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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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1.04.05 00: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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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4.4 전시_ 보궐선거에서 야권은 단일 후보를 만들 것인가.ㅎ


FACE

이현정展 / LEEHYUNJUNG / 李炫政 / fiber craft   2011_0406 ▶ 2011_0412


이현정_K선생_펠트_181×126cm_2010
  초대일시 / 2011_040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갤러리 가이아 GALERIE GAIA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5번지 2층 Tel. +82.2.733.3373 www.galerie-gaia.net

  작업을 시작하면서 양모가 눈에 띄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얼굴을 여러 가지 펠트기법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펠트가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움이 사람의 피부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엄마와 크레파스로 여러 번 겹치고 그 위에 검정색으로 칠해 긁어내던 스크래치 기법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뭣도 모르고 무작정 칠하고 긁으며 거기서 우연히 나오는 색들이 참 재밌었다. 본인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사진과 같이 대상을 포착한다. 그리고 잘라서 나오는 색의 우연성은 스크래치 기법과 같다.  
이현정_K선생_펠트_181×126cm_2010_부분
  이점을 더 연구할 필요성이 있어서 나는 척클로스(Charles Thomas Close)의 작품을 참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에도 얼굴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기법의 시도들이 보이고 있다. 나 역시 가족이나 지인들을 대상으로 얼굴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화면의 질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양모의 시간성과 촉감이었다. 양모를 한 층 한 층 겹겹이 쌓는다. 그러면 색을 갖는 양모들이 층을 형성하면서 시각적인 중색과 발색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사람의 피부를 표현하고 얼굴의 양감을 만들어 내는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재현하는 게 아니다. 동시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어떤 질감이나 패턴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척클로스의 작품을 보면 극사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그림에 인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 거창하게 아우라 같은 게 패턴 화된 레이어로 베어 나오고 있다. 좀 더 묘사하자면 그의 그림은 원색이 발산하는 감정적 쾌감과 층층이 겹쳐진 색이었고 어느 색으로 인해 약화 되지 않는 강렬한 색상대비와 맑고 명쾌한 표현이었다. 이것은 사실성과 질감이 만나 단순히 똑같은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을 너머서는 방식이라고 나는 판단하였다.  
이현정_오빠_펠트_182×126cm_2010
  거기서 나는 두 가지를 고민했다. 얼굴이 가지고 있는 질감, 그리고 질감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나는 엄마의 얼굴에서 온유함과 즐거움을 보았다.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들이 베어 나온다. 얼굴에서 베어 나오는 인품은 억지로 없애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얼굴에서 드러나는 표정과 눈빛 그 자체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양모를 가지고 내가 느낀 엄마의 모습 그대로의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것이 질감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엄마의 얼굴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따뜻하고 포근함이었다. 양모를 가지고 한 겹을 쌓고 두 세 겹, 다섯 겹을 쌓아 가면서 그리움도 달래며 오랫동안 엄마의 색을 찾았다. 작업을 하면서 나에게 주변 인물들은 추운겨울 장갑과 목도리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해주고 추위도 막아주고 하는 그 따뜻하고 포근함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점을 배우고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현정_엄마_펠트_182×126cm_2010
  이처럼 나의 작업에 있어서 양모가 가지는 질감은 단순히 기법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소박한 감정을 진솔하게 함의 하는 내용을 갖는 질료다. 그것을 나는 따뜻한 온도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주변과의 관계를 의식하게 되었다. 얼굴은 관계의 총합이 아닌가. 그리고 얼굴이 만들어낸 질감인 주름은 여러 사연의 시간성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의 작업은 거기서부터 출발하였다. ■ 이현정  
이현정_L선생_펠트_185×125cm_2010
  필자는 이현정과의 대화를 통해서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현정은 가족이나 친한 지인들의 얼굴을 양모로 재현하는 작업을 한다고 하였다. 특히, 척클로스의 작업 방식에 관심이 있고 척클로스의 작품들이 여러 측면에서 그의 작업에 모델이 되어 왔다고 하였다. 그는 극사실로 작업을 하면서도 질감에 대한 특이한 느낌을 여러 인물의 그림에서 드러내고 있다. 물질의 질감 표현과 이미지의 사실적 묘사는 상반되고 상충되는 요소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를 척클로스는 심리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는 미국의 포토리얼리즘 작가로 대표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유명한 것은 극사실적으로 이미지를 뽑아내는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하는 사진을 매체로 하여 사실적임을 너머서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물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 혹은 개별적인 성질을 화면의 표면에 발생하는 현상들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현정_외할아버지_펠트_183×126cm_2009
  이현정의 작업에서도 그러한 심리적인 묘사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심리적인 내용이 그림을 이끌고 있기 보다는 개인적인 경험과 감성을 기반으로 한 결과로서 이미지의 대상을 재현하는 데 그치고 있어 보인다. 본인에게 있어서 엄마는 살신성인의 인자한 존재로 따뜻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오빠는 해군으로 용기와 힘찬 패기가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한 가지 고민해 볼 것이라면, 이미지는 다양한 감정과 해석들이 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면에서 한 방향의 감정만을 보거나 하나의 해석에 머무르게 되면 감상의 시간이 짧고 그 깊이가 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본인이 느낀 감정을 다시 객관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내가 아닌 타자의 시선에서 면밀히 고민하게 되면 감정의 다양성과 다별함이 하나의 이미지로 모아질 것이다.  
이현정_작업과정_사진
  다음으로, 이현정은 동양화의 전신론을 거론하였다. 아마도 고개지(顧愷之)의 전신론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개지는 동양미술의 중요한 전통을 세운 인물이다. 인물과 자연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그림의 외형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그 의미나 정신성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과 다른 동양화의 내용이다. 이와 함께 이현정의 작업에 점착하여 전신론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주지한바와 같이 전신론은 의미와 정신성을 필법을 통하여 화면에 가시화시키는 방식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피부가 가지고 있는 두께의 질감을 보여준다거나 거기서 비롯되는 양감, 표정으로 인물의 인상을 표현해 내는 이현정의 작업은 고개지의 전신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서양의 르네상스의 인물을 표현하는 명암법과 순간의 빛을 그리고자 했던 인상파의 병치법이 적절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현정의 작품에 동양화의 전신론의 가능성을 찾아본다면 이미지보다는 질감의 표현에 있지 않은가 한다. 작가 본인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증명사진처럼 재현하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대상에서 느낀 감정을 고유하고 구별된 질감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L선생'의 이미지에서 그 가능성을 제안해 본다. 이현정은 인물의 얼굴에 분청의 질감을 응용하였다. 분청의 질감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이나 자연성이 한 개인의 얼굴에 겹치고 있다. 작업에 개별로 제한된 감성에 개인을 넘어서는 요소들 즉, 자연성이나 역사성 등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 김용민




Dual Realities

한성필展 / HANSUNGPIL / 韓盛弼 / photography.video   2011_0407 ▶ 2011_0508


한성필_Metamorphosis_플렉스글라스에 역광 피그먼트 프린트, LED라이트박스, 혼합재료_ 125.3×155×6.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325a | 한성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07_목요일_06:00pm 기획 /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관람시간 / 10:00am~07:00pm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ARARIO GALLERY SEOUL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gallery.com

  파사드 프로젝트 ● 가상의 파사드는 존재론적으로 묘한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그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들어설 것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은 앞서 존재했던 원본의 복제일 뿐 아니라 동시에 앞으로 존재하게 될 건물의 원형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과거의 복제이자 미래의 기획이다. 한성필은 그 건축의 뷰파인더를 다시 사진의 뷰파인더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촬영'을 주제화한다. 그는 과거를 향해 복제를 복제할 뿐 아니라 동시에 미래를 향해 기획을 기획하고 있다.  
한성필_Mirage_흑경에 역광 피그먼트 프린트, LED라이트박스, 혼합재료_120×162×6.2cm_2010
  그가 찍은 파사드 중에는 복제나 기획이 아닌 것도 있다. 가령 트롱프뢰유 (Trompe l'oeil)를 이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때 가상의 파사드는 이미 있었던 것의 부재를 대리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있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거기에 있지 않을 완전히 새로운 환타지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물론 거리를 지나는 현실의 관찰자에게 이 환영의 가상성은 비교적 뚜렷하게 의식될 것이다. 하지만 이를 다시 사진으로 복제하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져 사진 속의 이미지는 일종의 버추얼 리얼리티가 된다.  
한성필_Duplication_크로마제닉 프린트_124×162cm_2010
  이처럼 최근에 거리에 나타난 가상의 파사드들 속에는 이 시대의 기술적 조건, 문화적 기억, 세계-인간 존재의 변화가 은밀히 집약되어 있다. 한성필이 파사드에 주목한 것은 바로 그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 게다. '파사드 프로젝트'는 내게 벤야민의 '파사주(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연상시킨다. 30년대에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20세기를 읽은 것처럼 그의 '파사드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21세기가 꾸는 꿈을 해독할 수 있지 않을까?  
한성필_Fable & Fairy Tale_크로마제닉 프린트_124×158cm_2010
  청동주물의 의미론 ●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포럼'. 이 광장에 가면 '죽음의 무도'가 있는 마리아 교회, 넵튠의 조각으로 장식된 분수대, 빨간 벽돌로 지어진 붉은 시청, 그리고 베를린에서 제일 오래된 니콜라이 교회의 쌍둥이 첨탑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368미터의 높이를 자랑하는 텔레비전 타워. 구 동독시절 이 건물은 그 압도적 높이로써 사회주의적 생산력의 시각적 증명이었다. 비록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TV 타워는 외려 장벽이 무너진 이후에 동서의 차이를 넘어 베를린 전체의 상징으로 영광을 누리고 있다. ● 얼마 전만 해도 광장 반대편에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이 서쪽에 등을 돌린 채 이 동독 사회주의의 건축학적 위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기보다 우월했던 서독의 현실에 애써 눈을 감은 채 오직 제 모습에만 반한 어느 체제의 자폐증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남자의 동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게 서베를린 쪽에 설치된 한 여인의 동상. 이 여인은 아직도 그곳에 서서 동베를린의 관문인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해 두 손을 모아 "문을 열라"고 외친다. 여인의 이 외침에 공산주의의 두 아버지는 내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은 루드비히 엥엘하르트(Ludwig Engelhardt1924-2001)라는 조각가가 1986년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목공일을 익힌 후 예술학교로 진학하여 작가가 되었다는 것을 빼고 작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독서하는 노동자」(1961), 「노동영웅 빌리 셰퍼」(1964)를 비롯한 그의 몇몇 작품이 아직도 구동독의 몇몇 도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안다. 형태가 약간 단순화한 것이 예술적 터치를 거친 흔적을 드러낼 뿐, 두 혁명가의 동상은 당시 공산국가에 공식교리였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작품 역시 와이어로 프레임을 짜고 그 위에 점토를 붙여 형태를 만든 후 이를 석고로 떠 청동주물을 붓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제작됐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념물의 제작 및 설치의 과정을 지빌레 베르게만 (Sibylle Bergemann 1941-2010)이라는 꽤 유명한 동독의 사진작가가 흑백의 사진 속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림이 그려진 아틀리에 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미완성의 동상에서는 마치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듯 묘한 초현실주의적 무드가 느껴진다. 지빌레가 남긴 사진 중에는 완성된 동상이 마르크스-엥겔스 포럼의 그 자리에 세워지기 위해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것도 있다. 체제를 선전하는 기념물들은 체제가 바뀌면 존재의 이유를 잃기 마련이다. 한때 숭배의 대상이었던 레닌의 동상이 성난 군중의 손에 끌어내려져 길바닥을 나뒹구는 고철이 된 것은 얼마나 극적인가? 과거의 향수를 지지하는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일독일에서도 구체제의 상징은 종종 철거의 대상이 되었다. 그 치열한 상징의 싸움 속에서도 용케 철거의 운명을 피했던 이 동상도 광장 아래로 지나는 지하철 공사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나 보다. 베를린시는 작년 가을 이 동상을 광장 안의 다른 곳, 조금 더 외진 곳으로 옮겼다.  
한성필_Bindi Statues_캔버스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2×130cm_2010
  바뀐 것은 위치만이 아니다. 동상은 이제 TV탑에 등을 돌린 채 서쪽을 응시한다. 아직 공사가 덜 끝나서인지, 내가 그곳에 갔을 때 동상은 사각의 울타리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과거에 사회주의의 위대함을 증언하던 이 기념물은 새로 신설될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올 관광객들의 눈요기 감이 될 예정이다. 오늘날 사각의 청창에 갇힌 그 동상은 우리 속에 들어앉아 인간들의 구경거리 노릇을 하는 동물원의 거주자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청동이라는 물질이 수치심을 못 느낀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한성필은 동상이 옮겨지는 전 과정을 사진과 비디오에 담아 두 개의 영상물, 「운명애(Amor Fati)」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를 제작했다. 「운명애」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이 크레인에 달려 옮겨지는 장면에 함께 흐르는 베토벤 5번은 마치 동상의 기구한 운명을 비웃는 패러디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동상이 구현한 휴머니즘적 가치가 쉽게 비웃을 만한 것이 아니기에, 「운명애」는 니체가 말한 그대로, 그 모든 모욕을 묵묵히 견디는 영웅적 존재미학을 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제목은 이 두 가지 의미가 겹치는 중의성의 지대를 가리킬 것이다.  
한성필_Amor Fati_단채널 비디오_00:06:02_2010
  한성필의 작업은 어쩔 수 없이 동독의 여류 사진가 지빌레 베르게만의 작업과 펜던트를 이룬다. 베르게만이 동상이 설치되는 사건을 흑백의 사진으로 기록했다면, 한성필은 동상이 이전되는(아니, 사실상 철거되는) 사건을 사진과 동영상에 담았다. 이 두 작업 사이에는 24년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동상이 움직이는 사건은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키네틱아트를 처음 본 관객이 느꼈을 법한 당혹감이랄까? 어쩌면 그보다 강할지도 모르겠다. 조각은 전시를 위해 더러 이리저리 옮겨지기도 하나, 동상은 우리 머릿속에서 늘 특정한 장소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레인에 들려 운반되는 동상의 수동적 상황에서는 어떤 우스꽝스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떤 앵글에서는 동상이 마치 아무 도움 없이 제 스스로 전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여호와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듯이 앞으로 미끄러지는 것이 마치 영적인 존재가 세상을 배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나의 신으로서, 하나의 우상으로서, 거기에서는 모종의 장엄함이 느껴진다. 나폴레옹의 말이던가? 숭고와 우스꽝스러움 사이에는 단 한 걸음만이 있다고. 동일한 장면이 주는 이 두 가지 상반된 효과는 아마 동상의 이전을 바라보는 이들의 모순적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한성필_Workers of All Lands Unite!_단채널 비디오_00:02:53_2010
  그 동안 작가는 주로 '가상과 실재의 관계'를 문제 삼아 왔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매체작업은 예전과는 맥락이 사뭇 달라 보인다. 하지만 예전과 연결시켜주는 선은 건재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두 영상물 외에도 베를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한 동상이 함께 전시될 예정이다. 그는 이 복제 동상을 '3D Photography - Reverse Representation'라 부른다. 사진이 3차원의 입체를 2차원의 평면으로 재현한다면, 이 작품은 2차원의 사진을 다시 3차원의 입체로 되돌린다. 이로써 작가가 그 동안 천착해 왔던 물음, 가상과 실재에 관계에 대한 물음은 한 차원 더 깊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방진막 위의 트롱프뢰유를 3차원 공간의 오브제로 번역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모조 동상 역시, 전혀 엉뚱한 곳에 나타나 생뚱맞아 보이는 방진막 위의 트롱프뢰유처럼, 그것이 속해야 할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 미술관의 실내에 고립되어 버린다. 아무 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에서 동상은 마치 무중력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듯한 모습으로 관객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좌표를 잃은 이 '옮겨놓음', 이 백색의 사라짐('white out')이 과연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까? 작가에 따르면, 이는 "우리 자신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 지빌레 베르게만이 동상을 촬영했을 때, 그 동상은 아직 사회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성필이 동상을 촬영했을 때, 그 동상은 이미 승리한 자본주의의 포로로 관광객들 앞에 전시되던 상태였다. 하지만 한 동안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자본주의도 최근에 지구촌을 덮친 금융위기 이후 자신감을 많이 잃어버린 기색이다. 새로 옮겨질 그곳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은 다시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알 수 없다. 한때 자본주의가 그들을 비웃었듯이, 그들 역시 거기서 자본주의가 낳은 만성적 위기를 비웃을지 모르겠다. 의미는 닫히지 않았고,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 추기: 지빌레 베르게만은 이 동상이 옮겨진 직후인 2010년 11월에 작고했다. ■ 진중권




형상회화-다섯 겹

5 Artists'-Figurative Painting展   2011_0406 ▶ 2011_0419


김지원_비행_리넨에 유채_60×60cm
  초대일시 / 2011_0406_수요일_05:00pm 2011 나무화랑 신춘기획展 참여작가 공성훈_김지원_박불똥_장경호_최진욱 관람시간 / 11:00am~06:0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지난 십 수 년 간 우리나라의 회화는 영상, 설치, 매체미술 등의 활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옥션을 통한 젊은 작가들의 부상으로 활발해진 듯도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상업적 목적에 매몰되어 미술이 갖는 근본적인 철학적 토대의 부재도 눈에 뜁니다. 또는 묘사에만 치우치는 손의 즐거움, 컴퓨터 프로그램을 옮겨 온 듯한 시각적 효과, 가벼운 재치, 대중문화적 코드에만 탐닉하는 가벼운 양상들을 보이기도 합니다.  
공성훈_호수공원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0×120cm
최진욱_웃음 5_캔버스에 유채_53×41cm_2011
  이처럼 가벼워진 회화의 지층을 반성하고자, 지난 1980년대 이후 형상회화에 천착해온 중견작가들의 회화적 태도, 미학적 인식, 세계에 대한 묵직한 통찰로 『형상회화-다섯 겹』展을 기획 합니다. 장경호, 최진욱, 박불똥, 김지원, 공성훈선생님 다섯 분이 초대작가들입니다. 40대 중반~50대 중반에 이르는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주제의식, 회화적 형식에 대한 독자적인 입장을 지속적으로 개진해 온 진지한 작가들입니다.  
장경호_해월연구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07
박불똥_똑빠루사럿!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cm_2010
  나무화랑은 형상회화의 내용적, 미학적 완결도를 전시로 연결하고자 해 왔습니다. 1993년 개관 후 2000년 폐관까지의 활동도 그러하였고, 또 2009년 재개관 이후 지금까지의 기획들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나무의 성격과 맥락의 선상에서 한국형상회화의 중요한 겹을 형성해 온 이들 다섯 분들의 전시는, 비록 그 규모는 작으나 앞으로 형상미술의 흐름에 반성적 동기를 제공하리라 믿습니다. ■ 김진하





Combat


강영민展 / KANGYOUNGMIN / 姜英敏 / installation   2011_0407 ▶ 2011_0424


강영민_Combat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028i | 강영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11_0414_목요일_05:00pm
후원/협찬/주최/기획_가나아트기획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서울대 및 동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미국 텍사스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강영민은 회화, 영상,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대문명과 매스미디어가 조장하는 피상적인 가치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그는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으나, 하나의 장르에 국한되기를 거부하고 관람객과의 인터렉티브한 소통의 도구로써 영상과 설치를 다루고 있다. 강영민은 국내 주요 국공립 미술관에서의 꾸준한 전시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미술창작스튜디오 및 장흥 아뜰리에 입주 작가로 선정되는 등 국내미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아트오마이 레지던시 입주 및 폴록 재단 기금을 수상하며 국제무대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영민_Combat_2011

 
일상의 소재를 통한 주변의 재발견 – 본질에 대한 탐구 ● 강영민은 대량생산제품이나 대중매체와 같은 일상적 소재들을 통해, 우리가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치와 대상들을 재인식하도록 하고 대상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 별을 대체한 인공불빛으로 이루어진 밤하늘을 통해 문명의 폐해를 드러내거나, 플라스틱 용기가 벽을 뚫고 나오는 형상을 통해 대량생산의 이면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작품들은 주변의 사물 또는 현상의 진지한 재인식을 유도한다. 미술은 예술로서의 심미성과 함께 사회적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고 말하는 강영민은 시사성을 견지하면서도 특유의 유머와 유희성을 잃지 않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작가는 기성문화와 매스미디어의 반복적인 학습으로 인해 현대인들이 습관적으로 인식해오던 현상들을 낯설게 느끼도록 하며, 그것들이 내포한 다중적 의미들을 표면 위로 드러내고자 한다.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의 충돌: 컴배트 ● COMBAT. 본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강영민은 하나의 현상이 지닌 표면적 의미와 그 이면에 숨겨진 충돌되는 가치를 동시에 끌어냄으로써 대상의 진실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의 설치작품 「도시풍」에서와 같이 문명과 진보의 상징으로 잘 포장된 도시가 가진 파괴, 무분별함 그리고 불안정함이라는 또 다른 진면목을 드러내기 위해, 강영민은 철제 구조물을 이용하여, 파괴와 건설이 진행중인 공사현장에 빗대어 도시를 묘사한다. 일루전(Illusion),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 위에서 ● 강영민은 일루전(Illusion)이라는 장치를 통해 관습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질서와 가치에 대해 반문하고 현대문명으로 잘 포장된 시스템을 교란시킨다. 디지털 이미지의 최소단위인 픽셀로 만들어진 친숙한 듯 낯선 도시 풍경, 몽환적인 광고 이미지 등 그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환영적 이미지는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순수하게 만들어낸 가상의 이미지, 즉 일루전이다. 그의 작품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루전은사회와매스미디어가형성한권위적이고견고한가치들을무기력하게만드는장치이며, 우리 주변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들은 왜곡된 인식이 만들어낸 "가짜 현실"일 뿐임을 상기시킨다. ■ 가나아트




피처링 시네마 Featuring Cinema

2011_0407 ▶ 2011_0531 / 일요일, 명절 휴관


Bruce Conner_2000BC: The Bruce Conner Story_exhibition opening at the Walker Art Center

 
초대일시 / 2011_0407_목요일_06:00pm
오프닝 세미나 / 2011_0407_목요일_03:00pm~05:30pm - 비디오 아트와 파운드푸티지 필름의 상호관계성 (임산-영국 랑카스터 대학 현대예술연구소 박사) - 영화 이미지 차용과 반복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해석 (김서영, 광운대 교수, 정신분석학자, 영화 칼럼니스트)
참여작가 파괴와 조합의 미학 :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미국) 네버엔딩 스토리 : 크리스토프 지라르데 & 마티아스 뮐러 Christoph Girardet & Matthias Müller(독일) 트레이시 모팻 Tracey Moffatt (호주)_올리버 피에치 Oliver Pietsch (독일) 노재운 Jaeoon Rho (한국)_마누 룩스 Manu Luksch (오스트리아) 영화의 재구성 : 피에르 위그 Pierre Huyghe (프랑스)_임민욱 Minouk Lim (한국)
주최 /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후원 / (주) 코리아나화장품_서울문화재단
관람료 / 일반_3,000원 / 학생_2,000원 / 단체(10인 이상)_1,000원 할인 관람시간 / 10월_10:00am~07:00pm / 일요일, 명절 휴관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 씨 Coreana Museum of Art, space*c 서울 강남구 신사동 627-8번지 Tel. +82.2.547.9177 www.spacec.co.kr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최초의 영화를 선보인 이후 '무빙 이미지'로서의 영화는 벤야민이 언급하였듯이 카메라에 의해 열려진 시각적 무의식의 층위를 보여주며 인간의 지각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필름을 잘라 붙이는 몽타주(montage)의 편집을 그 미학의 본질로 삼는 영화는 현실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임의적으로 재구조화할 수 있는 하나의 정치적 미디엄으로서 시각예술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기록과 선전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매개적 가치를 넘어 시간과 공간을 선택적으로 배열할 수 있는 비연속적 서사방식, 촉각적 지각이라는 새로운 지각경험의 가능성은 영화를 20세기 가장 도전적이고 영향력 있는 매체로 등극시키며 초현실주의, 다다이스트, 러시아 구성주의, 팝아트 등의 작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특히 90년대 이후 비디오 아트는 이러한 영화의 내용과 조건을 적극적으로 수용, 비판, 해석하면서 미학적 제도적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와 담론을 생산해왔다. 영화적 허구와 일상적 사실의 간극에서 영상매체를 검토하는 비판적 시선에서부터 영화적 내러티브와 장치로 영화적 경험을 전달하거나 프로덕션의 방법론으로 아티스트 필름을 제작, 배급하는 등 비디오 아트와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 또한 활발해졌다. ● 이러한 영화와 비디오 아트의 관계 하에서 『피처링 시네마 Featuring cinema』는 '영화' 이미지를 인용하여 새로운 문맥에서 편집하고 재배열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리얼리티와 의미를 창조하는 비디오 아트의 한 경향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비디오 아트와 실험영화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참여작가 브루스 코너, 피에르 위그, 트레이시 모팻, 크리스토프 지라르데&마티아스 뮐러, 노재운, 임민욱, 올리버 피에치, 마누룩스 등 국내외 9명(8팀) 작가들의 10점의 영상 작품들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영상으로 지칭되는 일종의 비디오 몽타주 형식을 견지한다. 이는 기존 영화나 영상 이미지를 발췌하여 조합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독립영화나 실험영화의 한 장르로 이해되어 온 파운드 푸티지 영화와 거의 동일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다. '발견된 화면'이라는 뜻의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는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와도 같이 실제로 촬영되지 않은, 이미 누군가가 찍어놓은 영상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 논의되는 파운드 푸티지 영상과 필름은 바로 기존 영화에서 찾아낸 특정 이미지를 기반으로 그것들을 재조합하여 영화가 지닌 기존의 서사적 의미에서 일탈, 새로운 기호로 작용하는 일종의 '리사이클링 무빙 이미지(recycled moving images)'들이라고 할 수 있다.
파괴와 조합의 미학 ●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브루스 코너(Bruce Conner)의 영상 작업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이질적인 영상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중층적인 의미를 제시하는 '파괴와 조합의 미학'으로서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을 소개한다. 영화와 뉴스, 광고 등에서 추출한 서로 관련 없는 영상들을 일관성 없이 무작위적으로 편집한 브르수 코너의 필름은 시각의 파편화와 낯섦의 효과를 야기하고 반 서사를 통해 사회적 논평을 가하는 파운드 푸티지 필름의 메타 미디어적 속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보여주는 상호모순된 공간들의 다중구성과 이중적 문맥은 끊임없이 열려지고 복합적인 알레고리 효과를 드러낸다.
 
Bruce Conner_Cosmic Ray_16mm film on DVD_00:04:43_1961
Christoph Girardet & Matthias Muller_Maybe Siam_35mm film on DVD_00:12:20_2009
Tracey Moffatt_Mother_단채널 비디오_00:20:00_2009(edited by Gary Hillberg)
Oliver Pietsch_The Shape of Things_컬러, 스테레오_00:1730_2008
Jaeoon Rho_God4Saken_비디오 설치_2009
Manu Luksch_Faceless_디지 베타, 베타 SP, DVD, 컬러, 사운드_00:50:00_2007

 
네버 엔딩 스토리 ● 이질성이 아닌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실제 영화의 컨텍스트로부터 작가가 관심 있는 특정 장면만을 발췌하여 주제적인 시리즈로 매끄럽게 결합한 파운드 푸티지 영상을 제시한다. 전시에 참여한 크리스토프 지라르데와 마티아스 뮐러, 트레이시 모팻, 올리버 피에치, 노재운 등은 꿈과 환각, 거울, 공연, 어머니, 삶과 죽음의 경계 등의 특정 모티브를 재현한 영화의 장면을 수백편의 영화에서 백과사전 식으로 모으고 이를 반복적으로 리드미컬하게 몽타주한다. 여기서 작가는 '수집(collection)'과 연쇄적인 '배열(ordering)'의 과정에 따라 연속적인 무빙이미지의 백과사전을 축적하는 일종의 아키비스트로서 임무를 부여받는다. 이에 따라 중심서사를 묶어내는 기존 편집의 외연이 해체되지만 영상이미지의 조각들은 다시 각각의 특이점을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러한 파운드 푸티지 영상은 이미 존재하고 고정되어 보이는 것의 파편들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와 해석이 만들어지는 열린 하이퍼텍스트적 구조를 취한다. 관객은 유사한 주제로 연결된 파운드 푸티지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 통로(passage)와 무한한 루핑에 자연스럽게 빠져들면서 의미의 연쇄반응을 경험하고 정의된 내러티브 대신 스스로의 스토리텔링을 이어간다.
 
Pierre Huyghe_The Third Memory_2채널 비디오 프로젝션, 사운드_00:9:32_2000
Minouk Lim_Tarkovsky 'Offret-Sacrificatio'-Jump Cut_단채널 비디오_00:08:00_2008

 
영화의 재구성 ● 이질성과 유사성에 따라 수백편의 영상을 결합하고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조합과 배열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 대신, 단 한편의 영화를 인용하여 리메이크(remake)나 점프 컷(jump cut)의 방식을 통해 영화적 경험과 기억을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미학적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파운드 푸티지와 실제 사건의 재상연된 장면을 섞으면서 사실, 허구, 기억의 경계를 제시하는 피에르 위그의 작업이나 안드레이 타르코브스키의 영화를 작가적 시각으로 점프 컷 하여 영화 원래의 서사구조를 해체하는 대신 시간의 압축과 이에 대한 불확실성의 개념을 던져주는 임민욱의 작업 등은 영화의 장치와 미디어로서의 사회적 함의, 경험과 기억의 재구성으로서의 영화적 효과를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해준다.
이번 『피처링 시네마』전은 감독과 에디터로서의 이중 역할을 수행하는 영상 작가들의 파운드 푸티지 필름을 통해 기존 무빙 이미지의 반복 재생이 어떻게 영화의 일루전을 해체하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영화와 미디어가 우리의 인식과 지각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파운드 푸티지 영상의 키워드인 선택적 조합과 제거라는 편집미학은 단순히 영화 이미지의 클리쉐를 반복 재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화 이미지를 재활용하여 새로운 층위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예기치 못한 시각적 인식적 파열을 던져주기 위한 것일 것이다. ■ 배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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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회화-눈을 속이다


2011 서울미술대전   2011_0408 ▶ 2011_0619 / 월요일 휴관


주태석_기찻길 Rail-road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1978

초대일시 / 2011_0408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강훈_강형구_김강용_김기라_김대연_김상우_김성수_김성진 김용석_김은옥_김창영_박성민_박주욱_박지혜_변종곤_서유라 서정찬_심점환_안성하_오흥배_유용상_윤병락_이광호_이석주 이성근_이정웅_이종구_이흠_정보영_정영한_정창기_주태석 지석철_최경문_최석우_최정혁_한영욱_한효석_황순일

관람시간 / 화~토_10:00am~09:00pm / 일,공휴일_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서울시립미술관 SEOUL MUSEUM OF ART 서울 중구 미술관길 30(서소문동 37번지) 본관3층 Tel. +82.2.2124.8800 www.seoulmoa.org


서울미술대전은 1985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연례전으로 회화, 조각, 공예, 판화 등의 각 장르별로 특화하여 개최해왔으며 올해는 6번째를 맞아 극사실회화를 조명한다. 이번 전시는 그간 지속적으로 수집해온 극사실 경향의 소장작품을 중심으로 하되 최근에 부상한 신진작가들을 포함하여 선보인다. 특히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 보다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기법 자체에 주목하여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더 진짜처럼 '눈을 속이는'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강강훈_Modern Boy-custom made breath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11

본 전시에서는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일어난 극사실회화의 주요작가들 중 일부와 그들의 후예 격이라 할 수 있는 최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극단적으로 사실적인 기법의 그림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을 소개한다. 극사실회화의 단면과 현황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강형구_자화상_캔버스에 유채_259×193.5cm_1999

극사실회화의 역사적인 배경과 범위, 개념에 대한 본질적 문제보다는 그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여러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따라 개념적인 구분이나 시대적인 구분 보다는 소재별로 일별하여 첫 번째 섹션에서는 '정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두 번째 섹션에서는 '인물과 풍경'을 그린 작품을 전시하여 시기적인 구분이나 역사적인 문제보다는 다양하고 포괄적인 각도에서 극사실회화를 바라보고자 한다.
안성하_담배_캔버스에 유채_300×100cm_2009

1970년대 극단적 추상화였던 모노크롬에 대한 대안으로 극사실회화가 등장했다면 근래 들어 다양한 매체와 미디어 환경의 발달로 더욱 극단적인 기법의 극사실 계열 회화가 주목받게 되었다. 이들은 정물, 인물, 풍경과 같은 일상적인 소재에 주목하여 우리가 익히 알고 있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일상 풍경에 관심을 가진다. 이들은 대상의 세부를 확대하고 극도로 정밀하게 묘사하여 고도로 현실적인 동시에, 오히려 그 현실을 뛰어넘을 법한 초현실적인 감각을 얻게 되기도 하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에 비해 새롭게 급부상하며 미술시장의 주목을 받았던 젊은 작가들은 고화질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세대들답게 실재보다 더 선명하고 매끈하게 보이도록 화면을 구성한다. 이로써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 소비사회에서 더욱 매혹적으로 비춰지는 오브제와 정물, 실제보다 더 정교하고 적나라한 인물을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 극사실회화의 다양한 양상과 함께 기법적이고 표현적인 특성을 다각도로 살펴보며 오늘날 극사실회화의 현황을 한눈에 조망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 서울시립미술관
윤병락_여름향기-그날(Summer Fragrance-The day)_한지에 유채_72×81.5cm_2004

The Seoul Art Exhibition is an annual art show regularly organized by the Seoul Museum of Art since 1985. It has been organized into sections specializing in painting, sculpture, craft, and print since 2004. This year's show marking the 26th of its kind highlights Hyperrealism painting in contrast to last year's which focused primarily on sculpture. Those invited to this show are 39 of Korea's representative hyperrealism painting artists who are active now. ■ SEOUL MUSEUM OF ART




Project Dialogue vol.1_<꿈의 먼지>, <오래된 약국>


박혜수展 / PARKHYESOO / 朴彗秀 / installation   2011_0401 ▶ 2011_0424 / 월요일 휴관


박혜수_꿈의 먼지_전동 타자기, 파쇄기, 선풍기, Research paper, 종이, 풍선_가변크기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212h | 박혜수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01_금요일_05:00pm

금호영아티스트 박혜수 개인展

퍼포먼스 2011_0401_금요일_05:00pm 2011_0416_토요일_03:00pm 작업 「꿈의 먼지」에서 작가, 점성술사, 정신과 의사가 직접 관람객을 대상으로 '잊고있던 꿈'을 찾아드리는 퍼포먼스가 진행됩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발견하는 사람, 예술가 ●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생각하기, 걷기, 그리고 답이 없는 질문으로 대화하기이다."(「쓸모없는 대화」,『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중) 사소하고 익숙한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발견된 것들을 예술의 도마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해오는 박혜수는 타인 혹은 주변 환경을 면밀히 관찰하고 끊임없이 기록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화한다. 예컨대,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에 개제된 질문문항을 통해 관객의 대답을 리서치하거나(「묻지 않는 질문, 듣지 못한 대답」(2008)), 공공장소에서 엿들은 대화에 대해 선정된 외부인이 코멘트를 하는 방식(「Dialogue-Archive」(2009)) 혹은 직접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에게 설문조사하는 방식(「Ask Your Scent」(2005))을 통하여 외부와 관계를 맺고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지난한 작업과정은 집단이 지닌 무형의 기억을 채집하는 것으로, 작가에 대한 이야기이자 '너(관람자)', 그리고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는 폭발력을 지닌 결과물로 귀결된다.
박혜수_꿈의 먼지_전동 타자기, 파쇄기, 선풍기, Research paper, 종이, 풍선_가변크기_2011 2010년부터 조사 중인 Research '당신이 버린 꿈'을 버리는 장소이다. 관객들은 자신의 포기한 꿈을 적은 종이를 설치된 작품을 통해 공간에 날려 버릴 수 있다.
박혜수_꿈의 먼지_전동 타자기, 파쇄기, 선풍기, Research paper, 종이, 풍선_가변크기_2011

2011년 금호영아티스트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작품 「꿈의 먼지」와 「오래된 약국」 역시 집단 무의식의 기저에 깔려있는 '꿈'이라는 모티브에 주목하고,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Project-Dialogue』의 다섯 가지 소주제 중에서 그 첫 번째에 해당하는 「꿈의 먼지」는 2010년부터 진행한 '당신이 버린 꿈'에 대한 온라인 상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다. '당신이 버린 꿈은 무엇입니까', '언제 버렸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항목에 대한 답이 적힌 종이를 파쇄하거나 풍선에 달아 날려버리는 공간을 제공하는데, 일종의 꿈의 저장소이자 소각장에 관한 설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오래된 약국」은 타로점술사, 정신과의사 그리고 작가 본인이 직접 관객과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꿈과 가치를 찾아보고자" 제작된 작업이다. 이미 2005년 관람객에게 간단한 심리테스트를 통해 마음의 향을 조제한 설치작업이자 관객참여 퍼포먼스인 「Ask Your Scent」에서처럼, 작가는 자라면서 현실적인 꿈에 밀려 '버려진 꿈', 이미 누군가의 꿈이 되어버린 '타인의 꿈', 점쟁이가 알려주는 꿈 등 복합적 층위에서 꿈의 의미를 읽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개념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잊혀진 대상으로써의 '꿈'을 직면하도록 한다. 바로 이 지점, 즉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쉽게 지나치는 것들에 대한 자각을 유도하고, 다분히 편집적이고 선별적인 우리의 시각과 사고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는 점에서 박혜수의 작업은 명상적인 측면과 맞닿아 있다.
박혜수_오래된 약국_각종 실험도구, 30여가지 tea,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새로운 꿈을 찾고자 하는 공간으로 사람들에게 버리진 꿈, 이미 누군가의 꿈이 되어버린 '타인의 꿈', 점쟁이가 주는 꿈 그리고 스스로 찾아낸 꿈 등 다양한 text를 통해 꿈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개념 공간으로 점쟁이, 정신과 의사 그리고 작가가 직접 관객과 대화하면서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의 꿈과 가치를 찾아보고자 한다. 2005년부터 관객에게 간단한 심리테스트를 통해 '마음의 향'을 조제한 관객참여 퍼포먼스 'Ask Your Scent'도 이번 '오래된 약국'작품에 포함된다.
박혜수_오래된 약국_각종 실험도구, 30여가지 tea,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박혜수_오래된 약국_각종 실험도구, 30여가지 tea, 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2011년 동명의 저서로도 출간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What's missing?)』는 근 10년간 작업에 대한 작가의 누적된 단상이자, 일상의 편린들에 대한 작가 특유의 명상이다. 인기척이 센서에 감지되면 사물이 그 움직임과 소음을 멈추는 작업인 「숨은 시간의 방」이나 「뒷담화」(2010)와 같은 설치에서도 잘 드러나듯, 재미있는 발상으로 일상적이고 주변적인 것들의 틈새를 드러내고 보는 이로 하여금 자각과 사색을 유도한다.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잊고 있던 것들을 발견해내는 박혜수의 작업 앞에 선 관객은 그의 작업 과정만큼이나 성실하게 전시에 집중하게 된다. ■ 금호미술관

 



Welcome to venus

이유진展 / LEEYOUJIN / 李有珍 / sculpture   2011_0406 ▶ 2011_0423 / 월요일 휴관


이유진_Pieta_합성수지에 페인트, 황동_140×170×115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512b | 이유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11_0406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변성된 육체와 관념의 유보 ● 이제까지 이유진 작가의 예술적 관심은, 조각으로 연출한 변성된 육체(denatured bodies)를 통해서 기존의 시각적 문화 제반(諸般)에 심리적 파동을 끼치는 자기 역량의 치열한 시험에 있었다. 몇 개의 계기가 기억에 남는데, 무기나 날카로운 것, 생명에 상흔을 남길 수 있는 치명적 물질, 금속성의 차가움, 곤충의 섬뜩함과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정반대의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와 만나서 미묘한 마력을 수여하곤 했다. 바로 여체의 형상이 통상적으로 수여하는 부드러움의 아름다움, 생명의 잠재태(潛在態), 고요함 등의 이미지가 공격적 성향을 지닌, 정반대 이미지와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반된 이미지가 만나서 상충하며, 조절되는 시각적 에너지 파동의 세기가 얼마나 되는가를 측정하는 것보다, 이유진 작가가 어째서 이 대립항의 이미지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혼미한 충격을 주려 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시급하다. 이유진 작가는 2007년부터 실제 주변 사람들의 인체를 주조(鑄造, casting)하여 자기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니까, 2007년도부터 2011년이 되는 최근 5년 동안 자기 일상의 지인들의 작품에 투입된 셈이다. 여기에 이유진 작가는 니켈이나 금과 은을 다루는 아주 특별한 금속학(연금술이라 불러도 좋다)의 기술을 보유한다. 주조된 주형에 전혀 다른 형질의 금속이 마치 한 몸처럼 이식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일상의 지인들, 특히 여성들이 지녔던 태초의 몸 형상은 현실초월적이며, 압도적으로 무섭되, 만인으로부터 쉽게 인지되길 거부하면서도, 성애적 매력을 발산하는 이질적 속성으로 탈바꿈한다. 바로 일상의 흔한 사람들, 즉 실재(實在)들이 외부로 힘을 강하게 뻗치는 가운데, 다시금 특수한 의미체계로 형질변경(形質變更)되어 그 의미를 해독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한다. 즉, 이유진의 다수의 작품들은 예외 없이, 특수 형상이 지닌 외세적 확장의 힘과 수렴적 의미가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한다.
이유진_Olympia_합성수지에 페인트, 황동, 천_70×63×140cm_2009
이유진_Venus_합성수지에 페인트, 유리, 거울_185×90×180cm_2009

일반적으로 '사유 존재의 구속성(Seinsverbundenheit)'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외부세계나 인간내면에 관해 생각하는 주체는 그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토양으로부터 제약을 받는 숙명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물리, 이공계에 중국인과 독일인이 나뉠 수야 없겠지만, 인문학계과 문화계에서는 각각 사람들이 살아온 환경과 역사의 처지에 따라 각기 나름의 성격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작품에는 흑인종, 백인종, 아랍인종이라는 각각의 고유한 '구속성'을 초월해서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심미적 기제(aesthetic mechanism)가 구현된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예술이 지니는 의미는 각자의 감상하는 인격에 의해 여러 개, 심하게는 일파만파로 확장되거니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의 농도가 숙성되어 역사화되기도 한다. 즉, 예술의 의미는 이제껏 세간에 존재하지 않던 발상을 과감하게 발현시킴으로써 전문인과 대중의 인식을 동시에 확장시키거나 감성에 파문을 일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며, 나아가 최고의 예술이 지닌 의미란 것은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작가, 즉 예술가의 인생과 그 예술가가 펼쳐서 개진시키는 예술세계가 이율배반하지 않고 표리일체 할 때 나타나는 숙연한 감동이다.
이유진_Venus_합성수지에 페인트, 황동_180×65×60cm_2009
이유진_Venus_합성수지에 페인트, 황동, 유리, 큐빅지르코니아_55×63×150cm_2011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구분 지어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한 몸일 것이다. 예술작품의 육체는 겉모양, 즉 형식(form)일 것이다. 또한 예술가의 기량일 것이다. 반대로 예술작품의 영혼은 작품이 지니는 내용, 그리고 예술가가 살아온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이유진의 작품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최초의 단상은 형언할 수 없는 채도의 붉은 색의 입체감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기운과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성의 질감, 그러면서도 여체로부터 느껴지는 안온한 안심이라는 여러 개 엇박자의 공감각이 주는 거센 조수(潮水)이다. 이 거센 느낌은 작가의 삶에서 유리되지 않은 구체적이며 간절한 자기 표현이다. 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냈고, 90년대 도미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영위하며 학위를 받았다. 이유진 작가는 한국판 메카시즘이 종용하는 스테레오 타입적 관념에 젊음을 보내다, 이내 포스트모던이나 해체적 전위 일색의 미국의 예술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억압과 자유 분위기라는 상반된 경험은 10년 안에 일어난 일이다. 억압, 압제, 위축, 강요의 시대 분위기에서 열린 미감, 자유, 창의, 수용의 사회 분위기로 역전되는 해방감은 기쁨인 동시에 혼란이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밀려드는 이 자유감은 과거 한국의 분위기와 정면충돌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 여성의 몸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며 표현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무한자유에서 나오는 창의적이며 참신하고 세련된 서구의 작품들이 눈앞에 몰려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자기 것이 무엇이고 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들었다고 한다. 이유진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아주 간단해 보이지만 동시에 울림이 큰 말이다. 바로 한비자(韓非子)가 남긴 말로 "탁월한 잔재주는 바보스러운 정성만 못하다"는 문구이며, 그 원문은 "功詐不如拙誠"이다. 한국이 여행 및 유학 자율화가 된 1985년 이래로, 서구의 신문물을 익히고 돌아온 수많은 예술가들을 보면서, 그들이 다만 서구의 표면을 흉내 내는 일에 자기 업을 삼는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은 적이 많다. 시대유행에 어긋나는 감이 있다손 치더라도 독창적인 그릇에 자기의 삶과 자기 의지를 담는 일은 훌륭한 일이다. 자기 인생을 분리시킨 채, 자기 감각이 아닐진대 남의 감각을 훔치는 것은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보면 "공사(功詐)"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유진 작가가 마네킹이라는 쉬운 방법을 쓰지 않고 고된 중노동을 요구하는 실제 인물 캐스팅의 방법을 고수하는 것은 그래야 여기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공감각에 적합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어떤 공감각이란 섬뜩함이다. 친근함이다. 친근해서 오히려 낯설고 초현실적인 느낌이다. 무서움이다.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편안함이다. 이런 느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바로 한반도의 샤머니즘의 세계이다.
이유진_Venus_합성수지에 페인트, 유리, 천_120×75×145cm_2009

이번 전시회에서 이유진 작가는 피에타, 비너스의 탄생, 올랭피아, 니케 여신 등 서구 미술사의 도상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 철저하게 신화화되고 상식화되어 굳어버린 이미지들을 이유진 작가 특유의 공감각적 파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우리 편과 적(敵),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좌와 우와 같이 우리를 멍들게 하는 이치관념(二値觀念)은 정치나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 속에도 엄존한다. 이유진은 아름답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한, 그렇게 굳어버려 우리 뇌리에 박힌 미의 전형을 해산시킨다. 그리스의 신화, 성서의 이야기, 서구 역사상의 에피소드들이 부지불식간 우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유진 작가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저 장대한 서구의 관념들이 꼭두나 벅수 혹은 장승이 가진 샤먼적 힘과 만나 전혀 새로운 양태의 에너지로 거듭나 우리를 뒤흔드는 것 같다. 2005년의 승려 만해(萬海)의 시구에 파리를 붙이는 과감함이나 항아리 속에 몸을 숨기던 쥐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여체의 등에서 나오는 흉기의 아찔한 미감은 사유의 경계를 벗어난 대상과 조우했을 때 느껴지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이유진 작가의 제스처는 기존의 가치나 체계에 맹목적으로 항거하려는 것보다 자유로운 사고의 틀로써 세계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자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것까지 아우르려는 태도, 여기에 이유진 작가의 작가정신이 펼쳐진다. ■ 이진명




Mentality

안은비展 / AHNEUNBEE / 安垠飛 / painting   2011_0408 ▶ 2011_0423


안은비_private place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09

작가와의 만남 / 2011_0408_금요일_06:30pm

음악공연 Lotus Project 『Musical Show』(guest: 성종완, 이효림)

관람시간 / 11:00am~06:00pm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CSP111아트스페이스는 현대인의 심리를 대중과 소통시키고자 열정이 많은 신예작가 안은비를 발굴하여 『Mentality』를 기획하였습니다. 안은비는 사회 변화에 따른 소통이 단절된 개인주의적 인간 심리를 일상공간을 통해 낯설게 보여줍니다. 상상 속의 공간을 작품으로 제시하면서 자동화되고 규범화 된 관람자의 경험과 무의식을 끌어냅니다. 안은비 개인전 『Mentality』은 일상적인 관습적, 규범적 공간에서의 일탈로 우리들의 지각세계에 신선함을 주어 미적 감동을 느낄 것 입니다. 특히, 작품 뿐 만 아니라 전시 공간 자체를 작품화하여 관람자는 기존의 시각이 아닌 창조적인 시각으로 새로운 경험에 재미를 더 할 것입니다. ■ CSP111 ArtSpace
안은비_Private place 2_캔버스에 유채_91.9×60.6cm_2009
안은비_private place 2_캔버스에 유채_60.6×116.7cm_2010
안은비_private place_캔버스에 유채_112.0×145.5cm_2011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시대의 변화로 인한 인간에 심리 분석을 motive로 두었다. 이것은 지극히 무디게 들어나는 변화이며 인간은 느끼고 깨닫는, 옮고 그름의 판단이 부족하므로 나는 회화(평면) 작업을 통해 관람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안은비_private place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1

시대의 흐름은 현대인을 정(情)과 애(愛)보단 자신의 자아에 대한 성취와 성찰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고 관심을 가지며 살아가도록 변화시키고 있다. 이렇게 흐름에 따라 심리 상태가 변화 하면서 인간은 지극히 쓸데없고 소모적인 시간을 부정하며, 개인의 권위와 자유를 중히 여겨 자신의 영역에 침범을 증오한다. 또한 자기 이익만을 행위 규정으로 삼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도 주지 않는 성향을 뛰며, 집단이라는 공동체를 벗어나 단독적인 개인주의를 추구하고, 공적인 활동 외에는 모든 것을 차단시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단절된 사고를 가진다. 나는 평소 인간이 활동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장소를 토대로, 심리 상태에 인한 행위의 변화를 가장 솔직해 질 수 있는 내부구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내, 인간의 심리 상태 변화와 내부구조의 상관성을 평면으로 풀이 한다.

안은비_private place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0

빛이 들어오는 불투명한 흰 색채에서부터 시작 된다. 견고한 벽면들은 소통이 단절됨을 나타내며, 또 그 견고한 면들의 틈 사이로 빛이 차단된 공간들이 이어진다. 이것은 안과 밖의 대비를 통해 안정과 불안정을 나타내는데, 오히려 인간은 빛이 차단된 삭막하고 불안정한 공간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난다. ■ 안은비

 

2011.04.08 14:53:40 / Good : 485 + Good

zabel

  • 작성시각: 2011.04.12 02:5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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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비치다 Glimmering

인주리展 / INJURI / 印珠里 / photography   2011_0412 ▶ 2011_0417 / 월요일 휴관


인주리_어리비치다#1_울트라 크롬 프린트_73×110cm_2010

초대일시 / 2011_04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pm~06:30pm / 월요일 휴관

류가헌 ryugaheon 서울 종로구 통의동 7-10번지 Tel. +82.2.720.2010 www.ryugaheon.com


호흡하는 기억 ● 400년도 더 된 그 집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들의 아들, 또 그 아들의 아들로 대를 이어 내려온 집. 하지만 이제 그곳은 빈 집이다. 마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계처럼 그 집은 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멈추었다. 집이 지어지던 때 함께 심었다는 배롱나무만이 400년 세월을 증언한다. 해마다 허물을 벗고 여름 내내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는 거대한 나무는 이 집안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내력의 연표라도 되듯 집을 껴안고 있다.
인주리_어리비치다#2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 작가는 아버지가 떠난 후 자꾸만 그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적막에 싸여 돌처럼 굳어가는 집과 어둠을 닮아 가는 나무들 사이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다. 대청마루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 그는 행여나 자신이 모르는 새 아버지의 혼이 다녀가지는 않았을까, 애달파하며 그 흔적을 집요하게 쫓는다. 아버지가 다녀간 건 아닐까? 나비가 되어, 빛이 되어, 바람이 되어 잠시 들렀다 간 것은 아닐까? 그러니 방으로 너울져 쏟아지는 오후의 나른한 햇볕도, 바람을 타고 마당으로 불어 들어온 낙엽도, 덜컹 열렸다 조용하게 닫히는 문소리도. 그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부재한 것(혹은 결핍된 것)의 흔적을 쫓는 그의 작업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디테일이다. 그의 시선은 아버지가 한번은 앉았을 방석이나 손과 발이 닿았을 바닥과 벽에 멈춘다. 오래 된 집이면 으레 있기 마련인 얼룩이나 자국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지만 무언가 사연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작가가 아버지가 부재한 집을 피사체로 하면서도 정작 아버지에 대해서는 어떤 직접적인 단서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며 피사체에 다가서는 그의 선택은 결정적으로 옳았다.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이 결국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면 굳이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아니, 그것은 애초에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인주리_어리비치다#3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그는 아버지의 어머니가 기대어 앉았던 벽에 남겨진 머릿자국과아버지의시신을염한후에묶은천을잘라내며바닥에남겨진칼자국같은것들은보여주지만, 아버지의 사진은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방 한쪽 벽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하지만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작아서 잘 안보이거나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나 잘려진 채다. 설혹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히 보인다고 해도 그 사진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을 닮았을 뿐, 결코 아버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어머니에 대해 말했듯이 아버지의 존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사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이곳에 없는 아버지를 보여주기엔 터무니 없이 부족할 것이니까. 그 어떤 직접적인 것도 부재한 존재를 경험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우리는 오직 예기치 않은 순간에만 부재한 존재와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뿐이다. "프루스트가 어느 날 구두 끈을 풀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 갑자기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진정한 얼굴을 보았던 것처럼",무의지적인 기억만이 단번에 전체를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이다.
인주리_어리비치다#4_울트라 크롬 프린트_48×63cm_2010

작가는 이번 작업에 '숨'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어했다. 사람의 삶이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지듯 기억의 삶 역시 숨쉬듯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일까? 그의 사진 속 세계는 강한 도발이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덤덤하고 차분하고 평온하다. 그리고 그것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순환구조를 닮았다. 결국 호흡한다는 것은 살고 죽는 것과 다름 아니다. ● 솔직히 대개의 죽음 체험은 타인을 통해, 그리고 그 타인의 부재를 감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작 죽음의 본질을 만나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죽음을 대하는 한 개인의 시선에서 결정된다. 죽음에 대해 거리를 둘 때 우리는 알 수 있다. 죽음이 고통이거나 동정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힘을 가진 그 무엇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주리-어리비치다#5_울트라 크롬 프린트_73×110cm_2007

이제 집은 아버지다. 부재하는 존재가 살아 숨쉬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상상 속의 공간이다. 빈 집에서 부재하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작가는 슬픔과 사랑을 느낀다. 그 과정을 통해 결핍의 자국들은 존재를 증언하고, 기억과의 대면은 죽음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진다. 먼저 떠난 자에 대한 헌사라 할 수 있을 그의 작업이 그리움의 사진인 동시에 결국 우리 모두 죽음에 닿을 것이라는 평온한 예언으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전미정




구레모토 토시마츠_최석호展

2011_0412 ▶ 2011_0420


구레모토-정지하고있는 세일즈맨 止するセ-ルスマン_260×280×135mm_2010

초대일시 / 2011_04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am~06:00pm / 일요일_12:00am~05:00pm

갤러리 담 GALLERY DAM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82.2.738.2745 www.gallerydam.com cafe.daum.net/gallerydam


일본에서 활발하게 작업중인 최석호 작가와 일본조각가 구레모토 토시마츠의 2인전이 갤러리 담에서 열린다. 구레모토 토시마츠는 오오사카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한 작가로 현대인의 자화상과도 같은 작품을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젠 괜찮아」라는 작품에서 철조각을 조각보처럼 이어 붙여놓은 상자 위에 서있는 샐러리맨의 모습에서 힘든 현실에서 살아남은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오른손은 바지 주머지 앞쪽에, 왼손은 바지뒷주머니에 찔러 넣어서 방황하는 자아의 모습을 다독이고 있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정지하고 있는 샐러리맨」에서는 마치 안마체조경기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고 있는데, 한 손으로 땅을 딛고 땅과 수평으로 떠있는 모습은 직장인이 느낄 수 있는 고뇌를 상기시키고 있다. 이렇듯 구레모토의 작업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느끼는 비애를 관조적으로 나무와 철로 작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최석호의 작업은 나무를 주로 이용하여 둥근 형태의 나무조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어머니의 젖가슴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형태는 우리나라 무덤에서도 그 부드러운 둥근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자연의 일부인 나뭇가지나 나무를 조각하여 이런 원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최석호는 중앙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현재는 일본 오오사카에서 활발한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 이번 전시에서는 구레모토 토시마츠의 작품 8점과 최석호 작품 8여 점 가량이 선보일 예정이다.
구레모토_친구는성실하다_455×230×130mm_2010
구레모토_포기한건아니야あきらめた_ではない_680×100×140mm_2010
구레모토_바다에서 부는 바람海からのかぜ_380×140×210mm_2010

그리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는 나에게 있어, 현재 흥미 있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번에 발표하는 「입체초상」작품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있는, 창조 의욕을 만족시켜서, 나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표출되기를 바라고 있다. ■ 구레모토 토시마츠 描くことを信?にしている私にとって、現在、興味深くやりがいのあるものは、今回?表の「立?肖像作品である。 私の心の?底に?む、創造的欲求をを?たし、? >自な世界が 表れることを望んでいる。 ■ ?本俊松

최석호_공
최석호_공3
최석호

사각의 건물에서, 사각의 방에서..., 태어난 침대가 사각이고, 사각의 식탁에서, 사각의 책상에서... 사각의 책과 사전, 그리고 노트... 사각의 시험지에 시달리며, 사각모를 쓰고 졸업한다. 그 세월 속에... 병들어 죽어갈 때, 사각의 병실에서, 또는 사각의 요 위에서 운명을 다하면, 관도 사각이요 땅을 파도 사각이다. 그리고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왜 묘는 둥글게 했을까? 감성과 감정, 그리고 생리적 감각을 느끼고 행동을 유발시키는 것 들은 대개가 둥글다 오감을 느끼는 신체부위로부터 시작하여, 먹는 음식들의 그릇이 둥글다. 밥솥, 밥그릇, 국그룻, 냄비, 접시, 컵, 내가 좋아하는 막걸리 잔, 소주잔도 모두가 둥글다. 한국의 건축과 의복의 옷고름, 버선코,, 장신구, 족두리, 갓, 노래의 완곡 미, 춤의 곡선미, 우아한 청자, 소박미의 백자 등등... 근거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둥글고 동그란 것을 좋아한 민족으로서, 어머니의 가슴이 둥글기에, 죽어서 다시 모태로 돌아가길 원하기에 그래서 묘를 어머니의 가슴처럼 둥글게 한 것은 아닌지? 이 이야기를 비켜간다고 해도, 21개국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그라미와 네모꼴의 선호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는데, 한국- 인도-일본 순으로 동그라미 선호도가 나타났다고 한다.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까지 그것이 심성에 배어들어간 한국을 문화인류학자 엘리아데는 우리 태극의 도형에서 "근대합리주의에 묶여 있는 인간성을 해방하고 다원 의 대립된 가치관을 수렴하며 분열된 이념을 화합시키는 궁극의 이치"라고 하였듯이 (이규태. 한국인의 정신문화154쪽) 한국인의 심성이 깊숙이 잠재된 둥글고 동그란, 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철학과 미의식을 극적으로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 최석호




山水 - 재개발된 도시풍경


윤세열展 / YOONSEYEOL / 尹世烈 / painting   2011_0414 ▶ 2011_0427 / 월요일 휴관


윤세열_山水-재개발된 도시풍경_비단에 먹_45×27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222c | 윤세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서울을 치유하기 위해 나타난 노자 - 윤세열의 작품에 관한 단상겸재의 오마주를 통한 불편한 경계의 인식 ● 윤세열이 이번에 보여준 일련의 그림들은 겸재에 대한 오마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화풍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겸재의 진경산수를 차용하려 했다면 윤세열의 작품들은 그 어떤 예술적 지향점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겸재가 진경산수를 통해 조선 후기 실사구시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면 윤세열이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인간이 상실된 도시의 삭막함 그 자체일 것이다. 전통 산수화에서 여백이란 그 그림의 운치와 분위기를 살려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면에서 윤세열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여백은 극단의 경계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여백은 오로지 하늘과 한강뿐이다. 여백이란 그림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지만 이번 윤세열의 작품에서 여백은 주제 그 자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시의 첨탑과 같은 빌딩들이 만들어낸 마천루와 콘크리트로 분명한 선을 그어버린 한강의 모습을 통해 그의 작품에서 여백이란 이미 인간이 사라지는 거대도시의 공허함을 적절히 나타내는 소재이자 주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 기술의 발달이 가상과 실제의 경계를 허무는 지금, 아무리 사실적 묘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겸재가 살던 시대에 그의 그림이 가졌던 사상 철학적 세계와의 연관성은 단 1퍼센트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윤세열의 작품에서 단순히 인간 소외, 자연 파괴, 황금만능과 같은 뻔한 주제들만 읽어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오브제를 화폭에 옮겼다면 그 기법이 아무리 훌륭하고 화려해도 예술 작품으로서의 온전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유행처럼 사회, 예술, 철학 등 전반의 분야에서 화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아직도 그 흐름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분명히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성립한다. 이성 중심적 사고의 총체이며 그로 인한 근대성이 모든 가치의 종착점이라 생각하며 발전론적으로 세계와 사회는 발전이라는 이름을 달고서 달려왔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가장 명확한 결과물은 '도시'라는 이름의 거대 괴물이 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다. 과연 우리는 이성과 발전의 최대 결과물인 이 도시 안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가? 윤세열의 그림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물음을 던지고 있다. 한강과 고수부지를 경계 지은 그의 붓끝이 단순히 그림으로만 그어진 선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경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의 예술 세계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일 것이다. 조선시대 겸재가 그의 진경산수를 통해 비판하고자 한 점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대와 사회상이었다면 윤세열이 보여주고자 한 점은 무엇일지 함께 더 고민해 본다면 그의 작품세계를 조금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윤세열_山水-재개발된 도시풍경_비단에 먹_53×33cm_2011

2011 인왕제색도 그리고 서울 ● 서울은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문화의 충돌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여의도를 얻고 밤섬을 잃으면서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새로운 삶으로 전환을 이루어 내었다. 서양의 물결을 타고 들어온 분석적이고 실제적인 사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 성장의 기적과 그 기적에 힘입은 절대적 빈곤의 해결과 질병의 퇴치. 자유의 인권의 신장. 하지만 서울은 호흡이 고달프다.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생태계 파괴, 자원 고갈은 서울에게 인공호흡기가 필요한 상태로 병들게 한다. 개인과 집단의 분리와 단절, 경쟁의 심화에 따른 구성원 상호간의 반목은 서울을 외롭고 삭막한 섬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서울은 외롭고 고달프다. 현대의 합리성이 서울을 해방시켜가면 갈수록 동시에 자기로부터 소외라는 역설적 생채기가 서울을 더욱 감옥같이 옥죄여온다. 윤세열의 산수화는 역설적이다. 산수화는 말 그대로 '산수(山水)'를 그린 그림이다. 산수화의 자연은 신비와 경외의 대상에서 시작하여 현실세계로부터의 은둔과 속세 초월의 관념을 포함하는 유유자적의 공간이다. 윤세열의 「서울의 산수」에는 산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가 바라본 서울에는 '산수'가 역설적으로 재등장한다. 술통을 가득 싣고 뱃놀이를 가는 선비, 학이 노니는 마당이 있는 초가집. 거대한 서울의 압도감에 마치 과거의 추억을 되살리듯 띄엄띄엄 배치된 산수의 흔적은 멈출 줄 모르는 불도저 뒤에 가려진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윤세열이 서울의 산수화에서 사라져 감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비단, 괴물같이 거대해지는 서울의 외면에 반비례해 사라져가는 옛 모습 뿐만이 아니다. 그가 주로 소재로 삼는 '재개발 된 도시의 풍경'은 달동네의 키 낮은 지붕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 그 지붕아래 미로 같은 골목길을 뛰노는 아들의 부서지는 건강한 웃음소리, 새벽바람에 일을 나서는 이웃을 따뜻하게 지켜주는 가로등의 모습들을 세밀하게 캐치함으로써 서서히 잃어가는 외로운 사람들의 외로운 따뜻함을 간직하고 싶어 한다. 윤세열은 노자를 서울의 산수에 그려낸다. 급속한 현대화의 과정 속에서 겪는 아노미와 서구적 합리성에 의해 병들어 가는 서울의 슬픈 모습을 치유하기 위해 노자를 불러온다. 인생과 자연, 우주에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라는 약을 짊어진 2011년의 노자를…….
윤세열_山水-재개발된 도시풍경_비단에 먹_55×80cm_2011

밤섬을 찾아온 '무위'의 노자 ● 윤세열의 작품에서 소재로써 '밤섬'은 서울의 변화를 보여주는 그만의 아이콘이다. 63빌딩이나 국회의사당 등의 주변 환경에 홀로 우뚝 선 밤섬은 그가 '서울의 산수'를 그려내는 데 있어 독특한 영감을 제공한다. 시인 함민복은 "섬이 혼자가 있으면 섬이 아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밤섬은 이제 孤島가 되어버렸다. 1968년 2월, 여의도를 얻기 위해 폭파 해체된 밤섬은 이제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쓸쓸한 섬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왜 윤세열은 우리에게 다시금 밤섬에 주목하는가. 그것도 노자를 서울로 데려 와서 말이다. 인위는 부작용을 만든다. 인간은 유전자부터가 이기적이라는 말을 받아들여야 할까? 인위는 욕심이다. 내가 무엇인가 잘 해봐야겠다는 생각,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에게 욕심을 만들어낸다. 이는 반목과 필요 이상의 경쟁, 사회·정치적 모순을 초래한다. 톱니바퀴에 끼여서 돌아가는 모던 타임스의 채플린처럼, 밤섬은 호흡이 가쁘다. 모두 자연적인 것을 거부하고 인위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다. 인위의 치유제로써 '무위(無爲)'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떻게 서울의 밤섬으로 노자를 데려와야 할까.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해롭고 이기적인 행동에 대한 거부다. 거짓 행위를 버리고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더욱 적극적인 인위'다. 노자의 무위는 노자 사상의 핵심 용어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자연에서 인간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으로 돌아가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모든 작위와 강제에 대한 거부다. 무위는 노자의『도덕경』에서 열두 번이나 언급된다. 이 중에 절반의 사용은 통치자들이 무위를 실천해 올바르게 세상을 통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어가 있다. 노자는 당시 통치자들의 인위의 정치가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고 보고 무위자연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자연은 무엇일까? 자연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천연적인 변화의 총체이다. 사람은 이러한 길을 갈 때 완벽하고 조화로운 움직임을 갖게 된다. 자연적인 상태에서의 사람은 원래 행복하지만 인위적인 사회의 변화로 인해 스스로 시지프스의 고통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문제를 만들어낸 원인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의도를 버리고 밤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결국 무위는 순리에 맞도록, 자연의 변화에 맞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적극적인 처세 철학이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무위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게 없다(爲無爲則無不治)' 윤세열은 작품을 통해 물음을 던진다. 오늘날 생태계의 파괴와 인간의 소외는 어디에서 오는가. 누가 밤섬을 홀로 있는 외로운 섬(孤島)로 만들었는가. 윤세열의 조형언어_사라져가는 시간의 흔적들에 대한 애착 ● 윤세열은 서울로 노자를 데려왔다. 황량한 도시의 거친 숨결 위에 노자의 아이콘을 그려낸다. 술통을 가득 싣고 뱃놀이를 가는 선비. 학이 노니는 마당이 있는 초가집. 작가는 황량한 서울의 眞景에 '무위'라는 약을 처방한다. 수없이 반복되는 겹겹의 선으로 숨이 가쁜 도시 풍경. 그 앞에서 노자의 처방이 담긴 아이콘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숨이 가쁜 도시의 풍경이 '인위'라면, 초라하고 왜소한 아이콘은 '무위'의 처방이다. 하지만 그 처방의 효과는 크다. 무위로써 처방하면 작아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윤세열은 화폭을 그렇게 처방한다. 화폭에는 우리시대의 산수가 담겨 있다. 숨 가쁜 우리의 일그러진 산수가 있고, 우리가 지향해 가야 할 미래의 산수가 있다. 황사비가 내린 것 같이 뿌연 잿빛의 도시 가운데에는 우리의 내면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있다.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인류가 만들어 낸 문명과 야만이라는 흑백의 절멸 속에 등장하는 빨간색 옷을 입은 소녀가 있다. 윤세열의 그림이 그러하다. 우리는 그 빨간 옷을 입은 소녀를 보면서 마지막 남은 희망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노자의 아이콘을 보면서 자연스레 숨 쉴 수 있는 서울의 산수를 희망한다. 그 속에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가득하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것이 사라져 가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다. 화폭에 등장하는 노자의 아이콘에는 그런 따뜻한 애정의 편린이 가득하다. ■ 박상환




미디어극장Welcome to Media space

갤러리 정미소 기획展   2011_0414 ▶ 2011_0615 / 월요일 휴관



첫 번째 전시 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두 번째 전시 초대일시 / 2011_0429_금요일_06:00pm

미디어 극장 1부 / 2011_0414 ▶ 2011_0512 첫 번째 전시 2011_0414 ▶ 2011_0427 참여작가 /손유미_김창겸_김해민_올리버그림 오프닝공연_Harp meets Live Electronic 이기화(하피스트), 윤제호(라이브 일렉트로닉 퍼포먼스) 두번째 전시 2011_0429 ▶ 2011_0512 참여작가 / 김병호_한승구 오프닝 퍼포먼스_White Interfaces 백색접점, Artist: 김병호, Sound Artist: 조은희

미디어 극장 2부 / 2011_0514 ▶ 2011_0615 참여작가 / 김창겸_김해민_함양아_심철웅_김세진_유비호 한계륜_신기운_이진준_안세권_오용석_박준범_이배경_박제성

주최/주관_갤러리 정미소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_파라다이스 문화재단 협찬_운생동건축사사무소㈜_월간 객석

관람시간 / 11:00am~07:3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정미소_GALLERY JUNGMISO 서울 종로구 동숭동 199-17번지 객석빌딩 2층 Tel. +82.2.743.5378 www.space-act.net


미디어극장은 공연을 위한 무대 혹은 현실을 순간적으로 잊을 수 있는 영화관, 다양한 매체로 제작되는 그 무엇의 예술작품, 아니면 우리가 미술에서의 예술범주에서 언급하는 미디어아트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야기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미소에서 이번에 선보이려는 미디어 극장전에서는 오늘날 많은 부분 간과하고 퇴보됨을 강요 받는 미디어 작업을 다시금 재 조명 하려한다. 그 어떠한 기술이 매개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의 극장은 배우와 관객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예술이 완결되었을 것이며, 카메라와 영사기가 발명되던 순간에는 많은 이들이 움직이는 이미지 영화를 보기 위해 한 장소에 모였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극장", "영화관"이 될 수 있었던 단초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재조명 해 볼 수 있는 극장이라는 개념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특정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로 인해 과거에 주로 연극으로 흥행했던 극장의 개념은 어느새 공연장, 영화관의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이는 곧 사람의 몸 그 자체에서 발현할 수 있는 조형세계에 그 어떠한 기술이 매개, 개입, 침투된 결과 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개입을 설명하기 위해 "미디어극장"이라는 또 다른 언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거론되는 "미디어아트"의 출현과 그 의미들이 발현되는 또 다른 장소로서의 극장개념 말이다. 앞서 언급한 공연장과 영화관이 각각 연극과 기술, 영화와 기술이 매개된 오늘날의 또 다른 공간이라면, 미술과 기술이 매개된 공간이 바로 "미디어극장"인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은 기술에 의존하여 왔다. 물감, 붓, 캔버스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1600년대 화가와 고가의 복잡한 장비를 이용하여 영상작업을 제작, 편집, 상영하는 1990년대의 미디어아트 집단과 서로 크게 다른 것처럼 예술가의 기술 의존도는 각 시대 혹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다. 하지만 이번 미디어극장에서 한 가지 염두 해 두고 싶다면 이는 곧 올드 미디어가 아닌 뉴미디어의 개념으로 존재하는 예술을 보여주는 장이 된다는 지점이다. 뉴미디어의 원리를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 레프마노비치에 따르면 뉴미디어는 수적재현, 데이터자체의 연속성과 디지털화를 들어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컴퓨터 데이터를 이용하고 또 그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조작, 변형하며 가상의 공간에도 존재하는 즉, 뉴미디어의 원리로 작품을 구현하는 작가들을 이번 미디어극장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손유미_한강 상들리에_66개 LED라이트 패널, 와이드인화, LED, Arduino Board, 전자부품_300×210cm_2010

디지털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공간의 경험 ● 비트 그 자체로 존재하여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예술의 집을 생성하는 디지털은 전자매체의 확산과 뉴미디어의 사용을 예술작품에 더욱 구체화 하게했다. 디지털 이미지가 네트워크화된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이를 수용하는 관객은 과거의 전통적인 예술의 관람방식과 다른 또 다른 국면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미디어예술이 과거의 아날로그 이미지의 수용방식과 구별되는 점은 주체의 지각방식의 변화이다. 다방면을 에워싸는 음향효과와 관객을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는 더 이상 관객에게 일정한 거리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람자는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또한 이미지 앞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 사진을 시작으로 LED기술을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기 시작한 손유미의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또 다른 창구가 된다. 그의 초기작 「옥수동」에서부터 사진매체로 공간 전체를 에우게 되면서 단 한 장의 사진으로 구현해 낼 수 없는 공간감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옥수동 골목골목 다녔던 자신의 어린시절의 상상들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시각화 시켰다. 그 공간에 놓이게 되는 관객들은 그가 제안한 경험 속에 함께 침투되게 되는 것이다. 「옥수동」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담아내었다면 최근작 「한강샹들리에」에서는 폐허공간의 반대편의 화려한 빛을 가진 도시 이미지에 대한 경험에 관한 것이다.
김창겸_water shadow 4_00:06:45_2006

디지털이미지의 개념이 예술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될 시기에 그러한 매커니즘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온 김창겸의 작품「The mirror」, 「water shadow」는 액자의 프레임과 물그림자를 통해 디지털 이미지 투영을 위한 또 다른 캔버스를 제안한다. 그러한 일련의 그의 작업들에서는 관객이 직접 이미지 안에 침투되는 경험을 제공하며, 작품 속 누군가의 이미지를 통해 마치 "여기"의 경험이 "거기"로 이전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김해민_R.G.B_칵테일 유리잔, 프로젝터, DVD_2001~10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 다양한 매체에 영상을 담아내온 김해민은 캔버스 형태에서 벗어나 비물질적인 디지털 이미지가 가시화 될 때 물리적인 데이터 작업을 거쳐야 하는 과정을 칵테일잔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이미지를 출력한다. 컴퓨터의 모니터를 통해 투사되는 색감의 표시방식 즉, 빛의 장치에 의해 감지되는 RGB는 무엇보다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을 현실공간에 발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다. 그는 이러한 빛의 사용을 통해 미각을 자아낼 수 있는 칵테일 잔에 영상을 담아내는데, 이를 통해 디지털이미지 그 자체가 우리에게 시각성외의 또 다른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올리버그림(Oliver Griem)_composition for movinglights 03_2011

최근까지 진행시켜온 올리버그림(Oliver Griem)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설치 및 인터렉티브 360° 비디오 설치 작업은 기존의 단채널 비디오 작업들과는 전혀 다른 공간성을 만들어 내는데, 그렇기에 그에게 항상 중요하게 작용했던 점은 관객이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인터페이스의 문제였다. 이미지의 투명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는 비디오 설치작업에서 사용자 즉, 관객이 직접 이미지를 움직이게 하는 버튼과 장치를 존재하게 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이미지에 동요되고 둘러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선보이는 「composition for moving lights3」는 어떠한 특정 인터페이스의 매개장치 없이 관객이 이미지 안에 그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이미지 안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다양한 감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승구_나르시소스의 두 얼굴_혼합재료_490×220×240cm_2011

3D의 환영적인 시각의 문제를 그대로 공간 안에 재 배치 함으로 관객에게 이미지를 그대로 체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승구의 작업 「나르시소스의 두얼굴」의 또 다른 버전은 한 장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 내면의 다중적인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환원시킨다. 이를 통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관객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현실에 존재 하지 않는 가상의 거대한 인물과 마주하게 된다. 현실이미지와 또 다른 디지털의 세계, 즉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된 세계는 가상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극적인 환경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각적인 이미지외 소리의 수반도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미디어아티스트들은 온몸으로 체감되는 그 모든 정황을 동시에 고려한다.
김병호_White Interfaces_microphone, mixer, piezo, electric wire_가변설치_2011

사운드의 확장적 요소를 가지고 끊임없이 뻗어나갈 것 같은 김병호의 설치 작업에서는 이미지를 보려는, 소리를 자세히 듣고 싶은, 또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싶은 그 모든 경험치의 욕망을 한꺼번에 수용하게 한다. 「The flower」의 조형은 마치 지금이라도 퍼져나가야 될 것 같은 꽃 모양의 스피커로 끊임없이 보고 듣는 행위를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 이처럼 6명의 작가들로 미디어 극장 1부가 구성되며 1부의 첫 번째 전시에서는 손유미, 김창겸, 김해민, 올리버그림 작품이 선보여지며 한승구, 김병호의 작품은 1부의 두 번째 전시에서 소개된다. 또한 각 각의 전시마다 작가와 만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된다. 이 두 가지의 전시로 인해 미디어극장을 찾는 관객이 뉴미디어아트를 기반으로 디지털 이미지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해보길 기대한다. ■ 이은주

프로그램 Nice2 meet 2-작가와의 대화_2011년 4월23일(토), 오후3시 / 김창겸, 김해민, 손유미, 올리버그림 Nice2 meet 2-작가와의 대화_2011년 5월7일(토), 오후 3시 / 김병호, 한승구

미디어 극장 2부 open: 5월 14일(토)~6월 15일(수) 미디어극장 1부에서 영상, 설치, 미디어 퍼포먼스, 사운드오브제작업이 주를 이루었다면 2부에서는 극장 개념을 전격 이용하여 미디어작가들의 영상작업을 마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방식으로 싱글채널 작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더 나아가 갤러리 정미소를 찾는 관객은 특정적인 날에 어떠한 특정작가의 영상작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한번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은 상영되는 작가의 작업 10편이상을 한번에 감상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무엇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 중반에 많은 싱글채널 작업들이 소개되었다는 단초를 설명할 수도 있으며, 또한 그 시기의 작품들을 최근의 작품들과 함께 동시에 상영하여 그간 작가 작품의 사유와 사회적 환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문의 contact 199-17 Gaeksuk B/D 2F Dongsungdong Jongno Seoul, 110-810, Korea Tel. +82-2-743-5378 Fax. +82-2-764-8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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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코리나 슈니트展 / Corinna Schnitt / screening   2011_0409 ▶ 2011_0430


코리나 슈니트_Once Upon a Time_DV/DVD, 사운드_16:9, 00:22:00_2005

초대일시 / 2011_0409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8:00pm

경기창작센터 GYEONGGI CREATION CENTER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400-3번지 중앙동 전시실 B1 Tel. +82.32.890.4820 www.gyeonggicreationcenter.org


이 작품은 고정된 카메라 앵글의 제한으로 이루어진다. 카메라 한 대가 계속 축을 중심으로 돌면서 방한가운데에 있는 기준점 위에서 촬영을 한다. 카메라 작동은 너무나 놀랍게도 이루어져 그 결과 코리타 슈니트의 작업으로 귀착되는데, 평범한 거실이 점진적으로 애완동물들로 점령당하고, 서서히 황폐화한다. 동화같은 이야기... 옛날에, 인간이 길들여지자, 그 동반자들이 문명화된 공간을 재정복하였다.
코리나 슈니트_Once Upon a Time_DV/DVD, 사운드_16:9, 00:22:00_2005
코리나 슈니트_Once Upon a Time_DV/DVD, 사운드_16:9, 00:22:00_2005

슈니트는 매우 정확한 영화촬영법에 기반을 두고 회화적인 언어를 적용한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상호보완적이다. 슈니트의 비디오에서 그녀가 만든 현장과 연출된 장소들은 사회적 가치와 코드의 완전한 시스템에서 개인을 어떻게 위치시키는지를 인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소통의 의미와 상호작용을 다루며, 현대적 역기능에 대하여 표현한다. 그녀는 클리셰를 연출하고 작가가 관찰하는 사회적 가치 판단에 대한 인식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한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권유한다. ■ 경기창작센터
코리나 슈니트_Once Upon a Time_DV/DVD, 사운드_16:9, 00:22:00_2005

 



Bruit qui pense

크리스틴 라께展 / Christine Laquet / video   2011_0409 ▶ 2011_0430


크리스틴 라께_개와 늑대의 사이_영상_16:9, 00:07:55_2007

초대일시 / 2011_0409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00am~08:00pm

경기창작센터 GYEONGGI CREATION CENTER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400-3번지 중앙동 상설전시실 Tel. +82.32.890.4820 www.gyeonggicreationcenter.org


나는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시각적 수수께끼를 제안한다. 그 내면에는 자연미와 야생미에 인공미가 조화를 이룬다. 나의 작품세계는 이동성과 적응의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를 통해 왜 사회적 영역과 인간의 습관을 연관 짖고자 한다. 정치, 신화, 사회, 지리, 인류학, 자연사적인 교차점에서 나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나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지점으로 돌아온다. '다른 곳'으로 이처럼 이동하여 분명 두 시대 사이를 오가며 사고하게 된다. ■ 크리스틴 라께
크리스틴 라께_Just before, was the Dorippe Granulata_영상_00:05:00_2007

개와 늑대의 사이 ● 땅거미가 질 무력 야외에는 두터운 소리가 무리를 이룬다. 이 때 학교 공터에는 십대들이 모여 밤의 운치를 느낀다. 베이스 기타 연주자는 거친 연주를 하며 무언가 찾아 헤맨다. Just before, was the Dorippe Granulata ● 이 단편영화는 코페르니쿠스설의 혁명이라고 일컬을 만한 동물 다큐멘터리이다. 퍼포먼스 작업에 가까운 이 비디오는 관조적이며 깊이 있게 빠져들게 만드는 초상화라 할 만 하다. 원자폭탄의 폐해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도립 그라눌라타(dorippe granulata : 백색의 게 일종) 앞에서 히로히또 황제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만족해 하는 모습이 Sokurov 영화 「태양(The Sun)」에도 나온다. 손전등을 이용하여 게를 추격하듯 촬영하므로, 전등 빛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가 모래더미에 경직되는 모습이 마치 사무라이 전사의 머리와도 같다.
크리스틴 라께_속임수_디지털 영상_00:04:30_2010

속임수 ● 이 작품은 물속 풍경에 대한 경로(route)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하천에서 잠수하면서 천천히 돌아 움직이며 위협적인 동물이 나타날지 기회를 엿보며 매복하고 있다. 접근방식은 다소 머뭇거리기도 하지만, 누가 누구를 사냥하는지 알 수 없다. 인공과 자연의 공간 사이에서, 우리는 눈앞의 유혹에 잘 속지 않는다. 그럼에도 의심은 계속된다... Manguetown ● 「Manguetown」은 시대의 대표적 위인인 다윈과 아인슈타인을 두 주인공으로 한다. 그들은 브라질 북동부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어 연출한 거대한 거인 인형들이다. 두 명의 유명한 과학자들은 브라질로 여행을 가기로 한다. 1세기의 격차를 두고 있는 두 인물은 숲에서 만나 제, 사회, 정치적 변화를 겪고 있는 이 방대한 국가의 근대 역사에 경이로워 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론을 재고하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의 이론을 비아냥거리며 브라질의 북동부지역의 소요에 대한 도시적, 사회적, 생태적 묘사를 통해 관련 사태에 의문을 던진다.
크리스틴 라께_마라부_2채널 영상_00:07:54_2008 / Co-production CNC DICREAM

마라부 ● 실제 촬영 사진과 3D 이미지를 혼합하고, 위협적인 동물과 사악한 인간의 이미지를 혼합하는 '황새(marabout)'는 우리의 통념을 깨고 아프리카 전통과 예식이 깃든 분위기 속에서 발견된다. 황새가 주인공인 이 영화에서 그는 마치 여러 장면을 장악하는 위용을 발휘한다. 여러 은유적 인물들의 행동이 하나로 관통되며, 황새는 인간의 손 위에 놓이게 된다. 황새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진화하는 모습을 담는 영화의 배경은 카사블랑카이의 큰 신전인 '핫산 2세 모스크' 내에서 촬영했다. * Marabout는 프랑스어 동음이의어로 신성한 '황새'와 이슬람교도의 '성자'를 이른다. 애국가 ● 타일랜드에서는 애국가가 공공장소에서 하루에 두 번 들린다. 국가가 울리면, 사람들은 모든 활동을 멈추고 애국가를 경청하며 똑바른 자세로 서야 한다. 나는 공원, 시장, 경찰서 앞 등 방콕에서 20번의 이 동원사태를 촬영하였다. 일 분 동안 꼼짝 않고 있는 신체들은 마이크 의식(micro-ritual)을 형성하며 전체가 하나의 안무를 만들어낸다.
크리스틴 라께_애국가_영상_00:19:00_2007

분리수거 ● 분리수거라는 작품은 프랑스의 소도시 뽕투와즈에 있는 군사 건물이 예술창작지구로 지정되면서 2004년 로랑 뻬르넬과 크리스틴 라께가 했던 퍼포먼스이다. 일종의 불꽃놀이를 대낮에 행한 것인데, 소위 소모품으로 규정 되거나 시각적 기호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산업재료인 형광색 종이, 알루미늄, 플라스틱 같은 것들을 창 밖으로 날려보내어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위험표시를 알리거나, 주의를 끌게 만든다. 부케를 날려보내는 이러한 행위는 시각적 공해를 양산하고, 우리가 던지는 재료들의 승화가 비로소 이루어진다. ■ 경기창작센터




입체•나선형 변증법 Pyramid Dialectic

정수진展 / CHUNGSUEJIN / 鄭秀眞 / painting   2011_0412 ▶ 2011_0522 / 월요일 휴관


정수진_입체, 나선형 변증법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909h | 정수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12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몽인아트센터 MONGIN ART CENTER 서울 종로구 삼청동 106번지 Tel. +82.2.736.1446~8 www.mongin.org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몽인아트센터는 2011년 4월 12일부터 5월 22일까지 정수진의 개인전『입체•나선형 변증법: 정수진 개인전』을 마련합니다. ● 이번 전시는 회화, 즉 시각언어의 고유함에 대한 정수진의 오랜 생각들이 인간 의식과의 변증법적 작용을 통해 순환적인 다차원을 이루어가는 형상의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드러나는 과정들을 보여줍니다. 끝없는 상상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수진의 화면은 특정 내러티브나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순수한 형상 자체를 시각적으로 바라보려는 과정의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시각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 끌어들인 방법론이 바로 전시의 제목인『입체•나선형 변증법』이고, 그려진 모든 것은 이러한 변증법적 작용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결과물로서의 회화 작업을 통해,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의 본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정수진_Crag_2008

입체 변증법, 피라미드 변증법, 나선형 변증법: 궁극의 본질을 향해 열린 통로 정수진이라는 작가를 강하게 각인시킨 2000년의 개인전『뇌해(腦海)』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원근법이 사라진 듯한 공간, 중력마저 벗어 던진 듯한 공간을 부유하는 인물들과 사물들, 반복되기도, 혹은 해체되거나 파편화되기도 하며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물들이 끝도 시작도 없이 읊조리는,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기울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정수진의 화면이 수수께끼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도, 그 어떤 상징이나 은유를 위한 제스처를 보여주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화면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관람자들에게 정수진은 화면을 마주하고 서서 그저 '보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은 비밀스럽고 불가해한 이야기를 풀어내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색채와 형태가 전달하는 고유한 것, 시각 언어의 고유함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수진_무제_2008~10

"이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계이며 가시적이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느끼는 모든 체험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현재,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어떤 형태로건 물질성과 함께 체험된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이나 사물의 물질적 환경 안에서 경험하는 것. 그런데 그 장소나 인물, 사물이 가진 물질성은 얼마만큼의 지속성을 가진 견고함일까?" (2006년 작가 노트 중에서) ● 『뇌해』를 선보이던 즈음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정수진의 오랜 질문은 여전히 그의 작업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으로 제안된『입체•나선형 변증법』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작가 스스로가 고민하고 정리해온 '시각 논리'를 회화의 형태로 전개하기 위해 끌어들인 하나의 방법론으로, 순수하게 시각적인 하나의 이미지로서의 회화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정수진은 이 '입체 변증법(피라미드 변증법 혹은 나선형 변증법)'을 '무(無)가 유(有)가 되는 과정'을 거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논리라고 정의한다. 정수진에게 있어 회화는 우리 눈 앞에 드러난 세상의 질서가 적용되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눈 앞에 보이는 세상이 인간의 의식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듯이, 회화도 인간의 의식을 투영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각 논리'를 구성하는 전제가 된다. 회화의 경우, 이러한 비가시적인 인간 의식은 색채와 형태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가시화되어 하나의 시각적 결과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조합의 과정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입체 변증법인 것이다. 결국, 끝없는 상상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캔버스 위에 구현된 정수진의 작업은 어떤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혹은 무언가를 은유하거나 상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것들을 피하고 순수한 형상 자체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결과물, 즉 색채와 형태가 순수하게 화면 위에서 만나 화면을 구성해가는 논리를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정수진_Another 100 seconds_2011

그렇다면, 과연 정수진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그리고 그 작업을 구축하는 이 복잡한 방법론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정수진의 언급대로 이해한다면, 그의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형상들은 작가 정수진의 의식이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차원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정수진은 형상이 캔버스 위에 나타나는 과정을 다시 인간의 의식에 적용하면서 이를 해탈(解脫)에 이르는 인간 의식의 변화에 비유한다.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결론에 다다른다. 회화, 즉, 색채와 형태로 이루어진 다양한 표현의 결과물은 '신'이라 불리는 '무한함'을 측정하는 도구 중의 하나라는 결론. 그렇다면, 무수히 반복되는 입체 변증법의 과정을 통해 무한함에 조금씩 다가서게 되는 것, 이것은 결국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궁극적인 본질을 향해 열린 통로로서의 회화를 희구하는 것일까? 가시적인 세계가 제공하는 물질성의 견고함에 대한 정수진의 회의(懷疑)는 결국 보이지 않는 궁극의 본질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다시 그의 그림 앞에 서서 그저 그림을 바라본다. 여전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수진을 화면을 읽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저 바라본다면, 그의 불가해하고 매력적인 캔버스는 나에게도 궁극의 본질을 향해 열린 통로를 보여줄 것인가? ■ 몽인아트센터




정제된 풍경

권인경_이미경展   2011_0413 ▶ 2011_0513 / 주말, 공휴일 휴관


권인경_순간의 지속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130×162cm_2009

초대일시 / 2011_041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공휴일 휴관

리나갤러리 LINA GALLERY 서울 강남구 논현동 229-26번지 해광빌딩 1층 Tel. +82.2.544.0286 www.linaart.co.kr


4월. 얼마나 찬란하고 활기차고 따스한 계절인가. 2011년 4월 이 좋은 계절, 리나갤러리에서는 권인경, 이미경 두 작가의 『정제된 풍경』展을 준비하였다. '정제된' 단어가 말해주듯 물질에서 불순물이 없어져 더없이 순수해진 상태, 또는 정성이 들어가 정밀하게 잘 만들어진이란 뜻을 가진 이 타이틀에 걸맞게 권인경, 이미경 작가의 작품이 그러하다. 권인경 작가는 캔버스에 고서를 꼴라쥬 형태로 한장 한장 붙여가며 그 위에 수묵채색의 기법으로 풍경을 완성해 나가고, 이미경 작가는 한 획 한 획을 정말 정성껏 그어나가며 자기만의 풍경을 완성해나가니 이 얼마나 수공과 정성이 가득한 작품이 아닐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일상생활의 풍경을 작가는 무심히 스치지 않고 자기만의 눈으로 정제된 풍경을 완성하고 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보여주고 있는 우리 주변의 풍경들을 보며 우리는 당연한 공간으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지금의 이 모습이 우리의 과거를,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겨우내 얼어있던 것들이 이제 아지랑이 피듯 스르르 녹고있는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공간과 주변 풍경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두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작가의 입장이 되어서 작품을 바라보고 또한 작가의 시선으로 만성적으로 느껴졌던 주변의 풍경들을 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두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장인의 정신으로 작품을 완성시킨 작품들을 보며 집착에 가까운 이 작업에 경이로움을 표하기를 기대해본다. ■ 리나갤러리
권인경_순간의 지속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117×91cm_2009
권인경_정감화된 공간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116×71cm_2011
권인경_정감화된 공간_한지에 고서꼴라쥬, 수묵채색_53×73cm_2011

체험된 공간으로서의 도시 ● 사물들은 인간의 실존적, 역사적 경험, 즉 체험의 대상이다. 이것으로 구성된 3차원 공간은 대상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의미를 지닌 자리이다. 그것이 자연공간이던 도시공간이던 인간의 경험을 통해 의미화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 어떤 공간도 인간에게 포착된 이상 인간 삶의 흔적 밖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체험하게 되는 공간은 인문적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직접적 체험이 바탕을 이루는 삶의 의미형성체로서의 도시는 축소된 인문공간이다. 나의 작업은 바로 어떤 공간을 체험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의미부여와 그에 따른 해석을 통해 궁극적으로 실존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내 삶의 공간에 펼쳐진 미로 같은 골목길과 끝 모르고 치솟은 빌딩들의 스카이라인, 굽이쳐 흐르는 강물에 비친 시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의미를 지니며 각인된다. 인간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모든 역사적이며 상상적인 경험이 물리적 공간인 도시에 녹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인간이 도시공간에 개입하여 마치 고정되어 있는 듯한 도시를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게 하며 또한 도시공간 속에서 인간의 삶이 동시에 변해간다.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소우주인 도시에는 인간 개개인의 체험된 시간들, 공존하고 있는 자연의 변화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들의 역사가 융합되며 도시는 시간 속에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 권인경
이미경_봄날에(A Spring Day)_종이에 잉크펜_120×90cm_2011
이미경_모란이 필때(In the peony blossom time)_종이에 잉크펜_80×80cm_2011
이미경_해룡상회(Hyeryoung Sanghoe)_종이에 잉크펜_100×80cm_2010
이미경_지촌상회(Gichon Sanghoe)_종이에 잉크펜_40×75cm_2010

기억의 공유 -그 연결고리를 찾아서 ● 내가 십여 년 동안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보았던 우리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현장이었지만, 그 곳에는 분명 고고함과 여유와 따스함이 함께 쉼 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주변에는 높은 담벼락과 굳건한 대문, 날카로운 쇠창살과 단단한 자물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문은 조금씩 열려 있고 쉽게 드나들 수 있어, 마음의 고향으로 빨려 들어가는 비상구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다소 어눌하고 어질어져 보이는 구멍가게 풍경과는 달리 내 그림은 절제된 구도로 일관하고 있다. 하나하나 그 가게의 내부까지 정돈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무엇을 파는지, 주인은 누구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가게에 비치된 물건들은 절대 풀 수 없는 암호로 그려지는 궤적의 낯선 집합이 아니다. 날카로운 펜의 재질에도 그 영향이 있고 내 마음에도 그 이유가 있다. '비록 소소한 정이라도 기개가 없는 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작업 내내 나와 함께 했다. 빠르고 쉽게 다량의 작업을 선보여야 하는 작가로서의 아쉬움을 대신하여 힘들고 중노동에 가깝게 그리면서 실사에 바탕을 두어 한 터치 한 터치가 무의미를 표방하지 않도록 선긋기 중첩에 심혈을 기울였다. 단순히 유희로서의 자동기술적 끄적거림도 아니고 사대부의 정신수양으로서의 운과 획도 아니며, 해탈의 경지에 오른 무념의 선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보고 그린다'는 행위가 내 그림의 중심이고 동시대의 대표적 서정을 정리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내 작업의 모태이다. ■ 이미경




別憬/Another view

리준展 / LIJUN / 李君 / photography   2011_0414 ▶ 2011_0427 / 월요일 휴관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58#_디지털 C프린트_122×180cm_2010

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karts.ac.kr/gallery175 club.cyworld.com/gallery175


리준의 별경(別景), 대국적 발상과 한국적 카메라 아이 (Camera eye) ● 리준의 산수화같은 풍경 사진은 사진술이 갖는 광학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한 젊은 사진가의 실험 정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풍경 사진을 촬영함에 있어 광각렌즈를 써야한다거나 조리개는 조이고 거리는 무한대에 두는 것은 아마추어 사진가들도 아는 상식이긴 하지만, 작은 피사체를 찍는 클로즈업 촬영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리준은 자연 풍경을 작은 크기로 실내에 재현, 감상하는 취미인 분경 미니어처를 자기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다. 여느 자연 풍경을 찍는 보통의 풍경 사진과는 달리, 리준의 경우는 축소한 작은 풍경을 피사체로 삼았으므로 조리개를 최대한 조여도 여느 풍경 사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깊은 심도를 얻을 수 없다. 보통의 풍경 사진에서라면 원경과 근경이 모두 선명하게 초점이 맞겠지만, 리준처럼 축소한 풍경을 촬영할 경우, 선명한 원근감이 결여되어 구체적이지 못한 풍경 사진이 되게 마련이고 결국 선명함보다는 심상적인 사진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리준이 피사체로 작게 축소한 풍경에는 풍경 사진에 흔히 쓰이는 대형 카메라도, 작은 피사체를 촬영하는 데 사용하는 마이크로 렌즈도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기 곤란한 피사체를 자기 작품의 대상으로 삼은 리준의 시도는 통념을 벗어난 무모한 발상같기도 하다.
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46#_디지털 C프린트_90×140cm_2010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62#_디지털 C프린트_66.67×100cm_2011

이같은 광학적 한계를 리준은 이렇게 극복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부분 부분 초점을 이동하여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뒤, 초점이 맞지 않는 부분을 지움으로써 전체적으로 초점이 맞는 흑백의 풍경 사진을 만든 것이다. 수십장의 원본 파일을 합성하여 이중 초점을 한꺼풀씩 걷어내는, 정교한 회화 작품 이상의 인내와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24#_디지털 C프린트_100×66.67cm_2009

이렇게 만들어진 리준의 연작 「별경(別景)」은 총 60여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리준은 이 작품들을 찍기 위해 전국을 돌면서 소위 취미를 넘어선 걸작이라는 '미니어처 분경'들을 찾아 다녔고, 비닐하우스나 분경 소유자의 집에서 밤새 촬영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리준은 아파트 베란다나 거실에 꾸며진 작은 폭포와 안개 발생기로 연출된 미니어처 분경을 카메라 파인더로 보고 있노라면 대자연의 축경같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이 말에서 아파트 실내에다 축소한 가짜 풍경이라도 만들어 자연의 기운생동(氣運生動)의 교감을 맛보려는 현대인의 자화상이 보이는 듯하다. 그가 제목으로 붙인 '별경'이라는 말은 '또 다른 깨달음'이라는 동양적 사색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리준의 미니어처 분경 사진은 언뜻 보면 또 다른 세상의 자연 풍경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전통적인 다소 고루한 양식의 풍경같지만, 작가는 이 사진들을 찍으면서 클로즈업의 매력에 흠뻑 빠져 생기를 만끽하고 현실 세계와는 다른 작가만의 마술적 최면에 빠져 실제 자연의 기운생동 이상의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01#_디지털 C프린트_66.67×100cm_2008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02#_디지털 C프린트_66.67×100cm_2008

리준의 「별경」연작은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우리나라의 유명한 산천을 답사하여 그린 산수화이듯, 리준의 「별경(別景)」연작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미니어처 분경들을 답사하여 찍은 사진이다. 그러나 진경산수화가 단지 산천을 그대로 베낀 그림이 아니라 우리 산하에 대한 자긍심을 담은 그림이듯, 조선족 중국인인 리준 역시 미니어처 분경을 통해 자신의 고향인 두만강을 보는 듯한 대륙적 역동성을 자신의 사진에 담았다. 이 조선족 유학생이 백두산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키웠던 원대한 꿈은 콘크리트 숲속에서 갑갑하게 돌아가는 서울이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미니어처 분경처럼 쪼그라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풍경 사진은, 한국 산수화 전통에 맥이 닿으면서도 또 한편으로 현대 도시 문명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풍경 사진이며, 한국어와 중국어를 구사하고 할아버지의 고향이 북한인 조선족 중국인이 한국에 와서 찍은 소위 '현대 사진'인 것이다. 풍경 사진에 대한 조선족 유학생 리준의 새로운 접근은 한국 사진계가 주의깊게 봐야 할 한국 사진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리준_From the series 별경/別憬/Another view_005#_디지털 C프린트_66.67×100cm_2008

또 한편으로 리준의 이같은 작업은, 디지털 기술을 풍경 사진에 보다 진전된 방식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사진 기법적 의의가 있다. 풍경 사진에 있어 기존의 디지털 기법은 도시 풍경 표현이나 단순한 선을 가미하는, 소위 '합성' 차원에 머물러 왔지만, 리준은 클로즈업의 초점 문제를 디지털로 극복했다든지,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복잡한 자연 풍경도 실재의 풍경처럼 마음대로 그렸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 그러나 그의 이같은 적극적이고 진일보한 디지털 기법 활용은, 정교한 회화 이상으로 치밀하고 인내를 필요로 하는 아날로그적 접근의 도구인 것이다. 즉, 리준의 이같은 작업은 무한 복제와 양산으로 요약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에 현대 사진이 나아가야 할 바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중국의 광활한 풍경에서 대국적 발상을 얻었고, 한국적 현실을 인식하고 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자신만의 풍경 사진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 구성수




거기 Somewhat Somewhere

김은진展 / KIMEUNJIN / 金銀鎭 / painting   2011_0414 ▶ 2011_0522 / 월요일 휴관


김은진_남녀상열지사 love affairs_캔버스에 피그먼트_145×112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409c | 김은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5:00pm

작가와의 대화 / 2011_0414_목요일_05:30pm 참석 / 평론가 고동연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김은진의 치유와 초탈을 위한 '남녀 상열지사': 신기(神氣)를 담은 물건의 성상화(Icon)김은진과 성상화의 전통 ● 러시아 정교의 전통에서 이콘(Icon), 혹은 성상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성상화에서는 관람객과 그림 간의 교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하여 배경의 세부 묘사가 최대한 배제되었고 이에 반하여 중앙의 성모, 성자, 혹은 성인의 모습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클로즈업 되었다. 동양화가 김은진의 작품은 성모 마리아 상이나 대표적인 순교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만을 부각시키는 성상화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치유」(2003)에서 전체 인삼의 무정형적인 듯이 보이는 형체는 이내 사람의 전신상을 연상시키면서 화면의 중심에 직립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불쌍하게 생각하다」(2005)에서도 목이 부러지고 머리가 한 쪽으로 기운 인형은 허공에 내던져져 있다. 어떠한 물리적인 배경이나 이야기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인형은 덩그러니 공중에 매달려져 있다. ●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소재들은 성상화의 주제들과는 명백히 달라 보인다. 「불쌍하게 생각하다 」에서와 같이 손상되고 더러워진 인형의 모습이나 「개가죽과 지팡이」(2004)에서와 주교의 옷을 입고 있는 얼굴 없는 성직자의 모습은 이콘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에는 성상화에 비견할 만한 몇 가지 요소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 첫째로 그녀가 재현하고 있는 인삼, 인형, 기이한 여성의 모습,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지속적으로 그녀의 작품들에 등장하면서 작가만의 도상(iconography)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도상들은 전혀 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공간에 놓여지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종의 아이콘과 같이 등장한다. ● 둘째로 성상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특정한 대상을 개념화하고 알아보기 쉬운 형태로 간략화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상화에서 다루어진 대상은 일상 생활에서 실제로 보고 느끼는 특수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형화된 대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성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태나 묘사는 대상이나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나 특징적인 부분만을 전달하는 축약된 형태로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성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예술님의 책형 이미지는 예수님의 고난에 관하여 잘 알려진 나레티브 중에서 절정에 다다른 한 순간만을 포착한 것이다. 즉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은진의 「心中常有 마음 가운데 항상 늘 그러한게 있다」(2009)에서도 인간 신체의 한 부분에 속하는 심장은 전체 생명력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도 살아서 꿈틀거리고자 하는 인간 전체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 그렇다면 왜 김은진은 자신의 소재들을 성상화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는 왜 인삼이나 인형으로부터 인종적으로 혼성되어 보이는 눈이 큰 여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자주 사용하는 소재들을 단순히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인가 경배되고 강렬하게 정서적으로 관람자를 자극하는 대상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리고 이를 위하여 전체가 부분을, 그리고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실은 비 논리적인 성상화의 미학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김은진_남녀상열지사 love affair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5×112cm_2010
김은진_남녀상열지사 love affairs_캔버스에 유채_145×112cm_2010

성상화의 혼동된 세상: 전체/부분, 안/밖이 바뀌다. ● 성상화에서 전체와 부분을 혼동시키는 미학적 수법은 결국 그것이 지닌 특정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성상화는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을 '있었던 그대로' 혹은 '본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성상화는 무엇보다도 보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그려지고 보존된다. 그러므로 성상화는 지나치게 사실주의적이거나 개연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 대신 작품은 그것을 바라본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정서적 반응, 즉 신의 존재를 경험할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신도들은 집의 한 구성에 성상화를 설치해 놓고 매일 경배를 드린다. 우리나라의 부적처럼 성상화는 초월적인 기운[氣韻]을 내포하고 있는 '물건'이 된다. ● 김은진의 작품에서도 특정한 물건들이 다루어지고 재배열되는 방식은 결코 논리적이지도 서술적이지도 않다. 「주름의 마리아」(2007)에 등장하던 인형의 모습은 독립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거대한 치마의 한 부분을 이룬다. 또한 그녀의 하체는 다시금 전체 옷자락의 부분이 된다. 독립적인 개체였던 이미지는 짙은 붉은 치마 주름에 파묻히면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유사한 아이콘들은 특정한 시, 공간을 암시하는 배경과는 무관하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그림들에서 전체가 되기도 하고 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한 「달콤한 배」(2006)나 「제단」(2009)에 등장하는 산수 풍경은 「남녀상열지사 1」에서 각각의 돌산이나 수석으로 축약되고 진열장대에 배열되어 있다. 「남녀상열지사 1」나 「안녕하세요?」(2009-2011)에서 골동품 상을 연상시키는 진열장 위에는 산들의 작은 모형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으며 이외에도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각종 아이콘들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게다가 징그럽게 생긴 심장은 일종의 '장기'와 같이 선반 위 한 자리를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콘의 예수님 상이 더 이상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를 설명해 내는 수단이 아니라 신의 영기를 받은 일종의 물건이 되듯이 김은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도상들도 그 맥락으로부터 이탈하여 영기를 지닌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 김은진 작업에 등장하는 심장의 이미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심장은 그야말로 인체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은 인체로부터 튀어나와서 또 다른 몸의 상체를 구성하게 된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인체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뿐만 아니라 관객은 인간의 생명력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기와 대면하게 된다. 게다가 작가는 강렬하고 반짝이는 색감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잡아 둔다. 그저 그렇게 지나가던 인체가 아니라 아예 해부되어서 내부가 외부로 드러내 보여진 신체와 장기의 상태는 성상화와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더 이상 간접적인 이야기나 메시지를 떠올릴 수 없으며 마지막 심장 박동수를 듣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된다. 게다가 산의 모형들과 함께 선반 대 위에 놓여진 심장들은 작가가 자유자재로 자연이나 인간의 생명력을 '물건'들로 해체, 재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은진_남녀상열지사 love affairs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3.5×145.5cm_2011
김은진_사다리도 The Jacob's ladder_캔버스에 유채_145×97cm_2011

김은진은 왜 안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을까?: 집을 뛰쳐 나오다. ● 대상을 맥락에서부터 이탈시키고 부분과 전체를 혼돈함으로써 소재를 특정한 나레티브나 상징적 의미로부터도 분리시키고 특정한 '기' 혹은 '힘'을 부여 받도록 만들고자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심장을 거대하게 그리고 그 뭉클 뭉클한 표면을 과장한 김은진의 그림은 과연 어떠한 충격 효과를 노리고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적당한 대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관심사는 종교로부터 사회 통념, 여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들은 여러 차례 다른 작업들에서 반복되기도 하고 서로 결합되기도 하면서 작가의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세계가 여러 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 하지만 안과 밖의 구분은 여성으로서 매주 교회에 다니면서 스스로를 특정한 사회적, 종교적 정체성 내부에 틀어 막고 있는 작가의 현실을 연상시킨다.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그림이 그녀의 개인적인 삶을 표방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각각의 물건들은 분명히 안과 밖의 이분법 속에서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존재성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튀어 나온 심장은 신체의 내부와 외부, 골동품 집에 놓인 '산'의 모형은 풍경화의 외부와 골동품 상의 내부, 그리고 나아가서 여성적인 얼굴과 남성적인 신체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국적인 인물상은 내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김은진의 2003년과 2005년에 등장하였던 손상되고 더럽혀진 인형의 모습이나 무섭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주교의 이미지보다 더 양가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제 막 짙은 색의 커튼이 드리워진 내부로부터 나와서 여신과 함께 산수 풍경을 즐기는 이국적인 얼굴의 여인(혹은 자화상?)은 마침내 집에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즐기는 듯 하다. 그녀는 무릉도원을 향해 떠나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젊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의 어색한 표정과 커튼으로 드리워진 공간은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자유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아름다운 산수 풍경에 등장하였던 산, 생명력을 상징하는 심장은 어두운 실내 선반에 일종의 물건, 혹은 상품과 같이 진열되어 있다.
김은진_my own libra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4.5×194 cm_2010
김은진_안녕하세요 How are you_캔버스에 피그먼트_91×116.5cm_2010

저항과 초탈을 위한 '남녀 상열지사' ● "보수적인 남성위주의 한국사회의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종교인으로서 동시에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로서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 간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혼란스럽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게 된다. 왜냐하면 한 개인으로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내 자신은 그런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이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회가 요구하는 삶과 내가 느끼는 내자신의 모습과의 넓은 간극을 극복하려는 포기 없는 노력들이 나의 작업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성상 등의 종교적 아이콘들과 그것과는 대치되는 나의 유약하고 고단한, 완벽함과 거리 먼 나의 삶의 현상들을 화면에 대립시키거나 마구 섞어서 재현 시킴으로써 이 양쪽 삶의 괴리감이 주는 고통을 객관화 하려 한다. 이러한 나의 예술적 노력은 나의 구도의 한 방법이자 작업의 주제이다."(김은진, "작가노트,"2010-11) ● 작가는 자신이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체제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는 일상 생활을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면에서 이국적으로 생겼지만 매우 어색한, 그리고 수동적이며 답답한 실내를 배회하는 무표정한 여성의 모습은 작가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한시적으로만 자유를 즐기는 이국적인 여성처럼, 언젠가는 여성성이라는 몸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싶어하는 양성적인 불상처럼, 수술대에 놓여서 마지막 숨 고르기를 희망하는 심장처럼, 그리고 내면에 까마귀와 같이 불길한 야수적 본능을 숨기고 있는 인물상처럼 그녀의 그림에는 폭풍전야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는 힘이 공존한다. 그녀의 작업들에 존재하는 확연한 안과 밖의 구분은 이러한 해석을 부추긴다. 게다가 「안녕하세요?」에서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위압적이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자신의 표정을 감추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한편 애처롭다. 남녀 상열지사 시리즈 둥 「사다리」위에서 수영복을 입고 다양한 정체성을 취하면서 날개 짓을 해보려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귀여우면서 어색하다. ● 모순되고 갑갑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인식은 결국 현대 예술가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프로이트가 1910년 글 레오나르드 다 빈치: 그의 성장기의 기억(Leonardo Da Vinci, A Memory of His Childhood)에서 르네상스 대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불새로 (잘못) 해석하면서 예술은 슬픔을 분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켜가면서 등장한 정서적, 미학적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오랫동안, 그리고 현재에도 예술가와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을 바라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관점을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종교와 예술의 공통점이 있다면, 종교 또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와 그들을 둘러싼 이 세상의 고통을 보다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초월해 보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욕충만도」(2007)에서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갑갑한 실내에서 초탈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은진의 모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터의 탈피가 불가능하다면 초탈을 믿는 종교인처럼, 그저 묵묵히 부처와 같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생산적인(?) 대안을 결심한 부인처럼 불상의 이미지는 실존적인 고통과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초탈이나 초극의 길을 걷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혹은 「남녀상열지사」에서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군중의 모습과 대포로부터 쏘아 올려진 어린아이의 모습은 일상사의 고통을 '춤판'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 하지만 과연 그녀의 양성적인 몸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자아로 이어질지, 초탈하고자 하는 종교인의 염원이 과연 이 생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예술이 과연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초극이나 초탈이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면 놀라운 신기를 지닌 성상화들도 우리의 불안을 떨쳐주고 고통을 치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의도를 지녔던 많은 현대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겪어온 시행착오라면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해결방법은 결국 저항을 계속해 가는 것뿐일 것이다. ■ 고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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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욱展 / HUHMYOUNGWOOK / ??? / photography.painting   2011_0414 ▶ 2011_0522 / 일,공휴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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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후원 / 로얄&컴퍼니(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로얄 GALLERY ROYAL 서울 강남구 논현동 36-8번지 로얄TOTO빌딩 2층 Tel. +82.2.514.1248 art.royaltoto.co.kr


물론 사물도 나이를 먹는다. 시간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심지어 산이나 강, 바다나 별 같은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금씩은 변한다. 하물며 고작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들 따위야 말할 필요도 없다. 흐르는 시간은 마치 이끼와 물때처럼 사물에 달라붙어 흔적을 남긴다. 반짝이던 것들은 그 빛을 잃고, 투명한 것들은 탁해지곤 한다. 시간은 사물과 만나 때로는 긁힌 자국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움푹 들어간 흠집이나 부스러지는 페인트 조각이 되기도 한다. ● 오랜 시간을 살아낸 물건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된다. 이는 시간이 변화시키는 것이 단지 사물의 외양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간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은 그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을 매일 닦고 손질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영원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때는 금보다 더욱 비쌌다던 알루미늄처럼, 귀금속도 갑자기 잡금속이 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사물을 해석하는 우리의 관념 역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우리가 사물을 보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물론 본다는 행위는 일정 부분 사회적이고, 문화적이며,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보는 행위의 의미는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되어 하나의 의미망을 구축하고 있다. 물론 그 의미의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조각들을 읽어내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참고할 만한 수많은 방법론과 문헌들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그 중 어떤 것들은 인류가 만들어 낸 지적 자산 중 가장 빼어나고 매력적인 작업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론도 움직이는 시공간에 놓인 사물의 의미와 운명을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수단는 아니다. 방법론들은 마치 질기지만 성근 그물과 같아서, 큰 물고기는 옭아매더라도 작은 새우나 게, 바닷물 같은 것들은 도무지 포획하지 못한다. ● 이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부분의 사물보다 빠르게 살아가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시간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나 아름다워지고, 어떤 것들은 추해지는가. 어떤 물건은 시간이 흘러 애틋한 것이 되고, 어떤 것은 낡고 촌스러운 것이 되는가. 왜 대량생산된 일상용품들 중 어떤 것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또 어떤 것은 수집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는 장인이 만들어낸 '작품'과 비슷한 대접을 받는가. 오랜 시간을 살아온 물건을 우리가 소유하거나 버리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허명욱의 카메라는 우리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그런 질문들을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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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허명욱이 찍은 것은 트렁크나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가 아니다. 그 위에 슬어 있는 '녹'이다. 장난감 자동차와 트렁크에게 시간은 '녹'의 형태로 내려앉는다. 시간에 마모된 사물들은 처음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존재가 된다. 허명욱은 오래되고 작은 장난감 자동차를 세밀하게 관찰하여, 카메라를 통해 자동차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을 날카롭게 잡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무언가 아름다운 것으로 바꾼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독특하다. 그의 카메라는 사물과, 그리고 거기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과 깊게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늙어가듯이, 각각의 사물들은 전부 다른 방식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허명욱은 알고 있다. 그가 찍은 어떤 사물에 슬어 있는 녹은 마치 수풀에 내리는 비처럼 생겼고, 어떤 것은 말라붙고 벗겨진 나무껍질처럼 보인다. 대량생산된 산업생산품이 지니는 기능적인 미학은, 시간과의 화학 반응을 통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물로 다시 태어난다. ● 우리는 허명욱의 작업을 통해 시간을 버텨낸 사물이 새롭게 지니게 된 아름다움과 물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허명욱의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아마도 대상이 너무 작기 때문에 초점이 맞는 범위는 거의 밀리미터 단위로 변화할 것이며, 같은 이유로 특정한 부분을 조명으로 비추거나 빛을 가리는 일도 어려울 것이다. 렌즈가 피사체와 거의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카메라 경통으로 밀려들어오는 난반사를 가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허명욱은 카메라를 사물에 바짝 들이대고, 정밀하게 움직이며 심도와 초점, 빛을 조절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사진에서는 묵직한 아름다움을, 어떤 사진에서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낸다. ● 이는 그가 물건을 찍는 일로 단련된 사진가이기 때문이다. 제품 사진가의 눈은 일반인 뿐 아니라 다른 사진가의 눈과도 전혀 다르게 진화되어 있다. 그들은 연필 한 자루와 지우개 하나를 촬영할 때, 그것이 어떻게 놓여야지 아름다운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해내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연필이 지우개에 걸쳐진 것이 아름다운지, 수평으로 놓인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을 바닥에 놓고 지우개를 수직으로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을 지우개에 찔러 넣어서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지, 연필과 지우개를 교차하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지, 만약 그렇다면 그 각도와 간격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순간적인 미적 판단이 가능한 이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필과 지우개가 지닌 특징과 재질을 단번에 파악하고, 두 제품의 반사율 차이를 감지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들은 카메라로 사물의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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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허명욱은 제품 사진가들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금속공예 작품이나 반사가 심한 제품을 주로 작업하는 테크니션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그것이 허명욱의 눈과 카메라가 우리와는 다른 기관으로 진화한 까닭일 것이다. 탄탄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허명욱의 프레이밍은 정밀하다. 그의 발색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피사체에 떨어지는 빛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아무렇게나 쌓은 것처럼 보이는 장난감 자동차와 트렁크의 형태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치밀하다. 특히 허명욱은 능란하고 유연하게 사진의 크기를 다룬다. 그는 72분의 1로 축소되어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다시 72배로 확대하여 실제 자동차의 크기로 만들어 프린트한다. 이 과정에서 장난감 자동차가 지닌 디테일의 감각은 극도로 확대되어 우리에게 다가오며, 우리는 사물이 살아 온 시공간을 좀더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 사실 정교한 기술을 가지고 장난감과 진지하게 씨름하는 프로페셔널의 모습은 어딘가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허명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그는 정밀하게 찍은 사진을 캔버스에 프린트하고, 프린트 위에 부드러운 컬러의 아크릴로 직접 채색한다. 심지어는 직접 쇠막대를 구부려 액자까지 만들어낸다. 허명욱의 작업은 일반적인 사진가들과 달리 사진을 찍고 프린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진 이미지가 완전한 형태의 '사물'이 되는 데까지 섬세한 눈과 손으로 개입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사진가들보다는, 물건을 만드는 장인이나 공예가들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사진이 피사체가 주는 존재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 자체로도 완결된 물성을 지닌 사물이 되기를 바란다. ● 어쩌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루는 그의 기술은 직업적인 버릇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의 눈과 카메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다면, 낡은 트렁크는 그냥 낡은 트렁크에 불과했을 것이고, 장난감 자동차는 오래된 장난감 자동차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렇게 묵직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물건들이었는지 몰랐을 것이고, 그들의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복잡하고 중첩된 구조 안에 있다. 실제 자동차가 가지고 있었을 아름다움은 장난감으로 제작되는 과정과, 다시 수십 년이 지나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여기에서 허명욱의 사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이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과연 우리가 느끼는 이 감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원래의 자동차인가? 그렇지 않다면 장난감인가? 혹은 허명욱의 카메라가 새로 만들거나 발견해낸 것인가? 분명한 것은 허명욱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의 흔적과 시간을 추억하며, 그것을 욕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아름다움과 미의식은 자생적으로 자라나기보다는 수입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기 때문이다.
허명욱_작업실 전경
허명욱_작업실 전경

중요한 것은 그 아름다움의 성격이, 과연 지금-여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하는 부분이다. 허명욱의 작업물은 아름답고 독특하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사진이라는 '물건'이 지닌 완성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과연 그 아름다움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종류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름다움이 매우 민감한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참으로 복잡한 존재여서, 한편으로는 예술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히려 예술을 공격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어떤 예술들이 아름다움이 버틸 수 없는 황량한 공간에서만 자생하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사진은 전통적으로 대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기능을 해 왔다. 예를 들면 제품과 패션 사진을 비롯한 상업사진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들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격정적인 한편, 서늘하고, 관능적이고, 냉정하기도 하다. 프로페셔널 사진가들이 생산한 아름다움은 미디어와 인터넷을 타고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둘러싼다. 우리는 주로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이미지를 바탕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과 관념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둘러싼 사진 속에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은, 우리의 미적 관념을 공격하고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여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한다. 예술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 불완전하고,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취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 허명욱의 사진은 한편으로는 매혹적이고 아름답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이는 우리의 삶이 그의 사진보다 대개 남루하고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사진을 찍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 충분히 아름답고 만족스럽다면 굳이 사진을 통해 아름다움을 소유하려고 할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허명욱의 사진에 매혹되는 것 역시 그 때문이다. 허명욱은 한때는 대량생산된 일상용품에 지나지 않던 사물이 지니게 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작업 안에서 아름다움이 만들어지는 서사는 복잡하고, 내재된 욕망은 다양하다. 아마도 그는 예술이라는 영역을 지나면서 수많은 질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질문에 대답하며 조금씩 전진할수록, 우리는 그를 통해 사물의 다양하고 복잡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 김현호




A master piece : 얼- 얼을 통한 진짜를 말하는 가짜

하명은展 / HAMYOUNGEUN / 河明殷 / painting   2011_0415 ▶ 2011_0501


하명은_Girl, with a masterpiece painting earring_혼합재료_120×60×6.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07a | 하명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15_금요일_05:00pm

갤러리 도올 기획 초대展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A master piece: 얼" - '얼'을 통한 진짜를 말하는 가짜 ● 20세기 이후의 예술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정은 과거와 현재와의 관계맺음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과거가 새로운 것을 낳는 이러한 현상은 재현의 반복적 현상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작업은 과거를 재현하는 것에 의미를 둔 것만이 아닌, 작품자체를 재현하는, 과거에 대한 회상과 현재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1세기 미술시장에는 하루에도 수십 가지의 패러디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더 이상의 새로운 순수창작물 등장의 한계로 설명될 수도 있고, 기존의 미술품을 하나의 상징으로 인정하여 그것을 재인용하고 있는, 일종의 안전성을 보장받는 작업의 시대적인 반복의 행위라 볼 수 있겠다. ● 본인의 작업은 유명작가의 작품이미지에서 일부를 차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분할하여 다시 나만의 패턴으로 표현하는 것이 작업방식이다. 최근 인물을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은 어떠한 다른 소재보다도 무궁한 변화와 다양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고자 하고 있다. 얼굴에서의 "얼"이 정신의 줏대, 넋, 영혼, 정신 등으로 풀이되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있고 수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 하나도 동일한 내용을 가진 것이 없다. 한 사람의 얼굴의 생김새는 그 사람의 삶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명은_L.S.H-730920_혼합재료_60×60×6.5cm_2011
하명은_Patti. K- 380228_혼합재료_60×60×6.5cm_2011

이번 전시에서의 얼굴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이전의 작업에서처럼 명화의 일부에서 등장했던 인물이 다시 나타나는데 이는 모양이 변형되어 실제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으로 차용에 차용을 거듭한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제멋대로 해석하여 스스로 인정하려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왜곡된 얼굴의 표현으로서 보이는 것을 보이는 데로 보지 않고 추측하여 인지하는 시각적 습관을 버리게 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얼굴은 명화 속에서 발견한 것이 아닌 주변에서 차용한 얼굴들이다. 새로운 얼굴의 이미지로서 현 시대를 대표하거나, 이슈가 되었거나, 아주 개인적 관심으로 선택한 인물들을 소재로 삼아 누군가에게 차용되길 기다린다. 본인은 작업에서 팝아트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인물을 표현함으로서 현 시대의 대중성을 반영하고, 얼굴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가장 다양하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사회에서 항상 마주치는 다양한 얼굴.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다른 다양한 얼굴. ● 조형적인 틀은 이전 작업들과 흐름을 같이하여 시각적, 공간적 입체를 중시한다. ● 'CANVAS in canvas' 로서의 다多평면화를 추구하여 1차적 평면회화를 회피하고자 하고 평면을 입체화하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을 표현함으로서 내용적으로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하명은_A master piece-#A Seductive Girl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A master piece-#A Windy Girl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A master piece-#A Happy Girl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A master piece-#A Sad Girl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A master piece-#Think about him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A master piece-#A Hairband Girl_혼합재료_120×19×8.5cm_2011
하명은_무얼 먹을까 무얼 입을까What should I eat ' wear_혼합재료_35×35×9cm_2010
하명은_Lichtenstein#Hamyoungeun-Black'White Woman_혼합재료_35×35×9cm_2010

회화작품임과 동시에 입체, 조각 작품의 틀을 갖추고, 작품자체를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관객의 시선을 이리저리 '통과'하게 하고 안쪽의 무언가를 '찾는' 관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이는 평면의 반복행위로 평면의 성격을 가진 조각들의 반복이 조각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간감을 생성하여 입체물의 형상을 가지도록 한다. 이것은 평면이기도 하고 입체이기도하다. ● 본인은 이렇듯, 이중적 구조의 의미를 지닌 개념적 팝아트, 다多 평면의 구조를 지닌 평면회화의 표현으로 여러 복합적인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어렵기만 한 현대미술이 아닌, 시간과 공간성을 가지고 대중과 쉽게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 하명은




JOHN & BALBOA

홍남기展 / HONGNAMKEE / 洪男基 / mixed media   2011_0415 ▶ 2011_0501 / 월요일 휴관


홍남기_DEUX_드로잉 애니메이션_00:01:15_2011

초대일시 / 2011_0415_금요일_06:00pm

기획 / 스페이스15번지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비슷한 취향을 지닌 동시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특히나 남자들끼리라면 더욱 그렇다. 홍남기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09년 7월쯤이었다. 거대한 3채널 작업인 'Mr. Hong'은 3D 애니메이션, 디지털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 등이 뒤섞여 있었다. 작가 본인이 게임과 영화(좀비, 호러, 밀리터리 물)을 좋아하는 남자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은 내가 비슷한 취향의 남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기 위해 그의 신작을 보게 되었을 때의 반응 역시 과거의 그것과 비슷했다. 아니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남자들이 좋아하는 소재와 주제는 전형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분히 한국의 남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것도 아닌가 보다. 홍남기 작가는 함께 경기창작센터에 머물렀던 지하드라는 아랍 아티스트와 서툰 영어로 군대이야기를 몇 시간씩 떠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밀러터리 대화 이후에 남은 단어이자 둘의 인사법이 '헤이~ 칼라시니코프'였다고 한다. 지하드가 떠나기 전날 함께 메탈리카의 「Enter Sandman」을 미친 듯 따라 불렀다는 영상을 내게 보내줬고 영상을 보는 나도 오래간만에 고개를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홍남기_John_드로잉 애니메이션_00:01:10_2011
홍남기_John & Balboa_드로잉 애니메이션_00:01:25_2011

동시대의 인물이면서 비슷한 외형을 갖추었지만 그 삶과 성향이 기묘하게 다른 사람들이 있다. 마치 희비가 교차하듯 두 인물의 유형이 철저하게 호불호로 나뉘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4일이라는 차이를 두고 태어난 찰리 채플린과 아돌프 히틀러는 모자의 여부로만 구분이 가능하리만큼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위대한 광대로 또 한 사람은 위대한 독재자로 시대를 장악했고 이들의 묘연한 운명론에는 수천 가지의 이유가 나열될 것이다. 그 중 첫째로는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납득하는) 각기 다른 시선이 있었을 것이고, 둘째로는 그들 자신이 파악한 자아와 이를 기반으로 규명화 된 자아가 이 묘연한 운명론을 결부 시켰을 것이다. ● 홍남기 작가의 '칼라시니코프'에 대한 잔상 또한 이러한 이면적 효과를 내포했다고 할 수 있다. 나치즘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AK-47자동소총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칼라시니코프 병사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소통 단어가 되는 상징어로써의 칼라시니코프가 그 예이다. 병사 칼라시니코프가 불호(不好)의 잔상이라면 상징어로써의 칼라시니코프는 호(好)적 잔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측면으로 보았을 때와 인식하게 되었을 때의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 차이가 이면적 효과로 상징화 될 수 있는 것이다. 홍남기는 작업을 통해 이 두 지점을 친숙한 영화와 게임 장면에서 포착해 내어 연출하기를 시도한다. ● 이처럼 기표에 대한 작업 방식은 '존 앤 발보아'로 수렴하게 된다. 얼굴이란 기표는 무엇보다 강력하다. 하나의 얼굴로 두 개의 영화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두 혹은 한 남자, 존과 발보아. 여기에는 같은 남자를 다른 남자로 의도적으로 오인해야 하는 것이 바로 영화보기의 미덕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동시에 존과 발보아가 비슷하게 폭력을 행사해야만 하고, 보는 이는 이 폭력을 충분히 즐기게 되는 영화 즐기기의 구조 역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홍남기_미하일 칼라시니코프_아스키코드 드로잉, 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2011
홍남기_못말리는 람보_아스키코드 애니메이션_00:00:25_2011
홍남기_John & Balboa_가변설치_2011

컴퓨터로 영화보기의 장점은 영사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게임도 이와 비슷하게 1인칭 시점과 조작이라는 유사 전능을 제공한다. 홍남기 작가는 디지털이 제공하는 이러한 시점, 시간과 유사 전능을 작품 제작의 형식으로 전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영상작업들의 시간은 내러티브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오히려 단지 대상을 보여주기 위한 시간으로 종속하게 될 뿐이다. 더불어 순간적으로 멈춰지는 이미지들을 재편집하고 디지털로 이에 효과를 주는 방식을 사용하면서 영화의 맥락과 재현 방식을 탈맥락화 시킨다. 그 결과 노골적이면서 현실적인 폭력의 이미지는 오히려 에로틱해지고 성스러워져버린다. 이는 의도된 재맥락화일 수도 혹은 유사하게 작동하지만 순수하게 유희의 활동일지도 모른다.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장난, 근엄한 초상 이미지에 콧수염을 낙서하거나 팔다리를 하나 더 붙이는 식의 그런 장난말이다. DOS기반의 컴퓨터 환경에서 이미지를 구현하려고 했던 방식(ASCII 코드를 이용한 방식)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 성용희_신진영




누구나 다 아는 노래 Refrain

김지현展 / KIMJIHYUN / 金志炫 / photography   2011_0415 ▶ 2011_0507 / 일,월요일 휴관


김지현_서울상회 seoul store_디지털 프린트, 디아섹_80×120cm_2011

초대일시 / 2011_0415_금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아뜰리에 아키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아뜰리에 아키 ATELIER AKI 서울 종로구 혜화동 71-10번지 Tel. 070.7522.7713 www.atelieraki.com


「누구나 다 아는 노래, Refrain」 ●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누구에게도 일상은 존재한다. 문화적, 사회적 이슈들이 큰 목소리로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존재한다. 그것이 너무 구태의연하고 늘 비슷비슷해서 우리의 머리속에 일상의 존재는 그리 길고 뚜렷하게 남지 않는다. 항상 주변을 맴돌아 왔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일상의 조각들은 가치없는 존재로 사람들의 머리 한 구석으로 밀려나고 만다. 2002년부터 6년간 나의 일상은 파리라는 도시에 존재했다. 물론 그것은 파리지앙들의 것과 같지 않고, 그들은 나를 더러'아시아에서 온 여행객'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 매일 지하철을 타고, 매일 까페에서 들러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시고, 매일 누군가에게 불어로 이야기 하고, 그들이 불어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듣는다. 파리지앙들이 그렇 듯, 그것들은 파리에서 생활하며 가지게 되는 일상들이지만, 외국인으로서 처음에는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던 것들이 조금씩 익숙해져 그것들이 차차 매일 반복되는 습관적 일상이 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이방인으로서 일상의 흡수, 반복이라는 소재를 파리지앙들과는 다른 시점으로 보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같아 보이지만 다른 하나의 단어,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시키는 방법으로, 알아차리기 쉽지않은 반복의 차이와 일상의 차이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다시 모아 또다른 반복의 틀 안에 재구성 하거나, 새로운 시점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 후 나의 일상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서울이라는 도시로 다시 되돌아왔고, 그 곳의 일상들은 특별히 다시 발견해낼 것도 없이 당연한 듯 익숙하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내 주위를 꽉 채운 일상들은 나도 모르는 새 매일매일 반복되고 번식하고 있다. 「반복이란 반복하는 오브제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정신을 변화시킨다.」라는 영국의 철학자, David Hume의 이론이 있다. 일상 생활에서 반복되는 것들은 늘 예상되기 마련이다. A가 끝나면 B가 시작되리라는 것은 오랜시간동안의 반복을 통해 훈련되어 이미 알고 있다. 이어지는 반복은 사람들에게 그 다음을 예상하게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그 특별한 가치를 잃게 된다. 나는 그러한 일상들을 수집하여 그들의 가치를 다시 재생시키고, 관심 가득한 시선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 보려한다.
김지현_silent sign 1_디지털 프린트_35×57cm_2011

「안녕하십니까?, How are you?」 ● 전화기를 통해 수도 없이 듣게 되는 낯선 여인의 인사, 「안녕하십니까?」 얼굴없는 익명의 목소리가 불특정 다수에게 묻는 안부.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ARS 음성이라고 부르고, 의미없는 인사는 어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만을 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인사는 더이상 "인사"가 아니다. 이런 의미없는 인사가 되어버린 수많은 「안녕하십니까?」에 진심을 담아,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밀려나고 자꾸 묻혀지는 일상의 것들에게 좀 더 가치있는 인사를 건내본다.
김지현_silent sign 2_디지털 프린트_35×35cm_2011

「SilentSign」 ● 홍수처럼 넘쳐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던 건물 숲의 다양한 글씨들이 사라진다. 막상 주의깊게 보지도 않던 간판 가득한 건물의 풍경이 낯설지만 고요하다. 글씨가 사라져 비로소 호기심 당기는 간판과 상점으로 변하고, 별 특징없는 이름의 「서울상회」는 각양각색의 간판으로 옹기종기 한데 모이니 그제서야 눈길이 가는 풍경이 된다.
김지현_silent sign 3_디지털 프린트_35×57cm_2011

「봉쥬르, Bonjour」시리즈 사진 ● 이 시리즈 사진 작업에는, 하나의 반복된 포즈가 일상적인 상황과 함께 존재한다. 각각의 시리즈를 위하여 나는 먼저 우리가 시시때때로 취하게 되는 동작들을 떠올렸다. 선 채로 손을 내미는 동작, 입에 손을 가져다 대고 하품을 하는 동작, 두 팔을 들어올려 벌리고 갸우뚱 하는 동작 등은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동작들이지만 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필요하고 반복하게 된다.하지만 다양한 상황들 안에 같은 동작의 이미지를 복제/재현함으로서, 결합된 이미지들은 더이상 평범한 느낌을 갖지 않게 되고, 하나의 시리즈을 모두 보고 난 후에는 처음에 받지 못한 느낌을 얻게 된다. 그저 일상의 한 스냅이라고 보일 수 있는 이미지가 하나 하나 지날 수록 같은 동작의 복제로 인해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 작업을 통하여, 일상의 생활속에서 습관처럼 반복하는 행위들을 다르게 관찰하고, 그것들을 재구성하여 오히려 낯선 느낌으로 되돌아 오게끔 한다.
김지현_silent sign 4_디지털 프린트_35×51cm_2011

「에스프레소, espresso」,「그건 아니야, ce n’est pas comme ça」● 이 두개의 비디오+사운드 설치 작업은 모두 에스프레소 커피를 소재로 한다. 파리에서의 생활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는 마치 중독과 같은 습관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어느 카페에 가든 들을 수 있는'에스프레소'라는 줄임말은 프랑스 생활에서 중요한 상징적 코드이다. 이 일상 생활에 존재하는 코드를 반복시킴으로서, 작지만 익숙한 조각들의 느낌을 다른 시선으로 보여준다. 비디오 「Expresso」를 위해 나는 파리의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며 카페의 갸르송들이'Un express(에스프레소 한잔)'라고 외치는 소리들을 녹음했고, 그 소리들을 카페의 앰비언스 소리와 함께 규칙적으로 나열하였다. 같지만 다른'Un express'의 반복을 들으며, 조금씩 그 속에서 다양성(variete)과 변형(transformation)을 인식하고, 초반에는 특별할 것 없던 소리가 조금씩 낯선 느낌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내려놓은 동작의 손들을 에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 이 동작들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각각이 조금씩 차이를 가지고 있다. 손 제스처는 종종 어떤 표현을 상징한다. 그래서 손이 내려놓는 오브제를 보여주지 않을 때, 제스처의 반복은 소리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 두번째 비디오 「 Ce n'est pas comme ça」 에서는, 누구나 매일 반복하는 사소한 행동들 중 커피를 소재로 삼아, 우리가 쉽게 옳다/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한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개개인의 다양성을 커피를 마시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이미지로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지와는 사뭇 상반되는 하나의 문장을 소리로 반복시킨다. 이렇게 반대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본래 의도하는 메세지를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하고, 이미지와 소리가 상반되게 맞물려 반복되면서 점차 역설적으로 이야기되는 다양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짧은 한 문장의 반복, 절제된 흰 선으로 이루어진 에니메이션은 군더더기 없이 이런 반복의 효과를 증폭시킨다.
김지현_안녕하십니까?_단채널 영상_00:02:50_2011
김지현_숲_혼합재료, 사운드, 빛 설치_2011

「숲, La Forêt」● 50개의 튜브와 LED, 스피커를 이용해 만들어 낸 어두운 숲. 관객은 수십개의 튜브들을 헤치며 마치 풀 숲을 헤치듯 공간을 거닌다. 희미한 LED 불빛만이 어슴프레 발 밑을 비춰주는 어두운 공간에서 걸음을 옮기면서 관객은 희미한 노스텔지어를 느끼거나, 가슴을 압박하는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불빛이 유혹하듯 흔들거리고, 숲을 헤쳐나가면서 귀 옆을 스치는 스피커에서는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속삭이고 있는 일상의 상징적 소리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처음엔 그저 익숙한 소리들이 공간, 관객의 이동과 함께 점차 점차 본래의 느낌을 잃어가며, 공간을 빠져나갈 때에는 처음 숲으로 들어섰을 때와는 다른 감정 상태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김지현




Touch me

유르겐 텔러展 / Juergen Teller / photography   2011_0415 ▶ 2011_0731 / 월요일 휴관


유르겐 텔러_Judy, Judy, Judy_2009 / 대림미술관 제공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Louis Quatorze_현대해상

대림미술관 트위터 www.twitter.com/daelim_museum 대림미술관 미투데이 www.me2day.net/prdaelim

관람료 일반 5,000원 / 학생 3,000원 / 미취학 어린이 2,000원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대림미술관 Daelim Contemporary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통의동 35-1번지 Tel. +82.2.720.0667 www.daelimmuseum.org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 전시를 소개하고 있는 대림미술관은 2011년 4월 15일부터 패션사진가로 유명한 유르겐 텔러의 대표 패션 광고사진과 그의 예술적 사진을 함께 소개하는 『Touch me』전시를 개최한다. 전시『Touch me』는 프랑스 디종의 유명 미술관 Le consortium과 협업으로 만들어진 전시이다. 전시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본 전시는 작가가 모델들과의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보여지는 자유로운 성의 표현과 획일되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들에게 이 시대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루이비통, 마크 제이콥스, 비비안 웨스트 우드, 셀린느, 미소니, 입생 로랑, 푸마 등 다양한 해외유명 브랜드의 광고사진을 찍어왔던 유르겐 텔러의 작품들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유르겐 텔러_Victoria Beckham_Marc Jacobs Campaign SS08 / 대림미술관 제공
유르겐 텔러 / 대림미술관 제공

유르겐 텔러의 상업적 사진의 원천인 예술적 영감이 반영된 사진 작품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패션광고 사진을 새롭게 재조명 해보며, 그의 사진들이 미학적, 기술적으로 기존의 광고사진들과 어떤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 할 기회를 제공한다. 케이트 모스. 파멜라 앤더슨, 라켈 짐머만 등 유명 모델과 셀러브리티와 함께 호흡하며, 꾸며진 아름다움만을 표현하는 단순한 상업광고가 아닌, 그들 내면의 숨어있는 새로운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면서 텔러가 사진 속에서 추구하는 "진정한 아름다움(Real Beauty)"을 보여준다.
유르겐 텔러_Octopussy, Rome_2008 / 대림미술관 제공
유르겐 텔러 / 대림미술관 제공

이번 대림미술관에서는 작가가 지난 10년간 촬영해온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의 작품들과 함께 작가가 촬영한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ackney), 로니 혼(Roni Horn),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 윌리암 이글스턴(William Eaggleston) 등 의 유명 아티스트과 함께한 portrait 작업을 소개하여, 작가의 패션사진가로서 면모뿐만이 아니라 예술가적 시선을 조명한다. 본 전시에서는 예술과 상업사진의 경계를 두지 않고 작업을 진행해 오고 있는 작가의 독특한 사진철학을 통해, 그의 사진이 기존의 광고사진과 어떻게 차별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기존의 전시에서 다뤄지지 않았었던 낯선 도시에서의 다큐멘터리 작업 「Ten days in Havana」를 전시함으로써, 사진가로서의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전시성에 있어서 작품과 작품 사이에 충분히 여백을 두는 설치 방법을 통해서, 작품 외의 어떠한 외부조건들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초현실적인 시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배치되며, 이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의 시선으로 작품의 내러티브를 만들고 작가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유르겐 텔러_Girl in park, London_1999 / 대림미술관 제공

1층 전시장은 본 전시의 Intro 공간으로, 본 전시가 어떻게 기획되었으며,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Photo zone도 마련하여 관객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한다. 2층은 전시 Touch me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작가의 예술적 영감이 반영된 사진 작품들을 소개하여, 예술과 상업사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3층 전시장은 2층에 이어 Touch me 시리즈가 이어지고, 또 다른 공간에서는 관객들이 보다 작가의 작품 세계를 공감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미디어 룸을 조성하였다. 미디어 룸에서는 Juergen Teller 가 지난 10년간 촬영해온 Marc Jacobs의 광고 사진들과 작가가 하바나에 머물며 촬영한 도시 다큐멘터리 ten days in Havana를 소개한다. 또한 Reading room을 마련하여, 다양한 작가의 작품집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세계 유명 패션, 예술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Juergen Teller에게 질문한 102가지의 질문과 영국의 유명 예술비평가 Adrian Seale의 텍스트를 통하여 작가의 작품세계와 철학에 대하여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 대림미술관
유르겐 텔러_Kate Moss_Gloucestershine_2010 / 대림미술관 제공

전시 연계 프로그램

1. 아트패키지 프로그램(Art & Lecture & Concert) - "Please, Touch Me" 도슨트와 함께 하는 작품관람, 패션·사진 분야 전문가들의 심도 있는 강연, 유르겐 텔러와 함께 즐기는 콘서트, 이 세 프로그램을 한번에 즐기며 그에 대해 심도 있게 이해하는 의미 있는 주말을 선사합니다. 추첨을 통해 대림미술관이 준비한 소정의 제품을 선물로 드립니다.(단, 아트패키지 콘서트는 재즈콘서트와는 별개로 운영합니다.) - 일시: 2011.04.23(토) / 05.14(토) / 06.11(토) / 07/09(토) 02:00pm~05:00pm - 참가비: 10,000원 (전시관람, 강연 및 공연 참가비 모두 포함) - 접수: 선착순 150명, daelim.museum@gmail.com 이메일 접수

2. 재즈콘서트 - "JAZZ NIGHT IN THE MUSEUM" 다양한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미술관의 로맨틱한 저녁, JAZZ NIGHT - 일시: 2011.05.28(토) / 06.25(토) / 07.23(토) 06:00pm~07:00pm - 장소: 대림미술관 4층 - 입장료: 2,000원 (전시 입장료와 별도, 당일 선착순 판매) - 추첨을 통해 대림미술관이 준비한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 오후 6-8시까지 전시관람 가능

3. 청소년프로그램 - "거침없이 누르는 리얼포토" 유르겐텔러의 작품 제작 방식을 직접 체험하는 "전시-교과-체험활동연계 교육프로그램". 전문 도슨트의 작품 해설과 함께 유르겐텔러의 작품을 감상하고 유르겐텔러의 작품제작 방식을 응용한 광고사진 찍기 활동을 통해 그의 작품 철학을 이해해 볼 수 있는 특별 교육 프로그램! 대림미술관만이 가진 특별한 사진 교육프로그램을 교과 활동과 연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 대상: 중.고교 학생을 포함한 청소년 단체 - 전시기간 중 청소년 15인 이상 예약 접수(진행일시는 신청시 교육팀과 조율) - 참가비: 1인 10,000원(재료비포함) - 신청: 전화 혹은 이메일 접수(Tel. 02.720.0667 교육팀 / E-mail. daelim.museum@gmail.com)

4. 교사초청설명회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전시 투어, 청소년 프로그램 "거침없이 누르는 리얼포토" 시연. 유르겐텔러는 누구인가? 광고, 사진이 학교 교육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이 해답을 교사초청설명회에서 드립니다. - 일시: 2011_0416_토요일_04:00pm~06:00pm - 대상: 중.고교 교사 - 접수: 이메일 daelim.museum@gmail.com - 문의: 대림미술관 교육팀장 한정희 02.720.0667

5. 전시투어 프로그램 "Paul Smith & Juergen Teller" 유르겐텔러의 작품과 함께 안타깝게 놓친 폴 스미스 전시를 만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전시 투어 프로그램! 20인 이상 신청 단체에 한하여 서울 통의동 소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는 유르겐텔러 『Touch me』전과 안양 비산동 소재 대림갤러리에서 열리는 폴스미스 전 『Paul Smith Photography- his moment and his inspiration』을 전문 도슨트의 작품 해설과 함께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일시: 2011_0415 ▶ 2011_0515 - 대상: 20인 이상의 단체 - 장소: 대림미술관(서울 통의동)-대림대학 대림갤러리 (안양 비산동) - 소요시간: 총 3시간 - 참가비: 5,000원/1인 - 참여신청: 대림미술관 교육팀 02.720.0667

 

2011.04.15 01:33:03 / Good : 454 + Good

zabel

  • 작성시각: 2011.04.15 21: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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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of Safe Zone


2011_0416 ▶ 2011_0501 / 월요일 휴관


허수영_100Caterpillars with nepenthes_캔버스에 유채_130×210cm_2010

초대일시 / 2011_0416_토요일_05:00pm

참여작가 / 마진영_손경환_윤영혜_장수지_허수영

외부 기획展

기획 / 유화영(ArtAngel company 디렉터)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유앤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126-1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Out of Safe Zone ● 모든 사물에 대한 분별은 사람들 각자의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 그러나 그 체험을 통해 사람들이 인지한 사실은 진실과 일치할 때도 있지만 때론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의 해석에 불과할 때도 있다. 자신이 경험하고 인지한 사실은 처음에는 새롭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르고 익숙해지면서 무관심해지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Out of Safe Zone』전에서는 5명의 젊은 작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응축과 과잉, 신기루, 복제, 의존, 익숙함으로 축약되는 이들의 작업은 현대인들의 내적, 외적인 삶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 프로그램화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안주해버린 Safe Zone을 떠나 가끔은 현실에 대한 물음과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몸이 익숙해져 버린 편안한 현실보다는 마음과 정신으로 찾는 세계로 말이다. ● 허수영은 한 권의 책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응축시켜 한 장의 이미지로 담아낸다. 여러 가지 식물들이 응축되어 한꺼번에 생생하게 다가왔을 때 그 식물들의 이미지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정글처럼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한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손경환_손에 닿을 듯 가깝다고 생각했던 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60.5cm_2011

손경환은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보이는 것'에 대한 물음이라기보다는 '시선에 들어오게 된 과정' 다시 말해 '그것이 내 눈에 쏘아져 들어오기까지의 경로'에 대한 물음으로 이끌어낸다.
윤영혜_VARNISHVANISH_사진_2010

윤영혜는 실제로 그린 작품을 찍어 디지털프린트로 캔버스 천에 출력하고, 그 복제된 작품을 전시장에 작품처럼 전시한다. 관람객들은 그 복제품을 실제 유화 작품(원본)으로 받아들이고 감상한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복제품들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이 보는 것이 절대 진실의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게 한다. 작가는 진실, 혹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에 대한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장수지_소.녀_장지에 채색_72×72cm_2010

장수지는 자신을 보호하는 무엇(외모, 돈, 권력)인가에 의존하려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아상을 뿔이달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소녀는 힘이 없고 아무런 의지나 희망이 없어 보인다. 뿔이나 장난감 왕관 같은 보잘것없는 것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나약한 현대인들의 대해 이야기한다.
마진영_507번 버스 안_캔버스에 유채_91.9×72cm_2010

마지막으로 마진영은 우리에게 익숙해서 무관심해져 버린 주변환경을 다시 새로운 눈으로 보고 우리가 잊고 있는 작은 감동들을 찾고자 하였다. 생각은 쉽지만 습관적으로 주변환경에 그냥 지나쳐버리는 현대인들에게 매 순간의 소중함을 작가는 알리고 싶어한다. ■ 유화영
2011.04.15 21:44:50 / Good : 324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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