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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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1.06.01 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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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없이 - 282

윤석남展 / YUNSUKNAM / sculpture   2011_0513 ▶ 2011_0831 / 월요일 휴관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926a | 윤석남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水 서울 송파구 신천동 32번지 석촌호수 내 Tel. +82.2.2147.2810, 3813 www.songpa.go.kr

송파구립 갤러리 水에서는 2011년 5월 13일부터 8월 31일까지 윤석남 『사람과 사람없이 - 282』을 개최합니다. 이 전시는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아르코미술관에서 『윤석남 - 1,025; 사람과 사람없이』로 첫 선을 보였습니다. 유기견을 소재로 하여 나무로 제작한 1,025마리 조각 작품들을 설치하여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선사하였습니다.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갤러리 水의 공간에 맞추어 새롭게 제작한 282마리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윤석남은 여성의 삶과 내면을 사유하며 여성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 및 해석을 작품에 제시합니다.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한 이력을 살펴보면, 1939년 만주생, 1966년 성균관대 영문과 입학, 1967년 중퇴, 마흔이 넘어 작가로 데뷔 1982년 첫 개인전 이후로 작업에 더욱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눈」(1993), 「빛의 파종」(1997), 「늘어나다」(2003)는 작가의 주요 전시를 일별해 본 것으로 작품의 주요 개념은 어머니로 모성의 재해석을 통해 새로운 여성사를 구축합니다. 작가에게 가장 각별한 어머니에 대한 작업은 개인적, 사회적으로 공유된 어머니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까지 더해져 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억압되고 주체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존재, 부당한 삶을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품화 합니다. ● 여성, 어머니에 대한 작업은 우연히 접하게 된 포천의 '애신의 집' 유기견들을 만난 후 작품의 대상은 확대됩니다. '이애신' 할머니가 돌보는 1,025마리의 버려진 개들은 인간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대상으로, 인간에 의해 보호받도록 길들여지고, 의존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유희적 도구로 전락해버려 인간의 돌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에 의해 생을 살고 '사람'에 의해 버려지는 유기견을 통해 작가는 소외되고 버려진 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문화의 일면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천착하고 있습니다.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윤석남_사람과 사람없이-282展_갤러리 水_2011
이번 전시에서는 갤러리 水 전시장에 맞추어 282마리의 작품이 새롭게 선보입니다. 282마리의 조각 작품은 나무의 재질과 특성을 최대한 살려가며 다양한 형상으로 다듬고 그 위에 아크릴물감과 먹으로 그리고 채색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수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해 온 제작 기법으로 회화의 전통 방식인 '그리기'를 조각과 설치에 접목하여 표현합니다. ● 1,025마리를 통해 비참하게 죽어간 유기견을 애도하였다면, 이번 282마리를 통해서는 '희망'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가 되는 석촌호수는 도시에 사는 개들에게는 최대한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 관람객들에게는 도심 속에 위치한 전시장에 마련된 작품을 통해 기존의 미술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넘어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과 탐험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윤석남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문제와 시대적 표상으로 발현된 작품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범위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역할과 활동을 하는 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 봅니다. ■ 갤러리 水




Urban Space

이언정展 / LEEUNJUNG / 李彦政 / painting   2011_0523 ▶ 2011_0612


이언정_CITY25_실크스크린_90×11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언정 홈페이지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1:00am 카페 미엘 CAFE MIEL 서울 강남구 청담동 94-3번지 puzzlehaus 1층 Tel. +82.2.512.2395 www.miel.kr

본인은 '도시' 혹은 '인간의 활동 공간' 속 "타인과의 관계"와 "공간"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 2008년부터 「무제」연작을 통해 인간의 활동 공간 안에서 사람들 사이의 공간적 거리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탐구하고 있고, 「city」연작을 통해 도시의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업들을 표현함에 있어 판화 기법 이용하고 있는데 목판화를 통한 양각 기법과 동판화 에칭, 실크스크린을 이용한다. 평면회화 작업과 함께 관객 참여적인 인터렉티브 아트 작업도 하고 있는데 관객과 상호 작용하는 작업을 통해 도시가 건설되고 파괴되었다가 다시 건설되는 순환적 과정과 이로 인해 생겨나는 도시 속 다양한 공간의 의미와 타인과의 소통을 다룬다.
이언정_CITY21_실크스크린_32.5×42cm_2011
이언정_CITY22_실크스크린_32.5×42cm_2011
이언정_CITYXII_목판화_100×190cm_2009
이언정_CITYⅩ_목판화_70×172cm_2009
이언정_CITY88_목판화_60×90cm_2010
이언정_CITY APPLEO(6×6)_실크스크린_각 24.5×33.5cm_2010
본인의 작업은 현대 도시에 대해 느끼는 본인의 내향적 감성을 표현한 것이다. 도시를 주제로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은 객관적 도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느끼고 생각하며 체험한 도시를 그려낸다. 본인의 작업은 이 시대의 체험 현상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작가 본인이 느끼는 시대적 감수성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체험한 현대 도시의 시각 현상과 도시 속에 살고 있는 본인의 감수성을 집약한 결과물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가며 변화하는 도시의 새로운 상황과 계기를 체험하고 그것을 개인적 시각에서 표현했다. ■ 이언정




Homage to Morandi: Essence of Art

2011_0602 ▶ 2011_0626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611_토요일_06:00pm 참여작가 고창선_김창겸_박은선_이만나_임자혁_임춘희_장보윤 Anne Harild_Bryan Osburn_Frank Webster_Eric Sall Joseph Burwell_Sky Kim_Tom Lee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이번 전시는 2008년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열렸던 20세기 정물화의 대가 죠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 Italian)의 회고전에서 목격한 꽃 그림에서 시작되어, 14명의 국내외 작가들이 모란디의 작품과 일생에 관련된 몇 가지 단초를 둘러싸고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각자 해석하는 데서 비롯된 전시이다. 회고전의 묘미는 단연 예술가의 일생을 한 공간에 압축해 놓고, 그가 남긴 유물들을 조합해 과거에 생존했던 존재의 강력한 아우라를 접할 수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Frank Webster_Lill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1×45.7cm_2011 Eric Sall_Blossom 1_캔버스에 아크릴, 유채_40.6×30.5cm_2009
Joseph Burwell_Fort of Hippies_나무패널에 팬, 연필_25.4×30.5cm_2011
Bryan Osburn_untitled 2_종이에 아크릴채색_9×12inch_2010
Anne Harild_Morandi Room_단채널 비디오, sound by Edmund Finnis and Orlando Higginbottom_00:04:01_2008 ( 5 editions with 2 artists prints) Tom Lee_Morandi Flower 2_캔버스에 유채_41×32cm_2011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모란디 회고전은 다른 많은 전시회들 가운데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전시였는데,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전시장에 디스플레이 된 작품들 사이사이, 그가 지인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이 액자에 넣어져 같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편지에서 보여지는 그의 사생활에서 그의 마음과 정신이 온건히 그의 예술세계에만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작은 캔버스 위에 군더더기 없는 정물들의 정교한 배치와 담담하고 세련된 팔렛트의 구성을 통해 일상을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모란디. 작품들과 편지들의 적절한 배열을 따라 관람하다 보면 일생의 흔적이 일관될 수 있었던 이유를 간파할 수 있었는데- 평생 같은 주제의 비슷한 그림을 반복적으로 그렸다는 그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수많은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똑같은 정물들이 사실은 한 예술가의 일생의 고뇌가 깃들여져 있는 상징적 사물이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었다. 또한, 그것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 노력한 한 예술가의 인생은 마치 예술가라는 직업인의 표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모란디라는 예술가와 그의 예술세계가 조금의 어긋남이 없이 일치하는 현상은 예술을 업으로 하는 자라면 한번쯤은 생각할 만한 의미 있는 화두라 생각하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전시되었던 유작 중 꽃병 안의 꽃다발을 묘사한 작품 'Fiori' (flowers) 가 여럿 눈에 띄었는데-꽃 그림의 작품명은 모두 같았다- 모란디의 꽃그림은 개인소장이 많아 한자리에 여러 개의 꽃그림을 두고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출품된 꽃그림들 중 많은 작품들은 소장자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전시를 돕기 위해 첨부해 논 설명문구와 예의 편지들에서 이 작품들이 오로지 선물용으로만 제작된 것 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날 본 꽃그림들에 대한 야릇한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Sky Kim_Imprinted Codes_종이에 팬_각 29×25cm_2011
임자혁_4월_종이에 과슈, 잉크_42×29.7cm_2011 장보윤_Chapter1_Story about Bob Petersen6_종이에 과슈_32×30cm_2011
고창선_빛이 말하는 순간 구름이 말을 막아서며_잉크젯 프린트_20×80cm, 20×40cm_2011 이만나_봄밤_캔버스에 유채_각 41×32cm_2011
임춘희_Feeling an Emotional Disturbance in an Unfamiliar Atmosphere_나무에 유채_27.1×19.2cm_2008 박은선_Red Flow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5×53cm_2011
이러한 이유로 이번 전시의 시각적 소재는 '꽃'으로 결정된다. 그런데 모란디 꽃 그림 속의 모델은 아직도 볼로냐의 모란디 미술관에 보존되어 관람 가능한 조화이다. 이는 그의 많은 정물들과 같이 그림 속의 꽃도 하나의 오브제로써의 꽃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의 시각적 주제가 꽃이자 꼭 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상기의 전제는 꽃이라는 사물, 혹은 이미지를 선물로 주고 받는 것에 따르는 상징성에 대해 전복하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렇다면, 모란디의 꽃그림이 실재하는 생화보다 더욱 은은하고 우아한 잔상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안구를 통해 시각적으로 인지된 이미지는 경험의 잔상을 반영하는가? 혹은, 그것이 지지 않을 꽃임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구별한 것일까? "현실보다 더 초현실적이고 추상적인 것은 없다 (There is nothing more surreal and abstract than reality itself)"라는 말을 남긴 모란디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평생 같은 주제의 그리기를 반복하며 구하려 했던 것은 인간의 시각체계를 통한 인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은 전부 없애고 뼈대(essence)만 남은 그의 작품이 전세계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아직도 변함없는 사랑과 영감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번 전시는 정지된 사물을 통해 시간의 개념을 삭제하고 우리의 영혼에 사색의 공기를 불어넣는 모란디의 작품 세계를 같이 음미해보며, 동시에 "예술의 본질(essence of art)"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해보는 소중한 기회로 삼고자 한다. ■ 오숙진
김창겸_Flower Garden_단채널 비디오_00:15:00_2011
『Homage to Morandi: Essence of Art』 Press Release Participating Artists: Anne Harild, Boyun Jang, Bryan Osburn, Changkyum Kim, Changsun Koh, Chunhee Im, Eric Sall, Eunsun Park, Frank Webster, Jahyuk Yim, Joseph Burwell, Manna Lee, Sky Kim, Tom Lee Title: Homage to Morandi: Essence of Art Date: 2011.6.2 (Thu) – 6.26(Sun) Reception: 2011.6.11 (토) 6 pm Venue: Brain Factory (Tongui dong 1-6 Jongro-ku Seoul, Korea / Tel. 02-725-9520) Curated by: Sook-jeen Oh (Brain Factory Director) Open hour: 11am – 6pm, closed on Mondays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2011_0602 ▶ 2011_0623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홈페이지로 갑니다. 개막식 / 2011_0603_금요일_05:00pm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songamfoundation.org

공간그룹은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를 개최합니다. 1980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모토에서 시작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국제적으로 참신하고 유능한 판화작가를 발굴하고 판화의 저변확대 및 보급을 통한 일상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해 애써 왔습니다. 본 행사는 다양한 판화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전세계의 판화 작가들로부터 작품을 응모 받고, 심사를 거쳐 선별된 작품들을 전시하고 시상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국내 유일, 국내 최대의 판화전문 국제행사로서 전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국제판화축제입니다. 30여년의 역사는 해외의 많은 판화 작가들 및 기획자, 평론가 등에게 본 행사의 중요성과 인지도를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2011년 6월 2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됩니다. 전세계 판화가들로부터 접수 받은 400여점의 응모작품들 중 국제심사위원단의 엄정한 심사를 통해 미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작품들로 선별된 입선작 100점이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OCI 미술관 전관에서 전시됩니다. ■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OCI 미술관_2011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OCI 미술관_2011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OCI 미술관_2011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OCI 미술관_2011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 시상제도 ●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는 입선작 100점을 1차로 선정한 후 이들중 대상 1점, 우수상 2점과 다수의 매입상을 선정하여 시상합니다. 대상은 10,000USD, 우수상 2점은 각각 5,000USD의 상금이 수여됩니다. 매입상은 위축되는 여건에서 어렵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판화작가들을 장려하기 위하여 시상자가 선정한 작품에 대해 일정한 상금을 후원하고 작품을 매입하는 제도로서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만의 독특한 시상제도 입니다.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대상 남천우 Nam, Chunwoo_We are Here_석판화, 에칭, 금박_66×102cm_2011_KOREA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우수상 Ha?derek, Grzegorz_Cooling Tower I_음각_69×99cm_2011_POLAND
제16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_우수상 Hiratsuka, Yuji_Garden Posture_음각_60×90cm_2010_JAPAN
수상작 전시회 전시기간 / 2011년 06월 2일 ~ 2011년 6월 23일






이동을 위한 밤 A Night for Transfer

윤민지展 / YOONMINJIE / 尹旼芝 / painting   2011_0607 ▶ 2011_0629 / 일요일 휴관


윤민지_이동을 위한 밤-2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초대일시 / 2011_0607_화요일_05:00pm 런치토크 / 2011_0617_금요일_12:00pm 미술체험 / 2011_0625_토요일_03:00pm * 프로그램 참가신청 www.shinhanmuseum.co.kr < 정보마당 < 교육행사 < 신청하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신한갤러리 SHINHAN MUSEUM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2-12번지 신한은행 광화문지점 4층 Tel. +82.2.722.8493 www.shinhanmuseum.co.kr

공항, 어두움, 하늘 그리고 추상적 면들 ● 공항이 있다. 시간은 황혼에서 새벽까지이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도착한 비행기들과 또 다른 시간대로 날아가는 비행기들이 한 공간에 머물러 있다. 날아오는 것들과 떠나가는 것들은 이 장소의 바깥에서는 어두운 공간의 점, 불빛들로 나타난다. 거대한 밤하늘과 텅 빈 활주로, 그리고 거대한 동물들처럼 어둠 속에서 매끈한 유선형의 윤곽을 드러내는 비행기들이 있다. 인물들은 잠시 이곳에서 조우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은 곧 알 수 없는 먼 장소들로 흩어질 것이다. 이들은 거대한 창문을 통해 그들이 곧 날아오를 어두운 공간을 응시하거나 대합실의 높은 천장 아래에서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사람들의 모습을 쳐다보곤 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출발지와 목적지, 그리고 시각들로 표기된다. 전광판이 없다면, 이보다 더 고립된 곳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공항은 도시보다 하늘에 더 가깝다. 그것은 추상성의 경계에 있는 장소인 것이다. ● 윤민지는 공항을 그린다. 2007년부터 약 3년 간 그가 경유한 인천, 동경, 싱가폴, 암스테르담, LA, 뉴욕, 런던, 두바이의 공항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있다. 특이한 것은 항상 어두운 시간대의 공항을 그린다는 것이다. 어두워진 이후의 공항에서는 그것이 바깥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불빛들이 사라진다. 공항 건물의 실내를 제외하고는 활주로의 유도등만 남기고 모든 불빛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물을 통해 바라본 바깥의 공간은 칠흑 같은 어두움이 지배한다. 건물의 불빛과 비행기 주변의 조명들은 마치 어둠 속의 흐릿한 얼룩들처럼 은은하게 사물들을 비춘다. 작가가 그리는 그림들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톤을 유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새벽을 그린 그림에서조차 화면의 상당부분을 짙은 검은색에 할애한다. ● 희미한 조명과 어두운 배경, 그리고 검은 실루엣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환기시키는 것은 인공적인 무대다. 물론 아무 무대를 다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무대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물들의 배경으로 보이는 공간을 규정하는 것은 일상적인 예를 벗어나는 커다란 면이다. 공항의 높은 천장, 단조로운 회색의 벽면, 이상하리만치 거대한 창문, 광활한 활주로와 어둡고 텅 빈 하늘, 등은 일상적 존재의 삶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 이 공간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회화의 장소들 가운데 이렇게 커다랗고 텅 빈 면을 지니고 있는 인공적인 장소들은 많지 않다. 대표적인 또 다른 공간은 극장과 수영장이다. 극장의 스크린은 간혹 텅 빈 커다란 면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이어질 재현의 시간이다. 그것은 의미들로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장소는 커다란 수조에 물이 담겨 있는 수영장으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물의 의미에 생각하는 대신 그 안으로 몸을 담근다. 공항의 면은 주로 하늘이거나 커다란 건물의 천장, 유리벽면이다. 이 공간 역시 수영장의 물처럼 구체적 의미를 띠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중립적(neutral)이다. 인물의 배경으로 제시되는 이 인공적이고 단순한, 커다란 면들은 비극의 핵심적인 조건 즉, 세계가 개인들의 의지를 초월하는 미증유(未曾有)의 상태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신(神), 혹은 물질적 무관심으로 채워진 세계이다. 인간의 근원적 고립을 야기하는 이 면으로부터 비극이 비롯된다. 두 번째는, 장소의 원격성(remoteness)이다. 공항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도시 외곽의 동떨어진 장소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공항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는 곳이다. 과거의 항구와 달리, 이곳이 접하고 있는 것은 바다가 아니다 (물론 바닷가에 많이 위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공항은 관념적으로 기술적으로나 하늘과 접해 있다. 육지 안의 섬과 같은 이 장소가 제공하는 추상성으로 인해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일상의 사건들로부터 분리된다. 사람들에게 닥친 일은 허공으로 들어 올려지거나 그곳으로부터 내려오는 일이다. 공항은 이 두 가지 사실 사이를 경유하는 과도적인 공간을 제공한다. 일종의 연극이 시작되기 전의 심리적 전환 같은 것이 길고 느리게 공항을 지배한다. 아마도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이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까지의 모든 기억들을 정리하고 전혀 다른 시간대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공항이 만들어내는 비극적 카타르시스가 사람들을 더욱 내면으로 침잠하게 하고, 스스로 침묵 속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공항은 모두를 혼자로 만든다.
윤민지_이동을 위한 밤-3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0
윤민지_왜 이렇게 긴긴밤은 또 잊지못해 새울까_캔버스에 유채_60.5×72.5cm_2010
윤민지의 그림에서 검은색은 다른 모든 색들과 섞인다. 장소의 시간대가 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검은색은 몇 가지 독자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윤민지는 붓의 터치를 평면화함으로써 넓은 면을 상대적으로 중립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감의 밀도에 의해 화면에는 붓의 흔적들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약간의 흔들림을 야기하는 이 붓자욱들로 인해 넓은 면에는 미세한 번짐 혹은 얼룩 같은 것이 남게 된다. 회색의 건물이나 바깥의 푸른 하늘에서조차 붉으스름한 갈색이나 녹색의 어렴풋한 계조가 발견되곤 한다. 그러나 전체 화면의 주조(主調)는 엄격하게 중립적이고 무거운, 혹은 차가운 감정을 압도적으로 강조한다. 밝은 면으로 이어지는 경계에서 이러한 색의 혼조는 좀 더 격렬한 형태를 띤다. 수평적이고 빠른 붓의 움직임에 의해 검은색과 강렬한 붉은색 혹은 푸른색 등의 대비가 화면에 속도감을 부여한다. 빠른 붓질은 대상의 일시적 포착, 시선의 움직임, 덧없는 조우 등을 환기시키면서 부유(浮遊)하는 공기의 흐름을 포착해낸다. 검은색은 붓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그것은 화면의 구석구석까지 시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두 번째로, 이러한 검은색은 미술의 역사 속에서 몇 가지 참조들을 떠올린다. 그 가운데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와 에드루샤(Ed Ruscha)가 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검은색이 차지하는 면은 생략과 단순화를 강조한다. 1942년 작 「Nighthawk」는 어두운 바깥과 밝은 실내를 역광을 통한 대비로 보여주고 있다. 이 밤풍경에서 보이는 날카로운 경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밝음과 어두움의 역전은 윤민지의 실내풍경에서 보는 기하학적 면의 분할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에드루샤의 1963년 작 「Standard Gas Station, Amarillo, Texas」의 검은 하늘과 건물의 밝은 면들, 그리고 하늘을 가로지르는 조명과 전체적인 역부감의 구도 역시 윤민지의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구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어두운 면의 사용은 붓터치를 이용한 전계(轉階, gradation)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세 번째로, 검은색은 화면을 극적 공간으로 만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면에서 밝은 면은 부분적으로 조명이 비춰진 장소이거나 아니면 창문 바깥에서 들어오는 새벽의 여명, 혹은 황혼이다. 빛은 한낮의 전면적인 사실성 대신 인공적인 연출을 연상시키는 흐릿하고 추상적인 면들이 된다. 이 면들을 만들기 위해 검은색이 사용된다. 검은색은 기본적으로 무대이며, 여기에 드리워진 빛은 불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암시하는 추상적인 장치이다. 그 무대 위로 인물들이 오가고 시선들이 움직이며 침묵과 지연(遲延)이 화면을 지배한다. 이제 곧 누군가가 첫 대사를 말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이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화는 그 이전의 지점에 머물러 있고, 아직 인물들에게는 조명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 윤민지의 작품들 가운데 특이한 연작이 있는데, 바로 활주로 바닥을 그린 것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로 느리게 주행(taxi)하는 구간의 바닥을 그린 듯한 것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비행기의 불빛에 의해 빛을 받은 화면 아래쪽의 바닥에 쓰인 사인(sign)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닥에는 활주를 위한 지시 대신 '왜 이렇게 긴긴 밤을 또 잊지못해 새울까', '돌이킬 수 없는 줄도 모르고', 혹은 '울고 있는 내 친구여 어차피 우리는 사라진다'와 같은 노래 가사 같은 문구들이 멀어져 가는 원경 속에 어렴풋하게 나타나 있다. 회화에서 단어의 기재(inscription)를 사용한 예들은 수없이 많다. 그것이 시각적 요소이건 개념적 요소이건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은 회화적 요소로서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나 에드루샤의 경우, 단어의 사용은 작품의 형식을 지배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이미지를 생산하며 뒤샹이 말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색채'(invisible color), 혹은 그 이상의 것이 된다. 윤민지의 작품에서 이 문장들은 비행기의 현창(舷窓)에서 내다본 어두운 공간에 투사된 심리적 파편들일 수 있다. 동시에 이것들은 이 공간이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얼룩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활주로의 어둠은 거대한 이드(Id)처럼 무의식의 바다를 이룬다. 그것으로부터 무엇이 솟아오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 그것은 이제까지 지상에 나를 붙잡아 놓았던 상념들의 잔상을 마지막으로 표시한다.
윤민지_준비의 시간_캔버스에 유채_100×72.7cm_2011
윤민지_ 깨지못한 밤_캔버스에 유채_100×72.7cm_2011
윤민지의 작품이 지니는 극적 성격은 특정한 내러티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분할에서 비롯된다. 그의 화면은 단적인 비례의 불균형(disproportion)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미니멀리스트 무대미술의 대가인 로버트윌슨(Robert Wilson)의 공간에서 역-투사(Rear Projection)을 이용한 무대화면 전체의 색면효과를 떠올릴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무대 위의 인물들은 어두운 실루엣으로 정지되어 있는 반면 거대한 붉은색 혹은 흐릿한 푸른색의 장방형 빛이 거대한 공간을 채우곤 한다.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연작이나 「A-S-A」, 「T-A-1」과 같은 작품들의 장면은 윌슨의 「성 세바스찬의 순교」, 「햄릿」, 「파우스트」 등의 무대를 연상시킨다. 화면의 과도한 여백은 모두 심리적 심연에 할애된다. 그것은 인물들의 내면과 등가적인 존재로 바뀐다. 그러므로 여백의 면은 생산하는 면이다. 윤민지는 이 면을 회화적인 면으로 고수한다. 그것은 조금씩 움직이는, 거의 정지되어 있는 면이며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의 재현적 영역이 의존하고 있는 면이다. 회화는 동영상과 달리 하나의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진과 달리 구체적인 시공간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영원히 정지된 시간이자 불특정한 시공간을 다룬다. 이것이 회화적 추상성의 본질이다. 그것은 특히 회화가 재현하고 있는 것이 사실적인 대상일 경우 더욱 강조된다. 단(單) 프레임인 유화가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비-시간적 요소들, 즉 면(面), 빛, 분할, 그리고 비례를 이용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서 영원함에 대한 감정이나 절대성에 대한 예감 등을 추출하는 것은 그것들이 정지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특정한 정지를 선택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 회화적 장소는 세 가지 레이어로 이루어져 있다. 모티브로서의 장소, 회화적 장소, 그리고 감상자 안에서 생산된 것으로서의 장소. 윤민지의 장소인 '공항'은 흔히 '헤테로토피아'적인 장소로 분류된다. 즉 '비-장소'(non-lieu), 경계, 통로, 닫힌 공간(espace clos), 비-자본주의적 장소, 전환부 등이 그것들이다. 윤민지의 공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미셸푸코가 언급한 '다른 장소들' 혹은 '타자적 장소'로서의 '헤테로토피아'가 있다. 우리는 그의 분류들을 통해 공항이 복합적인 헤테로피아의 원칙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공항은 수많은 권력과 해석의 형태들이 수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는 극장과도 같은 공간이면서, 동시에 감옥처럼 허가에 의해 개방과 폐쇄가 이루어지는 통제된 공간이며 동시에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허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거의 항구처럼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치밀한 감시와 전율의 잠재성을 내포한다. 아마도 과거의 항구와 오늘날의 공항은 바다와 하늘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헤테로토피아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헤테로토피아로서의 '회화'가 있다. 회화적 장소는 '동굴'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로 남아있다. 그것은 일루젼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회화가 공항을 재현하는 것은 그것의 타자성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언급이 된다. 세 번째는 회화적 장소와 관련된 것으로, 바로 검은색 혹은 추상적 면의 장소성이다. 윤민지의 회화 속에서 의식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이 면의 장소성은 감상자의 시각적 경험 안에서 헤테로토피아를 생산하는 중요한 장치이다. 그의 작품에서 '다른 공간', '공간의 타자성'은 회화의 공간, 회화의 타자성으로옮겨적을 수 있다. 회화가 그리는 것은 공항이 아니다. 그것은 장소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소는 회화의 본질이다. 윤민지의 회화를 구성하는 본령은 이 회화적 장소들에 있다. 때로 그것은 어둠이고 때로 그것은 흐릿한 하늘이다. 다른 말로, 추상적 면들인 것이다. ■ 유진상
윤민지_나눌수 없는 밤1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11
윤민지_향하여_캔버스에 유채_100×72.7cm_2011
이동을 위한 밤 A Night for Transfer ● 나는'공항'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경유를 하게 되면서 마주친 장면들을 토대로 작업하고 있다. 물리적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 공간에서는 출발지의, 또 목적지의 것도 아닌 잠시 부유하는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 ● 현대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로서의 건축과 기구를 통하여 물리적인 변화, 이동을 꿈꾸는 공항은 지구에 발을 내려 살아가는 한 생물체로서 가지는 저항력이 극대화 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결과임에 불구하고, 그 안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모습은 애잔하다. ● 매우 공적인 공간 안에는 매우 사적인 기다림이 있다. 국가와 국가사이의 경계라는 장소적 특성과 그 기다림조차도 도착과 출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사이경계에 있는 듯하다. 낮의 선명함으로부터 피한 개인의 온전한 시간, 심연으로의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밤. 그 누구도 방해받고 싶지 않을..혹은 누구도 방해하고 싶지 않은 밤. 많은 것을 품고 있으면서도 가려주고 있는 밤에 나는 이동한다. ■ 윤민지




높은곳 - 카타콤베 CATACOMB

장수선展 / JANGSUSUN / 張蓚渲 / photography   2011_0608 ▶ 2011_0613


장수선_catacomb01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93×125cm_201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02b | 높은곳-카타콤베 도서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3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원래 카타콤베(카타콤)는 그리스어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였다. 서기 3세기 무렵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없게 된 기독교인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지하무덤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당시에 그곳은 식사와 기도를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면서 기독교인들은 땅 위로 올라와 자유롭게 되었다. 하지만 그 후 반대로 권력의 반열에 오르자 그들은 자신과 종교적 신념이 다른 종교인들을 박해하여 또 다른 이들을 어느 곳인가로 숨게 하였다.
장수선_catacomb04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40×175cm_2010~11
21세기 한국에서 사진가는 광풍처럼 몰아닥친 뉴타운 건설 지구로 지정된 서울에서 주로 강북에 위치한 홍은동, 돈암동, 전농동, 남가좌동, 등등의 여러 빈 집들을 찾아다녔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자본의 논리에 강북으로 몰린 서민들은 주거 공간으로서 수많은 빌라와 작은 단독주택에서 그나마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주거 공간의 한 시절이 완전히 무너지고 또 한 시절이 다가오는 변곡점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욕망과 꿈이 어지럽게 흩어진 흔적으로 남아 섬광처럼 잠깐 등장하였다가 사라지며 21세기 폐허로서 강력한 이미지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장수선_catacomb05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40×175cm_2010~11
철거를 앞둔 빌라들은 처음 등장할 당시 서민들에게는 세련된 주거 공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낡아가고, 조금 더 세련되고 편리해지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빌라를 사라지게 해야 하는 괴물처럼 둔갑시켰고 거주민들을 몰아냈다. 그곳은 3세기의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서 생긴 카타콤베의 흔적과 다름없었고, 한국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계층의 차이로' 이름만 바꾼 뉴타운(새마을의 재현) 건설 지역이었다. 이렇게 21세기 한국의 카타콤베는 역사의 직선적 진보라는 역사 인식에 의심을 품게 할 뿐만 아니라, 파괴와 박해의 반복, 다가올 미래에도 동일한 모습이 재현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 면에서 사진가가 2007년부터 산 위에서 본 아파트를 스펙타클로 작업해온 '바벨'과 이번에 발표하게 된 '높은곳-카타콤베'의 작업은 묵시론의 선상에 서 있다. 나아가 이번 작업은 대형 카메라의 기계적 특성을 엄격하게 이용하여 바닥에 누워 정면으로 소멸되어가는 천장과 천장 장식, 조명기구만을 집요하게 미시적으로 추적하여 거시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장수선_catacomb12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1
장수선_catacomb18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0~11
사진가는 2010년부터 2011년 4월까지 진행하여 빌라, 단독주택에 있던 천장화 같은 천장의 장식들을 사진집 '높은곳-카타콤베'에 39장의 컬러 사진으로 남겼다. 빌라나 단독 주택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천장 장식이야말로 지극히 사적인 주거 공간에서 강렬한 욕망을 담아내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한국의 초창기 근대화에서 벗어난 1980년대부터 주거공간에서 천장 장식의 문화는 권위주의적 정부 하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바깥으로는 강제적이고 엄격한 통제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해온 한국의 상황에서 어찔할 수 없이 공허해진 개인의 내면은 실내 장식의 과도함을 통해서 해소하려는 측면이 있었다. 즉 실내 공간의 화려함은 바깥 현실의 황폐함을 이면적으로 암시한다. 그래서 그것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서구에서 몇 세기 전에 유행하였던 화려한 양식만을 수입해오는 쪽으로 치우친 것으로 보인다.
장수선_catacomb23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75×140cm_2010~11
장수선_catacomb29_디지털 잉크젯 프린트_100×125cm_2011
1970년대부터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천장 장식 대부분은 전시관의 화려한 액자를 따라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의 근대화에서 극히 은밀하고 내밀한 욕망조차 이미 지나간 서구 세계의 문화사를 자신의 것처럼 전시관에서 경험하고 싶었음을 알려준다. 이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들은 현대 천장의 중심인 조명기구의 낡아감, 파손, 부재 등을 사진의 정중앙에 놓고 반복한다. 근대화의 한 상징인 빛을 쏟아내는 조명 기구 뒤에서 너무도 화려하면서도 보이지 않던 배후로서 천장 장식은 획일적인 근대화의 욕망을 조작해온 힘으로 이렇게 계속 나아가면 뉴타운도, 그 뒤에 올 새로운 건축물도 그 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징성을 활용하여 불길함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낸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사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담는 묵시론적인 사진예술의 특징과 한 시대의 욕망이 낳은 대상들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사진집 "높은곳-카타콤베”의 39장의 사진 중에서 15장의 사진으로 진행된다. ■ 장수선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

서재정展 / SEOJAEJUNG / 徐在禎 / painting   2011_0608 ▶ 2011_0614


서재정_불확정성 유기적 공간-#1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1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심미적 공간에서의 스토리텔링 ● 내가 생각하는 도심 속의 건물이란 누구나가 교통수단을 통해 이동하며 혹은 공원을 산책하며 바라보게 되는 그런 존재이다. 서재정은 이렇게 일상 속에서 등장하는 건물의 건축적 요소들을 작품의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사이사이 항상 똑같이 자리하고 있는 건물, 특히 이러한 건물들 속에서 작가는 건축의 장식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건물이 가지는 건축적 기본구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작가는 현실 속 건축 공간에서 선과 면들이 모여 건물의 입구, 벽, 기둥 등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러 건축물들이 모여 또 다른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반복과 순환의 과정을 표현하려고 하고 있다. 마치 선과 면이 만나 새로이 만들어지는 공간들이 미로를 형성하듯, 작가의 작품 속에서는 그 비워진 공간들의 분할을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무궁무진한 시각적 풍경이 펼쳐질 것만 같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서재정_불확정성 유기적 공간-#2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1
서재정_ILLUSORY-B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1
서재정의 근작들은 "Phantasmagoria(환등)"와 "ILLUSORY",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의 제목을 달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품들은 선과 면이 만나 뚜렷하게 만들어지는 건축물의 고유한 기능적 부분들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건축물을 모티브로 선과 면들이 생성하여 만드는 새로운 건축 공간에 대해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상상을 자아내고 있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 "불확정성 유기적 공간"은 현실적인 공간을 넘어서 심리적 공간도 표현함으로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간"에 대한 상상의 유희를 자극하고 있다.
서재정_ILLUSORY-S_캔버스에 아크리릴, 유채_65.1×90.9cm_2011
서재정_ILLUSORY-H_캔버스에 아크리릴, 유채_65.1×90.9cm_2010
작가는 우리가 경험한 개개인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경험을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상상하고 있다. 이것이 "Mind Architecture"이다. 즉 현실의 모습과 개인의 심리적인 작용이 만들어 내는 유일무이한 공간들을 통해 시대의 유동적인 흐름 안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의식의 배경을 찾고, 각자의 시간과 경험을 투영시키는 공간의 단상으로써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저장할 때, 태생적 한계로 인해 원래의 정보보다 간략화 된 정보로 저장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정보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다가도 그녀의 작품을 연결고리로서 타인으로 하여금 그들만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서재정_합리적인 상징-Arch-#2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07
이번 전시는 개인의 인식과 경험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시대의 유동적인 흐름 안에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의식의 배경들을 찾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건축물이라는 공간을 통해 새롭게 구성하여 각자의 시간과 경험을 투영할 수 있는 건축 공간들을 상상하게 한다. 즉 서재정은 현실 속에 규정되고 고정된 것이 아닌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요구하는 심리적 공간으로서 예술적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되고 상상되는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최근의 사회적 트렌드인 "창의성 강조", "소통(Soh-Tong)" 등이 바로 그녀의 작품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지 자문해 본다. ■ 김경민
서재정_Phantasmagoria-#2_캔버스에 아크리릴, 유채_50×60.6cm_2010
Storytelling in an Aesthetic Space


 



찰나의 자리

박설아展 / PARKSEOLA / 朴雪? / painting   2011_0608 ▶ 2011_0614


박설아_이름없는 성북2동_장지에 분채_162.2×130.3_2011cm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2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찰나의 자리 ● 장소,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 ● 어느 순간 예고없이 나타나는 이끌림이 있다. 일상 깊숙이 숨어있다 고개를 드는 그것은 내 곁에 가까운 장소를 낯선, 혹은 특별한 느낌을 받도록 한다. 그중에 문의 개념을 가진 사물이나 보이지 않는 곳을 넘나들 수 있는 경계 사물에 더 주목하고 있다.  
박설아_다락_장지에 분채_130.3×193.9_2011cm
박설아_도봉로608_90.9×72.7cm 박설아_쌍문3동_장지에 분채_90.9×72.7cm_2011
박설아_북촌로45_장지에 분채_193.9×130.3cm_2011
  공간, 아무도 없는 빈곳. /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범위. /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 영역이나 세계를 이르는 말. ● 그 사물들과 경계 사이의 공간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 자리를 지나치는 개인들의 주관에 의해서 전혀 다른 감정과 기억을 갖는다. 나는 그 경계 사물 사이에서 찰나를 바라보는데 그 순간은 평소 관념이 아닌 마음자리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박설아_북촌로45_장지에 분채_193.9×130.3cm_2011
박설아_사간동16_장지에 분채_90.9×72.7cm_2010
박설아_창5동 224-20 _장지에 분채_112.1×145.5cm_2010
  경계,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 ● 나에게 마음자리를 따라 보는 찰나의 경계는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 어느 장소에 발붙이고 있던지 한계 없이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거나, 실제 장소와 다른 장소에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물리적인 공간에서 문이 닫혀있거나 열려 있는 것은 존재 자체로 나누는듯 하지만 서로를 연결하는 통로로도 느껴진다. 몸으로는 지날 수 없더라도 시선과 정신으로 오갈 수 있는 경계는 시각으로 확인하는 현실과는 다르게 나에게서 걸러져 종이에 기록된다. ■ 박설아





권창남展 / KWONCHANGNAM / 權昌南 / sculpture   2011_0608 ▶ 2011_0618


권창남_향(鄕)-그 곳에 가면Ⅱ_오석_100×110×4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20051017b | 권창남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4:00pm 장은선갤러리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1:00am~05:00pm   장은선갤러리 JANGEUNSUN GALLERY 서울 종로구 경운동 66-11번지 Tel. +82.2.730.3533 www.galleryjang.com

  삶이라는 아포리아 Aporia - 진솔한 독백 ● 얼마 전 그의 작품 명제는 "꿈꾸는 집"이었다. 그 집들은 아담하고 정겨워 보이는 소박한 집이며, 풍광이 좋은 곳에 있는 누각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한편 "꿈꾸는 집"은 전통 기와집과 현대 도시의 이미지가 숲을 경계로 대비된 모습을 보여주는 부조 같은 "경계에 선" 작업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번 전시에는 "집" 혹은 "누각"이 "장", "화초" 혹은 "다듬이돌"과 대비된 작업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집"에서 출발하여 "집과 관련된 것"으로 확장되었고, 이번 전시회의 작품명제는 "고향"으로 회귀하고 있다. 고향으로 회귀하기 위해 그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돌을 다루고 있다. ● 권창남은 1998년 첫 번째 개인전에서 "시각적 즐거움"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인 이래 조각가로서 제작의 즐거움과 그를 통한 작품의 완벽한 마무리를 우선시 하였다. 그와 더불어 항상 어떤 즐거움을 관객과 공유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여왔다. 특히 그는 미술이 지나치게 관념화 되는 것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표명해 왔으며, 항상 "코드 없는 메시지"인 미술작품-사진만이 아님-의 특성상 관객과 작가사이의 소통의 간극을 줄이고자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조각가적 솜씨때문에 스펙터클에 익숙한 관객들은 그의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것 Connotation보다 외시적인 것Denotation에 경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그는 무엇인가 관객과 소통하고자 한다. ● 누구에게나 집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집에서 최초로 가족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창남에게 집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29년 전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꿈꾸는 집"들은 공통적으로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어릴 때 시골집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식사시간이 다가왔음의 지표index로 인식되었으며, 식사는 곧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을 의미한다. "집을 만드니 아내가 가장 좋아 하더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꿈의 집"은 그의 소박한 가정관에서 출발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권창남_향(鄕)-휴식_사암_64×63×30cm_2011
권창남_향(鄕)-보름_사암_52×58×10cm_2011
  그의 집들은 작품 하나로 완결된 작품으로 제시되다가, 점차 최소한의 가공을 한 원석의 형태를 산과 같은 형상으로 살리면서 전통 기와집과 현대 첨단의 빌딩 이미지가 대비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대비되는 곳 위에는 숲이 있다. 그 숲은 자연을 대변하여 마치 기와집에서 최첨단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급변해 온 우리의 시간을 관조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개인의 소박한 꿈에서 시작된 집 이야기가 점차 도시의 삶에 매몰되어 콘크리트와 같이 회색으로 탈색되어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로 확대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 고향의 정자들이 "장", "다듬이돌", 혹은"화초"위에 놓여있다. 장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공간인 안방에 있는 가구다. 그리고 장 깊숙한 곳에는 은밀히 물건을 숨겨 두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장은 "흥보가"에 나오는 화초장과 같이 그 화려함으로 여성성을 드러내고, 은밀히 무엇인가를 숨겨놓는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가구이다. 그래서 장은 여성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으며 "다듬이돌"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 여성성을 표상하는 사물 위에 "정자"가 놓여 있다. 정자는 과거 남성들이 풍류를 즐기던 남성들의 공간이다. 화분에 심은 화초위에 "꿈꾸는 집"이 꽃처럼 놓여 있다. 화초는 가꾸는 것이며, 화초의 생존은 전적으로 관리자에게 달려있다. 이런 대비를 통해 권창남은 전통적 가부장적 가족개념과 기러기아빠로 대변되는 기능만 남은 현재의 가족개념사이에서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만파식적萬波息笛의 대금이 고향의 산 아래 놓여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권창남_향(鄕)-산사에서_사암_50×45×18cm_2011
권창남_향(鄕)-그리움_대리석_25×44×20cm_2011
  한편으로 그는 작품이 투자의 대상이 된 작금의 상황에서 "고향과 집"이라는 익숙한 소재를 통해 "가장"이라는 삶의 현실과 "작가"라는 이상 사이의 경계선상에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는 현재 자신의 삶의 아포리아에 대한 진솔한 독백이 담겨 있다.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조È!"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고민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조각 작품으로 완벽한 마무리, 그러한 완벽함을 위한 끊임없는 성실한 작업자세는 그의 삶에 대한 진솔한 고뇌가 더해져 이 시대의 소시민적 리얼리티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그래서 역사학에서도 미시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닐까? ■ 황도마  
권창남_향(鄕)-그 곳에 가면Ⅰ_오석_80×100×45cm_2010
권창남_향(鄕)-여행_검은대리석_50×45×25cm_2011
  The Aporia Called Life : A Frank Mon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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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Up




신진작가발굴展   2011_0608 ▶ 2011_0708 / 주말, 공휴일 휴관




서보람_보물찾기1_장지에 채색_145.5×112cm_2009



초대일시 / 2011_0608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서보람_이재민_장종현_한형록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 휴관

리나갤러리 LINA GALLERY 서울 강남구 논현동 229-26번지 해광빌딩 1층 Tel. +82.2.544.0286 www.linaart.co.kr




『Step- Up』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신진작가 지원에 힘썼던 리나갤러리가 올해로 3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작가들이 좀 더 쉽게 발돋을수 있는 등용문 역할을 하고 싶었던 리나갤러리는 그 취지에 맞게 젊고 신선하고 미개척지 같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지원에 힘쓰며 올 해에도 참신한 4명의 작가를 초대하였습니다. 젊은 작가들 전시를 하며 오히려 더 배움의 기회를 갖을 수 있었고, 젊은 작가를 찾아 다니는 유쾌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였습니다. ● 올해 저희 갤러리에서 선정한 4명의 작가는 어느 해보다 작품구성이 재미나고, 자기색이 강한 다채로운 작가들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서보람, 이재민, 장종현, 한형록 이 4명의 작가는 지난해에 비해 평균 나이가 어려 전시경력은 짧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차게 미술계에 자기이름을 톡톡히 알리고 있는 경쟁력있는 작가로 구성되었습니다. 신선하고 열정적인 젊은 작가군단의 작품을 감상하며 마음속에 숨겨뒀던 초심을 꺼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이 작가들이 앞으로 어느 궤도를 그리며 작품을 해나갈지 함께 고민하고 감상하는 시간이 되 길 희망합니다. 기나긴 예술 마라톤을 시작하게 될 이 젊은 작가들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리나갤러리
서보람_보물찾기9_장지에 채색_50×50cm_2011

낡고 오래 된 전통가구는 나에겐 하나의 사각상자이자 더 나아가 사각모양을 한 미지의 공간이다. 서랍을 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들이 잔뜩 쏟아지고, 작은 비밀의 통로처럼 가고 싶었던 곳으로 향하는 입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아련한 옛 추억과 사연이 깊었던 물건들이 다시금 생생해 지면서 마치 전통이 시간을 거슬러 우리 앞에 온 것 처럼 기억들은 어느새 내 앞의 서랍 속 을 가득 채운다.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들이 서랍 속 에서 터져 나오고, 또 만들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번엔 또 무엇이 터져 나올까? 어떤 이야기가 나를 기다릴까? 라는 상상을 하다보면 어느새 그 서랍 속으로 들어가 행복한 보물찾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기에 나는 이것을 전통과 상상이 만든 '마법의 상자' 라고 믿는다. 사각의 공간속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사각의 서랍. 그리고 그 서랍이라는 공간을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꿈만 같은 상상의 순간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나만의 비밀 공간을 찾았다는 희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중한 세월과 오랜 전통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었던 나만의 비밀 공간. 그 곳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도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때로는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상상의 공간 또한 존재하지는 않을까? 상상의 씨앗이 꽃으로 피어나는 미지의 공간속에서 혼자만 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행복한 보물찾기를 하며 그리운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자신이 가장 아끼는 서랍을 조용히 열어보길 바란다. 어린 시절의 추억 혹은, 첫사랑의 기억 같은 어쩌면 그동안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소소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오늘 그 서랍 속 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찾기 전의 설레임과 찾은 후 의 기쁨을 맛보는 행복한 보물찾기처럼. ■ 서보람
이재민_The stranger_캔버스에 유채_91×72.7cm_2011
이재민_The stranger_캔버스에 유채_91×72.7cmcm_2011

내면과 외면을 관통하는 여성작가가 바라보는 콤플렉스적인 상징과 갈등, 나 홀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캐랙터화 된 누드 페인팅으로 표현하고 있다. 육체를 대상으로 작가의 생각과 교차하는 주제를 화면 속에서 반추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 속에 투영한다. ● The Egg 시리즈에서 신작 The Stranger는 대상을 재현하는 한계까지 추구하는 러시아 유학생활 경험 후, 대상의 개별적인 다양한 이야기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새로운 작업의 흐름이다. 현대인은 사회나 집단으로부터의 소외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을 캔버스 화면 속에서 하나의 '이방인'으로 만들어낸다. 'Stranger' 로 상징화된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화면은 모태신앙에서 기반한 아티스트가 만들어 내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사랑의 공간이자, 'Strangers' 의 심리적 고통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재민의 작품세계에서 보여지는 이방인의 초상은 관객에게 선사하는 내면의 감정을 공유하는 'Strangers' 의 또 다른 얼굴이다. ■ 이재민
장종현_응결-Violet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11
장종현_응결-Celadon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0

나의 작업에서 질료는 이미지로 응결되고, 이미지는 질료로 응결된다. 눈으로 인식되는 표상적 이미지는 인물의 모습으로 인식 될 수도, 질료덩어리 자체로 인식될 수도 있다. 물질적 대상들과 감정의 유기적 형상들이 서로 뒤엉켜, 하나의 응결현상을 만들어 내며, 그것은 시간이나 온도 따위에 의해 작용하는 응결 현상이 아닌, 나의 냉철한 시각에 의해 하나의 조형적 상황으로 응결되게 된다. 그리하여 나의 작업은 보는 사람에게 일종의 팬텀(가상이 실제보다 먼저오는 일루젼의 의미)으로 다가오게 되고, 나는 그것을 통하여,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사실성은 오류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한다. ● 원본과 복제, 가상과 실재의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얽혀있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어느 부분이 거짓인지 판단해 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체로 우리들은 시각적으로 습득한 정보에 대해 그것의 진위 여부를 가장 크게 확신 하는 편이긴 하나 망막에 의존해 학습된 경험 또한 때론 진실을 지배하기도 한다. 나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두터운 마티에르로 형성된 덩어리라고 판단하게 하고 실제 작품 앞에 섰을 때 그것이 사실은 평면의 이미지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인식의 오류에서 오는 당혹감을 느끼게 함에 목적을 둔다. 감상자는 나의 작품을 보며 가상이 실제보다 먼저 인식되는 일루젼으로 인한 오류를 범하게 되며, 이는 지금껏 우리가 보아오고 알아오던 것들이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었는지를 되묻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 나의 작업은 먼저 추상 이미지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가상화시키는 작업을 거쳐, 다시 물감이라는 회화적 질료로 그려지게 되는 일련의 전이와 환원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한 행위의 과정들이, 나의 작품을 대면하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해설로써 작용할 수 있다. 작품을 인식하고 있는 감상자 또한 그 상황에서 가상과 실재를 오가는, 같은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 장종현
한형록_Shadow9_캔버스에 유채_162.2×112.1cm_2011
한형록_Shadow12_캔버스에 유채_112.1×162.2cm_2011

나는 덧없는 찰나의 순간을 영속적으로 화면에 기록한다. ●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매우 차가우며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운 곳이다. 모든 것들은 불온전하며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감수성을 잃은 지 오래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 속 우리가 바라보고 느끼는 대상은 그것의 본질이 아닌 인간의 머릿속 고정된 관념의 단면에 불과 하며. 이것은 투명성을 잃은 희뿌연 시선과 같다. 흐려져 버린 시선과 감성을 영속적 풍경의 기록을 통해 극복 하고자 한다. ● 나의 작업에 있어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은 사실적인 표현 방법으로 기록 되지만 작품 제작 과정에 있어 편집과 수정의 단계를 거치며 대상을 둘러싼 빛과 색, 현대문명의 잔존물 등, 불필요한 요소들을 절제하고 제거해 나간다. 이는 대상을 조금 더 관조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결과물은 거대한 이론이나 사상을 담고 있지는 않다. 화면 속 대상이 그 자체로써 독립성을 가지기를 원하며 단편적 관념에 지배 받지 않는 투명성을 갖기를 바란다. ● 화면 속 풍경은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모습처럼 나의 끊임없는 행위를 통해 화면에 기록 될 뿐이다. 이렇게 표현 된 화면 속 풍경은 순간의 기록이지만 그 풍경은 정지 된 모습이 아닌 과거와 현재가 점유 된 영속적 풍경이며 나아가 감상자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되길 꿈꾼다. ■ 한형록






between A n B



김보아展 / KIMBOA / 金甫娥 / mixed media   2011_0606 ▶ 2011_0614



김보아_A Watchman_와이어메쉬_installation_2011


클로징 파티 / 2011_0614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무이 GALLERY MUI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58-14번지 무이빌딩 1층 Tel. +82.2.587.6123 cafe.naver.com/gallarymui



김보아는 유독 결정 내리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다. 그의 하루는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야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 자리에 누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어떠한 일이 결정된 순간부터 그 이후가 깊게 새겨지지만, 김보아에게 어떤 일이 일단락되기 이전의 시간이 지닌 밀도는 가까스로 내린 결정을 아주 사소하게 만들 정도로 촘촘하다. ● 김보아의 작업은 고정되어 있는 배경 또는 이미지에 빛이 드리워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촘촘하게 짜인 와이어메쉬로 나타낸 그림자는 화면 위에서 뚜렷한 위치를 잡지 못한 채 내내 흔들린다. 그림자로 표현된 인물들은 공간의 오브제나, 캔버스의 그림 혹은 또 다른 그림자들과 엮여 여러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만, 그 이야기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한 발짝 떨어져있다.
김보아_Turn it on please_와이어메쉬_installation_2011
김보아_An Indecisive Person_패널에 분필_109×78.8cm_2011

창 밖을 바라보려는 사람, TV를 켜려는 사람,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사람과 같은 형태로 표현된 인물의 동작들은 시작과 끝 사이의 찰나를 포착한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다음 동작으로 연속되는 현실과는 다르게 그림자들은 그 상태에서 아주 천천히 흔들리거나 회전하면서 결정을 유예시킨다. 작품 사이를 오가며 관람하는 일은 작은 바람을 일으켜 그림자들의 상황을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림과 그림자와 관객은 서로의 흔들림 때문에 교차되어 보여진다.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스침은 실제적이지 않은 소통을 유발하며, 그것은 결정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 Artist Group 511-1




한국의 그림_사진을 그리다



2011_0609 ▶ 2011_0703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609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11_0609_목요일_04:30pm 주제 / 사진 속의 리얼리티와 회화 속의 리얼리티 강연자 / 김인선(기획자)_강석호(작가)_김보민(작가) 김수영(작가)_노충현(작가)_박영길(작가)

참여작가 / 강석호_김보민_김수영_노충현_박영길

기획 / 강석호_김인선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진경(眞景)을 창조하는 작가들 ● 전시의 출발은 작가들이 무심코 던진 의문에서부터이다. 강석호 작가를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의 작업을 하는 작가들과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던져진 의문이 '한국 회화 작가들의 작품 속에는 독특한 한국적 특징이 존재하는가' 였다. 이들은 정기 모임을 통해서 예술 전반에 관한 다양한 현상을 토론하고 또 그것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즐기는 모임이었고 어느 날의 회화를 주제로 나온 담화 속에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물음이 떠오른 것이었다. 이 그룹의 일원인 강석호 작가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 발상은 강석호로 하여금 전시공간 '갤러리 팩토리'의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이에 본인은 그의 발상을 실행하는데 보다 구체적인 개념화 작업 및 전시의 진행을 함께 하는 기획자로서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회화는 의례히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은 재료와 기법의, 한국화로 명명되어 그 맥을 잇고 있는 그림 정도로 여겨지는 동시에, 서양으로부터 전수받은 재료와 기법을 서양화라는 이름으로 전수받아 활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 현대회화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회화 속에서 한국적인 특징을 찾아보자는, 어찌 생각하면 무모했던 출발점은 이제 한국의 수 많은 작가들이 회화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출해 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로 그 방향이 전환되었다. 그리하여 이 전시의 제목은 작품 자체의 지역성을 지칭할 뿐 아니라 또 한편 한국의 작가로서 개인의 작업태도를 짚어보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속 한국의 그림' 으로서 소개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미술의 기법과 재료에서 타 지역의 회화 작업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막상 해외에 나가보면 작가나 큐레이터들은 언제나 한국의 미술은 어떤 점에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온다. 한국의 외부에 위치한 이들은 일본과 중국 현대미술에서 특징적 차이를 발견해 내듯 한국의 현대미술 속에서도 그 독특한 특징을 찾아내려고 한다. "한국의 그림" 전시는 거시적인 안목으로 회화를 연구해 나가는 작업이다. 매년 한국의 현대회화가 묶일 수 있는 단위를 설정하여 나름대로의 작가군을 보여주게 된다. 동시에 작가들의 작업태도에 대한 리서치와 그 형식적 특이성을 찾아 나가는데 용이한 카테고리를 만들기 위해 아카이브가 병행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의 회화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정체성의 실마리를 잡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 전시에서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는 총 다섯 명이다. 어떤 이는 서양화를 전공하였고, 어떤 이는 동양화 (한국화)를 전공하였다. 어떤 이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고 또 어떤 이는 그림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상업 화랑과의 활동이 익숙한 작가도 있고 비영리 시스템과의 작업이 익숙한 작가도 있다. 다섯 명의 작은 단위이지만 활동 범위가 다양하고, 자라온 환경과 회화 학습 방식도 각기 다른 다양한 작가의 집합체이다. 이들의 작업 스타일은 각자 강한 개성이 드러나고 있고, 현재 한국의 회화 흐름이 미술시장의 기후에 따라 들쑥날쑥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작업 스타일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고찰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하고 있는 성실한 다섯 명의 참여작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강석호, 김보민, 김수영, 노충현, 그리고 박영길이며 그들의 공통된 매개체로 보고 있는 것은 "사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전시의 첫 시리즈인 "한국의 그림 – 사진을 읽다"는 전시와 아카이브를 함께 드러내는 형식을 취한다. (이 전시는 참여작가의 회화 작품으로만 이루어진 "한국의 그림 – 사진을 그리다"라는 전시 형식으로 비슷한 기간에 갤러리 "16번지"에서 함께 이루어진다.) 참여작가들은 공통적으로 풍경을 그린다. 여기서 풍경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정 공간을 그리는 작가도 있고, 특정 부분을 그리는 작가도 있다.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환경을 풍경의 개념으로 두었기에 의복을 입은 신체 부분을 그리는 강석호의 작업이나 건물의 일부분을 캔버스에 채우는 김수영의 작업도 풍경화의 범주에 둔다. ● 이들 다섯 작가는 모두 사진기를 사용하여 풍경을 기록하고 파악한다. 하지만 그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그보다 앞선 활동이 있다. 바로 개개인의 체질화된 분석력, 즉 물리적 시각 활동과 뇌의 작용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캔버스 속 이미지는 사진을 통해서 포착한 장면이지만 사진으로 기록하기 전에 눈으로 인식한 풍경이다. 사진을 직접 찍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실재로 바라보고 신체기관에 각인한 풍경은 분명이 찍어온 사진과 다름을 체험한다. 또한 이 전시가 작가 각각의 작업 과정을 함께 보여주기 위한 아카이브가 함께 제작이 되는 만큼, 작가들이 자신의 그림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서로 공유하는 것도 이 전시의 중요한 프로세스이다. 그래서 비공개 세미나와 공개 세미나를 전시 준비 중에, 그리고 전시 오프닝을 기해 개최하게 된다.
김수영_양면_캔버스에 유채_72.7×72.7cm_2011

작가 김수영은 언제나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관심이 가는 건물 외관을 찍는다. 관심이 먼저 간다는 것은 이미 눈으로 건물의 개성과 자신이 그려야 하는 작업의 윤곽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막상 찍어온 사진을 작업실에서 살펴보면 자신이 절대로 인지하지 않았던 뭔가가 사진 속에 존재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찍어온 풍경과 원래 기억했던 풍경이 항상 서로 다르다는 점, 사진은 분명 실제 공간의 실존의 모습인데도 자신의 눈에는 추상 이미지로 읽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새삼 놀라곤 한다. 이는 마치 현실과 비현실의 공존처럼 인식된다. 눈이 경험한 것이 다른 모습으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 매체가 상당한 객관성을 띠고 있는 사진기라는 것이 그 신비한 경험을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작품은 현실을 그렸지만 추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캔버스 속 그림 이미지는 현실과 신기루가 서로를 비추고 있듯이 구상성과 추상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이는 관객의 실제 공간에서 신기루를 바라보듯 분명히 저기 존재하는 대상임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존재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노충현_폭설_캔버스에 유채_130.3×162.1cm_2011

사진에 찍힌 지시적 정보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는 작가도 있다. 노충현 작가가 그러한데, 전체적인 풍경의 프레임은 사진에 의존하되 사진이 기록한 디테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원래 장소의 상태가 어떻든 그 장소를 구성하는 사물이나 건물 등은 표현대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노충현의 화면은 마치 부연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듯 풍경 전체가 녹아 내리듯 흐릿한 인상을 준다. 대상이 물이든 건물이든 나무이든 일단은 꿈틀거리는 물감과 붓의 흔적으로 말랑말랑해진 공간 차제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표현하듯 '공간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대상을 그리는 이유는 우리의 눈과 대상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공기의 느낌을 시각화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작가가 공간 속에 인물을 집어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움직임이 있는 동적인 존재는 공간을 포착하기에는 시각적인 방해물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지워버리고 공간을 인식하기 위한 대상만 남겨놓은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 작가의 손을 거친 화면 속 이미지에는 사진속에 존재하던 인물이 사라져버린다. 그의 화면 속 이미지 또한 실제이면서 허상인 듯한 신비로운 적막감을 제공하고 있다.
박영길_Wind-road_한지에 수간채색_80.3×60.6cm_2011

반면, 대상 자체의 정확한 인상을 기록하기 위해 박영길 작가는 꽤 정교한 사전 작업이 진행된다. 작가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기록을 통하여 현장에서의 호흡과 정서를 최대한 반영하려 한다. 작품을 위한 사전작업은 기본적으로 드로잉이지만 사진기 또한 필수 요소이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집요하게 여러 컷 도촬한다. 움직이는 행인들이나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포즈와 분위기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작가의 연출적인 개입이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망원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지나가는 사람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최대한 정교하게 여러 번 포착한다. 사진은 그런 작업을 거치면서 작가의 기억을 점점 정확하게 환기시킨다. 사전 드로잉은 순간적으로 작가의 눈으로 바라본 풍경을 작가의 호흡에 따라 최대한의 현장성을 잡아내게 되지만, 작업실에서 본 그림으로 옮기면서 놓쳤던 풍경의 부분들을 그가 찍어 온 사진 속에서 찾아낸다. 수많은 드로잉과 사진의 기록으로부터 자신의 기억이 환기되고,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 당시 감각이 더욱 명확히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화면 속 이미지 또한 실제이면서 허상인 듯한 신비로운 적막감을 제공하고 있다.
강석호_무제_캔버스에 유채_100×95.5cm_2011

강석호는 평소에 찍어둔 사진들, 인터넷 검색을 통한 이미지, 잡지 속의 인물 사진 등을 활용한다.어떤 이미지는 작가가 직접 선택하고, 어떤 의미지는 선택된다. 어디서 찾아내건 이미지는 작가의 손에서 한번 더 잘려 나가게 되는데, 신체의 일부를 획득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신체로서의 묘사가 아니다. 어딘가에 속해있는 풍경의 일부인 인물 속에서 흥미로운 특색을 포착해 나가는 과정은 넓은 시선에서 좁은 시선으로 시야를 좁혀가는 미시적 접근법이다. 그리고는 자신만의 풍경을 발견한다. 이는 그 대상이 육체이기 때문에 관음적인 태도가 동반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풍경의 개념을 드러낸다. 작가의 관음적 시선은 또다시 관객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둔부, 등, 가슴팍 등 인체의 일부분을 줄기차게 그렸던 것은 사람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얼굴의 생김새에 국한되지 않고 몸의 표정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캔버스를 꽉 채운 신제 일부분은 몸 자체를 인식하기 전에 그 몸을 감싼 화사한 색채와 무늬의 의복으로부터 보다 비현실적인 경계에 존재하는 풍경화를 보는 듯한 감흥을 주고 있다.
김보민_낙하병_모시에 수묵담채, 테이프_100×80cm_2011

우리는 이들의 작품에서 '진경 眞景'을 만나게 된다. 진경산수화는 전통 한국화에서 이어오던 관념의 실경산수화를 기반으로 변혁을 꾀한 한국화의 혁신적 시도이다. 지금 현대회화작가로서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사진은 풍경의 진정성에 작가의 이상주의적 상상력이 더해져서 지신만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사진은 기록의 매체이면서 작가의 인식에 비교되는 풍경을 제시한다. 몸의 시감각으로 받아들인 장면과 기계로부터 받아들인 한치 오차 없는 객관적인 장면은 캔버스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작가의 눈을 거친다. 똑같은 사진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마다 또 틀린 이미지가 표현되더라는 김수영 작가의 말처럼, 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시각과 감정을 작품 속에 쏟아 붇게 된다. 사진을 읽어내는 과정과 옮겨 담는 과정의 진행은 관객을 예측 불가능한 작가의 상상력 속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 김인선


 



환 幻 Solid Illusion

박승모展 / PARKSEUNGMO / 朴勝模 / installation   2011_0607 ▶ 2011_0707 / 일,공휴일 휴관


박승모_환973_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_170×340×34cm_2011

초대일시 / 2011_0607_화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 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번지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어둠을 두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치유의 방 "Osho Rajneesh Meditation Center"에서의 2시간은 찰나의 순간처럼 흘러갔다. 땅 속 깊은 곳으로 층층이 이어진 방들 맨 아래에 놓인 방에 이르면 지상의 빛은 사라지고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나타난다. 자기 몸뚱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차 보이지 않는 절대적 어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심장소리만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공포스런 적막 속에서 박승모 가 발견한 것은 삶과 죽음, 공간과 시간, 나와 타자와의 경계를 넘어선 자기 자신이었다. ● 박승모 는 90년대 중반 남들이 다 가고자 했던 영국이 아닌 인도로 향했다. 그리고 5년여의 시간을 명상과 수행으로 보냈다. 그 곳에서의 체험은 그의 예술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예술의 절대적 가치와 미(美)의 완성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인가를 목격한 순간이었고, 자아의 실체와 직접 대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박승모는 많은 걸 얻었다. 그런데 그의 명상은 동심원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면에서 원이란 형상은 특별하다. 일종의 만다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이는 마음 속 의식의 흐름을 개념적으로 시각화하는 키워드가 된다. 일종의 시간의 수레바퀴처럼 영원히 회전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원"은 작가의 공간과 시간개념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어다. 이는 공간과 시간의 경계, 꿈과 현실의 경계,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 자체가 회전하는 바퀴처럼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박승모_환428_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_170×170×26.5cm_2011
박승모_환1037_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_170×170×28.5cm_2011

실재가 보이지 않고 그 껍질만 보일 경우, 진실은 보이지 않고 그 윤곽만 보일 경우 사람들은 이를 허상이라고 말한다. 박승모는 허상(Illusion)을 고체화시켜 눈앞에 실재하게 만든다. 실재에 필적하는 존재론적 무게를 지닌 허상을 그려냈던 이전 알루미늄 껍질 작품과 많이 달라졌다. 허공에 떠 있는 이미지는 언제라도 사라질 신기루처럼 가볍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이전 작업보다 훨씬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속성을 노출한다. 이는 의도적인 노출이다. 고체화된 이미지의 불안정성이 "원"으로 상징되어온 그의 시간 개념과 공간 개념에 작용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시각적인 환경을 만든 것이다. ● 그러나 전시 제목 환(幻)을 시각적인 일루전만으로 읽어선 안된다. '다시 돌아온다.'는 회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환(還)이기도 하다. 이는 작품 속에 시간적 요소가 숨어 있음을 의미한다. 전작에 이어 이번 신작 시리즈 역시 얇은 선의 연속이 겹쳐지고, 교차하며 만들어 내는 허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내는 알루미늄 와이어의 고정된 이미지와 다르게, 이번 작품의 허상은 동적인 요소를 어렵지 않게 획득하고 있다. 다가서면 사라지고 다시 거리를 두면 모습을 나타내는 허상은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가까이 다가서며 발견하는 얇은 스테인레스 와이어의 집합이 실재인지, 아니면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환영이 실재인지의 문제는 박승모 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가 변화하는 순간이다. 이는 실재와 허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고, 동시에 작품과 관객의 상호작용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창조의 순간이기도 하다.
박승모_박승모Portrait_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_80×80×22.5cm_2011
박승모_환2068_스테인리스 스틸, 페인트_170×170×26.5cm_2011

박승모 는 꿈을 깨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수중에서 진행된 배우 곽지민의 몽환적인 연기는 죽음을 경계로 갈라선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너는 생각했을 때 내가 죽어 있다고 슬퍼하겠지만, 내 시점에서는 네가 죽어있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설명이 배우와 작가, 작품과 관객 사이의 관계가 꿈과 현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박승모의 죽음은 어떤 것의 종말이며 동시에 어떤 것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곽지민의 몽환적 이미지는 중력이 사라진 공간 속에서 흑백의 점과 선으로 흩어져 버리는 허무한 실체로 변해버린다. 이처럼 허상이 실체와 만나는 찰나에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야말로 박승모 가 만들어 내고 싶어했던 움직임이다. 그것은 부유하고, 가변적이고 불안정하고, 찰나적이다. 그래서 그의 허상은 독립적이지 못하고 항상 관객의 시점에 의존한다.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빈틈을 의도적으로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박승모 의 허상은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이대형




I am a painter

2011_0609 ▶ 2011_0619 / 월요일 휴관


변웅필_한 사람으로서의 초상_캔버스에 유채_70×55cm_2004

초대일시 / 2011_0609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고등어_김성남_김진_변웅필_비앙카 레글_서고운 이이립_이주형_이혜인_이희명_지효섭_한지석_혜자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유앤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6-1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최근 대한 민국을 떠들썩이게 하는 Hot 이슈 중 "나는 가수다" 가 빠질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화두에 오르며 대중 문화 신드룸을 일으키고 있다. 일주일 단위로 새로운 에피소드가 방영될 때마다 엄청난 이슈와 주목을 받으며 언론과 인터넷이 들썩거리고 있다. 한편 가창력으로 최고의 가수라는 평가를 받는 가수들이 탈락을 면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경쟁에 임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다. ● 이 프로그램을 보면 미술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직업을 넘어서 대중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가수나 화가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 화가들도 혼신의 힘으로 작업한 작품으로 대중과 충분한 소통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을 가질 수 있다면 작가 자신은 물론이요 대중에게도 좋은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작가의 말처럼 현실과 꿈은 그 사이의 괴리가 멀기만 하다. 미술계의 높은 문턱이 없어지고 화가들이 작품으로 대중에게 감동과 열정을 주고 그들 또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그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 "나는 화가이다."고등어는 기존의 사회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시각에서 바라 보지 않고, 피지배층인 여성들의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가 느끼지 못한 낯설음을 통해 인식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자신의 원하는 삶과 반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의 단상을 강렬한 색채와 기이한 형태의 조형적 언어로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 김성남의 숲 연작은 작가의 무의식에 내재된 언어이다. 김성남의 숲은 인간이 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숲이 아닌 인간에게 다듬어지기 이전, 원형으로써의 대지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강요하지 않듯 김성남도 숲 연작에서 원형대지를 제시할 뿐 어떠한 목적성도 두고 있지 않다. ● 김진은 창문을 통해 본 경계인 의식, 이방인 의식을 표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로 표현한 것이다. 짧게 끊어진 중첩된 붓질과 해체되는 형태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사물의 형태를 해체시키는 원인으로서의 자기 투사가 김진의 그림에서 또 다른 형식을 얻고 있는 것이다. ● 변웅필은 옷은 물론, 머리카락과 눈썹까지 배제시킨 자화상을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초상화가 옷, 머리스타일, 소품과 인물의 배경의 요소들이 개인의 신분이나 직업, 학력, 능력, 삶에서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까지도 설명하는 요소로 삼았다면 변웅필의 자화상은 우리 자신을 감추었던 장치들을 벗어 던진 한 인간을 그리고 있다.
비앙카 레글_2 delayed dystopia_캔버스에 유채_90×80cm_2010

비앙카 레글의 가장 큰 장점은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현상 및 대상의 진정성과 본질을 탄탄한 드로잉이 뒷받침 된 과감한 공간구도 속에서 감각적인 색과 힘차고 절제된 붓질로 순간적인 이미지의 느낌을 간결하게 풀어내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사실적 표현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굵직한 선들로 이루어진 추상화로 다가온다.
서고운_애도의 늪(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에게 바치는 제단)_캔버스에 유채_72.7×91.9cm_2011

실제 꿈속에 나타난 스토리를 바탕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서고운은 현실과 무의식의 세계 사이를 오가며, 인간과 동물, 생명체와 무생물, 삶과 죽음 등 상반된 것으로 분류되는 것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통해 의식의 단면을 조형화한다. ● 이이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기억의 파편들이 불러 일으키는 불분명하면서도 모호한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감으로 재해석을 했다. 의식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만 익숙했던 기억과 흔적들을 단순한 기억의 재 조립이 아닌 예술적 감수성을 작품에 투영시켰다. 그래서 작품에 표현된 오브제들이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온다. ● 이주형은 머리카락을 그린다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신체', '몸의 쇠퇴에는 아랑곳 없이, 늘어지며 번식하는 머리카락', '본능으로써의 신체와 정신으로써의 머리 사이의 극간', '소통에의 불안'을 신체의 털로 가시화시킨다. ● 이혜인은 어쩌면 쉽게 잊혀질 수도 있었던 기억을 찾아내고 그 장소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사람의 눈으로 미처 볼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담아냈다. 하지만 그것들이 단지 보여지는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절절한 사적인 아픔과 상실감이 살아나는, 경험으로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희명_풀어지지 않는 매듭_캔버스에 과슈, 아크릴채색_91×117cm_2009

이희명의 작업은 개인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열등감과 욕망에서 시작된다. 사회 혹은 사회의 또 다른 개체와 소통하지 못하고 작아지는 개인으로서의 자괴감은 그 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그들을 대표하듯 이희명은 작품을 통해 이 사회에 대한 복수극을 펼친다. 이희명의 복수극은 단순히 사회에 대한 혁명(revolution)이 아닌, 종의 형질이 변형되는 진화(evolution)를 통해서 진행된다. ● 지효섭의 작품들은 우리가 아직 접하지 못한 신화의 한 장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작품 '속' 등장하는 여자와 동물들이 뭉그러진 풍경 안에서 빚어내는 묘한 분위기는 다른 세상이라는 이계적인 느낌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호기심과 신비감을 자극한다.
한지석_untitled 100973-379001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0

한지석는 그 동안의 형상을 떠올려 채워가는 작업을 거쳐 이제는 행위 안에서 형상을 그려낸다. 화면 안에서 가능한 많은 요소를 가미, 터치하고 뿌리고 긋고 흘리면서 생겨나는 우연의 형상을 잡아낸다. 그 과정 안에서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변형되어지기도 한다.
혜자_Crossing, 6 p.m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1

혜자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로 가득 찬 도시 내면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눈이 시릴듯한 화려한 색채, 형태를 가늠할 수 없으며 무질서 속의 질서로 이루어진 듯한 선의 움직임…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건물들, 어두운 밤거리를 또 하나의 신세계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는 다양한 불빛들, 이렇게 화려한 도시의 내부를 걷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 등이 그의 작품 속에서는 모두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되어 있다. ■ unc gallery





각산수山水彫刻 _ landscape sculpture 1.0

김윤재展 / KIMYUNJAE / 金倫栽 / sculpture   2011_0609 ▶ 2011_0629


김윤재_금강내산 연작2_강화플라스틱에 혼합재료_37×32×3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윤재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09_목요일_06:00pm

2011 유아트스페이스 젊은작가 기획공모展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공휴일_11:00am~05:00pm

유아트스페이스 YOO ART SPACE 서울 강남구 청담동 101-6번지 1,2 전시실 Tel. +82.2.544.8585 www.yooartspace.com


어릴 적 유난히 산에 가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무수히 올랐던 호암산에서 보았던 풍경을 마음속에서 조금씩 도려내고 있었다. 무심코 도심을 걷다 보면 어린 시절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보이던 산들이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고층건물에 가려져 그것이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 진지 오래이다.
김윤재_무이귀도_강화플라스틱에 혼합재료_45×33×33cm_2010
김윤재_세검정_강화플라스틱에 혼합재료_40×34×34cm_2011

군 시절 수색대대에서 보직을 받고 사람의 출입이 극도로 제한된 D.M.Z.라는 공간에서 2년여의 생활에서 도심에서 살아오며 잊었던 과거의 풍경들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본인은 이런 개인적인 생각들에 의해 그 속에 살아있는 생명들(산)을 소조라는 기법을 통해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업과정 중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기억조차 잊어가게 되어버린 현대인의 인체를 산과 하나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극대화 하기위한 나만의 표현 방법이다. 작업은 인체를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지금은 갈 수 없는 과거의 장소를 표현하는데 그 역시 실존할 수 없으므로 과거의 화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입체화하였다. 둘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인체 역시 산과 비슷하게 미묘하지만 역동적인 굴곡이 있으므로 시각적으로 보여 져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만들어 준다.
김윤재_세검정_강화플라스틱에 혼합재료_40×34×34cm_2011_부분
김윤재_옥순봉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_117×77cm
김윤재_죽서루_도자에 혼합재료_35×30×25cm_2011

이렇게 작업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궁극적으로 우리는 소멸해서 다시 자연이란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지만 산을 포함한 녹지가 사라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산업화라는 거부할 수 없는 비약적인 발전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풍족한 먹을 거리와 안전한 공간을 부여받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궁극의 발전 끝에 어떠한 상황이 발생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러한 추세라면 언젠가는 우리가 숨 쉬는 공기 역시 사라지게 되고 생명이 사라진 죽은 땅위에 콘크리트가 우리의 역사가 될 것이다.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인지해야 한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 김윤재
김윤재_폭포아래_부분

산수화가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입체를 선과 색을 통해 평면화 함으로써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입체처럼 보이는 시각적 환영을 반영한다면, 김윤재의 조각은 입체를 통해 평면을 재현함으로써 평면속의 선이나 입체들을 형상으로 만들어 내는 입체산수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현실로 다가온 3D, 4D가 평면 영상의 혁명이라면, 회화의 영역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김윤재의 조각 또한 평면회화를 넘어 서고자 하는 작가의 혁명이다. 그러나 김윤재의 조각은 단순히 평면을 입체화시키는 시각적인 형태만을 주요시 하지 않는다. 산수화에 담겨있는 민족적 정체성과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사진과 그림으로만 볼 수 있는 금강산, 총석정 등 조선시대 산수화의 맥락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체의 부분과 산수의 합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주제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김윤재는 인체의 곡선과 자연의 굴곡을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자연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을 인간의 머리위에 혹은 인체의 부분을 통해 접합함으로써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고 있다. ■ 유아트스페이스





Playground


백종훈展 / PAIKJONGHUN / 白宗勳 / painting   2011_0610 ▶ 2011_0619


백종훈_Night night_캔버스에 유채_97×193.9cm_2011

초대일시 / 2011_0610_금요일_06:00pm

기획 / 노암갤러리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적절한 거기 그리고 모호한 관계 ●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혼자서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과 함께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사회가 정한 규범과 규칙들을 준수하며 그 사회의 보호망 아래에서 안정감을 얻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경쟁 구도가 발생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나은 집단이라 생각하고, 열등한 집단을 격하시킴으로서 자신을 격상시킨다. 또한 인간의 욕망은 단순한 경쟁을 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과 폭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기도 한다. 이러한 경쟁 구도 안에서 힘이 강한 자와 힘이 약한 자, 사회에 적합한 자와 적합하지 못한 자로 구분 지어 질 수밖에 없다. 사회는 다 같이 평등하고 행복한 삶의 모습을 만들고자 노력하지만 한편으로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야생과 같은 면이 공존하는 모순을 갖는다. 만약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과 틀에서 벗어나면 사회와의 유대감을 상실하고 소외되는 약자가 된다. 작가는 사회적 약자, 소외되고 배제된 대상들에게 애착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 역시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백종훈_Babble_캔버스에 유채_130.3×193.3cm_2011

작가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받은 대상들을 고요하고 정지된 순간으로 초대한다. 캔버스 속의 주인공들은 자고 있거나 죽음의 모호한 순간에 머물러 있다. '잠' 혹은 '죽음'의 상태는 외부적으로 방어할 힘이 없는 그들에게 내부적으로 고요히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힘을 준다. 다른 사람의 말이 내부적으로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침묵은 백 마디 말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진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모호한 순간에 있는 생명체에게 잠을 선물 할 수도 있고 죽음을 선물 할 수도 있다. 잠과 죽음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삶이라는 경계선을 지워버리면 둘 다 편안하고 행복한 휴식이다. 그리고 긴 휴식의 끝에는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백종훈_Sleep Tight_캔버스에 유채_72.7×100cm_2011

작가는 주로 어린아이나 동물을 화면 속에 등장 시킨다. 어린아이나 동물은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거나 지배받는 위치에 있는 존재들로 사회적 약자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어린아이와 동물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며, 애정과 동정심을 갖는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어린아이와 동물의 신체는 실재 비례보다 얼굴은 크고, 몸은 작게 과장되거나 변형되어 표현되었다. 동화적이고 판타지적으로 표현된 대상은 실재 대상보다 더 귀엽고 재미있는 느낌을 준다. 감정을 가정 먼저 인식 할 수 있는 부분은 얼굴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표정은 대부분 무표정하거나 놀란 표정으로 묘사된다. 작가는 얼굴에서 보여지는 직접적인 표현이 아닌, 자세나 손짓 같은 세부적인 형태에 따른 느낌을 포착하고 이를 재치있게 묘사한다. 엉뚱하고 묘한 상황 설정들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씁쓸한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표정의 묘사를 통한 직접적인 감정의 전달보다 더 많은 은유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의 대상에 있어서도 바라보는 관찰자가 가진 환상이나 상상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분명하게 의미가 규정되지 않는 것은 혼란일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무한하고 다양한 가능성으로 볼 수 도 있다.
백종훈_Sleepwalker_캔버스에 유채_80×160cm_2011
백종훈_반함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1

작가의 환상이 작용한 화면은 시간과 공간의 구성이 비논리적이며, 화면 속에는 서사적 이야기 구성이나 대상들 간의 개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않고, 모순 없이 상반된 사고나 감정들이 그대로 배치되며 자유롭다. 명확한 경계나 어떠한 구분 없이 모호하게 열려있는 공간은 불확정적인 삶의 모습과 같다. 그리고 대상들은 삶의 공간에서 그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가 위치한다. 대상과 대상사이의 거리는 대상과 관객사이에도 거리를 만든다. 우리는 공감하고 소통하고 싶어도 그들 안으로 들어 갈수 없는 심리적 거리를 느끼게 된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집중과 관조 사이에서 주인공들을 정서적으로 고립시킨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다들 따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딘가 낯설고 부조화스럽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고, 함께 있지만 서로 고독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빠르고 바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들 모두와 소통하고 있지는 않다.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에서도 상대의 얼굴이 아닌 휴대폰이나 기기를 통해 의사전달을 하기도 한다. 서로 맡 닿아있고 계속적으로 소통하지만 또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삶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자신만의 판타지를 바탕으로 현실의 부조리한 사물과 현상들을 새로운 형태와 질서로 바꾸어 놓으며, 냉소적이지만 냉소적이지 않은 말랑말랑하고 시크한 웃음을 선물한다. ■ 신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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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김무아_하놀쌈展   2011_0614 ▶ 2011_0811 / 일요일 휴관





김무아_INVASION 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꼴라주_56×120cm_2010




초대일시 / 2011_0614_화요일_06:30pm

기획 / 임주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판코 Gallery FANCO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6-1번지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 카페 판코 Tel. +82.2.880.5552





나는 자주 꿈을 꾸었다. //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선 좁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난간도 없는 다리. / 나는 그 다리를 건너야만 한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 이건 꿈이니까, 떨어져도 고통스럽지 않을 테니까 괜찮다고 가보자고 용기를 내본다. / 하지만 발은 붙어버린 듯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다. / 내가 걷고 있는 곳은 꿈과 현실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 그리고 나의 나약함과 광활한 세상 속 모든 힘이 충돌하는 접점이다. / 모든 것은 정지된 채로 나의 떨림을 지켜보고 있다.
김무아_INVASION Ⅱ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꼴라주_56×120cm_2010
김무아_경계_패널에 아크릴채색_10×10cm_2011

공존에 의해 생겨나는 경계, 그리고 그 경계를 조금씩 흐트러뜨리는 조용한 침범의 흔적들. 풍경 속의 실루엣은 더 이상 정체성을 위한 것이 아닌, 존재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가변적 경계일 뿐이다. 나의 삶에 늘 공존해 왔던 보이지 않는 힘, 너무나 익숙해서 의식조차 못했던 그 힘이 내 삶의 실루엣을 만들어 왔고 그 실루엣이 나의 정체성을 바꾸려 했음을, 나는 사라져 가는 바다와 집과 잡초 속에서 목격했다. 풍경의 목격자가 되는 순간 조금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의 정체성을, 모든 대상 속 힘의 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이제 나는 침범의 현장을 재구성하려 한다. 나 스스로 역학관계의 중심이 되어 경계를 새롭게 규정짓고 힘의 관계를 뒤바꿔놓기도 하며 또 때로는 침범 당하는 자들의 무기력과 예민함을 날카로운 반격의 무기로 전이시키기도 한다. 작품 속에 나타나는 가늘고 날카로운 직선은 침범 당하기 쉬운 약함의 표상이자 두 힘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 내 앞에 놓인,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경계선 위를 이제는 떨림과 긴장감이라는 장대로 중심을 잡으며 조금은 담담하게 건너보려 한다. 그것이 나를 침범해 오는 힘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라 생각하며... ■ 김무아
김무아_옥상 풍경Ⅰ_보드지에 마카, 모눈종이_21×14cm_2011
하놀쌈_고양이와 루차도르_순지에 먹_53×45cm

당신 : 마스크쓴 괴한에 이것저것 잡스럽게 섞어서 그려놓고 이런 우스꽝스런 그림을 도대체 뭐라고 그려놓은 겁니까? / 나 : 코메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 당신 : 색은 또 왜 이렇게 칙칙하게 검은색을 지천에 바른 거죠? / 나 : 그러니까 그게 블랙코메디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하놀쌈_목가적인 오침과 독일식 슈플렉스_순지에 먹_각 73×91cm

논리체계로써의 흑백논리는 지양되어야 할 사고의 방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현상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흑백논리화하는 경향이 큰 것은 그 이분법적 사고가 무엇보다 가장 명료하게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일견 만화적으로 여겨지고 비논리적인 장면이 병치되어 있는 이미지에 그러한 흑백화의 옷을 입힘으로써 개연성도, 의미도 없어보이는 상황이 희극을 만들어 낸다. 흑백화의 과정을 통해 행위를 나타내는 가장 간결한 주체들만이 남은 화면은 창작자인 내가 할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불친절한, 감상자들과의 접촉지점인 것이다.
하놀쌈_목가적인 오침과 독일식 슈플렉스_순지에 먹_각 73×91cm

또한 예전부터 고매한 정신세계와 깊은 의미를 표현하는 용도로 사용되어 오면서 어느새 숭고한 재료로 암묵적 권위를 가지게 된 먹이라는 재료로 블랙 코메디라고 말하고 싶은 철딱서니 없고 경박하다 싶은 화면으로 끌어당기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먹의 용법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놀쌈_체크메이트_순지에 먹_각 45×53cm

그리고 화면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가면을 쓴 레슬러들에겐, 가면이란 본 얼굴을 감추고 정체를 비밀화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링 위에서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임과 동시에 투쟁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많은 페르소나가 '잔혹한 엔터테인먼트'의 링이라는 모순적 상황과 공간에서 끊임없이 격돌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나는 그런 장면을 반복적으로 구성하고 만들어내면서투박하고 허술하며 모순투성이인 것 같지만 톱니바퀴처럼 딱 맞물려선일견 문제없이 돌아가는 것 같은, 확실히 돌아가고 있는삶 자체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 하놀쌈




Fetishrama II







도병규展 / DOBYUNGKYU / 都炳奎 / painting   2011_0611 ▶ 2011_0702 / 일,공휴일 휴관





도병규_Ocean without a shore_Black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_150×12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20081018c | 도병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11_토요일_04:00pm

관람시간 / 월~금요일 09:30am~07:00pm / 토요일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사우스 PYO GALLERY SOU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B112호 Tel. +82.2.511.5295 www.pyogallery.com





'Memento Mori', 삶과 죽음의 매개항으로서의 '다리' ● 도병규 그림의 소재는 벌거벗은 인형이다. 그것도 아기 인형에 국한돼 있다. 그가 극사실적인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는 화면속의 인형들은 한결같이 무표정한 모습을 띠고 있다. 연한 살색의 부드러운 고무로 만든 인형 그림은 특히 근작에 와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많다. 화면을 꽉 채우다시피 클로즈업된 인형의 얼굴은 따라서 관객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셈이 된다. 이를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관객 역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화면과 시선의 정면 대결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말해 준다. 필경 전시장에서 그림은 화면 속 인형의 눈이 관객의 시선과 맞닿을 수 있도록 알맞은 높이에 걸리게 될 것이다. 인형의 얼굴을 화면에 꽉 채워 그린 이번 근작을 통해 도병규가 의도하는 것 또한 이러한 시선의 전략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얼굴 그림은 마치 '인형의 눈을 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 연한 갈색, 연한 검정, 혹은 서양의 어린이를 연상시키는 파란 색의 커다란 눈동자는 다분히 위압적이다. 그러한 느낌을 주는 요인은 커다란 눈의 모습에도 기인하지만 비록 아기 인형의 눈일망정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오는 데 있다. 그것은 인형이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지만, 그런 사물에 작가의 감정이 이입돼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기묘한 미적 체험은 작가의 육필이 원래의 인형이 지녔을 법한 무표정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따지고 보면 작품을 대하는 관객들의 객관적인 거리 유지가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연민을 느낄 수도 있고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이것이 그의 그림을 극사실주의의 범주에 넣기 곤란한 이유이다. 작가나 관객 모두 객관적인 거리의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도병규_Pacifier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 & 유채_100×100cm_2011
도병규_Fifteen Babies_캔버스에 아크릴 우레탄 & 유채_130.3×193.9cm_2011
도병규_Bridge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 & 유채_120×150cm_2011

도병규의 근작은 대략 두 부류로 분류된다. 하나는 예의 크게 클로즈업된 인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나 끈적이는 점액질처럼 보이는 용액에 잠긴 인형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시선의 강렬함은 전자의 그림에 주로 쏠려있고 후자에는 아래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물이나 점액질에 의해 한 꺼풀 덮여있기 때문에 다소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 이 두 부류의 인형 얼굴의 그림들에는 서로 다른 상황성이 부여돼 있다. 전자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된 보다 선명한 그림들에는 인형의 분신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아기들이 얼굴에 산재한 작은 구멍에서 막 나오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이다. 인형 이미지의 분신인 이 벌거벗은 아기의 작은 모습은 플라톤의 잘 알려진 비유에 의하면 이미지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원상(原象), 즉 진리로부터 삼 단계나 떨어져 있다. 그것은 작은 아바타처럼 보인다. 인형의 아바타.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인형만의 아바타에 지나지 않을까? 인형이 아이들의 완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인형의 아바타 역시 사람의 아바타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도병규는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사이버 현실을 수작업에 의존하는 아날로그의 대표적 매체인 회화를 통해 다루는 전복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이버 세계의 아바타 역시 인간이 고안해 낸 이미지 완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도병규의 이러한 전략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구나 사이버 상의 아기 아바타를 키우다 실제 아기를 굶겨 죽인 사건이 발생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진리로부터 삼 단계나 떨어진 가상(假象)을 경계한 플라톤의 혜안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예술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가상을 경계하라는 플라톤의 메시지는 도병규의 작품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 후자의 부류는 물 혹은 맑은 점액질에 잠긴 인형의 이미지이다. 여기서도 역시 정면성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들이 전자의 그림들과 다른 점은 인형들이 어딘 가에 갇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부글거리는 물이나 점액질의 요동치는 모습이 그런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도병규는 왜 굳이 이런 상황을 설정한 것일까. 이 장면은 인형을 물이 가득 찬 용기(容器) 속에 억지로 밀어 처넣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느 누군들 유년시절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을까만, 이 가학적(加虐的) 행동이 그의 그림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시선의 전략이 엿보인다. 그림 속의 인형의 눈은 생기를 잃고 체념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전자의 그림들이 선명하게 표현된 반면, 후자의 그림 속의 눈은 물이나 점액질에 한 꺼풀 덧 씌워져 다소 흐릿하게 보인다. 아니면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가득 채운 양수 속을 유영하고 있는 아기의 모습일까? 그 어느 것이 됐든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도병규의 그림이 드러내는 것처럼 사회 속에서 개인적 자아가 겪는 심리적 갈등과 괴리감에 대해 주목을 하고 싶다. 어쩌면 유년시절에 형성된 트라우마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를 이러한 심리적 갈등은 자아 안에 내포된 '금기적 성향들과 욕망, 두려움'(작업 노트)에 연유한다.
도병규_Ocean without a shore_White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_180×110cm_2011
도병규_Ocean without a shore_Black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_150×120cm_2011
도병규_Fifteen Babies_알루미늄 패널에 아크릴 우레탄 & 유채_110×180cm_2011

이번 전시의 주제는 죽음과 관련된다. "너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금언처럼 삶과 죽음을 다른 것이 아닌 같은 것으로 보는 관점이 이 주제에 내포돼 있다. 삶과 죽음을 같은 차원으로 생각하는 견해는 불교적 혹은 도가적 인생관이거니와,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난 것이 바로 「Bridge」이다. 'bridge'는 '다리'라는 의미로 전통적인 한국의 생사관에서보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항, 즉 중음신(重陰神)을 의미한다. 도병규는 태아와 태아 사이를 연결하는 탯줄로 작은 아기들의 이미지들로 연결된 줄을 전치시키고 있다.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영혼의 다리로서의 탯줄인 것이다. ● 도병규의 그림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와 같다. 인간의 가학성에 대한 고발은 사실 그의 관심사가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러한 징후는 사실 그의 그림 그 어느 곳에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아기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그런 징후와 의도를 감지할 수 있다. 도병규는 실제의 아기가 아닌 아기 인형을 통해 인간을 둘러싼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하나의 은유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가상이 때로는 실제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선례를 우리는 도병규의 그림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 윤진섭





A Sound-View





염기현展 / YEOMKIHYUN / 廉起賢 / painting   2011_0615 ▶ 2011_0621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치자, 양파, 밤, 커피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162×122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1 미술공간現 기획展

관람시간 / 평일 10:00am~06:00pm / 주말 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www.artspace-hyun.co.kr




자연 속 울림 - 염기현의 선(線)을 통해서 ● '선(線)'이란, 점(點)의 운동으로 생기는 동적(動的)인 것임과 동시에 색(色), 면(面)과 함께 조형적 형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선(線)'은 명확성과 동적(動的)인 율동감, 입체감까지도 보여주는 광범위한 표현 효과를 지니고 있다. 서양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와 동양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는 차이가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가 '회화에서의 동양예술은 선의 예술이고, 서양예술은 면의 예술'이라 언급한 것처럼, 동양의 선은 개념적이고 관념적, 그리고 사의적이어서 작가 자신의 정신세계의 표현이자 동시에 무한적인 공간의 표현인 것이다. 선은 점(點)에서 시작하여 길이와 방향의 변화에 따라 반복하며 무한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만들어진다. ● 작가의 작품에서 선은 하나의 조형적 언어로서 그림을 통해 마치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들은 또 다른 공간들을 형성하고 있으며, 작가가 말하고자하는 내면세계들을 표현하고 있다. ● 염기현의 근작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재료, 즉 풍경을 소재로 삼는다. 작업실 주변으로는 지천에 널린 형형색색의 꽃과 산들 바람, 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생명력 가득한 자연에서 나뭇잎이 발산하는 청량감 넘치는 자연의 향기, 그리고 귀를 맑게 하는 청아한 강물소리 등을 입체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시 속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에 쉽게 몰입될 수 있도록 만든다.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커피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100×100cm_2010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양파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130.2×130.2cm_2010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린넨, 소목으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91×117cm_2011

작가는 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두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염기현의 작업은 그 과정 하나하나가 오랜 시간들을 요구한다. 작업에 앞서 판넬에 린넨을 댄 후 면천을 배접하고, 자연적 재료인 치자, 양파, 밤, 호두, 소목, 쑥 등의 식물성 재료들로 염색한 후에야 비로소 인두를 이용한 작업이 시작된다. 면천에 뜨거운 인두가 닿기 시작하면 작가의 손길에 의해 화면은 서서히 갈색으로 변한다. 이러한 표현은 기존의 캔버스에 유화나 아크릴 물감이 올려지고, 쌓이는 방식이 아닌 여러 겹 둘러싼 천들이 인두에 의해 점점 갈색으로 태워지는 방식이다. 이것은 작가가 말한 동양화에서 먹(墨)이 화선지에 스며들어가는 것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 갈색의 선들은 일정 규칙을 반복하며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확산되어가는 원의 형태로 표현된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퍼져나가는 동심원(同心圓)처럼 멀리 자연의 울림과 함께 마음의 평온함을 전한다. ● 자연이라는 주제는 '빨리'라는 단어와 호흡을 맞추기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 완성까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작가의 표현 방법은 주제와 지향점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바쁜 현대를 살아가며 '크게'보다는 '일찍', 혹은 '빨리'만을 추구하는 인생(人生)에 관한 한 지독한 근시(近視)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잠시 서서 뒤돌아 볼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을 느끼는 계기를 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김경민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린넨, 치자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91.2×116.8cm_2011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치자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145.7×89.7cm_2011
염기현_A Sound-View_린넨에 면천, 밤으로 물들이고 인두로 태움_72.7×60.8cm_2010



An echo in nature – Through the lines of Yeom Ki Hyun


 

시간의 이빨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 / painting   2011_0615 ▶ 2011_0621




구본아_시간의 이빨 01_한지에 먹, 채색_182×201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20091006a | 구본아展 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시간의 이빨 ● 삶이란 바로 소멸이다. 기계의 잔해들은 과거의 기계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예전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런 잔해는 예전의 형태를 잃어버렸지만 예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온전한 건물보다는 폐허에서 더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죽은 쥐가 하루도 안 돼 구더기가 우글거리며 새로운 생명으로 변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패한다는 것은 결국 변화하는 것인데 이처럼 변화해 가는 것이 바로 삶이다. 폐허의 돌들도 기계의 잔해도 제각기 모습이 다르며, 각자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나타내고 있다.
구본아_시간의 이빨 02_한지에 먹, 채색_130×320cm_2011
구본아_시간의 이빨 03_한지에 먹, 채색_130×100cm_2011
구본아_시간의 이빨 04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1

이번 작업에서 채워짐과 비워짐.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순환을 태엽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표현하였다.'태엽(胎葉)', 아이밸 '태', 이파리 '엽' 의 의미처럼,시계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만든 나뭇잎과 같이 생명을 잉태시키는 틀을 의미한다. 칠팔월의 복숭아 열매는 손대기가 무섭게 '탁'하고 터져버려 씨를 산지 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껍데기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말려버린다. 그들 세계에서 소용돌이는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다. 시계는 생명의 단위이고 연속으로 쉬지말고 움직여야 하기에 인간의 심장대신으로 태엽을 넣어 주었다. 모든 완벽한 것은 언젠가는 망가진다. 아침마다 울리는 자명종시계, 63빌딩, 경복궁, 해안가의 철옹성같은 요새, 사랑받는 옆집 똥개강아지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이 완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오직 순간뿐이다.
구본아_시간의 이빨 05_한지에 먹, 채색_30×50cm_2011
구본아_시간의 이빨 06_한지에 먹, 채색_130×320cm_2011

주름살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 꽃이 시들어 가는 것, 우리가 태어난 집이 철거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거기서 시간을 읽어낼 수 있는 시계와 같은 것들이다. 땅과 건물의 붕괴는 그 자체가 탁월한 시간 측정기인 셈이다. 즉 바다의 섬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초침과도 같은 현상이고,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이 붕괴되어 라인 강으로 쓸려내려 가는 것은 분침, 땅속의 용암이 식어가는 것은 시침과 같은 현상이다.
구본아_시간의 이빨 07_한지에 먹, 채색_ 160×80cm_2011

사람들이 태엽을 되감을 수 있다고 한다면, 왜 시간 역시 되감을 수는 없는 것일까... 왜 폐허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고 , 늙은이는 아기로 성장해 갈 수 없는가... 시간은 무엇이 그리 특별해서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근본적으로 보면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연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동일하다. 나는 자연과 문명의 화해에서 오는 경외심을 시간의 이빨의 해답으로 찾았다. 경외심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그것이 나이와 함께 자란다는 점이다. 경외심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경외심은 시간에 대한 승리이다.. 그것은 파멸의 반대이다. 그것이 바로 완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구본아





EUMMOLON



윤석만展 / YOONSEOKMAN / 尹錫晩 / painting   2011_0615 ▶ 2011_0621



윤석만_Face Series 1_종이에 연필_130×89cm_2011


초대일시 / 2011_0615_수요일_06:00pm

후원 / 화봉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gallery.hwabong.com



음모론 - 摹倣者 ● 어차피 재현(再現)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모방일 것이다. 그 무엇이 특정 대상이나 사물 일 수도 있고 이미지나 심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으로 말미암음' 인 것이다. ● 자신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가 아닌 다른 존재를 열망 하는가? 변장 혹은 변신 혹은 재연 혹은 재현된 자신은 스스로가 주체인가? 아니면 타자인가? 일반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의 변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욕망일 것 이다. 드라마 보기, 영화 보기, 코스튬 플레이, 소꿉놀이 혹은 작품의 제작, 영화나 드라마의 제작, 연예인에 대한 갈망, 영웅의 탄생, 엄마가 되기, 어른이 되기 등. 우리는 항상 스스로가 지금의 상태나 상황을 벗어난 또 다른 상태로 변이하는 것을 꿈꾼다. 그것도 아주 다양한 상태로 변화하는... ● 이러한 열망은 결국 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아주느냐'에 있는 문제 일 것이다. 마치 내일 친구의 결혼식을 가기 위해 멋지게 옷을 입은 다음 거울을 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윤석만_Face Series 3_종이에 연필_130×97cm_2011
윤석만_Face Series 4_종이에 연필_130×97cm_2011

-나는 지금 거울을 보고 있는 나를 보고 있다. - ● 사람이 무엇인가 보고 그리게 될 때, 우리는 대상을 보고 재빨리 종이나 캔버스에 옮겨 그리게 되는데 바로 이 순간에는 대상을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리는 순간에는 자신의 머릿속의 이미지를 기억하면서 손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 잔상들은 그림을 그리는 주체에 의해서 해석되고 변화되고 왜곡이 되어 진다. 그렇다면 결국은 대상과 같지 않고 오히려 작위적(作爲的)이게 될 것이다. 어차피 '진실이 아닌 진술'인 것이다. 결국 그 이미지는 그리는 주체의 숙련과 기술에 의해서 ~처럼 보이게 되는데 관객의 기억과 관념에 의해 그 그림이 진실과 닮거나 혹은 작가의 의지나 심상이 담겨진 이미지로 인식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작가의 의지나 심상이 이러한 '작위'의 한계를 벗어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즉 '모방imitation'이 아닌 mimesis 혹은 reproduction이 가능케 한다.) ● 마치 '~처럼 보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은 그림에서 떠나가 있다. 뭐 특정한 용어를 빌려 쓴다면 외밀성(extimie)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는데, 나는 자신의 이미지가 규정되지 않고 바라보는 관객들에 의해 규정되기를 바란다. 물론 관객이 내리는 규정이 관객들 마다 다르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 일 것이다. ● 동시대에서 비슷한 문화와 정보와 관습을 가진 대다수의 관객들은 비슷한 추론을 하겠지만, 어쨌든 나는 실험을 하는 것이다.
윤석만_Face Series 5_종이에 연필_130×97cm_2011
윤석만_Eummolon Series 1_종이에 연필_89×130cm_2011

-Children are often good mimics- ● 이 문장은 mimic 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다가 사전에서 알아낸 예문의 하나다. ● 규정을 짓는 순간 이미지는 고착화 된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아니라 죽은 사물이 되는 것이다. ● 이름 짓기, 분류 하기는 사람에게 지식을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구조화 시킬 수 있게 만들었지만, 반대로 그 대상이 더 이상 발전하거나 변화를 가질 수 없는 족쇄를 만들어 버렸다. 움직일 수 있는 틈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사물과 이미지가 죽어버려서 더 이상의 상상을 할 수 없게 될지라도 분류나 이름 짓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 우리는 교육을 통해 많은 것의 이름을 알고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지식이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가 되기 싫은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나만의 분류와 이름들을 상상한다. 내가 그것을 특정한 단어나 이미지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매개자[媒介者] 로서 존재하고 싶기 때문이다. ● 중학교 때에 같은 동네에 사는 친했던 고등학생 누나를 기억한다. 그런데 그 누나는 시력 무척 나쁜 사람이었다. 그래서 늘 콘택트렌즈나 안경에 의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바람이 무척이나 불었던 봄날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누나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말을 걸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달리기 시작했다. '귀여워~' 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는 누나의 앞에는 바람에 날리는 하얀 비닐봉지가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누나는 그 하얀 봉지가 강아지인줄 알았던 것이다. 누나는 그날 콘택트렌즈도 안경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 권정준
윤석만_Eummolon Series 4(Heart)_종이에 연필_170×122cm_2011
윤석만_Eummolon Series 5(Milk cow)_종이에 연필_122×170cm_2011


Conspiracy Theories - Imitator




Innocence of Childhood



양재광_원성원_윤정미展   2011_0615 ▶ 2011_0629



양재광_Nightswimming-나이트스위밍,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07


초대일시 / 2011_0615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양재광_원성원_윤정미

기획 / 갤러리 아트사간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아트사간 GALLERY ART SAGA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삼청로 22) 영정빌딩 3층 Tel. +82.2.720.4414 www.artsagan.com



어린 시절 추억을 환기시키는 표상 ● 현대사회는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속도의 시대이다. 우리들은 그만큼 많은 것을 잃어버리면서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우리의 정서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때 묻지 않은 순수성에 대한 동경 때문 일 것이다. 또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심리적인 태도를 반영하여 어린이들의 특정한 심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매개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택해서 전시를 마련했다.
양재광_Nightswimming-나이트스위밍,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06
양재광_Nightswimming-나이트스위밍,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0×100cm_2007

양재광은 어린 시절의 추억에 관한 작업을 한다. 마치 어린이 드라마의 특정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엽기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 있는가하면 어른을 흉내 내는 어린이의 심리를 묘사 한 것 같은 작품도 있다. 또 다른 작품은 아이들의 모험심이나 호기심을 상징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작가가 연출하여 재현한 장면들이지만 현실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한다. ● 다른 한편으로는 연극이나 드라마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보는 이들에게 다양한 시각적인 재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의도와 무관하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지점에서 발생한 공간 및 스토리텔링이 보는 이들을 현혹하여 영상언어로서의 매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와 더불어서 작품 한 장 한 장에서 작가 내면세계의 알레고리적인 표현이 읽혀진다. 어쩌면 작가가 어린 시절에 성취하고자한 꿈이 사진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성원_일곱살-가벼운 가출, C 프린트_123×170cm_2010
원성원_일곱살-엄마를 찾는 종이비행기, C 프린트_136×195cm_2010
원성원_일곱살-진달래 밥과 들국화 국, C 프린트_140×140cm_2010

원성원은 자신이 어릴 때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실을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보는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현실을 과장해서 보여준다. 그로인해 드라마틱하게 혹은 정서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할머니나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 들려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디지털테크놀로지와 작가의 미술적 혹은 문학적인 상상력이 효과적으로 만나서 풍성한 서사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 작가는 현실을 매개로 자신의 기억의 창고에서 끄집어낸 과거의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특정한 체험을 디지털프로그램을 이용해서 과장하고 강조해서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조한 것이다. 그 결과 이지점에서 보는 이들과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게 된다. 말 그대로 우리시대의 또 다른 아름다운 동화이다.
윤정미_로라와 로라의 노란색 물건들, 라이트젯 프린트_122×122cm_2006
윤정미_블루 프로젝트-에단과 에단의 파란색 물건들, 라이트 젯 프린트_76×76cm_2006
윤정미_핑크 프로젝트 I ,II- (함)예린이와 예린이의 핑크색 물건들, 라이트 젯 프린트 각 76×76cm_2005, 2009
윤정미_핑크 프로젝트-에밀리와 에밀리의 핑크색 물건들_라이트 젯 프린트_122×122cm_2005

윤정미는 어린아이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의 컬러를 매개로해서 그들이 선호하는 컬러에 대한 고정관념을 시각화했다. 아이들의 방에 물건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고서 물건의 소유주인 아이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작품마다 아이들의 생활용품 및 컬러를 통해서 당대의 특정한 문화가 들추어지고 있다. 또 다르게는 아이들의 심리가 느껴지는 동시에 작품을 보는 어른들의 오래전 추억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 우리가 현재 사회화과정에서 체득한 지식이나 상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시기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상식이 문화적인 환경이 변화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블루가 남성을 상징하는 컬러이고, 핑크가 여성을 상징하는 컬러라는 색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이와 같이 우리가 현재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컬러에 대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보는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일깨워주는 작용을 하는 여러 매개물 중에 하나다. ● 예술가들의 예술적 행위는 대부분 기억이나 체험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시각화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고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이지점에서 다양한 모습 및 주제를 바탕으로 펼쳐지고 있는 동시대 현대사진의 풍경을 반영한다.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별점이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같은 공간에서 만들어낼 아름다우면서도 풍성한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글을 마친다. ■ 김영태




헤테로토피아: 불안의 징후



2011_0615 ▶ 2011_0708 / 일요일 휴관



김선애_인생은 꿈, 사랑은 시 Ⅲ_장지에 채색_145.5×112.1cm_2008


초대일시 / 2011_061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선애_김스민_권종수_방병상_이승준_이다슬_장인선

협찬 / 신 프린트_대안공간 충정각

기획 / 김석원 (평론 및 전시기획)

코디네이터 / 박수빈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대안공간 충정각 ALTERNATIVE SPACE CHUNGJEONGGAK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60-22번지 Tel. +82.2.363.2093 www.chungjeonggak.com



미셀 푸코가 언급하는『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다른, 낯선, 다양한, 혼종된' 이라는 의미가 있는 hetero와 장소라는 뜻의 'topos/topia'의 합성어로 푸코가 『말과 사물,1966』 서문에서 서로 상관없는 사물들을 묶는 하나의 허구적 질서와 연관 지어서 언급한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실과 환상의 이중적인 구조가 시간과 공간으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구획해보면 감옥, 정신병원, 묘지, 극장, 이동, 유원지, 식민지, 매춘굴, 바다 위의 배, 복도, 박물관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모든 공간은 주류 사회에서 일탈한 공간들이다. 모든 것과 관계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과는 모순된 기묘한 장소, 일상에서 일탈한 다른 공간이다. 문학에서 환상적 사실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헤테로토피아의 성격을 살펴보면, 카프카의『변신』, 호프만의『모래 사나이』에 드러난 공간의 혼 종적 성격은 일상적인 생활공간에 비일상적인 공간이 서로 맞물리는 환상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을 강조한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는 이상 세계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요소가 한편으로는 덧없고, 강박적이며, 불안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일부분 인정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은 주체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트라우마는 주체의 인생에서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안(anxiety)은 주체가 과도한 자극을 제어하지 못할 때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한 자극은 외부에 존재하는 자극으로서『현실적인 자극(실재 불안: realistic anxiety)』과, 주체의 내부에 존재하는『본능적 자극(신경질적 불안: neurotic anxiety)』으로 나누어진다. 불안을 근본적인 트라우마와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내부의 것이 외부로 투사되어서 마치 외부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 즉 '신경질적 불안'과 '실재 불안'의 두 가지 요소가 함께 혼합된 자극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폭넓게 적용해보면 이 세상에 불안한 징후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방문을 잠갔는데 누가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지만 아무 이유 없이 온몸이 불편하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불안감,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만, 신경이 집중되지 않고 불길한 전화가 올 것만 같은 불안감, 마음이 답답해서 종교적인 부분에 의지하고 싶지만,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기에는 어딘가 텅 비어 있는 상태가 그것이다. 『헤테로토피아: 불안의 징후』展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헤테로토피아의 속성에서 작가 개인이 느낀 다양한 불안이 표출된다. 그것은 푸코가 정의한 아카데믹한 헤테로토피아를 지향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작업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신세계에 내재하고 있는 다양하고, 혼성적인 불안감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전시의 재목에서 의미하는 개념적인 특성 때문에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어떤 특별한 장르에 치우쳐서 생각하면 안 된다. 헤테로토피아를 단선적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로만 규정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 때문이며, 미술사 장르에 제한해서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기능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되기에 그렇다. 아울러, 헤테로토피아의 특성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식상함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투명성(transparency)'의 특성을 깨뜨리는 작업을 부분적으로 선보이려 한다. 이러한 시도는 시각적으로 체험하고, 관찰하는 관습적인 행위를 넘어서려는데 있다. 『헤테로토피아: 불안의 징후』展은 작가들이 개념적인 부분을 다양하게 체화해서 자유롭게 헤테로토피아의 불안한 상황을 재해석하고자 한다. 그들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이 충돌하거나 교차하면서 긴장을 축적하고 그 내용이 응축돼 터졌을 때 어떤 파열음을 생성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김선애 ● 작품에 등장하는 고가구(앤틱)는 가장 일상적이며 공간을 표현하는 오브제로 선택한다. 주변부를 장식하는 민화(民畵)는 현대 사회에 사는 작가의 일상과 혼합되면서,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들과 조우해서 허구의 내러티브를 만들어서 과거와 현재의 만남, 현실과 허구의 만남이 새로운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김스민_my breath is free and easy_잉크젯 프린트_60×90cm_2010

김스민 ● 김스민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서 장소적 위치를 일정부분 차지하는 가전제품들이 전기 에너지를 통해서 작동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그녀는 전기코드에서 흐르는 에너지가 기계의 내부에 투입해서 내뿜고, 열을 발생하는 소리를 내는 전자제품이 인간과 닮았다고 여긴다. 기계적 존재감과 생명력에 대한 관찰은 인간과의 공존관계에서 다른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작가의 자아가 기계적 물성에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실제 공간과 연극적 공간이 혼합된 혼성체를 구성한다.
권종수_ft-bb_3D 렌티큘러_116×120cm_2010

권종수 ● '렌티큘러(Lenticular)'를 사용해서 평면과 입체감을 동시에 확보하는 작업은 대단히 섬세한 가상과 현실의 겹침과 드러냄을 표방한다. 작품에 주된 요소로 등장하는 '깃털'은 가벼움을 상징화한 것으로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불상에서 드러난 종교적인 분위기는 현실세계를 벗어난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심리적 불안을 조장한다.
방병상_One day_HD 단채널 비디오_00:03:36_2011

방병상 ● 『One day, 2011』은 관 행사에 동원된 군인들, '표적(잡스라는 살균, 살충 기업회사)'과 '방역기(살충제)'의 현장성을 도큐먼트 한다. 군인들이 임시로 부여받은 방역의 일이 진행된 짧은 행사는 그들의 '일탈한 행위'가 드러난다. 방역기에서 분출되는 살충제와 기계적인 소음은 불안감을 유도하고,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줄을 선 군인들은 일반인의 행위와 뒤섞여 언캐니한 장면들이 드러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연기'의 역할은 다양한 해석 '(인덱스와 비 인덱스, 코드화와 탈 코드화)'과 기존문법에서 어긋난 다층적인 영역을 건드린다.
이다슬_From the series I know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100×185cm_2010

이다슬 ● 예전에 존재했던 강원도의 탄광 마을은 강원랜드로 대변되는 문화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곳은 과거의 시간이 존재하고 그 잔여물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작가는 이곳에서 '환경과 에너지에 관한 작업 (I Know)'을 시작한다. 이 작업은 자신이 쓴 소설을 기반으로 전개하는데, 버려진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 동물, 작은 벌레들이 모여 내러티브를 만든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의 모습은 분신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시도는 '투명성(transparency)'의 속성인 '몰입(immersive)'적 특성을 깨트리는 방법론으로 해석된다.
이승준_In the Bath_3채널_설치, 00:04:02_2004

이승준 ● 『In the Bath』, 『The Tao of 7th Train』에 드러나는 영상작업은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한다.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모든 현상의 공존성과 상호의존성에서 파생되는 시간과 공간의 메타포를 언급한다. 작가는 인간의 의식의 흐름에서 세분화한 지각, 감각을 포함한 잠재의식에서 벌어지는 시공간의 확장성 - '존재하던 것이 사라지는현상', 중성적인 '현전감(sense of presence)' - 을 언급한다.
장인선_혼종 white – 1009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아크릴수지_90×120cm_2010

장인선 ● 작가가 구현하는 시 공간의 개념은 과거, 현재, 미래가 혼합된 혼종공간으로서 동시다발적으로 시 공간의 층위에 자아가 공존한다. 작가의 자아는 다층적, 다의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자아는 실제 존재하지 않거나 인간이란 생명체가 아니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혼성 적으로 엉킨 형태가 원으로 구현된다. ■ 김석원




하하호호작업실



유승하_최호철展   2011_0603 ▶ 2011_0627 / 월요일 휴관



유승하_에무전시포스터_튀어나가는 아이(고래가 그랬어 표지)_종이에 혼합재료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복합예술공간 에무 초대전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복합예술공간 에무 EMUSPACE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81번지 B2



낮게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 재크는 거짓말쟁이다. 콩을 심었더니 구름을 뚫고 올라갔단다. 흥부는 망령이 났다. 박씨를 심었더니 금은보화가 열렸단다. 그렇게 비뚤어진 입들이었지만, 아주 터무니없진 않았다. 무언가 심었기에, 무언가 열렸다.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하지는 않았다.
유승하_엄마의 경대(한겨레신문 사이사이 2010 발표)_종이에 혼합재료
유승하_토끼와 나(고래가 그랬어 표지)_종이에 혼합재료
유승하_빨래대놀이터_종이에 혼합재료_2007
유승하_아빠는 만화가(우리만화연대 표지)_종이에 혼합재료
유승하_살려줄까말까(표지)_종이에 혼합재료

최호철과 유승하가 한 집에 살면서 종이 밭을 일군 게 열다섯 해란다. 최호철은 스케치북을 들고 산으로 길로 공장으로 싸돌아 다녔다. 그렇게 주어온 것들 중에는 녹슨 고철도 있고, 지하철의 한숨도 있고, 소를 닮은 산도 있다. 어깨 번듯한 사내가 뚝심도 좋다. 그 묵직한 것들을 잘도 심었다. 유승하는 아이 하나 손에 잡고, 아이 하나 등에 업고 이야기들을 캐러 다녔다. 때론 툴툴 대는 아이들 때문에 일찍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날도 있었지만, 꾀많은 여우와 마음 깊은 고양이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것들도 구슬린 뒤 심었다. ● 금은보화는 열리지 않았다. 그건 거짓부렁이다. 선녀가 나와 춤을 추지도 않았다. 그건 한낮의 꿈이다. 콩 심은데 콩 났고, 고함을 심은데 고함이 났고, 이야기 심은 데 이야기가 났다. 둘은 그렇게 뿌리고 일구어 거두어낸 것들을 모두에게 나누어주었다. 「십시일반」한다더니 백 그릇을 만들었다.
최호철_2008년 북아현동 골목길_종이에 혼합재료
최호철_2011년 하남시 초이동_종이에 혼합재료
최호철_2011년 하남시 초이동_종이에 혼합재료
최호철_2010년 성남시 신흥동_종이에 혼합재료

같은 울타리에 나란히 앉아 작업한지 열다섯 해. 두 사람이 '낮게 따뜻하게, 그리고 가까이' 이웃과 세상을 보고 그려낸 작업들이 한군데 모였다. 닮으려면 한없이 닮고, 스밀려면 여지없이 번지고, 자칫하면 뭉뚱그려질 수도 있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런 '부부 작가'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유승하는 여전히 유승하이고, 최호철은 여전히 최호철이다. 유승하의 붓은 아이들과 부대끼며 더 찰져졌고, 최호철의 펜은 혼자 걷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그리하여 우리 이웃의 가장 진솔한 시간들이 여기에 두 이름으로 증빙되어 있다. 최호철이 기록이라면 유승하는 대화다. 혼자 바라보는 아련함과 두런두런 나누는 살뜰함으로 떼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이 붙어 있으니 더 따뜻하다. 우리도 그 사이에 엉덩이를 밀어넣고 싶다. ■ 이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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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ulnerable Scenery 유연한 풍경










이정후展 / LEEJEONGHOO / 李姃厚 / installation   2011_0601 ▶ 2011_0705 / 주말 휴관






이정후_어떤풍경_갤러리 AG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 휴관

갤러리 AG GALLERY AG 서울 영등포구 대림2동 993-75번지 안국약품 1층 Tel. +82.2.3289.4399 www.galleryag.co.kr






1. Garden State. 젊은 작가 이정후가 2008년에서 2010년 사이에 제작한 일련의 사진작업 제목이다. 집 입구에 있는 '정원(garden)'과 함께 '멀리 있는 집'이라는 부제가 공통으로 등장한다. 이들 작업은 비슷비슷한 그러나 서로 다른, 각기 개성 있는 집 저마다의 표정을 담고 있다. 모두 이정후가 해외 체류 당시 만난 현지 삶의 표정이다. 당시 외롭고 낯선 이방인으로서 경험한 이런저런 먹먹함을 엿볼 수 있다. 이역만리에서 체험한 사회문화적 차이와 다름을 압축적으로 반영한 것 중 하나가 거주공간일 것이다. 여행을 하건, 일정 기간을 머무르건 간에 이방인에게 가장 신경 쓰이고 중요한 것은 아마도 먹고 자는 일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주생활 공간일 것이다. 낯설고 어색할 수 있는 서구의 주거문화는 작가 이정후에게 새로운 작업 모티프로 작용했다. ● 사진 속 집들은 대체로 생소하고 낯설다. 익숙한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낯선 풍경도 아니다. 영화라든가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왔던 풍경이다. 몇 개의 간단한 기하학적인 선들로 단순, 엄격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집의 모습은 일견 경직된 느낌을 주지만, 한편으론 친근하고 포근한 느낌도 준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카메라의 눈'으로만 포착했다기보다는 타향살이를 자처한 외로운 이방인 이정후의 '사람의 눈'으로도 들여다본 인간적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저녁 무렵의 표정을 담은 사진들은 자연스레 가족들이 모여 있거나 각기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굳게 닫힌 문과 함께 어둑한 표정은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마다 불은 밝히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에는 다소 부담이 될 정도로 엄격한 표정이기 때문이다. 뭔가 철저히 차단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엄습한다. 이국적인 표정과 함께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마저도 든다. 사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정후는 현실적으로 느낀 것을 비현실적으로 풀어냈다. ●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는 흔히 길을 잃어버리거나 심리적으로 문화적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이정후는 자신의 지난 경험을 떠올렸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던 답답한 상황, 불통의 감정을 반추했다. 유학생활을 했던 런던도 물론 포함되겠지만, 전시프로젝트 관련하여 방문했던 뉴욕과 시드니 등지에서의 전혀 생소한 경험도 이번 작업에 있어 주요 모티프로 작용했다. 주택가에서 흔히 만나는 영화세트장 같은 집들, 특히 야경을 눈으로, 드로잉으로,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도시건 주택가건 늦은 오후가 되면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희한한 풍경은 이방인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당최 누가 사는지 알 수 없는 풍경.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사는 형태가 보이는 비슷비슷하지만 다른 집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집의 구조나 정원의 형태들이라든가 꾸며 놓은 것들이 각각 달랐다. 공통점이 있다면 휴게, 거주의 공간으로 안정적인 유기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각각은 서로를 냉정하게 고립시키고 있어 보였다. 푸석푸석 건조한 사이를 무언가로 매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훗날 사진작업이 입체, 설치작업으로 작업이 이어지면서 공간을 매개하는 의자라든가 사다리 등이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인 계기가 된 경험이었다. ● 이정후는 여행 당시 인상 깊었던 풍경들을 훗날 다시 방문해 찍기 시작했다. 작업을 위한 방문이었다. 뷰파인더를 피사체인 집으로부터 멀리 가져가 이런저런 집들의 표정을 멀리로부터 최대한 객관적으로 담아내고자 노력했다. 멀리 있는 집이라는 부제는 그만큼 작가가 심리적인 거리를 엄격하게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진에는 구체적인 얘기들을 담을 수 없었다. 촬영을 하면서도 집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 자신만이 존재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정후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각각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정후에게 있어 사진은 실제와 작업을 매개하는 것이다. 사진은 이들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설정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정후는 집의 정면을 주로 담았다. 이정후가 집을 특별하게 주목한 이유는 집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표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각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집들이 가지고 있는 가지각색의 표정으로부터 점차 전체 매스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전공이 조각이라서 일까. 평면으로부터 매스(mass)로 그의 관심은 옮겨 갔다. 점차 집으로부터 벗어나 그것을 '건물'로 보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모양이나 환원적 형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정후_어떤풍경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이정후_어떤풍경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1

2. 이정후의 입체, 설치작업은 드로잉, 사진 등과 같은 평면작업으로부터 비롯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정후가 선보이는 사진들은 대부분 단일시점에서 담은 정직한 표정을 보인다. 반면 공간 작업은 그것을 다시점(多視點)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과 각도, 눈높이에 따라 다양한 표정과 그림자 그리고 메시지를 선사한다. 사진도 그러하지만 특히 입체, 설치 작업에서는 삼각형 등과 같은 예각 형태가 많이 등장한다. 중세 성당 건축의 첨탑을 보듯 뾰쪽뾰쪽한 모양이 많다. 곡선보다는 수평, 수직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선들이 많이 나타난다. 건물이라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접근 방식과 산과 바다 등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과 경험을 추상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 이들 모두는 누군가가 사용하는 공간으로서의 건물을 압축한 것이지만, 철저하게 출입이 차단당한 심리적인 불안이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다. 최근 설치작업은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둘이 간신히 서로를 지탱한 채 서 있는 의자들이 다수 등장한다. 기형적으로 특정 부분이 왜곡되거나 강조된 의자들은 역시 심리적인 불안함을 반영하고 있다. 자신이 경험했던 외롭거나 또한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절대적인 한계상황을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작가의 개인적 바람으로 보인다. 공감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상황을 최소 단위로 압축, 환원시킨 라인들과 여러 형태의 매스들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둘이 아닌 한계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피를 실어 나르는 혈류 동맥처럼 그것들을 이어주는, 즉 매개하는 것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사다리다. 이번 전시에는 대륙과 섬나라의 집과 건물들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하여 이들이 적극적으로 섞이고 중첩되는 과정을 보인다. 이 과정 속에서 사다리는 공간의 분할과 연계를 도와주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빛과 그림자, 재료의 이질감, 이질적 공간과 공간사이의 소통,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풀어낸다. 이정후는 평면(드로잉)과 평면(사진), 입체(집)와 입체(건물), 공간(사물)과 공간(주체)사이를 오가며 보이는 공간과 보이지 않는 공간, 가짜 그림자와 진짜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치밀하게 반영하고 있다. 낯선 느낌과 친숙함이 쉼 없이 교차한다. ●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주목한 것은 낯선 공간속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심리적인 반응이다. 이는 유학초기 집과 건물을 통해 경험한 낯선 문화적 체험과 그것이 작은 공간, 큰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받은 감동과 심리적인 느낌의 차이를 작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로 많이 머무르는 공간이 학교 작업실이기도 했지만, 당시 가장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곳은 집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집이 가장 그립고 절실했기에 집을 통해서 당시의 낯선 외로움과 감정을 반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공간 자체를 어떻게 다시 심리적으로 분할하고 연계하고 매개할 것인가 하는 관심과 의문으로부터 이정후의 작업은 비롯되었다. ● 이정후는 '유연한 풍경'이라는 전시 타이틀처럼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집과 건물사이의 관계까지만 보여주는 풍경작업을 소개한다. 사진과 입체, 설치작업은 일견 잘 정돈된 느낌을 준다. 이는 아마도 전시공간의 특성상 설치작업을 제한적으로 적용, 소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정후의 이번 전시가 함축적으로 준비,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큼직한 매스와 의자들이 소개되고 사다리가 개입된다. 이들은 '어떤 풍경 1, 2, 3' 등으로 명명되었다. 거주와 이주, 정주를 암시하는 다양한 재료와 형태의 작은 매스들이 등장한다. 주재료는 아크릴과 시멘트와 나무 등이다. 실제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재료들을 사용했다. 전체적으로 유연하지만, 인위적으로 조립된 풍경이다. 전시장을 통으로 사용했다. 이런저런 절제된 기억들이 바닥에 놓이거나 천정에 매달린 채 관객을 반긴다. 오브제를 더 사용하고 싶은 욕심을 억제한 디스플레이가 빛났다.
이정후_유연한 풍경_갤러리 AG_2011
이정후_유연한 풍경_설치_부분

3. 보기에 따라서는 심리적 고립무원의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다리가 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사다리다. 자유로이 다른 공간과 시간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수평적으로 이동할 수도 있는 그러한 수단과 매개로서 사다리가 채택, 적용되고 있는 자유공간이다. 사회, 문화적인 차이도 작용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특히 공간의 차이로부터 혼란과 갈등을 경험했다. 조각을 전공한 작가로서 가질 수 있는 감각적인 부분도 작용했다는 생각이다. ● 이번 전시에서 이정후가 보여주는 작업은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당시 작가가 세상을 인지했던 방식이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되고 경직된 경계를 넘어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꿈을 꾸고 환상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이정후가 선사하는 특유의 판타지는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유연한 풍경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풍경들은 오랜 드로잉을 거쳐 물리적으로 구현되고 완성된다. 이정후는 이러한 풍경 속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동네 풍경을 새롭게 반추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 꿈꾸던 침대나, 매일 지나다니던 공원을 자유로이 거닐기도 한다. 특정 상황이나 장소, 물체 등에서 느꼈던 순간의 감정들을 반추하고 개입시키고 응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정후의 풍경 속에 등장하는 오브제 모두는 공간과 공간, 시간과 시간,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는 마인드 브릿지(mind bridge)로 작용한다. 이정후는 파편적이면서도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매스들을 한껏 늘어놓은 다음, 공간에 들어선 관객들이 자신만의 독자적 방식으로 공간적 상상력을 발휘하길 바란다. 그것이 관객에게 또다른 낯선, 감각적 경험이 되길 이정후는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 박천남




어떤 풍경 Somewhere Place









2011_0616 ▶ 2011_0715 / 일요일 휴관






윤정선_4월의 기억 Memory of April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6×113cm_2009





초대일시 / 2011_0616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서경_박상희_윤정선_이문호_이상원_이소영_이혁준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카이스 갤러리 CAIS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7-16번지 Tel. +82.2.511.0668 www.caisgallery.com






전통적으로 풍경은 가장 오랜 미술의 주제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자연풍경은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었고, 도시화와 산업화로 새롭게 달라진 풍경 또한 화가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풍경이라는 것은 그 사전적인 의미처럼 산이나 들, 강, 바다 등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일 수도 있고 어떤 정경이나 상황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의 모습이 아닌 바라보는 이의 심정이 담겨있기도 하다. 하지만 익숙한 풍경의 재현이 주는 감흥은 한계가 있기에, 이제 작가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풍경을 탐구한다. 카이스 갤러리는 전시 『어떤 풍경 Somewhere Place』를 통해 자연과 인공, 현실과 가상 등 넓은 범주에서의 풍경을 통해 새로움을 모색하는 회화와 사진작가 7명을 소개한다. 각각의 작품들은 작가들의 눈에 비친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지금의 모습 혹은 관심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혁준_Forest_Eden 2-1_콜라주에 광택 니스 칠_66×100cm_2010

이번 전시에서는 다루는 풍경은 실제 존재하진 않지만 작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풍경이나(이소영, 이문호, 이혁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 익숙한 풍경(윤정선, 이상원, 박상희) 혹은 작가의 마음을 담은 '심상의 풍경'(강서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소영, 이문호, 이혁준은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소영의 풍경에는 도서관이나 미술관 작업실 집 등 다양한 공간이 나타난다. 이 공간은 모두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에서 설계되고 배치되어 마치 무대나 영화의 세트처럼 보여진다. 축소모형으로 만들어져 사진 속에 담긴 공간 안에는 평소 작가가 의미 있게 바라보았던 미술사 속의 거장들의 작품 이미지들이 도입되어있다. 관람자는 이소영이 전개하는 전시장 공간 안에서 다시 개별 작품들이 제시하는 미술관 공간으로 인도되어 작품과 만나면서 작가와 함께 경험과 사유를 공유하게 된다. 청량감을 느끼게 하는 신비한 색감이 감도는 이소영의 가상공간에서는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이 공존함이 느껴진다.
이문호_Innerspace_람다 프린트_100×145cm_2009

설치와 사진을 병행하여 공간을 분해하고 재현하여 다양한 시선에서 보여주는 작업을 하는 이문호의 작품은 늘 보아오던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관람자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인간의 눈은 의도적으로 시각적 착시나 오류를 유도해 만들어진 대상의 덫에 여지없이 걸려든다. 예를 들면, 실제 거울이 있는 공간이 아닌데 거울이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만들어진 공간을 거울로 인식하는 식이다. 이문호는 이러한 인간의 눈과 실제 혹은 인간의 눈과 기계의 눈 사이의 미묘한 차이와 어긋남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인식에 대한 균열을 드러낸다. 그가 담아내는 공간은 실제의 공간이 아닌 기억이나 상상 속의 공간으로 일상의 인공적 건축 공간이다. 이는 다시 한 번 사진을 통하여 추상적 공간으로 재현된다. 오브제를 통하여 만들어내는 구조자체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여 바로 주변에서 바라보던 사물과 같은 착시와 환상을 가져오지만 작가의 의도는 구조물이나 오브제를 통하여 주변의 여백처럼 느껴지는 공간과 사물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공간에 관람자의 기억과 상상력을 대입하게 한다.
이소영_키리코 광장 Chiricos square_C 프린트_220×200cm_2008

이소영과 이문호가 인공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면, 이혁준은 기억 속의 숲을 재 조합해 가상의 자연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얼핏 평범한 숲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는 원근법을 무시한 풀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고 느닷없이 오두막이나 트럭, 빨래, 동물 등이 등장한다. 사진이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작가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한 기억을 한 작품에 한번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숲 풍경 작업은 숲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대상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무심히 보아 넘기기 쉬운 숲을 구성하는 각각의 사물들을 조용히 찍고 관찰하면서, 숲의 기억과 개념을 시각화시키고 있다. 포토샵을 이용하여 밑그림이 완성되면 출력한 사진을 손으로 붙이고 그 위에는 바니쉬를 칠을 하는 수공방식이 가미된다. 이 때 사용하는 한 장 한 장의 사진은 구체적이지 않은 기억의 단편이다. 구체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숲이지만 이 숲은 그에게 옛 일을 회상하게 만들고, 추억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원_Ski Resort_종이에 수채_17×35cm_2010

윤정선, 이상원, 박상희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해석해 제시한다. 윤정선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대상은 우리에게 익숙한 동네의 골목 주택가 풍경이다. 이렇게 익숙한 풍경이 일부가 지워져 여백이 되거나 실제보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색들도 채워지면서 보다 담백한 인상으로 새롭게 펼쳐진다.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느림과 텅 비어 있음을 느끼게 되고, 이들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소소한 기억들에 잦아들게 된다.
강서경 Please treat me gentle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10cm_2011 강서경,Freshly Squeezed Structure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10cm_2011

이상원은 화창한 날씨의 강변 공원, 더운 여름날의 바닷가, 눈 쌓인 스키장 등 많은 사람들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장소를 찾아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을 복합적인 시점으로 포착해 드러낸다. 개개인의 표정이 숨겨진 인물들은, 넓은 시야로 포착된 풍경 속에서, 오히려 추상적인 요소로 다가온다. 또한 여기에 운동하는 사람들의 반복적인 동작과 군집을 이루고 있는 형상들이 화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담백한 인물을 보면서 관람자는 저마다 자신들의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회상하며 또 다른 휴식을 꿈꾸게 된다.
박상희, 아트플랫폼_캔버스 시트컷팅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박상희는 현대 도시 풍경 속 상징물 중에 하나인 간판의 재료인 플라스틱 시트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칼로 오려내는 방식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의 인상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화려한 밤, 화려한 인공의 빛으로 밝혀진 박상희의 도시 풍경 속에는 상이한 요소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음조가 있다. 풍경에는 시끄러운 빛으로 소란스러워 보이는 거리와 함께 그림자로 인해 생겨난 고요한 적막감이 존재한다. 빛과 그림자의 조합이 각기 다른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내며 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이야기들이 도시의 빛 덩어리 안에 녹아 들어 고유의 색깔이 형성된다. 박상희는 도시가 품고 있는 이질적인 조합을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법을 통해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그림 속 그곳은 서울의 한 곳일 수도 혹은 홍등이 밝혀진 홍콩의 모퉁이 이기도 하지만 그 어디에나 있는 누구라도 한번쯤 지나쳤을지도 모를 풍경이기도 하다. ● 마지막으로 강서경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공적이거나 자연적인 풍경이 아닌 작가의 마음의 상태를 바탕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몇 개의 이미지가 레이어로 겹쳐져 화면 속에는 칠하고 지워가는 과정을 통해 다중적인 공간을 만들어진다. 그림 안에는 구름이나 말 풍선 같은 형상이 떠도는데 이것은 꿈 꿀 수 있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기억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차분한 단색의 표면에 얼룩지거나 버무려지듯 섞인 이미지들은 마치 구름의 형상과 함께 흘러내린다. 구름은 항상 떠돌고 있으며 고정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고 순간 모였다 흩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구름의 형상 안에는 또 다른 형상들이 보여진다. 그 안에 살며시 숨어 있는 이미지들은 꿈꾸는 장면,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의 이미지이자 추억과 잔상의 풍경들의 집합체이다. 심상을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의 작업은 근작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 『어떤 풍경 Somewhere Place』안의 풍경은 실제 존재하는 장소이건 혹은 연출된 것이든 우리가 처한 환경이며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보고이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만한 굉장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거나 자극적인 요소들이 있다기보다는, 익숙한 듯 평범한 일상적 풍경 속에서 우리가 주시하지 않았거나 발견하지 못한 풍경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풍경에 내재된 아름다움과 의미가 새롭게 보이는 순간을 함께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카이스 갤러리





정치적 풍경 Political Landscape







이용환展 / LEEYONGHWAN / photography   2011_0617 ▶ 2011_0703 / 월요일 휴관





이용환_yong01_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에 리플렉시브 글라스_100×150cm_2010




초대일시 / 2011_0617_금요일_06:00pm

진실과 이행 "landscape between truth and transition"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자하미술관 ZAHA MUSEUM 서울 종로구 부암동 362-21번지 Tel. +82.2.395.3222 www.zahamuseum.com





페이크 세상을 위한 또 다른 역설 Another paradox for the fake world ● 영어의 make(만든다)와 take(취한다)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같은 말로 소통된다. 특히 현대미술에서 그림을 그린다(make a painting)와 사진을 찍는다(take a picture)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사실상 같은 개념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예술적 실행이 전통적인 그림의 행위로서 "만든다는 것 a make"으로부터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인 "취한다는 것 a take"으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화는 결국 전통적 재현(再現)미술이 오브제의 제시(提示)미술로 이동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말한다. ● 또한 take(취한다)와 fake(위조하다 혹은 꾸미다)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같은 개념으로 소통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술적 행위는 레데-메이드의 포착(take) 패러다임 보다 오히려 모조(fake) 패러다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예술 행위의 또 다른 진화로서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조(흉내)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조는 엄밀히 말해 물질적인 짝퉁(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패러디, 판박이, 하이브리드, 픽션, 연출, 조작-합성 등 원본 없는 혹은 원본과 복사본 사이를 대충 구별하는 개념적인 모조로서 시뮬라크르(simulacre)를 말한다.
이용환_yong02_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에 리플렉시브 글라스_100×150cm_2011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우리들의 삶은 예컨대 직장 출퇴근, 학교 수업, 집회 참석, 자동차 여행, 전화 예약, 백화점 쇼핑 등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문화적 활동에서 언제나 물리적 만남과 실행 즉 "주체에 의한 선택(take)"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식은 이데올로기의 집단 통제나 오로지 생산을 위해 강요된 삶의 무게로 선택과 기회가 전혀 없었던 과거 획일화 된 삶의 방식(make)과는 분명히 다른 패러다임이다.
이용환_yong03_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에 리플렉시브 글라스_100×150cm_2011

또한 오늘날 "주체에 의한 선택적인 삶(take)"은 슬며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패러다임 즉 "주체가 사라진 위장된 삶(fake)"으로 전이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온-라인 쇼핑, 인터넷 장터, 은행 자동이체, 브랜드화 된 상품, 아바타, 사이버 머니, 인정번호와 로그인, 트위터, 이-메일, 블로그 등 대부분의 삶의 방식들이 사이버화 되었고 개인적인 경험과는 무관한 일방적 선택과 미디어에 의한 맹목적 믿음이 보편화 되었다. 이는 곧 가상공간과 실제공간이 혼재되고 또 그만큼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사라지는 페이크(fake) 세상을 말한다. ● 이러한 페이크 세상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것은 단순히 사이버화 된 물질적인 모조물이 아니라, 집단 마녀사냥, 진짜로 둔갑된 가짜, 실제가 된 환상, 보편화된 정치인의 위선 등 오늘날 사이버 가상공간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형태의 사물화 현상(chosification)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집단의 획일적인 가치와 지나친 물질숭배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곧 디지털 무한 복제시대 기술 자본주의가 만든 일종의 정신착란으로 불가능한 유토피아의 맹목적 갈구임과 동시에 끝없는 부조리 연극이기도 하다.
이용환_yong04_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에 리플렉시브 글라스_100×150cm_2010

여기 작가 이용환이 보여주는 도시의 위장된 풍경들 예컨대 숲으로 위장된 광화문 공사장 칸막이, 주위 나무들과 교묘히 위장된 담벼락, 정원으로 위장된 고가다리 벽화 등은 바로 이러한 페이크 세상을 암시하는 가장 분명한 지표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풍경들은 우리가 거리를 지날 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조물임과 동시에 페이크 개념을 암시하는 분명한 시각적인 지시이기 때문이다.
이용환_yong05_피그먼트 프린트, 알루미늄에 리플렉시브 글라스_100×150cm_2011

그 점에 관해 작가는 그의 노트에서 "어느 날 집 앞 지하철 공사장의 가림막이 풍경사진으로 도배되었다. 도시 공간을 관통하는 긴 숲 행렬은 어느새 도시 공간 곳곳에 채워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가상공간은 현실 세계와 같이 공존하게 되었다. 난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의 일상이 되어 버린 지금 도시 공간 곳곳에 진짜 자연을 대신하여 가짜 자연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에 주목하였다."라고 언급한다. ● 이러한 위장된 풍경들은 언뜻 보기에 전통미술의 속임수 그림(trompe-l'oeil)처럼 두 장면이 병치되어 드러나는 미학적인 풍경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결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각적인 비유를 통한 개념적인 제스처 다시 말해 원본과 복사본의 모조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사진적 행위(acte photographique)에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실제와 모사를 교묘히 병치시켜 응시자에게 현실과 가상 사이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시각적 딜레마를 놓고 있는데, 이는 모순된 허상을 폭로하기 위해 아주 치밀히 계산된 작가의 의도적인 제스처로 볼 수 있다. ● 현실과 가상세계와는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주체가 사라진 위장된 일상에서 현실과 가상이 뒤섞여 있다. 거기서 실체 없는 실제, 공간 없는 공간, 실행 없는 실행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히려 친숙하게(?) 느껴지는 수많은 착각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의 가상이 아닌 바로 현실 그 자체로 나타난다. 결국 작가가 보여주는 도시의 위장된 풍경들은 고도(Godot)를 기다리는 희망의 빛도 아닌 그렇다고 플라톤 동굴 죄수들이 보는 어둠의 절망도 아닌 빛과 어둠, 희망과 좌절, 환희와 고통이 혼재된 암울한 페이크 세상의 또 다른 역설이 된다. ■ 이경률





번역된 현장 Translated Site







박성진_이정자_조이경展   2011_0617 ▶ 2011_0703 / 월요일 휴관





박성진_표선리_피그먼트 프린트_76×125cm_2010




초대일시 / 2011_0617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 박성진_이정자_조이경

기획 / 김재원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세 명의 이미지자〈image+子〉들은 현장에 머물던 장소와 시간의 회유回遊를 통해 그 상태를 자신의 언어에 가까운 각 매체로 번역해내고 있다. 그 번역된 현장은 이미지자 자신의 영역에 대한 현장성을 기록하는, 일상에서 관여되고 결합하는 모든 것들이 감각적인 현상의 시선 앞에서 자유로워지는 행위의 반복이라 하겠다. ● 회유回遊: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거나 놂. (네이버 국어사전) 일상의 관념적인 시선 앞에서 자유로워진 이미지자들. 자신의 시각이 유일한 행동반경이며 최대한의 방어벽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지혜롭고 라이브 하다. 그들의 자유로운 파편은 소속되지 않는 정신을 일궈낸다. 냄새나는, 소위 일상을 작당하는 것이 아닌 놀음이다. 유일한 놀이이며 유일한 낙이며 유일한 탈출구이며 잔인한 삶의 방식이다.
박성진_창신동_피그먼트 프린트_125×76cm_2010
박성진_목포_피그먼트 프린트_76×125cm_2010

SLOW WALK ● 박성진 이미지자는 현장을 걸으며 시간의 연속성, 장소의 진보, 이미 퇴색된 삶의 구체적인 주변을 이미지자의 시각을 통해 번역된 찰나의 빛으로 표현한다. 그 빛은 찰나의 순간들을 자신만의 회화적인 색감으로 잡아낸다. 늘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 불현듯 눈에 들어온 것에서 빛을 이용한 다양한 방식의 구성과 이야기 전개에 맞는 색감, 질감, 모든 것들을 포획해내고 있다. 빛과 공기와 사람들, 모든 산물의 구성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현장 안에서의 상황을 기록과 전달하는 것은 이미지자의 들숨 호흡으로 받아들여 날숨 호흡으로 뱉어내는, 이미지자가 바라본 것에 대한 관람자의 반응에 반응하는 이미지자의 상황결속에 관한 내러티브이다.
이정자_Twin Song_캔버스에 유채_91×116cm_2011
이정자_꾀꼬리 합창단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08
이정자_목이 늘어나는 거북이_캔버스에 유채_182×182cm_2008

구성의 재구성 ● 이정자 이미지자 회화의 중심에는 일상의 연속적인 관계망에서 숙련된 익숙함과 무감각이 재구성되어 새로운 관계의 낯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 관계망에 포함된 현장의 현실감은 재현과 구성의 지점에서 그 힘이 가감되며, 이미지자의 역할이 크게 관여된 재현과 구성의 내러티브에 또다시 새롭게 관계돼 반복 전개될 재구성의 화면이라 하겠다. 이러한 구성과 재구성의 반복적인 접촉관계는 새로운 반응과 연계를 통해서 현실의 번역이라는 국면에 있게 된다. 그 탐구와 번역의 현장은 눈을 통한 탐지(eye scanning), 즉 인지한다(noticing)는 것의 구성력과 새로운 서사의 구성력이 접촉해내는 재구성의 회화이다.
조이경_Still Life_3채널 비디오-콜라쥬 설치_00:10:00_2008
조이경_Still Life #6_C 프린트_60×40cm_2010
조이경_Still Life #1_C 프린트_60×40cm_2010

변주의 시공간 ● 조이경 이미지자는 ①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와 사물의 변질을 감지하여 열린 시공간의 시각적 패러다임을 화면에 담아낸다. 이 변화의 기록은 자신의 감성이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현장의 기록인 상태이다. ②현장의 기록으로 감지된 시각적 패러다임을 현재 시각의 흐름인 자신의 공간으로 이주시켜 영사하는데, 새로운 시공간의 상황과 자신의 감성을 결합하는 순간을 재촬영하는 것이다. ③재촬영된 영상은 여러 겹의 시공간으로 결합한 채, 결국 각각의 시공간에 대한 현장의 기록을 가지며, 새로운 시공간과 인접한 상황을 이웃하는 콜라주 형식의 영사로 최종적인 상황을 갖게 된다. ⑤아니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날 때마다 다른 모습의 패러다임을 선사하게 된다. 선택 내지는 강제된 공간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이미지자의 ⑥촬영과 ⑦영사, ⑧재촬영, ⑨영사, ⑩재촬영의 반복적인 기록은 상황과 상황이 연결되는 다양한 기억의 변주로 시선을 따라 흐르게 되는 시공간의 모호한 아름다움을 갖게 한다. ⑪⑫⑬⑭...시공간을 넘어선 이미지자와 반 이미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퍼포먼스라고 해도 무관하다. ■ 김재원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







홍일화展 / HONGILHWA / 洪逸和 / painting   2011_0617 ▶ 2011_0730 / 일,공휴일 휴관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20080221f | 홍일화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11_0617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노이즈 마케팅 ● 노이즈 마케팅은 단지 상품홍보만을 위해 고의적으로 각종 이슈를 만들어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 시키는 마케팅 기법으로 특히 단기간에 최대한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상품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구설수를 퍼트려 소비자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더 이상 선한 이미지는 판매욕구를 부추기지 못 하게 된 것이다. 대중에게 더 많이 기억된 이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과정은 지워진 채 결과, 즉 이름만이 남기에 시청자의 머리에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진다. 스캔들로 가장 파격적인 방법이 노출과 유출이다. 이제는 웬만한 노출엔 대중들은 자극 받지 못한다. 동영상 유출 또한 마찬가지다. 넘쳐나는 노출 이미지 속에서 두드러지는 홍보 마케팅은 소위 '텔레토비 학습'이다. 어차피 충격을 주지 못 할 바에는 반복을 하면 된다. 무한반복으로 감각을 무뎌지게 하며 변화되는 새로운 노출 이미지로 Sexy Symbol을 만들면 지저분한 이미지는 사라진 채 그녀는 자연스레 매혹적인 스타로 둔갑해져 있는다. Marylin Monroe, Brigitte Bardot 와 같이 전설로 남게 된다. 항상 처음이 힘들다. 하지만 일단 저지르고 나면 그 다음은 수월해진다. 왜냐면 그 누군가는 최초로 기억되고 이미 과거에 있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으로 단순하며 간사하다. 쉽게 흥분하며 너무나 쉽게 잊어 버린다. 그러기에 앞으로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간다. 충분히 잔인하고 야하고 충격적인 이미지의 홍수에 살고 있지만 더 !, 더 !, 더 !, 만을 외치기 때문이다.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노출증 ● 자신의 은밀한 신체 일부를 노출 또는 과시하여 상대방에게 충격이나 공포반응을 일으켜 자신의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상대방이 놀라지 않거나 무시하면 그 사람의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한다. 뻘쭘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성적 경험이 없을 것 같은 청소년들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마도 노약자들을 상대로 노출을 시도하려는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깐 말이다.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관음증 ● 타인의 성생활이나 비공개 되는 은밀한 부분을 몰래 엿봄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것을 말한다. 성인 비디오 물이나 인터넷에 유포되어 있는 야한동영상으로는 성적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감춘 상황에서 직접 본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비로소 관음증은 성립된다. 타인과의 공유를 거부하는 습성이다.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습성이기도 하다. 노출증과 관음증 이 두 가지 경우는 인간이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본능 일 것이다. 단지 얼마나 억제를 할 수 있느냐가 동물과 사람을 구분 짓게 하는 기준점이다. 노출증환자와 관음증환자를 짝짓기를 시켜주면 과연 문제는 해결될까? 본능을 치료한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성교육은 단지 억제할 수 없는 본능을 좀 더 쉽게 자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성에 눈을 뜨며 가장 충만한 성욕을 자랑하는 시기는 청소년기. 소위 주변인, 질풍노동의 시기이다. 지금은 휴대폰이나 소형카메라로 도둑촬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과거에는 손거울을 소지하고 다니는 남학생들이 많이 있었다. 여자 선생님들의 치마 속을 보기 위함이었다. 행여 여자교생선생님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마치 발정 난 개처럼 미친 듯이 들이댄다. 어느 날 여자수학선생님이 계단을 올라가는 틈을 타 한 남학생이 선생님 치마 속을 보려 하다 걸린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주 냉정하게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엄마 것과 똑같으니, 너네 엄마에게 보여 달라고 해!'하자 학생은 허겁지겁 도망갔고 그 이후로 어떤 학생도 그 수학선생님 치마 속을 보려 시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여교생 선생님의 경우는 사뭇 다른 결과를 불러왔다. 시험결과 답안지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한 남학생이 거울로 선생님 치마 속을 보려 하다 발칵 되었다. 그러자 여교생은 당황하며 울기 시작했다. 이에 중학생들은 선생님을 달래준다는 명분 하에 몰려 들었고 그 틈을 타 더 많은 남학생들이 치마 속을 보고자 몰려 들었다. 그 다음날부터 학교에 소문이 퍼지고 남학생들은 점점 더 여교생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여교생의 당황하는 모습을 알게 된 학생들은 노출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교생 실습이 끝나는 날까지... 상대방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도착증 환자들에 대처하는 반응은 냉정함이라 한다. 하지만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리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고통의 수위를... 더 재미 있는 것은 사회는 여성을 탓한다. 의상 불량이 이러한 문제들을 야기시켰다고 치부시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남성들의 성욕에 의해 사회문제가 발생한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남존 여비 사상이 강하고 남성이 권력을 장악 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의 우월권을 내세워 자기 방어에 돌입한다. 암암리에 결론은 원인을 제공한 여성이 잘못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문제를 떠나 사회 전반의 깔린 모순점이다. 니플게이트 사건이 의상 분량 판결로 마무리 지어지긴 했지만 일상 생활을 스타들의 노이즈 마케팅에 비추어 말할 수 는 없다. 행여 의상불량으로 인한 성범죄 사건이 일어 났다고 하여 여자가 남자를 꼬신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아름다운 몸에 매료가 되는 노출 미학은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신체부위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노출증 또한 쉽게 접할 수 있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본능의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기보다는 올바른 성문화를 정착 시키기 위한 성교육 제도가 제일 먼저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좀 더 개방적이고 솔직한, 때론 직설적이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권리이고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무분별하게 떠도는 야동을 통해 습득하는 잘못된 성교육보다는 학교나 다른 공공기관들로부터 행해지는 의무교육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기이다.
홍일화_Slip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훔쳐보기 ● 1998년에 '짐 캐리' 주연의 'Truman Show' 영화가 문뜩 생각 난다. 영화 속의 주인공 트루먼 주변의 모든 이들은 연기자다. 거대한 스튜디오 내에서 트루먼은 일거수일투족 감시 속에서 성장한다. 모든 일상 생활은 철저한 감시와 통제 그리고 지시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도입부에 그의 절친한 친구인 멀론이 "모든 게 진짜이고 사실입니다. 다만 약간의 조절 (Control)만 있을 뿐이죠." 여기에서의 'control'은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을 뜻하며 사회의 'control'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상을 일컫는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다른 사람의 인생 엿보기'이다. 섬뜩한 생각이 들면서도 재미있다. 엿보기의 진수는 또 하나의 리얼리티 쇼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2001년 4월 26일부터 프랑스 민영방송 M6에서 방영된 11명의 트루먼 후보에 의해 구성된 'Loft story'이다. 트루먼 쇼가 한 남자의 인생사를 보여주었다면 로프트 스토리는 11명 남녀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하겠다. 20대의 청춘 남녀가 수백 대의 카메라가 설치된 대형 스튜디오 안에서 70일 동안의 사생활을 대중에게 선보인다. '쇼'라는 전제 속에서 출발한 프로이지만 어느덧 500만 명의 시청자들은 엿보기에 열광, 또 열광하게 된다. 오늘날의 일상들은 과거에 영화이거나 리얼리티 쇼라 일컫는 프로그램의 현실화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안을 명분으로 설치된 CCTV 카메라들, UCC동영상을 위해 동분서주로 뛰어다니는 아마추어 파파라치들, 몰래 카메라와 도둑 촬영을 서슴지 않고 감행하는 관음증 환자들 등 이 모든 것들이 도심의 벽을 투명화 시키고 있다. 유리로 만들어진 스튜디오에 분양 받아 살고 있는 셈이다. 개개인이 트루먼이 되고 개개인이 트루먼을 보고 흥분하는 시청자가 되는 혼돈의 사회에서 사생활 보호를 외치며 살아가는 모습이 눈가를 찌푸리게 한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처럼 부끄러움을 모른 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너무나도 간단히 해결 될 수도 있는 문제인지 모른다. 그래서인가, 뱀의 사과가 인류의 역사를 뒤집어 놓을 정도로 중요한 이유가? 어쩌면 누드족들이 자연주의를 외치는 이유가 이런 사회병폐의 답을 제시하려는 줄도 모른다. 무조건적인 구속으로 억압하는 것보다는 되던 안되던 간에 다양하게 시도하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인권을 보장해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그것이 가능할까?' 보다 '가능 못 할게 뭐 있어?' 식의 가능한 모든 변화를 통해 살기 편한 세상보다 좋은 세상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홍일화
홍일화_Elles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175×70cm_2011 홍일화_Elles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175×70cm_2011 홍일화_Elles시리즈_캔버스에 유채_175×70cm_2011




갤러리세줄에서는 다가오는 2011년 6월 17일(금)부터 7월 30일(토)까지 홍일화작가의 열네 번째 개인전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展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홍일화작가는 한국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프랑스로 건너가 거주하면서 국내와 유럽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현재, 프랑스 렌느시에서 제공하는 영구무상의 아뜰리에에서 작품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본 전시에는 갤러리 전시장 1층과 2층을 여성의 신체 일부를 고의적으로 노출한 작품으로 가득 채워 "노이즈 마케팅"이란 주제아래 인간의 잠재되어있는 심리를 이슈화하여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합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난 선입관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감성을 작가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솔직하고 자유롭게 작품을 통하여 표현하였습니다. 본 전시에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


   


 



한국의 그림_사진을 읽다
Korean Painting
<한국의 그림_사진을 그리다 - 갤러리현대 16번지갤러리와 연계전시


전시제목 한국의 그림_사진을 읽다 Korean Painting
공동 주최 및 주관 갤러리팩토리
전시기획 강석호, 김인선
전시작가 강석호, 김보민, 김수영, 노충현, 박영길
전시일정 2011년 6월 23일 - 7월 17일

아티스트 토크 2011년 6월 23일 (목) 오후4시
전시기획자 2인과 전시참여작가 5인 참석
주제 : “회화 속의 리얼리티와 사진 속의 리얼리티”
작가들이 사용하는 리얼리티라는 언어는 현대 미술에서는 가장 다양한 개념을 가지는 단어이다.
각 작가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개념을 들어보고, 자신들이 사용하는 사진에서 발견되는 리얼리티의 의미는 무엇이며,
회화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프닝 2011년 6월 23일 (목) 오후6시
시간 화-일 오전 11시-오후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갤러리팩토리(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27-3)
전시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개요
<한국의 그림_사진을 읽다 Korean Painting>전은 매년 특정한 공통적 작업 태도를 가진 한국회화작가들을 묶어서 작가 및 큐레이터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한국적 특색의 현대회화에 대하여 연구해 보는 전시이다.
2011년도에는 사진을 매체로 사용하며 이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다섯명의 작가 강석호, 김보민, 김수영, 노충현, 박영길이 참여하게 되며 이들이 작품 제작을 위하여 어떤 방식으로 풍경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전시와 함께 아카이브가 만들어진다.  
이들 작가의 회화 주제는 ‘풍경’이다. ‘풍경’은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정 공간과 특정 부분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강석호의 작품에서 보이는 신체의 부분도 우리 주변의 가장 가까운 환경으로 취급하며 김수영이 드리는 건물의 일부분도 풍경화의 범주에 둔다.
풍경은 작가들이 드로잉과 사진을 이용하여 기록된다. 즉석에서 기록되는 역할의 사진은 이후 작업실에서 바라보는 그때 당시의 풍격을 회상하게 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이때 작가들은 자신이 실제로 본 것과 사진에 찍힌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발견하고
이 간극을 자신의 상상과 감성으로 메꾸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실경 산수가 교묘하게 작가의 의지와 결합된 진경 상수화로 변화한 작가만의 풍경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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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으로 가득한 세상 The world of spirits



김명곤展 / KIMMYEONGGON / 金明坤 / painting 2011_0622 ▶ 2011_0628



김명곤_꿈을 싣고 가는 자동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명곤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22_수요일_05:00pm

기획/후원 / 아트플랜트_BC카드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3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생명으로 가득한 세상 The World of Spirits ● 김명곤은 2008년 이후 자동차나 자전거, 오토바이, 요트 등의 오브제를 식물 이미지와 중첩시키는 비현실적 풍경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회화가 지향하는 지점은 이미 존재하는 실재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실재 세계를 낯설게 하고 이를 재고하게 하는 일종의 메타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김명곤의 회화가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음은 그의 회화가 지지하고 있는 데페이즈망 기법, 즉 자동차 등의 오브제 위에 꽃과 풀과 같은 식물 이미지가 오버랩 된 독특한 이중 구조에 있다. 김명곤의 회화에서 식물 이미지는 의외의 장소에 놓여져 섬광을 발휘하는데, 무생물과 생물의 결합이라는 이러한 이종 교배의 회화적 코드는 초현실주의적인 소격효과를 강화하면서 재현으로서의 평범한 리얼리티를 전율의 아름다움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김명곤_꿈을 싣고 가는 자동차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7cm_2011
김명곤_세상을 향하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2cm_2011

그의 회화가 사진의 리얼리티적 속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이를 지우는 것은 회화를 위해 작가가 인용한 사진 이미지의 특성에 있다. 작가가 미디어를 통해 획득한, 혹은 직접 촬영한 풍경 사진들은 회화의 일차적 자료가 되는데, 이들은 모두 작가의 주관적 시점에 의해 조합과 재배열의 과정을 거친다. 특히 특정 공간의 지정학적 위치들이 화면 위로 부상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작가는 사진 내에서 의도적으로 여러 시공간을 중첩시킨다. 로마, 파리, 도쿄와 같은 특정 공간의 정보들을 삭제하고 서로 다른 시공간을 봉합하여 결국은 의미론적으로 중성적인 영역이 구축되도록 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립성 속에 우리는 그의 회화가 실재를 모방하고 반영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즉 특정 내러티브를 의미화하는 화면의 르포르타주적 속성은 그의 회화에서 상실된다.
김명곤_세상을 향하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1×162cm_2011
김명곤_세상을 향하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30cm_2011

의미론적으로 중립적인 경계를 구축하는 사진 이미지들의 봉합, 스피드를 연상시키는 오브제와 식물이미지의 중첩 등은 그의 회화가 리얼리티의 파편화, 일종의 몽타주의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가 또 다른 텍스트에 의해 중첩할 때 총체성과 완결성의 외피를 뚫고 생기는 이미지의 알레고리화를 그의 회화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자동차, 자전거, 요트 등이 가지는 사물의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기 보다는 기존 사물들의 맥락을 데페이즈망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일상적 의미들이 수정되는 일련의 방식에 방점을 둔다. 또한 이미지의 병치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사물들의 여러 맥락들을 포착함으로써 의미의 중층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
김명곤_세상을 향하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1cm_2011

그렇다면 김명곤의 회화에서 알레고리의 변용은 이미지들의 상호배합 속에서도 찾아지는 것인데, 자동차를 그리고 그 위에 식물을 올려놓거나, 요트를 타는 역동적인 장면을 그리고 곳곳에 꽃의 이미지를 개입시키는 것은 생명을 무생물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무활력적인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함을 암시한다. 하나의 이미지가 의미를 담지하는 일종의 언어가 되고 상이한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생명에 관한 관심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김명곤_세상을 향하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2×227cm_2011

작가가 오랜 기간 자신의 회화를 통해 발언하고자 한 것은 바로 '생명'이다. 자체로 발광하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과 고뇌의 터널을 지나온 생명이다. 죽음이라는 대립항과 상호침투하고 서로 의미를 교환하면서 강화된 생에 대한 개념은 사회와 삶에 대한 비판을 넘어 생에 탄력을 주는 긍정의 에너지로 향하게 하였다. 이러한 낙관주의는 색채에서도 감지되는데, 면으로 분할되어 보색의 대비를 이루는 인상주의적 색채는 근거리에서 일견 추상화된 평면으로 나타나지만 원거리에서는 입체감을 되살리면서 활기와 리듬을 고양시킨다. 「꿈을 싣고 가는 자동차」, 「세상을 향하여」, 「질주」 등의 제목이 의미화 하듯, 예술과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는 삶에 대한 긍정과 예찬이다. 그는 문명에 대한 비관주의에 동조하지 않으며 추상을 통해 초월적인 세계나 내면의 문제에 안착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역동적인 도시 이미지, 자동차와 같이 동력을 잠재하고 있는 사물에 주목하고 꽃과 식물을 올려놓으면서 생명 에너지의 복원을 지향하는 것이다. 마티스의 「생의 기쁨」과도 같이 미래지향적인 유토피아적 세계관이 다분히 그의 작업에서 추적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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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形 (DOLL)



조수경展 / JOSOOKYUNG / 趙水京 / photography 2011_0622 ▶ 2011_0628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93×140cm_2010


초대일시 / 2011_062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그 동안 많은 예술가들이 자화상을 그려내었다. 고흐는 세상과 소통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하기 위하여 귀를 칭칭 감은 모습의 자화상을 그렸다. 자아를 안다는 것은 예술가뿐만이 아니라 고요한 강가에 정적처럼 인간이 평안해지기 위한 자아의식에 대한 소통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다. ● 작가는 어느 날 자기 카메라 앞에 선 자신 안에서 평소와 다른 자아를 발견한다. 사진 안에 존재하는 자아를 상상하며 렌즈를 응시하는 또 다른 자아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은 상념을 만들어 내를 이루는 것이다. 익숙해진 것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그녀는 사정없이 벗겨져 투영되어버린 또 다른 모습에 낯설었던 자아를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부둥켜 안고자 한다.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63×90cm_2010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93×140cm_2010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93×140cm_2010

자아의식에 대한 소통의 바램은 젊음에 대한 연민의 기억과 상실의 아픔을 자기 거울을 통해 비친 또 다른 자아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된다. 구체관절 인형으로 분신화한 것이다. ● 또 다른 분신을 만들어 가는 인고의 작업과정을 통해 자괴적으로 표현되어지는 자아에 대하여 더욱 낯설고 경이적인 생각들이 교차하게 되지만 작가는 분신화한 인형을 다시 사진 안에 전이시키는 작업을 통하여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지문처럼 현실과 마주하며 불완전한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갖게 된다. ● 작가는 인형작업과 공유된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사유적 공간의 은신처에 남아있는 여유로움을 탐닉하고 있다.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보여지는 표정들은 굳이 잘 보이려 하기 보다는 내면에 숨겨진 시선을 과감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63×90cm_2011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90×63cm_2011
조수경_人形_Archival Pigment 프린트_90×63cm_2011

이번에 보여지는 작품들은 은유적이기 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작업이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있을 법한 본능적 자아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다. 불완전한 자아에 대한 접근 방법도 시선을 끈다. 드러냄을 통하여 숨기려 하지 않는 당당함이 완전함으로 보여지려 하는 이중적 자아에 대한 인간의 속성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 아무쪼록 이번 작업을 통하여 보여지는 거울 앞에 선 자아로부터 보여지지 않는 자아의 거울 앞에 당당하게 홀로 선 그녀의 자아에 대한 연민이 훈훈한 사랑으로 꽃피워지길 기대해본다. ■ 양재문




뒷담화



RUNMEI(이윤미)_최경운_신윤선展 2011_0622 ▶ 2011_0627






초대일시 / 2011_062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5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전시『뒷ː담화』는 우리말 뒤(後)와 담화(談話)가 합쳐져 생긴 합성어로"대상이 듣지 못하는 뒤에서 수군데는 이야기"라는 주제를 세 명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관점과 다른 생각으로 재밌게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넌센스 같은 전시 입니다. 저희 세 작가의 그림 속에 보여주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뒷담의 Gossip이 모해(模楷)인지 모해(謀害)함인지, 주체인지 혹은 객체인지, 이 상대적 입장 관계가 과연 올바로 성립되는 것인지에 대한 고찰과 함께, 꼬리물기 같은 술래잡기의 순환과정과 같이 "나는 너를 보면서 나를 찾아가고 너는 나를 보면서 너를 찾아가는 즐거운 상상의 뒷이야기"에 모두가 공감하며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전시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 뒷담화
RuN Mei(이윤미)_때밀러와요- Speed Demon_천에 수묵채색_130×97cm_2011
RuN Mei(이윤미)_때밀러와요- Vain_천에 수묵채색_130×97cm_2011
RuN Mei(이윤미)_때밀러와요- Shopaholic_천에 수묵채색_97×130cm_2011


나의 작품은 동양화와 서양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illustration), 인간의 개인성(privacy)과 사회성(community), 이 3가지 축을 중심으로 한 양극의 메시지들을 피륙을 짜는 베틀처럼 끊임없이 교차하는 융합 방식을 토대로 한다. ● 나는 동양화의 기법과 원리를 사용하면서도 서양화의 기법을 병행하는 순수미술과 응용미술(illustration)의 중간지점을 좋아하는데 이는 아마도 구렁이 담 넘듯 동·서양을 아우르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큰 포부에서 비롯된 시작이었으며, 이제는 습관적 화풍이 된 때문이기도 하다. ● 원거리에서의 희극이 근거리에서 봤을 땐 비극이었던 것처럼, 겉에서 보여지는 우리에 포장된 외면적 모습은 어쩌면 우리 내면의 갈등과 공허함으로부터 오는 괴리감을 좀 더 과장된 안정감으로 뒤바꿔 과시하려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심리에서 오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나는 이런 뮤즈를 그림 안에 상징적 장치로 놓아, 화면에 투영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소비지향적 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쩔어 그것들에 철저히 지배되어 지고 뿌리 깊게 박혀있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뒷담화 같은 그림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여 공감하고자 하는 것이 이번 작품에 의도이다. ● 또한 목욕이라는 소재인 때를 미는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정갈함과 긍정의 에너지는 이런 우리의 정신적 공허함과 방황을 인간 본연의 순수한 내면적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얻어지는 따뜻함, 건강함, 신선함, 치유감, 청결함, 행복감 등 의 자아성찰의 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함이다.. ■ RuN Mei(이윤미)

최경운_귀를 막고- hope_캔버스에 유채_160×130cm_2011


사람들은 습관처럼 남의 얘기를 한다. 그들은 그것이 '대화'라고 쉽게 말하지만 정확하게는 '뒷담'이다. 뒷담을 듣는 행위는 소속감이라는 야릇한 안락함을 선물하는데 뒷담에 함께 동요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서로 간의 친밀감까지 생긴다. 결코 선하지 않은 친밀감을 만드는 뒷담화 하는 행위는 가벼운 인간관계쯤으로 여겨진다. ● 뒷담에는 피해자가 있다. 사람들이 끝없는 지껄이는 뒷담에 쓰러지는 사람, 그들은 사람들의 가벼운 지껄임에 더 이상 날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어디로 날아야 할지 판단력을 잃고 더 이상 능동적일 수 없게 된다. 그저 수동적으로 가만히 앉아 견디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다. ● 나는 뒷담이 이루어지는 행위 묘사를 통해 뒷담화 하는 사람들의 가벼운 비웃음과 당하는 사람의 몸부림, 그 씁쓸한 관계를 담아낸다. ■ 최경운

최경운_웅크리고- hope_캔버스에 유채_160×130cm_2011


내 작업의 메시지는 희망이다. 나는 여행하는 마음으로 내가 경험한 솔직한 희망 이야기를 그림에 담고 싶다. 지금은 억압받는 현실에서도 희망을 꿈꾸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 그림은 거울처럼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다. 내가 슬플 때는 아무리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색은 어두워지고 그림 속 인물들(피사체)의 표정은 쓸쓸해진다. 내 마음이 언제쯤 평화로워질지, 그래서 언제쯤 아주 밝고 경쾌한 붓질로 희망을 그리게 될지 나조차도 기대된다. ■ 최경운

신윤선_그럼에도 불구하고Ⅳ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1
신윤선_그럼에도 불구하고Ⅴ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1


그림으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싶다. 있는 그대로 너와 나의 세상사는 이야기 그 안에서 깨닫게 되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자연스럽게 그림에 녹아든다. ● 어떤 방식으로, 어떤 형태의 그림을 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표현 한다는 것, 내 몸 전체에 퍼져있는 뭔가를 밖으로 끌어내어 나타낸다는 것 자체가 나를 설레게 한다. ● 이번 전시의 주제도 너와 나의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뒷담화 하는 사람과 뒷담화 당하는 사람이 각자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든지 누구나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접하게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종이컵 전화기로 뒷담화를 한다. 그것은 비밀스런 뒷담화를 완성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상징이다. 사람들은 마음 한 구석에 종이컵 전화기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닐까? ■ 신윤선







눈부신 윤리학 Splendid Ethics


2011_0624 ▶ 2011_0721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624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리천 Li Chen_펑정지에 Feng Zhengjie 쫑삐아오 Zhong Biao_인짜오양 Yin Zhaoyang_관용 Guan Yong

관람시간 / 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인터알리아 아트컴퍼니 INTERALIA ART COMPANY 서울 강남구 삼성동 147-17번지 레베쌍트빌딩 B1 Tel. +82.2.3479.0114 www.interalia.co.kr


눈부신 윤리학 ● 화사한 인공정원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다음과 같은 달콤한 논리에 고착되고 있다. '새로움은 욕망을 생산하고, 그 욕망은 이윤을 생산하며, 이것은 아름답도다!'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점철되어 있는 이 한 문장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면, 그 새록새록 한 의미들이 기생충이 알을 까듯이 수십 만 가지의 행태로 생활 속에 침투했음을 알 수 있을 듯하다. ● 지속되고 있는 세계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롭다. 이는 우리에게 현재 무슨 일이 그곳에서 일어나는 지를 분석하게 만들기 때문일지 모른다. (뭐 이런 변태 같은 이야기를 하느냐는 혹자도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발상이 괴물처럼 느껴지긴 마찬가지이다.) 아시다시피 세계화의 영향하에 급변하는 문화적 삶은 근대 공화국의 많은 특징 중 하나이다. 현재 중국은 가파른 경제발달 속에서 독특한 형식의 동시대 예술, 건축 그리고 시각예술과 관계된 도시문화가 여러 가지 형태로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들은 그들의 혼혈적 특성, 즉 중국의 전통, 50년간의 공산주의 체제, 서구자본주의 유입 그리고 동양사상의 혼합으로 현재 우리에게 많은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Feng Zhengjie_Portrait 2009 no.2_bronze with car oil_50×60×35cm_2009
Feng Zhengjie_Portrait B Series 2010 no.5_캔버스에 유채_96×96cm_2010

중국에서 당대예술은 80년대 중반까지 감상할 만한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는 예술이 엄격한 통제와 제한된 감시체제하에서 생산되어야 했기 때문인데, 그것은 오직 해방, 가짜와 진짜, 정치적인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상황이 여기에 한 몫 차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의 예술은 이후 체제에 대한 반감과 막을 수 없는 개방화의 물결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른바, 정치적 팝 운동과 냉소적 사실주의 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 정치적 팝은 공식적인 중국 공산당의 시각 풍에 근거한 화파인데, 그것은 서구산업의 광고 로고와 상징적 이미지를 혼합하고 반복하여, 중국 공산당정권을 풍자하면서 이전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이념적 마케팅과 대량생산과 같은 공식적 시각 풍의 가면을 벗게 만들었다. 여튼, 정치적 팝의 발달은 거의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선언(정치, 경제 개혁)에 따른 자유 소비에트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할 듯하다. 그리고 중국 당대예술에서 빠지면 않되는 또 다른 하나는 냉소적 사실주의이다. 이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냉소적 사실주의는 당시 중국사회에서 발생되었던 인간존엄성의 억압에 대한 소극적(?)반기로 출현한 것으로, 현실사회에서 능동적인 주체자로 살수 없는 무기력한 중국인의 삶을 냉소적 시선으로 풍자한 것이다.
Guan Yong_Two Hearts_캔버스에 유채_130×160cm×2_2011
Guan Yong_Two sides of the Earth happened same thing No.1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9

1990년대 초기 많은 젊은 예술가들은 의무적으로 자행되었던 영웅적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이념에 반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이는 자연스레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신의 신체에 가학적인 집중으로 보였는데, 이러한 현상은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들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의 신체를 고문하면서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행하였다. 이러한 많은 퍼포먼스 예술가들은 작품에서 그 당시 중국예술이 상업화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반기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이에 1990년대 중반 첸쩐(Chen Zhen), 황용핑(Huang Yongping)과 같은 예술가들은 중국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은 동시대 중국예술의 또 다른 개인적 형식으로 작업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전통적인 중국문화의 선 이념과 서구 설치예술의 혼종이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이리하여 이러한 3가지 운동은 서구에서 중국 당대예술의 돌파구의 근거가 되면서, 이후 이들의 작품은 전세계에서 전시되고, 폭넓은 관심과 존중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상업적 성공의 발판이 되었다. ●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2006년 새로운 세대의 중국예술가들의 눈에 완전히 지나가 버린 것이 되었다. 첫째로, 정치적 팝을 태동시켰던 당시 시대의 사회 문화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고, 그리하여 여기서 파생된 시각적 양식 역시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 못하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눈에 문화혁명 이후 자행되었던 엄격한 사회 통재의 반감으로 출현한 두 번째 '운동'인 냉소적 사실주의 역시 그들에게 현실감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예술가의 이주로 기원된 세 번째 '운동'인 역사적, 전통적 형식의 중국문화로 되돌아가는 것은 지나치게 낭만적이거나 현실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2010년부터 중국에서 다시 중국문화의 우수성과 자국의 경쟁력으로 세 번째 운동은 다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Li Chen_Riding the Wind_브론즈_88×122×71cm_2007
Li Chen_Soaring Dragon_브론즈_139×48×33.5cm_2010

근대 중국에 있어 주요 논지는 물론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도시환경의 사회적, 지리적 그리고 인구학적인 현실이며, 여기서 파생되고 있는 이러한 사회현상들이 또한 중국 당대예술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소 과장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중국사회에서 최대의 관건은 새로운 것의 수용과 그것에 관한 방향설정에 핵심적 가치를 두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실용주의 경제가 동튼 이후 중국인민들은 명확히 제시된 삶의 지침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더 이상 정치적 이념에 대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었다. 현재 시장계제, 자본주의, 물질주의 진보 그리고 상업주의처럼 말이다. 중국인들의 삶은 현재 매일매일 재빠르게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역시 마찬가지며, 그들은 이러한 즉각적인 동시대의 현실을 그들 작품의 시작점으로 잡는다. 작품은 종종 '가치'에 관한 조사 혹은 설치, 행위예술, 비디오, 사진과 같은 형식으로 변장하여 이러한 현실 의미의 표본화가 된다.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의 세계와 연결을 설립하는 방법에 관한 문제를 웅변한다. 동시에 초기 반 주류의 예술가들은 대체로 사회와 관계된 개체와 개인에 관심을 이동시키며 또한 즉각적으로 그들 환경에서 변화를 감지한다. ● 다시 돌아가보자. 변화는 좋은 것이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도시환경의 변화는 그들에게 주기적으로 놓치는 것과 새로이 다가오는 것이라는 위대한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이러한 상황은 모두에게 에너지, 불확정성, 그리고 공포스런 미 즉 변화 그 자체의 불확정성을 보여주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대예술이 최고의 주제를 발견한 것은 바로 새로운 형식의 출현에 있는 것이지, 그것들의 확정된 결과의 묘사(기술)나 교체되어 환기를 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향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재빠른 보폭으로 움직이는 변화는 중국의 최대 거대도시보다 더 광범위한 규모로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매년 이전의 어떤 곳보다 더 과거와 연결고리가 없는 더 크고 낯선 또 다른 새로운 도시들의 출현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과거의 라스베가스 건 현재의 두바이 건 간에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곳도 중국처럼 이렇게 확장되고 널리 공포된, 즉 불과 몇 년 전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인공적인 아레나에서 매우 빠르게 굳어진, 기술발달과 경제성장의 형식을 가진 적은 없었다. 이러한 것은 발전을 뒤좇는 고정된 범위의 도시환경에서뿐만 아니라, 보통 디지털로 진행되고 배포되는 덧없는 미디어 영역에서도 진실로 드러났다.
Yin Zhaoyang_Diffusion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8
Yin Zhaoyang_White Square_캔버스에 유채_200×200cm_2007

중국예술가들과 수많은 블로거들은 이러한 집중적이며 거대한 변화상태에 활기차게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기술을 품격과 발자취를 남기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수용했으며, 당대 중국에 자리한 특정한 종류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등정에 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정확한 반영을 배제한 체 거주하고 있는 현실과 평행을 유지하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거대한 변화의 상태에 대하여 혹은 그것을 이용하여 예술을 만들고 있으며, 끊임없는 변화와 불확정성, 종종 깜짝 놀랄만한 이미지들에서 시각적인 새로움과 파괴적인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비춰 볼 수 있는 하나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변화는 서구사회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범람하고 있는 중국보다 더 극단적이거나 복잡하지는 않은 듯하다. ● 그래서 중국 최고의 예술가들과 다른 모든 시각예술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그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에 대한 명확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Zhong Biao_Possibility_캔버스에 유채_215×330cm_2008

현 중국 사회와 문화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체 전시를 이해함에 있어 한두 마디의 말로 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단적인 진단과 단상을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눈부신 윤리학"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눈부신 자본주의의 발달의 영광과 그 찬란한 빛이 앞을 가려 환상을 조장하고 있는 현시점의 양가적 현실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며, 또한 아직도 공산주의 체제이념을 고수하면서 최고도의 자본주의 체계를 결합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리천, 펑정지에, 쫑삐아오, 인짜오양, 관용의 작품을 통해 그들의 당대에 대한 비판의식과 사회와의 상호연관관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현재는 항상 진행형이다. 역사와 문화에 있어 그리고 예술에 있어 당대사회와 그 속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과 같은 곳에 신기루를 찾고자 한다. 현재 이 거대한 괴물 같은 자본의 논리에서 말이다! ■ 김미령





Collector's Choice

오재우展 / OHJAEWOO / 吳宰宇 / mixed media   2011_0624 ▶ 2011_0724 / 월요일 휴관


오재우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1

초대일시_2011_0624_금요일_06:00pm

아트라운지 디방 2011 출사표 선정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35번지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무더운 여름에『Collector's Choice』전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전시는 '실제로 작품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에게 그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그 작품들을 빌려서 전시를 하면 어떨까?' 라는 다소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을 찾아뵙고, 대여하는 과정들과 대여한 작품들을 직접 전시하는 것이 이 기획의 의도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궁금했던 점들에 대한 대답을 얻기도 했고, 컬렉터들의 소장 작품과 미술에 대한 많은 생각과 경험들을 접하기도 했습니다. 그것들을 듣고, 기록하는 가운데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미술에 대한 생각을 재고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전시되는 것은 그 과정들의 기록들입니다.
오재우_Andy Warhol-Dollar Sig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28.6×177.8cm_1982
오재우_Jake and Dinos Chapman-Insult to Injury no.39_Drawing on Goya's Aquatint_15.5×20.7cm_2003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를 통해서 미술사의 주요한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제가 얻은 가장 큰 영광이었습니다. 컬렉터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저는 책이나 인터넷으로만 접할 수 있는 작품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고, 더욱이 사적인 공간까지 공개해주시며 환대하여 주신 분들에 대한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다행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컬렉터들은 미술 작품을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미술작품의 공공재적인 성격에 동의하셨고, 제가 터무니없이 기획한 이 전시에도 흔쾌히 작품을 대여해 주었습니다. 고급문화의 소비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재우_On Kawara-22 Sept. 197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3×43cm_1970
오재우_Gerhard Richter-Betty_디지털 프린트_97.1×66.2cm_1991

이번 전시를 기획하면서 가장 곤란하면서도 동시에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가 만난 컬렉터들의 소장품 중 어떤 작품을 전시에 포함할지를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저는 전문 전시기획자의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가에게 전시 참여를 직접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컬렉터들을 만나기 전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몇몇 컬렉터들은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지만 크기와 운송 문제로 인하여 작품을 대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또 어떤 컬렉터들은 소장 작품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점 한 점이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서 전시 작품을 결정하는데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어려운 결정 과정을 통해서 이번 전시 작품들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선정한 작품들을 전시공간으로 빌려와 제 나름대로의 문맥을 만들어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이 같은 전시의 기획과 구성은 제게 새로운 도전이자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오재우_Marc Chagal-Le Coq_캔버스에 유채_81×65.5cm_1928
오재우_Dieter Kiessling-Untitled_Projection Blurred Light-Projection onto four nails by means of a slide-projector_1994

이제까지 보기 어렵던 작품들을 직접 만나는 이번 전시가 아무쪼록 여러분에게 새로운 미술 감상의 경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컬렉터들을 소개해 주신 미술과 미래 연구소 소장이신 이지훈 소장님과 소중한 작품을 대여해주신 컬렉터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올립니다. ■ 오재우





TRUTH & FACT-허위사실유포

2011_0615 ▶ 2011_0702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61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윤현_이범용_이재명_조혜진_최배혁_한경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TRUTH & FACT ● 낯설거나 파악되지 않는 어떤 대상 혹은 상황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불가능하거나 대안을 세우기 어렵다는 판단 서게 되면 그 불안은 공황상태로 까지 이어진다. 이런 경우 현상 너머의 진실에 대하여 주목하고 판단, 이해하려는 인간의 능력은 쉽사리 그 자취를 감추고, 사회가 이 범상치 않은 소수자를 제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계도와 순화의 명분을 들어 처벌로 이어지기도 한다. ● 현대의 미술은 수용자의 관점을 통해 종종 이와 유사한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표면에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파악 하기 어려운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구사하는 표현들이 우리의 일상과 달리 낯설고 때로는 혐오스럽거나 부정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사회는 기존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표현 방식의 제약 또는 해석의 왜곡 등 여러 방식으로 그 의미를 희석하고자 한다. ● 현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우리는 진실과 사실의 사이에는 미세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보통 개인이나 일정 집단에게 있어서의 진실이 어떤 관계 하에서는 사실이 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가판대 위 몇 종류의 신문사설들이 펼치는 상이한 논지들만을 보아도 쉽게 파악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실상 중요치 않게 여겨지곤 하고 악용 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각자의 명분과 관점에 따라 사실과 진실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방법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 이번 전시는 위와 같은 현상에 근거한 사회적 혼란들을 전시의 형식을 빌어 넌지시 표현하고자 기획되었다. 진실과 사실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장소인 법정을 전시의 무대로 삼아 사회, 작가, 큐레이터, 관객을 각각 고소인, 피고소인, 변호인, 배심원으로 치환한 일종의 법정 상황극으로 묘사 할 것이다. 진실과 사실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전시장 안에서 관객들은 배심원의 관점을 통해 전시를 조망하게 되며 그 동안 기획자가 마련한 작가에 대한 변호가 이어지게 된다.
이재명_A strang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12.1cm_2011

이재명 작가는 유년시절, 대도시와의 첫만남에서 도시가 보여준 차가운 표정을 잊지 못한다. 거대한 도시는 인간을 위해서 그곳에 지어졌지만 인간을 배제하고 그 스스로 존재 하는 것처럼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며 서있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주목 받지 못하는 도시의 생소하고 초라한 이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러한 일상의 의외적인 장면, 그리고 장소와 개연성 없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작품을 통해 지루하고 수동적인 도시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투적인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한경우_Right angled IHN_페인트, 라인테이프_가변 크기_설치_2011

한경우 작가는 우리의 주변을 아우르는 환경, 그리고 그 핵심이 되는 건축적인 구조를 여러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일상 속에서 어떠한 형태 혹은 용도로 규정 지어진 사물들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숭고함이나 그 정반대의 허구를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낸다. 인지하지 못한 사물의 이면과 마주치는 놀라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감춰진 이면을 발견하고 사뭇 놀라는 것과도 비슷하다. 전시 공간을 마치 조각 놀이를 하듯이 여러 조각으로 분할하여 기존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짐작해보게끔 하는 드로잉이 소개된다.
이범용_Garden of love_종이에 수채_76×57cm_2010

이범용 작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든 형상들에 주목한다. 그것은 여행이나 산행중의 신비한 영적 체험일 수도 있으며, 곤충과 주고받은 일종의 교감 따위의 것일지도 모른다. 자연 속에서 경험한 불가해한 감정에 주목하고 그 심상을 종이 위에 옮기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기억하는 그 형상은 본래의 그것과 상당히 변화된 모습으로 기록된다. 이미지로서의 형상뿐만이 아닌 그가 경험한 모든 과정, 그리고 고민들은 색상과 도식(diagram)의 형태로 재조합 되고 나열된다.
조혜진_Mouth-7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10

조혜진 작가는 몸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듬어지지 않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캔버스에 옮긴다. 성애와 관련된 신체, 해부된 장기등 이는 우리가 모두 경험하거나 지니고 있는 신체의 언어이지만 또한 모두가 외면하고 더러는 저속하다고 여기는 주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를 작업의 전면에 가감 없이 내어 비치면서 언뜻 개방된 듯 보이나 감춰지고 억압당하는 현대인의 몸과 그 너머에 감춰진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윤현_PTS 01-013N_잉크젯 피그먼트 프린트_104×130cm_2010

윤현 작가는 세상을 빛이 닿지 않는 심연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잃고 살아가곤 하는데 이는 심연과도 같은 사회 속에서 자아마저도 상실해버린 사람들이 그 어두움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런 작가의 생각은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 보고 있으니'. 다만 작가는 목적이나 되돌아 가야 할 어디가 아닌, 지금 여기의 초라하지만 나름의 빛을 발하는 우리를 직시할 것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최배혁_기러기 아빠_레진, 혼합재료_90×60×60cm_2010

최배혁 작가의 작업은 유쾌한 모습들 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화 속 삽화와도 같은 장면이다. 동화는 우리가 상실한 무언가를 담고 있음에 비로소 환상적이거나 행복한 장면으로 변모한다. 작가의 작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동화적인 설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러기 아빠와 몸에 빼곡히 돋아난 부모 고슴도치의 자식들은 이런 웃음 뒤의 비애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 방윤호





Viewfinder

2011_0622 ▶ 2011_0705 / 월요일 휴관


Nicholas Devison_Viewfinder I photoscreen and monoprint_100×89cm_2010

초대일시 / 2011_0622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브룩 & 블랙 Brook & Black_닉 데이비슨 Nicholas Devison 에드워드 딤스데일 Edward Dimsadale_마이클 에반스 Mike Evans 조 러브 Jo Love_데이비드 라이언 David Ryan_마크 쇼 Mark Shaw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뷰파인더'로 이름 붙여진 이번 전시는 프린트 미디어 기법을 통해 표현의 본질을 반영하는 수단으로 디지털 방식과 전통적인 방식 사이에 창의적인 교차점을 모색한다. 다양한 형식의 각각의 예술가들은 의식의 불안정성, 장소의 혼란, 의미의 개입과 단절 들에 관한 개념들에 관여한다. 따라서 디지털화된 환경을 통해 변화된 인식, 의미, 표현의 불확실한 본질을 고려한 사진 이미지에 관한 토론의 장을 창출한다.
브룩 & 블랙 brook & black_Life Raft II_Giclee_91.5×81.25cm_2009
데이비드 라이언 David Ryan_Via di San Teododo-Mirror_HD VIDEO_Variable_2010

이번 전시는 사진 이미지와 관련되어 결성된 예술가들의 그룹 전시이다. 지난 10년간 사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하면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암실 작업에서 벗어나 즉각적 만족에 대한 기대감과 원하는 대로 전달할 수 있는 역량으로 변화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난 세대에서의 사진은 화학반응과 장치로 규정되었지만, 이제는 역사와 컨텍스트에 의해서 정의된다. (사진이 최초에 등장한 시기부터 사진이 얼마나 설득력있게 왜곡해 내는지에 따라서 작품성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아날로그 사진을 규정짓는 특징이 진실 또는 사실이라면, 디지털 시대에서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그러므로 시기적절하게 열리는 '뷰파인더(Viewfinder)'와 같은 전시는 순간포착을 보여주고 이러한 변화의 일부가 작가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는지 또한 사진 이미지가 이미지 제작의 다른 수단들과 관련하고 있는지 반영하는 전시다. '뷰파인더'의 작가들은 사진 이미지를 면밀히 검토하여 모순을 파악하고, 무엇보다도 감상자에게 대상의 표면에 대한 연구로 화답을 시도한다.
에드워드 딤스데일 Edward Dimsadale_Model Love_Digital Print_Each print 60×40cm_2010
조 러브 Jo Love_the series Straub_photographic print and graphite pencil_110×200cm_2011

각각의 작가들은 새로운 디지털 시대에서의 사진의 본질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있다. 협력관계로 공동 작업을 하는 브룩(Brook) 과 블랙(Black)은 정지된 비디오 화면, 페인팅 및 디지털 사진을 조합하여, 새로운 방법과 기존에 확립된 이미지 제작의 방법을 동시에 탐구한다. 닉 데이비슨(Nick Devison)은 항공 사진과 프린트에 근거한 작품을 통해서 공간의 존재성을 발견하고, 무정형의 데이터와 정확한 위치 사이의 차이점을 제시한다. 마크 쇼(Mark Shaw)는 움직이는 신기루를 통해서 추상과 구상 사이의 경계를 맴돌게 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하게 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딤스데일 (Edward Dimsdale)도 모호한 상태의 작품으로 관심을 유도하지만, 그의 작업은 빛을 기록하는 사진의 전통적인 방식 하에서 확고하게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충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서 축소되고 저하된 이미지들은 실체라기보다는 환영으로 읽혀진다.
마크 쇼 Mark Shaw_Undulating Alternating Schema_Inkjet Print_56.5×75cm_2011
마이클 에반스 Mike Evans_Composite No2_Digital Print_76×51cm_2010

마이클 에반스(Michael Evans)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일련의 페인팅들이 '디콘볼루션'이라는 불리는 이미지 조작의 과정을 거치며 나온 결과물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의 작품들은 한 관점에서는 형태를 보여주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작품을 인식할 수 있는 근원에서 분리시키는 과정의 결과물로서의 상태로 나아간다. 이러한 축소의 의미 및 과정은 조 러브(Jo Love)의 드로잉이 가미된 디지털 프린트에서 극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녀의 작품 속 이미지들은 그러한 이미지들이 유래한 사진의 원천을 간신히 식별할 정도의 데이터만 제공한다. 먼 풍경을 보여주는 정보의 잔존물은 표면에 연필로 그려놓은 먼지 및 입자들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이러한 점들은 감상자의 초점을 반복해서 이미지 자체가 아닌 그 표면에 두게 함으로써 공간의 이해를 어렵게 하고, 표현된 정보의 본질을 식별하기 어렵게 한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아날로그 사진 작가들에게 미세 먼지는 적이면서, 거짓을 드러내는 결함이다. 하지만 조 러브(Jo Love)의 작업에서는 이러한 먼지는 이미지 자체의 진정한 언어의 일부로 포용되고 있다. 이러한 불분명한 관점에서 볼 때 데이비드 라이언(David Ryan)의 작품은 로마 중심가에 있는 작곡가 기아친또 쎌시(Giacinto Scelsi) 집의 다채로운 색과 섬세한 표면들을 감상자에게 보여준다. 그의 필름은 공간과 소리의 시적인 이해를 야기시키기 위해 이미지들이 거울에 비춰졌을 때처럼 공간을 구상하고 배가 시키는 아이디어를 탐구한다. ● '뷰파인더'의 작가들은 기존의 고착된 사진 기술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한히 변화하는지 그리고 사진 이미지에 대한 공통적인 집착과 의구심이 합쳐진 하나의 통합적인 전시를 개최한다. ■ Paul Coldwell
닉 데이비슨 Nicholas Devison_Viewfinder II_photoscreen and monoprint_100×89cm_2010

Viewfi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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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forest 서쪽 숲









이향경展 / LEEHYANGKYUNG / 李香京 / painting   2011_0625 ▶ 2011_0701






이향경展_다원예술공간 도어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향경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625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01:00pm~07:00pm

다원예술공간 도어 OPEN SAPCE DOOR 서울 마포구 동교동 177-22번지 B1 2관 Tel. 070.7590.9335 www.thedoor.co.kr






'서쪽 숲'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림을 그리는 나조차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그동안의 탐구에 의한 과정적인 결론으로, 서쪽 숲을 '기억과 만나는 통로'로 조심스럽게 정의하려 한다.
이향경_서쪽 숲_장지에 분채_220×300cm_2010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과 나무, 그리고 인면나무가 서 있는 어둠의 공간은 나름의 상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상징체계를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쪽 숲 자체가 나에게 주는 영향이다. 소재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이미지는 상징의 총합을 넘어 '거대한 고요'로 다가온다. 나는 거대한 고요 속에서 작품제작을 하며 의식의 문턱을 넘나들고,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 기억 중에는 아련한 추억도 있겠지만, 잠재의식에 동화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통제했던 장치로써의 기억 또한 존재한다. 나는 '서쪽 숲'을 통해서 '무의식의 장치'를 발견한다.
이향경_서쪽 숲_장지에 분채_162×130cm_2010

그리고 그 기억들은 단순히 떠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시로 다시 제작된다, 시를 쓰는 이유는 탈고를 통해 나를 억압했던 '무의식의 장치'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 위해서이다. 계속적인 대면은 이해와 화해로 변화할 것이다. 서쪽 숲 그리기와 언어화된 시, 이 두 가지는 나에게 치유를 위한 어떤 경건한 의식과도 같다.
이향경_서쪽 숲-고무나무요정_장지에 분채_230×150cm_2011

그러나 서쪽 숲이 최종적으로 관객들과 만날 때에는,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모습이 빠진, 그냥 숲으로만 남길 바란다. 사람에 따라 상징이 갖는 의미는 다르기 때문이다. 작품해석에서 고정된 상징체계는 필요 없다. 같은 요소라도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며, 같은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업을 한 나에게도 해당한다.
이향경_서쪽 숲-쭉정이의 꿈_장지에 분채_91×72cm_2011
이향경_서쪽 숲-쭉정이의 꿈_장지에 분채_91×72cm_2011

나는 작업의 상징이 나를 포함한 감상자 개개인에게 다른 의미 - 그러나 자신에게 적합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길 원한다. 그럼에도, 그 생각들은 보편적인 어떤 흐름 안에 존재한다. 그 흐름이 감상자의 기억, 애써 잊으려고 했거나 무의식중에 잊어버렸던 기억과 만나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서쪽 숲'은 나와 내 기억의 통로를 넘어, 감상자와 감상자의 기억을 잇는 매개체로써의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다.
이향경_서쪽 숲-상추로 만든 아가씨_장지에 분채_117×91cm_2011

이번 전시는 고민과 바람에 대한 잠정적인 마침표이다. 그러나 나의 작업 세계에서 결론은 언제나 과정 안에 존재하기에, 결론의 마침표 또한 물음표가 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작업이 마무리된 지금도 서쪽 숲은 여전히 모호하며, 나는 그 숲을 여전히 탐험하고 있다. 또한, 나의 배낭 속에는 아직 대면하기 두려운 기억들도 숨어 있다. 언어화하지 못한 사건들은 의식의 문턱으로 돌아가 다시 나를 통제할 것이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서쪽 숲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 이향경


 


THE PHOTOGRAPHER









박형근_이명호_한성필展   2011_0628 ▶ 2011_0720






박형근_Forbidden forest-2_C프린트_150×190cm_2010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30am~08:00pm

롯데갤러리 영등포점 LOTTE GALLERY YEONGDUENGPO STORE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618-496번지 10층, 11층 Tel. +82.2.2670.8889 www.lotteshopping.com






최근에 와서 현대사진은 분명 어떤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는 사진에 대한 그간의 전통적 규정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전통적 규정이란 일반적으로 사진을 특징 지울 때 꼽게 되는 현장성, 대상성, 기록성 등을 일컫는다. 사실 사진의 의미가 대상(피사체)이나 사건을 특정의 장소나 상황 속에서 카메라 렌즈를 통해 포착하고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즉 과거 사실성에 상당히 국한되었던 사진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컴퓨터, 편집 기술의 발달 등과 함께 그것은 실제 보다 더 현실적인 유토피아 내지 환상을 구현할 수 있는 유용한 매체로 받아들여진다. ● 위와 같은 이유로 사진은 현대미술의 맥락 안에서 매력적인 매체로 부각되고, 또 적극 채택되고 있다. 이로써 사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거나 익숙하지 않았던 미술가들도 작품에 풍부한 사실적 상상력을 부여할 수 있는 매체로써 사진을 선택해 어렵지 않게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사진의 전환점에 대한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고민에 당면하게 된다. 이쯤 되면 이미 어디까지가 사진이고 또 그렇지 않은지 좀체 그 경계를 어림잡기가 힘들어 진다. 아울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에 대한 신선한 접근 내지 진보된 규정이란 과연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위와 같은 인식의 자연스러운 귀착점이 된다. 이는 또한 이번 전시 『THE PHOTOGRAPHER』가 그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먼저 변화하는 환경 하에서의 사진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대체로 회화성의 유입으로 전개된다. 사진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본 전시에서는 사진 매체의 장르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그와 같은 회화적 접근에 대해 유의미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세 명의 작가들이 소개된다. 각각의 고유한 사진언어로 그처럼 현대사진이 당면하고 있는 회화성 유입의 문제들을 직간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박형근, 이명호, 한성필이 바로 그들이다.
박형근_Tenseless-64_The double screen_C프린트_120×190cm_2009

박형근은 자연적 대상에 반영될 수 있는 감정의 층위를 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상에의 주관적 개입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그가 포착한 풍경은 단순히 자연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특별한 무대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차원의 문(dimensional gate)처럼 현실과 비현실,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로 존재하며 여러 색깔의 감성을 이끌어 낸다.
이명호_A View of Work_Tree #5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100×240cm_2007
이명호_Tree # 4_종이에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_75×60cm_2005

이명호는 스스로의 작업을 사진행위 프로젝트로 명명한다. 그는 '하나', '사막', '오브제' 연작들로 회화성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나무 뒤에 캔버스 천을 드리운다든가, 사막에 캔버스 천을 드리워 오아시스로 전환시킨다든가 하는 행위를 통해 회화의 오랜 화두인 재현의 문제를 사진의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확장 시킨다.
한성필_Secret Tale_크로머제닉 프린트_122×152cm_2009
한성필_The Domination of Light_147×117cm_2006

한성필은 세계 각지를 떠돌며 담아내는 건물의 가림막, 벽화 등을 통해 가상과 실제의 문제를 사진에 끌어 들인다. 그의 사진 안에서 가상의 이미지는 실제를 감싸거나, 위장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침으로써 실제의 공간은 보다 가상에 가깝게 제시된다. 이렇듯 작가는 사진 자체의 고전적 특성인 사실적 기록성을 그대로 유지함과 동시에 그에 대한 혼란을 조장한다. 그는 사진적 문법 안에서 그 미학적 화두인 가상과 실제의 문제를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 익숙하게만 받아들여졌던 많은 것들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화를 겪게 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매체에 대한 유연한 접근은 분명 절실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유연함을 앞세운다고 한들 본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고유의 정체성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 세 명의 작가들은 각각의 사진화법으로 그에 대한 상당히 유의할 만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롯데갤러리






Did I?_제가그랬나요?







히라키 사와展 / Hiraki Sawa / photography   2011_0625 ▶ 2011_0825 / 일요일 휴관





히라키 사와_Hako_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_2007




초대일시 / 2011_0625_토요일_05:00am

기획 / 숨 아카데미 & 프로젝트 후원 / 하몬 코리아(Hamon Korea)_자생한방병원_하셀블라드(HASSELBLAD)_Greenfish House

관람시간 / 화~토요일_11: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월요일 사전 예약

아트클럽1563 ARTCLUB 1563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63-6번지 하몬프라자 B1 Tel. +82.2.585.5022 www.artclub1563.com





지난 2010년 10월 서초동에 개관한 비영리 아트센터, 아트클럽1563 (artclub1563)에서2011년 6월 25일 부터 8월 25일까지 네 번째 전시로 영국에서 거주하며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 출신 작가 히라키 사와 (Hiraki Sawa) 의 첫 개인전, 'Did I? (제가 그랬나요?)' 전이 열린다. 히라키 사와는 실제 공간에 가구, 장난감 등의 일상적 소재를 배치하여 사진 합성 기법, 미니어처를 이용한 촬영 기법을 사용, 디지털 영상 방식으로 새로운 풍경들을 시각화 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는 의미를 부여한 상징적 요소들이 교차적으로 연출되며 이를 통해 덧없는 현실 속에서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을 시적 영상으로 표현된다.
히라키 사와_Did I?_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_2011
히라키 사와_Did I?_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_2011
히라키 사와_Sleeping Machine_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_2011

작품 'Did I?'는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나 갑자기 기억 상실증 (amnesia) 에 걸린 한 친구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그 친구와의 기억을 회상하며, 우리 '기억'의 실제와 그 인식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작가 특유의 몽환적 세계로 그려낸다. 또한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롭게 제작된 'Sleeping Machine'은 낯익은 일상적 공간에 환상적인 요소를 부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의 모호함으로 채워진 시공간을 선사한다.
히라키 사와_Silts_단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_2009

일상 공간을 점유한 그의 상상력은 그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통해 생기를 얻고, 관람객에게 실제 현실과 상상의 소재가 혼재하는 전경을 제시한다. 즐겁고 어린아이 같은 동화 속 판타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은 일상의 논리가 허물어지는 비현실적 공간으로 빠져들게 된다. 히라키 사와는 그의 작품을 통해 끝이 보이지 않는 몽환적인 여정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바로 그 곳에서, 인식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일상의 논리는 재구성된다. 이번 전시 'Did I? (제가 그랬나요?)'에서는 'Did I?' 와 'Sleeping Machine' 을 포함한 순차적으로 재생되는 3점의 영상 작품과 더불어 존재와 순환에 대한 또 다른 4점의 작품이 소개된다. ■ 이지윤
히라키 사와_Canon_3채널 비디오_2011




artclub 1563







일본 현대미술 사진전
Daido Moriyama 森山大道 / Fuyuki Hattori 服部冬樹 / Kazuo Kitai 北井一夫/Yuki On…

























 



2011-05-23 12:17
● 전시장소ㅣ금산 갤러리 서울
                       서울 중구 회현동2가87번지 남산플래티늄빌딩B-103호
● 전시일정ㅣ2011년6월15일(수) ~ 7월17일(일)
● 오프닝 리셉션ㅣ  2011년6월15일(수) 17:00 금산 갤러리 서울
● 주최ㅣ 금산 갤러리
● 초청작가ㅣDaido Moriyama 森山 大道/ Fuyuki Hattori 服部 冬樹/ Kazuo Kitai 北井一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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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소ㅣ금산 갤러리 헤이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140            
● 전시일정ㅣ2011년6월18일(토) ~ 7월31일(일)
● 오프닝 리셉션ㅣ  2011년6월15일(토) 17:00 금산 갤러리 서울
● 주최ㅣ 금산 갤러리
● 초청작가ㅣDaido Moriyama 森山 大道/ Fuyuki Hattori 服部 冬樹/ Kazuo Kitai 北井 一夫/Yuki Onoderaオノデラユキ/Toshio Shibata柴田 敏雄

금산갤러리(서울/헤이리)는2011년6월15일부터 한 달여간 일본의 저명한 사진거장인 모리야마 다이도(Daido Moriyama 森山大道),핫토리 후유키(Fuyuki Hattori 服部冬樹),키타이 카즈오(Kazuo Kitai 北井一夫)등 의 대표 작품들을 통해 일본 근현대 사진을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본 전시의 주축이 되는3인의 작가 모리야마 다이도(森山大道), 핫토리 후유키(服部冬樹), 카즈오 키타이(北井一夫)는 빈티지 작품 총100 여점 선보일 예정일 예정이며,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구화의 영향으로 급변해온 일본과 일본인의 모습을 단순한 미적 측면을 넘어, 작가의 감각적 시선으로 시간의 역사를 담아 새로운 미학적 개념을 제시한 당대 최고의 작가들로, 이미 전시를 통해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그 실력을 인정 받은 바 있다.

모리야마 다이도(森山大道),는2차 세계대전 후 사회, 정치, 문화적인 가치변화로 갈등을 겪는 자국의 모습을 강한 명암의 대비와 단순하면서도 불균형한 구도를 통해 기존의 정형화된 예술관의 관례를 깨뜨리고 일본 예술계의 중심에 우뚝 서며, 일상의 무질서함과 인간실존의 고민을 담은 진정성 있는 리얼리즘을 구현해 냈다.

핫토리 후유키(服部冬樹)는1978년 사진학과 재학시절 체코 슬로비키아의 사진가 요제프 수덱(Josef Sudek)의 정물 사진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인체를 하나의 “정물”로서 포착하는 관점을 일관성 있게 다루고자 했다. 특히, 그의 누드작품 시리즈는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 낭만주의 회화 작품에서 느껴지는 픽토리얼리즘(Pictorealism)을 선보였다.

카즈오 키타이(北井一夫)는1965년, 요코스카 항구의 핵잠수함 기항반대 운동을 테마로한 사진집 「저항」을 시작으로1970년대 나리타공항 건설을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과 생활을 촬영한「三里塚(산리즈카)」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 농민들의 생활상과 풍경의 아름다움을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담아내었으며, 그 중에서도 대표작 「마을」시리즈를 비롯, 「언젠가 보았던 풍경」 등에서 소소한 일상 안에서 놓치기 쉬운 소중한 기억의 흔적들을 사진을 통해 재현했다.

금산갤러리는 일본의 근현대 사진을 통해, 우리의 근현대 미술과 역사를 반추하며 예술매체로서 사진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했던 그들의 시도와 열정을 회고하며 아울러 디지털 사진을 접하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된 지금, 우리의 현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금산갤러리 헤이리에서는 18일(토)부터3인의 작가 외에 오노데라 유끼 Yuki Onodera(オノデラユキ)와 토시오 시바타 Toshio Shibata(柴田敏雄)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Animalier 애니멀리어



2011_0629 ▶ 2011_0817 / 일요일,명절 휴관



이종선_Men & Animals 시리즈_Chapulson valley, Pakistan, Digital Pigment Print_90×60cm_2010


초대일시 / 2011_0629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곽수연_금중기_김남표_박종호_성유진 송상희_양승수_이종선_임만혁_정정엽

주최_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씨 후원_㈜코리아나화장품

관람료 / 일반_3,000원 / 학생_2,000원 / 단체(10인이상)_1,000원 할인

관람시간 / 10:00am-7:00pm / 일요일,명절 휴관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Coreana Museum of Art, space*c 서울 강남구 신사동 627-8번지 Tel. +82.2.547.9177 www.spacec.co.kr



동물은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의 친숙한 교감의 대상이다. 그렇게 인간 사회의 지탱과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동물은, 예술 장르 전반에서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 지 오래다. 수 만 년 전 어느 동굴 벽에 그려진 동물그림이 우연히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동물은 인간의 예술작품에서 당대의 사회와 관념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간의 동반자로서 존재한다. 게다가 인간은 동물을 또 다른 생명체로서 존중한다. 게다가 동물의 생태에 많은 빚을 지게 되면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인도주의적 보호의 의지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삶의 방식이 사냥에서 농업으로 전환되고 자연 정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동물은 인간 세상에서 폭력과 쾌락의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초 우리 사회가 목격한 끔찍한 사건들 몇몇을 되새겨보자. 살처분 된 수백만 마리의 동물, 더 높은 생산력을 강제 당하며 임신용 우리에 갇혀 지내는 암퇘지들, 인간의 기호에 맞게 유전자 개량되는 젖소 등의 현실에서 우리는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의 단면을 볼 수 있다. ● 코리아나미술관의 특별전 『Animalier 전』은 다양한 역사적 맥락 안에서 무수히 회자되어 온 동물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을 시각예술의 틀 안에서 조망하고자 기획되었다. 전시의 제목 "애니멀리어(Animalier)"는 19세기 프랑스에서 동물을 주요 제재로 다루었던 화가나 조각가에게 붙여졌던 호칭이다. (대표 작가로 앙투안느 루이 바리(Antoine Louis Barye)가 있다.) 당시 그들은 초상화•종교화•역사화에 비해 하찮게 취급 받고 있던 동물화(Animal Painting)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다. "애니멀리어"는 이른바 동물-작가를 지칭하는 미술사 용어일 뿐만 아니라, "Animal"(동물) 단어와 인간 행위자를 뜻하는 접미사 "-ier"를 결합하여 동물-인간 사이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제시하려는 본 전시의 주제어이기도 한다. ● 전시는 [인간의 동반자] [동물을 통한 자아성찰] [도구로서의 동물] [반인반수, 경계적 존재] 등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전시에 참여한 현대 애니멀리어는 동물에게 새로운 상징성과 관념을 부여하고, 현대 문명이 초래한 혼돈과 위기 속에서 동물과 맺어 온 인연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소개한다.
김남표_Instant Landscape-garden #7_artificial fur and charcoal on canvas_193.9×130.3cm_2011

인간의 동반자 ● 인간이 동물을 삶의 반려자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이다.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기계 같은 존재"(르네 데카르트)라는 주장에 대해서 "동물 또한 인간과 같이 고통 받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고 반박하였다. 이런 인식은 당시 활동했던 조지 스텁스(George Stubbs 1724-1806)나 윌리엄 길핀(William Gilpin 1724-1804)의 작품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동물에게 이입시키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본 전시에 소개된 애니멀리어 작품들로 이어진다. 김남표, 이종선, 임만혁의 작품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동물(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았다.
임만혁_말과 가족_한지에 목탄 채색_162.2×130.3cm_2010

동물을 통한 자아성찰 ● 애니멀리어 예술가들은 동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자기성찰을 위한 기회와 사회와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인식을 통해 행동을 결정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한다. 박종호와 곽수연은 동물의 행동에 자신의 삶을 이입시킴으로써 관람객들에게서 일종의 "성찰의식" - "어떤 행동에 대한 자신만의 동기와 이유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능력이 바로 사회 적응 능력"(니콜라스 험프리) - 을 불러일으킨다.
곽수연_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_장지에 채색_130×162cm_2011
박종호_Children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9

도구로서의 동물 ● 동물은 인간의 이익과 편의를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이 깊이 내재해 있다. 의학적?심리학적 목적에 이용되는 동물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에 시달린다. 세계 곳곳에서 빈번히 발행하는 동물 떼죽음은 인간의 무관심과 이기심의 결과다. 금중기는 인간화된 자연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동물의 감정을 표출시키며 현 시대의 위기를 강조하고, 송상희와 정정엽은 동물의 희생을 통해 무자비한 환경 파괴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다. 양승수는 인간의 놀이도구로 이용되는 동물의 모습을 포착하여 비정상적인 인간성을 고발한다.
송상희_변신이야기 제16권_연필 드로잉 애니메이션 HD_00:14:00_2008
양승수_Treadmill_단채널 비디오_00:02:30_2010
정정엽_고래_천에 아크릴채색_150×220cm_2010

반인반수, 경계적 존재 ● 반은 인간, 반은 동물을 의미하는 반인반수(半人半獸)는 애매하고 기괴한 형상이지만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이 하이브리드 생명체는 초자연적 신비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 상징되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괴력으로 인간 사회를 위협하는 생명체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반인반수 형상은 미와 추의 문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고민하는 경계적 존재로서 모호한 정체성을 띤다. 성유진의 반인반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작가 자신이 느꼈던 두려움, 불안함, 불안정성이 동물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여 경계적 외연을 지닌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성유진_Untitled_다이마루에 콘테_162.2×130.3cm_2010

『Animalier 전』에는 단순히 예술작품에서 동물의 형상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에서 벗어나 현대의 예술가들이 동물과 인간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그들의 고민이 담겨져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인간과 공생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동물을 대하는 대안적 시선을 함께 공유하길 바란다. ■ 이영주






RETURNS



고권展 / KOKWOUN / 高權 / painting   2011_0629 ▶ 2011_0705



고권_공항 가는 길_한지에 수묵채색_122×16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127a | 고권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11_0629_수요일_06:00pm

2011 화봉갤러리 고권 초대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화봉 갤러리 HWABONG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2.737.0057 gallery.hwabong.com



화가는 '그리기(painting)'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선, 색, 구성 등과 같은 외적 형식을 빌어 그리기에 대한 의지와 정체성, 삶을 대면하는 태도 등 그 내적 의미까지 구현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마음에 담고 있던 것들이 오직 화가의 손을 거쳐 평면 위에 곧바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회화'는 진정하고 솔직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가시적으로 얼마나 '잘' 그렸느냐를 가늠하는 테크닉에서 벗어난 회화는 '못' 그렸을지라도 투명하고 꾸밈없는 진솔함으로 화가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그러한 그림에는 화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이 내밀하게 녹아 들어 있다.
고권_누이의 섬_한지에 수묵채색_132×162cm_2011
고권_물고기를 든 엄마_한지에 수묵채색_162×122cm_2011
고권_추운날_한지에 수묵채색_162×132cm_2011

과거에 대한 기억을 모티프로 그리기를 행하는 고권의 작업은 직관을 통해서 결정된다. 기억을 바탕으로 망막에 비치는 일상과 상상의 이미지가 그를 그리기로 이끈다. 이번 전시는 고향과 타향의 시간적이고 공간적 이미지 혹은 상상의 파편들을 수집한 결과이다. 제주도에서 성장한 작가는 유년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자신의 과거와 사랑했던 풍경의 인상들을 환영처럼 재구성한다. ● 제주도를 연상시키는 상징적인 생물과 풍경들이 등장하는 그의 작업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한다. 겨울과 여름을 각각 상징하는 눈과 야자수, 에스키모와 파충류 등 생경하지만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어찌보면 대립적인 요소들이 마찰을 일으키는 가운데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나가는 아이러니한 과정이 우리네 인생일지도 모른다.
고권_화가와 새_한지에 수묵채색_53×45cm_2011
고권_Sea-Stone_한지에 수묵채색_41×53cm_2011

연약하지만 순수한 생명력을 뽐내는 물고기는 삶의 무게를 뜻한다. 그것은 삶이 지닌 소중한 가치이자 운명적인 위대함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그림 속 주체의 또 다른 분신이다. 본질적인 외로움을 함께 할 우애적 대상이며 야생적인 경계심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 풍경 작업들은 환영처럼 펼쳐지는 과거의 정경이다. 육각형 주상절리, 그 경이롭고 거친 제주의 절벽에서 근원적인 힘이 느껴진다. 제주 바닷가의 비정형적인 현무암은 추상적인 아름다움과 영겁의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짧고 사소한 여정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공항 풍경 그림에서는 애잔함과 같은 복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 '미어켓'은 특유의 사회성과 태생적 귀여움을 지닌 개체로써, 독특하게 망을 보는 미어켓의 경계 자세는 삶 속에서 무언가를 주시하고 기다리는 인간을 연상케 한다.
고권_추운날_한지에 수묵채색_38×23cm_2011

고향과 타향을 오가며 떠남과 돌아옴의 반복을 습관처럼 겪었던 작가에게 삶이란, 돌아갔다가 되돌아오는 '회귀(回歸)'의 과정처럼 여겨졌으리라. 그 과정에 내재된 '기억'은 과거에 대한 애정이기는 하지만 무조건적인 그리움은 아니다. 과거의 기억은 그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데 더 큰 가치를 지닌다. 그가 과거에 얽매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기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지금의 답답한 현실도 미래에는 놀라운 의미로 새롭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한 희망이 화가를 솔직하게 이끌고 그리는 행위로써 거짓 없이 풀어 내게 한다. 여기에 회화의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 그에게 '그리기'란 삶과의 끊임없는 대화의 과정이다. ■ 김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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