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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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5.02 20: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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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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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의도시 (City of Illusion)


구본석展 / KOOBONSUK / 具本錫 / mixed media 2012_0501 ▶ 2012_0520 / 수요일 휴관


구본석_City of light and dark_LED 패널, 아크릴_72×116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716a | 구본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1_화요일_06:00pm 스페이스선+갤러리 신진작가공모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수요일 휴관   스페이스 선+ Space Sun+ 서울 종로구 삼청동길 75-1 Tel. +82.2.732.0732 www.sunarts.kr

  빛의 환영 ● 구본석은 이미 캔버스 위 핫픽스의 무수한 반복으로 밤의 정경을 표현한 연작을 여러 차례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신작은 기존의 장식적이고 물질적인 형태에서 멈추지 않고 좀 더 발전하여 LED를 사용한 정말 더 '야경'같은 빛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다. 무수한 틈의 조합 속에서 빛이 퍼지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형태를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빛의 색이 쉼 없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휘황찬란한 시각의 혼란을 체험하게 된다. 구본석의 이러한 연속적인 작업 세계에서 보이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는 건물, 도시의 모습은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보고 익숙해 져버린 우리에겐 어쩌면 너무 친숙한 풍경들을 다시 상기시키며 새삼 우리가 이러한 현란한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나 할 정도로 강하게 우리의 숨어있는 기억을 자극한다. 실상 작품을 통해 형태를 인지하면서 관람하는 우리는 어떠한 현실을 이미지화 시키는 과정에서 옮겨진 그 자체의 대상에 대해 기호를 통한 표현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실 우리 머릿속에 있는 또는 실제 존재하는 형태를 어떠한 도구를 통해 전달하여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도구를 통해 옮겨진 그 이미지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이미 이미지화가 이루어진 것은 현실과 즉 우리가 재현한 대상과 유사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말한 '코드 없는 메시지'와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옮기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코드 변환이 필요하지 않지만 재현의 미메시스를 표방하는 회화는 현실의 복사물임에도 불구하고 재현의 과정에서 그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의 주체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옮기는 과정 안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인 기호 코드가 들어있는 것이다.  
구본석_City of light and dark_LED 패널, 아크릴_각 72×116cm_2012
구본석_City of Illusion_LED 패널, 아크릴_30×50cm_2012
구본석_City of Illusion_LED 패널, 아크릴_30×50cm_2012
구본석_City of Illusion_LED 패널, 아크릴_60×91cm_2012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시뮬라시옹' 이론을 설명하면서 오늘날의 추상은 더 이상 지도나 복제, 거울 또는 개념으로서의 추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구본석의 작업에서 형태의 추상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보드리야르는 이미지나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어떤 실체의 시뮬라시옹이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 즉 파생실재(hyperréel)를 가지고 산출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시뮬라시옹의 작용은 사라져버린 모든 형이상학적인 면을 띄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더 이상 존재와 그 외양을 나누던 실재와 그 개념을 나누던 상상적인 공통분모가 없어지게 되면서 실재는 무한정 재생산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이상적이거나 부정적인 어떤 사례에 빗대어 측정되지 않는 조작적일 뿐인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이상 실재를 포괄하지 않는 합성물이 되는 것이다.  
구본석_City of light and dark_LED 패널, 아크릴_각 90×160cm_2012
구본석_City of light and dark_LED 패널, 아크릴_83×180cm_2012
  구본석의 「City of Light and Dark」 연작에서 보이듯 시뮬라크르된 투명성 앞의 파생실재성 속에서 모든 형태는 물질과 이상의 관점을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드리야르가 낭만주의를 허무주의의 첫 번째 커다란 출현이라고 말했듯 화려함 속의 미학적 형태는 결국 실제가 없는 것들에 대한 생산을 계속 해낸다. 이렇게 실제가 없는 허구 속에서 펼쳐진 빛의 이미지들은 공간과 상황에 대한 지각의 혼란을 제공하는데 이는 「City of Illusion」작업에서 극명해 진다. mise en abîme 기법의 심연의 무한 반복은 결국 실제와 재현의 모든 차원을 벗어나 초현실적인 환상적 효과로 이야기를 마감한다. 이는 할 포스터가 말했듯 프로이드 적인 언캐니(uncanny)개념에서 보이는 사실과 상징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을 흐리는 경험을 의미한다. 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흐리는 묘함 속에서 밝고 현란한 빛의 작용은 결국 허상이라는 환상의 환영을 남기며 복제된 빛의 움직임으로 반복된다. ■ 김주옥 ---------------------

못난 딸이라 미안, 엄마.


히데카 토노무라展 / Hideka Tonomura / 殿村任香 / photography 2011_1028 ▶ 2011_1118


히데카 토노무라_행복한 우리 집 시리즈_비디오 프로젝션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히데카 토노무라 홈페이지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협찬,주최 / 트렁크 갤러리 81 기획 / 최현중 큐레이터 관람시간 / 11:00am~07:00pm   트렁크갤러리 81 TRUNK GALLERY 81 서울 종로구 인사11길 22 1층(구, 견지동 81번지) Tel. +82.2.737.3781 www.trunkgallery.com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사진가로 살기로 결심했고, 예술가로써 지금 이 시간 이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야 하겠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나중에 단 몇 줄로 채보 될 음계와 리듬을 구성해 내기 위해 수 백배의 시간을 고민한 즉흥연주자처럼, 당신이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렇게 원하고 원했던 무대에 오르기 위해 매니저도 없고, 악기를 안전하게 이동할 차량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고 말입니다. 아마도 연습할 시간을 빼앗겨 가며 관계자들을 만났겠지요. 내가 이 무대에 서야 할 이유를 보여주고 설득하기 위해 노래방까지 따라가서 악기를 연주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시간이 아까워 당장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을 술자리와,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웃거나 울며 지었을 표정도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지친 몸을 뉘인 배게 위에서 떠오르는 자기 의심과 불안. 그러면서도 다시 자기 자신을 다잡으면서 되뇌었을 자신만의 주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 그런 간난신고 끝에 히데카 토노무라는 자신이 그토록 열망하던 곳까지 왔습니다. 이 곳에서 사진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불륜 상대와 정사를 벌일 것이고, 그것을 자신의 피붙이인 딸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단지 보여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광경은 필름에 자취를 남기고 적절한 방법을 거친 후 인화지에 갇혀 공공장소에서 버젓이 전시될 것입니다. ● 당신은 예술가라 이 장소와 시간, 이 무대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다시 한 번 가정해 봅시다. 그렇지만 이 무대의 대도구이자 소도구이며, 주인공이자 관객으로 설정 된 당신의 엄마와 그 애인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엄마의 딸이자 사진가인 한 편, 오늘 이 곳에서 배우/연주가/무대감독이 된 히데카 토노무라는 이 모든 요소를 종합해내 만족스런 기록을 남길 수 있을까요? 이 한편의 소극은 과연 기획자가 의도한 결말로 갈 수 있을까요? ●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이 전시를 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무수한 사진 이론과 관계 없이 말입니다. 기념사진이니까 서로 친한 포즈를 잡아보라고 주문할 때, 카메라 렌즈 앞에서 자신이 가장 멋지게 나오는 포즈를 궁리할 때, 사진에 찍히기가 징글징글하게 싫을 때, 어떤 사진은 버리고 어떤 사진은 앨범에 간직할 때를, 그리고 당신이 카메라의 액정화면 뒤에서, 그리고 렌즈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기억해 낼 수 있다면, ● 당신은 이 전시를 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가 어떤 결말을 얻었는지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 최현중  
히데카 토노무라_mama love_오리지널 프린트_20.32×25.4cm
  이 작가는 여자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실제 가족을 찍었습니다. 가족은 불행합니다. 아버지는 거의 돈을 벌지 않고 직업도 없습니다. 가족을 때립니다. 성애를 하는 여자는 작가의 어머니입니다. 집에서의 어머니와 성애를 하는 어머니는 전혀 다른 여자처럼 보입니다. 작가는 어머니의 불륜 장면을 찾아가 어머니를 직접 찍었습니다. 어머니와 얽혀있는 까만 부분 혹은 남자는 어머니의 남자친구입니다. 어머니의 불륜을 찍기는 했지만 남자의 요청인지 남자는 까맣게 칠했습니다. 어머니의 남자친구가 예술가적 감각이 있었는지 까맣게 칠해진 남자로 인해 훨씬 임팩트 있는 작품이 된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아버지에게 보여지는 것이 두려워 전시도 집에서 아주 먼 곳에서 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작가의 아버지는 이 작품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아는 사실입니다. ● 이 작품을 보고 이 사실들을 듣는다면 페미니즘이나,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특히, 라깡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이용한다면 증폭된 관계의 끈을 쉽게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시간이 있고, 아직 전시장 안이라면 작품을 한 번 더 보고 아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은근 바라는 것이 많은 글입니다. 아래 글은 제가 느낀 것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고 이 작품에 없는 두 가지에 관심이 갔습니다. 하나는 작가의 아버지고, 다른 하나는 작품을 보고 이 글을 읽는 당신입니다.  
히데카 토노무라_행복한 우리 집01
히데카 토노무라_행복한 우리 집02
  저는 이 작품에서 - 그리고 이 가족 내에서 -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불행의 씨앗처럼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진에 거의 나오질 않습니다. 아버지는 이 작품의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요? 어쩌다 한 번 아버지와 작가가 서로에게 관심 없어하는 시선을 보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저 딸년이 또 무슨 미친 짓거리를 하나하고 무관심했을 수도 있고, 딸은 아버지가 무서웠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의 빈 공간은 우리가 채워가면 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작품 전체에서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아버지에게는 딸의 존재가 하찮겠지만). 이 작품 어느 것 하나도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첫 사진부터 마지막 사진까지,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부터 허망한 방안 사진까지 아버지를 의식하고 있는 작가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아이덴티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나오고, '가정의 어머니와 불륜의 어머니'같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머니도 여자구나'하는 어머니의 아이덴티니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작가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작품이(전시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매우 세련되면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을 -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어머니를 통해 – 드러냈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 다음은 당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당신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이 전시를 본 것일까요? 아니면 보여짐 당한 것일까요? 상당히 쓸데 없는 이야기이지만 재미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살 돈이 없기도 하지만 돈이 있어도 이 작품을 내 방안에 걸어놓고 싶지도 않습니다. 너무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날 낳아준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성애를 즐기는 장면을 매일 아침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작품 - 의 폭력성 - 을 보면서 지젝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포르노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 영화에서는 배우가 카메라 렌즈와 눈을 맞추는 것은 금기입니다. 배우가 렌즈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그 영화가 가상이라는 것이 들통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르노의 여배우는 일반 영화와는 다르게 카메라 렌즈를 바라봅니다. 저는 흥분 속에서 그 시선을 즐겼지만 지젝은 슬로베니아학파(슬로바키아와는 다른 나라입니다)를 만든 대학자답게 포르노도 학구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포르노를 볼 때 야한 것이라는 한가지 목적만 기대합니다. 마치 파블로브의 개 같죠. 이것은 포르노가 우리에게 도착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성적으로 흥분시킵니다. 여기서 지젝은 말합니다. 우리를 흥분시키는 포르노 배우가 실제 시선의 주체이고 우리는 그저 마비된 대상이라고. 포르노를 보는 순간 우리는 시선의 타자가 됩니다. 라깡이 말한 '대상을 보고 있는 눈은 나에게 있지만 응시는 대상 쪽에 있다', 바로 그것입니다. ● 작가의 어머니 또한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를 시선의 타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갤러리 또는 사진집은 우리를 무장해제시킵니다. 여기서부터는 예술의 영역이니 야한 생각이나 돈 생각은 버리고 경건하게 작품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애를 즐기는 어머니의 모습은 무장해제한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그저 마비된 체 응시 당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 어머니의 시선은 현실과 가상을 가르는 선이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모습이 불편한 것은 그런 어머니의 현실적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라깡은 이런 모습이 진짜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 진짜 세계를 곤혹스러워하는 우리는 지금 모두 가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작품에는 우리가 채워가야 할 빈 공간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이 글을 통해 작품의 빈 공간을 조금 더 채워보았습니다. '이 작가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할거야', '어머니의 애인은 어떤 생각으로 촬영을 동의해주었을 거야'같은 스토리부터 데리다니 들뢰즈니 하는 부분까지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이 빈 공간을 함께 채워갔으면 좋겠습니다. ■ 남상부     ---------------    

The Starry Night


이은열展 / LEEEUNYEOL / 李銀烈 / photography 2012_0502 ▶ 2012_0507


이은열_The Starry Night #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94×12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 Tel. +82.2.734.9258 gana.insaartcenter.com

  어느 날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한 감정의 실체는 낮보다는 밤에 엄습한다. 이런 정서적 기호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알 수 없을 때 상징적인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며 그것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개인적의 밤의 의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공간형성이 가능한 시간을 의미한다. ● 나의 불안한 감정은 환경적 요인인 공간으로부터 생겨나왔다. 낯선 장소, 사람들, 소리, 냄새 등과 같은 환경이 주는 개인적인 불안한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기억 속 그리움으로 남고, 또 다시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낯설어 지는 순환적 감정인 '언캐니'의 경험을 담았다.  
이은열_The Starry Night #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8×100cm_2011
이은열_The Starry Night #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94×120cm_2011
  「The starry night」는 밤이 주는 개인적인 공간과 그 안에 밀려드는 정의하지 못하고 형용하지 못하는 갖가지 감정을 표현하였다. 자연의 밤이라는 검은 공간을 거대한 스튜디오로 활용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오브제에 직접 전구를 설치하여 필름 안에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의 아날로그적 표현방법을 하였다. 사진 안에는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익숙한 기억의 풍경인 전구를 설치 하기 전의 풍경과 개인적 감정을 흩뿌려 표현한 전구를 설치 한 후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의 빛이 합쳐서 신비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은열_The starry night #7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78×100cm_2012
이은열_The starry night #9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94×120cm_2012
  나의 불안한 마음과는 달리 밤하늘은 잠을 자고 있었다. 하늘은 고요 했고, 어두운 곳에서 더욱 고운 빛을 내었다. 별은 더욱 반짝였으며 자연의 것들은 그렇게 은은하게 퍼져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밤하늘에 표현함으로써 스스로 감정을 덜어내고 위안을 받는 행위는 온전히 나의 마음에 집중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이은열  
이은열_The starry night #12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94×120cm_2011
이은열_The starry night #13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94×120cm_2012
  The reality of emotion --------------

비상(飛上)을 꿈꾸다 Ⅱ


한유진展 / HANYUJIN / 韓有珍 / painting 2012_0502 ▶ 2012_0508


한유진_新天地2012-Ⅰ_린넨천에 채색_73×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31b | 한유진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화봉 갤러리 초대 개인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1159 gallery.hwabong.com

  나의 그림 속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새, 해와 달, 구름, 모란꽃, 둥근 원 등 많은 이미지가 함께 공존한다. 이 모든 이미지의 공통점은 길상(吉相)적 의미로써 부귀(富貴)와 공명(功名), 풍요(豊饒),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조합하며 비상을 꿈꾼다.  
한유진_新天地2012-Ⅱ_린넨천에 채색_80×117cm_2012
한유진_新天地2012-Ⅲ_린넨천에 채색_110×90cm_2012
  이번 작품들은 위에 언급한 많은 이미지들 중에 가릉빈가(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새)와 달, 이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가릉빈가(迦陵頻伽)에 대해 언급하자면, 불교에서 이것은 극락정토에 사는 새로 머리에는 여인의 얼굴, 몸은 새, 손은 사람의 손, 발은 새의 발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며, 문화권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어 진다고 한다. 항상 즐거운 노래를 연주하고 있어 극락을 갈구하는 인간의 염원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날개를 좌우로 펼치고 있는 모습은 극락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인간의 바람을 나타낸 것이다. ● 나는 중생들에게 부귀영화(富貴榮華)를 가져다주는 길조인 가릉빈가에 모란꽃을 함께 그려 길상적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으며, 가릉빈가로 표현된 작품 속 인물들에 나 자신을 투영시켜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해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한유진_新天地2012-Ⅳ_린넨천에 채색_53×45.5cm_2012
한유진_日月 2012-Ⅰ_린넨천에 채색, 은박_85×270cm_2012
  다음으로 달이다. 달은 해와 함께 우주 속 하늘의 한 가운데 떠있는 신비한 천체물로 낮과 밤을 지속적,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며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소중한 존재이다. 또한 원시시대부터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무신도(巫神圖)의 "일월신도(日月神圖)"에는 해와 같이 표현되어져 있기도 하다. 또한 주기적이고 항구적인 달의 운동은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영생(永生)의 존재로, 생성-죽음-재생이라는 윤회의 이미지로 인식 되어졌다. 이러한 달의 가장 큰 의미는 장생불멸(長生不滅)이며, 이로 인해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민화의 십장생도(十長生圖)에서 달과 함께 장수(長壽)를 상징했던 구름을 같이 그려 넣어, 상서(祥瑞)로운 의미를 더하였다.  
한유진_月2012-Ⅰ,Ⅱ_린넨천에 채색, 은박_80×80cm_2012
한유진_月2012-Ⅲ_린넨천에 채색, 은박_85×85cm_2012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이런 의미들을 내포하는 이미지의 조합으로 아직은 날아오르지 못한 다양한 인물들이다. 어떤 인물은 사내아이 같은 모습으로, 어떤 인물은 단발머리 소녀로, 각기 다른 모습이지만 모든 인물 군상들은 심리적 불안감을 떨치고 한발 나아가고자 하는 나 자신이다. 나는 작업 안에서 길상적인 의미를 뜻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하여 비상(飛上)하고픈 나를 그대로 반영하고자 하였다. ● 길상적 의미들을 가지고 조합한 것이라면 '비상이란 단어만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인데 '꿈꾸다'는 왜 붙였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작품 속 인물들은 높이 날아오르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에 있으며, 현실 속의 나의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 지금의 시간은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 생각되어 진다. 그러기에 이번 전시에서는 나와 나의 작품이 함께 비상을 꿈꾸고 있음을 전하고 싶다. ■ 한유진 ----------------

wave


김민정展 / KIMMINJUNG / 金珉廷 / painting 2012_0502 ▶ 2012_0508


김민정_아일랜드_장지에 채색_73×12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403g | 김민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한여름의 거센 소나기,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광활한 바다, 시끄럽게 부딪치며 흐르는 계곡물, 한치 앞을 알 수 없이 자욱한 안개, 고요한 강물 등 물은 다양한 형태로 흐르고 순환한다. ● 나는 물의 여러 형태 중 홍수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관점이 아닌 자연의 관점에서 보아 재해가 아닌 자연의 순환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작업하였다. 홍수로 인해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 물로 덮여 일상적이지 않은 우연한 풍경에서 시각적 충격과 생경함을 느꼈다. 그것은 재앙이라는 두려움보다는 온 천지가 물을 담는 하나의 공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안의 공간에서 둥둥 떠다니고 부유하는 사물들은 수영장의 물놀이를 떠올리게 하였다. 이러한 상상력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다른 시각에서 본 것으로 구체적인 형상을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결합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민정_district_장지에 채색_130×150cm_2010
김민정_표류_장지에 채색_75×90.5cm_2012
  이러한 입장에서 시작된 작품은 우선 물의 특성을 바탕으로 한다. 물은 자연의 한 요소로 주변의 환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순환한다. 물의 다양한 물리적 속성은 작품 안에서 다양한 형상으로 등장하는데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고 곡선을 만들어내며 부드럽게 흐르는 모습으로, 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은 그 양에 따라 청각적인 상상력 또한 유발시키며 많은 양의 물이 폭발적으로 떨어지고 흐르는 모습은 파괴적이고 두려운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본인의 작품에서 이처럼 물은 다양한 형태로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물질적 특성을 지녔다.  
김민정_wave2_장지에 채색_90.5×75cm_2012
김민정_wave1_장지에 채색_110×57.5cm_2012
  본인의 작품에서 물을 표현하는 주된 조형적 요소는 드로잉인데 주위의 영향에 따라 여러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물을 점과 점에서 파생된 선을 그 요소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과 선의 조형요소로 하여 이미지를 단순화시켜 물의 방향성과 운동감을 강조해 물의 흐름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김민정_이중적 풍경_장지에 채색_150×260cm_2012
  나의 작품 안에서 물의 다양한 형태가 공존한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 산의 계곡에서 굽이쳐 흐르는 물, 급히 아래로 하강하는 폭포수, 잔잔히 흐르는 강물, 등 모든 물들은 아래로 떨어져 고이고 넘쳐나 지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이러한 중력이 작용하는 자연의 모습 때문에 위 부분은 몽환적인 차분함이 느껴지지만 아래로 갈수록 역동하고 넓게 퍼지는 구성이 된다. 물에 잠긴 도시의 모습은 간간히 보이는 높은 건물이나 굴뚝 등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내었다. ■ 김민정     --------------------    

또 다른 창으로부터, De nouvelles fenêtres


박자용展 / PARKJAYONG / 朴仔容 / painting 2012_0502 ▶ 2012_0515


박자용_contemplation_피그먼트 프린트_60×12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자용 홈페이지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09:30am~06:30pm   갤러리 라이트 gallery LIGHT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7번지 미림미술재료백화점 3층 Tel. +82.2.725.0040 www.artmuse.gwangju.go.kr

  또 다른 창으로부터 ● 박자용은 현실 세계와 지각의 새로운 효과를 재배열하기 위해 사진을 조형적인 수단으로 이용한다. ● 그녀는 원 사진 이미지의 구성을 상실시키며, 비건축적인 해체 행위속에서 의도대로 이미지를 삭제시키며 이를 작업에서 하나의 재료로 사용한다. 특별한 것은 원 이미지의 부재 속에 또다른 사실적인 구조를 도입시킴으로 그 속에 다른 새로운 의미의 창을 삽입하며, 이는 클래식한 페인팅 작품에서와 같은 의미로 참조 이해 될수 있다. ● 박자용에 의해서 이 형태들은 다시 사진으로 만들어져 입문된다. 말하자면, 다양한 수단의 테크닉과 여러 매체의 혼합에 대한 질문들은 효과와 결과를 위해서 존재된다. 결론적 이미지들에서는 실질적 대상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것들은 촬영된 사진의 사실적 이미지들을 삭제시키므로) 조형작품을 위하여 사진으로 기록된 이미지를 습관적으로 지워나간다. 조형적 과정에 반대되는 이 행위는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하여 이미지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 베르나르 제르부  
박자용_또 다른 창으로부터 I_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2
박자용_또 다른 창으로부터 II_피그먼트 프린트_80×120cm_2012
  존재하지 않는 장소, 하지만 존재하는 공간. ● 나의 작품은 사실적인 공간을 촬영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 존재하는 공간을 바탕으로 수많은 공간과 시간들이 중첩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적이며 동시에 가상성을 가지고 있는 비현실적 가상공간 속의 시선을 보여준다. ● 사진의 고유한 특성인 기록성을 통해 현실 속 존재하고 있는 공간을 기록한 듯한 이미지는 내가 경험하고 존재했던 기억의 장소를 끼워맞춘 기억의 편린의 공간이다. 또한 다른 양식들의 건축물에서 따온 요소들을 한 공간에 자연스럽게 도입시킨다. 창문과 문을 통해 나타나는 공간, 외부는 상식적으로 바깥이 되어야 하지만 때론 외부가 또 다른 내부의 통로가 되기도 하며, 내부 공간이 밖이 되기도 하는 초현실주의적이며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시선을 보여준다. ■ 박자용  
박자용_공간의 미학_피그먼트 프린트_40×120cm_2012
박자용_공간의 미학_피그먼트 프린트_60×12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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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PARADISE


박종화展 / PARKJONGHWA / 朴種和 / painting 2012_0502 ▶ 2012_0529


박종화_FREE MARK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3×227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GSTOWER THE STREET GALLERY 관람시간 / 24시간 관람가능   GS 더스트릿 갤러리 GS THE STREET GALLERY 서울 강남구 역삼동 679-1번지(논현로 508) GS타워 1층 로비갤러리 Tel. +82.2.2005.1173 www.gstower.co.kr

  영화는 픽션이다. 즉, 결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폭소를 터트리기도 한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은 바로 현실이다. 잠시나마 현실의 상황이 아닌 영화 속 연출된 상황 속에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박종화_정글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2×100cm_2011
박종화_에이스벤츄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7cm_2011
박종화_I love you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120cm_2012
박종화_green toil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2×100cm_2011
박종화_남자의 시선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80cm_2011
박종화_바람난 가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0×180cm_2011
  몇 개의 영화장면들을 뒤섞어 놓고, 그 속에 여러 인물들을 내 마음대로 배치해 놓으면서 나는 신이 난다. 붓을 잡고 색을 입혀가면서, 내가 만들어가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 나는 자유롭다. 풍경을, 인물을 자세히 묘사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깊은 공간감을 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냥 즐겁고 재미나게 상쾌한 색들을 입혀나가며 나만의 장면들을 내 방식대로 연출한다. 내가 만들어 놓은 장면들은 일상 속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들이다. 그래서 작업하는 과정 내내 내가 더욱 유쾌하고,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마치 영화를 보며 그 시간 대리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의 작품을 보게 되는 관람객들도 즐겁게 만들어진 작품앞에서, 잠시나마 유쾌하고 상쾌한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 박종화 --------------------

품 Breast


이우창展 / LEEWOOCHANG / 李宇昌 / painting 2012_0503 ▶ 2012_0520 / 월요일 휴관


이우창_얼굴2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710c | 이우창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담당기획 / 박영택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이우창-피부를 품다 ● 회화는 피부위에 기생한다. 세계의 피부를 주어진 화면의 표면위로 옮기는 일이 그림이다. 모든 사물과 인간은 자신의 피부만을 보여줄 뿐이기에 회화는 그 피부 너머를 강박적으로 탐하면서 육박한다. 그러나 결국 회화도 납작한 피부위에서만 서식하는 일이기에 그 피부를 떠내면서 그 내부를 열어보이고자 하는 무모한 일을 욕망한다. 따라서 그림은 표면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표면을 하나의 통로로 삼아 그 이면을 펼쳐 보여주는 일이다. 사물과 살의 안쪽을 연상하게 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이우창_얼굴3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11
  캔버스 표면에 단색의 미묘한 톤으로 인간의 피부를 그리는 이우창의 그림은 얼핏 흑백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잠시 헷갈리게 하기도 하고 오일페인팅과 수묵의 가늠도 애매하게 한다. 아울러 그것이 어떤 몸인지, 왜 그 피부에 주목하고 있는지도 잘 잡히지 않는 편이다. 몸에 근접해서, 그 피부에 달라붙어서 뜯어먹는 시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우창_얼굴5_캔버스에 유채_162×97cm_2011
  이우창은 분명 실재하는 인물을 그린다. 자기 앞에 놓은 대상에 대한 이 핍진한 시선은 세부에 탐닉하는 눈과 붓질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러한 접근이 역설적으로 대상을 무척이나 낯설고 모호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있다. 뒷짐을 쥐고 있는 사내의 손, 늘어진 뱃살을 보여주는 남자의 가슴 부위는 흡사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기 위해 서있거나 진찰을 받기 위해 웃통을 벗고 앉아있는 이의 몸을 연상시키는 포즈다. 그것은 자신을 보는 타자의 시선, 기계의 시선에 무방비로 놓인 몸, 사물화된 몸과도 같다.  
이우창_품_캔버스에 유채_27.5×17cm_2010
  사실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그의 회화는 그런 파편화된 시선에 의한 부분적 접근, 모노톤의 중성적인 색채를 통해 다소 애매한 느낌 등을 전달하려는 것 같다. 구체적인 누군가의 재현이나 묘사와는 분명 다르다. 작가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그리지만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연유하는 느낌의 시각화에 주목한다. 비로소 주체와 대상이 만나서 발생하는 감정, 사건, 느낌이 시각화다. 자기 앞에 자리한 인물의 피부를 훑어나가면서 그것이 자아내는 아우라를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인물화는 일반적인 인물화와 다르다. 사람의 얼굴생김새를 중심으로 그리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접근한 시선, 뜯어먹는 시선으로 피부를 관찰하는데 특히 ' 피와 뼈'를 화면에 표현하고자 한다.  
이우창_품I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2
  그는 고고욕생(枯槁欲生) 혹은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성향이자 그가 존재를 통해 느낀 것이다. 그 육덕진 것과 현상들에 주목하는데 그것들을 결국 살기위한 본능을 지닌 것들이다. 누군가의 피부를 지도 그리듯이 그리고 지도를 읽어가듯이 독해한다. 피부란 내부를 감싼 막이자 세상의 경계이고 모든 생명체의 외형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이다. 그 멈춰있는 대상을 보고 그리면 문득 그 피부의 주인인 생명체의 과거와 미래, 현재가 읽혀진다. 그 피부를 그리다보면 그 피부를 두른 이의 삶의 역사가 다가온다. 그가 살아온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펼쳐진다. 바로 이 부분에서 그의 그림은 외모와 피부의 핍진한 묘사를 통해 이른바 전신사조에 도달하고자 했던 조선신대 초상화와 만난다. 외모를 통해 정신이 드러나고 그의 생애가 기록된다. 그것이 다름아닌 성리학에서 주창하는 이기일원론에 유사한 것이다. 이우창은 모종의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특정 의도를 가지고 모델에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그 존재/피부를 보면서 그의 생명체로서의 본능을 그리고자 한다. 그림에는 살 안에 보이는 핏줄, 부드러운 질감 등이 어른거린다. 설명과 표정을 지닌 안면을 배제한 신체만이 풍경처럼 파리하게 자리한다. 부동의 신체, 피부에는 처지고 늘어진 살과 주름, 반점들이 별처럼 흩어져있다. 그렇게 외부로 드러난 조그마한 단서들을 조심스레 그림 안으로 불러들여 한 존재가 지닌 생명체로서의 본능과 생애의 이력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흐릿한 흑백톤으로 마치 회상이나 기억에 잠긴 듯한 신체의 한 부위가 더없이 매혹적이다. 이 낯설고 미지의 것으로 다가오는 슬퍼보이면서도 완강한 피부를 눈과 가슴으로 품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 박영택  
이우창_품다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2
  Woo Chang Lee – Embracing the Skin --------------

가족이야기


임만혁展 / YIMMANHYEOK / 任萬爀 / painting 2012_0503 ▶ 2012_0523 / 일,월,공휴일 휴관


임만혁_가족이야기11-4_한지에 목탄채색_90×11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임만혁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3_목요일_05:00pm 기획 / 아트포럼뉴게이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5:00pm / 일,월,공휴일 휴관   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종로구 명륜4가 66-3번지 Tel. +82.2.517.9013 www.forumnewgate.co.kr

  차가운 현실 원칙에 응전하는 가족적 공간 ● 오랫동안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왔던 임만혁의 요즘 작품은 좀 더 다채롭고 울긋불긋 밝아진 색상으로 이상적인 가족의 이미지에 어울릴 법한 아기자기함과 아늑함을 부여한다. 몇 년 전 부터는 친근한 동물까지 포함시킴으로서 가족 공동체의 외연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동물, 또는 동물적 요소는 단순한 장식적 액세서리가 아니라, 놀이와 치유, 유대라는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인간의 눈망울과 똑같은 눈을 가진 동물은 친구이자 가족인 것이다. 그에게 작업과 생활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작업실과 생활공간이 하나가 된 생활 밀착형 작업 스타일은 예술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그의 선택이다. 사적 영역으로 고립된 가정은 무한히 연장된 아동기까지 책임지면서 가정을 부양하는 이나 보호받는 이 모두에게 간단치 않은 공간이 되었다. 그곳은 결코 자연적으로 주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가정은 현대의 경쟁적 사회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러한 중산층적 이상은 점차 극소수에게나 실현가능한 가족 로망스일 뿐이다.  
임만혁_가족이야기11-2_한지에 목탄채색_132×101cm_2011
임만혁_바다이야기11-4_한지에 목탄채색_150×60cm_2011
  임만혁의 작품에서 가족 이야기에 내재된 평화로움과 불안함의 공존은, 가정이 반드시 따뜻하고 행복해야만 하는 곳이기에 더 춥고 불행을 야기할 수 있는 역설적인 곳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정은 인간적 친밀함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지만, 가족 이야기로 작품을 특화시킨 작가에게 가족의 양지쪽만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유난히 추워 보인다. 극단적인 분업화를 통해 서로 달라진 생활 패턴은 물론, 서로 다른 성과 세대, 종들이 공존하며 소통하는 그의 작품은 이러한 근대적 모순이 펼쳐지기 이전의 유토피아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연민을 자아내는 크고 동그란 눈과 인체를 이루는 각진 실루엣은 이상적인 것만큼이나 도달하기 힘든, 또는 지키기 어려운 가족의 드라마가 내재한다. 실루엣 뿐 아니라 형태의 그 내부를 채우는 특유의 준법은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지만, 동시에 벽화 같은 오래된 표면의 견고함이나 강한 리듬을 연상시키면서,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그 명맥을 이어온 가족 공동체를 강조한다. ● 전시된 20여점의 작품은 최초의 가족인 아담과 이브 시리즈로부터 골프장에서 현대적 여가를 즐기는 이들을 비롯해, 대부분 가족을 소재로 한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원시시대의 가면이나 현대의 캐릭터처럼 유형화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개별성보다는 보편성에 주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딱히 어떤 특정한 가족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사람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다른 성과 세대의 인간 간의 심리적, 물질적 관계가 집약되어 있는 장으로서 가족에 주목한 결과이다.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거친 사회로부터의 방파제이자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 가족과 사회 등을 분리하는 경계면으로서의 방파제는 그리 견고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적인 영역의 대변자가 된 가족이나 가정의 경계는 지배적 시스템에 의해 그어진 가변의 영역으로, 결코 공적 영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임만혁의 '가족 이야기'는 동시에 사회의 이야기가 되며, 가족상은 동시에 현대의 풍속화가 된다.  
임만혁_가족이야기09-12_한지에 목탄채색_145.5×112.1cm_2009
임만혁_골프가족12-1_한지에 목탄채색_72×60cm_2012
  그의 작품에서 가족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많은 내용들이 파생될 수 있는 다산(多産)의 주제이다. 그는 원주의 장인이 만든 두터운 장지 위에 목탄으로 형태를 그린다. 30-40번씩 칠해서 바닥이 은은하게 투영되는 채색 방식은 고분벽화와 민화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우연과 실수까지도 작품의 요소로 포함하는 바탕처리는 깊이 감을 준다. 붓 대신에 목탄으로 그려진, 화면에 편재하는 리드미컬한 선적 요소는 동양화의 준법에 해당한다. 사선과 예각으로 처리된 임만혁의 준법은 원근법적 입체감 없이도 평면적인 색채와 형태에 존재감을 부여한다. 그의 작품은 타자화 된 전통을 불러들여 현대성에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가분수 같은 큰 얼굴에 정면성을 유지하며 가면 같은 모습을 한 인간, 그리고 중요한 부분을 크게 그리며, 기하학적이고 단순하면서도 필요한 부분은 다 표현하는 방식은 작가가 수집해왔던 아프리카 조각상들에서 왔다.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그림에 나타난 한국인의 체형을 참조한 작품에서, 강조된 눈과 더불어 커진 귀, 그리고 손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상황을 표현하는 방식은 초상화의 어법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화면 가운데에 놓는 방식은 동양화의 형식이다. ● 이렇게 표현된 가족 또한 영원불변한 한 가지 패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임만혁의 작품에서 가장의 권위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가족은 흔들리고 있다. 남성 화가로서, 그리는 이의 주체적 관점이 투사된 그것은 불행도 다행도 아닌, 변화해 가는 세태의 반영이다. 공적 영역과 분리된 사적영역으로서 배타적인 경계선을 가진 핵가족은 근대의 산물로, 결코 침해되지 않는 이상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가족은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그의 가족 이야기는 가족의 역사 또한 포함한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 중에서 가장 작게 표현되곤 한다. 그가 참조하는 고대 벽화에서 중요한 사람이 가장 크게 그려지므로, 남성의 축소임은 분명하다. 남자 가장의 위치나 비중의 축소는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반증일 뿐, 결코 실추가 아니다. 자전거나 동물 등에 올라 탄 피에로 같이 불안한 균형을 잡고 있는 임만혁의 작품 속 가족들은 가족의 진정한 의미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에 대해 자문하게 한다.  
임만혁_가족이야기09-11_한지에 목탄채색_145.5×112.1cm_2009
임만혁_나의 가족이야기09-1,2,3_한지에 목탄채색_77×47cm×3_2009
  냉혹한 시장에 던져진 경쟁적 개인들에게 가정은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따스한 모성의 공간으로 간주되어왔지만, 남성/여성으로 대변되는 공적/사적 영역의 차이가 차별을 낳는 이분법이 지속되는 한, 모성의 공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임만혁의 가정 풍경에 내재한 따스함 이면에 깔린 멜랑콜리의 측면은 주목 할 만하다. 그것은 냉혹한 사회의 대안이 되어야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위기의 가정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임만혁의 작품에 나타난 가족은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을 예시하는 가상(illusion)의 차원을 복구함으로서, 모성적 공간의 미학적 의미를 되살린다. 화사하고 따스한 색이 바닥까지 겹겹이 스며있는 화면은 현실과는 다른 가상적 차원을 강조한다. 모더니즘에서 현실로부터 분리된 언어는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유폐되기 시작했고, 추상화된 예술 작품은 그 논리적인 귀결인 '물질에의 충실성'을 향하면서 물화의 과정을 완성했다. 이러한 극단적 분리는 인간은 물론 예술 또한 빈약하게 했다는 점에서 소외의 과정이다. ● 이러한 맥락에서 임만혁이 참조하는 원시, 또는 동양의 양식들은 근대를 통하여 사라진 가상의 영역을 다시 복귀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가상의 영역은 장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장식이란 벽화처럼 한 장소에 온전히 속해 있으면서 공동체와 상징을 공유하게 하는, 즉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 있기 이전에 있었던 총체적인 문화 환경과 더욱 가깝다. 심리학자 위니코트는 원래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존재했던 잠재적인 공간이 아이와 가족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재생된다고 말한다. 이 중간의 영역을 현실의 원칙이 가하는 쓰라림으로부터 구원받도록 하는 문화적 체험의 장이 된다. 임만혁이 그리는 가족이 위치하는 곳 또한, 현실 원칙의 쓰라림을 완화하고 인간의 창조력이 풀어헤쳐지는 중간 영역이다. 그의 가족풍경이 주는 따스함은, 단순히 가족상이라는 소재적 차원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를 통해 사라진 미적차원, 또는 잠재적 공간의 복귀에 있다. 이러한 노력은 예술로 하여금 단지 예술이 아니라, 세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게 할 것이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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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OCI YOUNG CREATIVES




황지윤_한승구展 2012_0503 ▶ 2012_0525 / 월요일 휴관



황지윤_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116.8×72.7cm_2012


초대일시 / 2012_0503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 황지윤_한승구

후원/협찬/주최/기획 / OCI 미술관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풍경화의 디아스포라, 그러나"그리고 그곳에는 광막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건조된 범선들을 타고 바다를 횡단하는 수부들에게 수정같이 번쩍여 보이는 지붕을 한, 빛나는 궁전이 하나 솟아있나니, 그리하여 그곳에 그 나라의 온갖 짐승들과 떼 지은 살찐 가축들 그리고 최상의 과일들이 모여드는지라" (James Joyce, Ulysses)1. 지금 회화의 위치 디아스포라(diaspora), 한자로 이산(離散)은 애초 민족이 자신들의 고국에 집단으로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혹은 고향을 상실하고/뿌리 뽑힌 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흩어져 사는 처지를 뜻하는 단어다. 따라서 이 용어를 그림에 가져다 쓰는 일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보면, 원천을 잃어버리고 이곳저곳을 유랑하는 모든 존재가 사실 디아스포라 상태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림에 그 말이 적용되지 못할 법도 없지 않은가? ● 특히 오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즐겨 그리는 그림의 스타일을 보건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현대 회화의 유행하는 특정 경향 내지는 방법론을 설명하기에 꽤 유효적절한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문인화의 외관을 차용해서 지금 여기 사물들을 그린 그림, 중국 명·청시대의 산수화 구도를 빌려다가 그 속에 오늘날의 다종다양한 일상사를 끼워 넣은 그림, 17세기 플랑드르 화파의 풍경화나 정물화 양식에다가 21세기 디지털 대중 문화산업시대의 이미지 및 상품을 조합해 그린 그림들 말이다. 그런 그림들에서는 본래 신화화, 종교화, 문인화, 산수화,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 초상화, 알레고리회화 등등이 태어나고 하나의 회화 형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문맥/고향/원천은 사라진다. 대신 시각적 요소들만 파편화된 채 등장한다. 이제까지 동서양에 존재해온 회화 일반을 민족 같은 것으로 인간화해도 좋다면, 그렇게 양식·도상·모티브·장식적 파편들로 따로 떼어 내져 이 작가의 저 그림에, 저 작가의 이 그림에 차용되거나 이식되는 기존 회화의 형편은 그야말로 현세의 잡다한 이미지세계를 방랑하는 디아스포라에 다름 아니다.
황지윤_landscape_캔버스에 유채_65×193.9cm_2011~12

2. 표면의 여정황지윤의 그림들 또한 일견 위와 같은 의미에서 회화의 디아스포라, 특히 풍경화의 디아스포라처럼 보인다. 그녀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그린 그림들 중 다수가 기존 동서양 회화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고, 아마도 우리가 익히 봐온 덕분에 친숙해진 양식화의 소재, 구도, 형상, 표현 기교 등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 젊은 작가가 의식적으로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이제까지 받은 미술교육과 경험한 시각문화를 통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형성한 상상력에 따라 그린 그림들이 그렇다는 얘기다. 가령 황지윤의 작품에서 우리는 중국 북송시대 산수화나 조선시대 청록산수화부터 이발소그림의 전형인 다산(多産)의 돼지 그림이나 자연물을 의인화한 민화(民話)까지, 두루 기존 회화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또는 고대 로마의 프레스코 벽화 및 15세기 르네상스의 제단화에 구현된 신화적 풍경, 17세기 북유럽 바로크의 드라마틱한 풍경, 19세기 독일 낭만주의의 숭고한 풍경 등등을 꼽아볼 수도 있다. 예컨대 황지윤은 「조춘도(早春圖) 1」에서 중국 북종산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곽희(郭熙, 약 1001~1090)의 동명 그림을 직접적으로 ―주제부터 구도까지― 모방한다. 또 「달빛그림자 2」에서는 전체적으로 전경 ? 중경 ? 후경이 있는 산수화의 전형적 구도를 취하는 가운데, 그림 곳곳에 문인화 또는 키치그림에 흔히 등장하는 모티브를 패치워크처럼 잇댔다. 즉 세로로 긴 화폭의 호방한 산수풍경 속에 다음과 같은 것들을 깨알 같이 그려 넣은 것이다. 중경의 오른쪽에서는 물레방아가 돌고, 왼쪽에서는 주렁주렁 새끼돼지를 품은 어미돼지가 누워있으며, 그 밑에 선사와 시동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다리를 건너고, 물가에서는 낚시질하는 이가, 후경 부분 나무 밑에서는 중년의 남자가 마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 늙은 선비가 그러듯 물을 보며 서 있고. ●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꼼꼼히 덧칠해 그린 황지윤의 그 이종(異種) 산수화에서 회화의 원전(原典)들은 전통의 깊이를 고수하지 못하고 화면 여기저기를 떠돈다. 동시에 애초 그것들이 속했던 관계가 아니라, 생경하고 다소간 뜬금없는 사이로 연접하며 이미지의 퍼레이드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감상자 또한 그림 표면의 곳곳을 유랑하는 양식화된 회화의 파편들을 따라 회화 전통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나 감상법 없이도 즐길 수 있다. 마치 이국의 다양한 풍경들을 인공적으로 한데 모은 테마파크를 누비듯이. 신구(新舊), 성속(聖俗), 동서(東西)를 가로질러 온갖 문화의 형상들이 미니어처로 재현된 민속박물관의 유리 진열장 안을 들여다볼 때처럼.
황지윤_두 줄기의 강_캔버스에 유채_65×193.9cm_2012

3. 경험의 여행 ● 하지만 황지윤의 작품은 차용(appropriation) 개념을 표방한 포스트모던 회화가 아니며, 그녀의 작업 태도 및 방식은 유희적 혹은 비판적인 목적에서 전통문화예술/민속적 이미지를 브리콜라주(bricolage)하는 동시대 다수 젊은 작가들의 범주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황지윤의 그림들이 곽희의 「조춘도」를 모방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과거의 특정 그림과 1:1 대응관계에 있지 않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녀의 풍경화는 일정 정도 우리가 그것을 처음 봤을 때 어디서 본 듯이 느낄만한 시각적 친밀성을 지니고 있다. 혹은 오래전 동양이나 서양의 미술사에 등장하는 대가들이 일가를 이뤄놓은 양식을 장르나 주제에 상관없이 가볍게 가져다쓴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시각적 인상으로만 그렇다. 반면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황지윤의 그림들에는 참고문헌처럼 달릴만한 개별 원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화집의 도판들에서 고스란히 따온 도상들 또한 없다. 대신 그녀는 화면의 구성, 정조(tone), 표현 기법 등 구조적인 차원을 모방하거나 재구성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것이 바로 황지윤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여러 젊은 화가들이 엇비슷하게 취하는 방식이라고, 그러므로 각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식의 모방이나 재구성 자체가 탈 맥락화, 파편화, 이종의 혼성을 유행처럼 따르는 경향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범주화해버렸을 때도 남아있는 개별성이 황지윤의 그림에는 있다. 이미지의 경험과 경험의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엮이는 점, 테크닉의 학습과 상상력의 실행이 병행되는 점이 그것이다.
황지윤_Reflection_캔버스에 유채_73×260cm_2012

굳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자면, 황지윤은 국내외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낯선 풍경과 세태를 몸소 겪는 여행자이자, 동시에 도서관에 앉아 골똘히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화집을 들여다보고 스튜디오에서는 그런 그림그리기(painting)를 연마하는 견습생이다. 이 두 상반되는 모습, 또는 병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태도 내지는 작업의 방식이 황지윤의 그림을 개별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실제로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국내의 지방 소도시든 유럽의 관광지든, 혼자 하는 배낭여행이든 패키지여행이든 가리지 않고 수시로 여행을 떠나며, 그 여행의 와중에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그림을 그린다. 그 경험은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으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것들이 별반 아니다. 그보다 때로는 혼자 밥 먹으러 들어간 식당 벽에 걸린 키치 그림을 따라 스케치하거나, 어떤 여행지에서 폭우와 화재가 동시에 일어나는 광경을 먼발치에서 구경하며 나중에 꼭 그것을 그려보겠다고 생각하는 식의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경험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혹은 그것을 경험했던 때로부터 시간이 상당히 흐르는 동안 황지윤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풍속화를, 갑자기 마주쳤던 기이한 사건을 중국의 산수화나 낭만주의 풍경화 구도에 접목하고 그 안에 녹여내는 작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기존 회화 양식과 모티브를 참고하고, 테크닉을 변주하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소개한 「달빛그림자 2」 속의 물레방아와 돼지 그림은 그런 경험에서 재구성된 것이며, 「롯의 증언 Ⅰ」에 그려진 검은 구름 밑 폭우와 섬 안의 불길이 그렇게 재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롯의 증언 Ⅱ」는 그 폭우의 정경을 뚫고 들어갔을 때, 그 안에 벌어지고 있을 자연의 사태를 작가가 자신의 상상과 신화의 힘을 빌려 알레고리화한 것이고 말이다. (참고로 그 정경은 1513년 경 피에로 디 코지모(Piero di Cosimo)가 그린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를 환기시킨다.) ● 위와 같은 두 방향의 의미, 즉 한편으로는 기존의 회화적 양태나 속성이 부분적으로 발췌돼 황지윤의 그림 표면을 떠돈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화가 자신이 세계의 이곳저곳을 떠돌며 경험한 부박하지만 독특한 사태들이 그림에 이미지화된다는 의미에서 황지윤의 회화는 '디아스포라 상태'의 것이다. 그것은 일견 정처 없고 원본 없는 이미지들의 유희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젝(Slavoj ?i?ek)이 언어 분석을 통해 명쾌하게 정의했듯이, 우리 각자의 주관적 경험이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없고 다른 무엇으로도 유보할 수 없는 개인성(the in-dividual)을 마련해주는 것이라면, 황지윤의 작품에서는 그녀의 떠돌이 경험, 그 경험적 지각이 바로 고유한 성향이 되고 특별한 정조가 된다.
황지윤_The isle_캔버스에 유채_193.9×112.1cm_2008~12

4. 유사성의 여러 세계 ● 우리가 현재 우리 자신 안에 형성해놓은 그림 혹은 시각이미지의 세계는 어디서 왔는가? 많은 경우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본 것들, 즉 시각 경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감상한 작품들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사물들, 풍경, 겪은 사건이나 본 것들이 우리의 상상력 및 기억력과 결합해 일종의 이미지 저장고이자 생산처로서 우리 안에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해둔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 Ulysses』의 한 장면은 읽는 이에게 스펙터클한 풍광과 찬란한 인공물과 풍요로운 자연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작가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아일랜드 더블린의 어느 시장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정경이 누대에 걸쳐 축조된 문학적 표현법과 만나고, 조이스라는 저자의 개별적 삶의 경험 및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문학 실험과 결합하면서 광대한 바다, 위용 넘치는 범선, 수정 궁전, 육감적인 짐승 떼, 윤택한 과일더미 이미지를 출현시킨다. 우리에게는 그 이미지가 애초 초라한 도시의 시장이라는 사실이 크게 실망스럽지는 않은데, 왜냐하면 그 초라한 실제 세계와 황홀한 문학이미지의 세계는 오히려 우리 안에서 유사성의 즐거운 관계 맺기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 황지윤의 그림들을 통해서도 그 즐거운 유사성의 관계가 촉발된다. 앞서 분석했듯이 그녀의 작품들에는 분명 기존에 그려졌던 회화의 양식과 모티브가 모방돼 있기 때문이며, 그와 동시에 황지윤만의 경험과 상상력이 그 모방 대상들을 독특한 정조를 풍기는 풍경화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림을 친숙해하면서, 그러나 바로 그 자체만의 특별한 이미지로 바라볼 수 있다. 또는 이러저러하게 알고 있는 것과 눈앞에 펼쳐진 화폭 속 특이한 미적 대상을 요소요소 따져가며 즐거워할 수도 있다. 그것이 바로 황지윤의 그림이 지닌 미덕이고, 황지윤이 참조한 회화의 여러 양식과 모티브가 그 신참 작가에게, 그리고 감상자에게 행사하는 이미지의 힘이다.
황지윤_풍경의 움직임_캔버스에 유채_193.9×112.1cm_2012

이제 황지윤의 작품 중에 그 이미지의 힘을 간단하지만 명쾌하게 보여주는 「청솔모」라는 제목의 드로잉을 논하면서 글을 마치기로 하자. 그 그림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오른쪽 끝에 그려진 소나무와 매우 닮아 보이는 나무 한그루를 화면 가득 배치해 푸른 잉크 선만으로 그린 것이다. 물론 이 같은 연관관계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연상 작용에 의한 것으로, 애초 작가에게는 그런 의도가 없었을 수도 있고, 다른 감상자는 그런 연관성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도 「청솔모」는 보는 이에게 푸른 소나무의 기상이 느껴지는 소박하지만 담대한 그림으로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며 한 걸음 바짝 다가서서 작품을 보면, 이내 감상자는 그림 속의 나무가 소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나무 솔잎인 양 가지에 뭉쳐있는 것들은 다소 놀랍게도 작은 짐승 떼, 작품 제목을 참조하자면 '청솔모'라 불리는 다람쥐과(Family Sciuridae)의 동물들이다. 보통 다람쥐보다는 몸집이 크고 현재 남한에서 그 개체수가 현저히 늘어났다고 하는 이 동물은 큰 나무줄기나 나뭇가지 사이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지윤의 「청솔모」는 바로 그러한 사실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가지를 뻗은 소나무, 그것처럼 보이는 청솔모 떼를 표현해 놓았다. 차가운 흰 여백의 공기 속에서 고고하게 서있는 소나무 몸체는 한순간 날짐승의 소란스러운 몸짓들로 바뀐다. 청빈한 나뭇가지들은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무리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검은 몸과 두툼한 꼬리의 동물 떼거리가 된다. 다소간 무섭고, 다소간 징그럽게도. 어디서 그러한가? 우리의 지각 과정에서. 여기서 핵심은 그 지각의 과정이 황지윤의 드로잉이 없었다면 촉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점에서 디아스포라처럼 화면을 부유하는 회화 이미지의 힘이 센 것이다. ■ 강수미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64×64cm_2012

장치(裝置) 화된 노드(Node, 컴퓨터망에서의 중앙 처리 시스템 상호 간, 중앙 처리 시스템과 단말 장치 간 등의 통신로의 분기점에 설치되는 통신 제어 기능을 갖는 처리 장치)를 흐르는 얼굴들한승구는 전통적인 조각과 설치 작업을 통해서 자아와 실존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가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를 활용한 인터랙션 설치작업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작가이다. 최근의 작업들은 단순히 전시장 설치 오브제 뿐 아니라, 공공공간의 설치작업 미디어 파사드 프로젝트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작업의 형식적 확산은 작업개념의 변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업을 묶고 있는 관념들은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 이미지들은 함축해 놓은 개념 덩어리들로서 이 개념들은 경우에 따라서 지극히 구조적이고 사적이다. 그의 작업이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기반으로 출발했지만, 그는 끝없는 질문을 통해 자신을 덮고 있는 '얼굴'들을 벗겨내고 미성숙의 낯짝에 까지 이르고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때로 쉽게 읽히지 않는 난해함을 동반하지만 작업과 만나는 방식은 매우 친절하고 소통적이다. 마치 씨줄과 날실이 얽혀 복잡한 구조를 내부에 품고 있는 장치 화된 지식정보 사회의 얼굴처럼 때로는 밋밋하고 단순해보이기 까지 한다. 좁은 통로로 진입하여 거대한 광장을 만난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64×100cm_2012

육체 상부의 앞면을 지칭하는 '얼굴'은 한 개인을 표상한다. '얼굴'은 상호 소통적, 상호 주체적, 표현적, 언어적 기능이 활동하는 장(場)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은 인간적이며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달리 말하면, '얼굴'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동시에 타자를 바라보는 장소이기도 한다. 따라서 모든 정령들의 정면 상은 그들 감정의 형태와 초상이 된다(스웨덴보리).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그래서 "하나의 얼굴을 촬영할 때, 그 뒤에 있는 영혼을 촬영한다고 말했다. 이 영혼의 얼굴들은 어느 한 순간도 하나의 얼굴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스타들이 출연한 영화의 장면들조차도 멀티미디어의 복제와 반복 재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순간들일 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얼굴의 역사는 '얼굴 표현성의 역사이자 얼굴 표면을 이용한 자유로운 감정 기록의 역사다. (자크 오몽, 영화 속의 얼굴). ● 한승구의 작가노트에서 보듯이 사회 속에서 얼굴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유기적 구조 내에서 사람마다 다른 얼굴은 개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노출은 각각의 개인에게 하나의 불안 요소를 자극 시킨다. 폭력적인 사회란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각각의 개인은 사라지고 모든 객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구조체계를 위해 움직이면서 감시 통제되어 지는 사회다. 여기서 '얼굴'은 사회 구조에서 이탈해 나갈 것 같은 각 개인을 정착하여 못 움직이게 만드는 하나의 감옥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체적인 얼굴들은 얼굴성이라는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태어난다.'고 보았으며, '권력의 어떤 배치물들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주체성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얼굴'은 사회 권력의 구조적 장치로서의 얼굴인 '네트워크' 혹은 '노드'의 얼굴성과 만난다.
한승구_mirror mask_혼합재료_240×180×174cm_2012

폴란드의 소설가 비톨트 곰브로비치 (Witold Gombrowicz)의 소설 페르리두르케(Ferdydrurke) 에는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와 필리베르가 등장한다. 그의 난해한 포스트모던적 소설의 5장과 12장에 각각 별도의 서문과 함께 삽입된 인물들은 극단적인 이원론을 해체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들이다. 이 소설에는 전체성과 총합주의자 필리도르 박사와 안티-필리도르박사가 몇 번의 결투를 벌이다가 결국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는 다소 우스꽝스럽고 황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필리도르는 계속해서 전체성을 이야기하고 안티-필리도르는 이를 분석하여 해체하는데, 이 둘의 전체와 부분은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대립은 소설 안에서 청년과 건달의 대립, 선생님과 학생의 대립, 현대성과 늙음의 대립, 귀족과 천민 혹은 주인과 하인의 대립으로 대체 될 수 있다. 여기서 성숙은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형식으로서 수많은 가면들이다. 무의식의 열등하고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가면 페르소나는 집단사회의 행동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 미성숙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낯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성숙의 낯짝은 그러므로 실존의 가면이다. 낯짝은 우선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낸 자기이다. 작가의 말은 빌리자면, 정신의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저 타인에 대한 함수일 뿐이다.
한승구_untitled_혼합재료_80×80×80cm_2012

최근 랜티큘러(Lenticular)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서 제작하고 있는 한승구의 「Mirror Mask, 2011」시리즈들에서는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중첩된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얼굴'의 표면을 한 커플 씩 벗겨내면 종국에는 도달하게 되는 차가운 가면 피부는 그가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 한 것처럼, 주체는 타자의 담론이 머무는 그릇으로 전락했다. 디지털 기술로 생성된 가상공간에서 개인은 가상의 신원확인 절차를 거치기만하면 생성되는 정체성들로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을 망각하고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생겨나 넘쳐나는 ID들 속에서 스스로 길을 잃는다. 이처럼, 가상공간에서 주체들은 ID라는 가면을 통해 스스로를 은폐한다. 한승구의 「Mirror Mask」는 자기를 위장하기 위한 가면이며 끝없이 성숙을 갈망하는 미성숙의 낯짝이다. 이 싸움은 필리도르프 박사와 안티-필리도르프 박사의 싸움에서처럼 "뭐든 다 뒤집어 보면 어린애"상태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각 30×30cm×6_2012

그는 실재하는 자아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환영에서 존재성을 발견하는 나르시소스의 행위를 모티브로 「나르시소스의 두 얼굴, 2011」을 발전시켰다. 「Mirror Mask」가 위장적이라면 나르시소스는 편집증 적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와 같은 실존적 질문의 답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미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 2009」작업에 나타난다. 어쩌면 이 작업을 통해 훨씬 더 또렷한 얼굴의 무위적인 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승구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탐구는 얼굴로 대표되는 정체성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4원소, 모래, 2008」는 물이나 모래(흙), 바람, 소리 등을 인터렉티브한 설치작품 안에서 동조 시켰는데, 4원소는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물질로 관람객들이 흘러내리는 물줄기나 모래를 만질 때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온다거나 얼굴이 달라지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 또한, 실존적인 문제를 사회적 관계로 확대하게 된 대표적인 작업으로 「Network identity, 2006」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작업은 한승구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선보였다. 이 작업은 '나'를 물으며 동시에 '내가 속한 사회와의 관계성'을 질문하면서 진정한 자아 찾기의 방법으로 정보와 인식의 코드가 되어 버린 얼굴을 제거하도록 거세되어진 얼굴에는 익명의 새로운 얼굴들이 부여되는데, 관람객의 참여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24개의 얼굴들이 서로 뒤섞일 때 발화점이 되는 것은 이를 네트워크 하는 시스템으로서 '노드(NOD)'다. 이 얼굴들은 타자의 얼굴로 교차, 혼재된 상태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 낸다. 프랑스의 영화 이미지학의 대가인 쟈크 오몽은 거울이 보여주는 얼굴은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며, 타자들이 본 나의 얼굴과도 다르다, 그럼에도 시각적으로 거짓인 이 응시는 주관적으로는 진짜다고 말했다. 이 자기애적인 편집증은 최근 인터넷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공간 내에서 더욱 극대화 된다. 모니터 화면 너머에 존재하는 나와 연결된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끝없이 나르시소스의 얼굴을 생산하고 내가 관계 맺고 있는 '타자'들의 나르시소스들과 만난다.
한승구_mirror mask_렌티큘러_100×71cm_2012

한승구는 초기 작업들은 3D, 2D 그래픽 툴을 활용한 인간존재에 관한 고찰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엇이 진실인가?(What is the truth?"라는 질문의 삼 색 텍스트가 좌우로 물결처럼 움직이는 웹아트 작품은 기술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이후, 그의 실존적인 질문으로 진입하는 출구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학적 질문에 기초해 출발된 한승구의 작업은 「Space& cyber space, 2003」 싱글채널 비디오에서 수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특유의 차가운 마스크가 등장하게 된다. 이와 같은 디지털 이미지 혹은 3D 영상 실험이 입체화된 조각 작품으로 실험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서대문 형무소 전시를 시점으로다. 이 작품은 조각위에 덧붙여진 조각으로서 영상이미지 혹은 사물의 디지털 이미지로서의 영혼을 부여받은 환영에 가까운 것이다. 미국의 영상설치작가 토니 아워슬러(Tony Oursler)가 쓰레기로 만들어진 인형들에게 미디어를 통해 영혼을 불어 넣듯이 한승구의 가면들은 시간과 조건에 따라 우연히 생동감을 부여받는 마법적 관계 안에 들어오게 된다. ●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기술의 극복은 인간이 기술의 본질을 통찰하고 이 본질이 지니는 위험을 직시하며 이 위험 속에서 자라 나오는 존재의 새로운 도래에 겸허히 귀 기울일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미지들의 스펙터클은 때로는 권력의 얼굴로 때로는 구조화된 장치로 작동한다. 따라서 한승구가 작가노트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의 작업의 주요 목적은 얼굴이란 것을 제거하는 것에 있다. 또한 단지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진 빈 공간에 새로운 얼굴을 부여하여 타인화 한다. 최근 미디어를 국내에서 활용하여 작업하는 작가들이 미디어의 스펙터클과 기술적 환상에만 몰입하여 미디어 미학은 장식적이고 찰나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한승구의 작업들은 자기 비판적이고 성찰적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간직한 미성숙의 상태가 지속해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백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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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기계




노순택展 / NOHSUNTAG / 盧純澤 / photography 2012_0504 ▶ 2012_0610 / 월요일 휴관



노순택_망각기계 #V-025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8×108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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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504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화~토요일_09:30am~07:00pm / 일요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학고재 Hakgojae 서울 종로구 소격동 70번지 Tel. +82.720.1524~6 hakgojae.com



망각기계로 죽다, 망각기계로 살다"과거는 죽지 않는다. 과거가 되는 일조차 없다. The past is never dead - it is not even past" (윌리엄 포크너 William Faulkner) 1. '애국의 길'을 걸어 '망각된 기계'가 되다. 이 사진은 슬프다. 선글라스 너머로 렌즈를 응시하는 저 노인은 가히 살아 있는 슬픔이라 할 만하다. 빳빳하게 다린 그의 군복과 자랑스럽게 달려 있는 그의 계급장, 꾹 다문 그의 입술과 주름진 그의 턱이 이 사진의 슬픔을 웅변한다. 그는 왜 이런 절망적인 센스의 옷을 입고 있을까. 이 옷이 멋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왜 거리에 나와 있을까. 자신이 이곳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은 지금과 같은 과잉 근대화된(over-modernized) 국민 국가를 만드는 데 그의 인생을 얼마간 잘라서 썼을 것이고, 그는 고통스럽게, 혹은 기쁘게 자신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대해 당연한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 하지만 바로 그 믿음이 그를 외롭게 만들 것이다. 그의 고통과 기쁨, 긍지와 분노는 전혀 공유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더라도, 그의 언어는 정밀한 담론의 형식으로 정리되거나 유의미한 사회적인 파장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점점 강퍅해질 것이고, 그들은 결국 한 장의 사진이 될 것이다. 그들은 아름다운 물성의 인화지에 프린트되고, 보존 처리된 뮤지엄 매트 보드와 원목 액자로 마감되어 세계를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이상한 박물지의 일부가 되어 벽에 걸리게 될 것이다. 변방의 '예술' 사진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노순택의 사진은 백 년 전 프란츠 카프카가 쓴 문장을 닮았다. 카프카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묘사한다. 카프카처럼 초현실적이고 어딘가 뒤틀려 있다. 숨결이 닿을 만한 가까운 곳에 어떤 섬뜩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누구도 등장인물이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의 이유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질서를 꿰뚫어 볼 능력도 없고, 탈출하는 방법도 모른다. 구원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피사체였던 노인이 점점 기력을 잃고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이 사진은 죽지 않은 채로 돌아다닐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사진은 이미 지시하는 대상에서 독립된, 자신만의 운명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육체와는 별개로, 사진 속 노인의 육체는 사진 속에 계속 남아있게 될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비바람에 방치된 낡고 육중한 기계처럼, 조금씩 탈색되고 풍화되며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우리를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기계가 겪었던 고통과 상처에 대해 무감각하듯, 우리는 도대체 그의 삶이 지닌 서사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노인은 어떤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사진에 갇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노순택_망각기계I-김동진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40×100cm_2005~11

2. '망각기계'가 되어 '비상국가'에 살다 ● 다시 사진 속 노인의 옷과 깃발을 바라보자. 그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매우 단순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사실 노인은 잊히고 싶어하지 않아 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지층 속에 조용히 파묻히고 싶은 사람이 저렇게 처절한 타이포그래피로 온몸을 두르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노인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 자신이 거할 자리를 만드는 일인 듯하다. 그는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지금의 대한민국과 우리의 삶이 가능했음을 각인시키고, 우리가 이를 기억하고 애도하기를 바라는 것 같다. ● 과거란 참으로 먹먹하고 거대한 시공간이어서,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인이 바라는 방식대로 지금 한국의 현대사를 규정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즉, 한국은 전후의 폐허에서 '공산주의의 위협'과 맞서 싸웠고, 찬란한 경제성장과 굳건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는 카리스마적이지만 소탈한 정치 지도자와, 뼈를 깎는 고통으로 험난한 세월을 버텨낸 노인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길은 험했고 덜컹거렸으나, 이는 '선진국'에 도착하기 위해 예비된 사소한 고난 같은 것이었다. ●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과거를 영광스럽게만 재구성한다면,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역사의 순간들이 있다. 또한 구석에 서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볼 기억들이 있다. 예를 들면 80년 5월, 광주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그러하다. 한국의 현대사를 '선진국을 향하는 위대한 도정'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을 도대체 속 시원히 설명할 수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진국이 되기 위해 동족을 죽일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었는가, 아니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공산주의자들에게 촉발된 우발적인 폭동이었는가. 혹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한 부당하고 일방적인 학살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불미스러운 사고'였는가. 만약 광주를 학살이나 항쟁으로 규정하는 기억들이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면, 어떤 이들이 믿고 사랑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모욕당하게 될 것이다. ● 이런 지점에서 기억의 투쟁이 생겨난다. 깃발을 들고 군복을 입은 저 노인 역시 전투에 참전하는 군인이며 전사다. 그에 맞서는 이들도 흰옷을 입고 얼굴에 회칠을 한 채 거리에 나온다. 거리는 기억의 전쟁터다. 동시대는 수많은 과거들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전장이다. 노인과 젊은이들, 남자와 여자들, 정치인과 활동가들, 좌파와 우파들, 전경과 민간인들이 그 싸움터에 소환된다. 싸움에서 승리한 기억은 우리 사회의 공식적 기억(official memory)이 되어 재생산될 것이고, 패배한 기억은 몇몇 개인의 기억으로 전락하여 비루하고 초라하게 늙어갈 것이다. ● 노순택은 이 지루하고 무망한 기억의 싸움을 끈질기게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그는 거리에 나와 악을 쓰는 이들의 사진을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이 찍은 사진가일 것이다. 노순택은 거리에 나온 노인과 젊은이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좌파와 우파에게, 전경과 민간인에게 바싹 붙어서 카메라를 들이댄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노순택이 사진으로 포착한 세상은 괴이하고 뒤틀린 곳이며, 그의 프레임에 걸린 사람들은 어딘가 이상하고 고통스러워 보인다. 그들은 그들을 거리에 나오게 한 이들은 과연 누구이고,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있어 노순택의 세계관은 카프카와 닮았다. 하지만 노순택은 카프카와는 달리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의 이면에 있는 것이 '존재의 부조리'나 '인간 운명의 불안' 같은 모호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가 생각하는 고통의 원인은 좀 더 단순하고 명확하다. 우리가 아픈 것은 우리가 '비상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뒤틀려 있는 것은, '애국의 길'을 걷는 '망각기계'와,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는 '망각기계'가 동시대에 함께 살면서 서로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노순택_망각기계I-김완봉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40×100cm_2005~11
노순택_망각기계I-나종기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40×100cm_2005~11

3. 사진 뒤에 숨지 않고 죽음을 바라보기 ● 하지만 노순택의 사진에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는 노순택이 사진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작업 방식과 비교해 본다면 사진에 대한 노순택의 '불신'을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진의 힘'을 믿는다. 때로는 그것을 '기록의 힘'이나, 심지어 '진실의 힘'이라 부를 때도 있다. 그들은 세계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자신의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고, 타인의 삶에 존재하는 참혹함을 사진으로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들고 타인의 삶에 뛰어든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세상의 진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매체다. 진실이 알려진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굳센 믿음 위에 그들은 서 있다. ● 놀리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시에라리온에서, 소말리아에서, 콩고에서, 보스니아에서, 그리고 아부 그라이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네이팜탄을 맞고 울부짖으며 달리는 소녀를 찍은 닉 우트의 사진이 아니었더라면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운동은 그렇게 거세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단과 비아프라의 어린이들이 겪는 참혹한 현실을 찍은 사진들은 실제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갑을 열게 했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어떤 위대한 예술도 그런 일을 해낸 적은 없었다. ● 목숨을 걸고 현장으로 들어가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선의를 의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롯한 삶을 사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진가들이 즐겨 의지하는 휴머니즘을 값싼 동정심으로 매도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가 케빈 카터는 엎드려 있는 수단 소녀를 바라보고 있는 독수리의 사진을 찍은 후 나무 밑에 앉아서 어린 계집아이처럼 울었고, 서른세 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진가들은 고통받는 '피사체'를 안전한 곳에 있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각적 충격은 필요하다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피사체'가 구원받을 수 있는 희박한 가능성이 바로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완성도에 달려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 그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 옳다. 실제로 더 잘 찍힌 사진은 보는 이의 눈을 더욱 사로잡곤 하니까. 하지만 이미지의 참혹함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점점 무뎌지게 마련이고, 동정을 얻기 위해 사진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보여주려 노력하게 된다. 고통의 이미지가 거래되는 전 지구적인 시장이 이미 구축되어 있고, 우리는 쇼핑을 하듯이 수많은 사진 중 '마음에 와 닿는' 것을 골라서 지갑을 열거나 ARS 전화번호를 누른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시에라리온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찍은 최근의 사진을 본다면, 베트남전이나 한국전쟁의 사진은 그리 참혹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사진들은 더욱 앙상한 갈비뼈와 잘린 손목을 우리의 눈앞에 들이대며 경쟁적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참혹한 일이다. ●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진정성'은 윤리의 영역까지 진격하지는 못했다. 사진 이미지 속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하고 슬퍼서, 안전한 곳의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일이라는 것을 도무지 상상하지 못한다. 사진 속 현실의 동시대성으로부터 우리를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눈물과 분노다. 우리는 참혹한 현실에 화를 내고, 그들의 삶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위무하고, 현실에서 등을 돌려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 광주가 재현되는 방식 역시 대개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사진과 영화, 소설에서 잔혹한 계엄군과 인간미 넘치는 시민군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광주의 기억은 일정 부분 과잉 재현되었고, 또 일정 부분은 결핍되었다. 우리는 죽어가는 순박한 시민군과 착한 유가족을 위해 눈물을 흘렸고, 먹먹한 마음을 안고 영화관 밖으로 나와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사실 우리의 분노와 눈물은 광주가 지닌 역사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광주의 학살과 그 해부학적 참상에 깊숙하게 들어가는 대신, '적당히 참아낼 수 있는 정도'의 기억을 선택한다. 즉 이것들은 광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만든다든가, 광주에서 죽은 '영령'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가능했다는 식으로 '봉합'하는 것들이다. 사실 이런 식의 말은 '한국의 현대사는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위대한 여정이었다'는 화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를 지닌다. ● 우리의 기억은 취약하고 텅 비어 있다. 우리는 얼마든지 기억을 바꾸거나, 다른 기억으로 대체할 수 있다. 니체는 기억은 곧 망각의 다른 의미라고 썼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인정하겠다는 말이고, 이는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을 배제하겠다는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광주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뭔가 더 '건설적'이고 '희망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다. ● 의 기억은 주로 사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우리는 사진을 '기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사진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은 우리의 '현실'을 구성한다.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완전히 정보화된' 세계에 있다. 우리는 굳이 거칠고 위험한 현실 그 자체를 직접 만날 필요가 없다. 우리를 둘러싼 사진 이미지가 단순한 기억의 도구가 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새로운 기억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주의 사진 몇 개를 선택한다면, 이제 그 사진이 새로운 광주의 기억을 생산하여 우리에게 공급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이것이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 좀처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 사실 사진이 재현하는 것은 사물의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만들어지는 불완전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진이 지닌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사진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독특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힘은 불완전하지만 터무니없이 강하다. 우리는 도무지 사진을 의심할 줄 모른다.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광주를 역사적 비극으로 기억하겠다고 결론짓는 순간, 우리는 그 결론에 적합한 사진들을 찾을 것이다. 사진 역시 우리에게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공범인 것이다. ● 노순택이 사진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 홍보 사진이건 좌파 다큐멘터리 사진이건, 우리를 타인의 죽음 앞에서 쉽게 도망칠 수 있게 하는 어떤 사진에도 윤리적 긴장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순택은 우리가 분노와 눈물로 향할 여지를 열어두지 않는다. 노순택이 찍은 사진들이 답답하고 괴이한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도대체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노순택_망각기계V-001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40×100cm_2005~11

4. 현실 세계에서 무한회귀하는 지옥도 ● 하지만 '공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시대착오적이다. 지금은 2012년이고, 80년 5월의 광주에 대한 기억의 싸움은 1996년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 '공식적으로' 종전된 바 있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정치인들은 매년 망월동에서 고개를 숙인다. 죽은 이는 망각되었고 생존자들에게는 전리품이 배분되었다.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는 비로소 애도(trauer)가 허락되었다. 당시 '일부' 유족들이 격렬하게 항의했었고, 가장 참혹한 일을 겪은 이들의 기억은 은폐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미 십오 년 이상 지난 일이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의 죽음은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을 위한", "이 땅의 역사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것이 5월 광주에 대한 '공식적' 기억이다. 어지간한 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대해 반박할 이들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 그렇다면 이제 와서 노순택이 굳이 『망각기계』를 들고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는 이제 와서 광주 망월동의 구묘역에 카메라를 들이대는가. 2012년 지금, 망월동 구묘역을 다시 사진 찍는다고 해서 광주에 대한 공식적 기억은 조금 더 나은 것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자기 양심을 위한 단순한 마스터베이션은 아닌가. 분명히 어느 정도는 그럴 것도 같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망각기계』 연작이 노순택 개인의 경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한국 사진사(史)에서 매우 무거운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이 작업이 사진의 구조를 탐색하는 질문을 쉴새없이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망각기계』 작업에는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성격의 사진들이 섞여 있다. 우선 노순택이 망월동 구 묘역에 방치된 영정 사진들을 다시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다. 그는 사진의 훼손된 모습과 희생자들의 육체가 겪은 '해부학적' 참상을 교묘하게 중첩해서 보여준다. 사진 표면의 감광유제는 물에 불었다 햇빛에 마르기를 반복해서 조각조각 갈라지고 너덜너덜하게 변했다. 구멍이 뚫리거나 녹아내린 부분도 있다. ● 사진을 다루는 관습적인 방법으로 이 사진들을 분류하기는 어렵다. 이 사진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순수 사진'의 계보에 속하지도 않고, 다큐멘터리 사진의 분류에 거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이 사진의 유족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아물지 않은 슬픔을 찍으려 했을 것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묘역의 관리 상태를 고발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희생당한 이들을 국가와 사회가 과연 어떻게 대접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이런 사진들이 던지는 질문은 매우 정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오히려 탈정치적이다. 질문들의 답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듯이, 답이 정해져 있는 어떤 질문도 예술이 아니다. ● 노순택의 사진들은 태연스럽게 우리에게 속임수를 걸어온다. 마치 자신들이 반쯤 썩은 몸을 지닌 망자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단지 방치된 사진을 찍은 사진일 뿐이다. 그 사진들에 끌려가서 망자들의 육체가 당했을 참혹한 일들을 상상한다면, 우리는 그 사진들에게 조금쯤 속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망각기계』 연작을 구성하는 모든 사진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역사적 사진인 것처럼 행동한다. ● 하지만 그 사진들이 지닌 강렬한 죽음의 분위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것이 작업의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요소이기도 하다. 노순택의 사진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망월동 구묘역의 영정사진들이다. 또한 그 영정사진들이 가리키는 것은 고통을 받고 죽임을 당하기 전의 인간들이다. 사진이 만들어질 당시의 그들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운명을 몰랐을 것이다. 이 사진에 있는 날카롭고 불길한 느낌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것들이 이 사진들에 묘한 역사적 긴장을 부여한다. ● 또한 사진이라는 평면적인 대상을 복사하듯 다시 촬영한다고 해서, 노순택 특유의 예리한 미감(美感)이 무뎌지지는 않는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매체 기자로 일했던, 게다가 지금도 수잔 손탁과 존 버거를 읽으면서 시선의 정치와 사진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는 이가 한국의 사진 역사상 가장 독특한 미적 감각과 윤리적 집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은 괴이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 사진들을 더욱 기괴한 긴장감을 지니게 만든다. ● 영정 사진들과 함께 배치되어 있는 스냅 사진들 역시 괴상하다. 노순택은 여기서 『비상국가』『좋은, 살인』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스냅처럼 압도적으로 빠른 셔터 포착이나 정교한 프레이밍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단지 『망각기계』의 사진들은, 훨씬 음산하고 괴이하다. 도대체 그들이 어느 편인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혹은 방관자인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 사진들은 마치 현세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건조한 지옥도처럼 보인다. 지옥의 특징은 끝나지 않고 영겁 회귀한다는 것인데, 이 사진들 역시 그러하다. ● 또 이 사진들은 분열적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말이다. 작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노순택이라는 한 인간 안에는 몇 명의 서로 다른 존재가 있다. 우선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 지금도 끊임없이 분노하는 활동가 노순택이 있다. 그는 우리 삶의 이면에 여전히 5월 광주가 죽지 않고 도사리고 있다고 믿으며, 학살자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다. 날렵하고 빠르게 카메라를 다루며 사진을 찍는 단련된 현장 사진가 노순택도 있다. 반면 사진을 끊임없이 불신하며, 카메라의 고삐를 틀어쥐고 그것에 끌려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소심한 노순택도 있다. 그러한 긴장감은 사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 노순택은 분열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셋 중 하나만 포기하더라도 그는 지금보다는 훨씬 편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소심한 노순택을 포기하면 뛰어난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될 것이고, 현장 사진가를 포기하면 시각이론에 대한 나름의 소양을 지닌 활동가가 될 것이다. 활동가를 포기하면 괜찮은 예술 사진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순택은 아마도 그럴 정도로 융통성이 있는 이는 아닌 듯하다. 그는 분열된 채로 계속 고민하며 나아간다. 그리고 가볍고 세련된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없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는 윤리와 정치, 역사적 문제 같은 것인데, 어느 것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노순택의 사진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진을 통해 과거를 서술하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식의 통념에 대해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지금도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근대 다큐멘터리 사진의 신화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 성찰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물음을 내포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자신의 카메라로 타인의 삶이나 죽음의 '결정적 순간'을 포획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주어질 구원을 위해 자신의 참혹한 이미지를 거래하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예술의 재현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옳은가? ● 이런 꽉 막힌 질문을 던지면서도 미적 긴장감을 놓지 않는 작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국 사진사에는 아직 없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노순택이 개인적으로 이루어낼 성취는, 곧 한국 사진이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성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서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진 속 망자들은, 아마도 영원히 평안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 일어났던 공간은 기념물이 될 것이고, 살아있는 자들은 망자를 등에 업고 자신의 목청을 높일 것이다. 졸지에 민주화의 영령이 되어버린 망자들은 과연 이런 일들을 즐거워하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녕 지옥의 풍경이 아니겠는가. ■ 김현호
노순택_망각기계 #V-024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8×108cm_2007

* 망각기계로 죽다, 망각기계로 살다 : 이 글은 2010년 11월 『아트인컬처』에 기고한 『사진으로 망각과 싸우기: 노순택의 사진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을 전면적으로 고쳐서 다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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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on and Reaction 작용과 반작용




2012_0504 ▶ 2012_0627





초대일시 / 2012_0504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동현_김민형_김보남_권혜원 이병찬_유승구_자우녕_정석희

관람시간 / 10:30am~07:00pm / 2층(Café di KiMi)_10:30am~11:00pm

키미아트 KIMIART 서울 종로구 평창동 479-2번지 1,2층 Tel. +82.2.394.6411 www.kimiart.net



Action and Reaction (작용과 반작용)-현대예술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 'Action and Reaction', 작용과 반작용은 뉴튼의 제3법칙으로 알려진 물리용어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대 예술이 가진 관계성을 물리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비교해 가며, 본 전시에 참가한 8명의 작가들과 함께 현대 예술에 있어 작용과 반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또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동현_우주미세먼지탐사선마가렛5호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김민형_여자의 일생_구두, 깃털, 새장_가변설치_2011

물리적으로는 작용하는 힘을 F1, 상대작용하는 힘을 F2로 표기하는데, 이는 힘은 같으나 진행방향이 서로 반대인 힘을 말한다. 이 용어의 쓰임은 원리적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는데, 예를들면,"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런데 여기서 원리적 의미란, 반드시 모든 경우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김보남_Modified forms_우드, 페인트_180×130×75cm_2010
권혜원_조선관광단(가이드)_단채널 HD 영상, LED_00:14:22_2012

물리적으로는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 항상 같은 힘으로 일어나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욱 빈번하며, 이것은 작용과 반작용이 반드시 '고립된 물리계'에서 정의 되는 반면, 예술의 경우 고립된 물리계가 아닌 '열린 인간계'에서 존재하는 특성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말 장난일 것 같은 이 원리는, 현대예술에 있어 관계성이란 무엇인가를 좀 더 기억에 남겨두고자 선택하게 되었다.
이병찬_kimi zoo- Creatures_비닐, 에어 모터_설치_2012
유승구_무제_철_135×64×47cm_2011

예술에서 작용과 반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다만, 그것이 항상 같은 힘으로, 방향이 반대인 경우는 오히려 드물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가며, 작가와 작품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작용과 반작용이 일어나고, 이것이 다시 누군가에게 보여질 때 작가와 작품, 작품과 관객 사이에 수많은 작용과 반작용이 오고 가게 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작품과 영상작품을 통하여, 현대예술의 작용과 반작용, 그 관계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자우녕_후인마이의 편지_단채널, 칼라_00:07:14_2011
정석희_숲에서 길을잃다_animated painting_00:02:00_2012

우리가 사용하는 책상이 바닥에 있을 때는 책상이지만, 이것이 천정에 있을 때는, 과연 '책상'일까? 아이들이 즐겨먹는 캔디가 주머니 안에 있을 때는 캔디지만, 전시장 바닥에 있을 때는, 과연 '캔디'일까? 이것은 물리적 위치, 개념의 위치에 따라 그 작용이 달라지고, 이에 따른 반작용도 달라짐을 의미한다. 우리가 10분짜리 영상 필름을 볼 때(작용), 5분을 본 뒤의 반응(반작용)과 10분을 본 뒤의 반응(반작용)은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같은 작용을 하는 매체에 대해서 선택적으로 반응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열린 인간계' 속에 예술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현대 예술을 통해 우리가 갖는 긍정적 관계성은 점점 사회에 작용되어, 긍정적 가능성으로, 긍정적 반작용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이번 전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한다. ■ 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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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 PLUS ULTRA 2012




서울소재 8개대학교 박사과정 연합展 2012_0502 ▶ 2012_0515





초대일시 / 2012_0502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국민대학교 / 옥경래_허나래 단국대학교 / 문경록_황효실_박하얀_정미정 동국대학교 / 신영훈_이효림_이지연_이충우 동덕여자대학교 / 고은주_신승화_구모경_남윤지_이상미_한경자 서울대학교 / 김민정_송윤주_장현지_강현선_김제민_황연주 성신여자대학교 / 이진혁_전은희_김이수_황수경 이화여자대학교 / 박상미_백지혜_장현주 홍익대학교 / 변내리_조미영_홍지윤_정나영_이상원_정재석_김지희

주최 /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주관 / 동덕아트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동덕아트갤러리 THE DONGDUK 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51-8번지 동덕빌딩 B1 Tel. +82.2.732.6458 www.gallerydongduk.com



디지털 시대의 한국 미술, 그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 ● 디지털은 오늘의 문명을 아우르는 상징적 단어이다. 이는 단순한 기계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 상황 전반을 아우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간 인류의 문명은 물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월한 물질을 지닌 민족이 그렇지 못한 민족을 지배했으며, 이러한 물질의 우열에 따라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질서가 성립되었었다. 이른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강현선_A Tea Set_디지털 프린트_29×43cm_2006
고은주_생명의시론_한지에 수간채색_260×180cm_2012

이러한 물질문명은 줄곧 서구문명에 의해 주도되었다. 지금의 이라크 근방인 수메르에서 발생한 문명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 그리고 유렵대륙에 전파됨으로써 서구문명의 토대를 이루었다. 이후 대항해 시대를 거쳐 아메리카 대륙이 문명의 흐름에 들게 되었으며, 서부 개척시대를 거쳐 미국 서부에 이른 것이 현대문명의 발자취이다. 이러한 문명의 흐름은 줄곧 동에서 서로 진행된 것이었다. 이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문명의 발달사이자 흐름이며, 뉴 밀레니엄이라 부르는 21세기 이전까지의 문화 지향이다.
김이수_Inframince-landscape_트레팔지에 아크릴채색_130×88cm_2012
김제민_The dream of mobility_종이에 먹_51×70cm_2010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을 건넌 물질문명이 태평양을 마주한 21세기는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가치체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문명의 이기로서의 인터넷이라는 기계적 성과가 아닌 기존의 가치체계를 순식간에 뒤바꾼 혁명적인 사건이라 할 것이다. 진화가 그러하듯이 과학의 발전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 '문명의 혁명적 상황'인 것이다. 과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실존적 명제는 '나는 접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이 성립될 정도로 인터넷은 현대인의 삶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지닌 실체로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과거 선진국에 의해 견인되던 획일적 가치의 주도적 보편성은 사라지고 개별적인 특수성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일상화된 '실시간', '동시대'와 같은 단어들은 바로 인터넷을 통해 구현된 가상공간의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이전에 존재했던 물리적인 시공을 해체하고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는 과거의 권위적이고 수직적이며 독점적인 물질문명의 질서를 수평적이며 민주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변환시켰다. 물질적 우위를 통해 이루어졌던 선진의 기준은 망실되고 다양성을 용인하고 긍정하는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세계화'라는 말은 생명력을 잃은 죽은 말이 되었으며 개별적이고 특수한 가치들이 수평적 질서 속에 나열되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 혹은 디지털로 구현되는 21세기를 선도하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이들은 단순한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을 견인하는 철학자라 함이 옳을 것이다.
송윤주_죽정관학도(竹亭觀鶴圖) Ink_한지에 피그먼트_130×162cm_2011
이상미_環鐵(Huan Tie)_캔버스에 실_90.9×65cm_2011

앞으로의 세계는 다원화, 정보화, 세계화, 네트워크화 된 사회로 구성되어질 것이다. 컴퓨터와 인간, 그리고 네트워크의 유기적 결합하고 사이버 공간과 물리적 공간이 통합되는 유비 쿼터스의 시대가 될 것이다. 과거 물질문명을 선도했던 서구적 자연관은 이미 한계에 봉착하여 수많은 폐해를 드러내고 있다. 자연을 대립과 투쟁의 대상으로 인식하며, 자연에 대한 무차별적인 개발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제공하였던 20세기까지의 문명은 환경오염을 비롯하여 인간의 비인간화 등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21세기의 당면한 과제는 바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동양적 자연관,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작기 고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성과 화해와 조화를 통해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간 문명의 발달이 지중해 시대에서 대서양 시대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라면, 21세기의 문명은 태평양시대가 될 것이며, 그것은 물질에서 정신으로의 가치 전환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북아는 세계 경제의 주요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역동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 물질에 의해 선도되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명의 질서가 인터넷 등 새로운 가치에 의해 수평적이고 민주적이며,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현실은 머지않은 장래에 아시아가 새로운 문명의 주역으로 부상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충우_토끼 굴로 떨어지다-증언7_혼합재료_설치_2012
정미정_표류하는 연극적자아,그리고 이종교배의 현실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11

그간 한국 미술은 물질적 가치에 따른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구조를 추종하여 왔다. 이제 이러한 가치체계가 붕괴되고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다양하고 개별적인 특수성이 용인되고 긍정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우리 미술의 앞으로의 이정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심도 있는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삼 한국 미술의 특질과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살피고 연구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여하히 발현해 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선진문명에 의해 견인되던 보편적인 가치는 망실되고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지역적 특성을 요구하는 현실은 이러한 화두에 대해 더 이상 망설이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는 바로 이 시대의 정신이자 요구이며 과제인 셈이다.
홍지윤_애창곡 My favorite song_장지에 수묵채색_400×900cm_설치_2010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_11×14inch×96_2011
황연주_채집된 풍경 채집된 슬픔_11×14inch×96_2011

이번 전시는 한국의 현대미술을 담당할 새로운 주역들의 무대이며, 오늘의 우리미술이 지닌 생생한 표정들의 나열이다. 이들을 통해 우리 미술의 오늘을 조망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내일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상황이 과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상기할 때, 모쪼록 이들의 작업을 통해 내일에 대한 진지한 시색과 부단한 추구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계는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에 없던 새로운 상황이 목적에 펼쳐지며 이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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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먹힌 뇌




2012_0504 ▶ 2012_0530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04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범수_김윤아_김황록_왕지원_정수용

주최 / 조관용_CSP111 아트스페이스 기획 / 조관용(Director)_박진(Curator)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개에게 먹힌 뇌 - 감각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실체의 흐름으로 ● 육체가 삶의 시작이며 끝이라는 생각이 전부일 때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육체가 인간 정신의 모든 근원이라고 생각하며, 과학 기술만 급속히 발전해갈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사회는 어떤 세상일까? 그러한 미래의 사회는 왕지원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이보그의 인간이나, 김범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클론의 도움으로 신체의 장기를 끊임없이 이식 받은 기괴한 유형의 인간들이 사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김범수_Super-objet21_합성수지_190×150×110cm_2011
김윤아_Dawn_혼합재료, 폴리에스테르_30×30×30cm_2007

인간의 두뇌 중추만을 살리고,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원이 되는 제반의 육체들을 제거한 왕지원의 사이보그 인간 "mechanical Xanadu"이 인간과 동일하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 - 완전한 은둔자"에서 몸통을 분리하고 뇌로만 살아가는 학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소설 속의 학자는 인간을 둘러싼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뇌'만을 남기고, 자신의 몸을 거세한다. 그는 뇌를 통해 의식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지 못하는 그의 뇌는 어린 아이의 시선에선 집안에 놓여 있는 장식용의 돌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그의 뇌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개'의 먹이가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뇌와 기계적인 몸통으로 이루어진 "mechanical Xanadu" 역시 소설 속의 학자와 같이 외부의 사물과는 격리된 채로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내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기계의 몸통을 지니고 있는 뇌가 생물학적인 몸과 같이 부드러운 바람이나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그 미세한 차이를 동일하게 느낄 수 있을까?
김황록_The Dream of Things-Disapearing Things_아크릴 플레이트, 스테인리스 스틸_270×120×90cm_2010

인간이 과학 기술의 발전을 거듭하여 육체와 뇌를 분리시키지 않고, 클론(인간 복제용의 세포)을 통해 새로운 장기를 이식함으로써 부드러운 바람이나 살아있는 생명체들의 그 미세한 감각을 느끼면서 죽음과 고통의 질병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클론을 통해 죽음과 고통의 질병으로 벗어난다고 하여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미래의 인간은 김범수의 「Super-Objet: 25, 2012」의 작품에서 보듯이 자신의 신체의 형태를 자신의 취향대로 변형시키며 살아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삶으로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자신의 신체를 장난감과 같이 변형시키는 일로 일상의 삶을 지속시키는... 그러한 분열된 몸을 지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유토피아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깨지기 쉬운 폴리로 만든 김범수의 인체 형상은 모래로 만들어진 성들과 같이 클론을 통해 생명을 연장시키면서 살아가는 미래의 불안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은 육체의 소멸보다는 '나'라는 의식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무상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육체의 소멸보다는 장 그리니에가『섬』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물들과 교감하지 않고,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자인 맥클린톤은 DNA도 인간의 정신과 분리되어 자신만의 기계론적인 질서에 따라 변화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상호 교감하며, 변화해간다고 말한다.
왕지원_mechanical Xanadu L_urethane, metallic material, machinery, electronic device (CPU board motor)_가변설치_2011
왕지원_mechanical Xanadu S_urethane, metallic material, machinery, electronic device (CPU board, motor)_가변설치_2011

정수용과 김윤아와 김황록의 조각은 그러한 세계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정수용의 신체 조각이 탐구해 들어가는 지점은 정신과 우리의 육체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인체 형상은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실존적인 상태를 여성인지 남성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상징적인 인체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체 형상은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인의 인체 형상이나, 또는 배가 풍선과 같이 배가 부풀려져 공중으로 날아갈 것과 같은 신체의 모습에서 육체와 정신이 서로 긴밀하게 상호 작용하는 내밀한 의식 세계로 시선을 향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김윤아의 신체 조각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순환하는 감각 너머의 생명의 흐름을 포착하려고 한다. 그의 조각은 인간의 뇌에 흐르는 생명의 흐름을 실의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하고, 뇌에 흐르는 그 에너지가 나무를 잉태시키는 생명의 흐름과 맞닿아 있음을 실의 재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아크릴 박스에 조명을 받아 주위가 반짝이는 부드러운 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자연의 모든 것들에 생명의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이자 동양 사유에서 말하는 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정수용_crouching woman_폴리에스테르_70×34×30cm_2007
정수용_복부팽만_a mysterious portrait_폴리에스테르 페브릭 우드_124×70×50cm_2011

김황록의 조각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들에 연결된 고리를 보다 확장된 의식 체계를 통해 접근해 간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실체들은 불교에서 말하기를 4생(四生:태생, 난생, 습생, 화생)의 생명체 중에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나'라는 의식을 벗어나 생명의 흐름을 통해 모든 사물들을 세밀히 들여다보면 인간은 생명을 잉태시켜 나오는 사물들의 일부인 것이다. 김황록의 「사물의 꿈」은 사생을 상징하는 아크릴 판으로 부터 바닥으로 길게 늘어진 철사 줄로 감각 너머의 사물들의 보이지 않는 의식의 움직임들을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다. 평면의 점들이 공간을 가르며 입체화된 철사 줄의 형상은 공간에 대한 인식을 우리에게 코페르니쿠스 적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다. 공간은 그에게 인간과 사물이 거주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이 생성되어 나오는 근원적인 모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꿈」은 감각 너머로 인간과 사물들이 서로 상호 작용하며 순환되는 의식의 실체들을 탐구한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자연의 모든 생명체들과 다르며, 물질이 생명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회에서 죽음으로 인식되는 무상함은 자연스런 현상인 것이다. '개에게 먹힌 뇌'를 주제로 하는 5인의 조각 기획전은 죽음이라는 시선을 통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인식 체계에 대한 반추이자 감각 너머의 생명의 흐름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의식의 세계로의 탐험과도 같은 것이다. ■ 조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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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知的作家視點 전지적 작가 시점




2012_0502 ▶ 2012_051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02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구이진_김연용_백기은_안세권 오용석_이예린_이주리_임상빈 장지아_정윤철_조해연_차영석_하지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잔다리 GALLERY ZANDARI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0-12번지 Tel. +82.2.323.4155 www.zandari.com



바라보기_보여지기의 지점 찾기 ●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각 가운데 시각이 주는 매력은 시각을 연출하거나 감추기가 가능하며, 일정한 의도를 지니고 이러한 바라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각이 인지할 수 있는 2차원의 평면과 입체감의 차원이 아니라, 미적인 감각이 결부되면서 점철되는 지점을 의미하겠다.
구이진_혼자있기 Being Alone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1
김연용_하얀 코끼리, 현대전자산업 공장 :덤펌라인, 피레, 스코틀랜드_흑백 확대 복사_각 84×137cm_2010
백기은_감각공생체 드로잉:수만개의 알을 몸에 붙이고 걸어가기_종이에 펜, 잉크_23×30.5cm_2010
안세권_청계천에서본 서울의 빛 2004_디지털 C 프린트_127×278cm_2006
오용석_Delgado_s John the Baptist 2_캔버스에 유채_60×72cm_2012
이예린_한 푸른 하프시코드의 그림자방_캔버스에 유채_116×90cm_2011

이러한 바라보기의 의도가 결합된 다양한 예술 장르들을 볼 때 눈여겨서 보게 되는 부분은 작품을 제작하는작가가 만들어내는 시선이다. 관람자 혹은 관찰자로 하여금 어떻게 보여지게 될지, 혹은 의미없음에 의미를 부여 하느지, 또는 무심한 듯 툭 던지는 것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작품에서 받게 된다. ● 때로는 작가들이 던지는 시선 속에 물음이 담겨 있기도 하며, 물음 자체에 숙제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러한 경우 작품 전체를 운영하는 작가들의 작품 세계 속에서 과연 어떻게 공간을 인식하고 어떻게 접근을 하며 이야기 하고 있는지 우리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이주리_롯데리아_종이에 아크릴채색_74×53cm_2012
임상빈_옮겨진 기억, 사우디 2_종이에 연필_45×57cm_2011
조해연_03/04/2012-17:45:40_캔버스에 유채_151.4×121.4cm_2012
차영석_Well Still Life_종이에 볼펜_31.5×22cm_2011
하지인_섬 islet_캔버스에 과슈_91×116.7cm_2012
장지아_아름다운 도구들2_C 프린트_120×150cm_2012
전수천_Reading dissimilarities between objects 10-2_사진_164.5×109.5cm_2010

작품 안에서 선보이는 공간의 운영에 대한 작가들의 표현 내지는 분출의 형태는 다양하기 그지 없는 형태로 나타나며,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작가들의 시선과 이를 통해 간접 경험하게 되는 작가적 시선 처리로 말미암아, 작가의 눈을 빌어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체험하게 되는 경험을 즐기게 된다. 카메라의 렌즈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눈, 캔버스의 틀 안이 아니라 그 깊숙한 곳 너머의 영역, 종이 위에 펜에서 묻어나는 작가의 흔적들. 결국에 이러한 무언의 세계를 향해서 쏳아 붓고 있는 시선에 대해서, 무언가의 의미가 전해지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 이번 전시 『전지적 작가 시점』展를 통해서 다양한 장르와 표현을 통해 작가들이 던지는 바라보기의 방법들을 전달 받기를 바란다. ■ 이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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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ndro Erlich : Inexistence




레안드로 에를리치展 / Leandro Erlich / installation 2012_0504 ▶ 2012_0707 / 일요일 휴관



레안드로 에를리치_The Staircase_금속, 나무, 비닐 타일_450×350×1500cm_2005


초대일시 / 2012_0504_금요일_06:00pm

Artist Talk / 2012_0504_금요일_04:00pm_송은 아트스페이스 B2 S. Atrium

주최 / 재단법인 송은문화재단 기획 / (주)로렌스 제프리스 협력 / 주한 아르헨티나 대사관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송은 아트스페이스 SONGEUN ART SPACE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2번지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연례 기획으로 국내에 심도있게 소개되지 않은 역량있는 해외작가들을 매해 한 명씩 선정하여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올해 2012년 해외 작가로 아르헨티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Leandro Erlich)의 국내 첫 개인전이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최됩니다. 특히 에를리치는 수영장 수면 안팎으로 관람객이 투영되는 일루전을 보여주는 대표작 Swimming pool과 같이 일상 공간들을 통해 착시를 유도하는 독창적인 설치작품들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입니다. 이번 개인전은 실재와 가상 사이의 교차를 보여주는 에를리치 특유의 대표작들이 전시되며 아티스트 토크가 함께 마련되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보다 면밀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레안드로 에를리치_Changing Rooms_나무, 금색 프레임, 거울, 커튼, 스툴, 훅_가변크기_2008

레안드로 에를리치(1973-)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출생으로 20세의 이른 나이에 비영리기관 안또르차스 재단의 문화예술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으며 미국 휴스톤 작가 레지던시 Core Program(1998-1999)에 참여하면서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에를리치는 바르셀로나 산타 모니카 아트센터와 로마 현대 미술관 등 주요 갤러리 및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특히, 1999년에 첫 선을 보인 Swimming Pool 을 베니스 비엔날레(2001)와 뉴욕 PS 1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개인전(2009)에서 선보임으로써 큰 각광을 받았고, 관람객이 공중에 부유하는 착시를 보여주는 La Torre(2008)와 바닥에 놓여진 실제 크기의 건물 모형이 거울에 투사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Bâtiment (2004)등을 비롯하여 그의 작품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아왔다. 에를리치는 제 49회 베니스 비엔날레(2001) 아르헨티나 대표작가로 참여했으며 리버풀 비엔날레(2008), 상하이 비엔날레와 부산 비엔날레(2002) 등 주요 국제 미술행사에 꾸준히 참여하며 자신의 역량을 펼쳐왔다. 오늘날 그의 작품들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21세기 가나자와 현대미술관 등 유수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에를리치는 건축가 아버지와 함께 여러 건축현장들과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공간과 구조물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키워왔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친숙한 공간들 즉, 집이나 엘리베이터 등을 거울, 유리 혹은 수면과 같이 이미지를 투영하는 도구들을 이용하거나 혹은 이들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점 자체를 전복시킴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지각하도록 유도한다. 그의 작품들은 관객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며 이는 작가에 의해 정교하게 제작된 설치작품들이 제시하는 허상과 실재의 경계를 깨닫는 것으로 이어진다. 에를리치에게 건축은 기능적인 측면보다는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서 더 큰 의미를 갖기에 그의 작업들은 관객이 작품을 직접 체험하고 스스로 지각하는 과정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 이번 개인전 "Inexistence"은 제목에서와 같이 현존(現存)과 부재(不在) 두 가지 상반된 경험을 제시하는 에를리치의 대표작 4점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시된다. "Inexistence"는 일종의 언어 유희적인 제목으로 사전적 의미로 '존재하지 않음' 혹은 '실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in existence"로 띄어 읽을 경우 정반대의 의미인 '현존하는' 의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는 평범하고 익숙한 경험을 교묘하게 비틀어, 보는 이들에게 실재와 가상 사이의 역설적인 교차를 깨닫게 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함축한다. 에를리치가 정교하게 재현한 일상의 공간 구조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눈 앞에 보여지는 '실체' 와 우리 일상의 실체와 항상 동반하는 친숙한 '환영'이 부재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직면하게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현실과 상반되게 전복된 에를리치의 작품들은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시야에서 현실을 지각하게 함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야기시킨다.
레안드로 에를리치_The Staircase_금속, 나무, 비닐 타일_450×350×1500cm_2005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마주치는 설치작품 The Staircase 는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수직 구조의 공간을 수평 구조로 뉘어 놓은 것으로, 계단의 기능이 상실된 채 원근법이 전복됨으로써 우리의 지각경험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가능케 하는 작품이다. 이는 히치콕의 대표작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한 것으로, 관객들이 미로와 같이 중첩된 계단 사이로 오고 갈 시, 마치 중력을 거슬러 계단 사이를 부유하는 듯한 전이된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레안드로 에를리치_Changing Rooms_나무, 금색 프레임, 거울, 커튼, 스툴, 훅_가변크기_2008

거울은 에를리치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로,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 실재와 현실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Changing Rooms 은 누구나 쉽게 경험하는 매우 사적인 공간을 재현한 것으로 각 벽면에 부착된 거울이 서로 비추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공간의 투영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울이 있어야 할 벽면에 거울이 없고 그 대신에 거울 크기만큼 벽면을 뚫어 거울 프레임으로 마감함으로써 마치 전체 공간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정교하게 대칭을 이루며 각각의 방들이 미로와 같이 연결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거울을 바라보려는 관람객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대신 다음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마주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은 있으나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친숙한 환영은 없다. 이를 통해 작가는 우리의 획일화된 경험에 의해 고착된 현실을 지각하는 것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레안드로 에를리치_Le Cabinet du Psy (The Psychoanalyst's Cabinet)_2009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The Chairman's Room (2012)은 2005년에 제작된 심리분석가의 사무실Le Cabinet du Psy (The Psychoanalyst's Cabinet)을 송은 아트스페이스를 위해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은 투명한 유리 벽에 의해 균등하게 분할된 두 개의 공간 중 한편의 방은 프로이드의 사진 액자와 책상, 환자를 위한 소파 침대 등 전형적인 정신분석학자 사무실의 모습을 재현한 데 반해, 맞은편 방은 관람객이 이러한 사무실을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구성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람객은 사무실을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는 동시에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 또한 보게 된다. 맞은편 사무실 가구들과 정교하게 일치하는 관찰실 내부 구조물들에 관람객이 앉거나 누움으로써 마치 자신이 사무실에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듯한 지각 경험을 하게 된다. 이처럼 마법과 같은 환영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현실 외에 성립 가능한 가상의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사고범위를 확장시켜 준다. Chairman's Room(2012)은 (재)송은문화재단의 설립자이자 주식회사 삼탄의 창립주인 故 송은(松隱) 유성연 명예 회장의 집무실을 재현한 것으로, 올해 삼탄 창립 50주년을 맞아 송은 아트스페이스만을 위해 작가가 구성하여 선보이는 작품으로, 예술가의 꿈을 소중히 여겼던 고인의 집무실을 관람객들이 조우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레안드로 에를리치_The Doors_나무, LED 조명_가변크기_2004

이번 전시장의 마지막 작품 The Doors 은 4개의 닫힌 문 틈으로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광경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어두운 공간에 들어와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문 앞으로 이동할 수 있다. 현재와 다른 공간을 기대하며 관람객이 문을 여는 순간 빛은 사라지고 여전히 동일하게 어두운 또 다른 공간에 들어서게 된다. 작가에게 이 작품은 본 전시에서 일종의 최종적인 궁극,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은유이며 문을 연다는 것 자체는 작품에서 결국 여전히 같은 공간에 머물게 되는 것처럼 그 이상의 의미도 없다. 에를리치의 이번 개인전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전복시킴으로써 새롭게 지각되는 현실의 또 다른 이면 즉, 실재와 부재의 교차점에 대해 조망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출품작 외에 작가의 과거 대표작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영상과 인터뷰 동영상이 함께 선보여진다. ■ 송은 아트스페이스
참고이미지 ◁ 레안드로 에를리치_The Swimming Pool_석조, 수영장 계단, 유리, 물_300×600×280cm_1999 참고이미지 ▷ 레안드로 에를리치_Bâtiment_프린트, 거울_1200×800×600cm_2004


○ 부대행사 작가 강연회 Artist Talk 일시 / 2012_0504_금요일_04:00pm~06:00pm 장소 / 송은 아트스페이스 지하 2층 S. Atrium 무료입장, 예약문의 : info@songeunartspace.org (성함, 연락처, 동반인원 수 기재, 예약자 우선으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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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Uncertain Shadow
4. 19 ~ 5. 31 PKM트리니티갤러리





할로겐 조명, 유리, 알루미늄, 변압기 가변 크기 2010 ©2012 올라퍼 엘리아슨



자 연에 대한 체험을 전시장 안에 끌어들이는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미술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이 열린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2007년 PKM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2007년과 2009년의 개인전에 이어 개최되는 세 번째 국내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가 제작한 신작을 포함, 조각 회화 설치 21점이 출품된다. 특히 <유목(Driftwood)> 연작은 빛과 색채의 지각적 인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온 그의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여정이라는 시간성의 개념을 새롭게 부여한 작품이다. 또한 2m 높이의 만화경 <라바 칼레이도스코프(Lava Kaleidoscope)> 역시 아름다운 빛의 시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작품 내부에 장착된 고반사율의 특수 유리는 반사체와 빛 사이, 즉 잔상과 가상 사이에 물리적 시각반응을 일으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올 라퍼 엘리아슨은 자신이 태어난 북유럽의 신비한 자연현상을 모티프로 하여 스펙터클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는 관객 누구나 빛의 파장과 온도, 날씨, 천체 운동과 같은 보편적인 자연현상을 정신적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총체적인 환경을 조성한다. 그는 이로써 기존의 관객과 작품, 공간 사이의 정적인 관계를 재정립하며 예술작품의 지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왔다. 특히 ‘보는 행위’에 내재한 다양한 사회적 예술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작품이 보여지는 맥락과 관객들의 다양한 반응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을 강조해 왔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섬세하게 구축하기 위해 건축과 기하학, 과학적 원리를 적극적으로 응용한다. 그의 작품은 1995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설립한 베를린의 대규모 스튜디오에서 과학자 색채학자 건축가 기술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다. 엘리아슨은 이번 전시를 맞아 직접 방한할 예정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1967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아이슬란드인 부모에게서 출생. 덴마크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관 작가, 런던 테이트모던에 <날씨 프로젝트>설치(2003). 샌프란시스코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P.S.1 현대미술센터, 달라스미술관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순회전(2007~8). 뉴욕 맨하튼 다리에 <뉴욕시 폭포 프로젝트>(2008) 설치 등 다양한 공공미술 및 기업 협업 프로젝트 진행.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79 B2,3
www.pkmgallery.com
02)515-9496~7







FANTAZIA


지인_이진아_이화영展 2012_0426 ▶ 2012_0513


진아_무덤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테디베어 사파리 테지움 신진작가지원展

주최 / 고양시 후원 / 테지움 브랜드 컴퍼니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일산 호수공원 내 고양꽃전시관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 906번지


테디베어를 바라보는 세 개의 시선 ● 봉제 곰인형을 일컫는 테디베어(Teddy Bear)는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는 장난감이다. 미국의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시시피주로 사냥을 갔다가 몰이꾼이 잡아놓은 무방비상태의 곰을 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는데 유래(*주)하여 대통령의 애칭을 이름으로 달고 있는 이 인형은 그 자체가 친근함과 동심의 상징이다. 테디베어가 탄생하고 100여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테디 베어를 안고 잠에 빠져들고 어른들은 단지 귀여운 동물의 외모를 한 곰인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곤 한다. 이진아, 이화영, 지인 3명의 작가가 참여한 판타지아(FANTAZIA)는 이러한 테디베어 특유의 친숙함과 각자의 예술세계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여 제시한 협업(Collaboration)전시다. 지금껏 서로 전혀 다른 타입의 작업을 해온 세 명의 작가는 각각의 작업적 기반에 테디베어라는 소재를 더해 전시를 꾸몄다. 여기서의 테디베어는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표상으로서의 테디베어임은 물론 차연(differance)의 기준점으로서의 성격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동시에 작가들이 테디베어가 가진 파급력과 이미지가 예술과 결합했을 때 얻어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고민한 실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진아_Good evening friends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2

PAST – 이진아 ● 이진아 작가는 이번 판타지아 전시를 위해 프로젝트성 작업을 선보인다. 지금껏 작가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얻은 불안을 끈끈하게 뒤엉킨 물감에 투사하는 작업을 해왔으나 이번에는 테지움의 메인 캐릭터인 '테테루'를 매개로 메시지를 던진다. 작가에게 있어 테디베어는 기원인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의 친숙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우정의 유산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계기는 무엇보다 대공황에 이은 미국의 경제위기 극복이었다. 그는 무너진 민심을 붙잡기 위해 취임 당시 라디오 연설에서 국민들에게 한 인간으로서, 그들과 함께 고충을 나누는 친구로서 친숙한 밤 인사를 건네곤 했다 - 그러나 테디베어가 탄생하고 시간이 흐른 지금, 친숙함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동화되어 브랜드화 되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친구'가 아니라 '돈을 버는 것' 수단으로 낡은 위상을 이어가는 테디베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변질되지 않은 본래의 상태로의 '회귀'는 이진아 작가의 작업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다.
화영_Central Park_종이에 팬_21×27.9cm_2011
화영_Wonderland-teteru_가변설치_400×296×300cm_2012

PRESENT - 이화영 ● 이화영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 조금 방향을 선회하여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성 작업을 완성했다. 지금까지 장식적 패턴을 통해 작업 소재에 포함된 조형적 요소를 탐색하고, '주름'에서 펼쳐진 일종의 '가능세계'를 구현해내온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단지 자신의 작업 방식만을 차용했다. 특히 이는 이전부터 작가가 고민해온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예술과 그 반대급부에 위치한 예술 사이의 차이에 대한 탐구이며, 여기서 테디베어라는 소재는 좋은 모델이자 매개체 역할로 작용한다. 작가는 테디베어의 장식적인 것, 보기에 좋고 친근한 것 이라는 감정적 동조가 호명하고 있는 요소들을 팝아트적 언어로 추적해 나간다.
지인_[00000004]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1
지인_지구인을 위한 I_디지털 프린트_2.95×2.5cm_2012

FUTURE - 지인 ● 지인 작가의 작업은 테디베어의 유래(*주 참조) 에 키덜트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과정이다. 이전부터 직접 쓴 픽션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페인팅과 설치작업을 해온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테디베어가 가진 '사연'에 주목했다. "만약 루스벨트 대통령이 살려준 곰이 마을을 만들고 그 자손이 살아있다면"이라는 상상에 기반한 작업은 유쾌 발랄한 동화적 전개를 따른다. 작가는 직접 만든 탈을 쓰고 퍼포먼스를 펼친 후, 수집한 결과물들을 전시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던져지는 메시지는 상당히 굵직하고 단순하나, 진부함이 되려 대답하기 곤란하게 변한 오늘날의 세태에서 던져진 질문이 마냥 유치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동시에 동화로 가장된 현실에서 포착된 일련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는 작가가 다시 동화적 해피엔딩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아이러니다. ■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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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처방


2012_0504 ▶ 2012_052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04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구성연_권남득_나얼_최경주_필승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토스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3층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현대인들은 늘 사랑 받고 행복한 풍요로운 삶을 살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치열한 삶 속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로 많은 상처를 안고 있으며,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행복하고 기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번 전시는 바쁘게 살아가는 지친 현대인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주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예술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 따뜻한 감성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치료제 역할을 하길 기대하며, 그 특별한 힘은 우리들의 오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할 것이며 고단한 일상에 녹아들 것입니다.
구성연_사탕시리즈-p04_라이트젯 C 프린트_147×120cm_2010
권남득_꽃폭탄_스테인리스, 철_50×120×150cm_2012
나얼_Collage For Ebony 1_디지털 콜라쥬_92×63cm_2011
최경주_빛바랜 즉흥곡(레이어와 레이어 사이 시리즈No.1)_나무의자 틀, 실크샤, 바느질_2012
필승_만져도 되는 작품-말_점자

가정의 달이자 사랑을 상징하는 오월을 맞아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예술작품으로 치유, 그 특별한 힘을 처방하며 관객과 함께 소통해 보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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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쓰잘데기 없는 연구


최형욱展 / CHOIHEONGUK / 崔亨旭 / mixed media 2012_0501 ▶ 2012_0531


최형욱_달리는 잠자는 침대_나무, 전기 모터_50×120×60cm_2012

초대일시 / 2012_0501_화요일_06:00pm

2012 유중아트센터, 카페 드 유중 기획展

후원 / 유중아트센터

관람시간 / 10:00am~10:00pm

유중아트센터, 카페 드 유중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번지 유중빌딩 1층 Tel. +82.2.599.7709 www.ujungfoundation.org www.ujungartcenter.com


일상의 풍경을 응시하다보면 이따금씩 우리 시대 어디에나 있지만 주변인으로서 무심히 스치거나 의도적인 혹은 자연적인 소외를 겪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버스정류장에서 추위를 견디며 차를 기다리는 학생, 스쿠터를 타고 가는 중년여성, 캐리어에 짐을 가득 싣고 광화문 횡단보도를 건너는 배달부, 관광지에서 필름사진을 찍어주는 노년의 사진사, 보따리를 움켜쥐고 망연히 길을 걷는 노숙자 등 최형욱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렇게 소시민적인 삶의 한 켠에 선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이 드라마를 통해 그려졌다면 비록 곤궁하고 부박할지언정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미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삶은 대개 일상의 보편성이 진부함으로 점철되는가 하면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들로 행복과 즐거움 보다는 슬픔과 좌절이 만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드라마는 현실보다도 더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애초부터 대상화된 현실과 체감적인 현실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예정되어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종종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동원하여 해결하기도 하는데, 저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그에 따라 느끼는 속도와 무게감이 차이가 있는 만큼 추상적인 인식과 직관적인 인식은 접점을 이루기보다 하나의 경향으로 기울거나 다양한 양상으로 왜곡되게 된다. 이렇듯 모든 판단이 주관성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과 가장 가까운 현실의 모습을 분별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최형욱_견실한 시민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최형욱_The chronicle of feces_종이에 유채_36.5×52.3cm×9_2012

최형욱은 동시대의 리얼리티(Reality)를 표현함에 있어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사회적 그물망(Social net)안에서 대립하는 가치 쌍과 그 사이의 간극을 탐구함으로서 극복하고자 한다. 작가는 특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구속력을 갖는 사회적 규범 속에서 은폐되었거나 혹은 은밀히 존재하는 삶의 타자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사회생활을 위한 기념비(2010)', '스킨쉽이 부족한 40대 중년부부를 위한 러브침대(2011)', '달리는 잠자는 침대(2012)', '내 남자의 내연녀를 우아하게 물리치는 테이블(2012)' 등의 작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들은 내용 상 사회의 질서와 관습, 도덕, 진지함, 상식과 같이 이른바 상위 가치로서 간주되는 개념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배제되어온 무질서, 경박함, 부도덕함, 비상식 등을 관통하고 있다. 이들은 웃음의 개념사적인 관점으로 볼 때, 우스꽝스러움, 가벼움, 찰나, 사소함, 쓸모없음과 같은 희극적인 요소와도 맥을 같이 한다. 작품에 도입된 희극성은 대상을 조롱하거나, 사회적 판단이나 도덕적 입장으로 인해 거리를 둔 채 유희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플레스너(Helmuth Plessner)의 경우처럼 위트, 유머, 아이러니, 풍자, 그로테스크 등의 웃음의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한 인류학적 접근에 더 가깝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러한 희극성은 현실에서 오랫동안 권위를 누려왔던 가치체계가 삶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삶은 결국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서 활용된다. 또한 칸트(Immanuel Kant)가 정의한 바와 같이 실재와 개념 그리고 기대한 것과 실제 일어난 것 사이의 불일치 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유도하는 요인이 된다. 이 때 작품에 부과된 작가적 상상력은 이러한 희극성과 함께 작품이 갖는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최형욱_내남자의 내연녀를 우아하게 물리치는 테이블_나무, 컵_75×60×60cm_2012
최형욱_내남자의 내연녀를 우아하게 물리치는 테이블 드로잉_종이에 먹_39×54cm_2012

한편, 최형욱이 이러한 주제와 표현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은 예술과 삶의 통합을 목적함에 있어 예술의 권위주의적 태도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최형욱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하고 있는 지점은 비유하자면 제도권 내에서 예술이 추구하는 인정과 권위로부터의 진지함, 무거움, 영속, 기념비적인 것과는 대조되거나 혹은 그 경계에 위치하는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작가는 회화, 조각 같은 전통적인 매체에 세속적인 주제와 아마추어적인 제스처 그리고 실천적인 형태의 예술을 혼합함으로서 예술의 유일무이한 현존성과 아우라(Aura)를 와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스스로의 포지션에 있어서도 장인(匠人)에서 관찰자이자 감독 혹은 연출자로 자유로운 전환과 병행이 이루어진다. 결국 작품에는 내?외적으로 익숙한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들이 한데 섞이며 현존하는 삶의 일반을 자연스럽게 담기게 된다.
최형욱_스킨쉽이 부족한 40대 중년부부를 위한 러브침대_나무_830×800×1200cm_2011
최형욱_객관식문제1번_나무에 연필_30×30cm×4_2011

어떤 면으로 최형욱의 작품은 장소특정적인 이벤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간에 놓임으로서 일상의 공간에 색다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작품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갖기보다 환경적 맥락에서 해석되며 인터렉티브(Interactive)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것은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 동일한 단서와 논리 구조 속에서 회를 달리하며 다른 버전의 신(Scene)을 출현시키는 연속적인 옴니버스(Omnibus)와 같다. ● 관람객들은 미적 자율성에 입각한 체험의 일부로서 작품에 참여하며 내재되어있던 관습적 사고와 일상의 습관적인 태도로부터의 탈피를 경험한다. 그리고 작품이 동인하는 웃음, 그로부터의 오락과 위안으로 경직된 일상의 삶을 새롭고 창의적이며 활력적으로 바라보고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얻는다. ■ 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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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서인경展 / SEOINKYUNG / 徐仁敬 / photography 2012_0509 ▶ 2012_0514




서인경_zoom in no.1_검프린트_50×7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809i | 서인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잠자리 ● 네 날개 짓은 나에게 손짓하지./네 손짓에 난 가만히 너를 들여다 본다.//잡으면 부서질 듯 한 네 날개 속에/너 아직도 태고적 모습 간직하고 있구나!/그 모습 속에 너의 억센 고집 아직 남아있구나!//넌 기억하니?/너의 날개 짓에 하늘을 뒤 덮던 그때를/너의 날개 짓에 세상을 뒤흔들던 그때를//너 알고 있니?/네 모습 속에 감추어진 너만의 아름다움./네 안의 억센 고집스러움//자 ,날개를 펴고 다시 날아 보는 거야./그때처럼...
서인경_zoom in no.2_검프린트_45×60cm_2011
서인경_zoom in no.3_검프린트_45×60cm_2011
서인경_zoom in no.4_검프린트_50×70cm_2012

잠자리는 중생시대부터 지구상에 존재했고, 날개 길이가 무려 9m정도였으며, 폭이 90cm 정도 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잠자리는 너무나 작고 여린 날개를 지닌 미물에 불과하지요. 저는 잡으면 부서질 것 같은 잠자리의 여린 날개의 아름다움을 지난 4회 개인전에서 다루었고, 이번 5회 개인전에서는 잠자리가 지니고 있던 태고적의 억센 고집과 기질,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다루고자 합니다.
서인경_zoom in no.11_검프린트_50×50cm_2012
서인경_zoom in no.14_검프린트_74×100cm_2012
서인경_zoom in no.16_검프린트_50×50cm_2012
제 작품 기법은 검프린트(gum bichromate print )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색을 연한색에서 깊은 색으로 1도씩 올리는 고전적인 사진기법입니다. 보통 하루에 1도, 한 색을 올릴수 있으며, 작가에 따라 색을 분판하기도 하고 ,색이 지면에 이미지를 남기는 일회의 우연성을 이용하기도 하고, 정확한 데이터를 토대로 작업하기도 하는 매우 매력적인 암실작업입니다. 제가 이 작업을 유독 고집하는 이유는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의 묘한 장르의 접점에서 양쪽이 지닌 장점을 적절히 이용하고, 또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전시를 통해 검프린트의 매력을 좀 더 알리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 정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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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KI 念力通






안철展 / AHNCHUL / installation 2012_0509 ▶ 2012_0514




안철_Psychokpi 念力通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5:00pm

기획 / 김진혜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1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다양한 방면의 경험을 통하여 고정된 틀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 안 철의 6번째 전시가 오는 5월에 선보인다. 엔지니어이자 사업가로서의 경험과 창의적이자 실험적이며 때로는 도발적으로 보이는 작가로서의 크리에이티브적 에너지가 60대를 넘어서는 연륜과 맞나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흥미로우면서도 사고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전시로 기획되었다.
안철_Psychokpi 念力通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안철_Psychokpi 念力通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전시의 주제는 염력'念力 Psychoki power'이다. 말 그대로 우리가 소원 하는 것을 이루게 하는 염원하는 에너지를 전시에서 표현 한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염기(염력의 기운)을 담아내는 작업들을 통하여 희망, 기쁨, 성공, 소원을 이뤄내는 에너지를 실제로 구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장 전체는 하나의 염력 발전소가 되어 염력을 발생하게하고 그런 염력을 모으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 에너지로 발전해 나가는 내용을 보여주며, 관람객들과 공간이 소통하여 염력에너지를 더욱 키워 나가고 관람객 개개인도 소망하는 힘, 염력을 충전 할 수 있게 된다.
안철_Psychokpi 念力通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안철_Psychokpi 念力通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2

지난 전시에서 안 철은 밀도와 차원의 상관관계를 통하여 탄생과 죽음을 이야기 하고 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염력이란 에너지를 통하여 생과 사의 제한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과정을 만들었다. 죽음을 끝으로 한정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부활의 시작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죽음도 간절한 염원으로 감싸면 생명이 된다' 는 염력이 주는 기원의 힘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보고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전시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으로부터 생명의 그 너머에 비밀스런 개념까지 보여주고 있다. ■ 김진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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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다 마유미 사진전 《피안의 세계 : Living Absence》

2012/03/31 - 2012/06/09

장소    : 한미사진미술관
기획    : 한미사진미술관
참여작가    : 테라다 마유미

1334320077430113160.jpg

테라다 마유미, basin 080601b, Gelatine Silver print, 57.2x43.2cm, 2008

테라다 마유미는 흑백 은염사진을 통해 사진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을 차근히 보여준다. 작가는 카드보드와 스티로폼, 석고 등으로 미니어처를 제작한 뒤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빛과 그림자, 사물형태의 변화를 흑백사진으로 촬영한다. 이번 전시는 마유미의 신작과 더불어 2011년부터 작업한 일련의 시리즈들을 통해 작가의 심상변화, 작업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하나의 흐름으로 시각화시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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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ing . 초점맞추기




양혜진展 / YANGHYEJIN / 梁惠眞 / painting 2012_0509 ▶ 2012_0515



양혜진_과도한 관심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31 GALLERY 31 서울 종로구 관훈동 31번지 B1 Tel. +82.2.732.1290



매일같이 넘쳐나는 뉴스꺼리 속에서 누군가의 '충격'고백은 더 이상 신선하지도 않다. 습관처럼 눈길이 가고 호기심에 쏠렸던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 곧 잊혀지게 마련이다. 더 새로운 사건들에 시선이 집중되고 또 다시 잊혀지기를 반복하면서 머릿속에는 세간의 관심이 주목되었던 자극적인 순간들만 기억에 남아 마치 인스턴트 식품처럼 뉴스꺼리를 소비하고 있는 것 같다.
양혜진_그림자를 쫓는 사람들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양혜진_억울한 그를 위한 자리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아무것도 아닌 일도 뉴스의 카메라가 주목하면 곧장 대단한 사건이 되고 반대로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도 주목받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단지 많은 카메라가 주목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이미 '시사적이고 중요한 일'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고 느끼게도 하지만, 빠르게 보여지고 사라지는 이미지는 즉각 즉각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에게 생각해볼 여유를 주지 않고 빠른 판단을 내리도록 재촉한다. 어쩌면 내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결과는 결정되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 대해서 혹은 어떤 일에 대해서 보여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그 대상을 얼마나 알고 내리는 판단일지는 항상 알 수 없는 일이다.
양혜진_인터뷰 이벤트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2
양혜진_노코멘트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12

나는 보도 매체의 카메라들이 취재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행위 또는 그 취재 대상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세상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주는 지, 그 이면에는 어떤 것이 감추어져 있는 지, 아니면 내용 없는 형식적인 '초점 맞추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뉴스나 보도 프로그램, 또는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 등의 한 장면 등을 소재로 삼아 그려진 그림은 세상이 '초점 맞추는' 대상에 불가항력적으로 순식간에 시선이 쏠리는 나의 심리를 반영하며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 의문을 제기하고 싶고 판단을 보류하고 싶은 마음을 그림 그리는 행위로 표현하고자 한다. ■ 양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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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展 / GWONOSANG / 權五祥 / photography.installation 2012_0509 ▶ 2012_0624 / 월요일 휴관



권오상_Untitled_C프린트, 혼합재료_118×70×47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506e | 권오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아라리오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청담 ARARIO GALLERY SEOUL CHEONGDAM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82.2.541.5701 www.arariogallery.com



권오상의 개인전이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청담에서 열린다.이번 전시는권오상 작가가 2006년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 개인전 이후 한국에서6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기에,그의 신작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이 더욱 증가하는 전시이다. ● 권오상은 '데오드란트 타입(Deodorant Type)', '스컬프처(Sculpture)', '플랫(Flat),'이세가지 다른 형식의 시리즈를 꾸준히 연구 개발하면서, 조각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호평을 받아왔다. 특히 '데오드란트 타입'은 스티로폼과 같은 가벼운 재료로 형태를 만든 후 대상의 사진들을 조각의 표면에 붙인 사진조각으로서평면으로 입체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각광받는 그의 가장 유명한 시리즈이다.'더 플랫'시리즈는 잡지에 게재된 광고 이미지들을 오린 후바닥에 세우고 이를 다시 촬영해서 한화면에 집결한다.이러한 그의 작업은 대상을 재현한다는 공통된 과정에서2차원 평면 사진에서3차원 조각으로,또는 다시3차원 입체가2차원 평면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작품은 입체와 평면,실물과 이미지,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권오상_Untitled_C프린트, 혼합재료_118×70×47cm_2012_부분
권오상_Khumbu & Kuma_C프린트, 혼합재료_210×95×50cm_2012

이번 권오상 개인전에서 특이한 점은 조각의 주재료인 사진 이미지들의 원천이 대부분 인터넷 서핑에 의해 서도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전 사진조각 모델에서 보여준 고해상도 사진의 화려한 디테일을 과감히 포기하고, 인터넷에서 찾아낸 다양한 해상도의 이미지들로 대체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이미지를 확대했을 때 픽셀이 깨져서 보이는 현상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사진이 조각을 완결하는 미적이고 지시적인 역할에서 미디어의 대상을 현실의 조각으로 옮겨놓기 위한 하나의 픽셀 역할로 대체된다. 인터넷 미디어를 이용한 권오상의 새로운 제작과정은, 현대인들이 어떤 대상을 찾기 위해 가장 빠르고 쉽게 이용하는 "인터넷 검색"과 유사하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검색결과들은 빠른 답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눈속임과도 같은 피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는 권오상 작가가 데오드란트가 원래 냄새를 없애고 다른 향기를 내게 하는 일종의 눈속임을 갖는 점에 착안해 그의 사진조각에 '데오드란트'라는 이름 붙인 것과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인터넷을 떠도는 한 대상에 대한 무수한 이미지들의 조합은 그대상의 본질 위에 덧입혀진 제3자의 시선을 통한 겉모습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권오상_2011, December(Vase)_라이트젯 프린트, 우드프레임_154×105cm_2012
권오상_2011, November (Tumbler)_라이트젯 프린트, 우드프레임_154×105cm_2012

더 플랫 시리즈의 신작은 하나의 잡지 안에 있는 모든 이미지를 오려서 하나의 플랫 작품으로 완성한다. 매 달 출간되는 잡지에는 무수히 많은 상품들과 이미지들이 있다. 잡지의 이미지들은 독자들에게 상품과 서비스 구매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정제된 것들이다. 이 이미지들을 한데 모은 권오상의 플랫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엄선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이미지들은 작가에 의해 보다 낮은 화소의 카메라로 재촬영 되면서 자극적이고 부풀려진 잡지의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은 이미지로 변환된다.
권오상_2009, July(Head)_라이트젯 프린트, 우드프레임_154×105cm_2012

흉상, 플랫 연작과 함께 데오드란트 타입의 이번 신작 3점은 기존에 하나의 인체를 형상화하여 만든 사진조각과는 다르게 다양한 포즈의 인체와 동물들이 한데 어우러지고 결합되어 구성되었다. 3미터가 넘는 대형 크기와 서로 다른 대상들이 서로 엉킨 하나의 조각은 짜임새 있는 구도 안에서 그 거대한 형태를 드러낸다. 그리스전통 조각에서 볼 수 있는 인물의 포즈와 구도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이는 현재 미디어 내에 존재하는 현대 의복과 광고의 정형화된 포즈들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 대형 조각 속에 등장하는 사자는 작가가 미디어 내에 존재하는 여러 사자의 이미지를 조합해 형상화 한 것이다. 이렇듯 권오상은 이제 시공간을 넘어서서 어떠한 대상도 재현 할 수 있는 현대조각의 새로운 방법론을 이번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아라리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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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급수 Infinite Series




2012_0508 ▶ 2012_0529



최윤정_기억 지우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97×162.2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윤인선_정유진_최윤정(사진)_최윤정(회화)

관람시간 / 10:00am~06:30pm

57th 갤러리 서울 종로구 송현동 57번지 2층 Tel. +82.2.733.2657 www.57gallery.co.kr




작가에게 창작은 끝없이 진행되는 수련의 과정이다. 꾸준히 변모하기에 규정지을 수 없는 작가적 이상을 향한 그 길에는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절망이 흩뿌려진다. 그리하여 창작의 양끝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이상, 그리고 작가적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해체가 놓여지게 된다. 『무한급수』는 특별히 평면작업을 추구하는 청년작가 4명의 내밀한 분투에 주목하는 전시이다. 이들은 개인적인 인식의 풍경을 낯설게 조형 Defamiliarization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자의 이상에 수렴해가는 과정과 그 작가적 국면을 펼쳐 보이고자 모였다. ■
기억의 숨바꼭질 Hide and Seek in Memory ● 나는 기억의 파편을 주워 담는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들, 때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는 파편들과 조각들을 회화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낯선 풍경으로 만들어낸다. 기억의 조각들로 재조합된 장면은 관람자 개개인이 품고 있는 욕망으로 다시 읽혀지며, 타인의 시간 속에서 또 다른 무엇을 발현시켜 나간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그 어떤 기억을 가만히 떠올려보게 될 것이다. ■ 최윤정

정유진_Krazyrabbit_몽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7×145.5cm_2010

미친 토끼 Krazyrabbit ● 내 그림에는 10년이 넘도록 그려온 토끼형상을 한 나의 분신들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미친 토끼」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내 존재에 대항하는 도피처로써의 자아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유약하고 친밀한 동물인 토끼는 친숙하지만 독일어 "Heimlich"의 어원이 그렇듯 동시에 "비밀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다. 머리 속을 헤집는 환영들 속, 나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나는 작업을 통해 정신적인 불안들을 해소해온 것 같다. 그것은 나와 타인들 사이에서 생기는 장벽과 관련된 거부의 감정을 극복하는 데서 온 일종의 자가치유의 방식이기도 했다. ■ 정유진
최윤정_Hello to Myself #25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05×70cm_2010

종이인형과 현실 Hello to Myself ● 어린 시절의 놀이도구였던 종이인형으로 탈바꿈한 내 상념의 기억은 과거로의 회귀를 갈망하고 있지만 시공간에 놓여진 실체는 언제나 현실의 벽 앞에 놓여져 있었다. 내 작업에서 종이인형은 돌이킬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고 한없이 나약한 자화상이며 현실을 고의적으로 망각하려는 심리적 충동의 요체이다. 이는 상념 속의 자아와 현실에 머무르고 있는 자아의 이중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의 표출이기도 하다. ■ 최윤정
윤인선_사라진 풍경 (연작 중)_합판에 유채_각 21.5×31.75cm_2010

사라진 풍경 Studies on Presence ● 누가 봐도 "결함"이 역력한 스냅사진의 형식을 빌어온 나의 작업은 일상의 진부함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초점이 맞지 않아 상이 흐려지고, 노출이 부족한데다 한 귀퉁이가 잘려나간 이미지는 일상의 언어로 포획할 수 없는 현현 epiphany의 순간을 담지하고 있다. ● 가장 낯익은 대상이 반대로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의 의식 밖으로 멀어져 가던 존재는 비로소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드러낸다. 「사라진 풍경」은 바로 이 찰나의 기록, 그리고 존재의 환영이다. 부엌과 화장실에서 발견되는 낡은 생활용품들을 응시하는 근시안(近視眼)의 화면은 상실감과 향수를 종종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라진 풍경」은 일상과 언어의 장막에 묻혀있던 존재가 다시 태어나고, "아직 호명되지 않은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낯선 비일상의 세계를 펼쳐 보일 것이다. ■ 윤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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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강승희展 / KANGSEUNGHEE / 姜丞熹 / printing 2012_0509 ▶ 2012_0522


강승희_새벽, 백두산-21207 Day Break-21207_드라이포인트_5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118d | 강승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_노암갤러리

2012 미술공간현 기획초대展

2012_0509 ▶ 2012_0522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2012_0509 ▶ 2012_0515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동판화기법으로 동양적 사유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강승희 판화가(추계예대 교수)의 개인전이 4년 만에 인사동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미술공간現의 기획초대전으로, 노암갤러리(2012. 5. 9 - 5. 15)와 미술공간현(2012. 5. 9 - 5. 22) 두 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최된다. 강승희 작가에 대한 다수 미술관계자들의 평가 가운데 특히 세 평론가의 평을 통하여 작가와 작품세계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 박영택 미술평론가는 강승희 작가의 표현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딱딱하고 견고하고 차가운 매체에 한없이 부드럽고 눅눅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마음의 자락을 문질러댄다." (박영택-'강승희- 풍경의 맛' 평론 中 발췌) ● 김영호 미술평론가는 "오랜 연륜 만큼이나 동판화에 관해선 남다른 경지에 이른 것 같고, 이로써 자신만의 형식과 정서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작가를 평하고 있으며, (김영호-'동양적 명상세계의 판화적 번안' 평론 中 발췌) ●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강승희의 판화작업은 대상에 근거하면서도 화면의 내적 질서에 충실한 면모를 취하고 있으며, 각종 판화기법을 수렴하여 종합적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고충환-'자연의 원형, 존재의 원형' 평론 中 발췌) ● 강승희 작가의 동판화작품들은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로, 보는 이로 하여금 고독과 사유의 시간을 이끌어낸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이지만 잠시나마 전시장에서의 작품과의 조우를 통하여 고요한 명상의 시간을 갖거나 혹은 잠시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보기를 권유한다. ■ 구나영
강승희_새벽-21205 Day Break-21205_드라이포인트_50×80cm_2012
강승희_새벽-21206 Day Break-21206_드라이포인트_60×90cm_2012

강승희- 풍경의 맛 ● 작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 매체가 지닌 역사적 과정과 전통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특정 매체를 다룬다는 것은 그 매체의 조건에 순응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로부터 연유하는 표현방법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일탈과의 긴장을 부단히 겪게 된다. 모든 작가는 자신이 다루는 매체, 물질을 화두 삼아 끝까지 가는 이들이다. 작업은 그로부터 발원한다. 이처럼 작가란 존재는 특정 매체를 다루는 이들이며 그 물질과 연장을 통해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작가의 작업이란 생각해보면 그가 다루는 물질과 연장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가능한 표현의 극대치를 모색해 온 모종의 결과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 강승희는 오랫동안 동판화를 제작해온 이다. 그의 작가적 삶과 작업의 주제, 표현방법론 역시 그 동판화로부터 비롯되고 기원한다. 자신이 다루는 매체, 물질과 연장이 고스란히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반영하는 도구가 되고 인격적 공간과 내면의 깊이를 반영하는 수단이자 결국 자신의 또 다른 얼굴로 나앉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동판화란 기법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 연장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매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그 매체를 통해 그는 특정 풍경을 형상화했다. 그 풍경 역시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다는 선에서 연출된 풍경화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자연에서 모티프를 취했지만 그로부터 파생한 이미지는 자신의 내면의 프레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모든 풍경은 결국 그 풍경을 본 이의 마음과 사유에 의해 번안되고 해석되고 걸러진 것들이다. 그와 무관한 풍경은 부재하다. 따라서 강승희가 그려낸, 찍어낸 풍경은 풍경을 빌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의 한 자락을 펼쳐놓는 것이다. 흡사 전통시대에 그려진 인물산수화처럼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간결하게 형상화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상하는 한편 군자적 삶의 희구를 열망하는 제스처를 간절히 각인했듯이 말이다. 강승희의 이 적조한 풍경 역시 광막한 우주자연에서 홀로 수신하며 그 광활하고 숭고한 자연과 교호하는 이의 마음을 조심스레 부려놓았던 인물산수화의 전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강승희_새벽-21220 Day Break-21220_드라이포인트_50×80cm_2012
강승희_새벽, 독도-21208 Day Break-21208_드라이포인트_50×80cm_2012

작가는 부식동판화기법을 통해 금속에 저항하고 그것을 자신의 감성에 의해 조율된 특정 상황으로 연출한다. 그는 금속판위에 직접 제작한 특수한 니들(송곳, 칼)로 선을 파고 새기고 점,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단호하고 견고한 금속의 납작한 평면에 상처를 입혀서 만든 구멍, 깊이에 물감과 압력, 시간과 여러 효과를 부여해 이미지를 만들었다. 금속판에 마음과 정신을 새기고 자신만이 접한 자연의 감흥, 분위기를 올려놓고자 한다. 대화 중에 그는 수많은 여행을 통해 자연의 맛을 찾아다닌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이 흥미로웠다. "자연의 맛"이라! 우리는 맛이나 멋이니 하는 말로 아름다움을 칭했다. 그것은 단지 시각상의 세계, 감각적 층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에서 예술은 맛, 멋이었다. 이 총체적인 것을 지시하는 단어는 온 몸으로 관여하고 깨달은 경지를 칭한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비로소 궁구하고 인간 존재의 궁극적 한계를 깨닫는 일이며 그로인해 이상적인 생애를 도모하고 그 자연과 조화로운 생의 길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인물산수화였다. 그 그림은 단지 풍경화도 아니고 자연을 재현한 것도 더더욱 아니다. 자연에서 깨달은 정신의 경지를 한 화면에 응축시켜 놓은 것이고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지를 부려놓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이고 수신적인 그림인 셈이다. 더불어 자연의 그윽한 운치가 가득 그려져 있다. 고요한 자연 속에서 식물처럼 좌정하면서 주변 풍경에 눈길을 주는 가하면 흐르는 물을 관수하고 청음하면서 고독하게, 모든 인위를 지우고 있다. 깊은 산의 덕을 헤아리고 뭇생명체들의 인연을 떠올리며 모든 존재의 연기적 그물망과 자연이 자아내는 모든 색채, 기운, 활력과 소리를 온 몸으로 흡입해내는 이다. 우리는 자연을 그렇게 대하고 받아들이고 그것과 부단한 조응으로 뒤섞여 경계 없이 녹아드는 경지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 느낌, 맛과 멋을 어떻게 형상화시킬 수 있느냐가 바로 미술의 문제이다.
강승희_새벽-21230 Day Break-21230_드라이포인트_60×90cm_2012

아마도 강승희는 나이가 들면서 전통산수화의 세계에 더욱 깊이 공명하고 있는 것 같다. 혹은 그의 심성이나 정서 자체가 한국인의 이 심상적 기억으로 유전되는 형질 속에서 강하게 배태되었음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면 고향 제주도가 그에게 각인해준 원초적인 자연 체험을 부단히 상기하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자연을 찾아 헤맨다. 무엇이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맛'이 있는 풍경을 찾아 떠난다. 더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우며 자신 속에 억압된 것들을 풀어주는 자연, 유년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한편 깊은 명상으로 유인하는 그 자연의 어느 한 순간, 장면을 찾아간다. 우연히 그 정경을 접하면 이를 사진으로 담고 스케치를 해서 작업실에서 그만의 풍경화로 번안해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장면을 기억하고 스케치한 후 이를 자신의 마음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꺼내 간결하고 인상적이면서도 그 맛이 유지되는 어떤 상황을 연출해내려 한다. 딱딱하고 견고하고 차가운 매체에 한없이 부드럽고 눅눅하며 형언하기 어려운 깊은 마음의 자락을 문질러댄다. 금속의 피부를 파 들어가 새기고 그 위에 무념무상으로 점을 찍고,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찍어가면서 자신이 보고 온 그 풍경의 맛을 구현하려 한다. 흡사 수묵화처럼 짙은 검은 색채의 번짐과 응고, 여백처럼 비워진 공간, 간결한 구성. 몇 그루의 하얀 측백나무와 덩어리로 자리한 산과 섬, 검으면서도 푸르스름한 색상으로 얼룩진 구름의 자취, 판위에 바람처럼 남겨진 스크래치 등이 어우러져 어딘지 정적이고 고독한 자연풍경을 함축적으로 안긴다. 부식동판화기법으로 '동양화처럼 그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존 동판화의 기법적 한계나 상투형에서 벗어나 표현과 기법의 또 다른 가능성과 효과를 공략하면서 이를 자신의 정서를 표현해내는 쪽으로 추려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수묵화와 유사해졌던 것 같다. 다소 클리쉐적인 이미지와 감상적인 드라마가 연상되는 상황성이 노출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재의 풍경은 강승희 본인이 지닌 근원적인 정서와 취향의 세계를 구현하는 선에서 풀어내려는 것 같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감수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만의 감수성이나 기질, 취향을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발설하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일 것이다. 좋은 그림은 결코 그 작가를 넘어서지 않는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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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형상회화 2012


2012_0509 ▶ 2012_0529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공성훈_김성남_김정욱_김지원 김진열_류준화_신학철_안창홍_이문주 이샛별_이세현_이흥덕_정복수_최경선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한국현대형상회화』 2012 展에 부쳐 ● 회화는 작가의 의식과 감성이 체화되어 드러내는 표현이자 기록이다. 기침과 같은 생리적 발산이기도, 침을 뱉는 것과 같은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형상회화'는 이런 회화적 생태를 보다 더 구체화 시킨다. 대상에 대한 단순한 재현·표현·서술의 형식을 넘어 세계와 직면하고 있는 작가적 의식과 태도를 간단없이 표명하고 발언한다. 그래서 각종 레토릭으로 드러낸 다양한 형상과, 그 형상을 구성하는 질료나 프로세스의 긴장감이 발현하는 '형상성'은 지극히 개인적이되 문화적이고, 문화적이되 정치적이고, 정치적이되 다시 개별적인 순환의 역장을 형성한다. 바로 여기에 '형상회화'가 갖는 자기진술성과 정치사회적 전언으로서의 열린 해석학적 메시지가 있다.
공성훈_촛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0×150cm_2012
김성남_there01102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1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169×116cm_2010
김지원_이륙하다_리넨에 유채_228×182cm_2008
김진열_만삭_혼합재료_2011
류준화_선인장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콘테, 석회_145×145cm_2012
신학철_한국현대사-망령_캔버스에 유채_220×120cm_2011

'한국현대형상회화'는 이미 주지하듯이 80년대 이래 우리미술이 자생적으로 온축해온 '형상성'을 뿌리로 성장하여 왔다. 그러나 [한국현대형상회화] 2012 展 참여 작가들이 보여주는 '형상성'은 그 다양성만큼 서로 다르다. 작가들은 각자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각자 특유의 어법으로 새롭게 '형상성'을 해석하고 도모한다. 특정한 이념이나 집단적인 입장에서 '형상성'을 단서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작업들은 자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별적인 정서와 인식들을 따라나서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안팎 관계가 감지되고, 우리시대 삶의 징후들과 전형들이 그 배후에서 진득하니 조망되고 반영된다.
안창홍_걸터앉은 남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97cm_2010
이문주_채석장 아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65cm_2012
이샛별_소거_캔버스에 유채_210×160cm_2010
이세현_Between Red - 108_리넨에 유채_200×200cm_2010
이흥덕_맥도날드_캔버스에 유채_132×132cm_2012
정복수_인간의번식_130.3×162cm
최경선_겨울-물놀이_162×227.3cm

회화가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시대현실과 인간존재의 길항관계에 대한 성찰의 바탕에서, 회화적 개념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갱신하려는 형상회화의 현재진행형은 앞으로도 한국현대미술의 너비와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 한국현대형상회화 운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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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환展 / CHOISOOWHAN / 崔秀煥 / installation 2012_0510 ▶ 2012_0523


최수환_Emptiness_bw_LED 플렉시글라스_124×124×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829e | 최수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0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_11:00am~05:00pm

유아트스페이스 YOO ART SPACE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번지 1,2 전시실 Tel. +82.2.544.8585 www.yooartspace.com


유아트스페이스는 검은 화면 위에 세밀한 구멍을 통해 빛이 만들어 내는 형상들을 표현하고 있는 작가 최수환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최수환_Emptiness_259_LED 플렉시글라스_121×99×3cm_2012
최수환_Emptiness_water drop_LED 플렉시글라스_103×143×3cm_2012

작가의 노동력을 근거로 한 반복과 집적으로 만들어내는 형상. 구멍을 뚫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그의 화면은 명암과 빛,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공간과 공간 사이의 빔(Emptiness)의 의미를 통해 실제와 비실제의 입체적인 착각에서 오는 감각적 환영을 경험하게 한다. ● 또한 이번에 전시되는「백자 용문호」, 전통기와의 문양 등 전통적인 사물과 형태 등은 LED와 Plexiglass 두 개의 화면의 레이어를 통해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의 공존, 그리고 동양적인 여백과 선의 의미를 미디어를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명상적이고 동양적인 사유구조에 근거한 이중적 시각을 제시한다. ● 수천 수만개의 구멍의 빛으로 새어 나오는 빛들의 이미지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공존하며 관객의 시선을 따라 미묘한 오차를 보이며 동적인 관람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 유아트스페이스
최수환_Emptiness_water_LED 플렉시글라스_55×187×3cm_2010
최수환_Emptiness_water 02_LED 플렉시글라스_27.5×102.5×3cm_2012

나의 작품 (light drawing)은 손으로 직접 검정색 아크릴 판(plexi-glass)이나 종이(museum board)에 수천 개의 구멍들을 뚫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구멍들은 공간(space)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빔(emptiness)을 의미한다. 빛(형광등 혹은 LED), 아크릴 판(plexi-glass), 종이(museum board)등으로 이루어져있는 나의 작품에서 빛(light)과 수천 개의 구멍들은 빔(emptiness)을 의미하는 동시에 형상(image)을 나타낸다. 관객들의 움직임과 빛의 어른거림 그리고 구멍의 다양한 크기들로 인해 평평한 작품표면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신비한 시각적 현상을 관객들은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관객들은 내 작품에서 사과(apple)의 형상을 보았다고 믿을 수 있으나 사실은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천 개의 구멍들을 통해 비추어지는 빛들만이 존재한다. 관객들의 사고는 실제하지도 않는 본질에 대해 너무나도 강요당하거나 혹은 고정되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빛(light)은 이러한 모순성에 있어 가장 실제적인(substantial) 동시에 가장 비실제적인(non-substantial) 공간(space)이다. 나의 작품은 관객들을 차분하게 혹은 평온하게 만드는 명상적 미(meditative aesthetic)를 그리고 관객들 자신의 의식작용, 시각적 환영을 형성하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실재(real)라고 여기고 있는 실제공간의 빔(emptiness)에 대한 인식의 견고성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수반한다.

최수환_Emptiness_Mt. Bukhan_LED 플렉시글라스_55×187×3cm_2011
최수환_Emptiness_FMOR_LED 플렉시글라스_124×124×3cm_2011

최근 작품들을 통해 미의 물질성 보다는 본질의 실체성을 다루는 것에 더욱 주목하는 나는 인공의 빛(artificial light)을 통해 보여지는 사진같은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 빛은 우리들에게 형상(image)을 파악하게 함과 동시에 빔(emptiness)을 볼 수 있게 한다. ■ 최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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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 존재의 표정


김형기展 / UNZI KIM / 金亨基 / video.installation 2012_0510 ▶ 2012_0527 / 월요일 휴관


김형기_vibration_단채널 비디오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017e | 김형기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주최 / 한빛미디어갤러리 후원 / 서울시_GL Associates_streetworks

관람시간 / 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한빛미디어갤러리 HANBIT MEDIA GALLERY 서울 중구 장교동 1-5번지 Tel. +82.2.720.1440 www.hanbitstreet.net


존재를 탐색하는 얼굴 ● 오늘은 존재의 의미를 망각한 시대이다. 모든 인간 존재자들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사회적인 체계 안에서 끊임없이 핍박받는 노예로 혹은 도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체계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의 한계 속에서 존재감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작가는 인간 존재에 대한 잔잔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 출발은 결국 인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될 때이다. 양심의 소리는 곧 존재의 소리이다. 전시는 존재에 관한 물음의 실마리를 인간 내면 분석, 더 구체적인 출발점은 얼굴의 표정에서 풀어낸다. 작가는 얼굴의 시각적 껍데기를 뚫고, 얼굴로 내면의 살아있는 감정과 진실된 자아를 제시한다. 얼굴은 인간의 신체 가운데서 가장 생명력 있는 표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라고 했듯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의복에 불과하며 단지 얼굴을 통한 영혼의 표정이 발현되는 것이라 하겠다. 작가는 자신의 심상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표정이란 형상을 통해 하나의 명확한 이미지를 만들어내 감정을 압축하여 표현한다. 작가의 얼굴은 '내 안에 있는 타자'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성질들의 전체성을 파괴하고 이를 뛰어넘는 존재 그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김형기_Be-ing-space_4채널 비디오, 4 PDP(Plasma Display Panel), 컴퓨터_2012

작가는 눈물과 기쁨, 열정과 좌절, 쾌락과 고통, 기대와 실망, 믿음과 배신, 그런 삶의 드라마 속에서 과도한 의미들을 배제하고 존재감 자체에 주목한다. 인간을 파악하고, 그 이미지를 형상화한 작품은 미디어의 시선으로 왜곡될 수 있는 부분과 강조된 과잉 현실의 외면을 최대한 제거함으로써 인간 삶의 모습이 이미지를 통해 거울처럼 드러나도록 한다. 그러한 존재 본질에 대한 그의 고민과 성찰은 인간의 얼굴이나 모습으로 비추어져 존재 대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존재론적 감성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김형기_Be-ing_emotion_단채널 비디오_2012

얼굴을 통한 존재는 형식에 갇혀 있지 않고 어떤 중성적인 존재로 머물며 스스로 여러 타인들 앞에 나타난다. 얼굴은 열려있고, 깊이를 얻으며, 스스로를 열어 둔 상태 그대로 내버려둠으로써 많은 세계와 만나 스스로를 그 안에 머물게 하여 백지와 같은 상태로 수신자와 대화하고 기록하며 그들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 경건한 사유의 태도로 현실에 깊이 관여하면서도 동시에 현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본질에 대해 묻고 또 묻는 태도를 지향한다. 사실적인 작업들 안에 있는 거리감과 냉정함은 인간이 스스로를 비추려고 하는 성찰적 태도가 담겨 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자신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하여, 그로부터 자신이 존재하는 당위성, 정당성을 찾게 된다는 연유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점은 존재에 대한 사유를 각자 스스로에 대입해 현실의 삶 가까이 끌어당겨 비춰볼 수 있는 길고 깊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김형기_Be-ing_come_단채널 비디오_2012

작가의 사유 속 여러 인물들의 얼굴은 실체가 아닌 가상적 존재로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실천적 요구가 동반된다. 물질로서의 몸, 얼굴은 관객에게 조용하면서도 날카롭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된다. 얼굴 표정에는 특유의 고요와 초연함이 스며 있다. 존재에 대한 간절함으로 표현되어 영혼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 그대로이다. 표정을 통해 내적인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며, 작가-작품 속 인물-관객은 침묵으로 마음을 나눈다. 서로의 교감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은 마음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잔잔하지만 명료하게 발휘되는 존재가치의 힘은 채찍이 되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하고, 고뇌 속으로 다시 자신을 밀어 넣는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작품 속 인물이 내부에 있는 가치를 강화하여 본질적인 인간이 될 것을 스스로 주문한다. 자기 반성과 성찰의 사이 어느 순간을 붙잡고 잇는 것처럼… 이렇게 엄숙한 표정과 공허한 시선에는 존재진리가 참답게 밝혀지고 보유된 것이다.
김형기_Be-ing_look_단채널 비디오_2012
김형기_Be-ing_come_단채널 비디오_2012

이렇게 작가의 중심사상은 '진리'와 '사유' 개념에 근거를 두고 '존재' 문제와 직결해있다고 볼 수 있다. 변형 가공된 외부의 상이 아닌 내면세계로 들어온 얼굴의 표현은 인간이 내재적으로 스스로 자기변화를 질적으로 진행하게 하고, 또 타자를 포섭하면서 제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게도 하고, 자신과 더불어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그렇게 존재에 대해 탐색하게 한다. 작가가 발송하는 전언은 그것을 받는 수신자의 머리 속 개념과 함께 작용하여 반응하는 것이다. 진리가 생기는 장소에서 다발의 진리를 얻기도 하고 또는 수양과 성찰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 크기만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그 과정과 결과는 어디까지나 각자에게 달려 있다. ■ 조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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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스 Sense


2012 유중아트센터 신진큐레이터 전시기획 공모 수상작展 2012_0510 ▶ 2012_0531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510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구현모_김가을_노영훈_장명근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유중아트센터, 유중갤러리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 유중빌딩 3층 Tel. +82.2.599.7709 www.ujungfoundation.org www.ujungartcenter.com


『센스 sense』展은 구현모, 김가을, 노영훈, 장명근 이상 4인의 작가가 시각예술 전반에 걸친 영상, 회화, 설치, 사진 작업을 통하여 각각 '부동의 시간 속에서 노래하는 나무', '생사가 공존하는 비현실을 닮은 현실', '뒤틀린 오브제의 방' 그리고 '낯선 풍경에서 발견하는 익숙한 정서' 등을 선보인다. 본 전시는 이러한 네 작가의 작품들이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관계하는 모든 것'과 '상생(相生)'하고 '공생(共生)'하는 현장에 놓일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 상생과 공생의 현장은 전시작품 간의 '시각적 조화로움'으로부터 출발하여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서, 작품과 전시 공간 사이에서 그리고 전시 공간과 관람객 사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정서적 공명의 순간을 통해 실현된다. ● 본 전시에서 의도하는 정서적 공명은 예를 들어 시각적, 청각적 접촉으로 촉발되는 관람객의 미묘한 감정이나 그로 인한 감정의 파문이다. 이는 전시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고유한 요소가 '독립적으로' 혹은 우연한 공존을 통하여 '집합적으로' 관람객의 심리를 자극함으로써 관람객-수용자의 개별적 반응을 끌어낼 때 비로소 성사될 수 있다. '센스 sense'展은 관계에 의해 공명이 이뤄지는 순간에 일렁이는 관람객들의 '심리적 울림'으로 전시장을 '울렁이는 침묵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상상 위에 위치한다. ● 전시 장소는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 네 작가의 감각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우선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동시에 마주치게 되는 정경이 잡아끄는 시선의 끝자락에는 김가을의 회화와 장명근의 사진이 장소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공간을 사이좋게 분리한다. 두 작가의 작업은 동일한 정서 위에서 서로 다르게 피어나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아있다. 혹은 그 시선이 온전히 둘에게 닿기 전, 전시장 입구로 흘러나오는 구현모의 영상이 연주하는 바흐의 Largo(Piano Concerto in F minor BMV 1056)가 먼저 관람객의 가슴을 조심스레 끌어안을 수도 있다. 김가을을 등지고 서서 바라보니 구현모와 장명근은 조용히 어울리며 다시 짝을 짓는다. ● 소리에 사로잡히거나 시선에 매혹되어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다가 숨어있는 다른 한 곳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된다. 1차적 눈길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이곳에는 몸을 뒤트는 오브제들이 관람객의 시각을 흔들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노영훈은 거짓 같은 실제로 방을 채웠고, 그 방은 스스로 고립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현모_Baum_HD 비디오_00:08:36 loop_2010

구현모는 일상의 관찰 대상으로서 발견한 나무(Baum)를 그의 앵글 안으로 끌어다 놓았다. 읊조리는 듯한 가녀린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 흐느적거리는 나무 영상은 작가의 감성과 감각에 따라 시각에 반응한 또 하나의 결과이다. 작가의 집 창가에서 바람의 선율에 하늘거리는 나무는 외부의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며 미세한 움직임을 지속하여 소리를 그려내고 빛을 품어낸다. 관람객은 시각이든, 청각이든 자신의 예민한 감각에 먼저 와 닿는 감정을 작품과의 상응점에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김가을_지하_섬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12

김가을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데생과 유화를 선보인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는 보편적인 사실 앞에서 산 자의 언어로만 쓰인 두려움의 역사는 죽은 자의 기록을 담고 있지 않다. 여기서 김가을은 산 자로서 죽은 자의 역사를 써내려가면서 극복하고 위안을 얻는다. 작가는 예민한 사유로 생사를 분리해 놓을 수 없음을 증명하고, 관람객은 작가의 조형언어가 그려낸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 정경 속에서 각자의 풍경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노영훈_Fiction-objet V_레진, 철, 멀티미디어_가변크기_2009

노영훈은 조형예술가이기에 시각과 형태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들여다보기 위해 그리고 시각을 통한 인식체계가 가변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일그러진 오브제가 가득한 방을 낳았다. 일상적 오브제들이 뒤틀려 꿈틀거리는 듯한 방은 옳다고 믿었던 혹은 의심한 적 없었던 우리의 확정적 시각이 어쩌면 실제로 그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의 뒤틀어진 오브제들의 방은 바라보는 사람의 인식 변화를 자극하기 위한 계산된 지점으로서 일종의 계시자이자 폭로자가 되는 셈이다.
장명근_Tronjan Horse_C-type pigwment print_98×134cm_2008

장명근은 2003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드림 인사이드(Dream Inside) 시리즈에서 선정한 작품을 전시한다. 작가는 사진의 표면적 형태가 이끌어 내는 서정적 분위기 너머 더 깊은 곳에 위치하며 작가의 몸을 감정적으로 지배하는 개인사에 근접해 있는 본질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작가는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대상으로부터 느낀 감정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자기 자신의 역사를 활성화하고 형태화하여 사진에 담았다. 관람객은 과연 타인의 모호한 시간으로 채워진 기억의 공간 앞에 서서 그 표면을 뚫고 안쪽 깊숙이 침투하여 시처럼 은유적이고 함축된 작가의 서정성을 본질적으로 느끼고 도달할 수 있을까? ● '센스 sense'展은 4인의 작가가 지닌 각자의 수용성(受容性)을 관람객이 수용하여 자발적 심리적 움직임을 통해 타인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을 그려 보는 시간을 제공하고자 한다. 이로써 관람객은 감성적 상황의 현장에서 자신만의 '내면 여행'에 스스로를 초대하고, 초대에 응한 관람객의 초월적 차원이동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바로 본 전시의 본격적인 시작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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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개의 사과


박영근展 / PARKYOUNGGEUN / 朴永根 / painting 2012_0509 ▶ 2012_0527


박영근_분노하다 Get angry_종이에 목탄_100×7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707e | 박영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9:00pm / 토_10:00am~06:00pm / 일_11:00am~06:00pm

금산갤러리 KEUMSAN GALLERY 서울 중구 회현동 2가 87번지 쌍용남산플래티넘 B-103호 Tel. +82.2.3789.6317 www.keumsan.org


숨은 이미지의 탐험가, 사과의 역사를 발견하다.평면에 숨은 여러 층위 최근 그리기와 보기는 평면성이란 회화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은 채, 다시 이야기와 주제를 회복한 특이한 형태를 잉태했고, 작가의 노동력은 새로운 미덕으로 보상 받는 듯 보인다. 자율성의 완전한 복귀는 아니지만, 담론이 생성될 수 있는 예술 매체로서의 위상 획득과 문학, 정치, 그리고 사회와의 연결이란 이질적 결합은 평면작업의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형식의 새로움을 위한 진화론적 노력대신 다양하고 복합적인 내용으로 통합적인 밀도를 높이는 회화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박영근_놀라다 Be astounded_종이에 목탄_100×70cm_2012

박영근 작가는 한국 회화의 다양성속에 자신의 위치를 갖는다. 그는 화면에 그리기와 벗겨내기의 상반된 행위를 적용시키고, 여러 겹의 레이어 속에서 이미지를 구사하면서, 전기 공구(샌더)나 페퍼를 이용, 색을 벗겨냄으로써 직접적인 노동의 장으로서의 화면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조각처럼 캔버스 위의 두께, 물적 양괴를 파고드는 특이한 방식으로 이미지들은 안료의 층위위로 섬세하게 부상하면서, 종교, 역사, 테크놀로지, 그리고 개인의 주변 등 다양한 주제를 보여준다. ● 캔버스 위 물감은 조각가의 대리석처럼, 깎이고 사라지는 '부재'로써 이미지를 드러낸다. 박영근 회화는 더함으로써 이미지가 형성되고 주제를 전달했던 전통적인 도그마를 해체하고, 더함과 빼기라는 상반된 방식이 공존함으로써 이미지가 스스로 발견되는 듯한 방식을 부각시킨다.
박영근_액자에 갇힌 사과 An apple is locked in frame_캔버스에 유채_80×73cm_2012

이야기와 이미지의 결합과 변형 ●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는 사과에 집중해서 전시를 구성한다. 사과는 특이하게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존재해왔다. 인류의 상징적 시작을 보여주는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은 많은 경우 사과로 묘사되었다.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인류는 저주와 함께 구원이라는 절대적 명제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사과는 인류의 죄의 시작이자 동시에 구원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 뉴턴은 사과의 낙하를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닫게 되고,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인간과 인생의 허무를 넘어서서, 지구의 멸망이 도래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세잔은 사과를 그리면서 눈에 보이는 형태로부터 회화적 비구상의 가능성, 즉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원형의 구를 발견해냈다. 결국 세잔의 사과는 미술에서 추상의 도래를 가능하게 했다.
박영근_아내와 나 My wife and myself_캔버스에 유채_116.8×195cm_2012

작가는 자신의 가족이 사는 평창동 일대가 과거 사과냄새가 진동했던 곳이라는 역사적 고증에 근거해서, 사과를 한국에 처음으로 수입했다는 안평대군, 못생기고 팔기 어려운 상처 난 사과를 주로 샀던 박수근 등 한국적 맥락에서의 사과에 얽힌 인물들을 그렸다. ● 사과로 대표되는 21세기 아이콘, 스티브 잡스,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여 생존 공간으로 내쫓긴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과 달콤한 열매의 유혹으로 둘러 쌓인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대표하는 작가의 자화상은 실은 특별한 공통점이 없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누드로 표현된 작가 부부의 초상화는 사과를 통해 결핍을 거부하는 심리적 열정,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과 함께 유혹 앞에 무기력한 순수한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부터 실존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까지 작가에게 사과는 사람과 사회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매개로서 특별하게 작동 하고 있다.
박영근_매달리다 Hang on_캔버스에 유채_116.8×240cm_2012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체적인 하루의 일과와 연결되기도 하고, 때로는 좀더 거대한 상징성을 담보하기도 한다. 그것이 일상적이든, 상징적이든 작가에게 사과는 하나의 기호로서 작동하고 있다. 작가는 문자를 그림 아래 배치하는데, 글은 이미지와 크게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다. 텍스트는 그림처럼 강력한 기호로 작용하지만, 오히려 '그려진' 글자들이 하나의 이미지로서 그림 안에 통합된다. 기호의 집합체로서 그의 작품 속 사과와 인물들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이미지의 연속으로 풀어지면서 해석되어진다. 이런 이미지 연관성의 시각적 함축을 내포한 그의 작품은 관객들에게도 마치 자신만의 사과를 발견하고, 무언가를 깨닫기를 촉구하는 듯 하다.
박영근_열 두개의 사과 Twelve apples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2

기호 속 이미지들의 연속성, 회화의 리듬으로 재현되다 ● 파편처럼 보였던 그림의 일부는 작가의 일상과 사고 과정의 증거로, 시간적 흔적들의 층위를 다룬다는 점에서 매우 기록적이지만, 작품은 완전히 물적이지도 않다. 이것은 사과를 선택한 작가의 의도와도 관련 있어 보인다. ● 사과는 가장 보편적인 식재료로서 특정한 계층이나 취향과 크게 상관 없는 과일이다. 동시에 역사, 종교, 철학, 문화 속에서의 주요 키워드의 탄생과도 관련 있다. 심오한 철학이자 가장 가벼운 일상의 양면을 보여주는 복합적 의미체로서, 미술과 문화 안에서도 같은 역할을 계속 하고 있다고 하겠다. ● 작가는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그의 종교, 예술적 감성이나 믿음, 기억 등을 사과라는 대상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 개인적인 서사는 곧 작가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의 화면 안 형상의 윤곽선은 그런 작가의 심리적 파장처럼 지극히 율동적이다. 작가의 사적 영역 안에서 생명력을 얻은, 그만의 계보학을 드러내는 작품은 작가의 관찰과 표현의 은유적인 결과인 것이다.
박영근_열네개의 사과 Fourteen apples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2

층위를 벗겨내던 것에서 입히고 더하는 것으로 ● 과거에 그의 작품이 물리적 층위의 이탈 - dislocation- 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다양한 내용과 이질적인 시각적 이미지와 서사적 문구의 결합으로 층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옮겨왔다. 그의 이야기는 마그리트의 언어작품들처럼, 언어기호와 시각기호 간의 충돌과 합의, 분절과 보완의 긴장을 제공하면서 기호로서의 이미지의 실체를 강조하고 있다. 동시에 주제가 갖는 무게도 덜어내지 않는다. ● 박영근 작가는 발견의 순간, 영감의 획득을 얻게 되는 매개체로서 사과에 접근한다. 그의 시도는 캔버스 위의 '부재를 통한 표현'과 문학적 이야기의 결합으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온전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작가의 내면과 주변의 이미지들이 관객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은 그 기호적 특성의 분명함 때문으로 보인다. ● 작가의 서사(敍事)가 홍수처럼 밀려드는 이 시대의 많은 이미지들 속에서, 그들과 섞임으로써 의미를 생산하는 동시에 그것을 잃을 수 있는 지점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중적 단면의 교차점에서, 작가의 선택은 이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기술과 그의 신념으로 확대 또는 변형 될 것으로 보인다. ■ 진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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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Myths


베로니카 베일리展 / Veronica Bailey / photography 2012_0510 ▶ 2012_0608 / 일,월요일 휴관


Veronica Bailey_Olympus_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가인갤러리 GAAIN GALLE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512-2번지 Tel. +82.2.394.3631 www.gaainart.com


편재하는 현대적 신화에 대한 사진적 비판 ● "나는 언젠가 이발소에 갔었다. 거기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파리-마치(Paris-Match)』라는 잡지 한 권을 내밀었다. 그 잡지의 표지에는, 프랑스 군복을 입은 흑인 청년이 눈을 약간 치켜 뜬 채 주름진 프랑스 삼색 국기를 주시하면서 군대식으로 경례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순진하건 순진하지 않건 간에, 나는 이 표지의 이미지가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프랑스는 위대한 제국이며, 프랑스의 모든 자손들은 인종 차별 없이 프랑스 국기 아래에서 평등하게 군에 복무한다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유명한 그의 저서 『신화론(Mythologies)』(1957)에서 오늘날 무수히 많은 사회 현상 가운데 작동하는 '현대적 신화'를 발견하고 '탈신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앞서 진심을 다해 경례를 올리는 흑인 청년의 이미지는 사실상 프랑스 제국주의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일종의 신화로서, 우리는 그러한 '외연'과 그 안에 감춰진 '함의'를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영국 사진작가 베로니카 베일리(Veronica Bailey)의 신작 「현대 신화(Modern Myths)」(2011)는 이러한 바르트의 신화론과 밀접히 닿아 있다. 베일리는 현존하는 인류의 모든 기원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신들을 대표적인 현대 신화인 미디어, 그 중에서도 전통적 미디어인 신문으로 재해석한다. 작가가 포착한 사진의 피사체는 신문을 말아 쥐었을 때의 단면들로, 신문의 종이색, 매수, 말아 쥔 강도나 모양 등에 따라 그 이미지 또한 달라진다. 그 결과 각기 다른 열 두 신문의 이미지는 상징하는 바가 각기 다른 올림포스의 열 두 신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검은색 배경 가운데 놓인 신문들은 그 자체로 '정물화'임에도 이미지와 짝을 이루는 각 신의 이름을 가리키는 제목과 함께 일종의 '초상화'로 보여지게 된다. 아프로디테, 아폴로, 아레스, 아르테미스, 아테나, 데메테르, 헤파이스토스, 헤라, 헤르메스, 헤스티아, 포세이돈, 제우스가 그 주인공이다. 모든 기호에서 기표와 기의를 연결하려는 우리의 해독적 습관은 자연스럽게 신문의 이미지와 각 신의 상징적 의미를 연결시키고, 그러한 노력은 때로는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여러 겹의 종이들이 풍성하게 겹쳐져 부드러운 이중의 곡선이 강조된 이미지는 여성, 결혼, 모성의 여신인 헤라이며 종이의 홑겹이 아닌 스테이플러로 묶은 부분이 드러나 두텁고 강한 선들이 강조되고 안쪽에 붉은 색이 보이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미지와 텍스트의 대응은 작가의 주관적인 인상과 직관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마치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 관계처럼 전적으로 임의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를 왕래하며 둘 사이의 관계를 추론하는 것은 『현대 신화』를 감상하는 하나의 유희적 방식일 수 있으나 작가의 본질적인 의도는 아닌 셈이다. 오히려 작가는 그러한 기표와 기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하나의 '신화'로 보고 암묵적으로 비판하려는 쪽에 더 가깝다.
Veronica Bailey_Hera[Goddess of Women, Marriage and Motherhood]_ 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Veronica Bailey_Hephaestus[God of Fire and the Forge]_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Veronica Bailey_Hestia[Goddess of the Hearth and Home]_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본격적으로 베일리가 고대 신화를 끌어들여 전달하려는 신문에 대한 탈신화의 시도는 두 가지 층위에서 일어난다. 첫째, 신문을 '읽을 수 없는 텍스트'로 제시함으로써 무력화하는 것이다. 작가는 신문의 매체적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로 제시함으로써, 미디어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리라는 보편적인 믿음을 비판한다. 우리는 오늘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접할 수 있다고 믿지만, 사실상 미디어의 발달은 자본이나 권력과의 결탁으로 인한 왜곡과 더 많은 조작을 수반한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는 미디어가 전달하는 수많은 현상들 이면에 우리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강변한다. 한편, 베일리의 『현대 신화』가 구사하는 탈신화의 두 번째 층위는 신문을 '물질적 본성으로 직면'하게 함으로써 미디어의 절대적 권력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종이의 질감과 신문 특유의 가장자리 마감 부분까지 디테일이 살아있는 고화질의 클로즈업 이미지를 통해 신문이란 하루(또는 한 주)의 소식을 전달하는 용도가 다 하면 폐기되는 값싼 종이일 뿐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미디어의 신화에 흠집을 내는 것이다. ● 『현대 신화』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지점은 열두 신 외에 또 다른 이미지, 즉 그들의 신전이 있던 산의 이름을 딴 「올림포스」라는 제목의 사진에 있다. 올림포스가 대신한 그리스 신화의 열세 번째 신의 자리는 원래 지하세계 왕좌에 머물러 있던 '죽음의 왕' 하이데스의 것이다. 베일리는 이 '죽음의 자리'를 9.11 테러 사진이 1면에 실린 『파이낸셜 타임즈』로 대신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용(텍스트가 아닌 이미지지만)을 볼 수 있는 「올림포스」는 나머지 열 두 이미지를 대신해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 그 중에서도 뉴욕 맨해튼, 그 중에서도 증권가 한 가운데 자리한 상징적인 건물에 대한 공격으로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는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공격이자 완전무결해 보이는 자본주의 신화의 파열을 함의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가 폭발로 건물이 불타고 있는 여타 신문의 이미지와 달리, 건물이 붕괴되어 사라지고 없는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폭발 사진을 접할 때의 비현실성과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난 뒤 사후적 지표(index)로서 사건을 받아들이게 하는 독특한 경험을 유발한다. 베일리는 그 이미지가 "죽음을 '하나의 공간(a space)'으로 받아들이게 하였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 열세 번째 사진을 신이 아닌 신이 머물렀던 장소로 대치하였을지 모른다. 사실상 이러한 '부재의 현전'이야말로 다름 아닌 신화의 본성이다. 작가가 인상 깊게 기억하는 색이 바라고 신체 일부분이 훼손된 고대 그리스 조각의 모습은 이러한 신화의 본성을 잘 말해준다. 현재의 상태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신화의 신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현전하는 것처럼, 역사적인 발생의 기원과 무관하게 지금의 그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하는 것이 바로 신화의 작동원리이기 때문이다.
Veronica Bailey_Apollo[God of Sun, Light, Truth, Music and Poetry]_ 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Veronica Bailey_Zeus[God of sky, thunder and justice]_durst lambda print on fuji archival paper_2010

『현대 신화』와 유사한 시기 제작된 베일리의 또 다른 사진연작 「헤르메스 베이비(Hermes Baby)」(작품제목인 '헤르메스 베이비'는 히긴스가 당시 전장에서 사용한 타자기 모델명이자, 베일리가 해당 작품에 사용한 서체인 '베이비 헤르메스'와도 관련된다.)(2011)는 대표적인 현대 신화 중 하나인 전쟁을 주제로 한 작업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자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라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전쟁을 감행했고, 다수의 국민은 나라가 내세운 전쟁의 공익성과 정당성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쟁의 신화는 실질적인 테러와 무관한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가고, 그 가운데서도 여전히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 수 있었다. 미국의 경우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은 신화로서 유지되어 왔으며, 오늘날 단순한 무력충돌뿐 아니라 힘의 논리에 의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문화제국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여전히 일정한 신화로서 작동하고 있음에 우리 모두는 전쟁의 신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헤르베스 베이비」는 최초의 여성 퓰리처 상 수상자인 미국인 종군기자 마그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한국전쟁의 경험을 적은 책(마그리트 히긴스, 『한국 전쟁: 한 여성 종군기자의 보고서(War in Korea: The Report of a Woman Combat Correspondent)』(Doubleday & Co, Inc, New York, 1951))을 소재로 한 작업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두 세 단어의 구절을 발췌하여 '베이비 헤르메스' 라는 특정 서체로 적고, 글자가 적힌 디지털 이미지를 35mm 아날로그 필름으로 전환해 암실에서 수작업으로 현상하고 명함크기의 1950년대 빈티지 인화지에 인화하였다. 그리고 넉 장의 사진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장방형으로 하나의 액자에 배치하였다.(「헤르메스 베이비」는 다음과 같이 넉 장의 사진이 하나로 묶인 네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그룹 1]: 「얼어 죽은(Frozen Dead)」, 바닐라 아이스크림(Vanilla-Ice-Cream), 녹색 병사(Green Soldiers), 웅장한 지옥(Gallant Hell), [그룹 2]: 「뒤돌아 도망치라(Turn and Bolt)」, 「묘지 같은 참호(Graveyard Foxholes)」, 「완벽한 표적(Perfect Target)」, 「가망 없는 승산(Hopeless Odds)」, [그룹 3]: 「쇄도하는 공포(Rush of Fear)」, 「붉은 껍데기(Red Shells)」, 「악몽 같은 샛길(Nightmare Alley)」, 「가혹한 진실(Bruising Truth)」, [그룹 4]: 「위험 가능성(Possible Danger)」, 「보랏빛 심장(A Purple Heart)」, 「냉혹하게(In Cold Blood)」, 「반으로 찢어진(Blew in Half)」.) ● 이 사진들은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작가 자신의 이전 작업은 물론 여타의 사진들과 차별화된다. 첫째, 카메라 촬영이 아닌 빛의 노출을 통해 상을 얻는 고유의 제작 방식이다. 카메라 촬영에 작가의 제작 행위가 집중되는 대부분의 대형 디지털 사진과 달리, 이 소형 아날로그 사진은 - 레이요그램이나 솔라리제이션 등 빛에 노출하여 상을 얻는 일부 전통적인 사진기법들처럼 – 필름에 상을 안착시키고 인화지에 이미지를 얻어내는 후반 작업에 무게가 실린다. 특히 이 작업에서 작가는 1950년대 기록된 전쟁에 관한 텍스트를 당시 생산된 인화지에 재현함으로써 내용과 물질의 양 측면에서 과거에 대한 현재의 시대적 개입을 시도한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작가의 제작행위는 내용상 창작이 아닌 발췌이며, 형식상 촬영이 아닌 필름전환, 현상, 인화라는 점에서 소극적인 방식에 국한된다. 그러나 작가의 현재적 개입으로 인해 과거 전쟁의 내용이 다른 맥락에서 전달되고 과거 생산된 종이가 오늘날 새롭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 텍스트와 종이는 분명 과거에 발생한 역사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전히 현전한다는 점에서 신화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 맥락과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탈신화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Veronica Bailey_「뒤돌아 도망치라Turn and Bolt」, 「묘지 같은 참호Graveyard Foxholes」, 「완벽한 표적Perfect Target」, 「가망 없는 승산Hopeless Odds」_ ilford Bromide paper grade 4 - c.1950 vintage, printed by artist from 35m slide transparancy_ 29.9×33cm_2011 (Ed. of 5)

사실상 제작방식보다 중요한 「헤르메스 베이비」의 차별점은 사진의 피사체(subject)가 텍스트라는 사실이다.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 즉 도상기호가 아닌 문자기호가 그림이나 사진에 재현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것은 관습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닮음을 전제로 한 도상기호와 달리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인 문자기호는 지시체가 지닌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문자기호는 그 의미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달라지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심상과 상상력의 측면에서 훨씬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특히 「헤르메스 베이비」의 경우 베일리가 선택한 '녹색 병사', '보랏빛 심장', '붉은 껍데기' 등의 색과 관련된 표현이나, '뒤돌아 도망치라' '악몽 같은 샛길' '묘지 같은 참호' 등의 상황 묘사는 보는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심상은 직접적으로 묘사된 이미지보다 훨씬 폭넓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한다. 베일리는 이러한 텍스트의 효과를 인화지의 형태와 결합하여 배가시킨다. 인화 과정에서 끝이 제멋대로 말려들어간 종이의 모양은 그것이 단순히 종이가 아닌 깃발이나 손수건처럼 보이게 한다. 그것은 종전을 알리는 흰 깃발이나 전장으로 향하는 병사를 보내면서 가족이 흔들었을 손수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자체 특정한 정서를 자아내는 일종의 오브제로서 이 사진들은 전쟁과 관련된 텍스트와 겹쳐져 더욱 다양한 층위의 심상과 상상력을 자아낸다. 흥미로운 것은 베일리가 선택한 텍스트의 내용과 서체의 형태, 그리고 그것이 흰 배경 안에 고립되어 제시되는 방식이 잔혹한 전쟁의 현실을 가벼운 수사적 표현으로 희석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베일리가 전쟁의 탈신화를 꾀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군인들이 공유한 영예와 자만감의 집단의식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정부의 입장을 개인적으로 내면화한 허위의식에 불과함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상 그 젊은이들은 그러한 대의명분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전쟁에 충실히 임할 뿐이라는, 이른바 '바닐라 아이스크림'의 신화를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어 죽은'이라는 구절 바로 옆에서 발견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주는 상충적 느낌은 그야말로 이러한 전쟁의 신화를 대변한다. 바르트는 "신화는 곧 발화(speech)"라고 말한다. 신화란 특정 대상이나 소재에 국한 된 것이 아닌 모든 "의사소통의 체계"와 "의미작용의 양식"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바르트는 신화가 "역사에 의해 선택된 발화"인 점을 강조한다. 베일리가 지금까지 사진의 소재로 삼아 온 것들, 즉 역사적 인물의 서가에 꽂힌 책이나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최근의 특정 순간을 기록한 신문이나 과거 전쟁의 경험을 적은 텍스트는 모두 '역사에 의해 선택된 발화'와 관련된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것들 대부분이 발화의 내용에 해당하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고 작가의 최소한의 개입에 의해 새로운 시각적 기호로 제시되거나, 발화의 내용을 드러낼 때조차 전혀 다른 맥락의 의미로 전환되어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일관된 방식은 텍스트와 이미지, 문자기호와 도상기호의 관계에 관한 사진적 탐구는 물론, 현대적 신화의 편재와 그러한 신화의 허상을 암묵적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것이야말로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성과이며, 베일리는 바르트가 이론을 통해 행한 그 일을 예술이라는 다른 언어로 성취해가고 있는 셈이다. 그 세계는 명료하고도 풍요롭다. ■ 신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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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근 개인전 《중간인(中間人)》   
   아트선재센터(02-733-8945)
   2012-05-03 ~ 2012-07-17

 

아트선재센터는 2012년 5월 3일부터 6월 17일까지 오형근 개인전 《중간인(中間人)》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중간인>은 군인의 초상사진 연작으로, 개인으로서 일반 사병의 모습을 주목한 작품이다. 6?25 발발 이후 62년 동안 멈춘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대한민국 군(軍)의 특수성을 반영한 집단 안에서 개인이 강조된 군인의 초상사진이 예술작품으로 제작된 전례가 없다. 하지만 오형근은 국방부의 도움으로 지난 3년여 간 육?해?공군에서 촬영 작업을 하였고, 군이라는 집단 속 개인을 드러내는 <중간인>을 완성하였다.
현대미술에서 주목을 받으며 사회적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아줌마》(아트선재센터, 1999)전 이후, 오형근은 <아줌마>, <소녀연기>, <화장소녀>, 즉 소위 여성 3부작이라 불리는 작업을 통해 다양한 세대의 여성의 초상을 다루며 사회적 관념과 선입견이 만든 집단에서 이들이 느끼는 불안을 포착해왔다. 반면에 이번 <중간인>에서는 군인의 초상을 통해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간인>의 군인들은 실체적인 집단인 군에서 ‘나’와 ‘우리’, ‘개인’과 ‘집단’ 사이의 ‘중간인’으로서 갈등하며 느끼는 불안을 드러낸다.
전시 기간동안 1일 4회 도슨트 안내가 이뤄지고, 2012년 6월 4일 오후 4시에 오형근 작가의 아티스트 토크가 예정되어 있다. 본 전시 개최와 함께 <중간인> 연작을 담은 동명의 모노그래프가 출간된다. 전시 작품은 2012년 9월 12일부터 11월 20일까지 부산에 위치한 고은사진미술관으로 순회될 예정이다.


오형근의 눈으로 바라본 군인

오형근이 <아줌마>, <소녀연기>, <화장소녀> 등 이전의 작업에서 다양한 세대의 여성을 다루었다면, 이번 <중간인> 연작에서는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대상의 성별 전환과 더불어, 이전까지 다룬 통상적인 관념으로 모인 인물 집단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가 강요하는 ‘우리’의 개념을 탐구하기 위해 전형적이고 강제적인 집단인 군을 주목하였다. 하지만 오형근은 대한민국 사회의 남성성을 대표하는 의무적 집단인 군에서 사진작업을 진행하면서, 개개인으로서의 군인의 모습을 마주하며 사회가 강요하는 `우리`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한다. 때문에 오형근이 포착한 군인의 초상은 한국 사회의 ‘우리’가 아닌, ‘나`와 `우리`사이의 ‘중간인’으로서 느끼는 불안감을 담고 있다.

오형근은 철저한 외부자적 시점에서 극단적인 조명이나 캐스팅, 혹은 상황을 배제하여 군을 부정적으로 비판하지도 않고, 긍정적으로 표상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작가의 중립적인 자세는 중간 밝기의 조명과 중간 계조의 사진적 장치로 이어진다. 중간 계조의 사진적 장치는 오형근의 중립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모호한 ‘중간성’을 지닌 ‘중간인’에 대한 사진적 재현이기도 하다. 한편 이전 연작의 초상사진이 인물을 집중적으로 재현했던 반면, <중간인> 연작에서는 사진의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중간인>에서 배경은 모티브이자 ‘중간인’로서의 군인의 고립감과 격리감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의도적으로 병치(Juxtaposition)한 중요한 미쟝센(Mise-en-Scène) 이다.

오형근에 의하면 군을 ‘중간인’으로 바라보는 그의 작가적 관점은 단지 그의 반응일뿐 군이라는 대상의 본질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문제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지 대상이 무엇인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의 군인 사진은 관객의 성별, 계층, 연령, 군필 여부 등 보는 이의 개인적, 사회적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반향을 일으킨다.

<중간인>에서 드러나는 개인의 초상

<중간인> 연작은 군이라는 집단에서 촬영되었다. 하지만 작품은 군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 내재한 ‘우리`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관념 안에서 갈등하는 개인을 조명한다. 따라서 오형근의 사진 속 군인들은 군인으로서 용맹한 전형성이 아닌, 개인으로서 느끼는 `중간자’적 불안을 드러낸다.

《중간인》전은 크게 세가지 섹션로 나뉘어 개인으로 나타나는 군인의 초상을 선보인다.

아트선재센터 2층에서는 밝은 분위기의 군인들의 초상을 선보인다. 이들은 환하고 밝게 표현되나, 오히려 밝기때문에 모호한 고립감을 드러내고 있고, 작가가 병치한 배경은 이러한 미묘한 느낌을 더욱 두드러지게 재현한다.

아트선재센터 3층에서는 2층의 밝은 느낌의 군인들과 대조되는 어두운 분위기의 군인들의 초상이 한 섹션을 이룬다. 이들은 갈등과 고민을 드러내며, ‘나’와 ‘우리’ 사이에서 느끼는 불안과 격리감을 전달한다. 또한 음울한 색조의 배경은 중요한 미쟝센으로 역할한다.

마지막으로 오형근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는 초상사진 섹션이 있다. 아트선재센터 2층 초상사진 방에서는 인물에 집중한 전통적인 초상사진을 선보인다. 앞의 두 섹션의 사진 속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반면에, 초상사진 섹션에서는 보다 인물을 주목한 사진들이 전시된다. 인물의 솜털까지 보일 정도로 디테일한 초상사진은 대상 인물에 초점을 맞춰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인물의 내러티브를 드러낸다.

오형근의 사진 속 군인들은 눈에 띄게 특이하지 않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하고 ‘중간’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오형근은 이들에게서 미세하고 미묘한 인간 본연으로서의 갈등과 불안을 발견하고, 이들이 집단 속에서 개인으로서 느끼는 정서를 포착하여 <중간인> 연작으로 완성하였다.

글 : 사무소(Space for Contemporary Art)




 
2012.05.08 22:45:36 / Good : 349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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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희展






저멀리, 또 가까이
4. 25 ~ 5. 13 갤러리현대 강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캔버스에 유채 183×218cm 2012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정연희의 개인전이 열린다. 작가는 어린 시절 전쟁 상황 속에서 도시와 국가의 죽음, 부활, 동서양의 문화 충돌을 경험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현대사회의 정신적 빈곤
, 만연한 병폐라는 문제를 ‘자 연’이라는 대조적 존재를 통해 치유하고자 했으며, 그 중에서도 ‘우주’를 향한 관심을 키우게 됐다. 작가가 생각하는 우주는 자연의 모체이자 시작점이고, 죽음 이후 우리가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회화 작품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며, 그 안에 교회나 배의 설계도가 별자리처럼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의 몸을 감싸는 건축적 공간, 육체의 안식처를 형상화한다. 작가의 작품은 보는 이들을 현실에서 이상으로,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인도하고자 한다.

정연희
1945년출생. 서울대 회화과 졸업 및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 졸업.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1985), 국립현대미술관(1988), 캘리포니아 트라이톤 미술관(1991), 뉴욕 성 피터 성당(2000), 환기미술관( 2007), 루스 브룬스타인 갤러리(샌프란시스코 2011)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 개최. 인천비엔날레(2007) 등 다수의 국내외 단체전 및 행사 참여.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640-6번지 아트타워
www.galleryhyundai.com
02)5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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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혜展







4. 19 ~ 5. 20 갤러리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cm 2012






김 은혜가 두 번째 개인전을 연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어린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그린 회화 <보다> 연작 4점을 선보인다. 김은혜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유년 시절의 기억을 소재로 작업을 지속해 왔다. 그가 그린 어린아이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하지만 그 가운데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작가는 얼굴을 그리기 전에 커다란 새를 배경에 그려 2개의 이미지가 희미하게 겹쳐지게 했다. 그에게 새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강렬하게 각인된 두려움의 대상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캔버스를 거울로 삼아 바라보면서, 그 두려움과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김은혜 1984년 출생. 2005년 수원대 서양화과 졸업. 갤러리2에서 2009년, 2012년 개인전 개최. (화성 고운미술관) 등 단체전 참여.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118-17 네이쳐포엠 315호  
www.gallery2.co.kr
02)3448-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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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미학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브레송展 “결정적 순간”
 
2012.05.19 (토) ~ 2012.09.02 (일)
세종 미술관1
오전11시~오후8시30분 
02-2277-2438
성인 12,000 (단체 20명 이상 10,000)

시대의 눈이 사라졌다. 95세를 일기로 20세기의 대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2004년 8월 3일 운명했다. 당시 르몽드,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일간지들은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의 전설적인 사진작가의 죽음을 일제히 알렸다. 프랑스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추모성명에서 “시대의 진정한 증인으로서 그는 정열적으로 20세기를 찍으면서, 자신의 범 우주적인 불멸의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의 변화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경의를 표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이 세계 순회 회고전은 사진을 기록에서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거장이 전 생애에 걸쳐 포착한 사진미학 정점의 작품전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이 전시가 베를린에서 순회중인 2004년 8월에 사망하였다.)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공동창립자이기도 한 카르티에-브레송은 근대사진의 최고봉이자 현대사진의 문을 연 영상사진의 아버지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뉴스(News)중심의 사건에서 해방되어 피처(Feature) 중심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채택된 영상의 일상성으로 삶에 대한 개혁보다 인식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영상의 사유화와 개인적, 주관적 시각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출현에 길을 연 선구자로서 자기 감정에 충실한 자기 세계의 사진을 추구하였다. 그의 독특한 르포르타주 접근은 동시대의 세계 문화와 시각예술에 있어서 불멸의 고전을 남겼다. 본 전시는 카르티에-브레송의 방대한 사진서고에서 엄선된 265작품과 출판물,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이나 각지를 취재할 때의 기자증, 편지와 같은 다양한 기념물이 함께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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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낯섦     
    

            카이스갤러리(02-511-0668)
            2012-04-24 ~ 2012-05-25
            2012-04-24 오후 17시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공간은 관습적 사고로 인해 새로울 것 없는 단조로운 풍경이 된다. 이렇게 익숙한 오늘의 찰나도 작가들에게는 내면의 세계를 반영하는 창조적 실천의 계기가 된다. 7명의 사진 작가로 구성 된 이번 전시<익숙한 낯섦>은 사회에 관한 또는 정치적 이슈를 담은 거시적 시각과 주제에 대한 담론은 뒤로하고자 한다. 비판적 거리감을 넘어선 예술의 가장 미시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 섬세함을 보여주는 작가 개인의 예술 본질에 대한 숭고한 악수의 현장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서로 다른 연결 고리로 맺어져 낯섦이란 우연한 접근의 통로를 제공하고 낯설고도 익숙한 화면 안에 숨겨지고 드러난 연결고리는 관객과의 소통의 실마리를 능동적으로 제시할 것 이다.

이번 전시는 이미지의 조합과 재배열이라는 디지털적인 요소를 개입시킴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 시각적 유희를 선사하는 류정민, 원성원, 장석준, 안준과 아날로그적 섬세함으로 인해 디지털요소의 개입에 대한 의구심을 자아내는 박형근, 이명호, 하형선의 작품을 소개한다.

글 : 손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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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 幕 방병상 사진전   
    

            갤러리조선(02-723-7133)
            2012-05-16 ~ 2012-06-09

방병상은 2006년부터 겨울동안에 그날의 기온, 풍향, 풍속, 습도에 따라 달라지는 수증기의 형태를 기록해왔다.
수증기는 순수한 상태일 때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항상 머물고 있지만 기후의 변화에 따라 김, 안개, 이슬, 구름, 비 등으로 우리 눈에 보여 지게 되는데 이렇게 기록된 기후에 대한 정보는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의 흐름 및 작용은 비가시적인 것에서 부터가 아니라 대상에 주어졌을 때 감각되어진다. 변화무쌍하게 솟아오르는 수증기처럼 자연이 명료하게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우리의 생각은 수많은 착란을 겪게 되고, 그때 우리의 몸과 마음의 감정변화를 주며 대상을 바라보는 태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가시적으로 다가온 세계의 본질은 비로소 공감 가능한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사진이 가지고 있는 즉물적이고 기계적인 기능에 충실한 기록매체로서의 사진을 활용함과 동시에 자신이 보고자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펼쳐진 막(幕)이면의 이야기, 현실 너머의 세계, 이전과 새로운 것이 만들어내는 진행과정에서 보여 지는 구성방식을 통해 다양한 의미작용을 유도하고자한다.
그런 면에서 대상의 의미가 확연하게 변하는 곳이 오늘날 현실적인 풍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곳은 한적한 시골보다는 대도시일 것이며, 그 속에서 자유로이 배회하는 군중들일 것이고, 여가를 위해 생겨나는 휴식공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화가 막 진행 중인 개발지역, 그 경계지점에서 구조적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바라보는 풍경은 결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들이다. 회색빛 삶의 배경이 된 자연은 인간을 위해 만든 인위적인 것과 화해로이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하며 존재한다. 여기서 인간이나 자연이 맺고 있는 부정적 시선에 대해 헤아려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작가는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회한을 굳이 보여주려 하지는 않는다.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들 거칠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원초적인 자연들과 파헤쳐진 공사장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현장들을 구조적으로 가르는 막이 존재하는 듯 하며, 디지털 리터칭 작업으로 재구성된 풍경들은 로맨틱한 시적 이념이 묻어난 듯 우리의 망막에 와 맺힌다.
작가가 자신의 이념에 비춰진 세계를 깊고 풍부하게 비현실적인 차원에서 구축하고자 한 이러한 시도는 기후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리하는 풍경의 인상을 먹의 농담으로 담아내고자 했던 전통적 산수화 작업에 다름 아니며 톤과 색감의 조정만으로 표현한 컬러사진작업을 통해 우리의 인식과 현실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오래전 자연을 풍류하고자 했던 관점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달리 보고자 했음이다.
수증기가 온도가 다른 공기층을 사이에 두고 기화와 액화를 반복하듯 자연이 침식당한 만큼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자연은 인간이 채우지 못한 과거의 향수로 상품화 되어 도시 안에 다시 자연적인 분위기로 연출된 또 다른 풍경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것이다. 자연 앞에서 발 빠른 세계의 구축은 진보를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채로운 변화가 있을 뿐이다. 그 변화만큼 본다고 하는 의미역시 우리들 의식 속에 다채롭게 순환할 것이다.


글 : 이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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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중호작가 개인전 <타인의취향, Le Gout Des Autres, The Taste Of Others, 1999>   
    

            #원앤제이갤러리(02-745-1647)
            2012-05-03 ~ 2012-05-23

염중호와 관계 `있는/없는` 이야기, 그 사이 어딘가에서
염중호는 자신이 기계가 아닌 `자신의 눈`이 사물(대상/사건)과 마주했던 순간을 기록했다. 염중호는 `무엇을 찍었다`보다는 `무엇을 보았다`에 치중한다.
염중호는 2007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개인전 <새로운 경계>전을 개최했다.
염중호는 이 전시에서 서울, 파리, 암스테르담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을 선보였다.
염중호는 관광하듯 자신의 일상을 두리번거리기도 하고, 어슬렁거리면서 소소한 일상의 사물(대상/사건)을 채집했다.
염중호는 비루한 일상에서 발견한 사물(대상/사물)의 소소한 이야기를 한다.
염중호는 대상에 내재된 문화적 혹은 공간적 특수성은 사진 외부로 밀어냈다.
염중호는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물(대상/사건) 그 자체만을 프레임을 안착시켰다.
염중호는 <새로운 경계>에서 사진을 `숨겨` 놓았다.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았다는 직접적 의미가 아니라, 전시 디스플레이 방식에서 표출된 은유적 표현이다. 작가가 일상에서 사물(대상/사건)을 발견했듯이 관객이 사진을 발견하도록 한다. 하얀 벽면을 마구잡이로 유영하듯 배치된, 그리고 하얀 벽면을 그대로 노출한 작은 사진을 보기 위해 관객은 `행동`을 해야 한다.
염중호는 2009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전을 개최했다.
염중호는 사물을 은근슬쩍 재등장 시킨다. 배 터진 모래주머니는 간판의 지지대로 사용되기도 하며, 그저 도로 한 켠에 모여 있기도 한다.
염중호는 이러한 사물의 재등장을 통해 단독성을 획득한 사진과 사진의 관계를 엮어 특별한 이야기를 구축한다.
염중호는 그렇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전면에 배치하지는 않는다. 관객에게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단서 정도만을 제공한다.
염중호는 자신이 구축한 이야기는 `사진 작품`이 아닌 `사진집`을 통해 제시했다. `사진집`은 전시장 안으로 들어와 조명을 받으면서 그 자체로 `작품`이 되었다.
염중호는 이 전시를 `작품(사진집)` 안에 `작품(사진)`이 놓여 있는 (혹은 `작품(사진)` 밖에 `작품(사진집)`이 있는) 구조로 만들었다.
염중호는 이 전시의 작품(사진) 제목으로, 작품(사진집)의 페이지를 사용했다. 이는 작품(사진집)을 벗어나 있기에 무의미해보인다. 그러나 이를 통해 관객은 비선형적 구조와 마주하게 된다.
염중호는 선형적 이야기를 제시하지만,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에 동조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시작이 될 수는 있지만, 그 끝을 함께 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염중호는 관객들 각자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고 노닐기를 원한다. 마치 자신이 일상을 어슬렁거리며 이 사진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그것은 작가의 이야기일수도 있으며, 그것과 상관없는 관객 스스로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염중호는 2012년 원앤제이갤러리에서 <타인의 취향>전을 개최한다.
염중호는 이 전시에서 다른 작가(artus, lionel, 노충현, 서동욱, 최대진)의 취향을 묻는다. 염중호는 이 작가들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내고, 그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
염중호는 이 작가들을 의 관객과 동일시한다. 이전 전시에서는 관객이 구축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들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염중호는 다른 작가들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신도 그들의 작업에 개입하고자 한다.
염중호는 자신의 일상을 다른 작가의 비일상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다른 작가의 일상을 자신의 비일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순환구조를 통해 타인의 처지(나아가 취향)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염중호는 나에게도 사진을 보냈고, 나는 그것을 컴퓨터 폴더에 옮겼다. 그리고 두 장의 사진을
선택했다.염중호는 나에게 취향을 물었고, 이 사진은 그에 대한 답변이다.
염중호는 나의 취향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이것은 염중호의 취향일까, 나의 취향일까.
염중호는 이 사물(대상/사건)에 왜 시선이 빼앗겼을까?
염중호는 나의 취향을 물었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염중호의 취향을 묻는다. 그의 취향과 나의 취향의 공통점은, 그리고 차이는 무엇일까? 이 사진은 염중호의 것인가, 아니면 나의 것인가.

나는 염중호가 보낸 데이터 파일을 나의 개인 사진 폴더에 넣었다는 사진을 발견했다. 나와 염중호의 게임은 이제 시작되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자신의 취향을 들고 이 게임에 동참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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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수 사진전   
    

            사진위주류가헌(02-720-2010)
            2012-05-22 ~ 2012-06-03

사람들의 발길에 무늬가 지워져가는 낡은 마룻바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문짝, 먼지가 내려앉은 성모마리아 조각상, 심지어 지저분하게 낙서가 된 시멘트벽... 사진가 소정수의 사진 속에서 배경이 되고 있는 사물들은 이처럼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을 감싼, 혹은 일부에 스미거나 응결된 빛에 의해 일시에 성스러운 느낌으로 전이된다. 마치 우리에게 숭고미를 선사하는 성물(聖物)과도 같이.

보라색, 파란색, 분홍에 가까운, 아니 그 중간색. 불길이 타오르는 형상 같기도 한 이 빛은 스테인드글라스(유리화)를 통과한 빛이다. 오래된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공간 내부에 들어 온 빛이 사물들에 부딪히고 반사되면서, 혹은 머물면서 평범한 사물들의 외연을 이전과는 다른 것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 빛을 거슬러 가면, 감상의 깊이는 더 깊어진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태양광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한다. 이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하나의 이야기가 담긴 프레임이다. 그 이야기는 성모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야이로의 죽은 어린 딸을 되살리는 기적을 행하고 있는 예수, 또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받는 예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모두가 성경 속의 이야기가 담긴 성화다. 그러므로 저기 저 마룻바닥에 무지갯빛으로 스몄거나 쏟아진 물 위에 영롱하게 맺힌 저 빛은, 빛이 성화(聖話)가 성화(聖畵)로 이루어진 창을 통과함으로써 쓰게 된 새로운 감탄과 탄식의 성화(聖話)이자 성화(聖畵)인 것이다.

작업 노트에서 스스로 고백했듯이 “마주한 대상의 주변부에서 오는 울림을 느낀” 사진가 소정수는 그 대상들과 울림까지를 고스란히 사진에 담았고, 이제 소정수의 사진을 통해 ‘울림’은 성당 밖으로까지 확장된다. 쉬이 해독할 수는 없지만, 아름답고 경외케 되는 울림이 사진 속에 있다.

전시 제목은 이며 5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종로구 통의동에 자리한 사진위주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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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 MESS








발두어 부르비츠展 / Baldur Burwitz / sculpture.performance.film 2012_0511 ▶ 2012_0518





발두어 부르비츠_Applause_Art Karlsruhe_2007




초대일시 / 2012_0511_금요일_05:00pm

주최 / 서울시립미술관

관람시간 / 01:00pm~06:00pm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갤러리 1관 NANJI GALLERY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로 108-1 Tel. +82.2.308.1071 nanjistudio.seoul.go.kr








본 전시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국제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현재 입주해 있는 국외단기입주작가의 전시입니다. 현재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2개의 스튜디오를 국외작가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으며 매해 입주신청과 심사를 거쳐 입주작가를 선발합니다. 입주기간이 끝나는 시기에 입주기간 중의 성과를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성과보고전을 개최하며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프로그램에 참여한 발두어 부르비츠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그는 입주기간 동안 한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념적인 작품을 설치합니다. 발두어 부르비츠는 독일에서 출생, 브라운쉬바이크 미술대학에서 조각과 사진을 전공하였으며 독일 함부르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발두어 부르비츠_Affendisco_Lambda-Print on Dibond_180×280cm_2008

발두어 부르비츠(Baldur Burwitz)의 예술, "What a mess." ● 철학자 퍼스(C. S. Pierce)가 의미 깊은 이야기를 남겼다. "나는 진정한 켄터키의 사나이로서 위스키에 대한 미적 판단에 대해 골몰하곤 했다. 정말이지 어떤 위스키는 다른 위스키보다 더 훌륭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위스키는 모두 미적으로 좋다는 것이다." (I am inclined in aesthetic judgment to think as true Kentuckian about whisky: possibly some may be better than others, but all are aesthetically good.) 정말 위스키의 맛은 그 어떤 것이라도 모두 좋다. 그러나 위스키의 맛보다는 위스키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는지 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가령, 내면적 기분의 돋움, 그 상승의 기류가 선사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감의 형성, 이런 것들이 위스키에 대한 더욱 성숙한 질문일 것이다. ● 발두어 부르비츠의 사고 역시 퍼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작가는 예술작품은 미적으로 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적으로 훌륭한 것은 세상에 너무 많다. 아기의 눈빛이나 자동차의 곡선, 자연의 모든 요소들은 경탄의 대상이며, 예술작품은 이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초라하기 그지없는 볼품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작가가 묻고자 하는 것은 미적 기능 외에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역할에 관한 것이다. 예술은 작품이라는 외부적인 형식과 작가라는 내부적인 제스처가 착종(錯綜)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게 하려는 끊임없는 요청이다. 세계는 바꾸려고 한다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바뀌는 것이 더욱 긴박한 문제이다. 예술은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개심(改心)의 촉매제인 사실에서만 일말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의 시각과 마음을 바꾸지 못할 때 아름다운 형식이라는 이름의 예술은 존재의 장식에 불과하다.
발두어 부르비츠_Ohne Ende_Kunstverein Hannover_2008

발두어 작가는 그의 이러한 믿음을 관철시키기 위해 십 수 년간 마음 고생도 많이 했고 사건도 많이 일으켰다. 일례로 작가는 예술적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을 초대한 다음 그 공간의 출입구를 폐쇄한 후 공간의 사방을 불도저로 압축한 일이 있다. 문을 개방한 후 작가는 앞니를 잃었다고 한다. 작가의 수업시간에 실기실로 학생들을 모은 후 문을 폐쇄한 연후에 수 만 마리의 파리떼를 풀어놓았다. 그 후 작가는 교수직을 잃었다고 한다. 그는 때때로 건물을 중장비로 손상시키면서 문명의 짐스러운 무거움을 벗어 던지려고 한다. 어떨 때는 움직이는 로봇 치킨을 만들어 사람들을 희화시키기도 한다. 여하튼 작가는 저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 찰스 메리엄(Charles E. Merriam)이 말한 두 가지 상징조작, 미란다와 크레덴다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미란다(miranda)는 무언가 '동일시 현상'이다. 정서적인 면에 호소하여 사회를 장악하는 방법이다. 한국민의 애국가, 미국인에 대해서 독립기념일, 독일 국민에 있어서 독일의 위대한 작가 괴테가 그것이다. 크레덴다(credenda)는 '신조'라는 뜻이다.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는 점을 내세워 사람들의 이성을 움직이는 기호를 '합리화의 상징'이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지적인 면에 호소하는 상징이다. 헌법, 이데올로기, 정치학, 미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징조작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매우 특별한 존재들이 예술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상징조작으로부터 벗어나면 삶이 도대체 어떻게 변하는 것인가? 주체적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다. 외로운 존재다. 작가에 의하면 자기를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깨우침뿐이며 작가는 이 깨우침을 도와줘야만 한다는 것이다. ● 발두어 작가의 첫 번째 한국 전시의 테마는 'What a mess'이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다. 작가가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받은 인상이 그렇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부정적인 수식어만은 아닐 것이다. 'mess'라는 표현은 코스모스의 세계가 아니라 카오스의 세계다. 코스모스란 이성의 준칙에 길들여진 세계다. 로고스가 활약하며 예측가능성의 안정된 세계다. 개화된 밝음의 문명이다. 반면 카오스는 이성과 대비되는 어두움의 혼돈이다. 작가는 아시아에 대해서 코스모스보다는 카오스의 어둠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는 어둠 속에서 가능성을 바라본다. 안정된 이성중심주의의 서구문명은 도구적 합리주의이며, 이는 결국 제국주의의 상징조작과 에콜로지의 파괴만을 남겼다. 그리고 작가는 새로운 제3의 패러다임의 창신(創新)을 안정된 서구의 안주하는 사고로부터는 찾을 수 없다고 진단한다. 오히려 아직 성장 중이고 안정화되지 않은, 나타(懶惰)를 모르는 미성숙에서 그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과 중국 등 사회전반의 미성숙에서 큰 가능성을 발견하는 한편 한국이나 중국의 현대미술의 미성숙에 있어서는 고칠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발두어 부르비츠_Dicke Brummer_Elekrohaus_2004

우리는 누구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에 대한 추억이 있다. 그 중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가 담벼락에 페인트칠하는 과정이다. 너무나 큰 담벼락을 하룻날에 끝내기란 불가능하다. 때마침 친구들이 집 근처를 지나간다. 친구들이 뭐하냐고 물어오길래, 허클베리핀은 페인트칠을 하고 있고 아주 재미있다고 말한다. 친구들은 그것이 뭐가 재미있겠냐고 생각하지만 콧노래 흥얼거리는 허클베리핀의 붓질에 조금씩 감화되고 모두 신나게 도와 한나절에 페인트칠을 끝내버린다는 이야기다. ● 위의 이야기는 바로 메타노이아의 상징적 장면이다. 그런데 작가는 한국의 미술가들이 특정 그림의 스타일을 개발하고 브랜드화(branding)해가는 노고의 과정에서 산업화되어 가는 전지구촌의 치열함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그 치열함의 목표는 레드핫칠리페퍼스 밴드의 노래 '캘리포니케이션(Californication)'이 웅변해주고 있다. 모든 국가가 캘리포니아의 문명화를 목표로 치열하게 뛰어갈 때 그 결과는 에콜로지의 붕괴, 즉 자멸뿐이듯이, 아시아의 미술문화도 허클베리핀처럼 메타노이아를 거치자는 제스처를 제안한다. 작품의 특정 스타일의 브랜드 라벨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치열한 경쟁은 곧 엘리트층의 수장고를 채워주는 물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에 작가는 디즈니랜드의 이미지를 한국의 유명 작가들(10명)에게 나누어주고 그 위에 작가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한국의 유명 작가들은 기꺼이 이에 동참한다. 허클베리핀의 품앗이가 현실화된 순간이다. 새로운 창신(創新)의 계기를 보여준 셈이다. 또 한가지, 작가는 경주놀이용 카트(cart) 두 대를 전시장에 설치한다. 한국의 작가들에게 이 카트에 태워서 경주를 진행시킨다. 그것이 바로 카(K-ART), 즉 한국미술이라는 것이다. 바닥에 남은 스퀴드 마크의 어지러움을 우리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다.
발두어 부르비츠_Poison Idea_Art Max_Braunschweig_2003

끝으로 작가는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복합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복합성은 상징조작 중 크레덴다에 해당한다. 바로 현무 미사일이다. 작가는 현무 미사일을 옥외광고용 발룬으로 만든다. 이 발룬을 리어카에 설치한다. 발사용 기반이 리어카가 되고 미사일은 광고용 풍선이라는 메타포는 우스꽝스럽다. 소위 '중국 위협론'이나 '악의 축'을 막는 예방의 힘은 군사확충이라는 그럴듯한 크레덴다의 기획은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의 안락의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그들의 논의에 얼씨구 맞장구를 쳐주는 동북아시아의 상징조작 계층에 대해서 작가의 생각은 남다르다. 그가 속해있는 사회는 분열과 통일이라는 경험 측면에서 우리의 그것과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가장 낮은 계급과 가장 낮은 차원의 산업수단을 연상시키는 리어카 위에서 작은 미풍으로도 쉽게 흔들릴, 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우리는 어떻게 깨달아야 하겠는가? ● 이렇듯 발두어 부르비츠는 굉장히 총명하고 예민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미덕만을 예찬하고 싶지 않다. 부족한 면에 대해서도 지적해주고 싶다. 나는 언제나 발두어라는 사람에게 지속성이 있었으면 한다. 굉장히 총명한 작가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하늘이 준 재능에 비해서 현실의 열정과 작업과 생활을 지속하지 못해서 불운했던 경우를 자주 목격하곤 한다. 그리고 서구인들은 너무 민감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발두어가 기왕 아시아 땅에 왔으니 '중용(中庸, The Doctrine of the Mean)'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경구를 하나 말해주고 싶다. "중용이란 참으로 지극하구나! 그러나 그 중용의 덕을 지속시키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구나!" (中庸 第3章, 子曰, 中庸其至矣乎, 民鮮能久矣.) ■ 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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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프로젝트 HANOK project 오픈 스튜디오








안두진展 / AHNDOOJIN / 安斗鎭 / painting.installation 2012_0511 ▶ 2012_051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22g | 안두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1_금요일_05:00pm

주최/주관 / 캔 파운데이션

관람시간 / 5월17,18일_02:00pm~04:00pm

한옥 스튜디오 HANOK studio 서울 성북구 성북동 60-37번지 Tel. +82.2.766.7660 www.can-foundation.org





『한옥프로젝트』는, 캔 파운데이션에서 운영하는 작가 창작활동 지원 프로그램 일환으로,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한옥형 가옥을 작가의 창작활동공간으로 활용하고자 시작된 레지던시 개념의 프로젝트입니다.
안두진_번개치는 밤_캔버스에 유채_53×73cm_2010
안두진_거기 There_캔버스에 유채_181.5×227.5cm_2011
안두진_먹구름이 몰려오는 어느날 A day the dark black clouds gather_캔버스에 유채_198×292cm_2011
안두진_섬광 Flash light_캔버스에 유채_227.5×364cm_2011
안두진_먹구름이 몰려오는 어느날 A day the dark black clouds gather_캔버스에 유채_90×131cm_2010

입주하는 1인의 작가에게 전통한옥의 가옥을 체험시킴으로써 새로운 창작공간의 개념을 제공하는 레지던스입니다. ■ 캔 파운데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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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조송展 / JOSONG / 趙松 / painting 2012_0511 ▶ 2012_0524 / 월요일 휴관





조송_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눈물을 흘리는 동상_종이에 먹, 혼합재료_150×20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13d | 조송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조송이 그리는 화면은 중후한 깊이가 있다. 어두운 표면, 그 배후에 조용하고도 엄숙한 기운이 중첩되어있기 때문이다. 보통 검은색은 '죽음'을 의미하는데, 작가가 그려내는 검은색은 우울한 기운과 평온함이 혼재하고 있다. 이는 죽음이란 인간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함께 한다는 그녀의 사상 때문일지도 모른다."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일종의 이론을 만들어내듯 나는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일련의 메시지를 도출한다."라고 말하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인간의 증명』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내러티브가 담긴 삶의 기승전결을 선보인다.
조송_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_종이에 먹, 혼합재료_76×100cm_2011
조송_뭐야 몰라 무서워_종이에 붉은 먹, 혼합재료_100×100cm_2012

인간의 삶이란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과정이다. 각자 위치에서 어떤 경험을 하든 결국 이 길고도 덧없는 여정은한 개인의 고유한 것이며, 그 누구의 삶도 동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본인의 굳은 신념이나 의지를 뒤흔드는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며, 이것은 결국 가치혼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얻는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개별성보다는 집단성이 더욱 강조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번씩은 자아가 흔들리는 경험을 가지고 있을 법하다.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작품제목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초점을 잃은 한 인간의 모습이 어두운 화면에 배치되고 동물들 사이에 둘러싸여 불안과 긴장상태로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라는 집단 사이에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은 앞서 언급했듯 개별성과 집단성의 혼란에 빠진듯하다. 또한 조송의 작품에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浮游)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데 「기적을 바랬을 때가 언제였던가」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난감 인형 얼굴들이 둥둥 떠있다. 목적지를 잃은 배처럼 핵심이 빠진 빈 껍데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송_우리는 인간도 동물도 아니다_종이에 먹, 혼합재료_60×80cm_2012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매일 눈물 흘리는 동상」에서는 매우 안정적 부유(浮遊)함을 보여주며 앞서 드러난 모든 감정구조를 정리하는 결말을 암시한다. 한 배에 동시에 올라 타있는 인간과 동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무대를 암시하는 푸른색 장막은 한 인간의 삶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듯하다. 공연이 막을 내리듯,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며 삶의 막을 내리게 되는데 결국 그 앞에서는 모두가 겸허해질 수 밖에 없는 모습이 나타난다.
조송_그냥 믿어 의심치 마라_종이에 먹, 혼합재료_43×27.5cm_2012

조송의 작업은 화면 구조뿐 아니라 제작과정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또한 인간 삶의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인 '먹'은 주변환경요소에 따라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적당한 습도 유지, 배접상태 등 물리적 요소까지 세심하게 컨트롤하며 인내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작가는 결국 붓을 통해 삶의 과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표면에 드러나는 검은 화면은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오롯이 담아낸 결과물과 같다. 문답형식으로 이어지는 작품제목도 마찬가지로 마치 깨달음을 얻게 되는 작가의 독백처럼 전개되고 있으며, 살아있는 생물이 느끼는 감정의 변화과정을 화면에 표현하고 여기에 내러티브를 첨가 함으로서 결국 조송은 『인간의 증명』전에서 한편의 플롯(plot)을 선보인다. ■ 김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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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선장의 보물상자 The Treasure Chest of Captain Silver








여동헌展 / YEODONGHUN / 呂東憲 / painting 2012_0511 ▶ 2012_0527





여동헌_실버선장의 보물상자-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828c | 여동헌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5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아트파크 ARTPARK 서울 종로구 삼청동 125-1번지 Tel. +82.2.733.8500 www.iartpark.com





실버선장 여동헌의 보물찾기 후일담 ● 보물지도를 갖고 보물을 찾아 떠난 후에 난관과 역경을 거쳐 보물을 갖고 돌아온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원초적인 플롯이다.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Louis Balfour Stevenson 원작의 「보물섬」(1883)은 바로 그 보물지도와 보물섬에 관한 판타지를 가장 극적으로 전해준 이야기가 아닐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원작자가 쓴 소설인 만큼 이야기 속 캐릭터들도 전형적인 악인이거나 선인으로 양분된다기 보다는 굉장히 현실적으로 상황과 조건을 판단하고 처신하는 인물상으로 그려지는데, 뭐니 뭐니 해도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 것은 악행을 일삼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정체 불명의 실버선장일 것이다. ● 「보물섬」은 수많은 영화와 어린이용 동화,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되어 지난 120여 년 동안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아마도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2세대인 데자키 오사무가 1978년 제작한 TV용 애니메이션일 듯하다. 부리부리한 눈에 긴 생머리, 굳게 쥔 강한 주먹으로 기억되는 그는 다리 한 쪽을 잃고도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 강한 힘을 보여주고, 동시에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년 짐에게는 아버지의 감수성을 선사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분히 마초적인 그 캐릭터가 많은 사내아이들에게 하나의 로망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탁월한 영상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여하튼, 보물을 찾아 떠난 후 종적을 감추었다는 그 아련한 추억의 주인공 실버선장을 2012년 다시 한 번 우리 앞에 들이민 이가 있으니, 바로 작가 여동헌이다. 지난 2009년 열린 개인전의 말미에 「실버선장의 보물 상자」라는 새로운 연작을 슬쩍 선보인 바 있는 그가 이번 전시에서는 아예 이 실버선장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웰컴 투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시티」 등 일련의 파라다이스 연작을 통해 부정과 분쟁이 사라진 진정한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유머러스한 이미지와 강렬한 원색으로 보여주면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도상을 심어준 작가는 왜 그의 파라다이스에 난데없이 실버선장을 불러들인 것일까? 「보물섬」 원작이 남긴 아련한 후일담에 대한 호기심이 어떻게 그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고 있을까? 그의 근작들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여동헌_실버선장의 보물상자-8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cm_2012

소위 386 세대에서는 비껴나 있고, 그렇다고 이제 더 이상 젊지도 않은 세대들에게 어린 시절 보았던 TV판 일본 애니메이션은 유년 시절 한켠에 제법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 시절 '베르사유의 장미'와 '빨강머리 앤'은 여자 아이들의 본방사수 프로그램이었고, '미래소년 코난'과 '보물섬', '은하철도 999'나 '하록 선장'은 성별을 막론하고 사랑받던 애니메이션이었다. 오죽하면 여동헌 작가의 인터넷 아이디가 아예 '실버선장'일까.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는 내내 마음속에 어떤 꿈을 불러 일으켰을 테고, 그 꿈을 잉태한 사람은 끝 모를 길을 떠나게 마련일 터. 여동헌 작가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실버선장'을 스스로와 동일시하며 그만의 '보물'을 품어왔을 것이다. ● 그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동헌의 작품들이 이제야 비로소 작가 스스로의 일상에 발을 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실버선장' 캐릭터를 전시와 작품의 전면에 세운 것부터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천국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여동헌의 '파라다이스 연작'이 시작될 때만 해도 그가 그려내는 파라다이스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천적들이 웃으며 뒤엉키고 보고 싶고 갖고 싶고 먹고 싶은 그 수많은 좋은 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천국의 모습은 말 그대로 마음속에 품은 이상향을 그린 현실 너머의 이미지였다. 물론 2009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파라다이스 시티」는 그러한 천국에 대한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마을이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같은 구체적인 장소를 보여주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가고 싶다는 마음을 이끌어내는 풍경들을 그린 이 작품들은 이전 작업보다는 훨씬 더 구체적인 사건들을 그림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여기까지도 여동헌이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개인적이고 소박하면서도 직접적인 대상들은 작품마다 늘 등장하는 양, 돼지, 펭귄의 모티프를 제외하면 소소하게 등장할 뿐이다.
여동헌_Here comes the Big Parade-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12cm_2011
하지만 최근의 작품들은 확연히 그 분위기가 다르다. 그 변화는 일단 「Here comes the big parade」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동안의 여동헌 작품이 담고 있던 집합적 동물들과 공간의 풍경들은 오간 데 없고 오로지 물감, 붓, 연필들이 마치 폭죽을 쏘아대듯 강렬하게 뿜어 올리는 색채의 향연만이 화면 가득 펼쳐져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여동헌은 판화 작품을 통해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수 십 장의 판화들을 여러 겹으로 이어붙이는 작업 과정을 통해 일 년에 서너 점 완성하기가 어려웠던, 지난한 노동의 집적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입체판화 작품들을 거쳐 회화작품으로의 변화를 겪으면서, 작가가 다루는 물질의 변화는 단순한 작업 매체의 이동과는 달랐다. 그리는 일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몸의 연장인 도구들의 변화는 작업 형식의 완벽한 변신으로 나타났고, 작가의 일상을 지배하는 '그리는 노동'은 일련의 '파라다이스 연작'을 통해 그에게 극명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작가는 그러한 변화를 서서히 즐기기 시작한 것 같다. ● 꿈과 이상으로서의 파라다이스는 이렇게 현실의 파라다이스로 모습을 바꾼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특유의 밝은 터치로 신나게 작품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 작품 속에 진정한 생활을 반영해내는 작업은 어쩌면 여동헌이라는 작가가 작업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작품의 주제로 담아왔던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것들이 기실 삶의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여동헌 작가의 작품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세 종류의 동물이 있는데, 펭귄과 양과 돼지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펭귄은 조형적으로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자연물이고, 양은 작가의 꿈속에 가끔 등장하여 포근하고도 안락한 느낌과 함께 영감을 선사하는 동물, 돼지는 통통해 뵈는 외양을 가진 작가 스스로를 투사하는 대상이다. 이들은 여동헌의 작품에서 말 그대로 꿈과 이상과 현실을 마치 삼위일체의 도상처럼 담지하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근작들을 바로 이러한 도상들과 연결하여 본다면,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서 치열한 현실 속에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진리에 다다르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펭귄과 양과 돼지로 형상화되는, 서로 동떨어져 있는 듯해 보이는 꿈과 이상과 현실이 실은 그 모습을 조금씩 달리하는 동일체라는 이해에도 비로소 도달할 수 있다.
여동헌_실버선장의 보물상자-6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62cm_2011
이러한 생활의 발견은 전시 제목이기도 한 「실버선장의 보물 상자」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축포를 터뜨리듯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장면들은 작가가 평소 관심있어 하던 이야기이거나 늘 흠모해왔던 리히텐슈타인과 야요이 쿠사마 같은 작가들의 작업 모티프, 좋아하는 음식과 사물, 좋았던 여행의 기억이나 작업실의 일상적인 풍경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어떤 것도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고, 밝고 경쾌하면서도 과장되어 있지 않다. 실버선장으로 대변되는 작가 자신을 화폭에 담는가 하면, 작품 서명을 아예 그림의 요소로 자리하게 만든 것도 있다. 두려움도 부정도 사라진 절대적인 즐거움 속에서가 아니라면 결코 시도할 수 없는 사건이 작품 속에서 경쾌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여동헌_welcome to paradise-tornado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63cm_2007
여동헌_실버선장의 보물상자-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30cm_2012
사실 화면 아래쪽의 보물상자에서 터져나오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화면의 상단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화면 구성은 2007년 제작된 「Tornado! Tornado! Tornado!」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모티프를 빌어온 이 작품은 '회오리 바람'이라고 하는 외부의 에너지로부터 그리는 대상들이 상승해 올라가는 효과를 담고 있다. 그 바람은 즐거운 무엇에게로 또 자신을 데려다 줄 테지만, 그 동기에 작가 스스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버선장의 보물 상자」는 더 이상 어떤 외부의 힘을 빌려오지 않는다. 무엇이 이상적인지, 무엇이 보편적인지 하는 객관적 시선 따위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이미 해놓은 이야기, 어딘가에 기대어 수줍게 선보이는 밋밋한 천국이 아니라, 오직 작가만의 이야기, 「보물섬」 원작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실버선장의 후일담에 관한 여동헌만의 이야기가 작가 스스로의 에너지만으로 물감 뚜껑이 터져오르듯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여동헌_실버선장의 보물상자-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6×227cm_2011
보물을 발견한 실버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 보물이 실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데자키 오사무 감독은 장성한 소년 짐이 그를 우연히 한 번 선술집에서 마주치는 것으로 잠시 실버선장의 뒷이야기를 전한 바 있지만, 작가 여동헌은 아예 실버선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일상과 현실이라는 극명한 보물을 발견한 기쁨을 우리에게 전한다. 그토록 인간적이며 제 삶의 욕망에 충실했던 실버선장은 많은 이들의 우상으로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기 또 한 명의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보물을 발견한 실버선장의 또 다른 후일담인 셈이다. 인생은 각자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닐까. 보물섬으로 향하는 지도는 그 여정에서 스스로 그려나가는 그림이며, 그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 또한 각기 다른 서로에게 유효한 것이지 않을까. 15년여의 작품 활동을 거쳐 이제야 비소로 발 딛고 있는 자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 작가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도 계속계속 그 실버선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 황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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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母性) Motherhood








한국미술 속의 어머니 / 아시아 미술 속의 어머니 Mother Images in Korean Art / Mother Images in Asian Art展 2012_0511 ▶ 2012_0731 / 일,공휴일 휴관








 
modified at 2012.05.15 20:39:03 by zabel
2012.05.09 17:28:40 / Good : 306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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