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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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1.03.02 13:3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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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n of desire 욕망의 정원

최나리展 / CHOINARI / 崔나리 / painting   2011_0302 ▶ 2011_0331 / 주말, 공휴일 휴관


최나리_Mato&Mayo''s Massacr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00×191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최나리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기획 / 재단법인 이랜드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 공휴일 휴관 이랜드 스페이스 E-LAND SPACE 서울 금천구 가산동 371-12번지 이랜드빌딩 Tel. +82.2.2029.9885

욕망의 드러내기와 감추기를 위한 페르소나-최나리의 회화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스스로 혼자 살수 없기에, 사회라는 구조화된 틀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 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다양한 역할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사회적 역할 앞에서 인간은 인습, 혹은 전통의 요청과 그 자신의 내적 요구에 부응해서 다양한 가면을 채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가면을 쓴 인격에 대해 심리학자 융(C.G. Jung)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명명하며, 그것이 사회가 인간에게 부과하는 역할인 동시에, 인간에게 담당하기를 기대하는 배역이라고 말했다. 이 가면은 자신의 고유한 심리구조와 사회적 요구 사이에 적응할 수 있는 역할을 해주는데, 때때로 그 사람의 본성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쓴 그는 단순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며, 자발적인 인간이기보다는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타자화된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재모습과, 심리적 가면 사이의 갈등에 관한 내용은 영화의 주제나 미술작품에도 꾸준히 등장해 온 소재이다. 최나리의 작업에서도 인간의 여러 욕망을 드러내기와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써 가면 쓴 캐릭터가 등장하고 있다.
최나리_Balance for Balanc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7cm_2010
최나리는 원래 토마토케첩과 마요네즈 튜브에서 도상화된 캐릭터를 착안하였다. 2008년의 초창기 작업에는 이러한 마토(Mato), 마요(Mayo)라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면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 혹은, 그들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작품을 진행했었다. 초기의 작품이 캐릭터성을 강조하고, 여성과 남성으로 화면을 양분하여 여러 가지 조형적인 실험과 색채연구에 주안을 두었다면, 근작에는 인간 본연의 욕망을 가시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근작의 나체 인물들을 캐릭터라기 보다는 가면 쓴 인간의 원형(原形)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얼굴의 눈, 코, 입이 지워진 모습으로 등장한다.(초기 몇몇의 작품에서는 얼굴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으나, 근작 대부분의 작품에는 눈, 코, 입이 없다.) 그나마 나체 인물군상들의 성(性)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단서는 젖가슴이나 페니스로 연상되는 남근형상이다. 남성, 여성의 나체 인물상에는 공통적으로 흐느적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마치 물살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해초, 말미잘, 혹은 히드라의 촉수처럼 생겼는데, 의식의 세계 아래에서 살아 꿈틀거리는 욕망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나리_False chatter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7cm_2010
작가가 인물 표현에 있어 가면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것은 인간의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안에 인간의 무수한 욕망들을 날것으로 표현하였으나, 그것을 어느 특정한 인간의 욕망이라기 보다는 그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보편의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가면을 씌운 것이다. 이러한 가면에는 어떠한 표정도 찾아 볼 수 없다. 표정이 지워진 채 그저 허망한 모습이다
최나리_Tug of war will not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12×162cm_2009
이처럼 최나리의 작품 전반에 걸쳐 관통하는 키워드는 '욕망'이다. 전시타이틀도 작가 스스로가 『Garden of desire(욕망의 정원)』이라고 지었다. 작가는 인간이 지닌 여러 욕망들을 나체의 인물군상의 모습으로 드러내면서, 관람객에게는 그 어떠한 판단도 유도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의 삶이 그러한 욕망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직설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이러한 욕망은 때로는 감추고 싶은 것 일수도 있고, 들키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최나리의 작품 앞에서면 속물근성(snobbism)이 탄로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적나라하게 표현된 욕망 앞에 마음이 불편하다.
최나리_Rooftop party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30.3×162cm_2010
이를 테면 작가는 작품 「Rooftop party」에서는 성공을 향한 욕망의 각축장을 빌딩 안의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앞서 서술한바, 기존에는 캐릭터성에 치중하여,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性)의 대비에 집중했다면, 신작에서는 공간에 대한 설명이 첨가되면서 내러티브가 강화되고 있다. 작가는 자본이 돌아가는 현대도시사회의 한 단면을 빌딩건물 안의 사람들로 대변하고 있다. 화면의 상단은 수많은 인간들이 뒤엉켜진 채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고, 배경에는 폭죽이 터진 상황으로 연출하고 있다. 또한 작품 하단의 빌딩 건물의 창문은 액자모양으로 그 테두리가 묘사되고 있는데, 건물의 우측에는 "AUCTION"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인다. 최나리는 성공을 향한 사람들의 몸부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처한 미술계 안의 경쟁적 상황에 빗대어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실의 냉혹함과 치열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쯤 인가를 스스로가 담담하게 확인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최나리만이 안고 있는 고민은 아닐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젊은 여성작가가 화단에서 살아남기는 얼마나 고독하고, 외롭고, 힘든 일이겠는가.
최나리_Garden of desire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12×145.5cm_2010
작품 「Garden of desire」에서는 성적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최나리는 모던아트의 이정표가 되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마네(E. Marnet)의 「풀밭 위의 점심」을 패러디하고 있는데, 풀밭대신 예술품이 가득한 미술관으로 장소를 변경하였다. 그리고 미술관 안에서 나체의 사람들이 큐피드(cupid)가 사랑의 화살을 쏘듯, 서로를 향해 욕망의 화살을 쏘고 있는 모습으로 설정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서양의 회화에서 과일은 여성과 관련된 섹슈얼리티를 상징하였다. 최나리는 사람들의 성적욕망을 가시화시키려는 듯 미술관 벽에는 탐스럽게 빛나는 과일그림을 걸어놓았다. 미술관으로 대변되는 미술계 역시 욕망으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또한 작품「Racing of a death」를 통해 인간이 욕망의 끝은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경쟁의 질주를 통해 쾌락을 맛보기도 하지만, 백미러에 비치는 해골과 유턴금지의 교통표지판은 그것이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최나리_Racing of a death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1×116.7cm_2010
프로이트(S. Freud)는 예술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유아기의 소망충족이라는 관점에서 작가와 작품간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중시했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창작행위가 심리적 자위이자, 대리만족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창작은 좌절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억압된 여러 개인사적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예술가는 심리적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최나리 작가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성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표현을 넘어서서, 인간이 지닌 여러 욕망과 속물근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발화하고 있다. 감추고 싶거나, 혹은 억압된 욕망을 작품 안에서 분출함으로써 자기 만족, 혹은 치유라는 심리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때 작품의 인물들은 욕망의 소유자가 특정인이 아닌, 그 누구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익명의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쓴 채,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날것으로 살아난 욕망이 가득한 정원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 고경옥




into the membrane

박종빈展 / PARKCHONGBIN / 朴鐘斌 / mixed media.installation   2011_0302 ▶ 2011_0330 / 월요일 휴관


박종빈_Domestic Occasion_탁자, 의자 12개, 바이스로 이루어진 설치, 흑연, 철, 나무, 레진_가변크기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70622c | 박종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02_수요일_06:00pm 기획_아라리오 갤러리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서울 ARARIO SEOUL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82.2.723.6190 www.ararioseoul.com

박종빈은 2007년 이래로 흑연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왔다. 2007년 영국에서 작업한 「Looking at him」은 카드보드(cardboard)로 도베르만(Doberman)을 대형 조각으로 만들고 표면을 정세하게 흑연으로 칠했다.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대형 조각은 마치 로봇이나 장난감처럼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형태와 흑연으로 곱게 칠한 표면 때문에 재료가 종이가 아니라 마치 단단한 강철과 같은 느낌을 준다. ●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흑연이라는 소재를 전면적으로 사용하였다. 대형 탁자와 열두 개의 의자, 그리고 조각작업을 할 때 물건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바이스(vice)가 어우러진 설치 작품 「Domestic Occasion」 (2010)에서 탁자 상판과 의자는 모두 흑연을 사용하였다. 흑연 덩어리를 재단하여 오랜 시간을 들여 표면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만진 탁자와 의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단단한 강철처럼 보이지만 실은 약한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거나 흠집이 날 수 있을 만큼 예민하다.
박종빈_Domestic Occasion_탁자, 의자 12개, 바이스로 이루어진 설치, 흑연, 철, 나무, 레진_가변크기_2010_부분
거대한 탁자와 열두 개의 의자는 전시장을 가득 채워 들어가자마자 답답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탁자의 벌어진 틈은 마치 바이스처럼 점점 정확하게 맞물려서 단단하게 원형을 이룰 것처럼 보이고 탁자를 둘러싼 열두 개의 의자들이 모든 것이 이미 정확하게 맞도록 장치한 듯한 느낌마저 준다. 수평을 가르는 탁자의 원형선과 바이스의 직선, 수직으로 뻗은 탁자 다리와 의자들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기하학적인 구성에서 나오는 쾌감을 준다. 육중한 탁자와 의자는 마치 초등학교 의자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일반 가정의 부엌이나 거실에 놓일 법한 탁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혹은 회의가 이루어지는 원탁이거나 회의를 끝내고 모여앉아 여흥을 즐기는 탁자일 수도 있겠다. 당사자들이 둘러앉아 그들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탁자와 의자는 그 동안 영화, 소설, 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가정과 모임의 안정과 화목, 특정 사안을 둘러싼 논의 등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어 왔다. 가정과 학교와 같은 제도들은 인간 개개인을 형성하거나 보호하는 막이면서도 이러한 막에 의해 이루어지는 강압과 압박은 또 다른 굴레가 될 수 있음을 단단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민감하고 연약한 소재인 흑연으로 만든 오브제들을 통해 비유하고 있다.
박종빈_Closed Passage_철, 우레탄시트, 나무_61.5×180×180cm_2010~11
박종빈_Closed Passage_철, 우레탄시트, 나무_61.5×180×180cm_2010~11_부분
탁자와 의자 세트는 또 다른 조각작품인 「Closed Passage」 (2010-2011)에서 미니어처 형태로 반복된다. 마치 서양 십자형 성당에서 사제단과 회랑을 잇는 교차 공간인 트랜셉트(transept)를 연상시키는 십자가 형태의 구조물 내부에는 탁자와 의자 미니어처가 놓여있다. 반투명한 비닐 막으로 가려져서 이리저리 흩어져 놓인 탁자와 의자들이 어렴풋이 보일 따름이다. 크기를 달리한 대상의 반복은 최종적으로는 「Dust Room」 (2010-2011)의 내부에 「Closed Passag」의 십자형 비닐하우스가 다시 한번 미니어처로 포함됨으로써 마무리된다. 「Dust Room」 은 물리 혹은 화학 실험을 위한 일종의 실험용 상자로 실험 대상을 가두고 각종 실험 변수를 적용한 후 반복적으로 실험값을 확인할 수 있는 장치이다. 이것을 이용해 작가는 실험용 상자에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푸른 빛깔의 먼지를 발생시켜 온통 노란 색으로 칠해진 내부의 벽과 도구들이 먼지로 덮히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종빈_Dust room_나무, 아크릴판, 라텍스 장갑, 가루, 붓_130×96×60cm_2010~11
박종빈_Dust room_나무, 아크릴판, 라텍스 장갑, 가루, 붓_130×96×60cm_2010~11_부분
설치 조각물과 함께 고운 흑연 가루들이 이루어내는 얼룩과 결들이 마치 거친 파도나 황량한 사막을 연상시키는 사진들이 함께 전시된다. 작가는 「Domestic Occasion」작업을 위해 육중하고 거친 흑연 덩어리를 잘라내고 문지르고 갈아내면서 흑연의 표면에 강철과 같은 광택을 내었다.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는 어찌 보면 구도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다. 흑연을 갈아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던 흑연 가루, 먼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갈고 문지르는 외부의 압력을 오롯이 받아내는 가루와 먼지가 이러한 압력을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어디에서든 보이는 그대로 쌓인 먼지와 가루가 마치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인간 개개인이 끊임없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종류의 압력들-그것이 내부의 신념이 되었든, 외부의 현실과 제도가 되었든-에 대한 시간과 장소, 정서의 기록으로 읽혀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 아라리오 갤러리
박종빈_Untitled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05×140cm_2011
Sculptor Chongbin Park,




心. 景. 고. 백.

사진집단 포토청 사진展 / photography   2011_0303 ▶ 2011_0316


백홍기_파주'夜'-운정_잉크젯 프린트_80×120cm_2010
초대일시 / 2011_0303_목요일_07:00pm 참여작가 / 강정미_김민수_김진호_백홍기_성호정_이경은 관람시간 / 12:00pm~08:00pm 공간415 GONGAN415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2-23번지 1층 Tel. +82.2.325.0415 cafe.naver.com/gonggan415

사진전을 기획하고 준비하다보면 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사진적 이해의 우매함을 탓해도 할 수 없으나 변함없는 의문은 역시 "사진이란 무엇인가?"입니다. ● 2011년 봄, 현대사진은 사진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따라 발표되는 사진의 내용과 형태가 천태만상이고 그 양이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대단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진들을 보면서 그 의문의 깊이가 더함 또한 숨길 수 없습니다.
강정미_안산_젤라틴 실버 프린트_25×25cm_2010
사진은 사실성이 중시되는 사진과 회화성이 중시되는 사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외국문화에 대비시켜보면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즉 사진 고유의 특성을 존중하는 정직한 기록을 통해 시대의 현실을 직시하는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과 현실보다는 회화의 형태에 가까운 표현으로 자기 내면세계 탐구의 목적이 더 크게 나타나는 로맨티시즘 계열의 사진. 아마도 요즘의 사진은 사실성과 회화성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서로 밀고 당기며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습니다.
강정미_군포_젤라틴 실버 프린트_25×25cm_2010
사진집단 『포토청』의 사진전이 올해로 11번째를 맞습니다. 되돌아보면 사진공부의 목적이 처음부터 같지는 않았으나 좋은 사진을 작업해 내려는 마음은 같은 사람들, 사진학과 출신은 아니지만 단순한 취미활동을 넘어 사진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그렇게 작업된 사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눈을 뜨고 싶어 하는 사람들, 게다가 꾸준한 작업과 사진 공부를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진정한 사진가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고 앞으로도 해마다 열릴 사진전이라고 믿습니다.
성호정_무제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24cm_2011
성호정_무제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6×24cm_2011
매년 주제를 선정해 작업하고 공동 전시로 풀어내던 것을 올해는 각 개인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리얼리즘 계열 혹은 로맨티시즘 계열의 개성을 살려보자는 의미에서 2개의 전시로 나누었습니다. 즉, 2월 17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리는『人과間』과 3월 3일부터 3월 16일까지 열리는『心景고백』입니다. '따로 또 같이' 라는 말이 있듯이 이 2개의 전시는 하나로 보면 포토청 정기사진전이 될 테고 나누어보자면 각 참가자의 개인전 형태로도 볼 수 있을 만큼 개성과 진정성을 드러내보고자 했습니다.
이경은_Truth Well Connected_刹•那_레이저젯 프린트_29×32cm_2010
이경은_Truth Well Connected_緣•結_레이저젯 프린트_16×41cm_2011
사진은 늘 그 작업을 한 사람이 사진에 대한 확실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작업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사진, 즉 사실적인 사진을 작업하거나 회화적인 사진을 작업하거나 제일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작업자의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내면의 정직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 강재훈
김민수_생명 Ⅳ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40×60cm_2009
김진호_Modern Evidence(matrix version)_C 프린트_80×100cm_2011
心. 景. 고. 백 ● 감히 사진은 모든 사물과 현상을 즉각적으로 '반영'하는 시각적 도구라 할 수 있다. 그 사물과 현상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도 하고 혹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 않으며 더구나 말과 글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찰나의 감정이나 무의식의 발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이 때로는 뜬금없는 넋두리, 곧 자기 고백이 되기도 하고 냉정한 기록의 산물이 되기도 한다. 사진의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心. 景. 고. 백.』은 그런 사진에 대한 순진한 시도이다. ■ 김진호




Unphotographable

정희승展 / CHUNGHEESEUNG / 鄭喜丞 / photography   2011_0303 ▶ 2011_0327 / 월요일 휴관


정희승_Untitled #07 the series The Reading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35×180cm_2010
초대일시 / 2011_0303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 주말,공휴일_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두산갤러리 DOOSAN GALLERY 서울 종로구 연지동 270번지 두산아트센터 1층 Tel. +82.2.708.5050 www.doosangallery.com

Still-Picture/Life : 정희승의 근작들 ● 사진은 '순간(刹那, moment)'을 포착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어빙 펜의 첫 번째 사진집 이름처럼 '보존된 순간 Moments Preserved'이다. 그런데 '보존된 순간'이라 할 때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발터 벤야민의 서술대로라면 초창기 사진에서는 모든 것이 지속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진판은 감광작용이 약했던 탓에 옥외에서 오랫동안 햇빛에 노출시켜야 했고 그 때문에 초창기 사진에는 광선의 집산, 명암연속성이 유지됐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초창기 사진에서 포착된 순간은 '지속성을 간직한' 순간이다. 초기 사진에는 벤야민식으로 말하면 순간성과 반복성,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후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노출시간은 점차 짧아졌고 머지않아 반복성, 지속성을 배제한 순간, 즉 말 그대로의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보존한 사진이 대세가 됐다. ● 스틸 사진(still picture)은 이렇게 즉물적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 적합한 이름이다. 즉물적 순간을 담은 사진에서 '순간'은 '짧은 순간'이라기보다는 '정지된(still) 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사진에서 사진가가 포착한 텅 빈 풍경은 여백의 美를 운운할 수 있는 정취를 간직한 풍경이 아니라 공허한 풍경이다. 으젠느 앗제의 텅빈 풍경에 관한 벤야민의 언급을 인용하면 그것은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이다. ● 이렇게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에 몰두하는 사진작가들은 마치 외과의사처럼 냉담하게 거리를 두고 자신의 대상을 마주 대할 것이다. 그에게 가령 누군가의 얼굴은 어떤 표정과 기분을 간직한 얼굴이라기보다는 그저 얼굴-즉물적 얼굴이다. 가령 토마스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이 그렇다. 또 그에게 도시 풍경은 도시인들의 삶의 애환과 욕망을 아우르는 풍경이 아니라 그저 풍경이다. 그 즉물적 풍경은 토마스 스트루트의 도시 풍경이다. 이렇게 우리 시대 사진가들은 냉담하고 건조하게, 인간적 개입을 배제하고 그저 순간, 단지 풍경, 얼굴 그 자체를 포착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대세다. 누구 말처럼 이것을 중성 미학, 무표정 미학(deadpan esthetics)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정희승의 사진 작업도 우리 시대 사진(예술)의 전체 흐름 속에 있다. 이 작가의 사진 작업 역시 루프와 스트루트처럼 냉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냉담하고 건조하지만 정희승의 사진 작업은 루프, 스트루트와 다소간 다르다. 여기에는 루프와 스투르트와는 다르게 어떤 표정이 있기 때문이다.
정희승_Untitled #05 from the series The Reading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35×180cm_2010
정희승_Untitled #04 the series The Reading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35×180cm_2010
중성 미학, 또는 무표정 미학 계열에 있는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사진에서 다루는 대상이다. 루프에게 그 대상은 '얼굴'이었고 스트루트에게 그것은 '거리(street)'였다. 즉물적으로 포착한 루프의 얼굴 사진은 그 자체로 얼굴의 유형학이 되고 냉담하게 포착한 스투루트의 거리 사진들은 그 자체로 도시의 유형학이 될 것이다. 그러면 정희승 사진 작업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취'다. 정취란 무엇인가? 그것을 우리는 일단 어떤 감정/표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정희승은 비극적 정취, 슬픈 감정/표정을 -즉물적으로-사진에 담는다. 냉담하고 건조하게, 그리고 작가의 개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말이다. 그것은 그 감정을 촉발한 어떤 사연, 그 정취를 만들어낸 어떤 특별한 상황을 배제하고 그저 그 감정, 단지 그 정취를 잡아내는 일이다. 예컨대 우리는 「Persona」 연작에서 (등장인물의) 슬픈 표정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왜 슬퍼하는지 알 길이 없다. 작가 역시 그 슬픔을 촉발한 계기나 원인을 제시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군더더기(?)가 배제된 '슬픔' 자체 혹은 '비극적 정취' 그 자체다. 그런 의미에서 「Persona」 연작은 '비극적 정취'의 유형학이라 부를 수 있다. ● 희극적 정취를 다룬 작업도 있다. 영상 작업 「Folly」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을 연기하는 한 배우를 만난다. 무표정의 상태에 있던 배우는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하다가 점차 웃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는 그가 왜 웃는지 알 길이 없다. 왜 웃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당혹감은 그 웃음이 최고조에 이르러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고 그것이 연기인지, 진짜인지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서 최고조가 된다. 그것은 낯선 웃음, 달리 말해 '순수 웃음(pure laughter)'이라 부를 만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즉물적 웃음, 또는 웃음 그 자체다. 또 하나 이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웃음 내지는 희극적 정취와 더불어 하나의 정취로서 '무표정'이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Folly」가 시작할 때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그리고 「Folly」가 끝날 때도 우리는 무표정과 만난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어떤 정취가 덧붙은 무표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무표정과 최후의 무표정은 같지만 다르다. 이것을 무표정의 유형화라 부를 수 있을까.
정희승_Untitled #11 the series The Reading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35×180cm_2010
정희승_Folly(still)_HD 아나몰픽, 영상 설치_00:04:11_2010
그런데 이렇게 비극적 정취, 희극적 감정, 무표정의 정취를 다룬 작업이 처음부터 안고 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을 포함해 정희승의 사진 작업 앞에 선 이들이 그것을 슬픔 그 자체, 웃음 그 자체로 마주 대하기 이전에 벌써 이미 사진 속 얼굴과 마주 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루프의 초상 작업에 등장하는 얼굴과 다르게 표정을 간직한 얼굴이다. 즉 그들이 마주 대한 것은 사실 '순수 웃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다. 그것을 '웃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로 보는 사람은 그 웃음의 유래를 찾아 어떻게든 그것을 '이유가 있는' 웃음으로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순수 웃음'이 초래한 당혹감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과 연기되는 배역의 얼굴이 교차되는 양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는 그것을 "서로 다른 페르소나가 공존하는"(신보슬)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중간자적 존재, 또는 비결정적 주체"(강수미)를 마주 대하는 순간으로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얼굴을 운운하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 정희승이 추구하는 바와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설명에서 그 자체로서의 정취, 감정, 표정은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상황에 작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정희승의 또 다른 연작 「Reading」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은 배우들이 대본을 반복해서 읽어나가면서 배역을 이해하고 창조해가는 과정을 다뤘다. 배우는 반복적인 대본 읽기 과정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을 점차 이해하고 자기화할 것이다. 그 과정은 배우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의 동작, 자세 일반에서도 관찰될 수 있다. 정희승은 그 가운데 어느 한 장면을 택해 우리 앞에 제시한다. 따라서 이 작업은 기본적으로 「Persona」, 「Folly」와 궤를 함께 한다. 하지만 「Reading」이 다른 작업과 다른 것은 배우로부터 좀 더 물러나 연기하는 배우의 몸짓을 좀 더 부각시키고 얼굴(표정)의 의의를 좀 더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얼굴보다 정취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을 것이다.
정희승_Curves (Triptych)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각 135×180cm_2010
정희승_Reflector_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208×156cm 2010
그런데 아직까지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이슈가 하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정희승의 작업을 스틸 사진으로, 즉 정지 사진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이것은 정희승을 토마스 루프 내지는 토마스 스트루트와 같은 계열의 작가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소위 중성 미학 작가들에게 정취, 감정, 표정은 처음부터 거부되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정희승에게 정취, 감정, 표정은 중대한 관심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벤야민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탬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벤야민에게서 '쓸쓸한' 것이 아니라 '아무런 정취도 없는 것'으로의 전환(으젠느 앗제)은 기본적으로 사진의 기술적 진보가 가져온 결과다. 노출 시간을 줄인 기술적 진보가 순간성, 일회성과 얽혀있던 반복성, 지속성을 사진으로부터 몰아냈고 그것이 '아무런 정취도 없는' 앗제의 텅빈 풍경 사진을 가능케 했다. 정희승에게서 벤야민이 초기 사진에서 관찰한 바가 역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보면 어떨까? 즉 정희승이 '정취, 감정, 표정'을 탐구 주제로 승인하게 되면서 사진에서 배제됐던 반복성과 지속성이 불가피하게 승인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또는 처음부터 관심사는 지속성, 반복성이라는 주제였고 그 때문에 정취, 감정, 표정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희승에게서 '순간'이 점차 확대되어 '정지된 순간'으로부터 '지속적 순간'으로 이어지는 양상은 흥미롭다. 이미 이런 특성은 배우의 두 가지 표정을 연이어 이어붙이거나 여러 표정을 이어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든 「Persona」 연작에 나타났고 시간의 흐름을 직접 개입시킨 영상작업 「Folly」에서 좀 더 분명해졌다. 정희승의 또 다른 연작 「Ghost」를 예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선 모델은 촬영 시간이 길어지면 카메라를 덜 의식하게 되며 자신의 내면(의 상념)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그 빠져듦의 순간에 모델의 얼굴 표정은 극히 복잡한 양태를 보일 것이다. 그는 물리적으로 여기 있지만 심리적으로 저기에 있다. 또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다. 「Ghost」는 이 여기/저기의 미묘한 심리적 공존/연속의 상태를 포착한 작업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적 연속성, 지속성의 개입은 정취, 감정, 표정과 불가분하게 얽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정희승의 사진 작업 일반은 벤야민이 말했던 초기 사진으로의 회귀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희승 자신은 이 초기 사진의 양태를 '미성숙'의 상태로 이미 '성숙'한 상태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본다. 천진난만한 미성숙의 유년기는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도록에 실린 정희승 인터뷰를 참조) 그것은 이 작가가 나다르를 좋아하면서 벤야민식으로 규정된 앗제와 잔더, 그리고 그 계승자로서의 베허 부부나 루프의 유산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건대 이 작가의 작업은 루프, 스트루트의 그것과 같지만 다르다. 그녀는 그들처럼 냉담하고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지만 그들처럼 시간적 연속과 불가분의 관계인 정취, 감정, 표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가가 근래 몰두하는 스틸-라이프(靜物, Still-Life) 연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 명칭 자체가 상호 배반적인 단어(Sill과 Life)로 구성된 전체를 나타낸다. 이 작업에서 정희승은 얼굴(표정)을 배제함으로써 그것이 야기하는 근본적인 오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배제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정물, 오브제를 관찰한다. 여기서 일광(day light)은 중요한 요소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의 조명 조건에 맞춰 계속 반응하는 일, 완전히 몰두해서 관찰하는 일은 냉담함을 유지하면서 지속성(과 불가분인 정취)를 탐구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들이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조율된 아름다운 정물 사진이 놓여있다. 공중에 걸려있는 반사판은 빛과 어울려, 둥글린 매트릭스는 차가운 벽과 조응하며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차가우면서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희승의 최근 작업을 스틸 사진(still picture)으로부터 스틸 라이프(still life)로의 전환으로 규정하고 싶다. 그것은 「Persona」이후의 작업 전개가 낳은 의미심장한 성과다. 물론 그 이질적인 것의 공존이 여전히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서. 이에 대해서는 아도르노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긴장을 풀고 마음을 편하게 하라는 표어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간호사의 입에서나 나올 말이지 '충일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행복의 이념인 암수가 하나되는 것은 풀어진 상태와는 반대되는 것, 즉 축복받은 긴장이기 때문이다."(테오도르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에서)홍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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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여행

홍미선展 / HONGMISUN / 洪美先 / photography   2011_0303 ▶ 2011_0322 / 일요일 휴관


홍미선_백천만겁난조우 Orongo Rapanui 2007_디지털 C 프린트_110×80cm_2010

초대일시 / 2011_0303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보다 컨템포러리 GALLERY BODA CONTEMPORARY 서울 강남구 역삼로 북9길 47(역삼동 739-17번지) boda빌딩 Tel. +82.2.3474.0013 www.artcenterboda.com

빛 여행 ● 최근의 화두는 여행이다. 여행을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은 빛으로 통해 있고 생명체의 생성과 소멸이 한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원생 인류는 아메리카 대륙 끝자락까지 수 만 년 동안 이 지구를 여행하였다. 그 사이 인종과 국가가 나뉘어졌고 지구는 점차 노화되어 가고 있다.
홍미선_Manu Amazon Peru 2007_피그먼트 프린트_62×75cm_2011
홍미선_Manu Amazon Peru 2007_피그먼트 프린트_46×62cm_2011

최근에 중남미 여행을 통하여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사막과 빙하의 풍경은 지구 반대편에서의 여행을 실감하게 하였다. 칠레 북부 지역은 태양이 내리 쬐어 건조한 사막이 되어 있었고 파타고니아 남부 지역은 그와는 반대로 빙하를 이루고 있었다. 세월과 환경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변해온 자연의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물 또는 태양의 결핍을 견뎌낸 자연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웅장하고 심오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자연을 보면서 결핍된 것이 전혀 결핍된 것이 아니며 그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임을 생각해 본다. 또한 사막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나스카 라인은 인간이 만든 드로잉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에서 본 사막의 드로잉들에서 다양한 생물들의 단순화된 이미지와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찾을 수 있었다. 다양한 생명체와 요소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과거 안데스 인의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홍미선_색즉시공 공즉시색 Upsala Glacier 2007_디지털 C 프린트_80×110cm_2010
홍미선_Atacama Chile 2007_피그먼트 프린트_75×105cm_2011

여행에서 만난 풍경은 나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고 만물이 하나임을 생각하게 하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지구 온난화로 천 년의 세월을 지켜오던 빙하가 굉음을 내고 부서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무분별함과 오만함에 대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이번 전시는 인류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중남미의 풍경을 중심으로 이 지구가 얼마나 장엄한지 그리고 우리가 지구별에 왜 여행을 왔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 홍미선





CUT-OUT

이보람展 / LEEBORAM / 李보람 / painting   2011_0304 ▶ 2011_0323


이보람_희생자 3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13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보람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04_금요일_05:00pm
후원 / 서울시_한국문화예술위원회_(재)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09:00am~06:30pm / 주말_11:00am~05:00pm
송은 아트큐브 SongEun ArtCube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82.2.3448.0100 www.songeun.or.kr

보도사진에 담긴 전쟁이나 테러의 희생자들을 본다. 피부 위로 흐르는 피, 속을 드러낸 상처들, 오열하는 얼굴들은 충격적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의 모습을 감상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고통에 대한 동정, 슬픔은 이내 가볍게 사라진다.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이전의 이미지들을 갈아치우고 나 또한 감정들을 값싸게 낭비하고는 그만이다. 전쟁보도사진의 소비가 이미지와 감정의 소비로 전환되면, '희생자'는 고통스러운 표정과 붉은 피로 대변되는 은유적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된다. 사진 너머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은 그들이 이미지로서 얼어붙음과 동시에 잊혀지고, '고통', '희생자'와 같은 단순화된 카테고리로 편입된다. '희생자'들은 각자의 이야기와 무게와 존재감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박제화된 상징, 의미를 잃어버린 채 떠도는 껍질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보람_희생자 2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130cm_2010
이보람_희생자 4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130cm_2010
이보람_희생자 5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93×130cm_2010

나는 사진 속 희생자들의 모습을 이미 네모로 한계 지어진 주변부의 상황에서 또다시 잘라낸다. 그들은 나의 그림에서 인종에 상관없이 회색의 딱딱한 피부를 갖게 되고 눈들은 모두 생략된다.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만을 보여준다. 가끔씩 서로 다른 사진들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완벽한 '희생자'모습을 갖추게 된다. 원본의 색과 명암은 단순화되어 극적인 명암이 가져오는 무게감은 가벼운 것으로 치환된다. 이들은 마치 형제들처럼 똑같은 피부와 표정과 무게감을 가지고 똑같이 붉은 피를 흘린다. 간혹 이들은 제단이나 무대처럼 연출된 배경에 놓인다.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담은 사진들은 '희생양'이라는 종교적 주제와 연결되면서 「피에타」나 「애도」, 「십자가에서 내려짐」과 같은 성화들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작업을 위해 모은 사진들을 분류할 때 위의 주제들이 포함된다. 고통을 '볼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러한 주제들은 어느 한편으로는, 현대사회에서 미디어를 통해 실제의 고통을 허구적인 것으로 소비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나는 현실의 고통을 승화되거나 추상화된 상태로, 리얼리티가 배제된 무력화된 상태로 -그래서 어느 한편으로는 볼 만한 것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때문에 본래 제단이 지니는 비장하고 압도적인 분위기 또한 나의 그림에서는 제거된다. 단지 기념되는 대상과 감정의 파편화된 이미지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보람_천에 싸인 죽은 아이, 분홍과 빨강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45×112cm_2010
이보람_천에 싸인 죽은 아이, 분홍과 빨강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45×112cm_2010
이보람_피흘리는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3×130cm_2010

작품에서 주로 쓰이는 분홍색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분홍색은 일반적으로 우정이나 사랑과 같은 따뜻한 감정을 상징한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상업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색이기도 하다. 감정이 담겨있는 듯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텅 비어있는 색인 분홍색은 대중이 소비하는 얄팍한 감정들을 닮아있다. 붉은 피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 그려진다. 옷감 위에 무늬를 그려 넣는 것처럼 희생자의 딱딱한 피부 위에 흘리고 튀고 번진 피를 정교하게 그려 넣는다. 나는 이들의 이미지를 작업을 위해 개인적으로 이용하는 셈인데, 이것은 이중의 죄책감을 가져온다. 때문에, 결과물로서의 붉은 피 무늬들은 피를 재현하는 이미지 이상의 것이 된다. 모든 것이 표현되고 정돈된 후에 그려지는 붉은 피는 피의 재현된 이미지인 동시에 그리기 행위를 통해 희생자 이미지 위에 올려진 붉은 물감 자체이기도 하다. 이렇게 감정들과 그리는 행위자체를 포함하면서 나의 작업은 자화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림 속에서 나를 대체하는 이미지는 붉은 색 물감을 묻히고 있는 붓들이다. 희생자를 향해 공격적으로 세워져 있는 붓들은 나의 행위와 시선을 대변한다. 붓들은 마치 희생자들을 찔러 상처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나의 사소한 불편함, 가볍고 사라지기 쉬운 죄책감이 담겨 있다. ■ 이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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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porary Storage


주황展 / JOOHWANG / ??? / photography   2011_0304 ▶ 2011_0402 / 월요일 휴관


주황_Temporary Storage #2_디지털 C프린트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520c | 주황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304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플랜트 GALLERY PLANT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1층 Tel. +82.2.722.2826 www.galleryplant.kr


주황은 그 동안 이곳의 산업화가 낳은 인공적 자연 속의 간극과 긴장을 상처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전시에서 그녀는 특히 조급하게 진행되어온 녹지 계획이 만들어 낸 "자연스러움" 속의 "기형"이 엿보이는 도시 풍경을 기록했으며, 그러한 풍경 속에서 우리는 이 곳 삶 속에 응축된 시간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주황_Temporary Storage #4_디지털 C프린트_2010

이번 전시 『Temporary Storage』는 이러한 작업의 연장에서 90년대까지 서울 외곽과 경기도 일대에 있었던 소규모 공장들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여러 종류의 물류 창고 건물들을 기록한 것이다. 이러한 창고들은 주로 조립식 가건물로 주변 환경과의 기이한 부조화를 이루며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으로 자리 잡았다.
주황_Temporary Storage #12_디지털 C프린트_2010
주황_Temporary Storage #14_디지털 C프린트_2010

한국은 경제 성장의 침체의 원인이 세계화의 흐름에 뒤쳐졌기 때문이라고 보아 IMF와 최근의 경제위기를 이에 대한 반성보다는 그 흐름에 신속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편입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했다. "물류창고"프로젝트에서 보여 지는 건축물은 이렇듯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예전에 있던 소규모 공장들은 해당 지역에서 인력을 충당하며 그 지역경제의 한 축을 이루었으나, 새로 재편된 세계 경제 구조 속에서 이런 소규모의 공장들은 노동력이 싼 중국이나 인도네시아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는 외부에서 생산된 물건들을 보관하는 물류 창고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들은 생산과 그 지역사회와의 소통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지 보관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주황_Temporary Storage #9_디지털 C프린트_2010
주황_Temporary Storage #8_디지털 C프린트_2010

주변의 정경이나 삶과 괴리되어 무분별하게 들어선 물류 창고건물들은 우리의 미적인 감수성에 대한 상처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안정된 삶의 근거인 환경을 파괴하는 적대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산업화와 함께 진행되어온 삶의 단절과 소외, 부실함과 비현실성 뿐 아니라 세계화의 흐름에 진입한 이 곳 삶의 임시성과 모조성, 이동성을 표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물류창고들 또한 불과 2-30년 안에 한국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라져 갈지 모른다. 새로운 변화는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Temporary Storage』는 우리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져가는 건축물들에 대한 기록이자 이들과 관계 맺는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 ???
2011.03.05 02:44:26 / Good : 370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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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st 2011


KWANHOON projects_Young Artists展   2011_0309 ▶ 2011_0330


◁김홍석_자화상2-1_디지털 프린트_130×86cm_2010 ▷김나연_D&C.k081107-D_캔버스에 잉크_각 44×33.3cm_2009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나연_김홍석_박상아_손수민_손피오_염지희_이미희 이행선_임상범_임지민_지현아_치키홍_한승구

관람시간 / 10:30am~06:3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본관 1,2,3층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김홍석 ● 나는 현대사회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파악해야 할 기호와 정보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로 인해 넘치는 기호와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지면서 그것들의 겉모습만 보게 되고, 급기야 겉모습 마저 왜곡되거나 부서져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의미들이 탈락된 겉모습들의 파편 조각들은 의미가 생성되기 이전의 무의식적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의미 이전 혹은 의미가 사라진 껍데기들의 파편 조각들을 이성적 방법보다는 직관과 감각으로 파악하려 한다. 한편 나는 이 혼란이 나를 둘러싼 세계의 혼란인지 그 것을 바라보는 내 의식의 혼란인지도 혼란스럽다. 어쨌든 이런 혼란의 주체이자 객체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사람을 소재로 이야기를 해나가려 한다.. 김나연 ● 미디어들을 통해서 원본이 변형된 이미지들로 현실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구축하고, 다시 복제와 왜곡으로 이미지, 정보를 배출하는 주관적인 인식 세계의 한 단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복제 이미지, 정보 과잉 시대 안에서 느끼는 이미지들의 혼동성과 정신분열적인 혼란을 표현하고 복제 이미지, 정보와 현실간의 괴리감, 그리고 현실에 대해 느끼는 비현실성을 중첩되고 무질서하며 지나치게 다양한 드로잉들의 겹침과 배열, 그리고 얼룩과 드로잉의 강하면서도 선명한 색상으로 마치 하나의 영상, 나아가서는 정보,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서 스스로가 경험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혼란성에 대한 세계관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박상아_The Streamline -Food Chain 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실크스크린_100×100cm_2010 ▷손수민_태양을 마주할용기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60.6cm_2010

박상아 ● 황홀경에 들게 하는 감각을 느끼는 신체 부위에서 나오는 기(氣)를 간단한 기호로 도식화 하는 것이 나의 의도이다. 눈으로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전달 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몸의 언어이다.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아닌 몸에서 반응하는 자극과 반응에 관한 표현인 것이다. 나는 인간을 포함한 유기물의 형상은 에너지의 결합이 응축되어 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손끝을 움직여 느끼는 것을 미미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생명의 움직임에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면 인간 몸체가 지니는 커다란 에너지에 대해서 인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의 결정체라 볼 수 있는 인체를 포함한 유기물은 자신의 몸 자체를 통해 감각을 느끼게 된다. 몸의 형상과 존재 자체는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감각 중의 하나인 미적 감각을 통하여 존재의 본질과 형상에 관한 표현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와 관객이 되는 인간 본질에 관한 생각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해나 계산에 의한 사유 활동 보다는 감각에 근거한 작업을 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손수민 ● 나는 복제되고 복제되어 다 닳아버린 표정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 꽃의 이미지를 생경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인슈타인이나 마릴린먼로처럼 진부한 도상과 꽃의 화려함이 대비될 때, 감상자는 어리둥절해진다. 나의 그림에서 무엇을 봐야 할 것인가?꽃이 예쁘다고만 감탄할 일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 역시 한 송이 꽃처럼 언젠가는 사라지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저 일회적인, 순간적인 화려함을 즐길 뿐이다. 내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그 일회적 존재와 일회적인 아름다움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고 영원한 의미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십자가로 상징되는 종교의 의미, 존 레논으로 상징되는 사회의식, 마릴린먼로로 대변되는 대중문화, 아인슈타인으로 대변되는 학문적 이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은 오직 그 때 그 때 하나의 이벤트였고 기호로만 기억될 뿐이다.
◁손피오_봄과 여름과 가을 또 겨울도_디아섹_51×76cm_2010 ▷염지희_Complex garden_디지털 프린트, 연필, 목탄_2009

손피오 ● 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연출된 순간이 아닌 인간이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순간들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라는 단어의 일반적인 선입견인 사회에 대한 고발, 무거움 등을 내 사진에서는 찾기 힘들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관찰'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종교, 사회적 지위, 경제 논리, 이념에서 벗어나 오로지 인류 그 자체의 다양한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사진 작업의 방식에 관해서는 크게 이국에서의 여정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감성과 낯선 이의 예리한 시선으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다. 처음 만난 이와 충분한 시간을 보내어 그들의 경계심을 풀고, 그들 내면에 담긴 인류 공통의 감성을 표출해내는 것이 내 사진 작업의 핵심인 것이다. 이국적인 요소들이 관객의 눈을 먼저 끌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감성들은 모두 우리의 삶과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즉, 나의 사진 작업은 세상을 통해 나 그리고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인 셈이다. 염지희 ● 작업을 통한 나의 자아 보기의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보기(see) 때문이고, 두 번째는 타자를 통해 나를 보기(gaze) 때문이다. 보이는 것에는 위장되거나 감춰져 있는 비밀과 거짓말이 존재하며, 타자를 정확하게 보는 것은 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 안에 파악되지 않는 공백은 존재한다.그러한 실패의 과정 속에서 나는 분열과 안정을 겪는다. 피할 수 없는 분열 안에서 혼란을 겪으며 통합을 이룰 안정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았다'고 생각한 것마저도 실패한 것이며 그것은 결코 '내'가 아니기에 분열은 계속된다. 자아를 보기 위해 계속되는 분열은 자기 파괴적이다. 그것은 삶의 욕구를 위한 파토스적인 욕망의 속성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분열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오이디푸스의 자발적인 실명처럼 나는 보는 눈을 잃고 스스로를 보는 눈을 찾고자 한다. 자아를 보려는 불가능한 욕망을 꿈꾸며 공백에 거주하는 눈먼 눈. 볼 수 없는 자아를 보기 위한 끊임없는 판타지를 꿈꾼다. 비록 그 행위가 텅 빈 제스쳐 일지라도.
◁이미희_Which came first, the chicken or the egg_종이에 드로잉_96×130cm_2011 ▷이행선_멍에 씌운 옷_목탄, 재봉_91×73cm_2009

이미희 ● 우리는 자국의 문화에 기반을 두어 동양적이고 훌륭한 예술작품을 탄생 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문화적 감성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조상들의 가치 있는 작품들이라 해서 지금까지 같은 작품들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가? 고전은 또 다른 버전으로 재창조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 하지 않으면 한자리에만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나는 평면 작업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의 소통,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와의 소통을 나타내고 있다. 마치 고미술과 같은 배경의 종이와 도자기, 보자기 등과 같은 고전적인 형태의 틀 안에 작가자신만의 현대적인 드로잉이 만나 또 다른 퓨전(fusion)형식을 띈 작품을 탄생시킨다. 한국적인 소재인 고전적인 형태의 틀에다 화려함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덧입혔다. 하나의 발상의 전환인 것이다. '한국적'이라는 단어 뒤에는 항상 단아함, 소박함, 정갈함 등 이와 같은 수식어들이 함께 따라온다. 과연'한국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가 과연 맞는 것일까? 역사가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정리된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행선 ● 어느 날 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옷은 나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옷 안에 거주하는 나, 또는 거주 했었던 '나'가 발견되었고, 나의 신체성을 드러내는 대상으로서의 사유가 진행되었다. 옷에서부터 시작된 신체, 즉, 몸에 대한 관심은 그 근본주체인 '나'로 복귀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시된 것은 하나의 초상화 또는 나의 익명적 실존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신체는 내 존재를 실어 나르는 유기체이며 나의 신체 각 부위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듯이 타인의 신체와 나의 신체는 하나의 전체이고 현재의 안과 밖이며 나의 익명적인 실존은 두 신체에 거주한다. 그 익명적인 실존의 거주가 이루어지는 곳을 옷의 상징성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옷이라는 신체 위에 착용되는 사물은 신체 위에 덧입혀 짐으로써, 또 같은 문화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입는 비슷한 옷은 이렇듯 익명적인 실존을 체험하게 한다. '옷을 입음'은 인간의 조건을 입고 살아가는 나와 너 사이에 공감대를 발생시키고 그 옷의 이동 가능성은 나의 익명적 실존을 운반한다. 다시 말해 그 익명적 실존의 근거는 결국 신체성이며 그 살에 가장 가까운 옷들은 그 자체로 애매하게 내 몸을 인식하게 하며 그것은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임상범_City of Illusion-13_아카이벌 잉크 프린트_26×40cm ▷임지민_그날의 원아 a pupil of the day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0

임상범 ● 기억...내 안에 존재하는 천사의 도시의 첫 느낌을 회상한다. 관광객으로 헐리우드 블러바드에 서있던 나, 흐릿한 날씨로 자욱했던 헐리우드 언덕에 놓여있던 헐리우드 싸인. 그것만이 내가 길을 잃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짜 슈퍼맨과 가짜 제다이는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돈을 구걸했다. 그들의 웃음은 나에게 버려져 허공을 날고 있는 텅빈 플라스틱 봉지를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동시에 난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보고자 했던 헐리우드는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날 새벽 6번의 총소리를 나의 새벽 단잠을 깨웠다. 환영... 우리의 공간에는 빛과 함께 어두움이 항상 공존한다. 하지만 어두움에 거하는 존재들 즉 Shadow와 Reflection과 같은 환영들은 언제나 소외되어진다. 플라톤의 동굴우화에서 처럼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 즉 우리의 환영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는 존재이다. 환영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천사의 도시에 존재하는 환영들을 찾고자 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천사의 도시이며 동시에 환영의 도시이다. 임지민 ● 어떤 이 또는 무엇과 함께했던 시간은 일상이었다. 현재 내 주위에 일상이었던 그 무엇과 누군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추억을 떠올릴 때 사진은 좋은 수단이다. 사진 한 컷은 흩어졌던 조각기억들을 한군데로 모아 한 장에 담아준다. 나는 단절된 옛 일상을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꺼낸다. 우리는 이 사진을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진 속 일상과 단절된 현재, 그 사진은 더 이상 가볍게 넘기던 사진이 아니다. 단절된 그 무엇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네모난 종이의 모든 것, 작고 사소한 부분에 까지 신경 쓰게 된다. 하지만 그때의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게다가 그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부재다. 남은 것은 사진뿐이다. 남겨진 사진은 변하지 않는다. 과거의 증거물이 되었다. 이것은 잘못된 증거물이 되어서 기억에도 영향을 준다. 그것에 의해 기억은 변하고 짜 맞춰진다.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 증거물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F.E.A.R. 그것은 사진이다.
◁지현아_Let Your Peace Be a Victory_벨벳, 면사, 금사_150×90cm_2010 ▷치키홍_Bullet effect_디아섹_130.3×162.2cm_2010

지현아 ● 인간을 불완전하며 악한 존재이다. 자기 방어와 보호를 위하여 타인이나 외부의 상황을 비난, 비판하여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는 행위를 반복한다. "A gentle and reasonable being can be transformed into a maniac or a savage beast. One is always inclined to lay the blame on external circumstances, but nothing could explode in us if it had not been there. (Carl Jung) 균형과 조화, 평등을 위한 삼각구조 안에서는 여러 가지의 복합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다. 도덕적 이상향을 비판하는 자세로 터부적 성향을 정당화 시킨다거나, 인간의 악함을 정당화 시킴으로써 터부가 금기가 아닌 당연한 인간의 경향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사회에 물들어진 인간, 우리는 한가지 답만 믿어서도, 알아서도 안 된다. 그 어디에도 하나의 답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더 더욱 이 사회를 조합, 조화, 균형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습득하여야 한다. (유토피아 건설의 실천) 각각의 작품 위에 그려지고, 수 놓아진 삼각기호, 전시장 전체를 삼각형의 형태로 만들어 놓은 듯 하다. 곳곳에 보이는 피라미드 형태의 구조물과 조각들, 보는 이들은 분명 이 전시를 보며 이 삼각기호에 대하여 궁금해 할 것이다. 균형과 조화, 평등을 위한 삼각구조"라 불리 우는 이 삼각기호는 우선적으로는 작가 자신의 방어와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하나의 삶의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 들을 위한 이 시대 사회적응 습득의 방법이기도 하다. 치키홍 ●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과의 소통에 필요한 어떤 무언가가 내 안에 결핍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단절된 소통 사이에서 내 안의 이야기는 안에서만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그 진동의 위태로움 끝에서 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세상을 조롱하듯 분노하던 자아는 '치키 호돌이(Cheeky Hodori)'가 되어 세상에 강력한 펀치 한방을 날렸고, 현실에서 죽어가던 아이는 '치유치유(Cheeyou Cheeyou)'가 되었다. 나를 감싸고 있던 터질 듯 한 분노와 죽음으로 인도하던 망막의 지루함, 온몸을 훑고 다니던 공포에 저며진, 칼날 같은 차디찬 상처를 토해내어 샅샅이 쪼개고 부수어 그 감정들의 본질적 원소를 통해 처음 말문을 열게 되었다. 대중들과의 소통이라는 부분에서 디지털은 어떤 매체보다 나의 결핍된 부분을 채우며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현 시대에 사람들의 삶 또한 디지털화 되었다. 그들은 갤러리에 걸린 그림보다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폰에서 보이는 이미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과연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것일까?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시대는 어떤 형식의 매체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파고들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한승구_나르시소스의두얼굴_혼합재료_45×100×100cm_2010

한승구 ● 사회 속에서 얼굴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유기적인 구조 내에서 사람마다 다른 얼굴은 개인의 특징을 드러내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얼굴은 각 개인의 어떤 구조에 속해 있는지,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시각적 정보를 제공한다. 이렇게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노출은 각각의 개인에게 하나의 불안 요소를 자극 시킨다. "타인에 대한 욕망"이 그 불안요소이다. 이는 얼굴의 노출로 인해 본인의 모습을 타인들이 항시 지켜볼 수 있다는 불안감이며, 이 의미는 개인의 현실에서의 역할도 함께 노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 속 유기적인 역할의 노출로 인해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각 개인은 늘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내면의 모습을 함부로 드러내놓을 수 없다. 즉 사회 속에서 각자 고유의 얼굴을 지닌 객체는 스스로 통제되어지고, 폭력적으로 사회란 시스템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졌다. 각각의 개인은 사라지고 모든 객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구조체계를 위해 움직이면서, 감시 통제되어지고 사회화된다. 즉 얼굴은 사회 구조에서 이탈해 나갈 것 같은 각 개인을 정착하여 못 움직이게 만드는 하나의 감옥이다.■





Drawn by Life


김선혁展 / KIMSUNHYUK / 金善奕 / sculpture   2011_0309 ▶ 2011_0315


김선혁_The way to happiness II_스테인레스 스틸, 우레탄, 아크릴채색_270×210×90cm_2010

초대일시 / 2011_0309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뿌리, 삶, 사람 ● '나무(木)'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준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나무를 그린 풍경은 지속적으로 그림에 등장한다. 인간이라면 나무로 대변할 수 있는 자연이 주는 편안함을 물리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자연을 보면서 절대자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김선혁은 스테인레스 스틸을 용접하여 나무 형태를 만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을 표현하고 있고, 얼굴 형상과 뿌리 형태가 겹쳐진 선들은 혈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찬(Christian)인 그는 현 시대 많은 작품들이 자극적이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충격을 주는 것과 달리, 작업에 보다 건강하고 영적인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중략) ● 김선혁이 만들어내는 나무 인간의 형태는 작가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고 절대자(The God)를 향한 보편적 인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선혁_The way to happiness III_스테인레스 스틸, 우레탄채색_가변크기_2010
김선혁_The way to happiness IV_스테인레스 스틸, 우레탄채색_190×120×90cm_2010

통합된 의미를 가진 신체 ● 김선혁은 외국 작가 중에서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1950~)와 록시 페인(Roxy paine, 1960~)에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두 외국 작가의 작품은 일면 닮아 있다. 인간과 자연을 주제로 선을 이용하여 이어 붙여가고 공간을 확장해 가는 모습은 형태적으로 유사성을 가진다. 이러한 부분은 김선혁의 나무 혹은 뿌리 형상과도 흡사하다. 김선혁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곰리의 작품에서는 인간과 다른 형상을 이중적으로 표현한 점, 록시 페인은 200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한 나무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김선혁은 '철조'라는 방법적인 면에서는 비교할 수 있으나 이 두 작가의 작품과 맥락이 다르다. ● 나는 김선혁이 석고로 인체모형을 만들고 그 위에 금속으로 용접해나가는 작업과정에서 곰리를 떠올렸다. 곰리의 작업은 여러 가지 제작 형태가 있지만 그 중 석고로 틀을 뜨고 표면에 납을 붙여 만들어 가는 시리즈와 비교할 수 있다. 곰리 만의 독특한 과정인 석고로 '실물뜨기(life casting)'는 사람이나 사물에 직접 석고를 발라 형태를 뜨는 작업을 의미한다. 특별히 곰리의 경우 작가 자신이 틀이 되어 석고를 입혀 형태를 떠낸다. 그 틀 위에 다시 얇은 납 판을 겹쳐 철조 작품을 제작한다. 이 때 석고 틀을 제거하지 않고 그 안에 남도록 하는데, 의미상 납 틀 안에 '자신의 신체'가 그대로 들어 있다. 그래서 곰리는 자신의 작업을 말할 때 신체 용기라는 표현을 쓴다. 곰리는 이외에도 선(line)적인 재료를 가지고 인간을 만들거나 분자 구조처럼 단위적 형태를 가지고 제작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곰리가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체가 육체로 나뉘어져 있다는 이원론적 개념이다. 서양에서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적인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들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하지만 김선혁의 작품은 곰리처럼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는 아닌 듯하다.
김선혁_Vitality of vision_스테인레스 스틸, 스틸, 아크릴채색, LED_50×145×50cm_2010
김선혁_The way to happiness_스테인레스 스틸, 구리, 에나멜채색_97×60×50cm_2009

곰리가 인체를 그릇이라고 표현했던 것과 달리 뿌리 모양 인체는 용기 모양이라기보다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열린 구조이다. 곰리는 모든 작품에서 핵심이 되는 중앙부에 결국 인체 형상이 나타나도록 제작한다. 곰리의 작품이 개방된 형태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부에 상이 맺히도록 의도한다. 그러나 김선혁의 작품은 이러한 구심적인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다. 선으로 인체를 표현했으나 표면적인 형상일 뿐 내부는 비어있다. 이 점을 비교해 볼 때 김선혁의 작품은 인체 안에 '담긴' 정신성을 표현했다기보다 그 뿌리 모양 인체 자체가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이원론으로 표현된 '정신+인체=인간' 이 아닌 정신과 형태가 통합된 '정신(생명력)=인체=인간'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구약시대에는 예배를 드릴 때 제물을 바치지만 신약시대 이후 하나님께 내 몸을 드려 예배드리는 상징적 의미의 산제사의 개념과 비교할 수 있다. 사람이 자신과 스스로 정신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김선혁이 이야기하듯 작품으로 예배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이 개념들이 초기에 보여준 '찬양하는 나무'와 함께 '속삭임(Whispering)'(2010)에 나타난다. 뿌리는 인간의 모습이지만 담긴 정신성 보다는 형태로 의미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했듯 정신성 표현에 있어 보다 통합적인 개념을 가진다. 김선혁은 인간의 형상을 의도적으로 차용하지만 오히려 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작품에서 관람자들이 얼굴 형상보다 선의 모습에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나뭇가지의 선적인 형상들은 그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 록시 페인의 나무 형태 작품과 닮아 있다. '꿈의 생명력 Ⅱ(Vitality of VisionⅡ)'(2011)는 그의 나무들을 떠올린다. 물론 이 작품은 록시 페인의 나무들보다 규모나 여러 면에서 다르다. 록시 페인은 주로 실제 나무와 함께 작품을 설치하거나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크기들을 가진다. 페인의 나무는 얼핏 나무 모양과 매우 비슷하지만 공해나 산업 폐해에 따른 변종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그의 작품은 김선혁이 추구하는 긍정적 이미지와는 조금거리가 있다. 페인의 나무에서 느껴지는 것도 생명력, 강인함이다. 그 나무들은 마치 록 앤 롤 음악을 듣는 것 같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선혁의 작품은 시끄럽게 고함치기보다 고요한 찬양과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김선혁_Affirm_C 프린트_2010

"나에게 자연이란 절대자의 존재와 찬미로 이어지게 하는 '무엇'이다. 광범위한 자연을 다 표현하고 나의 작업으로 보여줄 수만 있다면 평생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식물의 형태를 언급하고 형상화 하면서 감성적인 작품,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이유이다."(2010 작가노트 中) 아직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어깨를 겨루기에는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긍정적인 언어들로 더 힘찬 생명력을 영리하게 보여줄 날을 기대해 보자. '행복해지는 법Ⅱ(The way to Happiness Ⅱ)' (2010)와 '행복해지는 법Ⅲ (The way to Happiness Ⅲ)' (2010)에서 보면 조금씩 그가 자신 만의 방법과 언어로 해결점을 찾아가는 것이 드러난다. 자연이라는 주제를 나무, 잎사귀, 빛과 같은 직접적인 모양들로 보여주기보다 암시와 은유적인 방법으로 정리해 나가고 있다. 얼굴이나 인체 형상들에 대한 해석도 직접적인 표현에서 재해석된 형태들로 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언어를 개척하는 것이 현시대 작가들의 최대 고민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스스로 많은 선택 사이에 놓여져 있다. 그가 늘 담고 싶은 긍정과 절대자를 향한 마음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어떻게 조합해 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이번 전시는 김선혁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부단히 진보하는 그의 작품을 보고 싶다. ■ 이주리
김선혁_Whispering_스테인레스 스틸, 스틸, 우레탄채색, 모니터_110×50×19cm_2010 김선혁_Whispering_단채널 영상_00:02:09

Root, Life and H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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