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글쓴이
내용

zabel

  • 작성시각: 2011.03.19 21:06:53
  • 총 작성한 글타래: 56 개
  • 총 작성한 댓글수: 141 개
  • 가입일: 1970/01/01
  • 포인트:
  • 레벨:
  •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글 제목: 3.19 전시


인터뷰, Interview & Artists as an Interviewer

2011년 아르코미술관 기획展   2011_0322 ▶ 2011_0420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0322_화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홍석_나현_믹스라이스_박경주_이수영_이영호_이진준 임흥순_정연두_조혜정_천경우_태이_플라잉시티 오프닝퍼포먼스 / 천경우_100 Questions 2011_0322_화요일_06:00pm   아티스트 토크 1 / 천경우_임흥순_이수영 2011_0324_목요일_04:00pm   아티스트토크 2 / 믹스라이스_조혜정 인터뷰와 한국의 비디오다큐멘터리의 전개 2011_0402_토요일_02:00pm 관람료 / 어른(19세이상) 2000원 학생(초,중,고), 20인이상 단체, 경로우대, 장애인,국가유공자 50%할인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르코미술관 ARKO ART CENTER 서울 종로구 대학로 100번지 Tel. +82.2.760.4608 www.arkoartcenter.or.kr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에서는 3월 22일(화)부터 4월 20일(수)까지 『인터뷰Interview & Artists as an Interviewer』전을 개최한다. 2011년 아르코미술관의 첫 기획전인 『인터뷰』전은 현대미술에 나타난 인터뷰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고, 인터뷰의 속성을 갖춘 작품들이 현대미술을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를 조망해보고자 하는 전시이다. 인터뷰는 일반적으로 "상호적인 관점(inter-view) 즉, 공통으로 관심이 있는 주제에 관해 대화하는 두 사람의 관점을 교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인터뷰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주체인 인터뷰어(interviewer)와 인터뷰의 대상자인 인터뷰이(interviewee) 간에 이루어지는 목적이 있는 대화의 한 형식이자, 가장 형식적인 대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내밀하고도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대화의 방법으로 여겨지지만, 그 내용이 방송, 신문, 출판 등의 매체를 통해 공개된다는 속성 때문에 다분히 수용자인 독자나 시청자들을 염두에 둔 일종의 질의응답 게임이나 연극에 비유되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는 인터뷰의 이와 같은 특성을 드러내거나 인터뷰의 기본적인 속성을 역전시킨 작품들과 함께 미술에서의 인터뷰가 미술이 아닌 타 분야의 인터뷰와 어떻게 차별화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소개될 예정이다. 『인터뷰』전은 현대미술이 왜, 어떠한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하는 형식을 띄게 되었는가와 함께 인터뷰어로서의 작가의 역할의 다양한 양상과 변화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제1 전시실 : 현대미술 속에 나타난 인터뷰의 속성 ● 인터뷰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는 방식의 대화이다. 천경우의 「100개의 질문들(100 Questions)」과 「1000개의 대답들(1000 Answers)」은 질문하기와 답하기라는 인터뷰의 기본적인 속성을 활용한 작업이다. 「100개의 질문들(100 Questions)」은 '예' 또는 '아니오' 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유럽과 서울에서 각각 50개씩 수집한 후 10명의 퍼포머(performer)가 수집된 100개의 질문에 대답하는 퍼포먼스로, 예 또는 아니오라는 정답을 강요하는 우리의 질문방법에 관한 생각해보기를 제안하는 작품이다. 이 퍼포먼스는 『인터뷰』전 오프닝 당일에 라이브 퍼포먼스로 진행될 예정이다. 태이의 「인트라 위브(Intra-Weave)」는 런던에 거주하며 인터뷰를 직업적으로 사용하는 3인에 관한 인터뷰이자 인터뷰에 관한 대화이며, 따로 따로 진행된 3인의 인터뷰가 마치 한 장소에 세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 보이도록 구성된 작업이다. 인터뷰를 사용하는 작품들에서는 작가가 곧 인터뷰어가 되어 타자인 인터뷰이와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어가 된 작가들은 인터뷰를 시도하기 위해 저널리스트나 토크쇼 진행자가 되기도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 이수영은 수유시장을 위한 커뮤니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수유시장 상인들과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사주를 보는 점쟁이로 자신의 정체성을 변신시켜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 결과물인 드로잉과 복채를 전시함으로써 현대미술에서의 작가의 정체성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해 왔는가를 보여준다. 제2 전시실 : 현대미술에서의 인터뷰의 등장과 전개 ● 많은 작가들이 작품의 제작 단계에서 모델 혹은 작품의 주제와 연관된 대상들과 인터뷰를 시도하지만 명확하게 인터뷰라는 형식과 인터뷰이가 작품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비디오라는 매체의 등장과 함께이다. 인터뷰이 즉, 타자들의 인터뷰를 기록한 비디오는 주로 비디오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구분되는데, 한국에서 비디오 다큐멘터리가 가장 활발히 제작되었던 것은 2000년대 초의 일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초기 비디오 다큐멘터리의 대표적인 작가인 박경주, 조혜정, 믹스라이스, 플라잉시티의 작업을 통해 비디오라는 매체와 인터뷰의 연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임흥순, 나현, 정연두는 평범한 노인들이나 역사적 사건과 연관된 타자들과 그들의 기억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업은 역사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억압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타자들의 사적인 기억을 재조명하는 최근의 '기억담론'과 연계되며, 타자들의 기억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작품은 다큐멘터리 비디오의 형식을 통해 등장하기 시작한 인터뷰가 현대미술 속에서 보다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 아르코미술관




비밀의 방 Secret Rooms

윤소연展 / YOONSOYEON / 尹素蓮 / painting   2011_0323 ▶ 2011_0328


윤소연_문을 열면 어느새 나는 그 곳에 와 있다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806f | 윤소연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1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비밀스런 일상과 현실적인 상상 ● 일상은 공평하다. 어느 누구도 일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은 또한 반복이다. 나날이 일상의 세목을 채우는 것들이란 거의 같다. 자고 일어나 씻고, 먹고, 마시고, 입고, 신고, 걷는다. 중간에 화장실에도 들러야 한다. 이처럼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라는 점에서 일상은 구속이며 감옥이다. ● 그런데 이따금 단정한 옷이 삐져나와 살을 드러내듯 그 반복에 균열이 생겨, 만나고 헤어지며 사랑하고 미워한다.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그것을 '옷이 하품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우리는 결국 일상의 반복을 끊어내지 못하며 존재의 시원(始原)처럼 그리로 돌아가지만, 아니 늘 그 안에 있지만, 그래도 일상은 그 안에 하나의 '사건'처럼 반복과는 다른 생성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일상의 구속을 견디게 하는, 더 나아가 일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신비다.
윤소연_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되다_캔버스에 유채_130.3×97cm_2010
윤소연_작업실 속 미술관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0
윤소연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일상을 조형의 대상으로 삼아 이루어져 왔다. 그것도 거의 실내를 벗어나지 않고서. 어쩌다 등장하는 창은 언제나 닫혀 있고, 드물게 열려 있는 순간에도 밖은 캄캄해서 마치 두터운 흑의 장막이 둘러쳐진 것 같다. 실내에서도 심지어는 셔터를 내리기까지 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실내는 엄마의 자궁으로의 회귀, 혹은 퇴행 욕구를 표상한다. 이때 바깥세계는 그만큼 두렵거나 내키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렇다고 윤소연의 작업에서 실내 공간이 꼭 밝고 따듯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일상의 어질러진 사물들이 보여주듯 거기에는 기쁨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어떤 쓸쓸한 정서가 녹아 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의 활기에 찬 질서라기보다는 연극이 끝나고 난 뒤의 적막과 같은 쓸쓸함. 그래서 옷은 그냥 벗어 내버려둔 채이거나 여기저기 무심하게 걸려 있고, 여러 켤레의 신발로 '왁자지껄'한 분위기조차 이상하게 정적(靜寂)을 동반한다. ●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최고의 만찬'에서든, '우아한 한끼의 식사'든, '수다 중'인 식탁에서든 사람의 모습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아서, 마치 실험영화의 정지 화면처럼 그러한 극적 상황이 오히려 아슬아슬하게 제목을 배반하는 것 같다. 일상은 우아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별 볼일 없기까지는 아니지만 기껏해야 소박한 식사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세계가 그러하듯 타인(他人)과의 관계 역시 불편까지는 아니라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것일까.
윤소연_좋은날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1
윤소연_희정당-그와의 떨리는 조우_캔버스에 유채_130.3×89.4cm_2011
윤소연의 일상의 이미지가 갖는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공간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꼭 만족스런 공감으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구두다. 그의 캔버스에서 구두는 거의 언제나 어딘가로 나가려는 느낌을 준다. 지극히 정적인 구도에서조차 그의 구두는 어떤 움직임을 안에 감추고 있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가고 싶은 것이다. 그토록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서도 사실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 즉, 안과 바깥, 자아와 타자의 어긋나는 관계처럼 현실과 꿈, 의식과 무의식이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역설적 긴장이 이전까지의 윤소연의 '삶의 풍경'을 채워왔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실제의 자아와 연극 무대의 배우가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듯이. ● 이 점에 대해 작가 스스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기고 있다. "그동안 작업의 면면들을 보면 개인의 일상공간이나 생활, 생각들을 이야기를 풀어가듯 캔버스에 재현해왔다. 극히 주관적인 내용을 연극 무대의 뒷배경처럼 드라마틱하게 구성하여 올리고 그 가운데 나는 어느새 연극을 하는 배우가 되어간다."(2004년 12월 작업일지 중에서)
윤소연_고택에서의 유쾌한 수다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윤소연_종합선물_캔버스에 유채_97×162cm_2010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활짝 열어젖힌 문처럼 그의 작업이 바깥세계를 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문은 여전히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제야 '수다'는 유쾌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고택(古宅)의 정원, 단풍이 지는 가을 숲과 하늘, 바닷가의 모래사장, 파리의 건물 지붕, 런던 템즈 강의 다리 등등은 모두 그의 신발이 그토록 나가고 싶어 했던 바깥의 풍경들이다. 아니나 다를까. 「날아오르다」에는 암시처럼 그 신발의 구두코가 보인다. ● 게다가 이번 전시에는 꿈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제목을 가진 두 개 작품이 있다. 「상상이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되다」와 「한 겨울날의 꿈」이 그것인데,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케이스에서 막 꺼낸 것으로 보이는 새 구두가 등장한다. 마치 작가의 꿈이 실내에서 걸어 나가 바깥세계와 소통하는 것임을 말하기라도 하듯. 이번 전시는 그래서 실내와 바깥세계가 만나는 어떤 경계처럼 보인다. 이것은 일상과 상상, 현실과 꿈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종종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을 할 때가 있다. 때론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같은 나의 일상... 나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가끔은 꿈같은 일상을 원할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꿈은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원동력이며 희망인 것이다."(2004년 12월 작업일지 중에서) ● 그런데 일상적 현실은 극사실에 가까워질수록 차라리 비밀스럽고, 작가가 꿈꾸는 상상의 세계는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인의 속옷이나 침대, 일상용품이 등장하는 현실은 지극히 내밀한 반면, 상상의 공간에는 정원과 숲, 강과 같은 현실적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윤소연의 세계가 갖는 아이러니의 연장일 것이다. 그의 공간은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동양과 서양, 바다와 육지, 부재이자 충만, 홀로이자 여럿인 세계다. ● 이렇게 보자면 그의 작업은 실내로부터 바깥세계로, 일상의 현실로부터 상상의 공간으로, 즉 자아의 내밀함이 타자(他者)와 만나는 어떤 풍경으로 할 수 있다. 내면의 자아가 그려나가는 '삶의 풍경'이라고 부를 그 세계는 이처럼 공간과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인 일상의 단면들을 무대 위로 끌어냄으로써 특별하고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2004년 12월 작업일지 중에서) 이러한 작업을 통해 윤소연 '일상의 변용', 혹은 '낯설게 하기'를 수행한다. 허구로서의 연극의 무대가 실제의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하듯이. ● 그래서일까. 일상의 공간은 어느새 꿈이자 선물이며, 유쾌하고 좋은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옷이 하품하는 순간 맨살결이 드러나듯, 이 공간과의 조우(遭遇)에 어떻게 가슴이 떨리지 않을까. 마치 새 신을 신고 팔짝 날아오른 한 풍경이 여기에 있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다. ■ 박철화




나비늘꽃

나비늘꽃展 / NAVINEULKKOT / painting   2011_0323 ▶ 2011_0329


나비늘꽃_종이에 공필채색_60×120cm_2011
초대일시 / 2011_0323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관계를 수놓다 ● 한 땀 한 땀 놓는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나비늘꽃의 이번 작업은 대상-사물로서의 '꽃-나비'에 대한 정밀한 애정의 결과이다. 모든 사랑에는 한 존재에게 사용 가능한 모든 능력이 투여되기 마련이다. 이들의 공필화가 바로 그 '꽃-나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증거이다. 화가의 손과 붓이, 평면 위에서, 그 수많은 평면들과 함께, 포개졌다가 나뉘는 순간들이야말로 사랑이 펼쳐지는 순간일 텐데, 바로 이때 세상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포개지고 나뉘는 일들의 반복은 그만큼 대상에 대한 세밀한 배려와 살핌을 불러온다. 그 세밀함의 반복이야말로 모든 공필화의 근본일 것이다. 평면 위에서 꼼꼼하게 스쳐 지나가며 선을 남기는 붓놀림과 또한 붓놀림을 따라 한 점 한 점 영역을 넓히며 물들어가는 백지는 그 자체로 에로틱한 세계이다. 스치고 물드는 관계의 감촉에 대한 상상에 의해 꽃은 색채를 더하고 나비는 날갯짓을 더한다. (중략...)
나비늘꽃_비단에 공필채색_32×105cm_2011
나비늘꽃_종이에 공필채색_60×120cm_2011
나비늘꽃_종이에 공필채색_100×220cm_2011
나비늘꽃_종이에 공필채색_60×120cm_2011
나비늘꽃_종이에 공필채색_61×90cm_2011
나비늘꽃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나비와 꽃의 마주침이 이렇게 의미화 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일이 그 마주침과 같다는 전언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지의 탄생이 모든 예술에는 운명처럼 전제되어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술은 다만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유희라고 말하는 작품들에도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든 예술가들과 관객들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나비와 꽃의 마주침이 미래의 생명을 씨앗의 형태로 준비하는 사건이듯이, 화가와 화가, 화가와 관객, 글쓴이와 독자, 작곡가-연주자와 청자 사이에는 모두 새 삶을 생성시키는 사건들의 당사자라는 역할이 있다. 그 역할의 긴장이 나비늘꽃의 작품에서는 '꽃-나비'의 정밀한 이미지로 살아난다. 여기에 공필화의 매력이 사실감을 더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인다. 리얼리즘의 필법에 대한 무수한 비판 이후에 그 리얼리즘이 살아남는 한 방법을 이들의 작업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이들 나름대로의 공동창작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의 척박함을 건너가는 좋은 길이 될 수도 있으리라고, 이들의 마주침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상기하면서 꽃과 나비를 본다. 정교하고 신기한 아름다움이 저 평면을 피가 도는 세상으로 막 바꾸어놓는 중이다. ■ 박수연








35° - 두번째 이야기

이길렬展 / YIGILREAL / 李佶烈 / photography.installation   2011_0323 ▶ 2011_0405


이길렬_둘_인화된 사진긁기_20.3×25.4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208g | 이길렬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23_수요일_06:00pm 기획 / 갤러리 룩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공휴일_11:00am~07:00pm 마지막날 화요일은 낮12시까지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www.gallerylux.net

35° ● 나의 주관은 경사에 관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것과 감상적인 두뇌를 자극하는 것 역시 각도의 관점에 끼워 맞추고 있다. 그것은 완만하거나 경사지거나에 관한 개인적이며 심미적인 설정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세상의 규칙에 근거하고 있다. 한마디로 35°는 두 발이 딛고 있는 땅과 그것으로 인해 접혀진 발목의 압박이며 삶의 단상이다.
이길렬_전봇대 줄 셋_인화된 사진긁기_20.3×25.4cm_2010
35° 경사에 지어진 집들의 집단과 혹은 그의 주변은 이미 익숙하지 않다. 보이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거나 방관해서이다. 그렇다고 다시 되짚어보자는 의중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두고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기록하는 것이다.
이길렬_18_인화된 사진긁기_20.3×25.4cm_2010
작품에 등장하는 집들, 전봇대, 새들, 잡풀 그리고 사람은 의미심장하거나 의도를 둔 객체는 아니다. 밀려나 있는 주체이다. 한걸음 떨어져 있는 주인공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진의 방법을 선택했으며 거리를 두고 찍었으며 포커스나 색감은 개의치 않았다. 하물며 프레임에 걸려드는 것 중에서 불필요한 요소들(사진이 기억에 관한 속성을 숙명적으로 내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즉시적인 기록에서 발생하는 시간의 개입과 주관을 벗어난 도상을 최대한 제거하는 것을 통해 현시적인 판단을 용이하게 하는 것) 또한 지워버린다. 기계적 수단은 사용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업은 손이 쥐고 있는 칼, 송곳, 사포와 그들에게 맞닿아 있는 인화지의 물성에서 이루어진다. 긁고 문지르고 벗겨내는 과정을 통해 사진의 일방적인 면모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이길렬_무제_인화된 사진긁기_20.3×25.4cm_2010
산동네에 지어진 판자촌에 이르는 길의 경사각, 자동차의 테스트 경사각, 스키 활강 각도, 적절한 산행 코스의 각, 영하 35°의 추위, 영상 35°의 더위 따위에 의미부여를 하고자한다면 소심한 대변일 수 있다. 그것들이 시사하는, 또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규칙이 무엇에 근거하는가가 관심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조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주어진 신체의 적절한 한계와 관계가 있다. 고꾸라지거나 뒤집히지 않으려는 각도이며 쓰러지거나 뒹굴지 않으려는 각도이다. 그것들의 중심에는 기술적인 장치나 최고치를 추구하기 위한 특별한 노고나 개발의 문제가 아니라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원초적인 결과물인 것이다. 우연하게도 이 모두는 즐거움과 수고스러움에 이른다. 즉, 그 둘은 한통속인 것이다.
이길렬_담 전봇대 집_인화된 사진긁기_85.1×101.6cm_2011
사진은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물이다. 또한 사진은 시간성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안고 간다. 당신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 속에는 우연히 지나가는 다른 사람의 뒤통수가 함께한다. 그는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이며 아무런 근거도 없으며 그저 관계없음의 상황에 놓인 것일 뿐이다. 한 장의 사진 속에 내포한 무수한 배경, 수많은 선들, 색들이 돌이켜 보건데 전적으로 나와 관계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1/125만이 진실이다.
이길렬_고추담 너머의 집_인화된 사진긁기_85.1×101.6cm_2011
이길렬_계단 문 전봇대_인화된 사진긁기_59.2×76.2cm_2011
어느 날 어떤 집의 담벼락에서 '고추를 심었으니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요'라는 경고 문구를 본 적이 있다. 넘어다 본 담 저쪽에는 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 이길렬




Flyaway

류호열展 / RYUHOYEOL / 柳虎烈 / video.photography.sculpture   2011_0324 ▶ 2011_0411 / 일요일 휴관


류호열_Null_구리선, LED_200×60×6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류호열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24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빛갤러리 VIT GALLE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76번지 인곡빌딩 B1 Tel. +82.2.720.2250 Vitgallery.com

아이에게 주위의 모든 것은 새롭고 신기하다. 앉는 용도의 의자도 어깨에 메면 책가방이 될 수 있고, 십자가도 비행기가 될 수 있다. 아이에게 모든 사물은 그것만의 목적, 용도가 없는 열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자는 의자가 아닌 가방이 될 수 있고 아이들은 그것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니체가 말한 데로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기에 이런 순수한 창조의 즐거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류호열의 작업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류호열_Baum_44100 Hz 16 bit stereo_HD 1920×1080pixels_00:03:00_2011
류호열_Baum_44100 Hz 16 bit stereo_800×600pixels_00:03:00_2010
그의 작업은 하나의 매체에 갇혀있지 않다. 사진, 영상, 조각 등 사용 가능한 모든 매체를 사용한다. 그 모든 작업의 기본은 컴퓨터로 이루어진다. 그는 그것을 이용하여 의자, 자동차, 비행기를 비롯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물을 3D로 만들어낸다. 그가 만든 3D의 하얀 사물들은 아이가 바라 보는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는 사물들과 닮아 있다. 그 의자와 자동차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 자동차와 모양과 형태는 같으나 그 쓰임이 사뭇 다르다. 그는 그것들을 무작위로 쌓아 올려 언덕(Huegel, 2011)과 사람(Mensch, 2011)의 형상을 만든다. 언덕의 작품 안에 그 사물들은 더 이상 그 고유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언덕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부분이 된다. 즉,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앉을 수 있는 의자, 탈것으로서의 자동차가 아닌 것이다.
류호열_Baum_Video, LCD, Plexiglas, Speaker_33×52×12cm_2011
류호열_Meers_44100 Hz 16 bit stereo_HD 1920×1080 pixel_2011
같은 선상에 그의 비디오 조각이 있다. 비디오작품은 흔히 모니터 안의 영상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의 비디오 조각은 영상뿐만 아니라 영상을 구동하는 장치 역시 중요하다. 그는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창조하는 것이다. 그의 비디오 조각은 아크릴판 위에 작은 모니터, 스피커, 메인보드 그리고 그것을 구동하는 회로들이 노출되어 있다. 그에게 스피커와 회로들은 영상을 구동하는 하나의 부품이 아니다. 그것들 자체가 작품을 이루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 즉, 그에게 모든 작업은 하나의 의미를 지우는 과정임과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인 것이다.
류호열_Mensch_디지털 프린트_100×150cm_2011
류호열_Huegel_디지털 프린트_100×150cm_2011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만든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보통의 혁명처럼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 또한 우리에게 새롭게 만들어진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그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작가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세계에 가두는 것이 아닌 그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기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작가와 함께 끊임없는 창조를 유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추선정











뭇웃음 Empty smiles

권순영展 / KWONSOONYOUNG / 權順英 / painting   2011_0325 ▶ 2011_0417 / 월요일 휴관


권순영_별 Star_장지에 채색_96.5×145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916b | 권순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25_금요일_02:00pm~07: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팩토리 GALLERY FACTO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7-3번지 Tel. +82.2.733.4883 www.factory483.org

뭇웃음 ● 권순영은 관훈갤러리에서의 지난 개인전에서 이야기 책에 등장하는 삽화의 형식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했다. 기억에서 건져진 무거운 일화들을 만화 속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들과 드로잉을 이용하여 가볍게 전도시킨 작업들이었다. 경쾌한 어법으로 실랄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역설의 방식은 이번 전시에서도 여전히 주요한 미학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근작에서 권순영은 단편적 이야기의 삽화 같은 방식에서 좀 더 회화적인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작품 속 이미지는 일화들의 전달을 위한 부가적 장치가 아닌 자기충족적 리얼리티를 갖게 되었다. 첫 개인전 이후 지난 4년간의 작가적 성숙을 보여주는 환영할만한 발전이다. 그의 근작들 역시 기억 속 개별적인 사건들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사건의 특수하고 개인적인 지점을 벗어나서 폭력과 공포라는 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를 다루고 있다. 기억의 파편들은 자동기술적 드로잉의 원리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또 다른 상상의 이야기로 진화되고 증폭되어, 특정한 기승전결 없이 상처와 고통이라는 정서적 상태를 형상화하고 있다. 기억과 상상이 뒤섞여 세포분열 하듯 증식된 이 시각적 콘텍스트를 일컬어 하나의 정서적 덩어리, 혹은 심리적 유기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권순영_눈 Snow_장지에 채색_96.5×145cm_2009
권순영_오르골 Orgel_장지에 먹_39.8×39.8cm_2009
권순영의 근작들에서도 만화적인 캐릭터가 계속 등장하는데, 이 캐릭터들은 이전 작품에서와 달리 특정 인물을 표상하기 보다는 제의적 의식에 참여하는 가면 같은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작품 속에서는 순정만화에 나올듯한 여린 소녀들이나 잘 알려진 캔디, 미키마우스를 닮은 주인공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만화가 일반적으로 지시하는 천진한 해피엔딩의 세계 속에 놓여있지 않으며, 마치 보슈의 그림 속 최후의 심판 장면처럼 신체가 절단되거나 해체되는 끔찍한 신체적 고통을 받고 있다. 쏟아진 내장, 각목에 찔린 몸, 벗겨진 피부와 같은 이미지는 고통의 상징으로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당하고 있는 잔인하고 파괴적인 사건은 행복해야할 동화 나라에 느닷없이 끼어든 희생 제의처럼 부조리하고 가혹하다. 「눈」과 같은 작품에서도 어여쁜 순정만화의 주인공 소녀들은 다리가 잘려있거나 고문을 당하고 있다. 역설적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것은 그림 속 주인공들의 표정이다. 기형이거나 훼손된 신체를 가진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그들이 경험하는 현실의 비참함을 웃음으로 덧입힌 듯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다. 사건의 본성과 유리된 이러한 표정으로 인해 이들은 떠도는 유령 같이 현실적 힘을 잃은 채 무기력한 느낌을 준다.
권순영_가족 Family_장지에 먹_89.4×145.5cm_2010
권순영_회타운 The town of raw fish_장지에 먹_97×145cm_2010
주목할 점은 권순영의 작품 내용이 고문 현장과 같이 폭력적인 장면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종종 크리스마스나 별이 빛나는 밤하늘, 장식용 볼과 같은 순수한 유년기의 환상을 투사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아들의 성탄」이나 「가족」에서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제 이미지는 그림 속 캐릭터들의 훼손된 신체를 통해 감각적으로 전해지는 심리적 고통들과 오버랩 되어 기이한 판타지를 만든다.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성탄절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은 잔혹함이 주는 감각적 충격의 파장을 조용히 흡수하면서, 파괴적 장면을 마치 꿈처럼 몽환적인 것으로 만든다. 비천함(abjectness)의 미학 자체를 감각적으로 탐닉하는 것이 작품의 목적이 아님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가 펼쳐 보이는 것은 때묻지 않은 유년기의 환상과 뒤틀린 현실의 공존에서 발현되는 세계로서, 동화나라와 현실의 중간 즈음에 위치하는 기묘한 연옥의 지대이다. 이 세계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서 흡사 성냥팔이 소녀가 창 안을 바라보는 것 같은 아득한 거리감이 견지되는 것은 흥미롭다. 작품 안 세계에는 유리구슬 안의 공간처럼 닿을 수 없는 엷은 장막이 있는 듯하며, 이 때문에 어쩐지 슬프게 느껴진다. 감각을 날카롭게 건드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곧 사라질 물거품처럼 허무하고 가벼운 느낌을 안겨주는 것도 이러한 장치 때문이다.
권순영_미키미키 mickey-mickey_장지에 먹_97×146cm_2010
권순영_수태고지 the Annunciation_장지에 먹_140.5×206cm_2010
이율배반적인 세계의 충돌과 결합, 이로부터 진화되는 새로운 판타지는 권순영의 작품을 형성하는 요체이다. 축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잔인한 현실, 그 안에 여전히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으로 남겨진 유년기의 환상, 잔혹한 감각적 충격들을 완충시키는 아득함,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판타지야말로 권순영의 근작에 새롭게 성취된 개성적인 특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뭇웃음'은 여러 사람을 향하여 덧없이 웃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제목의 작품 「뭇웃음」은 권순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녀, 아이와 같이 약한 존재들을 위한 기념비나 무덤과 같은 것으로, 이름 없는 수많은 희생양들을 기리기 위한 작업이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특정한 상황 설정 없이 신문에서 읽은 사건과 기억, 상상력이 만나서 창조된 캐릭터들 하나 하나의 표정이 곧 주제가 되고 있다. 각기 다른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이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덧없고 헛헛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예리한 아픔이 내재되어 있는 이들의 옅은 미소는 작가가 그림 속 존재들을 창조하면서 공유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고통에 대한 심리적 잔상이 투영된 것이다. 배경의 별빛과 둥근 볼들은 정령처럼 떠 있는 이들의 웃음을 좀 더 아름답게, 애처롭게 만들어준다. 기억과 상상이 만나 형성된 이 캐릭터들의 세계를 통해서 연약한 존재들의 공포, 고립과 고통이 보편적인 인간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뭇웃음'에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낀다면 이미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 이은주

 

RPG-Role Playing Game 롤플레잉게임


이동기展 / LEEDONGI / ??? / painting   2011_0325 ▶ 2011_0417 / 백화점 휴점시 휴관


이동기_Bubbl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0×280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롯데갤러리 본점 관람시간 / 10:30am~07:30pm / 백화점 휴점시 휴관 롯데갤러리 본점 LOTTE GALLERY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 130번지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9층 Tel. +82.2.726.4428 www.avenuel.co.kr/guide/guide_project.jsp

"아토마우스, 롯데를 거닐다." ● 아토마우스(아톰+미키마우스)가 롯데백화점 에비뉴엘(명품관)에 나타났다. 아토마우스는 시크릿가든의 김주원처럼, 에비뉴엘의 사장이 되기도 하고, 에비뉴엘 잡지의 커버모델이 되기도 한다. 에비뉴엘만의 독특한 서비스인 퍼스널쇼퍼의 도움을 받아 쇼핑을 하기도 하며 롯데갤러리 큐레이터가 되어 미술작품을 선정하기도 한다. 베트남 롯데스쿨 학생으로, 발레리나로, 롯데 자이언츠 선수로도 분한다.
이동기_Flying Atomau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아토마우스는 한국을 대표하는 팝아티스트, 이동기 작가의 대표캐릭터다. 60년대 태어나 70-80년대 학교를 다니고, 90년대 활동을 시작한 작가에게 아토마우스는 본인 스스로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일본의 '아톰'과 미국의 '미키마우스'. 각 나라의 대표캐릭터를 믹스해 태어난 아토마우스는 1993년 작가의 간단한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등록되기까지 한 스타이자, K-POP의 1세대로 여겨지지만, 캐릭터의 결합이라는 이유 때문에 90년대, 그의 작품은 '어른들' 사이에 미국과 일본의 만화를 재생산한, 가벼운, 어린이를 위한 전시에서나 볼 법한, 또는 일러스트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었다.
이동기_Picasso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이동기_Steamboa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이번 전시는 롯데백화점의 명품관, AVENUEL(에비뉴엘) 창립 6주년을 맞아 마련되었다. 기업들이 펼치는 다양한 문화마케팅의 사례는 종종 회자되어 왔지만, 그 지원이 일회성에 그치거나 일방적인 짝사랑에 머물기도 했다. 에비뉴엘 역시 근 6년 동안 문화가 숨쉬는 공간을 표방하며 예술과의 다양한 협업과 전시를 병행해 왔다. 그러면서 얻은 가장 큰 결실 중 하나는 기업의 사고(思考)가 유연해지고, 점차 작품을 대하는 태도와 문화를 접하는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문화자극과 영역의 확장은 비단 백화점을 왕래하는 고객들에 대한 문화서비스 차원을 넘어서 기업이미지를 제고하고 직원들의 창조적 마케팅의 키워드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나 매년 에비뉴엘의 창립 월인 3월이면 이를 기념하는 전시를 개최해 왔다. 2005년 일본작가 『세이지 후지시로 특별』전을 시작으로 오픈 1주년을 기념하여 생일 축하파티를 주제로 『일러스트』전을 열기도 했으며, 2006년 당시 가장 유망한 작가들로 구성된 『커팅 엣지(Cutting Edge)』전을 자선경매형식으로 진행하여 이슈화 되기도 했다. 이제 6년째 되는 2011년, 한국 K-POP(케이 팝)의 선두, 이동기작가와 보다 적극적인 아트 콜라보레이션(Art Collaboration, 문화적 협업)으로 기념하려 한다. ● 아토마우스라고 불리는 아톰의 머리와 미키마우스의 얼굴의 조합은 아톰과 미키마우스의 원형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두 개의 이미지 조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한 얼굴로 그렸던 것처럼, 순수회화(페인팅)를 통해 만화를 그리며, 캐릭터를 고수하지만 화랑이나 미술관에서만 전시한다. 즉 '대중예술'로 '고급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거꾸로 '고급예술'로 '대중예술'을 격상시킨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내용에서도 반영되어 미국과 일본의 대표아이콘을 차용하면서도 한국의 독특한 세대상을 표현하며, 비평가나 기획자들에게 팝아트로 분류되면서도 2008년 갤러리2에서 선보인, 그리고 이번 전시에도 선보이는 「버블」이나 「더블비전」같은 작품을 통해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끊임없는 균형과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 가벼운 이미지 이면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속뜻. 이것이 바로 아토마우스의 장수비결이기도 할 것이다. (이성희, 「아토마우스의 창조주, 이동기」, 2010, 네이버케스트)
이동기_Flower Garde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알 듯 말 듯, 경쾌하면서도 진지한 아토마우스의 탄생은 앞서 언급한대로 1993년 한 장의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드로잉은 그간 습작이나 스케치같이 완성작의 보조수단이거나 숙련과정의 파생물 정도로 낮게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창작의 결과보다 과정을, 기술보다는 의도와 개념을 중시하는 요즘, 드로잉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활발하다. 작가의 창작의지를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는 매체로써 드로잉은 그 가치가 점점 재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모아 『RPG-Role Playing Game 롤플레잉게임』 전시에 등장하는 100점의 드로잉들은 아토마우스가 약 20여 년 동안 행했던 다양한 롤플레이(역할놀이)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거기에 추가로 에비뉴엘과 롯데를 소재로 새로운 롤플레이도 선보인다. 2003년 J-POP을 대표하는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가 루이비통과의 협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던 것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무형의 창조에너지가 유형의 제품을 만나 대중들에게 폭넓게 사랑을 받았으며, 이러한 재물의 파급력은 지금도 루이비통의 아르노회장의 발걸음을 각 국 갤러리로 향하게 한다. 상품과 작품의 결합도 이러한데, 한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 이동기의 드로잉 가치는 하물며 어떨까.
이동기_with doogy dog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사실 롯데백화점이 제안한 이번 프로젝트를 두고 작가 역시 고심을 거듭했다. 자칫 너무 가볍게 비춰질까 우려한 까닭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데백화점의 명품관으로서 에비뉴엘이 지난 6년간 지속적으로 펼쳐온 다양한 전시와 문화마케팅은 작가의 결정에 힘을 실었다. 또한 이번 경우처럼 비즈니스와 아트를 거의 동일선상에 놓고 추진하는 아트 콜라보레이션 작업은 이제까지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경험이 될 것에 높은 점수를 줬다. 작가와 기업이 서로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작가는 롯데백화점의 이미지를 드로잉으로 옮기고, 백화점은 이를 각종 감사품이나 DM, 관련 인쇄물과 전시에 활용하게 된다. 더군다나 전시 후 드로잉 작품 100여 점을 그간 에비뉴엘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준 VIP들에게 증정하는 이번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다. 작가와 기업의 협업이 나아가 아름다운 보답으로 고객에게 되돌아가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동기_with Nero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펜_30×25cm_2011
이동기작가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와 재치로 에비뉴엘에서 즐거운 역할놀이를 선보일 100명의 아토마우스. 이동기 작가와 롯데백화점의 협업이 작가의 명성과 예술성에 흠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아가 이번 사례가 동반자적 문화마케팅의 성공적 사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귀추를 주목해 본다. ■ 성윤진







공허한 심연

이채영展 / LEECHAEYOUNG / 李彩瑛 / painting   2011_0330 ▶ 2011_0412


이채영_새벽 2시_장지에 먹_130×162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604b | 이채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밤이 열어 보이는 세계, 마술적인 밤 ● 어릴 적에 곧잘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술심부름을 위해선 숲길을 지나쳐가야 한다. 낮에도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밤에는 왠지 같은 길이 아닌 다른 길처럼 느껴졌다. 동네 청년들이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개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실제로 허연 뼈다귀가 발견되기도 했다. 동네어귀를 지나쳐 그 길에 접어들 때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긴장하기 시작했고, 긴장은 숲길을 빠져나올 때쯤이면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긴장감은 낮에 그 길을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것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반복되는 술심부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감되거나 줄어들지가 않았다. 이상한 것은 그 길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하던 머릿속이 밤이면 어김없이 하얗게 지워져버려 매번 새 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길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상상력을 부추겨 긴장감을 고조시켰던 것 같다. 세월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고 환경도 변했지만, 모든 것을 어둠 속에 품어 들이던 그때의 밤의 질감이나 그 질감이 자아내는 두려움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이채영_새벽3시10분_장지에 먹_97×130cm_2011
  이채영은 밤을 그린다. 서울의 밤이며 도시의 밤이다. 필자에게 작가의 밤 그림은 유년의 밤을, 유년이 형성시켜준 밤의 질감과 정서와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했다. 흔히들 도시의 밤 풍경을 그리지만 대개는 인공조명으로 휘황하거나 그 속에 도시의 욕망이 탑재된 번잡한 것들이기 마련이다. 밤의 침범을 밀어내기라도 하듯 오히려 낮보다도 밝거나, 아니면 마치 꿈을 꾸듯 가물거리는 별빛처럼 아예 먼 조망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작가의 밤 그림은 이 휘황하고 번잡한, 그리고 때로는 몽롱한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시점으로 치자면 도심 속으로 지나치게 밀착해 들어가지도 않고 동떨어지지도 않는다. 아마도 대상을 더 잘 조망하게 해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미학적인 용어로는 심적 거리두기 혹은 미적 거리두기가 유지되고 있다. 대상에 지나치게 근접되면 의미가 결정적이기 쉽고 다른 의미들에 배타적이게 되기가 쉽다. 반대로 대상으로부터 지나치게 동떨어지면 의미는 오리무중에 빠진다. 대상으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작가는 대상이 자신의 성질을 발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드러난 성질에 저마다의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 최근 수년 내에 특정화된 장르 페인팅으로 소위 도시회화가 있다. 일찍이 인상파 화가들이 카페문화에 매료되어, 그리고 팝 화가들이 소비문화에 혹해 도시의 정경을 즐겨 그린 적이 있지만, 최근의 도시회화의 경향은 이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아이콘 내지는 아이템을 도시에서 발견한 경우인데, 그 가운데에는 아파트와 연립 같은 생활공간도 있고, 재개발 현장이나 청계천과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가 강한 장소도 있다. 그런가하면 흔히 간과하기 쉬운, 그래서 오히려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는 도심의 변두리에 주목한 경우도 있다. 이채영의 그림은 이 도시회화의 한 부류로 범주화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작가만의 특유의 정서를 매개로 도시의 또 다른 국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채영_밤 12시 35분_장지에 먹_72.5×60cm_2010
  다시, 이채영은 밤을 그린다. 도시의 밤을 그리는데, 그러나 그 도시는 도심이 아닌 도시의 변방이며 변두리다. 주로 정적에 감싸인 주택가를 그리고, 주택과 주택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길을 그리고, 어두운 가로 위로 희미한 불빛을 흩뿌리는 가로등이나 반 지하방의 정경을 그리고, 대개는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함께 주차된 차들이 어둠 속에 잠겨있는 막다른 골목의 귀퉁이를 그리고, 등이 발하는 조명이 가장자리에 갇혀 무슨 무대처럼 보이는 아파트 현관을 그리고, 적막감과 함께 다소간 생경해 보이는 구조물이 어떤 이질감마저 자아내는 텅 빈 놀이터를 그린다. ● 익히 보아왔고 알려진 정경들이지만, 그 위에 밤이 드리워지면서 정경들은 불현듯 낯설고 이질적이고 생경하게 다가온다. 밤이 되면서 친숙한 풍경이 낯설어지는 것. 이처럼 이질적으로 와 닿는 풍경이 캐니와 언캐니에 대한 프로이드의 논법을 상기시킨다. 두려움은 예기치 못하게, 부지불식간에 침범하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진작부터 친근한 것 속에 이미 내장돼 있었다. 친근한 것이 어떤 사건을 매개로 낯설어지고 생경해지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 작가의 경우에 그 사건은 밤이다. 밤은 사물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사물의 정서를 변질시킨다. 마치 벨벳 같은 어둠의 질감 속에 사물을 품어 들여 그 형태를 정서로 치환시켜놓는다. 즉 밤에 사물은 형태를 벗고 정서로 화한다. 그래서 두런거리는 것 같고, 움직이는 것 같고, 쳐다보는 것 같다. 그 응시에는 광기와 매혹이 묻어있다. 어둠이 쳐다본다. 광기와 매혹이 손짓을 한다. 밤이 낮과는 다른 세계, 낮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세계, 어쩌면 아예 존재하지도 않을 세계, 낮이 결코 열어놓을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  
이채영_새벽3시_장지에 먹, 혼합재료_97×130cm_2010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명명백백해지는 낮에 세계는 하나다. 그러나 밤이면 세계는 사실은 양가적으로 구조화돼 있음이 밝혀지고, 사물과 사물, 정서와 정서, 의미와 의미간의 차이가 불현듯 불투명하고 애매해진다. 사물과 그림자, 빛과 어둠, 친숙함과 낯 설음, 광기와 매혹이 하나의 결로 직조되는 어떤 차원이 열리고, 타자와 타자가 서로 만나 삼투되는 이질적인 세계가 개시되는 것. 이처럼 밤이 열어 보이는 양가적 세계, 양가적 비전에는 그림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도맡는다. 광원이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때 그림자는 사물과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무슨 국부조명처럼 가까이서 불빛이 비칠 때 그림자는 칼로 종이를 자르듯 공간을 가른다. 때로는 부드럽게, 그리고 더러는 급격하게 공간을 구획하면서 그림자는 사물을 변형시키고 대기의 질감을 변질시킨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세계를 변형시키고 변질시키는 밤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는 것 같다. ● 일부 채색을 도입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작가는 이 모든 그림들을 대개 먹만으로 그리고, 흑과 백의 음영만으로 그린다. 그림들은 무슨 흑백사진처럼 보이는데, 가까이서 보면 붓질이 여실한데도 왠지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사실적인 감각과 느낌을 통해서 일루전 곧 실재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 이 실재감은 아마도 풍부한 하프톤 때문이 아닐까 싶고, 특히 먹빛으로 표현된 대기(밤?)의 습윤한 기운을 자기 내부에 머금어 들이는 종이의 질감 내지는 성질 탓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빛과 어둠의 상호작용이 자아내는 밤의 질감을 감각적으로 캐치하는 작가의 남다른 감수성과 함께, 그 감수성에 형태를 부여해주는 표현력이 뒷받침되고 있을 것이다.  
이채영_새벽2시20분_장지에 먹_97×130cm_2011
  이로써 작가는 밤의 시간을 열어놓는다. 시간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밤은 낮과는 전혀 다른 도시의 생리와 삶의 질감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그 존재의 빛을 발하는 것들, 어둠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 들이는 것들, 어둠 속에서 소생한 것들이 수런거리는, 친근하고 생경한, 감싸면서 두려움을 자아내는, 매혹의 그림자 속에 광기의 빛을 숨기고 있는 밤이 열어 보이는 세계로, 어쩌면 마술적인 세계로 우리 모두를 초대한다. ■ 고충환



a Space

이원균展 / LEEWEONGYUN / 李源均 / photography   2011_0330 ▶ 2011_0404


이원균_a Space #45282_디지털 C 프린트_180×18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50513a | 이원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이원균-기억이 봉인된 공간 ● 이미 지나버린 것들은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남겨진다. 몸 속 어딘가에 부동으로 굳어있다가 느닷없이 솟아오른다. 기억은 견고하거나 명료하지 만은 않다. 그것은 무척 자의적이고 모호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그에 비례해 자꾸 희박해진다. 점차 상실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잊혀진다고, 없어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기억은 무엇인가의 자극에 의해 불현듯 찾아온다. 내 의식 앞에, 눈 앞에 기이하게 자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불충분한 기억에 의존해 살아간다. 기억이 없다면 삶도 없다. 기억이 있어야 그 기억에 기생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 그의 전생의 모든 기억을 가능한 빼곡히 그려 넣어주었다. 죽은 이가 환생해 벽에 그려놓은 이미지를 통해 이전 생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불사하고 불멸하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지는 사리진 순간, 그래서 의식 속에 비물질로 남을 수밖에 없는 기억을 외화해서 굳혀 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이제 추억이나 기억을 대신해 자존하다. 문자나 이미지는 결국 찰나적으로 사라지는 덧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인간의 그 일회성 삶에 대한 불안과 초조를 위무해주고 시간을, 그 시간을 경험하고 겪어냈던 흔적들을, 기억들을 반복해서 되돌려준다. 문화란 결국 모든 것을 매번 기억 속에 되살려놓으려는 욕망으로 인해 가능했다. 문자화 한다는 것이 결국 문화다. 시간의 기억에 대한 저장의 결정적 수단은 당연히 사진이다. 한 장의 사진은 한 순간을 영원히 봉인한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영구히 보존하고 있다. 이제 사진은 현실의 시간을 대신해서 그 시간 대신에 영원히 산다.  
이원균_a Space #44928_디지털 C 프린트_180×180cm_2









공허한 심연

이채영展 / LEECHAEYOUNG / 李彩瑛 / painting   2011_0330 ▶ 2011_0412


이채영_새벽 2시_장지에 먹_130×162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604b | 이채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팔판동 27-6번지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밤이 열어 보이는 세계, 마술적인 밤 ● 어릴 적에 곧잘 아버지의 술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술심부름을 위해선 숲길을 지나쳐가야 한다. 낮에도 지나다니는 길이지만, 밤에는 왠지 같은 길이 아닌 다른 길처럼 느껴졌다. 동네 청년들이 아름드리나무 밑에서 개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실제로 허연 뼈다귀가 발견되기도 했다. 동네어귀를 지나쳐 그 길에 접어들 때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긴장하기 시작했고, 긴장은 숲길을 빠져나올 때쯤이면 최고조에 이른다. 그리고 긴장감은 낮
추천 스크랩 신고

태그 없음

첨부파일

zabel

  • 작성시각: 2011.03.27 03:33:23
  • 총 작성한 글타래: 56 개
  • 총 작성한 댓글수: 141 개
  • 가입일: 1970/01/01
  • 포인트:
  • 레벨:
  • 오프라인 상태입니다
글 제목: 3-26
수정 삭제



만나다

스페이스 15번지 작가 공모 당선 기획展   2011_0325 ▶ 2011_0410 / 월요일 휴관


이흙_Diver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130cm_2008

초대일시 / 2011_0325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 이흙_정철규_임지민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 15번지 SPACE 15th 서울 종로구 통의동 15번지 Tel. 070.7723.0584 space15th.org


스페이스 15번지는 역량있고 순수하게 작가를 지원하고 소개하는 비영리공간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통하여 작가간의 교류의 장, 또는 협력의 장소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 전시 공간이 하나가 되는 공간으로 이끌어 나가려 합니다. ● 2011년 기획 공모에 당선된 신진 작가전시 『만나다』展을 개최하오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스페이스 15번지
이흙_어느날 구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2cm_2010

옵티미스트(긍정주의자)의 하늘 ● 나의 일련의 작업을 통해 관람자에게 「토끼구름~나비구름」 같은 어릴적 부르던 동요등을 떠올리게 한다면 나의 작업은 반쯤 성공한 셈이 된다. ● 거대한 시간 속에 묻혀 사는 현대인들에게 어릴 적 묘한 흥분이 묻어있는 동요를 떠올리는 과정은 마치 책장 서랍 속에 담겨있던 앨범을 들추는 행위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 일종의 기억 환기 장치인 나의 하늘-구름 작업은 물리적 풍경의 하늘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개입되고 의도된 하늘을 보여준다. ■ 이흙

임지민_임씨의 화실_Mr.Lim's atellier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0
임지민_선물_Gift_캔버스에 유채_112.1×145.5cm_2011

일상과 단절된 이는 아주사소하고 소심한 것에 신경 쓰게 된다 ● 사진을 보고 얻는 기분 좋은추억되새김은 이기적인 선택에 능란한 기억의 능력 덕택이다. 능수능란한 기억의 홀림으로 인하여 무시되었던 두려움의 논리에 집중하여 본다. 누군가와 함께 했었던 과거의 일상을 남겨진 사진을 통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곱씹어본다. 단절된 그를 추억하고자, 나를 위해 꺼내든 사진들로부터 작업은 시작된다. ● 옛 사진을 뒤져보는 나의 심정은 간절하다. 내 마음대로 일상 속 기억을 짜 맞춰 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진 채 오래된 사진을 계속 꺼내어 본다. 흩어졌던 사소한 기억부스러기들을 모으며, 추억을 되새기고 슬픔도 정리해간다. ● 슬픔은 먹먹함으로 또다시 기대와 상상으로 변화되어간다. 내적인 감정이 점차 외적이고 객관적인 감정을 변화되어 간다. 마치 미지의 상황을 풀기 위한 단서로서 남겨진 증거물을 대하듯이. ■ 임지민

정철규_움직일수없이_합성수지에 유채_지름60cm_2011
정철규_노란깃발을 찾아갈사_합성수지에 유채_지름 60cm_2011
정철규_스페이스 15번지展_2011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 또한 있을 것이다. 나의 작업 또한 그러한 시기에 겪었던 불안함과 아련함 속에서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우연히 만난 길가의 볼록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된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볼록거울의 모습에서 작가와의 심리적 동일시를 발견하게 됨으로써 시작한 Lingering Moment 시리즈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뇌리에 맺혀질 수 있는 기억의 시간, 장소 등의 상황을 볼록거울을 대변해 볼록거울의 원형과 닮은 모습의 캔버스에 담아냄으로써 잊혀 지지 않거나, 잊으려 하지 않는 이미지를 기억에 관한 기록으로서 보여준다. 많은 경험을 하는 현대인은 누구나가 간직하고 싶거나 간직하지 않으려 해도 간직되는 상황이 있다. 그러한 상황은 무의식의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마치 행복했던 꿈을 잊지 않으려는 습성처럼 말이다. ■ 정철규



2011.03.27 03:33:23 / Good : 376 + Good
Powered by GR Fo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