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제목: Gerhard Richter, Self-portrait, 1949
('.그림이 나를 본다. 그것을 누군가 냄새 맡는다..') + + +출처 : 구글검색
청춘의 자화상, 성장의 불꽃 _강수미 미술평론가독일의 현대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비단 모국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어지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회화의 진보 및 확장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자 살아있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미술 시장에서 이전에 그와 비슷한 수준을 찾기 힘들 만큼 엄청나게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그 자본제적 가치의 상승이 여하한 경우에도 멈추지 않으리라 예상되는 초대형 작가다. 그의 미술은 대규모 국제 비엔날레부터 명망 높은 미술관의 개인전까지, 130년 역사를 가진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부터 작은 상업 화랑의 벽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다종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해서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리히터의 작품들과 조우한다. 그리고 물론 당연한 일인데, 전 세계 아주 많은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를 공부하고 그를 모델로 삼아 미술가로서의 화려한 성공을 꿈꾼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감상자들이 리히터의 그림 앞에서 회화가 선사하는 극대치의 미적 쾌감을 향유한다면, 예비 미술가들은 이미 현대미술의 신화가 된 ‘게르하르트 리히터’로부터 예술에 대한 열망과 예술가로서의 성공적 삶에 대한 판타지를 동시에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완성된 성공신화에는 반드시 고난과 역경과 갈등의 젊은 시절이 결정적 요소라는 듯 기입돼 있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담임교사로부터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된다며 학교에 나오지 말 것을 종용받은 적이 있다. 또 세잔은 19세기 후반 이미 당대 최고의 문제적 작가로 유명세를 떨친 유년시절부터의 친구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에서 자신을 ‘좌절하고 실패한 화가’로 묘사하는 상황을 감내해야 했다. 리히터에게도 그처럼 결코 세상이 판타스틱해 보이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재능을 의심하며, 타인을 향한 질투에 몸을 떠는 것은 물론 자존감을 갉아먹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사막에 홀로 버려진 듯 피폐한 마음 상태, 세상 모두가 웃고 있을 때 불행히도 혼자서 울고 있는 것 같은 고독한 처지. 그때의 처지와 상태가 고스란히 담긴 그림이 리히터가 열일곱 살 때인 1949년 종이에 수채화로 그린 〈자화상〉이다. 지금은 사진 자료만 남아있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그림은 ‘생존하는 최고의 미술가’라는 권좌에 오른 오늘의 리히터와 그의 작품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매우 거칠고 도발적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없다. 1961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망명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세계 미술계의 기린아로 떠오르고, 그 이후 줄곧 실패를 모르고 비상해온 화가의 그 많은 유명 작품들 또는 대표작들에서 보이는 면모를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령 작가의 심중이나 작품의 의미는 모호하게 감춘 채 시각적 표현의 탁월함으로 감상자의 감각을 즐겁게 하고 매혹하는 이후 그림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이미 눈앞에 성공한 인물로 서 있는 누군가에게 우리는 실제야 어떻든 당연하다는 듯이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과거를 상상적으로 대입하곤 한다. 하지만 청소년기 리히터가 그린 예의 자화상은 뇌우가 치고 검은 빗줄기가 대지를 적시는 칠흑의 밤, 그 같은 마음의 고통을 앓는 청춘을 보여준다. 리히터의 49년 〈자화상〉은 세상을 향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얼굴이다. 또는 그 그림을 그린 이가 얼마나 화가 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지를 보란 듯이 과시하는 작품이다. 아마도 리히터를 불세출의 작가로 만들어준 그림들, 즉 1960년대 중반부터 덧없는 이미지를 사진처럼 재현한 그림들이 계기가 돼 이 작가의 미술 세계에 입문한 감상자들에게 〈자화상〉은 불편할 것이다. 작가 자신이 말했듯 “엽서를 복사하듯이 어리석은 짓”이었을지 모르나, 보는 이에게는 회화의 혁신이자 감각적 향유의 황홀경이 됐던 그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들(photography based painting)’ 말이다. 예컨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베티〉는 소녀가 된 자기 딸의 뒷모습을 사진에 기초해 화려한 색채, 그윽하고 안정감 있는 톤, 정교한 붓질로 아름답게 재현한 것이다. 반면 〈자화상〉은 그 대극(對極)에서 열일곱 살 나이의 리히터 자신을 무채색, 격렬하고 불안한 분위기, 내지르는 식의 드로잉으로 점철시킨 것이다. 그 때문에 보는 이는 전자에서 가시적 즐거움, 따뜻함, 사랑의 감정 등을 향유할 수 있다면, 후자에서는 짓눌리는 심정, 소외, 통증에 시달리는 영혼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질문은 ‘그렇다면 화가는 왜 그 〈자화상〉을 그렸을까?’ 이다. 리히터는 1932년 독일 나치 치하 드레스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독일 바로크 문화예술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그 고풍스럽고 위대한 도시가 1945년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폐허로 몰락하는 상황을 어린 눈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부모의 재정 형편 때문에 드레스덴보다 점점 더 작은 도시들로 떠밀리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자화상〉은 그런 와중에 리히터가 동독영토의 변두리 지방 치타우(Zittau)에 살 때 그린 것이다. 그로부터 채 이십여 년이 지나지 않은 미래에 사람들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세계 최고의 화가’로 꼽는 미술가가 된 리히터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청소년기의 그에게 그곳이 엄청난 심리적 압력을 행사했다고.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부모의 관계는 삐걱거렸으며, 그 지방 사투리를 쓰지 못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고, 클럽에서 노는 또래들을 보며 질투에 휩싸이고는 했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시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것을 잘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자화상〉 속 얼굴이 극단적인 명암으로 양분되고, 한쪽 눈이 공격적인 눈빛 속에서 흔들리는 듯하고, 굳게 다문 입술이 강해 보이지는 않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리히터는 십 대 후반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 치타우의 삶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자 저항으로 그 〈자화상〉을 그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그림을 그림으로써 내부에 뭉쳐있던 통증을 밖으로 꺼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통증은 분명 과거 리히터의 삶을 괴롭힌 큰 원인이었겠지만, 역으로 그 통증 덕분에 리히터는 현재의 그가 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리히터의 1949년 〈자화상〉은 성장의 불꽃을 내포한 그림이라 풀이해도 무리가 없다. 오늘 내가 여기서 문득 세계적 거장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자화상을 꺼내 든 것은 바로 그 ‘성장의 불꽃’이 지금 이곳에서 간단치 않은 삶을 사는 젊은이의 고통 속에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있는 우리의 십 대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못해서가 아니라 도대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로 어른들의 시간을 대신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자기 안에 깊이 잠복한 고통을 마주하고 밖으로 꺼내보라고 권유하고 싶어서다. 불꽃 같은 성장은 그다음에 오는 것이다. 참고자료 ㅡ 리히터 공식 웹사이트 http://www.gerhard-rich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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