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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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5.15 20: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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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ous Show


마리킴展 / MARI KIM / printing 2012_0517 ▶ 2012_0530


마리킴_Mari Kim (Self portrait)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30×144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308d | 마리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마리킴의 페이머스 쇼, 아이돌(Eyedoll)의 페미니즘 쇼"업어줄게. 따뜻한 체온을 느끼렴. 이제 눈물은 뚝 그치고 그냥 곤히 잠드는 거야."_마리킴 ● 마리킴의 캐릭터, 왕눈이 소녀들의 이름은 '아이돌'(Eyedoll)이다. 그녀의 아트북『아이돌』(Eyedoll, Art Fever, 2008)이 출간 되면서부터 이 소녀들은 Eyedoll이라 이름 붙여졌다. 발음이 똑같은 Idol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녀는 유명 아이돌그룹인 2NE1의 캐릭터와 뮤직비디오를 제작(2011)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나이 어린 대중문화스타로 알려져 있는 아이돌(Idol)의 원 뜻은 우상(偶像)이다. 우상이란 뭔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우상은 한마디로 가짜/복제본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진짜/원본은? 그것은 바로 신(神)이었다. 전근대와 근대를 신이라는 키워드로 나눈다면, 신과 신의 부재(不在)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란 말은 형이상학의 몰락과 함께 자연과학의 합리주의, 즉 인간의 이성이 주체가 되는 20세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때부터 작가는 신과 귀족에게 봉사하는 신분을 떠나 창조라는 신의 절대영역의 권위를 넘보게 된다. 이것이 모더니즘 미학의 출발이지만, 그 출발과 동시에 그 권위는 균열을 맞게 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생각처럼 산업화로 인한 기술복제가 원본의 아우라(Aura)를 쇠퇴시켰기 때문이다. 뒤샹은 레디메이드로 작품의 권위를 공산품에 넘겨줬고,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이란 복제기법으로 작가의 아뜰리에를 공장(Factory)으로 만들었다.
마리킴_Shin Saimdang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65×124cm_2012
마리킴_Joan of Arc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40×91cm_2012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마리킴의 평면작품들은 모두 출력물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컴퓨터에서 그림을 그리며 완성 된 데이터파일을 출력소로 보낸다. 출력물은 갤러리에서 전시 되고, 이미지파일은 블로그에 올려진다. 앤디 워홀이 구축한 공장 시스템이 21세기 정보화시대를 맞아 업그레이드 된 셈이다. 판화가 원본의 복제품이라면 이 출력물들은 원본이 없다. 몇 벌을 찍어도 모두가 원본인 셈이다. 보드리야르가 말한 원본이 없는 복제,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인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에선 복제가 원본이 된다. 우상이 곧 신이 된다. 우상숭배를 금지 해온 문화가 우상(Idol)을 떠받들게 된 것이다. 우상(Idol)은 이제 그 옛날의 거대한 신이 아니다. 저마다의 취향으로 파편화 된 개인의 신이다. 모니터에 출몰 하는 아이돌(Idol) 걸그룹이 광장에서 연설하는 혁명가를 대체해 나간다. 따지고 보면 어린소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단지 그녀들은 주인공도 관객도 아니었을 뿐이다. 근대가 출범하면서 새롭게 떠오른 여성이란 주체들이 20세기 초에 참정권을 따내더니 페미니즘운동을 통해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 미디어를 장악한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또 하나의 주체가 탄생한다.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다. 컬트영화 매니아인 마리킴은 자신의 RMIT 석사논문인『뒤틀린 순수』(Twisted Innocence, 2006)에서 아이돌(Eyedoll)의 영감을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70년대 미국의 호러무비(엑소시스트, 오멘, 캐리, 샤이닝등)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그녀는 어린소녀들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런 영화들이 68혁명이후 서양의 성해방운동과 아동인권운동에 대한 기성세대의 무의식적 공포를 나타낸 걸로 해석했다. 여기서 그녀는 여성과 아동을 합쳐 아이돌(Eyedoll)을 창조한다. 어린소녀들은 우상(Idol)이 되기를 꿈꾼다.
마리킴_Coco Chanel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35×114cm_2012
마리킴_Madame Curie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35×98cm_2012
이번 전시의 타이틀은 '페이머스 쇼'다. 동서고금을 망라한 유명여성들이 아이돌(Eyedoll)로 변신한다. 동시에 아이돌(Eyedoll)이 유명여성들을 롤플레잉 한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돌(Eyedoll)이 차용하는 이 유명여성들은 이미 기성 미디어에 의해 정형화 된 이미지다. 그 미디어란 서구의 근대문명이 세계를 보는 창이다. 마리킴의 아이돌(Eyedoll)은 어린소녀들의 큰 눈을 통해 관객이 다른 창을 엿보기를 원한다. 더 나아가 미디어에 의해 주입 된 이 유명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리셋(Reset)하기를 요구한다. 그 대상은 남녀평등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성을 닮아 온 페미니스트들을 겨냥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현재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같은 여성적 매력을 강조한 페미니스트가 그 리스트에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 쟌다르크, 시민혁명에 의해 처형 된 마리 앙뜨와네트, 홀로코스트의 상징 안네 프랑크, 철의 여인 대처 등은 모두 아이돌(Eyedoll)이라는 천진난만한 욕망을 가진 어린소녀라는 자연인, 모든 가능성을 가진 잠재성으로 융해된다. 페이머스 쇼의 또 다른 리스트를 차지하는 주인공은 백설공주, 메텔, 키티 같은 만화캐릭터들이다. 마리킴은 이전 작품들에서 이미 아이돌(Eyedoll)에 미키 마우스 귀나 토끼 귀 등을 달아 그 만화 같은 속성을 강조 한 바 있다. 나는 이런 요소들을 오타쿠들의 용어를 빌어 '팝아트적 모에요소'라고 부르고 싶다. '모에'(Moe, 萌え)는 '싹이 트다'라는 뜻으로서 싹틀 '맹'(萌)자의 일본식 발음이다. 오타쿠 문화에서는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싹트는 메이드 복장이나 고양이 귀 같은 특정한 요소를 말한다. 아즈마 히로키(Azuma Hiroki)는『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에서 이런 모에요소에 반응하는 집단의 특성을 약물의존증적이라고 말한다. 프로작이나 향정신성의약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 집단의 외부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오직 그런 요소에 반응 하도록 훈련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단순한 기표이자 그 코드를 모르면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는 폐쇄적인 이너서클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대중에게 열려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모종의 특수한 이너서클로 닫혀 있는 팝아트의 이율배반적 특성에도 적용 할 수 있다. 이때의 이너서클은 제도권 미술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술계란 이너서클 안에서도 일본의 오타쿠 문화나 컬트영화등을 공유하는 특수한 취미집단에 가깝다. 어린소녀들에겐 어린소녀들만의 문화가 있다. 그들은 그 문화를 공유하며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만만한 것 같지만 그 속은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친근한 숭고미'라고 부르고 싶다.
마리킴_Hello Kitty_캔버스에 울트라크롬 잉크 프린트_124×101cm×4_2012
마리킴_2NE1_람다 프린트, 페이스 마운트_162×132cm_2011
이것은 팝아트의 '일상의 숭고미'란 전략과 일치한다. 그 이름처럼 눈이 큰 아이돌(Eyedoll). 이 눈은 너무 커서 어쩐지 인간의 눈이 아닌 것 같다. 무표정한 얼굴의 다른 요소들인 코나 입은 이 눈을 보완 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얼굴이란 기호를 구성하기 위한 조합일 뿐이다. 아니 얼굴마저 눈에 종속 되어 있다. 모든 것은 눈에 집중 되어 있다. 이 눈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가르는 게이트이자 웜홀(Wormhole)이다. 이 점을 강조하듯이 전시장에는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는 피라미드가 서있다. 그 눈 한 가운데 홈을 통해 피라미드의 내부를 훔쳐 볼 수 있다. 마리킴의 '전시안'(全視眼, All-Seeing Eye)을 통해 들여다본 내부는 수수께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마리킴의 페이머스 쇼는 권위가 확정 된 역사적 인물들을 어린 여자아이들이 롤플레잉하는 버라이어티 쇼로 구성하여 그녀만의 가상현실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우리를 초대 한다. 이 영역은 우리의 고정 관념 속 유명 여성들을 아이돌(Eyedoll)로 재창조(Re-creation)한 상상의 놀이터(Recreation)이다. 이제 관객들은 이 새로운 세계의 유혹을 거부할지 받아들일 지만 결정하면 된다. 당신은 이 세계로 날아 올 준비가 되어 있는가? ■ 강영민 ------------------


畵·刻·人


김준권展 / KIMJOONKWON / 金俊權 / printing 2012_0516 ▶ 2012_0521


김준권_겨울바다_수묵목판_53×94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007f | 김준권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6_수요일_05:00pm
김준권 목판화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김준권의 작품은 평온하고 정서적이며, 함축되고 시적이며, 동방예술의 미적 특질이 풍부하다. 예를 든다면 그의 작품은 마치 한국의 산천으로부터 흘러나온 샘물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고 미래를 향해 흘러갈 것이다. ■ 송원문

김준권_대나무 숲_채묵목판_92×208cm

오로지 '목판화'를 통해서만 세계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려는 김준권의 궁극적 화두(話頭)가「畵·刻·印」이 아니라「畵·刻·人」이었음을 보면, 이는 단순히 기술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쟁이'를 넘어서는 것이며, 종국에는 그림(畵)과 프로세스로서의 새김(刻)과 찍음(印)이 모두 작가와 보는 사람의 마음(人)으로 귀결된다는 뜻이다. 목판화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사람에게로 다가서려는 그의 인간적 태도는 앞으로의 작업도 푸근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게 사람과 이별하고 가속도로 달리는 현대미술과는 다른 목판화만의 소박한 매력이기도 하다. ■ 김진하

김준권_대나무-1211_채묵목판_60×99cm

김준권의 수성 다색목판화는 한국 현대 산수화의 방향을 제시할 만큼 독보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를 계승한 조형미를 떠오르게 하여 반갑기 짝이 없다. 현실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국토사랑, 부지런한 발품, 생거진천의 땅에서 받는 에너지, 50대를 넘어선 판화기술과 예술적 완숙, 한 작품에 대여섯판 이상 파고 찍는 강도 높은 노동을 감내하는 장인정신 등 여전히 건강하다. 김준권이 지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생동生動하는 기운氣韻을 유지할 것 같다. ■ 이태호

김준권_대나무-1212_채묵목판_50×79cm

내면의 판을 갈아 선경禪境을 찍는 그림수행 ● 이번 전시회에 또 그가 내인 판화들은「靑竹」연작이다. 대나무가 외투를 입은 청회색빛 '겨울'을 벗고 야들야들한 연초록빛 '봄'으로 새 단장을 하였다. 종종 그의 주제는 소재 속에 녹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대상이 가진 상징의 언어는 결을 따르되 결코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어 날마다 그것을 따라 읽고 만지고 그리고 즐기며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대나무도 그렇다. ● 머리오리는 소쇄하니 바람을 쓸고 가슴은 텅 비어 무심한데 사계절 곧은 그림자는 밤마다 달빛을 희롱한다. 나무도 아니요 풀도 아닌 비목비초非木非草의 한 가운데를 살아 백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면 어찌 새 세상의 봉황을 못 부를까! '봉황새'는 중국 최초의 황제인 황제黃帝 때 나타났다고 하여 전설이 되었다. 봉황은 출현할 성군을 위해 나타나고 대나무는 그 봉황을 맞이하기 위해 열매(봉황새가 유일하게 먹는다는 '죽실')를 예비한다는 '각본'. 대나무의 초고속 생장력(하루에 60~100cm를 자라 약 3개월 만에 성목이 된다.)이나, 마치 달이나 갈대 같은 것이 긴 세월을 치르는 동안 해뜩 변해버린 듯 기묘한 식물이라는 점도 관심거리지만 대나무다움은 역시 마디 속이 텅 비어 있는 '공동空洞현상'과 백년 만에 한번 꽃을 피우고 모두 죽는 미스터리의 '개화현상'에 있다. 단 한번 지핀 불길에 목숨을 건다? 사랑 말인가 깨달음 말인가...

김준권_대나무-1213_채묵목판_53×90cm

김준권의 대나무 연작은 말하자면 이런 대나무의 유래와 성상과 빛깔을 무심히 껴안고 돈다. 그는 목판 위에 칼춤을 추면서도 무난하고 냉정하며 고독하다. 그가 그리고 파고 찍는 노동의 형태가 그러하고 묵언의 대화법을 감추고 있는 저 대나무 속 같은 '공동空洞의 마음'이 그러하다.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중간에 놓인 다리쯤 될까, 조금 낭창낭창하다 싶지만 그렇다고 어떤 '바람'을 기대한 것은 아니니 이번에도 그는 과묵한 편이다. 가늘고 긴 대나무의 줄기든 가벼운 잎사귀든 그 그늘이든 그 볕이든 한 데 묶어 매 순간의 움직임을 차단한다. 대나무를 소재로 한 여느 수묵화들이 마치 대여섯 자의 거리를 두고 부분적으로 죽간의 크기와 길이를 정한 다음 잔가지와 이파리의 필력을 다듬는 짜임으로 흔했거나, 더러 뒤란이나 마을을 에워싼 대숲을 먹 번짐과 함께 넓게 담아내는 것들이었으되 아직까지 칼로 무수히 색점을 뜬 사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몇 걸음 중경으로 물러나 전체 대숲을 잡아내고자 한 이유를 알만하다. 작품 『대나무 숲』에서 보듯 화면 하나를 댓잎의 파노라마로 즐기는 그의 한가로움이 멋지지만 숲 전체를 압도하며 정말 판각으로 도전하고자 한 담력과 그의 장인적 포부에서는 차라리 질린다.

김준권_靑竹-1208_채묵목판_56×88.5cm
김준권_숲에서-1103_채묵목판_42×70cm

일본에는 수성판화 '우키요에'가 있다면 중국에는 '수인목판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동등한 지위의 판화는 없을까... 그는 의당 '수묵목판화'라 답한다. 뱃속의 아기 이름을 이미 지어놓은 것이다. 그가 불러줌으로써 비로소 기꺼워지는바 뱃속의 태동이 좋다. 그가 의욕적으로 전취戰取하고자 하는 것은 적어도 그 모국어적 독자성에 서있을 목표이니 우선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저 티 없이 맑은 기법에 흐뭇이 박수를 보낸다. ● 눈 내리는 날 죽총竹叢에 앉아보라. 거기 어디에 지상의 삿된 언어와 허튼 욕망이 도사리고 있으며 거기 어디에 위선과 훼절과 굴욕의 만신창이가 웅크리고 있는지! 김준권이 이제 그런 영어囹圄의 것들을 다 알았으니 바람이 능수버들을 매만지고 폭풍이 슬슬 대숲을 술렁이게 하는 서늘하고 선유仙遊한 칼놀림을 더 보여주면 아니 될까... 가늘고 곧아서 푸르른 것이 사시를 흔들며 우리들의 영혼을 맑혀주는 댓바람소리나 그 바람 그친 청정한 날 선지扇紙 같은 달빛이 지상에 그어대는 눈부신 수묵화를 그의 목판과 칼끝에서 바라본다. (김준권의 수묵목판화의 길 - 中에서)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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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 發·我


정찬부展 / JUNGCHANBOO / 鄭贊富 / sculpture 2012_0516 ▶ 2012_0522


정찬부_Come Out_빨대, 혼합재료_60×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910b | 정찬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Tel. +82.2.737.4678 gallerydos.com

플라스틱, 그 무한한 생명의 에너지 ● 우리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플라스틱이 있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화학적 합성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제는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인류는 알게 모르게 자연물에서 인공물로 잠식당하고 있으며 현대인에게는 자연의 풍경보다 인위적인 풍경이 더 익숙할 지도 모른다. 작가는 플라스틱 빨대라는 주변의 물건을 재료로 선택하고 그 자체를 현대성을 반영하는 매개체로 받아들인다. 일정하게 나눠진 형형색색의 단위들은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는 씨앗처럼 새로운 생명체의 모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뻗어나간다. 전시 주제인 '발아'는 식물의 싹이 발생한다(發牙)는 일반적인 의미도 갖지만 새로운 생명으로 재창조하는 작업과정이 곧 자신이 가진 작가적 에너지를 표출하는 행위(發我)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찬부_Come Out_빨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정찬부_Come Out_빨대, 혼합재료_120×135cm_2012
플라스틱은 순수하게 인간이 만든 물질이며 시적인 감성보다는 현실을 자극한다. 빨대가 가진 현란한 색채와 깊이 없이 드러나는 노출 그리고 대중성은 현대적 감수성을 잘 드러내는 표현도구로 받아들여진다. 작업 전반에 걸친 분해와 재조합의 과정은 빨대가 가진 일상의 기능성을 해체하며 플라스틱이라는 물성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재료를 만지고 느끼고 사고하는 상호과정은 완결된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돌, 나무, 금속과 같은 전통적인 재료와 비교되는 가벼운 밀도와 값싼 이미지는 작가에게는 극복해야할 대상이며 역으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한다.
정찬부_Come Out_빨대, 혼합재료_35×70cm_2012
정찬부_Come Out_빨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분자를 연상시키는 최소한의 파편들은 양감과 무게를 지닌 자연의 이미지로 재조합된다. 작가는 정형화된 형식을 적용하기보다는 재료가 이끄는 대로 형상들을 발전시킨다. 작은 단위들이 모여 큰 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 상호 연관성을 지닌 하나의 유기적 형태로 진화하는 것이다. 빨대 한 조각은 최소한의 조형 요소로서 회화에서의 한 붓질과 같다. 일정한 길이의 빨대가 이어지고 뻗어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색 점의 물결들은 매끈거리는 표면의 질감과 함께 작가만의 고유한 감각을 드러낸다. 노동 집약적인 결과물의 첫 시작은 작은 플라스틱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재탄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응축되어 있다. 빨대가 가진 에너지는 생명의 에너지로 전환되며 그 안에는 이미지와 실재, 인공과 자연이라는 이중적인 현실이 평행한다.
정찬부_Antibarometer_빨대, 혼합재료_30×120cm_2012
정찬부_Antibarometer_빨대,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정찬부는 빨대가 가진 고정된 통념을 뒤엎고 유기적인 형상으로 재창조하고자 한다. 재료가 가진 물성은 작품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러한 오브제의 사용은 작품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의 손을 거친 작은 인공 조각들은 발아하여 무한한 생명력을 얻는다. 기존의 용도를 전환하고 형태를 변형하는 심상치 않은 과정은 흔한 일회용품을 예술로 격상시킨다. 익숙함이 낯설음이 되는 시각적 충돌과 괴리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 그리고 자연의 관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사용되고 버려지는 것으로 여겨졌던 일상의 물건이 보여주는 새로운 풍경들은 보는 이의 시각에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 김미향 --------------

線·感 - 자유를 품다


전경화展 / JUNKYONGHWA / 全敬華 / fiber art 2012_0516 ▶ 2012_0522


전경화_Tears_vinyl thread wrapping_110×310cm_201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갤러리 라메르 관람시간 / 10:30am~06:30pm / 화_10:30am~12:00pm 갤러리 라메르 GALLERY LAMER 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홍익빌딩 3층 Tel. +82.2.730.5454 www.gallerylamer.com

빛으로 투영되는 선의 미학, 그 수공의 아름다움 ● 현대미술이 지니고 있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다양성일 것이다. 소재와 표현에 있어 경직된 구분은 이미 의미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장르간의 결합과 새로운 매재의 개발로 그 외연은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이는 개별적인 개성의 무제한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시각과 표현 방식을 통해 발산되는 다양한 개성들은 바로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담보하며 유기적인 증식을 견인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 작가 전경화의 작업은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 금속성을 띈 단색조의 화면은 엄숙하고 견고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여타 회화 표현의 경우와 같이 그려지고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고 축적되어 이루어진 또 다른 조형 방식의 산물이다.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재료적 특성과 극히 절제된 형상과 표현은 다분히 금욕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견상의 특징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독특한 감성은 그의 화면을 단순한 물질적 구조로 읽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사변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 그것은 물질을 통해 정신을 표현하고, 조형을 통해 사유를 구체화 하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결국 시각적 자극을 사변적 내용으로 변환시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는 내밀한 사유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물론 그 내용과 실체는 구체적이고 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물질적 전개가 아니라 정신적인 수렴에 있음은 여실하다.
전경화_Desire_vinyl thread wrapping_100×300cm_2011
전경화_Clamor for Reform_vinyl thread wrapping_가변크기_2011
전경화_Curve Play_vinyl thread wrapping_100×120cm_2011
작가의 작업은 수지를 이용한 독특한 방법이다. 수지에 물리적인 힘을 반복적으로 가하여 얻어지는 극히 섬세한 섬유 형태의 실과 같은 물질을 중첩하여 형상을 구축하는 작업 방식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작위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의 산물이지만, 그 속성의 본질은 무작위적인 것들이다. 직선들로 이루어진 실들은 엄정한 질서를 구축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곡선의 유려하고 부드러움으로 발현된다. 작위적인 것의 무작위적인 것으로의 변환, 그리고 직선의 곡선으로의 환치는 바로 작가의 작업 의지로 대변되는 필연의 내용들을 우연의 요소로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절충인 셈이다. 결국 작가의 작업은 우연과 필연을 날줄과 씨줄로 하여 엮어내는 물질의 중첩이며, 물성의 초월이다. ● 견고한 금속성의 은은하고 침잠된 빛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화면은 빛이라는 조건에 의해 비로소 작동되는 구조이다. 빛을 통해 섬세한 섬유질 같은 수지의 결들이 살아나고, 그것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난반사는 빛을 발산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에 축적함으로써 무게와 깊이를 지니게 된다. 어쩌면 이는 단순히 작품을 투영하기 위한 조명의 개념이 아니라 또 다른 자연의 조건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유기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빛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각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직선과 곡선의 변주를 이루어낸다. 그것은 우연의 형식을 취하지만, 일정한 형상을 드러냄으로써 필연적인 것으로 귀납되게 된다. 빛들은 반사를 통해 물질의 표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지닌 아득한 깊이를 표출함으로써 반복적인 노동의 흔적들을 일일이 일으켜 세우고 있다. 기계적인 정연함 사이로 전해지는 따뜻하고 극히 인간적인 감성은 바로 이에서 비롯되는 가치일 것이다. 그것은 완강한 직선의 구조를 통해 부드럽고 원만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빛의 반사를 통해 오히려 그 깊이를 더하는 역설과 반전의 설정이다. 작가의 작업은 기하학적인 기계적 구조를 통해 다분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의 체온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부드러운 곡선과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금속성을 띈 독특한 질감과 시각적 자극이 안온하게 느껴지는 소이일 것이다.
전경화_At will_vinyl thread wrapping_60×100cm_2012
전경화_the rhythm of line_vinyl thread wrapping_40×180cm_2012
전경화_ebb and flow of line_vinyl thread wrapping_60×110cm×2_2012
작가의 화면은 빛의 파장에 의해, 또 기하학적인 형태의 연속성에 의해 화면 밖으로 까지 그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그것은 프레임의 그림자까지도 아우르며 미처 그려지지 않은, 혹은 표현되지 못한 또 다른 우연의 요소들을 전개시킨다. 공간이 확장됨으로써 무수한 섬유질들의 유기적인 구조는 반복적으로 증식되고, 부드러운 곡선은 완만한 원운동의 궤적을 통해 운율 같은 흐름을 일정한 질서로 수렴해 낸다. 그것은 마치 여백과 같이 독특한 여운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작품의 공명을 증폭시키고 있다. 특히 빛이라는 매개에 의한 조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확산의 공간 운용은 효과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부조와 같은 요철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섬유질의 독특한 매재를 통한 작가의 조형 작업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의 화면은 대단히 함축적이고 단순화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모노크롬 회화의 흑백 구조처럼 절제된 화면 속에서 여리고 가냘픈 선의 운동들을 통해 그 오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직선과 원 운동의 곡선이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미의 세계는 추상의 미, 기하학적인 미이며 이는 바로 현대적 감각의 미"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동양적 사유에 대한 단상들을 작업의 기저로 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직선들의 반복적인 축적을 통해 원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 일단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직선과 곡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같은 것이었으며, 공간의 확장을 통해 표현되어진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 역시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해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함축과 절제, 그리고 금욕적이면서 엄정한 질서를 지닌 화면에서 읽혀지는 사변의 실체인 셈이다. 작가는 섬유미술을 전공하였지만, 섬유를 실용과 공예의 제한된 영역에서 탈피시켜 순수예술의 정원에 들게 하였다. 그것은 그저 재료적인 이질적 신선함이나 장르간의 물리적 융합이 아닌 독특한 감성과 조형을 통해 현대미술에 다양성을 더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작업에 대한 진지한 몰입과 개성의 표출은 건강한 작가로서의 기대를 담보해 주는 덕목일 것이다. ■ 김상철 -----------------

변방풍경(邊防風景) - 보이지 않는 사람


전은희展 / JUNEUNHEE / 田銀姬 / painting 2012_0516 ▶ 2012_0608 / 월요일 휴관


전은희_간판_한지에 채색_180×14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21d | 전은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6_수요일_05:00pm 기획 / 브릿지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릿지갤러리 Bridg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82.2.722.5127 bridge149.blog.me

변방풍경(邊防風景) - 보이지 않는 사람 ● 부재된 공간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는 타자들이 들어있으며 타자의 얼굴은 부재된 풍경으로 작품에 보여 진다. 샤르트르에게 부재는 존재의 무(無)가 아니다. 현전과 함께 존재의 방식중의 하나로 타자가 어느 장소에서 부재한다고 할 때, 이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한 장소에서 타자는 존재의 사실성과는 대립하는 형상이나 타자가 존재했었음의 실재성과는 대립하지 않는다. 일일이 열거 못할 시간의 역사와 남겨진 흔적들로 타자들은 빈 공간에 실재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함(존재했었음)을 드러낸다. ● 녹이 쓴 철문과 깨진 시멘트 담, 모서리가 둥글어진 계단, 떨어져 버린 주소판, 버려진 침대 스프링, 옥상에 방치된 살림살이들, 빈 창문 등 모두가 존재의 증명임과 동시에 부재의 증명들인 사물이다. ● 이들은 자신의 몸으로 부재한 낯선 풍경을 만들고 공간에 묶인 시간의 덩어리들을 증명하며 동시에 부재라는 존재로 재탄생한다. 그 모든 사물들은 결코 녹녹치 않은 삶의 시간들을 몸으로 맞으며 변화의 시간들을 직접 표현해준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겪었을 이야기와 앞으로 다가올 시간까지도... ● 변두리라고 불리는 곳으로 갈수록 이런 증명들은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간직한 채 나에게 손짓을 한다. "세상에 나를 보여 주세요" , "내가 가진 이 아름다운 모습들을, 그들이 만든 시간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세요." 라고... ● 늘 새로움과 변화의 갈망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고 새로움의 미학에 맞춰 괴상한 노래만 하는 고상한(?) 기득권자들은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밀어버리고 본인들 기준에 맞는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다시 만들겠다느니, 한발 더 나아가 다른 대안이라며 뱉은 대책이라는 것이 박제화 된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교육의 장소로 만들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고작이다. 진정한 부재마저 소멸시켜 또 다른 부재의 생산 장소로 때만 되면 없애주겠다며 목에 핏대 세우고 외치더니 이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말들의 울타리에 가둬져 오도 가도 못하는 지경이 된 듯하다. ● 눈앞의 사라짐이 오래된 사진 속에 남아 있다 해도 그것은 바르트가 말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주체의 죽음이며, 지금 여기에 없음을 각인시키는 존재증명, 즉 부재증명인 것이다. 부재의 풍경을 사진에서의 존재의 죽음이 아닌, 무언가 더 덧붙여지고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붓질의 회화로 드러내 본다. 부재한 이들의 삶의 시간만큼 종이 속으로, 또 종이 위로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손놀림은 여전히 나의 현존을 증명해주며, 나에게 삶의 의무를 부여한다. ■ 전은희
전은희_청명 淸明_한지에 채색_65×100cm_2012
전은희_두개의 기억_한지에 채색_45×60cm_2012
전은희_옥상정원_한지에 채색_53×41cm_2012 전은희_운장대 雲場垈_한지에 채색_162×115cm_2012
전은희_그들의 공간_한지에 채색_45×60cm_2012
전은희_실재적 풍경_한지에 채색_60×90cm_2012 전은희_말할 수 없는 기억Ⅰ_한지에 채색_50×65cm_2012
전은희_알수 없는 시간Ⅰ_한지에 채색_162×130cm_2012 전은희_알수 없는 시간Ⅱ_한지에 채색_73×61cm_2012
Scenes in outskirt? The invisible people -------------

LUMINESCENT in DARKNESS


장용선展 / JANGYONGSUN / 張龍善 / sculpture 2012_0516 ▶ 2012_0622


장용선_Dark matter1203_scorched stainless steel_274×203×58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장용선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30am~07:0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세포에서 우주로 확장되는 생명의 비의 ● 파이프의 단면은 마치 하나의 세포 구조처럼 보였고, 파이프의 배열은 생명의 근원이 꿈틀거리듯 생기 있게 다가왔다. 작가 장용선이 현재 자신의 작업이 유래한 착상 내지 발상을 술회하면서 내놓은 고백인데, 아무래도 작가의 작업에 입문하는 계기 내지 실마리가 되어줄 것 같다. ● 사실 적재돼 있는 파이프의 단면과 배열이 세포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엄밀하게는 그 자체가 파이프에 내재된 고유의 성질이라기보다는 파이프로부터 작가가 보고 읽어낸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일종의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인데, 작가의 경우에 그 착안은 상당할 정도로 구체적이다. 이를테면 파이프의 단면을 세포와, 그리고 파이프의 배열을 생명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파이프의 단면이 모여 배열(패턴)을 이루듯 낱낱의 세포가 모여 생명체를 일궈낸다. 형태적 유사성과 함께 실제와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일종의 유비적 과정이 수행되고 있는 것. 이후 파이프의 단면들을 모아 배열을 이루는 방법과 과정을 통해서 유기적 형태의 세포 덩어리 곧 생명체 곧 생명의 최소단위를 일궈내는 것은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실질적인 근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일종의 생명주의에 대한 관심과 이념이 작용하고 있다. 결국 온통 생명에 맞춰진 평소의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고, 우연히 포착된 것일 수도 있는, 그래서 간과했을 수도 있는 일이 필연적인 사건으로 다가 왔던 것. ●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작업의 특수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주체와의 관계와 관련한 상대적으로 더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건드린다. 말하자면 세계가 어떻게 주체 속으로 들어와 둥지를 트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세계가 주체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변형되는지, 그리고 그렇게 변형된 비전이 어떻게 세계 자체의 유비적 표상이 될 수가 있는지(말하자면 파이프와 세포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차이가 클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 차이를 극복하고 파이프가 세포 자체의 유비적 표상이 될 수가 있는지)와 관련한 메커니즘 혹은 작동원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장용선_Particle SN470915Ⅱ_스테인리스 스틸_32×43×21cm_2011
장용선_Particle 470915_스테인리스 스틸_64×63×7cm_2011
결국 파이프의 단면을 배열해 만든 형상으로 하여금 군집을 이룬 세포 덩어리를 연상시키는 것이 작가의 작업의 관건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먼저 일종의 지지체를 만드는데, 석고 덩어리를 이용해 세포 덩어리의 유기적 형태 그대로를 재현한다. 그렇게 만든 형상을 지지체 삼아 그 위에 파이프의 단면을 배열하는데, 크고 작은 굵기의 속이 빈 파이프를 일정한 크기로 자른 단면을 용접으로 연이어 붙여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전체 형상을 만든다. 이렇게 다 덮씌우고 나서 지지체를 떼어내면 세포 덩어리 형상이 완성된다. 그 형상은 덩어리라기보다는 속이 빈 형상이며, 엄밀하게는 겉 형상을 본떠 만든 사물의 껍질이며 세포의 껍질에 가깝다. 속이 빈 탓에 겉과 속이 서로 통하는 통 구조를 띠고 있고, 이는 파이프의 절단된 단면들의 집적으로 나타난 형태의 최소단위구조(세포구조?)로 변주된다. 작가의 작업은 말하자면 전체 형상으로 보나 세부적인 디테일로 보나 겉과 속이 통하고 안과 밖이 연속되는 통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통 구조야말로 작가의 작업의 주요한 특징이랄 수 있다. ● 그리고 통 구조는 이런 형태적 특징뿐만 아니라 작가의 작업을 의미론적으로 뒷받침해 줄 서사적 계기마저 함축하고 있다. 즉 세포는 숨을 쉰다(작가의 표현으로는 숨덩이). 숨을 쉬기 위해선 숨이 들고나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통 구조는 바로 이처럼 형태 위로 숨이 들락거리는 숨길(숨이 지나가는 길)을 낸 경우로 볼 수가 있겠다(근작에서 작가의 관심은 세포로부터 우주를 유영하는 행성과 암흑물질로 옮겨가는데, 이 경우에 숨길은 숨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을 관통하는 빛의 통로로 변주된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작가는 여러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형태의 세포 덩어리(숨덩이)들을 만든다. 그리고 세포 덩어리들을 공간에다 설치하는데, 마치 원형물질(양수? 생명수?) 속에 부유하는 세포 혹은 생명의 입자들을 보는 것 같다. 조형물이 놓이는 공간 자체가 최초의 생명이 잉태되는 태곳적 풍경이며 원형적 풍경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며, 이로써 공간 자체를 조형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면서 작업의 외연을 공간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게 공간과 상호작용하는 조형물 자체는 비록 쇠 파이프의 절단된 단면을 집적시켜 만든 것이지만 정작 쇠의 성질이나 질료로서보다는 세포의 유기적인 형상이 느껴지고, 무거운 재료로 만든 것이지만 실제로는 가볍게 부유하는 것 같은 인상이 감지된다. 쇠를 질료로 해서 정작 그 질료에 반하는 형상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형상이 실제로도 비금속적인 인상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사물 혹은 물질의 본성과 관련한 일종의 연금술적 변성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엿보인다.
장용선_Particle SN481119_스테인리스 스틸_75×75×75cm_2012
장용선_Particle series&Dark matter_가변설치_2012
그리고 근작에서 작가의 관심은 세포로부터 우주로 옮겨진다. 이런 관심축의 이동은 외관상 급작스런 도약이나 비약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유기적이고 자연스런 변화로 보인다. 세포가 생명의 최소단위라고 한다면 행성은 우주의 최소단위에 해당한다. 세포가 원형물질(생명수)을 자양분 삼아 유기체의 기관(몸)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처럼 행성은 망망대해의 우주의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돈다. 우주는 말하자면 원초적 생명이 유래한 거대한 자궁이며 매트릭스에 해당하는 것. 모든 존재는 이 위대한 자궁인 우주로부터 왔다. 생명도, 세포도, 별도. 그렇게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는 하나로 연속되고 소우주와 대우주가 서로 통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의문과 물음이 세포에 주목하게 했고 우주로 귀결되게 했다. ● 특히 인간의 몸을 이루는 분자는 우주에서 왔고 인류의 조상은 우주에 존재하는 별이라고 보는 천체물리학의 발생론적 관점에는 과학과 함께 일말의 낭만주의 내지 신비주의가 스며있다. 모든 과학은 유사과학이다. 처음에 이성으로 입문해서 종래에는 신비로 끝난다. 과학 자체가 어느 정도는 신비학이며, 과학과 신비학은 서로 고립된 섬으로서보다는 상호간섭적이고 상호 내포적이다. 생명은 질료의 모나드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모나드이기도 하다. 세포도 생명이고 별도 생명이다. 칠흑 같은 천궁에서 발광하는 별은 내가 꾸는 꿈속에서 반짝이는 별빛과 통한다. 그렇게 나는 밤과, 어둠과, 하늘과 교신하면서 자신이 우주에 연속된 것임을 안다. ● 작가는 이런 생명의 신비이자 우주의 비의를 Luminescent in Darkness 곧 어둠속에서 발광하는 빛이란 주제로 풀어낸다. 생명을 다한 별이 폭발로 최후를 마감하는 현장 내지 장면을 초신성의 폭발이라고 하는데,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폭발을 통해서 생명의 기원을 형상화한 것이다. 폭발은 이처럼 어떤 별의 종말이면서 이와 동시에 또 다른 별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 된 별들이 Particle 곧 행성의 파편 시리즈로서 현상한다. 그리고 남은 잔해들은 Dark matter 곧 암흑물질이 돼 초신성의 폭발 과정에서 생성된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고 사라진다. 이로써 작가는 초신성의 폭발로 생성된 행성의 파편들을, 그리고 폭발로 인한 잔해들을 흡수해 들이는 블랙홀을 각각 조형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초신성의 폭발은 별(존재와 생명)의 생성과 소멸을 하나로 매개시켜준다. 폭발이 생성의 계기이면서 동시에 소멸의 원인이기도 하다. 생과 사는 서로 고립된 섬으로서보다는 상호간섭적이고 상호 내포적이다. ●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난 연후에 작가의 작업은 실제로 세포처럼도 보이고 행성처럼도 보인다. 공간 역시 세포가 부유하는 자궁처럼도 보이고 별들이 유영하는 우주처럼도 보인다. 그 상동성이며 알레고리와 더불어 나는 세포(미시세계)에 연속되고 우주(거시세계)로 연장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세포로부터 시작해 우주로까지 확장되는 생명의 비의를 열어 놓는다. ■ 고충환
장용선_Particle 120429_Twisted stainless steel, LED_57×47×7cm_2012
장용선_Particle series_스테인리스 스틸_가변설치_2011
The mystery of life stemming from a cell into the universe ● -----------------

Mr.1933과의 조우 - 발견된 기억


전기숙展 / JEONGISUK / 全基淑 / painting 2012_0511 ▶ 2012_0524 / 일요일 휴관


전기숙_Mr.1933과의 조우_캔버스에 유채_131×13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전기숙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gallery SAPA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8:00pm / 토요일_10:00am~03: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사파 GALLERY SAPA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60-1번지 강우빌딩 1층 Tel. +82.2.2278.8334 blog.naver.com/gallerysapa

사진으로 기록된 기억의 불확실성을 작품의 소재로 써온 나는, 여행 중 우연히 한 개인의 잘 정리된 앨범을 발견했다. 촬영한 년도와 장소까지 잘 기록된 그 익명의 앨범 속 수 백장의 사진들은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1932~3년의 한 프랑스인의 일상과 취미, 여행, 주변인 등 한 개인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었다. 그 시대의 건물, 도로, 자동차, 의복과 인물들의 표정, 놀이문화까지. 2차 세계대전의 혼란스러웠던 시간까지 잘 버텨온 그 생활사진의 기록은 촬영대상과 기록자 간의 시대와 공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전기숙_Mr.1933과의 조우_캔버스에 유채_131×131cm_2012
전기숙_Mr.1933과의 조우_캔버스에 유채_131×162cm_2012
전기숙_tag drawing_30×30cm_2012
전기숙_Mr.1933과의 조우 - 발견된 기억展_갤러리 사파_2012
전기숙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는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엄청난 한 개인에 대해 무한한 상상력과 애정을 키워 갈 수 있었다. 'Mr. 1933과의 조우-발견된 기억'이라는 이번 전시에서 희미한 이미지로 박제화된 80년 전의 한 유럽인의 주변 모습들에 현재의 나의 기록들을 함께 개입시켜, 80년 전의 기록자와 그 사진을 보고 있는 현재의 나의 기억들을 새롭게 가공해본다. ■ 전기숙 ---------------

COSMIC DANCER


지용현展 / JIYONGHYUN / 池用鉉 / painting 2012_0517 ▶ 2012_0622


지용현_cosmic dancer1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420h | 지용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_10:00am~06:00pm 유엔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58-13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살아 있는 존재는 / 머리카락 하나를 백 갈래로 가르고 / 그 갈라진 가락을 다시 백 갈래로 갈라 / 이런 식으로 백 번을 백 갈래씩으로 갈라서 나온 / 백 갈래중의 한 갈래 끝과 같은 것 / 그리고 그 안에 무한이 들어 있다 / 이는 여자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요, 중성도 아니다 / 다만 그가 어떤 육신을 입는가에 따라 / 그 안에 깃드는 것이다... (우파니샤드 중에서) ● 모든 것을 잠재우려는 듯 흘러내리는 검은 그림자에도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어두운 심연 사이로 포자와 넝쿨들이 발아한다. 솟아오른 기둥과 엉킨 물결들은 사방에서 쏟아지고 또 번져간다.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지만 그 안에서 그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춤을 춘다. 「Cosmic Dancer」라는 주제 아래 이어지는 지용현의 작품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지용현_cosmic dancer3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2
지용현은 전작에 이어 작가 특유의 상상적 세계를 가시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전작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색감은 밝고 다채로워졌으며, 기하학적 모티브가 줄어들며 첨두형 아치와 같이 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유기적 형상들이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또한 이전 작품에서 단계적인 명도변화와 기하학적 구조로 인해 느껴지던 다소 경직된 느낌은 고채도·고명도의 포인트 요소와 캔버스를 가로지르며 운율을 형성하며 춤추는 생명체들의 어우러짐에 의해 가감되는 모습이다. 전보다 리듬감과 자유로운 분위기가 더해졌으며 거기에 전면적으로 흩뿌려진 하얀색의 형상들, 요소들 간 경계의 불분명함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안개가 끼거나 베일에 가려진 장면을 보는듯한 기분도 느껴진다.
지용현_cosmic dancer4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2
그렇다고 그의 세밀하고 섬세한 표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용현이 구현하는 형상들의 정교한 짜임새는 여전히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들은 무엇보다도 작품 전체의 어우러짐이 두드러진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Cosmic Dancer」시리즈로써 어느 하나의 구조가 지배적으로 작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마다 동적이며 유기적인 형상과 춤추는 생명체들의 모습 등 소재와 형상, 이야기가 이어지며 다채롭게 어우러지고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함께 울린다'는 뜻의 어원을 가지는 '교향곡'을 연상케 한다.
지용현_cosmic dancer5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2
하지만 지용현의 교향곡은 규율과 규칙에 따라 잘 짜인, 끝맺음이 확실한 교향곡 보다는'미완성 교향곡'에 가깝다. 작품들은 여러 형상을 지닌 요소들의 밀도 높은 중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아래와 위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들며 개별체들의 시작과 끝을 짐작하기 어렵게 한다. 그것은 작품들의 어우러짐 에서도 나타난다. 작품들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시리즈지만 순번대로 이어지는 것을 넘어 보는 이에 따라 1번에서 3번으로, 때로는 2번에서 7번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러한 가능성들로 인해 지용현의 작품들은 질서정연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며 끝나지 않은 채 무한대로 확장되어 질서와 무질서, 시작과 끝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다.
지용현_cosmic dancer9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2
이렇게 지용현의 작품들은 여러 악기가 어우러지듯 하나의 대우주 속에 편입된 여러 형상들과 함께 전보다 더 깊고 웅장한 울림을 준다. 그것은 미완성 교향곡에 대해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마지막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죽는다. 마치 영원한 공간, 시간을 초월한 세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한 뷜러의 말처럼 시작과 끝이 없는 세계, 마침표도 쉼표도 없이 소멸과 생성이 동시에 이뤄지는 그만의 공간에서 나오는 여운 때문일 것이다.
지용현_cosmic dancer10_캔버스에 유채_97×145cm_2012
오랜 시간 공백을 깨고 그의 서막이 열렸다. 지용현이 창조한 「Cosmic Dancer」. 하나의 표현으로 정의되거나 귀결되지 않는 지용현의 상상체들은 작품에서 '생성과 소멸'이라는 코드를 공유하며 악장과 악장 사이를 넘나드는 음악적 심연을 보여주고 있다. 11장으로 이루어진 그의 울림은 마치 미완성 교향곡처럼 11장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영원한 공간을 생성해내며 예술의 경계 안에서 마술처럼 삶에 끼어든 또 다른 세상을 마주하게 할 것이다. ■ 유엔씨 갤러리
지용현_cosmic dancer11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2
That living self is to be known as part of the hundredth part of the point of a hair, divided a hundred times, and yet it is infinite. It is not woman, it is not man, nor is it neuter; whatever body it takes, with that it is joined. (From the Upanishads) ---------------------

The Poetry of Form


이모젠 커닝햄展 / Imogen Cunningham / photography 2012_0517 ▶ 2012_0623 / 일요일 휴관


이모젠 커닝햄 Imogen Cunningham_Phoenix Recumbent_피그먼트 프린트_127×101.6cm_196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모젠 커닝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7_목요일_06:00pm 주최 / 유진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유진갤러리 EUGEAN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6-7번지 Tel. +82.2.542.4964 www.eugeangallery.com

도로디어 랭(Dorothea Lange), 마가렛 버크 화이트(Margaret Bourke White)와 더불어 세계 3대 여성 사진가 중 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모젠 커닝햄(Imogen Cunningham_1883-1976)의 전시가 2012년 5월17일부터 6월23일에 걸쳐 청담동 유진 갤러리에서 열린다. 조형성이 강조된 아름다운 식물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커닝햄은 1883년 미국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1976년93세의 나이로 타계하는 순간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무려 75년이란 세월을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열정적인 사진작가였다.
이모젠 커닝햄 Imogen Cunningham_The Bath_피그먼트 프린트_50.8×40.64cm_1952
이모젠 커닝햄 Imogen Cunningham_The Unmade Bad_피그먼트 프린트_101.6×127cm_1957
이모젠 커닝햄 Imogen Cunningham_ Magnolia Blossom Tower of Jewels, Gelatin silver print_30.48×22.86cm_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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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의 교묘한 전복






박우식_임성희_권영성展 2012_0518 ▶ 2012_0601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주최/기획 / 아트 컴퍼니 긱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 컴퍼니 긱 Art Company GIG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30번지 Tel. +82.2.323.7395 www.artcompanygig.co.kr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아들이며 천상의 음악적 감각을 가진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피운 불이 잘 타지 않아 연기가 지나치게 나게 되고, 에우리디케는 연기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에우리디케의 눈물을 본 하객들은 말한다. "저것 봐. 신부가 눈물을 흘리다니 불행한 일이 벌어질거야" ● 이처럼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본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하는 것일까? 여기저기 자주 쓰이는, 이제는 死語처럼 되어버린 "아우라" 라는 말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라는 것은 예술작품이나 어떤 종교적 제의의 대상이 뿜어내는 신비적 분위기를 인간이 수동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보았다. 논문『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는 아우라를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다시 규정한다. 이때의 아우라는 대상에 대한 수동적 경험이라기 보다는, 인식주체가 대상을 통하여 작동하는 고유한 정신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와 달리 벤야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긍정한다. 예술이 예배가치에서 전시가치로 기능 변화를 겪는 것은 진보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본의 상실로 인한 아우라의 실종은 상징체계의 혼선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는 수많이 편재되어 있는 이미지와 상징의 홍수속에서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미지는 갈수록 실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현실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시뮬라시옹이 되어 간다. ● 본 전시는 매스미디어 세상에서 아우라의 파괴로 인한 상징성과 이미지의 혼란과 파괴, 전복을 담았다.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는 오브제와 상징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편재되어 있는 상징의 보편성에 도전한다. 권영성작가는 지도를 모티브로 그린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보는 지도의 figure가 아닌 파리채, 오렌지, 담배, 자장면 등의 사물, 눈이나 손 같은 신체의 일부를 차용한 지도를 작품 속에 담아낸다. 보통 지도는 우리에게 일종의 방향타이다. 방향성의 판단을 내리는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좀 다른가 보다. 일면 지도를 통해 작가는 객관성의 주관화를 노린다. 차도, 발자국 등으로 보이는 지도의 모습은 사실 알고 보면 작가 개인의 추억과 사유의 공간이며 그 편린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극한 개인 내면의 공간이다. 마치 이 지도를 통해 "나를 알아봐" 하는 수수께끼를 내는 듯하다. 보통 타자들에게 "지도"란 매력적인 매개체이지만 분명 주관화하기 힘든 소재이다. 작가는 이러한 지도의 상징성에 자신만의 모티브로 주체화시킨다. 이러한 상징성의 반전과 전복으로 권영성작가의 작품은 미로같다. 작품 속 지도의 사거리, 모퉁이, 등등 이곳 저곳 잘 뒤져보면 작가의 머리 속을 헤집어놓는 것 같은 쾌감에 빠질 것이다. 임성희작가의 작품에는 그림의 형식을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는 모종의 진실이 있다. 분홍빛 풍만한 살을 자랑하며 유유자적하는 돼지의 게으른 모습과, 가짜 식물처럼 인공적이면서 동물처럼 공격적인 느낌을 주는 통통한 모습의 식물은 작가 특유의 '밝고 환한 색채'의 옷을 입고 검은 유머의 단서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돼지 자체의 익살스러움을 강조함으로서 물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진실을 비틀린 웃음으로 차갑게 그려낸다. 돼지를 보고 우리들은 피상적으로 복스럽다고 한다. 그 내피를 들여다보면 사실, 불직적인 욕구에의 회귀가 들어있음을 숨길 수 없다. 작가는 이러한 우리내면의 속물근성을 재미있게 뒤틀러 비판하고 전복한다. 임성희 식 '블랙유머'의 핵심은 물화된 사회의 비인간화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드러나는 유쾌한 익살과 풍자성은 그의 돼지가 재현을 넘어서, 이 시대의 문화적 상징과 은유로 읽혀지는 데 기인한다. 박우식작가는 매중매체에 의해 전형화된 기호들을 피사체의 관점에서 뒤틀어 그리고 있는 사실주의 작가이다. 작가의 작품의 시작은 7,80년대 유행했던 극사실주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어 흉내 내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묘사에만 집착하여 기계적이고 일상적 현실 재현만을 추구하던 지극히 무의미적 행위를 반복하는 행위는 작가에게 묘한 쾌감을 주었다 한다. 작가는 피사체의 얼굴을 확대해서 미묘한 표정과 감정의 세세함을 그려내려는 표현방식을 통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그것을 재현해 내어 사라지는 아우라의 소멸감을 맛보고, 복제본과 원본과의 관계를 모호하게 함으로 현대인들의 일상적 단면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최근의 작품은 재현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뽀로로, 피노키오, 춘리 등 게임이나 만화 등 대중의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절제된 사실주의로 그려 대중문화 속 상징의 이미지를 묘하게 뒤틀어버린다. 매스컴이나 미디어에서 쉽고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 또한 명품을 소개하는 잡지 속에 등장하는 모델의 동작과 표정, 그리고 대중적 인기를 받으며 유명해진 스타나 정치인, 한때 유행했던 게임 속 등장인물의 동작과 표정들을 모델을 통해 그대로 재현하게 한 뒤 사진을 직접 촬영하여 화면에 담아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스미디어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원본들과 그 원본을 담아내는 매스미디어, 그 미디어를 보고 작가는 모델을 통해 회화라는 형식 하에 재현을 한다. 그 작업을 통해 탄생된 작품은 몇 번의 아우라의 소멸이 이루어진 것일까? 그 소멸을 거쳐 탄생한 작품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러한 대상을 실제처럼 그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매할 수도 있는 것인가? 작가는 스스로 물어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 아트 컴퍼니 긱

박우식_escape from reason ll_캔버스에 유채_89.4×130.3cm_2011
박우식_escape from reason ll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1
박우식_총든여인_캔버스에 유채_97×130.3cm_2010

박우식의 회화는 극사실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기존의 인식을 깨뜨리고 있다. 박우식은 강형구의 극사실주의에서 보듯이 카메라가 찍은 피사체보다도 정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우리의 익숙한 일상의 감각에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 자신도 낯선 모습으로 느껴지도록 카메라의 각도를 포착하여 그것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극사실주의 그림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생각을 전복시키며 일상의 생각으로부터 일탈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의 인물화는 팝아트나 정치인들의 오마주로서 보기에는 작가자신과는 친한 인물들의 초상화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둥절하며 일상의 모습에서 흔히 접할 수 없는 일종의 낯선 풍경들인 것이다. 작가는 자신과 친한 지인들을 TV속의 광고모델과도 같은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세태에 편승하는 사람들과 대중의 전형화된 모습들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playing model」,「insomnia」,「춘리」등 일부 작품들을 들여다 보면 대중문화의 전형적인 기호들을 그래는 것이 아니라 모델 자신의 일상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모델 자신이나 사회가 지니고 있는 여성이라는 일상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숙한 여성이 아닌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모습과는 다른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일상의 모습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주변의 인물들로 하여금 TV의 광고모델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주변의 모델들이나 유명인들의 인물들에 왜곡을 가함으로써 익숙한 풍경에서 낯선 세계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2011년의 극사실주의의 회화는 TV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에 왜곡을 가함으로써 익숙한 일상에서 낯선 세계로의 일탈을 꿈꾸고 있다. 코가 잘린 사이보그의 두상, 사악하게 웃고있는 만화 캐릭터의 주인공인 뽀로로의 얼굴의 표정은 매일 익숙하게 보는 캐릭터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뽀로로의 밝은 표정과 명랑한 얼굴로 어린아이로 하여금 유쾌하고 밝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지 못하는 사이보그나 또는 사악한 표정의 뽀로로를 통해 선한 모습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익숙한 일상의 세계에서 벗어난 일탈의 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 조관용
임성희_따뜻한 공격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60.6cm_2012
임성희_봄날이 왔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60.6cm_2012
임성희_숨쉬는 방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60.6cm_2012

임성희 식 '블랙유머'의 핵심은 물화된 사회의 비인간화에 있다. 그의 작품에서 흔히 드러나는 유쾌한 익살과 풍자성은 그의 돼지가 재현을 넘어서,이 시대의 문화적 상징과 은유로 읽혀지는 데 기인한다. 임성희의 그림에서, 탐욕적인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닮았지만 유유자적하는 게으른 돼지의 모습은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바로 돼지가 탐욕과 천박함을 상징하는 동시에, 복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서의 이중코드를 가졌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이중의 코드를 가지고 철저히 물화되어 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꿰뚫어 본다. 몇몇 두드러지는 그림의 장치들은 '물화'된 사회를 조명해주는 극적 구성에 해당된다. 특히 명도와 채도가 강한 색의 대비, 뒤샹의「샘」을 차용한 소변기, 수영장, 쇼핑카트, 섬 등.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주인공 돼지는 마치 은자의 삶을 즐기듯 평화롭고 유쾌하다. 예컨대 인위적으로 만든 조화처럼 보이는 식물로 가득한 섬에서 고독을 즐기거나, 초승달에 걸린 배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 돼지 커플의 낭만을 우리는 훔쳐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딘가 달관한 사람처럼, 이제는 물화된 사회에 적응한 우리 삶을 향해 자조적인 미소를 짓거나, 아이마저 쇼핑카트의 물건처럼 취급할 수도 있는 비인간화된 사회에 대해 조용하고 씁쓸한 조소를 보낸다. 마치 팝아트 작가 조지 시걸의 작품인, 마릴린 먼로 포스터를 바라보는 남자의 무심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그런 것처럼,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문화산업적 자본의 힘에 저항하기조차 힘들 뿐 아니라 도저히 세상을 변화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무력감이 임성희의 작품에서 '자조적 미소'로 변주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쇼핑카트의 아이처럼 상품만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 기세인 '비인간화된 사회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작가의 외침은 과연 설득력 있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다시 말해 임성희의 돼지는 충분히 정치적인 힘을 갖는가? ■ 유현주
권영성_재떨이_전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주_130.3×162.2cm_2012
권영성_짜장면_전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주_73×73cm_2010
권영성_발자국시_전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콜라주_130×96cm_2011

권영성은 근래 몇 해 동안 그러한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해왔다. 한데 초기 몇 점의 작품을 제외한 그의 지도는 모두 실재하는 땅의 지도가 아니라 주변의 익숙한 사물을 소재로 만든 가상의 지도이다. 파리채, 피자, 오렌지, 담배 등의 사물, 그리고 손이나 눈과 같은 신체의 일부 등이 그것이다. 소재의 형상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인공구조물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그려넣어 마치 한장의 실제 지도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화면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지명처럼 사용한 소재와 관련된 단어들을 세밀하게 붙임으로써 지도의 느낌을 강화하여 놓았다. 실제 지도를 화면에 재현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매우 독특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큰 흡입력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소재들을 지도라는 특이한 형식으로 해석하고 형상화하였을 뿐 아니라, 소재의 구체적인 부분들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지도를 읽듯 흥미롭게 살펴보는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라 하겠다. 실제로 거리를 두고 보면 전체적인 형상과 색채로 인해 소재가 잘 드러나는 한편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작가가 소재의 세부를 어떻게 지도의 모습이 되도록 변형하고 꾸몄는가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작가는 작업에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한눈에는 이제까지와 흡사한 지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지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사라지고 도로나 구획들로 상당히 단순화되고 형식화된 인체를 대상으로 한 작업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의학용 인체해부도에 흥미를 가지고 있던 작가가 기존의 작업에 하나의 새로운 전개방향으로 택한 일련의 인체해부도의 일환이다. 다른 하나는 지도형식을 유지하되, 소재를 구체적인 사물에 국한하지 않고 붓자국 등 관념적이고 비물질적인 대상으로 소재를 넓혀가는 것이다. 이는 관심사나 실생활 등 현실에 보다 밀착된 소재를 작품화함으로써, 작업주체인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보다 직접적으로 담고 이를 통해 보는 이와의 정서적 소통을 강화하려는 방식으로 보인다. ■ 박정구


주지하다시피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는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이미지와 대상, 언어와 사고 사이의 필연적인 관계를 전복시켰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여 있다. 우리말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모순어법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의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그림 속 텍스트도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를 그린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습에 따르면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마그리트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덧붙여 놓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환영인 그림이기 때문이다. 즉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마그리트의 그림은 먼저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는 평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물과 관습화된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뜻하지 않은 충돌을 작품 속에 펼쳐 놓는다. 권영성, 박우식, 임성희 이 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며,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낯섦과 수수께끼와 같은 의문은 우리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줌과 동시에 우리의 머리속 깊숙히 자리잡고 있던 시각이미지와 상징의 관습화된 그늘 속에서 유쾌한 탈피와 비상을 꿈꾸게 한다. ■ 아트 컴퍼니 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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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팔한 師弟同行






2012_0518 ▶ 2012_0615 / 월요일 휴관




한진만_金剛頌_한지에 수묵담채_135×180cm_2007



초대일시 / 2012_0518_금요일_04:00pm

참여작가 한진만_김명규_김재애_김정희_박병춘 박서령_박종갑_봉은영_안성구_안진의 양홍수_윤희정_이용석_임진성_전숙인_홍지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한원미술관 HANWON MUSEUM OF ART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49-12번지 Tel. +82.2.588.5642 www.미술관.org




오래된 동행(同行): 그 맑고 향기로운 만남1. 우리 그림과 한진만 교수 한원미술관은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한진만 교수의 정년퇴임을 기념하여 선생님과 15인의 제자들의 돈독한 정(情)을 기리기 위한 전시를 마련하였다. 김명규, 김재애, 김정희, 박병춘, 박서령, 박종갑, 봉은영, 안성구, 안진의, 양홍수, 윤희정, 이용석, 임진성, 전숙인, 홍지윤 이 15명의 제자들은 한진만 교수가 1988년 홍대에 부임하고 만난 처음 제자들인 셈이다.
김명규_스티브잡스_광목에 아크릴채색_91×72cm_2012

한국현대사 가운데 1980년대는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군사독재정권을 향한 민주화의 염원이 불길처럼 피어올랐던 1980년의 5.18이 있었고, 19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의 종식과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맞이한 1988년의 서울올림픽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자유, 민주, 평화에 관한 희망과 염원으로 세계인이 주목하는 가운데 개최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헤쳐 나가야 할 한국현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비합리적인 노동문제와 사회곳곳에 뿌리 깊게 내린 부정·부패, 분단국가가 안고 가야 할 국가적, 국제적 문제들은 산재하고 있었다. ● 그 가운데 경제성장으로 급속하게 변화된 환경과 활발한 국제교류에 의해 변화된 사고체계의 변화는 진정한 우리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자기반성과, 그 의미에 관한 정체성에 심도 깊은 숙고와 성찰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제를 포함한 사회 발전의 과정에서 속도가 아닌 전통과 역사에 관한 사회적인 재고와 진지한 성찰이 대두되고 있었다.
김재애_한국Ⅱ(자아)_한지, 혼합재료, 유리공예품, 태우기, 긁기_72.7×90cm_2011 김정희_학과 돼지_캔버스에 흙, 채색_135×100cm_2012

"팔팔한 師弟同行展"은 이러한 급변하는 시기를 스승과 제자로서, 대학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고 고민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성장한 민중의 의식으로 분출하는 노동, 자유, 억압, 자본, 분배, 통일과 같은 문제들에 첨예한 사회의 대립과 기대감이 혼재된 시대속에서, 그 시대의 고민을 함께하는 창작인이자 지성인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술계에 있어서 이들의 만남은 정신성을 강조하는 단색조 회화에 고무된 수묵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 묵의 정신성을 재확인하고 민화와 같은 전통 채색화의 가치를 조명, 종이와 먹을 넘어서는 다양한 재료가 가진 물성(物性)에 관한 고찰과 확장이라는 새롭고 다각적인 전통회화가 실험되던 시기였다. ● 한진만 교수는 한국현대수묵화의 발전에 있어 전통의 계승과 변모, 내용과 기법의 모색에 남다른 행보를 보여준 작가이다. 특히 그는 새로운 한국성을 찾기 위해 일었던 수묵화 운동을 통하여, 수묵 속에 내재된 정신성을 통하여 겸제 정선의 실경산수의 새로운 해석과 조형의 방법적 모색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실의 세계를 먹의 정신성과 철학성으로 변환시키며 생명력으로 요동치는 새로운 우리 산수화의 경지를 열어주었다.
박병춘_욕지도를 날다_한지에 먹_125×192cm_2011 박서령_山水鄕Ⅳ 12 Landscape the originⅣ 12_캔버스에 먹, 유채_91×91cm_2012

그가 그려온 사생을 통한 산천은 필의 시작점을 눌러 짧게 그은 선묘와 점들의 이합집산의 변주들로 완성되었다. 이러한 필의 예민한 움직임으로 탄생한 선들은 우리 민족의 뼈속(骨) 깊이 내재된 작지만 대담하고,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아리랑의 곡조 같은 우리네 성정을 닮아 있다. 그의 필법은 산천 골짜기의 숨기고 드러남, 바람이 머물다 지나간 물의 손짓과 대지와 호흡하는 보이지 않는 기운들을 가시화한다. 이는 성긴 듯 옹골찬 그의 필법이 이룩한 결과인데, 능숙한 필묵의 흔적들에서 대상의 숨겨진 본질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 속에서 탄생된 본질은 우주와 교감하는 오래된 우리 땅의 가치인 것이며, 민족을 잉태하고 자라나게 한 질박함 속에서 피워낸 우리 삶을 주관한 신성한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춤을 추는 듯 유기적이고 기운차며, 숭고하다. 이는 오롯하게 고립되고 함몰된 정신의 승화된 과정에서 경험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가시적 형상이며, 우주의 심성이 형체로 전이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계이기도 하다. 즉, 이는 동양사상의 핵심을 들추어내는 것으로, 숭고한 자연에 관한 성찰이며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 물음은 그가 보여주었던 우리 산천의 「금강산 시리즈」나 「영산(靈山)」에 이어 「히말라야 시리즈」로 이어지는 모습을 통하여, 그의 관심이 천변만화하는 우주의 실체를 함축하고 있는 대상을 포착하고 그 본성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박종갑_붉은 돌_한지에 수묵채색_각 40×50cm_2011 봉은영_원(願)+망(望)_천에 분채_116.5×80cm_2012

사실, 근자에 변화된 작품들에서 「장자」 천하(天下)편에서 말하고 있는 至大無外와 至小無內의 세계관이 간취된다. 지대무외는 무한대의 우주의 본성을 가리키고, 지소무내는 무한소의 우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필(筆) 하나에 지대무외의 우주의 실체를 담아내고, 유기적으로 호흡하고 생동하는 산수를 통해 무한대로 확장하거나 무한소로 작아지는 변화무쌍한 살아있는 우주의 실체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묵법을 통해 교감하는 우주와 그 속의 자연, 자연과 인간의 관계 항에 관한 그 본질의 성찰은 새로운 한국적 수묵산수화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안성구_新몽유도원도_한지에 수묵담채_45×110cm_2012 안진의_Code L1201_한지에 혼합재료

2. 만남의 길에서 피워낸 꽃 ● 사실 한진만 교수가 고민하는 필의 운용 그리고 그것을 통한 한국적 수묵화의 정체성의 발현은 제자들에게도 계승되고 있다. 어쩌면 80년대 일었던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테제에서 우리 그림의 정체성에 관한 대안적 모색으로의 전개는 스승이 제자에게 보여주었던 모범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15인의 제자들은 동양화의 테두리에서 스승에게서 이어지는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해석과 더불어 1990년대를 20, 30대를 지내오는 과정에서 일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인한 실험성과 다양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양홍수_숲_수묵채색_70×50cm_2011 윤희정_飛_한지에 혼합재료_56×70cm_2012

축적된 안료의 우연성에서 연출되는 색의 변주와 형상을 주목하는 김명규, 유리와 한지의 만남과 태우기를 보여주는 김재애, 지두화의 임진성은 재료와 기법의 실험적 모색을 구현하고 있다. 장식적인 구상과 추상들 속에서 빚어지는, 모순되는 세계의 조형과 오방색에 주목하는 김정희, 천연재료를 통한 꽃의 미학적 변주를 연구하는 안진의, 한지의 재료적 감성을 극대화시킨 윤희정 이들은 전통재료의 장점을 극대화 하고 있다. 안성구와 전숙인, 양홍수는 담담한 내면세계를 실제 가시화된 형상에 이입(移入)하고 있으며, 박병춘은 우리 땅의 형상을 구현하고 조망하는 현대감성을 녹여낸 실경산수화를 보여주고 있다. 박서령, 이용석. 박종갑은 내면의 풍경을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풍경으로 대체하고 있다. 봉은영은 한국전통의 이미지들을 도안화시키고 있으며, 홍지윤은 시작(詩作)을 통해 문학으로 승화된 심상(心象)들을 민화의 조형성에 대입하여 동시대미술로서 가시화한다.
이용석_붉은 정원1112_한지에 주묵_83×130cm_2011 임진성_충돌-易_화선지에 혼합재료, 지두화_134×134cm_2011

이들이 보여주는 종이, 먹, 채색에 관한 전통의 이해와 고민, 동양화론이 담고 있는 형사(形似)를 뛰어넘는 사의(寫意)의 표출, 겸재 정선이 구현한 실경산수의 동시대적 모색, 우리 민화 속에 내재된 매력적인 조형성의 해석과 계승은 한국 현대미술이 봉착하고 있는 우리 것에 관한 의미와 모색의 당당한 발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들 弟子들의 섬세한 작품내용과 화가로서의 역량 등, 미술계 안과 밖에서 이룩한 성과는 한국현대 미술계에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이들 하나하나의 뛰어난 성과들을 논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이 일구어낸 삶 속의 예술을 통하여 스승 한진만 교수와 제자의 관계가 남다른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관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선생은 스승이전에 외로운 화가의 길을 가는 인생의 선배이자, 우리 그림의 진정한 방향성을 고민하고 위로하는 제자들의 힘이 되어주는 창작인으로서의 동행(同行)이기도 하다.
전숙인_만추 홍지윤_인생은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_장지에 수묵채색_80×117cm_2008

이들의 모습에서 공자와 안회顔回(顔淵)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공자의 제자는 수없이 많았지만, 공자는 스승의 가르침에 성실히 임하고 그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안회의 모습에 마치 어버이가 자식 사랑하듯 진실히 대하였다. 그리고 안회는 공자를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아지는 선생님의 뜻을 우뚝한 언덕 같다 여기며, 스승의 높은 가르침에 예(禮)를 다하였다.(論語, 子罕 편) 이러한 공자의 가르침과 안회의 모범적인 실천은 가르침과 배움의 이상적 덕목으로 평가되고 있다. ● 사실, "팔팔한 師弟同行展"의 의미가 새로운 것은 공자와 안회의 관계를 반추하는 4 반세기를 이어 오며 가르침과 배움에서 피어올린 이들의 맑고 향기로운 만남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진만 교수가 보여주는 우리 민족의 성정을 드러내는 힘차고 역동적이며, 때론 관대하고 여유롭게 드러낸 우리의 혼(魂)과 우주와 자연에 관한 성찰, 15인의 제자들이 펼치는 깊게 사고 된 우리 것에 관한 승화되고 음미된 어법들은 현대 한국화의 계승과 모색의 긍정적이며 모범적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 박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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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기억 Memories of journey






홍원석展 / HONGWONSEOK / 洪原錫 / painting 2012_0518 ▶ 2012_0616 / 일요일 휴관




홍원석_solitude_캔버스에 유채_50×1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원석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8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포월스 GALLERY 4WALLS 서울 강남구 논현동 248-7번지 임피리얼팰리스 호텔 1층 Tel. +82.2.545.8571 www.gallery4walls.com




별 없는 밤의 주행 ● "...보석처럼 빽빽하게 들어찬 별들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정말 다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말이다..."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1931년)』중) "그날 밤은 무서운 밤이었다. 일찍이 그만치 춥고 그만치 어둡고 또 그렇게 무서운 생각의 협의 아래 하룻밤을 지내 본 짧은 생애는 가져 본 것이 없다." (『임화의 설천야 雪天夜의 대동간 반畔(1942년)』중)
홍원석_시발택시_캔버스에 유채_50×65cm_2012

비행사들에게 전시(戰時)가 아닌 평상시의 야간비행은 고독한 수행자처럼 세계와 자신을 향한 고요한 관조와 성찰의 비행이 된다. 반면, 별 하나 없는 검은 구멍에 빠져드는 야간운전은 불길하다. 삶의 관조와 성찰이 허락되지 않는 급박한 파국과 재난으로 폐허가 되어버리는 세계를 주행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또는 죽을지도 모르는 운명이 가로지르는 공포의 세계다.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이들의 야간운전은 그야말로 투쟁의 현장이기 싶다. 어려운 경제현실 속에 도시와 도시를 운행하는 대형트럭, 촉박한 배차시간에 쫓기듯 헐떡이는 버스, 전철, 택시. 야간운전이 주는 초현실적이며 몽상적이기까지 한 야경(夜景)은 마치 램브란트의 「야경(夜警)」처럼, 실상 현실과 삶의 고투 속에 깊고 검은 생활의 구렁텅이를 가로질러가는 시민들의 행로를 기록한 것이기도 하다. 죽음과 고통의 파국을 건너는 밤의 행군이다. 그런 밤은 무서운 밤인 것이다.
홍원석_Under Construction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12

야간운전으로 짙고 푸른 야경을 그려온 홍원석의 작업은 초기의 사실적인 도시풍경에서 초현실적인 풍경으로 점화하더니 최근에는 시민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퍼포먼스, 다큐멘터리로 확장한다. 「홍기사 아트프로젝트(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0년)」, 「홍반장 아트택시 프로젝트-가시발(加始發)아트택시(제주 가시리창작센터, 2011년)」, 「홍반장 아트택시 프로젝트-아트자동차 ‘바람’(경북 영천 가상리, 2011년)」, 「시발始發공짜택시 프로젝트(창동창작스튜디오, 2012년)」. 2010년 이후 홍원석의 작업은 진행해온 일련의 시민참여 프로그램이 최근 사회적 또는 공공의 가치를 지향하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경향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다. 같은 시기 홍원석은 「June 2002」, 「용산미스터리」, 「pm 9:00 야간 구급차」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며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이면의 정치경제의 힘과 구조를 은유하는 작업을 병행해 왔다. 그러나 그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업은 2005~2006년을 전후로 최근까지 제작되고 있는 사실적인 이미지와 초현실적 분위기가 어울려진 심미적 풍경이다. 현실의 관습과 제도와 갈등이 녹아들어가는 밤의 풍경은 페인팅이 여전히 사람들을 매혹하는 그 특유의 질적 속성과 오랜 기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통해 쌓인 시간과 경험의 질(質)과 연동한다. 낮의 질서와 경계가 사라지는 밤의 세계는 사물과 이미지가 서로 녹아들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뉘앙스와 분위기, 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세계이다.
홍원석_샷~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11
홍원석_크리스마스의 악몽_캔버스에 유채_97×193cm_2011
홍원석_파주 자유로_캔버스에 유채_181×227cm_2012

우주인이 부유하는 강변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강물은 불꽃으로 반사되는 비늘 같은 물결이 퍼지고 어디선가 차 한 대가 달려온다. 불빛이 긴 빛의 기둥을 쏘아 보낸다. 꿈속을 달려간다. 야간 운전은 빛의 주행이기도 하다. 이즈음 홀로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고독해진다. 주위를 지나쳐 가는 사물은 뭉그러지며 경계가 사라지며 하나가 된다. 점차 풍경을 이루던 요소들이 단순한 몇 가지 형태와 색채로 통합되면 어둠보다 더 검은 세계와 더 몽롱한 환영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무중력의 우주인이 되어버린다. 현실을 떠난 어떤 공간을 막연히 부유하는 듯한. 오래전 임화는 밤의 어둠은 밝은 데서 평가되는 모든 가치를 불문에 부치는 횡폭한 죽음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임화가 살았던 일제식민기의 비관적 세계와 그를 극복할 미적 세계가 충돌하여 화려한 그러나 아주 검은 빛을 발하는 불꽃놀이처럼 보인다. 앰블런스를 운전을 경험한 작가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는 다소 관습화되어 버린다. 생존의 문제는 단지 평범한 일상의 과업으로 치환된다. 마치 전투폭격기 비행사의 무심하면서도 아주 간단한 버튼 조작으로 보이지 않는 지상은 무고한 사람들의 생이 갈리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수많은 야간운전자들은 그들의 일상의 과업과 치열한 현실의 고투 속에서 어떤 마음의 영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어떠한 갈등도 고민도 멈춰버리는 무시간적 공간. 말 그대로 초현실의 체험이다.
홍원석_야간 여행_캔버스에 유채_60×150cm_2012

홍원석의 작업이 점차 일상과 현실을 다루는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그림의 소재는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들의 알레고리이니 당연하다. 그러나 그림은 언제나 한 켠에 빈구석을 남겨둔다. 뒷문을 살짝 열어둔다. 그것은 야간운전의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공간이다. 그림은 뉴스도 시사도 아니다. 그 이상이다. 삶과 세계는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삶도 죽음도 견뎌야하는 것이기도 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보르헤스의 푸네스처럼, 또는 영원한 삶을 사는 불사자의 망각처럼,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다. 홍원석의 작업에는 그러한 이중의 운동이 있다. 현실에 꽉 붙는 정신과 현실을 넘어서 초월하려는 정신이 병행한다. 밤의 세계, 특히 별빛조차 없어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미로와 같은 밤의 주행은 철저한 준비와 오랫동안 견디는 의지 등을 요구한다. 결코 낯설지 않은 시험(試驗)이다. 홍원석의 그림은 일관하여 낮의 세계의 안온함에서 떨어져 나와 고독과 낯선 정서로 가득한 밤의 세계를 유영한다. ■ 김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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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방 the Cloudium






이기봉展 / RHEEKIBONG / 李基鳳 / installation.painting 2012_0518 ▶ 2012_0715 / 월요일 휴관




이기봉_End of the End_aluminum, steel, water pump, blue lamp, acryl box, water and handmade book_200×152.5×65.2cm_2008



초대일시 / 2012_0517_목요일_06:00pm

오프닝 퍼포먼스 / 2012_0517_목요일_06:30pm_아르코미술관 제2전시실 퍼포머 정영두 (안무가, 두댄스씨어터 대표)

작가와의 대화 / 2012_0524_목요일_05:00pm_아르코미술관 1층 Space Feelux

주최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아르코미술관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0번지 Tel. +82.2.760.4608 www.arkoartcenter.or.kr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 : 이기봉 - 흐린 방 ● 아르코미술관 대표작가전은 매년 1명 내외의 중견작가들을 초대하여 작품세계 전반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전시로서 한국 현대미술발전에 대한 기여도에 비해 사회적 관심이나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미흡하거나 미술관 차원에서의 조명이 부족했던 작가들을 중심으로 초대하여 작업세계 전반을 조명하는 전시이다. 2012년 대표작가로 정제된 형식미와 특별한 감각을 선보여왔던 이기봉을 선정, 개인전 개최한다. 과거 작품들의 연대기적 배열을 탈피하고 오늘날 작가가 구축하고 있는 미학적 토대를 기초로 하여 신작 중심의 전시 구성을 시도하게 된다. ● 작가 이기봉(1957~)은 섬세한 서정성과 독특한 개념성을 동시에 갖추며 한국현대미술계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로 인식되어왔다. 1980년대 초반 활동을 시작한 이래 쉼 없는 활동을 지속해 온 이기봉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회화 작품과 감각적이고 압도적인 분위기의 설치 작품을 병행하면서 자신만의 탄탄한 작업세계를 구축해왔다.
이기봉_Sense Machine - 수평의 지속_330×237×60cm_2012
이기봉_지속되기 위하여 – 망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270×200cm_2012

이기봉의 작업세계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재료의 감각적 활용이다. 그는 다양한 재료들을 연구하고 실험하며 자신의 작업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그렇게 연구된 재료들은 설치작품들뿐만 아니라 회화작품들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재료에 대한 그의 실험과 노력은 그의 작품이 보유하고 있는 세련된 형식미와 감각적인 분위기를 갖추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견 매우 단순한 재료만으로 제작되어 있는 것 같은 그의 작품들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감각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그가 집요하게 연구해온 재료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 그의 작품의 또 다른 특징으로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적 구조를 들 수 있다. 관객의 눈 앞에 몽환적인 배경이 펼쳐지고, 그 내부의 가변적 요소들이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은 그의 설치작품 대부분이 갖는 특징이다. 그러한 대상들은 안개이기도 하고 거품이기도 하며, 그 내부 혹은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이기도 하다.
이기봉_지속되기 위하여 - 기억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혼합재료_270×200cm_2012

이기봉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로 '물'에 대한 사유를 언급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물은 다양한 형식으로 존재하며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회화의 배경으로서 물이 등장하기도 하며, 설치작품의 주재료로서 수증기나 안개와도 같이 기체와 액체의 중간단계에서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기봉_There is No Place - Shallow Cuts_glass, fog machine, artificial leaves, wood, steel, sand, motor, timer_가변크기_2008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이기봉이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구조'를 재현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는 잘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는 어떤 흐름에 주목한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생성과 소멸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층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대상이기보다 의식과 감각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층들을 오르내리며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존재하는 것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시도해 온 다양한 재료의 실험들은 모두 재료의 물성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재료와 조우하는 자신의 의식이나 신체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타남과 사라짐'의 조형어법은 층위를 유영하는 어떤 느낌들, 그리고 그 층위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비존재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유영의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기체와 액체의 중간단계인 수증기, 혹은 거품과 같은 상태로 등장하는 물은 이성이나 감성과 같이 상호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형태로 혼합되어 존재하는 연속체로서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기봉의 작업은 대기에 침투하는 습기로 발생하는 안개가 대상과 시선 사이에서 명멸하며 만들어내는 가시와 비가시의 간격을 구현하고 있다. ■ 고원석
이기봉_Cloudium_혼합재료_50×9000×488cm_2012
이기봉_Romantic Soma_혼합재료_65×100×370cm_2012



Kibong Rhee – the Clou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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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wish...




박소연展 / PARKSOYEON / 朴昭延 / painting 2012_0519 ▶ 2012_0617 / 월요일 휴관



박소연_I wish..._캔버스에 유채_65×90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피프틴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피프틴 GALLERY FIFTEEN 서울 종로구 삼청동 63-28번지 Tel. +82.2.733.1106



기다림은 약속이 아닌 막연함을 전제로 한다. 그 기다림의 대상은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다가올 어느 계절의 따스함일 수도, 또는 실현 불가능할 것 같았던 꿈꾸던 순간일 수도 있다. ● 작품 I wish 는 오지 않는 누군가가, 혹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꿈꾸던 그'날'이 불현듯, 나를 찾아오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박소연_I wish..._캔버스에 유채_90×65cm_2012
박소연_Anhedonia_장지에 채색_95×60cm_2011
박소연_Anhedonia_장지에 채색_100×97cm_2010

기다림의 시간은 지독한 인내와 고통을 동반한다. 기다림의 과정은 고독한 것이며 그 기다림의 과정에서 결국 무언가를 내려놔야하는 것들도 참으로 많다. 이러한 과정은 나를 침묵하게 하며, 당당했던 나의 어깨가 작아지게 함이다. ● 그러나 기다림에는 항상 설렘이 있다. 마치 꿈꾸던 그 누군가를, 그 날을 방금이라도 맞이할 듯한, 그 '순간'에는 가슴속이 분홍빛으로 물들여진 봄날의 설렘으로 가득 하다.
박소연_Anhedonia_장지에 채색_145×85cm_2010
박소연_Anhedonia-장지에 채색_73×53cm_2011
박소연_Anhedonia_ 장지에 채색_100×80cm_2011

하루가 될지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아니면 영영 그, 혹은 꿈꾸는, 그 날을 맞이하지 못할지라도, 평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지라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한 기다림은, 나로 하여금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게 함이다. ■ 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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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대하는 세가지 자세


홍조_황보은_한해랑展 2012_0522 ▶ 2012_0610


홍조_Ailurophobia 고양이공포증_세라믹 설치 / 캔버스에 프린트_80×120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1st : installation / 홍조展 『 Ailurophobia 고양이 공포증』 / 2012_0522 ▶ 2012_0527 2nd : Photo / 황보은展 『 길고양이』 / 2012_0529 ▶ 2012_0603 3rd : Illustration / 한해랑展 『 플라잉캣』 / 2012_0604 ▶ 2012_0610

MW갤러리 MW Gallery 서울 마포구 서강동 2-40번지 www.miniwide.com


고양이에 대한 세 가지 시선 ● 이번 전시는 세 작가들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고양이'에 관한 이미지들과 그 자연의 생명체를 바라보는 각각의 시선을 릴레이전 형식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약 5000년 전 아프리카 리비아 지방의 야생 고양이가 고대 이집트인에 의해 순화, 사육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고양이는 반려동물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곁을 맴돌고 있는 이 동물은 겁이 많고 조심스러우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성향을 갖고 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급자족 하며 자기도취가 강한 독립성을 가진 동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양이에 대해 외형적 모습에서 기인하는 표독스럽다는 선입견과 귀엽고 온순하며 다루기 쉬운 가족적인 동물이라는 상반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양립되는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고양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홍조, 황보은, 해랑 이상 세 작가들은 자신의 내적감각(inner sense)과 개성적인 시각으로 고양이에 대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황보은_길고양이_사진_29.7×42cm_2012
황보은_길고양이_사진_29.7×42cm_2012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이는 자연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추상충동과 자연의 친근감과 유화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감정이입충동이다. 홍조와 황보은 작가는 이 두 가지 충동에 대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고양이에 대한 공포는 추상충동의 외침이요, 고양이에 대한 사랑은 감정이입충동의 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협함으로써 공포심을 유발하는 자연의 성질을 무력화하고자 하는 홍조 작가의 추상충동은 인간과 자연의 불편한 불화관계 및 인간과 자연의 감정교류가 원활하지 못함을 사실상 드러내고 있다. 작가 홍조는 작품 속에서 자연의 유기성을 뺏어버리고 자신의 논리에 맞도록 자연의 성질을 변화시키거나 탈유기화 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던 고양이의 무서운 기운을 응집하고 군집시켜서 그 동물에 대한 공포를 마주하여 존재론적 전이(ontological transition)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고 아픈 영혼을 치유하고 있다. 홍조의 작품은 작가가 다른 예술형식을 취했다면 접근하기 쉽지 않은 본 주제의 궁극적인 본질에 점진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고양이에 대한 마음 속 공포심을 자신만의 편안한 화법으로 드러내고 있는 이번 작품은 다른 예술형식으로 도달하거나 대체하기 힘든, 이 조형작품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황보은 작가는 친근감을 주는 자연의 성질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감정이입충동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기운과 생명체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친근한 정서를 기저로 한 원활한 감정교류와 소통을 바탕으로 자연의 유기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녀는 진화의 유기체인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생명체와의 끊임없는 만남 속에서 공존과 상생을 통해 일상의 단면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다. ● 고양이에 대한 두 작가의 시선이 양립하고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두 작가 공히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가는 일상의 경험들로부터 미적인 의미(aesthetic meaning)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가는 같은 선상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 해랑은 상기 언급한 자연을 바라보는 두 가지 충동과 달리, 인간에 의해 매몰차게 버려지는 고양이에 대한 연민과 반려동물을 동반자가 아닌 자신의 필요에 의한 단순 소유물로 인식하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차가운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 해랑은 다소 유연한 자세로 인간과 세상과의 일정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특한 화법으로 고양이 일러스트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파스텔의 따뜻한 느낌 속에서도 헤진 허한 마음의 생채기가 느껴져서 일러스트 속 고양이를 어루만져주고 싶은 충동이 솟아나게 하고 측은지심을 동하게 한다. 인간에게 버려지는 반려동물에 대한 자각과 환기는 작가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인간성 매몰에 대한 화두라고 생각된다. 자연의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의 인식 재고를 작가는 은유적으로 호소하고 있다.
한해랑_flyingcat 1_캔버스에 프린트_50×76cm_2011
한해랑_flyingcat 2_캔버스에 프린트_47×70cm_2011

'고양이'이라는 공통된 소재로 자연의 생명체를 대하는 세 작가의 세 가지 시선, 이들 작가들이 인도해 주는 세 가지 시선의 흐름은 결국 마음을 치유해 나가는 인간의 의지와 함께 사랑과 실존의 깊이를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본질인 사랑의 감정과 실존의 의식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일상에서 접하는 고양이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과 인식의 출발점에서 착안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세 작가들은 선험적 직관에 따른 미의 감정과 존재의 실존적 의미 등에 대해서 그들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인간의 삶과 결부되어 있는 고양이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 박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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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TREE


강준석展 / KANGJUNSUK / 姜準錫 / painting 2012_0522 ▶ 2012_0604


강준석_RED TRE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144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강준석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스칼라티움 아트 스페이스

관람시간 / 10:00am~07:00pm

스칼라티움 아트 스페이스 SCALATIUM ART SPACE 서울 강남구 역삼동 828-10번지 Tel. +82.2.501.6016 www.scalatium.com


fan·tas·tic - 1. (비격식) 기막히게 좋은, 환상적 / 2. (비격식) 엄청난, 굉장한 / 3. 드물게 fan·tas·tic·al [주로 명사 앞에 씀] 기상천외한 / 4. 실행 불가능한 fan·tas·tic의 공간은 여러 감정의 시간으로 분리되어 만나게 된다. ● 순환적 계절의 조각난 이야기를 담기도 하며 때론 산책길에 만난 장수풍뎅이와 이야기를 할 재주를 지니게 될수도 있다. / 어떤 날 이 둘은 그 계절의 길목 어디쯤에서 장수풍뎅이와 이야기 하는 R을 만난다. / fantastic dreams of forests and jungles / 숲과 정글이 나오는 기이한 꿈들 / 숲과 정글이 나오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자신의 꿈이기에 스스로 결정한다. / 둘의 만남또한 스스로 결정한다. / 만나지는것과 만나는것의 차이를 / 깊은 숲속에서 결정하게 된다. ■ 강준석

강준석_GO RABBITIN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0cm_2012
강준석_FANTASTIC DREAMS AND BLUE ROOF HOUS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91cm_2011
강준석_RABBIT AND BIR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60cm_2012

박옥생의 칼럼 New & New - Mr. 편지 씨의 시크릿 가든-강준석1. 시크릿 가든(Secrect Garden) - 아주 여러 해 전 일입니다. 바닷가 어느 왕국에 애나벨리라고 하는 이름의 한 소녀가 살았습니다. 그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달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나벨리의 꿈을 꿉니다. 별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나벨리의 눈동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나는 밤새도록 애나밸리의 곁에 누워 있답니다. 에드가 알렌 포우의 Annabel Lee의 부분이다. 산호 빛 푸른 바다와 소녀와 사랑과 추억이 꿈을 꾸듯 아름답고 신비롭다. 이처럼 맑고 고운, 어른들이 꿈꾸는 동화를 그리는 이가 있다. 작가 강준석은 꿈꾸는 고독한 시인처럼, 하얀 집이 성처럼 솟아 있고 푸른 숲이 빼곡히 우거진 마법의 성이 있는 비밀의 정원을 그려내고 있다. 우주를 몽상하는 화가는 시를 쓰듯 세계를 그려 나간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방과 집은 내밀함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시인, 작가들을 인도하는 심리의 도해(圖解)라고 말하고 있듯이, 자신의 생각의 공간이자 우주로 나가는 소통의 문인 작은 화가의 방은 그래서 특별한 것이다. 「Fantastic dreams of forests and jungles」은 강준석의 회화적 경험과 주제를 함축한 것인데, 숲과 정글은 일종의 작가가 그려나가는 '나의 방'으로 드러나는 내면세계이자 확장해 나가는 화가의 시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집에서 확장한 숲속으로의 이미지들은 전통적으로 현실을 뛰어넘는 마법의 공간, 마음의 공간, 신비의 공간, 미지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왔다. 다분히 신화적이며 동화적인 꿈꾸는 공간인데, 핸젤과 그레텔은 숲속에서 신비한 과자로 만든 마법의 집에서 마귀할멈과 싸워 이겨 내었으며, 백설공주는 숲속에서 마녀의 위험에서 일곱 난장이와 이겨내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처럼 숲속은 꿈과 낭만, 어릴 적 모험과 환상적인 세계가 투영된 장소인 것이다. 강준석이 그리는 숲은 좀 더 신비롭고 달콤하다. 현실과 환상이 미묘한 경계를 이루는 비밀의 정원에는 집이 숨을 쉬며 살아가고, 꽃이 말을 하며 동물은 마치 인간처럼 삶을 영위한다. 시간과 공간이 자신의 영역을 교차하고 면과 선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그림이 마치 인간처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시크릿 가든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장치인 것이다. 작가는 꿈을 통하여 자신의 조형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사실, 꿈을 꾸는 세계의 심상(心像 image)은 매우 오래된 문학적 소재였다.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다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이야기나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복숭아 꽃이 만발한 도원(桃園)을 여행한 이야기는 대표적일 것이다. 또한 구스타프 융(Gustav Jung)은 자신의 심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꿈이 신화와 상징과 같은 무의식적인 원형의 재현이라고 보았듯이, 꿈은 현실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환상적인 세계로 나아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석_House calls on the sk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0cm_2011
강준석_비밀정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0cm_2011
강준석_하얀 숲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0cm_2012

2. 나는 꿈꾸는 배달부입니다. - 강준석이 중요하게 드러내는 표현방법은 드로잉이다. 선이 표현하는 함축적이고 검소한 이미지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억들에서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순수성을 강조하며 강하게 시선을 잡아당긴다. 내면에서 만들어진 신비한 세계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담아낸 그의 드로잉들은 마치 이국에서 날아 온 한 장의 작은 엽서에서 느끼는 설레임과 행복을 담고 있다. 신비한 마법의 성에서 보내 온 편지에는 소리만 들어도 잠이 들거나 세상이 바뀌는 마술 피아노, 숲의 정령들이 노래하고 숨 쉬는 마법의 숲, 아이처럼 말을 하는 Doggi씨(강아지), 걸어 다니며 춤추는 토끼, 이리저리 자신의 형상을 바꾸는 마법의 집이 그려져 있다. 사실, 그들은 모두 고요한 침묵 속에 존재하는 서늘한 휴식의 공간들의 한 부분이거나 구성으로, 꿈꾸는 화가의 시적 몽상들이 드러나고 있다. 마치 아이 적 추억을 되돌릴 때 뚜렷하고 선명하게 추억되는 기억들처럼, 너무도 맑고 아득한 서정성이 피어난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아이 적 만화에서 감동하는 유쾌한 위트와 설레는 동심과 신나는 환상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강준석의 위트는 현실을 넘어선 그러나 환상 속에 문이 열려진 4.5차원의 새콤달콤한 유머가 숨겨져 있다하고나 할까. 작가는 아이 적 순수한 세계를 그리워하거나 작가가 처해진 현실에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에서의 감동을 환상과 신비가 어우러진 세계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즉, 작가의 작품은 우리의 잃어버린 그립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계에 관한 강한 환기성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편지봉투 작업을 통하여 자신의 신비한 체험과 상상의 세계를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선과 면이 혼란스럽게 교차된 화면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건져 올리고 그리운 이로부터의 소중한 편지에서 오는 그 설레이는 감성을 건드리는 것은, 마치 작가가 우편 배달부와 같은 견지에서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끼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에서 하늘을 나는 마녀의 이미지를 삽입한 신비한 배달부 키키의 신나고 행복한 이야기는 마녀, 신비한 힘, 배달부의 의미들이 결합되어 한층 더 예술적인 완성도를 높이고 아름다운 세계로의 여행을 자극하고 있다. 편지, 설레임, 기다림, 추억, 사랑, 순수, 행복, 신비가 한 화면에 녹여 들어간 강준석의 화면은 분명 행복을 전하는 배달부처럼 행복의 마법을 배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에게서 상상력 부재로 인한 메마른 갈증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강준석의 작품은 뛰어난 감수성으로 빚어내는 작가의 남다른 서정성과 몽상하는 시인과 같은 무한한 상상력이 감지된다. 예술 드로잉으로의 초대와 편지작업으로의 소통, 섬세하고 세련된 감성이 투영된 환상적인 화면은 향후 그 행보가 매우 기대가 된다 하겠다.(2010.12) ■ 박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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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scape


김완展 / KIMWAN / 金完 / mixed media 2012_0523 ▶ 2012_0605 / 월요일 휴관


김완_Lightscape-gate_혼합재료_150×15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429a | 김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2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에이블 파인아트 갤러리 서울 Able Fine Art NY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546.3057 www.ablefineartny.com


"빛은 가시적인 우주의 시작이며, 따뜻한 생명이 시작된 태초이자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는 미지의 통로이다." 작가가 직접 쓴 전시서문과 함께 제출된 작품들은 빛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페인팅이 아닌 촉각적인 대상으로 구현하는 것임을 표현한다. 일견 색 면 회화(colour field painting)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캔버스 위에 칠해진 물감이나 붓질의 흔적들이 아닌 점에서 그의 작품은 페인팅(회화)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분명 빛이 내리비치는 현상이 뚜렷하고 색채는 온화한 톤의 느낌을 발산한다. 좀 더 자세히 살피면 그의 화면들은 거친 재질의 촉감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에서 놀랍게도 마치 거친 모직의 표면처럼 수 많은 직선이 켜켜이 층을 지우고 있는 단단한 조직임을 깨닫게 된다.
김완_Lightscape-blue wall_혼합재료_160×110cm_2012

풍부한 색감의 비결은 바탕화면의 작업과정에서 풀리는데, 캔버스나 패널, 종이 같은 평면이 아닌, 골판지를 절단 할 때 생기는 얇은 단면들을 마치 섬유 조직을 다루듯 쌓아 바탕 면을 구축한 것이다. 복잡한 듯 단순한 이 반복적인 과정 속에 그의 예술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 단순함 가운데 깊이와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그의 예술세계가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김완_Lightscape_혼합재료_120×120cm_2012

서양미술사의 전통 속에 빛을 묘사하는 수단은 다양한 변화와 함께 발전해왔다. 현대에 와서는 화면상의 재현을 넘어 직접 조명을 사용하는 설치 작품에까지 이르고 있지만 오랫동안 빛은 상징적이거나 재현하는 방식으로 묘사되어 왔다. 그가 제시하는 빛은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인다. 하나는 캔버스라는 전통적인 매체의 대체이고, 다른 하나는 채색하는 그림의 근본적인 접근법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재료를 천착하고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을 실천하는 현대미술가의 실험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김완_Lightscape_혼합재료_60×120cm_2010

감성적인 측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빛의 상징은 미묘하고 따뜻한 느낌을 부른다. 원래 빛은 명암의 묘사나 톤의 묘사에서 또는 색채의 표현에서 드러나는데 빛의 묘사에 열광했던 인상파가 이루어낸 색채의 혁명은 오늘날 현대미술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공로로 꼽힌다. 이렇듯, 인상파 그림의 화면에서처럼 그의 작품에서의 빛도 거친 표면의 마티엘 위에서 그렇게 산란한다.
김완_Lightscape-city_혼합재료_150×70cm_2012

화면에서 빛은 또한 방향성을 띤다. 마치 카라바조의 화면에서 지하실 천정으로부터 대각선 방향으로 들어오는 빛처럼, 또는 네덜란드 그림들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맑고 투명한 햇살처럼, 일정한 방향성을 지각하도록 의도한다. 단순함 속에서 빛나는 그 빛의 방향성에서 시적인 고요함이 환기된다.
김완_Lightscape-one spring morning_혼합재료_110×160cm_2012
김완_lightscape- the wall_혼합재료_160×110cm_2012

넓이가 없고 길이만 있는 선들이 모아져 이만한 면적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수의 선이 필요할까. 제작과정의 긴 시간이 작품 속에 촘촘히 각인되는 동안, 그 인내의 시간 속에 탄생되는 시각적 이미지는 높은 정신성을 함축한 바로 숭고의 빛과 色이다. 그래서 그 線的 방법을 禪的이라고까지 말하는 김완의 작업은 목적과 과정을 일치시키려는 의지의 결정체이자 '과정 예술'의 최종 지점이다. 만약 '목적과 그것을 이루려는 수단과 과정이 하나로 일치되는' 전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면 그의 말대로 '화해하지 못할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나눔을 지양하고 하나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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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Prologue


김억展 / KIMEOK / 金億 / printing 2012_0523 ▶ 2012_0605


김억_한강-합수머리팔당호_목판화_100×20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206a | 김억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김억의 『한강-Prologue』전 ● '국토'작가 김억의 이번 전시는 '한강'을 테마로 한 것입니다. 우리 국토와 역사, 그 시공간에서 우리들 삶의 모습을 목판화에 담아온 작가가 경기도의 성곽(수원화성, 남한산성), 고구려의 웅혼한 역사(요동과 만주)를 찾은 이후 갖는 또 다른 기획이기도 합니다.
김억_한강-두물머리_목판화_61×91cm, 30×130cm_2012
김억_한강-김포시_목판화_61×91cm, 30×130cm_2012
김억_한강-당인리_목판화_30×130cm_2012 김억_한강-동호_목판화_30×130cm_2012

이번 전시는 중부지방의 젖줄인 한강을 통하여 과거와 오늘, 인문지리와 국토지리, 풍경과 삶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려는 '한강 프로젝트'의 서장이라 하겠습니다. 남한강 지류인 동강으로부터 단양, 양수리, 서울, 강화도를 아우르는 공간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한강의 모습입니다. 그동안 김억이 지속적으로 구사해 온 꼼꼼한 재현적 판각법과, 다양한 시점(視點), 끌칼로 대범하게 목판면을 드러내는 표현성, 오랜만에 시도하는 다색판법에 이르기까지, 한강이란 테마에 구사할 여러가지 목판화 기법도 선보입니다.
김억_한강-성산교_목판화_30×130cm_2012 김억_한강-한남동_목판화_30×130cm_2012
김억_동강의 여정_목판화_65×122cm_2002
김억_강화 고려궁지북장대에올라 송악산을 바라보다_목판화_61×180cm_2010

본격적인 한강의 속살로 들어가기 전에 작가 스스로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시도하는 이번 『한강-Prologue』로부터, 다음에 시도할 북한강을 포함한 본문, 그리고 최종적인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이 작가가 섬세하게 감응하고 서술하고 표현하려는 국토와 삶의 이야기를 주목해 보면 좋겠습니다. 작가 혼자서 고독하게 시도하는 긴 시간과 노동력에 의한 지난한 작업이지만, 그 결과물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겐 한편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 애호가 및 관객여러분들의 작가와 나무화랑에 대한 많은 관람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나무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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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지 Residency


김보중展 / KIMBOJOONG / 金甫重 / painting 2012_0523 ▶ 2012_0612


김보중_개포동-비오는날녹색옥상_캔버스에 유채_154×154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428e | 김보중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23_수요일_06:00pm

주최 / 서울시 주관 / 서울문화재단_금천예술공장

관람시간 / 10:00am~06:00pm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금천예술공장 PS333 SEOUL ART SPACE GEUMCHEON 서울 금천구 독산동 333-7번지 3층 Tel. +82.2.807.4800 geumcheon.seoulartspace.or.kr blog.naver.com/sas_g geumcheon.blogspot.com


거주지 유랑기 ● 「제장마을 숲- 자화상」에서, 그러니까, 김보중-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산 정상에 올라, 안개가 휘감고 있는 저 아래 풍경을 고고히 바라보는 방랑자가 아니다. 그는 숲속 나무들 사이를 꿰뚫고 동네를 탐사하며 건물들을 살피는데, 그러는 동안, 발과 지팡이도 쉬지 않는다. 내려다보는 대신, 때때로, 그는 올려다본다. 그리고 산동네 자락에서 하늘로 까마득히 이어지는 좁은 계단 끝, 소실점을 삼켜 버리는 바로 그 곳에, 정상 말고 옥상을 놓는다. 그는 방랑이 아니라 거주를, 아니, 여기 거주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그네와 유랑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임을 그린다. 이번 개인전에서 그는 그런 거주지에 관한 묘사와 규범의 회화를 제시하고 있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된 네 점의 「녹색 옥상」들은 오래된 저층 아파트 꼭대기에 으레 있음직한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낡은 건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콘크리트 균열들이 여기 저기 보이고 옥상 바닥에는 방수제인지 페인트인지를 여러 번 덧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작가에게는, 균열 보수처리 과정의 에폭시 자국이나 불규칙한 페인트 칠 그리고 그것들이 옥상에 고인 물 위로 반사되면서 만들어 내는 다양한 무늬와 패턴들이, 회화적 흥미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나는 여기서 회화적이란 말을 단지 회화의 표면 곧 물질과 색채, 스트록으로 구성되는 '화질'의 차원에 한정하기보다는, 당연히, 건축물과 그 사이트로 표상되는 세계 속으로 예술이 개입하는 하나의 경로 및 방식에 대한 이해로 듣는다.
김보중_이태원-빈방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1
김보중_개포동-녹색옥상_캔버스에 유채_1162.2×130.3cm_2011
김보중_구로동-강남아파트_캔버스에 유채_154×154cm_2012

알다시피 건물에 금이 가고 틈이 생기면 곧바로 이는 신체의 안전과 재산상의 손실을 알리는 경보로 작동한다. 이 인덱스는 문제를 해결하거나 숨겨야 한다는 부정의 기호이기 때문에 보수처리를 한 후에는 가능한 한 빨리 표면을 재도장 하는 게 상례이다. 그런데, 김보중의 그림에서 그 균열은 가려지기는커녕, 한껏 도드라져 나름의 존재를 세게 어필한다. 한편, 이들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녹색은 다중이용시설에서 주로 안전과 구급, 진행의 방향을 알리는 용도로 쓰이며, 자연을 대표하는 색인지라 군인들의 위장복이나 동물의 보호색으로도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이 상징이 「녹색 옥상」들에서는 안전보다는 붕괴의 전조로, 위장보다는 정체의 노출로 전도되고 있다. 대체로 이런 식으로, 그의 그림은 역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 우리가 지워버리고 싶은 불안, 은폐하고 싶은 '콘크리트 공화국'의 속성들을 'un-camouflage'하고 있다. ● 원래 콘크리트는 압축강도compressive strength가 높은데 비해 인장강도tensile strength가 낮은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인장강도 때문에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인장력tensile stress를 견뎌내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고 그럴 때마다 이 재료로 구축된 건축체가 터져버려 크고 작은 균열이 생긴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비유로 가져다 쓸 수 있다면,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로 이루어진 한국현대 사회체the socius는 물론이고 그와 분리 불가능한 거주자들의 공동체도 역사상 전례 없이 높은 압축강도를 기록하고 있다고 해얄지. 동시에, 놀랍도록 취약해진 인장강도로 인해 조금만 밀어내거나 잡아당겨도 쉽게 터져버리고 마는 엉성한 기억의 구조물을 조성하게 되었다고 해얄지.
김보중_안창마을-긴계단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1
김보중_용인-안골숲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사실, 김보중의 이번 전시 작품들을 스튜디오에서 보았을 때, 그림의 틈 사이로 어떤 노스탤지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더랬다. 어린 시절 살았던 저층 아파트의 작은 공원과 도로, 여름방학이었던가 소설 『금각사』를 읽을 때 방안 한 가득 들어왔던 햇빛, 새로 이사 간 고층(이라고 해봤자 12층이었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 있었던 공동 수영장의 반짝이던 수면과 아이들의 함성, 그리곤 추운 한 겨울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방문하곤 했던 불광동 큰집과, 그 산동네의 긴 계단을 오르면서 힐끗 봤던 연탄재 옆의 사잣밥. 균열은 이렇게 난데없는 추억 속으로 나를 빠뜨렸지만, 그 그림들의 강한 현존성으로 인해 곧바로 나는 현재로 건져 올려진다. 과거를 헤집고 다니다가 지금으로 타임슬립하여, 그림 속 공간이 40여 년 전 시간대에 속한 곳이 아니라 현재도 엄연히 공존하는 장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 김보중은 최근 삼 년간 그가 직접 가보거나 살았던 곳을 그린 그림들을 이번 전시에 출품한다. 되돌아보니 도시화와 난개발이 막 시작되던 그 즈음에 이미,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시공간 체험이 우리 몸에 새겨진 것 같다. 확실히 내 부친은 '시범' 아파트에 살던 식구들을 불광동 산동네에 데리고 가는 것을 편케 생각지 않으셨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불광동 산동네에는 북한산힐스테이트 단지가 들어섰고, 재개발조합장이 사망한 후 몇 년째 사업이 표류하고 있는 건너편 재개발지역에 내가 살고 있다. ● 김보중의 회화는 의식과 기억 그리고 몸의 균열을 서둘러 봉합하고 그 위에 회칠하려는 예술 유형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다.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말처럼 세상을 보수화하거나, 평등과 연대성을 주장하는 글처럼 세계를 비현실화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글이나 말과도 또 다르게, 그의 그림은 다만 역사와 개체, 당대의 시공간과 기억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과 분열을 감각적으로 충만하게 구현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들은 사실을 감추거나 없애버리려는 기성 언어의 수사rhetoric보다는, 현실과 맞닥뜨려 자기 근육을 수시로 수축이완하며 강하게 준동하고 있는 소년의 신체를 닮았다고나 할까. 아마도 이것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에서 테리 이글턴이 말한 대로,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충동이 물질적으로 생존하려는 욕구만큼이나 강고하고 집요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김보중_대부도-먼곳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2

한편,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 건물에 난 균열만큼이나 공통되게 우리 눈을 끄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사물과 자연의 그림자들이다. 가령, 오래된 건물의 벽면과 형체를 그대로 노출하여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는 『꿀』의 어느 방을 그린 그림(「이태원-빈방」)에서, 중첩된 프레임 안에 있는 경찰관은 방 안까지 연장된 자신의 그림자 때문에 무게감을 갖게 된다. 경찰관 모형은 납작한데 오히려 그 실루엣은 입체적이니 말이다. 또 다른 그림, 「대부도-포도밭추수 이후」에서는 햇볕을 받아 지붕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나무줄기의 뒤엉킨 그림자들이, 그림 전면을 덮고 있는 붉은 흙과 함께, 왠지 불길한 기운을 더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근교도시의 밤풍경을 그린 「용인 야경」에서, 커다란 나무 아래 빛나고 있는 가로등의 노란 조명과 바닥에 넓게 깔려 있는 그림자는 순간 그곳을 숭고하게 보이게도 한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풍경화나 정물화 장르에서 그림자가 주는 다양한 회화적, 심리적 효과나 그것의 알레고리적 요소를 해당 장소의 특이성에 맞추어 변주시키고 있다. ● 그러다가,「녹색 옥상」들에서 균열과 페인트 자국이 그랬던 것처럼, 나무 그림자가 건물 벽면에 다채로운 무늬와 패턴을 만들어 내고 있는 풍경(「안창마을- 푸른 벽」)에 다다르면, 그림자는 그 자체로 틈새와 금이 된다. 단단한 회화의 지층에 균열이 가게 하는 이 그림자는 이제 육신의 네거티브로서, 줄곧 우리가 외면해 왔던 죽음을 직시하게 한다. 그의 그림에서 죽음은 무덤을 닮은 형상으로 드러나기도 하고(「안창마을-푸른 벽」), 녹색이라는 보호색으로 덮여있기도 하다(「안창마을-녹색 벽」). 어느 쪽이던 간에, 영원히 살 것처럼 위장하며, 의식 저 아래로 깊이 담가 버리려고만 하는 바로 그 죽음의 실존을 그는 그림이라는 공동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고 있다. ●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네 점의 이면화二面畵diptych(「안창마을-핑크 벽」「안창마을-좁은 골목」「북아현동-좁은 골목」「북아현동-낡은 옥상」)는 종교적인 형식이나 그와 연관된 내용을 차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어쩐지 생 이후를 묵상하게 한다. 빛과 그림자, 주름과 무늬, 금과 면, 원경과 클로즈업이 병치되어 있는 이 그림쌍pair에서 느껴지는 적막함과 쇠락함은 살아있는 인간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부재 가운데 화면에 포착된 아름답고 처연한 찰나는 우리로 하여금 영원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이렇게 해서, 두 장으로 된 그림들은 그 연결 틈 사이에, 다만 생존! 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타자화해온 죽음의 시야를 감추어 두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 그림들을 이면화裏面畵라고 불러도 좋겠다. ■ 백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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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STORY / TIMBUKTU


나영展 / NaYoung / 羅煐 / painting 2012_0523 ▶ 2012_0618


나영_고양이들을 위한 숲_혼합재료_60×48×28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2_0523 ▶ 2012_0618 『LOVE STORY』 갤러리 도스 기획展 관람시간 / 11:30am~10:00pm / 토_02:00pm~10: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도스_운모하(蕓暮霞) terrace GALLERY DOS_WOONMOHA TERR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4-7번지 Tel. +82.2.735.4678

2012_0523 ▶ 2012_0605 『TIMBUKTU』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TIMBUKTU』展 - 相生 의 숲 속으로 ● 세상의 어떤 풍경이 내가 잡은 붓을 통해 나의 화폭에 옮겨진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옮길수록 나의 화폭이 보다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은 내가 잡고 있는 붓을 자극시켰다. 그 이후 나는 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녔고,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기 않기 위해 꼼꼼하게 사진을 찍기도 하였고, 그것을 그대로 옮기려고 갖은 노력을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늘 언제나 변함없이 영원히 아름다운 풍경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영_검은숲_혼합재료_168×240cm_2008
나영_Oh! My Timbuktu_한지에 먹_71.5×129.5cm_2008
나영_투명한 숲_한지에 먹_164×262cm_2008

보다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났고, 그것들을 나의 화폭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옮기면 옮길수록 더욱 불만족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왜냐하면 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할 테고, 또 그 보다 더욱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감이 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날에는 내가 아름다운 풍경이라 믿었던 풍경들조차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옮긴 아름다운 풍경이 오늘은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어제 변함없는 진실로 믿고 옮긴 아름다운 풍경이 오늘 한순간에 거짓말이 되고 있었다. ● 나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 바람, 햇빛, 소리, 나무... 모든 것들이 매 순간 순간 쉼 없이 어지럽게 변하고 있었다.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려 휘어졌고, 광합성을 위해 햇빛 쪽으로 뒤틀어져 있었고, 뿌리들은 단단한 땅에 어지럽게 뒤엉켜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었고, 아름다움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이었다. 그것은 生 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나무들이 한그루 한그루가 보이기 시작했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 속에 고정된 일부분으로써의 나무가 아니라 각자 개개인의 生 으로써의나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 이제 나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쫓아다니지 않게 되었고, 사진기의 셔터를 마구 누르지 않게 되었고, 나무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위안을 주었고 커다란 휴식을 주었다. 나무들의 生 은 흔들리고,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뒤엉켜짐에도 그들은 함께 모여 숲을 이루고, 그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과 휴식을 주고 있었다. 나무들은 나무들과 함께,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또 나무들을 흔들고, 휘게 하고, 뒤틀게 하는 존재들마저도 함께 相生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단순히 형태나 풍경으로써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하나의 生 이 다른 하나의 生 에게 주는 위안과 휴식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이었다. ● 더 이상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옮기려 하지 않는다. 대신 나무들 각각 하나하나에 담긴 生 을 나의 화폭에 심고 싶다. 그리고 빽빽해진 相生 의 숲 속의 한 구석에 나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그렇게 나도 相生 의 숲 속의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많은 시간 동안 흔들리고, 휘어지고, 뒤틀어지고, 뒤엉켜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급하지는 않다. 이제 겨우 눈을 떴고, 이제야 겨우 숲 속에 한걸음 발을 내딛었을 뿐이다.
나영_달밤파티_혼합재료_24.5×16cm_2012 나영_고양이나무_혼합재료_15.9×17.4cm_2010
나영_Fantasia_혼합재료_15×41.5cm_2012
나영_고양이들이 들려주는 사랑동화_혼합재료_60×80cm_2009

『LOVE STORY』展 - LOVE STORY ● 「러브스토리」시리즈는 유기 고양이들의 행복을 희망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들과 작가 개인의 사랑관을 담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기 고양이들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매체를 통해 들었던 고양이 학대 소식들에 대한 충격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 자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유기 고양이들이 그림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여, 고양이들이 꿈꾸는 자유와 사랑 그리고 행복을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은 유기 고양이들의 다채로운 꿈의 발현인 동시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작은 안식처이다. 보는 이들에게 작품의 조형요소에 의한 심미적 감상과 함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유기 고양이들을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으로써 여기고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주었으면 하는 작가의 생각이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까망이'라고 이름 붙인 작품 속 검정고양이들이 유기고양이를 표현한 것이라면, 고양이를 의인화시킨 캐릭터들은 사랑에 대한 생각을 담아내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작품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동화다'라는 컨셉으로 제작 되었다. 서로 다른 곳,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만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고백, 결혼, 가정을 꾸려나가는 등등의 사랑의 결실을 맺어가는 모습을 고양이를 의인화하여 마치 동화책 한 권을 읽듯이 표현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아이들의 순수한 감성을 잃어가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하다. 사랑이라는 순수하고 따듯하고 아름다운 감정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에 쫓겨 서서히 우리들의 인생에서 자리를 다른 것에 내주고 만다. 이것이 안타까워 더더욱 표현해 보고 싶었다.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나는 내 사랑이 내가 하는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 자체로 삶의 기쁨이자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사랑이란 인간이 소유하고 느끼는 감정들 중에 단연 가장 의미 있고 훌륭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박하게 느껴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을 내 작품을 보는 이들이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랑동화'라는 테마로 작업하게 되었으며, 밝고 따뜻한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내가 느낀 사랑의 감정과 사랑이 주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 앞으로도 나의 무의식적 상상의 발현을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꿈, 행복한 꿈을 꾸게 하고 각자만의 안식처를 찾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 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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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MIND


김남연展 / KIMNAMYEON / 金南蓮 / photography 2012_0523 ▶ 2012_0529


김남연_In my mind_사진_80×120cm_2012
초대일시 / 2012_052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갯벌은 우리들 인간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 도도한 세월 속에 겉으로 보기에는 그 세월이 그 세월인 것 같은 긴 시간속의 인간의 모습은 큰 강물의 흐름처럼 변화가 없이 흘러가는 듯이 보이지만 하루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인간의 모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자연의 피부인 갯벌이 그렇다. 멀리서 보면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그 모습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모습으로 보여 지지만 자연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질서와 에너지로 하루에 두번 밀물과 썰물이 오가면서 인간의 일상이 그렇듯이 매일매일의 풍경이 바뀌는 것이 갯벌의 풍경이다. 수십만년을 두고 쌓여서 갯벌이 형성 되었겠지만 그 오랜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그녀는 매일 변하는 특정 공간과 시간에서 벌어지는 갯벌의 살아있는 풍경에 주목하다.
김남연_In my mind_사진_55×75cm_2012
김남연_In my mind_사진_55×75cm_2012
김남연의 갯벌은 역동적이지 않는 듯한 소소한 풍경을, 작가의 심미안으로 거대한 우주적 풍경으로 치환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살아있는 갯벌은 마치 우리 몸과 지구, 아니 우주의 축소판 같기도 하다. 갯벌이라는 속성이 제거된 상태로 본 갯벌풍경은 마치 우리 몸의 혈관과도 같은 형태, 그리고 상상치 못한 색상, 거대지구의 또 다른 모습을 투영시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심미안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김남연은 갯벌의 작은 풍경을 통해 우리가 꿈 꾸듯이 보게 되는 또 다른 풍경들을 보여줌으로 더 큰 파동을 만들어낸다.
김남연_In my mind_사진_55×75cm_2012
김남연_In my mind_사진_80×120cm_2012
김남연의 『IN MY MIND』는 '갯벌'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곳에 담겨있는 새로운 풍경은 인간의 삶의 모습의 맥락에서 또 다른 내러티브를 형성해 내려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작가 자신에게 보이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또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지극히 작가 개인적인 시선 을 탐구한다. ■ 이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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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Me Sweet


이동욱展 / LEEDONGWOOK / 李東昱 / sculpture.installation 2012_0524 ▶ 2012_0630 / 월요일 휴관


이동욱_Love Me Sweet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119b | 이동욱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24_목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아라리오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 ARARIO GALLERY SEOUL samcheong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gallery.co.kr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은 오는 5월 24일에서 6월 30일까지 아라리오 전속작가인 이동욱의 개인전『Love Me Sweet』을 갖는다. 작은 크기의 정교한 인물 조각을 통해 특유의 폭력적이고 서늘한 아름다움을 선보여온 이동욱은 이번 전시를 통해 신작 20여 점의 조각과 오브제로 구성된 인스톨레이션 작품들을 선보인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한국의 젊은 조각가 군을 대표하는 이동욱은 스컬피라는 소재로 만든 정교하고 사실적인 조각을 통해 완벽한 아름다움과 그 이면에 숨겨진 폭력적이고 낯선 상황의 대비를 표현하였다. 정확한 통제 하에서 모습을 드러낸 완벽하게 짜여진 작품들의 구성은 작가가 제어 할 수 있는 선까지의 작업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통제의 바탕에서 나온 조각 작품들은 매우 작은 크기와 생생하게 사실적인 형태와 색, 표면의 느낌을 전달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들이 마주한 작은 무대들은 크게 확장되었고 개개의 인물이 중심이던 작품들도 기존의 배경이 크게 확대되면서 단순한 하나의 조각에서 인스톨레이션으로 확대되었다.
이동욱_good boy_혼합재료_80×120×20cm_2012

2003년 첫 개인전부터 지속적으로 집중한 주제인 기르기(Breeding)는 원래 작가의 수집 및 동물을 기르는 취미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기르는 자와 길러지는 자, 이들 사이를 지배하는 기르기의 시스템을 포착한다. 이러한 전시 작품의 한 예는「Good Boy (2011)」라는 작업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위태로이 서있는 한 남자가 있다. 마치 먹이사슬을 연상하듯이 남자의 두 손에는 여러 가닥의 줄이 붙들려 있고 이 줄에는 다양한 형태의 30여 마리의 개들이 매여 있다. 인물과 개들이 놓인 상황은 매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이들의 균형감은 어느 누군가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매우 위태로운 것이다. 개들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들 딴 곳을 바라보고 있다. 굿보이(Good Boy)란 자신의 반려견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때 하는 칭찬의 말이다. 하지만 이 굿보이가 개를 지칭하는 것인지, 혹은 이러한 사슬의 상단에 위치한 묶인 인물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다만 굿보이라는 말로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고 있는 상황이나 혹은 사회 내에 여러 관습과 터부에 의해 암묵적인 질서에 놓인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인물의 자세와 형태에 따라 내가 가해자일수도 피해자일수도, 혹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일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동욱_love me sweet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한편 완벽한 아름다움, 꿈과 같은 달콤한 느낌의 대척점에 있는「Love Me Sweet (2011)」은 트로피 형태로 지어진 한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꿀과 같은 달콤한 물질이 처덕처덕 흘러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벌집으로 만들어 진 것처럼 보이는 트로피는 꿀과 함께 녹아 내린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요인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극명하게 꿀처럼 달디 달았던 그 어떤 영광의 시간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작품과 연장선에서「지켜야 할 영광과 지우고 싶은 과거 (2012)」는 새장과 트로피, 실제 새들로 구성된 인스톨레이션 작품이다. 반짝이는 트로피들, 새장에 갇힌 새들은 트로피 컵에 담긴 모이를 먹고 자란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새장 속에 놓여있다. 반짝이는 트로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들의 배설물들과 각종 오물들로 더렵혀져 그 빛을 잃는다. 새장에 갇힌 새들은 그 속에서 부대끼며 지내다 결국 죽음까지 다다른다.
이동욱_Wen_혼합재료_17×5×5cm_2011
이동욱_Wen_혼합재료_17×5×5cm_2011

이러한 가해자와 피해자, 영광과 성쇠 사이의 간극은 모자이크 형태를 사용한 인물 작품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물들의 한 부분이 마치 텔레비전 영상에서 폭력적인 장면 등이 방영될 때 사용하는 모자이크 처리처럼 보이는 네모난 조각들에 의해 가리워져 있다. 피와 살색이 비치는 작은 조각들을 통해 폭행이나 살인과 같은 폭력적인 한 장면이 벌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그 상황에서 행위를 가한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유추해 볼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해석도 제거된 상황에서 잔혹한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은 다만 그 상황의 가치중립적이고 유일한 목격자일 뿐이다.
이동욱_Wolf attack_혼합재료_15×19×10cm_2011

이렇듯 모호하고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인물에 대한 고찰은 지난 2006년 개인전을 통해서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 전시장을 거대한 양어장으로 변신했던 전례와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거대한 새장과 같은 더 극적인 상황이 제시되며, 장치는 보다 확대되고, 전시 작품 또한 확대 발전된 형태를 보인다. ● 이동욱은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마쳤다. 2012년『Love Me Tender』(두산 갤러리, 뉴욕, 미국), 2008년『Cross Breeding』(아반떼 갤러리, 취리히, 스위스), 2006년『Breeding Pond』(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삼청, 한국), 2004년『Mother Breeding』(브레인 팩토리, 서울, 한국)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2011년 스웨덴 웁살라 미술관과 2009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2009년 런던 사치 갤러리 등에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였으며, 내년 1월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 아라리오 갤러리
2012.05.22 20:03:43 / Good : 742 + Good

zabel

  • 작성시각: 2012.05.23 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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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언젠가 우리는 멸망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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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journal




이승훈展 / LEESEUNGHON / 李承勳 / video.photography 2012_0519 ▶ 2012_0525



이승훈_일기 journal展_한전아트센터 갤러리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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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19_토요일_04:00pm

후원,협찬,주최 /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 2관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태안반도에서의 이틀, 낙동강에서의 삼일, 부실대학교에 대한 아픔 그리고 고민, 강정마을에서의 하루, 재개발지역에서의 생각들.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쓰게 된 나의 일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어제의 하루고 오늘의 하루처럼 쉽게 지나가 버리는 무관심한 하루의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나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연계된 지점들이 뚜렷하게 보이는 사건들이다. 이 이야기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가는 밑바탕이 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지시해 주는 듯하다.
이승훈_Christmas Tree_한지에 잉크젯프린트,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버려진 물건들_594×420cm×6
이승훈_수행과 놀이 사이-나이테_한지에 잉크젯프린트,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버려진 물건들_297×420cm
이승훈_수행과 놀이 사이-내가 고告하는 방법_ 한지에 잉크젯프린트,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버려진 물건들_594×420cm

2011년. 짧은 일 년 동안 한 가지 깨달은 점과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먼저 깨달은 점이란 사람이란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일을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관심을 가질 수 없다.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일반적인 사람 중에 한명일 뿐이었다. 그리고 의문이란'그러한 단절된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군가와 소통과 공감으로 관계를 극복하고 나의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일까'였다. ● 이 의문은 내가 배워온 분야에서의 고민과 이어질 수 있었다. '사회에서 예술가로서의 역할이 있다면, 그 역할로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일이란 어떤 일일까' 나는 이러한 고민에 거의 매일같이 잠겨있는 것 같다. 그러한 고민 중에 어느 정도 생각 속에서 정해진 이야기가 있다면 예술가란 변화하고 움직이며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고 적극적인 소통과 사회참여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짧은 2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내가 봐야만 하는 사건들을 찾아다녔고 그러한 것들을 일기처럼 기록하고 되새기면서 고민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되었다.
이승훈_수행과 놀이 사이-원을 그리다_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버려진 물건들_00:11:00
이승훈_화보찍기 하 나-모래무덤 앞에서_ 한지에 잉크젯 프린트, 아현동 재개발구역에서 버려진 불건들_210×297cm

내가 찾고 경험한 것이란 이 사회와 환경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 숨겨져 있는 실제의 이야기들 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는 것을 통해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다. 그런 고민을 하는 행위 자체가, 고민을 소통하며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것이라 생각했다. ● 규격화되고 상품적으로 가치가 있어 보이는 액자의 힘에서 벗어나 재개발단지에서 버려지고 힘없이 떠나버린 개개인의 잉여물인 밥상, 창문, 문, 그리고 집을 부수는 인부들이 썼던 공사장 나무판자들을 이용하여 액자를 제작하고 디스플레이를 한 이유도 그러한 실제적인 것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또한 순수하게 작품 속에서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져서 영향을 주고받아야만 빛이 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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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NANJI ART SHOW Ⅲ




서울해부도 (SEOUL ANATOMY)展 2012_0525 ▶ 2012_060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25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선태_김원화_김지은_SINN_장우진_정소영_현창민

공동기획 / 김선태_김원화_김지은_SINN_장우진_정소영_현창민 (6기) 기획협력 / 김노암(아트스페이스휴디렉터)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01:00pm~06:00pm / 월요일 휴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운영하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6기 입주작가의 기획전시『2012 NANJI ART SHOW』로서 세번째 전시입니다. 전시는 현재 입주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기획되었으며, 입주기간이 끝나는 10월말까지 10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됩니다.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세상의 끝 또는 사통팔달과 좌충우돌의 도시 ● 1. 이번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작가들의 전시 『서울해부도』는 일련의 '서울 재발견' 시리즈의 하나처럼 보인다.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예술가들이 '서울'을 주제로 삼은 다양한 해석과 표현을 제시해왔다. 서울은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 교육, 의료 등 문화의 집합장이며 중심이다. 이 분명한 사실과 현실 앞에서 작가들은 서울이 정말 그러한지 의문을 던져본다. 이러한 행위는 어쩌면 아무 쓸모 없는 무용(無用)의 유희이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가늠하기 위한 유용(有用)한 전략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번 『서울해부도』 또한 이 양가적 가치와 목표를 염두해둔 협업전시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가 입주작가들과 함께 성장하고자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김선태_Confusion_장지, 은박, 석채, 안료_130×193cm_2012
김원화_스페이스 센터-상암_Google Earth_1080×1920px, 가변크기_2012
김지은_비계 덩어리_대나무 꼬치와 빵끈_200×109×74cm_2012

전시를 함께 만들어낸 김선태, 김원화, 김지은, 김진언, 장우진, 정소영, 현창민의 작업은 각자 독자적으로 수행해온 창작활동과 그 스타일을 이번 전시협업을 통해 객관화하는 실험을 한다. 비록 제한된 시간과 여건 하에서 진행되었지만 전시를 위해 참여작가는 각자의 일정을 조정해야 했고 또한 여러 차례의 토론 과정을 만들고 경험해야 했다. 그 과정이야말로 이 전시의 주된 목표이자 내용일 것이다. 그리고 『서울해부도』는 그러한 협업과정이 낳은 여러 갈래의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이다. 『서울해부도』는 실상 작가들 자신의 생활을 떠받치는 환경과 조건, 시대의 해부도이자 작자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해보는 과정이다. 서울이 바라본 난지, 서울이 바라본 예술가의 모습이다.
SINN_City of angel_인디안 잉크, 알루미늄에 스크레치_140×200cm_2010

서울은 한국과 동의어처럼 확대되기도 하고 서울과 지방과의 격차(그것이 심리적이건 물리적이건)는 서울과 해외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은 사통팔달에 좌충우돌의 마치 비현실적으로 요동치는 도시처럼 보인다. 서울의 수직적, 수평적 확장과 진동 운동은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간다. 그리고 서울은 마치 마침내 어떤 인격을 갖추고 스스로 생각하는 불길한 인공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시민은 단지 익명의 부품이거나 영원할 수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이 거대해질수록 사람은 점점 작아져 한 개인은 그야말로 먼지처럼 또 다른 개인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치 없음의 차원으로 추락한다. 서울은 모든 곳으로 통하는 그러나 그 어디와도 진정 만날 수 없는 도시란 소리다. 사람이 사라진, 사람의 가치와 인격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첨단 기능의 도시는 공포스럽고 불안하다.
장우진_바람방울 1_디지털 프린트_180×180cm_2012
정소영_Uncompleted Fragments III Under Construction_혼합매체_가변크기_2012

2. "서울은 인간의 욕망이 넘쳐흐르는 탐욕의 대상이다.(김선태)", "미래를 향해 도약하다 폭발했던 Challenger호를 연상 시키는 한국의 양가적 모습(김원화)", "열린 구조인 이 '비계'를 이용하여 지금 무엇을 짓고 있는가?(김지은)", "서울은 내게 이런 양감을 갈등케 하는 연인 같다.(김진언)",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일부로서, 그리고 그 힘 앞의 위태한 개인으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것(장우진)", "끊임없이 세워지고 무너지는 건물들,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물건들과 그 안에, 자라나고 사라지는 수 많은 이야기들(정소영), "권력자의 기념비가 항상 세워지는 광화문에 서울의 실패의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지면 어떨까?(현창민)"
현창민_광화문 mahnmal_설치_가변크기_2012

대체로 참여작가의 작업노트를 관통하는 기조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분야가 됐던 서울에 대한 인상과 견해에는 어떤 보편적 기조를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공통된 정조를 『서울해부도』에서도 느껴볼 수 있다. 일상화된 고립과 고독, 현대를 표현하는 물질적 욕망으로 가득한, 그리하여 합리보다는 비합리가, 공공의 가치보다는 어떤 음모로 작성된 계획서가 실행되는 도시로 비쳐진다. 이런 도시의 거주자들은 그 반동으로 도시로부터 탈출하는 '전원'과 '귀향'을 꿈꾸기 마련이다. '전원'의 또 다른 얼굴이 '예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어떤 위안과 치유를 기대한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새로움의 창조만큼이나 삶을 위안하는 역할을 스스로 떠안는다. 작가들의 실험과 탐구는 새로운 이해와 표현으로 승화되어 예측불허의 미지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발판을 만든다. ●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은 집과 도시와 도로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위대한 발명품은 그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정신적인 것들이다. 물질의 운동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리고 그 세계의 끝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정신에서 어떤 다른 운동을 시작한다. 그 위치에서는 위대한 도시가 위대한 오류처럼 보인다. 『서울해부도』는 거대한 세계와 삶과 오류를 껴안고 한바탕 몸싸움을 해보는 것이다. ■ 김노암

2012 난지아트쇼 전시 안내 Ⅰ. 0412 목 - 0422 일 Ⅱ. 0427 금 - 0506 일 Ⅲ. 0525 금 - 0606 수 Ⅳ. 0615 금 - 0624 일 Ⅴ. 0629 금 - 0711 수 Ⅵ. 0717 화 - 0729 일 Ⅶ. 0830 목 - 0909 일 Ⅷ. 0918 화 - 0930 일 Ⅸ. 1004 목 - 1014 일 Ⅹ. 1019 금 - 1021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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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윤리학Ⅱ_자아세대




??的?理?Ⅱ_自我一代 Splendid EthicsⅡ_The ego generation展 2012_0525 ▶ 2012_0621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25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리지카이 Li Jikai 李??_시옹위 Xiong Yu 熊宇 쩡더롱 Zheng Delong ?德?_찌아강 Jia Gang ?? 인쥔 Yin Jun 尹俊_인쿤 Yin Kun 尹坤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화사한 인공정원 살고 있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다음과 같은 달콤한 논리에 고착되고 있다. '새로움은 욕망을 생산하고, 그 욕망은 이윤을 생산하며, 이것은 아름답도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점철되어 있는 이 한 문장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 그 새록새록 한 의미들이 기생충이 알을 까듯이 수십 만 가지의 행태로 생활 속에 침투했음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리지카이_Ic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0cm_2005
리지카이_The Fores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147cm_2007

중국의 당대예술에서 70년대 생 작가군을 이야기 하자고 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서술해야 할듯하다. 아시다시피 문화대혁명은 중국현대사의 사회적 문화적 격동으로 중국사회에 교육의 파괴, 전통 도덕의 파괴, 문화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 소수민족 문화 핍박등으로 인해 중국인들에게 물질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피해를 주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현대사를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물론 중국 당대 미술사 역시 그러하다. 앞선 세대의 주류 중국미술흐름인 냉소적 사실주의(Cynical realism), 정치적 팝(Political pop), 그리고 염속미술(Gaudy Art) 역시 이러한 중국의 격동의 현대사와의 상관관계가 있다. 단지 사회상을 반영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세대간, 경험의 차이로 달리 표현되었지만, 여전히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현재까지 지울 수 없는 중국인민들의 예술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1989년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와 같은 또한 번의 격동의 시절이 있었지만, 이번 전시의 70년대의 작가군의 작품과의 상관관계를 밝힘에 있어 필자는 문화대혁명이 중국사회에 영향을 끼친 부분에 대해 더 많은 주력을 기울여 서술하고자 한다.
시옹위_Crossing the River of Light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11
시옹위_Some day I_ll floate upon the water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1
인쥔_Darling-Crying Seires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2
인쥔_Mother and Daughter-Crying Seires_캔버스에 유채_150×150cm_2012

1. 격동기 중국 (1966-1976: 문화대혁명) ●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은 근대에서 현재까지의 중국인민들의 사회, 문화, 역사 등에 엄청난 파급력을 끼쳤으며, 현재의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시는바와같이 문화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진행되어져 왔으며, 사회적 정치적 격동기의 현대 중국사라고 할 수 있다.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혁명 즉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으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중국인민들 대부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기간 동안 많은 경제활동이 일명 혁명활동 우선으로 정지되었다. 무엇보다도 현대 중국의 역사를 대참사로 이끈 것은 전통과 교육, 문화유산의 파괴였다. 10년간 계속된 문화대혁명기간 동안은 체계적인 교육이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대입시험은 잠정 폐기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은 농촌의 노동교화소로 가거나,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바로 중국을 떠나 망명하였다. 또한 도시의 젊은이들은 농촌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되었고 그곳에서 모든 정규 교육을 포기한 채 공산당 선전교육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에, 학력은 초등이나 중학교 교육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특별한 능력이나 기술이 잇는 사람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후에 덩샤오핑 지지자나 서방측 목격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부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 세대를 산출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 다음으로, 당시 마오의 사상은 전통 도덕과 관습을 제치고 중국에서 모든 것을 이끄는 중심논리가 되었다. 어린 홍위병의 권한은 군, 공안, 그리고 사법기관을 좌지우지 하면서, 중국의 전통예술과 전통사상은 구시대의 폐단으로 치부되면서, 그 자리를 마오쩌뚱 사상이 차지하기에 이른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당시 홍위병에 가담한 청소년이 자신의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또는 구타하는 일이 흔히 일어났으며, 문혁의 지도부는 이러한 일들을 즉 전통을 비판하고,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 위와 같은 교육의 부재와 전통사상과 전통예술의 부정은 자연스럽게 문화유적과 전통 유산의 파괴를 낳았다. 이 기간 동안 건물, 공예, 서적 등의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었다. 공예품이나, 서적, 그리고 서양의 악기 등은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다. 이러한 파괴는 사실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행위였으며, 중국 역사가들은 이러한 문화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종종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마오쩌뚱의 어록이 신앙이었던 당시에 종교의 탄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종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으로 홍위병들이 몰려와 사찰에 불을 지르고 승려들을 쫓아내는 폭력이 발생했다. 또한 당시 전통문화는 구습타파와 마오사상에 저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되어, 점술, 풍수지리, 전통의례, 중국고전학 그리고 음력 설 등이 폐기되거나 약화되면서, 마오 제 1일 주의만이 이 기간의 믿음이며, 신앙이며, 법이며, 규칙이 되었었다. ● 일련의 이러한 사건들(교육파괴, 전통도덕과 관습 파괴, 역사적 유산 파괴)라는 즉 문화대혁명이라는 기치아래 벌인 만행들은 당시의 사람들의 인권유린으로 이어졌다. 즉 혁명에 맞지 않는 이라는 명확한 기준 없이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첩자, 개, 수정주의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였으며, 수많은 지식인과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아사하거나 중노동으로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즉 계급투쟁과 정치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인재와 역사 그리고 문화가 소실된 시기였다.
인쿤_Basket filled with fragrance of frower_캔버스에 유채_120×100cm_2010
인쿤_Chinese Fairy tale-Singing a red song_캔버스에 유채_180×150cm_2012
쩡더롱_06-06_캔버스에 유채_210×150cm_2006
쩡더롱_2008-29_캔버스에 유채_150×210cm_2008

2. 중국현대사의 격동기와 당대미술의 상관관계 ● 앞서 서술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며, 자주 언급되는 중국 당대 미술사의 주류 즉 완세주의, 정치적 팝, 염속예술 그리고 현재 70년대 생 주류작가들에게 칭해지는 잔혹세대 혹은 만화세대 일명 자아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문혁시기에 청소년기를 맞고, 천안문 사태때 청년기를 맞은 세대와 문혁기간 이후 출생하여 천안문사태때 청소년기를 맞은 세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한 문혁이후의 개방과 개혁시작 그리고 천안문사태 이후의 자유화물결과 급속한 자본화 현상은 당대 중국 현대사와 인민들의 사상에 많은 혼란을 가중시켰음은 가히 짐작이 가능하리라 본다. ● 사실 중국 현대사에서는 사상과 언론 문화의 통제를 겪어왔다. 80년대가 되어서도 중국예술가에게 주체적인 예술 활동을 권한은 없었다. 전문 예술가들은 정부기관에 소속되어 학생을 가르치거나 부과된 작업을 제작하고 월급을 받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가 아닌 자아 표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표현의 제약이 심했다. 그러나 사상개방과 함께 서방의 사상이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면서 점차 개인의 내면세계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사회와 분리된 고독한 자아, 인간 존재의 의미 등에 관심이 점차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상개방은 아시다시피 단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는 정부의 정책에 따라 시시각각 긴장과 완화의 과정이 반복되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작가들은 심각하게 개인과 사회 권력간에 대립하는 중국의 현실과 마주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이성과 본능의 대립 속에서 고독과 허무, 비극적 자조적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샤오깡(Zhang Xiaogang), 쪼춘야(Zhou chunya), 위엔민쥔(Yue minjun), 왕광이(Wang guangyi), 쩡판즈(Zeng fanzhi), 양샤오삔(Yang shaobin) 등이 이 시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 군이다. 즉 문화대혁명과 천안문사태와 같은 격동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들은 관념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즉 1960년 전후에 태어난 문혁과 개방 그리고 천안문 사건 그리고 거대한 자본시장의 변화에 내몰린 이 세대들은 수차례 배신과 유린을 경험했고, 이로 인해 어떠한 신념이나 이상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의 작품들은 냉소적이고 허무적의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90년대이후 급속한 경제발달로 인한 배금주의가 싹트면서, 그 세태를 중국의 현대사의 잔혹한 시절의 상징이었던 문화대혁명시기의 포스터와 마오서적을 이용한 문화적 정치적 상업적 권력의 혼재된 작품을 쏟아 놓기에 이르렀다. ● 시기별 사적으로 뚜렷이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중국당대주류 예술 중에 염속예술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염속미술은 완세주의와 정치적 팝이 발단된 상업문화가 확산되면서, 조금 더 자본에 가깝고, 대중적 속성을 지닌 중국 현 대중의 통속성을 다루는 작가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주로 60년대 후반 출생의 작가군이 대부분으로, 이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저속함, 어리석음을 묘사했으며, 명확한 풍자나 비판보다는 찬양과 비판을 오가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작가군에는 펑정지에(Feng zhengjie)가 대표적이며, 그외 쫑삐아오(Zhong biao), 왕칭송(Wang qingsong) 등이 자리하고 있다.
찌아강_Flower Bed_캔버스에 유채_170×150cm_2011
찌아강_Residual Petals Keeps Perfume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11

3. 1970년대 생 자아세대의 특징 ● 서두부터 2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현대사, 그리고 앞선 당대예술가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회와 예술의 관계가 뗄래야 떨 수 없는 관계이다 보니,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편이 이번 전시를 이해함에 있어 도움이 될 듯한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번 『눈부신 윤리학Ⅱ_자아세대』라는 명칭은 사실 작년에 치루어진 눈부신 윤리학의 후발이다. 상기의 전시에서 설명했듯이,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자본주의 격랑속으로 뛰어들었으며, 2012년 현재시점 거대한 공룡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미권이나 유럽과 같이 오랜 시기 동안 쌓아서 지속하고,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라, 체제와 이념의 급속한 변화와 함께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살아온 중국인들의 당대예술을 논하고자 한다면, 당대 사회의 변화상을 알아야 함은 필수 일 것이다. ● 사실 각 나라마다의 여러 특수성이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될 작가군에 있어 어쩌면 이러한 생각을 혹자는 가질지 모른다. 자아세대라니? 자아가 없는 세대도 있는가? 혹은 중국에서 70년대생 작가군을 일컫는 말로 잔혹세대 혹은 만화세대라 한다. 수식어 없는 명사가 얼마나 추상적인지 아마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만화? 잔혹? 그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란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부분에 대한 조합으로 해석이 가능하리라 본다. 사실 잔혹이건, 만화건, 자아건 간에 중국에서 70년대 중반시기에 태어난 작가들은 중국현대사의 격동을 미미하게 겪은 첫 세대이다. 이들 세대는 감히 정치적 격동을 피한 세대라고 칭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삶이 많이 능숙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세대에선 이전세대와 확연히 다른 점이 포착이 된다. 즉 작품에 있어 정치적 성향(이념적 갈등)이 배제되어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에 세계와 인간의 본성 즉 생과 사에 대한 것에 대한 관심, 그러면서도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성향이 짙은 작품활동을 구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30대 중후반의 세대들의 삶과 맞닿아 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바로 이점일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념과 정치를 떠나, 처음으로 자기 표현을 구가한 중국의 첫 세대로 의미가 있다. 즉 이들 자아세대들은 작품에 있어 정치성이 배제되어 있으며, 경제 자본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배제하고, 자신만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첫 세대로 의의가 있다. 이번 전시는 리지카이(Li jikai), 시옹위(Xiong yu), 쩡더롱(Zheng Delong), 찌아강(Jia gang), 인쥔(Yin jun), 그리고 60년대 후반 출생으로 앞선 눈부신 윤리학전시의 연결고리인 인쿤(Yin kun)의 작품을 통하여 현 당대 중국미술에 있어 가장 핵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30대중후반의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고자 한다. ■ 김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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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되지 않은 unnarrated




이샛별展 / LISETBYUL / painting 2012_0525 ▶ 2012_0707 / 일,공휴일 휴관



이샛별_휘어진 자 The bent man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0×21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샛별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25_금요일_05:00pm

주최,기획 / Art space LOO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루 ART SPACE LOO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110번지 Park110 빌딩 B1 Tel. +82.2.790.3888 www.artspaceloo.com




토끼 가면과 트레이닝 복 차림의 인물, 흘러내리는 살덩이, 새떼와 날아다니는 사람, 사건의 연속 혹은 단절성, 그것은 어떤 코드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충분히, 혹은 너무 충분히 서술되고 있는 듯 보이는 화면에 '서술되지 않은' 것? 미처 포함시키지 못한 빠져나간 이야기, 제거된 이야기 때문에 서술되지 못한 무엇이 있는 것인가? ■ 이샛별

이샛별_클라인의 항아리 klein's bottl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0×210cm_2012
이샛별_라스트맨 last man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12 이샛별_라스트맨2 last man2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12

1. 사각 원-불가능한 봄 ● 이샛별의 작품은 좋다. 붓질, 드로잉의 흘리기, 대범한 스케일과 구성이 좋으며 무엇보다 색감으로 장악해 오는 감각적 매력이 뛰어나다. 왕창 다가오는 감각적인 매력과 군데군데 묻어나는 위트와 환타지는 매력을 발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를 미궁으로 인도하는 문턱이 된다. 문턱을 넘어가 보자. 이번 전시의 제목(서술되지 않은, unnarrated)에서 보듯이 이샛별의 작품은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것을 제시하려 한다. 그러나 'unnarrated', 서술되지 않은 것은 그의 작품을 모두 감상하고서도 여전히 찾아낼 수 없다. 의미의 적중은 고사하고 우리는 '아직 서술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며 종결되지 않는 소통의 채널에 매달려 있게 된다. '이게 뭐지?' '작가는 왜..?' 작품 앞에서의 질문은 곧 참조물, 작가의 의중을 탐구하게 하지만, 이 지점에 원하는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면에 묶어두는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이샛별 작품의 강력한 매력이다. 작품, 관객, 작가 모두 질문에 회부되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 소통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 순순히 이샛별의 작품을 마주할 때 인상은 마치 '최후의 심판'과도 같은 장엄한 맛이 풍긴다. 당연히 고전 작품에서 보이는 '최후의 심판'이나 '장엄'과는 다르지만, 매우 드넓게 조성된 조형공간과 그 안을 가득 메우는 다양한 종류의 형상들, 이 형상들의 심상치 않은 몸짓이나 수많은 단편들이 모여 고전 못지않은 장엄함을 자아낸다. 마치 물병에서 점점 풍성하게 퍼지는 꽃다발처럼, 자아에 대한 고집스러운 해명은 결국 화려한 수사로 만개하게 된다는 멋진 말을 라깡은 남긴 바 있다. 이샛별 작가의 작품은 이런 화려한 수사가 만개하면서도 다 하지 못한 자기 해명의 빈 틈(구멍)을 평면에 구조화함으로써 '말함과 말 못함 / 서술하고자 함과 [그럼에도] 서술되지 않음 / 가능과 불가능 / 만개와 빈 구멍' 사이의 반전이 주는 이상한 거리감을 현대식 장엄함으로 전치하고 있다. 기이한 추리닝맨과 사실적인 이미지들, 복잡한 장면의 틈 사이로 흐르는 살덩어리들과 고착된 형상들. 익숙하지만 살짝 낯설고 어긋나는 형상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그 현장에는 없는 '다른 장면'을 생각하게 되고 작품은 결국 그에 대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과잉 속 결여, 즉 스핑크스 앞에 선 오이디푸스가 되는 것이다. 여기 작품 앞에 우리 오이디푸스들을 묶어두는 매력의 핵심은 만개한 꽃(작품)에 질문이 이어지도록 만드는 장치(apparatus), 즉 추리닝맨의 제스처이다. 꽃으로 눈 먼 추리닝맨(「휘어진 자」), 태엽 있는 추리닝맨(「창세기」), 변형된 토끼 추리닝맨(「라스트맨1」), 3인조 추리닝맨(「보충물」) 등. 이 제스처는 해석의 연속과 단절에, 일관성 있는 조형질서의 연속과 단절에 관여하면서 관객에게 어떤 해명을 강요한다. 이러한 작풍은 초현실주의의 전통적인 수법이다. 달리(Dali, S)는 「시뮬라크럼(simulacrum)」(1938)에서 아주 익숙해 보이는 풍경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풍경인지 알고자 하는 순간부터 관람자는 완전히 오리무중에 빠지게 된다. 「시뮬라크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어느 것에도 적중되지 않는 끈 떨어진 이미지, 시물라크라이기 때문에 의식은 의미 있는 단위로 그것을 읽어낼 수가 없다. 지성은 그것을 분류할 능력이 없으며, 상상력은 그것에 대한 어떠한 종합도 불가능하다. 막다른 골목으로 유도하는 이러한 기법을 달리는 '편집증적인 비평기법' 이라 말한 바 있다. 살바도르 달리가 제시하려는 이러한 불가능성은 바로 '다른 장면' 즉 무의식의 제시이며 이것이 '초현실' 이다. 이샛별의 작품에도 이중노출처럼 흔들리는 이미지가 등장하거나(「라스트맨2」) 서사가 연결되지 않는 이미지들의 우연적인 조합(「클라인의 병」, 「휘어진 자」 등등)이 주된 수법이다. 작품제작의 기법이나 이념 면에서 초현실주의의 계보(다다, 네오다다와 그 이후 오늘날까지)와 80년대 형상미술을 잇고 있으나, 이샛별의 작품은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예를 들어, 작가가 화면에 소환하는 이미지들은 주로 인터넷 서핑을 통해 수집되고(「라스트맨1,2」의 배경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장소이다.), 애초에 이 이미지를 부르게 된 문자(제목)를 무수히 참조하면서 수집물을 화면 위에 배치한다. 즉 자신의 일상에서 / 공부에서 지각에 걸려 뱅글거리는 단어로부터 시작하여 불려 나온 성운(星雲)이 하나의 작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작업은 언젠가 자신에게 걸려 든 문자(예를 들어, '라스트맨', '보충물' 등등)에서 시작하여 이 문자로부터 비롯되는 이미지 연상과 수집 그리고 그것의 배치 혹은 구성으로 종결된다. 이 구성을 관람하는 관람자는 작가가 제시한 임의적인 흐름 속에 상존하는 '단절', '절단'의 지점을 분명히 하면서 실패하는 소통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양방향의 벡터 속에서 그의 형상 작업은 르네 마그리트가 주장하는 이미지 실재를 넘어 그것에 무의식이라는 근거를 소환하려 하고 나아가 그 무의식이 현실의 허구성을 돌파하는 길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정교함은 바로 '지금 여기' 의 현실과 무의식의 관계를 적시하며 현실의 허구성과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진실(the real), 이 둘의 불가피한 관계를 관찰하는데 있다. 이 점은 '현실이란 구성되는 것'이라는 입장에 대한 작가의 동의와 주장에서 잘 드러나 있다(작가노트 참조). 따라서 구성되는 현실처럼 그의 작품 역시 매끄러운 연결인 듯하면서도 늘 어긋나는 구성으로, 클라인의 병처럼 메우지 못하는 구멍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서술되지 않은' 구멍, 이것을 구조적으로 작품 속에 설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라깡은 이 빔(구멍)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해석)욕망의 변증법을 불가능한 '사각 원' 으로 부른 바 있다.
이샛별_임의적 자유 for itself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2
이샛별_창세기 Genesis_캔버스에 유채_160×160cm_2012

2. '서술되지 않은' 홀(hole)과 S1 ● 따라서 화면 위에 제시된 이미지들은 작품제목의 영향권 내에서 상호연관성을 가지게 되지만 매끄러운 전체 이야기로 통합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서술되지 않은' 작품들은 주요 도상을 통해 어떤 일관성을 지니는 것처럼 위장한다. 이것은 작품마다 등장하는 '추리닝맨(토끼 혹은 인간 얼굴)', '살덩이' 두 요소이다. 허공 중에 날아다니는 비닐봉지처럼 우연적이고 소음처럼 무의미하지만 이 도상은 각 작품마다 고정적으로 출연함으로써 마치 어떤 중대한 의미가 반복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사실 탁월한 배치이다!). 그러나 정작 추리닝맨(토끼가면이든 아니든)은 작품 속에서 특정 제스처를 통해 작품에 대한 질문을 증폭시켜줄 뿐이다. 작품에서 추리닝맨은 '고정되거나 가정된 의미'를 함축하거나 지시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며 그냥 하나의 표식, 라벨 혹은 기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작품의 감각적인 매력과 일관성을 주도하는 매우 중요한 도상이면서 그 지위는 상징화 연쇄에서 이탈된 어쩌면 가장 이질적이며 우울한 화면의 잉여분을 자처하는 듯하다. 공중에 떠오르고, 토끼모습을 하고, 태엽 자동인형으로, 살덩이를 쏟아내거나 3인조 개그맨 같은 위트와 재치로. 아마도 추리닝맨에 대해 무심하고 표피적인 인상에 고정되는 사람이 니체의 '라스트맨'이 아닐까 한다. 자아 밖의 일에 대해 귀찮아하는 자. 이 '밖'이 초월이자, 외부이자, 타자일 것인 바, 라스트맨은 단적으로 타자의 목소리에 대해 불감증에 걸린 자들. 그러나 라스트맨과 달리, 화면 속으로 유유자적 유영하는 인물을 뒤로하고 화면 밖으로 막 돌아선 추리닝맨(「라스트맨1,2」)은 언젠가 외부로부터 자신에게 기입된 문자 한 조각, 이 문자의 유래인 타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형상 아닌가? 이것은 동요를 일으킬 뿐 구체적 대상으로 상상할 수 없으니(표상불가능성), 추리닝맨의 제스처는 그 목소리를 시각화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시초에 기입된 문자인 타자의 목소리는 표상 불가능함을 환기시키면서 작품의 제목으로 그리고 다시 주요 도상인 추리닝맨을 통해 작품 속에 실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작품 외부에 있는 제목과 주요 도상(추리닝맨과 살덩이)은 작품의 화면을 기이하게 주도하며 작품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이 도상은 작품의 제목과 그 연상의 연쇄물 속에서 대단히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한 모종의 반성적 거리를 지니는 것처럼 위장하고, 이러한 지위에서 문자와 기표의 절묘한 반향을 일으키며 도달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거리감'을 지시한다. 거기에 타자의 목소리가 누리는 어떤 향유가 있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느껴지는 '장대함'은 이 거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타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작품이란 어떤 것인가? ● 잠시 다음의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자. 「휘어진 자」, 「라스트 맨」, 「보충물」, 「임의적 자유」, 「창세기」, 「클라인의 항아리」, 「서스펜스」. 이 목소리로부터 구성된 것이 그림 속 이미지들이니, 이런 맥락에서 이 목소리는 다른 이미지를 호명하는, 애초에 우리와 만났던, 그래서 향후 상실을 복구하려는 우리 욕망의 노선을 유도한 그 타자의 목소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목과 작품의 관계'는 우리 욕망을 승인했던 그 타자의 목소리에 대한 유비적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의 틀 내부에 한정하자면 추리닝맨의 제스처가 이 유비적 관계를 환기시켜 준다. 그렇다면 화면 배치의 근원에 놓여 있는 각각의 제목은 화면의 이미지들을 불러내는 일차적인 원인이자 출발점이므로 이를 라깡의 말로 S1이라 부를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하나의 기표로 결정해 버리는 것. 그래서 이것은 억압이자 은유이며, 주인기표라고 불린다. 이것을 S1이라고 부르게 된다면 이 발판(S1)으로부터 호명된 화면 위의 이미지들은 S2(다른 기표)가 되어 개개의 작품은 어떤 담화(discourse)가 되는 것이다. 제목, S1은 타자의 승인을 통해 기입된 내 욕망의 대표주자로서 자아 해명에서 막다른 골목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 S1이 베일처럼 가리고 있는 것, 그것이야 말로 막다른 골목에 놓인 간극(구멍), 이것이 바로 거세 아닌가? 이로써 지금까지 기술한 '제목, 문자, 추리닝맨의 제스처, 타자의 목소리 그리고 향유'는 막다른 골목인 거세와 관련된다. 어째든 작품에 대한 기술은 이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 '서술되지 않은' 그것은 S1 혹은 작품의 제목이라는 기표들로 베일에 가리기 때문에 동요만을 남긴 채 상상하기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목들… 이 S1들은 왜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것인가? 타자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기 때문 아닐까. 멈추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는 추리닝맨의 제스처처럼 낯설고 기이한 방식으로 우리 현실에 침입한다. 침입으로 인한 기존의 의미, 상상계의 붕괴는 불안과 공포, 하나의 서스펜스를 실연하기도 한다.
이샛별_서스펜스 suspense_비디오_설치, 00:32:08_2012

3. 서스펜스, 이성의 아니 초자아의 목소리와 문자 ● 작품으로 돌아와 보자. 으스스하고, 뭔가 수상한 분위기는 '말할 줄 아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 우선적으로 그것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우리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떠나 잠시 우왕좌왕하며 수상하고 낯선 전조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무엇인가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서스펜스 시리즈'는 이런 이상한 전조들을 화면에 담아낸다. 작품에서 수상하고 이상한 동요는 드로잉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조 기분의 초록색이 웅변해준다. 지금도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물감 자국은 이 웅변을 조형적으로 강화해 준다. 안정적이지 않은 초록색이 화면을 온통 메우면서 그 위로 흐르는 물감은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 계속해서 흘러내리면서 안정된 현실을 망칠 것만 같다. 뭐지? '지루하고 너무 긴 시간'은 의식의 주목에서 벗어나게 되지만, 그것은 진행되고 있으며 변화시키고 그래서 의식을 깜짝 놀라게 한다. 흘러내리는 물감은 이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들을 지시해주는 듯하다. 그래서 이샛별은 서스펜스 드로잉을 영상물로 제작하여 작품 속의 기이한 움직임을 실제 촬영분을 통해 드러낸다. 화면 속 구석에 등장하는 아주 작은 인물이 진짜 인물이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마치 소설 속 허구의 주인공이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나와 같은 인간으로 분 해 말하고 움직일 때 느끼던 기이함과 비슷하다. 영상물에서 드로잉의 문자는 소리로 대체되어 '문자와 소리'는 같은 지위(position)로 공명한다. 이러한 기분을 프로이트는 '기이하고 낯선(Unheimlich)'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라깡의 불안으로 재해석되어 불안의 출처로서 '거세'와 연결되는 것이다. 거세와 관련돼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 혹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이 '거세'는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다. 그 너머는 거세 이후, 상징계의 여러 기표효과를 통해 제시될 수 있을 뿐이다. 타자의 목소리가 이 효과들을 제시하려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어떤 동요, 불안으로 감지하며 삶 속의 서스펜스로 경험하게 된다. 서스펜스 드로잉 연작과 이를 다시 한 번 다른 매체(영상)로 굴절시킨 '긴장감(서스펜스)'은 이렇게 '서술되지 않는' 것의 징표들이다.
이샛별_서스펜스 suspense_비디오_설치, 00:32:08_2012

'ADDRESSEE, Je na sais quoi, spot, La voix, Unnarrated, ex-sist, not-all, Was will das weib?' ● 이상의 단어들을 눈으로 구경하고, 그 다음 읽을 수 있다면 소리 내서 읽어보라. 이샛별은 서스펜스 드로잉 연작에서 위의 문자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킨다. 의미를 안다면 작품의 내용이 풍성해지겠지만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읽을 수 없다면 이 단어들은 그 자체로 어떤 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말 속에서 이런 식으로 문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문자는 의미가 구성되기 이전 타자의 지도 아래 좋고 싫음의 표식과 더불어 우리 몸에 기입된다. 이후 이 지점들은 자아의 핵을 구성하며 향유의 진원지가 된다. 그러니 '문자와 향유'는 불가피한 관련을 맺는 것이다. 이 지점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좋음과 만족의 자기 우물'이면서 동시에 상징화라는 거세에서 소외된 '몸의 진리'이자 무의식의 핵이다. 몸의 진리로서 무의식은 라깡의 말로 '성적 현실이자 충동이며 이것이 바로 실재(the real)'이다. 문자는 충동의 운명(vicissitude)을 따르기 때문에 상징화되기를 끊임없이 열망하며 상징화 연쇄 속에 기입되기를 혹은 기표로 대표되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타자의 목소리가 충동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기에 '그치지 않고'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닌지. ● 칸트는 우리 경험에서 다룰 수 없는 고도한 추상물 즉, 이념을 다루는 우리의 능력을 이성에서 찾았고 그런 이성의 위대함에 경탄한다. 이성은 경험 너머의 것을 그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제시해주는 능력이다. 이 이성의 강요, 그것은 경험 불가능하고 표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제시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이성은 어떻게 그것을 알고 다룰 줄 아는 것일까? '그것'의 작용이 없다면 말이다. 라깡은 '그것의 작용'을 충동의 운명에서 찾고, 충동은 타자와의 기원적인 만남에서 남은 흔적을 배꼽으로 삼아 뫼비우스 띠와 같은 경로로 운행한다. ■ 남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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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


김호석展 / KIMHOSUK / 金鎬? / painting 2012_0523 ▶ 2012_0605


김호석_법정스님2_139×73cm_2012

초대일시 / 2012_0523_수요일_04:00pm

주최,기획 / 김호석_수묵화전 추진위원회 후원,협찬 / 솔출판사_스페이스 신정_공아트스페이스

관람시간 / 10:00am~06:00pm

공아트스페이스 Gong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8-31번지 Tel. +82.2.730.1144 www.gongartspace.com


웃다 그리고 깨다1. 현실의 골계(滑稽)와 인간군상의 고투(苦鬪) 김호석은 한국 화단의 수묵(水墨) 인물화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성취로 남다른 주목을 받는 작가입니다. 이러한 주목은 그의 작가적 역량과 함께 전통과 정체성, 정치적 환경과 사회적 힘의 긴장, 개인과 집단, 문화적 연관과 인간실존의 다양한 모순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심을 갖는 주제의 요소가 사회적으로 예리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속에 연관된 정체성의 정치학을 말하려는 듯한 김호석의 작품은 정체성의 보존과 새로운 창조 그리고 그것이 삶에 근거한 어떤 것이 되기 위한 회화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김호석은 언젠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전통적인 한국 회화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깊이 느낀다. 하지만 또한 나는 그 전통을 사람들의 삶에 근거한 것으로 만들 책임도 갖고 있다." ● 김호석의 책임의식은 그의 가계에서 근거한 전통, 즉 항일유학자인 고조부의 순절(殉節)과 몰락한 유학자이자 가난한 농촌의 서당 훈장, 그리고 농사꾼으로 생을 일관한 그의 조부에게서 받은 정신적 유산에서 근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산은 민족적인 자주의식과 선비가 가진 정신의 기개가 어우러져 화가 김호석의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정신과 전통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의식하에 전통에 대한 존중과 그 전통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화가로서의 모색이 그의 인물화에 나타나 있고 그것은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적 삶에 근거한 어떤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김호석이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물과 시대의 다양한 모순과 긴장이 부딪치는 장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물을 통한 역설과 풍자, 반어, 모순, 그리고 역풍자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순정과 배반이 함께 하는 비루한 현실의 골계(滑稽), 실로 인간군상의 고투(苦鬪)라고 표현해야할 모습들입니다.
김호석_물질1_95×190cm_2009

2. 깨어진 태양, 선비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 김호석과 대화하던 중 가장 독특하게 생각되었던 말이 '태양이 빠개졌다'는 표현입니다. '빠개졌다', '깨지다' 혹은 '무엇이 크게 어긋나고 잘못되었다'는 이 말은 '깨다'라는 말의 뿌리에서 나온 것으로 '판을 깨다'같은 파괴적인 뜻과 '잠을 깨다'처럼 건설적인 뜻이 함께 쓰이는 말입니다.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이 함께 하는 자리가 '깨다'입니다. 이 '깨어진' 자리, 빠개진 태양이 백안시 된 눈으로서 선비로 나타난 작품이 「빛 1」 그리고 「빛 2」입니다. 「빛 1」에서는 정신의 자리가 사그라들 듯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고인의 초상은 파천황(破天荒)의 상황을 맞아 먹의 얼룩이 한쪽 뺨을 스치며 백안(白眼)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다른 한쪽의 고요하고 단정한 눈동자와 부드러운 듯 굳게 다문 입술, 한 올 한 올 예리한 수염과 군더더기 없는 옷의 자태가 결백한 인물의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 2」는 전체적으로 변한 흙빛의 얼굴에서 극단적인 절망과 분노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두 눈의 백안(白眼)상태는 오로지 정신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명징(明澄)한 하늘과 흰 도포가 순결한 정신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는 흰 도포와 어울린 옷주름입니다. 강고한 선으로 그어진 칼날같은 필선의 힘이 인물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 「먹墨」에서는 정신의 부재와 훼손을 지워진 머리부분으로 표현하면서 이 결의에 찬 인물의 얼굴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두 눈은 한쪽은 짙게 그리고 한 쪽은 옅게 그려져 있고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강력한 집중을 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불퇴전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수염은 꼬은 상태로 있으며 두 손은 굳게 쥔 채 무릎 위에 놓여져 있습니다. 굵고 대담한 먹선으로 옷주름을 표현하면서 풍채와 위엄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법法」에서는 「먹墨」에서 보였던 부재와 훼손이 더욱 극단화되어 얼굴은 거의 가려지고 빈 공간으로 강렬한 눈동자만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선비의 말은 법法과 같고 그의 행동은 초연하며 일체의 주저함이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이 강력한 정신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옷 주름의 묘사와 번짐, 그리고 손과 발의 세부묘사를 치밀하게 하였습니다. ● 「빛 1, 2」, 「먹默」, 「법法」, 등에서 보이는 상황은 등에 화살을 맞은 정신성의 인물과 그 정신적 결기를 작품 속에 표현한 것으로 '태양이 빠개지는' 상황에 직면한 정신의 시차(時差)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인과 나와는 정신적인 시차(時差)가 없었으나 그 파국은 그것의 깨짐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사회 그리고 정체성의 훼손이 화가의 작업을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김호석의 대표작 「황희정승(1988)」에 표현된 네 개의 눈은 과거와 현재의 눈이 시차없이 바라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눈, 청백(淸白)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현재를 직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청백의 눈은 백안으로 바뀌는 파국을 맞았습니다. 이 파국에 직면하여 길을 묻고 있는 것이 선승초상입니다.
김호석_빛2_198×96cm_2012

3. 선사(禪師)에게 길을 묻다. ● 김호석은 이러한 정신의 깨짐을 시대를 가로질렀던 선사(禪師)들의 영정을 그리면서 이겨내고자 하였습니다. 먹을 쓰는 인물화가로서 맑고 고결한 인물의 초상을 통해 그 정신의 감응과 사조(寫照)로서 위안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법정스님 초상」은 조선 초상화가 가지는 절제된 필선과 맑고 은은한 색채, 단아한 인물상이 가지는 고고한 긴장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고 기법과 재료에서 전통을 복구하고 새로운 초상을 확립하고 있습니다. 툭 튀어나온 눈두덩과 눈썹, 잔잔한 눈매의 진지한 힘은 그러나 각막의 외곽선을 진하게 하고 동공 주변으로 갈수록 옅게 하여 상대적으로 동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차분한 착색과 안정감 있는 가사(袈裟), 고요한 정관(靜觀)의 기품을 담고 있는 스님의 초상은 근래 들어 본 초상인물 중 단연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이 초상은 밝은 화면에서 나오는 빛의 느낌이 작품의 평면성위에 초월과 신성(神性)의 새로운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스님의 유골 잔해 중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사리를 발라 까실하게 표면을 덮는 효과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얼굴의 점과 주름 표면에 착색되어 자연스럽게 입체화된 평면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성철스님 초상」은 유머와 위트가 섞인 인간미의 선사를 수묵인물화로 그려내었는데 선화풍으로 그려진 이 작품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어 자네왔는가?"라고 말할 것만 같습니다. 불도(佛道)에 당당한 정진으로 물러서지 않는 기백을 보여주었던 선사는 이제 천진한 표정을 짓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둥근 타원형의 강력한 안면 윤곽선과 개성있는 얼굴묘사, 건장한 어깨선을 중심으로 한 대담한 가사 표현은 수묵이기에 더욱 가능한 장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관스님 초상」에서 김호석은 정부와 불교계가 갈등했던 지난 시기 한 사건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총무원장의 차량을 수색하는 과정의 이 장면은 경찰의 무도한 조치에 스님은 뒤로 외면한 채 서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연신 염주를 굴리며 이 얼척이 없는 상황에 망연해 하는 학승이 뒷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 백미는 뒷모습으로 보이는 스님의 두상(頭象)입니다. 정면초상 못지 않는 스님의 뒷모습이 정제되어 있습니다.
김호석_하늘에 눕다_126×111cm_2007

4. 웃다 그리고 깨다 ● 삶의 모순 가운데 웃을 수 있다는 것, 그러한 긴장 가운데 대상을 비판할 수 있는 심리적 거리가 생기는 여유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복잡한 생각을 한편으로는 말로 한편으로는 웃음으로 말하는 능력은 표리관계에 있으며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게 만듭니다. 웃을 수 있기에 인간이고 바닥의 삶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웃음입니다. 김호석의 작품에서 삶에서 찾아낸 웃음들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날숨」은 며느리의 새치를 속아내는 시어머니를 그린 작품입니다. 시어머니는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며느리의 새치를 골라내고 있습니다. 세월을 닮은 손과 주름진 얼굴이 이 서툰 작업에 동참합니다. 며느리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여서 발끝이 오그라들고 흐르는 침을 입 끝으로 빨아들이며 애써 웃음을 참아냅니다. 「날숨 生」에서는 유건을 쓴 채 귀를 맡기는 아버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눈이 침침한 어머님은 가는 눈으로 최대한 집중을 하며 작업을 합니다. 꼭 쥐고 있는 손과 발에서 긴장이 서려있습니다. 인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머니의 의복 표현은 검은 먹으로 처리하여 무게감을 주었습니다. 이것과 다른 역설과 골계의 미가 「鼠 1」, 「鼠 2」의 작품입니다. 쥐에 대한 상징은 탐욕과 민첩함의 대명사이지만 그것이 쥐 수염으로 소용되었을 때 서수필(鼠鬚筆) 되었다는 상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소동파의 아들 소과蘇過의 서수필(鼠鬚筆)이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
2012.05.23 22:12:11 / Good : 549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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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새벽에 동이 트듯, 죽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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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Light










리경展 / LIGYUNG / 莉景 / installation.video.sound 2012_0524 ▶ 2012_0721 / 일요일 휴관






리경_더 많은 빛 more Light_레이저 라이트, 거울, 유리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50501b | 리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24_목요일_06:00pm

주최 / 코리아나미술관 후원 / (주) 코리아나 화장품_서울시_Bread Communications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료 / 일반_3,000원 / 학생_2,000원 / 단체(10인이상)_1,000원 할인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Coreana Museum of Art, space*c 서울 강남구 신사동 627-8번지 Tel. +82.2.547.9177 www.spacec.co.kr






『리경-more Light』는 코리아나미술관이 선정, 후원하는 중진작가 개인전이다. 리경은 스펙터클한 감각적 유희 대신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철학적인 사유의 영역을 건드리는 설치 작업에서 독보적이다. 『more Lightt』에서 작가는 설치, 영상, 사운드로 공간 전체를 에워싸는 대형 설치작품을 통해 유동하는 빛의 공간을 제시한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리경의 설치 작업에서 중요한 의미로 작용한 빛의 개념은 전환되었다. 이전 작업에서의 빛이 보이는 대로 믿어버리는 인간 시선의 불완전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기제이자 어두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빛이었다면, 『more Lightt』에서의 소위 '더 많은 빛'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보여 지고 느껴지는 현상과 신체적 감각에 더욱 주목한 것이다. 정감과 리비도로 충만한 리경의 이질적이고 유동적인 빛의 공간은 인간의 분열적인 상황, 불안이 지배하는 현 시대의 비유이기도 하다.
리경_더 많은 빛 more Light_레이저 라이트, 거울, 유리_2012

네 면에 위치한 거울과 겹겹이 쌓여진 유리들의 반사작용에 의해 녹색의 빛이 연쇄적으로 뻗어나가 끊임없이 확장되는 매트릭스 공간을 만들어낸다. 관객은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빛의 공간속으로 빠져들게 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에서 시선을 고정할 수 없는 분열된 지각체험을 하게 된다. 싸이키델릭한 수많은 광선들이 겹쳐져 다양한 초점을 만들어내며 관람객의 눈을 정처 없이 떠돌게 만든다. 이 작품에서의 빛은 시각적이라기 보다는 촉각적이다. 눈으로 빛을 바라보면서도 신체로 빛을 경험한다. ● 자신의 신체를 침범하기도, 그리고 신체에 의해 빛을 분산하기도 하는, 촉각적인 빛의 공간 속에서 관객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그 불안감은 일차적으로는 안정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무한한 공간감과 한 곳에 시선을 고정시킬 수 없는 멀티 중심화된 지각경험에 의한 것이다. 작품 속에서 신체로 감지되는 이러한 불안감은 작가가 언급하듯 사회 속에 자신의 위치를 규정지을 수 없는 자신의 현 상태와 감정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구조화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현대인의 분열적인 상황의 표상일 수 있다.
리경_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I am telling a lie_레이저 level, haze mist, 영상, 사운드_2012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빛과 연기, 영상과 사운드로 전시장 전체를 감싸는 공감각적인 대형 설치 작품이다. 분홍빛이 감도는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면 붉은 빛의 가느다란 선, 그 선들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문과 벽의 이미지, 공간 전체를 감싸는 모호한 연기와 사운드만이 감지될 뿐이다. 15분에 한번 씩 뿜어 나오는 연기가 붉은 빛의 선에 닿는 순간 빛과 연기는 반응을 일으키며 어느새 가느다랗고 기다란 통로를 만들어낸다. 빛의 통로는 연기가 존재할 때 확연하게 나타나지만, 연기가 사그라지는 순간 시각적인 존재감은 모호해 진다. ● 또 다른 방에 들어서면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만큼 강렬한 빛이 시선을 침범한다. 빛을 뚫고 들어가 반대편 벽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은 중첩된 계단 영상들이다. 광원을 등지고 돌아섰을 때 신체 이미지는 계단 영상에 비추어져 혼성적으로 나타난다.
리경_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I am telling a lie_레이저 level, haze mist, 영상, 사운드_2012

2000년대 초반 이후 리경의 설치 작업에서 빛은 중요한 의미로 작용하였다. 이전 작업 「The True Knowledge of Good and Evil」(2001/2003) 이나 「Seeing is believing, believing is seeing」(2003/2004) 등에서 빛은 보이는 대로 믿어버리는 인간 시선의 불완전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기제이자 어두움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빛이었다. 신적 존재를 염두 해 두고 명상과 성찰을 요구하는 빛으로, 제임스 터렐(James Turrel)이나 울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이 빛을 중심으로 한 설치작업에서 정신적 관조를 이끌어냈던 것과 유사한 맥락이었다. ● 진리와 관념, 신앙과 믿음과도 같은 빛의 의미는 이번 작품에서 전환되었다. 텅 빈 명상적 공간에서 뻗어 나오는 한줄기 빛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소위 '더 많은 빛'(more Light)이다. 절대적인 신앙이나 자기성찰을 촉구하는 빛의 의미가 아니라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보여 지고 느껴지는 신체적 경험에 맞닿아 있는 빛이다. 불변하는 광원(빛)이라기보다는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가려지기도 침범하기도 하는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빛이다.
리경_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I am telling a lie_레이저 level, haze mist, 영상, 사운드_2012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의미를 부여하는 빛은 보이지 않는 관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작가가 가지는 사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이를 통한 작가 자신의 인식과도 맞닿아 있다. 어찌 보면 『more Light』는 절대적인 믿음에 근거하였던 이전 작업의 맥락에서 벗어나 현재 자신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시화한 것이기도 하다. 붉은 빛의 선이 만들어내는 문이나 벽의 이미지, 빛과 연기에 의해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통로는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면서 우리를 통제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표상이다. 빛을 등지고 돌아섰을 때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계단 영상들, 나의 신체와 만나 융합되고 얽혀지는 이미지들은 우리의 시선에 비치는 다양한 현상적 세계이기도 하다. ■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Vol.20120524j | 리경展 / LIGYUNG / 莉景 / installation.video.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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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nd of Evolution - 진화의 땅








박부곤展 / PARKBOOKON / 朴富坤 / photography 2012_0530 ▶ 2012_0605





박부곤_The land-1_C 프린트_120×150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박부곤의 땅, 진행형의 풍경 ● 섬이 있었다. 섬은 바다 한가운데 솟아 막힘없이 세상과 통하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어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육지를 동경하지만 그들은 바다의 삶을 더욱 사랑했다. 거칠고 힘든 대자연과의 사투는 이들에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자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다. 대양을 항해하던 선박들과 바람을 따라 떠도는 새들에게도 이 섬은 집이자 곧 안식처였다. 언제부터 시작된 변화의 열풍인지 모른다. 사방이 엄청난 양의 흙으로 메워지더니 거짓말처럼 바다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순식간에 막혀버린 뱃길처럼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이 섬에 묶이고, 또 떠나갔다.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폭풍우에도 새들은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는다. 바다를 향해 끝없이 뻗은 방조제 위를 질주하는 트럭들의 행렬과 비례해서, 섬은 바다를 떠나 육지에 가 닿는다. 섬 중앙에 상징물처럼 서있던 산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흉하게 무너져 내렸다. 흙과 바위와 나무들도 깍이고, 베이고, 해체되어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섬 집들도 더 이상 밤에 빛을 내지 않는다. 등대도 마침내 외로운 숨을 잃었다. 고요한 밤의 정막마저도 쉼 없이 가동되는 기계의 격한 숨소리에 침식당했다. 이곳은, 새롭게 건설된 도로를 따라 오가는 차량들로 넘쳐난다. 지도상에서 영원히 지워져버린 섬은 가상의 육지위에 떠 있다. ● 국토의 자연환경을 보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가자는 명분 아래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전국을 공사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덕택에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불편함을 감수 할 일은 크게 줄었다. 도로는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생겨났고 농지와 대지들도 하나 같이 반듯한 모양으로 구획 정리되었다. 사람들의 생활공간과 집들도 시멘트 벽돌로 외관을 꾸민 디자인으로 바뀌었으며, 이곳에서 사람들은 일생을 살다가 죽어갔다. 근대화의 진행이 빨랐던 만큼 많은 것들이 지워졌다. 본래의, 당연한, 언제나 그곳에 있어야 했던 가치들이 우리의 기억과 현실에서 망각되어갔다. 가속도가 붙은 발전과 선진화의 열풍은 무서우리만치 거세게 세상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선택과 실행에 대한 일말의 재고와 반성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고향마을은 물에 잠겨버렸고, 거대한 인공 호수만이 과거의 향수를 대신한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대규모의 공공시설 부지를 찾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산을 허물고, 하천과 강을 지우고, 바다와 갯벌을 매립함으로써 인공의 대지가 생겨났다. 언제부터, 얼마만큼의 산, 들, 나무, 하천과 그곳에서 살아가던 존재들이 사라졌는지 명확한 통계 자료조차 구하기가 어렵다. 한적한 변두리로 향할 때마다 일상처럼 들려오는 다이너마이트의 폭발음은 여전히 짜증스럽다.
박부곤_The land-2_C 프린트_120×150cm_2012

『진화의 땅-The Land of Evolution』에서 박부곤이 직면한 현실은 역사의 이행과 파행이 거칠게 충돌하는 진화의 공간이다. 오랜 시간동안 기계의 차가움에 감춰진 인간의 욕망은 자연환경을 생존경쟁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주지하다시피 땅이란 문명건설의 물질적 하부토대이자 삶을 이루는 근원적 요소이다. 따라서 이 사진작업에서 작가가 설정한 땅의 모습은 자연과 도시의 수축과 팽창이 진행되는 가변적 영역인 동시에, 스스로의 통제 기능조차 상실한 현대사회의 폭주가 양산한 병든 징후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 「대지-The Land」 연작은 땅과 그 주변의 변화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객관적인 결과물이다. 이 사진에서 작가가 바라본 땅은 가공할 산업기계의 위력이 남긴 상처투성이의 모습이다. 그러하기에 그가 밤낮으로 개발현장을 떠돌며 기록한 사진들은, 외양적으로는 평온함으로 가장하고 있으나 공격성을 감춘 야생의 이미지라 할 만하다. 하지만 작가는 개발과 파괴의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함에 있어 감정의 억제를 통한 중립적 바라보기 즉, 절제와 초월의 형식성을 선택하고 있다. 동공의 미세한 떨림 조차 억누른 듯한 이 사진들은 역설적으로 세상에 내재된 어떤 폭력성을 누설한다. 무표정한 시선으로 땅의 변화를 조망하고 있는 사진속의 공간은 심지어 비현실적으로 고요하다. 공사장을 분주하게 움직였을 각종 기기와 사람들의 모습, 한 줄기 바람조차도 이 공간 안에서 멈춰 서 있거나 부재한다. 밝은 대낮에 촬영된 이미지가 대부분이란 점에서 이 사진에 재현된 현실의 모습은 오히려 낯설고 공허하게 다가올 뿐이다. 이러한 텅 빈 공간 창출이야말로 대지 위에 팽배한 긴장감을 증폭시키는 가시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부곤_The land-7_C 프린트_120×150cm_2012

「대지,The Land」연작은 외양상 자연 빛이 연출하는 아름다운 컬러사진이다. 「대지2,The Land-2」은 산의 내부에 고여 있는 물과 토사가 뒤섞여서 이질적인 컬러의 조합을 보여주고 있으며, 땅의 절단면을 촬영한 「대지-7,The Land-7」은 붉은 빛이 세상을 강한 인상으로 물들이고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개발현장의 이미지가 담긴 「대지-1,The Land-1」에서도 낭만적인 컬러는 사진 전체에 장식성을 부여한다. 이 사진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컬러는 사실 자연이 토해낸 병든 색이기에, 참혹한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어쩌면 피 빛처럼 강렬한 컬러들로 인해 우리는 상처 난 땅의 표면뿐만 아니라 그 내부와 뼈까지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함으로 이 사진들은 기계와 자연이 연출하고 있는 현대의 비장미이자 묵시록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대지, The Land」연작에서 심미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컬러들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의 본질을 가리고, 위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땅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다양한 지역에서 촬영된 이미지들이 하나의 평면위에 병렬 배치된 「대지, The Land H1-H18」작업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이 프로세스에서 작가는 조각난 땅의 이미지들을 서로 인접한 이미지간의 마주침을 통해 다시 하나의 통일체로 전환시키려한다. 수십 개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공통 선분위에 정렬시키는 순간, 카메라의 투시장치와 같은 초대형의 격자창이 구성된다. 새롭게 탄생한 프레임은 이미지들 간의 반복을 통해 개별적 차이를 상쇄시킨다. 서로 다른 시선의 무질서함도 결국 하나의 시각장안에서 통합되어버린다. 그리고 작가가 구현한 이 초월적 영역에서 자연과 문명의 경계는 서서히 지워지고 멀어진다. 마침내 조각난 땅의 편린들도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덩어리로 복원되고 있음이다.
박부곤_Tracking-1_C 프린트_120×150cm_2012

어두운 밤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밤빛, Urban Light>」연작에서 박부곤의 밤은 잠들기를 거부한다. 좀 더 엄밀히 표현하자면, 이 사진들은 밤이라는 특정 시간대에 촬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둡지가 않다. 오히려 어둠을 수놓은 화려한 인공조명과 각종 존재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이 밤은 더욱 분주하고 활동적이다. 어둠에 지배당한 밤이야말로 대지위에서 실체를 보이지 않는 기계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그러함으로 밤이라는 특정 시공간을 담아내고 있는 이 사진들에는 땅의 표면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하부 구조, 그리고 작동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다. ● 「밤빛, Urban Light」 연작들에서 어둠은 대지위에 생겨난 인공물들이 뿜어내는 빛의 강렬함 속에 제거된다. 이 빛의 향연이야말로 잠들지 않는 밤의 진실을 구체화시키는 시각장치이다. 1930년대 뉴욕 맨하탄을 촬영했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의 밤처럼, 어둠을 밝히는 인공조명은 현대성의 상징이자 밤을 지배하기 시작한 인간의 시대를 표상한다. 박부곤의 사진에서 어둠과 인공 빛의 혼재가 만들어낸 장면들은 육안으로는 결코 지각할 수 없는 세계의 실체와 자연을 잠식해 들어가는 인공기기들의 증식을 암시하고 있다. 「밤빛-1,Urban light-1」에서 푸른빛을 발산하는 아파트가 한적한 변두리의 밤에 홀로 빛나고 있다. 이 거대한 사각의 발광체가 뿜어내는 빛은 기묘하고도 차갑다. 그리고 짙은 코발트색 하늘배경과 대비적으로 화면의 하단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는 「밤빛-3,Urban light-3」작업에서 밤은 비가시적 존재의 현존을 통해 심리적 충격을 유도한다. 짙은 밤안개 속에 드러난 도시와 인공물의 실루엣이 쓸쓸한 정조를 띄는 「밤빛-4,Urban light-4」과 「밤빛-5,Urban light-5」은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처럼 허구와 환상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이 밤 사진들에서 보여지는 신비로운 컬러들은 장시간 노출로 인해 얻어진 우연성의 결과이지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오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다.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형형색색의 컬러들은 대기 중에 산란하는 인공조명과 빛의 누적이 연출하는 현대적 숭고미이다. 특히 웅장한 스케일의 다리 상단부에서 밤하늘을 향해 비춰진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밤빛-2,Urban light-2」에서 밤의 스펙타클은 완성된다. 어둠에 휩싸인 밤하늘을 향해 비춰진 두 줄기 광선은 우주의 섭리에 다가가려 하는 인간들의 열망, 그 끝없는 욕구의 정점을 표상한다. 또한 「밤빛, Urban Light」연작에서 보여지는 박부곤의 밤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어둠에서 더욱 강한 존재감을 표출하는 아파트, 공장, 건축물, 산업시설 등은 밤에도 결코 쉽게 잠들 수 없는 현대인의 밤을 은유하고 있다. 불빛의 화려함에 이끌려 온몸을 불태우는 불나방처럼, 존재를 각인시키는 동시에 사멸에 이르는 밤빛은 어둠속을 외롭게 헤매던 작가의 시선이 매료된 바로 그 빛에 다름 아니다.
박부곤_Tracking-2_C 프린트_120×150cm_2012

한편 작가의 물리적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트래킹, Tracking」작업들은 밤이라는 무형의 캔버스 위를 춤추듯 출렁이는 빛의 궤적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밤빛, Urban light」연작이 장시간 노출을 이용해서 퇴적된 빛의 확산을 통해 대지위에 건설되고 있는 도시의 팽창을 암시하고 있다면, 작가의 물리적 개입이 주된 형식을 구성하는 「트래킹, Tracking」연작은 어둠속에 감춰진 땅의 표면을 재 시각화한다. 이를 위해 작가가 채택한 표현법은 암흑 속을 무질서하게 유영하는 빛의 추적이다. 「트래킹, Tracking」연작에서 작가는 자신의 몸 자국을 검정 형질 위에 새겨 놓고 있다. 기존작업에서 추구하던 관조와 절제의 형식성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작가는 적극적 행위자가 되고 있다. 이사진에는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근원조차 짐작키 어려운 빛의 파동이 어두운 세계 안을 흐르고, 겹쳐지며, 가로 지르기를 반복하고 있다. 어둠에 휩싸인 세상의 표면은 작가의 물리적 이동이 남긴 빛의 궤적을 통해 예측 가능한 영역으로 전환되고 있다. 여기서 암흑지대는 우리의 인식이 다가갈 수 없는 모호한 영역이자 코드화 되지 않은 의미들이 머무는 잠재적 차원이다. 이와 같이 태양의 밝음으로는 결코 지각할 수 없었던 세상의 본성은 방향과 패턴을 벗어난 채 폭주하는 빛의 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박부곤이 남긴 빛 자국은 시간을 육화한다. 기계문명이 가져온 무한 질주의 본능을 밀란 쿤테라는 느림(1995)에서 인간이 육체적 제약을 벗어난 순수한 속도, 그 자체에 몰입하는 엑스터시로 표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트래킹, Tracking」연작에서 작가의 속도는 빛의 속도에 동화되고 있으나, 그 빛은 느리다. 이 빛은 기계와 자연의 빛도 아닌, 한 인간이 만들어낸 빛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신체가 남긴 빛의 궤적은 속도에 대항하는 인간으로서의 유한한 몸을 한정하는 동시에 현실 적응체로서의 신체를 뜻한다. 이 빛의 무질서함은 그 자체로 과잉의 흔적이자, 기계적 배치와 구획으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한 존재의 심장 박동이 밤의 충위에 새긴 거친 파열음이다. 이처럼 작가는 이 세계를 지각함에 있어 수동적 이해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가 빛이 되고 촉각적 요소가 되었다.
박부곤_Urban light-2_C 프린트_120×150cm_2012

『진화의 땅-The Land of Evolution』은 우리나라에서 진행중인 개발사업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카이브적 가치와 더불어서 근원적인 세계로 회귀하려는 한 인간의 고된 여정이 담겨있다. 박부곤의 사진에서 땅이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요소인 동시에 유토피아라는 약속과 전망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물질적 토대를 포함한다. 4년여의 시간동안 작가의 시선에 비춰진 땅의 모습은 개발과정의 반복 속에 원형조차 잊혀져버린 슬픈 초상이다. 땅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는 「대지, The land」와 낯선 밤 풍경이 인상적인 「밤 빛, Urban light」 그리고 추상적인 빛의 궤적을 추적하고 있는 「트레킹, Tracking」 작업에서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어두운 측면, 그 야누스적인 면모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날 모더니스트들이 꿈꿔 온 유토피아 건설은 연속성을 가진 완벽한 모델이라기 보다는 단절과 불연속성, 상이한 속도와 리듬을 가진 불완전한 모습이었다. 작가는 땅이라는 다소 추상적 대상을 통해 개발과 진보의 화려함속에 가려진 배제와 불균형의 그림을 폭로하고 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현대, 발전, 진보의 범주 안으로 세상 모든 가치를 수렴시키지 않아야만 한다. 숲, 바다, 땅, 하늘, 바람의 정령들에게, 그리고 대지의 여신 가이아(Gaia)에게도 이 세계는 스스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가 아니던가. 박부곤의 『진화의 땅-The Land of Evolution』은 현실세계의 변화뿐만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가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대지와 밤과 빛이라는 세상의 근원적 요소들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시원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향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박부곤의 사진에서 매체의 오랜 전통인 기록과 진정성이라는 무거운 책무를 다시 짊어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의 중대함에서 고전적인 사진의 실천방식이 유용한 방법일 수 밖에 없음을 자명한 일이다. 이 세계의 구조와 실체를 밝히려는 작가의 무모한 도전은 헛된 꿈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의 사진은 이미 땅 위에 새겨진 무수한 존재들의 흔적과 대상에의 완전한 몰입으로 점철되어 있다. ■ 박형근
박부곤_Urban light-3_C 프린트_120×150cm_2012




Park Bu-gon's Land, Landscape in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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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이야기








김태균展 / KIMTAEKYUN / 金泰均 / painting 2012_0530 ▶ 2012_0605





김태균_펭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2




초대일시 / 2012_05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더 케이 갤러리 THE K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blog.naver.com/thekgallery





살아간다는 것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황을 매일 마주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상황을 마주쳤을 때 앞서 주춤하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의지하여 해결하고 싶다거나, 되도록 빨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 또한 평범한 인간이므로 앞에서 언급한 심리로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나아가 그러한 상황들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김태균_펭귄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49.5cm_2012

하지만 시간이 지나 상황이 정리되고 해결되었을 때는 의외로 처음에 왜 두려워했는지 생각할 정도로 쉽게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처음 마주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내 경험상에는 많다. 이러한 나의 모습, 혹은 빠르고 새로운 상황에 늘 마주하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자화상을 동물에 의인화 시켜서 나의 작품의 주제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만이 우주적 재난을 대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동물은 자신의 처한 환경과 상황에 의해 발달된 고유 능력이 각 동물의 내· 외형에도 그 특징이 쉽게 나타난다. 펭귄은 이러한 특징을 통해 나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적절하게 구성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볼 수 있기에 나의 작업에 소재로 등장한다.
김태균_펭귄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목탄_116×162cm_2012

펭귄에 대하여 덧붙여 이야기 하자면 펭귄은 조류 과에 속하지만 손에 꼽힐 정도로 날지 못하는 조류에 속한다. 타조나 닭 같은 동물이 하늘을 날지 못하는 조류지만 펭귄에게는 그것들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바다 속의 어류를 먹이로 삼아서 바다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대신 하늘을 날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러한 모습은 생존을 위해서 변화하게 된 모습이며 현대인의 자화상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나에게는 펭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외형적, 그리고 내형적인 모습들이 매력으로 다가 왔다. 이것은 우리가 한 인간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한 모습이나 자아에 대한 정체성 문제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소재라고 판단된다.
김태균_펭귄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2

펭귄은 나의 작업에서 여러 도구를 과장되게 착용을 하고 있다. 특히 물안경과 산소호흡기, 오리발 같은 수영을 하는데 쓰이는 수영도구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물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펭귄에게 불필요한 도구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물안경과 산소호흡기, 오리발 혹은 전혀 다른 도구들로 펭귄 스스로가 바다 수영에 대비하여 완벽하게 준비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모습은 바보스럽게 표현된다. 이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며 나의 모습이다.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아에 대한 믿음이 없이 방황하며 불안해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나아가 나 자신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하는 것인가? 에 대한 사춘기적 질문이지만 해답이 없는 삶의 질문을 나에게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 것이다. ■ 김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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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ony-addicted






임안나展 / LIMANNA / 林安羅 / photography 2012_0531 ▶ 2012_0711 / 월,공휴일 휴관




임안나_Last Scene #6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60×12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25i | 임안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화~금_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 월,공휴일 휴관

진화랑 JEAN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7-35번지 Tel. +82.2.738.7570 www.jeanart.net




「불편한 아름다움」아이러니의 극치 – 전쟁과 여성 ● 무엇인가 은폐되어야 한다면 그에 대한 환타지는 커지게 마련이다. 억압된 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최대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전쟁은 인간의 부조리함과 환타지가 최적화된 영역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파괴가 자행되고, 두려워하면서도 잔인함이 행해지는 전쟁은 아이러니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전쟁 속 여성의 존재는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성은 전쟁에서 보호되어야 할 연약한 존재이자 치유를 돕는 위안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성적 희생양으로 파괴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것이 이미 익숙한 내용이라는 느낌자체가 이 아이러니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 임안나의 작업은 인간의 부조리함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2011년 선보였던「Restructure of Climax」와「Romantic soldiers」시리즈는 전쟁의 아이러니함에 대한 질문의 시작이었고, 그 연장선에서 전개된 또 하나의 갈래가 바로 여성과 전쟁의 아이러니에 주목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꽃, 거울, 가면, 새장, 빨간구두 등 여성성을 드러내는 대상을 등장시킨 작품들로 이뤄진다. 임안나가 말하고자 하는 여성성이란 파괴, 거칠음과 반대되는 보호, 모성애, 치유, 부드러움 등을 포괄한다. ● 가면은 자신의 육체내지 사회적 성취욕을 드러내는 것을 억압받고, 진정한 자아를 가려야만 했던 여성의 모습을 상기시키거나, 전쟁에서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여성이 성적 노예가 되어야 했던 이면을 은폐하는 도구로 비유될 수 있다. 가면으로 보장되는 익명성은 여성개개인의 상처를 가려주는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임안나의 화면에서 가면은 여성의 부드러움과 파괴되기 쉬운 연약함을 상징하는 깃털과 함께 구성되는데 그 속에 병정들이 나타남으로써 이 오브제들이 보호받는 것 같으면서도 파괴당하는 것 같기도 한 분위기가 아이러니한 느낌을 유발한다.
임안나_Last Scene #5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120×180cm_2012
임안나_Paintball #2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100×150cm_2012

하얀 새장이 깃털 위에 알을 품고 있는 작품에서 또한 새장 안과 바깥에 날아다니는 군용기들로 인해 대상물이 보호되는 것인지 파괴되는 것인지 모호하고, 파괴적 내용을 부드럽고 정적으로 묘사하는 점이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거울과 창 시리즈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공간의 분위기는 아름다운 여성이 거울을 보러 다가올 것만 같은 꿈결 같은 상황을 연상시키는데 실상 파괴적 성향의 전투기가 거울앞을 차지하고 있다. 총을 쏘는 순간 거울이 깨지면서 자신의 모습도 깨져버린다는 점을 상상하면 결국 상대와 내가 서로 겨누는 총 앞에 함께 파괴되는 전쟁의 은폐된 진실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명쾌한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 꽃은 아름다움으로 인간의 영혼에 위안을 주지만 쉽게 시들고 죽는다는 점에서 전쟁 속 여성을 비유하는 대상으로 등장했다. 임안나의 작품에서 묘사된 꽃들은 모두 맑고 찬란한(glorious) 미의 향기를 지녔다. 역시 함부로 만지기엔 그 영롱한 아름다움이 쉽게 훼손될 듯 한데 누구도 그것을 원치 않을 것만 같다. 병정들은 꽃의 잎사귀 하나도 다치지 않게 지켜줄 것 같고, 전체적인 화면의 분위기는 평화롭고 차분하다. 하지만 곧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격을 상상하면 무참히 깨져버릴 모든 것에 허무함과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 이와 같이 작품의 요소 요소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내용적 맥락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극도의 미와 추(beauty and ugliness)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아이러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영상은 미 인데 그 이면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임안나_Paintball #4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80×120cm_2012
임안나_Paintball #7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80×120cm_2012

임안나 작품에서의 아이러니는 화면 구성의 대비감을 통해서 한층 더 부각된다. 대상을 지키는 병정들이 도리어 턱없이 작은 형상을 함으로써 누가 누구를 지키는 것인지 모순되어 보일 뿐 아니라 실제의 생생한 사물과 공간으로 인해 현실감이 있으면서도 한편 몽환적인 영화 속 환타지의 세계를 보는 것 같을 주는 점도 아이러니다. 사물 크기의 대비와 더불어 색감의 대비는 환타지적 효과를 배가시키는데 특히, 가면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형광 빛은 대비효과를 흥미롭게 연출한 예이다. ● 임안나의 작품에서 아이러니한 요소를 찾아내는 것은 작품을 유희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방법이며 그것을 찾는 동안 우리는 그 속에 이미 빠져든다. 아이러니에 중독된(Irony- addicted) 순간!이다. ● 임안나의 작품이 주는 유희의 스펙트럼은 넓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금지된 욕망 내지 부조리에 빠져서 즐겨보기도 하고 내 자신을 점검해보기도 하며 비평적 시각도 가져볼 수 있다. 작품만이 줄 수 있는 특권을 철저히 누려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래본다. ■ 신민
임안나_monologue #6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70×70cm_2012
임안나_monologue #1_파인 아트 페이퍼에 프린트_70×70cm_2012



아이러니, 영원한 한계이자 일탈 ● 인간은 누구나 생명을 얻음과 동시에 죽음을 얻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종말을 향한다는 최고의 아이러니(irony)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생일은 자신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인 동시에 죽음에 더 가까워졌음을 확인하는 날이다. 공포와 절망에 함몰될 즈음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있기에 생명도 빛을 발한다는 또 다른 아이러니가 실낱같은 희망을 던져준다. 인간은 이내 자신의 종말을 망각하고 욕망에 사로잡힌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허무를 잊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더욱 더 욕망한다. 과도한 욕망은 허상(虛像)을 만들어내고 인간은 신기루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친다. 허상(虛想)에 매몰된 인간은 지나친 자존감에 휩싸여 궤변을 늘어놓고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또 다른 아이러니를 생산한다. 인간은 모두 아이러니에 중독된(irony addicted) 것처럼 보인다. 태생적으로 아이러니한 존재가 만든 세상이 부조리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 여기, 지독한 아이러니의 제국을 창조하는 작가가 있다. 임안나는 아이러니에 중독된 세상이라는 대(大)주제 안에서 아이러니가 극대화되고 중첩되면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는지 프라 모델(plastic model)이 등장하는 역할극을 통해 보여준다. 이를 위해 작가는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그리고 이 둘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이고 극단적인 아이러니로 규정하고 역할극의 소(小)주제로 채택한다. 그리고 이 모두가 인간 욕망의 허구성(虛構性)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극도로 정제된 인공적인 미장센(Mise-en-Scène)을 연출한다. ● 임안나가 아이러니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소재인 인형-프라 모델-, 거울, 꽃, 가면은 그 자체로 모순성을 내포하는 것들이다. 인형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생명이 없고, 거울은 마주하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반사시켜 보여주지만 가상(假象)을 제공할 뿐이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지만 이내 시들어 버려 바니타스(vanitas)의 상징물이며, 가면은 본질을 은폐시키는 수단인 동시에 그것을 외부로부터 보호해주는 방패이기도 하다. ● 이번 역할극의 주인공인 프라 모델들은 「마지막 장면 Last Scene」과 「페인트볼 Paintball」 연작에서 꽃과 가면을 배경으로 전쟁 중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사진에서는 공격하거나 전진하는 자세이고 또 다른 사진에서는 방어하거나 숨는 자세이다. 전쟁은 공격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방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국가를 침입하고 수탈하는 것도 전쟁이요, 자신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방어하는 것도 전쟁이다. 전쟁에는 자신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다른 인간들의 자유와 존엄성을 파괴해야 한다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또한 전쟁은 인간의 근본적 아이러니-삶과 죽음-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 잔혹한 사건이다. 전쟁에는 생존의 욕구와 죽음의 운명이 공존한다. 그 속에서 인류는 인간의 전지전능함을 믿는 사람들과 생존 과정에서 무기력함을 경험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리고 종국에는 인간을 향한 신뢰의 가능성이 파괴되어 인간이 어떻게 인간에게 이러한 악행을 벌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임안나는 최근에 제작된 휴머니즘(humanism) 전쟁 영화들을 예로 든다. 전쟁의 현장 깊숙이 들어가면 어디에도 절대적인 악(惡)은 존재하지 않으며, 전쟁은 평범한(banal) 주체에 의해 주도된다는 것이 작가의 논리이다. 단순한 선악이분법으로 전쟁의 주체와 객체를 획일화시켜서는 안 되며 보다 섬세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에 따르면 전쟁에 가담하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본래부터 악하지 않으며 도덕적 의미를 결여하지도 않았고 악마, 광신자, 사디스트(sadist)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양심이 집단적으로 실종된 상황에서 자신의 행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반성과 사유(thinking)를 포기했을 뿐이다. 사유하는 존재인 인간이 사유를 포기하는 모순적인 상황에서 전쟁과 같은 거대한 악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사회 구조가 자신에게 주입하는 당위성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시행하지 않은 채 무의미하게 동조하거나 이를 방관하는 것이다. 자신의 악행을 악행으로 보지 않고 이행해야 하는 의무와 동일시하는 태도는 세계를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만 이해하고 수용할 뿐, 행위의 영향력 안에 있는 타인의 관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난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전쟁의 행위가 옳지 않다고 비판하면서도 순응한다. 자신의 역할과 자리에서 이탈할 능력과 용기가 부재하는 것이다. ● 바로 이처럼 무책임하고 무비판적인 악행의 주체를 상징하기 위해 임안나는 프라 모델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다. 프라 모델은 외부에서 동력이 가해지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정지된 물체이다. 인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존재와 의식의 관계를 비유하는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운명에 좌우되는 수동적 존재, 영혼이 없는 존재, 기계적인 대상을 비유해왔다. 자력으로는 공격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무능한 군대인 프라 모델들은 자신만의 지평에 갇혀 타성적인 삶을 영위하는 전쟁의 가해자들을 상징하기에 훌륭하다. ● 전쟁에서는 모두가 피해자이다. 적을 향하는 것으로 여겼던 창(spear)이 사실은 나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는 비극적 진실은 「모놀로그 Monologue」 연작에서 확인된다. 이 연작에서 탱크와 비행기 프라 모델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조준하고 있거나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포(砲)가 발사되면 부서지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결국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피해자로 귀결되는 1인 2역의 비극이 완성되는 것이다. 한편 거울을 바라보는 프라 모델들은 나르시스(Narcissus)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취해 연못에 빠져 죽었듯이 전쟁의 주동자가 자신의 모습에 취해 스스로 파멸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거울을 마주보는 상황은 낯익은 풍경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여성 누드화의 스테레오 타입(stereo type) 중 하나이다. 남성 미술가와 감상자들은 자신들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감상하고 그것에 취해 있는 상황을 연출했고, 여성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빠진 허황된 존재로 규정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상을 쫓은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들이었다. ● 전쟁의 허상은 「페인트볼」 연작에서도 찾아진다. 이 연작에 등장하는 가면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감추고 보호하거나, 원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기 위해 얼굴에 덧씌우는 도구이다. 임안나는 페르소나(persona)를 상징하기 위해 가면을 사용한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사회의 요구에 맞게 자신의 모습을 바꿔나가는 사유하지 않는 껍데기뿐인 사람들을 암시한다. 또한 영웅주의와 자아 도취, 허황된 욕망을 이루기 위해 생산된 아이러니들을 은폐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가면은 전쟁이 소수의 권력에 의해 연출된 가면무도회이자 연극임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가면이 이렇게 은폐의 부정적 의미만을 담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가면은 은폐와 보호라는 양가성을 갖는다. 가면은 획일화된 가치 체계에 맞서서 개인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보호 장치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이 가신 뒤에는 언제나 가면 뒤에 숨겨졌던 선(善)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악이 평범한 만큼 선도 평범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전쟁은 여성에게도 정복의 대상이자 보호의 대상, 남성성을 자극하여 참전을 유도하는 섹스 심벌(sex symbol)이자 전쟁의 상흔을 치유시키는 뮤즈(muse)라는 모순된 페르소나를 부여한다. 임안나는 전쟁과 가부장제의 주인공으로서 존재해온 남성을 재현할 때 프라 모델로 대체했듯이 여성 역시 꽃이나 노즈 아트(nose art)의 핀-업 걸(pin-up girl) 이미지로 대체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은 언제나 지배되는 자연이었고 생산하는 모성이었으며 보편적 아름다움의 상징인 동시에 쉽게 시드는 허망한 꽃이었다. 그녀들은 오직 남성에 의해 재현된 허구적 이미지(image)로서만 존재해 왔다. ● 사실 역사 속에서 여성의 육체는 언제나 전쟁터였다. 여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수탈의 대상이자 안식의 도구라는 아이러니에 지배받아왔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침략하고, 지배하고, 무력화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남성들은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으며 여성에 의해 양육되었다. 여성은 주체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동시에 죽음까지 부여한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이지만 남성과는 다른 인간이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불명확한 속성 때문에 여성은 인간사에 있어 최고의 역설을 제공하는 미스터리(mystery)한 존재가 되었다. 이에 남성은 여성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업신여기고, 숭배하는 동시에 혐오하며, 지배하고자 하는 동시에 치유 받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허무한 꿈이며 신기루이다. 결국 모든 것은 욕망의 허상에 불과하다. ● 이즈음에서 우리는 작가가 인간사를 둘러싼 아이러니에 관한 비판이나 해결책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작가는 그저 세계를 축소시켜 보여주는 연극 무대를 연출할 뿐이며 관람자가 연극에 몰입하든, 거리를 두고 관찰하든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아이러니가 가진 두 가지 의미로 설명 가능하다. 첫째, 아이러니는 모순이나 부조화의 상황을 뜻한다. 둘째, 그것은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실제 의도를 감추고 그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말하는 수사법, 그 안에 중요한 진리를 함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반어법을 뜻한다. 임안나의 작업에는 두 가지 의미의 아이러니가 함께 한다. 즉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상, 그러한 세계상의 전복을 꿈꾸는 환상적 일탈로서의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것이다. 작가는 소크라테스(Socrates)가 대화 상대자의 무지(無知)를 깨닫게 하기 위해 아이러니를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그것은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것, 정답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저 모순적인 세상을 인형극으로 보여주어 관람자 스스로 모순의 세계상을 깨닫고 해답을 끌어내도록 유도할 뿐이다. ● 아이러니한 세상을 아이러니의 수사법으로 담아내는 임안나는 인간의 대체물들을 인공적인 공간에 배치하고 그들에게 가상의 전쟁이라는 역할극을 맡김으로써 최종적으로 상상력이 발휘되는 판타지(fantasy)의 시공간을 제공한다. 현실에서 불가해한 것도 상상의 세계에서는 용납 가능하기에 우리는 편중되어 있는 관점을 수정하고 판단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들을 고찰할 수 있게 된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세상을 경험하는 것,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용이해진다. 타인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위치에 서 보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할 수 있는 포용의 자세는 모순과 부조리를 넘어서는 첫 걸음이 된다. ● 오늘도 아이러니에 중독된 인간들은 살기 위해 공격하고 사랑하며, 저항하고 용서한다. 수많은 개인들과 수많은 집단들이 만들어내는 시작과 끝, 생성과 소멸, 기억과 망각, 상처와 치유 같은 역설의 이중주를 통해 역사는 건조(建造)되고 파괴되며 재구축된다. ■ 이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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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ecific Site




황정희展 / HWANGJEONGHEE / 黃晶熙 / painting 2012_0530 ▶ 2012_0610



황정희_The Specific Site 6 - Cafe Cloud 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16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06g | 황정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30_수요일_05:00pm

갤러리 도올 초대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삼청로 87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리얼리티와 '장소성'을 통한 삶의 회화적 표현 ● 황정희의 회화painting세계는 현실적이면서 내적인, 동시에 무한을 동경하는 침묵의 공간을 구축하려는 작업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무엇보다 그는 창조적 상상력을 중요시 한다. 특히 회화에서 '특정 장소성'specific site을 강조하고 있는 그의 독자적 해석과 내밀한 기록의 일상적 표현으로 투명한 효과의 조형성, 그리고 사실성reality으로 이미지의 사실적 묘사와 삶의 의미를 담는 회화적 은유metamorphose는 그의 가장 중요한 시각적 조형언어가 된다.
황정희_The Specific Site 3 - Cafe Sukara_하드보드에 콘테, 아크릴채색_90×120cm_2012
황정희_The Specific Site 5 - Coffee Smith_하드보드에 콘테, 아크릴채색_120×90cm_2012

그의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는 햇살 가득한 수영장과 물 위에 비친 파라솔, 그리고 실내의 의자들과 거리의 풍경 등, 빛과 그림자 속에 잠겨있는 듯 정지된 일상의 순간들이다. 소재가 되는 실내 수영장은 푸른색의 물기를 머금고 있으며, 흰 벽과 의자만이 그려진 실내정경은 주인공이 익명의 사물들이다. 작품에서 독립적인 개개의 사물들은 밝음이나 어둠 속에 갇혀 정지된 상태를 보여준다. 피아노 연주자가 있는 실내 풍경이나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거리 풍경도 느낌은 같다. 물 위나, 물 속, 의자, 거리, 가로수, 사람들, 빛과 그림자 등 모두 무언가에 갇혀 움직임이 없다. 작가는 숨이 멈추듯 정지된 이곳을 자기만의 세계를 담는 회화적 '특정 장소'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주제와 내용적 측면에서 장소성은 매우 중요하다. 그려진 형상의 이미지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보이는 그대로의 현실적 장소이며, 또 하나는 비현실적인 장소들로 추상적 삶의 이야기이다. 빛과 그림자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킨 이미지들은 수영장과 거리, 실내의 모습으로 단순하며, 정지된 시간의 흔적처럼 우리의 시선과 생각을 붙잡아 둔다. 그가 선택한 소재들은 단편적이며,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것을 작가는 일상의 평범한 장소로 기록하면서 나아가 그의 말처럼 '삶의 압축'이라는 회화적 과정으로 그 의미를 담고자 한다. 수영장과 거리의 풍경, 인물들, 그리고 의자와 같은 평범한 사물들은 일차적 사진 작업과 이미지 필터링의 회화적 과정을 통해 '삶'이라는 특정 장소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근작에서도 장소성 문제는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장소성이란 "회화를 매체로서의 공간보다 하나의 장field으로 파악하고 특정사건이 진행되는 곳"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회화란 결국 "우연과 물질, 행위의 흔적, 그리고 표면은 사건의 현장으로 '장소'라는 것"이다. 특정 장소뿐만 아니라 삶의 의미 탐구로 이미지의 장소성을 언급한다.
황정희_The Specific Site 2-Swimming Poo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90cm_2011
황정희_The Specific Site 4 - Hyatt Lobby_하드보드에 아크릴채색_90×120cm_2012

한편 장소성의 해석과 함께 그의 회화적 조형언어로 주목되는 것은 사실성이라는 리얼리티 문제이다. 그는 회화의 규범적인 것, 즉 평면적 공간에 사실적 묘사나 이야기의 리얼리티에 주목한다. 일상의 기록물처럼 풍경의 단색조 작업과 평면화시킨 세부 묘사는 사물의 실재감을 돋보이게 한다. 이러한 사실성은 리얼리즘의 전통적 양식을 계승하는 동시에 신사실주의 개념을 도입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형상을 입체적이 아닌 평면적으로 묘사하면서 반복적 선묘를 통한 구조적 공간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평면적 회화가 삶을 그리는 공간의 작업으로 변하면서 장소성과 함께 새로운 리얼리티 표현으로의 변신이다. 사실성의 실험적 표현은 정적인 느낌으로 정지된 화면과 침묵의 공간을 탄생시키며, 회화적 리얼리티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삶의 표현 과정으로 개체와 개인성이 강조되는 모더니스트의 태도이다. 일기의 내밀함을 그려내듯 자기 환원적 회화는 평면성과 구조적 공간을 갖추게 된다. 리얼리티의 현실적 풍경과 사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이 무엇인가보다 어떤 사건,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연극적 풍경으로 보는 사람인 '나'를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마치 하나의 연극처럼 그의 회화는 무대가 바뀌듯 자연스러운 변화를 갖는다. 표백 처리된 색채와 형태를 통해 그는 미의 고전적 가치를 보여주며, 나아가 장식성과 함께 직관에 의한 감각적 표현으로 리얼리티의 탈출구를 모색한다. 직관의 미적 가치판단은 화가의 무책임에서 벗어난다. 작품을 보는 우리 역시 보는 '나'로 하여금 판단을 시도하게 된다. 회화적 가치로 이미지와 평면의 구조적 공간 구성, 그리고 삶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작가의 의지는 미적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그의 그림은 결코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정제된 풍경과 사물의 표현이 점점 더 세련됨과 우아함으로 매혹적으로 변화한다. 그렇다고 장식적 기교나 화려함에 빠지며 자만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작가적 고뇌를 담는 빛과 그림자의 대립적 효과를 살려내면서 밝은 빛이 주도하는 명암을 통해 빠른 시간의 혼란이 거친 후 고요의 정적인 세계가 돋보인다. 또한 회화적 특성으로 언급되는 장소성site와 사실성reality, 은유metamorphose는 사색하는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 내며, 나아가 그 속에서 관객인 감상자는 속삭임과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일상의 친숙함 속에 낯 설은 표정을 그리며, 나아가 순간적 포착의 사진 같은 리얼리티로 풍요와 금욕적인 삶의 회화적 표현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그의 작가적 상상력에 공감을 하면서 나아가 황정희의 또 다른 미적 모험을 기대하게 된다. ■ 유재길
황정희_The Specific Site 1-Swimming Poo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95cm_2012
황정희_The Specific Site 7 - Robson St. Vancou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20×90cm_2011


Pictorial Expression of life through the Reality and 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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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6 15:52:59 / Good : 454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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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e of City
















이윤기展 / LEEYOONKEE / 李潤基 / photography 2012_0601 ▶ 2012_0614 / 일요일 휴관









이윤기_The Face of City#01_C 프린트_20×24inch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브레송 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충무로2가 고려빌딩 B1 Tel. +82.2.2269.2613 cafe.daum.net/gallerybresson









도시의 얼굴 ● 도시를 촬영한 사진들을 단순하게 분류해 보면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도시에 거주하는 인간들의 관계를 묘사한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도시의 경관을 찍은 것이다. 19세기 나폴레옹 3세의 명을 받아 오래된 집들이 즐비한 곳이 새로운 시가지로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했던 샤를 마르빌Charles Marville 의 도시 경관 작업은 외젠 아트제Eugene Atget 에 의해 꽃을 피운다. 30년 동안 파리를 배회하며 촬영했던 아트제의 사진은 비록 도큐먼트이지만, 기록이라고 하는 행위를 철저히 함으로써 기록이라는 그 목적 자체를 초월해 버렸던 사진이다. 아트제의 사진에 찍힌 것은 옛 파리의 외관뿐만이 아니라 그곳의 사진 아우라였다면 오늘날 도시의 경관을 찍는 사진가들은 도시의 아우라 대신에 끊임없이 변모하는 시공간의 뒤섞임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서울만큼 변화 속도가 빠른 도시가 또 있을까? 순식간에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이 세워지는 오로지 자본의 논리만이 공간을 지배하는 서울은 역동적이고 그만큼 새롭고 낯설게 다가온다.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해 추억하는 것이 힘들다.
이윤기_The Face of City#02_C 프린트_20×24inch_2012
이윤기_The Face of City#03_C 프린트_20×24inch_2012
이윤기_The Face of City#04_C 프린트_20×24inch_2012

현대의 대다수 예술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형성된 대도시를 실험 무대로 삼아 전개되어 왔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창조물이 도시라고 하듯이 자연의 물리적 위협과 편리성을 위해 형성된 도시가 공업과 기술 발전의 대명사인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팽창과 맞물려 발전하면서 사회, 문화적 모든 상황들이 집중되는 거대장소로 변모하였다. 도시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소였고 다양한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양성과 집중은 도시가 비인간적인 특징들 - 익명성, 고립, 소외, 밀집, 속도 - 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윤기 작가 역시 도시의 매혹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도시는 비인간적이지도 않고 낯선 이방인의 공간도 아니다. 오히려 매혹적인 대상이다. 이윤기는 벤야민이 지칭한 도시의 산책자(flanuer)인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바라본 산책자는 거리의 존재이며 군중 속의 개인이다. 산업화된 도시의 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면서 빌딩, 카페, 상점들을 관찰하였듯이 이윤기 역시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며 도시를 찍는다. 지하철을 주요 이동수단으로 삼아 지상의 건축물을 찍는다. 거리를 거닐며 그 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도시의 평범한 모습들, 너무나 친숙하여 의식하지 못했던 낯익은 도시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어 엄정하면서도 정감어린 시선으로 사진에 담는다.
이윤기_The Face of City#05_C 프린트_20×24inch_2012
이윤기_The Face of City#06_C 프린트_16×11inch_2012
이윤기_The Face of City#07_C 프린트_16×11inch_2012

그에게 있어 도시의 건축물들은 무미건조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총체적 집합체이다. 그래서 사진 속의 건축물이 빚어내는 다양한 생김새는 도시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 얼굴에서 인간이 만든 문명의 다양한 욕망이 빚어낸 표정을 찾아 사진에 담아내고 있다. 도시인의 삶과 욕망, 고립, 단절 등 사회에 얽힌 숨겨진 다양한 표정이 담겨져 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도시의 다양한 표정을 빛으로 해석하고 엄격한 수평선과 수직선, 그리고 이들이 교차하는 선이 만드는 기하학적 형태를 통해 건축물의 표정을 담아낸다. 잘 정돈된 수평과 수직의 화면 구조와 빛과 그림자의 기본 요소를 활용한 사진에서 이윤기의 도시적 감성이 잘 들어나고 있다. ■ 김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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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계: 알레고리
















송민규展 / SONGMINGYU / 宋旼奎 / painting 2012_0601 ▶ 2012_0622 / 월요일, 6월6일 휴관









송민규_Study for Revenge 13_종이에 수채_30×2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29i | 송민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0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6월6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0길 4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갑옷을 벗어 던진 후의 고해성사 ● 대뜸 그는 힘을 빼고 드로잉을 그리고 있다 했다. 첫 개인전에서는 내러티브가 있는 드로잉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사회의 각종 표피적인 구호들을 담은 회화를 보여주었던 그이다. 다시 그간 갈고 닦은 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할 차례가 되었는데, 힘을 빼고 그리고 있다니 예상 밖의 답변에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다. "미술은 내공의 문제"라는 야심만만한 제목(정확히 말하면 부제)의 전시를 보여주었던 그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는 덧붙인다. 그간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자신이 그려왔고, 그리고 있는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자신의 작업이 무언가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 보였다 했다. 여기에서 이번 전시 작품의 대략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복수심에 기원을 둔, 힘을 빼고 그린 드로잉. 그런데 힘을 빼고 하는 복수라니 복수치고는 좀 이상한 복수이다. ● 성공적인 복수를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옛말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百戰不殆)고 했던가. 복수의 칼날을 겨누어야 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생채기를 남긴 특정 개인, 단체 또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복수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알았으니 이제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복수를 꾀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가능한 한 자신을 상대보다 더 강하게 단련시키고 무장해야 마땅하다. '좋은' 작품이 미술가인 그에게 힘을 실어줄 갑옷이 될 터이다. 그런데 그는 도리어 그 갑옷마저도 벗어 던지겠다고 한다. 그 갑옷이 자신이 입고 싶어 입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그 이유이다. 대체 그 갑옷이 어떠하길래.
송민규_89°-1993-02_종이에 펜, 수채_31×24cm_2012
송민규_89°-1993-03_종이에 펜, 수채_45×35cm_2012

그는 내러티브, 촌철살인, 이면을 '콕' 찔러주는 은유나 비유 같은 장치들을 갖춘 작업이 '좋은' 작업이라고 학습 받아왔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그는 그 가르침을 꽤나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왔다. 그런데 영 불편했다. 매일매일 일기 쓰듯 그려나간 자신의 드로잉에 반드시 그렇게 거창한 무언가를 주입해야만 하는 것일까. 촌철살인적인 그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이면을 집어 주는 그 무엇이 없다 하더라도 '좋은' 작품일 수는 없는 것인가. 이 의심과 회의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해주던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누르던 그 갑옷을 벗어 던지고 어깨에 잔뜩 든 힘을 툭 내려놓기로 한다. ● 갑옷을 벗고 힘을 빼고 나니 남은 것은 혈혈단신 그 자신뿐이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무엇이 남아있는지를 찬찬히 살펴본다. 남겨진 것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이고,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얻는 즐거움과 재미, 그리고 그리기에 대한 고뇌 그뿐이다. 지난날 경험했던 부당함, 억울함 등 미해결 상태의 해묵은 상처들이 비어져 나와 비정형의 흘러내리는 붓질과 풀어헤쳐진 뇌와 같은 주름진 덩어리들에 스며들고(Study for Revenge), 트라우마의 경험이 발생했던 장소가 간결한 선과 면에 단속적으로 배어 나온다(89°-1993-01~04, 세 가지 선택). 거기에는 내러티브도 없고, 이면을 들추어내는 날카로운 면모도 없다. 다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 녹록지 않지만 그저 좋을 뿐이다. 그는 이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펜과 붓을 놀리게 하는 원동력임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송민규_Operation tool 12_종이에 수채_30×21cm_2012
송민규_Study for Revenge 18_종이에 수채_26×36cm_2012
송민규_Study for Revenge 19_종이에 수채_26×36cm_2012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안 그는 이제 출발선 앞에 새롭게 서있다. 어쩌면 그는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나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꾸밈없이 적어나간 일기처럼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과 느낌과 심상을 마음 가는 대로 그려나간 드로잉들로 감행하는 그의 복수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그리고 그 드로잉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 될지는 꽤나 긴 레이스를 펼친 후에나 판가름 날 것이다. 기억해두시라. 그 지난한 레이스를 펼칠 그가 바로 작가 송민규라는 것을. ■ 주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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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미展 / OHSOONMI / 吳順美 / installation 2012_0530 ▶ 2012_0612








오순미_Cosmos Fractal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순미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덕원갤러리 DUK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82.2.723.7771~2 www.dukwongallery.co.kr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난 과거와 펼쳐질 미래에 대해 긴장하며, 또한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의 대립 구조 속에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우리 모두 별다를 것 없다. 인간들은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선택해야 하며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Chaos Fractal에 들어서면 원과 정방형의 표식이 거울 면 양쪽으로 새겨진 거울 면에서 서로 다른 영상이 흘러나온다. 상하좌우가 거울로 둘러싸인 카오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이 공간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영상과 관객의 움직이는 상으로 인해 혼돈된 공간을 만들어 내지만 프랙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양사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보면 이것은 원형의 하늘 아래 사각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원은 양을 상징하며 자연과 우주를 나타내고 사각은 음을 상징하며 인공물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이 표식들은 하나의 만물의 조화를 이루며 다채로운 의미를 포함한 일종의 우주도 라고 할 수 있다.
오순미_Cosmos Fractal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이 작품의 지나 6면체의 거울로 이루어진 공간에 다다르게 된다. 관객들은 유한하고 감각적인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상적인 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무한공간을 제시한다. 이 공간 속에 새겨진 표식들은 기본 도형인 원과 정방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서와 조화가 있는 우주의 오묘한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투명하게 표현된 표식들은 내, 외면의 세계를 넘나드는 도구이기도 하다. 거울에 새겨진 정방형의 형태는 음의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여성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이(理)의 세계이며 물질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기호의 중심부에는 사각을 중심으로 하여 원의 형상을 이루는 사각형들이 방사형으로 배치하며, 그 바깥쪽에는 더욱 작은 사각들을 묘사하게 된다. 정방향의 기호가 여성적인 원리에 의한 이(理)의 세계를 표방한 것이라면 원의 기호는 남성적 원리에 의한 지(智)의 세계, 정신적 세계를 표방한 것이다. 이는 정방형 기호와는 구도적인 면에서 대립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표식의 중심부에는 원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가 사각의 형상을 이루는 원형들이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더욱 작은 원들을 묘사하게 된다. 이 두 개의 표식을 종합하여 이(理)와 지(智) 즉 물질적, 정신적 세계를 통합한 또 하나의 표식이 새겨진다. 각각의 원의 가장자리에는 3개의 큰 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에 4방의 문(門)의 텍스트로 이루어진 형상이 묘사되어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門)을 상징하는 하고 있다. 우리는 Cosmos Fractal에서 우리가 가질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끝을 볼 수 없는 무한함은 항상 우리의 곁에서 존재하고 있으며, 어떠한 물음도 어떠한 대답도 존재하지 않는 고차원적인 자기의식의 세계 속에서 빠져들 것이다. ■ 오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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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라는 사물 Familiar AKA Object












김재범展 / KIMJAEBUM / 金宰範 / photography 2012_0531 ▶ 2012_0703







김재범_Marry me_C 프린트_150×12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709b | 김재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31_목요일_06:00pm

후원 / (재)송은문화재단_금천예술공장

송은 아트큐브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송은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입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잃어버린 기억, 잊혀진 사건들 ● 우리는 무분별한 폭력 속에 노출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의 폭력에는 이미 감각을 잃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 비단 폭력뿐만이 아니라, 무차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수많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건들은 과거의 형태가 되어 우리 의식 속에서 잊혀져 간다.
김재범_Munich_C 프린트_100×177cm_2012
김재범_Baby shower_C 프린트_120×165cm_2012

작가 김재범은 국내외에서 일어났던 사건?사고를 한 장의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보는 이들에게 잊혀져 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업을 한다. 특히 작가가 주목하는 부분은 사건의 본질이다. 우리가 매체에서 접하게 되는 수많은 사진이나 영상은 폭력이 행해지는 당시의 상황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들은 시각적 임팩트가 너무나 강해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사건의 본질 자체에 대하여 생각을 할 수 없게 한다. 김재범은 결과적인 이미지 정보들로 인해 우리가 간과하게 되는 점들을 주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거나 발생하기 이전의 상황을 그려냄으로써 '폭력'의 본질에 의미를 두면서 사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각 작품의 상황은 범죄자의 주변환경이나 사건의 요소들이 묘사되어 있어 우리에게 다양한 생각의 장을 열어줌과 동시에 사건 이면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끔 한다.
김재범_Happy birthday_C 프린트_120×165cm_2012
김재범_Reichstag_C 프린트_120×147cm_2012

본 전시에서는 그 동안 작가가 수집한 자료들을 설치한 아카이브 작품, Cube를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작가의 작업 전반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작품 제목과 이미지로만은 쉽사리 떠올리거나 연결시키지 못하는 내용들이 아카이브 작품을 통해 제공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작가는 사건에 대해 어떠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생각해 볼 시간과 여유를 선사할 따름이다. ■ 송은 아트큐브
김재범_Let's wait and see_Installation(ID pictures)_244×366cm_2011
김재범_Rohtenburg_C 프린트_100×153cm_2012






Lost memories, Forgotten Cr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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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展 / YEESOOKYUNG / 李受俓 / sculpture.painting 2012_0604 ▶ 2012_0824 / 주말 휴관





이수경_Translated Vase_Celadon fragment, 24K gold leaf, Epoxy, Aluminum_ 157×88×9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523f | 이수경展으로 갑니다.

작가와의 대화 / 2012_0604_월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참석 예약문의 Tel. 02-460-1247 / E-mail. sinap@sindoh.com

제1회 신도리코 작가지원프로그램 (SINAP) 선정작가 첫번째 전시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주말 휴관

신도리코 문화공간 서울 성동구 성수2가 277-22번지 Tel. +82.2.460.1247 www.sindoh.com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와 고동연 비평가의 심사를 통해 작년 11월에 진행된 신도리 코의 작가지원프로그램, SINAP (SINDOH Artist Support Program) 1회 선정작가 (전준호+문경원, 이수경, 오인환) 중 첫 번째로 이수경 작가의 전시를 진행합니다. 이에 전시 오프닝 당일인 6월 4일(월) 오후5시 부터 신도리코 본사(서울시 성동구 성수2가 277-22)에 위치한 문화공간에서 직접 이수경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해 들을 수 있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있을 예정이오니, 많은 참여 부탁 드립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미리 예약 부탁 드립니다.
이수경_Breeding Drawing 8_Cinnarbar on Korean paper_100×100cm_2005
이수경_Flame_Cinnarbar on Korean paper_부분

Yeesookyung 이수경 ● 제 1회 SINDOH 작가지원프로그램(SINAP) 세 팀의 선정작가 중 첫 번째 전시로 선보이는 이수경 작가의 전시는 이수경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는 조각, 회화 등 12점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보인다. 도자기 파편을 에폭시와 금박으로 연결해 놓은「번역된 도자기 Translated Vase」시리즈는 이수경 작가가 지닌 삶에 대한 긍정적 자세를 잘 드러낸다. 도예 장인들이 깨서 버린 도자기의 파편들을 모아 붙이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가는 이수경의 작업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을 통한 창조이다. 도예 장인들처럼 이수경 작가에게도 형태적 아름다움은 중요할 수 있지만,「번역된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버려진 것들이 모여 그 스스로 형태를 드러내며 새로운 존재로 당당히 서있다는 그 자체에 있을 것 이다. 또한「불꽃 Flame」,「번식 드로잉 Breeding Drawing」작품은 부적을 그리는 재료인 경면주사로 화면 가득 불꽃과 묘기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이는 작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세계에 대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의 진동과 파동을 예민하게 포착, 화면 위에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 기(氣)를 생성해내는 작품이다.
이수경_Translated Vase_Celadon fragment, 24K gold leaf, Epoxy, Aluminum_ 126×86×73cm_2011

1963년 한국에서 태어난 이수경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서양화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를 수여하였다. 졸업 후, 프랑스 니스에서 Villa Arson Residency Program에 참여하였고 뉴욕 브롱스미술관과 Apex Art, 그리고 한국에서 쌈지스튜디오와 경기창작센터에서 레지던시를 하였다. 영국의 리버풀 비엔날레, 일본의 에치고 쯔마리 트리엔날레, 한국의 부산 비엔날레와 광주 비엔날레 같은 국제적인 미술전에 참가하였다. 현재 작가는 한국에서 작업하며 국제적으로 활동중이며, 올 해 6월 시드니 비엔날레에 참여한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올해의 작가 후보에 오르며 올해 하반기부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질 예정이다. 이수경의 작품은 런던의 사치 갤러리, 미국 보스톤 현대미술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등을 포함하여 주요 공공 미술관 및 국제적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이수경_Translated Vase-the moon_ Park Young-Sook's ceramic fragments, Epoxy, 24k gold leaf, Resin_2012




"나는 느리고 반복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내가 작업을 계속 하는 것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어떤 작품으로 완성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업을 하는 동안 그 과정이 나를 변하게 하고 나의 생각을 바꿔 놓는다. 나는 나 자신을 바꾸고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작업을 한다."_이수경


SINDOH 작가지원프로그램 (SINAP: SINDOH Artist Support Program) ● SINDOH가 2011년부터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를 이끌어갈 작가를 후원하기 위해 매년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 작가 3명을 선정, 작품활동을 지원하는 'SINDOH 작가지원 프로그램 (SINAP: Sindoh Artist Support Program)'을 제정하였습니다. SINDOH 작가지원 프로그램(SINAP)은 작품완성도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우리나라 작가들을 대상으로 현재 진행 혹은 계획중인 작품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평가하여 세계적 진출의 가능성이 내제된 젊은 작가들의 국내외 작품활동을 지원해나갈 것입니다. ● 작년 11월에 진행된 제 1회 SINAP은 세계적인 큐레이터이자 Serpentine Gallery의 공동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와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 중인 고동연 비평가가 심사위원이 되어 총 3팀의 SINAP작가를 선정, 프로젝트를 지원했습니다. (선정작가: 전준호&문경원, 이수경, 오인환) www.art-agenda.com
제1회 SINDOH 작가지원 프로그램 (SINAP) 작가선정 인증서 수여식 오인환 작가_이수경 작가_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큐레이터 우석형 회장_고동연 비평가_문경원&전준호 작가

이들 선정작가들의 첫 번째 전시로 이수경 작가의 개인전이 신도리코 본사 문화공간에서 6월 4일(월)부터 8월 25일(토)까지 진행됩니다.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인 깨진 조선시대 백자와 고려시대 청자의 파편으로 아름답고 새로운 오브제인「번역된 도자기(Translated Vase)」작품과 부적에 쓰이는 경면주사로 그린「불꽃」(Flame) 회화 및「번식 드로잉」(Breeding Drawing) 등 총 12점이 선보일 예정입니다. ● 6월 4일(월) 오후 5시부터는 이수경 작가의 작품세계를 작가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이 마련되어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 신도리코의 성수동 본사의 재탄생과 함께 개관한 신도리코 문화공간은 다양한 현대미술의 전시들을 선보이며 산업과 문화의 새로운 만남의 장입니다. 2012년 6월부터는 매년 SINAP 선정 작가들의 전시를 각 3개월 동안 선보이며, 기존의 사내 갤러리에서 이제는 대중에게 열린 전시공간으로 다가갑니다. ■ SIN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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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불 불 Bul Bul Bul




이우성展 / LEEWOOSUNG / 李宇城 / painting 2012_0605 ▶ 2012_0621 / 월요일 휴관



이우성_아무도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Nobody listen my sorrow._ 캔버스에 과슈_181.8 ×227.3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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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05_화요일_06:00pm

주최 / 갤러리175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club.cyworld.com/gallery175



파괴적 호명, 자조적 저항, 슬픔의 재현불가능성에 관한 시론(試論)-이우성 개인전 - 불불불 ● 이우성은 자신의 첫 개인전『불불불』에서 과슈로 작업한 회화 4점을 전시한다. 그는 주변에서 수집한 사진에 등장하는 얼굴들을 임의적으로 수정하거나 부위별로 재조합하여 화면에 재현한다. 해체와 재구성 작업으로 구현된 대상들은 대상을 비추는 외부의 불빛과 불빛에 대응하는 응시 사이에 놓임으로써 존재의 호명(interpellation)에 관한 문제를 이끌어낸다. 작가가 그리는 대상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통해 나타난다. 태초에 말씀(빛)이 있고, 존재가 시작되었음을 창세기 첫 구절이 적고 있듯이 빛은 대상을 비춤으로써 존재의 시작을 고한다. 여기에 작가는 빛의 발화가 갖는 파괴력을 부각한다. 다시 말해 어둠 속의 불꽃은 빛을 발함으로써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지만, 존재는 의미적 망에 여과되어 부서지고 파괴됨으로써 인식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빛은 발화(speech)하는 발화(ignition)이다.「아무도 내 슬픔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에서 불타오르는 오리배가 오리배로서 자신의 정체를 증명하듯이, 너는 하나의 의미가 되어 발화함으로써 자신을 호소할 수 있다. 불타는 오리배는 고통의 순간, 호명을 통한 주체의 탄생 순간을 함의한다. 오리배는 네가 너일 수 있기 위해 의미망에 여과되고, 분절되고, 파괴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보여준다.
이우성_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People who are staring straight ahead_ 캔버스에 과슈_259.1×569.6cm_2012

한편 빛과 더불어 등장하는 응시는 권위적인 빛과 대비를 이루며 긴장을 유지한다. 화면 속 응시는 의미적 구조에 저항한다. 빛은 얼굴들에 정체성을 입힘으로써 의미부여하지만, 화면 속 응시는 어떤 온전한 해석도 거부함으로써 대상을 호명하고 삼켜버리는 '악마적인 시선(빛)'에 포획되지 않는다. 화면 밖을 쳐다보는 대상의 응시(stare)는 대상을 파괴하는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얼굴들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도록 방해한다. 그들의 무심한 시선은 등신대로 재현되어 삼면의 커다란 화폭에 빼곡하게 담겨짐으로써 관객을 압박하지만, 오리배의 경우처럼 어둠 속에 파묻혀 초점을 잃은 채 나타남으로써 파괴에 대한 초연함 내지 무력함의 시선(gaze)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빛과 응시의 두 시점들이 충돌하여 형성하는 팽팽한 긴장의 한복판에서 얼굴들은 긴장에 반응하듯 왜곡되고 과잉 재현된다. 대상들을 낯설게 만드는 효과는 작가가 배치하는 몇 가지 형식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령「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에서 화면 가득히 떼를 이룬 얼굴들은 반복적인 패턴처럼 거리감 없이 배열되어 있는데, 저마다 특수한 개성이 묘사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군중의 점으로 나열됨에 따라 시선에 대한 몰입을 분산시킨다. 저마다의 얼굴은 호명(비춤)에 대한 무게와 윤곽을 짊어지고 있지만, 반복된 그들의 응시는 강제적인 호명에 저항함으로써 존재의 무게를 가면극의 가벼움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여기에 맨 앞의 인물들이 들고 있는 막대불꽃과 반사판 등의 소재들은 화면 밖의 강제적인 빛을 패러디함으로써 파괴적인 빛을 희화화한다. 여기에 작가가 대부분의 작업에 사용하는 과슈는 금방 마르는 속성으로 하여금 정밀한 묘사를 어렵게 하고, 극적인 명암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인위적인 조명의 느낌을 준다. 더불어 무광의 톤-다운된 질료의 색감은 두 시점 사이의 공간을 불투명하게 채움으로써 대상을 명료하게 비추는 빛의 효과를 반감시킨다. 특정하게 의미 부여된 대상들에게 일련의 시각적 효과들을 적용하여 다시금 재현하는 시도들은 화면 속 대상들을 불확실한 위상으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호명에 대한 거리두기는 캔버스에 재현된 호명을 신뢰할 수 없도록 만들고, 나아가 주어진 얼굴과 정체성들을 하나의 껍데기와 가면으로 위치 전환한다. 하지만 호명에 대한 거리두기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작가는 호명으로부터 거리를 두지만, 그의 거리두기는 어디까지나 호명에 의존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가의 작업은 호명의 과정을 '(재)호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우성_도망 Run away_캔버스에 과슈_ 40.9×31.8cm_2012

위의 교착상태에서 대상은 깨알같이 변형되고 패러디된다. 하지만 '자조적 유희'의 전략은 호명에 대한 무게로부터 도피하여 무관심한 시각적 유희에 그치는 무책임의 우려를 피할 수 없다.「도망」이 보여주는 것처럼 호명에 대한 대항-호명(counter-interpellation)의 보복은 호명의 폭력을 인식하면서도 호명을 반복하고, 정작 자신은 지배적인 호명으로부터 도피하는 기만을 보여준다. 자조적인 호명의 유희는 스카이댄스의 응시와 같이 폭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폭력에 반복적으로 가담할 뿐이다. 호명으로부터 도피 불가능한 교착상황은 호명의 세계에 자조적으로 도피할 것인지, 치열하게 자기한계를 깨나갈 것인지의 선택지를 만들어낸다.「가능성」은 예의 선택상황을 한 화면에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응시와 불꽃이 거리를 두고 화면에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스냅 샷처럼 순간적으로 기록한다. 일촉즉발의 장면 속에서도 작가는 예의 유머를 견지하면서 긴장의 순간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하고, 흑백으로 처리하여 불꽃의 파괴력을 반감시킴으로써 다른 작업들보다 폭력적 순간에 대해 확실하게 거리를 둔다. 하지만 작가가 묘사하는 순간적인 상황은 해석상의 모호함을 열어둔다. 역광을 받은 인물의 표정은 힘겨움인지 웃음인지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다.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의 응시는 빛의 반대편, 빛이 닿아있는 우리의 얼굴을 마주한다. 노를 쥔 손에 힘을 주면서 불을 등지는 모습은 흡사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불꽃의 위험으로부터 도피할 것인지, 폭력적인 호명과 말들이 난무하게 될 불지옥에 뛰어들 것인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폭력의 순간, 모든 것들이 재현의 언어 앞에 단절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마주하게 되면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것은 작가가 당면한 문제이며, 동시에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 남웅
이우성_가능한 Possible_캔버스에 과슈_130.3×193.9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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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stige 흔적


김재일展 / KIMJAEIL / 金在一 / sculpture 2012_0606 ▶ 2012_0612


김재일_Vestige_혼합재료에 아크릴채색_80×80cm_2011

초대일시 / 2012_060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흔적 : 풍경과 비-풍경 사이에서 ● 삶의 공간 속에서 수없이 지나쳐왔던, 그저 무의미한 것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감응을 불러 일으키며 자신을 장악해 버리는 사건들을 경험한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부터 그 대상-사물 혹은 풍경은 우리의 고정된 인식세계의 목록화된 대상-풍경이 아니라 탈 목록화된 풍경으로서 자리하며 기억의 흔적들을 따라 부유하는 텍스트화된 풍경이 된다.
김재일_Vestige_혼합재료에 아크릴채색_89×109cm_2012

작가 김재일은 우리가 쉽게 장악하고 있는 일상적인 풍경 이미지를 전복시킨다. 분명 그는 나무나 해변이나 별들을 집적된 이미지 혹은 음각화된 이미지로 재현시키지 않는다. 풍경에 대한 표상적 재현이 아니란 말이다. 단지 그는 동그란 흙 덩어리들로 대상(풍경)의 가시적 이미지들을 형상화 시키는 3차원 입체 조형방식을 택하지만, 이를 캐스팅한 후에 2차원 평면에 음각되어진 영역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중첩된 포지티브한 양의 공간을 배제시키고 네가티브한 음의 공간의 일렁임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중첩된 네가티브한 공간과 색점은 견고하게 구성된 우리의 대상에 대한 재현-이미지를 왜곡시키고 우리의 파편화된 풍경-이미지들을 재구성시키는 씨줄과 날줄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러한 풍경의 불명확한 형태를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의식적 이미지화나 기하학적 구성방식의 인위적인 표현 체계와는 다른 세계, 지각 속에서 발생중인, 즉 진동하는 세계를 포착하게 한다. 아마도 쉽게 장악되지 않는 풍경에 내재된 흔적들에 대한 이미지화된 사유로,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인 공간의 기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그 "흔적들에 대한 무엇들"이 그 스스로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다
김재일_Vestige_혼합재료에 아크릴채색_48×74.2cm_2012

그리고 작가의 조형어법에서 주목할 점은 3차원적 조형방식에서 2차원적 조형방식으로의 전환이다. 회화의 영역에서 색 층의 대비를 통해 대상의 인상을 잡아내려 한 것처럼, 그는 집적된 평면 안으로 네가티브한 공간을 구성하여 양각과 음각이 서로 충돌하며 빚어내는 인상을 포착하려 한다. 또한 풍경-이미지를 기하학적 구조로 파악함으로써 그 실재와 우리의 인식의 일치를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포착할 수 없는, 기하학적 구조로 환원될 수 없는 대상-세계의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표상된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대상과 조우하고 있는 그 순간에 발현되는 것들을 담으려하는 태도라 할 것이다. 이를 비표상적 태도라 할 수 있는데, 비표상(Non-representation)은 작가가 작가의 표상세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현실 세계의 사물과 유사하도록 제작하는 방식과 다르다. 사물(풍경)에서 발생되는 현상을 자신의 눈을 통해서 촉발되는 타자로서의 사물(풍경)에 주목하는 태도, 즉 사물에서 발생되는 현상을 사물의 형상으로 되새겨주는 가변적인 행위를 비표상적 특성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김재일_Vestige_혼합재료에 아크릴채색_80×80cm_2011

김재일의 경우 대상과 조우하는 그 순간에 대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적인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태도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된 이미지는 신체와 세계의 만남, 즉 신체적 지각 '속에서'그 둘의 얽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 심상-이미지는 롤랑 바르트가「카메라 루시다」에서 그의 어머니 사진은 다른 이들에게는 하찮은 한 장의 사진이 되겠지만 그 자신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푼크툼이 발생하는 장소이며, 어느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세계라는 언급을 떠오르게 한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작품은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발생되는 장소이며, 지극히 개인적이며 공유 불가능한 개인적 정서의 표현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를 자신의 경험 세계로 이끌고 들어가려는 일차적 전략에 목적이 있지 않다. 우리는 여기서 작가의 일차적 표현 의도를 따라 이행하는 과정에서 무의미한 흔적들이 유의미한 흔적들로 전환되는 그 정신적 이탈의 순간에 작가의 풍경이 탈-물질화, 탈-조각화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김재일_Vestige_혼합재료에 아크릴채색_89×109cm_2012

다시 말해서, 작가는 일상적 풍경에 은폐되어있는 개인적 '흔적' 또는 공통감으로서의 '흔적'을 드러내 보여주려 하고 있으며, 형태적으로는 일상적 풍경의 형상을 빌어 제작함으로써, 그곳에서 발생하는 의미를 새롭게 환기하게하고, 재인식하게하며, 재해석을 유도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작가의 중심은 형상의 재현 또는 복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재현에서 발생되는 "그 어떤 힘들"로, 모든 사물들의 현상 그 너머에 있으며, 그 세계의 특성들을 감지할 수 있도록 제시하는 방식이다. 일상적 풍경에서 탈 풍경으로의 전환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의 삶과 더욱 밀접한 이야기를 하려하는 것이다. ■ 황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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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loration of Space


이지연展 / LEEJIYEON / 李知娟 / painting 2012_0606 ▶ 2012_0612


이지연_Exploration of spac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78×260cm(각 78×13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06a | 이지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0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Tel. +82.2.737.4678 gallerydos.com


이지연 작가는 기억에 공간을 담는다. 누구나 어렴풋한 유년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학교나 놀이터 혹은 아파트 단지 등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정보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력은 불완전해서 꺼져가는 불빛처럼 위태롭게 깜박이더니 등장인물과 그에 따른 사건을 배제시키고 나와 무대만 남게 한다. 과거에 대한 증인과 물증은 없는 심증만 남은 현재의 상태는 온전히 내 머리 속 기억장치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이지연_Exploration of spac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60×300cm(각 60×100cm)_2012
이지연_Exploration of spac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34×159cm(각 34×53cm)_2012

오래될수록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 현실이었을 기억에 대한 확신도 차츰 줄어든다. 이러한 불분명한 느낌들은 어디까지가 꿈이고 현실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서로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환상적인 느낌만 남는다. 작가는 이러한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정말 그곳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그 결과는 점, 선, 면으로 단순화된 모노톤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기억을 곱씹으면서 정제된 무결점의 공간은 흐트러짐이 없다.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진공 상태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을 연결한다.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만들어내는 파편화된 공간들은 서로 이어져 한 때의 기억으로써 큰 화면을 이룬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 놓이며 작가의 그리운 감정을 더듬는다. 초기 작업은 평면 안에 라인테이프를 이용해 공간을 나누고 색으로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했다면 최근 작업은 입체로 발전되어 그 자체로 얇은 공간을 지니게 된다. 이는 작가가 보여주는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또 다른 공간의 설계이다.
이지연_Balmy day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60.6×40.9cm_2012

작가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전개되는 공간과 공간 사이의 스토리는 만들어간다. 어떻게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지난 시절의 그리움에 호소하고 있으며 이는 관람객의 해석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개인의 경험에만 국한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다. ■ 갤러리 도스
이지연_Balmy day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53×34cm_2012

2003년부터 작년까지 Recollecting Space라는 큰 제목 아래 과거의 장소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고 본인이 기억으로부터 찾아내는 '공간'에 대한 경험, 회상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다. 지금까지의 작업들이 공간에 대한 회상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면, 2011년부터는 '공간'에 대한 인지, 인식에 관심을 더하며, 작품과 전시공간을 아우르는 새로운 공간에 대한 접근과 경험을 만드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아직은 캔버스 공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미흡한 상태이지만, 사적인 서사가 가득한 공간을 넘어 새로운 '공간'을 설계하는 듯 한 과정을 실험을 하며 Exploration of Space 는 이러한 의미의 새로운 타이틀로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작업들을 하는 과정에서 아직은 나의 '기억'이 새로운 공간에 작용하는 힘을 무시할 수 없음을 느끼고 있는데, 이는 마치 영화 '인셉션 Inception'에서 새로운 꿈 속의 공간에서 처음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의 이미지까지 가져오게 되는 주인공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만들어보려는 공간이 완전한 새로운 이미지는 아니라는 점이 다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보다 많은 연상거리를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는 점은 아직은 좀 더 새로운 공간이미지를 설계해보려고 하는 바람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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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tter From Gregor Samsa








이경展 / LEEKYOUNG / ?? / painting 2012_0608 ▶ 2012_0621 / 월요일 휴관





이경_A man in misfortu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7×13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경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17_일요일_02: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대안공간 눈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눈 ALTERNATIVE SPACE NOON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82-6 Tel. +82.31.244.4519 www.galleryartnet.com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그레고르 잠자는 한 마리 흉측한 해충이 되어버렸다. 자고 일어나니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의 작업은 어디에서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 누구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하챦은 벌레로 변해 있을 수도, 내 주변의 풍경과 사람들, 심지어 가족마저도 일순간 변해버린 상황을 대면할 수 있다는 현실인식에서 출발했다.
이경_A man in misfortu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7×130cm_2012
이경_A man in misfortu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1.7×130cm_2012
이경_A man in misfortu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2
이경_Mas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2
이경_A man in misfortun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7×91cm_2011
이경_Peeping To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0

개인적 사고가 아니라도, 누구나 정치 혹은 역사적인 사회의 국면이 개입당해 개인사적 고난에 부딪힐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일은 순식간에 벌어진다. 미디어로 훔쳐보는 먼 나라 누군가의 불운의 풍경은 사실 나의 평화로운 일상과 손바닥의 앞뒷면처럼 맞닿아 있지만, 사람들은 타인의 불운으로 치부해버리길 원한다. 나는 예기치 않은 사건의 개입으로 예기치않은 고난에 직면한 사람들의 개인적 '순간'들을 이어 붙여, 불청객처럼 나타나는 모든 인간들의 예외없는 '장면'을 그리고자 하였고, 묻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 왜 흉측한 해충이 되어버렸을까? ■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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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ALT-신비와 비밀의 공간








김하영展 / KIMHAYOUNG / 金夏榮 / painting 2012_0607 ▶ 2012_0701 / 월,공휴일 휴관





김하영_Moon night flower_종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77.5×77.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023i | 김하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07_목요일_05: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가비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가비 GALLERY GABI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2층 Tel. +82.2.735.1036 www.gallerygabi.com





우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전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가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_Albert Einstein 1970~80년대 이후 미국 과학계가 주장하는 초끈이론 (Superstring Theory)에서는 만물의 궁극을 끈과 같은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즉 우주의 만물은 소립자나 쿼크와 같은 기존의 단위보다도 훨씬 작은 구성요소인 '진동하는 가느다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바이올린이나 첼로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이 현의 진동 패턴과 주파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끈들이 진동하는 패턴에 따라서 각기 입자마다 고유한 성질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 김하영의(COBALT-신비와 비밀의 공간)은 '진동하는 가느다란 끈' 선으로 이루어진 환상의 세계이다.
김하영_우주가 햇살로 쏟아지는 기이한 연못_종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123×148cm_2012

김하영의(COBALT-신비와 비밀의 공간)전 은 반복과 깊이라는 이전 작품과의 연계선에서 볼 수 있지만 좀 더 깊은 개인적인 의미의 확장선 에서 이해된다. COBALT는 단순히 깊은 파랑이라는 색의 의미를 넘어 자연, 생활, 가치 등을 의미하며 색 자체로 상징이 된다. ● 거대한 우주처럼 신비한 세계를 유년시절의 체험, 환상, 욕망 등을 드러내며, 자유로운 선과 색을 통하여 표현 하였다. 그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형상과 환상적 모티브로 사물에 내재된 근원적이고 비밀스런, 경이로운 의미를 찾고 현실과 상상이 서로 얽혀 새로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김하영_나타나엘의 눈과 푸른정원_종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130×194cm_2012

나타나엘은 프로이트의 유명한 분석에서 비롯된 호프만의 '모래사나이'의 주인공이다. 우리는 아마도 유년시절 의 불완전한 상상 하나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를 다스리던 불안한 감정들 커다란 상자라도 있다면 넣어서 떠나보내고 싶은 감정, 우울하고 어리석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로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런 무엇,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속해 있었다. 그러면 스스로 만든 세상을 만나게 된다. 깊은 마음속 한 구석에 정원을 만들고 연못은 빛나고 스스로 묻힐 것과 사라지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라보게 된다. 모든 것은 스스로 빛나며 스스로 사라지게 된다.
김하영_기이한 연못_종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145.4×145.5cm_2012

파랑색은 필연적인 속성인 물의 이미지로 깊은 심연이 되어 드넓은 하늘을 만나고 이는 자유, 자유로 확산된 무한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표현은 경험의 시각화를 통해 나타난다. 깊은 심연 속에 연못 있다면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해리슨은 고대인들이 마음의 평정과 깨우침에 필수적인 자기함양과 자아발전의 모델이자 장소로 정원을 보았고, 볼테르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원을 가꿔야한다고 강조한다.
김하영_이 TEETH-Memento mori_종이에 아크릴채색, 색연필_77.5×77.5cm_2011

작가의 작업 목적이 '사람들의 치유'에 있다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무한한 상상력으로 감성에 젖어들게 하는 힘이 있다. ■ 갤러리 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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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OCI YOUNG CREATIVES








신정필_박미례展 2012_0607 ▶ 2012_0627 / 월요일 휴관





신정필_제 3의 눈_철, 레진, 형광등_140×140×118cm_2012




초대일시 / 2012_0607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신정필_박미례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 미술관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일상성에서 의외성으로, 지각된 사물에서 표현된 사물로 - 신정필의 "시야 밖의 시야"전 ● 르네상스 시대 『회화론』의 저자 알베르티의 초상조각(부조)에는 주인공의 얼굴 이외에 눈 하나가 따로 부조배경에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 얼굴의 생김새보다도 이 특이한 표현에 더 시선이 가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눈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감각 중에서도 눈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중요한 통로라고 할 수 있으며, "보는 것이 믿는 것" 혹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눈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갖고 있다. 조각가 신정필은 바로 이러한 믿음, 즉 특권화된 시각과 본다는 것의 절대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신정필_시야 밖의 시야_나무, LED_24.2×170×37cm_2012

신정필의 작업은 주변의 사물에서 시작된다. 우선, 자신의 일상이나 여행에서 문득 시선을 끄는 사물을 선택한다.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을 동원한다. 사물을 파악하는 방법이자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인 눈을 사용하여 사물을 관찰한 다음,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 방식으로 그 세부 하나하나를 분석하는 것이다. 가능한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서, 그는 과학자처럼 사물을 아주 작은 단위로 분할한다. 핵심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부분까지도 면밀히 조사하고 관찰한다. 흔히 부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그 사물의 본래 기능과 관련해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작가는 이 분할된 조각들을 자신만의 새로운 재료로 환원하여, 사물의 외형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술자처럼 아주 꼼꼼하게 재조합한다. ● 그의 시선을 끈 사물 중 하나가 비행기였다. 작가는 비행기의 구성요소인 엔진, 프로펠러, 날개, 꼬리날개 등을 면밀히 관찰한 후 각각의 부분들을 만들고, 이를 꼼꼼하게 조합하여 비행기를 완성한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낸 비행기는 비행기의 형상을 띠고 있을 뿐 비행기 자체는 아니다. 부분들을 재조합한 결과, 우리가 시각적으로 보아 알고 있는 비행기와는 다른 "뜻밖의 사물"이 탄생했다. 이로써 작가는, 우리가 사물을 인간의 눈으로 "정확하게" 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지각하고 인식할 뿐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제기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사물을 파악하고 분류하면서 사물의 본질에 접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물에 대한 인식은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 즉 특정한 지식체계(구조)를 기반으로 정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인식의 한계를 노정한다. 때문에 지금 내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은 객관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사물의 본질이 아니라 한낱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개인의 경우에도, 주체가 대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지식과 지각체계를 바탕으로 대상을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신정필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만든 비행기는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비행기가 아니라 작가 신정필이 지각한 비행기다. 이처럼 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사물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순간 요청되는 것은 바로 사물을 다르게 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이다.
신정필_Design for the third eye_RP 프린트_55×30×25cm_2012

이번에 신정필이 선보이는 "뜻밖의 사물"은 눈동자와 망원경으로, 이는 인간의 시각과 직접 관련된 사물들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코나 귀보다는 주로 눈에 의존하여 환경을 파악하고 인식한다. 특히 눈동자는 사물을 바라보는 데 절대적인 기능을 하지만 실제로 우리 눈이 볼 수 있는 시야는 매우 제한적이다. 멀리 있는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 시각의 범위도 상하 약 130도, 좌우 190도 정도에 그친다. 이는 눈동자가 한쪽으로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신정필은 생각한다. 그래서 눈을 고정시키는 장치를 제거하고 그 장치를 내부에 집어넣는다면 완벽하게 360도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눈동자를 고정시키는 장치를 제거한다. 그 결과 커다란 눈동자는 공중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며, 이 눈동자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 망원경은 어떠한가? 실재하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사물을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현미경과 망원경이다. 천체망원경은 가시적인 시야 밖으로 시각을 확장시켜주는 도구로, 신정필은 이 천체망원경을 잘게 분할해서 면밀하게 재조립해도 결과는 역시 망원경이 될 것이라는 가설 하에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과학자와 기술자처럼 치밀한 공정을 거쳐 제작한 망원경은 형태상으로는 망원경과 닮았지만 달이나 별자리를 볼 수는 없는 사물이 되고 말았다. 대신 우리는 망원경을 감싸고 있는 현란한 빛에 빠져든다. 이와 같이 작가는 사물의 기능을 교란시고 전복시켰지만, 우리는 그가 만들어 놓은 망원경을 탓하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사물"은 더 이상 일상의 사물이 아니라 작가 개인의 사물이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시야 밖의 시야"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미술가들은 자신만의 시각적인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제작하는 동시에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는 지각방식에 대해 고민해왔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 사물의 표피가 아닌 구조에 집착했고, 피카소는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바라본 사물의 형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신정필 역시 사물의 본질에 대해 얘기하지만, 이 본질을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도, 드러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물의 본질과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인간의 시각을 이용하고 과학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지만, 결국 사물의 본질은 인간의 눈으로 인지 가능한 범위 너머에 있음을 환기시킨다. ● 인간의 인지 능력이나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는 자칫 작품을 지루하거나 난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 작업 방식 역시 과학과 기술이 도입되면 딱딱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정필의 작품에서는 사물의 바라보는 작가의 상상이 결합됨으로써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뜻밖의 사물"로 재탄생하게 되고, 이는 관람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관객은 마치 환타지 영화에 빠져들 듯이, 일상적이지만 결코 일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의 "새로운 사물"에 매료된다.
신정필_시야의 확장_청사진, 클래식 씰_가변크기_2012

신정필의 작업과정은 흥미롭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다양한 방법과 재료와 기법이 동원된다. 우선 아이디어를 종이에 스케치한 후, 이를 컴퓨터 3D 작업으로 정교하게 구체화시킨다. 그런 다음 실제 손으로 제작에 들어간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나무와 철 같은 전통적인 재료에서부터 광섬유, LED 등 각종 신소재까지 다양한데, 작가가 제작 과정 전체를 직접 진행한다. 용접 기술자처럼 형태의 기본 틀을 깔끔하게 용접하여 만들고, 그 안에 전기 기술자처럼 복잡한 전선을 설치해서 LED 형광등을 설치하는 일, 그리고 합성수지로 외피를 캐스팅하여 전체를 조립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을 작가가 직접 해내는 것을 보면 그가 예술가인지 기술자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 미술가들은 기술자와 차별화되기를 원한다. 르네상스 이후 미술이 인문학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기술은 미술과 분리되고 미술가는 스스로를 기술 중심적인 전통적 장인과 차별적으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뒤샹의 등장으로 미술가들은 아이디어만으로도 작품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개념미술에서는 급기야 미술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미지마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에 개념적인 미술이 유행하면서 작가의 공들인 수작업에 별반 가치를 두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 작가들은 수작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근래 젊은 조각가들 중에는 작업방식에서 기존의 조각가보다는 과학자 혹은 기술자와 더 흡사한 태도를 보이는 작가들이 있는데, 신정필이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다. 사물을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는 기술자에 가까운데, 신정필은 스스로 이러한 작업과정을 즐기는 듯하다. ● 조각가이면서도 과학자나 기술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신정필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자녀의 창의성과 과학적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사준 "과학상자"를 장난감처럼 갖고 놀던 세대다. 다양한 형태의 기계부품을 조립하고, 너트와 볼트를 조여서 갖가지 모형을 만들면서 성장한 세대임을 감안한다면, 신정필의 작업방식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찰흙을 붙이거나 돌이나 나무를 깎는 작업, 혹은 용접이나 주조 등의 기법으로 형상을 만들어가는 기존의 작업보다는 다양한 부품을 조립하여 형상을 완성해 가는 데 익숙한 세대가 우리나라 조각계의 새로운 세대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이들이 사용하는 재료 역시 기성세대의 조각재료와는 다르다. 신정필 역시 자신의 가설을 구체화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를 선택한다. 나무와 철과 같은 전통적인 조각재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합성수지, 파리핀, 광섬유, LED 형광등 등 다양한 재료를 넘나들면서 조각의 폭을 확장시키고 있다. ● 신정필은 2010년에는 고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2011년에는 난지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등 새로운 세대의 아이콘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 예술과 과학과 기술을 어떻게 작가의 상상력으로 융합시켜 새로운 작품세계를 펼쳐나갈지 자못 기대되는 작가다. ■ 김이순
박미례_길러진 식물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2

멀리서는 인간도 파리처럼 보인다.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 (a)황제의 재산인 동물 (b)방부 처리된 동물 (c)사육동물 (d)돼지 (e)인어 (f)상상 속의 동물 (g)길거리 개 (h)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미친 것처럼 날뛰는 동물 (j)셀 수 없는 동물 (k)낙타 털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진 동물 (l)기타 (m)막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 (n)멀리서는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 근래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관람객개발에 열을 올린 미술관들의 노력 덕에 동물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특수를 누렸다. 그 대부분의 동물을 소재로 한 작업들은 팝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친근하였다. 이 세계에서는 모든 동물은 가금류거나 펫이나 반려동물이 된다. 물론 죽음을 주제로 한 최근의 작업들을 보면 동물을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런 경우 동물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을 표현하는 대체물이다.
박미례_표본_캔버스에 유채_21×49cm_2012

자연사박물관은 단지 지식과 과학의 전당만은 아니다. 이성이 맹목과 광기와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자연사박물관은 사실 박제된 사체들의 전시장이다. 동물의 공동묘지이자 이성의 정신병동인 것이다. 어떻게 이성은 광기와 화해하는가? '의미 없음'과 '의미 있음'의 관계를 통해서 성스런 동거가 가능해진다. 인간이 인간을 박제하는 세계에서 동물의 박제는 문제거리가 아니다. 보르헤스가 상상으로 작성한 '(b)방부 처리된 동물'만이 존속하는 세계에서는 인간을 구성해온 온갖 이야기, 관념, 상상도 모두 박제된 자연사박물관의 세계가 되어 버린다. ● 사실 '자연사(자연의 역사)'란 이상한 말이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부여한 의미의 역사를 갖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사는 목적을 포함한 인위적 조어이며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자연은 역사를 갖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인식하고 명명하며 사용하는 동물은 문화에 포함되며 사회-역사적 구성물이다. 그러니 근대 이후 과학의 이름으로 획득한 성과를 진리로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독단적일 수밖에 없다.
2012 OCI YOUNG CREATIVES-신정필_박미례展_OCI 미술관_2012

자연을 독과점하면서, 동물을 대상과 의미에 가둬놓음으로써 인간은 세상을 정복한다. 인류의 영원한 전보를 위해 동물은 대상이 되고 지식이 된다. 사물은 의미가 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인식한다는 행위는 일종의 관계행위이다. 동물과 인간은 어느 순간부터 관계방식을 바꿔왔다. 인간은 동물과 분리됨으로써 동물을 대상화하였다. 대상은 내가 눈을 감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 이해하려면 우선 동물에 얹힌 신비와 공포의 성질을 분리시켜야 한다. 동물을 신격으로 대했던 인간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비로소 동물은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동물은 인간이 정복한 식민지 목록에 포함되었다. 명명되어 분류 가능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신비와 공포를 정복하고 마침내 인간 스스로의 존재성을 정복하고 마음껏 해부할 수 있게 된다. 신과 동물과 사물과 세계의 모독은 곧 인간 자신의 모독인 것이다. ● 전근대인들은 식량으로 사냥한 동물을 위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제의적 문화를 만들어왔다. 복합한 신성을 구성함으로써 세상의 평화를 영속시키는 것이다. 그 시설 영적 평화를 위협하는 어떠한 것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영혼은 어디에서도 안식할 수 없다. 그것이 인류문명이 자초한 영혼의 막다른 골목이다. 방부 처리된 영혼 없는 존재들만이 지상을 배회한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동물들은 마네킹처럼 더 이상 신성하지 않다. 진짜 동물이 사라진 세계의 인간은 고독하다. 마치 세계의 끝에 이른 기분이다.
2012 OCI YOUNG CREATIVES-신정필_박미례展_OCI 미술관_2012

박미례의 그림들은 근래 동물화들 가운데 매우 드물게 광기어려 보인다. 칼라와 터치는 날카롭고 신경증적이며 해체적이다.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후 마지막 인간이 방문한 자연사박물관처럼 이상한 공포와 예측불허의 불안이 있다. 누군가 동물원의 동물은 슬프다고 했으나 단지 슬프다는 수식만으로는 그녀의 작업을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 그녀의 그림은 어쩌면 의미와 결합된 동물을 그 의미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으로서 그녀의 작업은 의미를 획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선 의미를 벗어나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계와 태도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죽죽 그어대는 행위를 통해 삶과 죽음의 전시장을 부정한다. 인간이 정복한 의미의 세계를 부인하고 마침내 인간 자신을 거부한다. ● 자연사박물관 속 동물에게서, 자연사박물관의 세계를 사는 인간에게서 다시 신비가 솟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멀리서는 인간도 파리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또한 상상 속의 동물일지 모른다. ■ 김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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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jean blues








김준展 / KIMJOON / 金俊 / printing 2012_0607 ▶ 2012_0624 / 월요일 휴관





김준_Blue jean blues-doors_디지털 프린트_120×7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07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아트링크 GALLERY ARTLINK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6번지 Tel. +82.2.738.0738 www.artlink.co.kr








한국현대미술작가들의 국제적인 활동이 주목을 끌고 있는 요즈음, 가장 눈에 띄는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김준의 개인전이 열립니다. 우리의 대중문화와 생활문화가 세계적으로 홍보되면서 점화된 한류 열풍을 한국적 미학의 세계화로 종결시킬 순수 예술 분야 작가들의 국제적 활동은 더없이 중요한 시기를 맞이했다 할 것입니다. 김준은 유럽, 미국, 중국 등의 다양한 지역에서, 미술관, 갤러리, 아트페어 등의 다양한 미술현장에서, 예술적 평가와 미술시장에서의 성과를 고루 보이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렇게 세계미술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21세기 한국현대미술가가 어떤 차별성을 표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환경을 활용하는 그의 그림은 인터넷 상의 이미지 쇼핑에서 시작하여, 첨단 3D 기법을 노동 집약적 방법으로 구현하는 캔버스와 붓 없이 그리는 회화입니다. 대학원 시절 오브제 작업에서부터 지금까지 천착해온 김준의 작품주제는 우리 의식에 각인된 문신(TATOO)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게 모르게 영혼에 깊이 각인된 문신이자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몸뚱이들, 결국은 병들고 다치고, 부셔지는 몸뚱이들은 도자기 파편으로 은유 되고 작가와 우리의 지난 시간 속에서, 영혼을 붙들어 타투 시켰던 존재들의 이미지들이 새겨집니다. ● 연약한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정교하고 아름다운 화면 속에 표현 해 낸 김준의 최근작『블루스』展에 초대합니다. ■ 갤러리 아트링크

김준_Blue jean blues-rocker_디지털 프린트_120×210cm_2012_부분

김준『블루진 블루스」에 부쳐 : 감추어진 채 드러나는 세계(들) ● 세계는 넓다. 그리고 세계는 너무나도 깊다. 우리는 그런 세계 안에 살면서 사실 그 세계를 모른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 안에서 자신의 몸과 영이 속해 있는 세계를 감춘 채 살아간다. 이 감추어진 세계는 그러나 절대로 감추어져 있지 않다. 예술가는, 더구나 시각예술가는 자신의 시야에 잡히는 세계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시야를 감추어져버린 세계에로 활짝 열어서 시야 안으로 그 세계(들)을 불러들이려 한다. 우리는 그런 예술가들의 행위를 보고, 세계가 시야 안으로 잡혀들어 온다고 말해야 옳다. 그들은 세계의 됨됨이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를 자신의 시야로 잡아둔다. 그런 예술가들의 행동을 우리는 "눈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눈뜸"은 곧 예술이며 작품이고 또한 예술가와 감상자의 관계를 정리해 준다. 김준의「블루진 블루스」에서 그 "눈뜸"은 앞 선 작품들에 비해 조금 더 깊이를 더하고 있다.
김준_Rocker-shin joong hyun_디지털 프린트_35×45cm_2012
김준_Blue jean blues-play boy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12

김준의 작품들은 일련의 구획들로 전체를 이루어낸다. 몇 년 전의 작품부터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작품까지 그래서 그의 전체는 각 각의 부분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그는 전체를 상정하고 부분을 보여주지는 않으며, 그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를 통해 자신의 작업 방향을 유지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자신의 작품이 보이고 있는 하나의 경향에 대해 무덤덤하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우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우연의 개입이 작업의 방향을 만들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독립된 소주제,「블루진 블루스」에 묶여 있으면서 앞 선 작업들이 내보이던 연장선 위에서 '하나'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는 "블루스"(Blues)로 우리를 세계에 초대하고 있다. 그렇게도 애잔하게 노래 불러 세계를 돌려 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분의 종합으로 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영(靈, spirit)보다 몸(肉,flesh)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먼저 보인다. 그 몸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편안하게 김준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쫓아가며 웃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의 작품은 비례의 정합과 다소 엉뚱한 균열을 함께 내밀면서 그 사이를 웃음으로 채우는 솜씨로 마무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블루진 블루스」에서 김준은 "그 사이"에 웃음보다 애수(哀愁,phatos)를 집어넣고 있다.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힘이 찬 팔둑의 문신(들)으로 불러도 좋다면, 김준은 자신에게만 빛나던 청춘과 그 보다 더 어두운 현실을 애가 닳도록 쓰리고 아픈 마음의 눈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팔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웃음으로 돌려 세워질 때, 아마도 예술가는 웃으면서 그 웃음과 함께 울었을 것이다. 사실,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몸(들)은 언제나 이처럼 끔찍한 쌍의 관계를 하나로 묶어준다. 그래서 김준의 작품에는 늘 몸이 살과 피가 속아내고 떼어내진 것처럼 드러나고 있었다.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세계에 대한 그의 정조(情操, sentiment)는 몸에 대해서 처연하게 노래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지경에 몰려 세워져 있다. 그러하므로 우리는 아직 김준의 노래 전체를 다 들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블루진 블루스」(Blue-Jin-Blues)는 세 가지 형식적 테마(주제적 요소)가 혼용되어 있다. 그 작품(들)의 경향은 세 가지 테마를 통해 하나의 구조를 구축한다. 세 가지 테마 중 하나는 김준의 청춘이자 기억으로부터 감추어진 것이 탈은폐된 것이다. 그것은 "블루진"이고 껍데기로 남겨진 채 작품에 등장한다. 두 번째 요소는 영화와 음악이다. 사실은 영화로 회상되고 있는 자신의 기억의 오늘-곧 탈은폐된 현재다. 그런데 이 영화는 모두 제 각각의 테마 음악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삶의 현장, 즉 먹고 살아야 하는 '나'와 그런 '나'를 껴안고 있는 삶이다. 이 생활의 건강함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로, 그릇으로 그리고 '그 밥그릇'의 질감표현만으로 온전하게 삶을 간직하면서 섞여있다. 작가는 삶을 자신의 기억 안에서 끄집어내어 회상의 형식 안에 넣어 보여준다. 김준이 보여주는 예술가(자신)의 현실은 "그 삶"에서 간격을 키워 가까움을 은폐당하고 있다. 삶의 가까움이란 살아가면서 맞부딪히는 모든 것을 부단히 제거해내는 고단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예술가(들)는 이 고단함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있다. 자기 자신이 부재하는 "자신의 삶"에는 그러나 행복한 "나의 가족"이 그 멀리 떨어져 있는 간격을 두고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위태함에서 "나"를 만나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블루스"의 애잔한 노래 소리로 삶을 위무한다. 보이는 데로 보는 것이 옳다면, 시각예술은 애초에 그 시작이 없었을 것이다. 시각예술가는 자신의 눈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항상 의구(疑懼,apprehension)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데로 보는 것을 한 번이라도 의심하며 두려워했다면, 보이는 것의 '그 가까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단박에 알아 차렸을 것이다. 김준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보여주는 것이 "보이는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을 두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앞 선 작품들에서, 온 몸은 유명상표로 문신처럼, 얼룩처럼 살과 피가 속아져 버린 공포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상표도 몸뚱아리도 "가까움"을 치장하지만 가장 멀리 있는 '나'를 가까이 불러내는 것뿐이었다.「블루진 블루스」에서는 아예 "가까움"이 작가의 기억-탈은폐된 곳으로 숨겨짐으로, 보이는 모든 대상들은 김준에게 가장 멀리 있었던 그의 세계에서 온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이 개인적이고 내밀한 "가까움"이 이상하게도 우리에게 거리를 없애면서 다가온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흔히 우리가 항상 "무엇"이리고 이름 불렀다. 이름을 부르면서 사실 우리는 그 이름 뒤에 숨겨져 있는 '그것들의 참 모습'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애초에 내 주위 세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그의 작품에서 불현 듯 만나고,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낸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각 자가 간직한 그 간격'을 함께 회상하자고 한다. 그것을 두고 블루스로 작가는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 내 준다. 본다는 것은 보임 안에 담긴 의미를 앞으로 던지고 물러서서 받아내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보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과 몸(또는 영(靈)과 몸(몸의 감각)에서 동시에 종합하는 일이다. 보는 감각은 앞에 던져진 것을 던진 채 받아들이고, 마음(또는 靈)은 물러서 받아냄으로 대상을 온전하게 하나로 만들어 간직한다. 그것을 두고 김준은 세계에 "눈뜸"으로 이야기 하려 한다.
김준_Blue jean blues-texi driver_디지털 프린트_120×70cm_2012
김준_Blue jean blues-o yun_디지털 프린트_210×120cm_2012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내 삶의 주위", 즉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그가 탈은폐시키고 있는 "나의 주위"에 대한 깊이는 각 자가 스스로 '자신-안에-들어가'서야 비로소 무엇이 자신의 주위에 그렇게 있는지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방향 잡혀 있다. 그 곳은 바로 감추어져 있지만 항상 열려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블루진 블루스」에서는 그 곳이 바로 기억으로 감추어져 있었던 "가까움"에서 멀리 와 있는 "나"이다. 동시에 그것을 회상함으로 돌아가려는 지금, "멀리 와 있는 나"를 불현 듯 알아보는 "나"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청바지에 붙어 있는 브랜드가 바로 그런 "나"를 동시에 불러낸다. 작품 속 블루진의 브랜드는 작가의 딸아이 이름 "Pabi"다. "Pabi"는 "곳"의 두 지점을 연결하는 방향(vector)을 지시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고 바라 본 것은, "Pabi"가 자신의 세계에 오기 전이면서 동시에 "Pabi"가 있어 이제사 온전하게 그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눈뜸"을 통해 그는 감추어져 있었던 것을 개방된 지금의 자기 현실로 불러 올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블루스(Blues)는 또 다른 깊이를 간직한다. 이 번 작품들은 여러 개의 파편화된 의식의 대상들이 모여들고 흩어지면서 '하나'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작품 그 자체이면서 곧 작가의 회상과 기억 그 자체로 돌입함이다. 그리고 결국 '하나'로서 열려진 것은 지금 새롭게 얻어지는 개방된 세계다. 그가 구사하는 작업방식은 마치 재즈의 비밥(Bebop)처럼, 곡의 테마를 한 연주가가 연주하고 각 섹션(section)의 연주자들이 차례대로 독립된 변주를 하면서 느슨한 약속지점에서 합주(Jam-section)를 통해 곡을 완성해내는 것과 유사하다. 음악에 조예가 있는 작가로서 이런 발상은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따지는 일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김준은 자신의 작품이 비록 제작되어져 내보이는 것이지만, 작품이 마주하고 서 있을 지점에서, 즉 현실의 한 현장에서 이미지가 단순히 표상된 것으로서만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을 보여준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이미지를 비록 보이지만 그것에 근거하지 않으면서 대상들(눈에 보이는 것들) 안으로 밀고 들어갈 때, 혼자만 그것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삶의 지혜를 작품으로 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굳이 Blues를 통해 깊이를 더 한다. 그의 작품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동시에「블루진 블루스」에서, 더 나아가 "전체 작업"에서 Jam-Section으로 완성(깊이)을 향하고 있다. 작가의 눈뜸은 우리 주위 세계에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으로 창을 낸다.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해 우리는 이제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그 열려짐으로 초대된다. 그렇게 보이는 세계는 너무나도 넓고 깊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세계-안에-있으면서" 그 세계의 개방성에 감사를 모르고 살아버린다. 김준은 매일 그 창을 열지만, 아니 좀 더 확실하게 말해두자면, 그는 우리를 매번 초대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의 "눈뜸"으로 바라본 세계 안에서 거주할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렇게 감추어진 세계"는 그러나 그에게 절대로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상징이나 은유의 방식을 대입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우리는 그의 작품 안으로 곧 장 뛰어 들어가 눈을 크게 뜨는 방식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 기막힌 순간을 우리가 만일에「블루진 블루스」에서 찾아낸다면, 또 아는 가, 김준에게만 빛나던 그 청춘이 바로 나의 청춘이었던 것을 알아 차려버릴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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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is Terror






강영민展 / KANGYOUNGMEAN / 姜榮敏 / painting 2012_0525 ▶ 2012_0613




강영민_In the Skull Islan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6×135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강영민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5_화요일_05:00pm

기획 / 그문화갤러리

관람시간 / 12:00pm~01:00am / 일요일_12:00pm~10:00pm

그문화 갤러리 SPACE OF ART, ETC. 서울 마포구 당인동 28-9번지 1층 Tel. +82.2.3142.1429 www.artetc.org




그문화갤러리에서는 한국 팝아티스트 1세대인 강영민의 여섯 번째 개인전 『Love is Terror』를 기획했다. 이번 전시에서 강영민은 사랑을 죽음, 폭력의 다른 이름이라 말한다. 사랑이 만남과 이별의 단순한 시스템으로 환원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거대하다는 것을 직시한 작가의 내면적 충돌의 표현이다. 그래서 작가는 사랑과 죽음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개념으로 생각하며 '하트'의 음울한 이면을 그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누구에게나 벗어나고 싶은 만큼 동시에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싶은 것이다.
강영민_Love is Terro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09
강영민_Heart Factory_캔버스에 유채_71×66cm_2008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In The Skull Island」에서 작가는 해골 속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하트를 그린다. 작가의 자화상으로 표현된 이 하트는 동시에 해골 밖에 작은 배를 띄어 곧 떠날 탈출을 계획한다. 해골로부터의 탈출, 스스로 고립시켰던 자아를 다시 외부로 탈출시키는 것은, 다시 사랑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이렇게 끌어들이는 동시에 밀어내게 되는 사랑의 밝고-어두운 면을 강영민은 팝아트의 쉽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강영민_On the Clou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73cm_2011
강영민_Fe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2×62cm_2008

강영민은 캐릭터를 이용한 다양한 작업을 해온 팝아티스트이자 화가이다.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 '조는 하트(Sleeping Heart)'는 하트 모양의 얼굴에 무엇인가를 음미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트라는 보편적이고 몰개성적인 소재를 통해, 관객 각자가 다른 스토리로 감정이입하고, 일상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되기를 원한다. ● 그는 서울 지하철 을지로 3가역에 벽화를 제작하였으며, 6회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미디어 시티 서울, 광주 비엔날레, 뉴욕 덤보아트페스티벌등 주요 전시에 참가했다. 최근에는 현대백화점, 캐딜락, 뵈브클리코, DKNY, KUHO, 베이직하우스, 갤럭시노트와 함께 아트워크를 진행했다.
강영민_So far awa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1×53cm_2009
강영민_Smoking & Love Kill You Slowl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53cm_2012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트그림으로 현대인의 다양하면서 복잡한 감정을 유쾌하게 또는 신파조의 정서를 담아 표현하여 한국적 팝의 가능성과 표현영역을 확대시켰다. 강영민은 전형적인 반엘리트미학 또는 반미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팝아트의 정신과 미학을 21세기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 표현한다. 90년대 후반부터 '조는 하트'로 대변되는 유명한 하트 씨리즈, 전통적 권위를 해체하는 유쾌한 상상의 패러디 작품인 태극기 씨리즈, 아이러니컬한 관점을 잘 표현한 배고픈 돼지, 독특한 소녀 이미지 등, 작품 활동은 물론 다양한 기획활동과 프로젝트활동으로 팝아트가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고 작가의 활동력과도 관련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가이다. ■ 이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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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il Memories – THE BROTHERS






2012_0608 ▶ 2012_0731 / 일요일 휴관




이기봉_Black Misty_캔버스에 혼합재료_120×120cm_2012



초대일시 / 2012_0608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이기봉_하봉호_이경호_오용석_임영선 정영훈_이이남_강운_노상균_강애란_이길우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5월 한달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아시아미술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알리는 선구자 역활을 해왔던 고(故) 이원일 큐레이터를 기억하는 추모순회전시 『Wonil Memories – THE BROTHERS』展을 갤러리세줄에서 2012년 06월 08일 ~ 07월 31일까지 준비하였습니다. ● 독립큐레이터 고(故) 이원일은 중앙대 회화과와 미국 뉴욕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토탈미술관과 성곡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큐레이터를 역임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디어시티를 비롯하여 광주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세비야비엔날레, 타이페이 비엔날레, 프라하비엔날레 등에서 전시총감독으로써 역량 있는 한국작가 및 아시아작가들을 전세계 알리고자 쉬지 않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난징비엔날레 기획을 맡아 활동하던 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 본 전시는 그동안 고인과 함께하였던 작가들이 작품을 기증하여 모인 전시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갤러리 세줄
하봉호_redSignal_디지털 프린트_150×234cm_2012
이경호_No-Signal(Help) Bush&Bin-Laden Violation_렌티큘러_75×113cm_2008

'행복한 예술 전투기 조종사'의 죽음과 형제들 -『Wonil Memories-THE BROTHERS』展에 부쳐 ● 고(故) 이원일 큐레이터(1960-2011)는 한 번 계획을 세우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처럼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쉰이란 길지 않은 생애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재능은 있으나 미처 드러나지 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롯데갤러리 큐레이터를 시작으로 토탈미술관과 성곡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의 학예연구실장 등 공사립미술관에 몸을 담으면서 재능 있는 작가들을 발굴해 냈다. 보스 기질도 강해 때로는 작가들과 마찰을 빗기도 했지만, 일에 대한 열정으로 녹여냈다. 밤을 새워 술 마시고, 토론을 하고, 때로는 격렬한 논쟁도 불사하던 그였다.
오용석_Classic no. 1978, Siamesemontage.no2-애욕전선_설치
임영선_윤회_기계시스템, 사운드, 센서, 수지_130×30×30cm_2011

고(故) 이원일은 평소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행복한 예술 전투기 조종사'라고 불렀다. 그 자신의 비유대로 그는 매사에 전쟁에 임하는 장수처럼 용감무쌍했다. 그래서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많은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큐레이터나 예술감독 선정을 위한 프리젠테이션은 수차례의 사전 연습과 치밀한 준비로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성공은 늘 그의 편이었다. 두 차례의 미디어 시티(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을 비롯하여 타이페이비엔날레, 상하이비엔날레, 세비야비엔날레, 그리고 가장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독일 ZKM의『Thermocline of Art: New Asian Waves』로 이어지는 국제전에서 공동감독이나 큐레이터직을 수행한 것은 이러한 열정의 결과로 여겨진다.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무대를 종횡으로 누볐던 그는 미디어 전문의 독립 큐레이터로서 국제적 위상을 확고히 하는 한편, 한국의 우수한 작가들을 국제무대에 소개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재사박명(才士薄命)이라 했던가, 평소에 건강만큼은 자신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정영훈_Metaphysical Draw_ComicCity_ED 2.7_디지털 프린트_87×150cm
이이남_사계-인왕재색도_LED TV_00:04:00_2012

그가 전시를 매개로 생전에 친교를 맺었던 작가들의 범위는 매우 넓다.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 미국, 캐나다 등 국적을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중국 작가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중국 현지 추모식으로 표현했고, 벤쿠버에 소재한 'Centra A'는 스카이프 방송을 통한 추모방송을 전 세계에 내보냈으며, ZKM은 즉각 추모 특집을 꾸며 홈페이지에 올렸다. 또한 페이스북은 그의 위상을 '공인(public figure)'으로 표기했으니, 이야말로 그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평가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강운_물위를 긋다_종이에 담채_101×68cm_2011
노상균_Recording (Hermann Prey-m-p-violet)_ jacket, sequins on record_34×54cm_2009

난 2012년 1월 11일,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평소 그를 아꼈던 사람들이 묘소 앞에 모여 조촐한 1주기 추모행사와 함께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그리고 한국미술관에 이어 갤러리세줄에서 열리는『Wonil Memories-THE BROTHERS』展은 평소 고인과 함께 했던 작가들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을 기리는 애틋한 마음에서 선뜻 작품을 기증하여 마련한 것이다. 이기봉, 하봉호, 이경호, 오용석, 임영선, 정영훈, 이이남, 강 운, 노상균, 강애란, 이길우 등이 그들이니 어디 내놔도 국제적인 작가로 손색이 없는 면면들이다. 부디 이들의 거룩한 뜻이 초석이 돼 장차 이원일 큐레이터를 기리는 추모 사업이 번창하길 빌 뿐이다.
강애란_BRIDA_LED lighting book, plastic box medium_27×19×7.5cm_2011
이길우_무희자연_순지에 인두, 장지에 채색_170×140cm_2011

이 글을 마치려하니 창밖에서 문득 까치 소리가 들려오니 좋은 소식이라도 오려나 보다. 그러고 보니 이 감독이 세상을 떠난 날이 '1'이 무려 다섯 개나 겹치는 행운의 날이었다. 2011년 1월 11일, 거기다 '원일(One1)'의 두 자(李, 二)를 합치니, 럭키 세븐이라! 이 어찌 상서로운 징조가 아닐 것인가! 이들의 정성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몇 자 적는다. ■ 윤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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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나展 / LEEMANNA / 李만나 / painting 2012_0606 ▶ 2012_0703



이만나_성_캔버스에 유채_193.9×25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104e | 이만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갤러리 현대_윈도우 갤러리 GALLERY HYUNDAI WINDOW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82.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가제로 써왔던 '성'을 정식제목으로 정했다. 더 좋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긴 제작시간 동안 편의상 불러왔던 제목이 이젠 익숙해져 버린 탓이기도 하다. 내가 이 곳을 처음 발견한 것은 작년 3월 초순경이었다. 딱히 발견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강변북로 대로변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던 것을 그곳을 자주 지날 일 없었던 내가 그제서야 보게 된 것이기에, 그냥 개인적인 첫 대면이라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이겠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작업의 거의 모든 대상들은 '이미 거기에 있어왔던' 것들이어서 오직 나에게만 특별한 '발견'이라고 명명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치 이 비일상의 공간이 일상 곳곳에 숨겨져서 나와의 대면을 기다리고 있는 듯, 우연히 불쑥 마주치게 된다. 그 장소나 대상이 나에게 꽂혀서 특별해지면, 그 순간부터 그 공간은 나에게는 '더 이상 거기에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실재하는 장소의 맥락에서 벗어나버린다. ● 제목이 '성'으로 정해져 버린 이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섬'이기도 하다. 아놀드 뵈클린의 '망자의 섬'이 왠지 첫 발견 때부터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성'은 이미 그 일상의 장소를 떠나 비일상의 다른 공간에서 하나의 섬처럼 홀로 떠있기 때문이다. ■ 이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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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애정행각기 (Love Affair of the Empress)








문범강展 / BG MUHN / 文凡鋼 / painting 2012_0608 ▶ 2012_0715





문범강_청랑을 품은 황후 Blue Wolf Embracing Empress_리넨에 아크릴채색_292×216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615e | 문범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08_금요일_06:00pm

갤러리 스케이프 기획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일요일_10:00am∼06:00pm

갤러리 스케이프 GALLERY skape 서울 용산구 한남동 32-23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Bikini '황후애정행각기'가 인간 마성의 회화적 보고서라고 했는데, 마성 속엔 파지티브한 에너지와 네가티브한 에너지가 공존한다. 어느 쪽이 더 강한가? BG Muhn 공존하기도 하지만 회복에 관심이 있다. 인간 마성이 소나기 흠뻑 맞고 난 후 먼지를 씻어낸 정화된 본 모습으로의 회복. 결국 인간성 회복이다. Bk 짜아식, 뭐가 그렇게 거창해? 거품 좀 걷어내고 시작하면 안 될까? 너는 소위 예술한다는 작가란 놈이 사색 좀 한답시고 겉폼을 너무 잡는 경향이 있어. 그건 그렇고, 황후와 인간마성이라고 한 그 얘기, 매력이 있긴 하지만 두 개념을 같이 묶기엔 좀 무리 아닌가? BGM '황후애정행각기'는 인간 문명의 음험성에 대한 나의 개인적 고찰. 5년 동안 해 온 회화 인스톨레이션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 가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인간이 퇴적해 왔다가 인간에 의해 붕괴되고 다시 어느 곳에서 생겨났던 문명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다. 과거 역사를 보면 거장巨張하고 찬란한 문명이 여러 곳에서 피어났다. 그런데 그러한 문명이 20세기를 넘어오면서 좀체 다시 생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은 확실에 가깝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 속에서의 깊은 문명은 향수를 자아낸다. Bk 잠깐! 자꾸 옆길로 새는 느낌이 드는 데, 황후와 마성에 대해 다시 말해 봐. BGM 보채지 마라. 생각이란 서서히 갈피를 잡아서 풀어나가야 제 길을 찾는다. 황후와 문명은 둘이 아니다. 황후란 하나의 심벌. 아이칸 iconography 이란 말이다. 쉽게 말해 스타벅스 커피와 같다. 현대사회에서 초록색 문양하나 내 세우고 물장사를 하는 스타벅스가 커피의 아이칸인 것처럼 황후는 내가 만든 인간 문명의 아이칸이다. (중략)
문범강_청랑을 탄 황후 Empress on Blue Wolf_리넨에 아크릴채색_292×216cm_2009~10

어느 날 내가 잠시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앉아서 그림을 그리다가 벌어진 일인지 누워서 눈을 감고 자면서 생긴 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꿈을 꾸었다. 아마도 허리 곧추 세우고 그림을 그리다가 한 순간 생각을 이 백년 전쯤으로 던져 생긴 일인지도 모르겠다. 베이징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그냥 거기가 편했다. 자금성에서 덕종융유황후를 꼬드겨 내 등에 태웠다. 내 등은 털이 성성했다. 털은 푸른 색이었다. 나는 늑대였고 융유황후는 나를 등푸른 늑대라고 청랑靑狼이라 불렀다. 황후는 궁궐에 새벽이 오기까지 운무에 촉촉히 젖도록 내 등에 타고 돌아다녔다. Bk 꿈이라기 보다는 한 편의 신화 같다. BGM 그래서 내가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거다. 맞다. 이건 내가 만든 신화다. Bk 아, 그러고 보니, 2010년인가 네가 쓴 책 '암호놀이'에 너의 신화에 대해 읽은 기억이 어림풋하게 떠오른다. 굳이 장황히 늘어 놓을 필요 없이 그 대목을 잠시 빌려오면 편할 것 같다. BGM 그러든지. [왜 하필이면 중국의 황후를 데려왔느냐? 이런 얼빠진 질문 같으니! 나에겐 어느 국가의 황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음험의 scale과 몸의 sensuality가 나의 target이다. 지구상 가장 음험이 깊은 곳은 중국이고 명성황후와 하루꼬황후의 젖에 비하면 융유황후의 젖가슴이 훨씬 더 육감적이다. 누구를 통해야 어두운 슬픔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가. 결국은 인간의 얘기를 하는 것이기에 기왕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황후가 한 밤중에 늑대등을 탈 수 있는 걸물이 내겐 중하다. 또한 센슈알리티와 더불어 섹슈알리티의 이슈를 들고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 11대 덕종이 자랄 때 젖이 부족하여 결혼한 후 와이프 젖만 찾았다는 얘기는 나의 창작이지만 나의 관심은 인간의 이런 액션 & 리엑션에 있다. 인간에 속한 일은 거의 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가능하다'로 귀결될 수 있다. 섹슈알리티의 속성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어찌하여 수많은 암수 중에 눈에 불꽃이 튀는 짝쿵들이 있을 수 있는가. 내막을 들춰보라. 죽은 덕종의 어머니는 평생 자식에게 모유를 실컷 빨려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40이 되기전에 눈을 감은 그녀는 덕종의 와이프로 다시 찾아왔다. 사발젖에 가득찬 모유를 보유한 채. 현상의 화려함! 과거가 미래를 통해 다시 현재로 되돌아 왔지만 현상은 친절한 설명을 베풀지 않는다. 나는 이들의 내막에 관심이 있고 나의 예술은 그 내막의 현상이다.] Bk 너의 창작 신화가 저 두 걸개그림의 바탕 얘긴가? 족자 형태 같은데 싸이즈가 제법 크다. 황후가 푸른 늑대를 탄 그림이 있고 또 다른 그림은 늑대가 황후를 품은 것인지 황후가 늑대를 품은 것인지 묘한 포즈구먼. BGM 늑대 등에 탄 황후가 융유황후다. 젖가슴이 포인트다. 모유가 충만하다. 동시에 섹스어필해야한다. 내가 저 황후의 아들로 세상 빛을 보았더라면 섹스와 모유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을 터인데 아깝다. Bk 변태. BGM 변태적인 성향은 누구에게나 조금은 있게 마련이다. 나는 문학적으로 말한 것 뿐이다. (중략)
문범강_그녀, 황후 24, Lover,Empress 024_캔버스, 투명필름에 아크릴채색_38×30cm_2010
문범강_그녀, 황후 72, Lover,Empress 072_캔버스, 투명필름에 아크릴채색_38×30cm_2010

Bk 황후초상화 72점 말이야, 왜 72야? 그리고 페인팅 인스톨레이션이라고 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 BGM 72라는 것은 동서양에서 흔한 숫자을 빌려왔어. 12 간지니, 조디액 zodiac이니, 12 달이니 하는 그런 흔한 숫자. 그걸 계속 더해가면 72도 되고 108도 되고. 내게 더 시간이 허락되거나 이 시리즈에 흥미가 지속된다면 어쩌면 지금의 72점을 108점으로 채울 수도 있을거야. 페인팅 인스톨레이션이라는 말은 가변성, 즉 전시장소에 따라 저 72점을 융통성 있게 설치할 수 있다는 얘기야. 워싱턴에서는 72점을 상하로 3 줄씩 설치를 했었는데 서울의 갤러리 구조상 2 줄씩 설치를 할 수도 있다는 장소 포용성으로 보면 될거야. Bk 72점의 황후 초상화는 어떻게 진전이 된 것이야? 모델이 있었나. BGM 모델이 있다. 중국 지방 관공서나 사당에 비치했던 목판화 황후 전신상이다. 오리지널 판화를 12점 구해서 얼굴 부분만 면도칼로 따내어 모델로 사용했다. 그런다음 얼굴을 베꼈지. Bk 어떻게? BGM 영구성이 뛰어난 반투명 재료인 DURA-LAR라는 세룰로이드 같은 재질 위에 연필로 황후의 외곽선을 우선 베꼈는데 오리지날 황후의 모습을 그대로 베끼고자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베끼는 과정이 복사기에서 여러 장을 출력해 내는 것과 같다. 다만 하나 하나 손으로 그린 수제품이란 점을 제외하곤. 얼굴표정을 제외한 황후의 의관 등 문양의 아웃라인이 손으로 복사되어 나왔다. 인터넷에서 남의 글을 퍼가거나 jpg 이미지를 떠가는 데 원본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가져가는 시대적 현상을 고려했다. 일단 이 부분의 복사과정이 완성되면 본격적인 해석이 가해진다. 문양의 테두리 선은 거의 다 동일하지만 입혀진 색은 한 점 한 점 다 다르다. 또한 얼굴의 이목구비가 전부 다른 표정을 짓는 본격적인 회화 과정을 거친다.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권위를 하나의 고정틀[template] (궁중의관의 문양 등)로 잡고 그 틀 속에서 생명체는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낱낱의 생명체는 여자이거나 다른 생명체로 나타난다. 절대적이라고 휘두르는 권위도 사실은 한 생명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잠시 가능할 뿐. 황후는 주로 여성으로 나타나지만 승냥이로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주먹으로 대신되기도 한다. 어느 황후는 한 철 사는 것이 이리 헛된 데 여름 뒷간의 파리와 그리 다를 바 없다고 큰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니 눈물이 순간 수백 마리의 파리로 바뀐다. (중략)
문범강_하얀 절 White Obeisance_리넨 족자에 아크릴채색, 오리지날 목판화_130.3×194cm_2008~10

Bk '하얀 절'이란 두 쪽짜리 작품, 먼지 냄새가 배어 있는 데, 왜 그래? BGM 오리지날 황후 족자에서 묻어나는 오래된 때. Bk 숨겨 놓은 얘기가 있을 것 같은데 BGM 이 그림은 일명 '춘자 황후'라고도 부르는데 이 것 그리면서 내가 '안팍이 여의하다' 라는 시를 한 편 써 보았는데, 너의 동의 없이 읊어 보겠어. 구름은 떠돌다 안착할 곳이 있기나 한 가. 이내 흩날려 희뿌연 연무라도 남기지 못 한 채 사라져 버릴 것을. 힐끗 뒤돌아 본다. 한 점 아쉬움 남길 여지도 없다 하거늘. 그 순간 먹장이 몰려온다. 내가 청나라 황후년을 잡아 기어이 조복을 받으리라 했더니 어느 새 누드되어 다가왔다. 먹장 구름을 타고. 동대문 광장시장에 들러 흰 레이스를 하나 사왔다. 황후 팬티로 제격이다. 청나라 황실 야사를 훑어보니 젊은 황후는 속곳을 입지 않는다고. 사발젖으로 이름 난 덕종융유황후를 왼쪽에 모셨다. 유두가 하늘 쪽을 향해 3도를 겨냥한 그 기세는 온 궁궐에 쩡쩡했다. (6억 중국 여성 인구 중 유두가 수평에서 1도 상향 위치한 여인은 불과 150명에 불과했으니 3도라는 각도는 성경처럼 숭고하다.) 오른쪽엔 효전황후를 모셨다. 57%만. 백 프로 다 모시지 못한 사연은 그녀의 품행이 백 프로 방정한 까닭이었다. 홀딱 벗고 덤비는 이 치열한 구도救道의 조아림에 윤리적으로 반반한 황후가 범접하기엔 판이 그리 용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름하여 '황후애정행각기(하얀 절)'이란 타이틀을 깔았다. 지극한 절은 조복調伏이다. 조복은 안팍이 여의하다. 내부로부터의 항복이 완결판으로 끝날 때 몸 속 1 억 2 천의 신들이 백기를 들고 항복 해온다. 투항한 신들을 참수하고자 하는 무모가 잠시 욕정처럼 치솟을 지라도 오죽하면 슬플 비悲 자字 를 사용했을까. 자비 慈悲라도 아이스크림처럼 핥자. Bk 끝났냐? BGM 아직 쬠 더. 춘자의 아량은 그녀의 오지랖처럼 넓다. 벌거벗고 덤비는 황후에게 춘자는 그녀의 피앙새인 청랑을 임대해 준다. 청랑 靑狼. 이 푸른 사내가 누구인가. 늑대의 습격은 빙빙 돌면서 시작된다. 가장 치명적인 급소를 한 번에 물든지 앞발로 내리쳐야 하기에 빈틈을 노린다. 아무리 황후가 나체로 엎드려 코 앞의 타격 범위내로 들어와도 청랑은 점잔을 뺀다. 청랑은 안다. 하얀 조복을 달성한 황후에겐 나와 너가 따로 없다는 것을. 내가 저 여인을 살해하면 나 스스로의 살해가 이뤄지기에 이 번거로운 마음을 행위로 옮기기엔 청랑의 푸른 털이 민망해 한다. (중략)
문범강_그녀, 황후-디지털 스킨, She, Empress-Digital Skin_합판, 리넨에 아크릴채색_41×31cm_2012

Bk 2012년 들어서 새로 한 '그녀, 황후'는 다른 72점과는 상당히 다른 맛인데. BGM '그녀, 황후' 제목 뒤에 부제 비슷한 것을 달아 놓았어. '시간 저편' '쿠테타' '디지틀 스킨' 그리고 '스마트 폰' 등등. 그런데 얘들은 앞으로 발생할 시각적 소요의 주모자들이지. '시간 저편'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녀는 확고한 권위를 입고 한 없이 어진 인간성을 들고 나오는 데, 그 어질다는 게 소름끼쳐. Bk 어진데 왠 소름? BGM 생각해 봐. 사람이 어질고 또 어질면 그거 고름이야. 물러 터진다고. 냄새나. Bk 그럼 '쿠테타'는 냄새 안나? BGM 저 아이는 너무 똘똘해서 문제. 얼굴의 형상을 봐. 어디 평범한 데가 한 곳이라도 있나. 저 애는 앞으로도 성형이 많이 필요해. Bk 이 작품들이 시각적인 소요의 주모자들이란 얘긴? BGM 반란이지. 특히 '디지틀 스킨' '쿠테타' '스마트 폰'이. 디지틀 픽쓸digital pi×el이 둔갑한 이미지들이지. 지금 사람들이 디지틀 세계에 빠져 익사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장난을 좀 쳤지. 슬쩍 시각적 마법의 가루를 뿌렸다고나 할까. 디지틀 세계에서 발생하는 데모는 통제가 안 되는데 그걸 잘 처리하는 게 내 임무이기도 해. 처음의 72점 황후 중에도 한 점이 있는데, 제일 마지막 72번의 등번호를 달고 있는 황후가 디지틀 이미지의 첫 순진한 시도였어. '쿠테타' '디지틀 스킨' '스마트 폰'은 시각적으로 분열증세를 일으킨다고 보면 될거야. 내가 가끔씩 작업하는 자체가 지겨워 새로운 모반을 시도하거든. 나 스스로 나의 시각세계에 가하는 쿠테타인 셈이지. Bk 시각의 정신분열. 그것 괜찮다. BGM 괜찮다 안 괜찮다 그런 것 보다는, 엎어버리는 셈이지. 잘 자라고 있는 채소밭을 통채로 엎어버리는. 그런 파괴 뒤엔 통열이 오거든. 아주 짜릿한 자학이라고나 할까. 그 쓰라림으로 한 몇 년 작업을 지속할 수 있어. 그게 건전지가 되어 다 소모될 때까지. Bk '디지틀 스킨'은 페이샬 리컨스트럭션 facial reconstruction의 요소도 보이는 것 같다. BGM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 내가 이 작품 하면서 인공스킨을 만들었어. 산업비밀이라 여기서 말할 순 없지만 아크릴릭 물감으로 만든 인공 디지틀 스킨이라고나 할까. 따로 만들어서 캔버스에 이식시켰더니 줄기세포 보다 더 성공 확률이 높았어. 금방 본체와 동화되어 숨쉬면서 자생력을 지니게 되었어. (중략) ● 묻겠다. 이 번 중국황후 프로젝트와도 관련이 되는 질문이다. 네가 한반도 출생이며 대학까지 서울서 나왔다는 정체성에 대해 너의 작품으로 나타낸 적이 있는가. 아직 없다면 앞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는 있는가? BGM 우라질!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단어가 아이덴티티와 디아스포라다. 그거 다 뿌리가 없다는 얘기거든. 그 단어들이 지닌 정치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매력 때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모양인데 생각이 덜 떨어진거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나는 그대로 나의 정체다. 무슨 정체성을 어디서 또 찾는다 말인가. 나는 한반도에서 태어나 동양사상과 서구교육제도의 혼합체에서 성장했다. 무슨 바람에 실려 지금은 미국땅에서 작업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예술가일 뿐이다. 생명체로 치자면 단지 지구인일 따름이다. Bk 귀엽다. BGM 지랄! Bk 예술한다는 놈들은 다 말이 거친 모양인 데. BGM 내가 말이야, 아침에 눈뜨고 화실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 살아 있구나. 내 몸 속의 세포가 말한다. 시발, 이 짓거리하다가 휙 그냥 가도 괜찮은 짓을 하고 있구나. 나는 그렇게 살아. 말이 거칠다기 보다는 내가 부여받은 이 세상에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진골로 파고 들다 보니 그 속에서 나오는 휘파람 소리지 뭐. Bk 쩝. BGM 우리 대화, 여기서 그만 마칠까. 애썼다. Bk 황후, 잘 모셔. 예사 분들이 아닝께. BGM 그래봐야 내 붓끝에서 놀지. 푸하하! Bk 무슨 웃음소리가 그래? BGM 내 가슴 속에 표범 한 마리를 키우거든. 걔가 웃는 소리.
문범강_황후애정행각기 (Love Affair of the Empress)展_갤러리 스케이프_2012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 스케이프는 재미작가 문범강의 개인전 '황후애정행각기(Love Affair of the Empress)'를 6월 8일부터 7월 15일까지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2010년 갤러리 스케이프의 개인전 '암호놀이'에서 선보였던 '춘자 시리즈'와 드로잉 연작과 2010년 워싱턴의 아메리칸 유니버시티 뮤지운의 캇젠 아트 센터에서 선보였던 '황후애정행각기' 시리즈의 연장선으로 더욱 풍부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 '황후애정행각기'는 페인팅 인스톨레이션 프로젝트로서 어느 청나라 황후의 초상화로부터 시작된 드로잉 연작 72점, 청랑(靑狼)을 탄 황후, 청랑을 품은 황후로 이름 지어진 대형 족자 작품 2점, 하얀 절, 꽃잎 황후, 그녀-황후, 황후의 낙관으로 구성된다. 진시황릉을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은 '황후애정행각기'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아름다움과 추함, 지식과 무지, 귀족적 존재와 일반적 존재 등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상반된 성향을 이야기한다. 작가의 은밀한 상상력으로부터 시작된 황후라는 가상의 인물은 여러 모습으로 탈바꿈하면서 관객들을 감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이야기의 세계로 초대한다. (맨해튼 무당과의 대화 中) ■ 갤러리 스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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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Fantasy'?在的幻境








김시하展 / KIMSIHA / 金霞 / installation 2012_0609 ▶ 2012_0622 / 월요일 휴관





김시하_blooming young art 3_워터 파이프_850×700×70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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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609_토요일_05: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쿤스트독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사람들이 원하는 건, 실재의 삶이 아니다, 실재의 삶은 마주하고 나면 더 잔인하기에 사람들은 이상의 나를 세워놓고, 그 이상치가 자신의 실재의 삶도 구성한다는 환타지를 가진다. 즉, 사람이란, 조작되거나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자신을 착각하는 것이다. 마치 빈 건물과 같고, 영혼의 껍데기인 육체와 같다. 과연 진실이란 건 있을까. 가두고 강제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과연 '나' 라는 존재가 남아 있는지 궁금해졌다. (2012년 1월 작가노트 중)
김시하_blooming young art_파이프, 라이트_700×650×1200cm_2012

「real fantasy」는 2010년 가을 무렵부터 시작된 사진과 설치의 혼합작품이다. 중국에서 내가 거주하던 지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지어지다 만, 유럽식 건축양식의 단지가 굉장히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었다. 나는 그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사람의 아무런 흔적이 담겨있지 않지만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빈 건물들 사이로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실재의 나와 내 이상 속에서 존재하는 듯한... 건물로 치자면 새집과 오래된 집과 같은 괴리감, 그리고 마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혼재된「낯섬」을 느꼈다. 그리고 이 낯선 경험을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니, 많은 곳이, 이런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고 중국의 경제발전과 건축 붐으로 많은 곳이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채 이렇게 텅 비어져 있었는데 그 까닭이야 내가 깊이는 알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일전에 식탁작품을 진행하면서 느꼈던, 그 부재감과 사람이 머물다 지나간 자리, 혹은 사람이 채워지지 않은 자리의 흔적에서 유추하는 가상의 삶, 미래정원의 가상으로 만들어진 세계 등, 삶이 가진 거짓과 진실의 교묘한 줄타리기의 느낌을 이 곳이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시하_real fantasy2_디지털 프린트_74×110cm_2011
김시하_real fantasy4_디지털 프린트_140×96cm_2011

실제의 삶을 구성하거나 재현하거나 방식에 있어서 나의 방식은 억압과 분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중앙의 설치물은 자연과 인공, 현실과 이상의 사이 어디쯤이다. 억압하고 강제하는 듯한 구조물, 그리고 살아 있지 않은 도시의 잔재물, 둘은 같은 나무지만, 이 사이를 넘나드는 듯한 오브제로, 빈 건물과 같은 경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작품은 최대한 간결하고, 단순해야만 했다. 많은 걸 보일 수도 , 풀어내놓을 수도... 기존의 파이프 작품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진행해야만 했는데, 파이프-blooming young art 작품은 공간의 확장성을 기반으로 뻗어나가면서 공간 자체를 작품화했지만 이 번 작품은 거친 자재를 최대한 그대로 드러내놓으면서도 과하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용접 자리 하나 까지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2012년 작가노트 중_Real fantasy/blooming young art –sihakim's statement)김시하
김시하_real-fantasy1_디지털 프린트_96×140cm_2011

김시하는 경희대학교 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계원조형예술대 동시대미술 연구과정을 수료, 최근까지 중국 북경에서 거주하며 작업해왔다. 2012년 인천 아트 플랫폼 레지던시, 2008년 고양 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에 참가경험이 있으며 2011년『his,her stories, ㅡMK2 gallery, Beijing』,『look up-force gallery, 798, Beijing』 2010년『핑야오 international photo festival, 핑야오, 중국』『어서오세요- 정재욱, 김시하 2인전 space15, seoul, korea』『식사의 의미-여덞가지 스토리 전 고양 아람미술관/ korea』,『일상의 연금술 -국립현대미술관,christchurch art gallery, christchurch,newzeland』, 『미술관 봄나들이 -서울시립미술관 seoul,korea』등 중국과 한국의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




Main key-word of principal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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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안경 Old Glasses






이여운展 / LEEYUWOON / 李汝云 / painting 2012_0611 ▶ 2012_0623




이여운_가회동 11번지_천에 수묵_130×19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여운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11_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가회동60 GAHOEDONG60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gahoedong60.com




어릴 때 보던 TV 드라마 속 보통 사람들이 살던 집의 이미지는 내겐 참으로 생소하였음이 분명하다. 우리집과는 분명 달랐다. 기억할수 있던 순간부터 내가 살았던 집은 아파트였다. 그리고 옆집에 살던 친구의 집도, 앞동에 살던 친구의 집도 나의 집과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였다. 그래서 TV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당이 있고 그 가운데 수도가 있고, 게다가 건넌방에서 다른 가족들까지 같이 살고 있는 한옥의 구조는 매우 이상해 보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그러한 구조를 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드라마 속 한옥의 구조는 보통의 시골에서 볼 수 있는 한옥의 구조와는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여운_가회동_천에 수묵_130×162cm_2012
이여운_옥인동_천에 수묵_130×162cm_2012
이여운_노틀담 수녀원 아네스 공부방_천에 수묵_93×117cm_2012

그동안 개발의 붐에 휩쓸려 무시되었던 한옥이 요즘 들어 그 기능의 훌륭함과 과학성이 다시 재조명 되면서 예전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옥마을들이 전국적으로 열풍을 몰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 안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광지화와 상업화도 속속 진행중이다. 그 중의 하나인 북촌에서 옛날 드라마 속에서 보던 한옥의 구조를 볼 수 있었다. 작은 공간 안에서의 효율적인 분배, 그리고 가파른 산중턱까지도 주거 공간이 차지할 수 있게 그 구조들을 이어주던 골목골목들이다.
이여운_가회동 11번지 망 31번지_천에 수묵_97×73cm_2012
이여운_또다시 한옥마을 1_천에 수묵_30×30cm_2012 이여운_또다시 한옥마을 2_천에 수묵_30×30cm_2012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인 집의 형태는 그 시대의 생각과 그 민족의 정서를 대변한다. 북촌을 답사하면서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한옥에서 자란 사람들과 이야기 할 기회가 많았었다. 개방적이면서도 적절히 폐쇄적이고, 많은 것과 소통할 수 있으면서도 적당히 독립된 공간을 제공해주던 그 곳에서 커 온 사람들의 정서는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살짝 걸쳐보는 것만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오래된 안경처럼 말이다. ■ 이여운
이여운_골목길 1_천에 수묵_24.5×28cm_2012



Old Glas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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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4


2012_0613 ▶ 2012_0619



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룩스

참여작가 서영철_장용근_전리해_황병욱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 6월 19일_10:00am~12: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이번 갤러리룩스 에서 열리는『META4』展은 자신의 위치에서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서영철, 장용근, 전리해, 황병욱 등 4인의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다. 사진, 영상, 그리고 회화 등 다양한 매체를 전공한 네 사람은 저마다 느낀 도시의 모습들을 자유롭고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서영철_Gray city-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32.9×48.3cm_2012
서영철_Gray city-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32.9×48.3cm_2012

서영철의 작업은 'gray city (회색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답답하리만큼 빽빽한 건물,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회색도시의 무미건조함을 중성적 색채, 흑백의 톤으로 표현하였다. 작가는 섬세하고 면밀한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동시에 회색도시를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 스스로의 욕망과 작가가 그리는 도시의 애틋한 그리움을 나타내었다. 또한, 감각적인 구성으로 조형미를 강조한 그의 사진은 일상 속 도시 풍경을 촬영한 것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매우 다른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장용근_대구백화점_잉크젯 프린트_100×150cm_2012
장용근_대구백화점-1_잉크젯 프린트_100×150cm_2012

획일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파편들이 모여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도시채집' 이라는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장용근은 세워지고 무너뜨리고를 반복하며 자연을 서서히 잠식해나가는 인공의 도시를 비판하고 있다. 백화점에 나열된 소비재, 건물에 붙어있는 화려한 간판들, 노래방입구, 각종 감시카메라, 대구 지하철사고 당시 조의로 내건 현수막 등 작가의 눈에 파고든 소재들을 촬영하고 수집한 뒤 이를 콜라쥬 형식으로 표현한다. 실재하는 풍경 속에서 수집된 작은 단위들을 세밀하고 집요하게 엮어낸 그의 이미지는 도시가 발산하는 무수한 욕망의 이미지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전리해_A scene of traces_C 프린트_2008
전리해_A scene of traces_C 프린트_2011

전리해는 도시공간 속 낡은 벽에 주목한다. 작가에게 벽은 단순히 외풍을 막기 위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과 추억을 심어둔 자리로, 낡은 벽이 견디고 지켜온 시간의 흔적을 통해 작가의 아련한 감성을 보여준다. 주로 재개발 지역, 재래시장 주변, 도심의 골목 등을 다니며 지역의 변화를 기록하고, 지역의 장소적 정체성을 재발견 한다. 작업은 수많은 세월이 담겨진 벽의 흔적을 기억하고,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기억해두었다가 물감으로 표현한다. 그 작업물을 다시 벽에 설치 촬영하여 실존하지 않는 새로운 흔적의 경관으로 나타낸다. 작가는 회화에서 설치, 그리고 다시 사진이라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삭막하고 훼손되어 보이는 도시를 따스하고 생명력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 시킨다.
황병욱_Calmness (still image #1)_프로젝터, 싱글채널 HD 비디오_2012
황병욱_Calmness (still image #2)_프로젝터, 싱글채널 HD 비디오_2012
황병욱_Calmness (still image #3)_프로젝터, 싱글채널 HD 비디오_2012

황병욱의 영상작업은 물방울과 호흡을 코드를 사용한 한 일전의 작업들과 연결성을 갖는다. 무생물인 인형과 생물인 물고기 오브제가 공존하는 가상공간을 영상으로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평온하기만 했던 일상적 공간이 점차적으로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담담하고 냉소적인 시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영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을 나타내고자하며 관객들과의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유행을 쫒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4인의 작가의 작품에는 한결 같은 진실함이 묻어난다. 또한, 관계, 호흡, 조화, 어우러짐 속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도시의 면면들을 만나게 될 이번 전시는 관람객들에게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할 것이다. ■ 갤러리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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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less Plant


송영규展 / SONGYOUNGKYU / 宋英圭 / painting 2012_0613 ▶ 2012_0619


송영규_Nameless Plant 2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417a | 송영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 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위로와 치유를 위해 건네는 손, 열려있는 커다란 귀. ● 미술 작품을 통해 예술가를 만나고 소통하고 일을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더욱 소중해서일까? 어둡거나 고통스러운 정서를 담은 작품을 지속해서 작업하는 작가에 대해 훌륭한 작품을 내놓지 않아도 좋으니 멈추라고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러한 요구가 지극히 단순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기에 혼자 웃고 만다. 그러나 작품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때로는 절실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나 잭슨 폴록이 아무리 인상적인 작품을 남겼다고 해도 내게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아볼 것을 창조자가 제안한다면 단번에 거절하고픈 심정도 마찬가지 생각에서이다. 이런 나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삶의 가치는 오히려 고통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은 아니지만 고통도 아닐 터 어쩌면 눈앞에 보이는 행복이나 고통 이면에 내재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따져봐야 할 수도 있다. 삶에서 펼쳐지는 현상에 대한 동기와 과정, 결과 모두를 살펴보았을 때 유의미한 무엇인가가 포착된다면 우린 그것을 삶의 가치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송영규의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절망과 고통의 신호에 대해 면밀하게 생각해보고 싶은 이유가 그것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굳건하게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표현하는 일관된 정서는 더욱 호소력을 지닌다.
송영규_Nameless Plant 2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1

작품은 어두운 무대 위에 단 하나의 작은 조명만을 밝힌 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킨다. 물론 2007년을 전후로 하여 흰색 배경에 컬러감이 들어간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작가는 그 당시 색다른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감히 밝은 색상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들 속의 흰색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작품은 연극적이며 은유적인 방식으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직접적인 감정의 분출보다는 마치 감독이 배우에게 연기를 주문하는 것처럼 송영규는 작품속의 이미지에게 어떤 연기를 하도록 지시하는 듯하다.
송영규_Nameless Plant 2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12

모노드라마의 연기자는 작가 자신과 주변 인물들, 신체의 일부인 손과 귀, 가장 최근작으로는 화분이다. 각각의 작품에서 그들은 모두 주인공인데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이기 때문이다. 신체 일부분을 비롯하여 정물에 속하는 화분까지도 등장인물이라 명한 것은 그것들이 분명 감정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없는 화분이지만 그의 일련의 작품들이 가진 맥락을 통해 보면 고립되고 에너지를 잃은 인물이나 시간마저도 멈춘 듯 그려진 화분은 같은 운명을 지닌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작가는 화분을 대지로부터 '분리된 존재', 관계로부터 '단절된 존재'로 상정하여 작품의 소재로 선택했다고 설명한다. 이 등장인물들은 작가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표현한 것이기도 하고, 작가가 이해하는 인간실존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홀로이며 단절되어 있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숨 막힐 듯하다. 완전한 독존.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주인공의 고통이 단절로 인한 것인지,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를 고립시킨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유야 어떠하건 간에 누구와도 교류되지 않는 상태는 설명할 필요 없는 고통 그 자체이다.
송영규_Nameless Plant 2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80.3cm_2010

또한 그의 작품들은 간혹 섬뜩한 느낌마저 지닌다. 그것은 작품이 묘사하는 감정적인 고통이나 짙은 어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다가 접시위에 날 것 그대로의 재료가 나왔을 때와 같은 당혹스러움이다. 기대 이상의 날것과 같은 사실성으로 인해 작품을 보는 순간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매우 사실적이고 솔직한 표현을 통해서 작가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심을 담았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누군가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의 경이로운 체험이 된다. 그것이 비록 매우 짧은 순간일 지라도 말이다. ● 곧이어 양가적인 감정이 찾아온다. 놀라면서도 공감되며, 섬뜩하면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절망스러우나 그러기에 희망적이다. 송영규는 끊임없이 고독감과 상처를 그리는데 나는 자꾸 그림에서 그 반대의 것을 향한 갈망을 함께 느낀다. 그는 마치 고발자 같기도 하고 자백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사실 이 고통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이러한 사태의 책임자는 우리 모두이다. 그러기에 실존의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단절, 소통의 부재, 그로인한 인간의 고통 그 자체는 악(惡)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폭풍과 같고 홍수와 같고 가뭄과 같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조건이다. ● 그러나 우리는 자명한 현실 앞에서 저항하고 분노한다. 송영규의 작품은 고스란히 그것을 드러내주고 있다. 어둠속에서 낱낱이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어둠은 고통과 상처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배경이 되고 있으며 한편으로 그것을 감싸안아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밝은 배경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간혹 어둠이 제거된 그의 작품에는 동시에 빛도 제거되어 고통을 어루만져줄 공간적이고 심리적인 장치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에 있어서 공간은 그저 3차원을 묘사한 회화적 기법의 결과만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안전하게 숨을 수 있기에 상처를 드러내도 좋은 곳으로서의 어둠. 이것은 어쩌면 빛보다 따스한 어둠이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그의 작품이 절규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송영규_Nameless Plant 2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cm_2011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내는 모든 성향은 유아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그 시기에 형성된 경향성이 평생을 걸쳐서 반복(reaction)되어 한 인간의 가족관계, 연애관계, 사회적 관계 등 모든 대상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외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러한 경향성 중의 한 가지이다. 그런데 그 경향성의 종류는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두려움, 분노, 결핍, 욕망을 얼마나 크거나 적게 억압했느냐에 따라 몇 가지 정도의 유형을 보인다. 이토록 단순한 경향성의 종류를 알게 되면 인간이 이렇게 단순하고 비슷한 존재인가라는 사실 앞에 허탈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다 사랑받길 원하고 안정을 누리기를 원하며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송영규의 작품을 대하면서 비슷한 공감과 위로를 받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겪는 소통 불능의 절망은 태어나면서부터 반복될 운명이었다. 어떤 부모도 아이의 욕구와 정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채워 줄 수 없으며 개인은 자라나면서 자신의 원초적 감정을 억제하고 포장하는 것을 배우면서 사회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이라 할 때 생각을 나누는 언어 주고받는 행위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소통이란 더 깊은 차원의 것이다. 서로의 감정을 알아주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의 신호-두려움, 분노, 욕망 등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교류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감춘다. 피상성은 거기서 비롯되며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도 피상적이 되는 일도 일어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바로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송영규의 작품은 피상적인 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고발이며 끊임없는 방어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피상성으로부터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는 적어도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송영규_Nameless Plant 2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0×150cm_2011

정신분석학은 병리적인 심리 상태를 겪고 있는 개인을 치유하기 위해 그가 경험한 모든 감정을 분석한다. 매우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은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감정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상처받은 채 해소되지 못한 감정을 반복하려는 마음의 경향성 때문이다. 여기서 '분석한다' 함은 상처 입은 감정을 제대로 다시 '만나주는 것'이다. ● 한편 불교의 오래된 구도 방법 중에 '위빠사나'라는 것이 있다. 위빠사나의 원리를 한 마디로 말 한다면 '보면 사라진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명료히 바라보면 그 대상-생각과 감정-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라진다'함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말이다. 만난다는 것, 본다는 것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피상적인 관계에서 진정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뜻이다.
송영규_Nameless Plant 1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진정한 소통을 경험 할 수 있는 첫 번째 'action'이자 가장 큰 치유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송영규의 작품은 마치 작가의 손끝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심리적인 고통과 절망을 그려내고 있다. 정면으로 직시한 실존의 고통은 짜릿하면서도 서글프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작업은 의미가 있다. 드러내고, 보고, 만지고, 느끼고, 듣고, 인정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쌓이면서 그의 마음에서는 자유의 폭이 그만큼씩 더 넓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둡고 탁한 그의 작품이 그 무엇보다도 따뜻한 위로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득 그가 그린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감싸 안은 '커다란 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 신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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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다시 빛난다


조충래展 / CHOCHOONGRAE / 趙忠來 / painting 2012_0613 ▶ 2012_0619


조충래_波 2012_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26i | 조충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2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다시 빛난다 ● 자정에 가까워지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휴식을 취하는 시간임에도 작업실의 열기는 식지 않고 있었고 사방에서 파도가 치는 한 가운데 그가 서있다. 생명의 근원적 모태인 바다와 심연 같은 밤이 어우러진 풍경에 “밤은 그대를 어머니같이 지탱하고 있다”라는 노발리스(Novalis)의 싯구가 떠오른다.
조충래_wave 2012_Ⅲ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2
조충래_波 2012_4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조충래의 그림은 빛으로 충만하다. 어쩌면 파도는 빛을 보여주기 위한 매개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울대며 부서지는 파도의 결을 따라 빛이 춤추고 있다. 반복적인 리듬을 타고 일어나는 파도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새로움을 찾는다. 화가들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으면 고갱은 “만족할 줄 모르고 발정해 있는 우리의 눈”이라 했겠는가.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바다와 파도만을 바라봤지만 그에게 파도는 여전히 팜므 파탈(femme fatale)처럼 두려움과 매혹이 한데 섞여 일렁이고 있다. 생명의 근원인 바다의 역동적인 힘이 밀려와 부딪치는 모래톱은 씨앗 하나 싹트지 않듯이 아름다운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치명적이다.
조충래_wave 2012_Ⅰ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2

파도와 모래톱, 둘 사이를 엮어주는 것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반복적인 운명인데 작가는 여기에 시간의 순간성과 연속성을 중첩시킨다. 파도가 크게 일면서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과 모래톱에 새겨진 상처(발자국)가 파도에 의해 ‘치유’되는 시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짙푸른 바다의 심연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면서 보여주는 것은 근원적인 내면의 빛이고 더욱이 그 순간이 찰나이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작가는 말한다. 파도가 해원(海原)에서부터 간직해 왔던 깊은 속마음을 들키는 순간인 것이다.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찾는 행위는 사실 빛과의 싸움이다. 파도에 산란되는 빛의 눈부심 앞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내적인 세계로의 침잠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소리만 듣는다는 것은 은유적인 세계로 미끄러지는 순간이다. 소리에 눈이 멀어 버린다면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마음에 의해 투영된 그림자, 즉 욕망의 그림자들로 형성된 세계일지도 모른다. 파도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파도소리는 흘려보내고 찰나의 아름다움만 캔버스에 담아낸다. 소리가 비워지는 그 순간이 바로 파도가 가장 아름다운 속살을 보여주는 순간이고 이때 파도의 순수성이 나타난다고 작가는 말한다.
조충래_wave 2012_Ⅸ_모래에 유채_60×91cm_2012

어쩌면 파도는 내밀한 욕망을 들켜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욕망은 부드러운 포말로 부서지며 모래톱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하지만 선택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 삶의 순간들처럼 파도는 쉼 없이 모래톱으로 밀려온다. 필자는 지난 전시회 서문에서 모래톱 위에 새겨지는 발자국과 그것을 지우는 파도의 모습을 인간의 실존적 선택의 순간으로 봤다. 의미 없이 남겨진 발자국들을 밀려오고 쓸려가는 파도가 반복적으로 지우는 모습에서 초월적 존재에 맞서는 실존적 존재의 모습을 본 것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표하는 모래톱 그림들은 각각 시간적 연속성을 가진 순간들의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발자국이 남겨진 모래톱으로 밀려오고, 머무르고, 쓸려나가고, 스며드는 파도의 연속성에 주목하면서 작가는 치유의 개념에 더 주목한다. 발자국이 파도에 의해 지워지는 과정을 바라보며 반복이 아닌 치유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의지가 강할수록 근원적 무게가 더해지는 발자국은 고단한 우리 삶의 숨은 얼굴이고 부드러운 포말 아래 은밀하게 밀려와 상처를 치유하는 파도는 에로스의 손길인 것이다. 인간의 가장 섬세한 부분인 영혼과 마음을 관장하기에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에로스가 발자국-상처를 사랑으로 어루만진다. 생성과 소멸로서의 파도는 사랑과 치유의 손길로 바뀌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파도는 욕망을 정화시켜준다. 지워진 발자국처럼 욕망이 비워진 공간을 채우는 알 수 없는 충만감에 욕망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조충래_wave 2012_Ⅶ_모래에 유채_45.5×53cm_2012

감각적인 사사로움을 물리치고 시각의 순수성에 의지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는 심재(心齋)와 닮아있다. 참은 빈곳으로 보이기 때문에 비워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듯이 파도에서 파도가 비워지는 순간을 찾는 것이다. 소리를 경계하고 눈으로 응하여 마음으로 깨달아야 비로소 자연의 신묘함과 깊은 이치를 이해한다는 깨달음 때문인지 스타일면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에 치중했던 전작과 달리 대범하고 거친 터치가 화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근경 혹은 원경의 파도가 대범한 붓놀림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치 또는 아웃포커싱이 되어 원근을 강조한 것처럼 혹은 부드럽게 부서지는 포말의 느낌으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중심부를 받쳐주고 있다. 이로 인해 작품 안에는 두 개의 프레임이 존재하게 되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빛과 싸우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눈부심을 이겨내고 파도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다. 이 두 프레임은 파도의 일어남과 부서짐 그리고 빛의 산란에 맞추어 섬세하게 계산되어 있어서 언뜻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그만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세계의 참모습인지 아니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인지를 알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삶의 무게란 결국 자신의 의식 속에 갇혀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눈앞에 쳐져있는 “마야의 베일”을 걷어 버리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삶에 대한 고민과 번뇌가 쌓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조를 통한 성찰이고 결국 관조의 기쁨은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파도에 자신을 실어 비워내는 것에서 온다는 것을 작가는 파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충래_wave 2012_Ⅸ_모래에 유채_53×65.1cm_2012

다시, 조충래의 그림은 빛으로 충만하다. 파도 역시 비우면 비울수록 더 높이 솟구치고 더 많은 빛을 받아들여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빛은 아폴론적인 이상으로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고 격정적으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는 디오니소스적인 열정으로 세계를 온 몸으로 사랑한다. 끝임 없이 변하는 파도를 무섭게 응시하는 조충래의 시선은 격정의 고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대적 순간에 명하는 파우스트처럼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를 외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조충래의 파도는 아폴론적인 이상과 디오니소스적인 정열이 조화를 이룬 빛나는 풍경이 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은 다시 빛난다. ■ 노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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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CAME






서지원展 / SEOJIWON / 徐志源 / painting 2012_0615 ▶ 2012_0630




서지원_Artificiality Wind_리넨에 유채_145×160cm_2012



초대일시 / 2012_06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아트사간 GALLERY ART SAGAN 서울 종로구 삼청로 22 영정빌딩 3층 Tel. +82.2.720.4414 www.artsagan.com




현실과 회화의 경계 ● 무엇을 예술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혹은 무엇이 예술작품의 본질에 관해 기술하는 요소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미학자들은 한 인간이 자연적인 질료에 행위를 통해 미학적으로 합리적인 형식을 부여했을 때, 그리고 그 형식을 다른 사람들 혹은 예술전문가들이 그들의 감수성을 통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예술적인 오브제 혹은 예술작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자격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반성적인(reflective) 시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은 미술적인 접근에서 예술에 대한 정의적인 개념을 포괄적으로 예술의 상황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미술 작품의 제작 행위에 공예적인 실용성으로부터 벗어난 미학적인 본질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은 환영에 기반을 둔 재현의 왕국에서 인간 인식의 범주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회화작품은 세계로 향한 창문이 아니라, 이 세계를 인식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지원_安養川花盆木塔_리넨에 유채_110×120cm_2011
서지원_Empty Lot_리넨에 유채_130.3×97cm_2011

서지원의 작품은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통회화의 재현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게되면 그의 미술에서 분명히 환영적인 차원들이 그의 작품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1차적 지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미술에서 재현적인 것은 다분히 표면적이다. 그리고 그의 화면에서 적극적으로 보여지는 표면성을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의도했던 상식에 기반한 공간적 질서의 왜곡에서 비롯된 생경함에 비교해 설명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지원의 화면에서는 상식적인 질서들의 뒤틀림(twist)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지향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는 작가가 사물들의 물질적 존재성을 그대로 표면 위에 각인시켜 놓은 듯 이질성이 목격되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에서 형식과 배경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보다는 3차원의 공간에서 처럼 개별적 존재성을 주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같은 표면성은 미술의 전통적인 표현기법과 형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화면 속의 자연 풍경과 사물들의 비유기적인 조합이 서지원의 회화를 설명하는 적극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서지원의 화면에는 전통 회화가 가지고 있는 재현적 전통에서 볼 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생략되어 있는데, 인간의 삶을 재현적으로 대변해 줄 수 있는 상징성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환영적이기는 하지만 재현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연적이기는 하지만 의식적이기 때문에 다른 해석들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서지원_Empty Lot_리넨에 유채_130.3×97cm_2011
서지원_Empty Lot_리넨에 유채_165×180cm_2011

서지원 작품의 화면에 서술되어 있는 형상들의 이질성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낮설게 하기"의 감성과 비슷한 부조리극의 정서를 상기시킨다. 마치 '이것은 그림이다'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여기서 관객의 정서적인 감성들은 회화작품의 내용으로, 혹은 내러티브로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화면의 표면에 부딪치고 다시 반사되어 허공으로 산개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관객들은 풍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풍경의 주인공이자 일인칭적인 전지적 관찰자가 되지 못하고 화면 외부에 머물게 된다. 그의 화면은 현실과 회화의 경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질적인 물성을 지닌 화면 속의 오브제적 형상들은 각각이 강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예상치 못한 정서적인 전이를 가져온다. 즉 회화의 전통에서 볼 때 그런 오브제들은 상징이어야만 하는데, 말하자면 형상은 전통 회화에서의 아이콘들이 보여주는 상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그런 형상들이 스스로의 물성을 끊임없이 드러냄으로써 상징성은 스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 종합을 지향하지 않는 이런 전이의 과정이 회화의 표면과 회화의 내용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관객들의 시선은 그의 회화에 정착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의식 혹은 자의식의 상태로 복귀하게 된다. 이성적 분석에 의존하여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회화의 오브제 형상들은 그런 일방적인 상황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능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서적으로 휴식이 불가능한 장소인 자동차 도로와도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물에 대한 인식의 차원과 그 인식의 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사물에 대한 정의의 문제에서 발생하는 자의식적인 간극이 만들어내는 '낮설음'이다. ● 자의식은 의식의 과잉으로부터 비롯된다.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든 의식의 과잉은 한 존재의 표면과 내부의 괴리감을 만들어낸다. 브레히트는 오히려 연극에서 그런 괴리감을 그의 예술적인 장치로 만들어버렸다. 서지원이 미학적으로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의 화면에서는 예술적 자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현실과 회화의 비타협적인 경계가 던져놓는 존재론적인 간극들이 존재한다. 회화라는 절대적인 미학적 세계로부터 이전 단계의 자연적 의식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게 해주는 간극은 역사라는 시간 의식으로 부터도 벗어나 있고, 그렇다고 절대적인 회화의 의식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서지원_Empty Lot_리넨에 유채_110×120cm_2011
서지원_Empty Lot_리넨에 유채_80×90cm_2011

서지원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자의식적인 상황과 중첩되어 있는 의식은 그의 회화의 표면과 내용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양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의식과 재현적 형상들이 서로 이질적으로 공존하는 회화적 공간의 낮설음으로 인해 관객들은 그의 작품으로부터 서로 화해될 수 없는 파편적 의식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파편성은 회화적 의식과 회화로의 의식적 지향이 충돌함으로써 발생하는 낮설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형식적, 상징적으로 화면에 혼재하는 파편성은 개념적인 회화로서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화면에 묘사된 오브제들의 물성이 가지고 있는 존재성이 드러내는 독립적인 의식들이 작가의 회화에 대한 개념적인 장치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작가의 의식과 회화적 환영의 충돌은 그의 회화를 연극성 혹은 의식의 자기기술적(self-descriptive)인 회화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 정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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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ule of Reproduction I








2012_0613 ▶ 2012_071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613_수요일_06:00pm

세미나 / 2012_0622_금요일_04:00pm 주제 / 사진의 재현과 복제 Representation & Reproduction 참여 / 참여작가 및 오상택(기획), 박영택(평론, 경기대교수) 참여방법 / 이메일 사전예약 info@gallerychosun.com (성명, 연락처, 소속을 기입바랍니다.)

참여작가 강석호_강홍구_김도균_김병훈 김연용_오상택_이종명_홍범

주최/주관 / 갤러리 조선 후원 / 서울문화재단 기획 / 오상택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조선 GALLERYCHOSUN 서울 종로구 소격동 125번지 Tel. +82.2.723.7133~4 www.gallerychosun.com





The Rule of Reproduction I ● 지난 2011년 4월 서울시에 소재한 갤러리 Factory에서는 동네 사진관을 재현하는 '후광을 찍어 드립니다: 이종명 사진관' 프로젝트가 진행 되었다. 그 당시 본 The Rule of Reproduction 팀은 사진관 운영의 주체인 이종명(사진가)에게 사진관을 이용하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각 가정에 보관 되어있는 옛 아날로그 사진 중 재현(복원)해 보고 싶은 사진을 수집 해달라는 의뢰를 하였다. 그 결과 소정의 archive 자료들이 모였고 본 팀은 그 자료들 중 한 장의 사진을 선택해 찍혀있는 이미지를 사진적 방법론에 의해 각자 작가의 관점에서 재현해 보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김병훈_Time of Portrait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60cm_2012

사진에 있어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사실적 재현, 기록이라는 기능과 재현된 이미지를 원본으로 무한한 복제가 가능해지는 이 두 가지의 물리적 속성은 사진이 갖는 주요한 매체적 특징이자, 사진의 고유성,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이 속성들은 다양한 사진적 담론을 끌어내는 사진의 원천이라 할 수 있겠다.
강석호_무제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60cm_2012

먼저 사진에서의 기록이란 일차적인 사건의 서술적 기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된 이미지에 의해 시간(과거의 시간)까지도 함께 동봉되어 그 시간을 증거하는 지표가 된다. 그러한 시간을 박제하는 사진의 본성은 찍혀있는 그 시간에는 사건을 전달하고, 의미를 전달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수단으로 그 쓰임이 있을 수 있고, 또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매개로서, 또한 개인, 시대의 역사를 반추하는 기록의 쓰임으로, 혹은 개인과 개인의 역사가 모여 시대를 증거하는 서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김연용_The Untitled film Stills_B/W 젤라틴 실버 프린트_40×57cm_2012

그리고 다음으로 사진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로 복제성을 들 수 있는데, 사진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대상에 비추어진 빛을 필름 혹은 디지털 촬상소자에 모아 감광하고 이 감광된 빛으로 필름에 다시 대상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사진의 기계적, 물리적 과정으로 사진은 필름이라는 복제가 가능한 원본 이미지를 갖게 되고, 이것은 사진의 또 하나의 주요한 고유성이자 특수성인 사진의 복제성 즉, 이미지 전달의 사회적 확장 기능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종명_Unicut Freetyle Scratching #2(Unique edition)_젤라틴 실버 프린트_60×50cm×4_2012

사진술은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기 전, 찍는 순간, 찍힌 후로 나눌 수 있겠다. 사진을 찍기 전 단계에서는 본인의 개입 즉, 본인의 내, 외부적 주관이 찍는 대상 및 방법 등을 결정하게 되고, 찍는 순간엔 물리적인 환경(대상)에 반응한 개인적 주관이 개입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찍힌 후엔 일반적으로 개인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고, 그 전 단계까지 에서 예측했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사진의 기계적 프로세스에 충실 한다. 즉, 작가가 개입하는 것은 찍는 순간까지이고, 그 후의 과정은 실질적으론 그때까지의 이미지를 실재하는 사진 이미지로 구현해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상, 인화과정에서 개인의 개입이 전혀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사진에서 실재적으로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현상, 인화의 과정은 데이터, 기계적 프로세스에 의해서 지배된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의도(개입)한 전 단계까지의 과정을 충실히 옮기기(재현) 위한 사진의 물리적 프로세스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사진의 프로세스 방법이 사진에서 중요한 방법론이 되는 이유는 사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사진의 복제성을 담보 받기 위함인 것이다.
홍범_사진의 기억I_혼합재료_41×57×3.5cm_2012

사진은 이러한 기본적인 방법을 통해서, 보여지는 대상을 개인의 주관, 혹은 개입을 통해 이미지로 구성하고(사진을 찍는 순간까지), 기계적인 프로세스에 의해서 실체 하는 이미지로 구현된다(현상, 인화 과정을 통한 이미지의 실재화). 사진은 대상이 존재하여야만 이미지의 구현이 가능해진다는(대상에 대한 사실적 재현)속성과 함께, 대상을 사진 이미지로 만드는 물리적 프로세스 과정에서 복제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갖는 것이다. 사진에서의 이러한 매체의 물리적 속성에 대한 담론은 사진 매체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사진에서 사진기의 기계적 시선과 작자의 개입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이러한 복제를 위한 기계적 프로세스가 가지는 의미(담론)는 주요한 이야기 거리가 아닐 수 없겠다.
강홍구_사진의 관계_사진 콜라주_71×84cm_2012

사진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사실적 재현과 복제가 가능한 매체의 탄생으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 혹은 환경에 대하여 기존 인식에 대한 의문과 관점의 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대상과 환경을 인식 하는데 대한 주요한 인문학적 토대와 담론 또한 이끌어 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디지털 시대의 사진에서도 사진의 쓰임이나 그 쓰임의 관점이 사진 산업의 발달로 인해 많은 부분 확장되어 가고는 있지만, 이러한 사진의 고유한 성질들은 변화되지(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사진매체의 확장에 기본을 이루고 있다.
김도균_t.r.o.r(Ⅰ,Ⅱ,Ⅲ)_젤라틴 실버 프린트_48×160cm_2012

이번 전시 'The Rule of Reproduction I'은 크게 보면 사진은 어떤 특성을 가진 매체이며, 그것을 통해 어떠한 사회적, 미학적 역할을 수행 하는가? 라는 물음을 가지고 출발 하였다. 그리하여 작가 각자가 이러한 질문을 성찰하며,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다양한 각도, 관점에서의 사진적 실험으로 해석, 재현 해보고 그것을 통해 그 물음에 대해 같이 생각해 보는 전시이다. 이것은 또한 앞으로 사진이 사회적으로 미칠 수 있는 영향 즉, 사진을 통한 의미전달 방법의 확장, 사진 이미지가 의미전달의 수단으로서 사회적으로 가질 수 있는 파장에 대해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해 본다. ■ 오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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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ur World / Flower project N°2




오유경展 / OHYOUKYEONG / 吳有慶 / installation 2012_0615 ▶ 2012_0628 / 월요일 휴관



오유경_Flour World_밀가루_가변크기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오유경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15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_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시작 Gallery SIJAC 서울 종로구 인사동 39번지 2층 Tel. +82.2.735.6266 www.artandsmart.co.kr



Flour World / Flower Project N°2 ● 밀가루를 이용해 이 시대 도시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는 프로젝트이다. 밀가루의 뭉쳐지는 성질을 이용해 다양한 사물들을 캐스팅하고, 이러한 작업을 반복하면서 공간을 채워나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마치 모래성과 같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유지 된다.
오유경_Flour World_밀가루_가변크기_2012

몇 년 전 라다크를 여행하는 동안 모래로 제작한 다양한 만다라그림을 보았다. 만다라는 세상의 여러 모습을 상징화시킨 형태와 기호로써 표현되는데 모래로 만든 만다라는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제작한 후 다시 붕괴해 버린다. 특히 만다라를 제작하는 라다크의 승려들은 무엇인가를 일으켜 세우고 완성과 함께 소멸되는 명상적 작업행위를 통해 인간을 우주의 사이클과 연결시킨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모래만다라의 제작과정 전반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그 영감을 통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오유경_Flour World_밀가루_가변크기_2012
오유경_chair floured(Flower Pjoject)_형태를 녹이고 만듬을 반복하는 프로젝트_ 천, 밀가루풀_가변크기_2009

밀가루로 만들어진 도시는 항상 무겁고 웅장하게 세워져 있는 세상의 모든 인공물들이 그리 튼튼하거나 깊지 않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 표현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절대적이거나 이미 구체화 되어있는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눈앞에서 항상 새롭게 다시 태어나고 움직이는 가변형태의 세계이다. 때문에 나는 이 밀가루로 만들어진 도시가 고정되어있지 않고 관람객의 참여를 통해 계속해서 변화되어나가도록 구성할 것이다. 관람객들로 하여금 이러한 프로세스에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고정된 시선을 버리고 늘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우리들이 절대적이라 믿고 사는 삶의 무거운 짐들을 심적으로나마 잠깐 덜어줄 수 있는 그런 전시가 되길 바란다. ■ 오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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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임하는 그들의 자세




지현석_정미애展 2012_0618 ▶ 2012_0803



지현석_벽1(我)_ 합성수지, 유리, 우레탄도장_33×33×36cm_2010


초대일시 / 2012_0618_월요일_12:30pm

관람시간 / 월~금_09:00am~05:30pm / 토요일 예약 관람

샘표스페이스 SEMPIO SPACE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231번지 Tel. +82.31.644.4615 www.sempio.com



거창한 대서사시나, 텍스트적으로 읽혀지는 작품들만이 예술이라는 이론이 절정이었던 미니멀리즘, 모더니즘의 시대가 지나가고 언제나 역사는 순환하듯, 이에 반하는 다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도래하며 다원주의적 성향이 정점에 달하고 있다.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은 고급문화라고 스스로를 엘리트화 시키며 예술가들은 철저하게 지적 탐구에 대한 욕망을 지적 허영심으로 변질시키고-어찌 보면 강박적일 수도 있는-지극히 심오한 주제들만이 작품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스스로를 상등화 시키려는 현상이 극에 달하여 공허함을 야기시켰고 이후의 출현하는 모든 작품들은 패러디이고 인용으로 전락 할 뿐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자취는 근본적인 예술의 회화적 감성을 도외시 시켰으며 대중들은 미술품을 습관적으로 읽으려고만 하는 감상법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술은 스스로 대중문화로 발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점 좁혀온 것이다 . ● 팝 아트나 키치처럼 읽혀지기 쉬운 미술만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용이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편견은 버리고 회화적 감성이 풍부한 작품들도 개념, 텍스트 본질 자체가 대중화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이번 전시가 기획된 것이다.
지현석_벽2(애처로운 손길)_합성수지, 유리, 우레탄도장_33×25×84cm_2010

이번 기획전에 참여하게 된 두 작가는 무거운 주제들은 뒤로하고, 작가 개개인의 일기로써의 수단, 또는 작품을 제작하는 행위 자체를 수련의 한 방법으로 해석해 나가며 감상자에게 작가 고유의 감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고통스러운 자신의 일상을, 본인만이 느꼈던 일상의 이야기들을 음악,영상, 글 등이 아닌 미술품으로 감상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한다. 그들이 예술에 임하는 소소한 자세로 부터 출발 된 작품들은 감상자 역시 각각 본인만의 소소한 감성과 일상을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의도하고자 하는 수 없이 많고 다양한 현대 미술의 풍류 속에서 예술을 대하는 다양한 자세 및 방법들 중 하나인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에 임하는 작가의 자세, 예술에 임하는 감상자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위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김연희
지현석_벽3(상처)_합성수지, 유리, 우레탄도장_24×26×40cm_2011
지현석_벽5(我2)_합성수지, 유리, 우레탄도장_36×30×12cm_2012


혼란스러운 세상, 기쁨과 눈물이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공간, 바다만큼이나 넓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우리는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들 세상이라는 바다를 개개인이 내린 정의 속에서 그것을 믿으며,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동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름답게 그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으로는 비극적인 영화처럼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려본 세상도 검고 탁하며 가식적이고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고통은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고 성숙하게 만들었다. 고통 속에서 상처받은 내 마음을 달래 보려 한다. 솔직했고, 겸손하지 않았으며, 어른처럼 성숙한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되어서 구원의 손을 내밀었고 아플 땐 소리쳤다.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참지 않았다. 작업 속에서 유리라는 것은 세상이라는 것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투명하지만 단단하고 그러나 깨질 수 있고 날카로움의 상징이었다. 나에게 주문을 걸었고 그 속에서 나는 내담자가 될 수 있었다. 울었고, 소리치며 한 장 한 장 채워 나갔다. 어린 날의 그림일기처럼... 계속해서 일기처럼 써 내려 갈 것이다.

지현석_벽6(냉정한 도시)_합성수지, 유리, 우레탄 도장_41×46×23cm_2012


시간이 흐르고 생각했다. 나의 영화는 비극을 맞이하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닌 감독이 되어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지는 않은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은 상처들을 품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언젠가 극복하기 위한 나의 몸부림 정도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 그것을 극복했다는 행복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룬 따뜻한 작업이 나오길 바라면서 행복한 인생의 자서전을 쓸 것이다. (작가노트 중) ■ 지현석

정미애_AND_와이어_400×300×300cm_2011


늘 반복되기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치는 상황이나 장면, 그리고 외부의 충격으로 인한 이미지나 형상들을 작가는 개인적인 시선에서 선이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과거의 자신만의 추억, 일상의 이야기들을 작품으로 나열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독특한 성질, 방식들을 갖는데 와이어를 통한 늘어짐과 구부러짐, 재료의 연결을 통한 가변적 성질 그리고 빛과 선의 그림자를 통한 새로운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선 즉 와이어라는 재료는 만들어지기 이외의 효과, 설치되는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형성하여 상상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작가의 개인적 시선에서 본 일상성을 통한 재현적 내면고찰을 보여주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한 형상의 시각 효과로서의 선이 아닌 공간의 개념으로써 작가의 내면세계를 생동한 화면으로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다. ● 작품은 나의 인생의 줄거리이며 하루하루의 나를 표명하는 일기장이다.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은 일상생활에서 문학적으로 시와 같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즉 단어 속의 또 다른 의미를 찾듯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경험과 기억 속의 아련한 추억을 되돌려 보듯 서정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사물을 와이어라는 재료를 통하여 드로잉 하듯이 설치한다.

정미애_사랑을 쓰려면 연필로 쓰세요_와이어_30×200×30cm_2010


일상적 체험을 통한 세계 ● 예술이라는 것은 인간과 인간 활동의 장(場)으로서의 세계를 반영한다고 볼 때, 일상적인 것들이야 말로 우리가 인간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일상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음으로 이를 통한 외적인 현실의 반영이 무엇보다 용이하며, 예술의 소재를 가장 가까운 곳 즉 일상의 삶 속에서 찾으려 하는 것을 그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이렇듯 작가가 체험했던 다양한 일상은 그 어떤 초월적인 곳에 있지 않았으며 또 그 어떤 이데올로기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일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작된다. 일상적 체험의 내면세계를 표출하기 위하여 엄격함과 고고함, 엄숙함과 진지함을 버리고 오히려 가벼운 정신의 자유분방 함으로서 삶들에 얽혀있는 관계 속으로 가보고자 하였다.

정미애_HAND_와이어_200×200×100cm_2009


형상의 모호함 ● 작가의 작품은 재료의 성질과 엉킴의 작업방식 결과로 인해 형상의 모호함의 결과를 낳는다. 조명에 의해 다른 분위기를 갖거나 보는 각도에 따라 형상이 달리 보이는 형태를 갖는다. 시각적 혼란에 의해 이중적으로 형상과 의미를 낳는 작가의 작업들은 일상의 사물에 대한 폭넓은 시각과 틀이 없는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작가가 설치한 일종의 장치이기도 하다. 기억이미지의 재구성 ● 작가의 작품의 소재들은 과거의 기억과 일상적 체험에 비롯되어 내면적인 성숙과 현재로서의 존재함에 본질적인 세계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기억 속의 과거는 일종의 추상화된 과거다. 다시 말하면 의미화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정서와는 다른 정서로 보존되어 있는 과거다. 모호했던 실제를 분간할 수 있는 형태로 그리고 변형된 정서의 형태로 기억은 과거를 보존하고 재현한다.

정미애_사소한 기억_와이어_200×30×20cm_2011


그림자를 통한 새로운 이미지 ● 현대미술에 있어서 영역과 개념의 확장은 재료와 매체의 혁신에 대한 실험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재료를 통하여 연구자만의 실험정신으로 조각의 재현적 주제나 이미지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재료의 영역에서 탐구하다 보면 물질적인 이미지를 통해 허공의 이미지 즉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는 공간에 대한 배치로 인해 재료의 직접적인 조형물보다 공간의 물성으로 이루어진 재료의 간접적인 이미지 창조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와이어(선) 라는 재료의 특성상 빛에 의한 반사나 투과되는 이미지는 작가에게 있어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렇게 형성된 새로운 이미지는 물질적 형상과도 연결되어 또 하나의 차원을 형성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얻은 경험에 의해 많은 것을 알고 느끼게 되며, 이로 인해 개인만의 새로운 조형세계를 만들어간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의 일상적 체험에 의한 내면세계의 표현을 추구하여야 하고 그 출발점을 일상적 경험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선은 일상과 공간을 이어주는 매개적 요소로 출발한다. 또한 일상은 더 이상 영유의 목적이 아니라 소통의 소재로 확장된다. 이렇듯 작가는 내면세계를 공간적으로 표현하고자 가장 기본적 요소인 일상을 주제로 선택하여 선과 공간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표현하였다. (작가노트 중) ■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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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VS 이윤엽




한국민예총 룰루랄라 개관기념 배틀展 2012_0520 ▶ 2012_0715 / 주말,공휴일 휴관



이철수_나뭇잎 편지


초대일시 / 2012_0520_일요일_02:00pm

참여작가 / 이철수_이윤엽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공휴일 휴관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6-5번지 대광빌딩 3층 Tel. +82.2.739.6851 kpaf.kr



싸우는 사람 VS 성찰하는 사람? ● 『이철수 VS 이윤엽 배틀』展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 '싸우는 사람과 성찰하는 사람의 만남'이었다. 몇 년간의 열정적인 현장미술 활동으로 이제는 꽤 유명작가가 된 이윤엽, 일상과 생명에 대한 관조적이면서도 번득이는 통찰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나라를 대표하는 목판화가로 꼽히는 이철수. 얼핏 둘은 매우 달라 보인다. 굵고 거친 선과 가늘고 날렵한 선의 대립은 한 쪽은 전투적이고 다른 한 편은 명상적이라고 생각해버리기 쉽다. '싸우는 사람 VS 성찰하는 사람'이라는 구도는 여기서부터 비롯됐을 거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이런 생각들이 선입견에 기반한 편견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이철수_나뭇잎 편지
이철수_나뭇잎 편지

이철수의 작품은 그가 매일 생산해내는「나뭇잎 편지」가 주종을 이룬다. 편지의 내용은 4대강, 정부의 방송장악, 생명의 경이, 원자력의 맨얼굴, 비정규직 등을 가로지른다. 생명에 대한 성찰, 권력에 대한 경고, 욕망에 대한 경계,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고발까지 세상사를 두루 훑어낸다. 작품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이걸 싸움이라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생명의 가치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풍경이 대비될 때는 가없는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이들을 '누가 떠밀었나요?'라고 묻는 순간, 가슴이 서늘하다. 문득 내 손을 펴고 물끄러미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꿈틀거린다. ● 이윤엽의 작품들은 싸움의 현장과 갈등의 주체들을 보여주지만, 그가 일상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을 담아내는데도 게으르지 않다. 「호박에 깔린 사람」은 이웃집 노인이 매일 가져다주는 호박을 처리할 방법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던 작가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싸움의 현장에서 잡아채는 모습들에서도 전투적이라기보다는 명랑함이 살아 있다.「공권력과 맞짱뜨는 사람」이나 오키나와의 노인이 듀공을 타고 미사일을 막아서는 작품 등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몇몇 작품에서는 현실의 제약을 쉽사리 뛰어넘지는 못하겠지만, 쉽게 물러나지도 포기하지도 않겠다는 의지가 우회적인 방식으로 유머러스하게 드러난다. 판화로 치자면 이철수의 최소주의와 이윤엽의 현장주의를 구분할 수 있겠으나, 결국 근본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삶에서 길어올리는 성찰이다.
이철수_나뭇잎 편지
이철수_나뭇잎 편지

두 작가 모두, 일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과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동경을, 딱딱한 권력과 눈먼 탐욕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싸움은 성찰에서 시작되고, 성찰은 싸움에서 다시 돋아난다. 성찰과 싸움을 통해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다른 세상에 대한 꿈, 희망, 기대, 바램이다. 새로운 세상이 특별한 세상일 리 없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이 득세하지 않는 세상, 폭주하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작가들은 오늘도 현실과, 자신과 싸우고 성찰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안태호
이윤엽_맨드라미 꽃밭에서_종이에 목판_2010
이윤엽_민주경찰_종이에 목판_2009

룰루랄라 진화하는 예술 ● 여기 유쾌한 만남의 장이 열린다. 만남의 주인공은 이철수와 이윤엽이다. 이철수는 현실 비판과 저항의 언어로 1980년대를 갈파했으며, 1990년대 이후 명상적인 성찰의 언어로 대중성을 획득했다. 그는 민중미술의 전형성으로부터 진일보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근년에 제작한 판화들과 더불어 팬과 붓으로 그려낸 글그림들을 선보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상적인 언어의 판화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나왔는지를 짚어볼 수 있는 생생한 그림들이다. 그는 판화와 그림들 속에 동시대의 사회적 의제와 개인적인 사유를 담았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붓과 팬과 칼을 드는 그의 진지한 태도가 오롯이 담겨있다. 공인으로서 또는 사인으로서 예술가 이철수가 품고 있는 고뇌와 희망이 묻어난다. 정제된 언어의 목판각 작업 이전의 생생한 날것들까지 만날 수 있어 더없이 좋다.
이윤엽_땅_종이에 목판_2003
이윤엽_승죽골사람_종이에 목판_2005

이윤엽은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목판화가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장르적 위상의 문제에 고정하지 않는다. 그의 장점은 오히려 예술 내부의 문제, 그러니까 장르니 기법, 매체, 양식 따위에 묶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추리에서 용산,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4대강, 그리고 강정마을에 이르기까지 지난 10년간 첨예한 사회적 의제의 현장에 뛰어든 이윤엽의 예술행동은 예술동네 안의 예술이 아니라 세상 속의 예술을 창출했다. 그는 현장에서 절규와 환희, 두려움과 용기, 죽음과 삶을 만났다.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동네박물관을 만들기도 했고, 거대한 크레인에 걸개를 설치하는 등 파견미술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예술적 실천으로 첨예한 사회적 의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 온 이윤엽은 우리시대 예술행동의 최전선에 서있는 예술가이다.
이윤엽_프리티벳_종이에 목판_2008

이들의 만남이 열리는 곳은 새로이 문을 여는 민예총의 사무실 겸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국 예술계의 한 진영을 대표하는 거대조직 민예총의 육중함을 덜어내고, 세대와 지역, 계층, 장르 등 그 모든 차이들을 훌쩍 넘어서 모두 함께 '룰루랄라' 경쾌하게 만나는 곳이다. 한국민예총 굿위원회와『연영석 vs 야마가따 트윅스터』의 공연이 함께 열리는 공간 개막일에 두 예술가가 전시를 연다.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 세대인 이철수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윤엽, 두 예술가의 만남은 목판화라는 장르 동일성 때문만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세대공감에 있다. 굳이 말을 짓자면, 80년대 민중미술가와 486예술가의 만남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도 상투적이다. 이들의 행보는 세대와 진영의 논리를 넘어서 끊임없이 동시대성을 획득해 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여기 새로운 진보의 장이 열린다.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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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다방


2012_0619 ▶ 2012_0708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수환_벤자민 필립스_웁쓰양_이퐁_전윤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금,토_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인천아트플랫폼 INCHEON ART PLATFORM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18번길 3 B동 Tel. +82.32.760.1000 www.inartplatform.kr


인천아트플랫폼에서는 2012년도 입주예술가 창작지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김수환, 벤자민 필립스, 웁쓰양, 이퐁, 전윤정 5인이 참여하는『우주다방(宇宙多房)』展을 6월 19일부터 7월 8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B동 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우주다방(宇宙多房)』展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단서를 제공하는 이퐁 작가의 글로부터 출발하여 각자의 예술적 소우주(宇宙)를 보여주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이퐁 작가가 길을 걷다 골목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우주다방'을 보고 떠오른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 우주다방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연출은 우리들의 무뎌진 상상력을 자극하며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플랫폼이 된다. 전시에 참여한 이들은 우리의 일상을 탐닉하는 몽상가가 되어 직간접적 체험, 평범한 일상 속의 불명료한 것, 논리적으로 납득 불가능한 것, 알 수 없는 순간들, 구체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는 순간과 감성들을 탐구한다. ● 우주다방 - 이퐁은 우주다방이라는 특정한 상황설정으로 시작된 도입부분의 네러티브를 구성해 왔다. 제 3의 공간으로 이끄는 그녀의 작품은 현실과 비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상상력', '일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웁쓰양은 소설 속 '다방'을 전시장에 재구성하고, 시공간 이동의 능력자인 김 씨와 일련의 사건을 암시하는 장면을 이미지화 한다. 소설은 일상의 장면을 묘사하며 사실에 기반 한 것처럼 보이나 김 씨가 담배연기로 터널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허구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작가는 이 같은 허구성에 주목하고 시각화된 이미지를 연출된 무대장치 가운데 놓음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와해시킨다. ● 이상한 우주의 엘리스 - 벤자민 필립스는 소설의 장면을 엉뚱한 상상력으로 재해석한다. 동화적 모티브를 기반으로 뒤틀고, 강조하고, 재조립된 이미지들은 생략과 강조를 반복하며 드라마틱한 형태로 전시장에 구현되어 극적인 요소를 배가시킨다. 전시장 벽면은 머리가 층층이 싸여 마치 케익 같아 보이는 소녀가 흔들거리며 돌고 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순간을 포착한 벤자민의 유머러스한 상황 포착이다. 전시장 벽면의 대형 드로잉은 '만약 ~이라면', '만약 ~할 수 있다면'이라는 긍적적이고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키워드가 된다. 전윤정은 "조심스레", "힐끗"과 같이 극도의 감정적 상태를 라인테이프 드로잉으로 묘사한다. 팽팽한 긴장의 상태, 예민한 감각의 변화 등과 같은 미처 표현되지 못한 생각과, 타인과의 오해와 갈등을 내포한 사회적 관계 속에 얽혀있는 복잡 미묘한 심리를 표현한다. 주변에서 수집된 풍경과 기억 안에 잠재된 불편한 의식의 드로잉들은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바라본 우리사회의 모습을 관통하고 있다. 김수환은 노숙자, 취객 등과 같은 우리 주변의 인물과 풍경들을 드로잉 한다. 꿈틀거리는 그의 자유로운 드로잉 기법은 경계 없이 확장되어가는 우주와 같은 에너지를 함축한다. 작가는 주변의 의미없는 인물들과 오브제들을 통해 무심코 지나쳤거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을지 모를 우주를 발견하고자 한다. 우리의 '우주', '희망', '이상'은 닿지 못하는 먼 곳이 아닌 우리 안, 우리 주변에 있음을, 나아가 결국 나 자신이 하나의 우주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 사라지지 않는 순간 - 이퐁 작가의 소설과도 같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시작되어 꾸물거리는 드로잉, 설치, 회화, 실재 다방의 오브제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예술장르간의 삼투작용을 통해 탄생된『우주다방』展은 5명의 재기발랄한 작가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다. 이들은 수잔 손탁이 언급한 '토성의 영향아래' 영향을 받은 벤야민처럼 거리, 길, 아케이드, 미로로 관통하는 예민하고 미묘한 관계에 대해 우울한 도시의 산책가가 되어 시공을 관조하기도 한다. 또한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또는 재크와 콩나무의 재크처럼 낯설고 두렵지만 기이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경험을 통해 예술이 가지고 있는 특성 중의 하나인 원초적인 유희와 상상력이 주는 즐거움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제, 5명의 작가들이 안내하는 각각의 출구에서 우주로의 히치하이킹을 경험 해 보자. 전시를 통한 다섯 작가의 우주로의 여행은 텍스트와 시각예술의 만남을 통해 생성된 강력한 에너지가 넘실대는 특별한 우주로의 여행을 선사할 것이다. ■ 오혜미
김수환_빅뱅_혼합매체_97×150cm_2012

우리는 우주다. 세상의 온갖 풍경과 사건 사고들이 뒤죽박죽 만들어낸 우주들이다. 얇은 경계로 둘러싸인 우주들은 작은 점에서 만나 또다시 뒤엉키고 분열하고 팽창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 김수환

웁쓰양_문명의 방II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2

소설 속 공간을 현실에 재현해 reality를 부여하고, 재현한 공간을 바탕으로 다시 소설 속 사건을 캔버스에 재현함으로써 텍스트와 공간, 이미지의 재연을 모두 한자리에 놓고 실제와 허구의 접점에서 그 모호한 경계를 보여준다. ■ 웁쓰양

이퐁_원고지에 펜글씨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루한 일상 곳곳에는 중대한 비밀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바로 좁은 골목길에 숨어 있는 우주다방처럼 말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그러니까 그런 '상상의 필터'를 끼우고 세상을 바라보면 지루하던 모든 것들이 비밀스러운 사연을 품은 특별한 무언가로 일제히 탈바꿈한다. 나는 내가 찾아낸 비밀스러운 사연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지루한 세상을 살아가는 바로 당신과 함께. ■ 이퐁

전윤정_다방多房중 생각의 배_종이에 펜_25×20cm_2012

조심스레 앉았다. / 한 장의 사진을 골랐다. / 힐끗 / "그럼."_우주다방 본문 중 ● 소설 속 우주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소설 속 여자아이와 김씨의 관계에서 현실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현실을(소설 밖의 이야기) '우주'로 이야기를 풀어 작업하고자 한다. 소설의 텍스트 '힐끗' 과 "그럼"을 통해 유추해낸 '우주' 이다. ■ 전윤정

벤자민 필립스_소녀_종이에 펜_21×15cm_2012
벤자민 필립스_소녀_종이에 펜_35×24cm_2012

만약 우리가 늘어나고 압축되고, 분해되고 재조립 될 수 있다면 여전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느낄까? 우리의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기 전에 얼마나 많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만약 사람들이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모두가 내일로 여행할 것이고 모든 것을 훼손하고 폭행하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이렇게 '실제'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범죄가 줄어들 수도 있고 사람들이 더 만족하거나 그냥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역겨움을 느낄 수 도 있을 것이다. ■ 벤자민 필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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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 4


박용석_아라크네展 2012_0620 ▶ 2012_0623



초대일시 / 2012_0620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 박용석_아라크네(김잔디, 이지연, 이계원)

주최/주관 / 캔 파운데이션 CAN Foundation 후원 / 파라다이스문화재단_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오래된 집 서울 성북구 성북동 62-10,11번지 Tel. +82.2.766.7660 www.can-foundation.org


개발과 재개발이 꼬리를 물고 순환하는 구조가 만연한 한국사회의 과도기적인 풍경을 가진 성북동, 그 중심에 세월의 변화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가옥 2채가 있다. 성북구 성북동 62-10, 62-11번지 주소지를 가진 이 두 채의 집은 성북동의 지역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이 가진 장소성과 역사성을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공간재생을 시도하고자 2009년 9월 시작된 오래된 집 재생프로젝트는, 예술가들이 오래된 집에 잠시 머무는 이방인이면서 거주자로서 공간을 해석하고 관찰한 흔적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공간의 변화는, 누군가가 살았던 기억의 집에서 예술의 흔적들로 또 다른 시간의 지층을 쌓아가고 있는 작가들이 공간을 모티브로 어떻게 작업을 실현시켜나가는지 주목하게 만든다. 세 번의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들이 공간을 관찰하고 해석한 방식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 첫 번째 입주한 변시재, 문영미 작가가 예술적인 공간으로 재생을 가능케 하였으며, 두 번째 입주한 김보아, 이다 작가가 공간을 구조적으로 접근하여 풀어갔다면, 세 번째 입주한 리금홍, 이지영 작가는 오래된 집을 모티브로 스토리가 있는 한편의 드라마를 만들었으며, 공간을 무대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기억을 가진 공간으로의 재발견을 보여주었다.
박용석_Exploation_DV 영상_00:06:40_2012
박용석_scene62-10_2012
박용석_'배다리' 드라마_HD 영상_00:05:35_2009
아라크네_Doll House Party 2
아라크네_House Warming Party 3
아라크네_Paper Ships

2012년 4기 작가를 공모하면서 선정대상의 범위를 개인에서 그룹으로 확장하였다. 그렇게 하여 선정된4기 입주작가는 '집'을 모티브로 작업하는 3인의 여성작가로 구성된 아라크네와 현대의 도시공간을 탐색하며 그 속에서 목격되고 경험되는 풍경과 현상에 대하여 작업해 온 박용석 작가이다. 2012년 3월 입주하여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바라 본 오래된 집과 오래된 집을 둘러싼 성북동이라는 지역이 갖는 특색을 이용하여 작업한 결과물은 2012년 6월20일, 오래된 집 현장에서 선보여질 예정이다. ■ 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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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Flower


신정옥展 / SHINJEONGOK / 申貞玉 / painting 2012_0620 ▶ 2012_0625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145×104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112g | 신정옥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신정옥의 회화-꽃, 우주를 흡수하고 우주로 환원되는 존재 ● 아마도 꽃은 최초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이 그린 소재이며, 가장 오랜 소재들 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많이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그려서 고갈될 법도 한데, 이런 염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듯 꽃은 지금도 여전히 그려지고 있다. 꽃에서 새롭게 캐낼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 여지는 앞으로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 꽃은 사물이되 특이한 사물이다. 그 속에 생기를 품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이처럼 매순간 변화하는 존재의 형태며 질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주의 깊게 보고, 사물과 존재의 이치에 공감한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사물과 존재는 얼핏 똑같은 것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매순간이 다르고 틀린데, 그럼에도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지식의 오류와 한계와 자기 합리화 탓에 똑같은 것의 반복인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내재화되어졌기 때문이다. 개념을 통하지 않고 보는 것, 바로 보는 것, 그럴 때에야 비로소 사물 자체가 보이고, 존재 자체가 보인다. 그렇게 매번 다른 꽃을 보고, 다른 꽃을 그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2

꽃은 아름답다. 화가들이 꽃을 그리는 이유는 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을 그리는 이유가 다만 그 뿐이라면, 이처럼 지속적으로 그리고 현재까지도 그려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꽃은 그 자체보다는 온갖 비유법 속에 살아있고, 비유법과 더불어 그 의미가 갱신되고 재생된다. ● 신정옥은 꽃을 그린다. 그러나 꽤나 감각적이고 잘 그림에도 불구하고 꽃 자체의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는 것에는 별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꽃은 무엇의 메타포일 수가 있는가, 꽃은 어떻게 주체를 대리하는 매개가 될 수가 있는가, 어떻게 꽃에 자신의 인격이며 아이덴티티를 투사할 수가 있는가와 같은 문제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그림에서 오는 감각적 쾌감은 덤이며 부수 정도로 봐도 되겠다. 그 만큼 꽃을 매개로 꽤나 의미심장하면서도 다른 지점을 짚어내고 있다는 말이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2

흔들리는 꽃, 사진과 회화 사이. 작가는 꽃을 그린다. 파스텔 톤의 색조가 꽃 자체의 물성보다는 부드럽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감지케 한다. 그런데 그 꽃은 뭔가 다르다. 꽃을 닮아 있으면서도 꽃에 대한 선입견을 재확인시켜주지는 않는다. 꽃이되 뭔가 애매하고 모호하다. 희뿌연 색상의 이미지가 중첩돼 보이는데, 아마도 미풍에 꽃이 하늘거리는 것을,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것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가장자리의 모호한 경계가 이런 분위기를 더하면서 마치 배경화면과의 차이를 지워 그 일부로 흡수되는 것 같기도 하다. ● 이런 몽환적인 분위기는 어디에 연유한 것일까. 바로 사진이다. 작가의 꽃 그림은 초점이 나가 피사체가 온통 희뿌연 실패한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실패한 사진? 실패한 사진은 현대사진미학의 분명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현실에 대한 감각적 닮은꼴을 재현하는 것에 실패한 것인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사진의 경계를 넘어 회화의 아우라를 겨냥한 의도적인 실패일 것이다. 그리고 회화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실패한 사진을 모델 삼아 재현의 다른 지점을 짚어낸다. 아마도 재현을 매개로 한 사진과 회화의 관계는 서로의 표현영역과 범주를 확장시켜주는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상호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작가의 꽃 그림 역시 그 맥락에서 읽힌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90×90cm_2012

피사체가 흐릿해지면 소재의 물성이 약화되고 분위기가 강조된다. 피사체가 분위기의 일부로 흡수된다. 배경화면과 모티브와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서로 흡수되는데, 흡수가 지속되면 마침내 소재의 물성은 사라지고 유기적인 덩어리로만 남겨질 것이다(바로 이 현상이 연이은 작업을 예고하고 있다). 작가의 꽃그림은 소재의 물성과 유기적인 덩어리 사이에 펼쳐진 스펙트럼의 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소재의 존재를 암시하면서 분위기가 강조되는, 어쩌면 회화의 아우라가 고조되는 한 지점 위에 멈춰 서 있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 중 상대적으로 더 완성도가 있어 보인다. 분위기는 회화 고유의 감각적 쾌감을 불러오는 계기이며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일종의 생기로, 꽃이 발하는 생명력의 표현 내지 표출로 볼 수도 있다. 소재의 물성이 약화되면서 오히려 그 생기는 더 강조돼 보인다. 작가는 바로 그 생기에, 존재가 발하는 생명력의 분출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생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연이은 작업에서 보다 적극적인 계기를 얻고 뚜렷한 형상을 얻는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54×96cm_2012

S_Flower, 진동에서 리듬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흔들린다. 파동을 그리며 확산하고 환원되기를 반복한다. 어쩌면 시간을 사는 존재라면 유생물 무생물 할 것 없이 그럴 것이다. 다만 둔감한 감각에 어필되지가 않을 뿐, 세계며 우주며 존재며 사물은 밑도 끝도 없는 변화의 매트릭스 속에 던져져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고정된 한 순간을 사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고정된 순간이 아닌, 그럴듯한 말로 순간들의 연속이 아닌, 분절되지 않는 진행과 과정 속을 사는 것인데, 그 진행과 과정을 운동성의 계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 계기가 나타나지는 태가 파동이고 파장이다. 자기를 자기 너머로 확산시키는 운동성의 계기가 원심력이며, 재차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운동성의 계기가 구심력이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원심력과 구심력을 반복하면서 파동을 그리고 파장을 그린다. 그렇게 변화를 산다. 그 변화, 그 운동성, 그 힘의 계기가 에너지며 엔트로피며 기다. 그 계기는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고, 모양새를 가지고 있고, 패턴을 가지고 있고 결을 가지고 있다.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결인데, 물결과 바람결, 진동과 리듬, 그리고 춤사위와 여운은 모든 존재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결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54×96cm_2012

일천한 감각으로 볼 때 존재의 결은 그저 무분별하고 우연하게만 보이지만, 사실은 이처럼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고 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주기는 대개 영문자 S자 형태의 패턴을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계적으로 S자를 그린다기보다는 크고 작은, 길고 짧은 정형과 비정형의 유기적인 곡선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작가는 바로 그 S자 형태의 패턴을 그린다. 기왕의 흔들리는 꽃에서 시작된 존재의 변화 내지 파동에 대한 인식을 일정한 주기와 패턴으로까지 진척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진척된 작가의 꽃그림은 현저하게 해체돼 보이고 파편화돼 보이고 유기적으로 보인다. 파편화되다가 종래에는 그렇게 파편화된 부분과 부분이 어우러져 꽃의 모양새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유기적인 덩어리로 스미고 녹아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정옥_S_Flower_캔버스에 유채_54×54cm_2012

우주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라기보다는 운동성의 계기로 볼 수가 있고, 감각으로 어필되는 우주의 질료는 그 운동성의 계기가 형상을 얻은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작가가 그린 꽃은 운동과 더불어 변화하면서 점차 자신이 유래한 우주의 일부로 흡수되고 환원되는 과정을 그린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우주의 일부로 완전하게 흡수되기 전,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변화와 운동의 과정 속에 놓인 꽃의 태를 그린 것이다. 그런 만큼 그림은 생기로 충만한 느낌이다. 기와 기가 서로 밀어내고, 덩달아 꽃의 모양새 역시 그 밀어내는 결을 따라 휘어진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존재의 경지가 느껴지고, 자연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읽혀진다. ● 이처럼 작가의 그림 속에서 꽃은 미세한 파동으로 흔들리다가, 기의 흐름을 따라 휘어지고 흩어지고 모인다. 어떤 그림에선 그저 존재의 최소한의 흔적과 궤적만을 남긴 채 꽃의 모양새가 지워지고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우주와 존재가 교감하는 과정이며 운동성의 계기를 그린 그림으로 정리해 볼 수가 있겠다. 미디어꽃(사회학적 지점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약간 다른), 흔들리는 꽃, 해체되는 꽃, 그 다음에 꽃을 어떤 차원과 경지로까지 끌고 갈지, 다음 그림이 자못 궁금해진다. ■ 고충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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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의 시간 Time Among Us


2012_0620 ▶ 2012_0626


김전기_155 miles #1, 해안초소_잉크젯 프린트_100×120cm_2008

초대일시 / 2012_0620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김전기_김해정_박부곤_박미자_신현민_이선정

주관 / 스페이스 407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인사동길 52-1) 3층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우리안의 시간 - Time Among Us ● 사진은 시간을 담아낸다. 좀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시간은 사진 안에 머물고 또한 흐른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시간은 우리 안에 있다. 한편 사진은 그 매체적 본성으로 인해 우리 시간 너머의 영역을 지시하곤 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의 한 순간부터, 무수하게 겹쳐진 현재, 그리고 다가 올 미래라는 미지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사진은 이 모든 변화와 양상을 이미지의 스크린 위에 고정시켜 지시한다. 하루하루의 변화를 일기 쓰듯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던 사르트르의 명저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으로부터 이미지와 기억의 관계를 통해 단단한 시간의 지층을 와해시키고 있는 베르그손,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우연히 마주한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사진의 본질과 그 존재론적 의미를 깨닫고 아파하는 바르트, 주인공이 마들렌 과자를 입에 넣는 순간 단 한번도 체험한 적 없는 형태의 과거가 영원성에서 떠오른다고 묘사함으로써 기억과 시간에 대한 일반적 견해를 거부하고 있는 프루스트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은 시간이라는 절대적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세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시간인식간의 관계를 사진으로 재해석한 전시가 『우리안의 시간』전이다. 본 전시에 참여한 6명은 각자의 시간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공적, 사적인 기억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기록, 표현하고 있다.
김전기_155 miles #3, 주문진_잉크젯 프린트_105×140cm_2010

김전기의 「155마일」프로젝트는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강원도 동해안을 따라 설치된 철책선이 제거되는 장면과 일상의 모습이 교차하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는 그의 사진들은, 우리의 삶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와 현실상황을 재고하도록 한다. 철책선이라는 녹슨 기념비는 60년이라는 시간의 누적을 그리고 155마일은 넘어설 수 없는 현실장벽에 대한 심리적, 물리적 제약을 암시하고 있다.
김해정_꿈의 방-3_C 프린트_80×120cm_2011
김해정_꿈의 방-5_C 프린트_80×120cm_2011

그리고 어떤 공간속을 홀로 떠도는 환영들을 추적하고 있는 김해정의 「꿈의 방」연작은 꿈과 기억의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사진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작가의 요구에 의해 전환된 이미지의 파편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설정한 시간동안 그녀의 이미지들은 시공을 넘어 찰나처럼 머물다 사라진다. 이 사진속의 존재들은 그녀의 시간으로 소환된 기억과 동경의 이미지들이며, 지극히 사적이고 서정적인 이 사진들은 미묘한 심리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박미자_The forgotten-1, Phone_C 프린트_120×120cm_2012
박미자_The Forgotten-2, Wallet_C 프린트_120×120cm_2012

한편 박미자의 시간은 타인의 기억에 의존한다. 「잊다」연작은 과거 누군가의 소지품었던 핸드폰, 지갑, 도장등을 하나의 화면 위에 병치시켜 보여준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아있던 이 물건들에는 개인의 취향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수집품들을 통해 유추 가능한 익명의 주인과 물건 간의 관계에서 소비, 유행, 자본이라는 거대한 구조는 유행이 지나면 버려지고 대체되는 수많은 소모품처럼 너무나도 하찮고 일회적으로 묘사된다. 즉, 이 시대의 주체는 소비를 통해 증명되고 또한 쉽게 잊혀질 수 밖에 없음을 환기시킨다.
박부곤_Urban light-3_C 프린트_120×150cm_2012
박부곤_Tracking-1_C 프린트_120×150cm_2012

박부곤의 「진화의 땅」프로젝트는 산업개발현장과 그 주변 환경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대지, 밤빛과 트래킹'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필요조건이며 진행중에 있는 불완전한 시공간이다. 작가는 땅이라는 익숙한 대상물을 통해 자연환경의 순환과 유지라는 근원적 성찰과 더불어서 발전과 진보의 그림자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누설한다.
신현민_Fragment-2_C 프린트_120×110cm
신현민_Fragment-1_C 프린트_64×122cm_2012

신현민의 「파편」연작은 도시의 구조와 디자인에 주목한다. 마치 실현 불가능한 청사진처럼 인간들은 이상적인 도시를 꿈꾸고 건설한다. 작가의 사진 속에 도시는 무수하게 잘라지고 덧 붙여지기를 반복하는 조각파편이다. 특정 지역과 장소를 수차례 반복 촬영한 후 디지털로 재구성하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는, 도시가 마치 레고 블록처럼 교체, 전환 가능한 허구적 구조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이 세계를 지탱하는 역사라는 엄격한 기준과 질서 조차도 해체, 와해시켜버리고 있다.
이선정_The set-3_잉크젯 프린트_100×120cm_2012

마지막으로 이선정의 「세트」연작은 연극적이다. 자신이 화자로 등장하는 이 사진들에서 작가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 떠나온 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 속 캐릭터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채로 연기하듯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대변한다. 그러하기에 숲길에 형형색색의 천으로 가상의 세트를 세우고 그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이야말로, 절대적 시공간의 벽을 허물고 자신의 세계로 회귀할 수 있는 작가적 염원의 반영된 때이다. ● 『우리안의 시간』전은 사진작가 6명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선험적 조건들에 대한 인식과 성찰 그리고 새롭게 재편, 구축되는 현실의 다층적 구조를 펼쳐 보인다.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가장 확실한 매체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 자체를 포착하려는 원론적 역할보다는 소멸, 생성, 순환 또한 결국 작가들이 한정한 범주와 언어 안에서만 재현 가능함을 엿보게 된다. 이들에게 시간은 고정되어있지 않은 채 파편화되거나 혼재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역사와 시간의 절대적 관계는 쉽게 허물어지고 변화하는 가변적 양태이다. 사진이라는 현대의 시간기계를 통해 망각에 대항하고 때론 기억에 적극 개입하며 자신의 존재를 시간성의 억압으로 부터 탈주시키려는 작가적 의지는, 전시장을 혼란과 전유가 뒤섞인 공간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 스페이스 407
이선정_The set-17_잉크젯 프린트_100×120cm_2012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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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tover


김윤선展 / KIMYOONSUN / 金侖宣 / painting 2012_0620 ▶ 2012_0716 / 일요일 휴관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윤선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2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30am~10:00pm / 토_02:00pm~10: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도스_운모하(蕓暮霞) terrace GALLERY DOS_WOONMOHA TERR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4-7번지 Tel. +82.2.735.4678


남겨진 것으로부터 상처를 치유하다.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감정에 영향을 받고 그 감정이 오히려 자신에게 영향을 준다. 작가는 삶 속에서 겪는 고통과 치유라는 순환의 과정을 '쓰나미'라는 실제 일어난 특정 사건에 이입한다. 인간이면 누구든 한 번 쯤은 겪었을 감정의 붕괴를 무너지고 폐허가 된 건물의 파편들로 비유하여 표현한다. '쓰나미'와 같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격한 감정의 물결 뒤에는 고요한 잔재만 남으며 이는 작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2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12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2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적어도 한 번쯤은 극적인 감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오며 인간의 힘을 벗어난 자연재해와도 상통한다. 화면 안에서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파괴적인 형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쓰라림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명확한 형체는 붓질에 의해 점점 사라지고 지나간 자국만 남게 되기도 한다. 이는 작가의 심리의 변화 과정을 현실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여정으로 받아들이고 기록하고 포착하는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이 휩쓸어간 마음의 자리를 '쓰나미'가 남긴 흔적으로 구체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작품 자체를 사유의 공간으로 만든다. 어떠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죽은 듯한 적막감은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게 한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것처럼 작품의 중심에는 상처와 고통이라는 근원적인 고뇌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치유와 희망을 찾는데 있다. 작가는 예술이 아름다운 것만 추구할 필요는 없으며 잔재만 남은 건축 더미가 주는 감정과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2
김윤선_Emotional collapse_종이에 연필_25.7×18cm_2012

김윤선은 추상적인 내면의 감정을 '쓰나미'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쓸려진 풍경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진 재해이며 곧 우리 삶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는 무너진 마음을 남겨진 잔재에 투영하며 인간 내면의 상처를 건드린다. '쓰나미'가 만들어 낸 절박한 상황은 기억 저편에 내재하고 있는 사소하고 복잡한 감정을 아우르며 보는 이의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이번 전시는 남겨지고 버려진 것들을 통해 바닥을 치는 절망에서 다시 솟아오를 희망을 찾는 치유의 과정이 될 것이다. ■ 유가은
2012.06.18 14:48:19 / Good : 400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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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uble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展 / Felix Gonzalez-Torres / installation 2012_0621 ▶ 2012_0928 / 월요일 휴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 (완벽한 연인들)_벽시계_1987~90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 (Perfect Lovers)_Wall clocks, Edition 1 of 3, 1 AP_1987~90 ⓒ 김상태 Sang Tae Kim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협력 /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재단

전시 강연회 / 6월30일, 7월14일, 8월18월, 9월8일(토), 오후 2시~4시

전시 이벤트 / 『숨은 작품 찾기』, 『Lucky Go Go』 한여름 밤의 Afro-Cuban Jazz 콘서트 / 2012_0726_07:00pm 10-minute talks / 화~금요일_12:30pm / 인근 직장인 대상

전시설명 / 화~일요일_오후 2시, 3시, 4시, 5시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PLATEAU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150번지 삼성생명빌딩 1층 Tel. 1577.7595 www.plateau.or.kr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1957~1996)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Double(Felix Gonzalez-Torres, Double)』을 6월 21일부터 9월 28일까지 개최한다. ● 쿠바에서 태어나 1979년 뉴욕으로 이주, 사진을 전공한 곤잘레스-토레스 는 1988년 뉴욕에서 첫 개인전 개최 이후 AIDS 합병증으로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근 10년의 작품활동 기간 동안 소재나 형식 면에서 극도로 단출한 작품을 남겼다. 그럼에도 작가 사후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 60회에 가까운 개인전과 700회가 넘는 그룹전을 개최하였고, 200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2011년 그의 작품을 주제로 이스탄불 비엔날레가 개최되는 등 현대미술에 영감을 주는 신화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 (북녘)_전구, 자기 전구소켓, 전선_1993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 (North)_Light bulbs, porcelain light sockets and extension cords_1993 ⓒ 김상태 Sang Tae Kim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 (북녘)_전구, 자기 전구소켓, 전선_1993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 (North)_Light bulbs, porcelain light sockets and extension cords_1993 ⓒ 김상태 Sang Tae Kim

그는 보수파가 집권하던 1980~90년대 미국에서 쿠바 출신의 난민이자 유색인종, 동성애자, 에이즈환자로 사회적 소수자이면서도 변방의 이미지를 주장하는 대신 주류미술계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그 허점을 내파하고 전복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의 작업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시적인 은유와 정치적인 발언을 동일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 (플라시보)_은색 셀로판지에 포장된 사탕, 무한 공급_설치_1991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 (Placebo)_ Candies individually wrapped in silver cellophane, endless supply_ Installation view at PLATEAU_1991 ⓒ 김상태 Sang Tae Kim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 (고고댄싱 플랫폼)_ 나무, 전구, 아크릴 페인트, 은색 수영복을 입은 고고댄서, 개인용 음악플레이어_설치_1991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 (Go-Go Dancing Platform)_ Wood, light bulbs, acrylic paint and Go-Go dancer in silver lame bathing suit, sneakers and personal listening device_Installation view at PLATEAU_1991 ⓒ 김상태 Sang Tae Kim

작가가 일생동안 작업했던 빌보드, 시계, 거울, 사탕, 전구, 퍼즐, 인쇄물 더미, 텍스트 등 일상적이고 한시적인 재료로 만든 작품들은 '사랑'과 '죽음'이라는 매우 사적인 삶과 사회, 정치적 비평을 병치시킨다. 동성(同性) 애인 로스 레이콕이 AIDS로 죽어가는 시간을 고통으로 감내해야 했고 그 자신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작가는 흐르는 시간과 소진되는 재료로 죽음의 공포를 담으면서도 '영원히 다시 채워지는' 작품의 조건으로 재생과 영속을 기원했다. 또한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진정한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예술작품을 관람객이 변형, 소유하게 하는 등 혁명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기존 공공미술가는 물론, 선배 개념미술가들과도 차별화되는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_빌보드_명동 신세계백화점 맞은편 중앙 우체국 옆 설치_1991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_Billboard_Installation next to Korea Post Office, Seoul_1991 ⓒ 김상태 Sang Tae Kim

이번 전시의 주제인 'Double'은 작가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한 쌍의 오브제를 의미함과 동시에 완벽한 사랑과 사회적 터부(동성애), 작품의 감상과 훼손, 변형과 영속, 복제와 탄생 등 작품 안에 담고 있는 다양한 이중적 의미들을 상징한다. 그와 동시에 한 장의 증서로만 소유권이 증명될 뿐 '오리지널' 원작이 존재하지 않으며 매번 새롭게 제작되고, 심지어 하나의 작품을 동시 다발적으로 여러 장소에서 전시할 수 있는 곤잘레스 - 토레스의 작품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 아시아 미술관으로는 최초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에는 뉴욕의 MoMA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개인 소장가 22개처에서 대여한 작가의 대표작 44점이 출품된다. 특히 플라토와 함께 리움, 삼성생명 서초타워, 서울 시내 여섯 곳에 설치된 외부 빌보드(옥외 광고판)를 전시장으로 활용하여 '반복'과 '복제'를 통해 '영속성'을 담보하려는 작가 작품의 특성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 이번 전시는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의 의미로서 공유되고 수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 세계를 만나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 안소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_"무제"_빌보드_남이섬 노래박물관_1991 Felix Gonzalez-Torres_"Untitled"_Billboard_ Installation at The Song Museum on Nami Island, Chuncheon_1991 ⓒ 김상태 Sang Tae Kim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재단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재단(The Felix Gonzalez-Torres Foundation)은 작가 사후, 작품의 저작권을 관리하고 작가 및 작품, 전시이력, 소장처에 관한 모든 자료를 집적하며, 작가에 대한 전시와 연구를 독려, 지원하기 위해 2002년에 설립되었음.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나 전시 장소에 따라 가변적이고 무한한 변형이 가능한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이 작가의 본래 의도를 유지하면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조언하는 역할을 함. 작가의 오랜 친구이자 1990년부터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갤러리스트 로서 주요 후기 작품들과 전시를 함께 꾸렸던 안드레아 로젠(Andrea Rosen)이 현재 이사장으로서 재단을 대표하고 있음. 안드레아 로젠은 뉴욕 안드레아 로젠 갤러리 대표로, 미국 미술계 주요인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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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Lee and The Line of Duration


이일展 / ILLEE / ?? / painting 2012_0619 ▶ 2012_0715


이일_BL-119_캔버스에 볼펜_190.5×297.2cm_2009

작가와의 대화 / 2012_0623_토요일_02:00pm

참석 : 이일, 정준모(미술평론가) * 선착순 80명, 예약 불가

갤러리 현대 GALLERY HYUNDAI 서울 종로구 사간동 80번지 Tel. +82.2.2287.3500 www.galleryhyundai.com


갤러리현대에서는 재미한인작가 이일(b. 1952)의 개인전 『이일과 선의 영속성』을 선보인다. '볼펜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일은 1977년부터 뉴욕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한국에서 갖는 이번 16년 만의 개인전에는 볼펜선 만으로 화면을 채운 작품들과 함께, 빈 볼펜 혹은 대나무 등으로 표면을 긁어낸 신작들을 선보인다. 또한 그의 작업세계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위해 정준모 미술평론가와 이일 작가가 직접 대화를 주고 받는 시간(2012년 6월 23일, 오후 2시)을 마련하였다.
이일_BL-095_캔버스에 볼펜_221×365.8cm_2008

…(전략)… 이일의 작품에 나타난 무한한 길이의 선은 단지 길게 그린 선이 아니라 작가의 긴 호흡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의 이런 특색은 대부분의 회화 작품들 또는 통일된 선이나, 형태, 문양으로 구성된 다른 작품들과 탄생부터가 다르다. 이일의 작품은 마치 춤과 같다. 즉 이일이 긋는 선은 조화롭게 살아 움직이며 지나간 자리가 남긴 흔적으로, 그의 작품은 정지된 시각적인 그래픽아트가 아니라 생명력 있는 움직임 그 자체이다.
이일_BL-110_캔버스에 볼펜_188×188cm_2008

이일의 작품이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선을 그리는 대표적인 도구였던 붓이 독점했던 틀에서 벗어나 볼펜을 사용함으로써 무한의 공간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평론가 에드워드 레핑웰(Edward Leffingwell)이 이일의 작품에 대해 "전달체계(delivery system)"라고 멋지게 정의했듯이, 이일의 작품에는 새로운 시각적 리듬이 흐르고 있다. 이 리듬은 고밀도의 석판처럼 단단하지만, 우아하고도 환상적으로 중심에서부터 밖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이 움직임은 마치 행성과 소행성의 궤도나 입자가속기 안에서 원자를 구성하는 미세한 입자들이 터지는 찰나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 「BL-119」(2009)나 최신작인 「BL-1202」(2012) 같은 작품들을 보면, 흑암 같은 중심부-원래는 청색인 이 중심부는 고밀도로 검게 보인다-에서 시작된 선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무한히 퍼져나간다. 한편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중력의 어떤 힘에 이끌려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는 선들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몇 가닥 선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려나간 실, 혹은 철사처럼 공중에 갑자기 멈춘다.
이일_BL-089_종이에 볼펜_95.5×144.5cm_2006

이일이 작품의 매체로 볼펜을 선택한 것은 자유롭게 선을 그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가 볼펜에 매료된 것은 볼펜이 역사가 없는 도구라는 사실 때문이다. 어떠한 예술사적 전통에도 속하지 않는 도구를 가지고 작업했기 때문에 이일은 자유롭게 자신만의 드로잉 방식으로 새로운 시각언어를 만들 수 있었다. 전통적인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이일의 이런 시도는 후기 미니멀리즘 작가인 도로시아 록번(Dorothea Rockburne)이나 앨런 새럿(Alan Saret), 그리고 전통적인 화방에 혐오감을 보인 까닭에 1960년대 초기에 볼펜을 사용하여 독일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연작으로 그렸던 독일 작가 시그마 폴케(Sigmar Polke)와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화가 안지올라 가티(Angiola Gatti)의 볼펜 작품은 어떤 면에서 이일의 작품정신과 가깝지만, 흥미롭게도 두 작가는 각각 볼펜에 내재된 서정적인 잠재력을 독립적으로 발견하였다. 순수 예술 도구가 아닌 공산품이라는 볼펜을 사용하는 이일의 작품이 미술사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법과 수많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일이 자주 언급하듯 빽빽하게 그은 볼펜 잉크 선들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의 초상화에 나타난 어두운 배경과 유사하며, 이일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종횡으로 그어진 선들에서 대가들의 에칭에서 볼 수 있는 크로스 헤칭(crosshatching: 동판 기법으로 인그레이빙이나 에칭에서 서로 다른 평행선들이 일정 각도로 교차한 것을 지칭하며, 주로 입체감을 표현하거나 음영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을 감지할 수 있다. 이일이 작품에 사용하는 동판 기법은 그가 뉴욕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공부했던 부분이고, 그의 초기 작업이 추상화를 에칭용 송곳과 유사한 못으로 새기듯이 작업했던 방식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빛과 어둠, 즉 명암에서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인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이 엿보이며, 광적인 선의 구도는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의 연작 판화인 『감옥(Carceri)』에 나타난 대가의 에칭 기법을 연상케 한다.
이일_TIRW-12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08.3×276.9cm_2012

지난 30년 동안 볼펜만을 사용한 화가 이일을 독일의 조형가인 조셉 앨버스(Josef Albers)처럼 일종의 순열의 매력에 빠져있는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이일은 화가로서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구조, 방법 및 관계 등을 모색해왔다. 최근에 그는 빈 볼펜으로 작업하며 종전의 작업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2012)부터 그는 대형 캔버스의 어두운 배경 위에 수천 개의 하얀 필라멘트로 연결된 반짝이는 100여 개의 빛의 구들을 그렸는데, 대표적으로 「TIRW-1201」(2012)에 나타난 이미지는 거미집 무리나 거대한 불꽃놀이를 연상케 한다. (혹자는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을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이일이 평소 방식을 멋지게 역 발상하여 나온 결과인데, 우선 흰색 아크릴 물감을 여러 겹 바른 뒤에(그의 작업방식은 언제나 이렇듯 세심하다.) 그 위에 어두운 색의 유화 물감을 두텁게 덧씌운 뒤, 빈 볼펜으로 유화 물감 위에 선을 긋는다. 잉크가 나오지 않는 빈 볼펜 끝으로 어두운 색의 유화 물감 위를 가로지르면, 유화 물감이 벗겨지고 그 아래에 있던 아크릴 물감이 드러나며 날카로운 면도날처럼 가느다란 흰색의 선으로 되는데, 같은 강도로 계속 그어대면 환상적인 느낌으로 반짝이는 성단이 탄생된다.
이일_IW-10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08.3×297.2cm_2010

…(중략)… 이일의 회화나 드로잉은 고정된 틀에 넣어 잴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도전적일 만큼 기존의 상식의 틀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디가 바탕이고 어디가 형태인가를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며, 드로잉의 매체와 회화의 매체를 구분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고정된 틀 속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이일은 속박과 팽창을 결합하여 완성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 문제의 본질적인 연속성을 제시한다. ■ 라파엘 루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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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뿌리


Root of Imagination展 2012_0621 ▶ 2012_0721 / 일,공휴일 휴관


뮌(Mioon)_관객의 방백 Aside of Audience 드로잉_종이에 연필_30×40cm_2008

초대일시 / 2012_0621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뮌_박정혁_정연두_한진수

기획 / Hzone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번지 B1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상상력의 뿌리 Root of Imagination ● 료타르 (Jean-Francois Lyotard)는 포스트모던의 조건으로 '마스터 네러티브'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뒤이어 로잘린 크라우스 (Rosalind Krauss)는 포스트 미디엄의 조건으로 일관성과의 이별을 강조한다. 실제로 개념미술을 시작으로 현대미술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하나의 작품 속에 병치시키는 방법을 활용하면서 마스터 네러티브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정 소재와 재료의 미학적인 가공을 이상으로 여겼던 예술의 전통적 정의가 경계를 초월하는 혼성문화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읽히고, 생산되고, 배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말해 현대미술이 더 섬세하고, 복잡하고, 때론 난잡하고, 난해해졌다. 이러한 변화된 양상은 국가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 신 자유주의 경제질서와 지구촌이라는 우산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화 교류 속에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특히 구체적인 것 속에서 보편성을 읽어 내고, 특정 재료의 선택에서 조차 은유적인 상징을 이끌어 내는 관객의 향상된 해석 능력은 '저자의 죽음' 혹은 '관객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작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작품이 놓이게 될 다양한 문맥과 담론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에 의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코드로 활용된다. ● 부부 미디어 아티스트 뮌(Mioon), 박정혁, 정연두, 한진수가 참여하는 전시『상상력의 뿌리 Root of Imagination』는 이처럼 변화된 미술의 양상을 읽어 내려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반영한다. 이들 4팀의 작가들의 작품은 결코 하나의 소재, 주제, 재료, 장르에 갇히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현대미술은 역사, 문화, 철학, 그리고 개인의 기억이 물리적 혹은 비물리적 구성방식을 통해 인간의 감각기관과 소통하는 그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뮌(Mioon)_Habitual Passion_영상스틸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전공한 김민선씨와 같은 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을 전공한 최문선씨가 만나 결성한 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전공이 시사하듯이 장르와 경계를 초월하며 동영상, 컴퓨터, 조각, 디자인, 디지털 매핑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다. 2009년 서울시립미술관의「라이트 월 프로젝트」, 2010년 아우디 A8 런칭 행사를 기념한「전기인간」, 2012년 BMW과의 협업 등은 그들의 통섭적인 작업 태도를 말해준다. 뒤셀도르프 뉴빌 예술상을 수상한 경력이 말해주듯 뮌의 작업은 단순한 인터렉티브 미디어 아트가 강조하는 기술적인 완성도 보다는 그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인문학적인 상상력과 스토리를 중요시 여긴다.
박정혁_Park's Park 7-1_캔버스에 색연필_140×250cm_2009
박정혁_Ghost 1-1_ 디지털 페인팅, 잉크젯 프린트_109.1×72.7cm_2012

2004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장을 유기견의 냄새로 어지럽혔던「KMDC 프로젝트」, 그리고 2011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짜집기해 만든『Ordinary People』展까지 박정혁의 작업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시스템을 조롱하며, 그 시스템을 덮고 있는 위장막을 걷어내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만든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 그래서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공간인 인터넷에서 박정혁은 불합리, 선정성, 폭력성, 가학성 등 소비문화의 부작용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콜라주해서 세상에 고발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자신의 메시지가 관객에게 보여지는데 있어 역시 위장이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평면 회화를 통해서는 중심과 주변, 인물과 배경의 경계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며 이미지 본래의 문맥을 지워버렸고, 영상작업을 통해서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기법을 통해 기승전결의 틀을 허물어 버렸다.
정연두_Documentary Nostalgia Drawings_C 프린트_29.1×42.1cm_2007
정연두_Documentary Nostalgia Making Film_00:15:25_2007

현실과 이상, 실제와 가상, 연극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를 이어 붙이고 있는 정연두는 영상과 사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대표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이다. 84분짜리 HD 비디오 작품「다큐멘터리 노스탈지아」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 한 켠을 샹들리에가 매달린 실내 풍경에서 시작해, 약국 간판이 보이는 거리풍경,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자동차, 그리고 비가 오는 풍경으로 변화시키더니, 이윽고 가을 추수하는 시골 풍경,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봄 풍경, 그리고 안개와 소나무가 가득한 풍경, 그리고 산 정상에 오른 주인공의 뒷모습을 한 장소에서 모두 보여주었다. 처음 시작 화면과 마지막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치를 수동으로 대치해 관객과 영상 사이의 일정한 거리 두기를 유지시킨다. 일종의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로 집중과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해 객관적 판단을 위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한진수_Sketch for the Bubble-one project_종이에 잉크_30×21cm_2011

정교한 기계와 버블의 우연성을 통해 한진수의 작업이 이원론에 대한 해체를 예견하고 있었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된다. 그의 작업은 기존 질서의 해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날아가는 버블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노스탈지아에 취해 있는 동안 전복과정은 천천히 쉬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작가의 피조물인 설치작품이 어느 순간 작품을 창조하는 저자의 위치를 작가로부터 약탈했고, 한 갓 터지기 쉬운 버블 덩어리는 모이고 모여 거대한 붉은 영토를 정복했고, 배경에 지나지 않던 벽면은 매력적인 회화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전복의 과정이 결과적으로 양 극단의 관계에 있을 이항대립적 요소들 사이에 유기적인 밸런스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평형상태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전복이 우연이 아닌 계획이었다는 사실이다.
한진수_Sky Generator_구리, 유리, 에어펌프_160×40×40cm_2010_부분

이들 작가들은 공통적으로 물리적으로 어떤 것을 잘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독창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더 열중한다. 스토리와 메세지를 우선 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재료와 형식, 기술을 이후에 덧붙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을 읽어내고, 소비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세상을 치열하게 관찰했듯이 관객 또한 바로 눈앞에 보이는 작품에만 시선을 고정하지 말고 그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바라보고 싶었던 세상으로 시선의 폭을 넓혀야 한다. ● "사람은 죽으면 어떤 물리적인 흔적도 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작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의 2012년 MoMA PS1의 기조연설은 예술의 앞날은 물질성이 아닌 정신성, 노동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그녀의 2009년도 퍼포먼스 작품「우유를 들고 Holding Milk」는 전통적인 조각의 정의를 해체하는 좋은 예로 기억된다. "움직임과 감정의 흐름이 정지된 상태의 어떤 입체적인 형식"이란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정의를 떠올리며, 무려 700시간 동안 한 자리에 앉아 뉴욕 MoMA를 찾은 1400여 명의 관객과의 소통을 이루어낸 그러나 고요하게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던 퍼포먼스를 보고 단순히 "매우 긴 퍼포먼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조각" 이라며 새로운 카타고리를 만들어야 되는 것인가? 그 구별이 쉽지 않다. 아니 그런 범주화 자체가 무의미한 시도이다. 관객들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그녀의 기발한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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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권선언


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지은이_이부록/옮긴이 조효제/아트디렉터 안지미가 함께 만들다


지은이_이부록/조효제/안지미 || 면수_168쪽 || 판형_15×21cm(신국판 변형) || 출간일_2012년 6월 15일 ISBN_978-89-97778-00-3 (03300) || 값 11,000원 || 사회 일반 || 출판사_프롬나드

『세계 인권 선언』 출간기념展 / 2012_0629 ▶ 2012_0712 장소 / 땡스북스 홍대점 THANKS BOOKS Tel. +82.02.325.0321 www.thanksbooks.com

프롬나드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4-2번지 동인빌딩 202호 Tel. +070.8828.2025


기획의 변 온종일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시공간을 가리지 않는다. 내 생각과 다른 이는 모두 적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그 어디에도 상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상식이 뭐지? 우리에게 상식이 있긴 한 걸까. 상식이 없으니 기준이 있을 수 없고, 그러니 주장만 있고 근거는 없다. 다르면 적이다. 20세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였다. 큰 전쟁.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 일을 겪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다르면 다 적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상식을 세웠다. 내가 소중한 존재이듯 당신도 소중한 존재라는, '타자'를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한 선언에 담았다. '세계인권선언'. 70년쯤 전에 세웠던 상식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 ● "'세계인권선언'이라… 그래 그런 게 있었지. 말은 들었어. 그런데 내용은 본 바가 없어. 이제야, 아, 보니, 그래! 우리에게 이런 권리가 있었지! 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적 인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류는 이미 이런 다짐을 천명해놓았구나!" (박재동) ● 익숙하지만 낯설었던 '세계인권선언'을 통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모든 상식의 출발점은 인권에 있을 테니. 이 책은 그 '바람'의 시작이다.
제1조

추천의 글 『세계인권선언』이라는 반가운 책을 보았습니다. 크고 작은 일상의 고민들을 떠나 그림들을 넘겨보시지요. 인류 최고의 가치인 '인권'이 천의 얼굴로 다가올 것입니다. 책을 덮고 난 뒤 남을 더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더 남을 존중하게 되더라도 두려워 마시고요. 그래봤자 결국은 '나' 존중받자고 하는 성장입니다. 그럼, 즐거운 독서 되십시오! (박원순, 서울시장) 인권은 인류가 일용할 양식이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류의 아픔을 품어 안는 세속 경전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의 울을 넘어서고,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원리를 담고 있다. 글로도, 그림으로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글과 그림을 함께 아우르면 보다 크고 선명한 세상살이의 원리가 보인다. 이 책이 누이처럼 살갑게 도와준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세계인권선언'은 전 세계 국민의 보물이다. 각 조문의 한마디 한마디가 중대한 실천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한 많은 연구 서적이 나왔지만 이론적 해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번 책은 각 조문의 핵심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세계인권선언'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조문을 읽은 후, 눈을 감고 그 뜻을 왼쪽 심장에 새기자.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인권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출발점이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고 야만과 구별하는 기준점이다. 인권은 어떤 경우에도 양도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최후 근거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역사가 인권 실현의 역사였으며 이후의 역사 또한 인권 실현과 인권 확장의 역사여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 다소 낯설 수도 있는 '세계인권선언'이 미래 세대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음에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권은 이렇게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성국, 정치 평론가) '세계인권선언'이라… 그래 그런 게 있었지. 말은 들었어. 그런데 내용은 본 바가 없어. 이제야, 아, 보니, 그래! 우리에게 이런 권리가 있었지! 아,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적 인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인류는 이미 이런 다짐을 천명해놓았구나! 우리 모두는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것을! 이 간단 명료한 선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겨울날 입혀준 두꺼운 옷같이 든든하다. '세계인권선언'을 그림으로 읽는 매우 흥미로운 이 책, 이 시대에 숨 쉬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적어도 한 번쯤은 읽어보고 책꽂이에 꽂아놓아야 할 책이다. (박재동, 만화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제8조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조문을 읽은 후, 눈을 감고 그 뜻을 왼쪽 심장에 새기자 ● '인권', 누군가에게는 조금은 어려운 단어일 수도 있겠다. 굳이 알 필요 없는 먼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생계와는 관련 없는 사치일 수 있고,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가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다양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역사 이래 인류가 발전시켜온 최고의 가치이자 개념이다. '인권'에 대한 시대와 지역별 태도의 차이가 사상의 차이, 정치·경제 제도의 차이를 낳았고, 보다 나은 '인권'의 '일상'을 향한 열망은 인류 기술의 진보를 이루었다. 문화·예술 역시 궁극으로는 '인권'을 표현하고 있고, 본질적으로는 '인권'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 그렇게 큰 이야기들만이 '인권'의 전부는 아니다. 소소하게는 가족 내에서도 기본적 인권은 서로 존중해야 하고, 친구와 동료, 스승과 제자, 이웃과 연인 사이에도 존중하고 받아야 할 인권은 존재한다. 또한 분명한 것은 '인권'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백인 남자에서 백인 여성, 흑인 남자에서 흑인 여성으로. 더 나아가 동물권까지. 따지고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의 '존엄'에 대해 고민해온 셈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해온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인권'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타자'를 존중해야 '내'가 존중받을 수 있다는 불변의 진리. 그것이 인권을 성장·변화시켜왔다. 그림으로 읽는 인권 바이블, 『세계인권선언』 ● 인권의 바이블이라 일컬어지는 '세계인권선언'은 상당히 짧은 문헌이다. 영어 문장으로 전체가 1,748단어밖에 되지 않을 만큼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히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세계인권선언'을 겉핥기로 읽기만 해서는 내용을 깊이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이런 성격 때문에 재미없고 밋밋한 느낌이 드는 문헌으로 비치기 쉽다. 압축파일을 읽으려면 그것을 풀어야 하듯 '세계인권선언' 역시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이드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많은 연구 서적이 이론적 해설에 치우쳤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 책 『세계인권선언』은 각 조문의 핵심을 그림으로 형상화하여 '세계인권선언'을 쉽고 친근하게 전달해준다는 미덕을 갖고 있다. ● '세계인권선언'이 외계인을 위해 쓰이지 않았듯, 이 책의 그린이 이부록은 인간이 창조한 이미지의 역사에서 적합한 이미지를 뽑아 올려 21세기를 사는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들어냈다. 그가 인권을 상상하며 창조한 것은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조합하는 것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은 수천수만 년을 지속한 인류가 체험으로부터 깨달은 인간 고유의 권리이자 '인간 선언'이다. 이 선언을 위한 고통의 DNA는 이미 숱한 이미지로 탄생해 있었다. 수많은 풍속화, 종교화, 상징 마크, 카툰, 사진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러니 선언의 문장들이 떠오르지 않거든 이 책에 실린 그림(이미지)을 연상해보라! 사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나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언어이지 않은가.
제 12조

책 속으로 제 1조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20-25쪽) 제 5조 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이거나 모욕적인 대우 또는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38-41쪽) 제 12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사생활, 가족 관계, 가정 또는 타인과의 연락에 대해 외부의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평판에 대해 침해를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과 침해에 대해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66-69쪽)

지은이 소개 그린이_이부록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설치, 디자인, 뉴미디어, 출판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통해 시각이미지 생산자로서 사회에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을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인사미술공간, 아르코미술관, 경기창작센터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5회 광주비엔날레』 『신호탄전』(국립현대미술관) 『1번 국도』(경기도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지은 책으로는 『기억의 반대편 세계에서_워바타』 『Mag+파블로프의 사나운 개와 슈뢰딩거의 게으른 고양이』 『NEWISM MOVEMENT_창백얼굴』 『UPSET NEWYORK/NY』 등이 있다. 옮긴이_조효제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학교(LSE)에서 사회정책학 박사를 취득했고,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인권 펠로와 베를린자유대학교 DAAD-STAR 초빙교수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인권을 찾아서』 『인권의 문법』 『인권의 풍경』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세계인권사상사』 『인권의 대전환』 등이 있다.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과 연구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위원, 법무부 정책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아트디렉터_안지미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했다. 이 책의 그린이 이부록과 함께 청계창작스튜디오, 경기창작센터 등에서 단독전을 열었고, 『공공의 걸작』(경기도미술관) 『예술가 프로덕션』(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시사저널』 선정 '올해의 북디자인', '한국백상출판문화상',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선정 '디자인이 아름다운 책'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지은 책으로는 『기억의 반대편 세계에서_워바타』 『스티커 프로젝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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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듣는 밤


한지민展 / HANJIMIN / 韓志旻 / printing 2012_0601 ▶ 2012_0703


한지민_녘_리노컷_100×7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314j | 한지민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10:00pm

유중아트센터, 카페 드 유중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번지 유중빌딩 1층 Tel. +82.2.599.7709 www.ujungfoundation.org www.ujungartcenter.com


달과 별마저 저버린 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밤은 새벽으로 향한다. 시간의 흐름만큼 자연스런 것이 없을 진데, 그 자연스러움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두려움의 원인은 다양할 것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수만큼이나 말이다. 그 두려움의 그늘에는 어둠을 위시하는 부정적 개념들을 비롯하여 생애주기를 통해 체감하게 되는 인간의 유한성과 삶의 불확정성 그리고 타자화된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좌절감들이 있을 것이다. 새벽은 밤과 낮, 양 극단으로 이어지며 어둠과 밝음을 교차시키고 한데 섞는다. 이러한 혼재성은 카오스(Chaos)적인 한편, 코스모스(Cosmos)적인 질서정연함으로 상호보완성을 갖으며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공포와 불안을 잦아들게 한다.
한지민_꿈 속의 시_리노컷_100×70cm_2012

한지민의 '새벽을 듣는 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삶의 새벽을 희구하는 자아의 이야기이다. '새벽을 듣는 밤'이라는 제목은 한편으로 하루키의 소설「어둠의 저편」을 떠올리게도 한다. 소설 속에는 서로 다른 암흑의 시간을 보내며 극단적인 수면과 불면을 겪는 자매가 등장한다. 상반된 의식의 상태는 곧 결핍된 정신의 소망과 몸의 소망을 의미하는데, 자매의 오랜 대립과 갈등은 결국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잠이 드는 화해의 제스처를 통해 해소된다. 이는 마치 칠흑 같은 밤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타인과 한 몸이 되어 잠들던 인류의 원시적인 경험과도 같다. 어쩌면 현대인의 무의식에 자리한 공포와 불안도 이러한 일체감의 단절로부터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상징화된 표상의 추상적인 힘에 기대어 숭배와 제의를 통해 이를 재현하려 하는 것일 것이다. 예배하는 대상의 형상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간 이상의 존재와 비범한 능력을 나누었다는 믿음에 경도되며 심리적인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한지민의 작품에 등장하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이미지도 이러한 원시종교의 논리를 관통하고 있다. 작가가 개인적인 토템(Totem)으로 사용하고 있는 새는 작가의 어린 기억 속에 각인된 날개와 부리가 갖는 자유로움 그리고 강함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비롯한다. 새와 인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기이한 모습은 얼핏 악몽 혹은 판타지 영화 속에서 본 듯하며 이집트 신화 속, 매의 머리를 가진 태양신 호루스(Horus)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분명 반인반조는 작가의 기억에 예술가적 독창성이 더해져 창조된 이미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로부터 떠오르는 잔상들을 융의 분석심리학적 측면으로 본다면, 개인적인 경험에 앞서 존재하는 초인격적 본질로서 개인에 내재해있는 역사적이고 집합적인 기억, 즉 집단무의식의 원형(Artchetype)이 드러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각기 다른 문화와 시대에 있었던 종교, 예술, 신화 속의 신과 상징물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 등이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한지민의 반인반조의 이미지가 내포한 복잡한 상징과 의미를 해석하는데 있어 신화는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한지민_부리 숲_리노컷_35.5×58.5cm_2012
한지민_새벽에 깃든 밤_리노컷_38×52cm_2012

새는 우리의 민간 신앙 속에서도 '솟대' 등을 통해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지상과 천상을 오가며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성한 동물로서 묘사된다. 이러한 특징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헤르메스 그리고 이집트 신화 속에서는 따오기의 머리를 한 지혜의 신 토트(Thot)와 같다. 특히, 토트는 언어, 글, 과학, 예술, 의학, 마법, 수학 천문학, 점성술의 창시자이자 신들의 대변자, 기록보관자로 숭배 되는데, 심장의 무게를 다는 의식 중에 죽은 자와 전수자에 대한 최종 판결을 기록하는 서기관으로서 팔레트와 갈대로 만든 펜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가의 모습과도 형태적 유사성을 갖으며 자연스럽게 반인반조의 이미지를 예술 그리고 예술가와 연결시킨다. 실제로 한지민의 작품 속에는 스스로의 신체로부터 또 다른 신체를 잉태하고 분열해 내며 산고를 겪듯 끊임없이 도약하고 추락하는 신체의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한다. 이는 창작에 대한 은유로서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표현이 된다. 허나 작품에는 전반적으로 뒤러의 '멜랑콜리아(Melengolia I)'와 같이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짙게 갈려 있다. 파노프스키가 「어둠의 철학」을 근거로 밝힌 예술가의 음울한 숙명을 암시하는 듯 말이다.
한지민_피어나는 꿈의 연기_리노컷_48×30.5cm_2012

결국, 한지민의 작품은 오늘날과 같이 아우라가 붕괴된 탈신화적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그리고 예술가로서 스스로에 대한 성찰과 사유의 과정을 바탕으로 재조된 개인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고대로부터 전래되어왔던 많은 이야기들이 그러하듯 한지민의 이야기 역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는 감각과 사고를 깨워 현실의 삶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세계를 다시금 만나는 초월적인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 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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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으로 Back to the Beginning


조태광展 / CHOTAEGWANG / ??? / painting 2012_0614 ▶ 2012_0707 / 일요일 휴관


조태광_떠도는 숲_리넨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초대일시 / 2012_06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 Gallery b'ONE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32.1273 www.gallerybeone.kr


다시 처음으로 ● 우리는 유토피아를 소망한다. 1516년 토마스 무어에 따르면 유토피아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벗어나 자연으로, 인류 본연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자연 상태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태광의 회화는 유토피아적이다. 근대 문명에 따른 폐해가 존재하지 않는 태고의 자연이 16세기 유토피아의 가장 이상적 형태라면 조태광의 회화는 단연 유토피아다. 자연을 묘사한 따뜻하고 다정한 색채로 가득 찬 화면은 밝게 빛나고 빈곤과 기아의 부재를 대신하여 완벽한 풍요와 절대적 여유가 존재한다.
조태광_떠도는 숲_리넨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2

유토피아는 미래지향적 대안인 동시에 돌아가고 싶은 과거 지향적 성격을 가진다. 이런 양면성은 스베트라나 보임(Svetlana, Boym)이 연구한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이후 동부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노스텔지어에서도 발견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을 의미한 프로이트의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부터 프레데릭 제임슨의 파스티슈(Pastiche)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기존의 노스텔지어 개념에서 벗어나 보임은 과거재건적(restorative)이자 과거반성적(reflective) 성격을 수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근래의 노스텔지어는 잃어버린 과거의 문화를 추앙하고 재건하려 하는 동시에 과거의 문화가 다시 반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과거를 동경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에 노스텔지어는 유토피아의 미래의 것이되, 과거의 순수한 상태를 꿈꾸는 실현 불가능한 상태와 맥을 같이한다.
조태광_떠도는 숲_리넨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2

실현되지 않은 그리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노스텔지어는 작가의 연작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색면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떠도는 숲」, 사람들이 해변에서 한가하게 피서를 즐기는「On the Beach」. 이 모든 것이 조화롭고 완벽한, 이상화된 노스텔지어적 이미지다. 색면(color field)으로 표현된 아름답게 정리된 농장의 정경과 해변가의 피서객들은 마치 끝없이 발전할 것 같던 과거 40~50년대 미국의 풍요로운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구글 어스의 기능을 이용하여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에서 벗어난 지역을 선정하는 작가의 선택과정은 더욱 이러한 비현실성을 강조한다. 실현가능할 것 같지만 과거의 여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즐기기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접근이 여의치 않은 유리된 자연, 선택된 유토피아인 것이다.
◁ 조태광_맴도는 숲_리넨에 아크릴채색_91×91cm_2012 ▷ 조태광_On the Beach_리넨에 아크릴채색_91×91cm_2012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는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완성한 작가의 시각은 무엇을 대변하는가. 데이터를 집적하여 만드는 구글 어스의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품의 시공간은 시선에 의한 감시를 상기시킨다. 푸코의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 모든 것을 영구히 볼 수 있는 완벽한 감시 장치 판옵티콘"은 구글 어스를 통해 구현되었다. 완전히 공개적인 동시에 계산된 시각으로 완벽히 은밀하게 작동하는 장치의 속성은 지구의 모든 장소를 비추되, 그 작동 형태를 물리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글 어스와 동일하다.「on the beach」에서 면밀하게 묘사된 해변가의 여행객은 누군가 훔쳐보고 있는 듯한 불쾌감이자 그들을 엿보는 쾌감을 양가적으로 불러온다. 대상의 정체를 검은 점으로만 표현하는 구글 어스의 정책은 개개인을 보호하는 것 마냥 느껴지지만 관음증적이며 통제하기 위한 시각은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숨통을 옥죄어 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가는 숨겨진 무언가를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치밀하게 묘사하여 우리 주변을 휘감고 있는 숨겨진 감시자의 역할을 폭로한다.
조태광_낮잠_리넨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2

깔끔하게 구획으로 나뉘어 성장하는 자연 역시 작가에 의해 변성된 유토피아임을 알리는 단서이다. 인간의 계획과 조정에 의해 제어되는 플랜테이션 농장은 원초적 생명력의 자연과 정반대되는, 유린된 자연과 인공적 질서를 대표한다. 이제 숲은「눈물이 되어」공포스러운 생산력 수탈아래 놓이게 되고 인간에게 완전히 정복된 공간은 지루한 색면으로 변모한다. 따뜻하게 빛나던「떠도는 숲」의 여유로움은 기계적으로 배치된 상품을 보듯 평면적으로 구획된 격자무늬로 돌변한다.
조태광_눈물이 되어_리넨에 아크릴채색_130.3×162.2cm_2012

화면을 유영하는 구름을 통해,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는 나무를 이용하여 작가는 디스토피아로 변질된 화면을 유토피아로 되돌아가도록 다시금 유도한다. 비현실적인 소도구들을 이용하여 화면의 현실과 거짓을 교묘히 뒤섞어 관객들을 뒤흔든다. 여기서 그는 작품을 통해 감시자와 개입자를 넘나들며 중재자로 기능한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평평한 구글 어스의 부조리한 시공간 탐험을 폭로하며 완벽한 통제를 목표로 하는 도시의 유토피아이자 인간의 디스토피아는 이렇게 완성된다.
조태광_그날이후_리넨에 아크릴채색_50×60.6cm_2012

홍진의 세계를 벗어나 표표히 살고자 하는 것은 동서양 모두 마찬가지이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울 때마다 사람들은 사회의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꿈꾸나 이를 구체화하거나 현실화하지 못했다. (실상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믿었던 것은 혁명을 통한 체재 전복을 꿈꾸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조태광 역시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접점에서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의 현실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그러나 그 경계는 불분명하고 작가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에 현실적 개입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고 그의 작업 역시 유토피아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관음증적인 시선을 통해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의식 무의식을 넘나드는 개입을 하며 전시를 마무리 짓는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그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중간계로. ■ 권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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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Kunst Doc


권순학展 / KWONSOONHAK / 權純學 / photography 2012_0622 ▶ 2012_0705 / 월요일 휴관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권순학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622_금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부모님의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다. 감기기운이 누그러지며 피곤이 밀려오는 듯한 그러한 순간인데 완전히 깨어있지도 그렇다고 졸고 있지도 않다. 천장은 눈처럼 흰 백색의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데 거의 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표면의 질감으로 관심을 돌리자 완벽해 보이던 그 백색의 표면은 수많은 곡선, 구멍, 상처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백색의 정의를 내리기가 힘들어져 버린 상황에서 단일성과 복합성에 대한 구별마저 힘들어지는 것을 느낀다.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_Giclée Print_111×316cm_2012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I_부분

비어있는 공간을 응시하는 와중에 내 입 속의 혀는 입천장과 치아를 건드리고 있다. 갑자기인지 점진적으로 찾아온 것인지 입 속에서 무언가 두꺼움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묘한 상태에 진입하였다. 마치 거대하고 날카로운 매스가 내 입에서 떠 다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동시에 여기 이 방안도 가득히 메우고 있다.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의 극단이 동시에 느껴지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내 몸 안에서 느껴진다는 것도 거슬린다. ● 이제 천장은 거대하게 느껴진다. 아니다. 작게 느껴진다. 모르겠다. 이제 천장과 나와의 거리감에 대한 개념이 없어졌고 공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어지럽다. 나는 아직 내가 누워있는 것에 대해 의식하고는 있지만 역설적으로 마치 천장에서 아래를 보고 있는 듯한 현기증이 난다. ● 나의 몸은 거대한가? 작은가? 왜 혼란스러운가? 시간이 많이 흘러간 것 같다. 아닌가? 나에게 찾아온 이 묘한 상태를 내가 통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쉽게 떨쳐버릴 수도 있지만 호기심이 발동해서 나는 계속해서 이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놀고 있다.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I_Giclée Print_211×77cm_2012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II & IV_Giclée Print_300×440cm_2012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다." 이제 이 환각상태의 다음단계에 돌입할 것 같은데 좀 더 극단적인 상태로 나를 초대한다. 환청을 동반한 구체적인 상황을 연상하게 되었다. 현기증이 심해지며 구체적인 환영과 환청으로 발전되어 '거대함과 작음', '좋음과 나쁨', '진실과 거짓' 그리고 '나와 타인'등과 같이 상반되는 것들이 동시에 느껴지며 구별 하기가 힘들어졌다. 연상에 의한 환청은 웃음소리와 비명소리가 구별되어지지 않고 하나로 들리는 듯 하다. ● 이 단계의 환각은 나의 감정 깊이 들어와 혼란을 야기하고 있기에 이제는 너무나 불편하다. 기분이 언짢아져서 응시하는 것을 그만두고 이 환각에서 빠져 나오려 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 권순학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II_부분
권순학_History of Kunst Doc IV_부분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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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 그 絶對를 향한


김종영展 / KIMCHONGYUNG / 金鍾瑛 / sculpture.painting 2012_0622 ▶ 2012_0726 / 월요일 휴관


김종영_Work 64-3 자각상_나무_26×17×16cm_196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50227a | 김종영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우성 김종영 30주기 특별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김종영미술관 KIM CHONG YUNG SCULPTUER MUSEUM 서울 종로구 평창동 453-2번지 Tel. +82.2.3217.6484 www.kimchongyung.com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선생은 한국과 동양의 사상에 깊이 뿌리를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화정신을 수용함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전통을 지켜 나가는 문제와 새로운 문화 속으로 뛰어 드는 문제인데 그런 점에서 우성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많이 닮아 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서구미술의 흐름을 읽어 나가며 우리네 전통예술과의 상관성을 추구하셨던 우성
2012.06.20 20:36:18 / Good : 404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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