제한적이고 좁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 한국화 전통에 도전적 매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실험적인 현대 한국화의 한계가 더욱 지엽적이고 모호하게 인식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들은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다양한 매체를 이용한 실험적 모색과 한국미술에 내재된 심오한 전통적 미의식, 나아가 예술적 기운의 구현"으로 이어진다면 진정한 현대 한국화의 시대정신이 계승되고 이어질 것으로 본다.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2. 이미지로 표현되는 형상과 존재의 의미 ● 최근 들어 작가 이정철은 오늘날 한국화 화가들이 고민하는 전통의 계승과 현대성에 대한 깊은 고찰을 새롭게 체험하고 있다. 1998년 중앙대학교 한국화 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이 대학졸업과 함께 겪게 되는 삶의 깊은 고뇌와 갈등에서 얻게 된 직장생활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던 자아를 발견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었다. 졸업과 함께 시작된 직장생활과 새로운 가정에서 비롯된 가족이라는 새로운 구성은 그동안 잊고 지내왔던 인간의 존재와 세상살이를 통해 보고 느꼈던 본능적인 표출이 그림의 새로운 소재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 이었다. 인간 본질(이데아)과 정체성 표현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 그의 그림 속 주제는 '인간존재'이다. 우리네 삶의 주체는 인간이고, 그 인간은 현대라는 복잡한 사회적 구속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인간존재의 내면이나 일상성을 가식 없이 보여주는 그의 그림 속에는 현대인의 삶을 축약 적으로 표현하려는 강한 예술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한국화가 주는 매체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수묵과 장지를 이용한 신선한 노동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는 그의 작품에는 현대 한국화의 신선한 묵필정신을 느끼게 해준다. 그의 화면 속에는 우리주변에서 늘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매일같이 마주치지만 유명인이나 특정인이 아니기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그들의 얼굴 속에서 이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성실한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유명스타와 같은 소위 영웅주위적인 삶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특정인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들의 외형적 모습이 주는 도상학적 의미 전달보다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주변인들의 내면과 그 속에서 내재되어 있는 진실 된 삶의 깊이와 심미적인 자각에서 오는 무게감을 자연스럽게 이식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간결하고 절제된 선과 채색으로 현대인의 내면 풍경을 담아내고 있는 그의 근작들에서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방향성과 비전마저 조심스럽게 탐색해 볼 수 있다.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그의 그림은 아교에 분채(汾彩)를 직접 녹인 후 여러 번 반복해서 칠하는 한국화 전통채색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엷게 채색되어진 화면 속 인물들은 한결 같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대표작인「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올랭피아」그림 속 여인들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며 관객에게 말 걸기를 시도 하듯 그의 그림 속 여인들도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인물화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의 모습들은 열린사회와 서구화된 주거환경, 교육기회의 확대에서 오는 진취적이고 현대적인 존재감을 과감하게 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간극의 깊이만큼이나 여성들의 고독과 갈등이 그림 속에 깊이 숨겨져 있음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작가 이정철은 이들 작품들을 통해 여성을 감상의 대상으로 하는 전통의 여성성 보다는 인간존재로서의 모습 부각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은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차가운 경쟁 사회 속 고달픈 일상 속에서 분출 되는 절박한 항변과 존귀한 자아에서 오는 인간의 존재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정철_우울증_한지에 혼합재료_116.8×91cm_2011

3. 영혼의 이미지를 담기 위한 새로운 여정 ● 작가 이정철이 한국화의 기본 틀을 구축했던 중앙대는 한국화과 동문들로 구성된『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을 통해 1980년대에 한국화 중흥운동을 일으켰던 명문대였다. 소위 홍대파와 서울대파의 대립적 헤게모니 속에서 한국화가 가지는 시대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치열한 작가정신을 반영한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던 중앙대 한국화과는 서라벌 예술대의 맥을 이어 한국화의 원류를 찾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했던 학과였다. 이러한 학과출신 동문들이 주축이 된『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의 85년 창립은 한국화단에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던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당시 창립전 서문을 보면 "현재 한국화가 당면한 문제는 기존적 전통 문화에 새로운 문화가 유입됨으로써 야기되는 문화적 혼란과 갈등에 있다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기존적인 것의 고답적인 수용이나 반발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우리자신들을 원초인으로 보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을 반영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한국화가 빠지기 쉬운 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피상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삶의 느낌과 감동을 표현하고자 한다." 라는 내용을 통해 당시 한국화 화단 분위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런 모교의 화풍 영향 탓도 있겠지만 그가 추구하는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은 분명 시대적 젊은 한국화 화가가 안고가야 할 소임인지도 모른다. ● 이정철의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얼굴은 단순히 소재적 의미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 속 얼굴은 모든 것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시대상까지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인간에게 있어 얼굴은 "영혼의 통로"라는 비유처럼 그의 인물화는 삶의 풍경들을 담고 있으며 사회적 메타포(metaphor)를 나타내려 한다. 얼굴은 "지구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표면(surface)"이라고 말했던 프랑스 현상학자 프랑시스 자크(Francis Jacque)의 지적처럼 얼굴은 다양한 사회적 텍스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은 인간 영혼의 최고의 그림이며, 얼굴은 몸의 영혼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또한 인간의 얼굴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해 준다. 비록 세월의 나이만큼 깊은 연륜과 인물이 주는 모든 분위기를 화면 속에 모두 담아내기에는 이번 첫 개인전이 심리적으로 큰 부담감을 줄는지도 모른다. 학창시절 "컵에 물이 가득 찬 듯 한 느낌"으로 작품에 임하고 전시회를 준비하라던 은사님의 말 한마디가 늘 마음속 짐이 되어 미루어 왔던 이번 그의 첫 개인전이 갖는 의미는 충분 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유는 현대 한국화의 시대적 과제와 이 시대 젊은 작가가 가져야 할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조형적 탐구가 포항이라는 넉넉지 못한 미술 인프라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과, 비교적 안정된 경제적 여건 속에서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 앞으로 작가 이정철은 현대회화가 가지는 형식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표현하기 보다는 시대의 정신과 함께 지금의 예술가적 순수한 마음이 지속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지나간 추억만을 먹고 살기보다는 아름다운 꿈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작가로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김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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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 - from Hollywood to Eden






울라 레이머展 / Ulla Reimer / photography 2012_0815 ▶ 2012_0828




울라 레이머_ETRE OU NE PAS PARAITRE -1_Ed. 6/6_analogical silver print_60.8×85.3cm_199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울라 레이머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15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Evolution' - from Hollywood to Eden ● 붓이 캔버스에 닿기 전, 종이 위로 음악만이 흐르고 렌즈의 "클릭"으로 순간을 포착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상상력, 강렬한 느낌, 그리고 자각에 영감을 얻은 무의식이 작가의 손을 이끌어 창의적인 그의 진정한 영혼을 드러낸다. 깊은 내면 속 자아인식에서 발생한 감정의 스냅샷은 어떠한 방해나 장애물 없이 그의 영감을 오롯이 드러내준다. 극도로 강렬한 멋진 그 순간-어느 가을 바람이 부는 절벽의 황혼 녘, 고조된 감정들이 하나가 되고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채는 바로 그 순간-그의 작품과 삶은 진화한다.
울라 레이머_Mickey Rourke_analogical silver print_60×60cm_1985
울라 레이머_ETRE OU NE PAS PARAITRE -2_Ed. 3/6_analogical silver print_60.8×85.3cm_1991
울라 레이머_ETRE OU NE PAS PARAITRE -2 bis_Ed. 3/6_analogical silver print_60.8×85.3cm_1991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프랑스 사진작가 울라 레이머의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자신의 '진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3가지 시리즈-「On-Off」,「ETRE OU NE PAS PARAITRE」,「HIGHWAY TO EDEN」-를 선보인다. 첫 번째 시리즈인「On-Off」는 16년 간 할리우드의 수 많은 셀러브리티의 사랑을 받는 작가로,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던 그의 초기작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끝으로 리포터로서의 활동은 더 이상 없었다. 초현실주의 사진으로 구성된「ETRE OU NE PAS PARAITRE」는 기존의 작업과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감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작가 자신의 내면을 표출시킨 첫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사진작가로서의 첫 발 또한 내딛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며 세계적으로 빛나기 시작한 2000년, 작가는 암 발병으로 인해 수술대에 오르고 휠체어에 앉게되는 작가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사진에 대한 열정과 집념으로 긴 투병생활을 이겨내고 2009년, 작품 활동을 재개한다. 이 때 시작된 시리즈가 바로「HIGHWAY TO EDEN」이다. Charles Baudelaire의 '이방인'이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는 작품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공간, 부활, 재개라는 또 한번의 변화를 보여준다.
울라 레이머_ETRE OU NE PAS PARAITRE -24_Ed. 6/6_analogical silver print_60.8×85.3cm_1991
울라 레이머_Highway to Eden -2_Ed. 2/8_C 프린트_80×120cm_2011
울라 레이머_Highway to Eden -3_Ed. 2/8_C 프린트_80×120cm_2011

작가는 이제 '사진'이라는 매체의 한계에서 스스로 벗어나 영상, 음악 등의 융합을 통해 또 다른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을 '진화(evolution)'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 내면의 감정, 꿈, 질문, 영적인 탐구를 공유하기 위한 초대장이다. 또한, 작품을 통해 작가 내면의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우리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상상력을 찾는 도약판으로써 우리와 함께 진화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 유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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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선展 / CHOIKYUNGSUN / 崔敬善 / painting 2012_0815 ▶ 2012_0903




최경선_풀자라는집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327b | 최경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15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1,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실존의 포에지(poesie) ● "예술이란 일종의 넓은 의미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도움으로 인간들은 서로 접촉을 시도하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남에게 알리고 타인의 낯선 경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한 예술가가 순전히 자기실현만을 위해서 창작할 자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상호간의 이해 없는 자기실현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 그러나 자기 자신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중에서)
최경선_오아시스_캔버스에 유채_97.2×145cm_2012
최경선_집에관한 조언_캔버스에 유채_130.3×193.7cm_2012

최경선의 풍경은 네거티브 필름 즉 음화(陰畵)에 색을 입힌 초기 컬러사진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이 출몰하듯이 낯선 세계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드러나 있지만 숨기고 싶은 곳, 알고 있지만 밝혀내고 싶지 않는 곳에 대한 메타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폐되고 숨기고 싶은 세계가 모두 비의적인 것도 아니며, 반드시 매혹적인 세계도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혼동과 혼란의 세계의 반영에 가까워 보인다. 최경선은 바로 이 어둡고, 황량한 세계의 비참을 목도한 이방인-타자로서의 예술가적 자기인식을 견지하고 있는 존재다. 예술가는 이런 시대적 혼돈과 역사의 참혹함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럼에도 그들은 생의 허위성에 맞서 어떻게 참다운 실존을 구가하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더불어 자기만의 내면의 목소리를 어떻게 빛나는 것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을 늦추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최경선의 실존적 미학의 관심 또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 예술가의 실존의 방법 중 가장 앙가주망(engagement)한 것이 이 세상에 하나의 아름다움을 보태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향한 노력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상을 향한 동경으로부터 태어난 예술이 결코 사회의 추함과 속세의 비참함을 피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술적인 형상이란 항상 두 모순되는 존재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예컨대 예술가는 활력에 넘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멸한 것을 끄집어내고, 무한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한한 것을 불러오고, 유토피아를 추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디스토피아를 선택해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 또한 부조리한 모순 속에 얽혀있으며, 이 모순은 예술 속에서 조화롭게 배치된다. 그리고 그 모순이 극단적일수록 예술은 마치 수수께끼같은 은폐된 세계에서 서서히 탈은폐(aletheia)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드러냄' 혹은 '노출'이 아닌, 숨겨져 있거나 은폐되어 있다가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탈은폐=알레테이아'이고, 이것이야말로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최경선_잊혀진낙원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12

타자적 풍경, 풍경의 타자 ● 삶의 풍경을 리얼하게 빚어낼 때 이미지는 오히려 단조롭고 판에 박은 듯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전형적인 풍경들은 오히려 보는 이의 부재를 요구하고, 관자로 하여금 풍경에 아무 것도 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경선의 풍경은 바라보기 좋은 안일한 풍경도 아니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심리적인 풍경도 아니고, 망막에 호소하는 리얼리스틱한 풍경도 아니다. 오히려 살풍경에 가까운 작가의 화면은 공감을 요구하거나 자기 망각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작가의 살풍경은 관조할만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개 관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은 지각하는 주체의 소멸을 야기하곤 하는데, 최경선의 풍경은 어떤 형태의 관조도 일으키지 않으며, 오히려 반성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이러한 최경선의 풍경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한다. 이 낯설음과 난처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최경선 작업의 모티프는 크게 집과 아이들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의 이런 모티프는 그의 10여년간의 타국생활(베이징)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역동적인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베이징에서는 철거하는 집들, 생업으로 헝클어진 살림살이, 고단한 노동자, 그 와중에서도 어느 곳에서건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베이징의 풍경은 더 이상 이국적인 동경의 대상이 아니며, 암울했던 유년시절의 기억과 오버랩되기에 이른다. 작가는 특히 걷잡을 수 없는 변화 속에 소외되고 배제되는 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방치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앞서 말했듯이, 집과 아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작가의 화면은 음화, 즉 네거티브사진을 연상시킨다. 색채는 거의 금욕적이라 할 만큼 신중하게 선택되는데, 이렇게 절제된 색채는 억압된 세계에 대한 상징으로, 또한 잃어버린 공간을 되찾고자하는 절박함의 상징으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세계가 왜 늘 단조로운 회색빛이어야 하는지, 왜 침울한 정서밖에는 안느껴지는지, 왜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늘 단편적으로만 드러나야 하는지, 무엇보다 색채에 대한 작가의 선입견과 편향성 또한 좀 더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다행스러운 것인지, 2012년부터 화면에 새로운 모티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바로 화지아오 나무가 중요한 상징으로 배치되면서 화면은 다소 활력을 되찾게 되었던 것! 화지아오는 산초나무 열매를 말하는데, 보통 '마라'라고 하는 이 향신료는 중국음식에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혀를 마비시켜 얼얼한 맛과 매운맛을 내는 데 사용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자극성이 강해 처음엔 오히려 적응을 못하지만, 이 맛에 길들여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라고 한다. 사실, 이것이 무슨 나무인지 이해하기 전, 그것은 그저 살풍경과 꽃나무의 결합인지라 어떤 긍정의 메시지를 주려는 것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와 가지의 기묘한 형태에 끌려 이 도상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 나무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현대의 인간 조건을 설명하기에 합당하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최경선_그녀의 낙원_캔버스에 유채_112.2×162.2cm_2012

빈집 혹은 언홈리 ● 먼저 최경선이 그리는 집은 거의 빈집이다. 집은 콘크리트와 철골구조를 가진 획일적이고 삭막하며 차가운 현대적인 빌딩에 가깝다. 전혀 사람냄새와 온기를 잃은 빈집은 얼마나 낯설고 생경한가? 사람들이 더 이상 살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더 이상 쉬고 싶은 공간이 아닐 때,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곳은 폐허 혹은 폐가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곳으로 변한다. 그래서 그곳은 일종의 수용소 같은, 잠시 머물 수는 있지만, 결코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비참한 곳으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은 거의 허울뿐인 공간이고, 오히려 사람들은 그 공간을 피해 도망 나온 사람들처럼 보인다. 집을 배경으로 배치된 아이와 어른들은 마치 유령처럼 떠도는, 갈 곳 없는 영적 부랑아들이 되어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최경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집은 무엇인가? 그곳은 인간의 영혼이 쉬는 곳, 타자로 대표되는 아이들이 행복한 곳이다. 그러기에 집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회귀해야할 곳, 영원한 곳, 자궁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집은 비어있고, 폐허가 되었다. 폐허가 된 집은, 집을 잃어버린 자들의 삶 즉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에 대한 메타포이며, 인간 영혼의 피폐함의 상징이다. 그러니 빈집을 보며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했던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얼마간 얻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실존주의적으로 예술가는 이중으로 소외된 자들이다. 기성의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대표되는 사회로부터, 즉 지배적 가치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안일한 삶으로부터 그렇다는 말이다. 즉 작가는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소외시키는 자, 경계에 선 자들이라는 말이다. ● 그런 빈집 앞에서 아이들이 논다. 아이들은 열심히 놀이에 집중되어 있듯이 보이지만, 조금은 위태로워 보인다. 실상, 위태로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일 것이다. 더 섬세하게 말한다면, 작가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풍경 속 아이들이 자신들의 열악하고 위험한 생존 조건을 작가에게 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메를로-퐁티가 주목한 "그러므로 풍경화는 나를 통해서 스스로를 사유하며, 나는 그것의 의식으로 성립된다"는 세잔느의 말을 환기시킨다. 세잔느는 "풍경이 내 속에 들어와서 자기 생각을 한다"고 말하곤 했다. 어쩌면 예술가는 더 아픈 존재들한테 자기 몸을 비워주는 영매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경선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선과 응시가 교차되는, 사유하는 풍경화가 된다. 그런 까닭에 관자로 하여금 여전히 낯설고 생경하고 불안한 감정을 주는 것이며, 바로 그 그런 이유 때문에 관자들은 생생히 깨어서 풍경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최경선 회화가 지니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동시에 그 생경하고 불편한 감정은 또 예술가의 무력감을 그대로 전해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실존은 아이들의 생존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아이의 생존이 위협받는 땅에서 예술은, 도대체 그림은 "벽에 붙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이다. 최경선 작품을 보는 내내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러한 무력감이 온전히 관자에게 전달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를 통해 표현되고, '집 같은(homely)'은 '집 같지 않은(unhomely)'에 의해 표현된다면, 작가의 의도 아닌 의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인데, 그럼에도 디스토피아 즉 잃어버린 낙원에서 '잃어버린', '돌아가야 할' 근원적인 공간에 대한 추구는 미흡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낯설음의 공감을 넘어선,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에 대한 열망과 비전을 표현할 것인가?
최경선_검은길_캔버스에 유채_112.1×162.3cm_2012

개념(사유) 혹은 감각 ● 잃어버린 낙원은 본향(本鄕)이다. 작가와의 서면인터뷰 중 작가로부터 '본향'(사실 이 단어는 내게는 약간 금기시된 단어이기 때문에 발설하기엔 좀 난감하게 생각해오던 차였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작가가 어떤 태도로 작업에 임하는지 가늠이 되면서, 순간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이 A. 타르코프스키가 『희생』과 『노스텔지어』에서 말하는 본향의 이미지였다. 최경선은 누구보다 선험적으로 그러한 본향에 대한 이미지를 자주 상상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의 작품에선 그러한 이미지는 배제되고 있었다. 오히려 이전의 『물주기 Watering』(2007년)와 같은 작품은 실존적 의지를 가진 존재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높은 건물에서 아주 작게 축소된 사람이 물을 뿌리는 장면은, 마치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어』에서 주인공 코르차코프가 온천의 끝에서 끝으로 작은 촛불 하나를 켜서 그것이 꺼지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옮기는 과정을 반복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최경선의 근작은 자신의 의지를 얼마간 배제하고, 오히려 현실의 상황이 그대로 표현된 다큐멘터리적 요소(다큐도 이미 객관적인 매체가 아니다. 이미 카메라의 각도에 작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를 몽타주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때론 예술가의 의지와 소명의식에 의한 개념적 작품보다 외부현실을 그대로 재구성하는 일이 훨씬 더 강력한 이미지를 구현할 수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경선은 예전 작품을 통해 개념을 생각해가며 이해가 좀 명료해 보이는 이미지를 선호했다면, -사유(개념)를 통해 표현을 추구하는 화가는 무엇보다도 대상이 자연 속에서 드러날 때의 수수께끼, 즉 우리가 매순간 볼 때마다 새로워지는 수수께끼를 놓치게 된다- 현재는 이미지 자체가 말을 하도록 하는 방식, 그러니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그 자체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전에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방법, 즉 화면을 지우는 기법이 사용된다. 일종의 돌발흔적 즉 '디아그람(diagramme)'이 그것이다. '디아그람'이라는 전략은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도입되는데, 이는 추상과 구상을 동시에 벗어나려는 의지, 물질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더불어 이 기법은 어떤 갑작스러운 에너지의 출몰, 이로써 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공간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사실, 이 기법을 매우 훌륭하게 구사한 프란시스 베이컨의 예술세계를 풀어낸 G. 들뢰즈의 책 『감각의 논리』에서는 디아그람에 대한 숙고할만한 논지가 실려 있다. 베이컨이 사용하는 디아그람이라는 개념은 "감각을 그린다"는 베이컨의 발언에서 유래한 것으로 질서와 리듬의 맹아를 내포한 혼돈, 말하자면 수많은 형상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어떤 회화적 사실이 도래하게 만들어주는 돌발흔적을 가리킨다. 디아그람은 화폭에 혼돈과 재난을 도입하는데, 이것들에 의해 빈 화폭을 미리 점령한 기존의 판에 박힌 이미지들은 무장해제되고, 새 이미지들이 생성될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디아그람은 혼돈이며 파국이나 동시에 새로운 질서 혹은 리듬의 싹이기도 하다. 아마 최경선의 작품이 가진 힘은, 바로 기존의 이미지를 무효화하고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최경선_길이사라지려고할때_캔버스에 유채_110.3×140cm_2011

본향 혹은 포에지 ● 최경선은 삶에 애정을 갖고, 삶을 인식하고,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개선하는 일에 작가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런 고민과 함께 작가는 변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 인간의 생존을 겁박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소외된 공간과 인간을 다룬다. 그리고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empathy)에 근간하지만, 그것은 연약하거나 감상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분노할 줄 아는 비판적 힘과 진실의 속살을 드러내려는 강인한 태도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근작이 '침울하다'거나 '쓸쓸하다'의 감정과 같이 단선적으로 읽혀지는 것은, 바로 패러독스와 위트, 유머와 같은 수사법(rhetoric)의 도움이 없어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예술도 사람도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기만 하다면, 관객들은 부담스러워하고 거부반응을 보이기까지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지하고 심각한 거대담론에 근간한 테마일수록 에둘러 미시 담론으로 가는 길을 선택해야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마치 휘어서 돌아가는 원반 같은 것이다. 은유와 환유와 같은 비유법과 위트와 역설 같은 수사는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 즉 탈은폐(aletheia: 진리)의 방식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최경선 역시 바로 이 지점에서 근작이 가진 딜레마에 대한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모색을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사실,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미술사의 모든 대가들이 고민하고 열망해 오던 것이다. 예술에 답이 없다는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예술의 경지가 시적 경지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단연코 타르코프스키적 포에지(詩: poesie)를 들고 싶다. 포에지란 하나의 세계관이며 현실과 맺는 관계의 하나의 특수한 형식이다. 이렇게 볼 때 포에지란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동반되는 하나의 철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야 비로소 예술은 사실의 반영이 아닌 진실의 창조가 되는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작가에게 이러한 타르코프스키적인 시적 연결을 당부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에게 내 스스로 모토로 삼고 있는 좀 긴 아포리즘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해짐을 느낀다. "위대한 예술가가 긴 인생의 최후까지 창조적인 상태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한 것 같다. 그는 한편으로 삶에 대한 비정상적인 예민한 의식을 유지해야 하며, 결코 흡족하지 않아야 하며, 삶에 만족하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야 하고, 그것을 가질 수 없을 때는 절망해야 한다. 불가사의한 무거운 짐이 밤낮으로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는 위로 받지 못할 벌거벗은 진실들로 뒤흔들려야만 한다. 이 신성한 불만, 이 불균형, 이 내적 긴장 상태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많은 이류시인들은 젊은 시절에만 그것을 가진다. 워즈워스는 절망할 수 있는 용기를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그의 시적 힘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흔히 역동적 긴장들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 사람이 원숙함에 다다르기 전에 그를 파괴시켜 버린다."(험프리 트레벨얀 『괴테에 관한 글』 중에서) ■ 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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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와 환상






2012_0804 ▶ 2012_0908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주현_구인성_김도훈_난다_박종필_이국현 이대석_이자란_조샘_천근성_최잔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구로아트밸리 갤러리 GUROARTSVALLEY GALLERY 서울 구로구 의사당길 12 Tel. +82.2.2029.1700, 1742 www.guroartsvalley.or.kr




예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대상 혹은 외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를 중시하는 것을, 다른 하나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을 중시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 세상을 모방하고자 하는 예술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예술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실재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식의 대상이면서 단순한 외경이나 착각, 환상, 허구 같은 것과는 대비되어 사물의 진실된 자세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반영하고 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환상은 인간의 잠재의식에 바탕을 둔 표현이며, 이를 개입시켜 외부사실을 일그러뜨리거나 경험상의 사실에서 자유로운 유희적 정신작용의 결과이다. 즉 환상은 외부 현실보다는 인간의 내면세계와 창조적인 상상력을 중시한다. 이와 같이 실재와 환상은 명확한 대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것은 아니며 어느 면에서 상통하기도 한다. ● 환상은 실재가 있음으로 존재 한다. 실재가 만들어낸 하나의 도피수단이 될 수 있으며 위안거리가 될 수 있다. 환상이라는 이미지 뒤에 가려진 현실의 내부에 현재·실재의 현상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 환상은 우리들의 자아이자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꿈이나 희망이 될 수 있고 병든 자아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실재란 합의된 세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한 실재이지만, 중세에는 유일한 실재도 중요한 실재도 아니었다. 중세에 '합의된' 진정한 실재는 감각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였기에, 가시적 세계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는 현대 예술이 처한 상황과 닮았다. 카메라의 등장이후 현대 예술에서도 재현은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외부 현실을 아무리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카메라처럼 대상을 복제해 내는 것은 아니다. 묘사된 대상은 결국 예술가 자신의 미적 가치 판단에 따라서, 즉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재구성 되는 것이다. 반면에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새로운 세계를 강조하는 경우에도 그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 혹은 인간의 정신적 실재와 무관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이번 전시는 실재와 환상을 양분화 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실재와 함께 내면적 실재를, 그리고 의식의 세계와 함께 무의식의 세계를 다룸으로써 작가의 작품을 통해 실재와 환상이 합의된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강주현_Combined sense Project-The swish of a hand_PVC, 합성수지, 디지털 프린트_130×130cm_2011

강주현 ● 인간 기억의 유한성을 배경으로 한 기록에 대한 욕망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진의 활용을 촉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일련의 사진작업들을 통해 사진과 조각, 그리고 드로잉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조각과 사진드로잉의 형식적 가능성을 실험하며,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의 재현적인 사진을 입체로 구현해서 사진조각을 실현하고, 사진을 중첩된 선들의 집합으로 재구성해 사진드로잉을 실현한다. 그리고 시각의 영역으로만 치부되어지는 사진을 감각의 영역, 즉 이미지의 새로운 재조합과 재구성을 통해 사진의 제한된 형식에서 여러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드로잉과 같은 형식으로 이미지의 확장을 이끌어 보려한다. 단순히 느껴지는 사진이 아닌 마치 사진 속 대상이 실제화 되어 그들의 감각을 우리에게 체감하게 하듯이 실재와 가상과의 미묘한 감각적 확장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려 한다.
최잔_re. 행복한눈물_홍보용 스티커, 아크릴 보드_96.5×96.5cm_2009

최잔 ● 나의 작업은 기존의 작가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직접 묘사하면서 예술 작품들이 무거워졌다고 느낀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소비사회를 좀 더 가볍고 신선하게 표현하고자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여 상징적 기호에 대한 구매 충동을 유발시키는 역할을 하는 광고에 주목하였다. 특히 우리가 무심코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값싼 스티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티커는 흔히 볼 수 있으면서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지나치며, 간혹 필요 이상으로 생산되어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대량생산과 복제성, 그리고 사회성의 이미지를 가진 흔하고 값싼 스티커로 사람들이 동경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미지로 명화 내지 대중적인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서 현대소비사회의 단면을 유쾌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
김도훈_face I_스테인리스 스틸, 철수세미_145×114×10cm_2011

김도훈 ● 김도훈 작가의 인간을 포함한 동물상들은 일정한 크기의 금속판으로 구성된 고도의 인공성이 두드러지지만, 구조적인 면에서는 군복을 입은 군인처럼 늘 한계조건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종들에 보편적인 의태(擬態, 서로 다른 생물 종끼리 유사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의 생태학이 있다. 실내에서 조명을 받으면 조각상들은 주변 공간으로 확장되는 시각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효과는 개체가 생성, 또는 소멸하는 단계의 원소적인 차원을 가시화한다. 개체는 원소로 해체되어 자신이 비롯되었던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가 만든 것은 사슴, 도마뱀, 북극곰같이 멸종 위기의 생물로서, 우주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경계 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종들이다. 멸종 위기 종에 자화상을 끼워 넣은 것은 불안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자의식 또한 반영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자화상은 순한 초식동물이나 녹아내려 비좁아진 얼음 조각 위에서 웅크리고 있는 곰에 비해 구체적인 표정이 읽힌다. 자화상은 쇠 수세미를 이용해 머리카락을 연출하여,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는 인간만의 독자적 특징을 과장되게 표현했으며, 정면을 주시할 수 있는 인간 특유의 공격적 시선 또한 빼놓지 않았다.
난다_0508엄마의 제단_잉크젯 프린트_150×120cm_2012

난다 ● 나는 '기념사진'이라는 일상화된 사진적인 카테고리를 통해 구현되는 현대인의 기록과 자기 표현욕구, 또 그 안에 용해된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허상의 현실에 주목한다. 어린이날과 결혼식,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삼겹살 데이와 같은 각종 변종 기념일까지 현대인들이 만든 기념일들이 사실은 그들의 심층에 자리한 '욕망의 병리적 실체'를 반영한 문화인 것이다. 나는 동시대에 일상화된 '기념사진'의 연극적 요소를 극대화시키는 실행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기억의 진실과 현대인의 전이된 욕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박종필_cake16-1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09

박종필 ● 나는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진짜와 가짜에 대한 아이러니를 작품에 담아왔으며, 작업을 통해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나의 작업에서 대상은 종종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며, 약속된 기호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한 모호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이 사회의 아이러니를 나만의 방식으로 보여주며, 이로써 관객은 작품을 통해 '잊고 있던 진실'을 보게 된다. "모든 존재는 미와 추의 경계에 서 있으며, 또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아이러니한 세상의 진실이다.
이국현_On the Sofa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0

이국현 ● 나는 지식, 즉 경험이 하나의 조각이 되고 얇은 필름과 같이 되어버린 시대의 표상을 '콜라주적 시대', '레이어적 시대'라 부르기로 한다. 나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콜라주 기법과 레이어 효과는 이런 시대적 표상을 반영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며, 앞으로 더욱 연구하고 발전시키려고 하는 주요한 형식이다. 이는 동시대의 이슈들, 이를테면 현대인들의 소통의 부재와 소외, 강박증, 페티시, 정신병적인 행태, 전쟁과 폭력, 자본과 성에 관련한 문제의 지점들을 작업에 어떠한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의 일환이다. 그리고 각각의 도상들이 캔버스 위에서 충돌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의미형성과 함께 오일 물감이라는 질료가 가지는 특질들(마티에르, 레이어, 물감이 가지는 색감의 재현 등)이 어우러져 보다 설득력 있는 작품(동시대적 이슈와 문제점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대석_gram_테이프, 우레탄_120×150×30cm_2012

이대석 ● 나는 실재 오브제를 캐스팅하여 같은 사물의 형태를 재현했지만 주재료인 테이프의 특성을 살려 쇳덩어리 공구들이 주던 무게감과 질감, 그리고 색채감을 반대로 해석하여 무거움을 가볍게 표현하였고 어두운 색감들을 하얗게 표현하면서 단지 형태만 그대로 유지한 채 사물을 재해석해서 표현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사물들의 형태에만 주목하지 않고 각 사물들을 연결하고 고정해주는 연결점과 고리부분에 주목하며, 이들 부분에는 실재 오브제를 그대로 표현함으로서 다른 곳에 평소 일반적인 사물에서 주목하지 않는 부분들을 부각하여 인지하도록 표현하였다. 더 나아가 기존 조각 작품들은 대부분 무겁고 단단하고 튼튼하게만 표현되는 것에서 벗어나 오히려 가볍고, 강한 색감 없이 밋밋하게 표현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이자란_반 고호와 함께_종이에 수채_80×100cm_2010

이자란 ● 나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번식)를 식물에 이입하여 표현하였다. 식물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가장 솔직한 대상이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거나 새싹이 돋으면 우리들은 예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식물들에게는 마치 전쟁과 같은 처절한 순간일 것이다. 식물들은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아 번식을 위해 쓰고, 다음해를 위해 잎을 떨구고 준비한다. 이러한 과정을 과연 예쁘다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식물들에게 가장 큰 욕구는 번식하는 일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림 끝에 결실을 맺고 또 다른 생명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향기롭고 화려하게 치장을 해야 된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고 가꾼다. 이처럼 나는 식물과 인간의 겉모습은 내면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냈기 때문에 자연을 쉽게 접하고 보다 많이 관찰하였다. 그래서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 싶다.
조 샘_lamb_잉크젯 프린트_110×110cm_2012

조샘 ● 사람들은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구석구석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보지 못하지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인식이나 의식에 따라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시각적 인식을 통하여 재발견된 현장 사진을 일반 대중들에게 창의적 시각의식을 통해 제시하고 대화의 또 다른 언어로 인간의 감정적 의식, 즉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의식이 변화될 수 있는 문화의 소통 도구로 보여주고자 한다.
천근성_Pixelbody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0

천근성 ● 천근성 작가의 작업은 남과 여,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진과 조각이라는 대립구조와 서로 이질적인 아이콘을 하나의 작품 안에 보여줌으로서 대립구조의 해체와 동시에 상호 공존의 형태를 보여준다. 개념과 가치란 다 사람이 세운 것이며 가치판단이란 전부 비교함으로서 생긴다. 이는 수시로 변하는 것으로 가치판단 역시 부단히 변한다. 유와 무, 삶과 죽음, 장과 단, 흑과 백, 전과 후 등 모든 것을 태연히 대처하고 범인적인 우려를 버려야 한다.
구인성_the monotonous scenery_카드보드_85×115cm_2012

구인성 ● 판지cardboard는 그 자체로 시대적 산물이다. 시대를 특징짓는 갖가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재생을 거듭해서 인위적이며 때론 자연스레 질서 속에 존재하는 마치 삶의 주변인으로서 살아 숨 쉬는 소산물인 것이다. 작가는 그 자체를 '시대적 유물'이라 말하며, 골판지에 곧게 그어 내려진 틈 사이로 또 다른 시대적 산물의 흔적을 고대한다. ■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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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going on?




임하영展 / LIMHAYOUNG / 林夏瑩 / painting 2012_0816 ▶ 2012_0830 / 첫째주 월요일 휴관



임하영_What the hell is going on?_캔버스에 유채_91×233.6cm_2011


초대일시 / 2012_0818_토요일_05:00pm

2012 갤러리 골목 기획공모 선정작가展

관람시간 / 11:00am~10:00pm / 첫째주 월요일 휴관

갤러리 골목 Gallery GOLMOK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34-23번지 1층 5호 Tel. +82.2.792.2960 www.gallery-golmok.com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헷갈리는 것들이 있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무엇이 애도할만한 것인지 혹은 해야만 하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안녕'한 삶인지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고민이 나의 작업에 근간이 된다.
임하영_So you think you can dance?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1
임하영_My dear little devil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1

적어도 미디어에서 전해지는 세상의 모습은 다양한 층위에서 긴장국면이 조성된다. 어느 곳에서는 테러행위가 행해지고, 세계 중심지라는 곳에서는 99%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마른 하늘에 포탄이 떨어지고, 잠수함이 침몰하기도 한다. 미디어를 통한 이야기들이 사실이든 허구든 어디선가 생경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자신들의 앞마당만 평온하다면 그것이 안녕하다고 믿는 것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아닐까싶다. 나의 작업은 도대체 어떻게 당신들은 그리고 우리들은 그렇게도 무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이자 사람들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임하영_Laugh!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1
임하영_Ready,_캔버스에 유채_162.2×97cm_2011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생경한 세상의 모습이 진짜인지 정말 내가 안녕하다고 믿는 나의 실재가 허구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이해관계로 뒤섞인 사회에 속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세상의 역설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계속되는 역설이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삶이 연극이라면 그저 연극이겠거니 하고 모두를 포용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세상은 연극이 아닌 실재라서 모두를 이해하고 감당해내기가 벅차다. 그저 우매한 이들의 하나인 척 정해진 매뉴얼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 안녕한 삶일까.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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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8.15 20:4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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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진화_evolution of Urban






이병찬展 / LEEBYUNGCHAN / 李秉燦 / installation 2012_0816 ▶ 2012_0909 / 수요일 휴관




이병찬_urban-creature.1_비닐, 에어 모터_가변설치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026c | 이병찬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수요일 휴관

씨드 갤러리 SEED GALLERY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교동 9번지 아주디자인타워 1층 Tel. +82.31.247.3317 blog.daum.net/gallerymine




문명은 진화하는 것인가? 변모할 뿐인가? 인류의 삶을 변화 시킨 몇 가지 사건이 있다. 철기문화, 전기, 컴퓨터가 그것일 것이다.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식량의 생산은 기하 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하고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 부의 창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전기의 발명은 인간의 활동시간을 낮 시간에서 밤낮으로 확장 시켰으며 컴퓨터의 보급은 SNS로 발전하면서 정보 공유의 영역을 확대하고 국경을 지워 버렸다. 시간경영이라는 단어까지 출현한 지금, 우리는 진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단지 변화하는 격랑 속에 묻혀있는 것인가?
이병찬_urban-creature.2_비닐, 에어 모터_가변설치_2012

작가 이병찬은 일회용 비닐봉투에서 문명의 진화와 변화의 모습을 찾는다. 당대 문명의 모습은 도시의 모습이면서, 도시는 인간의 삶이 가장 적나라하게 반영되는 삶의 현장이다. 엉뚱하지만 수많은 도시의 모습 가운데 생활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비닐봉투는 우리네 삶의 양태를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비닐봉투는 이제 필수품이 되었고 너무나 흔한 물건이 되어서 의미를 부여할 꺼리조차 없다. 그 비닐봉투에 쾌적한 도시환경을 위해 음식찌꺼기를 담아 버리는 중요한(?) 역할이 부여됐다. 음식찌꺼기가 담긴 비닐봉투가 도시의 담벼락에 넘쳐난다. 거리의 고양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봉지 속에 버려진 치킨과 족발을 얻기 위해 비닐봉투를 발기발기 찢어 놓는다. 닭둘기까지 가세한다. 사람의 접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잠시 눈치를 볼 뿐... 인간이 파괴해 버린 자연은 먹이 사슬이 무너지고, 언제부터인가 사람 주변에서 숨 죽여가며 먹거리를 찾아 서성이던 동물들은 경계심을 내던지고 사람들의 생활 주변으로 정착지를 옮겨왔다. 문명의 진화와 더불어 변화하는 생태계의 끄트머리를 헤매고 있던 고양이는 정글이 아닌 도시를 선택함으로서 문명 덕택에 쉽사리 먹이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모순적인 생태의 모습으로 상위 먹이 사슬인 사람이 버린 먹이에서 생존의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본능을 스스로 버린 것인지,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양이의 정체성이 변질 된 것이다. 새로운 생태계, 새로운 종(種)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병찬_urban-creatures-zoo 1_비닐, 에어 모터_가변설치_2012
이병찬_urban-creature parking_비닐, 에어 모터_가변설치_2012

작가 이병찬은 일회용 비닐봉투와 일회용 라이터를 사용해서 도시의 생태계를 조망한다. 문명의 진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와 종(種)의 변이, 변종(變種)의 현주소를. 일회용 비닐 동물은 에어모터로 생명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하며, 모터가 멈추면 한줌의 비닐 뭉치에 불과하다. 독자적으로 존재 할 수 없어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아야 존재감을 알릴 수 있으면서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나약하기만 하다. 진화하는 문명의 혜택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를 발현할 수 없는 객체에 불과한 '나' 의 모습은 아닐런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나'가 아닌 도시를 살아가는 도시 구성 인자에 불과한 새로운 '종'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이병찬_urban-creature park_비닐, 에어 모터_가변설치_2012

문명은 새로운 권력을 만들었고, 권력은 환경 변화에 따라 변모해 왔으며 형태 또한 정치 일방면에서 경제와의 공존으로 변모되었다. 정경유착으로 삶의 지향점이 왜곡되고 지형이 바뀌고 있다. 새로운 권력-재벌, 언론, 금융, 통신, 유통-은 새로운 마름을 키우고, 그 마름들은 생산성과 경쟁력을 외치며 새로운 하호를-일용계약직, 텔레마케터, 댓글 알바, 편의점 알바, 대리운전, 목숨을 담보하고 질주하는 오토바이 퀵서비스 등등-주문하고 있다. 새로운 종을 원하고 있다. 도시의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다. 아니 진화하고 있다. 음식 쓰레기 비닐 봉투를 헤집는 거리의 고양이 모습에서「문명-도시의 진화」의 현 주소를 찾으려는 모색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 ■ 씨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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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oat in a storm 폭풍 속의 배






윤영화展 / YOONYOUNGHWA / 尹永華 / photography 2008_0404 ▶ 2008_0427




윤영화_A Boat_배_사진에 디아섹_07a1_2007



초대일시_2008_0404_금요일_06:00pm

갤러리 세줄_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경계 / The Boundaries ● 윤영화는 대상의 외형을 담아내는 재현의 도구인 카메라를 사용하여 형상 너머의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에서 거친 붓질과 같은 회화적 표현은 실상 왜곡된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으로, 윤영화의 카메라에 포착된 사물의 모습은 원형을 알 수 없는, 빛의 붓질로 생성된 색면으로 기록된다. 기존의 '포토 페인팅 Photo-painting' 연작에서부터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가 사용한 방식은 이런 회화적 표현과 시각적 효과를 배가시키는 철망이었다.
윤영화_An Isle_섬_사진에 디아섹_07a1_2007

흔들리는 카메라는 고정된 시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존재의 빛을 담아낸다. 카메라는 자율적인 기관으로 기능하며 우리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추상한다. 기존의 '포토 페인팅' 연작들이 흔들리는 카메라에 포착된 다채로운 색면들로 채워진 작업이었다면, 2007년의 신작 「배」, 「섬」은 과도한 노출로 색감과 형태가 왜곡되어 단출한 구성을 가진 평면적인 외양을 띤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은 빛의 운동감으로 나타나던 존재의 역동적인 표현과는 다른, 무심한 듯 던져진 이방인과 같은 태도다. 대상으로부터 감상자를 분리시키는 또 다른 도구인 철망은 존재의 의미와 이미지의 경계에 천착하는 작가의 질문, 그 자체로 보인다. 물질의 눈을 통해 대상에 투명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는 오히려 의도된 기법으로 대상의 외형을 지워버리거나 왜곡시키며, 그 위에 얹힌 철망은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에 선 인간을 도리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두어 버린다.
윤영화_Grid-A Boat_그리드-배_wire net on photograph_2007

작가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는 가두어져 있는 몸뚱이를 통해 형이상학적 반항을 꾀한다. 그가 경계에 대한 질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이 곳과 저 곳의 좀 더 단련된 내밀한 만남, 궁극적 합일이다. ● 철망에 의해 가로막힌 경계를 방문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체험은 아니다. 생경한 이미지와 차갑고 낯선 철망, 그 곳에서 바라보게 되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철망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제 경계는 명상을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된다. 빛으로 표현하는 그의 회화는 우리에게 존재에 대한 질문과 명상의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 갤러리 세줄
윤영화_Grid-Storm_그리드-폭풍우_사진에 와이어넷_07m1_2007
윤영화_Grid-Storm_그리드-폭풍우_사진에 와이어넷_07m3_2007



'그리드(Grid)'는 물질을 정신으로, 순간을 영원으로 여과시키는 통로로서,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에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내면으로의 만남, 절대자와의 조우(遭遇), 그리고 관계의 우주적 회복인 동시에 모순된 것의 궁극적 합일의 장소이다. 나의 관심은 단지, 카메라가 대상의 객관적 이미지를 가감 없이 재현하는 사진의 차가운 속성과, 자아의 뜨거운 표현으로서의 회화가 각자 100퍼센트 순수한 그 스스로의 모습을 유지하고서도 서로가 얼마나 동등하게, 얼마나 투명하게 만날 수 있느냐에 있다. ■ 윤영화

윤영화_Grid-Storm_그리드-폭풍우_사진에 와이어넷_07s4_2007
윤영화_Grid-Storm_그리드-폭풍우_사진에 와이어넷_07s5_2007

피사체와 카메라는 대상과 매체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매체적 속성이 대상(피사체)에 더 많은 언어를 덮씌울 수 있다는 때문에 카메라는 단순 매체가 아니라 하나의 어법으로 보인다. 윤영화의 카메라는 묘사의 기능이나 기록으로서, 기능으로서 포착된 대상 이해를 넘어서 중얼거림, 비껴남, 흔들림 따위의 어눌함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생성하고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매체가 만든 이미지에 익숙한 우리의 시대에 그는 그것들 이용하면서 건조한 시선으로 잡힌 피사체가 아니라 피사체 너머에 있는 것들을 이미지로 사유하려 한다. 때로 그의 작품을 보면서 질 들뢰즈를 떠올리는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미지로 사고하기라는 영역을 보여준다. ■ 강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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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2012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展 2012_0817 ▶ 2012_0928 / 월,공휴일 휴관







개막식 / 2012_0816_목요일_06:00pm

개막공연 / 하헌진 (싱어송라이터)

참여작가 공성훈_김기철_김상돈_노충현_오인환 육태진_임선이_정주하_최수앙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아르코미술관

관람시간 / 11:00am~08:00pm / 매표마감_07:30pm / 월,공휴일 휴관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0번지 제 1, 2 전시실 Tel. +82.2.760.4608 www.arkoartcenter.or.kr www.facebook.com/ArkoArtCenter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주제를 발굴, 연구하고 전시를 개최하여 시대의 흐름을 조망하고 시대정신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올해 아르코미술관은 잠재되어있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한국사회의 '불안'에 주목했다. 불안은 나쁜 일 혹은 공포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두려운 예감으로 인한 부정적 상태를 의미한다. 불안은 공포에 비해 지속시간이 길고 대상이 불명확하다. 프로이드는 불안의 원인중 하나로 '외상(Trauma)의 순간'을 언급하는데, 전후 급격한 사회변화부터 IMF 시대의 급격한 경제변화라는 트라우마를 겪은 한국사회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오늘 우리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안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집적된 다양한 이질감과 불안감들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승자가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조로 급격하게 재편된 한국 사회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이혼율, 사교육비, 저임금 및 비정규직 노동자비율, 근로시간, 노동 유연성, 산재사망자수 등 달갑지 않은 지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매우 구체적이고 심각한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징후들은 모두 우리가 안고 있는 불안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징후들이 야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확신이 부재한 상태로 만성적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과측정 위주로 개편된 사회시스템에서 대부분의 개인들은 불안의 원인과 해결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고 지속적으로 쏟아지는 일상의 과업 수행에 급급한 상태로 살아갈 뿐이다. 결국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불안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2012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의 전시제목인 『플레이그라운드』는 상이한 신념과 입장이 어색하고 불안하게 공존하는 동시대 한국사회의 모습을 관찰한다. '플레이그라운드'라는 전시 제목은 불안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이번 전시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어린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나름대로 엄격한 위계와 분명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주류의 압력과 비주류의 소외, 심지어 폭력과 범죄의 가능성들이 존재하는 곳이 놀이터다. 『플레이그라운드』는 표면적으로는 평범함과 보편성, 합목적성의 외관을 취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은밀한 불편함과 혼란스러운 인식으로 인해 불안해진 오늘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전시에 참여하는 9명의 작가들의 작품은 그러한 면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그들의 작품은 결코 직설적으로 불안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에 포착된 대상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작품들 속에서 대상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그 표면 속에 쉽게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대상이 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레이그라운드』는 관습적이고 제도화된 시각이 주는 안정성을 탈피하고 현실에 대한 의문과 의지를 품은 예술가들의 사유와 성찰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시도를 통해 불편함을 은폐하는 수사(修辭)의 과잉으로 점철된 2012년 한국사회의 불안한 풍경을 총체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공성훈_낚시_캔버스에 유채_130.3×193.9cm_2007

공성훈의 회화는 동시대 회화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과장된 색감과 불안정한 구도, 그리고 다소 괴이한 형상들로 이루어져있다. 그의 시선은 주로 도심 주변부의 어색한 문명의 흔적을 주로 향해왔고, 최근에는 자연의 역동적 모습들을 보다 과장된 스타일로 재현하고 있다. 이러한 공성훈의 풍경화들은 소외나 고독, 히스테리 등을 안고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불편함, 혹은 불쾌함에서 기인하는 불안'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불편한 대상들과 타협하며 살아가야하는 동시대 한국인들의 심리에 주목한다. 체념의 환경이 부가하는 불편함과 불쾌함의 반복은 결국 실체 없는 불안을 양산하는데, 공성훈은 그러한 불안을 특유의 냉소주의적 화법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불안함은 단순히 현재를 둘러싼 환경의 차원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로부터 짙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자아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는 작품 촛불에서 보이는 그로테스크한 형태의 바위나 과장된 색감의 바다와 같은 소재들을 통해 그는 자연의 안정감이 아니라 자연의 불안함과 괴이함을 강조한다. 그러한 풍경은 결국 자연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관조하는 시선의 불안정한 모습을 인식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김기철_화양 華樣_Illuminant Scene, collected sound, sound device_가변크기_2012

김기철은 소리를 조각의 재료로 활용하는 '소리 조각'이라는 작업적 방향을 일관되게 유지해오고 있다. 이것은 김기철이 통상적인 사운드 아티스트와 구별되는 부분이다. 최근 그의 작품은 소리라는 비물질 재료가 갖는 상상력의 한계를 확장시켜 공간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기철은 관객이 소리의 숲을 걷는 체험을 유도해낸다. 빗소리나 바람소리와 같은 안정감 넘치는 자연의 소리가 전체 공간의 배경으로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 관객이 들어가게 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들이 뒤섞이게 된다. 그 소리들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거북하고 불편한 소리들이다. 지극히 평범한 소리가 불안과 공포, 혹은 불편함을 촉발시키는 매개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소리를 시각적으로 확인하지 않고 청각만으로 접속하는 행위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김기철은 일상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많은 소리들이 듣는 사람의 심적 상태에 따라 원래의 맥락과 전혀 다른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삶의 불안함을 표현하고 있다.
김상돈_4분간 숨을 참아라 2008_단채널 비디오_00:04:00_2008

김상돈의 비디오작품 『4분간 숨을 참아라』(2008)는 한국에 존재하는 미군기지 주변 유흥지구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동두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카메라는 1950년대 이후 그 지역에서 사망한 다수의 무연고자들이 묻혀 있는 공동묘지 등을 향한다. 정치적 변천사와 지역 변화의 흐름을 따라 흘러들어왔다 사라진 수많은 무연고 망자들의 휴식처는 국제자유무역도시 개발조성의 영향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한다. 김상돈의 작품이 언급하는 불안함은 이렇게 자극적인 소재가 지극히 평화롭게 존재하고 있는 우리 일상의 표면 뒤에 은닉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타자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현대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두천의 사례 또한 동두천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김상돈은 그러한 자극적 소재에 대해 건조하고 담담한 화법을 유지하고 있다. 그의 영상은 평온하기만한 자연의 분위기를 차분히 재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중간중간 무연고자의 무덤 표식이라든가 미군기지의 전형적 흔적 등 복잡한 생각을 드러내는 등의 태도를 통해 대상의 뒤에서 숨어 있는 거대한 기억, 폭압의 흔적, 공포의 복선 등을 묘사하고 있다.
노충현_복도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09

노충현의 풍경은 황량하고 공허하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침묵의 공간들을 빛바랜 사진과 같은 색조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가 그리는 풍경의 대상들은 삶의 영역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공간들이다. 특별할 것도 없는 대상이 없는 듯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그의 풍경은 언뜻 목가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노충현의 작품들은 일상에서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의 숨은 폭력성을 머금고 있다. 그 공간들은 단순히 폐쇄성이 강한 밀실이라는 사실을 떠나 그 폐쇄적 구조에서 행해졌음직한 소통의 일방성과 그로 인한 폐해의 징후들이 어른거린다. 그의 그림은 그러한 공간 속 감추어진 모순과 부조리의 확인 불가능한 흔적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분위기들은 일상의 평범함을 의심하고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다. 노충현이 '불편하고 난처한 현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몸의 반응'으로 그린 이러한 회화들은 일상의 평범함 속에 은닉되어 있는 불안의 그림자들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오인환_태극기 그리고 나_다채널 비디오_00:09:37, 가변크기_2009

오인환은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성찰에서 시작하여 사회와 제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개념적이고 실험적인 형식의 작품들로 표현해왔다. 그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깊은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차갑고 냉소적인 화법을 견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그의 견해가 상당부분 기존의 제도와 권력에 대한 의문이나 불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대중적 가치를 획득한 것들의 보편성을 전복하는 그의 작업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상식과 보편성의 준거틀을 의심해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일방적 냉소주의가 아니라 그 냉소를 넘어 더 원활한 소통을 시도하게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태극기 그리고 나』(2009)는 거대한 국기와 게양대를 비디오 영상으로 보여주는데, 경직된 이미지의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는 의외의 신음소리 같은 소음이 삽입되어 있다. 스크린에는 태극기 이미지만이 재현되지만, 화면의 흔들림과 신음 소리는 태극기를 촬영하고 있는 촬영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대상과 관찰자의 2자구도 속에 촬영자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 개입된다. 여기서 이미지와 소리 사이의 이질감은 개인과 국가라는 관계의 절대성을 뒤집는 것이다.
육태진_시계_벽시계, 모니터, 플레이어_00:01:54_2005

육태진은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영상작품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만연 이후 붕괴된 주체의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을 선보였던 작가다. 그의 작품은 절제된 테크놀로지의 미학과 감각적이면서도 시적인 정서를 갖추고 있다. 적절하게 제어된 요소들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에 주로 등장하는 것은 작가 자신, 혹은 작가를 매개로 등장하는 관람객 자신의 고독한 모습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영상작품 『숨』은 암실로 들어간 관객의 직관과 감각을 일깨우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면이 비춰지는 어두운 공간 속은 알 수 없는 소리만으로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어서 보이기 시작하는 한 남자는 담배 한 대를 피운 후 자세를 잡고 앉아 심호흡을 하다가 의외의 반전을 일으키며 사라져버리고 만다. 육태진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반복의 미학은 『숨』에서도 들숨과 날숨, 생성과 소멸, 흑과 백의 교차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육태진이 제시하는 불안은 모든 사회적 반응들이 자신의 의식 깊이 침투한 이후 질병을 얻은 듯한 자아의 모습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비사회의 병리적 구조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지속했던 작가의 모습이자 예측 불가능한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의 불안한 모습이기도 하다. 관객은 작가의 이마고(imago)를 통해 작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임선이_그들만의 세상을 기념하며_브론즈, 스틸_180×70×70cm_2009

임선이는 조각의 언어를 이용해 모종의 풍경을 재현하는 작업들을 지속해왔다. 일부작품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그가 재현하는 풍경은 낯설고 불안한 풍경들이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를 가진 자연의 원형에 모종의 행위를 가하여 다소 언밸런스한 인공적 풍경으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모호하고 불안한 경계선을 언급하는 그의 작업세계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 『Shelter-Landscape』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문명의 지형도 어느 한쪽에 자신의 편안한 거처를 찾지 못하는 작가의 불안감은 2009년 작 『그들만의 세상을 기념하며』에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는 경직된 근육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소수자들의 불안한 모습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은유하고 있는 그 대상이라는 것은 타자화된 시선에서 분명한 대상으로 상정된 것들이라기보다 공존하지만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혹은 잘 주목하지 않는 대상들로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장소에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를 주목하지 않는 일상적 시선의 불안함을 보여준다. 이는 곧 소외와 은닉의 습성을 본능적으로 안고 있는 동시대 주체들의 불안을 표현하는 것이다.
정주하_불안, 불-안_피그먼트 프린트_159×217cm_2003~7

정주하의 사진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이 사실은 제도에 의해 형성된 것임을 의심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진은 관습화된 시선이 놓치고 있는 교묘한 풍경에 대한 예민한 포착이며, 보이지 않던 대상들을 보이게 하는 형상의 창조이다. 『불안』시리즈는 정주하가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의 시간동안 한국의 4개의 원자력 발전소 주변의 풍경들을 채집한 사진연작이다. 원자력발전소들이 위치한 장소는 유원지의 기능을 가진 바닷가다. 해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유희적, 혹은 일상적 행위들이 일어나는 풍경 한켠에는 원전 시설의 모습들이 언캐니(uncanny)하면서도 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정주하의 사진들은 의식을 동반한 시각을 제거당한 주체들이 평화롭게 존재하는 역설적 풍경을 통해 '위험사회에 반항하지 않고 백기를 든 개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주하의 사진은 일상의 장소에서 생경함을 감지할 때 몰려오는 막대한 불안을 통해 익숙해진 모든 것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제도와 사회에 대한 사유의 계기를 제안하고 있다.
최수앙_The Speaker(ED. 3/5)_합성수지에 유채_84×30×38cm_2011 최수앙_The Listener(ED. 3/5)_합성수지에 유채_53×52×40cm_2011

최수앙은 정교한 미니어쳐나 독특한 비례와 사실적 기법의 인체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정상적 삶을 유지하고 있으나 지각과 사고에 장애를 입어서 주체로서의 행위를 수행하기 어려운 '식물적 상태'의 인간들을 묘사한 작품들은 오늘날 모든 것이 표준화되고 규격화되어 있는 틀 내에서 특별한 사고를 수행하지 않고 살아갈 것을 종용당하는 익명의 현대인들을 상기시킨다. 상위 이념의 절대성이 형성된 사회에서 자율 의지를 포기하는 대상에게 제시되는 달콤한 유혹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불안이 엄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최수앙은 말하는 사람(남자)과 듣는 사람(여자)으로 구성된 작품을 출품했다. 말하는 사람의 표정은 단호하고 듣는 사람의 표정은 모호하다. 말하는 사람의 자세는 공격적이고 듣는 사람의 자세는 수동적이다. 두 사람 모두 전체적으로 흐릿한 윤곽선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화자의 입과 청자의 귀는 매우 선명하다. 이것은 사람들 간의 소통이라는 것이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전체성에 기초하기보다는 미시적이고 국부적인 메시지 자체에 국한되고 마는 동시대의 양태를 묘사한다. 역설적으로 이는 소통의 과정을 명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오해와 왜곡을 초래하고, 결국 소통으로 인한 안정감이 아닌 역설적 불안감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 고원석


릴레이 작가와의 대화 8. 23(목) 오후 5시 아르코미술관 1층 (공성훈, 정주하) 8. 30(목) 오후 5시 아르코미술관 1층 (김기철, 노충현) 9. 6(목) 오후 5시 아르코미술관 1층 (김상돈, 임선이) 20대와 함께하는 커피토크 - 한국사회의 불안과 20대 9. 20.(목) 오후 5시 아르코미술관 1층 이택광(문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최서윤(월간잉여 편집장), 이경민(고려대학교 행정학과 박사과정), 박혜민(작가) 전시연계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 큐레이터와 함께하는 청소년 미술관투어 일시 : 8월 31일 / 9월 21일 (2회) 오후 2:00-4:00 아르코미술관 1층 참여방법 : 전화 및 온라인 신청 대상 : 중고등학생 신청자

* 온라인 사전신청 방법 : 희망참여일자, 프로그램명, 참가자 이름, 연락처 반드시 기재요망/ 이메일(sunj@arko.or.kr)로 신청 * 문의 : 02-760-4606 (담당 : 김지선)

아르코미술관 페이스북 : www.facebook.com/ArkoArtCenter 트위터 : @arkoart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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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미래를 보다




2012_0728 ▶ 2012_0825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728_토요일_04:00pm

참여작가 강호성_권아리_성유림_이보람_유휘_차재영

관람시간 / 10:00am~06:30pm / 토요일_10:00am~04:00pm 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엘르 GALLERY AILE 서울 강남구 역삼동 652-3번지 혜전빌딩 Tel. +82.2.790.2138 www.galleryaile.com



갤러리엘르에서 소속작가 6인 작가전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젊고 유망한 작가들에게 많은 기회와 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기획전시로 매년 6명의 개성 넘치는 신진작가를 선발하여 진행된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는 여섯 명의 - 동양화가 2인, 서양화가 2인, 입체조형 1인, 부조 1인 - 젊은 작가들은 자신만의 작품세계와 스토리를 구축하고 있지만 작업의 다양성 속에 색다른 조화를 보여준다. Asyaaf를 통해 주목받기 시작한 강호성(08'), 이보람(10'), 차재영(11'), 많은 수상경력과 전시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권아리와 성유림, 유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각자의 작업을 소개하고 가능성을 평가받고자 한다.
강호성_당신의 향기를 듣노라면_비단에 채색_100×140cm_2010
강호성_환영_비단에 채색_130×140cm_2010

강호성은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도 아름다운 동화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소박하고 쑥스럽게 꾸며내는 일상들 모두가 우리시대의 신화이자 동화라 생각한다. 작가는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힌트를 주고 있지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칠 뿐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동화는 한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앉아있는 작은 요정들 - 음유동자라고 부르는 - 과의 교감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자신만의 동화를 보여준다. 이 작업은 작가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허구에 불과하지만 시선을 끌며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작은 요소들의 기적은 주변에 실재하는 모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그려놓은 동화세계 안으로 당신을 초대하며 같은 꿈을 꾸길 바라고 있다.
권아리_마음이 눈뜰 때_장지에 채색_130×162cm_2011
권아리_눈을 뜨면(2piece)_장지에 채색_각 194×130cm_2010

권아리의 작업은 현실이라는 배경에서 '나'라는 조각을 떼어 돌아봄으로 시작된다. 우리 삶 속에서 타인 또는 자신으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들로 인해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상처를 받고 치유하는 과정속에서 마치 타인을 접하듯 가깝고도 먼 자신과 소통하는 '자아'를 발견한다. 문득 피어오르는 고독감과 그리움은 '나'에게서 뗄 래야 뗄 수 없이 자라나는 머리카락, 버리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일상처럼 '나'를 감싸고 또 옭아멘다. 고독감과 그리움의 감정은 한 마리의 나비처럼 아련하지만 강렬하게 와 닿는다. 고치는 스스로 실을 짜냄으로 자신을 감싸고 보호하며 언젠가 그것을 탈피한다. 실을 짜내어 만들고 그것을 깨부수고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결국 내면의 폭풍과 싸우는 '나' 자신, 우리들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작가는 작업 속 '나'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고 '과정' 속에서 지금 일상의 소중함과 따뜻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성유림_Untitled 0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09
성유림_Untitled 0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09

성유림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삶을 살다 늙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나무'에서 찾고 있다. '나무'는 어떤 풍파가 와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다. 세월이 흘러 의부의 물리적 힘에 의해 수피에 손상이 가고, 늙어 재생능력을 잃으면 썩어 들어가 서서히 삶을 다하게 된다. 이는 마치 인간의 일생과 흡사하다. 작가는 물감을 쌓아올리며 나무의 거친 마티에르를 표현해 내면서 살아 숨쉬는 나무와의 조용한 교감을 시도한다. 이를 통해 삶의 굴곡 속에서도 평안을 얻고 자연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작업 속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현실의 자신 또는 소중한 누군가의 삶과 교감할 수 있길 바란다.
유휘_My bar_code #0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112.1×145.5cm_2011
유휘_My bar_code #0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45.5×53cm_2012

유휘의 작업은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인식'이라는 과정을 바코드로 표현하고 있다. 어떠한 대상을 바라볼 때 그것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까지의 과정이 짧아짐을 담기 위한 매개체로 바코드를 선택했다. 살아가면서 대상을 보고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행위의 반복을 수 없이 경험하는 현대인들과 미디어나 방송매체들을 통해 무엇이든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려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가의 작업은 마치 계산대 위에 쌓인 수많은 상품들처럼 짧은 시간, 바코드 하나로 그 관계와 가치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악해 버리는 스캐너의 시각에 대입시켜 말하고자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은 바코드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이보람_Spread_색연필, 혼합재료_45×45cm_2012
이보람_생명의 약동Ⅲ_색연필_20×30×20cm_2012

이보람은 픽셀이라는 기본단위를 색연필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자연에서 연상되는 픽셀(세포-cell)의 이미지로 시각화하여 보여주고자 한다. 픽셀(pi×el)은 컴퓨터와 디지털 이미지 등의 주소화될 수 있는 화면의 가장 작은 단위로 (주로)네모 모양의 작은 점들이 모여서 전체 그림을 만든다. 작가의 작품도 작은 점(색연필)들이 모여 작가만의 픽셀, 즉 세포(cell)로 구성되어 있으며 깎고 자르고 붙이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확장시켜 시간적 순환, 생장과 분열의 형태로 작가만의 생명체로 형성되어 간다. 이는 가상공간에만 존재함이 아닌 현실 속 공간에서 나타나는 픽셀로 또 다른 공간과의 연결을 보여준다.
차재영_Journey#(냠냠)_합성수지,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우레탄페인팅_200×100×100cm_2009
차재영_Journey#(쿠션)_합성수지, 천, 우레탄페인팅_가변설치_2009

차재영은 작업을 통해 거친 일상 속 현대인들에게 동심의 세계를 선사하고자 한다. 획일화된 규칙에 익숙해져 질 높은 삶만을 추구하며 본래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은 티 없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낭만은 잊은 채 살아간다. 또 어린 시절의 큰 꿈과 열정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라져 간다. 작가는 여기서 어린이의 맑고 순수함으로 현대인들의 내면을 치유하고 휴식과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미적 체험을 통해 이미지의 잔상에 상상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상상이라는 휴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작가는 감정이 이입된 자연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다 적극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방법에 대한 형태로 무의식 속에서만 향유되던 동심의 세계를 불러와 현대인들에게 상상이라는 휴식을 제공하며 그들이 다시금 어려지고 포근해지길 바란다. ■ 갤러리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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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날카로운 Short, Sharp


Caterina Pecchioli_박용석_안정윤展 2012_0822 ▶ 2012_0902


Caterina Pecchioli_안전 수칙 Safety Instructions_비디오_00:02:44_2009 Performer:Marie Goeminne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물레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회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22_수요일_05:30pm

주최 / 물레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회 www.miaf.co.kr 주관 / 물레아트페스티벌 사무국 기획 / 안정윤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_문래예술공장_영등포구_레드디자인

관람시간 / 11:00am~10:00pm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문래예술공장 M30 SEOUL ART SPACE MULLAE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 88길 5-4 (문래동1가 30번지) Tel. +82.2.2676.4300 www.sfac.or.kr


"지금, 여기"라는 슬로건과 함께하는 2012년 물레아트페스티벌의 미술 전시부문은 "짧은, 날카로운"/"Short, Sharp" 이라는 소제목으로, 개인적인 성찰 또는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균열과 충돌의 발견들을 비디오라는 표현 재료를 통해 날카롭게 담아내는 한국과 이탈리아 출신의 세 명의 단편 실험영상 작가들에 주목하였습니다. 이들이 영상을 매개로 넓게는 아시아와 유럽의 "지금, 여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담아내고 표현하는지 공감하고 소통하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 안정윤

Caterina Pecchioli_분필 선 Chalk line_비디오_00:03:46_2008
Caterina Pecchioli_다비드와 카테리나 David & Caterina_비디오_00:03:57_200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이탈리아 플로렌스 두 도시를 거점으로 시각예술가, 연출가, 그리고 이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Caterina Pecchioli의 작품들은 신체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주로 표현되는 정체성과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방법적으로는 서로 상이한 분야의 예술장르, 이를테면 연극, 설치, 비디오, 무용의 요소들을 결합하는 형식을 취한다. ● 「안전 수칙」은 여객기의 안전수칙을 설명하는 스튜어디스의 동작을 정치적 종교적 제스쳐, 요가동작, 수화와 같은 다른 분야로부터의 제스처들과 함께 섞고 조작하여 보여주는데, 이러한 변형을 통해 실제 안전 지시가 죽음과 삶, 위험과 방어를 재현하는 동안 작가는 관찰자들의 상상력을 다른 행위와 상황으로 이동하도록 유도한다. 분필로 바닥에 그은 선을 개미들이 밟거나 넘지 못하는 자연현상을 보여주는 「분필 선」은 타의적인 공동체의 분할이 모든 조직에 영향을 주어 자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양상을 통해 국가와 영토의 개념 그리고 통제와 공포가 사용되는 정치적 메카니즘을 상징적으로 다룬다. 「다비드와 카테리나」는 미술계의 대가들에 대한 작가의 상충된 두 가지 감정을 희비극적 관점에서 보여준다. 플로렌스 출신인 작가에게 르네상스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언제나 영감을 자극하는 대상이자, 한편으론 비교로 좌절을 안기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개인적인 행위들은 예술을 한다는 것, 이탈리아 예술시장, 우상의 힘, 그리고 미술에서 여성의 위상에 관한 여러가지 충돌과 모순들을 반영하고 있다. ■ Caterina Pecchioli
박용석_테이크 플레이스 Take Place_비디오_00:17:33_2009
박용석_살지 않는 집 The House of no inhabitants_비디오_2012

박용석은 현대의 도시공간을 탐색하며 그 속에서 목격되고 경험되는 풍경과 현상에 대하여 작업해 오고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규범에 의해 관습화된 도시모습과 그로 인해 소비되고 버려져 방치되는 것들, 혹은 그것의 이미지들을 작품의 재료로서 수집한다. 작가는 사진, 설치,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고 있다. 「Take Place」는 2008~2009년간 제작된 5개의 시리즈 작품으로 공간의 정체성이 육체의 '활동'을 통해 등장하게 된다는 퍼포먼스 영상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 「Take Place」는 '사건이 일어난다' 라는 뜻과 '장소를 가지다' 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장소란 몸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등장하고, 그것에 대한 의미 역시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은 도시 재건축을 위해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골프연습장', '동대문운동장', '현저동 무허가집촌', '배다리 지역', '아현동 주택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마술 같은 이미지의 합성과 기존 영화에 대한 오마쥬, 사운드의 실험 등을 보여주고 있는데 재건축이란 장소에서 시작된 도시의 질문들을 결국 우리의 존재, 삶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로 풀어내고 있다. ● 「살지 않는 집」은 재건축 전, 후에 비어 있는 집들의 풍경을 담고 있다. 「살지 않는 집」은 재건축 현장 속에 「살고 있는 집」이다. ■ 박용석
안정윤_공화국 찬가 The hymn of a republic_비디오_00:04:46_2009
안정윤_비위 Spleen & Stomach_비디오_2012

안정윤은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사건과 행위들을 작품의 소재로 가져와 비정상적인 속도나 각도 혹은 극단적으로 확대한 사이즈로 낯설게 보여주는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을 정치 사회적 맥락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주로 해오고 있다. 「공화국 찬가」는 빠져버린 속눈썹 하나가 눈으로 들어와 안구 위를 떠다니다 스스로 빠져 나오기까지 5분여의 시간을 근접촬영으로 담은 작품으로 외부의 이물질로부터 눈을 보호하도록 기능하는 속눈썹 그 자신이 역으로 우리의 눈으로 들어와서 외부의 이물질이 되어가는 아이러니를 거꾸로 느리게 재생시킨 애국가에 실어 보여주며, 한때 우리 몸의 일부였던 작디작은 사물 하나가 얼마만큼 우리에게 위협적이고 두려운 대상으로까지 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전체와 개인의 대립, 폭력과 신체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비위」는 동일한 행위를 하는 두 종류의 곤충을 다르게 바라보는 또는 선택하여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을 실험하는 작품으로 작가는 놀이공원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장미꽃밭에서 여유롭게 꿀을 따는 벌의 모습과 재개발로 폐허가 된 지역에서 경쟁하듯 죽은 새의 진액을 빠는 파리의 모습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생존을 위한 섭식에도 미추를 적용하고 귀천을 갈라서 보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일깨우고 그 중 어느 한쪽만 골라 보고 싶은 것만을 계속 보거나 다른 한쪽을 외면한다거나 할 수 없도록 두 영상을 번갈아 섞어 방해한다. ■ 안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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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시간 The Time of Things


임해랑展 / IMHAERANG / 任해랑 / installation 2012_0822 ▶ 2012_0828 / 월,주말 휴관


임해랑_애매한 풍경-cafe_pvc, 아크릴_48×8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임해랑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2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주말 휴관

코사스페이스 KOSA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37번지 B1 Tel. +82.2.720.9101 www.kosa08.com


『사물의 시간』展은 일상의 장면들과 개인의 사물을 재현한다. 투명한 매체를 통한 개인의 일상 속 장면과 빛으로 그려진 개인의 사물들을 제시하여 그 안에 내포된 경험이나 시간을 표현한다.
임해랑_애매한 풍경-window_pvc, 아크릴_52×69cm_2012
임해랑_애매한 풍경_sky_pvc, 아크릴_48×82cm_2012

애매한 풍경 ● 『사물의 시간』展의 애매한 풍경들은 본인에 대한 의구심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때로 우리는 명백한 정답이 없는 질문들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나는 왜 여기 있는지, 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스스로에게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질문들을 하지만 명백한 답은 없으며 스스로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경험하게 되는 상황들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 사람냄새나면서도 고요한 카페, 창밖의 소음, 매일 드나드는 계단. 이것은 단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감성적 일상이다. 우리의 시간은 갑자기 나타나기도, 서로 엮기거나 중첩되기도 한다. 작품 안에서 이러한 시간성은 빛이라는 매체로 표현되고 있다. 빛이 투과 되며 드러나는 이미지들의 중첩은 우리가 겪은 시간의 중첩이며 축적이다. 개인의 기억속의 장면을 재현해 내는데 있어 분명한 이미지가 불가능하듯 드러나는 이미지 또한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임해랑_사물의 시간-트렁크_아크릴, MDF, LED_100×50×5.5cm_2012
임해랑_사물의 시간-서랍_아크릴, MDF, LED_90×60×5.5cm_2012
임해랑_사물의 시간-마우스_아크릴, MDF, LED_80×35×5.5cm_2012

사물의 시간 ● 나에게는 반년동안 함께 살았던 조선족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침대머리맡에는 커다란 트렁크가 있었다. 어디 넣어둘 곳도 없는 커다란 몸집 때문에 침대 옆에 겨우 자리를 차지한 가방은 옷더미가 쌓여진 채로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트렁크는 단순히 그 기능을 넘어 타지에 와서 공부하고 돈을 벌며 살아가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담겨있다. 이처럼 한 사람의 물건에는 그 사람의 시간과 삶이 묻어있다. 물론 사물은 일상 속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사용된다. 하지만 신체적인 접촉과 감각, 여타 관계를 수반하기 때문에 기능적인 것 이외에도 사물을 대하면서 심리와 경험, 기억, 나아가서는 사회적인 의미와 상징들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따라서 사물을 단순한 사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하면 일상적이지 않은 새로운 경험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임해랑_사물의 시간-화장대_아크릴, MDF, LED_60×100×5.5cm_2012

빛과 감성적 시간 ● 영화 속 시간은 흐름을 거스르기도 하며 시간의 순서를 흐리기도 한다. 사진은 순간을 재현하고, 매체는 몇 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열리는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현대의 시간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며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기도 한다. 시간은 매체를 통한 새로운 시간의 인식 이외에도 감성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존재한다. 기다림의 시간은 더디고 즐거운 순간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처럼 감성이 시간의 속도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감성은 시간의 흐름이나 속도를 흐트러지게 하고 이러한 감성적 시간은 우리의 일상의 경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문에 드리워진 빛 한줄기의 느긋함, 늦은 밤 길목을 비추는 가로등의 고마움, 환상적인 야경의 황홀감, 반짝이는 바다 물결의 신비로움 등 일상에서 발견되는 빛은 감성적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다. 빛은 인간의 다양한 관점이나 사고,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빛으로 그려진 작품 속 사물의 이미지는 중첩되어 보이기도 하며, 때론 선명하게, 때론 뿌옇게 보이기도 한다. 다양한 빛의 변화를 통해 사물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서, 우리의 경험을 통한 다양한 시간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 임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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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의 폐허들


안경진展 / ANGYEONGJIN / 安京眞 / sculpture 2012_0822 ▶ 2012_0904


안경진_원형의 폐허_합성수지에 채색_85×70×5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안경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월~토요일_12:00pm~06:00pm / 일요일_12:00p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형상 혹은 환영phantom의 유희들: 새로운 감각의 논리를 향해 ● 안경진 작가의 이번 전시작품들은 이전 전시의 작업들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그것들은 먼저, 일종의 구상적 조형들의 유희들이다. 이전 작업이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 작업은 조형성 자체의 그것에 집중한다. 그것은 또 어떤 의미에서 빛 - 그림자의 기체적인 공간으로부터 물질적이고 조형적인 공간으로의 회귀 혹은 변형이기도 하다.
안경진_형상과 그림자 그리고 허상_혼합재료_30×50×5cm_2012
안경진_각인-角人_혼합재료_130×160×55cm_2012
안경진_빈상_60×100×35cm_혼합재료_2012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의 작업들과 더불어 전통적인 조각의 공간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인가? 전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조형적 언어는 오래전부터 전통을 벗어났다. 즉 우리는 순수 회화적 공간처럼 순수 조각적 공간이 있어서, 우리의 무사심한 관조를 기다리는 그러한 조각품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지경」이란 작품의 경우가 그 이행을 잘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이라면 그것은 충분히 전통적인 부조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중의 비틀림을 수행한다. 각 작품은 뱃지와 구상적 얼굴들로 전체 뱃지의 형태를 빗어내고, 동시에 다른 표정들이 담겨진 뱃지를 배치함으로써 그는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 낸다. 다른 작품들도 각각 익숙한 구상들을 보여주지만 그 역시 게스탈트(Gestalt) 심리학의 형태들처럼 이중적 구상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A이기도 하면서 B이기도 하는 동일률의 붕괴를 만들어내는 사태이다. ● 예를 들어 작품 '원형의 폐허'는 무릎을 꿇은 한 병사의 이미지이다. 육중한 물질감과 존재감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해골이라는 B의 이미지가 출현한다. 이러한 이행과 변형은 시각적, 촉각적 감각의 변용과 더불어 진행된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환영의 경험을 줄 수 있다. 더구나 그 경험은 단순히 시각적인 '재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이위에 있는 형태들이 아니라 구체적 신체의 현존과 더불어 일어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은 처참한 실존의 외로움이라든가, 존재의 실존성으로 우리의 몸을 주파할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이와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이와 유사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의 변용과 변형 즉각적인 이행은 문제적 페르소나와 상징적 형상들의 내면이나 깊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효과로서 출현한다. 이러한 효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들은 그 본질의 현현도, 본질과 현상의 괴리가 아니라 환영자체의 유희들로 우리를 이끈다.
안경진_비너스_혼합재료_165×65×40cm_2012
안경진_요지경_합성수지에 채색_60×60×8cm×2_2012

따라서 우리는 촉각적, 실존적 환영들의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눈앞에 현존하고 있지만 알려진 어떤 정체성으로 되돌릴 수 없는 그러한 비-동일성의 사태. 그리하여 나타나는 환영 효과. 그것은 어떤 제 3의 힘을 불러들이는 것일까? 혹 그것은 이 질서 잡힌 세계를 운용하는 부계적인 원리들을 비틀고, 그 부계적 정체성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대로 모방적으로 반복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비-모방의 반복을 반복하는 서자(庶子)의 사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유일하게 이중의 형상을 갖지 않은, 여성적인 것의 상징이었던 「비너스」는 오히려 알려진 그 육체성을 사라지게 하면서 가녀린 선들에 의해서 희미하게 그 무엇을 현존케 하는 게 아닐까? ● 남성성과 여성성, 지배와 피지배 - 그러한 이분법적 구획을 강제하는 부계적 원리. 알려진 형상과 또 달리 알려진 형상의 동시화, 환영화를 통한 이분법으로부터의 탈주 경향. 작가의 조형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러한 구획된 이분법을 넘어서는 경계에서, 새로운 감각의 논리로 향하는 문턱에서 성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 백용성
안경진_피싱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영국의 저명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 박사는 그의 저서 "The Human Zoo"에서 풍선을 어미오리로 착각하는 새끼의 예를 들며 이미지를 통한 각인의 강력한 작용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에 대해 서술하였다. 편향된 시각적 인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류는 곧 고정관념으로 고착되어 대상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과 해석을 차단하고 '비둘기=평화'와 같은 일반화를 가속시킨다. 이와 같은 일반화는 범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여 보다 용이한 소통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획일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초래하기도 한다. 더구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주변은 적극적인 각인을 목적으로 한 수많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TV와 인터넷, 영화 등은 직, 간접적으로 무수한 광고를 끊임없이 재생하여 기업과 특정 단체 등의 상품과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키며, 화려한 패션 잡지와 최첨단 전자제품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여 '뒤쳐진 자'와 '앞서가는 자'에 대한 이미지의 수용을 강요한다. 이렇듯 반복적이고 맹목적이며 계산적인 각인의 홍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현실을 적시하고 풍자하기 위해 나는 상반된, 또는 다수의 의미를 함유한 복수의 이미지들을 하나의 형상에 구현하였다. ● 각 작품이 형성하는 보편적인 이미지를 바라본 관람자는 이미 각자에게 내재된 각인의 발현을 순간적으로 경험함과 동시에 곧 작품의 내용이 제공하는 다의적 해석의 기회를 뒤이어 깨닫거나, 반대로 작품의 내용이 제공하는 이미지의 보편적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형상에 주목하지 못하는 오류가 앞선 경우와 동일한 각인의 매커니즘을 통해 발생할 수도 것이다. ● 무수한 이미지의 범람과 반비례 되어가는 사고의 편협, 그리고 반복적 각인을 통해 형성되는 맹목적 추구가 만연한 지금을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 나는 조심스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풍선의 뒤를 쫓아다니는 새끼오리와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 안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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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치의 가능성 Possibility of Device


정성윤展 / JUNGSUNGYOON / 鄭盛允 / installation 2012_0818 ▶ 2012_0901 / 월요일 휴관


정성윤_goodbye_휠, 기어, 알루미늄, 스틸_220×120×120cm_2012

초대일시 / 2012_0818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화~일_10:00am~07: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정성윤의 고안된 기계 장치들은 타자에 대한 욕망과 믿음이 어떤 경로를 통해 나타나고 확장되어 종말을 고하는지 그려낸다. 기계들은 그것을 다루는 주체의 일반적인 행위와 결과물의 도출을 역설적으로 뒤집는 과정을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이 가진 정체성 상실의 트라우마를 관조하게 한다.
정성윤_goodbye_휠, 기어, 알루미늄, 스틸_220×120×120cm_2012_부분
정성윤_hold on please_체인기어, 알루미늄, 스틸_140×165×200cm_2012

매끈한 외형으로 은폐하지 않은 기계장치의 작동 메커니즘은 이러한 순환체계를 표상하는 다이어그램으로 은유 되어 기계와 사람, 사람과 사람이 벌이는 부조리 극의 양상으로 재현된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세계와 그것들의 관계에 대한 불가능한 가능성의 지점을 표현하고 있다. ■ 갤러리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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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ong Journey


정욱장展 / CHEUNGWOOKJANG / 鄭煜璋 / sculpture 2012_0822 ▶ 2012_0904 / 일요일 휴관


정욱장_A Long Journey-Camels_스테인리스 스틸_900×600×380cm_2012

초대일시 / 2012_082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주말_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빛갤러리 VIT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76번지 인곡빌딩 B1 Tel. +82.2.720.2250 Vitgallery.com


정욱장의 조각-Long Journey ● Long Journey. 긴 여행, 긴 여로, 긴 여정이다. 추상작업에서처럼 주제가 무의미한 경우도 있지만, 대개 주제는 창작주체의 작업을 대리하기 마련이다. 정욱장이 자신의 조각에 부친 주제가 그렇다. 이 주제 속엔 여행과 길이 들어있다. 여행은 떠난다는 것이다. 작가가 조각가임을 생각하면, 여행은 한 가지 형식에 정주하는 대신, 계속 새로운 형식을 찾아서 옮겨 다니는 유목민의식을 의미한다. 어떤 작가는 형식을 심화시키고, 다른 작가는 형식을 확장한다. 외관상 작가는 확장의 경우처럼 보인다. 엄밀하게는 확장과 심화를 맴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다양한 형식적 시도들이 결국 삶의 메타포라는 하나의 전제로 모아진다. 삶의 메타포로 치자면 길이 그 전형에 해당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매개로 삶의 길이며 조각가의 길을 전망으로 열어놓는다. 여행도 그렇지만 길 역시 삶의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기에, 작가가 그 길 위에 풀어놓는 형식의 지점들은 쉽게 공감을 얻는다. ● 조각에 관한한, 그동안 작가는 꽤나 다양한 그리고 꽤나 의미심장한 지점 지점들을 짚어냈다. 이를테면 나무 솟대와 마른 북어는 전통적으로 지복과 기원을 상징한다. 여기에 제의적 포즈를 취한 사람(아마도 하늘과 땅을 넘나들고 이어주는 제사장이며 무당이며 최초의 예술가일 듯) 형상이 가세하면서 전통과 제의(일종의 뿌리의식)에 관련된 표상형식을 부각한다. 그리고 인체와 구조물을 결합시켜 일종의 상황조각과 풍경조각을 예시해준다. 조각에 이야기를 끌어들인 결과로 볼 수가 있을 것인데, 형식보다는 혹은 형식과 더불어 내용에 기울어진 작가의 성향을 엿보게 한다. 풍경조각이 모티브와 모티브가 한자리에 배열된 어떤 전망을 열어놓고 있다면, 상황조각은 그렇게 열린 전망이 어떤 상황(이를테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상황)을 환기시켜주는 경우로 구별된다. 전망 자체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와, 그 전망에 탑재된 성격이 강조되는 경우로 구별해볼 수가 있겠다. 이런 이야기의 도입으로 차후 작가의 작업은 조각의 경계를 넘어 공간설치작업으로 확장되고, 마치 그림을 그리듯, 그림 속에 이야기를 풀어내듯 평면적이면서 회화적인 조각으로 변주되는 계기가 된다. 공간이나 평면 속에 어떤 극적 상황을 담아내는 연출가로서의 자질이 보태진 것이다. 마치 연극과도 같은 그 전망 속에 대개는 다른 사물들과 함께 말과 사람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은 인간이 처한 상황논리를 대리한다. 이를테면 말은 이상(그 의미가 여행과도 통하는)을 상징하며, 고삐에 묶인 말은 현실에 발목 잡혀 좌절된 이상을 암시한다.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붙잡혀 살지만, 그 와중에도 이상(어쩌면 일탈)을 향한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과 한계를 상징한다.
정욱장_A Long Journey-Deers_스테인리스 스틸_400×600×340cm_2012
정욱장_A Camel-Ⅱ_스테인리스 스틸_45×25×15cm_2010

그리고 비록 평면조각이 집중적으로 제작된 것은 근작에서의 일이지만, 매번 그 재료와 형식이 약간씩 다를 뿐, 사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작업과 함께 병행해온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스케치나 에스키스로 볼 수 있겠다. 당연히 그 자체 독립적인 조각들이지만, 다소간 이완된 상태에서 제작된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다. 이를테면 알루미늄 수작업을 기저로 제작된 근작들을 보면 눈에 쏙 들어오는 화면에 모티브들을 배열하는 감각이나 콤포지션이, 그리고 여기에 드로잉이며 표면질감의 차이를 연출한 것이, 게다가 화면의 대부분을 여백에 할애해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유도한 것이 영락없는 회화다. 조각에 이야기를 끌어들이는 것이나, 마치 그림을 그리듯 조각을 풀어내는 태도와 방식이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른다. 그리고 작가는 조각 자체의 문제를 향한다. 어쩌면 조각가로서 당연한 문제의식이랄 수 있겠다. 조각의 본질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는 양감과 중력을 들 수 있다. 즉 속이 꽉 찬 덩어리와 이에 따른 필연적 귀결인 중력이야말로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장르적 특수성일 것이다. 편의상 전통적인 조각과 현대적인 조각을 구별시켜주는 결정적인 계기며 분기점이 바로 이런 양감과 중력을 의심하는 것에 있고, 작가 역시 그 의심에 힘입어 새로운 형식의 조각을 제안한다. 소위 탈조각 내지 망조각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가녀린 철삿줄을 엮거나(밴딩) 이어 붙여(웰딩) 말이며 사람 형상을 만드는데, 하나같이 속이 텅 비어있고, 구조적으로 안과 밖이 구별 없이 하나로 통하는 통구조를 하고 있다. 가벼움 자체만으로 이미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되겠지만, 보다 적극적으론 조형물을 아예 벽에 걸거나 공중에 띄워 중력에 반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말에 실타래가 연장돼 있어서 마치 말이 실타래로부터 유래한 것 같다. 그 자체를 시간의 메타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사람 형상(다비드 상으로 차용이라는 또 다른 지점을 짚어내는)이 서 있는 바닥에 그 형상과 마찬가지 성분인 철사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부분과 전체, 재료와 형상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더불어 종이로 떠낸 속이 텅 빈 두상으로 중력을 드러내놓고 배반하고, 속을 파낸 텅 빈 돌덩어리를 매개로 중력을 암시적으로 거스른다. 작가의 개입과 해석에 의해 무거운 것이 가볍게, 견고한 것이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으로 탈바꿈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변태(존재가 자유자재로 그 태와 꼴을 바꾸는)와 아이러니(역설)가 작가의 주요 문법임을 알겠다.
정욱장_An Elephant-Ⅰ_스테인리스 스틸_106×50×36cm_2012
정욱장_An Elephant-Ⅱ_스테인리스 스틸_100×47×27cm_2012

작가의 작업에는 흔히 상황논리를 설명해줄 최소한의 오브제와 함께 말과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며, 작가에 의해 대리되는 현대인의 초상일 것이다. 그리고 말은 이상을 상징하고 여행을 상징하고 유목을 상징한다. 그 개념의 목록들이 하나같이 작가의 주제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말은 작가의 분신인 얼터에고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근작에서 사슴과 코끼리 그리고 낙타와 같은 또 다른 분신을 제안한다. 특히 낙타는 사막에 산다. 그리고 사막은 흔히 척박한 세상살이를 상징하고, 선인장과 함께 낙타는 그 척박한 살림살이를 살아내는 존재일반에 비유된다. 선인장과 낙타는 척박한 환경에서 최소한의 수분과 양분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진화된 몸 구조를 하고 있다. 사막은 넓고 낙타는 키가 크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멀리 본다. 남보다 먼저 보고 남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존재는 그 예지력으로 인해 고독하다. 그래서 낙타는 고고한 탓에 고독한 존재를 상징한다.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그런데 작가가 조형한 낙타는 팔다리가 실제보다 더 길고, 그 만큼 높다란 키를 가지고 있다. 대상의 특징을 과장한 경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상징적 의미를 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낙타의 긴 다리는 말하자면 그 긴 다리만큼이나 높고 아득하고 먼 이상을 상징하고, 이상주의자의 운명이랄 수 있는 고독을 암시한다. 운명적으로 낙타는 쉴 수가 없다(쉬어서는 안 된다). 일단 주저앉은 낙타는 자력으로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다. 한번 넘어지면 스스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코뿔소와 같다. 여기서 실제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작가는 낙타의 생물학적 닮은꼴이나 생리보다는 인간상황에 대한 유비에 관심이 있고, 그 관심으로 인해 낙타를 소재로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적 의미에 대해선 현실원칙보다는 신화적 사실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이런 신화적 사실을 따르자면, 키가 큰 낙타는 키가 작은 낙타보다 자력으로 일어서기가 더 힘들 것이다. 이상이 높은 사람은 그렇게 높아진 이상만큼이나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이상을 꿈꾼다. 단순하게는 현실을 잊고 싶어서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이상도 커진다. 일종의 보상심리다. 현실이 아니라면 이상으로라도 충족되어져야 한다. 리비도 원칙이며 엔트로피 법칙이다. 그렇게 이상을 키우다가 마침내 아득해진다. 현실로부터 멀어지다가 종래에는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눈에 띠게 높다란 키를 가진 낙타는 (진정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하고, (적어도 저마다의 무의식 속에서만큼은) 다시 현실로 복귀할 수 없을 지경으로 멀리까지 가버린 현대인의 꿈을 암시한다. 낙타가 서있는 아래쪽 바닥에는 공이 놓여있다. 외계를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 같은 공이다. 낙타가 사는 지구를 의미할 수도 있겠고, 자기를 반영하는 자기반성적인 거울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숫자들이 흩어져 있다. 삶의 시간이며 시계를 의미할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며, 존재론적 행위이며, 아마도 예술적 행위일 것이다. 낙타는 그 생긴 꼴이 왠지 현실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존재 같고, 외계에서 온 존재 같고, 신화적인 존재 같다. 작가는 그 신화적인 존재와 더불어 꿈을 꾸자고 초대하는 것 같다. 때론 그렇게 꿈을 꾸다가 영영 현실로 다시 돌아오지 못해도 좋을 것이다. ■ 고충환
정욱장_Endless Horizon-Ⅰ_알루미늄_77×77×5cm_2009
정욱장_Endless Horizon-Ⅱ_알루미늄_77×77×5cm_2009

Sculptures of Wook Jang CHEUNG-A Long 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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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of POP ART


2012_0823 ▶ 2012_1129 / 백화점 휴점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앤디 워홀_로이 리히텐슈타인_키스 해링_탐 웨슬만_데이비드 걸스타인

관람시간 / 10:30am~08:00pm / 금~일_10:30am~08:30pm / 백화점 휴점일 휴관

2012_0823 ▶ 2012_1003

롯데갤러리 청량리점 LOTTE GALLERY CHEONGNYANGNI STORE 서울 동대문구 왕산로 214번지(전농동 591-53번지) 롯데백화점 8층 Tel. +82.2.3707.2890 blog.naver.com/lotte2890

2012_1015 ▶ 2012_1107

롯데갤러리 광주점 LOTTE GALLERY GWANGJU STORE 광주광역시 동구 대인동 7-12번지 광주은행 본점1층 Tel. +82.62.221.1808 blog.naver.com/glotteart

2012_1109 ▶ 2012_1129

롯데갤러리 부산본점 LOTTE GALLERY BUSAN STORE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번지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6층 Tel. +82.51.810.2328 blog.naver.com/sky3778


롯데갤러리는 팝아트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The Great of POP ART』展을 개최합니다. 팝아트는 1950년대에 영국에서 시작해 6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확산된 현대 미술의 한 경향으로서, 자본주의의 영향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산업 사회의 모습들을 다양한 방식들로 미술 작품에 수용하였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광고와 같은 매스 미디어와 대중 문화 속에 등장하는 시각적 코드들을 적극적으로 예술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순수 미술과 대중 미술, 상류 문화와 저급한 상업 예술 사이에 존재하던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구분을 뛰어 넘는 새로운 미적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앤디 워홀_마를린 먼로 Marilyn Monroe_실크스크린_91×91cm_1967
로이 리히텐슈타인_두개의 그림-데그우드 Two Paintings-Dagwood_목판화, 석판화_실크스크린_1984
키스 해링_무제 (팝샵 III B) Untitled (Pop Shop III B)_실크스크린_41.2×33.5cm_1989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친숙한 소재들을 재치 있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해낸 팝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은 기존의 엄숙하고 경건한 예술과는 구별되는 밝고, 경쾌한 미감을 보여주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키스 해링(Keith Haring), 탐 웨슬만(Tom Wesselmann), 데이비드 걸스타인(David Gerstein)의 작품들과 걸스타인의 small objet 및 아트상품들을 전시합니다.
탐 웨슬만_리즈 테일러가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Liz (Warhol)_실크스크린_148×144.5cm_1993
데이비드 걸스타인_Sensation_철강_135×80cm_2010
데이비드 걸스타인_Birds of the World_철강_높이 45cm_2009

대중적인 상표나 인기 스타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표현한 '앤디 워홀', 만화를 팝아트적으로 재해석한 '로이 리히텐슈타인', 낙서화의 형식을 빌린 독창적인 표현 방법으로 사회 문제들을 언급한 '키스 해링', 가장 미국적인 사고방식으로 팝아트를 표현한 '탐 웨슬만', 회화 같은 조각 기법으로 일상의 모습을 신나는 축제의 장면들로 표현한 '데이비드 걸스타인'. 이들의 작품들을 통해 팝아트의 시작부터 현재까지의 전면을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친숙한 풍경 속에서 찾아낸 특별한 예술인 팝아트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평범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유쾌한 시간을 선사할 것입니다. ■ 롯데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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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인간을 닮다.


이길래展 / LEEGILRAE / 李吉來 / sculpture 2012_0825 ▶ 2012_0928 / 월요일 휴관


이길래_노송도 2012 Old Pine Tree 2012_철, 동파이프 산소용접_350×580×5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611h | 이길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2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 Gallery BK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155번지 1층 Tel. +82.2.790.7079 gallerybk.co.kr


익숙하고도 낯설은 소나무 ● 충북 괴산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은 한적하고 깊은 시골이다. 아늑한 동네는 마냥 고요하고 더운 날씨에 메마른 나무와 풀들만이 가득하다. 그의 작업실 마당에도 나무들이 버티고 서있다. 금속성을 잘게 나눈 것들을 일일이 용접해 붙여 만든 유사나무다. 실제 나무를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도 있지만 실은 나무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뒤섞인 듯한 기이한 형태들이기도 하다. 나무인간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길래는 나무와 인간을 결국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외형적으로는 상이해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생명체인 것이다. 좀 더 나가면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본 구조는 결국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길래의 작업은 동일한 구조의 동銅을 이어 붙여서 소나무를 만들고 알 수 없는 형상을 제작한다. 반원형이나 짧은 직선의 꼴을 지닌 동은 일종의 세포이미지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들이 모이고 응집되어 생명체를 보여준다. 식물이고 나무들이다. 그것은 공간에 직립하기도 하고 벽에 붙어나가면서 회화처럼 자리한다. 공간과 벽에 동을 용접해서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길래_풍경 2012-2 Landscape 2012-2_시멘트, 철분, 동파이프 산소용접_84×65×30cm_2012
이길래_소나무 2011 Pine Tree 2011_동파이프 산소용접_86×87×4cm_2011

그것은 조각적 충동이라기보다는 회화적 충동에 더 가깝다. 이길래의 조각은 조각의 기본적인 요소인 물성이나 질량, 공간을 채워나가는 구조의 문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보다는 작은 물질의 단위들을 가지고 이를 하나씩 덧붙여-마치 연필소묘나 붓터치를 하듯이-그려나가는데 관심이 더 커 보인다. 물질을 채워나가거나 깎아내기보다는 선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덩어리를 다루기보다는 선을 만들고 있고 시간의 지속을 보여주면서 궁극적으로 표면에 주목시킨다. 그의 조각은 동으로 형성된 자연의 피부, 그 표면을 이루는 낱낱의 개별적 존재들을 응시하게 하고 그것들이 모이고 번지고 퍼져나가면서 이루어지는 생명체를 닮은 형상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동시에 그 조각은 보는 이의 시선을 투과시킨다. 물질의 내부를 관통시켜 형상 너머로 나가게 한다. 따라서 나무와 나무인간의 형상을 한 것들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을 자기 내부로 흘려버려 그 너머의 것들과 조우시킨다. 공간과 부단히 통하고 바깥의 공기가 수시로 이 존재 속으로 파고들고 나가기를 거듭한다. 바람과 기운이 넘나든다. 기氣가 통한다. 생명이 가능하려면 이러한 기의 소통, 호흡이 요구될 것이다. 또한 내부가 이처럼 비어있는 조각은 자신의 존재를 한 눈, 한 시점에 투명하게 비춘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한 시선에 내주면서 그 전체의 모습과 그것을 이루는 단위들을 동시에 공존시킨다. 작은 단위(세포)와 그것이 이룬 전체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 평등함은 부분이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거나 소멸되는 것을 막는다. 그러니 이 조각은 부분과 전체가 동일하고 공평하다. 작고 작은 단위들이 없다면 커다란 나무는 불가능하다. 그 작은 단위들이 일정한 시간동안 자라야 그 다음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한 자연과 생명체의 마땅한 순리가 결코 생략되거나 간과될 수 없다는 메시지다. 나는 그렇게 읽어본다.
이길래_소나무 2012 Pine Tree 2012_동파이프 산소용접_204×115×59cm_2012
이길래_나이테 2011-1 Annual Ring 2011-1_동파이프 산소용접_55×75×3cm_2011 이길래_나이테 2012-1 Annual Ring 2012-1_동파이프 산소용접_43.5×65×3cm_2012

그의 조각은 물리적 공간을 체적화 하는 기존 조각적 방법론보다는 실제 식물이 자라나고 생장하는 과정과 그 시간적 추이를 유사하게 닮아가는 형국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연계에서 생명체의 생장과 변화과정을 주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조각적으로 응용해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이곳 괴산으로 내려온 10여년의 세월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대상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생리랄까, 생명법칙을 순응해나가는 과정이 그의 작업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조각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처럼, 나무처럼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서히 성장하고 번식되어 나간다. 작은 동 조각을 용접해 붙여나가는 그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이 그대로 식물의 생장주기와 유사하고 작은 단위(세포) 하나하나가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그렇게 작가는 엄청난 숫자의 동 파이프 단면들과 조각들을 연결해 소나무를 만들었고 기이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제작했다. 특히 소나무를 선택한 이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이자 우리 문화의 고고성뿐만 아니라 친근한 매력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생활을 아우르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하고, 정신적으로는 사유의 대상이자 서민들에게는 놀이터의 역할까지 겸하는 매우 중층적인 상징의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역사성도 깃들어 있고, 자유분방한 형태, 한 그루 나무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색감, 세월의 풍화를 머금고 있는 듯한 표피 껍질 등등 많은 조형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작가노트)
이길래_사슴소나무_동파이프 산소용접_230×150×87cm_2012 이길래_노루나무_동파이프 산소용접_125×124×85cm_2012

장황 할 정도로 소나무는 많은 의미망을 열매처럼 매달고 있다.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유별한 나무다. 생활주변에 흔하게 자리한 소나무와 함께 해온 생애가 한국인의 삶이다. 그가 이곳 시골로 내려오면서 유독 많은 소나무를 접했을 것이고 특히 소나무의 표면, 두껍고 거칠며 마구 일어나는 껍질은 조각가인 그의 창작충동을 건드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그 소나무를 입체로 재현했다. 아울러 동선을 연결해서 부조 작업도 했다. 벽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그림처럼 자리한다. 꿈틀거리며 솟구친 나무줄기며 사방으로 활짝 펼쳐진 솔잎, 굵고 거친 소나무 껍질의 느낌을 잘게 자른 금속으로 이룬 선들이 재현하고 있다. 소박한 재현이지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은 동 조각들이 모여 이룬 부조작업이라고 깨닫는 순간의 어떤 낯설음이 있다.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좀 더 강력한 형상, 상상력이 요구되었으면 한다. ● 실제 소나무를 닮은 이 의사소나무는 동이 지닌 색감과 물성에 힘입어 실감나게 다가온다. 강인하며 불멸하는 존재로 말이다. 어쩌면 이길래는 동 조각을 가지고 소나무를 만들어 특정 전시공간에 식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살아있는 소나무에 비하진 못하지만 우리는 이길래가 만든 이 낯선 소나무를 통해 소나무란 존재에 대해, 식물성의 존재에 대해 새삼스런 인식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변형되어 다채로운 형상으로 번식해나가는 여러 이종과도 같은 또 다른 형상을 만나면서 소나무가 인간과 대등한 생명체임을 다소 불안하고 기이하게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무릇 생명을 지닌 존재의 구조와 생김새, 그것의 본원적인 욕망을 떠올려보게 한다. 나아가 이내 죽어 사라질 나란 존재를 넘어서서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가는 저 소나무의 존재를 통해 소멸될 유한한 목숨들의 한낱 연극 같은 이 우스꽝스러운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 박영택
이길래_나무, 인간을 닮다.展_갤러리 비케이_2012

Uncanny Pine 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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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st Ink


제이플로우展 / Jay Flow / graffiti.painting 2012_0824 ▶ 2012_0909 / 월요일 휴관


제이플로우_TWDfam_디지털 프린트_71×54cm_2011

초대일시 / 2012_0824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3층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그래피티 아티스트 제이플로우의 개인전『Dust ink』展은, 앞서 개인전을 개최한 홍삼『스트릿 보이』展을 시작으로 10월21일까지 총 4차례에 걸쳐 펼쳐지는 그래피티 릴레이개인전(홍삼, 제이플로우, 후디니, 반달)의 두 번째 전시이다. 이번 릴레이 개인전 프로젝트는 거리의 미술 그래피티를 갤러리로 들여와 길거리가 아닌, 전시장 안에서 다양한 그래피티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기획된 전시로서, 이러한 시도는 이미 미국, 유럽의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기획 등 전세계적인 예술활동으로 그 열풍이 불고 있다. 그 동안 길거리 벽화 작업, 힙합음악, 앨범 재킷, 영화, 공연장, cf, 뮤직비디오, 아트콜라보레이션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해 오며 대중과 친숙하기는 했지만 정작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4인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한 본 전시에서는 무엇보다 그래피티의 기본적인 특징과 함께 최근 변화된 한국 그래피티의 경향을 잘 보여줄 것이다. 우리나라 그래피티는 장르 특유의 예술성을 이어가며 한국 특유의 감성으로 다이나믹하게 구현되고 있으며 또한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고 있다. 특히이번개인전으로소개될제이플로우는많은 유명 해외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래피티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과 경험을 얻게 되어 서양의 그래피티만을 동경하는 그래피티가 아닌, 국제적으로 독자적인 그래피티 스타일을 추구하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또한 그래피티 작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캐릭터와 스타일들을 연구해 왔으며 타투, 브랜드 아트디렉터 등의 그래피티 외적인 작업들을 동반하였다. JayFlow 아트웍의 스펙트럼을 한층 더 강화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래피티란 단어가 더 이상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현대의 미술사에 보다 신선한 자극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회화, 부조, 아트콜라보레이션, 제이엔제이크루 그래피티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 등이 선보인다. ■ 이도영
제이플로우_BLACKPANTHER_디지털 프린트_71×54cm_2011
제이플로우_RATFINK_디지털 프린트_71×54cm_2011

제이플로우와 그래피티 ●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타투이스트 제이플로우의『Dust ink』展이 열린다. 2001년 힙합문화가 소규모의 씬을 만들어가고 있을 시점에 시작된 JNJCREW(제이플로우와 알타임조 2인 그래피티 팀)결성과 함께 JayFlow의 그래피티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위문화로 불리어지던 그래피티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했던 제이플로우는 길거리의 예술행위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그래피티를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많은 전시와 퍼포먼스, 커머셜 작업 등을 통해 제이플로우만의 그래피티 스타일을 구축해 왔으며 이러한 독특한 그래피티 작업방식은 다른 그래피티 작가들과의 차별화를 주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 초석을 다지고 있던 JNJCREW 는2007년 독일작가 MOGI와 SEOULMATES 프로젝트 팀을 기획하면서 2008년 독일 arte TV와 함께 한국을 알리는 그래피티 투어를 하게 된다.

제이플로우_DRAGON_디지털 프린트_71×54cm_2011
제이플로우_Mr.HOTDOG_혼합재료_162×96cm_2012

이 영상이 독일에 알려지면서 MOGI와 JNJCREW 의 프로젝트 팀 SEOUL MATES크루는 독일 각 지역과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등지에 걸쳐 각 지역의 유명작가들과의 협업작업을 위한 투어에 초청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JNJCREW는 인터내셔널 그래피티 팀 STICK –UP-KIDS의 멤버로 영입되면서 보다 국제적인 활동을 활발히 하게 된다. 많은 유명 해외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그래피티에 대한, 보다 넓은 시각과 경험을 얻게 되어 국내에서 한정적인, 서양의 그래피티 만을 동경하는 그래피티 보다 국제적으로 독자적인 그래피티 스타일을 추구하는 제이플로우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이플로우는 그래피티 작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캐릭터와 스타일들을 연구해 왔으며 타투, 브랜드 아트디렉터 등의 그래피티 외적인 작업들을 동반하고 있다.

제이플로우_BABY_포멕스에 디지털 프린트_160×80cm_2012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스트릿컬쳐(거리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지나칠 수 있는 장난기 가득한 스트릿컬쳐는 단시간에 그려지는 낙서가 아닙니다. 갤러리에 작품으로 걸려지기까지 불특정다수의 대중 앞에서 싸워온 작가의 삶이 투영된 순수한 작업입니다. 환영 받지 못하는 작업일지라도 모든 예술은 사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래피티를 시작하던 공릉동 작은 굴다리가 기억납니다. 작은 연습장이 아닌 커다란 벽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고 뿌듯해 했던 그때의 열정을 잊지 않길 바라는 그래피티 작가 제이플로우로 남고 싶습니다." ■ 제이플로우

2012.08.24 16:46:21 / Good : 391 + Good

zabel

  • 작성시각: 2012.08.28 15: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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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계절 Emotional Season




박지혜展 / PARKJIHYE / 朴智惠 / painting 2012_0828 ▶ 2012_0910



박지혜_꿈의 장면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스칼라티움 아트 스페이스 SCALATIUM ART SPACE 서울 강남구 역삼동 828-10번지 Tel. +82.2.501.6016 www.scalatium.com



21세기 인간 리포트: 박지혜의 우울과 상실의 초상화1. 일상 읽기 - 박지혜는 인간의 실존적인 삶의 모습들을 관찰한다.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인간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마치 기자가 사건의 전황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기사를 쓰듯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스냅사진의 잘 짜여진 구도와 같은 일상의 다시 읽기 작업에는 작가가 주인공이 되거나 작가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은 하나의 스토리를 갖는 주인공이 된다. 작가의 화면들에는 인물과 풍경이 연극의 무대를 보는 듯 특정한 행위가 벌어지는 상황의 묘사가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인물들에게는 표정이 없다.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들의 슬픔들이 화면 가득 부유하고 산란하고 있다. ● 작가가 읽어내는 현대 인간의 삶은 단편적이고 현실 자체를 뛰어넘는 정신적으로 승화되거나 강조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근작에 보여주는「꿈의 장면」,「목욕탕」,「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날」과 같은 작품들은 핑크의 사용이 강조된 인물들과 나무, 풍경의 묘사는 인간 내면의 불안과 우울을 끄집어내기 위한 표현적 수단으로 보여진다. 화면을 분절시키고 구획시킴으로써, 그 사이에 습합되거나 남아있는 색 조각들의 편린들은 이 공간이 기억의 공간이거나 가상의 공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 사실 박지혜의 화면은 색선과 색면의 조각 맞춤에서 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마치 색의 조화와 범주를 실험하고 증명하고 있듯이, 색들은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간극을 드러내고 숨기고 가려지고 다시 덧칠해 지고 있다. 이들의 조합들에서 시뮤레이트 된 가상공간에서 경험하게 되는 색의 강조나 픽셀의 조합과 같은 흔적들을 경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이는 현실과 가상이 서로 침범하고 교합되어 시,공간이 교차되는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을 보여주게 된다.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 외부세계의 단상들이 내밀한 내부세계로 침투함으로써 겪게 되는 인간 정신을 닮은 실존의 색이며 풍경인 것이다. ● 이러한 작가의 화면은 70년대 이후 일었던 독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 新表現主義)의 일련선상에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요르그 임멘도르프(Jorg Immendorff) 나 게오르그 바젤리츠(Georg Baselitz)와 같은 이들 신표현주의자들은 인간현실에 관한 연약하고 모호한 인간 감정을 보여주며 도시사회의 현상들을 거칠지만 선명하고 명료한 색의 배열들로 구성한다. 도시 사회의 인간 단상들을 거칠고 분명하게 또는 우화적인 연극성을 동반한 작가의 작품에는 신표현주의의 특징들을 읽어 낼 수 있다. ● 작가가 강조하고 있는 강화되고 자유로운 분명한 색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 풍경들에 머무른 작가의 시선의 시점과 풍경에 닿은 뜨거운 응시의 감성이 사물들에 들러붙어 있음을 알게 된다. 외부 풍경에 맟닿은 작가의 내밀한 시선이 살아있는 유기체의 순간과 흐름으로 변환되고 있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극화(劇化)된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인간 실존의 표정과, 음미되어 정화된 따뜻한 색의 온도로서 유기적으로 꿈을 꾸듯 사유하는 색 면의 공간이다.
박지혜_목욕탕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7×130.3cm_2012
박지혜_그해_캔버스에 유채_80.3×116cm_2010
박지혜_장마철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2

2. 이방인에 관한 성찰(省察) - 작가의 화면에는 물질문명 속에서 소외된 인간에 관한 문학성이 강조된 이야기들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습관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문득 자신을 성찰할 때 우리는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우울하고 공허하고 슬픈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부조리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자체에 관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다. 유한의 죽음은 우리를 다시 내면으로 응시하게 되고 삶의 의미들을 재고하게 된다. ●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이방인』은 뫼르소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부조리한 인간 삶의 실존적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통보를 받았음에도 죽음에 관한 현실적 슬픔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읖조리는 뫼르소는 공허하고 우울한 현대인의 감정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현재도 과거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낯설고 슬픈 인간 군상들의 표정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 까뮈가 보여주는 주인공이 겪는 감정의 궤적들은 박지혜가 그리고 있는 불안, 행복, 일상, 가족, 자신의 모습들과 닮아 있다. 이는 모두 유한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이방인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들인 것이다. 고뇌하는 젊은 작가의 시선에 닿은 외부 세계는 다시 자신의 내부와 교류되고 있다. 그의 조형과 색이 공간과 시간의 교차로써 교류되는 것처럼, 작가의 시선과 사유는 내밀한 안과 외부의 감정과 정서들로 교차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주목한 인간 부조리의 상황 그 자체가 객체로써 인식되고 다시 주체로서의 작가에게로 환원되고 재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낯선 이방인으로서의 객체, 타자를 그대로 직시하고 그 상황과 존재 가치를 긍정하고 절대적인 가치평가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나의 상황과 나의 내면으로 끌고 들어와 그 의미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가 말하고 있는 타자의 존재로써 주체가 존재하고, 타자가 관계함으로써 주체가 성립되는 안과 밖의 유기적인 관계와 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 타자로서의 환경과 외부의 삶은 거울과 같이 작가의 시선을 반추하고 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작가 자신으로 향하는 성찰과, 유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대면하게 하는 비밀의 빗장과 같은 것으로 작용한다. ● 이는 박지혜의 작품이 동시대미술이 고민하고 있는 조형의 문제, 내용의 문제 그리고 전기론적인 작가의 경험과 삶의 내용이 작품과의 관계설정에 유기적인 영향과 침투를 보여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삶에 관한 성숙된 응시와 성찰이 얻은 결과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품은 거칠지만 힘찬 색의 운용과 감동의 파장이 긴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현대물질 문화 속에서 생명이라는 유기적인 인간의 실존성에 관한 고민과 성찰의 변주들을 앞으로 기대하고 싶다. (2012.7) ■ 박옥생
박지혜_히키코모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1×116.8cm_2011
박지혜_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날_캔버스에 유채_65.2×91cm_2012


내 작업은 한 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 시선이 닿는 현실을 표현한다.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관적 시선을 갖기까지는 많은 사람과 사회현상에 영향을 받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형성된 개인의 기질, 성격은 그 안에서 개성과 고유성을 갖게 되고, 가시적 현상을 자기만의 특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시선은 객관화된 타자와 세계를 향하기도 하지만, 나의 자아와 정서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주관적 세계가 객관화된 세계와 만나 뒤섞이기도 하고, 객관적 세계를 주관적 시선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본 작업과정은 주로 경험에 따른 직관에 상상을 더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경험은 모두가 경험하는 보편적인 사건에서부터 소수의 사람이 경험하는 특수한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사건으로부터 나온 현실적인 이미지를 인물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주관적 감성에 의한 색채사용과 패턴을 넣으므로 비현실화 시켜, 도피적 의미와 더불어 현실의 연속된 공간을 표현한다. 이 공간 안에서 일상적 풍경이나 사소한 형태를 호기심 어리게 혹은, 우울하고 불안정하게 바라보며 허무함을 표출하기도 한다. ■ 박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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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디의 인상 Normandy Impression




조택호展 / CHOTAIKHO / 趙澤鎬 / painting 2012_0828 ▶ 2012_0916



조택호_노르망디의 봄 Spring in Normand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300cm_2010


초대일시 / 2012_0828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점과 색의 유희 ● 작가에게 있어 그리고 싶은 욕망은 가득하나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를 때는, 사랑하고픈 욕구는 있으나 그 대상이 없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힘든 시간이다. 오래 전부터 친숙했던 팔레트의 물감들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작가는 방황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화실 바닥에 떨어진 물감 방울이 그려낸 작은 동그라미를 발견하고부터 조택호는 새로운 조형의 문을 열었다. 작가가 방황과 좌절 속에서 만난, 보잘것없이 몸을 던져 자국을 남긴 동그란 형상이 승화되어 만들어진 그림을 보며, 나는 이것이 작가와 관람자를 매우 아름답고 신비로운 색의 정원으로 인도하리라 믿는다. 그것은 산과 들, 바다 같기도 하고 늪이나 갯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치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 속에서 보았던 미지의 세계가 아련하게 기억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택호_피에로의 모자 Pierrot Ha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1

나는 동그란 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조택호의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황홀함을 느꼈으며, 어쩌면 그가 그토록 기다려 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다듬어지지 않은 화면에 반복적으로 찍어 내려간 작은 원과 - 작가는 점이라 말하고 있지만 나는 차라리 원에 가깝게 느껴진다 - 대지가 그려진 그림들은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같기도 하고 이슬 같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산소 같다고 말하고 싶다.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따라가노라면 공기 중에 부유하는 색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나는 조택호의 그림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조택호_이자벨 Isabel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2

이전에 그의 작품에서 보였던 확신에 찬 조형 세계는 지금은 절제되고 평온하며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조금씩 반복되어 쌓아 올린 붓놀림은 예전처럼 강한 조형성에 가까워 지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미적, 인간적 형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작가는 자연의 본질을 더 자유롭고 아름답게 표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조택호의 그림은 동그란 점의 유희 같다. 사실, 동그라미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대를 의미한다. 그러한 동그란 점이 무작위로 화폭 위에 뿌려진 모습은 셀 수 없이 많은 분자들이 공기처럼 떠도는 느낌을 주며, 마치 우주의 신비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그의 그림에는 향기가 있으며 또한 편안함이 존재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끌어들여 그림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그것이 내가 조택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조택호_도빌의 아침 Morning in Deauvill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0

조택호의 그림을 보면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상주의와 픽셀이다.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프리즘과 카메라의 발명이 인상주의 화풍을 낳게 되었다면,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컴퓨터의 발달, 그리고 디지털 시대를 통하여 예술가들도 사물을 보는 방식이 달라졌고 따라서 표현 방법도 달라졌다. 언뜻 보면 조택호의 작업이 요즘 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는 디지털을 이용한 변형된 픽셀의 그림 같아 보인다.
조택호_붉은 노르망디 Red Normand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300cm_2009

그러나 그의 그림은 마음과 눈에 의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픽셀일 뿐이며 과학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초기의 모네가 그리던 인상주의도 아니고, 쇠라의 비율에 맞춰 색점을 찍은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는 세잔느처럼, 보이는 물체를 자신의 지적이고 감각적인 반응대로 찍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잔느의 테이블 위의 사과는 곧 떨어져 내릴 것 같고 정물은 상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원근법도 없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매력이 있다.
조택호_브로캉트의 여인 Woman of Brocant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200cm_2010
조택호_노르망디의 소녀들 Girls of Normand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둘로 접힌 그림_130×390cm_2011

그와 같이 조택호의 그림도 세잔느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신기술이 지배하는 오늘날 그 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점과 색으로 소박하게 다가와 우리들의 눈과 가슴 속으로 스며들 때에 한 화가의 영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에블린 아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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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리_최정훈 2인展




2012_0829 ▶ 2012_0904



최예리_나와 너_종이에 수채_29.7×21cm_2012


초대일시 / 2012_082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1159 gallery.hwabong.com



살피고 살펴도 나와 너는 한치도 닮은 곳이 없거늘 같은 옷을 입힌다 하여 나와 너의 영혼이 같아지는 것은 아니리라. 나와 너를 묶으려 하는 사슬의 무력함을 비웃으며 춤을 추고 노래하자. 나와 너의 다름을 기뻐하자! ■ 최예리
최예리_나는지금_종이에 수채_29.7×21cm_2012
최예리_방학을 기다리며_종이에 수채_29.7×21cm_2012
최예리_셀카찍기_종이에 수채_29.7×21cm_2012
최예리-내일은_종이에 수채_29.7×21cm_2012
최예리_나에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2
최예리_너를보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2
최예리_얼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2

작품 쉽게 즐기기-짝쓉기1) "나의 관심사는 내 눈에 비친 세상의 욕망과 여러 웃기는 상황들을 보고 즐기고 배설하는 것이다!" 보고-즐기고-싸고-채집하고-나의 방식으로 나의 분신들을 창조한다. ● GREAT PASSION-NO.1/HEY!!ARE TOU READY?/COUNTER ATTACK/WONDERFUL POWER/MEMENT MORI/위대한 열정-NO.1/반격/아름다운 똥침파워/죽음을 기억하라!/웁쓰!/내 머리의 뚜껑이 열리던 날/나의 머리에는 노랑오리가 산다!/세상에 똥침을 가하는 남자!/세상의 부를 획득한 된장녀!/복날에 인기 짱인 DOG!/세상일에 뚜껑 열리는 안경잡이!/인터넷을 지배하는 전사들!/화장실 샤워기 청소용 인간!/등... ● 현실에서 보고 느끼는 인간적인 욕구와 욕망 열망 등을 내가 꼴리는 대로 그리고 있다.
최정훈_"GREAT PASSION-NO.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0×310cm_2011
최정훈_"HEY!! ARE TOU READ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0×310cm_2011
최정훈_"COUNTER ATTAC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0×310cm_2011

2) "블랙/옐로/화이트"를 쓰는 이유 - 명시성, 주목성을 노골적으로 노린 색이다! ● 3) "타이틀문자" - GREAT PASSION-NO.1/HEY!!ARE TOU READY?/COUNTER ATTACK/WONDERFUL POWER/MEMENT MORI/ WHOOPS!/GROW RICH!/COUNTER ATTACK!/SUPER POWER!/BRAINS POWER!/FREEDOM!/HELLO! WHOOPS! BOB!/은 작품의 제목을 적은 것이다. 흔히 보는 광고포스터를 응용하였다고 생각하면 매우 쉽다. ● 4) "블랙라인" - 작품의 배경에는 블랙의 선들이 꿈틀댄다. 스모그(세상의 잡 먼지)또는 나의 분신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표현한 것이다.
최정훈_"WONDERFUL PO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10×140cm_2011
최정훈_"MEMENTO MOR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00×140cm_2011
최정훈_"GREAT PASSION-NO.1 PHOTO-1"
최정훈_"GREAT PASSION-NO.1 PHOTO-2"

5) "채집" - 사냥꾼이 사냥을 하듯 나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나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손바닥만한 포스트 잇에 적고 채집한다. 나에게 있어 포스트 잇은 사냥총이며 펜은 총알인 셈이다. ● 미치도록 그리고 미치도록 배설한 후 창조한다..그것이 나의 무한(無限) 상상력이다. ● 6) "GREAT FREEDOM" -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나의 언어와 표현법으로! ■ 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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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커레이드


Masquerade展 2012_0830 ▶ 2012_1110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앨리슨 잭슨 Alison Jackson_Diana, Dodi and Baby_C 프린트_110×110cm_1998

초대일시 / 2012_0830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엘리노어 앤틴 Eleanor Antin(미국)_찰스 아틀라스 Charles Atlas(미국) 폴린 부드리+레나트 로렌즈 Pauline Boundry+Renate Lorenz(독일) 레이 보워리 Leigh Bowery(호주)_앨리슨 잭슨 Alison Jackson(영국) 딕 제웰 Dick Jewell(영국)_강영호 Youngho Kang(한국) 존 켈리 John Kelly(미국)_카타르지나 코지라 Katarzyna Kozyra(폴란드) 니키 리 Nikki S.Lee(한국)_크리스토퍼 마코스 Christopher Makos(미국) 야수마사 모리무라 Yasumasa Morimura(일본)_토모코 사와다 Tomoko Sawada(일본) 잭 스미스 Jack Smith(미국)_밍 웅 Ming Wong(싱가포르)

후원 / 코리아나 화장품_서울문화재단

관람료 / 일반_3,000원 / 학생_2,000원 / 단체(10인이상)_1,000원 할인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추석연휴 휴관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Coreana Museum of Art, space*c 서울 강남구 신사동 627-8번지 Tel. +82.2.547.9177 www.spacec.co.kr


『마스커레이드 Masquerade』는 신화와 역사, 미술사의 텍스트와 대중문화 등을 참조하며 자기변형 및 변장과 역할극을 시도해온 1990년대 이후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 영상과 사진 전시이다. 자신의 신체에 새겨진 성, 인종, 민족, 계급의 지표를 다른 이의 것으로 변형하고, 자아와 타자,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인간과 비현실적 존재 등을 넘나드는 일명 '페르소나 퍼포먼스persona performance'는 모호하고 열린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정치학의 궤도를 추적하면서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퀴어 이론 등의 탈모더니즘 논의와 적극적으로 연합해왔다.
크리스토퍼 마코스 Christopher Makos_Altered Image / Andy in Drag_ 젤라틴 실버 프린트_ 61×50.8cm_1981
위◁ 레이 보워리 Leigh Bowery_Spend Spend Spend_퍼포먼스_1985 위▷ 찰스 아틀라스 Charles Atlas_teech_단채널 비디오_00:07:47_1998 아래◁ 딕 제웰 Dick Jewell_What's your reaction to the show_단채널 비디오_00:40:00_1988 아래▷ 딕 제웰 Dick Jewell_What's your reaction to the show_단채널 비디오_00:40:00_1988
엘리노어 앤틴 Eleanor Antin_from the Archive of Modern Art_단채널 비디오설치_00:18:00_1975 잭 스미스 Jack Smith_Flaming Creatures_단채널 비디오_00:46:00_1963

변장을 기반으로 이번 전시에 참여한 16명의 국내외 작가들은 퍼포먼스 아티스트, 연극 배우, 사진가, 디자이너, 댄서, 가수, 디렉터 등의 다중 역할을 자신들의 삶에서 실질적으로 수행 하는 자들이며, 또한 몇몇은 남성과 여성의 경계가 해체된 월경(越境)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에 깊이 내재된 가변성과 유동성을 예술의 이름아래 끊임없이, 그리고 종종 과잉의 형태로 노출시키고 탈구축과 해체, 전복을 즐거이 수행한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무장소non-place, 무정형formless 으로서 자신을 경계 지웠던 신체적 사회적 범주들을 탈 자연화하고 재의미화하는 소위 '카멜레온 아티스트들'이다.
존 켈리 John Kelly_Muse Ascending a Staircase_3채널 비디오_00:35:00_2012
카타르지나 코지라 Katarzyna Kozyra_Summertale_단채널 비디오_00:19:58_2008
밍 웅 Ming Wong_Devo partire. Domani I must go tomorrow_다채널 비디오설치_00:12:58_2010

가면 뒤의 가면, 이성의 옷입기, 민족과 인종의 중첩, 대중문화에 투사된 주인공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 참여 작가들은 마스크 아래 또 다른 마스크를 쓴 듯 지속적으로 자기내부에 타자적 성향을 내면화하고 분리된 경계선을 지우면서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을 노출시킨다. 특히「Lady Warhol」사진 시리즈를 비롯하여 잭 스미스의「Flaming Creatures」와 카타르지나 코지라, 폴린 부드리&레나트 로렌즈의 작품 등 전시 작품 중 상당수는 가면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복장도착과 양성성을 시각적 전략으로 삼아 탈 경계적인 다중적 성,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을 의미화한다. 크로스 드레서crossdresser, 트랜스베스타이트transvestitie, 드래그drag 등으로 제시되는 이들의 작품은 젠더 정체성의 허구를 지적하고 나아가 고정된 정체성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도한다. 또한 야수마사 모리무라, 앨리노어 앤틴 등 마스커레이드로 주조된 다수의 작품들은 서구와 동양의 관계를 탈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재정의하고 성과 계급, 인종적 정체성이 제도와 지식체계에 의해 범주화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울러 앨리슨 잭슨과 밍 웅 등의 사진과 영상작품은 대중문화의 정형화된 인물이 재생산되는 방식에 문화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기도 한다.
◁ 니키 리 Nikki S.Lee_The Punk Project(7)_디지털 프린트_71.5×54cm_1997 ▷ 강영호 Youngho Kang_The king who grows the chin _파인아트페이퍼에 피그먼트 잉크_150×160cm_2009
폴린 부드리&레나트 로렌즈 Pauline Boundry&Renate Lorenz_Normal Work_단채널 영상_2007
토모코 사와다 Tomoko Sawada_School Days_C 프린트_13×18cm_2004
야수마사 모리무라 Yasumasa Morimura_Gift of sea_HD 비디오설치_00:23:00_2010

이번 전시의 주요 개념인 '가장하기masquerade'는 바흐친Mikhail Bakhtin이 언급하듯 사회적 규범에 대항하고 감정을 해방시킬 수 있는 '카니발'의 개념과 관계 있다. 자기변형을 골자로 하는 잭 스미스, 레이 보워리, 존 켈리 등의 페르소나 퍼포먼스들은 연극적 퍼포먼스, 춤, 노래, 패션 쇼 등과 혼성을 이룬 카니발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예술가가 작가, 연출가, 배우로 분하여 자신의 창작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러한『마스커레이드 Masquerade』로서의 예술방식은 질서와 억압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드러내고 있다. ■ 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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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연구 Study of Green


강홍구展 / KANGHONGGOO / 姜洪求 / photography 2012_0830 ▶ 2012_0919 / 월요일 휴관


강홍구_study of green-spring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902d | 강홍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30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 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번지 Tel. +82.2.745.1644 www.oneandj.com


녹색 연구 Study of Green-支離滅裂 ● 녹색에 관한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6년 전 쯤이다. 봄이 되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야산 나무들의 새잎에 반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누군가는 그 이유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럴 것이다. 그 놀랍고 다양한 녹색들을 카메라를 들고 찍으면서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사진이 아니라 사진 위에 채색하는 시도를 2007년에 처음 했다. 몇 점 만들어본 다음에 같은 방법을 이용해 2010년『그 집』전시를 했다. 이번 전시 준비를 하면서도 생각은 단순했다. 사 월말 오월 초의 나무들이 보여주는 엄청나게 다양한 녹색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표현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 되면서 생각은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깊어지거나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복잡해졌다. 예를 들면 인간은 어떻게 식물들을 그려왔나? 그 배경은 무엇인가? 따위부터 아주 오래된 개인적인 녹색에 대한 기억까지. 그뿐 아니라 녹색 성장, 녹색 인증 따위의 이념적 상투어들과 어렸을 때 식물을 가지고 놀던 기억까지 뒤섞이면서 드디어 지리멸렬해졌다.
강홍구_study of green- rice field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강홍구_study of green-small field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지리멸렬은 그래서 이 전시의 열쇠말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지리멸렬은 우리시대의 열쇠말이기도 하다. 그 잘났다는 이념도, 종교도 다른 어떤 무엇도 이 재난과도 같은 인간의 삶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삶을 끝장낼 방법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욕망을 줄이는 것. 그러나 실천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은 시스템화 되어 사회적 현상을 넘어 후천성 생물학적 DNA로 변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인간은 그렇게 살도록 프로그램된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섣부른 생물학적 운명론이 되는 것 같아 그렇기는 하지만.
강홍구_study of green- eagle peak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강홍구_study of green- wide leaf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예언서인 탐정, 범죄 소설과 SF소설들은 직접, 혹은 비유적으로 인간에 관해 말한다. 예를 들면 "알프레드 엘튼 반 보그트"가 쓴『우주선 비이글호』에 나오는 우주 생물들을 역사적 단계로 구분하는 방법의 경우가 흥미롭다. 우주선에 탑승한 한 역사학자는 초기농민기적 특성을 가진 우주 생물들은 종족보존을 본능적으로 우선시하기 때문에 위기의 상황에서도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추론을 한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우주선을 위기에서 구한다. 토인비의 역사구분 방식의 영향을 받았다는데 이런 관점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떨까? 인간의 문명은 어떤 단계에 해당될까? 초기농민기를 넘어섰을까? 이토록 지리멸렬하고 분열적이며 어리석은 삶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혹시 자기파괴적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닐까?
강홍구_study of green- grove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강홍구_study of green- red line_피그먼트 프린트에 아크릴채색_2012

어쨌든 녹색연구는 작업실을 출발해 북한산에 오르는 산책 길에 대한 일종의 기록이다. 그 과정에서 농업본능을 버리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작은 채소 밭, 논, 농작물에서 나무와 숲을 지나 산꼭대기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그것들로 다 말하지 못하는 녹색에 대한 기억과 여러 생각 등은 드로잉과 설치를 이용했다. 물론 전시 자체는 잘 조직 된 것은 아니다. 그럴 생각도 별로 없었다. ●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글도 역시 지리멸렬하다. 하지만 글과 전시가 지리멸렬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지리멸렬한 세계에서 지리멸렬한 전시란 필연적이지 않은가? ■ 강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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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얼굴 Unfamiliar Face


박은하展 / PARKYUNA / 朴垠河 / painting 2012_0830 ▶ 2012_0923 / 월요일 휴관


박은하_망가진 꽃밭 broken garde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8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은하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월요일 휴관

지와이엠프로젝트 GYMproject 서울 강남구 청담동 네이처포엠 311호 Tel. +82.2.3443.9276 www.gympr.co.kr


현실적인 면에서 소원성취가 불가능한 유년동경의 백일몽은 퇴행이라는 심리적 방위기제(防衛機制)의 한 방편이기에, 유년시절은 종종 관념상의 유희공간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유년은 전복된 소년시절에 의해 일그러져버린 일시적 안락의 흔적 따위로 전락된 채 , 오히려 내 의지와 선택으로 이루어진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과거로부터 도주 가능한 퇴행의식이 되어 있었다. 캔버스를 마주해온 시간이 한해 두해 길어질수록 점차 이러한 의식의 위화감에 부딪히기 시작하면서, 이를 개인적인 기록으로 풀어내 보고자 하였다.
박은하_모르는 얼굴#1 unfamiliar face #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80×80cm_2012
박은하_모르는 얼굴#2 unfamiliar face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80×80cm_2012
박은하_모르는 얼굴#3 unfamiliar face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80×80cm_2012

「모르는 얼굴」은 모친을 대상으로 한 연작의 제목으로, 17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동안 조우한적 없는 대상의 외면에 대한 '모름'과 그 기간과 현재 대상의 상황에 대한 '모름', 그리고 이를 야기했던 모친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모름'을 의미한다.「망가진 꽃밭」은 모친의 일기 중 유일하게 기억하는 문장에서 가져온 제목으로, 일종의 심리적 풍경을 구체화한 작업이다. 그리고 이 4점을 그리기 위해서 나는 뚜렷한 계기를 필요로 하였는데, 여기에 사용된 재료가 2010년『이 사람을 보라』展에서 날개를 형상화했던 벽화이다. 폭 160cm, 총 길이 9M의 천에 그려진 벽화를 무작위로 찢은 결과 총 66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각각의 크기에 맞추어 프레임을 하고 벽면에 재구축하였는데, 이 때 빈 캔버스를 먼저 중앙에 위치하고 이로부터 확장하는 이미지로 구성한 뒤 이와 연결되는 선들로 선위(先位)했던 캔버스에 스케치하는 방식으로 4점을 작업하였다. 이는 현대인의 파토스로 이룩된 날개를 해체하여 미시서사로 역구성하는 과정으로, 주로 거시적 시점에서 불특정다수를 소재로 했던 지난 작업에서 개인적 서사로의 형식적 대상전환을 암시하는 동시에 이들의 상관관계와 필연성의 시각화를 도모한다.
박은하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가변크기_2012
박은하_무제 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유채_가변크기_2012

개인사를 작업에 개입시킬수록 사적인 감상과 주관성에 매몰되기 쉽지 않은가하는 우려는 정의감과 열정,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숙함과 치기로 가득했던 시기적 특성과 결합하면서, 작업의 방향이 점점 거대담론 쪽으로 치우치게 되다보니, 정작 개인적인 진실들을 더 사소한 것들로 스스로 폄하해버리는 경향이 발생하는 듯했다. 사실 직접적으로 부딪히면서 괴로운 지점들은 모두 사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들이며, 다분히 관념적이라 할 수 있는 거대서사란 결국 삶 속에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모르는 얼굴」연작은 이러한 간극에서 기인되는 작위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불편하고 난처한 기억의 시점으로부터 현실의 위기를 거꾸로 되새겨가는 작업의 일보이다. ■ 박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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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8.30 12: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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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하태범展 / HATAEBUM / 河泰汎 / mixed media 2012_0830 ▶ 2012_1007 / 월요일,추석연휴 휴관




하태범_yemen_피그먼트 프린트_100×1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715g | 하태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30_목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운생동건축사사무소㈜_월간객석

관람시간 / 11:00am~07:30pm / 월요일,추석연휴(9/29~10/1) 휴관

아트스페이스 갤러리 정미소 ART SPACE GALLERY JUNGMISO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82.2.743.5378 www.galleryjungmiso.co.kr




1974년생, 서울에서 거주하며 작품활동. 하태범은 인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끔찍한 각종의 사건들로 파생된 공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오브제들이 순식간에 무너지고 폐허가 된 현장공간을 화면에 담아낸다. 그의 최근작품 「WHITE 2008~2011」시리즈에서 일관된 시간성은 모든 현상의 마지막 단계이다. 따라서 그 화면에는 폐허의 공허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으며, 쓸쓸하고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그렇기에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들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태범_playing war game2_단채널 영상_00:05:45_2012
하태범_쓰나미_피그먼트 프린트_120×180cm_2012

그는 이제 더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폐허와 공허로 가득 찬 사진의 현장성을 구축하는데, 이는 현실(Actuality)과 가상(Imagination)의 경계에 놓여 있는 지점을 드러냄으로써 제시된다. 하태범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의 문제를 가지고 현실공간에 위치한 가상적인 오브제들의 배치에 관한 문제를 꾸준히 다루었으며, 그러한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진을 사용했다.
하태범_이라크바쿠바폭탄테러_100×150cm_2012
하태범_인도네시아지진_100×150cm_2012

그는 그간 자신의 작업에서 실재(Real)와 가상(Virtual) 사이의 단순하지만 오류를 범하기 쉬운 대립적 상황들을 고려해 왔는데, 이러한 실재와 가상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의 사진초기작「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2007~2008」과 「ECKE(모퉁이) 2005」 에서부터 출발한다. 현실공간에 존재했던 다양한 사건과 사고의 장면을 작은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공간을 메우는 오브제들을 하얗게 탈색시킨다. 사진을 완성하기 위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실재 공간성의 문제를 덮어버리며, 그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실재성을 지워가면서 자신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하태범_콜롬비아경찰서테러_80×120cm_2012

이를 통해 그는 어떠한 감정과 환경적인 요인의 개입 없이 사건사고 자체의 현실적인 문제를 고스란히 화면에 담아낸다. 가상은 실재가 아니라 현실에 대립된다. 그렇기에 그는 실재의 사건, 사고를 자신의 사진을 통해 제시하기 위해 또 다른 제3의 공간 상정을 위한 현실화(Actuality) 작업에 몰두한다. 따라서 「Ich sehe was, was du nicht siehst」 「White」 등의 작은 모형을 촬영하면서 획득된 사진 이미지들은 작은 모형에 불과하지만 실제 현실공간으로 인식된다. 또한 여기서 발생하는 실재와 가상의 간극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제작한 모형에서 좁혀질 수 있으며, 그 간극에 자신의 판타지인 상상과 가상의 영역을 부분적으로 침투시킨다. 따라서 이곳에는 실제 사건도, 모형을 제작했던 다양한 오브제의 흔적들 그 모두가 실존 이상의 부재를 경험하게 하는 공간으로 남게 된다. ■ 이은주


이메일 galleryjungmiso@gmail.com 홈페이지 www.galleryjungmiso.co.kr 페이스북 www.facebook.com/Artspacegalleryjungmiso Tel. +82.2.743.5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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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 시퀀스






劇,極,克 Sequence展 2012_0831 ▶ 2012_0917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831_금요일_05:30pm

참여작가 김도균_박대조_이지연 김영배_박민준_서상익 유선태_하이경_황용진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시각예술가들은 자신의 한계 혹은 자기와의 싸움을 극복(克)해 내어야만 새로운 창작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중 얻어지는 화면은 함축된 이미지를 통한 스토리텔링으로 매우 극적(劇)인 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오늘의 결과물인 예술 창작품은 일정의 한계를 벗어난 극(極)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극적인 작업은 완성이라는 단어를 서술어로 갖게 되어 그들의 고뇌와 모든 에너지의 종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 완성으로 펼쳐 보여주는 작품은 무언가를 향해가는 연속된 사건들이나 순서의 차례들일 지도 모른다. 하여 오늘 완성된 작품은 절정을 향해가는 중간 중간의 장면들. 시퀀스(Sequence)라 부르기로 한다. ● 極的 Sequence - 이들이 포착한 장면은 매우 극적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모두 목격했던 장면이다. 인간의 삶의 범주인 도시와 숲, 그 속의 익명성들과 부조리한 실존의 사실이다. 우리가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작가들은 시각적 아름다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우리 삶의 실제 모습을 매우 긴장감 있게 보여 준다. 이들의 접근 방식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벗어났다. 그들의 이미지를 통하면 보다 넓은 時空을 만나게 된다. 무형에서의 유형으로 창조된 환경보다 훨씬 더 동의를 구하기 힘든 유형에서 새로운 유형으로의 전이. 이것은 구획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절대 찰라의 순간이며 行間일 수도 있다. 그들이 실행에 옮긴 카메라의 셔터 타이밍은 일상의 평면이 지닌 매우 極的인 절대 순간을 새롭게 조성하여 화면이라는 공간 위에 조성된다. 날카롭지 않지만 예민하고, 적나라하지 않아도 단호하다.
김도균_sf.Be-3_나무 프레임에 C 프린트_160×200cm_2010

김도균의 도시 화면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라졌으나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도시의 건물과 차 창밖의 풍경은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빌딩의 한 모서리. 작가의 의도로 공간은 쪼개지고 새로운 시각적 환경을 제시한다. 달리는 차 창밖의 풍경은 구체적 환경이 사라지고 오로지 속도와 색만으로 표현되었다.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가치를 전달하는 것. 김도균이 오늘 목격한 지점의 뚜렷한 예술성이다.
이지연_Walking on air 2_피그먼트 프린트_140×180cm_2012

이지연은 조각난 도시는 반복되는 오늘의 우리다. 화면 속 인물은 특정인이 아닌 익명인이며, 바로 '나'다. 우리가 선택하여 벌어졌다고 믿는 오늘의 풍경은 사실 다분히 사회적이며, 규칙적이고, 소속된 개체일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는 뛰어난 색감과 리듬이 있어 보는 동안은 무겁지 않게 실존의 문제를 탐닉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여러 컷의 장면을 나열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작가의 감각적, 직관적 스킬이 매우 뛰어나야만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모아 놓은 여러 조각의 화면은 결과적으로 색감과 조화로운 구성으로 인해 마치 페인팅을 다루고 있는 것과 같은 정서와 느낌을 잘 전달해 낸다.
박대조_Human & Nature_혼합재료, 라이트 박스_101×154_2011

박대조는 인물과 자연을 화해(和諧)롭게 풀었다. 인간이 자처한 소외와 방임의 댓가를 스스로가 받아 공허라는 현대에 익숙한 단어로 안일하게 귀결지으려 할 때 자연은 그 대안으로 등장하며 자정작용을 인간에게 제시한다. 생각보다 강한 우리 내면의 힘은 결국 자연에게서 왔으며, 그로 인해 치유받고 정화될 수 있다. 박대조는 이러한 지점의 소통구조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아름답고 유연한 가능성을 내비친다. 인간의 여러 신체기관 중 내면을 가늠하기 가장 적절한 기관인 눈을 선택하여, 보여지는 눈과 보고자 하는 눈의 상을 망막에 맺힌 상이 아닌 눈동자 그 자체로 해결한다. 쉽지 않으나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도 아니다. 예술이기에 가능한 제시다. 예술가가 먼저 목격한 문제와 대안. 아름다움으로 보되 진심으로 느끼면 실천 가능한 구조다. ● 劇的 Sequence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삶은 진실이며 다큐멘터리고, 사실이지만 허구보다 더 치열하고 극적이다. 시각을 통해 말하는 작가들이 선택한 풍경은 다분히 시어(詩語)처럼 함축적이며 스틸 컷처럼 순간적이다. 그래서 이들의 풍경은 사실 탈일상적이고, 초일상적인 풍경이다. 현실과 환영의 중간 지점인 극적 구성은 공간의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고취시키고, 순간에 대한 시선을 더욱 집중시켜 작가의 창조적 현실 재현을 사실의 구현이라 믿게 만든다. 있을 법한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 것은 있을 수도 있다는 전제 조건 하에 가능한 일이고, 그 있을 수 있음은 다름 아닌 우리 삶의 무한한 스펙트럼 중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 재현일 것이다.
김영배_Botanical Garden_캔버스에 유채_130×170cm_2011

김영배는 화면은 있었거나 있을 법한 이야기로 구성된다. 그러나 모두 극(劇)이다. 작가는 모아둔 사진이나 스케치, 혹은 메모를 보면서 부분적인 소제들을 머릿속으로 조합을 해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면 작업을 시작한다. 소설이나 시나리오의 작법과 같다. 김영배의 관심사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안목을 시각적으로 확장시킴에 있다. 정적인 화면 속에는 언제나 인물이 중심이 되고 그 인물의 감정을 읽게 해 줄 도구들이 등장한다. 접근법은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평범함에 이례적으로 상징성을 띠게 만들어 작가가 평범한 인물을 특별하게 선택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선택적 장면이 갖는 힘은 일단 보고 나면 우리가 직접 목격했거나 체험한 장면처럼 견고하게 정신에 남아 있게 되는데, 이를 통해 결국엔 지속적인 삶의 궤적까지 사유하게 되는 영향까지 미치게 됨에 그 회화적 힘이 있다는 것이다.
박민준_No hope no fear_리넨에 유채_66.04×101.6cm_2011

박민준의 회화는 완전한 극적 삶의 환영이다. 작가는 타로카드를 재해석 하며 삶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회화로 재현한다. 박민준은 작품을 하기에 앞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결정해 놓고 있으며, 절대로 우연한 것을 다루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며, 그림을 진행시키는 상황에서 여백으로 처리될 수 있는 부분을 결코 간과하지 않아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화면에 집중하고 그 속내를 읽어 나갈 수 있는 작법을 유지한다. 박민준이 선택한 타로는 일상의 사건들이 서로 관련되어 나타나게 될 예지적 설정이다. 설정을 제외한 등장인물과 상황, 장소는 마치 벌어진 일처럼 보여지나 작가자신을 숨긴 채 피사체로 하여금 화자가 되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용히 주지시키는 묘한 힘을 갖는다. 그가 화자 뒤어 숨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 관한 이야기지만 매우 미묘한 감정의 것들이라 우리는 더욱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듯 그의 그림을 몰입하게 되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게 된다.
서상익_익숙한 풍경 2_캔버스에 유채_89.4×130.3cm_2012

서상익. 속임수 : 현실로 돌아온 척한 극. 그는 이제 극적 상황을 벗어나 현실을 그린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사실이라기 보다 현대인의 속성에 가깝다. 설득력을 가진 자체의 공간 체계를 만들어 놓았으나 그의 공간은 모호하다. 매우 현실적인 환경과 결코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는 상황을 병렬시키거나 결합시켜 우리를 혼돈에 빠지게 한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사적인 대중(private public)이다. 대중의 무리에 속하나 그들은 익명성이 부각되기 보단 개인이 주가 되는 매우 사적인 부류다. 이 사적인 대중을 통해 서상익은 사실로 보이는 부분(공간과 인물)과 가설인 부분(인물의 심리상태)을 적절히 혼합하여 자신의 발언을 극적으로 이끈다. 가설과 몽환이 보다 적극적이었던 이전의 작업보다 현실화된 작가의 시선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바로 동시대의 화두가 되는 물음표들이다. ● 克的 Sequence - 실존하는 일상의 기물들 사이사이 허상의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작가는 현실과 그렇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시각리뷰를 화면을 통해 제시한다. 이들은 인식이 갖고 있는 대상이나 공간에 대한 선입견에 가까운 오해들로부터 극복해내어(克) 직감적으로 느끼는 실체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오랜 사유과 관찰을 수순으로 가지고 화면이던, 나무던, 하늘이던 그의 손끝이 움직이기 시작하기를 작가 스스로도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는 시간, 드디어 우리는 그들의 심상 속에 자리 잡은 상을 목격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극(克)적 풍경들이다.
유선태_말과 글(3년간의 흔적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2

유선태의 화면엔 작가 작업실의 소도구들과 작가가 수년 간 수집한 물건들, 붓과 화구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현실이다. 아니다. 현실이 아니다. 작가는 그 현실 속에서 다시 환영을 부여하며 이미 조성된 환경을 이겨내 극적인 풍경을 조성한다. 아름답고, 심오하지만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시간과 공간, 현실과 환영, 서사와 은유가 경계 없이 펼쳐진 새로운 스펙트럼은 유선태의 풍만한 사유체계를 농익은 작가의 손끝으로 드러낸다. 아카데믹한 기법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작가의 속내는 사실 매우 유쾌하고 진취적인 사고의 기발함에 기인한다.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개인사적 맥락의 소재의 관계들이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그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진부한 과거가 아닌, 오늘의 나를 존재케 하는 살아 있는 호흡이다.
하이경_섬_캔버스에 혼합재료_51×43cm_2011

하이경이 다루는 풍경은 익숙한 거리와 익숙한 거리다. 아니다. 보기만 했을 뿐 인지의 단계까진 다다르지 못한 스쳐간 풍경들이다. 세필로 획득한 화면의 밀도는 팽팽한 긴장감과 탄성을 제공하며, 고요한 풍경을 집중토록 도와준다. 경복궁과 삼청동에서 우리는 언제 나뭇가지의 그림자까지 목격해 보았는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 귀중한 부제들이었으나 현실의 우리는 그저 스치기만 했을 뿐이다. 예술의 가치는 이런 것이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아름다움으로 승격시키는 힘. 하이경이 담아내고 있는 풍경에서 전이되는 소리와 냄새, 햇살의 농도와 거리의 온도가 바로 작가가 가지고 있는 극적인 시각이며, 그것을 규모있게 담아낸 화면이 바로 극적인 장면이다.
황용진_My Landscape-10103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황용진은 보다 내밀하게 안으로 들어온 풍경을 담는다. 내 방 책장 안의 오래된 책들과 소품들. 그들을 통해 작가의 머릿속과 이상향마저도 유기적으로 오늘의 현재 진행형처럼 꿈틀거린다. 동화도 되고 환상도 된다. 오늘을 바탕으로 삼으나 머지 않을 미래인 오늘이며, 잠들지 않을 초심이다. 나와 오늘을 이겨야만 가능한 극(克)적 화면이다. 화면 속 관계들의 밀도와 속도는 작가의 심미적 리듬을 타고 때론 경쾌하게 때로는 정적으로 결말에 도달된다. 그러한 구성은 소재가 갖고 있는 물성을 극복하고 현실이라는 정답에 가까운 상황을 극복하여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화면을 이루어 낸다. 아날로그적인 소재들이 아카데믹한 붓질을 통해 조심스레 화면을 운용하면서 작가는 무엇에 대한 기원을 올리는 듯 의식적인 행위를 지속해 나간다. 그의 화면이 오늘의 작가로써의 기도가 되는 의미다. ● 극적 시퀀스의 작가들은 첨예한 감각의 시선을 가졌다. 주어진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에 이들의 시선의 주목이 시작된다. 날카롭게 바라보고, 미묘한 감정을 먼저 포착해 낸다. 익숙한 풍경이, 사물이, 사건이 이들의 시선을 만나 기묘하고, 찬란하며, 극적인 사유로의 전환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작가의 시선에서 포착된 일상의 날 것은 그들의 관찰을 통해 미분화되고, 그들의 감정을 통해 예리하게 분석된다. 그 분석은 감정적일 수도, 사변적일수도 있으나 대부분 혹독한 외로움과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야만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되며, 뜨거운 감정의 몰입과 집착 같은 사유의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만 짐작하고 있던 막연한 이미지를 예술작품이라는 현실적 구현으로 제시 가능해 진다. ■ 김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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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가든 Plastic Garden






이세현展 / LEESEAHYUN / 李世賢 / painting 2012_0829 ▶ 2012_1014 / 월요일 휴관




이세현_플라스틱 가든 Plastic Garden展_학고재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721d | 이세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29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일요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Hakgojae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Tel. +82.720.1524~6 hakgojae.com




Plastic Garden, 자연에 역사를 입히다. ● 이세현의 붉은 산수는 환각을 일으킬 정도로 비주얼이 강하다. 몇 년 전 런던에서 본 전시가 그랬다. 조그만 흰 방에 붉은 산수 네 점을 걸었는데, 흰 벽에 반사된 붉은색이 영롱한 형광 색을 띠면서 방 전체가 형언할 수 없는 핑크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SF 영화에 UFO가 등장할 때처럼 비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 그런 몽환을 헤치고 한 발 더 다가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사실적이고 익숙한 풍경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 주변의 자연, 건물, 마을, 사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아주 현실적이다. 그 현실은 아름답지만 슬프기도 하다.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다. 그림의 어떤 부분은 마치 몸속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뽑아내어 그려놓은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자연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된다. 한 장의 그림 속에 인간과 자연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건축, 음악이 가지지 못한, 성공적인 회화 작품만이 누릴 수 있는 큰 장점이자 특권이다. ● 이런 장점들은 오래된 편견 혹은 편의적 구분을 극복한 지점에서 태어났다. 작가가 문제 삼는 가장 큰 편견은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에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 동양화의 삼원법은 풍경의 앞면, 뒷면, 윗면을 인간이 원하는 각도로 절개해서 봉합해놓은, 자연을 억압하고 이기적으로 지배하려는, 인간이 자연에 가한 가장 큰 시지각적 폭력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동양적 사유가 절대 자연 친화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서양보다 인간적이지도 못하다. 이런 비판은 동양 지식인 계층의 취미이자 애완의 대상이었던 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분재는 인간이 자연에 가장 직접적으로 손을 댄 조작이자 조각이다. 동양이 추구한 자연미의 최고 경지라는 분재에서 그는 아름다움보다는 인간의 잔혹함과 억압을 읽어내고 있다. 이런 고정관념에 대한 '살부 행위'를 통해서 탄생한 것이 붉은 산수와 분재 산수다. 이런 생각들은 다시 분재 조각으로 이어진다. ● 그의 작업은 그리기에 내재된 인간의 폭력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자연에 각인된 역사의 상처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며,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내보인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의 상처 모두를 아우른다. 강한 비주얼에만 이목을 빼앗긴다면 작업 속에 녹아 있는 녹록지 않은 생각들을 놓치기 십상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자신의 작업 속에서 내용과 형식의 일치점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는 동양과 서양, 인간과 자연을 넘나들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완결적으로 만들어냈다. 그의 생각들은 상당히 도발적이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가 일궈낸 형식에는 선배들도 박수를 보낼 만하다. 이세현은 이런 작업들을 통해 자신만의 소화기관과 배설기관을 가진 작가가 되었다. ■ 윤재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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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ression






김계완展 / KIMKYEWAN / 金癸完 / painting 2012_0831 ▶ 2012_0913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계완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3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Expression ● 얼굴을 감추다. 누군가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난 그의 살갗과도 같은 모조품을 갖게 되었다. 그와 닮아 있는 이 모조품은 부서지기 쉽고 불안하며 위태로워 보인다. 난 그것을 관찰한다. 그의 본질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를 닮은 이 얇은 모조품을 열심히 관찰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의 모습일까? 그의 가면일까, 그의 살갗에 비친 내 모습일까? ● 가면은 자신을 포장하는 도구이다. 역할을 정하고 그 역할에 맞는 행동과 대사를 하는 가면극에서 배우의 내적 인간성은 감추어지고 정해진 역할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의 작품 과정에서 사용하는 은박지는 거울과 같이 주변의 반사되는 색을 비추어 담는다. 반사되는 색이란 그 대상을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비추어져 보이는 것이다. 가면을 보는 나와 주위의 색들이 구깃구깃한 작은 면들 하나하나에 담겨진다. 얼굴이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듯이, 무표정한 가면이 은박에 반사된 색에 의해서 전혀 다른 표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예리한 빛의 변화가 대상의 표정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80.3cm_2012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2

은박지의 반짝임과 얇고 쉽게 구겨지는 특성을 이용해서 사람의 얼굴에 씌워 가면(假面)을 만들었다. 자기 마음대로 변형할 수 있다는 것은 조심스럽고 불안정해서 오히려 나에게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은박가면은 사진적 기록과 자료로 남게 되고, 자료는 다시 나의 손에 의해 캔버스로 옮겨지며 이 과정에서 나의 의도성과 특수한 상황을 만들기 위한 개량작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화면에 표현되는 것은 정해진 구획(區劃)위에 놓인 물감들이다. 평면위에 스케치 작업을 할 때 확실한 면의 구성을 위해 세밀한 구획을 그려나간다. 그리고 각자의 색들을 정해진 구획 위에 올리면서 작품은 완성되어 간다. 어떨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들이 놓이기도 한다.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그 색들은 조화롭게 어우러져 빛을 나타내는 것이다.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3cm_2011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2×45.5cm_2012

사람들은 대상을 바라볼 때 항상 자신을 비추어서 본다. 아는 만큼 보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그 대상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타인에 투사된 나의 형상(색상표현)의 본질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대상의 진짜 모습일까? 이러한 물음에서 시작된 나의 작품 속의 재현은 형상적 사물의 자연스러운 묘사와 상황의 재구성으로 의미를 다양화하고 모호하게 얽힘으로써 다양한 해석을 유도한다. ■ 김계완
김계완_express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60.6cm_2012
김계완_상상(imagi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_2010



Conceals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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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 세계 Chronic Circumstance






차영석展 / CHAYOUNGSEOK / 車泳錫 / painting 2012_0831 ▶ 2012_0921 / 월요일 휴관




습관적 세계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113g | 차영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83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0길 4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습관적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설 ● 난초 화분, 도자기, 러시아 인형, 곤충, 새. 여러 사물들이 화면 위에 늘어서 있다. 작가 차영석의 화면에서는 눈에 꽤나 익은 풍경이다. 건강을 위해서나 여행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으는 다양한 수집품들을 채집하여 그린 그의 연작 「건강한 정물」에서 이미 이 사물들의 풍경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습관적 세계』전에서 보여주는 그의 신작들에서도 이 사물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이전의 「건강한 정물」과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같아 보인다. 「건강한 정물」과 「습관적 세계」를 가르는 그 미세한 차이는 무엇일까?(본문 중 「습관적 세계」로 언급되는 작품들은 모두 『습관적 세계』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신작을 지칭한다.) 이 글은 이 질문에 대한 가설 하나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차영석_망각한 변형_종이에 연필, 금색펜_156×147cm_2012

『습관적 세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차이는 색의 도입이다. 「건강한 정물」은 종이에 연필로 그린 흑백의 그림이었다. 그러나 『습관적 세계』는 그 흑백 톤에 금색을 과감히 받아들인다. 금색의 도입으로 화면은 불가피하게 얼마간의 장식성뿐만 아니라 관능성마저 띤다. 특히 까만 구슬이 등장하는 작품들의 경우 금색과의 대조를 통해 이러한 특성이 한층 더 두드러진다.
차영석_은밀한 습관_종이에 연필, 금색펜_135×200cm_2012

또 다른 차이점으로 화면구성상의 변화의 조짐을 들 수 있는데, 이 점을 보다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건강한 정물」은 타인의 수집품들을 채집하고 나열하기에 숨가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관한 사물들이 한데 모여 있어 생기는 어색함과 기묘함, 그리고 그것이 자아내는 우스꽝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각 사물들을 서로 연결 짓고자 하는 의도는 거의 전무했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물들이 서로 무관하게 한 자리에 흩뿌려진 광경의 기이함에 강조점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작에서는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에 대한 고려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암시하는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습관적 세계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2

사물의 채집 및 나열의 강박적인 열의가 이전에 비해 누그러지면서 집적의 정도가 한결 여유로워지고 화면은 보다 많은 여백을 받아들인다. 고립된 개별 사물들 사이의 빈 공간이 단절을 의미했던 「건강한 정물」과는 달리, 「습관적 세계」에서 이 공백은 화면 전체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완급을 조절한다. 또한 러시아 인형의 크기를 저마다 달리하여 구성의 강약을 꾀하는가 하면, 작은 식물과 실에 꿰어진 구슬, 늘어지고 엉킨 실, 늘어선 성냥개비들이 사물과 사물 사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연결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나열보다는 전체화면의 조화를 염두에 두고 각 사물을 안배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차영석_망각한 변형_종이에 연필, 금색펜_143×137cm_2012

구성의 이 같은 변화는 「건강한 정물」과는 달리, 사물들이 함께 빚어내는 전체적인 '세계'에 방점을 찍는다. 그러나 전체를 강조한다는 것이 일관된 내러티브로 묶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서술구조는 「건강한 정물」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따라서 「습관적 세계」는 「건강한 정물」에 비하면 조화롭지만, 전체를 일괄하는 내러티브가 있는 작품에 비하면 조화롭지 않다. 「습관적 세계」를 이렇듯 모호하게 아우르고 있는 구성 원리는 대체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작가가 지닌 취향의 '습관'이다. 「건강한 정물」이라는 재료를 재가공한 「습관적 세계」는 특정한 의미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그림이 아닌 바로 그 만큼 작가 자신의 취향에 솔직하게 기댄다.
차영석_망각한 변형_종이에 연필, 금색펜_110×79cm_2012

작가는 각 사물을 모티프로 삼아 화면 위에 하나하나 배치하며 그려나가면서 화면 전체를 자신이 원하는 형상대로 마치 천을 짜듯 직조한다. 그리고 도자기와 러시아 인형, 작품 곳곳에 배치된 원형 모티프에 이르기까지 그는 화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을 패턴으로 채운다. 그 때 짧은 선을 무수히 반복하여 그리는 세밀하고 정교한 손놀림이 거의 모든 사물의 표피 위에 예외 없이 펼쳐진다. 결국 「습관적 세계」를 그리면 그릴수록 「건강한 정물」이 노출하는 사물에 대한 특정 개인의 취향이나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나 시대의 취향이 지워지고 패턴화와 미세함을 향한 작가 자신의 취향의 습관 또는 습관적인 취향만이 오롯이 남는다. 그 「습관적 세계」 안에서 그는 사물의 옷을 입은 자신의 취향과 습관을 가만히 응시하며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습관적 세계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2

이것은 그러나 아직은 하나의 가설일 따름이다. 「습관적 세계」를 이제 겨우 한 번 그것도 살짝 엿보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가설의 운명은 앞으로 「습관적 세계」가 어떻게 쌓이고 펼쳐질지에 달려있다. 이 가설이 참으로 증명된다면 뿌듯하겠지만, 한편으로 「습관적 세계」가 이 가설로부터 보기 좋게 빠져나가기를 기대하는 마음 또한 적지 않다.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 주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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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sterius






이승애展 / LEESEUNGAE / 李昇愛 / drawing 2012_0831 ▶ 2012_1007 / 월요일 휴관




이승애_Kid A(I'm ok)_종이에 연필_162.8×406.4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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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83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 ARARIO GALLERY SEOUL samcheong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gallery.co.kr




이승애의 개인전 『The Monsterius』가 오는 8월 31일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2008년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열린 『The Monster』 이후 4년 만의 개인전이다. 기존 이승애가 창조했던 괴물들은 인간 내면의 깊고 어두운 심리를 드러내 보여주며 보는 이들에게 깊은 공감을 선사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기존 이승애의 드로잉에서 보여 지던 것 보다 더 짜임새가 있고 복합적인 구도를 띄고 있으며, 동시대 사회구조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종류의 몬스터를 선보인다.
이승애_Unrave_종이에 연필_162.8×101.6cm_2012

이승애는 독특하게 연필과 종이만을 재료로 사용하는 드로잉으로 많이 알려졌다. 작가는 연필이 쉽게 부러지고 뭉게지기 쉬운 가장 연약한 재료이기 때문에 연필을 사용한다고 밝힌다. 이승애가 창조하는 몬스터는 인간 심연의 가장 연약한 감정들과 대치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작가는 그것들을 창조하기 위한 재료로서 연필과 종이를 선택하였다. 기존 작업 속의 몬스터는 내면의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과 싸우는 개체로, 작가의 온전한 상상력 속에서 탄생하였다. 이들은 인간 내면에 두려움, 슬픔과 같은 감정이 생기면 그것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지니고 감정과 맞서 싸운다. 따라서 이들의 형태는 승리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신체의 각 부분들이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거나 특화되어 있다. 또 작가가 창조한 다른 종류의 몬스터는 현실 세계 속의 '소수'의 모습을 대변한다. 노숙자나 거리의 부랑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은 아주 작고 마른 몬스터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몬스터 시리즈의 개개는 앙상한 뼈대 위에 가죽이 붙어있는 작고 연약한 모습이다. 이들은 미라와도 같이 말라있으며, 날개는 바스러져 떨어져 있다. 작가는 이들을 표본화해 상자에 담거나 액자로 만들었다.
이승애_Optimistic_종이에 연필_203.2×162.8cm_2012

심리적인 내면의 감정들과 연계된 몬스터를 창조하고 그 것들에서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내던 이승애의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보다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면모를 갖추었다. 신작에는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를 찾고자 하는 작가의 열망과 노력들이 드로잉으로 풀어져 있다. 따라서 개개의 몬스터를 그리던 기존의 작업들에 비해 신작들은 보다 복잡하며 사회적인 구조를 띄고 있으며, 어두운 감정에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벗어나 긍정적이며 결연한 면을 보인다. 또한, 작품 속 캐릭터도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개체가 아닌, 현실적인 개체들의 형상에 기반을 둔다. 나무나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자세히 보면 괴물이거나, 나무의 형태를 가진 상체에 사슴으로 보이는 하체가 결합된 모습 등 결합과 변이를 반복한 돌연변이의 양상을 보인다.
이승애_Nice Dream_종이보드에 연필_310×170cm_2008

한편 기존 작품들이 개별 몬스터들의 특성과 특성에 기반한 형태를 만드는 캐릭터 작업이 주였다면, 이번 전시는 작품 내부의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스타일이다. 마치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의 요소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테마에 기반한 이야기를 마치 글처럼 전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림 속에는 작가와 몬스터와의 교류에 의해 생겨난 암호들이 곳곳에 퍼져 있으며, 배경도 하나의 무대처럼 연출되어 제시된다. 설정된 하나의 풍경 속에 여러 몬스터들은 서로 얽혀 있거나 각자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각각의 사연들이 합쳐져 하나의 세상을 이룬다. 이런 연유로 예전 작품이 몬스터들에 대한 초상이었다면 이번 작품들은 몬스터들에 대한 풍경이라 하겠다.
이승애_Phantom pain 1_종이에 연필_243.9×101.6cm_2010

이승애(b. 1979)는 성신여자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2005년 갤러리 현대(Gallery Hyundai), 2006년 두아트 갤러리(Do-Art Gallery), 2008년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Arario Gallery Seoul samcheong)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2008년 일본의 라이브 앤 모리스 갤러리(Gallery Live & Moris), 2009년 일민 미술관(Ilmin Museum of Art )과 서울시립 미술관(Seoul Museum of Art), 2011년 소마 미술관(Soma Museum of Art) 등 다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오는 2012년 8월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에서 4년만의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며 2012년 광저우 트리엔날레(Guangzhou Triennial) 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 아라리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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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실현불가능한 일반화 Gaps, Unrealistic Generals




백승우展 / BACKSEUNGWOO / 白承祐 / photography 2012_0831 ▶ 2012_0916



백승우_RS-#001_디지털 프린트_150×202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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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831_금요일_05:00pm

기획 / 한금현_가나아트센터

관람료 대인 5,000원 / 소인(초,중생) 3,000원 / 7세 미만, 70세 이상 무료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틈, 실현불가능한 일반화 ● 개인의 교육적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는 어떤 사람의 취향을 결정한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그를 둘러싼 여러 사회적인 요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이나 사회적 배경은 한 사람의 취향을 정하고 다른 예술적인 감성을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감성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문화적 소양을 지녔느냐에 달려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의 소극적인 정열 혹은 흥미에 대한 결핍은 자본주의의 속된 대중화 현상에서 야기된다. 개인의 취향은 어떤 의미로는 "자유"와 같은 것으로 인간이 지닌 잠재성과 창조성의 표현과 같은 것이다. 유행을 따른다던가 규격에 맞추는 행위, 이러한 일반화의 사회적 현상은 일종의 상업주의에서 양산된 물질애착적 증세이며 진정한 자유가 정신적으로는 결핍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중문화, 그리고 포플리즘과 같은 현대 문화 현상들이 이러한 차이를 간과하게 한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사람들의 소극적인 만족과 흥미의 결핍은 자본주의적인 대중화 현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상적인 삶은 영화, 보도자료 등 각종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여 우리의 뇌를 세뇌시킨다. 상업화된 문화산업은 어떤 특정한 가치를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 다른 사고와 행동의 차이가 설 자리가 없다. 아도르노는 이를 "규격화" 혹은 "일반화"라고 한다. 어떤 것을 일반화시키는 행위는 아주 냉정하고 저항할 수 조차 없는 전지전능의 권력과 같다. 자유의지란 여기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아무런 저항조차 없이 무반응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질만능적인 동시대의 시대상은 실로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성적인 비판의식을 갖는다고 해도 실제의 삶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의지가 거대권력의 앞에서 완전하게 사그라져 버리는 것도 아니다. 백승우의 이번 전시는 완전한 규격화 혹은 일반화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제어하는 상업주의적 일반화가 실로 가능한가에 대해 시각적인 발화를 한다. 일반화된 체계 사이사이의 틈을 시각적으로 잡아내는 것이 백승우 작업의 쟁점이다.
백승우_RS-#002_디지털 프린트_150×215cm_2012

전시는 13개로 조각난 사진으로 재구성된 「Utopia-#032」(2011)로 시작된다. 백승우는 같은 이미지의 동일한 프린트 데이터를 13개국의 현상소에 보내 프린트를 의뢰했다. 같은 데이터의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색감은 13개가 하나도 같지 않다. 작가는 이 13개의 프린트를 조합하여 하나의 사진 작업으로 재구성한다. 얼핏 보면 하나의 사진인 것 같지만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13개의 조각은 색이 조금씩 다르다. 사진은 즉각적으로 하나의 이미지로 보여지기 위해 프린트의 미묘한 차이를 보듬어 안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차이는 사진적 스펙터클 앞에 묻혀 버린다. 「Utopia-#032」에서 전체이미지를 구성하는 13개 프린트의 색감의 차이는 일반화의 기준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차이들을 관객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한다. 사실 이러한 기계적인 차이는 일상생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가 발견했을 때 차이를 인정한다기보다는 체계에서 벗어난 오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오점이라기 보다는 규격화의 불완전성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백승우_RS-#003_디지털 프린트_150×227cm_2012

「Re-Establishing Shot」(2012)는 이번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으로 도시전경을 담은 대형 사진 작업이다. 서울, 부산, 동경 등 국내외의 대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역시 자세히 보면 이미지의 시각적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의 이미지는 「Utopia-#032」와 마찬가지로 조각난 사진들로 재구성되어 있다. 사진적 스펙터클로 관객을 유인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도시인지를 구별하는 지역적인 특성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도시 이미지가 지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 상징들이 지워져 있고 학습된 경험과 개인적 추억이 연결될 상징적 고리를 찾을 수 없다. 사진을 읽어내는 기호들은 작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삭제되어 있고 이미지 겉모습만 남아 있다. 여기서 백승우는 이미지를 일반화시키며 그 안의 차이와 체계를 뒤섞어 버리는 시도를 한다. 마치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대하는 것과 같이 사진 이미지는 읽혀지는 요소가 제거되었고 즉각적인 이미지와의 대면만 이루어지는 부유하는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사진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지워졌으니 이미지는 특수성을 잃고 일반화되어 버린다. 차이, 구별, 다름, 취향이 사라져버리는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일반화의 경향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듯 하다.
백승우_RS-#005_디지털 프린트_120×218cm_2012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먼(Nikals Luhmann)은 사회적 체계들을 분석하면서 사회적 대상에 대한 분석보다는 그 체계 안에서의 일반화의 문제, 그리고 그로 야기되는 소통의 문제에 대한 연구를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하였다. 루먼은 체계를 기계적, 유기적, 심리적, 사회적 체계로 분류하며, 생물학적인 체계에서부터 실제로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를 광범위하게 하였다. 특히 일반론에 대하는 구별과 차이는 사회전반의 일반론 틈새 안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놓여있다. 또한 사회의 체계는 인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작동되는 요소들로 인해 야기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소통이 가장 큰 쟁점이 된다. 현대사회가 다양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이전의 분류체계가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하나의 타이틀을 지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학자이면서 예술가이고 과학자이면서 종교인이 된다. 이러한 복합적이고 통합적인 사회 분류 체계 현상 앞에서 기존의 기준에 의한 경직된 분류체계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구별과 차이는 일반화에 가려져야 하는 오점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위한 시작점이 된다. 차이는 인간의 욕망의 가장 원초적인 자유의지의 결과이고 구별은 존재를 증명하게 하는 기본적인 근거이기 때문이다.
백승우_BL-#205_디지털 프린트_80×95cm_2012

언어의 일반화와 그 안의 모순 ● 언어는 지시 대상 자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 체계에 대한 개념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사과라는 말은 실재로 존재하는 사과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고 과일이고 어떤 맛이 나는 우리의 경험 안에 존재하는 사과의 심상의 이미지를 기호화한 개념의 실재이다. 그러나 언어로 지각되는 개념은 소통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사과의 개념을 일반화시켜 유사한 사과의 모든 종류를 사과라 지칭하고 이는 다른 과일과 다르게 이름 붙여 그 차이로 인해 사회 안에서 소통된다. 그러나 언어의 소통에는 문제가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것은 실재의 대상이 아니라 미리 지각된 것으로 간주된 것, 즉, 이미 경험된 사과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는 개개인의 기억 속에 같은 사과가 존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과라는 품목에는 벗어나지 않지만 개인의 특정한 경험과 기억을 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지식을 담보로 한 체계를 소통시키기 위한 상징적 개념적 도구일 뿐이고 지식체계를 넘어서는 개인의 감성, 의식, 기억 등은 일반화된 언어로는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 백승우가 2002년 북한에서 찍은 스냅사진을 확대한 「Blow Up」(2005-2007)과 인터넷의 각종 폭발 장면을 재구성한 「Blow up Ⅱ」(2010)를 같이 전시하는 것은 일종의 말장난을 시각화한 것이다. 영어로 'Blow up'은 '폭발하다'라는 뜻이며 동시에 '확대하다'라는 뜻도 있다. 백승우가 이 두 다른 시리즈를 같은 장소에서 보여주는 것은 일종의 동어반복적인 말장난을 시각화하는 시도이다. 같은 말이 다르게 반복하듯이 두 개의 시리즈를 섞어서 보여주며,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그리고 불완전한 소통을 유머스럽게 보여준다. 폭발하고 있는 이미지나 확대된 북한 사진은 드라마틱한 순간이 사진으로 포착된 이미지들이다. 폭발 전과 후의 엄청난 변화와 에너지 발산의 격동적인 순간은 정지된 사진이미지에 고정되며 대단한 스펙터클로 제공된다. 폭발의 이미지 자체도 강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사진적인 조작을 가해 드라마틱한 장면을 더 드라마틱하게 연출한다. 그로 인해 이미지는 물리적 변화 당시의 엄청난 충격과 공포의 순간을 벗어 개념화된 실재로 접어들게 된다. 관객은 더 이상 실재의 감동은 느낄 수 없고 담담하게 재구성된 사진이미지로만 대면하게 된다. 북한에서 찍은 사진을 확대한 '폭발'도 시각적으로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사진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폭발과 같이 확대 전과 다른 이미지로 탈바꿈된다. 이는 북한의 감시의 체계를 벗어나서 경계에 있는 이미지로 작가에 의해 재탄생하게 된다. 물리적인 변화의 순간에 개입한 작가의 사진적 조작은 개인의 시선이 삽입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백승우_BL-#203_디지털 프린트_70×67cm_2012

어떤 의미에서 백승우는 이미지를 언어와 같이 쓰고 있다. 시각이미지도 언어와 같이 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상징체계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특히 사진은 실제를 사실처럼 재현하는 듯하여, 사회에서 소통될 수 있는 기호의 상징성에 가장 근접한 이미지이다. 동시에 사진은 어떤 시간과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경험을 기록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사진에 있어서 순간의 포착은 가족 사진에서 기록물사진에 이르기까지 어느 종류의 사진에서도 이루어진다. 아무리 강력한 체계나 권력의 기록물로 쓰인다 해도 사진에 대한 연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롤랑 바르트는 사진의 광기를 없애려면 사진을 예술로 승화시키든지 아니면 철저히 객관적인 기록물로 만들어 버려야 된다고 했지만 송곳을 찌르듯이 지나가는 순간은 어린 시절 사진 뿐 아니라 주민등록 사진에서도 있다. 사진이 갖고 있는 이러한 이중적인 매체의 특징은 백승우 사진의 전반에 걸쳐 충돌하고 있다. 기록과 순간포착, 공적이면서 사적인 이미지, 냉철한 객관성과 사진적 스펙터클, 그리고 이러한 사진적인 논점들이 전반에 걸쳐 있으면서 일반화와 차이의 문제가 백승우의 『틈, 실현불가능한 일반화』전시의 기저에 깔려 있다. 체계는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체계는 그 안의 요소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재생산시키는가? 체계 안에서 차이들은 어떻게 일반화되고 소멸되는가? 차이를 소멸한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유로운 의지를 박탈당하는 것인데 이는 가능한 것인가? 백승우는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일반화라는 대전제에 가려 간과되고 있는 차이들을 사진으로 시각화한다. ■ 한금현
백승우_BL-#209_디지털 프린트_100×128cm_2012


Gaps, Unrealistic Gener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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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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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다:기억되다 Abandoned:Engraved






이민경展 / LEEMINKYUNG / 李旼徑 / installation.photography 2012_0831 ▶ 2012_0913




이민경_높은집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66×10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민경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1_토요일_04:00pm

작가와의 만남 / 2012_0907_금요일_07:00pm

주최 /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

관람시간 / 01:00pm~07:00pm

사진공간 배다리 갤러리 BAEDARI PHOTO GALLARY 인천시 동구 금곡동 10-12번지 Tel. +82.10.5400.0897 www.photobaedari.com




공간에 투영된 내면성에 대한 탐색 ● 공간에 종속된다는 것은 머물 수 있는 어딘가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으로 안정감을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필수조건일 것이다. 특히 주거공간은 누군가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해석되는 자본의 상징이기도 하다. 삶의 질과 연결되는 이 공간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몇 번이고 이동 되며, 그 이동이 반복될 동안 주거 공간 역시 헐어지고 세워짐이 교차된다. 오랜 기간 삶을 함께 한 공간은 기억이 겹겹이 축적되어있어 낡은 벽지, 벗겨진 페인트, 창틀의 프레임에 맞게 보여 지는 풍경까지 추억의 세포들처럼 기억이 엉겨 붙은 장소이다. 삶의 일부였던 공간이 허물어 질 때 느끼는 아련함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상실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민경_붉은집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72×100cm_2012
이민경_더큰집(두번째)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85.5×100cm_2012

이민경이 건네는 공간은 이러한 아련함을 되살리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곧 허물어질 그 곳을 담담히 향하고 있으나 대상을 바라보는 마음은 기억의 고향을 잃어버린 누군가의 마음과 연결되고 있다. 억지스럽게 해석하려 하지 않아도 사진을 마주하면 내면에 간직된 각자의 고유한 흔적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공간모형으로 재구성되면서 그 집중력을 더 자극시키고 있다. 인간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공허함은 작가의 구성방식에 의해 또렷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의식하고 있지 않다가도 특정 음악이나 냄새만으로 과거의 추억이 불쑥 떠오르듯 이민경의 이미지 역시 내면에 고착화된 기억을 반복 재생시킨다. 대상을 통한 지각은 보는 이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사진 속 대상을 만나는 관자들의 기억도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민경의 비워진 공간에서는 서로 상이한 기억의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공간속에 투영된 사적인 삶의 기억을 만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민경_푸른집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64×100cm_2012

가시적인 공간이 유실되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 역시 변화되어 왔음을 네모난 집 세모난 집 네모난 집(2012), 단단한 집(2012)이란 나레이션 작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외적인 변화보다 내면의 변화과정이 오늘의 자아를 형성하였듯 이민경의 작업은 공간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바라보게 한다. 어느 곳에 뿌리내려 에너지를 공급받고, 어디를 바라보며 삶을 이어왔는지, 주어진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그 중심을 찾아다녔던 기억을 만나게 된다. 거주와 이동을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심리적인 안식처가 되는 공간을 각자의 내면에 스스로 구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 시대의 물리적인 공간은 더 이상 따뜻한 고향의 모습으로 기다려주지 않는 듯하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표류자로 내면의 공간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이민경은 기억의 저장고에서 부피는 크지 않으나 밀도만큼은 진하게 내제된 그것을 끄집어내고 있다.
이민경_두개의 창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56×130cm_2012
이민경_하얀벽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71×130cm_2012

사진 속의 집들은 어느 시대 유행했었던 아주 번듯하게 세워졌을 다가구 주택들이다. 늘 그렇듯 건축은 시대의 부속물로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민경의 작업은 공간에 비추어 이러한 시대를 읽어내고 있다. 비워진 공간은 과거를 환기시키면서도 새롭게 구축될 무엇인가를 예측하기도 한다. 현 시대가 추구하는 모습으로 세워질 건물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노라 말하게 될 것이다. 높이 치솟아 오른 오늘날의 주거공간은 누군가의 기억의 고향이 되어주다, 시간이 흐른 어느 시대에 또다시 인간의 부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철거되고 허물어지게 됨을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낡은 것을 허무는 권력은 안식할 곳을 찾아야하는 이들에겐 끊임없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돌아오게 된다. 보금자리를 위한 개발과 욕망이 머물 곳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민경_inside003_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53×35cm_2012

하지만 작품을 마주하는 우리의 내면에도 그 양면성이 늘 존재하지 않는가. 철거되어 사라지는 공간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듯 아쉬워 붙잡고 싶으나, 이제는 불편해진 그 곳에 계속해서 종속되고 싶지는 않은 이중적인 내면과도 마주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낡은 것들은 한 장의 사진처럼 그저 삶의 한 역사로만 남아주기를 현 시대는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을 탐구하는 이민경의 작업은 그 장소의 범주가 확장되고 있다. 이는 공간을 대하는 작가의 담론 역시 점차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인과 사회의 정체성, 우리의 기억에 담긴 그 불확실한 감정들을 이민경은 보다 선명하게 대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안내하고 있다. 협소했던 기억의 잔재가 새로운 의식을 개척하는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짐작하면서 작가의 다음 도약이 기대된다. ■ 허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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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GARDEN - 그것은 아름답다






정양희展 / CHONGYANGHEE / 鄭凉姬 / sculpture 2012_0901 ▶ 2012_0906




정양희_새가 되고 싶은 소녀_목분점토, 아크릴채색_90×35×35c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2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전시 작가 공모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0:00am~05: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구체관절인형, 대리인에서 단독자까지 ● 사람의 형상을 원본으로 삼는 인형(人形)은 생명 없는 무기체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호흡을 불어넣어 마치 생명체에 준하는 인형을 창조하려는 심혈을 바친 과거사는 유구하다. 흔히 태엽이 장착된 자동인형의 움직임은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착시하도록 유도한다. 18세기의 어느 인형 제작자는 인형과 함께 감방에 수감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당사자인 자크 드로(Jaquet Droz)가 그런 형벌에 쳐해진 사유는 그가 만든 자동인형을 종교재판이 이단으로 간주해서다. 생명체를 빚는 신의 영역을 침해한 죗값. 어디까지 진실인진 알 수 없으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도 일찍 여읜 친딸 프랑신을 애도하려고 시계태엽으로 움직이는 딸을 닮은 안드로이드를 제작했다는 일설이 전해진다. ● 인위적 움직임을 부착하지 않고서 사람의 수준으로 인형을 승격시키려는 또 다른 방법은 사람을 빼닮거나 또는 정교한 미모를 지닌 인형을 제작하는 것이다. 비스크나 도자를 소재로 백옥처럼 고운 인공피부에 실리콘이나 유리로 만든 인조 안구를 착용한 (구체관절을 포함한) 인형은 사람의 천연 미모를 초월하는 극사실적인 매력이 지닌다. 때문에 인형의 수려한 미모란 원본 없는 미모 즉 현실에는 없는 미모의 발명이다. 보는 이에게는 살아있는 생명체로 착각하게 만들고, 만드는 이에게는 생명 창조의 우월감을 안기는 그런 미모다. ● 인형 원류는 기원전까지 거슬러가야 할 만큼 제작의 연대기가 길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인형으로 연상되는 건 아동용 완구로 수렴되기 쉽다. 대량생산된 지천의 인형이 그런 용도로 쓰이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꼭 실상이 그와 같진 않다. "아이와 어른이 인형을 대하는 관점은 차이가 실로 크다."는 인형예술가 웨슬리 스미스(Wesley L. Smith)의 진술은 인형을 놀이 대상으로 대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관상 대상으로 인형을 바라보는 극소수 성인 수집가의 미감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미성년이건 성년이건 인형을 의인화하려는 응시에선 일치한다. 글 서두에서 동력이나 미모를 통해 인형을 의인화 하려는 인형 제작의 배후를 살폈다. 인형에게 말을 건네고 인형과 자신을 혈연관계로 묶는 아이는 사유는 인형을 사람과 대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매한가지로 충분히 분별력을 갖춘 성인마저 빼어난 표현력으로 다듬어진 인형을 가까이 두고 지켜보려 한다. 성적 끌림 나아가 실제 성교를 목적으로 제작 시판되는 섹스 돌처럼 극단적인 상품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무수한 구체관절 인형은 사람의 육감적 미를 배가시키는 모양새로 설계되곤 한다. 무결점 피부에 긴 흑단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무기체 인형은 인간의 농염한 미모와 변태 성욕을 대리한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인간 형상의 무기체에 감정이입을 시도하려는 인간의 희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허구적 이야기로 재현한 것일 테다. 밀랍인형을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있는 무엇으로 지목하면서 '불가사의한 uncanny'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프로이트에서 보듯, 무기체이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 인형은 유기체의 아름다움을 정지된 시간 속에서 보존하고 박제한다. ● 인형이 인간으로 변신하길 염원하는 집단의 염원 때문인지, 인형은 예술가와 대중의 환심을 사로잡기 유리하다. 세라믹 목재 도자 구슬 섬유 카드보드 신문지 마스킹테이프 등 인형 제작에 동원되는 재료의 범주는 무궁무진하다. 세계 도처에서 인형 예술가들이 활약하는 배경일 것이다. 인형예술가 정양희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 무렵 내놓은 작품은 구체관절인형의 본질을 즉물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많았던 것 같다. 10대 후반 소녀의 나이를 한 인형들은 성적 끌림과 보호본능을 동시에 간직한 소녀애의 화신처럼 보였다. 현실에서 인간을 직접 내세워 수행할 수 없는 유무형의 욕망을 인형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인형은 일종의 대리인이다. 인형의 대리 역할이야 말로 인형을 바라보는 이와 그것을 만드는 이가 만끽하는 매력의 원점이 된다. 둥그런 관절구는 인형의 관절 부위마다 개입되어 인형의 목 팔 다리 허리가 생명체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도록 고안한 핵심 부품이다. 때문에 구체관절인형을 흡사 인간인양 보이려 했다면, 관절구로 인해 갈라진 틈새를 옷매무새 속에 숨겨서 눈속임은 완성시켜야 옳다. 그렇지만 구체관절인형들은 관절구 주변으로 둥그렇게 패인 선명한 틈새를 고스란히 노출시킨 채 전시되기 마련이다. 회전하도록 제작된 관절구가 틈새를 숨기기 어려운 구조 상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절구 자체가 사람을 닮은 인형을 실제 사람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독자적인 생명체 혹은 독보적인 존재로 알리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무릇 관절구의 인공미를 고의로 노출시켜 기괴한 상상력을 증폭한 예술가는 1930년대 초현실주의자 한스 벨머다. 정양희의 「무제」(2011)나 「Clown」(2011)도 관절구의 독보성과 관절구로 인해 이격된 신체의 해체를 토르소 부위만 떼어 강조한다. 이는 구체관절이기에 가능한 인형 미학을 즉물적인 방점을 찍은 것이다.
정양희_CLOWN_목분점토, 파스텔채색_67×55×45cm
정양희_무제_목분점토, 아크릴채색_110×60×41cm

예술가와 대중 모두를 유인하는 매력을 인형은 담고 있다. 그러나 인형이 전시장에 진열될 때면 제약이 수반된다. 좌대에 올려진 인형의 공간예술은, 동선과 이야기가 포함된 시간예술의 긴박감을 소유하지 못한다. 그러니 인형만이 모든 미적 승부를 감당하는 단독자로 뛰어야 한다. (구체관절인형을 포함한) 숱한 인형예술이 인형의 완전한 미모에 집중하거나 은밀한 관음주의에 기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를 보완하는 것이 미장센이다. 정양희의 초기작에선 화장실로 보이는 백색 타일에 몸을 기댄 「Sisters」(2001)나, 선혈 낭자한 밀폐공간에 소녀 인형을 기대어 앉힌 「첫사랑」(1998)가 미장센이 돋보인 경우였다. 표현주의적 첫인상과 설정된 화면 전후의 스토리를 관객이 대략 추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는 「무제 0」(2011)와 「백일몽」(2006)이 미장센이 부분적으로 개입된 경우 같다.
정양희_무제 0_유채_90×42×40cm
정양희_백일몽_목분점토, 유채_43×120×35cm

인형 예술의 완성도는 개별 인형에 공력을 집중시키는 방법과 미장센을 통해 생명 없는 무기체에 스토리텔링을 얹는 방법으로 성취될 것 같다. 인형이 사람의 욕망의 대리인으로 존재해 온 오랜 선례로 볼 때, 정련된 기술로 다듬어진 개별 인형들에게 드라마가 부여한다면 공감대의 너비와 깊이가 이전과 다를 것이다. 인형이 인간이 되길 바라는 보편적 인심처럼 인형도 인간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단다. ■ 반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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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se, and Breath!






한승민展 / HANSUNGMIN / 韓昇旼 / painting 2012_0901 ▶ 2012_0930




한승민_Beautiful World_디아섹에 혼합재료_70×7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한승민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1_토요일_03:00pm
오픈 축하 공연 / 2012_0901_토요일_07:00pm_국립 국악원
기획 / 어바웃아트(www.aboutartcompany.com)
관람시간 / 10:00am~09:00pm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307번지 동광빌딩 3층 Tel. +82.2.2.2246.0071 www.ai1.or.kr



『Pause,and Breath』展은 "부채로 펼치는 韓스타일" 작가 한승민의 여덟번째 개인전이다. 2005년 당시 그의 초기작은 지극히 한국의 부채다운, 여백이 살아 숨쉬는 차분한 이미지였던 반면 2010년 미술관가는길에서 선보인『행복을 열다』展에서는 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워졌으며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활발한 변신이었다. 그 이후 한승민은 다수의 전시와 공모전 수상, 해외아트페어 등으로 활발한 전시활동을 보여왔다.
한승민_행복무대의 축배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_130×100cm_2010
한승민_디아섹에 혼합재료_70×40cm×5_2012
한승민_A Festival of happiness2_캔버스에 혼합재료_50×100cm_2010
한 숨 쉬어가는 ● 2012년 8월 지금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에서 만나는 그의 작품은 부채로 마음을 열고 행복을 열었던 그의 초기 작품세계와 그의 인생을 반추하고 한 숨 쉬어가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작가 개인으로서도 잠시 멈추어서서 큰 숨을 쉬어가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큰 힘을 내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승민_dancer_디아섹에 혼합재료_2011
Beautiful world ● 이러한 배경에서 착안한『Pause,and Breath』展은 작품내에서도 보다 여유있고 에너지를 내뿜어내기 이전의 안정감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다.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의 내부공간에 있는 한국적인 오브제들과 한승민의 작품과의 만남은 또다른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 한승민의 작품은 부채에서 사물놀이 캐릭터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맞물려 춤을 추었다가 꽃동산으로 변화되는 '아름다운 세계'로의 변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사이 사이에 있는 여백, 즉 쉼표의 세계, 정지 또는 휴식의 세계이다. ● 한승민의 키워드가 '부채', '열다', '행복'에 집중했더라면 이번 전시에서 그는 또다른 도약을 위해 인생의 쉼표, 정지에 포커스를 맞추고있다. 작품에서도 여백의 미학이 살짝 엿보이며 살풀이 춤에서 주는 묘미와 같이 움켜쥐었다 풀어헤치는 조화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에 여유와 편안함을 선사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이든 담아내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그의 작품의 묘미라고 하겠다.
한승민_flower vase of happiness_캔버스에 혼합재료_140×100cm_2010
한승민_open happiness_디아섹에 혼합재료_50×100cm_2012
향후에 그림 속에서 등장하는 이미지들의 작은 아이콘을 아트상품화하여 한국적인 스타일에 보다 집중해보고자 한다. 9월 한달여간의 작품 전시기간동안 국립국악원 단원 위희경 국악인의 공연을 비롯한 콜라보레이션 창극, 인형극이 선보여질 예정이다. ● 모던, 서구화를 지향하여 살아온 한국의 미술역사에 있어서 가장 한국다운 아름다움을 그래픽 이미지 또는 미디어 아트, 설치로 발전시켜 또 하나의 미술 역사 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꿈이자 작품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아이원 문화예술나눔터와 한승민 작가의 어울림이 지역구민들의 애정을 넘어 세계로 발돋움해 가길 희망한다. ■ 손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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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함의 은밀한 위로




김나윤展 / KIMNAYOON / 金那玧 / painting 2012_0904 ▶ 2012_1004 / 일,공휴일 휴관



김나윤_마냥 행복해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706b | 김나윤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4_화요일

관람시간 / 10:00am~10:00pm / 일,공휴일 휴관

유중아트센터, 카페 드 유중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번지 유중빌딩 1층 Tel. +82.2.599.7709 www.ujungfoundation.org www.ujungartcenter.com



『달콤함의 은밀한 위로』 ● 미술에서 음식의 감정적 효과와 행위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서, 음식의 맛은 인간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호소한다. 그 중에서 달콤한 음식을 먹으면 행복함과 즐거움 등 감정적 쾌락을 동반하게 된다. 달콤함은 혀에서 감지하는 미각이지만 다른 모든 감각들로 전이되는 감각인 이것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기쁨을 주거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상태'라고 정의 내린다.
김나윤_휴식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12

나는 달콤한 음식이 주는 행복함을 돼지와 음식을 조합하여 나타낸다. 우리는 무한한 허구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데 돼지를 똑같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것이며 실제와 닮지 않은 무언가로,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돼지를 현대인의 모습으로 표현하며 내적 욕망을 은밀한 상상으로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 준다.
김나윤_달콤한 휴가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0
김나윤_쪽쪽_캔버스에 유채_45.5×30.9cm_2010

또한, 풍자를 통해 욕망과 순수의 간극을 메우려 한다. 돼지의 유쾌하고 행복한 모습을 먹거리와 함께 그리며 오히려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작업에서 우리는 평범한 일탈 속에서 인간의 한없는 욕망을 여유와 유쾌함 속에 보여주며 즐거운 펀치를 날릴 것이다. 그림 속의 음식을 탐닉하며 마냥 행복해 하는 돼지와 음식을 보노라면 욕망보다는 차라리 순순에 다가서게 하는 미소와 평안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김나윤_Happy Birthday to me_캔버스에 유채_60.6×60.6cm_2011
김나윤_그렇게_캔버스에 유채_18×14cm_2011

달콤함이 주는 감정적 쾌락을 직접적으로 나타냄으로써 무표정한 현대인의 얼굴에 미소를 띄울 수 있는 코믹하고 유머스러움을 담아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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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nowhere




김형무展 / KIMHYOUNGMOO / 金亨武 / painting 2012_0905 ▶ 2012_0911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118e | 김형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김형무-어디에도 없는 풍경 ●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이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조용히 응시하고 관찰하며 이를 통해 일련의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곱씹는 자들이다. 그래서 미술은 우선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본다는 것은 세상을 만나고 기억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일이자 그것과 나와의 관계를 유추해 보는 일이고 이런 식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모든 존재와 현상의 심부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일이다. 작가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밝은 눈, 깊은 눈을 갖고 싶어 할 것이다. 심연을 바라 본 고래의 충혈된 눈 같은 것 말이다. 그림은 궁극적으로 그런 눈의 깊이와 폭, 성찰의 아득함 속에 비로소 몸을 내민다. 한편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행위는 결국 이미지를 만나는 일이다. 작가란 존재는 특정한 이미지를 통해 사유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현하고 그것을 통해 발언하고자 한다. 그러니 작가는 이미지를 찾는 이들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그리는 이가 작가지만 동시에 그들은 매혹적인 이미지를 수집하는 이들이다. 생각해보면 세계, 특히 현대인들의 주된 삶의 거처인 도시공간은 무수한 이미지로 둘러 쌓여 있다. 상당수는 체제와 권력, 그리고 자본과 소비사회가 강제하는 욕망의 기호들이자 온갖 상품미학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기호들 속에서 현대인의 삶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도 하다. 작가란 존재는 그런 이미지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시각이미지를 생산하는 이들은 동시에 시각이미지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인 것이다. 아울러 이미지 생산을 주업으로 하는 이들에게 동시대의 대량생산되는 기계적 이미지, 상품이미지는 엄청난 이미지의 보고이기에 그 이미지를 채집하고 이에 기생해나가는 다양한 작업들이 산출된다. 그러니까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일이 창조적인 작업을 대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기존 이미지를 번안하고 각색하는 일이자 이를 재편집, 재맥락화 하는 일이다. 이미 뒤샹으로부터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현대 미술 자체가 그러한 재맥락화의 시도로부터 출현해왔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자리바꾸기, 전도, 낯설게 하기 등의 전략이 현대미술의 주된 방법론이 되었다.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2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94cm_2012

김형무는 어느 날 우연히 창밖으로 현실풍경을 접했다. 늘 보는 풍경이지만 그날 그가 본 풍경은 무척 낯설게 다가왔고 많은 상념과 반성을 거느렸던 것 같다. 창 밖으로는 온갖 군상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순간 창 안쪽과 창 바깥 쪽의 경계가 무너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그는 실내에서 창 너머의 풍경을 은밀히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도시공간에서 제각기 바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어딘지 공허하고 그림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도시공간이 무엇인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누군인지 말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본 그 풍경에 덧붙여 그로인해 연상되고 느낀 장면을 오버랩했다. 그렇게 해서 현실적이면서도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공간, 풍경화가 탄생했다. 선과 색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공간, 풍경을 설정한 후 그 사이에 무척 작은 인물과 숲(나무), 기둥, 도로표지판 등을 암시적으로 배치했다. 초기에는 그러한 이미지를 잡지에서 추출해 콜라주했다면 근작은 이를 직접 손으로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작가는 잡지나 인쇄매체를 통해서 흥미로운 이미지를 찾았다. 이는 틈틈이 창밖을 관찰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찾는 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다. 작가는 잡지나 인쇄매체에서 마음에 드는 이미지를 채집한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이미지들을 불러 화면에 안치시킨 후 이를 다시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손으로 그렸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궁극적으로 콜라주작업, 레디메이드작업이란 점에서는 이전 작업과 별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무척이나 작은 인물이 배치되는 공간은 색의 층차를 은연중 만들거나 표현성이 짙은 붓질을 남겨두면서 회화적인 맛을 고려하고 있어서 그것이 날카로운 선과 단호한 색 면을 슬쩍 흔들고 있다.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2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2

그가 잡지에서 오려낸 사진이미지는 대부분 사람들이다. 여러 크기의 다채로운 인간상들이 선택되었다. 특정한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들은 보편적인 현대인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동한다. 그렇게 선택된 사진을 캔버스 표면에 그림으로 옮긴다. 결국 화면 속에 등장하는 인간은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라 잡지에 실린 익명의 존재들이고 선택된 오브제인 셈이다. 그는 그렇게 선택한 오브제를 화면에 매우 작게 배치한다. 바탕 화면에는 풍경이 설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실제하는 구체적인 풍경, 특정 장소가 아니다. 그것 역시 익명의 공간이요 작가에 의해 상상되어진 풍경이다. 날카롭고 건조한 수직과 수평의 선으로 구획된 도시구조물 내지 실내풍경을 연상시켜주는 편인데 이 기하학적인 공간의 구획은 색 면으로 단호하게 발려져있다. 특정 공간을 연상시켜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물감으로 발려진 색 층, 색의 피부이기도 하다. 화면을 다시 몇 개의 면으로 분절하고 주어진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가설하는 순간 주어진 캔버스 표면은 기이한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비현실적인 공간이자 추상화된 공간이고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공간, 이른바 심리적인 공간이다. 그 심리적 공간은 아마도 작가가 현실을 관조한 결과로서의 공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공간 연출은 다소 관념적이거나 상투형으로 빠질 수 있다. 공간에 위치한 작은 인간들은 무력해보이기도 하고 소외나 상실, 혹은 다분히 공허하고 덧없는 존재성을 부감시키는 편이다. 그러나 이 개미처럼 작은 인간 군상들은 그 차갑고 단호하게 구획된 공간 안에서 제각기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고 걸어가고 있다. 화면 속에는 어떠한 길이나 출구도 부재하다.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2
김형무_landscape-nowher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2

작가는 말하기를 "이 고요하고 차가운 지평선과 함께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문명의 흔적이나 파편들, 세트처럼 구성된 정치화한 콘크리트처럼 보이는 실내풍경, 그 안에 갇힌 현실적인 인간 군상들, 그것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작가 또는 관객들의 시각이 어우러져 존재한다...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낯선 풍경이면서도 이질적이지 않은 리얼리티 한(콜라주장치)풍경, 불편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치유의 공간으로서의 풍경"(작가노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풍경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번잡한 사물들을 죄다 지우고 벽과 프레임만이 있는 건축물과 남겨진, 고립되고 축출된 인간의 작은 몸을 안겨줄 뿐이다. 모든 것이 죄다 사라진 후에 겨우 남겨진 이 앙상한 풍경, 세기말적이고 묵시론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기는 이 풍경은 ‘마지막 풍경’과도 같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삭제시키는 이유는 도시공간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과 의식을 조정하고 강제하는 모든 이미지, 욕망의 기호를 불식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아울러 저 멀리 겨우 자리한 숲/나무 한 그루는 자연으로부터 이탈된, 혹은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도시인의 삶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작가는 "도시의 통제를 벗어나는, 벗어나려는 풍경 그러나 결코 자연으로 회귀하지 못하는 그런 풍경"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작가 의식의 풍경이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풍경일텐데 그래서 그는 이 풍경을 '사이풍경' 또는 '헤테로피아'라고 부르고 있다. 어디에도 없는 그런 풍경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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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복원




조병철展 / CHOBYUNGCHUL / 趙炳澈 / sculpture 2012_0905 ▶ 2012_0911



조병철_Hedgehog_고물, 철, LED 전구, 감속모터, 열 센서_60×50×12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조병철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5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공존의 메커니즘 ● 작가 조병철은 『환경과 복원』展에서 공존의 관계성과 생명의 중요성을 주목시킨다. 자연의 힘과 동력, 조명 등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조각의 형태로 표현하고, 작품에 숨을 불어넣는 방식의 작업을 <키네틱 아트-움직이는 미술>라 칭한다. 키네틱(Kinetic)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키네시스(Kinesis), 키네티코스(Kinetikos)에서 유래되었고, 쉽게 말해,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원리((Mechanism)가 적용된 작가의 작업방식은 단순히 움직임에 대한 흥미를 고취하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을 통해 의미를 은유적(Metaphorical)으로 확장시켜, 사회적 문제성을 대변하고 있다. ●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산업과 문화가 나날이 발전되면서, 인간의 이기심은 무분별한 경쟁과 개발로 환경을 훼손하는 행태를 띄고, 아름다운 환경이 희생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인간이 자연과의 공존(Coexistence)의 중요성을 배제하여 발생 된 서글픈 결과이다. 작가는 이러한 심각한 현상을 직시하고, 매개체로써 개발 이후 파산된 산이나 주변 환경에서 쉽게 버려지는 폐기물을 소재로 하였다. 다양한 폐기물을 결합하여 조각의 형태로 완성하고 복원(Restoration)한 작품에 생명을 부여함으로써 적극 문제를 대변한다.
조병철_Save Earth tree_폐 전선, 고물, 스테인레스, LED 전구, 감속모터 열센서_200×80×80cm_2012

대표작품 바늘두더지(Hedgehog)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고찰하게 한다. 전시장의 두더지는 물체가 다가오면 새빨갛게 눈을 번뜩인다. 그리고 날이 선 가시를 세우며 자신의 영역에 접근 금지령을 내리듯, 방어하고 주변을 차단하는 행위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파괴된 현재의 처참한 환경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시하는 경고와도 같다. 작품과 마주한 관람객들은 이렇듯 섬뜩하게 반응하는 작품과의 직면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발생시킨 문제성을 자각하고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작업표현은 인간의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행위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견해를 담고 있다.
조병철_Landscape-War_철판 부식_40×120×10cm_2012

그러나 작가의 작업은 부정적인 의미만을 전달하고 있지 않다. 폐기물( 폐전선, 나무, 녹슨 자원들)을 통해 살아있는 동물이나 식물의 형태로 재구성하고, 빛을 접목해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렇게 빛과 결합한 작품은 빛과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고귀함이 드러나고, 긍정적 방향을 제시한다. ● 작가의 말처럼 "어쩌면 인간은 방대한 우주라는 숲 가운데에 아주 작은 지구라는 한 나무 안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하며 사는 작은 애벌레의 한 집단일지도 모른다." 소박의 그의 메시지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함께 호흡하며, 공존하고 상생할 때 아름답고 영원할 수 있음을 느낀다. 작가의 작업과 마주하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생경하게 느끼지 않고, 긍정적 의미로써 공감하길 기대한다. ■ 배은혜
조병철_Restoration-Ⅰ_나무, 철, LED 램프, 감속모터, 열 센서_250×40×40cm_2012


어느덧 사람을 경계하는 동물들.. 사람이 접근하면 고슴도치는 붉게 변하며 무섭게 화를 내고 자신을 보호하는 가시들은 인간을 향해 촉을 세운다. 고슴도치는 진화하여 폐허가 된 지구에서 기계적이며 공격적으로 변해있다. ● 폐기물로 만들 지구.. 지구는 나무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스스로 빛을 발산하며 자전한다. 수없이 자전하는 동안 지구는 생명을 얻고 스스로 복원한다. ● 시골길을 다니다 보면 산과 산들이 첩첩히 병풍처럼 둘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할 때가 많다. 작품을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풍경을 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 모습은 전쟁과 황폐해진 풍경임을 알 수 있다. ● 자연은 스스로 복원력을 갖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놀라운 회복력으로 스스로를 치유한다. ● 관객의 참여로 작품을 움직여보자! 작품은 생명의 상징인 나비를 사람의 운동력을 통해 얻어진 동력으로 작품속에 있는 나비를 날개 한다.

조병철_Rhythm-Ⅰ_나무, 스테인레스 스틸, 베어링, 수동동력장치_220×70×120cm_2012


어느 날 매스컴을 통해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폐허가 되어가는 지구의 모습을 보고 답답한 마음에 작업장 풀밭에 누워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인간은 방대한 우주라는 숲 가운데에 아주 작은 지구라는 한 나무 안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하며 사는 작은 애벌레의 한 집단 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숲에서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나무 안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며 기거하는 많은 생물체 집단 중에서도 가장 큰 혜택 받고 있는 거대한 집단으로서 다른 생물체와의 공존의 관계성을 깨뜨리고, 나무를 독식하며 갉아먹고 있는 해로운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이를 비판한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상상해 보자. 그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각종 벌레들과 새 들은 집을 짓고 기거하며, 오가는 동물들은 그루터기삼아 쉬어가고, 열린 열매들은 그들에게 자신을 먹이로 제공하고 그 배설로 인해 또 다시 번식하고 있다. 이렇게 나무에 기거하는 생물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로가 공존할 줄 알며,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의 이득을 주며 어떠한 집단 하나가 결코 독식하지는 않는다. 매우 슬픈 일이지만 지금 이 시대는 지구를 나무에 비교 했을 때 인간이라는 거대한 집단은 품격 상승을 지향하며 수준 높은 문화로 발돋움하고 있고, 서로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워 거대한 산업화라는 명분아래 지구를 마구 파헤치며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지구와의 공존을 깨뜨리고, 다른 생명체의 집단들을 사지로 내몰아 멸종의 위기로 위협하고 있으며, 이도 모자라 자원을 독점하려 과도한 경쟁으로 전쟁도 불사하며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나무는 온전히 생명체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다른 생물체들은 이러한 나무를 독식하여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가끔 우리들은 한 나무에 기생하며 나뭇잎을 모두 갉아먹어 말라죽게 만드는 수 많은 송충이들처럼, 한 나무를 독식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작가는 무작위로 개발하다 파산한 곳에서 나온 나무들, 공업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폐기물과 고물상 구석에 뒹구는 낡아 녹슨 자원들을 주 재로로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은 인간의 개발 과정에서 황폐해진 자연은 스스로가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으며 폐기물들을 이용하여 작품을 만들고 자연물(식물이나, 동물 등)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인간들에게 극한 경계와 경고하는 내용을 KINETIC ART로 표현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러한 작품을 KINETIC ART로 표현한 이유는 각각의 작품에 복원이라는 명명으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고자 했으며, 조명을 이용하여 각 작품들의 감정 표현과 숨을 쉬며 복원되어져 가는 느낌을 빛을 통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싶었다. ■ 조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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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scape




최성석展 / CHOISUNGSEOK / 崔成奭 / painting 2012_0905 ▶ 2012_0918



최성석_당신의 이미지_리넨에 유채_112.1×162.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614e | 최성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5_수요일_05: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6:00pm

덕원갤러리 DUK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82.2.723.7771~2 www.dukwongallery.co.kr



문득문득 떠오르는 길가의 장면, 어느 공원의 무미건조한 장면, 좋아하는 영화 속의 한 장면, 작업실 앞 골목길 장면... 일상의 이미지, 영상과 현실, PC폴더 속 어느 이미지, 웹상의 떠도는 이미지들은 내게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된다. 그 장면들은 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이동하며 나의 시선과 의식으로 파고든다. 한 장면을 떠올리면 내가 그 속에 있었나 싶고, 언젠가 어디선가 본 장면인지 모호하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희뿌연 장면들은 나를 수많은 질문과 갈등 속으로 인도한다. 내가 선택하고 그려내는 장면들은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개인적 시선을 담고 있다.
최성석_생태공원_리넨에 유채_97×145.5cm_2010
최성석_생태공원2_리넨에 유채_112.1×162.2cm_2012
최성석_3plants_리넨에 유채_45.5×60.6cm_2012

희뿌연 도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의 주변에 그렇게 있었다. 도시는 이미 내게 자연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보고 그 자연 속에서 자연을 느낄 여유도 찾기 어렵다. 그처럼 평범한 일상 속 장면자체에서 의미와 메시지를 찾아내기 쉽지 않다. 일상 속 장면에는 개인과 사회,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 대상과 대상 등이 우리도 모르게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관계의 비밀은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부분에 관심을 갖는다. 신문이나 인터넷 포털 기사에는 기자들의 의도가 듬뿍 담긴 메시지 강한 사진이 즐비하다. 이와는 반대로 일상적 장면을 조금만 눈여겨보면 관계와 관계, 갈등과 갈등, 존재와 존재의 어떤 섭리도 찾기 어려운 역학관계로 이루어진 듯하다. 하나의 장면 속에 개체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쉽게 드러나지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당연한 시간의 흐름이고 만들어지지 않은 자연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최성석_휴식의통로_리넨에 유채_97×145.5cm_2012
최성석_road to work_리넨에 유채_53×72.7cm_2012
최성석_시선_리넨에 유채_90×180cm_2011

하나의 장면을 선택함과 동시에 불가항력으로 특정한 메시지가 들어간다. 장면에는 정치, 경제부터 개인의 고민과 지극히 사적인 문제의 갈등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나는 그러한 장면 속 대상들을 회화표면에 하나씩 묘사해나간다. 한 장면을 선택할 당시 그 대상은 우연히 존재했을 뿐이다. 대상들의 표면이나 질감 등의 느낌을 대상의 본질과는 달리 임의의 표현으로 그려나간다. 이것은 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나는 회화의 방식으로 장면 속 관계와 대상의 비밀을 파헤쳐나간다. 이것은 대상의 또 다른 본질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대상을 나만의 특정한 붓 짓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캔버스가 작은 세상인 것처럼... 나의 회화를 관람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고 환기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최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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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book






설경철展 / SEOLKYUNGCHUL / 薛慶喆 / painting 2012_0905 ▶ 2012_0925 / 일요일 휴관




설경철_Episode1202(from the boo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1.8×100cm_2012



초대일시 / 2012_0908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빛갤러리 VIT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76번지 인곡빌딩 B1 Tel. +82.2.720.2250 Vitgallery.com




Episode(From a Book) 극사실적 초현실의 요지경(瑤池景) ● (From the Book)이라는 부제를 단 일련의 Episode 연작은 설경철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회화들이다. 펼쳐진 책을 배경으로 꽃, 새, 시계, 인형, 신발, 종이학, 타자기, 바이올린 등 다양한 물상들이 무중력의 공간에서 날고 있는 듯 한 그림들이 그것이다.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이렇듯 책과 물상들의 특이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언뜻 보아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둘 사이의 관계는 그러나 실상 책은 물상들을 산출하고 물상들은 책에서 유출되어 글자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 책의 내용을 시각화해 보여주고 있는 관계다. 마치 소리 내어 읽으면 책 속의 인물을 현실세계로 불러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나오는 잉크하트(Ink heart 2008)란 영화에서처럼 문자를 이미지로 불러내 읽으면서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면서 느끼게 하는 이를테면 보는 문학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 이처럼 2000년대 초반부터 활발하게 선보이기 시작해 줄곧 작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는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그러나 2000년대가 아닌 1980년대의 작품인 음(音)×색(色) 연작들로부터 기인했다. 작가에 따르면 이 음(音)×색(色) 연작의 기본 컨셉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악보를 배경으로 음악의 감상 내용과 관련이 있는 다양한 색과 형을 가지고 그림을 그린 후 음이 완성된 부분을 지휘하듯 지워 나가는 조형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음악의 기본 음(音)을 이루고 있는 7개 음(音)의 한 옥타브와 미술의 기본 색(色)을 이루고 있는 무지개의 7가지 색을 대입해 흑백으로 되어 있는 악보를 미술의 요소들로 지휘하여 시각적으로 연주해 나가는 과정을 표현해 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설경철_Episode1119(from the boo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5×116.5cm_2011

이러한 작품경향은 초기에는 음악과 악보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에 추상적인 표현이 대부분이었으나 이후 사실화를 선호하는 작가의 특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실적인 표현으로 옮겨갔고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지금과 같은 책을 배경으로 한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음(音)×색(色) 연작과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의 전환처럼 읽는 문학에서 보는 문학으로의 전환 곧 다른 예술 장르의 시각화 내지는 조형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컨셉에 의해 동일 선상에서 변화, 발전해 온 동종 회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이 경향은 극사실적 기법의 강화, 새로운 구도의 적용, 다양한 배치의 활용 등을 통해 진화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이렇듯 Episode(From the Book)연작은 30여년이라는 긴 시간의 축적을 통해 이루어낸 작가만의 독특한 조형적 결과물인 것이다. ● 그런데 Episode(From the Book)연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소위 장르의 전환과 통합만이 아닌 양식은 물론 기타 다양한 개념들의 전환과 통합도 중요한 컨셉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점은 우선 작가가 사실화의 정점인 극사실화를 추구하면서도 극사실화를 통해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의 상황을 화면 가득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전환과 통합의 컨셉은 흥미롭게도 음(音)×색(色) 연작과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물론 이전의 다른 작업들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적용 되어온 것이었음도 알게 된다. 작가는 이전의 작업들에서 감성 짙은 구상회화를 통해 물상의 윤곽과 배치의 미를 드러내는데 머물지 않고 문명과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한다든지 자연과 본질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감성적인 담론들을 논리적인 구상화면 속에 함께 풀어내기를 즐겨했던 점을 통해서도 확인 된다. 이는 작가가 장르와 양식은 물론 사실과 환상, 이성과 감성, 현실과 초월 등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들을 전환하고 통합함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창의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해왔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설경철_Episode1206(from the boo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12cm_2012

이러한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작업이 현대미술의 시류에 편승해 수평적이고 감각적인 변화에 치중해 온 일단의 경향들과는 달리 미술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사실화의 전통 위에서 그 전통의 수직적 깊이를 더하면서 변화를 꾀하고자 했던 확고한 의지를 실천해온 과정이었다는 데에 있다. 경이롭기까지 한 그만의 개성적인 극사실화는 이러한 과정의 특기할만한 성취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렇다고 해서 그가 수구주의자처럼 전통을 고수하는 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미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새로운 변화를 도출하기 위해 창의적인 도전을 계속해왔기 때문이다. 감추어져 있던 캔버스의 이면을 과감히 드러내 사용한 회화작품은 물론 안경, 카메라 등을 이용해 본다는 것의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감상자와 작품이 역전되는 상황을 다룬 설치작품 게다가 입체조상에 별개의 다른 이미지를 투사해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조각 등은 작가의 이러한 창의적이고 첨예한 시각과 도전적이고 왕성한 창작열을 확인 할 수 있는 몇몇의 예이다. ● 이렇게 볼 때 결국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미술의 본질을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도 고정관념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장르 및 양식은 물론 다른 가치들을 다양하게 통합함으로써 혼성적이고 통섭적인 관점에서 펼쳐지는 미술이 제공하게 될 전혀 새로운 시각과 감상의 경험을 도출해 보고자 하는 작가의 근원적인 창작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작가의 이러한 혼성과 통섭의 컨셉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회화와 미술교육을 전공한 후에도 다시 뉴욕공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 아트를 전공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순한 그리기의 차원을 넘어 다양한 매체 실험은 물론 장르, 양식, 이종 개념들의 전환과 통합을 꾸준히 실천해온 작업을 통해 깊이 있게 영향을 받아온 것이었다. 이전의 기판과 같은 오브제 위에 그림을 그린 작품들과 지금의 디지털기법으로 캔버스 위에 프린트 된 책과 그 위에 극사실적인 물상들을 그린 작품들은 이렇듯 작가가 추구해온 특유의 컨셉을 통해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들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러한 혼성과 통섭의 미술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삶과 현실을 바라보는 의식과 인식의 전환과 통합을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에게 미술은 새로움을 실현하는 장일뿐만 아니라 동시대적 소통을 실현하는 매개이기도 한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사실화에 대한 추구 특히 극사실적인 표현방식의 추구는 인쇄된 활자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책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책의 내용과 그것을 표현한 물상들에 담겨있는 동시대적인 사유를 반영하고자 한 것이었다. 결국 시선에 내재된 촉각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시각예술의 본질을 재확인함은 물론 소통의 매체로서 회화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전환과 통합의 추구는 소통의 장 곧 책과 그 내용이 반영하고 있는 삶과 현실에 관한 예술적 전환과 통합을 통해 동시대적이면서도 그와 동시에 해석의 차원을 달리한 색다른 소통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설경철_Episode1020(from the boo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5.5×112cm_2010

이렇듯 Episode(From the Book) 연작은 삶과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책의 내용을 시각화해 내용을 함축, 비유하고 있는 물상들을 4차원의 공간 속으로 불러냄으로써 새롭게 구성한 초현실의 세계를 통해 일차적인 소통을 넘어 지난하고 고단한 삶과 현실 속에 가려진 내재된 환희와 기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직유하거나 또는 은유하고 있는 물상들의 이미지를 통해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기보다는 중성적으로 보이는 다차원의 공간 속에서 삶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있는 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신세계에서는 문학과 미술이, 극사실과 초현실이, 이성과 감성이, 슬픔과 기쁨이 전환되고 통합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세계를 그림을 통해 현시함으로써 비로소 구체화된 상상세계 혹은 상상너머의 환상세계를 감상자별 해석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체험할 수 있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 요지(瑤池)는 중국 주(周)나라 목왕(木王)이 서왕모(西王母)와 만났다는 선경(仙境)인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못인데 요지-경瑤池景은 요지의 경치. 곧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이르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유토피아를 이르는 것이다. 작가는 책을 배경 삼아 유영하고 있는 물상들을 통해 작가만의 시각과 해석으로 새롭게 해석된 삶과 현실, 다름과 대립이 전환되고 통합되는 세계, 극사실적 초현실의 요지(瑤池)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환상적인 유토피아 속으로 감상자들을 불러 모아 요지경 속 진기하고 기이한 자신만의 특별한 회화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차안을 피안으로 변화시키고 아수라장 같은 세상 속에서 평화와 희락이 가능한 천국을 발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가 책과 물상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통해 복잡다단한 세상을 반영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기기묘묘한 이채로운 풍광을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작가가 새롭게 창조한 매혹적인 요지-경(瑤池景)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 주용범
설경철_Episode1205(from the boo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3.2×112.7cm_2012

책으로부터 잠재된 꿈과 욕망의 배출구 ● 설경철의 작품은 객관적인 현실인식에서 발단한다. 그림인지 사진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정밀하고 섬세하게 묘사된 극사실주의 화법은 경이로울 정도이다. 그의 작품은 형태묘사에 관한 한 실제와 그림을 혼동하게 한다. 그의 작품이 의도하는 일차적인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을 빙자한 일루전으로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자신이 추구하는 조형적인 이념 및 사상 또는 철학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감탄하는 손의 기술이란 이미 하이퍼 리얼리즘의 고도의 묘법에서 보듯 카메라의 정교한 재현을 넘어 과학기술의 시각적 표현을 무력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잠재적인 욕망의 배출구로서 그의 그림이 지시하는 메시지는 이렇듯이 우리의 미의식을 현실적인 공간으로부터 무한히 확장시키려는 데 있는지 모른다. ●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책이다.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의 대다수는 실제의 문학이 조형적인 언어로 현현할 수 있음을 실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책의 이미지는 문자를 통해 그 내용이 전달되는 인쇄매체로서 소통의 기능을 목적으로 한 종이 뭉치이다. 설경철은 이러한 책이라는 형식이 갖는 물성의 이미지에서 문학적인 의미체로 승화하여 인지하며, 이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독특한 발상의 작품세계를 갖고 있는 작가이다. 펼쳐지는 책의 이미지를 통해 시간의 연속성, 즉 행위가 발생하여 전개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은 인간의 지적취향, 즉 지적인 축적을 상징하는 책의 이미지를 통해 탐욕적인 인간의 지적 욕구를 은유한다. 그의 언어는 설명이 필요 없는 명백한 현실적인 물상들이다. 그 현실적인 물상들이 현실공간을 떠나 그가 제공하는 무중력의 조형공간으로 이동한다. 그 무중력의 공간을 유영하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재생산된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적인 공간개념과는 상관없는 조형적인 상상의 산물일 따름이다. 이러한 조형어법을 우리는 초현실주의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 또는 현실과 초현실의 상관관계란 결국 동전의 앞뒤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케 한다. 거기에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현상 또는 현실에서의 탈출, 즉 자유로운 꿈의 날개를 지닐 수 있다는 욕망과 믿음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런 잠재된 꿈과 욕망을 한껏 부추기고 있다. ■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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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quare




고석민展 / KOSEOKMON / 高錫敏 / photography 2012_0903 ▶ 2012_1010 / 일,공휴일 휴관



고석민_The Square 00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1


초대일시 / 2012_0906_목요일_06:00pm

송은 아트큐브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송은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입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 토요일_10:00am~03:00pm / 일,공휴일 휴관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나의 작업은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에서 얻어진, '시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생각에 대한 것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다. 투명하고 맑은 눈빛, 반복되는 일상의 피로에 찌든 눈빛, 자신감과 확신이 충만한 눈빛, 알 수 없는 슬픔이 서려있는 눈빛. 각기 다른 눈빛으로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들은 나에게 수많은 사연을 전달하고 감정을 일으킨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눈빛은 나에게 어떤 행동이나 감정을 강요하는 집요한 시선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고석민_The Square 10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0
고석민_The Square 11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0
고석민_The Square 02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0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시선에는 특정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의해 길들여진 편견과 고정관념이 짙게 배어있다. 그리고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타인의 시선을 좇아 행동하고 느끼며, 그들의 시선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심지어 타인의 시선 앞에서만 올바르게 행동하고, 즐거운 척을 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타인의 시선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 자신은 언제나 희망찬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연기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서로의 시선에 갇혀 살게 되고, 때로 우리들의 시선은 서로를 감시하기 위해 작동되기도 한다. 사회의 문화와 관습에 길들여진 개개인의 시선이 모여 집단의 시선으로 작용될 때, 개인은 자신을 숨기고 표준화된 인간으로 머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집단의 시선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인은 공존할 수 없다. 집단의 시선에 어긋나지 않게 길들여진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고석민_The Square 0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0
고석민_The Square 0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6×115cm_2010

"사람들이 보잖아! 이러면 어떻게 하니?"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집단의 시선. 그 시선의 감시 속에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집요한 시선의 경쟁 속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The Square」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사진 속에는 거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자연풍경이나 건축물을 비추며, 그 안에서 자신이 숨기 쉽거나 숨고 싶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른 곳을 비춰 자신을 만드는 행위는 시선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이자, 스스로 마련한 도피처였다. 나의 존재는 가려져 사라지고, 그 대신에 뒤틀린 이미지의 공간만이 남겨진다. 하지만 마치 생략된 기호처럼 표시된 작은 손가락이 어떠한 존재를 미약하게나마 알려준다. 자신만의 거울 뒤에 숨어버린 나는 수많은 시선의 통제에서 탈출하며 트루먼이 던진 마지막 말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Good Morning! In case I don't see you,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 고석민
고석민_The Square 15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74×112cm_2010


The general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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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가기 Take a rest for a while




이윤진展 / LEEYUNJIN / 李允珍 / painting 2012_0904 ▶ 2012_0916 / 수요일 휴관



이윤진_休_순지에 수묵_74×10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411h | 이윤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908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수요일 휴관

스페이스 선+ Space Sun+ 서울 종로구 삼청동길 75-1 Tel. +82.2.732.0732 www.sunarts.kr



이윤진 작가는 삶의 모양새를 정중동(靜中動)의 고요하지만 변화무쌍한 에너지의 흐름에서 찾고 있다. 기운, 기세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할 때, 그 기운은 특별한 자기 자신을 만들기도 하고, 또는 다른 누군가와 닮은 소속감을 주기도 한다. 내가 오롯할 때, 나는 다른 이와도 닮아도 인정이 되고, 그 지점부터 내가 오롯하기 위해서 다른 이를 수용하게도 된다.
이윤진_休_순지에 수묵_74×105cm_2012

"쉬어가기" 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 일련의 「감정덩어리」, 「섬」, 「나라」 시리즈들을 확인할 수 있다. 무심한 종이에 검은 먹을 자잘하게 찍어 가는 작업을 통해 드러난 감정들은 덩어리처럼 뭉쳐져서 하나의 존재로 경계를 만든다. 점을 찍어가는 그 순간순간이 그대로 작가가 스스로 인식하는 자신에 대한 존재감일터, 그 인식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작가 존재의 모양새로 잡히게 된다. 이 모양새를 작가는 '감정의 덩어리' 라고 부르고 있다. 「감정덩어리」 시리즈의 화면을 채우는 세 개의 덩어리들은 합해져서 하나의 존재가 되기도 하고, 또 그 하나하나가 각각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과, 또 자신과 다름없는 가족의 구성원 셋을 이야기한다. 작은 점, 색이 빠진 농담만으로 구분이 되는 작은 점들이 무수히 모여서, 하나의 경계를 만들어 모양을 잡고, 또 이 비슷한 모양의 덩어리들이 모여서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그래서 그 어디서도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지만, 비슷한 것은 찾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자신과 자신이 아닌 존재와의 소통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요소 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각각의 객체들은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다른 형태를 띄고 있지만 결국 그 비슷한 요소들로 공감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이윤진_休_순지에 수묵_90×74cm_2012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시작하는 작업은 분류다. 큰 덩어리를 어떤 기준에 의해 쪼개고 이들을 일정한 카테고리로 넣는다. 그 분류 기준은 무엇이든지 처음엔 양분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의식/무의식의 영역에서 나누어서 구분해보게 된다. 작가는 「섬」 연작을 진행하면서 객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법을 찾아보았다. 가로의 수평선이 화면 가운데 보이는데, 그 위 아래로 섬 하나와 섬을 둘러싼 물의 표면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나타난다. 여기서 나타나는 섬의 첫 번째 속성은 한 덩어리라는 점이다. 이 덩어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나무라는 또 다른 덩어리이다. 이 나무들은 각각이 하나의 객체이면서도 역시나 섬이라는 한 객체의 집합원이 되고 있다. 그 다음 속성은 그림자처럼 보여지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한 객체의 양분된 모습니다. 이 부분은 격자 무늬가 들어가는데, 작가의 외면적 모습과 유사하면서도 충돌할 수 있는 내면 공간에 대한 시각화이다.
이윤진_休_순지에 수묵_74×110cm_2012

이렇게 객체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식 작업을 한 단계 마치고는, 확장된 공간에 대한 관심을 「나라」 시리즈에서 보여준다. 크지 않은 드로잉 연작인데, 아프리카 대륙의 모양과 프랑스, 중국, 이라크,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란드 국경의 모습을 아웃라인으로 하고 그 안을 같은 요소로 채웠다. 간결하게 도식화된 나무와 바위들을 「섬」 연작에서처럼 수평선의 위 아래로 양분되어 방향을 달리 하고 있다. 이렇게 다른 형상의 나라들로 새로운 작가만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작가의 지도 안에서는 형체는 다르지만 결국 그 안을 채우는 건 인간이고, 이 인간은 자연의 큰 질서 안에서 또 하나의 요소로서 자리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이윤진_休_순지에 수묵_83×74cm_2012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꾸준히 고민하고 있는 작가는 자연에서 인간의 삶의 질서를 찾았고, 이렇게 찾아가는 과정의 지점마다 담담하고 성실하게 시각화하고 있다. 보여지는 것과 보았다고 생각이 드는 것과 보고 싶은 것과 볼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모아서 작업으로 가져오고 있는 작가는 '쉬어가기'라는 역설적 제목으로 쉬어 지지 않는 생의 움직임을 더욱 오롯하게 묘사하고 있다. ■ 최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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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일상, T0 Unknown Moment, T0




김영남展 / KIMYOUNGNAM / 金泳南 / video.installation 2012_0904 ▶ 2012_0916 / 월요일 휴관



김영남_창백한 파란 눈 PaleBlueEyes


초대일시 / 2012_0906_목요일_06:00pm

주최 / 갤러리 175 후원 / 경기창작센터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club.cyworld.com/gallery175



『알려지지 않은 일상, T0』 전시는 한국사회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알려지지 않는, 혹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드러난 상실과 불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현재 당면한 한국사회, 혹은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어떻게 예술적인 언어로 구현해 갈수 있을지에 관하여 작가의 시선을 드러낸다. 또한, 겉으로는 영화적인 영상어법을 적극 끌어오면서도,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채 스물스물한 형태들을 파편적으로 묶어내는 과정을 통해 작가가 가진 고민의 지점을 공유해보고자 한다. ●『알려지지 않은 일상, T0』은 상실과 불안의 문제들을 소재로 한국사회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잊거나 잊어버리는, 잃어버린- 시간과 일상으로부터 다시 호명하여 되찾는, 되찾은 시간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더욱 더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조그마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전의 역사도 현재의 역사도 그러하듯, 우리들의 삶은 돌고 돌며 반복하고 우리를 맞이할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도록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김영남_창백한 푸른 시선_HD 단채널 비디오_00:08:25__2012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이번이 첫 번이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뒤로 당긴 오른팔과 앞으로 내뻗은 왼손에서 방금 풀려난 내 활로부터, 화살 A는 사정거리 삼분의 일 쯤 허공에 떠 있고, 조금 더 떨어진 곳, 역시 사정거리 삼분의 일 쯤 허공에, 내게 뛰어들 태세로 사자 L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발톱을 겨누고 있다. 난 곧, 화살과 사자, 즉 사자가 화살이 꽂힌 검은 목에서 콸콸 솟구치는 피에 질식해 허공에서 울부짖으며 떨어질지, 말짱하게 나를 덮쳐 두 앞발로 내 가슴과 어깨 근육을 갈갈이 찢어놓고, 덥썩 내 머리를 척추로부터 찢어내게 될지를 알게 될 것이다...만일 이대로 간다면, 심지어 내가 출발했던 가정들을 포기한다 해도 내 상황은 조금치도 바뀌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시간은 윤회를 모르고, 각기 다른 돌이킬 수 없는 찰나로 구성되어 있고, 그리고, 각 찰나는 일회적인 것이며, 한순간 명확히 주어진 길이만큼 산다는 것이 그 속에 영생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T0는 뒤따르는 T1, T2, T3와는 아랑곳없이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끌며, 뒤따르는 순간들은, 나름대로, 내가 화살을 날리며 행한 동작과, 사자가 도약하며 행한 동작, 또한 사자와 내가 다음 찰나에 취한 동작의 결과에 따라 삶이나 죽음의 내용을 담게 되고, 무한한 찰나들의 한없는 지속에 대한 불안이 나를 굳게 하고, 사자를 허공에, 그리고 화살을 내 시야에 굳게 하고, T0라는 재빨리 다가온 이 찰나는 사자와 화살의 사정거리에 아무런 의혹도 없이 재빨리 다음 순간과 자취로 똑딱이며 흘러가고..." (이탈로 칼비노, 『티 제로(T0)』)
김영남_그와 우리, 공존의 시간_HD_00:09:19_2012

이탈로 칼비노의 『티 제로(T0)』을 보면, 사냥꾼이 사자를 잡으려고 쏜 화살이 목표물을 향해 1/3정도 날아간 그 순간, 사자는 사냥꾼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발톱을 세우고 있는 찰나, 바로 이 순간이 작가가 동시대를 인식하는 순간, T0이다. 이 순간의 이후엔 사냥꾼과 사자는 어떻게 될까? 그의 글에 따르면 -'사자와 내가 다음 찰나에 취한 동작의 결과에 따라 삶이나 죽음의 내용을 담게 되고, 무한한 찰나들의 한없는 지속에 대한 불안이 나를 굳게 하고'- 어느 무엇으로도 확신할 수 없다. 돌이킬 수 없고 일회적인 찰나이지만 그 뒤를 뒤따르는 영속적인 시간들로 인하여 그리고, 우리가 사는 찰나 바로 다음 순간을 미리 경험해 본적이 없으므로, 더군다나 그렇게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불안할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칼비노의 이야기로부터 고쳐 가져와 그 순간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김영남_그와 우리, 공존의 시간_HD_00:09:19_2012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T0에 머물기 위해서는 나는 T0에 대한 객관적 형상을 만들기 위해 T1으로 옮겨가야만 한다...시간에 정지해 있기 위해 나는 시간과 함께 움직여야 하며, 객관적이 되기 위해 나는 주관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라는 이탈로 칼비노가 단편소설 『티 제로(T0)』에서 제시한 실존적 시간의 해석기하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억압 속에 살지 않기 위해, 그 불확실함과 불안과 상처들 가운데서 벗어나기 위해, 그 T0라는 현재(찰나)를 어떤 원점으로 위치시켜놓고 다시 시작하거나 혹은 그 찰나를 벗어나 찰나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점은 그 원래의 자리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지금의 찰나가 원점으로 다시 재위치될 수도 있으며, 혹은 여타의 다른 곳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불안한 그 찰나를 이동시키거나 혹은 T0를 쳐다보기 위해 우리를 T1, T2...라는 지점으로 옮겨가야 할 때, 운동과 힘(에너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그 운동과 힘(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순간을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 주요인일 것이다. 원점이라는 것의 방향이 어디든 우리는 잠시 찰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찰나를 바라보아야 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찰나가 지닌 형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지금 현재(찰나)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현재(찰나)로부터 달아나고, 불안과 두려움이 지속되고, 삶에 대한 지각의 공간 사이에서 잃어버리거나 빠져나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찰나의 형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는 이 T0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하고, 생각하고, T0를 떨어져 바라보거나 T0를 위치시켜 가야 한다. 『알려지지 않은 일상, T0』의 작업은 위에서 이야기한 일련의 '현재 여기 now here'를 떨어져서 바라보는 과정이다.
김영남_그와 우리, 공존의 시간_HD(침묵)_00:06:25_2012

「창백한 푸른 시선/Pale Blue Eyes」은 시간과 장소가 모호한 어느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한 남자의 불안을 통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그리고 지속할 수 밖에 없는 운동을 다룬다. 현대 역사와 한국역사에 있어서 약 50여년에 걸친 주요한 운동적 사건들의 사운드가 파노라마처럼 겹쳐져 있고, 인물은 그 시간을 관통한다. ● 비가 오는 날, (정확한 표현이 없는) 어느 허름한 큰 건물의 지하 복도에 한 여자가 길을 잃고 헤맨다. 여자는 복도에서 만난 눈이 먼 젊은 소녀와 노파를 통해 여자가 품고 있는 역사와 공간이 지닌 불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여자는 어떤 꿈 이야기를 말한다. 이 작품 「그와 우리, 공존의 시간/Time Of Co-existence」은 작가가 거주하고 있는 선감도의 역사적 시간을 공간의 공감각적인 심상으로 펼쳐놓는다. 1942년부터 1945년, 1945년부터 1982년까지 선감학원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어린 영혼들의 비극과 참상이 역사적인 사실로써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이 이야기는 역사의 해석이나 환상이 섞인 과거의 단상들로 이곳 주변을 떠돈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영혼들의 공간을 작가와 배우들과 스탭들은 오가며 촬영을 하고 그들에게 찾아가 말을 건다. 그렇다고 어떤 기담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뭔가 일어날 것 같고, 어떤 감각이 작품을 품고, 그 과정 속에서 이야기가 생겨나도록 한다. 그런 시간들이 교차하고, 감각의 공존을 통해 우리는 한 발짝 떨어져 나와, 지난 한국역사의 숨겨진 한 부분이 지닌 공간과 시간을 연결한다. ●「내 곁에 있어줘/Stand By Me」는 임신한 어느 여자가 산길을 운전 중에 길을 잃었다가 목에 아가미가 달린 어느 소년을 만나는 이야기와 이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일련의 텍스트들로 구성된 영상이다. 상이한 이야기가 이접되는 과정들 속에서 이 여자의 현재 상황이나 심리뿐만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이 마음 깊숙한 근원에서 자리잡고 있는 불안 등이 현재를 환기시키며 보여진다. ●「백개의 못, 사슴의 뿔/A Hundred Nails And Deer's Antler」은 거주/이주/공간의 문제를 배경으로 놓고 코미디적인 형태의 이야기로 구성한 영화이다. 어느 여자 노동자가 월급을 받기 위해 2개월째 공장이 멈춘 상황의 중년 사장을 찾아가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 대화가 발전한다. 돈을 받으려는 자와 돈을 줄 수 없는 자 사이의 삶의 아이러니의 일부분을 그리고 있다. 서울의 양평동의 어느 판금공장에서 촬영한 이 영화는 실제 인터뷰 과정을 통해 나온 이야기나 사건들을 적극 반영하였다. 추상적인 물리적/사회적인 공간과 한 개인이 사회 안에서 지니는 개인 영역의 공간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균형이 깨어질 때 야기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균형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삶의 우연성이라고 제안한다.
김영남_백개의 못, 사슴의 뿔_HD_00:14:23_2012

영화감독으로써, 작가로써 어떤 시간들이 품고 있는 감정이나 정서 그리고 여러 공간들 속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왔다. 혼란스럽거나 미완인 상태, 현실에 고개를 떨구는 무력감, 뭔가 자리 잡지 못하는 부정형의 시간과 공간들로부터 주로 삶의 불확실성, 비정규성, 부유함과 모호함, 불안감을 다루어 왔다. 그것은 「내 청춘에게 고함」, 「보트」라는 일련의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의 형태를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는 그런 영화적인 감수성을 바탕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를 맴도는 역사가 지닌 불안감과 모호함,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공포, 탄식과 소망, 무력감과 꿈틀거림, 무언가 혹은 어딘가를 잃어버림과 같은 어떤 감정들을 이야기 한다. ● 명확히 꽉 잡히지 않는 정서와 보이지 않는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T0를 다시 찾아가는 순간이며, 바로 현재이다, 또한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관객이 지나가버릴 흘러가는 영상(영화)를 보는 과정이다. 지각의 형성 뒤에 오는 것이 아닌 동시간적인, 과거의 시트들과 현실의 기층들이 소통하는 막과 같은 현재를 이번 전시를 통해 탐색한다. 이제 와야 할 바깥으로부터 도래하는 것들이 만나는 지점을 현재라고 볼 때, 그 현재를 다시 재위치시키는 동시간적인 감각이야말로 바로 현재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 생각한다. 이 전시는 그런 태도를 향한 작가 스스로에게 향한 물음이자 고민이고 되돌아봄이며 관람객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지점이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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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E UP




박종일_이일석_이철민_홍성준展 2012_0803 ▶ 2012_0922



박종일_mindscape - monophobia 12_피그먼트 프린트_100×15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화~토요일_10:00am~07:00pm / 일요일_12:00pm~06:00pm

에프앤아트 스페이스 fnart spac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40번지 Tel. +82.2.546.7955 www.fnart.co.kr



돋다, 나오다, 생기다 뜻을 지닌 『COME UP』은 미술대학을 갓 졸업하고 세상에 막 나온 참신하고 열정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선정했으며, 회화에서 2명, 사진에서 2명 등 총 4명의 작가로 구성되어 1,2부로 나누어 전시된다. 박종일 ● 박종일의 「Mindscape; Monophobia」 는 도시시리즈이다. Monophobia는 의학 용어로써 고독공포증이라는 질병을 뜻한다. 21세기, 끊임없이 계속되는 도시문화의 발달, 산업 자본주의와 첨단 디지털 발전의 가세로 도시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고독, 소통의 부재, 함께하지만 함께 하지 않는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패턴화된 도시, 패턴화된 일상을 사는 사람들.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고독공포증의 사람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모습은 사진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박종일은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빠르게 패턴화 된 세상 속으로 사라져 버려지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세상에 제기하면서 말하되 말하지 않는 소통이 아닌 서로 대화하는, 각자의 고독함을 안은 채 극복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을 희망한다. ● 인간은 감정을 동반한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소리나 행동뿐만 아니라 말과 글, 그림과 음악 등과 같은 예술로써도 그 표현은 가능하다. 이때, 인간의 마음은 시시각각 끊임없는 생각과 더불어 하나로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마음들이 존재한다. 따뜻함, 우울함, 평화로움, 불규칙적인 마음 등 실제적으로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 않다. Mindscape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다중 노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중 노출은 단순히 하나 (한 가지 마음) 라는 숫자의 개념도 둘 수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더불어 수시로 바뀌고, 다양한 감정이 중첩되는 마음의 속성을 가시화시키는 작업이다.
이일석_X-S16_C 프린트_120×150cm_2012

이일석 ● "공간은 보는 이의 인식과 상상력의 결합에 의해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라는 의제에서 출발한 이일석의 X 시리즈는 한강 진출입 시설물인 나들목을 점, 선, 면의 공간구성 요소들로 인식하고 이에 교차하는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조형적 요소들을 공간에 재배치한다. 그 순간 '장소'로의 나들목은, 원근법으로 존재하는 3차원의 선들이 'X'의 형태로 교차되며 2차원 평면위에 가상의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다. 일상의 실험적 경험들은 한강과 동네를 잇는 나들목의 변신프로젝트로 발전하게 되었다. 제시 된 이미지들은 '존재를 바라본다'라는 인식에 '존재를 재구성한다'라는 상상력이 더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물임과 동시에 '장소의 소멸'과 '공간의 생성'이라는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장소의 나들목은 X와 함께 사라지고 공간의 나들목은 X로 다시 나타난다."
이철민_in the hands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12

이철민 ● 하루 종일 접하는 각종 매체에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들의 대다수는 뉴스에서 나온다. 매체가 발달하고 손쉽게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뉴스를 보고 읽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보통의 평범한 개인들을 대신해 '특정 인물'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도 있는 결정들을 했다는, 또는 할 것이라는 뭐 그런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이다. 마치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제한으로 복제되어 보도되는 특정 사실에 대한 어떤 장면들은, 마치 그것을 계속해서 소비하는 사람들에겐 그 장면 속 인물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 이철민의 고민의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고 싶어 뉴스를 아무리 본다 한들 그 안에 '나'라는 개인의 자리는 없어 보이고,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기 위해 계속해서 정보를 얻지만, 불안감은 줄어들질 않는다. 안정된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경고와 그에 맞춰 죽을힘을 다해 따라오라는 것 같은 뉘앙스의 뉴스가 대다수인 요즘, 그 와중에 반복적으로 뉴스에 등장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을 대신해 흐름을 만들어내는 '인물'들이 있다. 대다수의 욕망들을 대신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현상'에 대한 보도사진들을 약간의 변형과 왜곡을 통해 이철민은 다시 그려낸다.
홍성준_Portal services III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0×90cm_2012

홍성준 ● 작가 홍성준은 주로 관계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관계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소통적인 부분에 대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관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갖다보니 사람과 사람의 대화에 있어 소통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성준이 겪은 소통의 문제는 타국에서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겪는 문제였다. 이렇듯 작가에게 있어서 관계란 일상에 있어서 늘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 타자와 대화를 할 때 마치 작가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과도 같다. 그 상황을 제 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당시 작가 자신의 모습들을 바라보며, 반복되는 삶, 혹은 형식 안에 끊임없는 파괴의 행동이나 몸짓들, 표현하고자 하는 갈등의 연속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누구나 자주 겪는 소통의 부재 안에서도 그들의 관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아에 대한 고찰을 계속해 나아갈 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관심은 곧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며 회화 안에서 원경을 위주로 작업을 한다는 것 자체는 곧 제 3자의 시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 김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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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여러가지 방법




Several ways of conversation展 2012_0905 ▶ 2012_1023 / 일,공휴일 휴관



박이원_I was there_면에 혼합재료_120×90cm_2012


초대일시 / 2012_0905_수요일_05:00pm

신한갤러리 역삼 공모展

참여작가 박이원 Yiwon Park_리웬민 Li Wenmin_아니누 Anie Nheu 3ppod_3ppod.blogspot.com.au

런치토크 / 2012_0906_목요일_12: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신한갤러리 역삼 SHINHAN GALLERY YEOKSAM 서울 강남구 역삼동 731번지 신한은행 강남별관 B1 신한아트홀 내 Tel. +82.2.2151.7684



신한갤러리 역삼은 9월 5일부터 10월 23일까지 박이원(Yiwon Park), 리웬민(Li Wenmin), 아니누(Anie Nheu) 작가와 함께『대화의 여러가지 방법(Several ways of conversation)』展을 개최한다. 신한갤러리 역삼에서 진행하는 세 번째 공모전시이다. 세 명의 작가는 각각 한국, 중국, 대만 출신으로 아시아 문화권에 뿌리를 두고 시드니에서 작업하는 여성 작가이다. 이들은 개인적 시각언어를 통한 문화적 정체성 교류 관해 고찰하기 위해『대화의 여러가지 방법』을 기획했다. 다양한 드로잉 작업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와의 소통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경험, 인지, 마찰 등을 보여주고자 한다. 9월 6일 정오에는 작가에게 직접 작품 설명을 들으며 점심식사를 할 수 있는 '런치토크'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 신한갤러리 역삼
박이원_you were not there_면에 혼합재료_100×100cm_2012
박이원_you were not there when my heart was melting down_2_종이에 혼합재료_2012

드로잉으로 대화하기 - 대화의 여러 가지 방법 ● 드로잉은 사고를 가시화함으로써, 생각을 시각적 기호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일컫는다. 그러니 드로잉은 지식을 포함하고 작가의 인식, 존재론과 세계관의 기호화이자 감각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고와 연구의 표현, 형상화가 곧 드로잉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손의 표시이자 그만큼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몸의 반응을 기록한다. 동시대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은 이미 그것 자체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작업이 되었다. 그것으로 자족적인 예술이고 훌륭한 미술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구제적인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것도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 개념적이고 인식의 도면 같은 것들도 적지 않다. 드로잉은 무거운 예술작품을 지향하기 보다는 작가 자신의 몸의 반응, 사고의 유연성, 감각의 휘발성을 순간적으로 드러내는데 상당히 효과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은 거의 퍼포먼스에 가깝고 자신의 모든 것을 기술하는 연극적이자 설치적인 것으로 그만의 스타일, 회화의 매너를 직접적으로 지시하는데 용이하다. 어쩌면 드로잉은 미술의 어마어마한 전통으로부터 기민하게 빠져나오고 타인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감각, 몸짓, 사고를 외화하는 데 더없이 기민한 표현매체이자 장르이고 매너인 셈이다. 한국과 중국, 대만의 여성작가 3인이 각자의 드로잉 작업을 묶어 선보인다. 박이원(한국), Wenmin Li(중국), Anie Nhue(대만) 이렇게 3인이다. 동양문화권의 유장한 전통의 세례를 이어받고 있다는 점, 모두 고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호주)작업과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징 등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양문화권에서 활동하는 동양에서 온 젊은 여성 3인의 드로잉 작업인 셈이다. 아시아에서 태어나 서구문화권인 시드니에 이주한 지역적 문화적 특성을 공유했다는 교집합과 그것에 접근하는 각각의 개인의 방식을 시각 언어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이들 3인의 교집합이 여타 서구문화권의 작가들과 확연히 구분될 만큼 선명한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에서는 분명 전통적인 동양미술의 짙은 전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그 위에 예민한 자의식들이 가설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이들은 모두 드로잉을 통해 발언한다. 아시아 문화권에 뿌리를 두고 시드니에서 작업하는 한국, 중국, 대만의 3명의 여성 작가들인 이들은 두 문화 간의 소통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경험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을, 그러니까 우선적으로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이나 자아의식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시대에 자연스레 겪게 되는 '유목적' 성향들을 드로잉 형식을 통해서 개인 적인 언어로 풀어내고자 한다. 이들 세사람의 작업노트는 아래와 같다.
리웬민_Sunflower and tomatoes_실크에 혼합재료_60×40.5cm_2012
리웬민_Here and There I_종이에 혼합재료_175×114cm_2012
리웬민_a pair of pear_종이에 혼합재료_80×64cm_2012


Yiwon Park ● 나의 작업은 시각적 내러티브를 통해 감정의 상태를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데에 있다. 나는 감정을 문화적 맥락에서의 정체성과 연관짓는 매개로 고려한다. 이것은 내가 존재하는 불확실한 장소와 존재자체에 대한 불안정에 관한 감정들이다. 나 자신을 소재로 삼은 자전적인 작업이지만 이것의 바탕에 보다 넓은 의미의 문화적 정체성과 디아스포라 내포하고 있다.나는 나의 이야기 안에 연극적인 요소들과 만들어진 캐릭터를 도입하여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이러한 연속적인 작업은 확장된 드로잉 형식으로 표현된다. Li Wenmin ● 나는 인생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지속해서 한 시점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특별한 여행으로 본다. 그래서 지난 9년간 모국과 현재 거주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국 문화적 유산과 호주문화의 영향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두 문화 모두를 습득할 수 있는 잇점의 감사는 개인적 개념과 표현의 진정한 탐험으로 이끌었다. 드로잉 형식과 전통적인 방법을 작업 매체로 선택하는 것은 여러 맥락의 전통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계속되는 개인적인 해석을 찾는 표현 과정이다. 나의 작업에서 공간과 사물의 표시는나의 이해와 개념을 형성하고 생각과 감정을 초월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정착시키는 내면의 재현의 있에서 필수적이다. Anie Nheu ● 교류와 영향을 통한 정체성과 그것의 형성은 나의 작업에 지속되어 왔다. 신체를 영향이 진행되는 현장으로 사용하며 몸은 또한 정체성 형성을 알리는 감정과 기억의 저장소이다. 따라서, 나의 이미지에서 형태를 찾는 과정은 개념과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신체를 참고로 이미지 만들기는 유기적인 형태를 그리고 그 형태의 감정을 찾는 것이다. 표면을 교류의 은유적 현장으로 하여, 몸을 위한 피부처럼, 텍스쳐를 감정의 내용이 박히는 것처럼 이들의 형태에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한 작업의 부분에서 감정을 연결하는 메카니즘으로 작용한다. 나의 작업은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작업의 내러티브와 감정적인 내용은 다양한 문화를 표류하는 중국 가족에서 자란데에서 줄기 한다.

아니누_baggage_76×50cm_2012
아니누_us, them,a family_83×115cm_2012
아니누_strung with promises_77.5×68cm_2012

이번 전시는 일종의 프로젝트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드로잉을 공동 매체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만들었다. 아울러 대화에는 동의와 반대, 침묵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이 있듯이 이들의 작업 또한 '조화', '지우기', '짓기', '연결하기' 라는 프로젝트를 설정해 놓고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다른 언어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교류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발생하는 요소들에 대해 은유적 접근해 보고자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서로의 이미지에 반응하고 발생하는 문제들을 풀어내는 방식을 통하여 개인의 공간에 개입되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대화의 형식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최종 결과물인 작품만을 전시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기까지의 여정, 상호간의 대화의 과정을 작업에 수렴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들 3인의 드로잉작업을 통해 조금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작업과정을 엿보게 된다. 서구문화권으로 수학하러 온 동양 3국이 여성들은 그곳에서 서구인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동양인이 겪는 문화적 체험이나 미술적인 고민들을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고 동시에 조금씩 편차를 가지고 그 문제에 접근하는 서로의 모습을 거울처럼 만났을 것이다. 그러던 참에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드로잉 작업을 통해 각자 겪는 문제의식을 형상화하거나 기술하는 스타일을 접하게 되면서 드로잉작업과 이들의 문제의식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를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3ppod_Hotch potch no.3_종이에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3ppod_Hotch potch no.2_종이에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3ppod_shadow,cloud,nothingness_종이에 혼합재료_300×200cm_2012
3ppod_shdow_종이에 혼합재료_100×200cm_2012
3ppod_puzzle, Hide & Seek_종이에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드로잉은 그리기와 쓰기, 몸짓과 사고를 종합적으로 발화하고 있다. 그에 적합한 수단이다. 이들의 드로잉/작업은 결국 이들의 몸에서 나온다. 거미줄이 거미의 몸에서 나오듯이 말이다. 드로잉이란 작가의 몸 자체에서 실처럼 풀려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관여하는 일이다. 몸가짐이 드로잉이란 얘기다. 따라서 드로잉이란 그리기나 쓰기 같은 손의 행위로 제한시키기 보다는 "창작을 향한 작가의 몸짓 중 가장 기본이 되는 몸짓"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미술이 감각의 구현이라면 드로잉은 날것의 감각이 직접 산출되는 우선적인 통로다. 작가가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근원적인 몸짓인 것이다. 그것은 회화의 모든 과정을, 정해진 규칙을 전복하고 이분법을 폐기한다. 선과 색채의 구분조차 무화한다. 그 모두를 종ㄹ합하고 이분화 될 수 없는 모호하고 혼돈스러운 영역을 기꺼이 창출한다. 드로잉은 생각을 이끌어가는 몸에서 나온다. 그 몸은 보고 움직이는 몸만이 아니라 정신세계와 교감하는 몸, 세계에 참여하고 반응하고 자신의 감각으로 서는, 실존하는 몸이다. 자기 몸과 감각을 외화해서 자존시키는 일이 드로잉이기에 오늘날 작가들에게 드로잉은 단지 그림의 밑작업이나 초벌에 머물지 않고 그것 자체로 자족적이며 세계를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었다. 새로운 시각 세계의 가능성을 실험해보는 적극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결국 이들 3인은 드로잉 작업을 통해 자신들이 접한 낯선 세계, 문화와 비교적 익숙한 문화의 차이와 충돌, 그리고 오늘날 부정할 수 없는 글로벌, 다문화문화 속에서의 유목적인 작가상과 미술관을 사유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니 이들 3인의 드로잉은 흥미롭게도 중국본토와 대만, 그리고 한국에서의 미술 전통과 더 크게는 동양문화권, 그리고 서양미술사의 영향, 유목주의 등이 뒤섞여 빚어내는 초상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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