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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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3.03 1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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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3월 첫주


공동선_모든 산에 오르라! Common Good_Climb Every Mountain!

김기라展 / KIMKIRA / 金基羅 / mixed media   2012_0301 ▶ 2012_0329 / 월요일 휴관


김기라展_두산갤러리 서울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19j | 김기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0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서울 DOOSAN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두산갤러리 서울에서는 3월 1일부터 3월 29일까지 김기라의『공동선_모든 산에 오르라! Common Good_Climb Every Mountain!』展을 개최한다. 김기라는 사진, 회화, 영상과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여 사회와 개인의 모습이 반영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작업 전반에 흐르는 희극적 요소와 서사적 구조가 통합된 보다 집약적인 작품세계인「스펙터」연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김기라_Oriental Specter_Monster 001_종이, 프린트에 인그레이빙_197×168cm_2012
김기라展_두산갤러리 서울_2012
김기라_Drawing for Without Breath 002_종이에 수채_42×52cm_2011
김기라의「스펙터」연작은 신화와 종교, 사회, 경제구조로 의해 파생된 이미지나 성상들이 인간의 존재와 삶을 확장시키고 '공동선'을 향하게 하기 보다는 망령이 되어 보이지 않게 인간을 제약하고 규제하며 욕망을 부추긴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가 축적되어 온 신화와 성상 이미지들을 해체, 변형하고 재구축한다. 이는 인간의 의식이 반영된 또 다른 망령(스펙터 Specter)으로 결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지난 8년간 세계 10여 개국을 다니며 모은 500권 이상의 문화, 역사, 인류사 등의 서적에서 발췌한 신화와 성상의 이미지들로 만든 사진 콜라주, 드로잉, 그리고 설치작품들로 구성되었다. ■ 두산갤러리
김기라_Drawing for Specter_Monster_캔버스에 유채_64×53cm_2011
김기라展_두산갤러리 서울_2012
DOOSAN Gallery is pleased to present Common Good_Climb Every Mountain!, a solo exhibition by Kira Kim, from March 1 to 29, 2012. Kim's works reflect the society and individual through diverse mediums including photography, painting, video and installation. The exhibition features Kim's Specter series, an intensive body of work which integrates the comic elements and narrative structure found in general throughout Kim's oeuvre. ● Specter series is inspired by the artist's idea that sacred images or images deriving from mythology, religion, society and economic structure become a specter that constraints and controls man and incites desire in people, rather than aiming for the 'common good' and expanding human existence and life. Kim deconstructs, transforms and reconstructs the sacred and mythological images through which historical and social meanings have accumulated. The images are a specter that reflects the human consciousness, and metaphorically illustrate the human fate that can never be free from desire. Common Good_Climb Every Mountain! presents photo collages, drawings and installation works combining sacred and mythological images the artist has extracted from over 500 books about civilization, history and history of man that he has collected in the last 8 years, from a dozen or so countries he has sojourned. ■ DOOSAN Gallery     ---------    

Mind Strength


최윤정展 / CHOIYOUNJOUNG / 崔允程 / painting   2012_0305 ▶ 2012_0330 / 주말 휴관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73×14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627b | 최윤정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2 이랜드문화재단 2기 작가공모展 주최/기획 / (재)이랜드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7:00pm / 주말 휴관 이랜드 스페이스 E-LAND SPACE 서울 금천구 가산동 371-12번지 이랜드빌딩 Tel. +82.2.2029.9885

3월에는 이랜드문화재단 2기 공모작가의 두번째 전시로 최윤정의 회화작품을 한달간 선보일 예정이다. 최윤정은 파스텔톤으로 환상적이면서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이다. 동물과 식물 등 자연물을 공간에 등장시켜면서, 갈등과 아픔이 없는 평화로운 이상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작가 개인의 아픔에서 시작된 작업은 개인의 치유를 염원함을 넘어서, 관람자에게도 편안하고 안정되는 감정을 전이시킨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제목 "Mind Strength"처럼 내적 자아의 힘을 긍정하고, 믿으며 도피로서의 유토피아(Utopia)가 아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서의 유토피아(Utopia)를 보여주는 작품세계로 초대한다.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111×194cm_2011
내적 유토피아로의 초대 ● 잔잔하고 부드러운 색이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파스텔톤의 색채로 나타난 형상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화면에는 코끼리, 호랑이, 사슴 등 여러 가지 동물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등장하기도 하고, 그림자만으로 나타나 그 존재만을 짐작할 수 있게도 한다. 선명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색채가 주를 이루는 그림으로, 그 이미지도 색채처럼 몽환적이다. 꿈의 잔상으로 남은 일부분인 듯, 혹은 기억의 어느 조각인지 분간할 수 없는 환상적인 화면은 초현실주의(surrealism) 작품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때 그라데이션(gradation)으로 확장되는 둥근 원형들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강조하며 거리감과 착시효과를 준다. 그리고 가려진 부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다른 시공간을 넘나드는 매개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포근하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 중간톤으로 가라앉은 색채는 작품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인상이다.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Mind Strength』라는 전시타이틀로 세번째 선보이는 최윤정의 개인전은 기존 작업과 연결선상에 있는 작업을 보여준다. 환상적인 무의식의 공간을 보여주면서, "작가 개인의 치유", "내면의 정화"라는 일관된 주제를 회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적인 세계로 침잠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에게서 목도된다. 작가들의 작업이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밖으로 향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술가들은 특별히 예민한 감성을 지녔다. 이러한 감성은 타인과 구별되는 독특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남들이 인지 못하는 낯선 세계, 혹은 여러 문제들에 대해 시각적으로 환원시키는데 탁월한 도구로도 작용한다. 최윤정 역시 작가 개인이 지닌 내밀하고 섬세한 내면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윤정_Mind Space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10
어린 시절 최윤정은 어두움의 공포로 자주 고통 받았다고 한다. 가위에 눌리고, 악몽에 시달리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웠다고 하는데, 이러한 내적 트라우마(trauma)는 작품 창작의 동기가 되었다. 어두움과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작가 스스로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빛의 파장에 관심을 가지며 이를 이미지화 한 그림을 그리고, 내면의 자기 치유적 작업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연꽃이 만발한 정원이나, 맹수와 초식동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을 그렸다. 꿈속의 공간이자 환상의 공간으로 화면을 연출하며, 자연물을 그 속에 재배치시킴으로써 자신만의 유토피아(utopia)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물이나 구름 위에 놓인 동물들과 둥근 원들이 부유하고 있는 이미지로 그림으로써, 어머니 자궁에서 느꼈던 근원적인 편안함과 안락함의 세계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최윤정 스스로의 치유이자 심리적 안정을 위한 장치로 제작된 작품들을 대하면 관찰자는 창작자의 심리가 전이(transference)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과 만나면 차분해지고 편안해 지는 것이다.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200×200cm_2011
작업들은 2010년부터 자연스러운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의 중심에는 배경의 변화가 주를 이룬다. 2008-2009년에는 10가지 장수 동?식물을 그린 십장생도(十長生圖)나, 꽃과 새들을 산수화와 조화시킨 화조도(花鳥圖), 연꽃을 그린 연화도(蓮花圖)등 조선시대 민화적 이미지를 작품 배경에 많이 차용하였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근래에 들어서면서 민화적인 배경이 사라지고 좀더 평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물과 구름 위에 떠 있는 듯이 연출한 배경을 지워내고, 2차원적인 평면성을 강조하려는 듯 이미지가 납작하게 붙어있는 것이다.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80.5×116cm_2011
또 다른 변화는 등장하는 동물의 모습이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주를 이루었던 동물들은 최근작에 들어서면서 대부분 뒷모습이나, 측면을 보이면서 얼굴을 은폐한 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의 뒷모습은 주로 캔버스와 관계되어 나타나고 있다. 2011년 "Mind Strength"시리즈 작업에는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캔버스 위를 걷고 있는 모습, 책으로 연상되는 커다란 구조물로 몸을 반쯤 집어넣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러한 네모난 사각형의 캔버스는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정면으로 펼쳐지기도 하고 측면으로 나란히 서있기도 하며 공중에 떠 있기도 하다. 이때 캔버스는 대개가 비어있다. 빈 캔버스의 등장은 작품 창작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근래에 들어 강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빈 캔버스 앞에 섰을 때의 그 막막함이라던가, 작품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의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빈 캔버스와 연필이 숲을 이루어 빼곡히 서있는 작품은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좀더 직설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이다. 예전 작업이 어두움을 정화하고, 자신만의 유토피아적 공간 안에서 치유를 염원하는 내용이었다면, 근래의 "Mind Strength" 시리즈에는 텅 빈 캔버스를 넘어야만 하는 창작자로서의 고통이 한 층 부각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윤정_Mind Strength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최윤정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트라우마(trauma)가 작품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이를 창작으로 승화시켜 자기치유를 성취했다. 그렇다면 창작의 동기가 해소된 시점에서 이제는 작가로서 또 다시 무엇을 그려야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문과 고민은 어쩌면 창작자로서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화두(話頭)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이미지를 재구성해서 반복적으로 작품을 생산해 내느냐, 새로운 작품세계로 이전하느냐 하는 고민의 기로에 선 것이다. 작가는 작품 제목 "Mind Strength"처럼 내적 자아의 힘을 긍정하고, 믿으며 도피로서의 유토피아(Utopia)가 아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서의 유토피아(Utopia)를 보여주는 새로운 작업을 펼쳐보이길 기대해 본다. ■ 고경옥 -------

한국 드로잉 50년


2012_0306 ▶ 2012_0313


강덕창_murmuring_종이에 연필_55×39.5cm_2011
초대일시 / 2012_0305_월요일_04:00pm Patr Ⅰ.한국 현대드로잉전 2012_0306 ▶ 2012_0313 Patr Ⅱ. 한국 드로잉 50년전 부스전 1부 / 2012_0309 ▶ 2012_0309 2부 / 2012_0310 ▶ 2012_0313 Patr Ⅲ. 한국 드로잉 50년전 단체전 2012_0306 ▶ 2012_0309 Patr Ⅳ. 특별전 - 영 아트페스티발 2012_0306 ▶ 2012_0313 참여작가 Patr Ⅰ.한국 현대드로잉전 구자승_임직순_강덕창_권희연_김선이_김익모 김춘수_김춘옥_김홍태_문우식_박선희_배상하 백금남_신문용_신제남_우상호_윤종구_원문자_이건용 장지원_정명희_정정식_최상철_최수_최정수_홍석창 Patr Ⅱ. 한국 드로잉 50년전 부스전 1부 / 강규성_김경미_김동화_나드로잉_문인상_박순철_박영선_박은주 서정화_우창훈_유희승_이철규_조혜숙_최영숙_최찬수_허난영_홍승란 2부 / IWASA JUNKO_KAMEYAMA TOHIDE_KAKUMA TAKAO 강필림_곽연진_김영수_김인숙_드로잉코드_민선홍_몸으로전하다 박소현_박영철_성치영_이광옥_이나영_이미선_이민 이정희_이진하_이해경_장숙희_정병숙_조성은_최화삼_허국중 Patr Ⅲ. 한국 드로잉 50년전 단체전 권미혜_권은지_김명순_김밝은터_김성숙_김여옥 김옥숙_김옥자_김점늠_김종순_김창언_남궁순 노신경_류법규_박지원_박태현_배금좌_송현화 안혜영_안효근_양숙희_양태호_양형미_오영란 원미숙_유영희_이경희_이근표_이석우_이세실 이수현_이예린_이재걸_이재영_이정임_이준성_이해련 이혜영_임정기_장계순_전창섭_조영숙_조윤주_조진이 조태영_찬희_최정길_한남순_한영호_한철기_황경숙_홍순현 Patr Ⅳ. 특별전 - 영 아트페스티발 안명전_이종필_정황래_현경미 주최 / 한국국제드로잉 운영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2층 Hangaram Art Museum, Seoul Arts Center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서초동 700번지) Tel. +82.2.720.9785 www.sac.or.kr

한국 드로잉 50년전을 열며... ● 일곱 해를 이어가며 열린 드로잉 전시가 올 해는 한국 드로잉의 역사를 돌아보자는 취지로『한국 드로잉50년』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열리게 되었습니다.. ● 20대 중반부터 70대 중반까지의 50년 세대를 한자리에 마련하였으며 한국 국제 드로잉전에 한국 드로잉 작가의 70-80% 정도가 그동안의 전시에 참여 하였습니다. ● 드로잉에 대한, 아직은 부족한 일반인들의 관심속에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드로잉의 영역을 넓히고, 드로잉에 애착을 갖는 작가들과 함께 지난 한국 드로잉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 어떤이는 회화의 스케치로, 또 어떤이는 본 작업의 연습으로 드로잉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김익모_pleasant landscape122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cm_2012
문인상_드로잉_한지에 채색_53×45.5cm_2011
박선희_사유 그리고 은유_한지에 혼합재료_28×37cm_2012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드로잉을 순수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접하고 있다고 봅니다. 드로잉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똑같이 고민하고 기간과 공력을 아끼지 않는것도 사실 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지난세월과 함께 드로잉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가 달라진 게 아닐까요? ●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가 지난 50년의 드로잉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앞으로의 50년 후에는 드로잉이 또 다른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선두 주자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송현화_Magic chairs_캔버스에 유채_73×190cm_2010
우창훈_존재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2
홍석창_Rhapsody of flower_한지에 수묵채색_62×50cm_1997
이건용_격 interval_종이에 아크릴채색_39×54cm_2012
아울러 본 전시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남다른 애정을 같고 협조하여 주신 관계자분들과 특히 드로잉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매년 이 전시를 위해서 애써 주시는 관계자분들과, 그리고 수준 높은 작품을 출품해주신 작가 한분 한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이번 전시가 성황리에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 구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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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뛰기 Running Backwards


송준형展 / SONGJOONHYUNG / 宋俊亨 / mixed media 2012_0307 ▶ 2012_0313


송준형_무옵션_람다 프린트_160×250cm_2012
초대일시 / 2012_0307_수요일_06:00pm 송준형 블로그 songjoonhyung.tumblr.co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송준형의 '뒤로 뛰기' ● 굳이 전통을 구체적으로, 직접적으로 제시하거나 겨냥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작업은 전통과 관련되어 있다. 다음 중 어느 하나에 속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거나, 기왕에 존재했던 방식을 파격적으로 확장하는 일, 그것을 실험적으로 반복하는 경우 등이다. 동시대 수많은 작가들의 작업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어느 곳을 지향하건 본인의 의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자연스레 전통과 관계하고 있다. 그것은 재료나 형식, 내용적인 측면에서 전통, 혹은 전통방식을 거부하고 있거나 비판적으로 지지, 혹은 새롭게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젊은 작가 송준형. 그의 작업에는 전공으로부터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전통적인 조각술, 즉 매스를 강조하거나 모델링에 의한 성형, 재료를 자르고 깎아낸 적극적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제법 오랜 관심이었던 조각술은 소정의 작업을 구상하고 궁극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진행과정 정도로 작용하고 있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로서의 조각을 제시하기보다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간접화법으로 인용하고 있다. 주로 작업의 무대나 배경으로 개입시키거나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도 사진작업을 위한 뗏목제작이나 현대식 목욕공간과 재래식 펌프 등목의 결합, 전통 윷놀이 판을 재연하는 세트제작, 영상작업이 투사되는 부조화된 입체 스크린, 구체적 소음을 전달하기 위한 이질적 오브제들의 결합, 설치 등에 조각술을 도입, 확장해서 사용하고 있다. ● 송준형은 그것이 제작방식이건, 작업의 모티프로 작용하건 간에 전통기법, 전통문화와 현존하는 유무형의 문화유산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특정 방식으로 골몰하기보다는 회화, 조각, 사진, 영상, 설치 등 미술 전 장르를 유쾌하게 넘나들며 전통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이제 막 기성의 문을 두드리는 송준형이 이번 첫 개인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전승의 문제들, 그중 특히 놀이문화, 소통의 방식 등이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어오는 이런저런 전래의 생활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결코 무겁지 않게 작업 하나하나에 스미어 있다. 송준형 스스로도 왕성한 현실인식과 함께 결과보다는 프로세스를 강조하며 제작자이자 배우, 연출자로서 작업과정에 흥겹게 개입하고 있다.
송준형_축음기로 파티하기_빔 프로젝터, 공간설치, 혼합재료_45×30×40cm_2011
송준형은 미술은 진지해야하지만, 더불어 재미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시 역시 전통과 현재를 심각하게, 무겁게 풀어내기보다는 가급적 재미있게 전달하려 노력했다. 평소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물리적으로 또 특유의 입담으로 재치 있게 전환하는 순발력과 개인기도 한몫했다. 이를 반영하듯 송준형의 작업실에는 그만의 유쾌한 상상들이 가득했다. 비교적 커다란 작업공간 여기저기 이런저런 드로잉과 아이디어, 오브제들이 복잡하게 자리 잡고 있지만, 몇몇 사진과 영상, 오브제 등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물간 낯익은 물건들과 이미지들이 낯설게 조합되어 있었다. 반갑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작업의 콘셉트가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 작업실에서 만난 물품들은 그의 사진작업에 소품으로 사용되었거나 그 자체가 작품인 것 등 다양했다. 사라진 추억과 현재를 결합시키는 송준형의 가뿐 호흡이 가득한 작업실에는 익숙하거나 그리운, 이제는 사라진 이미지와 물건들이 한가득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작업은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처럼 보인다. 어제와 오늘을 절묘하게 적당한 비율로 버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추억이나 경험과 관계되어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특정 연령대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작업으로 풀어내기에 다소 버겁기도 하지만, 송준형은 현재 사용하고 있거나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형식적 제약과 시공간의 제약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어제, 오늘을 교차시킨다. 송준형은 이들 작업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여했다. 제작에 걸린 물리적 시간도 시간이지만, 제작에 합당한 물건들을 구하는데 상당 시간을 쏟았다. 그의 작업에는 낡은 축음기와 재래식 펌프 등 어렵사리 구한 물건들이 등장한다. 이들 위에 옛날 이미지를 투사하기도 하고 이들을 배경으로 이런저런 연출을 통해 과거와 현재와의 소통을 매개한다. 친구들과 함께 한바탕 즐기듯 만들고 부수고 연출하며 진행한다. 오랜 고민과 생각이 몸과 함께 녹아든다. 작업의 일차적 배경으로 사용된 세트와 공간을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 설치하는 등 공간에 대한 감각적인 해석 능력과 구성에 대한 치밀함이 엿보인다. 이제 시작이지만, 전체작업의 콘셉트, 작업규모와 소화력 등은 송준형의 작가적 행보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 교통수단의 발달, 통신수단의 발전과 더불어 세상은 더욱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가히 시간 과 정보의 속도전쟁시대다. 얻은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생활이 편리해지면서 문제는 몸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네 삶속에서 몸으로 풀어내는 노동과 흥, 땀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송준형은 전통과 현재, 현재에 대입하는 전통생활/놀이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인다. 동시대 문화 현실을 반영하고 꼬집는 특유의 재치와 유머가 반짝인다. 일견 가볍게도 느껴지지만, 공감 가능한 메시지를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다. 직접적인 경험과 체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현실풍경인 송준형의 작업은 지난 풍속과 풍습 등 과거의 문화를 현재적인 시점으로 반추하여 해학으로 마무리한다.
송준형_Time scandal_빔 프로젝터, 공간설치, 혼합재료_75×72×26cm_2011
송준형은 적응할 새도 없이 달려가는, 어쩌면 부러울 것 없는 현재적 삶속에 쉼표를 건네고 있다. 결론은 한 박자 쉬어가자는 것이다. 이른바 팔리는 작가로 주목받기보다는 작가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우선 시장에 내놓았다. 성공적인 상장을 위해 쌈박하게 포장하고 현실에 먹히는 방식으로 차릴 수 있었으나, 현실을 대단히 직설적으로,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형식보다는 메시지에 중심을 두었다. 인간미를 담아내지 못하는 현재의 이런저런 생활문화도 꼬집었다. 그의 작업은 결국 전통과 소통에 대한 인식이다. 세간에 존재하는 인식의 간극을 메워보려는, 이해하려는 지성적 노력이다. 전통은 일방적으로, 관성적으로 이어져오는 것이 아니라, 쌍방의 이해와 노력에 의해 이어지고 다듬어지고 섞이며 받아들여지는, 계승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건강한 소통방식을 지향한다.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은 속도다. 송준형은 어제와 오늘, 빠름과 느림을 조율하며 현재적 균형을 이룰 것을 제안한다. ● 윷판 위에 던져지는 윷가락은 나무로 만든 전통 윷가락대신 아이패드를 등장시켰다. 전통마저 어플리케이션화되는 현실을 꼬집었다. 함께하는 놀이에서 혼자만의 놀이로 바뀌게 된, 노는 방법과 노는 물이 달라진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정겨운 친구들과 가족, 전통시장이나 명절에 볼 수 있었던 그리운 생각들을 보고 만나게 한다. 한 뼘의 제한된 공간 안에서 제한된 방식으로 즐기는 현재 놀이문화보다 전래의 놀이문화가 훨씬 정감 있음을 유비적으로 보여주었다. 휴대전화문자서비스의 대중화와 함께 새롭게 생겨난 어투인 '음', '슴'체를 중심으로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문자로 대화하는 유쾌한 설정도 돋보인다. 새로운 기기나 유행에 민감한 얼리 어댑터로서의 젊은 감각이 문자원조에 시비를 걸고 있다. 또한 청소년시절, 추억 하나쯤 있을 법한 롤러스케이트장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현재의 클럽문화와 비교, 환기시키고 있다. 부조로 떠낸 울퉁불퉁한 흰색 스크린을 총천연색 추억으로 물들였다. 접하기 어렵고 구하기도 힘든 구형 축음기와 MP3의 결합은 시선을 오래 잡아맨다. 둘 다 외부 동력에 의해 소리를 내는 이들은 일정 궤적을 남기며 반복되는 축음기의 원반의 실제 소음과 일렉트로니카의 전자음악이 난삽하게 결합되어 음악과 소음의 중간 형식을 만들어 낸다. 사라진 녹음, 재생 방식과 전혀 새로운 음원 방식과의 충돌은 음악적 소음과 그리운 소리, 소음으로 함께 어우러지며 묘한 여운을 남긴다. 돌고 도는 원반과 새로운 형식의 음원처럼 전통과 유행은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 쓰는 것보다 빠른 휴대전화단말기문자 자판의 입력속도라든가, 여유 있게 돌아가는 축음기 레코드판에 비해 찢어질 듯 악을 쓰며 뱉어내는 MP3의 메탈릭한 음악,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클럽과 롤러 스케이트장의 돌고 도는 분위기, 현대식 신호를 받으며 길을 지나는 조선시대 관료와 하인의 뒷모습, 펌프로 힘들게 물을 끌어 올리는 장면과 구멍 많은 샤워기에서 보란 듯 뿜어져 나오는 물의 쨍한 수압차를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상호소통의 방식이든, 물리적 교통의 방식이든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통하는 과거와 현재의 소통방식과 체계에 대한 차이와 공통점을 주목하게 한다. 교통과 소통방식의 발달에 대한 소회를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거나 결합시키며 술회하고 있다. 동시대에 공존하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교차시키며 그 간극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움과 함께 쉽게 거절할 수 없는 편리함이 교차하는, 송준형의 작업은 바쁘고 빠른 현재의 일상 속에 지난 시절, 느림의 기운을 돌아보게 하는 이중의 풍경이다. ● 송준형은 넘치는 풍요시대를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에 주목했다. 현실문화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체험이 거름이 되었다. 그중 빠르게 사라져버린 잃어버린 문화, 변해버린 문화들에 주목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또는 어르신들의 지난 또래문화를 반추했다. 전래의 놀이문화 형식을 통해 속도와 환경에 대한 인식, 오늘날의 소통문화 등을 주목했다. 실제 전시로 드러난 작업들은 비교적 작은 규모의 사진, 영상, 설치작업들이지만 그것들을 전개하기 위해 투여한 상당한 시간과 노동, 동료들과 함께한 뜨겁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있어 행복했다. 제한된 전시공간이지만,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설치물들이 함께 소개가 되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 박천남
송준형_도로교통법 제2조_빔 프로젝터, 공간설치, 혼합재료_122×155×20cm_2011
Song Joon Hyung's --------------------

사진이든, 그림이든,


김학량_오종은展 2012_0307 ▶ 2012_0330 / 일요일 휴관


김학량_노안 老眼_춘천 샘밭 근처 제방길을 찍은 사진_2011
초대일시 / 2012_0307_수요일_6:00pm 찬조출품 / 이대범 관람시간 / 12:00pm~07:00pm / 일요일 휴관 가회동60 GAHOEDONG60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gahoedong60.com

조경산수(造景山水) ● 인간과 그 삶의 그 흔적이 없는 풍경은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보기 어렵다. 호수에 발을 담근 채 반 세기 너머 서 있는 폐교각과 먼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고압선 철탑, 들녘 저 편에서 다가오는 아파트 무리, 댐 건설로 생긴 오래된 호수, 바퀴자국에 패인 신작로... ● 이러한 것들은 이미 우리의 '풍경'(거대도시 서울에서는 이러한 '풍경'조차 보기 어렵다)이 되었고, 나는 춘천에서 만나는 일상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러한 풍경을 보듬고 있다. ● 무심한 듯 빠른 변화가 진행되는 '일상'과, 지금만큼이나마 지켜졌으면 하는 '풍경,'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기이한 모습이 지금 우리의 산수가 아닌가 한다.
김학량_카메라-선禪_'객수산록'을 구성하는 이미지 중 하나_2011
살아볼수록 사는 일은 참 허술하고 엉성하기 짝 없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드물다 는 것도 이맘때엔 사실이자 이치로서 수용하게 된다. 한심한 일이다. 예술이라는 발광의 업이라고 뭐 다르겠나―뭐 하는가 싶고, 그럴수록 점점 의심스러워지는 것―사진이든, 그림이든. 나이 먹어갈수록 미혹迷惑은 깊어진다. 해법이 있긴 있을까? 이를테면, 지음의 업으로부터 배움의 업으로? 조립의 법으로부터 해체의 법으로? 더부살이에다 빚쟁이 같은 삶, 또 그러할 예술에 대한 자의식을 파국에 이르도록 밀고가기? 글쎄. 흜-?
오종은_샘밭길 1_디지털 프린트_50×100cm_2011
오종은_의암호_디지털 프린트_50×100cm_2011
"달이 혼자 남았고, 그러나 그것 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김사과,「미나」(창비, 2008) 중에서 ● 오래된 사진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40여 년 전 안양천변을 걷고 있다. 나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안양천변을 걸었을 많은 사람 중에 하나일 터. 나 역시 삶의 대부분을 안양천변을 걸었으며, 뛰었으며, 스쳐지나갔다. 사진 속 그가 걸었던 풍경을 눈과 손으로 아로 새긴다. 어렴풋하던 그 시간, 그 풍경에 나를 보낸다, 그 풍경에서 나를 건진다. 나를, 나를, 나를,,,,. 그리고 지금. 또 다른 풍경이다. 한 남자가 그리고 내가 거닐던 풍경이 사라졌다, 풍경이 지워졌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지워졌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것들의 소리를, 소문을 듣고자 한다. 눈을 부릅뜨고, 귀를 기울이고, 촉수를 세워 매 순간을 몸으로 기록하자.
오종은_지암리 4_디지털 프린트_50×100cm_2011
이대범_'달이 혼자 남았고, 그러나 그것조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를 위한 에스키스_2012
이번 만남을 주선하는 입장에서 한 마디: ● 같이 노는 일도 즐겁고 때로 배울 점이 있는 법. 혼자서는 구축하는 법에 따르지만, 둘 이상이 있을 땐 해체하는 법을 따라야 한다―눈치 보기가 그것. 허물어지면서 일으키기. ● 작정해둔 목적은 없다. 불즉불리不卽不離의 인연법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것으로 족하다. 김학량은 오종은 주변을 서성거린다. 서성거리다 문득 친구 하나를 불러 같이 놀자 했다. 색다른 문법을 가지고 합석할 터인데 궁금하다. 그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 이즈음에 생각키는 것이, 살아볼수록 풍경을 체험하기가 수월찮다는 점이다. 풍경은 체험할 수 없는 대상·개념·주제·육신인 것 같다. 육접肉接할 수 없는 육신. 일종의 유토피아이면서, 환멸의 대상. 퍽 오래 전, 1920년대, 육당·노산·지용 같은 선배들이 풍경 앞에 육신을 접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삶의 법이 달라진 만큼 풍경이 우리를 접하는 법도 달라졌을 테지. 이렇게 보면 사진이든, 드로잉이든, 회화든, 글짓기든, 풍경을 체험할 수 없는 함량미달의 존재들이, 장쾌하게 내달리는 물줄기 속에서 지푸라기 하나 잡는 일일 뿐. 그러니 우리가 하는 일이란 기껏해야 어떤 잠정의 이미지나 허깨비·유령·욕심을 베껴내는 일에 지나지 않겠지. 사진寫眞이 아니라 사가寫假. 따라서, 진경眞景을 포기해야 할 때. ● 그렇게 하면 슬슬, 평소 놓쳤던 질감質感, 풍경의, 그리고 그림·사진·드로잉·개념 들의 질감을 비로소 의식하게 될런지 몰라. ● 풍경이 빙그레 미소 짓는 사이, 우리는 그새 피곤하다. ■ 김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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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상수동


2011_1114 ▶ 2011_1120




초대일시 / 2011_1114_월요일_07:00pm
참여작가 권세정_김동희_김화영_노은주 손영신_손주영_조익환_최진석
관람시간 / 11:00am~07:00pm
서울 마포구 상수동 154-12번지

『안녕, 상수동』은 상수동 재개발 예정 지역에서 열리는 전시이다. 전시가 열리는 공간은 참여 작가 중 한 명인 조익환이 20 여 년 동안 살던 집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철거 되기 전에 이 곳에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냈고, 전시를 위해 총 8명의 작가들이 모였다. 작가들은 이사가 확정된 후, 3개월 간의 대화를 통해 본 전시를 기획했다.

권세정_골방에서 식물 키우기_식물, 자외선 조명_110×110cm_2011
김동희_독서를 위한 의자_의자, 스텐드_가변설치_2011
김화영_Memories in the room_책, 설치_430×238×225cm_2011
노은주_임시거주_혼합재료_140×81×81cm_2011
손영신_White Cube_2011
손주영_평화로운 공존을 위하여 : 바퀴벌레를 위한 비상구_아크릴 박스에 실크스크린, LED_2011
조익환_Moor_버려진 물건 위에 아크릴, 단채널 영상(1h31m)_270×490×250cm_2011
최진석_찻잔-노고지리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공간의 특수성 아래에서 작가들은 각자의 작업과 상수동 집의 공통 분모를 찾고, 각자가 맡은 방을 전시장으로 변화 시켰으며, 전시가 끝난 뒤 열흘 후에는 집의 철거 공사가 시작된다. 이번 전시는 집이라는 공간이 예술과 연결되는 지점을 모색하고 현대 사회의 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 안녕 상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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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VING


정경희展 / JUNGKYUNGHEE / 鄭璟熹 / mixed media 2012_0307 ▶ 2012_0318 / 월요일 휴관


정경희_WEAVING_목화씨_설치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216b | 정경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0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시작 Gallery SIJAC 서울 종로구 인사동 39번지 2층 Tel. +82.2.735.6266 www.artandsmart.co.kr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는 등장인물의 유년기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을 한다. 그 과자의 맛과 향이 촉매제가 되어 주인공은 깊은 회상에 잠긴다. 이처럼 경험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내면에 기록되어 의식 깊은 곳에 남겨진다.
정경희_WEAVING_캔버스에 유채, 목탄, 연필_설치_2011
정경희_DREAMING_캔버스에 유채, 목탄, 연필_91×60.5cm_2012

기억은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어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같은 상태로 보존되지 않는다. 기억은 기록되었던 그 자리와 장소에 머물러 있는 수동적이며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상태에 따라 조합되며 변화하는 능동적이며 가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주체는 우리 내부에서 의식,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상상이라는 정신행위이다. 상상은 기억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하며, 때로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엮어 새로운 기억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기억은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계속 변화하는 우리의 그림자이다.
정경희_기억이자라다_캔버스에 유채, 목탄, 연필_73×91cm_2011
정경희_기억이자라다_캔버스에 유채, 목탄, 연필_162×130cm_2011
정경희_GrowGrow_설치작업_2011

정경희의 작품들은 자람, 시듦, 조합하기, 엮기 등의 동사들로 이뤄져 있다. 작품 속에 표현된 동사들처럼 기억은 크게 부풀려지고, 사소하게 변하며, 다른 기억과 연결되고, 새로운 기억이 된다. 하나의 기억은 기억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마치 마들렌 과자에 대한 기억이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 떠나는 시작점이 되어준 것처럼.『Weaving』은 우리를 그 시작점으로 부른다. 기억으로 떠나는 여정의 시작점. ■ 장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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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화가 Local Painter


최호철展 / CHOIHOCHUL / 崔皓喆 / painting 2012_0308 ▶ 2012_0330


최호철_북아현 뉴타운개발지구_종이 판넬에 펜, 수채_90×200cm_2012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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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8_목요일_05:00pm
기획 / 아트라운지 디방
관람시간 / 11:00am~06:00pm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0길 4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동네화가 Local Painter ● 동네화가라는 말이 좋다. 지금 여기, 내가 있는 곳에서 눈에 보이는 것부터 출발하는 그림쟁이. 그러다 보니 자신의 동네를 잘 알고 즐겨 그리게 된 작가가 되고 싶다. 동네 사람들의 기억이 묻어있는 공간을 그리며 사람과 공간이 맺고 있는 관계를 담아내는 그런 작가이고 싶다. ● 작은 스케치북과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 다니면서 공간의 지나온 흔적을 읽는다. 아스팔트 도로아래 구비구비 흐르던 동네 물길이 느껴지고 물길따라 형성되었던 동네는 논밭을 뒤엎거나 산을 깎아낸 반듯한 동네에 밀려나 있다. 푹신하게 씨앗을 품어주던 흙도 모두 격리되어 만나기 힘들어지는 만큼 동네를 가꾸고 꾸미던 시절도 이제는 옛 이야기이다. ● 지금 내가 사는 동네인 하남시로부터 시작해서 출퇴근길인 광주, 용인, 이천 등 경기도의 이곳 저곳 중, 스쳐 지나가는 풍경의 일부이지만 누군가의 고향이자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할 동네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직 동네의 깊은 곳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고 껍데기만 옮기는 느낌이지만 내가 그리는 공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기억을 담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 아직 풍경의 겉모습만 그릴 뿐이지만 그곳의 땅의 변화와 주민의 손길, 기억이 담기기를 원한다.
최호철_경기도 광주시청앞 송정동_종이에 펜, 디지털 페인팅_75×51cm_2011
최호철_용인시전경_디지털 페인팅_55×80cm_2012
최호철_크로키_얼굴모음_종이에 펜_30×22cm×12_2000~10
최호철_버스 안에서 그린 크로키모음_종이에 펜_각 22×30cm_2000~10

한 공간의 역사가 한 세대를 지속하지 못하는 현대에서, 아직 갈등이 새겨져 있을 때 동네화가로서 현재의 기억을 붙잡기를 원한다. 동네의 공간이 급격히 바뀔 때 대개는 그 동네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몰아내는 결과를 낳는다. 쫓겨난 이들이 주인으로 살았던 모든 흔적을 감추고 지우는 것이 개발의 속뜻이 아닌가 한다. 주변의 무언가 번듯해지고 우람해질 때 주민들은 무언가를 조금씩 잃고 있다. 특히 공동체의 기억을. ● 여기가 무엇이었다고 하는 과거를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있는 것, 현재 보이는 것이 완성되고 정해져 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의 기억들이 지금 우리 앞에 이렇게 낯설게 변해있는 것처럼. ● 동네화가로서 그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공간, 풍경, 풍경의 주인공인 주민들을 그리고 싶다. 낯설게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 배경의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주인공 그대로의 모습인 동네 주민들과 그들의 배경이 되어 주는 풍경들을. ■ 최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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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03.07 14: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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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WARS EPISODE Ⅴ





스타워즈-에피소드 Ⅴ展   2012_0308 ▶ 2012_033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203e | 스타워즈-에피소드 Ⅳ展으로 갑니다.

오프닝 리셉션 / 2012_0308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 김경민_민성식_이지영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_10:00am~06:00pm

유엔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58-13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Focus on Exhibition ● UNC갤러리는 오는 3월 8일부터 30일까지『스타워즈 에피소드 Ⅴ』展을 개최한다.『스타워즈 에피소드』展은 2007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번째를 맞이하는 UNC갤러리 연례 기획전으로, 현재 촉망 받는 컨템포러리 작가들만을 엄선하여 선정해 소개하는 전시이다. 매 해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展은 주목해야 할 전시로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소개된 작가들은 국내뿐만 아니래 해외에서 까지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해 나아가고 있다. 올해는 좀 더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구성하였고, 각 장르 (조각, 회화, 사진)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김경민_외출_청동에 아크릴채색_125×95×24cm_2011
김경민_기념일_청동에 아크릴채색_150×90×45cm_2011
김경민_2011 서울모터쇼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00×300×180cm_2011
김경민_친한 사이_청동에 아크릴채색_44×55×23cm_2011

일상을 해학적으로 담아내는 조각가 김경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해 구성하는 작가이다. 특히 가족이나 사회의 관계 속에 꼭 필요하지만 놓치기 쉬운 요소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며 흥미를 유발한다. 일상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매일 같은 형태로 반복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데, 이처럼 간과하기 쉬운 일상의 중요한 요소를 작가는 자신만의 감성으로 유쾌하게 표현해낸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현대작가로서 - 사회와 제도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내면 및 정체성 고찰에 진중히 빠져들기보다는 - '일상의 삶' 자체에 집중해 이를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고 쉽게 다가간다.
민성식_캠핑가기_캔버스에 유채_162.2×112cm_2011
민성식_수영장_캔버스에 유채_162.2×112cm_2012
민성식_목수의 집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1

사회의 현대화 및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삶은 신속하고 편리해졌지만 우리는 삶의 소중한 부분을 잃어가고 있다. 민성식 작가는 현대 사회에 나타난 이러한 양면성을 의식하며, 자연으로 회기하고 싶은 소망을 고도에서 바라본 비현실적 풍경의 이미지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작품에서 보이는 화려한 색대비나 원근법을 무시한 불안정한 공간구성은 도시와 자연, 현실과 비현실의 대비를 드러내며, 그 사이를 통해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은 실제의 공간과 소품을 모티브로 삼아 그려지는데, 여기의 소품은 작가의 욕망과 기호를 반영해 현실 속 작가의 이상을 대변하는 모티브로 사용된다. 이러한 실제 소품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작품 속 현재 상황에 대한 추론 가능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지영_The little match girl_디지털 프린트_128×160cm_2008
이지영_Neverending race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8

이지영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 속담, 어릴 적 기억, 직면한 현실 등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지 세트를 구성해 사진으로 표현한다. 이지영의 작업은 풍경 및 인물 중심의 전통적 방식을 떠나, 작가 스스로 세트부터 소품 하나까지 직접 제작, 구성, 촬영한 구성사진(fabricated photography)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데, 작가가 과거 직접 경험했던 사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극복해야 할 문제에 대한 스토리를 재현한다. 마치 작가 스스로 맞닥뜨린 온갖 상념들을 각각의 공간에 구현하고 지워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닥쳐 온 시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지영_The Best cure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7
이지영_Treasure hunt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10

일상을 알기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 김경민, 현대 사회의 양면성을 보색 대비나 독특한 공간구성으로 나타내는 민성식,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제작한 세트와 소품들로 구성하여 촬영한 이지영, 이번『스타워즈 에피소드 Ⅴ』展에서 선보이는 작가들은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을 어렵게만 생각 하는 이들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며, UNC갤러리가 소개하는 3명의 작가의 작품을 통해 3월의 봄바람과 함께 잊혀졌던 다양한 감성을 경험하길 희망한다. ■ UNC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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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꽃






송진화展 / SONGJINHWA / 宋珍嬅 / sculpture   2012_0308 ▶ 2012_0401 / 월,공휴일 휴관




송진화_너를찾아서_70×15×1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507d | 송진화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홀로서기, 그것은 나에게로 향하는 지난한 여정 ● 삶에서 가장 신비로운 일은 나의 몸이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몸의 기능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작동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맥박이 뛰고 있는 심장에게 갑자기 멈추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의 눈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워 억지로 눈을 뜨고 있으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그러한 현상은 신경 생리학에 의하면 두뇌의 신경 기능의 작용에 의해 생기는 생리현상이라고 말하며, 또한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심약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은 서구 근대와 모던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의 정신이 사용하고 나면 폐기처분 해버리는 물질에 불과한 것인가. 물질은 미시 물리학에 의하면 바라보는 이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홀로그램의 원리를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마이클 탈보트(Michael Talbot)에 의하면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를 품고 있다.""(마이클 탈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80.) 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마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의 모든 행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각자의 몸에 기록되는 것이다.
송진화_봄날은간다_37×35×7cm_2011

송진화의 조각은 삶을 통해 느껴지는 그러한 내면의 심리적인 상황을 여성의 다양한 신체적인 동작으로서 풀어헤치고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현대 미술에서 주된 논의가 되는 몸을, 그것도 여성 신체의 표정을 주된 소재로 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논의하고 있는 젠더(gender)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생리적인 신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냄으로써 본질적인 실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사회··문화적인 체계에 의해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함으로써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인체 조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성을 벗어나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몸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그러한 그의 인체 조각은 「가슴이 터지도록, 2010」의 작품에서 보듯이 「카니발의 저녁, 1886」에서 몽환적인 풍경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작품과 같이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에서 달리고 있는 여성과 개의 모습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을 느끼게 한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앙리 루소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이국적인 풍경과 합일된 남녀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무소유와 무위(無爲)의 정신을 통해 일상의 삶 속에서 '나'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일체화된 세계를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다.
송진화_나천사_108×70×50cm_2012

무위와 쓸모없음 ●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 동양의 무위 사상은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의 작품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 등에서 보듯이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 전반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에서 보듯이 나체 여성의 등의 한 가운데에 패인 골들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에서 보듯이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여성의 얼굴과 검게 몽우리가 진 여성의 젖가슴은 나무가 본래 지닌 특성과 지나온 삶의 시간들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모습을 여성의 신체적인 형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 조각해낸 것이다. 그의 인체 조각은 오귀스트 로댕의 「신들의 사자, 1890-91」의 조각에서 보듯이 건강한 여성의 음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청동의 인체 조각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톰 플린, 조각에 나타난 몸, 김애현 옮김, 예경, 2000. 참고) 김일용의 「체적(體積)-신체의 기억, 2002」의 라이프 캐스팅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시간을 통해 인체에 기록된 상처와 흔적들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 닮아있다. 하지만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김일용의 조각과는 달리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축적된 삶의 시간들과 심리상태를 나무의 성질과 그 나무가 살아온 삶의 이력을 빌어 형태를 제작하는 것이다. ● 즉 그의 인체 조각은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상태와 축적된 삶의 무게가 지닌 작가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똥밭에 굴러도, 2011」, 「또 다시 봄, 2011」, 「살아내기, 2010」에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똥밭에 굴러도, 2011」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삶의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은 나이가 들어도 봄이 오면 사춘기의 소녀와 같이 곱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선은 어딘가로 향하는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다.
송진화_따끈따끈_90×45×30cm_2011

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사상은 또한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의 지나온 이력을 볼 때 장자의 내편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下有之鄕)』(나무 줄기가 옹이투성이고 구불구불해서 목수들이 사용할 수 없는 나무일지라도 넓은 벌판에 심어두면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한다.)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그가 사용한 나무들과 돌과 뿔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나서 폐기처분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나, 또는 작가가 여행하면서 길에서 주운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L1020583」은 꽃다운 25살에 주운 꽃다운 돌이며, 「또 다시 봄, 2011」은 조계사 벤치에 사용되었던 팽나무이다. 그러한 사연들은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의 곳곳에 스며있다. 누군가의 집 자개 장농 문짝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봄, 2009」의 작품으로, 상계동 어린이 놀이터 늑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똥밭에 굴러도, 2011」의 작품으로, 가운데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로 사용되었던 것은 「살아내기, 2010」의 작품으로, 그리고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이다. ● 살아온 삶의 시간들과 흔적들을 지닌 폐기처분 될 나무는 그의 인체 조각이라는 창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다시 숨을 쉬는 것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있으며, 「살아내기,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가운데에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는 눈먼 강아지를 등에 업고라도 그 무언가를 부여잡고자 작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 애착의 미련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의지를 투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목수에게 쓸모 없는 나무는 장자의 시선에서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존재로 비추어지듯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폐기처분 될 나무들은 작가에게 홀로 서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잣대는 작가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잣대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정신과 물질이 이원화된 인식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송진화_바람에실려_50×100×30cm_2011

홀로서기와 무소유 ●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2012」의 조각 작업에서 보듯이 불교 최초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그 누구에게도 애착을 갖지 않고, 무소유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의 일체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작가에게 있어서 「빨간신,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집착이나 욕망을 끊임없이 정화시키고 홀로 서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 홀로 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독립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년 여성의 신체를 통해 홀로서는 여성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홍현숙의 홀로서기의 모습과는 유사하나 처해있는 상황과 심리적인 지향점은 다르다. 홍현숙의 홀로서기는 「체조, 2005」의 단채널 비디오에서 보듯이 TV의 에어로빅 장면을 속옷만 입고 따라하는 중년 여성의 영상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머리를 깍고 물을 주는 영상들을 통해 집안에 갇힌 중년 여성들의 홀로서기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데에 반해,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가슴이 터지도록, 2010」에서 보듯이 집안에 갇혀 있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노는 행위와도 같다. 그 모습은 남성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혼자 짖고 까불며 노는 행위처럼 보이는 것이다.
송진화_힘겨움이내등을밟고지나가기를기다린다_13×39×13cm_2010

그것은 송진화의 홀로서기가 남편이나 자식이나 그 밖의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행위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집착하는 행위로 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홀로서기는 타자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데 반하여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는 행위는 역동적이고 외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시선들과 마주하게 될 때 그 심리적인 상태는 정반대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전자가 역동적이고 외향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것이다. ● 그러한 심리적인 상태는 송진화의 인체 조각에서 사용되는 색채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색채의 특징은 본래의 바탕을 덮지 않고 그 위에 색을 덧칠해가는 동양의 채색화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한 색채의 질감은 「히~,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나무 바탕의 질감이 잘 드러나도록 사용하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화려한 듯이 보이나 수수하고 담백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듯이 보이나 튀지 않으며, 그 바탕이 감추려 하지 않고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 신체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하나의 문화적인 기호이지만, 몸은 자신의 시선으로 향하는 순간 문화적인 기호나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몸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field)이며,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이다. 누군가나 무언가에, 설령 그것이 자신의 신체라 할지라도 집착한다는 행위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들을 과거의 행위들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끝없이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들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그것 또한 현재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무위와 무용론과 무소유라고 하는 동양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상황을 때로는 기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조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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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be-Nature






구현모展 / KOOHYUNMO / 具玄謀 / installation.drawing   2012_0308 ▶ 2012_0407 / 일요일 휴관




구현모_들 野_혼합재료_133×8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09k | 구현모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 Gallery b'ONE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32.1273 www.gallerybeone.kr




도치된 풍경을 바라보다 ● 근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본능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을 억제하고 견고하게 축조된 비물질적 구조 속에 신체를 부합시키는 행위다.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맞춰 진화해온 신체를 인위적으로 재편한 노력은 동시대 문명의 물적 풍요를 견인한 동력으로 기능했지만, 동시에 신체에서 발화하는 다층적인 감각들과 추상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은폐시켜버린 것이기도 했다. ●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구현모는 감각으로 접근하는 조용한 경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작가다. 그는 사물과 풍경에 대한 관찰과 사고의 과정을 스스로 관조하는 독특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특정한 접촉들을 즐기는 구현모는 모호하고 비논리적인 사유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 그의 작업은 명백한 답변의 여지가 적은 모호한 질문들을 연속적으로 제기해온 것이었다. 분명한 응답의 여지를 고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언어적 모호함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물음들을 던져왔던 것이다.
구현모_집_혼합재료_110×28×34cm_2012

'집'이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속성을 반영하는 일차적 풍경이자 환경으로서 존재하는 집의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집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구역 내에서 확장된 자아이면서 동시에 외부로부터 그 한정된 영역을 방어하는 대상이다. 이 본질적인 중의성으로 인해 집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물질과 비물질과 같이 항시 마주쳐야 하는 어떤 경계의 느낌을 내재하고 있다. 구현모가 집이라는 대상에 몰두해온 이유는 바로 그러한 중의성에 대한 선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과 밖의 경계'의 느낌을 도치시켜 새로운 풍경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번 개인전에서 구현모는 종이와 나무를 주된 재료로 하여 축조된 세 종류의 집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모델링과 같은 스케일의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이 집들은 신체의 스케일을 넉넉히 수용하되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는 존재성이 역전된 것들이다. 그 크기는 집으로 표현하는 어떤 풍경의 느낌을 관객이 한 눈에 조망하게 하기 위한 작가의 선택이다. 작게 축소된 집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집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마치 모형장난감과 같이 핸디한 오브제로 인식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즉 집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유의 과정이 왜곡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니쉬를 엷게 바른 종이와 같이 그가 선택한 재료와 기법은 원래의 고유한 느낌을 차단시켜 결국 작품의 물리적 특질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상화의 왜곡을 고려하여 내린 작가의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현모_굴뚝집_드로잉

그가 전시장에 오브제로 구현한 집은 이끼집, 눈집, 번개집 등이다. 이끼집의 내부에는 녹색의 이끼가 조밀하게 들어차있다.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끼라는 소재가 실내에 한정되어 펼쳐진 느낌은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원과도 같은 풍경 한 자락이 실내로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들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초원의 느낌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눈높이에서 펼쳐져 있다. ● 눈(雪)집의 내부에는 흰 눈이 가득 깔려 있다. 이끼집이 어떤 시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면 눈집은 온도나 계절감과 같은 촉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 작은 집의 안쪽에 쌓여진 흰 눈의 느낌은 외부의 풍경과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전시장의 느낌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구현모_박제_목제, 나무, 철_70×12cm_2012 구현모_달_종이, MDF_74×74cm_2012

번개집의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번개가 치고 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공감각적 현상이 집 안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끌어와 실내에 두는 구현모 작업의 기본적 토대를 설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즉 외부에서 경험하는 번개에 대한 신체의 수동적 기억은 번개를 집 안으로 들여와 재현시킨 대상을 관조하게 되는 새로운 상황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상의 차원으로 반전되면서 새로운 관찰의 시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 이 세 집은 공히 관객의 시야를 고려한 높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들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집의 스케일이 부여하는 비례에서 살며시 벗어나 있다. 그의 집들은 공히 물리적인 제약으로서의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자연의 느낌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구현모_번개집_2012

오브제의 형식으로 배치된 세 종류의 집들 외에도 함께 벽면에 배치된 드로잉들을 통해 그의 자유로운 사고의 면면을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집, 구름을 안고 있는 집, 숲을 끌어온 집과 같이 흥미로운 집의 이미지들은 그의 관심이 가진 연속성과 감각적 사고의 단면을 들춰보게 한다. 구현모의 간결한 드로잉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오브제로 재현한 집들 또한 3차원적 형태로 구현한 드로잉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모호한 정신세계의 이미지들을 절제된 형식으로 재생하겠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불가지의 영역을 수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완성된 사고의 결과물을 관객 앞에 내어놓겠다는 의도보다 관객의 사고가 중첩될만한 여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작가적 태도가 깔려있다. 이것은 드로잉이 보유한 특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과정과 결과의 미학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드로잉 미학의 특징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과잉의 상태로 존재하는 이 시대에 밀도 높은 결과물을 추가함으로써 또 하나의 과잉을 초래할 필요가 있느냐고 구현모는 말한다. 고백 같기도 하고 질문 같기도 한 그의 언어는 그의 작업에 내재한 본질적인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가 만든 작은 집들이 근대화된 삶의 패턴을 거스르는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은 그 작은 집들과 조우하는 시선의 토대 위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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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light zone






김을展 / KIMEULL / 金乙 / drawing   2012_0308 ▶ 2012_0422 / 일,공휴일 휴관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26×36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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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8_목요일_06:00pm

『My Great Drawings』 출판기념회가 리셉션과 함께 열립니다.

후원 / 로얄&컴퍼니(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요일_11: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로얄 GALLERY ROYAL 서울 강남구 논현동 36-8번지 로얄TOTO빌딩 2층 Tel. +82.2.514.1248 art.royaltoto.co.kr




저 들판에 야산(野山)을 짓고, 너머의 바람을 쐰다. ● 김을은 작업실에서 하루 온종일 그리고 만들고 붙이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틈틈이 사색(思索)하며 즐긴다. 삶의 무게보다 예술의 무게가 무거워진 지금 지루한 일상은 유토피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마음가는대로 고집스럽게 살아온 그는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한국미술의 관습을 역순으로 걸어왔다. 생(生)의 한 바퀴를 돌아온 시점, 그에게는 '드로잉'이라는 것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김 을 드 로 잉!" 그만큼 자기의 위치에서 드로잉의 존재감은 깊게 뿌리박혀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가 향유하는 예술의 끝, 드로잉의 끝은 어디쯤일까?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2002년을 기점으로 그의 드로잉은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거의 매년 '작업-전시'를 지속하며, 더불어 드로잉북도 만들어냈다. 처음과 달리 주변인들로부터 '이제는 그만하지'라는 우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또 그리며 점점 더 예술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솔직히 우리들은 김을 드로잉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지인이라는 덕에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나 또한 잘 모른다. 하지만 그를 믿는다. 어떤 기회주의자보다, 전략적인 사람보다, 정치적인 사람보다,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보다, 미술사를 믿는 사람보다, 주제를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저 들판에 구름을 쫓는 野人 같은 김을의 진정성을 믿는다. 우리가 만들어놓고 정해놓은 언어와 행동의 규칙아래 우리는 무수히 지나치는 무의식보다 확연한 이미지와 글 그리고 말을 믿고 그것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행해왔던 드로잉의 행간을 너무 쉽게 간과하거나 그 드로잉 너머의 생각을 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김을은 저 들판, 저 野人 같은 삶을 위해 '날 것'으로써의 드로잉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는 예전에 '혈류도'를 그린 후 특정한 주제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그리는 고민에 빠졌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드로잉으로 풀고, 현재 그 판타지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 판타지는 그의 나이 불혹의 끝자락에서 시작되어 이미지 언어를 다시 쓰듯 하나씩 언어를 찾아갔고, 십년이 흘렀다. 빠른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로 역주하듯, 가볍고 느린 언어의 질주는 인생역정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 한계를 넘은 자연스러움과 자율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26×36cm_2011

삶이 예술의 무게로 바뀌다보니 온갖 상념들이 뒤섞인다. ● 사랑, 농담, 정념, 눈물, 도덕, 욕망, 아름다움, 상상, 영혼, 종교, 웃음, 진실, 꿈, 분노, 바람, 피, 장난감, 시간, 세계, 물리, 자연, 우주, 공간, 몸, 본질, 이상, 생명, 존재, 가치, 의문, 죽음, 현실, 원리, 그림, 정의, 역사, ... ● 이것이 김을의 생각으로 뒤범벅되어 화두라는 '빈 그릇'에 오랜 숙성을 거친 후, '드로잉'이라는 다양함의 변주에 리듬을 타게 된 것이다. ● 그 시작은 작았고 낱낱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 낱낱들이 모여지면서 거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2009년 김을이 부여한 'my great drawings'이다. 뒤늦게 깨달은 드로잉은 그동안 그가 품어왔던 미술 아니 예술의 모든 것들을 되돌려 놓는다. 드로잉이 단순히 '긋기'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척탄병처럼 김을은 세상의 모든 대상을 사유(思惟)함으로써 깨닫고 얻어지는 존재감을 찾고 재해석한다.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도 많고, 작업할 것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매일 해가 뜨고 저물어가는 자연의 순리에 난감해한다. 하지만, "김을은 김을이다!", "그림 이 새끼!"라는 글자드로잉에서 그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김을은 현실에 안주하는 꿈을 꾸지 않고, 들판에 야생하는 그냥 풀처럼 野人의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그는 넓은 들판에 조그마한 野山을 만들어 그 위에 홀로 서서 동쪽 한 번 바라보고, 서쪽 한 번 바라보고, 구름 따라 바람을 쐬며 새처럼 날고 싶어 한다. ■ 이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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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oduction & The Paradox Problem




한인규展 / HANINGYOO / 韓印奎 / painting   2012_0307 ▶ 2012_0313



한인규_Propriety(禮)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The K Gallery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am~06:00pm

갤러리 더 케이 GALLERY THE K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blog.naver.com/gallery_k



아이러니스트의 서가 – 역설과 이중성의 장면 ● 인적이 드문 곳에서 세속의 삶들이 지분대는 도시 한 가운데로 작업실을 옮기는 중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는 다비식을 3박 4일 동안 치렀다. 떠남도 멈춤도 이별도 정지도 없는 모든 흘러감을 일시적으로 묶기 위해 죽은 자(것)와 산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별리(別離)의 의식은 망각과 재생을 위한 것일 텐 데, 그 모든 무상함(의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극적)의식을 치른 자가 며칠 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무엇을 겪었고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뭔가 다른 것,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그에게 이미 있었던 것을 기꺼이 감행하기로, 대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리라. 작가는 다시 시작하기로, 자기를 지우고 다시 생겨나기로 약속한다. 그가 화면에 마치 최초의 시작인 듯 '세우고' 자신의 버팀목으로 의지한 것은 서가(書架)이다. 세상을 사는 것과 세상을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 근대는 읽는 것에 헌신한/매몰된 자들의 시대이다. 세상을 사는 데 읽기가 무용했던 시절 '시각'은 절대적 감각이 아니었고 인간은 여타 다른 동물과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시각이 절대화되고 인식과 앎에의 욕망이 요구되면서 탄생한 '인간'의 서가는 인간적인 세계의 크기를 과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읽는 자는 무지(의 무능)에 대한 공포를 강요당한 자이고, 읽는 자는 지성이 세계와 동시에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확신하는 신경증적 주체이다. 책을 통한 세상의 전유는 심지어 세계보다 세계에 대한 표상이 더 우월하다는 자만심/낙관을 깔고 있다. 삶은 책 뒤로 물러났거나 책 속으로 포획되었거나 책 너머로 숨어들었다. 책을 읽는 자는 그럼에도 책에 세상이 있다고 책과 세상이 똑같다고 믿는/착각하는 자이다. 책은 세상을 반복하면서 은폐하고 세상을 가리키면서 세상을 살해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다.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책의 집/무덤, 서가. ● 이미지로 세상을 재연/재현하는 작가는 책의 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예술은 지성에 대한 비판이며 감각의 집요함이며 (근대적)인간의 궁핍에 대한 증언이라는 근대적 선언은 예술이 지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읽되 그 읽기가 감각의 힘을 파괴할 만큼 지성에 가까워도, 감각의 논리가 구성될 수 없을 만큼 광기에 접근해도 안 되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광기와 지성 사이에서 광인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지성의 견제력일지 모른다. 예술가를 광인으로 묘사하는 일은 근대에 흔한 일이었으니. 따라서 예술가는 책에 대해 양가적이다. 읽는 자는 감각을 지성화하는 데 능숙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광기를 형식에 가둠으로써 경계 없이 날뛰는 광인과는 지위를 달리한다. 예술가는 읽되 다르게 읽어야, 비스듬히 읽어야 하는 자이다. ● 새로 옮긴 인가(人家) 안 작은 작업실에서 일년 간 그가 서가와 벌인 '전투'는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했다. 우선 작가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촘촘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한국어판 겉표지를 병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동시대에 들뢰즈만큼 예술가들을 매혹시키는, 예술을 위한 철학자로 거론될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인간을 위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이 사라진 풍경을 만들려는 반(反)-근대적 인간 들뢰즈의 사투는 곧 예술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렇기에 들뢰즈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근대적 아카이브였다. 들뢰즈를 읽지 않아도 예술가는 이미 들뢰즈-되기를 육화시킨 인간 유형일 텐 데, 박사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문이나 이론서를 접했던 작가에게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들뢰즈를 읽어야 한다는 압박은 들뢰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독해가능성과 독해불가능성이 중첩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은 작가에게는 읽기의 공포와 매혹이 중첩된 장면이었다.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앎의 탐욕과 무능에 대한 비판이면서 읽기의 희열(jouissance)을 증언하는 텍스트를 시각적 이미지로 선택하는 최초의 장면 뒤에, 작가는 미군부대 내 도서관에서 경험한 일화를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작가는 '닭 생산Poultry Production'과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When I grow up I want to be a...'란 제목이 닭과 송아지 이미지와 병치된 책의 겉표지를 서가 위에 중첩시킨다. 근대적 이념/이데올로기로서의 '생산'은 생산 제품이 닭이란 생명체가 되면서 작가에게 낯선 공포와 기이함을 유발시켰고,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란 아이들이 쓰는 문장이 송아지의 말이 되면서 우스꽝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외국어의 이질감, 인간과 가축, 언어와 이미지의 기괴한 충돌이 갖고 온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연상들을 가시화했다. ● 이제 화면 속 서가는 현실적인 서가가 아닌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한 비현실적인 서가로 바뀌어간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인용한 서가가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투사된 서가로 장면을 전환한다. 책 제목이 거의 '무감각한 사회'로 통일된 서가에 작가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수평으로 병치시킨다. 흥미로운 것과 에로틱한 것, 신기한 것에 몰두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게르니카」라는 지명으로 고발했었다. 아이같은 피카소가 현실의 비극에 진지함으로 반응한 결과물인 「게르니카」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감각한 사회'라는 책 제목과 '감각'의 산물 게르니카 이미지의 병치는 향수병, 미니어쳐 소품들, 그 외 평범한 인테리어 소품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모호한 맥락으로 들어간다. 그는 진지한 발언을 애써 가벼움과 경박함, 천진함의 이미지로 덮으려 한다. 덧없이 휘발하는 삶의 찬란함과 허무함을 상징하는 향수병들, 아직 삶의 비극에 노출되지 않은 이들의 장난감, 애써 삶의 무거움을 외면하는 소품들은 전쟁의 참극을 재연한 '피카소'를 하나의 실내 장식품의 지위로 추락시키면서, 작가 스스로의 진지함 마저 희화화해버린다. 이는 비극과 소극(笑劇)이, 진정성과 허세가 극단에서는 하나로 겹친다는 것을 '본' 자의 '반성'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작가는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인식에 확신을 갖고 몰입하지 못하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나르시스트가 아니며,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자이며, 몰입과 초연을 동시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자이다. 몰입은 비지성적이고 초연은 무감각적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몰입하는 자신을 동시에 보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사물과 인간의 진실을 상호모순적인 역설의 상태에서 찾아내려는 자이다. 변증법적 종합이 불가능한 모순의 상태에서 사물과 세계의 느낌을 유지하려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는 지나친 진지함, 지나친 이성, 지나친 대립으로는 삶의 진실이 드러날 수 없다는 이유에 근거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진지하면서 희극적이고 몰입하면서 초연한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모호성, 양가성, 역설을 실천하면서 일관성, 인과성, 정합성, 종합과 같은 근대적 인식론을 전복시킨다. 아이러니스트는 결론을 내리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동시에 두 가지 상황을 보려는 중에 장면을 열어놓는다. ● 작가는 도덕 혹은 윤리에 대해 역시나 양가적이다. 작가는 교육자였던 아버지를 존경한다. 이것은 흔치 않은 경험인데, 교육자가 곧 아버지이고 그 둘이 중첩된 존재를 아들-학생이 존경하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는 예술가에게는 곤궁을 만들어내는데, 예술가는 동시대의 상식과 규범이 어떻게 욕망과 성을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지를 '고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반-도덕적이기에 반-시대적이라는 일종의 예술의 규범과 아버지-살해를 실현하지 못한 아들의 무능은 작가의 화면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 현실에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가져야할 윤리적 덕목을 압축한 공자의 사자성어를 시각화한 「인의예지 仁義禮智」는 아버지-법을 위반해야하는 아들-예술가의 어려움에 대한 장면이다. 규범에 대한 위반을 미적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로서의 작가는 아버지-법에 대한 공포와 매혹을 「인의예지」의 풍경에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상태로 담아냈다. 한자 인, 의, 예, 지를 책으로 형상화한 장면은 그 사자성어가 자신을 얼마나 괴롭힌 '아버지'의 말씀인지를 구체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그 사자성어에 갇힌/반복하는 도덕적 존재도 그 사자성어에 혐오감을 갖는 부도덕한 존재도 못된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의 도덕적 모호성을 유아적 소품들을 통해 드러낸다. 장난감 주사위, 미니어쳐 용, 양, 기린, 기차, 소방차, 불상, 비밀(욕망의 기표들)이 가득한 가방, 미니어쳐 화분, 등등은 어른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는 도덕적 규범을 하나의 농담으로 재배치시킨다. 작가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가볍게 만들면서 아버지를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는 다 큰 아이처럼 아버지-되기에서 슬쩍 미끄러진다.
한인규_Wifman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PEEP」은 peep란 단어의 좌우대칭 구조 때문에, 또 '엿보다'란 단어가 갖는 의미망 - 비밀, 포르노적 시선, 여성/타자의 대상화 - 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연작이다. 여기서도 서가는 작가의 상상의 서가로 전환되었고 P E E P를 시각화하며 인포커스된 책들과 후면으로 아웃포커스된 책들 사이에 형성된 깊이/공간은 흐릿한 후면을 엿보고 싶은 욕망을 발산시킨다. 물론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우리의 엿보기의 대상은 인포커스된 책 제목들이고 「페미니즘의 거울」, 「정복의 법칙」, 「국가 이미지 전쟁」, 「레닌」, 「매맞는 여성」, 「Answer to History」과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는 진지한 책들과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제목이 유발하는 웃음 사이에서, 화면은 농담과 진지함이 뒤섞인 모호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특권)으로 산다는 것, 남성이 이미 항상 갖는 유리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남성이다. 작가는 여성이 억압당하는 사회, 여성의 곤궁에 대해 배운 자이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자신의 남성적/포르노적 욕망/환상을 반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자신의 화면에 드러낸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성이고자 한다. 인의예지가 극히 일부유교사회 기득권의 덕목이었음을, 그것이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와 억압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성찰하면서 작가는 '아버지'보다 더 윤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peep이란 단어와 병치시키는 이중적 존재이다. 그는 욕망과 의식, 앎과 감각,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이 벌이고 있는 '전투장'으로서의 삶을 상연한다. 그의 화면은 의식적이고 성찰적이면서 희극적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인간적'이다. ● 그의 1년여에 걸친 작업의 맨 마지막은 「여성 wifmann」이 차지한다. 고대 영어 wifmann은 글자그대로는 '여자남자'로 번역될 수 있을 텐 데, 이는 모든 사람은 남자mann이고 그 중에 '여자남자'와 '남자남자'가 있다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의 방식을 확인시켜준다 – 물론 한국어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wo'man'도 그런 표식을 갖고 있다. 앞서 분석한 작품 「PEEP」의 구조를 상하 대칭의 구조를 통해 반복하고 있는 「wifmann」은 베르미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와 고흐의 자화상이 인포커스와 아웃포커스의 방식으로 중첩되게 되어 있다. 예술가로서 고독하고 궁핍한 길을 걸었던 고흐를 하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베르미어의 저 유명한 걸작을 상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예술과 관련한 자신의 욕망의 이중성을 가시화한다. 즉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 그렸던 작가가 되고 싶은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성/사랑의 승화로서의 예술이라는 저 오래된 '남성' 작가의 욕망을.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과 자신이 그리고 싶은 환상 사이에서 작가는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을 저 '아래'에 뒤집어 배치함으로써 '위대함'의 자리에 대한 통념을 배반하고, 그럼으로써 작가의 지위를 희화화하고, 그럼으로써 나르시스트적 진지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기이한 존엄성을 성취한다.
한인규_Wifman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책과 이미지, 성과 윤리, 규범과 위반,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 작가는 양립불가능한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적인 장면이 자신의 삶의 풍경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결백, 순수, 진지에의 수사(rhetoric)에, 더 우월하고 위대하고 선한 지위에 이르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존하려고 한다. 삶은 본래 모순되고 모호하고 양가적이고 그래서 어려운 타자이기 때문이다. 양 극 중 어느 하나를 더 우위에 두지 않은 채 두 극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싸움이 아니라 놀이이다. 싸움은 타자를 적으로 상정한 자들이 벌이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타자를 살려두고 나의 힘을 최소화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작가가 벌이는 싸움은 전쟁이 아닌 놀이를 삶으로 환대하려는 이가 경계해야 하는 근대적 구도와의 싸움이다. 아이는 그냥 놀지만 어른은 놀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적과 아군, 나와 너, 옮은 것과 틀린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는 인식적 폭력을 경계하면서 놀기. ● 그것이 새로 태어난 사람, '신생아'로서 기억과 싸우고 인식의 집요함과 싸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 모순과 비일관성의 삶을 환대하려고 하는 작가의 1년의 결과물이다. ■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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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bing Up!




이가경展 / LEEKAKYOUNG / 李佳景 / video.installation   2012_0308 ▶ 2012_0401 / 월요일 휴관



이가경展_브레인 팩토리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403b | 이가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6:00pm

기획 / 오숙진(브레인 팩토리 디렉터)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이미지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학 ● 벌거벗은 아이가 비스듬히 세워진 나무막대 위를 오른다. 두 팔 벌려 막대 양쪽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어 제법 가뿐하게 막대등반을 즐기던 아이는 중반에 다다르자 갑자기 두 팔을 모으고 쭈-욱 위로 헤엄쳐 솟아 오른다. 아이의 귀엽고 앙증맞은 뒷모습에 매료된 관객을 뒤로하고 아이는 다시 막대를 잡고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가 사라져버린다. 목탄으로 그려졌던 주인공이 사라진 막대 위에는 회색의 지우개 자국이 그 여운을 대신한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채택된 2009년도 작 「Climbing Up!」이다. 스토리의 전말은 막대위로 자취를 감춘 아이의 모습이 다시 막대 아래에서 출현하여 1분 남짓한 그의 여정이 반복되면서 다시 시작한다. Two-Channel로 제작된 이 영상작품의 왼쪽은 클로즈업된 아이의 무브먼트가, 그리고 오른쪽에 막대 전체가 담겨 아이가 등반하는 모습을 원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작가가 '일상'이라고 명했던 아이의 움직임은 우리의 매일을 상징하는데, 일상과 일상의 반복 그리고 일상의 열정을 드러낸 이가경의 작업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9점의 비디오 작업은 연필드로잉이나 드라이포인트로 제작된 무채색의 판화를 이어 붙여 완성된 애니메이션 작품들인데, 내용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뉴욕에 거주중인 작가의 관찰 대상이 되었던 그저 평범한 뉴욕커들의 '일상'이고, 둘째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인 일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퍼포먼스'로 나뉜다. 전자는 「Untitled-Grand Army Plaza, Brooklyn.NY.03.09」등과 같이 주변의 매일을 묘사한 작품들이고, 후자는 「Dance, Dance, Dance」, 「Walk-2010」등과 같이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촬영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업들인데, 퍼포먼스는 대부분 반복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소재로 한다. 한편, 연필로 벽에 창문을 그려 넣고 창문의 열려있는 틈에 미니프로젝트로 동영상을 투사하는 설치작품「Window View」도 출품된다. 오전10시경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의 광경을 묘사한 이 작업 외에 또 하나의 설치작품 「Days in New York – Horizontal」은 각기 다른 지하철역 다섯 군데를 촬영하여 제작한 Five-Channel 애니메이션이다. ● 대부분 초기에 연필 드로잉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이미지들을 연속시키기 위해 한 컷의 드로잉을 촬영한 후 지우개로 지우고 그 종이 위에 시퀀스를 그려 넣어 다시 찍는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의 자취를 지우개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화면 안에 남기는 결과를 낳는다. 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기술적으로 얇은 라인드로잉을 기본으로 한 판화기법인 드라이포인트의 특성상 한 이미지가 아크릴판에 새겨지고, 그 다음 시퀀스가 같은 판 위에 새겨졌을 때 그 전의 이미지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자국이 제법 선명하게 남기 때문에 화면 안에서의 시간은 흐르면서도 그냥 흘러가 없어지지 않고 현재와 과거가 기술적으로 혼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효과는 그가 표방하는 일상성의 기본 전제가 되는데, 이를테면 우리의 매일이 일어남과 동시에 스러지고 다시 같은 일상이 같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의 테크닉과 절묘한 연계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업 안에서 시간의 개념은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여 인식의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매력을 지닌다. ●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판화(혹은 드로잉)를 무빙이미지로 만들기 위해 초당 다섯 프레임의 판화를 시퀀스로 찍어 연결하는 노동집약적 과정은 화면 안에 창조된 일상의 세계와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작가 이가경의 일상이 유기적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37초의 영상 「Untitled-Grand Army Plaza, Brooklyn.NY.03.09」를 만들기 위해 156개의 판화를 하나하나 제작한 수고로움이 이가경에게는 '산다는 것'과 '살아있음'을 매 순간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대한의 방법인 것이다. ■ 오숙진
이가경_Climbing Up-2009_다채널 비디오, 칼라, 사운드, 나무막대 위에 목탄_00:01:00 loop_2009


The Mechanism of Time Created by Superimposition of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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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7 14:08:03 / Good : 362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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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










고민정展 / M.J Ko / 高旼政 / photography   2012_0309 ▶ 2012_0323 / 일요일 휴관






고민정_New town project#1_람다 프린트_90×130cm_2012





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6:00pm

주최/기획 / CSP111 아트스페이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인간은 이기적인 힘과 권력을 이용해 자연을 파괴함과 동시에 재창조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작가 고민정은 양면성의 이미지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 꼴라쥬시킨 입체물을 다시 사진으로 기록하며, 파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자연파괴를 통해 유토피아의 공간으로 재건축되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조선의 전기 화가 안견의 산수화로 '몽유도원도'은 왼쪽의 현실세계, 오른쪽의 도원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서로 독립된 듯 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고민정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충해준다. 이번 고민정작가의 개인전 『夢遊桃源圖 (몽유도원도)』는 사진과 영상 작업들로 시각적 리얼리티가 파괴되고 재탄생되면서 형성되는 양면성에 대한 경험을 관람자들과 함께 소통해보고자 한다. ■ CSP111 아트스페이스
고민정_untitled#4_람다 프린트_L 75×100cm, S 45×60cm_2011

고민정의 신몽유도원도 ● 개발도상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많은 것이 파괴되기보다 건설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도시 건설이다. 도시는 뉘앙스에서부터 자연과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도시건설에 윤리적인 문제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고 그렇기에 아무도 자연의 파괴와 연관 짓지 않았다. 지금은 개발도상국이라 하기에 조금 많이 왔다. 삶의 질이나 사유의 깊이가 깊어진 건 아니라 할지라도, 흔히 말하듯 살기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개발은 여전하다. 도시의 본성이 그래서 일까.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문화와 자연을 끌고 와서 사용한다는 점이다. 공원과 조경이 그 예이다. 짧은 시간에 시멘트로만 덮여있던 한강부지는 공원으로 녹지화 되는 중이고, 성냥갑처럼 꽂힌 빌딩에 곡선과 사선을 긋고, 그리고 조경과 조형물에 상당한 공간을 할애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위성이다. 그 현상이 어떻게 변했건 간에 인위성까지 감출 수는 없다. 결국 개발의 논리 저변에 깔려있는 정치적인 속성이 그 인위성에 의해 들춰지는데, 하지만 이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들춰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보인다면 정치적인 속성은 이를 더욱 악용할 것이고, 직접적으로 들춘다면 정치적인 속성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고민정_몽유도원도-#2_람다 프린트_75×100cm_2011

개발은 본질적으로 파괴를 수반한다. 이제는 자연의 파괴를 연관지어야 한다. 이는 윤리적으로도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예술의 실천과 개입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술은 인식하기보다 감각하는 자의 것이고, 표현을 유머와 은유를 통해 놀이로 위장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 고민정의 사진은 보는 순간 개발과 파괴의 동시적인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사진들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조합한 사진에는 동화같은 파란 하늘과 노란하늘과 함께 말 그대로 조각구름이 있다. 건설되는 건물의 골격과 파괴되는 건물의 골격이 서로 차이나지 않으면서 원색과 대조되는 무색흑백으로 배치되어 있다. 간혹 작가에 의해 색을 부여받기도 하지만 건물은 여전히 시멘트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사진에 조작된 자연물과 함께 공사 차단막이 색을 지녔다는 이유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파괴의 대상으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과거적 기와집이나 건물, 특히 텐트는 색이 거세되지 않았기에 역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진의 전반을 아우르는 느낌은 도시건설처럼 위압적인 것 같지만, 작가의 시선은 이와 달리 파괴되는 부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차단막도 목적을 다하면 사라질 테니 말이다.
고민정_New town project#2_람다 프린트_75×100cm_2012

20세기를 시작할 즈음 앗제(E. Atget)는 인물을 배제한 풍경을 찍음으로써 벤야민에게 사진에 대한 성찰을 제공했다. 벤야민은 "사진촬영은 앗제에 와서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사진의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인 의미이다"라고 말한다. 고민정의 사진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건설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강하게 전하는 그녀의 사진은 일종의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이다. 도시건설, 파괴, 억압, 과거의 부정, 자본, 욕망, 권력 등 역사적 사건의 동기들에 대한 증거이다. 왜 더 좋은 삶을 위한 재건이 이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밖에 줄 수 없는 걸까. 여기에 강하게 작용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권력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한 계몽주의이다. 이미 알듯이 역사는 항상 파괴를 통해 전개되었다. 헤겔은 자신의 역사철학을 통해 이를 변증법적이라고 틀지었다. 여기에는 이상(이념)을 향해있는 방향성이 전재되어 있고, 이것이 폭력과 파괴의 논리를 정당화시킨다. '새로운'에는 항상 '더 나은' 이 깔려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레 파괴의 주체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도록 한다. 이로 인해 여기서 덧입혀지는 수단이 계몽이다. 파괴를 당하는 수동주체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괜찮다.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할테니. 그러나 계몽의 수동자는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행하는자에게 흡수된다. 자신의 색과 함께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약 거부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베일을 드러나게 거부한다면 흡수되지도 못하고 파괴될 것이다. 어느 누가 흡수되거나 파괴되는 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고민정은 도시건설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증거하는 사진을 찍고, 드러나지 않게 파괴에 대해 저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단지 사회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러한 표현을 자청한 것일까.
고민정_몽유도원도#1_람다 프린트_75×50cm_2012

심리학자인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은 자신의 저서 『트라우마』에서 사회의 힘, 또는 남성의 힘으로부터 파괴된 자들인 참전용사나 여성을 치료했던 자신의 방법을 제시하고 나아가 이를 적용한 역사의 바람직한 재건을 희망한다.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은 창조적인 에너지의 발생과 같다고 말한다. 그녀의 방법에 따르면,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재생하고, 수동적이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슬퍼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생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재생 말이다.
고민정_몽유도원도#3_잉크젯 프린트_L 200×150cm, S 100×75cm_2012

사회에는 반드시 권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힘이다. 하지만 메신저가 있었듯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목격할 수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는 권력 행사를 통해 남성을 강화시키는 자들이다. 가정해보자. 만약, 현재가 이러하다면 남성을 사회와 동일한 위치에 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사회의 권력은 남성을 지칭하게 된다. 사회의 많은 재건과 계몽은 일종의 '남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남성-사회'는 모든 것에 이것을 적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남성은 약화된다. 남성의 우위는 반대급부인 여성이 있는 만큼만 인정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에 대한 저항은 권력의 양만큼 필연적이어야 한다. 허먼이 제안한 방법을 적용해보면, 저항은 재생과 동일하다. 과거의 재생, 이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던 것에 대한 재생을 통해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권력의 존재를 그 자체로 유지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봐야 한다. 이를 예술에 적용해보면, 재생을 표현과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만약 예술가인 고민정이 사는 세계가 남성중심의 사회라면, 그녀의 사진은 '남성-되기'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의미는 권력에 대한 존중이며, 관계에 대한 회복이다. 양자의 동등한 지위와 서로에게 행하는 힘(권력)을 통해 비로소 얻게 되는 자유를 꿈꾸는 것이다. 증거물, 재생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로 저항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회복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뉴타운프로젝트를 몽유도원도라 명명한 것은 아닐까. ■ 박순영
고민정_몽유도원도#5_람다 프린트_107×70cm_2012





산, 바다, 그리고 인간에게 제일 살기 적합한 우리가 늘 생각하는 몽유도원도는 여기에 없다. ● 늘 꿈꾸던 유토피아는 찢어지고, 어눌한 배합의 빌딩들처럼 허술한 모습으로 다시금 창조되고 있다. 파괴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유토피아를 만들어 간다. 이리저리 지어진 신도시 아파트같이 절박하고 파괴적인 모습과 이상향을 이루고자 하는 양면성은 불편하게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 관객이 바라보는 몽유도원 속 세상은 당신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 아니다. 어쩌면 보기에 불편한 파라다이스일 뿐이다. 나의 몽유도원에는 파란 하늘이 어긋나 붙여지고, 푸른 물, 바다가 투명해 보이지만 비춰지는 것은 흩어진 모래언덕, 갓지어진 아파트의 형태다. 지어진 건물은 다시금 쌓여졌다 무너졌다를 반복하고, 수백번 반복된 건설과 창조 그리고 파괴는 결국 사라져가며 결국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illusion임을 관객들이 느낄 수 있길 바란다. ■ 고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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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내면 Insight into everyday life










진형주展 / JINHYOUNGJOO / 陳亨柱 / painting   2012_0309 ▶ 2012_0331 / 일요일 휴관






진형주_무제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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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5:00pm

오프닝 / 2012_0309_금요일_05:00pm 런치토크 / 2012_0323_금요일_12:00pm 미술체험 / 2012_0324_토요일_03:00pm

2012 Shinhan Young Artist Festa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신한갤러리 SHINHAN MUSEUM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2-12번지 Tel. +82.2.722.8493 www.shinhanmuseum.co.kr






'그리기'라는 이름의 욕망 ● '그리기'는 미술의 가장 원초적인 행위이다. 그리는 행위가 미술의 '기본'으로 여겨지는 만큼 각 시대마다 '회화'가 지닌 본질과 그 가치에 대한 담론이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그래서인지 미술의 역사상 유독 회화에 대한 논쟁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회화의 지속성에 대한 공방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회화의 종말을 예견했는데, 여기에는 '사진'과 '영상'이라는 새로운 매체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많은 화가들이 회화를 고집하면서 여러 가지 양식을 통해 회화를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회화가 더 큰 영역으로 발전하는데 공헌을 한 작가로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사진을 소재로 형태가 불분명한 흐릿한 이미지의 회화를 제작했다. 회화의 위기를 부추겼던 사진이 역설적으로 회화의 소재가 되었고, 사진이 갖는 리얼리즘적 요소는 붓질로 인한 추상적 요소와 결합하여 새로운 회화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리히터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회화 기법을 설명했다. "나는 실재에 대해 더 이상 정확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희미함, 불확실함, 일시성, 단편성 등을 추구한다. 이것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다. 우리에게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불명확함이고 이것은 재현된 대상과는 상이한 것이다. 그러나 그림이 외부세계와 비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닌 이상 그림은 희미하지도, 불명료하지도, 다르지도 않다."
진형주_무제_종이에 과슈, 목탄_40×56cm_2010

진형주의 이번 전시 『일상의 내면』은 사진의 '리얼리티'와 회화의 '흔적'이 공존하는 결과물로, 사진을 차용하여 회화의 의미를 되물었던 리히터의 진지한 시도를 환기시킨다. 진형주는 사진을 이용하지만 사실적인 재현보다는 그리기라는 행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회화가 단순히 사실을 재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적 기록물인 사진을 통해 지나간 일상을 들여다 보다가 이미지를 선택하면 과감한 붓질로 그리기에 몰입한다. 그는 사진에서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 내어 캔버스에 옮길 때 자신의 감각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색, 형태와 같은 외적 형식들이 결정되면 작가는 이를 빠른 붓질로 이어 나가면서 긴장을 유지한다. 한편으로는 그 긴장감이 화가를 그리기로 이끄는 가장 큰 설렘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리기의 행위 속에 작가의 날카로운 선택이 내재되어 있고 그 결과, 회화는 사진이 담고 있는 사건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
진형주_무제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진형주의 작업에서 '흔적'이란 앞서 말한 붓질에 있으며 이것은 사진과 회화를 크게 구분 짓는 요소 중에 하나이다. 붓질은 곧 '선'을 의미하며, 윤곽선은 그리는 행위의 기본이다. 알베르티는 "사물의 바깥 경계를 따라 한 바퀴 둘러서 묘사하는 것"이 윤곽선이라고 했다. 형상의 실루엣을 강조했던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재현은 환영이나 모방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현대미술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형주의 그림에 나타나는 선은 고전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모방의 리얼리티는 사물의 형태를 실루엣으로 보지만, 진형주는 가시적인 세계를 단지 선적으로 보지 않고 형태나 화면을 닫힌 구조로 두지 않는다. 그는 붓질의 방향, 필치 등을 불분명하고 모호하게 처리하면서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윤곽선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필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자유로움이 그의 회화 작업을 드로잉처럼 느껴지게 한다. 거침없는 붓질의 터치와 그 흔적들은 화가의 행위를 유추하는 기반이 되며, 이것은 곧 드로잉의 역할이기도 하다. 평면 위에 곧바로 표현된 그의 그림은 직관에 의지하는 드로잉처럼 즉흥적이고 직설적이다.
진형주_고흐의 길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진형주는 인물과 배경의 관계 역시 뚜렷한 경계를 짓지 않는다. 그는 작품 속 인물들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도록 표현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은 대부분 지워지거나 뭉개져 있다. 이 같은 익명의 존재들은 시각적 충격을 주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관람자로 하여금 시선의 변화를 유도한다. 또한 정확한 묘사를 벗어난 이러한 이미지들은 수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러한 흐릿한 필치는 내적 세계의 불명료함을 그 속성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배경과 형태의 모호함이 확실치 않은 인상으로 표현되면서, 숨겨진 내적 세계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진형주_무제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0
진형주_무제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0

이러한 추상적인 붓의 터치는 바로 진형주의 조형적인 전략이다. 다미슈(Hubert Damisch)는 「필치에서 선으로(Du trait a la ligne)」(1994)에서 '추상과 구상 사이에서 주저하는 필치'로 톰블리(Cy Twombly, 1928-2011)와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를 예로 들었다. 다미슈가 제시했던 구분에 의하면 진형주의 회화 역시 톰블리와 포트리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재현적인 기능에서 벗어난 진형주의 선은 자율적이고 회화적이며 표현적인 조형언어로 존재한다. 동시에 표현언어로서의 선은 외적 형태의 내면에 감추어진 본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진형주는 대상을 가시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에 근거하여 내적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결국 '무엇을 그리는가'라는 주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는가'라는 표현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화가가 가장 충실해야 할 것은 외적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캔버스에 그려질 내적 세계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 내적 세계의 표현 즉, 비가시성은 회화의 잠재된 속성이다. 가시적인 일상의 한 장면을 그리지만 결국은 비가시적인 내면의 무수한 층들을 담고 싶은 것이 화가의 욕망 아닐까. ■ 김남은
진형주_어린이동상_캔버스에 유채_194×130cm_2011





To Paint, The Painter's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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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RLAND #002: 실험실 DVRLAND #002: Laboratory










백승민展 / PAIKSEUNGMIN / 白承玟 / painting   2012_0309 ▶ 2012_0411 / 주말,공휴일 휴관






백승민_SCENE #5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291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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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6:00pm

송은 아트큐브는 젊고 유능한 작가들의 전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송은문화재단에서 설립한 비영리 전시공간입니다.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공휴일 휴관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3448.0100 www.songeunartspace.org






시각적 유희가 강박이 되는 실험실: 백승민의 디벨랜드(DVRLND) #002 ● 백승민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나라 디벨랜드(DVRLND)의 두 번째 시리즈를 선보인다. 일종의 실험실 장면으로 제시되는 디벨랜드 #002의 에피소드들은 백승민이 관심을 가져왔던 법, 규율, 도덕 등 사회적 약속들에 선행하는,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공인된 평형 법칙, 반사 원리 등 과학 이론의 도해를 바탕으로 구성된다.
백승민_SCENE #7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9×390.9cm2012

과학 이론들을 옮겨내는 화면에서 백승민은 디벨랜드 #001에 등장했던 형태들을 조각내기도 하고, 신체 파편들을 모아 완전한 인간 형상을 만들거나 대칭의 구조물을 중재자(mediator)의 모습으로 둔갑시키는 등 분해와 조립, 변형의 실험을 한다. 또한 과장된 입체감 표현에 공을 들이면서, 일점 투시를 기본으로 한 원근법, 축소법처럼 관찰된 세계를 효과적으로 모방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을 각각의 모듈 안에 반복적으로 적용시킨다. 그러나 백승민은 '회화성'을 위해 종종 기피되곤 하는 완벽한 대칭구조 안에 이러한 관습적 표현들을 가둬둠으로써 이들이 모방이나 재현을 위한 장치가 되는 것을 제지한다. 그 결과 명료한 과학 이론들은 디벨랜드 #002의 요란한 표현들 사이를 맴돌며 시각적으로 독해 불가능한 것이 된다.
백승민_SCENE #10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324.3cm_2012

법과 규칙, 질서가 사회적 권위를 입음으로써 모두에게 '합리적인 약속'으로 용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가설을 반박 불가능한 '절대 이론'으로 만드는 과학 실험 역시 권위를 얻기 위한 과정을 동반한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되풀이되는 가설의 검증과 반박, 이의 반복적 적용은 실험의 정확성을 위해서일 뿐 아니라 해당 명제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외와 변칙들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잠재울 “확률”이라는 정당성 역시 얻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 실험실이 하나의 명제가 확률적 승리를 쟁취하는 곳이라면, 백승민의 디벨랜드 #002는 시각적 유희가 강박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공간이다. 망막에 비치는 표피에 대한 집착이 재현이라는 회화의 관습을 넘어서는 권위를 가지고 정당화되는 디벨랜드 #002의 장면들은 합리적이고 절대적인 것들의 폐쇄성과 닮아있다. ■ 전인미
백승민_TRIPTYCH #5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324.3cm_2012
백승민_TRIPTYCH #6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324.3cm_2012

강박 정신과 은밀한 쇼의 복합구조 ● 일말의 불완전함에 대한 인식과 병증과의 상관관계는 어떤 경우에선 당연한 문제이다. 극단적 공포정치체제에서 평생 동안 순응을 강요받았거나 약간의 흠결도 용납하지 않는 부모, 죄의식을 끊임없이 자극받으며 자라난 개인사 같은 배경 때문이 아니어도 내적환경의 상황은 수시로 의식과 억압의 첨예한 대결에 놓인다. 그것은 가만히 생각해보았을 때 긴장의 외부적 종용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더욱 집요하게 각성되는 자의에 관한 인식과 그것에의 두려움 때문이다. 자의는 생래적으로 내재하는 것들로부터 발견되고 형성되는 것이면서도 특히 자신이 자처하는 완전에의 요구로 향하는 규칙이 제압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일 수 있으며 이것은 근본적인 두려움을 지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두려움으로 인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을 회피하고자 할 때 그는 규칙과 체계의 필연성에 관한 봉사를 기획하게 되고 그것에 집중을 쏟으면서도 실제로는 반대로, 직시함에 관하여 스스로가 알고 있는 한, 두려움을 들춰보는 일은 순간이 좁혀올 수록 가장 다급한 사안이 되어 급기야 이 공포를 마주대하는 일이 죽음과의 양자택일에 이르게 된다. ● 이러한 위험을 간파하지 못해서 병자가 되는가? 오히려 그 사실을 아는 것 때문에 병자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는 것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 태생적으로 이런 문제에 묶인 자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병자는 시지프스가 저승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것처럼 끝나지 않는 혼자만의 전쟁을 계속해서 치르는데, 거기엔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죽음 같은 고통의 처벌이 뒤따르는 엄중한 법칙과 기준도 점차 부여되며, -이미 그 전쟁 자체보다 더한 처벌도 없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졌거나 그렇게 되도록 만든 일일 뿐 이 수행에 꼭 적합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대책 같은 것은 상상해볼 수도 없고 더욱이 이같은 고통에 관해서마저 통제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은 환자에게 심한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 그러나 누가 그토록 이상한 사람이고 우리한테 해를 끼친단 말인가? 그는 한마디로 자기에게 속한 것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자인가? 능숙함의 관건은 무엇인가? 가령 사악함의 문제에 있어 그것을 해소하려하거나 혹은 현실적으로 작동시키면서 실제로 범죄자가 되지는 않으려면, 모르는 척 하거나 어설프게 은폐하려는 미봉책적인 노력보다는 오히려 집요하고 새로운 근성이 요구될 것이다. 자연 상태의 추악한 감정들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환경•교육•유전 같은 것은 하나의 가능한 구실들에 불과하며 그것들은 자연발생적이다. 위험은 외부세계의 불확실성에서뿐만 아니라 내적인 불가해로부터 더욱 만나게 되는데 마음속으로 얼마든지 대단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살인 같은 사회적 위험인자가 발발하면 그 즉시 사회적 억압으로 다스려지지만 개개인은 각자가 얼마간의 고충 속에서 지내는 것이다. 사회적 삶의 정신적이고 내적인 영역에서 매번 채택되는 양식은 위험에 관한 방어책들로서 생존의 구조를 이룬다. ● 정신의 분란한 지배형식들을 동원하여 하나의 완벽한 세계처럼 충족되고 구체화되게끔 하려는 화가의 연출가적 전략을 생각해보라. 이것은 조직화된 발화 능력을 갖추고 위험한 것에 관하여 위협적이고 설득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분명하고 특정한 기본내용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도, 완결된 모든 연출은 거의 의식하지 않거나 그럴 필요도 없는 최초의 임의들로부터 비롯되며 그 발단은 시작으로부터 완결을 향하고 있다. 음악과 춤들이 어느 암흑이나 어느 우연 속에서 점차 생겨나 이윽고 빛나는 수사들과 외양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의 건축적인 의지는 형상을 부여하는 일에 봉사를 거듭해 하나의 정립들을 정교하게 하고 확대되게 만든다. 화가의 건축적인 의지는 자신의 태도를 수단으로 하여 그것을 다시 대상으로 못 박으며 그 구조적 유혹과 이에 대응하는 용기를 함께 고려하는 가운데서 움직임을 거듭할 수 있다. ● 그러나 일단 이러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일에 논리란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공연을 보는 것처럼 감정적이고 전면적인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 하나의 완결들은 찬란함과 놀라움•혐오적이고 사악한 감정•추악한 아름다움•어둠의 장막을 들췄을 때 펼쳐지는 유혹적이고 저의에 휩싸인 놀이공원의 세계•그것을 탐미하는 무구한 유아기취미 고착적인 감성 같은 것으로 분연히 넘쳐야만 한다. 능숙한 연출자는 스스로 인격적 역할을 사양하고 태연한 정적 속으로 숨으려다가 그만 발설하게 되는 신경질과 지배욕 같은 것도 될수록 마음을 홀릴 수 있는 일에 돌려서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은데, 이상하고도 매우 아름다워서 마음속의 위험과 관능을 자극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을 매혹하고 놀라움으로 이끌며, 무엇보다 자신의 분노에 관한 저의를 얼마간 옆으로 밀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적극적인 연출가로서의 화가가 하는 일은 자신의 병적 상태에 놓인 채로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오직 병의 불협화음을 재현하는 것이다. 화가가 연출의 준칙들을 수행하는 것은, 내적 불가해로부터 도망하여 인간의 창조자적 면모와 그 유희를 나타내는 일이며, 동시에 이 자체를 통해 내부적 위험을 복합적이고 다른 성격을 지닌 것들로 승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양하는 것인데, 이같은 과정들이 손쉽게 와해되거나 이러한 노력들이 포기된다면 병자에게 있어 병증의 취지는 결국 위험성에만 할당된다.(중추신경계로 약물을 주입하거나 격리하는 조치로써 환자를 병에 둔감하게 하는 것이 언제나 능사는 아니며 오히려 그를 강인하게 단련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이 병이 사람을 서서히 죽음으로 안내하지만, 그것이 야기한 죽음의 공포는 삶에의 공포이며 여기에 이 병증에 있어서의 종요로움이 있다. 외로운 병인은 자신의 수레바퀴를 굴려 먼 곳으로 갔다 돌아오기를 거듭함으로 새로운 고양들에 도달한다. ■ 박세연
백승민_THOERY#3_Digitap Pint on Paper_29.7×21cm
백승민_THOERY#6_Digitap Pint on Paper_29.7×21cm





DVRLND #002: Laboratory turning the visual amusement into obs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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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Very Important Painting)










2012_0309 ▶ 2012_0425











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유미_김영수_박지원_이설아 조요숙_최현석_김문희_이현수_황정원

관람시간 / 10:30am~07:00pm / 2층(Café di KiMi)_10:30am~11:00pm

키미아트 KIMIART 서울 종로구 평창동 479-2번지 1,2층 Tel. +82.2.394.6411 www.kimiart.net






VIP (Very Important Painting)- ● Very Important Painting, 정확히 말하자면, Very Important Korean Painting이 좀 더 명확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한국화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현대 사회에 있어 '진행중인 한국화'란 어떤 의미를 갖고, 그 가능성은 무엇인지, 본 전시에 참가한 9명의 젊은 작가들을 통해 생각하고자 한다.
김유미_Chupar_장지에 채색_73×61cm_2011
김영수_눈이 맵다_종이, 연필_76×170cm_2011
박지원_무력방어 3_장지에 채색_194×130cm_2010

한국화란 '한국의 그림'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남겨온 한국화를 시작으로, 현재 한국화를 전공한 젊은 작가들이 그들의 다양한 감각과 사고로 펼치는 회화의 소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상이었지만, 오늘날 작가들에게 있어 한국화의 사상적 동기는 과거와 다른 시대성을 갖는다. 물론 역사에서 말하는 사상은 대부분 중국에서 형성된 주자학, 유학, 실학 등으로 이를 수용한 사상적 흐름이 화론畵論과 연결되어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한국화의 한국적 정의를 사상에서 찾는다는 것은 들어온 문화가 변전變轉되어 한국적 정서를 갖게 된 것들로부터 그 해석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설아_용마랜드 4_순지에 채색_130×162cm_2011
조요숙_사유의 공간_장지에 채색, 연필, 아크릴채색_116.8×116.8cm_2011
최현석_신묘년 인사동개인전현실도_마(麻)에 수간채색_112×162cm_2011

그렇다면 현대미술에서 과거의 한국화가 아닌 '진행중인 한국화'는 어떤 시점으로 화론을 정의할 것인가? 선조세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사상이란 사회성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성이란 사회의 흐름, 즉 전체환경과 개개간의 환경이 관계되어 이에 따른 반응사고가 사회성을 이루게 되고, 그 사회성에 큰 흐름은 있으나 개개인 미묘한 차이를 갖기 때문에 현대작가의 한국화 표현에 있어서도 과거만큼 통일된 인식이나, 정형화된 화법을 따르기란 쉽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과거의 화론적 해석을 지향할 이유가 없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의 한국화가 중요성을 갖는 부분은 사상이 아닌, 그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장場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문희_緣起ⅠⅡ_콘트지, 콘테, 실버_180×60cm×2_2008
이현수_노안도1.2_종이에 먹, 펜_158.3×103.6cm_2010
황정원_stranger 3호_한지에 먹_72×60cm_2011

하지만, 오늘날 한국화의 가능성이 보다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화의 인식이나 알림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역사속 한국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이 현 세대에 어떻게 계승되고, 변화되어 펼쳐가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의 진행과제는 무엇인지, 본 전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 키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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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_sound :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










x_sound : John Cage, Nam June Paik and After展   2012_0309 ▶ 2012_0701 / 둘째,넷째주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309_금요일_05:00pm

전시 오프닝 / 2012_0309_금요일_05:00pm

오프닝 퍼포먼스 / 2012_0309_금요일_06:00pm 존 케이지「상상 풍경 IV」_추계예술대학교 작곡과 학생 24명 사운드 퍼포먼스_오토모 요시히데 셔틀버스 / 15:15 합정역 2번 출구, 16:00 한남동 한남 더힐(전 단국대학교 자리) 육교 건너편

스페셜 토크 / 2012_0310_토요일_01:00pm_백남준아트센터 세미나실 오토모 요시히데『프로젝트 후쿠시마』 셔틀버스 / 11:15 합정역 2번 출구 12:00 한남동 한남 더힐(전 단국대학교 자리) 육교 건너편

셔틀버스 예약 / 031-201-8512, reservation@njpartcenter.kr

참여작가 디디에 포스티노Didier FAUSTINO_로리스 그레오Loris GRÉAUD 하룬 미르자Haroon MIRZA_수잔 필립스Susan PHILIPSZ 안리 살라Anri SALA_타카히코 이이무라Takahiko IIMURA 유코 모리Yuko MOHRI_김기철Kichul KIM_이세옥Sei RHEE 오토모 요시히데Otomo YOSHIHIDE_테츠야 우메다Tetsuya UMEDA 지문ZIMOUN_존 케이지John CAGE_백남준Nam June PAIK

후원 / 주한프랑스문화원_주한스위스대사관_스위스문화기금_스위스예술위원회 프로헬베티아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_삼성SDI_삼성전자 주최 / 백남준아트센터

관람료 일반_4,000원 / 학생(초/중/고)_2,000원 학생 단체 (20인 이상)_1,000원 *1인 1일 입장료, 경기도민 50% 할인, 중복할인 불가

관람시간 / 10:00am~08:00pm / 둘째,넷째주 월요일 휴관

백남준아트센터 NJP Art Center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백남준로 10 Tel. +82.31.201.8571 www.njpartcenter.kr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2012년 3월 9일부터 7월 1일까지『x_sound : 존 케이지와 백남준 이후』展을 개최합니다. 백남준 탄생 80주년이자 존 케이지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x_sound』展은 존 케이지와 백남준의 역사적 만남이 오늘날 사운드 아트에 남긴 잔향과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파장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백남준_총체 피아노_만프레드 몬테베 촬영 사진_1963
존 케이지_장치된 피아노_1946
마르셀 뒤샹과 존 케이지, 시게코 구보타_1972

"x_sound"는 미지의(x) 소리, 소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몰아내는(ex-pel) 소리, 확장된(ex-panded) 소리를 아우르기 위한 제목입니다. 즉,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소리로만 머물 수 없는 소리를 가리키며, 그런 소리에 대한 탐구의 중심에 존 케이지와 백남준이 있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가가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4분 33초」라는 곡으로 음악의 새로운 장(場)을 열었던 존 케이지가 1960년대에 전개한 실험들은, 그의 선(禪)사상과 함께 백남준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과 독일에서 현대음악을 공부한 백남준은 케이지의 실험에 큰 자극을 받아, 그에게 오마주를 바침과 동시에 설치 작품과 퍼포먼스(일명 '액션 뮤직')로 소리에 대한 실험을 확장해 나갑니다. 멜로디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음악(music)은 일상의 소음(noise)과 구분되지 않는 소리(sound)로 확장되고, 관객들의 반응까지도 곡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백남준은 장난감, 종이 등을 악기에 배치해서 소리의 원리를 공간에서 볼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 구체적인 행동과 상황을 요청함으로써 좀 더 예측할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백남준_존 케이지에게 바침_비디오_1973
지문_302개의 장치된 모니터_사운드 설치_2012
디디에 포스티노_빈 건물을 위한 장치_사운드 설치_2010

미술이 더 이상 관객들이 수동적으로 관조하는 시각의 전유물이 아니기를 바랐던 백남준의 이념처럼, 현대 미술은 관객들의 오감을 깨워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고, 관객의 개입을 통한 우연적 요소를 작품의 일부로 간주하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관객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고, 그 형태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소리는 이제 현대 미술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중요한 재료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대 작가들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에 소리를 덧대는 것이 아니라, 청각을 통해 시각을 확장하고,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감각과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존 케이지가 일으키고 백남준이 확장시킨 파장들은 동시대 작가들의 사운드 설치작업에서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맥락,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감각과 만나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룬 미르자_백페이드 5(춤의 여왕)_사운드 설치_2011
수잔 필립스_처음부터_사운드 설치_00:08:16_2007
안리 살라_대답 좀 해_비디오, 컬러, 사운드_00:04:51_2009

소리의 시각화라는 과제를 끈질기게 탐구해 온 김기철(한국)은 자연의 소리를 내보내는 스피커들을 전시 공간에 절묘하게 배치해서 청각과 시각의 연상을 극대화합니다.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 수상 작가인 하룬 미르자(영국)의 작품은 일상에서 음향 기능과 무관한 것들이 내는 소리와, 음향 장비들이 의외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소리로 구성됩니다. 지문(스위스)은 작은 모터가 설치된 빈 상자들로 이루어진 구조물 속으로 생경한 마찰음을 통해 관객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프랑스관 작가로 선정된 안리 살라(알바니아)는 비디오를 통해 소리와 공간이 연관될 때 나타나는 효과들을 예리하게 잡아낼 것입니다.
로리스 그레오_큰 소리로 생각하라_사진, 사운드_2009
유코 모리_오프나 플라워 센터_사운드 설치_2012
김기철_소리 보기-바람_사운드 설치_2012

2010년 터너상 수상 작가인 수잔 필립스(영국)는 복잡하고 풍부한 역사적 함의를 지닌 노래들을 직접 편곡하고 불러서 관객들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그 노래와 마주치게 합니다. 소닉 유스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리 래날도가 자신의 음악을 '생각'하는 '소리'를 녹음하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한 로리스 그레오(프랑스)의 작품은 소리의 부재를 통해 역설적으로 소리의 힘을 증명한 존 케이지의 실험을 이어나갑니다. 설치와 공연을 통해 독보적인 사운드 작가로 자리매김한 오토모 요시히데(일본)는 수십 대의 빈 턴테이블을 이용하여 다양한 소음의 협주곡을 만들어 냅니다. 이들의 사운드 설치 작품들은 단순히 전시 공간 속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소리가 만들어내는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긴장, 소리를 통해 형성된 환경, 소리가 역사와 정서를 뒤섞는 방식, 소리가 수학적 질서와 우연을 넘나드는 방식, 공간-소리-신체의 관계에 대한 예민한 탐색 등을 보여줄 것입니다.
오토모 요시히데_위드아웃 레코드_사운드 설치_2008
테츠야 우메다_무제_사운드 설치_2012

x_sound 전시에서는 설치 작품과 더불어 다양한 사운드 공연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전시 오프닝에서는 라디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추계예술대학교 작곡과 학생 24명)와 빈 턴테이블을 이용한 공연(오토모 요시히데)이 진행됩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존 케이지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존 케이지의 작품을 연주하는 현대 음악 공연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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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齋 심재






2012_0229 ▶ 2012_0306




김경덕_T18_C 프린트_11×11inch_2002 양지영_Weisse Wand, White wall_Lamda print with Acrylplate_100×100cm_2009



초대일시 / 2012_0229_수요일_06:00pm

기획 / 박영택

참여작가 김경덕_양지영_이정현_전병철_최희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 3월 6일_10:00am~12: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心齋(심재) ● 心齋란 텅 빈 마음으로 사물을 응대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을 비워 만물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경지가 그것이다. 이는 또한 거지(去知)와도 상통한다. 거지란 대상(物)과 접할 때 마음이 대상에 대하여 지식활동을 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지식활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되는 시비판단이 마음에 번거로움을 주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이는 대상의 상태를 주체의 요구에 의해 좋다 나쁘다, 쓸모있다 없다로 판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경덕_T08_C 프린트_11×11inch_2002
양지영_Wohnwagen,House trailer_Pigment print with Acrylplate_80×80cm_2008
이정현_A little More or Less than Nothing#20_디지털 프린트_44×56cm_2008
이정현_A little More or Less than Nothing#34_디지털 프린트_44×56cm_2009
전병철_AnotherMoment#002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70cm_2007
전병철_AnotherMoment#003_젤라틴 실버 프린트_50×70cm_2007
최희정_nuage #04_디지털 프린트_40×55cm_2004
최희정_nuage #07_디지털 프린트_40×55cm_2008

이런 판정을 유보하고 아무 가치도 부여하지 않은 비움의 상태가 대상과 주체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물(物)에 승리하는 방법은 나를 비워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옛사람들의 지혜였다. 나는 그런 사진들이 좋다. 사물과 세계를 대할 때 가능한 선입견이나 선험적인 지식, 사유 그리고 과도한 관념성의 자취를 지우려는 작업을 주목해봤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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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展 / KIMBYUNGCHUL / 金昞澈 / painting 2012_0308 ▶ 2012_0316 / 일요일 휴관




김병철_밤과 낮의 요정_캔버스에 유채_116×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02d | 김병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피치 GALERIE PICI 서울 강남구 청담동 122-22번지 Tel. +82.2.547.9569 www.galeriepici.com




거품, 물방울로 형성된 유기체적인 아우라● 거품하면 생각나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는 물리적인 형상처럼 비누거품, 맥주거품, 탄산소다 거품, 거품목욕처럼 가시적인 것과 동시에 추상적인 버블 경제, 버블파이터 게임 등이 연상된다. ● 그러나 과거부터 거품은 생명과 탄생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의 그리스 어원은 '물에 떠오른 거품(foam)'에서 유래하는데,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사이프러스 파포스(Paphos)의 바다 거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 이처럼 거품은 많은 상상을 요하는 신비적인 요소와 상징적인 테제로 작용한다. 김병철의 작품은 거품이라는 최소한의 형태를 요하는 미니멀한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사용하는 색채 또한 절제되어 있다. 블루와 코발트 등이 사용된다. 작품은 거품으로 대체된 순수한 점과 색으로만 구성된다. 그러나 무수한 거품 뒤에는 미세한 톤의 변화가 있다. 예리한 핀으로 찌르면 곧 터질 것 같은 최소한의 기체로 형성된 거품 그림은 추상인 동시에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어 가는 장난감의 레고 같은 존재와 최소한의 조형요소인 점과 픽셀에도 대체되는 인자다. ● 조밀하게 이루어진 거품들은 약간의 크기의 차이와 강약의 차이로 구체적인 형상을 구축해 나가는데, 의자 모양과 궁전 및 신전의 모양 큐브 및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끊임없이 생성해 나간다. 이는 마치 세포가 끊임없이 분화하는 모양새와 비슷하다.
김병철_영원한 영원하지 않은 의미의 질문_캔버스에 유채_90×72cm_2012
김병철_영원한 영원하지 않은 의미의 질문_캔버스에 유채_90×72cm_2012

김병철의 작업은 손의 노동과 눈의 망막으로 그리는 것으로 시간의 축적과 밀도를 동시에 보여 주는 작업이다. 세필로 정교하게 미시적 시각으로 세포가 분열하듯이 거품이 쌓이면서 형태의 표면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은 무수한 시간의 축적과 노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거품 하나하나를 그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화면에는 독특하고 새로운 실제적 형상이 발생한다. ● 작품은 독특한 색채처리로 더욱 환상적이다. 물감을 여러 겹 발라 중첩의 마티에르를 형성하기보다는 물감을 최대한 캔버스에 깊이 배어들게 하는 방식을 택한다. 화면에서 색채가 자연스럽게 스민 보글보글한 거품은 군집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조합을 보이며 명료한 실체의 모습과 간격의 설정, 서로간의 부피와 두께로 부상하거나 희미하게 사라져가거나, 윤곽이 흐려 와해되거나, 뚜렷한 윤곽과 실체를 대조시켜 보이는 등 거품의 다양한 크기와 집합이 이루어진다. ● 이와 같이 그의 작품은 거품이라는 메타포는 실재와 환영과의 간극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실제(實際:사실의 경우나 형편이라는 의미)와 실재(實在: 사실로서 현실에서 존재함의 의미)를 묻는 작업들이다. 물방울 혹은 거품은 우리들에게 순간적인 물리적 현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에겐 투명한 실존이며 극명한 존재감일지 모른다.
김병철_일말의 관심_캔버스에 유채_90×72cm_2012
김병철_괜찮은 발견_캔버스에 유채_53×45cm_2012

본래 실루엣과 환영 그리고 실체의 차이는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메트릭스의 가상 현실과 매트릭스 밖의 현실처럼 우리의 삶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장자(莊子)의 호접몽 또한 꿈에서 꿈인 줄 모르고 깨어나서야 꿈인 줄 알지 않았는가. ● 그림은 거품 덩어리지만 응집하고 분산되면서 그 형태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거품은 미세한 개체이지만 일종의 존재론적 연대를 이루어 자신의 내적 원리와 본질로 움직이며 구체적인 형상을 초현실적 형상으로 구축해내고 있다. ● 마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거품이라는 액체가 고체로 환원되는 미묘한 경계에서 뭔가 비상을 꿈꾸는 움직임과 변화, 탄생과 소멸을 포착하는 것으로 수없는 반복을 통해 삶의 각성과 사유에 이르는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다.
김병철_녹색조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60cm_2011
김병철_엄청난 대화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5×60cm_2011

김병철의 거품 그림은 멀리서 보면 단순한 형태를 거시적으로 품고 있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수없이 얽히고설킨 생선 알처럼 생물학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모든 생명체가 탄생하는 순간 거품은 부수적으로 따르는 자연 현상이다. 거품이야말로 생명의 약동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 거기에는 보이지 않은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 하나의 점을 거품이 대신하는 것으로 최소 단위의 점으로 구성된 픽셀(화소)로도 보인다. 아니면 이 픽셀이 모여 이루어진 더 큰 단위일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무수히 많은 은하수가 모여 소주우를 형성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자연과 생명의 원형으로 핵의 유기적 세계다. ● 결국 가장 나약하고 여린 소미립자 같은 거품이 모든 형상을 아우르는 완성된 작품으로 변모되는 과정은 마치 수수케기를 보듯이 명상적이고 신비로운 공간감을 관객에게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손의 회복과 장인적 기질을 통해 김병철이 표상하는 거품, 물방울의 기호는 기표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 초현실적 상징의 세계로 보는 이의 시선을 이끌기에 충분하다. ■ 김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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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HOME






채효진展 / CHAEHYOJIN / 蔡孝眞 / painting   2012_0314 ▶ 2012_0320




채효진_바람부는..._장지에 채색, 연필_194×130.3cm_2011



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6:00pm

2012 미술공간現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집, 외로움으로 가둬나가다... ● 도시 한 켠에 자리잡고 있는 낡고 허름한 건물. 그 집 앞 화분들은 사람의 손길을 오랫동안 받지 못했는지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있다. 과연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게 하는 그 곳을 작가는 화려한 도시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찾아내듯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를 재현한 '바람부는...'이라는 작품을 보면서 나의 눈길은 왠지 모르게 깨진 화분에 한참동안 머무는 것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담백한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는데, 산속에 있는 외딴집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실제로 없었던 나무를 집 뒤에 그려 넣어주기도 하고, 사람이 살긴 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인적이 끊겼다는 느낌을 주기위해 문을 아예 그려 넣지 않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묘사되는 요소가 많고 채색된 부분도 있었던 것에 반해, 이후 그려지는 그림들에서는 대상을 간결하게 그려내면서 작품의 의도를 보다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채효진_길들여지지 않은..._장지에 연필_130.3×162.1cm_2011

작가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멀어져가는 시골 풍경들을 떠올리며 너른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집 한 채의 느낌을 한지에 담아낸다. 집은 화폭의 작은 부분만 차지하고, 남은 넓은 부분에는 작은 동그라미들로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집 주위를 에워싼 동그라미들은 나무, 밭, 혹은 돌 등으로 연상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외로움'이라고 일컫고 싶다. 소재는 집이지만,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껴졌던 감정이 외로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풍경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남다르게 느꼈던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림들에서, 과연 관람객들은 어떠한 장면과 의미로 해석하게 될까.
채효진_집_장지에 연필_72.7×60.6cm_2011

종이에 집을 그리고, 연필로 반복된 원을 그려나가는 작업 방식은 마치 집을 가둬나가는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연필을 잡기 전, 때때로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느꼈던 소외감이나 TV라는 매체를 통해 접했던 자살에 관한 뉴스, 혹은 일상에서의 에피소드들이 파생시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집이라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 영향을 준 것이다. 작품 속 집은 때때로 홀로 고립되고 고립시켜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으며, 우리를 가두고 있는 원인은 어떠한 피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타인일 수도 혹은 나 스스로가 될 수도 있다.
채효진_집(2)_장지에 연필_97×130.3cm_2012

사람들은 때때로 갈등의 상황을 부정하거나 합리화하는 등 자신을 힘들게 하는 현실을 다르게 해석하여 외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을 억압, 부인, 합리화하는 등 자기방어적 성향을 나타내는 심리의식은 프로이트의 『방어의 신경정신학』에서 언급하는 정신분석 용어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로 설명할 수 있다. 방어기제는 갈등의 적응적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측면도 보이지만, 관점만을 바꾸는 습관화된 방어기제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부정적 측면 또한 지니고 있다. 화폭에서 느껴지는 단절적 요소들은 갈등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가혹한 현실 앞에 도피해버리는 방어기제에 찌든 나약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작품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채효진_집(3)_장지에 연필_130.3×162cm_2012

작가의 그림은 일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고 있을 누군가도, 타지에서 공부하고 있을 누군가도, 혹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나가고 있을 누군가도 공감할 수 있는 그러한 그림이다.
채효진_집(4)_장지에 연필_72.7×60.6cm_2012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한번쯤 느껴보았을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그러한 주제를 담아내고 이를 자신만의 담담한 분위기와 절제된 표현방법으로 작업해낸다. 연필을 세워서 그리는 방식을 고집하기에 선의 굵기, 혹은 강약의 표현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하지만, 그 절제된 표현방식과 반복적 작업행위가 스스로를 가둬나가는 듯한 느낌과 적절히 맞아떨어진다. 그 안에 우연에 의한 미묘한 연필선의 변화와, 만들어지는 패턴, 그림을 숨 쉬게 하는 작은 여백들이 발견된다. 외딴 집은 매우 외롭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혼자만의 안식을 느끼며 살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해본다. 그림 속 굴뚝에서 피워나오는 연기가 그의 무사한 존재를 알리고 있는 것만 같다.
채효진_집(5)_장지에 연필_97×123cm_2012

동그라미들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정작 안이 비워져 있다. 집을 가두고 가두게 하는 그 동그라미들은 텅빔 그 자체이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있는 집의 광경을 그려내는 동시에, 군중 속에서 느끼는 소외와 단절, 공허함 그 자체를 충실히 표현한다. ● 반복된 작업과정은 작가에게는 모든 것을 잊고 더욱 그리는 행위 자체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완성된 작품은 관람하게 되는 누군가에게는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는데'하는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러한 동질감에 의한 소통이 보는 이 스스로를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게 하고, 그것으로도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 구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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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나타나는 밤






한지민展 / HANJIMIN / 韓志旻 / printing   2012_0314 ▶ 2012_0320




한지민_부리가 된 밤_라이노컷_150×75cm_2012



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6:00pm

기획 / 갤러리도스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Tel. +82.2.737.4678 gallerydos.com gallerydos.com/140144912350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불완전함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외부의 보이지 않는 위협들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그에 따른 두려움은 무의식으로 깊숙이 내재된다. 그런 이유에서 고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신적인 존재를 통해 종교라는 방어기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초점을 두고 토템과 샤먼에 관한 인류학적인 접근을 통하여 실존적 완전함을 찾는다. 새벽이라는 길고 고독한 시간, 밤이 절정으로 짙어지는 순간이 되면 어둠의 판타지 세계가 열린다. 집단의 숭배대상이 되어 신성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동식물을 '토템'이라고 하며 절대적인 대상과 인간 사이를 연결 짓는 주술사를 '샤먼'이라고 한다. 이처럼 초월적인 힘을 자신으로 들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고대의 원시신앙은 작업의 근간이 된다.
한지민_새벽을 밟는 소리_라이노컷_100×70cm_2012
한지민_어둠의 찰나_라이노컷_100×70cm_2012

작가는 새를 개인 토템으로 삼고 직접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샤먼이 된다. 자신을 작품에 투영하여 표현한 인간과 새가 뒤섞인 형상은 원초적인 신비로움을 준다. 고전에서도 사람이 동식물로 변신하거나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초월적인 힘을 가진 대상과 동일시되는 부분이 종종 발견되는데 여기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새는 예로부터 날개라는 구조에 의해 인간과 신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작가가 느낀 새와의 개인적인 교감은 부리라는 단단하고 날카로운 촉각에 집중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부리는 불안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상징한다. 신체의 대부분은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체성을 나타내는 두상은 깃털로 뒤덮인 새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하나의 융합된 생명체라는 느낌보다는 새의 탈을 쓴 원시부족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가면 너머의 어둠에 숨겨진 불안한 정체성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발가벗은 신체는 나이와 성별이 모호한 채 그대로 노출된다. 이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새가 가지는 신적인 힘을 부각시킨다. 새는 섬세하게, 신체는 즉흥적으로 거칠게 남은 조각칼의 흔적들도 이러한 효과를 더한다. 이렇듯 모든 표현은 인물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 배경에는 공간적인 정보가 완전히 배제되어있다.
한지민_뿌리 같은 것들_라이노컷_100×70cm_2012

작가가 지향하는 그 곳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무결점의 완전한 세계인 것이다. 한지민은 내면에 지닌 어둠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을 끊임없는 칼 짓으로 승화시킨다. 작품에 등장하는 반人반鳥의 모습은 새가 가진 신적인 힘을 통해 완전함을 얻고자 하는 작가만의 표현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생명체의 창조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성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인간이 가진 실존의 의미를 건드리며 그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김미향
한지민_흐르는 잔야_라이노컷_100×25.5cm_2012



새벽은 밤이 옅어지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사전에 의하면 새벽 또는 심야(深夜)는 깊은 밤이나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이른 아침 시간을 뜻한다. 이 시간이 시작되면 최대한 미동 없이 어둠이 응집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절정의 순간 심호흡을 하며 눈꺼풀을 한껏 들어올린다. 어둠은 찰나의 순간을 거친 후 밝은 새벽(난 새벽을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두 가지로 나눈다.) 이 되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재빨리 응집된 어둠을 나의 검은 안구로 한껏 빨아들여야 한다. 그런 다음 바로 눈을 감아버린다. 이제 주변은 모두 검다. 아니, 검다고 표현하기는 모자란 空이자 또한 무언가로 가득하다. 이곳은 시작과 끝이 없다. 현실의 불안정함은 이 찰나의 순간에서 저 멀리 밀려나 있다. 대신 그 빈자리를 내 기억이 섞여있는 공기가 대신하고 있다. 공기 안에는 그립고 또 낯선 선택적 기억의 편린들이 부유하고 있다. 난 이를 건져내어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강한 부리를 가진 나만의 새가 만들어지고 난 홀로 완전해지기 위해 이를 취한다. 완전해지고자 하는 갈망은 나를 새가 되게 하고 또한 새의 부리가 되게 한다. 부리를 얻은 난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감각과 사고의 야생을 깨우고 불안정한 존재에서 벗어나 나만의 완전함을 찾는 과정을 시작한다. ■ 한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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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ping point






2012_0314 ▶ 2012_0327




김남현_Confined One 2_시멘트, 스틸, 우드_187×50×55cm_2008 김남현_Confined One 3_시멘트, 스틸, 우드_125×55×40cm_2008 김남현_Confined One 4_시멘트, 스틸_33×110×35cm_2008



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남현_고충환 추천 김효숙_김종길 추천 박미현_박영택 추천 양문모_김진하 추천 허용성_유근오 추천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는 역학개념으로 인체에 바이러스가 침투한 뒤 일정기간의 잠복기를 거쳐서 발병되는 발화점을 이른다. 이는 흔히 철학이나 사회 또는 예술 등 기타 제 분야에서 소수에 의한 어떤 형태의 사고 또는 행동이 수면아래서 진행되다가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나 는 것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날로 다원화되는 세계에서 생산되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단일한 그물망으로 포획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티핑 포인트』展은 35세 이하의 신진작가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작업에 내재되어 있는 다기한 발언들을 기존의 작가, 평론가의 눈을 통해 다양하게 들추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 장경호
예전에 예절교본이란 것이 있었다. 시대에 뒤떨어지긴 했지만 아마도 지금도 있을 것이다. 공손하게 인사하고 절하는 올바른 자세나 차를 따르는 정 자세를 간략한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는 책이다. 이런 교본으로 치자면 군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인데, 경례와 목례, 총검술과 군무와 같은 사례집들이 그렇다. 흥미롭고도 당연한 것은 이런 각종 교본이 제도적이고 관료적인 사회집단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학교와 기숙사, 군대와 감옥 같은. 미셀 푸코는 이 사회를 헤테로토피아 곧 초사회 혹은 부재하는 사회라고 불렀다.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이지만 정작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장 억압적인 사회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제도는 개별주체에게 전체주의를 요구하고 개인은 일탈과 자율을 꿈꾸지만 정작 처벌이 두려워 이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사회에 내어준 자기와 일탈을 꿈꾸는 자기로 분리되고, 겉보기에 멀쩡한 자기와 억압을 내재화한 자기로 분열된다. 프로크루테스가 법이고 권력이라면 개인들은 저마다의 키를 그의 침대에 맞출 수밖에. ● 김남현의 작업은 바로 이런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현실을 다룬다. 여기에 경례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엎드려 절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키스하는 자세와 세일즈맨의 자세(태도?)를 바로 잡아주는, 두 손을 번쩍 들거나 머리 뒤로 깍지 껴 완벽하고 안전하게 투항하는 자세를 교정하고 훈육하는 장비들이 있다. 말이 교정이고 훈육이지 그 장비들은 실제로는 무슨 억압의 도구들 같고 고문과 감금의 장비들 같다. 그 장비들은 풍자적인데 도구화된 이성을, 맹목적인 종교를, 효율의 극대화에 맞춰진 기계화된 사회를, 나아가 사사로운 욕망마저 억압하고 통제하고 감시하는 사회를 증언하는 메타포 같다. ● 그래서 개인들은 이런 숨 막히는 현실을 떠나 개인주의로 도피한다. 일인용 소변기와 좌변기, 일인용 욕조, 일인용 병상, 일인용 가옥과 막사, 일인용 놀이기구, 일인용 숲과 정원, 그리고 심지어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집중할 수 있는 일인용 강의실(이라기보다는 도구) 속으로 숨는다. 그 장비며 도구들이 폐쇄적인 현실을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은 스스로를 스스로의 감옥에 가두는 일인용 감옥에서 극대화된다. 이 장비며 도구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돼 있지만 터무니없지는 않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현실을, 희극적인(아님 비극적인?) 현실을 침묵으로써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김효숙_My Floating City-Lef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7×181cm_2010

김효숙의 작품에 관한 첫 미학적 인상은 고충환이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색을 잃어버린 시대 곧 정체성을 상실한 시대에 바치는 레퀴엠 같고, 그 상실의 시대를 증언하는 익명적 주체들 즉 얼굴 없는 사람들에 바치는 오마주" 같았다. 그가 주제어로 내세운 "부유하는 나의 도시"로서의 회화적 장면들은 속도와 도시, 인간의 유비적 삼각관계가 '욕망의 실존성'으로 뭉쳐서 비극적으로 해체된 상태를 보여준다. 근대이후 속도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세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상징적이며 실체적인 진리였다. 수세기, 수십 세기의 느슨하고 게으른 진화적 시간체계가 다급하고 노동집약적인 시간체계로 변화하면서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속도는 거대 근대도시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 속도는 뉴타운 개발정책과 디지털유토피아를 상상하는 메가폴리스 정책에 의해 근대도시를 다시 해체하기 시작했고, 21세기형 도시건축을 실험하는 미래도시를 생성시키고 있다. 김효숙의 장면들은 그런 해체와 생성 사이의 속도를 파편화된 잔상으로 길게 늘인 뒤 잔상의 표면에서 떠 올린 시간의 한 프레임이다. 그 프레임에는 인간성을 유지하고 상승시키는 생태적 관계들이나 정신적인 것(영성에 가까운), 윤리적인 것(철학에 가까운)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과 지혜, 숭고와 경외를 자아내는 연기적 사물들, 공간들조차 없다. 플라톤의 철학을 원용한다면, 김효숙의 장면들이 만들어 낸 세계는 그 스스로 존재하는 모상(icon:모방된 것)이다. 현실이 상실된 비현실의 현실이므로. 미메시스 즉 이것의 원형은 도시가 아니라 도시를 파괴하고 파괴된 자리에 다시 도시를 세우는 욕망일 따름이다. ■ 김종길
박미현_untitled1_한지에 샤프펜슬_63×93cm_2011

박미현의 그림은 한지(음양지, 유지油紙)에 샤프심으로 섬세하게 제작한 드로잉이다. 미세한 종이 위에 흑연을 사용해 단호하게 칠해나간 흔적이다.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특정 사물의 외양이나 구체적인 어떤 것을 연상시켜주지 않는다. 기하학적 도형이나 상상되어진 특별한 형태와도 같아 보인다. 다만 부드럽고 번짐이 좋은 흑명이 유지 사이로 스며들어 응고된 자취만이 또렷하고 마냥 선명하다. 0.5mm 샤프펜슬을 사용해 섬세한 표현을 만들었고 부드러운 표면효과를 건져올리고 있다. 닥나무를 재료로 하여 표면을 잘 압착한 한지(음양지)는 견고하며 표면이 매끄럽고, 수채화지에 비해 흑연이 뭉치지 않아 더없이 번짐이 좋다. 유지는 일반 한지에 비해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기름을 먹은 누런빛이 인공적이지 않고, 흑연과의 조화에서 차분하다. 한지의 그 오래되고 익숙한 느낌과 그 위로 밀착된 흑연의 단호한 자취가 모여 매력적인 그림/드로잉을 만들어 보인다. 이런 격조 있는 드로잉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새삼 회화의 근원에 대해, 그리기의 방법론에 대해 그리고 평면과 물질에 대한 여러 생각을 자아내는 작업이란 생각이다. ■ 박영택
양문모_Ex Ungue Leonem_캔버스에 유채_150×300cm_2011

한국현대회화에서 '사회적 서사'가 실종 된지 한참이나 되었다. '역사', '세계', '사회', '이념' 등의 어휘가 사라진 자리에 '팝', '시장', '개인', '재미' 등의 가볍고도 감각적인 토로가 그 자리를 채운 지 오래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최근 양문모의 '군중'을 소재로 한 인식적 서사가 눈에 띈다. ● 양문모의 작업은, 화면내의 또 다른 사건이나 타인 혹은 화면 밖의 나를 응시하는 한 무리의 군중들이 그 형상화의 대상이다. 군중(Crowd)은 어떤 현상에 대한 공통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리를 지칭한다. 다양하고도 무의식적인 욕망을 표상하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의 대중(Mass)이나, 정치사회적 계급을 일컫는 민중(People)의 개념과는 다르다. 양문모가 의미규정이 다소 모호한 '군중'을 소재로 한 것은, 통념화 되고 개념화된 세계와의 인식(과 감성)적 단층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을 제시하기에 적합한 소재이기에 그런 것 같다. 그의 그림내의 군중은, 외부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공통적인 자세나 태도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그런 무의식적이고 집단적인 시선의 제시를 통하여, 양문모는 우리들의 보는 행위가 과연 주체적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는 동시에 인간일반의 존재에 대한 심리적/사회적 사유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 이 젊은 작가의 이런 관찰자적 자세에 그만의 개인적 생존의 지문을 얹는다면, 좀 더 독자적이고 육중한 회화적 서사가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김진하
허용성_Marmotte No.3_한지에 채색_117×91cm_2011

침묵의 절규와 무시의 응시허용성이 그려내는 일련의 초상들은 대립과 응전의 세계를 향해 던지는 인간의 한계와 좌절의 절규로 보이지만, 의외로 화면은 극도의 침묵과 고도의 정태적 방식을 택한다. 탈색된 신체와 무표정, 그로부터 빚어지는 절망과 체념의 뉘앙스는 물질적 무소유뿐만 아니라 정신적 무념도 내포하는 듯하다. 따라서 초상들은 종종 관객에게, 그려진 인물들의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불신, 직관과 의지를 가지고 있어 타자에 의해 조종 받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몹시 꺼림칙한 의심을 던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초상들의 무념적 정적은 인고의 세월에서 오는 정적이 아니라 실존의 처절함을 너무 빨리 수긍하여 나타나는 의연하면서도 적나라한 정적이다.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긍정하면서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으려는 품격의 정적, 바로 역설의 정적 그것이다. 따라서 아무 것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휴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하는 초상의 현상과 본질이 겹쳐지는 순간,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와 의식의 흐름을 공유하게 하는 기묘한 매력을 갖게 한다. 그것은 '대립을 배제하려 하지 않고 극복하려는' 반영의 방법론이다. ■ 유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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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그대




2012_0314 ▶ 2012_0331 / 일,월,공휴일 휴관



김화현_詩情_장지에 채색_98×60cm_2012


초대일시 / 2012_0314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인영_김화현_나광호_손종준 최승선_황민희

기획 / 아트포럼뉴게이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5:00pm / 일,월,공휴일 휴관

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종로구 명륜4가 66-3번지 Tel. +82.2.517.9013 www.forumnewgate.co.kr



아트포럼뉴게이트의 재개관 기념전 중 3번째 전시인『젊은 그대』展은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의 그야말로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작품들로 꾸몄습니다. 이 작가들은 한결같이 현대인이 당면한 실존의 문제를 다양한 매제와 기법으로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참여작가들은 지난해 공모로 선정한 나광호, 황민희 두 작가, 강원도 사북 탄광 지역이 강원랜드로 변신하는 과정을 실지로 경험한 최승선 작가, 그동안 아트포럼뉴게이트와 긴 시간 인연을 이어온 김화현, 손종준, 김인영 작가등 실력 있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나이는 젊지만 이미 자신만의 표현 언어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는 신세대 작가들로서 앞으로 우리 화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눈여겨 보아주시기를 당부합니다.
김화현_Class Trip_혼합재료_28×23cm_2010

김화현 작가는 만화 이미지를 써서 현대인이 경험하는 혼란 중 남성성과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인물, 인체의 소묘가 주제를 돋보이게 합니다.
손종준_defensive measure_알루미늄, 스테인리스_65×45×45cm_2011
손종준_defensive measure_알루미늄, 스테인리스_110×80×65cm_2011

손종준 작가는 "Defensive Measure(방어기제)"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천착하며 보다 정교해진, 알루미늄 재질의 쓸 수 있고 입을 수 있는 조각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김인영_four birds_캔버스에 아크릴 에나멜 페인트_100×200cm_2011
김인영_Fragments_캔버스에 아크릴 에나멜 페인트_70×70cm_2011

김인영 작가는 에나멜 페인트를 화면 위에 뿌리며 작품을 구축합니다. 전통적인 화조 또는 산수로 나타나기도 하고 추상성이 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광호_Cooked and Raw_아크릴보드 3장에 아크릴채색, 실크스크린_117×85cm_2011
나광호_Cooked and Raw_아크릴보드 3장에 아크릴채색, 실크스크린_117×85cm_2012

나광호 작가는 아크릴 판에 실크스크린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표현하고 또한 여러 겹 겹치면서 작품의 깊이를 이루어냅니다.
최승선_아나키스트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12
최승선_23일의 새벽_캔버스에 유채_90.9×116.8cm_2012

최승선 작가는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유년시절의 폐광지역인 사북 탄광의 모습이 기억 속에 잔재하는, 잃어버린 시절과 없어진 장소와 삶의 상실에 대해 초현실적인 기법을 활용합니다.
황민희_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8cm_2011
황민희_In the Darknes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3×162.1cm_2011

황민희 작가는 인터넷에서 검색하거나 다양한 경위로 수집한 이미지들을 조합, 재구성, 활용하여 군중 속에서의 개인의 고독과 소통의 부재를 그리고 있습니다. ■ 염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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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POP




더 잭展 / The Jack / painting 2012_0310 ▶ 2012_0331 / 월요일 휴관



더잭_루이비통 가방속의 페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1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210a | 더 잭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0_토요일_05:00pm

주최/기획 / 갤러리 토스트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더잭은 장자의 꿈 속 나비장자의 꿈昔者, 莊周夢爲胡蝶 珝珝然胡蝶也 自喩適志與不知周也 / 俄然覺 則遽遽然周也 不知, 周之夢爲胡蝶與 胡蝶之夢爲周與. // 어느 날,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알 수가 없구나,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더잭_달려라 번개호 マッハGoGoGo 196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91.9cm_2012
더잭_세상에서 가장 큐티한 무기 시리즈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100cm_2012
더잭_더 잭의 블랙 잭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2

더잭의 꿈 ● 어느 날, 더잭은 꿈에 일본으로 이발하러 다니고 낭만의 거리 합정 카페골목에서 위기에 빠진 미녀를 구해주고또 구두가 벗겨진 미녀의 구두를 주워줬지만 정작 자신이 "세계의 미녀들이 열광하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만화 속 주인공인 더잭은 지구를 놀이터 삼아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 캔버스에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그려 전시하지만 더잭의 꿈이 우리의 현실인지, 우리의 현실이 더잭의 꿈속 공간인지 알 수가 없다.
더잭_아이 더 잭 런던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100cm_2012
더잭_은하철도 999-부끄럼 더잭 혹성을 향해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9×72.7cm_2012
더잭_국기에 대한 경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8×45.5cm_2012

꿈과 현실의 경계 ● 더잭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우리에겐 새로운 상상이 가능해진다.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가? 결국,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요! 그 꿈이 하나의 인생인 것이다. ● 더잭의 현실이 어떤 이들과의 일상들로 채워져 있는지 우리는 세세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그의 친구들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현실은 만화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그의 꿈 속 친구들을 우리의 현실 속에 침투시킴으로 우리의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의도적으로 만든 꿈(lucid dream)속 시공은, 인류를 구원해야 할 영웅으로써 계몽적 피로감이나 프로이트군단의 사전 검열로부터 매우 자유로운 유기농 비무장지대처럼 보인다.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더잭은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교배시켜 만화도 판타지영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경쾌한 예술을 창조해낸 유쾌한 예술가가 분명하다. 또한 이 점이 세계의 미녀들이 더잭에게 열광하는 결정적 단서가 아닐까 확신한다. 어쩌면, 장자가 나비꿈 이후 다시 꾸는 루시드 드림의 주인공이 더잭이 아닐까? ● 오늘밤 꿈에 나비 한 마리가 훨훨 날아와 내 귓가를 맴돌며 속삭일지도 모르겠다. '부끄러워요'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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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작전五人作展


이미지 가감승제異美知 加減乘除展 2012_0316 ▶ 2012_0330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임지혜_염지희_배성희_정진경_이봄이

주최/기획 / 아트 컴퍼니 긱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 컴퍼니 긱 Art Company GIG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30번지 Tel. +82.2.323.7395 www.artcompanygig.co.kr


사물의 물상이나 이미지에 탐구는 수세기에 걸친 것이 아닌 인류에 문명이 생긴 이후 다양한 철학사조의 갈래아래 쏟아져 나왔다. 요즈음 이데올로기나 각종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의 홍수 속에 꾸준히 순수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되어 지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우직하기조차 하다. 직관적 관점에서의 물상읽기는 이미지에 대한 표피적인 탐구를 넘어 사물 그 자체, 칸트의 의식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로 향하는 방향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을 얼마나 알 수가 있을까? 물상은 이미지라는 다른 말로 쓰이기도 한다. 본 전시는 이미지, 영어로 즉 image 이외에 언어의 유희로 異美知라는 단어를 썼다. 이는 미적 사물에 대한 색다른 탐구를 추적해 들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미추를 판단할 수 있던 없던 모든 사물들은 자기 혼자서 빛날 수가 없다. 밤이 있어야 낮의 찬란한 햇살을 그리듯이,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혼자서 빛나는 해는 빛날 수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물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성립되고 그 긴장감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계산과 도식을 만들어내어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창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흰 캔버스 안에 옆모습의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무의식적인 이미지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도자기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게스탈트 시지각이론에서 우리는 사물간의 긴장감을 느끼는 동시에 뺄셈이라는 수식이 우리의 머릿속 캔버스 안에서 연상이 된다. 우리의 오감은 허수가 많다. 그 허수에 잘 속고 분노하고, 기뻐하며 슬퍼하고, 즐거워한다. 재미있고 통쾌한 허수의 게임은 우리 일상 곳곳에서 나타난다.『이미지 가감승제』展은 임지혜, 염지희, 배성희, 정진경, 이봄이 이 다섯 명의 젊은 여성작가를 축으로 진행되어 진다. 배성희작가는판화와드로잉과설치예술의영역을넘나들며순백의공간에자신만의 Unit으로 복제와 반복의 모듈을 창출한다. 평면작업에서 나왔던 오브제들은 다시 끔 입체작업으로 재탄생되고 그것이 바둑판의 장기처럼 살아 움직이는 영감을 준다. 이봄이, 정진경 작가는 주위 사물들의 작은 무브먼트를 영감 있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주의의 코드로 풀어나간다. 염지희 작가는 보이는 그대로의 재현을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도 거부한다. 콜라주를 이용하여 캔버스 안에 수많은 관점과 공간을 두고 관자로 하여금 사유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풀어놔버린다. 일종의 정신해체의 과정이기도 하다. 임지혜 작가의 경우 이미지를 왜곡, 변형한다. 이미지에서 흐드러지듯이 흘러내려오는 장면들은 시각적인 쾌감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이 작가들의 작품에는 물상의 변주를 통해서 보여지는 다채로운 하모니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각적인 착시를 주기도 하고, 공허한 감상을 주기도 하며 반복적인 리듬을 통해 경쾌한 호르몬을 분비시켜 주기도 한다. 작품에는 우리가 모르는, 요소끼리의 가감승제(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선을 무한히 그리고 더하여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여백을 나누어 요소를 대입시키고, 요소의 무한반복을 통해 곱하기를 하고 있다. 또한, 머리속의 임의의 캔버스 속에서는 작품을 통해 다양한 허수의 게임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속고 속이고 있다. ● 이 다섯 작가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살아 움직이게 두기도 하고 반복시키기도 하며, 왜곡, 합성. 혼합시키기도 하며 공간을 두어 마음껏 뛰어 놀게도 한다. 어릴 적 우리들은 딱지치기, 공기, 망까기 등 다양하면서 순박한 놀이문화를 통해 우리가 싫어하던 수학이라는 학문의 유희를 무의식적으로 즐겨왔다. 자칫 멀리 할 수 있는 미술작품에서 작가들의 복잡하고 재미있는 이미지의 덧셈, 뺄셈, 곱하기, 나누기가 나타난다. 본 전시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서 어릴 적 추억의 순수한 유희를 즐겨보기를 권한다. ■ 아트 컴퍼니 긱
염지희_before the dust wall_종이에 혼합재료_112.2×162.2cm_2011

염지희는 존재의 분열과 히스테리를 그리면서 조금은 낯선, 음울한 세상을 구축해 간다. 이 세계는 마치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우리가 닿을 수 있을 법한 곳이다. 거대한 까마귀들과 늑대의 불편한 응시에 노출된 이들은 머리가 물에 잠긴 동물 그리고 얼굴에 사슴뿔이 이접된 여인, 시야를 가리는 고깔을 뒤집어 쓴 사람들처럼 연약해 보이면서도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이 살아있는 듯하지만 인공적인 생명체들은 텅 빈 제스처를 취한 채 위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양떼들은 이동하고 있으며 아이들은 일제히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작가는 재현을 하는 과정에 집중하기보다 콜라주 방식을 선택하여 이를 유연한 가변성의 도구로 이용한다. 시점과 명암이 각기 다른 이미지 오브제들은 기존 맥락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이 조합되어 현실과 비현실이 충돌하는 낯설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재료 중 하나인 연필은 캔버스와 콜라주 이미지 사이에서 뿌연 안개처럼 퍼져나가거나 차가운 금속판처럼 공간을 분할한다. 색의 개입을 차단한 흑백조의 화면은 오히려 그 형태와 조형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며 다른 한편으로 감상자에게 저마다의 색을 입힐 수 있는 공상의 여지를 부여한다.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익명의 세계는 공허함과 무기력, 침울함의 표출에 멈춰있지 않으며 심연을 응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치유 과정으로까지 나아간다. 분열되어 뻗어나간 뿔은 도리어 위로를 위한 손내밂으로 변모된다. 결코 요란스럽지 않은 그러나 끊임없이 순환하는 응시와 욕망의 에너지를 염지희는 정제된 환영으로서 보여주고 있다. ■ 이은지
임지혜_at_the_bed_1001_메조틴트_30×35cm_2010

깨끗하고 하얀 여백 위를 떠다니는 무채색의 무인도 같은 공간. 임지혜는 모노톤의 메조틴트와 애쿼틴트를 이용하여 휴식을 주제로 한 흑백의 공간을 그린다. 그녀가 그리는 휴식의 공간은 시작과 끝이 없고, 시간의 흐름마저 멈춰 버리고, 철저하게 고립된 상황, 현실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위치한다. 이것은 우구나 한번쯤 혹은 늘 마음속에 그려봤음직한 내면의 안식처로서의 공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러한 공간의 특징은 여백을 활용한 화면처리와 작가가 휴식의 공간으로 선택한 오브제, 그리고 표현기법 간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 동양화의 여백이 그렇듯, 임지혜의 여백은 공간의 깊이를 자유롭게 상상해 볼 수 있는 생기와 즐거움을 준다. 작품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연잎을 통해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고, 하얀 여백을 향해서 사라져 버린 난간의 끝자락이 역으로 공간의 무한함을 드러낸다. 또한, 여백은 작품의 중심이 되는 모노톤의 이미지와 극명한 명암대비를 이루는데, 흑과 백이 만나는 경계는 이미지의 형태를 구축해나가면서 작품의 조형적 미감을 전달한다. 이와 같이 여백을 활용한 화면처리는 작품 전반에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동시에 화면 속에서 유일하게 선택된 오브제에 시각을 집중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한다. ■ 황정인
배성희_urban park_펜 드로잉_66.5×91.6cm_2011

하얀 화면에 나무와 울타리들이 질서 정연하게 그려져 있다, 아니 대칭구도를 이루며 펼쳐진 화면을 자세히 보면 이것은 그려진 것이 아니다. 찍혀서 표현된 것, 즉 복제된 것이고 대칭의 구도는 중심을 기준으로 좌우를 찍어서 만들어진 흔적일 뿐이다. 하얀 화면 역시 하얗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색종이 그 자체의 모습이다. 점차 작아지며 종이 가장자리에 의해 잘려진 구도는 아련한 화면에 깊이를 더하며 그 복제된 이미지의 무한한 반복을 암시한다. 배성희가 판화의 매체적 특성을 매우 적절하고도 영리하게 운용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이밖에도 디지털세대의 감성인 것일까? 구체적인 작업방법은 디지털 환경에서의 복제와 반복의 모듈을 떠올린다. 백색의 화면 위의 반복되는 물체는 반복성 자체로 이미 unit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인물이 없는 하얀 바탕은 고요하고, 반복된 나무와 울타리의 이미지는 감상의 과정에서 운율을 자아낸다. 이러한 운율은 입체로 제작됨으로 하여 가변적이 되었다. 배성희의 이번 전시에서 유난히 눈이 많이 온 이번 겨울 순백의 종이 위로 장식없이 기술된 시를 또 감상하고 읊을 수 있는 시간이 기대된다. ■ 김도희
정진경_틀린게 아니라 아주 조금 다른 것 뿐_종이에 펜 드로잉_35×50cm_2011

정진경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점은 판화기법 그 자체를 통해서 생산되는 조형언어와 더불어 자신이 표현하려고 했던 대상의 상황과 형체 및 무늬에서 기인되는 이미지 조합지점이다. 어쩌면 너무나 일상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사물들에 불과하지만 정진경의 화면 속의 사물들은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부여되고, 마치 사물에 말을 거는 것과 가은 방법으로 화면에 옮겨진다. 어딘가에 버려진 듯한 플라스틱 병과 컵, 그리고 그릇 등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대상들이기에 그들은 그려지고, 찍혀지면서 특별한 것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화면에 옮기는 대상들에 대한 인식은 그 사물에 본연의 모양을 비롯한 고유한 특성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 속에서 가지각색의 사물들은 표현되기 이전에 사물과의 기습적인 만남을 시도하고 그 사물에 적정한 공간성과 더불어 사물 본연의 것을 표현하기 위해 선과 면을 극적인 구도를 사용한다. 이를 통해 정진경은 어떠한 궁극적이거나 특정적인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사물 그 자체에 자신이 순간적으로 느낀 감각적인 것들과 사물의 물리적인 공간성 및 현상을 연결짓는 작업을 이끌어내고 있다. ■ 이은주
이봄이_stillness_캔버스에 유채_80×80cm_2011

이봄이 작가는 우리 주위를 둘러쌓고 숨 쉬는 자연이라는 어머니 같은 존재와 그 품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과의 합일정신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각각의 오브제들을 캔버스 위에서 살아 숨쉬는 존재로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도한 작품에는 프레임의 측면을 정면으로 보이게 활용한다던가 프레임을 매달아놓아 새로운 사유의 공간을 제시하는 등, 회화가 가지고 있는 공간의 한계성을 벗어나기 위해 시각의 관점을 바꾸어 놓는 작가의 시험정신이 계속 시도하고 있다. 작가에게 캔버스 안에서 흙은 단순히 흙이 아니라 자연의 양분이며 인간의 터전이다. 질료와 물성의 변화를 통해 작가는 자연과 인간과의 공존과 소통, 결국엔 합일로의 길을 제시한다. 프레임을 버리고, 캔버스를 뒤집고, 천을 찢는다는 것... 찢겨진 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정체에 대해 고민을 해보면 작가의 생명주의와 환원주의 코드를 읽어볼 수 있다. 작가는 이 빛을 통해 우리에게 자연과의 소통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공간과 시간과의 함축적인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작품을 통해 창출하고자 한다. ■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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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센티멘털리스 Homo Sentimentalis


안옥현展 / AHNOKHYUN / 安玉鉉 / photography.video 2012_0316 ▶ 2012_0329 / 월요일 휴관


안옥현_분홍벽앞에 정진_C 프린트_41×41inch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1123g | 안옥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6_금요일_06:00pm

기획 / 쿤스트독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그만 울어!―눈물에 반대함 ● 옛날에 영화를 보는데 여주인공이 울기 시작했다. 30초 정도 울면 될 것을 그 배우는 5분 이상 울고 있었다. 좀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 앞자리의 어떤 '남성'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만 울어!" 그 일갈에 나는 속으로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 여배우는 정말 질질 늘어지게 지겹게 울고 있었다. ●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고 소리지르고 싶다. "그만 울어!" 좀 더 비평적으로 소리지른다면 "우는 장면 클로즈업 해서 미디어 상품으로 팔아먹는 짓 좀 그만 둬!"라고. 정말 너무 많이 운다. 그리고 우는 장면을 너무 많이 울궈 먹는다. 드라마도 울고 예능도 울고 남극, 북극, 아마존도 울고 김연아도 운다. 정말 나 빼고 다 우는 것 같다. 사람이 우는 현상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다. 아프거나 슬프면 당연히 눈물이 나는 것이다. 강아지도 우는데 말이다. 문제는 인위적으로 짜내는 눈물이다. 요즘의 미디어는 줌렌즈의 클로즈업 기능을 한껏 발휘해 눈물을 짜내고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심사위원들의 혹독한 소감을 들으며 눈물 지으면 카메라는 그의 눈물방울에 대폭 클로즈업해댄다. 대개 그의 어머니는 암에 걸려 있고 자기가 가수로 나서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유일한 출구인데 심사위원은 그에게 혹독하다. 그 딱한 모습에 시청자들도 줄줄 운다. 눈물은 시청자를 적시고 비판의식을 적시고 무의식을 적시고 미디어라는 필드를 적시고 대한민국을 적신다. 한 때는 컨템포러리 아트 전시 같은데서 '미디어의 확장'이라는 말을 곧잘 썼는데 이제는 '눈물의 확장'이라는 말을 써야 겠다. 나훈아가 "울지마, 울긴 왜 울어" 했지만 그 노래도 울고 있었다.
안옥현_보경과 헬로우폰_C 프린트_41×41inch_2012

눈물이란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단단히 포박해 버린 운명의 동아줄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컨템포퍼리 아트 마저 눈물이라니. 물론 아트가 흘리는 눈물은 다르다. 아트는 어떤 사태에 대해 바로 반응하는 양식이 아니라 성찰하고 표상하고, 그것에 대해 또 성찰하고 표상하는, 무한 반복되는 성찰의 회로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와 다른 양식이다. 즉 척 보고 좋은 작품도 다른 눈으로 보면 안 좋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아트다. 무조건 좋은 것이니 받아들이라는 것은 아트가 아니다. 『타짜』에서 백윤식이 "도박을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렸다"고 말했을 때 바로 그런 차원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을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조승우에게 도박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한다. 둘이 같이 사업을 하러 다니는 동안에도 도박을 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한다. 즉 도박을 하되 도박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타짜의 대가의 태도였다.
안옥현_나무잎무늬 커튼앞에 장훈_C 프린트_41×41inch_2012

따라서 아트가 흘리는 눈물은 대중문화가 흘리는 눈물과 다르다. 아트는 눈물을 흘리면서 도대체 이래도 되는가 스스로 성찰한다. 대중문화가 "같이 눈물에 푹 빠져 흠뻑 젖어봐요"라고 꼬드긴다면 아트는 "이렇게 울어도 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회의한다. ● 반면 대중문화의 눈물은 다분히 노출증적이다. 왜냐면 남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인데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에게 보이며 묘한 쾌락을 느끼는 것은 성적 도착의 한 형태인 노출증이기 때문이다. 바바리맨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변태인가? 그 개인은 변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설정을 하고, 매주 그런 장면이 나오고, 또 시청자는 그런 장면이 나올 것을 알고 기대하며 채널을 틀고 하는 모든 행위들 전체는 기묘하게 왜곡돼 있고 변태적이다. 대중문화가 그런 것인줄 알고 출연하는 사람도 변태적 행위의 공모자라고 할 수 있다.
안옥현_마 논 트로포 (collaboration with 오세현)_단채널 비디오_약 00:07:00_2010

눈물은 왜 나쁜가. 우선 습도가 높다. 사람이 명징하게 사고하려면 더운 것 보다는 좀 서늘한 것, 축축한 것 보다는 건조한 쪽이 좋다. 옛말에 발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두라고 하지 않았던가. 습도가 너무 높으면 감각이고 사고고 눅눅해져서 정상적인 판단과 성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눈물이 나쁘다. 대부분의 기계는 습도가 너무 높으면 안 좋은데 인간의 의식이라는 기계도 습도가 너무 높으면 망가져 버린다. 눈물이 나쁜 또 다른 이유는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헝겊이나 종이에 물이 떨어지면 점점 번져나가 적신다. 눈물도 번져나가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미디어의 프레임 안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 프레임을 타고 넘어 시청자의 안방을 적시고 뇌리도 적시고 온 나라를 적신다. 컴퓨터를 물에 빠트리면 못 쓰게 되듯이, 그렇게 젖은 의식은 바보가 된다. 웃음에는 거리두기와 비판이 가능하지만 눈물에는 함께 푹 젖어버리기, 그래서 머리가 휑하게 비어버리기 밖에 없다.
안옥현_마 논 트로포_단채널 비디오_약 00:07:00_2010

물론 사람들은 말 할 것이다. 한민족에게는 한이 많다고. 과연 그럴까. 19년하고도 180일간 317만명 이상의 군인, 민간인이 죽은 베트남 전쟁(베트남 사람들은 아메리카 전쟁이라고 부른다)만큼 한 만은 전쟁도 있을까. 600만명이 학살당한 유태인, 미국인들에게 대부분 학살 당하고 보호구역으로 내몰린 아메리카 원주민들, 스페인 사람들에게 도륙당한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 수도 없는 내전으로 참혹한 학살극을 겪은 아프리카 사람들 만큼 한 맺힌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보기에 한이란 눈물로 푹 젖은 영화나 음반 많이 팔아먹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눈물은 우리의 운명도 무의식도 아닌, 그저 21세기 대중문화의 한 코드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눈물에 반대한다.
안옥현_남몰래 흘리는 눈물 (collaboration with 오세현)_단채널 비디오_약 00:07:00_201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애도에 대해 생각해야 겠다. 애도(mourning)는 요즘 인문학의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크고 작은 슬픈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끊임 없이 희생되고 짓밟힌다. 거기서 생긴 한은 눈물만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주변사람들의 가슴에 피멍을 남긴다. 그런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면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계속 반복해서 떠오르는 것이 트라우마다. 그래서 그것을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 누군가는 그 피멍 어린 한들을 풀어줘여 한다. 그래서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존에 나와 있는 애도의 형식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울음이나 곡이 있다. 규모가 더 크고 공적인 것으로는 제사나 위령제 같은 리추얼, 추모비 같은 모뉴먼트가 있다. 트라우마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라면 애도하는 이벤트의 규모도 커진다. 추모곡이나 영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만들어서 애도하는 경우도 있다. 9.11 테러 같은 경우는 워낙 큰 사건이고 희생자도 많았기 때문에 애도의 형식도 다채롭고 규모도 크다. 즉 개인적 트라우마와 역사적이고 집단적인 트라우마는 대처방안도 다른 것이다.
안옥현_남몰래 흘리는 눈물_단채널 비디오_약 00:07:00_2012

그렇다면 컨템포러리 아트는 애도의 형식으로 적절한가? 여기서 문제는, 트라우마는 개인 주체의 실존적 조건에 깊숙이 얽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차원으로 끄집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작업을 했다고 했을 때 관객이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공감할 확률은 결단코, 분명히 0이다. 작가가 겪은 수치스럽고 끔찍한 경험에 대해 아무리 절절히 작업해 놓아도 보는 사람은 더 냉담해 질 뿐이다. '그건 니 사정이고'일 뿐이다. 더군다나 컨템포러리 아트라는 난해한 형식으로 돼 있을 때 관객이 작품 자체에 공감할 확률도 0이다. 끔찍한 일을 당한 당사자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트라우마를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통해 어떤 희생이나 트라우마에 대해 애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펜데레츠키가 작곡한 「히로시마 희생자들을 위한 비가」에는 추상적인 소리의 덩어리(클러스터)만이 있을 뿐이다. 그 소리의 불협화음에 몸서리를 칠 사람은 많아도 그 음악이 은유하는, 혹은 환유하는 히로시마의 희생에 대해 몸서리를 치는 것은 카프카의 소설 『단식광대』를 읽으며 단식농성하는 국회의원에 대해 연민을 품는 것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 눈물이란 그래서 힘든 것이다. 이제까지 쓴 것은 평론가가 눈물에다 겹겹이 두른 철조망이다. 안옥현, 이제 눈물에 어떻게 접근할텐가? ■ 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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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14:11:41 / Good : 313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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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 in between






권오신_김영미展 2012_0316 ▶ 2012_032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0316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2012년 스페이스 15th 세번째 기획전은 『Being in between』展_권오신, 김영미의 2인전이다. 두 작가는 '사이'에 머물기를 시도한다. 비워진 것과 채워진 것 그 사이에 머물기, 과거와 현재, 기억과 꿈, 그 시간의 사이에 머물기_Being in between_를 통해 작가들은 시공간을 아우르는 경험을 제안하고 있다. ■ 김홍식
권오신_Time no.110614_석판화에 혼합재료_70×100cm_2011



우리는 매일 여러가지 상황을 경험하고, 이러한 경험은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동시에 독자적인 여행을 시작한다. 이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여행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고, 새로운 상황과 만나게 되면, 이전의 기억이 다른 기억으로 변화하며, 또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개인적인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감각을 본인 나름대로 해석하고, 형태로 표현한다. 형태가 된 개인의 기억은 제삼자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착종 하며, 같이 공유하여, 본인 혼자만의 기억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게 된다. ● 『Being in between』전시는 누구나 한 번즈음 스쳐 지나간듯한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나의 기억 안에서 풀어나감으로써, 어디선가 본 듯한 현실의 공간인 듯하나 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화면을 나타낸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기억, 꿈, 시간 그 사이를 부유하는 다른 공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기억의 이미지로서 제삼자의 기억 속에서 새로운 시간의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기억을 공유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 권오신

권오신_Time no.13_석판화에 혼합재료_100×140cm_2010
김영미_Lace and Shadow_핸드컷팅,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40cm_2011
김영미_Lace and Shadow_핸드컷팅, 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0×60cm_2011



나는 캔버스를 오려내어 비워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언가로 덮혀져 왔던 캔버스를 오려내어 비워냄으로써 마이너스적인 공간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비워짐으로써 그것은 숨겨져 있던 자신의 구조를 드러내어 3차원의 새로운 공간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비워낸 화면은 빛과 그림자로 가득 채워져 가고. 비워짐과 채워짐의 경계에 머물게 된다. 이때에 캔버스는 빛과 실루엣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면서 조각이면서 작은 건축이 되어져간다. 한편 오리기는 대상이 얇을 때에만 가능하다. 무언가를 오려낸다는 것은 그것의 '얇음'을, 그 물리적인 특징을 드러내주는 행위이다. 나는 오려내기라는 수고로운 과정을 통해 캔버스가 자신의 물성을 드러내며 조금씩 조금씩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즐긴다. 가위나 칼로 무언가를 자르고 오리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노동이다. 아이들의 머리를 자르고, 매일 부엌에서 칼질을 하는 나에게 그것은 오히려 붓보다 더 친숙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나의 오리기는 파괴적이지 않다. 여자아이가 종이를 자르고, 인형을 오리고, 레이스를 자르듯이 실루엣을 드러내는 여성스러운 가위질이다. 그 속엔 여자로서의 나의 삶이 묻어있고, 땀이 묻어있고, 숨이 묻어난다. ●『Being in between』전시에서는 웨딩드레스의 레이스를 확대해 오려낸 작업을 선보인다. 캔버스에 오려진 레이스의 실루엣은 캔버스의 공간 속을 떠다니며 빛과 그림자를 만들며 부유한다. 비워진 것 그리고 다시 채워진 어떤 실루엣의 추상화된 공간 속에 머물고자 했다. ■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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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제이킴展 / J.kim / painting 2012_0316 ▶ 2012_0407 / 일,공휴일 휴관




제이킴 J.kim_chest pain_캔버스에 에나멜 페인트_97×162.2cm_2011



초대일시 / 2012_0316_금요일_07:00pm

후원 / (사)서울영상위원회_서울시 주최 /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일,공휴일 휴관

충무로영상센터 오!재미동 갤러리 미술동네 OHZEMIDONG GALLERY 서울 중구 충무로4가 125번지 충무로역사내 Tel. +82.2.777.0421 www.ohzemidong.co.kr




형광등이 눈부신 밤이다. 복도 가장자리에 위치한 내 작업공간은 빛이 좋지 않은 탓에 십자등을 박아 두었다. 네 개의 형광등이 제각각 차가운 빛을 내뿜어 스산한 기운을 만들어냈다. 어느덧 나무껍질과도 같은 텁텁한 날개를 가진 나방이 한 마리 들어와 형광등에 탁, 탁 하고 제 몸을 부딪쳐댄다. 텁텁한 날개를 가진 나방은 패널 위를 서성거린다. 패널 위에는 지독한 냄새를 내뿜는 그녀가 듬뿍 얹혀 있다. 그녀는 끈적끈적하고 아름다운 진홍색을 가진 페인트이다. 이윽고 나방은 얇고 가녀린 한쪽 다리를 헛디디고 만다.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쪽 다리를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푸드덕 거리며 발광하던 나방은 빠르게 집어삼켜 진다. 다리와 왼쪽 날개, 몸통, 머리, 더듬이에 이르러 마침내 오른쪽 날개까지. 날개가 삼켜질 때 즈음, 이미 나방의 발버둥은 멈추어져 있었다. 지독하고도 아름다우며, 무섭고도 고혹적인 광경이다.
제이킴 J.kim_chest pain_패널에 래커 페인트_90.9×74.8cm_2011
제이킴 J.kim_chest pain_패널에 에나멜 페인트_97×162.2cm_2011

그녀에게는 나방을 집어삼키는 것과 같은 힘이 있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빛깔은 강렬하고도 매서운 것이 실로 압도적인 까닭에 다른 어떤 질료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스스로의 빛을 뿜어내기도 바쁜 탓이다. 또한, 여정의 목적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일쑤임은 물론, 고집은 또 어찌나 세던지 타협할 줄을 모른다. 다른 질료가 접근해올 때, 그녀는 마치 영역을 침범당한 동물처럼 돌변하여 질료들을 몰아내어 쫓아내거나 말살시키곤 하는 것이다. 그녀는 모래사막의 소용돌이와 같은 존재여서 두려움과 동시에 눈을 뗄 수 없는 매혹 감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제이킴 J.kim_chest pain_캔버스에 에나멜 페인트_116.7×91cm_2011
제이킴 J.kim_chest pain_패널에 에나멜 페인트_130.3×162.2cm_2011

그녀에게 홀린 나는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하게 패널들을 눕혀댄다. 장갑과 마스크를 끼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가지고 있던 페인트를 모두 꺼낸다. 가빠진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동안 나는 눈을 감았다가 곧 작업을 시작한다. 페인트에 쑤셔 박아 놓았던 붓을 잡아들고 패널 위로 들이댄다. 붓은 번갯불 마냥 단숨에 패널 위를 스쳐 지나가기도,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지면 위를 지나듯 기어가기도 한다. 붓 끝에는 항상 페인트가 꼬리를 길게 늘어뜨려 놓은 채로 깐작깐작하게 매달려있다. 페인트의 강인한 점성은 중력에 경고라도 하듯이 붓으로부터 쉽사리 꼬리를 끊을 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패널 위로 떨구어진 페인트의 조각들은 끊어진 꼬리를 다시 찾으려는 듯 겹겹이 쌓여 위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때로 페인트는 쉬이 패널 위에 안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표류한다. 그 움직임에는 정처도 없고 규칙도 없다. 마치 안락한 선착장이 보장되지 않는 항해와 같다. 그럴 때면 나는 그녀에게 조롱당하기라도 하는 듯 한 기분에 휩싸인다. 두 귀에서는 그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꼬물거리는 그녀들을 보며 잠시 허리를 바로 세운다. 시간이 멈춘 듯, 패널 위를 뚫어져라 응시해 본다. 그러다 또다시 눈을 감아 본다.
제이킴 J.kim_Vergrant Birds_패널에 에나멜 페인트, 펜_120×60.3cm_2011
제이킴 J.kim_Vergrant Birds_패널에 에나멜 페인트_120×60.3cm_2011

아무도 없는 이 건물의 밤은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날카롭다. 몸을 의자에 눕히고 열어놓은 창밖을 바라본다. 방충망도 없는 저 작은 창문에서는 무중력의 어둠이 곧 삼켜버릴 듯이 나를 쏘아본다. 그곳에서 또다시 잡다한 날벌레들이 날아 들어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형광등에 제 몸을 부딪쳐댄다. 형광등 아래에는 여전히 진홍색의 아름다운 그녀가 꼼지락 꼼지락 거리고 있다. 시시각각 까르르 웃어대며 매혹적인 향을 내뿜기도 한다. 형광등에 제 몸을 박아대다가 그녀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비단 날벌레뿐만이 아니다. ● 차갑게 곤두선 형광등이, 검은빛이 들어오는 저 작은 구멍이, 그 구멍에서 날아와 페인트에 집어삼켜진 나방이, 나를 더욱 뜨겁게 하는 그런 밤이다. ■ 제이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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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wards, (part1. a story from Israel)





2012.03.06-2012.04.01










Freeze%20shahar%20marcus%d7%93%d7%99%d7%9e%d7%95%d7%99%20%d7%9e%d7%aa%d7%95%d7%9a%20%d7%a2%d7%91%d7%95%d7%93%d7%aa%20%d7%94%d7%95%d7%99%d7%93%d7%90%d7%95%20%d7%a9%d7%91%d7%aa%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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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스라엘 수교 50주년 기념 특별전시






일시: 2012 36()~41()

초청일시: 2012 3 6() 오후 5

장소: 토탈미술관 전관

기획: 토탈미술관, I-MYU Projects

후원: 서울특별시, 주한 이스라엘대사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참여작가: Ben Hagari, Shigalit Landau, Dana Levy, Sharhar Marcus, Uri Nir, Nira Pereg ,

Miri Segal & Or Even Tov, Shachaf Yaron, Tamir Zadok

특별강연:

- 강연자: 하지트 페레그 로템 (저널리스트, Land of Promise 비디오 컴필레이션 기획)

- 강연내용: 이스라엘 현대미술 이야기

- 일시: 2012 3 7() 오후 3

- 장소: 토탈미술관


□ Title:

□ Date: 6th of March to 1stof April 2012

□ Opening Reception: 6th of March 2012, Tuesday, 5pm

□ Organizer: Tot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I-MYU Projects

Sponsor: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Embassy of Israel, Arts Council Korea

□ Participating Artists: Ben Hagari, Shigalit Landau, Dana Levy, Sharhar Marcus, Uri Nir, Nira Pereg

Miri Segal & Or Even Tov, Shachaf Yaron, Tamir Zad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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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헌展 / MINBYUNGHUN / 閔丙憲 / photography 2012_0317 ▶ 2012_0506 / 월요일 휴관


민병헌_WV022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9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420h | 민병헌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7_토요일_05:00pm

갤러리이레 3주년 기획展

관람료 /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주말_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이레 GALLERY JIREH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405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41.4115 www.galleryjireh.co.kr


민병헌의 사진을 처음 접하게 되면 가슴이 먹먹하고 잔잔한 감동이 전해진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치 짙은 안개가 가득한 꿈속을 거닐듯,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될 때에 가려진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련히 보이는 희뿌연 빛깔을 담은 화면, 긁힌 듯 맺힌 듯 엉켜있는 미묘한 자국들, 그리고 배경과 피사체가 구별되지 않는 평평한 표면 등 그의 작품들은 회화적 요소가 많은 듯 보인다. 즉 민병헌의 사진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사진에서 기대되는 것들을 과감히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그는 '눈의 직관'을 좇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찍어 왔다는 것이다. 그는 광원이 없는 중간 톤의 밋밋한 빛에 의지하여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고 인화도 중간 톤의 인화를 좋아한다. 그의 작업에서 인화는 매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정통적인 사진 제작과정을 가감 없이 수행한 그의 사진은 아무런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은 매끈한 프린트 자체임에도 매우 촉각적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만져 보고자 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섬세하면서도 균형이 심하게 흐트러져 얼핏 보아 중심을 상실한 듯 허약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미묘한 톤의 변화와 완벽히 통제된 듯한 작은 흔적들에 의해 극도의 긴장감이 형성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그의 사진은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섬세한 색조의 변화와 얼룩의 정체를 감지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 "자유롭게 사물을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사진을 '눈'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_민병헌 그는 빠르고 날카로운 직관으로 "사진 작업이 아니고는 결코 표현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사진적 대상"을 추구한다. 이 대상은 크고 거창한 것, 혹은 기념비적이고 극적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작고도 별거 아닌 것, 의미 없는 것들 그리고 풍경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예술적 해석은 '문명의 현상보다는 자연이 자연을 변화시키고 있는 현상들'에 더 이끌리는 사진가인 것이다.
민병헌_DF040_젤라틴 실버 프린트_1998
민병헌_SL107_젤라틴 실버 프린트_미상

「별거 아닌 풍경」으로부터 시작하여「섬 Island」,「잡초 Weeds」,「깊은 안개 Deep Fog」그리고「Snow Land」와「숲 Trees」,「인물 Portrait」에 이르기까지 민병헌은 전형적인 자연의 소재들을 다뤄왔다. 평범한 소재를 사유화하기 위해 그가 고집하는 방법은 아날로그 방식의 흑백사진 프로세스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듯 하얗게 부서지는 찬란한 나뭇잎, 부드럽게 번지듯 스며드는 짙은 어둠의 숲, 심연처럼 온 세상을 감싸 안은 짙은 안개를 담은 흑백의 계조는 소재를 뛰어넘는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에게 순수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어왔다. 그는 작품에서 온전하게 자유롭다. 자연 앞에서 그가 느낀 바에 따라 톤을 조정하는 것일진대 그 미묘하고 섬세한 몰입의 경지가 감탄스럽다보니 자유롭다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육안으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병헌의 흑백사진에 담긴 자연은 보는 사람을 긴장시킨다. 사진 앞에서만 서 있어도 작가가 겪어낸 엄밀한 선택의 순간들, 자연을 마주하고, 나만의 자연으로 만들기 위해 교감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재단하고, 빛의 양을 조절하고, 인화지 위해서 한 번 더 은염의 농도를 조절하는 과정이 한 장의 사진마다 생생하게 다가온다.
민병헌_FF013-1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민병헌_MG364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그의 사진에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민병헌의 작품을 통해서만 감지되는 지점이 있다. 「Snow Land」 연작에서 눈은 흰색과 밝은 회색의 톤을 사진 전면에 부여하여 전체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다. 눈보라는 숲을 덮으며, 운무는 나무 꼭대기에서 하얀 장막을 드리운다. 눈은 빛을 대체한다. 눈에 덮인 세계는 사진을 최소화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나무와 산비탈의 흙은 마치 가볍게 긁힌 자국들처럼 희미하게 화면을 덮고 있다. 눈이 내린 세계는 어디를 보아도 균일한 거리의 음영(陰影)들만을 드러낼 뿐이다. ● 「폭포 Waterfall」연작 중의 많은 작품은 수직으로 하강하는 물줄기를 중립적인 셔터 스피드로 촬영해서 눈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운동감을 나타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폭포사진들은 셔터를 길게 늘려 물의 흐름이 과장되었거나 반대로 셔터를 아주 짧게 끊어서 극적으로 고정시킨 것들이었지만, 그의 사진에서 수직으로 하강하는 폭포의 물줄기는 그야말로 딱 '중간'으로 흘러내린다. 운동감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물줄기에 집중해서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면 물의 흐름과 반대로 내 몸이 끌어올려지는 듯한 착시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물줄기를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물줄기 그 자체를 사진의 온전한 주인공으로 삼아 장대함에 몰입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물줄기 사이에도 회색이 자리 잡고 있다. 정서 혹은 가치 판단으로부터 중립적인 좁고 세밀한 범위의 회색 층이 만들어낸 엄정성이 정적인 사유의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 사진의 기계성에도 불구하고 민병헌의 작품의 시선 속에는 어떤 다른 것이 내재되어 있다. 시선의 욕망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있을까?「인물 Portrait」연작은 다른 풍경사진처럼 텅 빈 공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여성을, 그것도 옷을 반쯤 걸쳤거나 벗은 여성의 누드를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피사체인 여성들의 모습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에로틱하다. 이 사진들은 다른 민병헌의 사진들과 달리 구체적인 욕망의 대상을 직시하고 있다. 피사체인 여성의 몸은 마치 목탄으로 그린 것처럼 상대적으로 뚜렷한 부분들과 흐릿하게 번진 듯한 모호한 그림자들로 묘사된다. 포즈는 바로 이 정지 상태에 의해 구성된 또 다른 대상(반투명한 스크린)에 대한 시선의 욕망이 사진의 이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생생한 대상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모호하게 만든다. 남은 것은 사진의 표면과 그 표면에 기록된 시선의 흔적이다.
민병헌_TR124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08

이와 같이 민병헌 연작시리즈를 살펴보면 그의 작품들이 지니는 힘은 오히려 그 어느 곳에서도, 언제라도 우리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상상의 세계의 주인이 되라고 청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의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매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완전히 독립된 공간 속에서 감각의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감각적 몰입을 통해서 내적 상상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 갤러리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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