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이전의 내 작품들이 그렇듯이 모더니즘과 에코 아나키즘(eco-anarchism)이라는 두 극점(極點) 사이를 오가는 작품들이되 에코 아나키즘에 조금 더 기운 모양새다.
내가 생각하는 내 작품에 있어서의 에코 아나키즘은 작품이 썩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 두거나 적극적으로 썩게 만들거나 일부러 훼손하는 행위를 포함하여 낡고 허름한 재료들, 쓰레기로 버려질 쓰고 남은 재료들을 찾아내어 사용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에코 아나키즘적 작품을 페인팅의 타자로서의 드로잉이라고 부른다. 드로잉이라는 말에는 이미 완성태가 아닌 지속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있지맊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엔드리스(endless)란 형용사를 붙였다.
에코 아나키즘은 2009년 12월에서 2010년 1월에 걸쳐 인도에서 한달 동안 지내며 확고하게 내 안에 자리잡게 된 듯하다. 그 때의 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은 “나는 이미 자본주의의 독배를 마셨다"라는 구절이다.
그렇다. 내가 지금 에코 아나키즘을 입에 올리며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저( 低 ) 엔트로피 작업’을 하고 있지만 내가 에코 아나키즘을 내 삶과 예술로 수행하기엔 이미 나는 자본이 제공하는 삶의 안락함에 깊숙이 중독되어 있어서 에코 아나키즘을 주장할 토대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이런 작업을 하고 발표를 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게 제작하고 발표한다. 그 이유는 오로지 자기위안 때문이다. 자기위안이라도 하지 않고는 이 파국의 시대를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라는 유기적 생명체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의 역사가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그 파국을 저지해야 함을 알면서도 자본주의의 유혹과 겁박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나와 동류의 사람들에게 나의 작품은 조그만 자기위안 거리를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에코 아나키즘을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에 동조 함으로써 뭔가 이 파국을 지연시키는데 일조라도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위안 말이다.
혹자는 이러한 에코 아나키즘적 저( 低 ) 엔트로피 작업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기에 의미 있지 않냐는 말로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막연해 보이는 그 말에서 위안을 찾기보다는 “자기위안”이란 말에서 위안을 찾으련다.
또 혹자는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믿으며 이러한 작업이 갖는 정치적 힘을 입에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말에 힘을 더러 얻어보기도 했었으나 예술은 역시 정치적인 힘을 따르기보다는 그 힘을 벗어난 곳에서 “위로하는 역할”을 자임할 때 그 힘을 제대로 낼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때 그 힘의 정체는 희미한 힘이되 자기 부정을 거쳐 나온 힘이며 “죽음의 보증”을 거친 힘이리라. - 2018.3.5. 작가의 말
김용익은 페인팅과 드로잉에 대한 이분법적인 구분에 저항한다. 이런 태도는 ‘페인팅 - 완성태 - 닫힌 구조 - 주체 - 분리와 배제의 미학 - 모더니즘’과 ‘드로잉 - 지속태 - 열린 구조 - 타자 - 연대와 의존의 미학 - 탈모더니즘’이라는 의미의 연쇄고리를 형성하며 작업에 내재된 정치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19세기 조선의 철학 사상인 정역( 正易 )의 우주론을 차용한다. 이제 우주는 새로운 것의 창작이 가능했던 시대를 지나 후천개벽( 後天開闢 )의 시대를 맞이했고, 그리하여 현 시대의 예술가는 기존의 것을 재전유 및 재배치하는 에디터로서의 역할만 한다고 읽는다. 이는 곧 페인팅의 미학이 그 의미를 상실한 채 드로잉의 미학으로 대체되는 패러다임으로서의 변화를 상징하다.
《 엔드리스 드로잉(Endless Drawing) 》전은 종이라는 매체에 국한되어 있던 드로잉이라는 주체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열린 ‘드로잉적’ 개념으로 단단히 연결된 다양한 작업을 펼쳐 보인다. 이번 전시는 ‘드로잉 개념 작가’의 김용익의 에코 아나키즘적 작업의 기저에 흐르는 ‘회화의 타자로서의 드로잉’에 대한 정의를 재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
나는 ‘거룩함’을 가난한 인간, 오래된 것, 굶주리고 병든 동물, 버려진 장소에서 찾는다. 나에게 있어 드로잉과 글쓰기는 이런 거룩한 것들에게 경배하는 방법이다. -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