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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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2.10.24 21: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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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네 혀가 너를 단죄하고 죽음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un)Necessaries


오상택展 / OHSANGTAEK / 吳尙澤 / photography   2012_1025 ▶ 2012_1107 / 일요일 휴관


오상택_Closet #53, 54, 55, 56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4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920h | 오상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25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분도 Gallery Bundo 대구시 중구 대봉동 40-62번지 P&B Art Center 2층 Tel. +82.53.426.5615 www.bundoart.com

  사진작가 오상택은 지금 미술계에서 끊임없는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작가다. 그가 찍은 사진은 유명한 패션잡지에서부터 서울대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또한 그 작품들은 연작 전부를 거둬 간 외국의 컬렉터들로부터 호기심으로 공공 미술관을 찾은 일반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사진이 미술과는 어느 정도 독립된 장르건, 아니면 미술에 종속된 하위 장르건 간에,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과 사진 양쪽에 걸친 모든 전시기획자들에게 구애를 받는 위치에 있다. 오상택의 사진이 보여주는 감각적인 인상은 일상적인 소재를 관객들이 압도당할 만큼 아름답게 표현하는 면모에서 출발한다. 그는 피사체가 가지는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부수적인 요소들을 대담하게 생략하고 구도를 단순하게 배치한다. 작가는 이처럼 통제된 공간이 딱딱해지는 것을 특유의 부드러운 화면으로 중화시킨다.  
오상택_closet#48,49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2_2012
오상택_closet #50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_2012
  작가 오상택의 퍼스낼러티는 누가 보더라도 쾌할하다. 서울 강남의 한복판에서 태어나서 자라온 그의 배경은 사진 속에 담긴 정서에 그대로 투영된다. 강남 정서를 사회과학적으로 측정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성장기에 배치된 또래 집단의 하위 문화적 요소들, 가령 닥터 마틴(Dr. Martin)이나 랠프 로렌(Ralph Lauren), 스쿠프 승용차와 같은 상징적 브랜드로 징후적인 관찰 분류는 가능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사진을 평생 업으로 삼으며 자신의 예술을 과도하게 의미 규정하는 상당수의 전업 사진작가들의 태도가 그에게는 없다는 사실이다. 19세기 초반 근대 사회의 출발점에서 어정쩡히 뒤쳐졌던 예술가 집단이 스스로 독특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 했던 낭만주의적 태도를 나는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로부터 관찰할 수 있다. 기예의 습득이란 면에서 회화, 연극, 고전발레, 바이올린 등에 비해 일상 활동 쪽에 다가선 사진의 중간 예술(middle art)적인 특성은 취미 집단과의 구별을 해야 하는 전업 작가들의 자의식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옆에서 본 작가 오상택은 작업을 취미 생활로 즐기듯 일 처리한다.  
오상택_closet#51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_2012
오상택_closet#52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_2012
  지금까지 작가는 작품 속에 도시적인 감성을 표현하려 애써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나 관중 없는 육상 경기장에서조차도 그랬다. 그가 표현하려는 도시적인 것이 전원적인 것과 반대 개념은 아니다. 이를테면 그의 사진 속 남성들이 입은 수트는 도시를 상징한다. 모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이 입은 옷과 같은 상징 매체가 중요하다. 디자이너 박동준의 패션 작업을 선별하여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으로 완성된 『(un)Necessaries』 연작 또한 마찬가지다('언'니세서리, 꼭 필요한 생필품은 아니지만 사치품이라고 할 수도 없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사람이 배제된 옷 사진, 그 허무함을 대리보충하는 것은 우리들의 감정이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진들은 다만 값비싼 사치재로 사용가치 대신 교환가치로만 붕붕 떠다니는 현대의 물신주의를 꼬집는 선동적 텍스트로만 기능할 뿐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감정의 폭은 훨씬 더 넓다. 예컨대 누군가가 벗어놓은 옷에서 우리는 측은지심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도 있다. 또한 편안한 해방감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번 신작 속에서 넘실대는 옷들을 통해 일종의 경건함을 느낄 수 있다. 이 경건함은 한 패션 디자이너의 오랜 경력이 런어웨이 무대가 아닌 사진 속에서 구현되며 전혀 낯설게 다가온 소격 효과일지도 모른다.  
오상택_closet#58, 59, 60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3_2012
오상택_closet#62_캔버스에 프린트_150×95cm_2012
  이처럼 낯선 시각적 체험은 작가가 이번 연작에서 의도적으로 장치한 방법 때문이기도 하다. 세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작가만의 고유한 기법은 첫째로, 마치 회화 작품과 같은 질감 표현이다. 작가는 사진의 감광면에 구성적인 과정을 더해서 유화나 아크릴화와 같은 이미지를 증폭시킨다. 두 번째로, 피사체는 원래 크기보다 비율이 10분의 일 정도가 더 커져있다. 따라서 사진 속 의류들은 현실적이면서도 왠지 낯설어 보일 수밖에 없는 인지적 체험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것은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사진 속에 가상의 옷장을 만들어 실재의 옷을 결합시킨 과정이다.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뼈대로서 조형적 공간성은 수평의 옷걸이만으로 암시된 옷장이 시각적 단순화를 완성한다. 화려한 패션쇼 무대 위가 아닌 옷장은 실용적인 가치와는 별도로 역사의 보관소 같은 알레고리를 만든다. 이로서 주제는 뚜렷해진다. 작가가 여기에 펼쳐놓은 작업은 단순한 패션 아카이브도 아니고, 일회적인 이벤트도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덜 난해해 보이는 사진과 패션을 각각 그 속에 담긴 역설, 눈으로 보이는 허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라는 이중의 비동시성을 현대예술 속에 안착시키려는 작가의 기획이다. ■ 윤규홍 -------------

아니쉬 카푸어展 / Anish Kapoor / sculpture   2012_1025 ▶ 2013_0127 / 월요일 휴관


아니쉬 카푸어_붉은 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 To Reflect an Intimate Part of the Red_ 혼합재료, 안료_200×800×800cm_1981 ⓒAnish Kapoor, Courtesy the artist
  작가와의 만남 / 2012_1025_목요일_02:00pm 큐레이터의 토크_태현선(Leeum 수석연구원) 영국 현대미술과 아니쉬 카푸어_전영백(홍익대학교 교수) 일시 / 2012_1101_목요일_02:00pm~04:00pm 강연회 신청 작가와의 만남 / 2012_1009 ▶ 2012_1024 큐레이터의 토크 / 2012_1016 ▶ 2012_1130 각 200명 선착순 마감 / 홈페이지(www.leeum.org)에서 접수 「아니쉬 카푸어 다큐멘터리」상영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키즈 & 패밀리 워크북」 도슨트 전시설명 / 무료, 약 60분 소요 화~일_11:00am, 01:00pm, 03:00pm / 주말_02:00pm 영어설명 추가 관람료 기획전_일반 8,000원/초중고생 5,000원 상설전_일반 10,000원/초중고생 6,000원 Day Pass(상설+기획전 패키지)_일반 14,000원/초중고생 9,000원 * 예약제 없이 편리하게 Leeum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 20인 이상 단체 예약 필수(관람료 할인) 관람시간 / 10:3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성미술관 리움 Samsung Museum Of Art Leeum 서울 용산구 한남동 747-18번지 기획전시실, 야외정원 Tel. +82.2.2014.6900 www.leeum.org

  삼성미술관 Leeum은 2012년 10월 25일부터 2013년 1월 27일까지 세계 미술계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작가 아니쉬 카푸어의 대규모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대규모 개인전으로 작가의 초기작인「Pigment」작품부터 카푸어 작업의 핵심인「Void」시리즈,「Auto-generation」시리즈, 최근작인 대형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 등 핵심적이고 중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리움의 기획전시실은 물론 야외 정원까지, 전관을 이용하여 삼성미술관 Leeum의 건축 공간과 어우러지는 대작들이 전시되어 카푸어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감상할 기회가 될 것이다. ●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카푸어는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예술 개념과 정서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명상적인 작업을 선보여 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카푸어는 존재와 부재, 비움을 통한 채움, 육체를 통한 정신성의 고양 등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요소들이 서로 수렴하고 소통하는 융합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통해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작가로 선정, 1991년 터너상을 수상하면서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또한 2002년 런던 테이트 모던의 유니레버 시리즈로 소개된 거대한「마르시아스 Marsyas」(2002), 미국 시카고 밀레니엄 공원의 대형 조각「구름 대문 Cloud Gate」(2006), 2009년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의 생존 현대미술가 최초 개인전, 파리 그랑팔레의「리바이어던 Leviathan」(2011)등 여러 성공적인 프로젝트와 전시로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특히, 2012년 런던 올림픽의 기념 조형물「궤도 Orbit」로 명실공히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 하였다. ● 이번 전시는 동아시아 최초의 아니쉬 카푸어 개인전으로, 작가로서의 존재를 알린 초기의 독창적인 안료 작업, 조각 내부의 빈 공간을 새롭게 인식시켜 준「보이드(Void)」작업, 존재의 자생적 발생에 대한 최근작 붉은 왁스 시리즈, 대형 스테인리스 조각 등 총 19점이 전시된다. ● 특히, 삼성미술관 Leeum의 건축물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고난도의 대규모 작품들이 설치되어 눈길을 끈다. 바닥을 실제로 뚫는 Void 시리즈 중 중요작의 하나인「땅 The Earth」(1991)이 약 20년만에 처음으로 전시되며 건물의 전체 벽면을 이용한「노랑 Yellow」(1999)과「내가 임신했을 때 When I am Pregnant」(1992)가 설치되어 직선적이며 조각적인 렘 쿨하스의 건축에 역설적으로 부드러운 곡선과 강렬한 색상으로 건축화된 조각을 보여 준다. ● 또한, 런던 로열아카데미와 빌바오 구겐하임에서 소개된 카푸어의「큰 나무와 눈 Tall Tree & the Eye」(2009)이 처음으로 리움 야외 정원에 설치된다.「큰 나무와 눈」은 15m 높이의 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공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작품으로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향,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작품이 선사하는 가지각색의 이미지들을 통해 관람객들은 작품과 만나는 순간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이로움을 경험할 것이다. ● 카푸어의 예술은 통상 동서양 문화의 만남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단순히 이질적인 두 문화의 만남을 넘어, 보다 보편적이고 신비로운 우주적인 세계를 지향하며, 그것은 곧 인간과 자연 본연의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다. 부박하고 현실적인 일상의 문제를 넘어 마음을 한 번 쯤 가다듬고 삶의 진리를 돌아보며 마음의 정화를 얻을 수 있는 예술, 카푸어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믿는다.  
아니쉬 카푸어_나의 몸 너의 몸 My Body Your Body_섬유유리, 안료_254×188.3×124.5cm_1999 ⓒAnish Kapoor, Leeum, Samsung Museum of Art
  아니쉬 카푸어의 예술 세계 ● 아니쉬 카푸어는 1954년 인도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에서 유태인 어머니와 인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19세 때인 1973년, 그는 영국으로 이주하여 혼지미술대학(Hornsey College of Art)을 졸업하고 첼시미술학교(Chelsea School of Art)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 영국 미술은 안소니 카로(Anthony Caro)를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학창 시절 카푸어는 비물질적인 세계와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는 시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추구한 작가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서구의 미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예술 지상주의의 형식주의 미술보다는 심리적이고 우주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에 더 이끌린 것으로, 작업의 큰 방향은 이미 잡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1979년, 학업을 마친 카푸어는 3주 간 모국 인도를 여행하면서 삶과 철학과 종교가 한데 어우러진 인도인들의 삶을 통해 "시적이고 철학적인 기원", 근원적인 세계에 눈을 뜬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오랜 동안 서양 미술 교육을 받으면서 얻지 못했던 예술적인 의문에 스스로 해답을 얻고, 자신의 작업에 뿌리를 찾게 된다. ●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강렬한 색상의 안료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은 인도인들이 힌두 사원에서 의식에 사용하는 원색의 물감가루 더미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작품은 물론 주변의 바닥에까지 뿌려진 안료로 인해 바닥과 작품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어 마치 작품이 바닥과 하나가 된 듯 보였다. 명상적이고 고요한 안료 작업으로 그는 80년대 세계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일약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안료 작업은 바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면서 바닥 아래의 보이지 않는 공간, 내부 등 이제까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공간에 대한 탐구로 발전하게 된다. ● 카푸어의「보이드」작업은 그의 예술 전개에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다. 조각의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형태를 벗어나 조각의 내부 공간을 적극적으로 작품으로 수용한 이 작업은 조각은 물론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했다. 내부가 텅 빈「보이드」작품에서는 마치 동양의 음양이론이 형상화된 듯이 안과 밖이 공존하고 비움과 채움의 역설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아니쉬 카푸어_나의 붉은 모국 My Red Homeland_왁스, 유성 물감, 철구조물, 모터_지름 1200cm_2003 ⓒAnish Kapoor, Courtesy the artist and Lisson Gallery
  「보이드」작업은 1990년대를 거치며 다양한 재료와 형식으로 전개되어, 관람객의 시선과 몸을 감싸는 환경적이고 체험적인 작업, 회화와 조각의 경계가 모호한 거대한 모노크롬 등이 등장한다. 또한 내부로 움푹 파인 빈 공간은 역설적으로 무엇인가가 채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생성의 의미를 포괄하게 되어 어머니의 자궁, 탄생의 원천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나아가 일반적인 우리의 몸 내부를 은유하기도 한다. 카푸어는 이러한 작업 개념을 건축 공간과 결합하여 유기적인 공간해석으로 펼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음의 공간은 카푸어의 창작의 원천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 이원성을 극복한 유기적이고 유동적이며 순환적인 삶의 진리를 추구한 카푸어에게 거울 같이 반사되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그의 작업 이념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재료였다. 작품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반사된 이미지이다. 물리적인 작품과 비물질적인 반사 이미지가 공존하는 거울같은 표면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은 물질을 초월하고자 했던 카푸어의 작업 이념을 가장 잘 전달하는 작업이다. ● 형이상학적인 특성이 짙은 카푸어의 예술은 흔히 동양적 사유의 반영, 동서양 문화의 만남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해석들은 당연히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지만, 사실 카푸어의 작업은 범종교적이고 범문화적이다. 인간의 눈과 정신을 공통분모로 한 보편적 원리를 담고 있다. 그의 작업은 우리를 철학적인 사유의 세계로 이끌지만 그것은 논리와 이론의 세계가 아니라 현묘한 우주적이고 원초적인 이치에 대한 사유이며 체험과 감각의 세계이다. 카푸어가 데뷔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난 30여 년 간을 특정 시대와 세대의 작가로 규정되지 않고 늘 오늘의 작가로 여겨지는 이유는 시대를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카푸어의 작업은 결코 구체성을 띠고 있지 않으며 일상적인 삶과 맞닿아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거의 망각되어 가는 우리의 보편적 질서에 맞닿아 있다. 현실을 반영하고 우리의 삶과 밀접한 예술이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만큼, 마음의 먼지를 닦아 내듯, 카푸어의 작업은 바로 그러한 정화의 시간을 제공한다. 보편적인 떨림과 파장을 담은 그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작은 우주이며 우리는 거기에 빠져 들어 우주의 질서를 예술적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일상에서의 상실을 숭고한 감동과 사색을 통해 치유하게 될 것이다.  
아니쉬 카푸어_동굴 Cave_코텐스틸_551×800×805cm_2012 ⓒAnish Kapoor, Courtesy the artist and Gladstone Gallery
  이번 전시는 세 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된다. 전시의 시작은 그라운드 갤러리로, 작가의 초기작부터 보이드 작업을 선보인다. 블랙박스는 카푸어의 특징적인 작업인 자가발생 개념을 특화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리움의 야외 정원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여 그의 대표적인 대형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을 설치하여 리움의 외관을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가득 찬 빈 공간 ● 그라운드 갤러리에서 시작되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코텐 스틸 작품은「무제 Untitled」(2012)이다. 붉은 녹으로 뒤덮인 육중한 쇠덩어리가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막대 위에 얹어져 있다. 지름 8미터, 무게 15톤의 거대한 타원형 작품이지만 철저한 공학적 계산에 따라 제작되고 설치되어 상식적인 중량감이 상쇄된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정해 보이는 자태와, 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구멍, 머리 위를 뒤덮는 어둠은 경이로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 준다. 한편 표면을 뒤덮은 황갈색 녹가루는 강인한 강철과는 상반되는 취약하고 남루한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특히 점차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자신을 가두는 거대하지만 좁다고 느낄 수도 있는 그저 텅 빈 타원형의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다분히 거칠고 물질성 강한 작품임에도 작품 앞에서 우리는 미묘한 심리적인 변화를 느낀다. 어둠, 존재하면서 보이지는 않는 공간, 우리의 시각과 심리를 자극하는 이런 요소들은 일찍이 그의 초기 작업에서부터 나타난다. ●「붉은 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 To Reflect an Intimate Part of the Red」(1981)는 카푸어의 안료 작업의 대표작이다. 작품과 바닥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섬세한 분말 안료는 바닥 면을 작품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우리가 늘 조각작품 자체와는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왔던 현실의 공간을 작품에 끌어들인다. 또한, 가루를 매개로 바닥으로 이어진 작품은 바닥 아래의 세계를 암시한다. 카푸어의 표현에 따르면 이 형상들은 10분의 1만 수면으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과 같은 것으로, 그에게 분말안료 작업은 가시적이고 관습적인 공간 너머를 탐색하게 하는 도정의 시작이었다. ● 세 개의 벽면에 설치된「무제 Untitled」(1990)는 보이드 작업이 형식적 개념적으로 절정에 있던 시기의 작품으로, 안팎을 뒤덮은 검푸른 분말안료는 빛을 흡수해버리고 어두운 심연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눈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심연의 암흑을 헛돌며 "당신이 심연을 응시할 때, 심연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니체의 경고를 체험하게 한다. 카푸어의 말대로 그것은 "텅 빈 어두운 공간이 아니라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어둠은 일반적으로 종말 혹은 절망과 공포를 의미하며, 깊은 어둠은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운 대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어둠은 공간의 물리적인 깊이의 한계를 넘어 무한한 공간으로 확장되는데, 카푸어는 그 무한 공간에서 인간이 느끼는 숭고함과 경외감 등의 근원적 체험을 유도한다. 또한 깊숙하고 어두운 빈 공간은 생명이 싹트는 어머니의 자궁을 은유한다. 이렇게 그의 보이드 작업은 모성 또는 여성성을 강하게 환기시키며, 작가의 표현대로 "창조와 에너지에 대한 모성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보이드 작업은 조각의 오랜 관습을 벗어나 조각의 표면을 열어 내부를 드러내고 그 안에 잠재된 숨은 가능성을 펼쳐 보인다. 비어있는 공간은 채워질 수 있는 공간이고, 특히 카푸어의 작업에서 그 곳은 무한한 정신성과 영적인 의미로 채워지는 공간이며, 또한 의미가 생성되는 곳이다. 호미 바바는 카푸어 작품의 빈 공간은 "그저 어둡고 빈 공간이 아닌 창조의 공간 space of making이고, 시적인 공간'이라고 했다. 또한 "비우면 비울수록 더 많은 것이 담긴다. 비운다는 것은 곧 채우는 것이다."라는 카푸어의 말은 본질적으로 음과 양의 균형으로 우주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는 동양의 공(空) 사상과도 다르지 않다. 보이드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단지 공간을 점유한 물리적인 오브제를 초월하여 보다 무한한 세계, 시적이고 신비한 세계로의 창구가 되기를 희망하며, 조각 내부의 음의 공간은 바로 카푸어의 예술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를 훌륭하게 구현한다.  
아니쉬 카푸어_노랑 Yellow_섬유유리, 안료_600×600×300cm_1999 ⓒAnish Kapoor, Courtesy the artist and Lisson Gallery
  카푸어는 물리적인 조각 작업을 하면서도 미술 오브제가 물질적인 상태를 초월할 수 있을 다양한 방식과 재료를 탐색해왔다. 그 중에서도 독립된 오브제로 존재하던 음의 공간을 건축물에 융합시킨 시도는 보이드 작업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그 한 예가 전시장 흰 벽면 위에 예리한 칼에 베인 자상인 듯 보이는「도마의 치유 The Healing of St. Thomas」(1989)로, 창에 찔린 예수의 상처를 직접 만져 보고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도마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카푸어는 이 작품을 '상처'가 아닌 '치유'라 칭함으로써 그 흠집의 즉물성을 초월하여 시적이고, 사유적인 차원으로 전이시킨다. 우리가 그 붉은 틈을 벽면의 흠집이 아닌 생명 현상으로, 벽의 내부를 유기체의 육신으로 느끼는 그 유동적인 인식의 순간에 우리의 고착되고 관습화된 인식 또한 치유되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건물의 벽면을 이용한「내가 임신했을 때 When I am Pregnant」(1992) 는 의심과 불신을 넘어 신비를 경험하게 한다. 흰 벽면에서 아롱거리던 미지의 환영이나 신기루는 관람자의 시선이 측면으로 옮겨가면서 그 온전한 실체가 드러난다. 다른 보이드 작업처럼 물리적으로 내부의 빈 공간을 만드는 대신 벽의 외피를 불룩하게 부풀려, 보이지 않는 내부의 존재를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육화된 벽면, 차가운 건축물과 생명을 잉태한 유기체의 신비로운 공존, 카푸어는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의 신비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차가운 건물이면서 따뜻한 생명체인 유동적인 경계에 있는 이 작품은 카푸어의 표현대로 "생성의 상태에 있는 오브제"이며, 작품이 사물로 실재하면서도 사물성이 사라지는 '비-오브제 non-object' 로의 전환이다. ● 카푸어의 작품이 관람자를 몰입시키는 또다른 요소는 건축적인 규모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6미터 정방형의 거대한 작품「노랑 Yellow」(1999)은 마치 거대한 모노크롬 회화를 입체화, 공간화한 듯, 회화이면서 네거티브 형태의 조각이고, 미술품이면서 건축물의 일부이다. 이 작품은 바넷 뉴먼의 거대한 모노크롬 회화의 숭고한 아우라에 공감하여 탄생한 작품으로, 우리는 빛을 발하는 거대한 색채와 텅 빈 공간 앞에서 그 빈 공간을 눈과 몸 전체로 인지하면서 회화와 조각이라는 예술의 관습화된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그 경이로움과 숭고함으로, 관람자의 시선과 상상으로 그 빈 공간 채워진다. ● 리움의 그라운드 갤러리는 직선적이고 각진 남성적인 공간이며, 어느 한 곳도 획일화되지 않은 매우 조각적인 건축이다. 반면 흑백과 회색의 단조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 설치된「내가 임신했을 때」와「노랑」은 역설적으로 부드러운 곡선과 강렬한 색상으로 건축 속에 파고들어 건축화된 조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건축으로서의 조각이 아닌 건축과 동화된 새로운 또 하나의 존재로, 카푸어 자신의 표현대로 비-오브제이다. ● 그라운드 갤러리의 마지막 작품은 아예 건축의 일부가 되어 버린「땅 The Earth」(1991)이다. 전시장 바닥의 검푸른 동그라미는 일루젼이 아닌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운 진짜 구멍이다. 코텐 스틸 작품「무제」가 머리 위로 어둠을 쏟아 부으며 우리를 압도하고 두려움을 야기한다면, 수미쌍관처럼 그라운드 갤러리의 끝에 위치한 이 작품은 바닥을 알 수없는 깊은 어둠으로 그 곁에 선 우리의 발끝 감각을 추락의 불안감으로 예민하게 한다. 바닥 아래의 빈 공간, 땅 밑의 보이지 않는 영역 등「땅」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1000개의 이름들」을 다시 환기 시킨다.  
아니쉬 카푸어_큰 나무와 눈 Tall Tree and the Eye_스테인리스 스틸_1500×500×500cm_2009 ⓒAnish Kapoor, Leeum, Samsung Museum of Art
  만물 창조의 풍경 ● 이번 전시에서 블랙박스의 내부는 역설적으로 밝은 창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블랙박스에 들어서는 관람객의 눈 앞에 가장 먼저 펼쳐지는 것은 지름 12미터의 광대한 작품「나의 붉은 모국 My Red Homeland」(2003)이다. 커다란 해머가 시계바늘처럼 한 바퀴를 회전하면서 왁스를 긁고 지나가면 그 궤적을 따라 작품의 형태가 유지된다. 작가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치 제 스스로 생명력을 가진 듯 스스로 만들어지는 듯한 이 작품은 카푸어의 '자가생성 Auto-generation' 개념을 구현한 대표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거대하고 강렬한 '붉음'이다. 붉은 색은 카푸어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색깔로, 그에게 붉은 색은 고향 인도의 토착적인 색채이지만, 무엇보다도 피의 색깔이고, 살아 있는 몸을 의미하며, 작가에게 있어서는 지극한 어둠으로 통하는 색깔이다. 결국, 문자 그대로의 붉은 대지와 같은 이 작품은 모국 인도의 풍경 만이기 보다는 보편적인 풍경이며, 너른 평원 같은 그 곳은 우리 모두가 비롯된 고향, 어머니로서의 대지이고 탄생의 장이다. 지극히 물성이 강한 재료인 왁스를 사용하여 오히려 근원적이고 비물질적인 가치를 전달하며 미술 오브제에서 풍경과 환경으로 전이되는 이 작품은 그가 늘 관심 있어 하는 상반된 요소들의 공존과 유동적 세계를 여실히 구현하고 있다. ●「나의 붉은 모국」곁에 설치된「스택 Stack」(2007)은 제목은 물론 형태에서도 도널드 저드의「스택」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최소한의 작가 개입이라는 미니멀리즘의 강령을 제시한 저드의 작업을 카푸어가 자신의 자가생성 개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카푸어의 작업 중에서 보기 드물게 수직적인 작품이 된 이 작품은 낮은 지평선을 이루는「나의 붉은 모국」옆에서 더욱 수직성이 돋보이며, 대지를 어머니와 여성으로 해석할 때 지극히 남근적으로 읽힌다. 이러한 해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그 곁에 설치된「나의 몸 너의 몸 My Body Your Body」(1999)이다. 피할 수 없이 성적인 연상을 야기하는 이 작품은 남근적인「스택」으로 인해 성적인 암시가 더욱 강렬해지는데, 사실상 상당히 많은 카푸어의 작품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케 하며 에로틱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카푸어의 예술에서 여성, 어머니, 성적인 에너지는 무궁한 창조의 원동력이며 이 우주의 근원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나의 몸 너의 몸」의 서서히 함몰되는 중심부 구멍의 깊고 검붉은 어둠은 우리 몸의 내부로 통하는 구멍들, 몸 안의 장기들을 추상적이면서도 강렬하게 상기시킨다. 구멍 저 깊은 곳은 어둠의 공간이고, 카푸어에게 그 어둠의 공간은 우리의 몸 속과 같다. 어둠의 몸이고 우리의 몸이기도 한 셈이다. 또한 보이드 작업이 벽면과 융합되어 작품과 벽면이 일체화되어 있다. 붉은 색의 그림으로 생각했던 우리의 눈이 깊이를 감지하는 순간이 바로 작품에 현혹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벽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구멍의 실존을 확인하고 싶어진다면, 아마도 작품에 깃든 작가의 속삭임이 들린 것이다. "자 이리 다가와요. 난 당신을 깊숙하게 끌어들일 수 있어요. 그러면 내 공간과 당신의 공간이 함께 스며들 겁니다. Come on, come over here. I can engage you deeply and my space infiltrates yours." ● 그리고 그 곁에서「우주를 위한 새로운 모델 실험실 Laboratory for a New Model of the Universe」(2007)은 성적 기운이 충만한 음과 양의 만남으로 막 태어나고 있는 미지의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단단하고 투명한 아크릴 한 가운데에 응결된 모호한 형상은 흡사 원생동물 같아 보이기도 하고, 생명체의 발생 단계의 모습 같기도 하다. 탄생, 생성, 생명 등 기원(origin)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어떤 '원형적인 오브제 proto-object'를 구현하는 것이 작업의 중요한 목표인 카푸어는 생성과 창조의 서사를 함축적으로 그러나 한껏 풀어내어 블랙박스 갤러리를 생성의 에너지로 충만하게 하였다. 그는 "미술가의 소명이란 바로 이러한 창조와 탄생의 순간을 증언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전시장 전체를 통해 실천하고 있다.  
아니쉬 카푸어_내가 임신했을 때 When I am Pregnant_1992 ⓒAnish Kapoor
  물질을 넘어서 ● 카푸어의 작업은 물질성 강렬한 재료로 물질을 뛰어넘는다. 거울처럼 윤나는 스테인리스 스틸 작업은 이 역설이 가장 극명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은 카푸어가 1995년 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재료로서, 작품의 물리적 실재를 초월한, 실재와 부재의 경계를 흐리는 보이드 공간을 보다 더 다양하게 모색하고자 한 그의 소망을 여실히 실현시켜준다. ● 거울은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치명적인 매력을 발휘한다. 인간의 나르시스 본능을 자극하며 우리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우리의 공간으로 침투한다. 그러나 오목 거울에 비친 우리의 이미지는「여전히 위아래가 뒤집힌 Still Turned Upside Down」(2002)에서 보듯이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상하 좌우가 뒤집히기도, 바로 서기도 하며 마구 해체한다. 오목 거울의 반사 이미지를 통해 재료의 굳건한 물질성은 휘발되고 유동하는 이미지만 남아 비물질의 상태로 전이되는, '비-오브제' 상태에 이른다. ● 「육각 거울 Hex Mirror」(2009)은 더욱 복합적인 역설로 엮여 있다. 작품을 이루는 수 백 개의 작은 거울들은 자연 상태의 가장 안정된 구조라는 육각형 이지만, 동시에 작품에 반사된 이미지들을 파열시키고 해체해버린다. 그 결과, 외부 현실의 이미지는 파괴되지만 동시에 우리의 눈 앞에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펼쳐진다. 눈을 뗄 수 없는 만화경 같은 이미지를 통해 관람자는 이 복합적인 역설과 유동적인 전이를 관람객은 체험하게 된다. ● 카푸어의 스테인리스 작품 중에서도「현기증 Vertigo Ⅴ & Ⅶ」(2012)은 유동적인 전이로 가득한 작품이다. 사각의 오목 거울에 비친 왜곡된 이미지는 제목 그대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은 이제까지 단독으로 설치되던 작품이었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독특하게 두 점이 등을 맞대게 설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통상 내부로 여겨지던 오목한 면은 바깥 쪽이 되고, 볼록한 면이 안쪽이 된다. 내부면서 바깥이고, 바깥이면서 내부인, 안과 밖이 유동적으로 공존한다. 반사의 반사가 무한대로 일어나는 두 작품의 사이에서 관람자는 매력적인 아찔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현기증'은 일찌감치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바로 어지러운 혼돈의 감각을 담고 있는 것이다. ● 야외에 설치된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은 더욱 확장된 공간에 놓임으로써 의미의 층위가 더욱 두터워진다.「현기증」이 우리의 눈과 몸의 반응에 집중하고 있다면, 함께 설치된「하늘 거울 Sky Mirror」(2009)은 보다 형이상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하늘 거울」은 카푸어의 대표적인 야외 조각으로, 2001년 첫 발표 이래 다양한 크기로 제작되어 여러 장소에 설치되었다. 거대한 스테인리스 스틸 오목 원반은 보이는 그대로 하늘을 담은 그릇이다. 마치 돔 천장의 오큘리스를 땅 위로 내려놓은 듯 하늘 한 조각을 우리 눈 높이로 가져와, 새로운 시각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 전시장과 야외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들을 벽과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만, 시간에 따라, 작품 주변을 오가는 관람자들로 매 순간 순간이 다른 모습이다. 작가의 관심은 바로 "관람자를 시간, 공간과 구체적인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조각"이고, 카푸어의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을 통해 작품과 관람객은 서로를 완성시킨다. 이 모든 것이 무엇보다도 물질성이 강한 강철, 그 표면의 얇은 반사 효과로 일어나는 일이며, 물질과 비물질의 좁고도 넓은 모호한 경계 속에 그의 작업이 존재한다. ● 리움의 야외 정원에 높이 솟은 나무「큰 나무와 눈 Tall Tree & the Eye」(2009)은 릴케의 시집「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죽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땅 밑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던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소재로 한 릴케의 시에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현실과 신화 등 대립적인 영역을 넘나드는 시인의 상상력과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 유동적이고 풍성한 시적 이미지들이 수십 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공이 뭉게뭉게 증식하듯 표현되고, 높이 솟아오르게 할 만큼 빼어난 오르페우스의 거문고 연주를 칭송하는 시 구절이 제목으로 차용된 이 작품은 오르페우스와 릴케와 교감한 카푸어의 시정(詩情)을 담고 있는 셈이다. ■ 삼성미술관 리움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하여


조민희展 / CHOMINHEE / 曺旼喜 / painting   2012_1026 ▶ 2012_1101 / 월요일 휴관


조민희_......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9.4×145.4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조민희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026_금요일_04: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씬 효천아트센터 GALLERYSYN HCMP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 5번지 효천아트센터 B2 Tel. +82.2.3676.2352 www.gallerysyn.com

  실재(實在), 그 '순간의 반복' ● 구름의 윤곽처럼, 늘어진 커튼처럼, 일상이란 그렇게 높낮이를 달리하며 주름지어있다. 그 주름진 커튼 너머 실재(實在)가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실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당겨진 캔버스 천처럼 그 주름진 일상을 펴 보이는 일, 작가 조민희가 그려낸 화면들은 무심한 듯, 형용사를 지우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 위로 끊임없이 침묵의 점을 찍어가는 것이란, 작가가 말하는 '보이지만 읽혀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표현해 나가고 있는 과정이 아닐까.  
조민희_......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2
조민희_......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2
  예술이 모든 시대와 양식을 아우르며 리얼리티의 구현이라는 것에 근거해왔다면, 작가 조민희의 작품은 시각적 리얼리티의 추구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실재의 모습이란 어쩌면 그렇게 더 과장되어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가 그려낸 화면들은 과장되어진 실재가 아닌, 과장과 위장의 모호한 경계에서, 실재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그려낸 '그 무엇'은 그래서 보여지는 풍경이나 장면이 아닌, 추상 되어지고, 사유 되어져야 할 그 무엇일 것이다. 그래서 실재의 재현이 아닌, 실재의 현시가 그 하나의 순간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 위에 그려진 화면을 바라보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민희_......_종이에 목탄_19×28cm×4_2012
조민희_......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8×91cm_2012
조민희_......_종이에 목탄_23×38cm×3_2012
  작품 속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은 읽혀지지 않는 기호와 메시지로 마치 우리가 실재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우리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는 만나보지도, 누구인지도 모를, 실재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하는 어느 인물의 일상의 한 편린을 바라보며, 그것에 맞는 형용사들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은 실재의 풍경일수도, 혹은 작가가 잘 만들어낸 공간 위에 연출된 장면일수도 있다. 젖혀진 커튼 너머로 잠시 실재를 들여다 보는 그 순간, 우리는 이제 관찰자가 아닌, 그 장면의 서술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커튼의 안쪽에서 나에게서 실재되었던 반복된 순간들, 그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던 실재들, 그 실재의 표정 앞에서 우리들 삶에 대한 서술형의 문장들 또한 여기 작가에게서처럼, 침묵의 점을 수없이 반복하며 찍어가고 있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조민희_......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90.9cm_2012
  이 시대의 예술은 표면 위에서 일렁이는 효과들이 만들어내는 일루전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진도 아닌, 이 '정지된' 그림들이 담아낼 수 있는 리얼리티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또 다른 실재가 있다. 작가가 그려낸 장면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서술해나가는 자아를 사유해 보는 일, 시간의 주름들,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그 무엇을 들여다보는 일, 미술표현이 리얼리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본질의 현시, 그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조민희에게서의 실재란, 보여지거나 읽혀지는 것이 아닌, 영원히 반복되는 이 찰나의 순간들 속에서 잠시 커튼을 걷어내어 실재를 바라보게 하는 그 시간에 있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작가는 우리에게, 삶이라는 본질을 향한 묘사의 과정과, 은유라거나 상징을 감추어버린 벽을 잃은 공간들,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 속의 명사와 동사들을 남겨둔 것이 아닐까. ■ 김종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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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문


2012_1026 ▶ 2012_1118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026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 박기일_박성현_서완호_세바_오수진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토스트 GALLERY TOAST 서울 서초구 방배동 796-4번지 3층 Tel. +82.2.532.6460 www.gallerytoast.com

예술가도 엄밀히 말하면 장인 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손으로 생각을 한다. 손이 창의력을 만들고, 또 그 손은 눈까지 이해시키는 창발력까지 발휘한다. 다섯 개의 문은 다섯 명 참여작가의 작품세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리얼리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필요한 다섯 가지의 단계를 중의적으로 상징한다. 머리, 가슴, 호흡, 눈, 손이 그 다섯 단계이며, 이를 통하여 작업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손을 첫 번째 위치에 두어, 장인 (craftman) 으로서 범위를 넓히고, 눈보다 손 끝으로 오감을 느끼는 그들을 부각시키고 싶다. 이들 다섯 단계는 작업진행과정에서는 역순으로 진행되며, 손, 눈, 호흡, 가슴, 머리. 관람객은 다시 역순으로 그림을 감상하게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이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크고 작은 문이 다섯 개가 있으며, 그 문의 크기는 보는 관람객의 몫이다. 마치 숨을 내쉬고 있는 듯한 오수진과 박성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 그림의 그림자에 까지 압도 당하는 느낌이다. 사진이나 아니 실물보다도 더 리얼한 표현은 그 표피의 색깔 재현이 아닌 얼굴 피부 내부를 마치 건물을 지을 때 치밀한 설계를 하고 기초공사 및 골조를 올리는 것 같이 얼굴 피부의 외장공사 이전의 근육과 뼈를 먼저 설계하고 피부를 입힌 것 같은 소름 돋는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세바와 서완호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매몰 환상(*어떤 특정한 요소에 대한 집착은 그 요소의 중요성을 확대한다.)은 지나친 집착이 나타내는 중요성의 부각이라고 느껴진다. 서완호의 작업은 무언가 불안전한 인간 군상의 직업적 어두운 면에 대한 집착에서 그 중요성을 넘어 심각한 퇴폐적 나르시즘 마저 느끼게 한다. 그 근원의 어둠은 조그만 빛도 창조의 빛과 같은 역설을 자아낸다. 세바의 입체적이면서도 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한 깨진 얼굴을 보면 그가 추구하는 매몰 환상은 극에 닿아서 파괴되어버려 진리마저 증발한 느낌이다. 이 둘의 작업은 극히 손끝에 눈을 달아 하나하나 뜯어 보며 그린 그림 같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는 것 보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롭다고 말했다. 박기일에 작업에서 느껴지는 그 존재성의 신비감은 단연 박제된 인간의 영원성 같은 거 같다. 그 상태로 시간여행을 떠나 몇 만년 후에 신비한 존재성으로 창조되어 걸어나올 것 만 같은 느낌이다. 혹여 지금 우리도 이런 벌거벗은 상태로 다른 행성에서 몇 만년 전에 옮겨져 온건 아닐지. 화성에 물의 흔적도 밝혀진 마당에 말이다. ■ 박용남
박기일_Plastic Memory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112cm_2011
그의 캔버스에 묘사된 인물의 피부는 완전한 인간의 피부도, 그렇다고 인형의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도 아니다. 주름살과 흉터는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치 인공 피부를 다시 보고 그린 것 같은 그러한 정도의 사실성만이 표현될 뿐이다. 그 인물들의 출처가 미디어에 비친 이미지이기에, 또한 작가가 피규어를 그대로 모방한 것 또한 아니기에, 그러한 모호함은 정직한 회화적 재현의 결과물인 셈이 된다.(중략) 자신이 보았거나, 보고 있는 세계를, 자신에게 보이는 만큼의 정교함으로 묘사하는 박기일은 그리는 작업을 통해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화가'의 입장을 견지한다. 대상이 소유한 사물을 다시 소유의 관점으로 풀어낸 방법론이라든가, 수집의 습관과 거리를 둔 채 그러한 행위를 작업의 틀로 긴밀하게 끌어들인 점은 박기일 회화의 메타적 측면과 연관된다. 그의 작업은 곧 '보는 자'로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실천한 흔적이다. 그 메타성, 곧 그의 작업에 일관된 제 3자의 시선은 작품 자체의 뛰어난 묘사력을 넘어서, 보는 이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박기일 개인전 전시서문 중 발췌) ■ 유혜인
박성현_인물연작6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11
나는 이러한 얼굴에서 편안함을 찾는다. 어디에서나 있을법하고 누군가의 이웃일 것 같지만 중요한 존재들, 사회에 있어서 보통의 편안함, 그들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인물의 색을 바꾸고 정형화된 초상의 틀을 벗겨버려도 그들의 얼굴에서 오는 따뜻함은 벗겨 낼 수는 없다. 작업을 하기 위해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출하기 위해 많은 얘기를 한다. 그렇게 하여 얻은 한 컷 한 컷들은 나에게 있어 어떠한 보석보다 값지다. ■ 박성현
서완호_Empty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2
나의 작업은 현대사회의 사람들간의 소통의 부재와 단절, 사회 시스템에 매몰되고, 폐쇄된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이다. 규격화 되어있는 현대사회에 끼워 맞추어진 하나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사람들의 공허함과 감추어진 자아를 탐구하여 심연의 묵직한 깊이와 본질을 표현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나아가 그 시선을 타자로까지 확대하며, 서로간의 '틀' 에 의해 가려진 관계성에 있어서의 한계 및 모순에 대한 상황을 가설정 하고, 결국 중첩되고 반복된 소통의 무의미함 혹은 이해될 수 없는 각자의 세계의 존재론을 다소 세기말적, 혹은 냉소적인 느낌으로 재연하려고 노력하였다. ■ 서완호
세바_Nas_캔버스에 스프레이_90.9×72.7cm_2012
하이퍼리얼리즘은 어떻게 보면 미술하는 이들에게 가장 베이직이 아닐까 생각된다. 무엇이든 표현할 능력이 있다면 그 이후에 다른 표현주의, 추상 등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슬픈표정, 기쁜표정을 짓고 있어도 그것이 정말 진심인지 가식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우주인 자신의 내면은 세상에 펼쳐져 현실과 많이 닮았고, 이 시대와 많이 닮아있다. 수많은 매체와 언론의 표정은 밝기도, 때론 어둡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무엇이 진실이지 사실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그런 다중적인 것들 역시 사람이 만들고 어떠한 인물들이 만든다. 아니 벌써 내가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볼 수 없는 표정에서. ■ 세바
오수진_Red lips Madonna_캔버스에 유채_112×112cm_2012
나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얼굴들은 나와 소통하며 함께 살아가는 주변인물들이 아니다. 주로 인터넷이나 잡지 등 대중매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달받아 다시 나의 캔버스에 옮기게 된다. '히키코모리'라는 신조어가 있다. 일본어로서 은둔형 외톨이를 뜻한다. 단순히 숨어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일정장소에 틀어박혀서 사회와 자신을 완전히 고립시키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들은 사람들과의 실질적인 만남을 통한 교류는 극도로 피하고 인터넷과 익명성이 보장되는 매체를 통해서만 사회와 소통을 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매체가 다방면으로 활성화되면서 대중매체에 노출되며 자라오기 시작한 첫 세대, 인터넷과 함께 성장해 온 세대가 나의 세대다. 어쩌면 나 역시 나의 얼굴을 그린다거나 나만이 보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개인적인 이야기보다 히키코모리적 작업방식이 편한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보고, 알고 있는 것과 내가 보고 알고 있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 존재가 가려진 익명적인 작업방식이 덜 불편한 것은 아닐까. ■ 오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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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영단


한홍구_최원준_김익현展 2012_1017 ▶ 2012_110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2_1017_수요일_07:00pm 유신 40년 공동주제기획 6부작『유체이탈 : 維 體 離 脫』展 2부 후원,협찬,주최,기획 / 평화박물관_아트스페이스 풀 전시디자인 / 이수성_최원준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스페이스99 SPACE99 서울 종로구 견지동 99-1번지 Tel. +82.2.735.5811~2 space99.net

유체이탈維體離脫 ●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 비상조치인 10월 유신이 선포된 지 40년이 되었다. 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전문예술사단법인 아트 스페이스 풀(구 대안공간 풀)과 사단법인 평화박물관의 미술전시공간 스페이스99가 '10월 유신'이라는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 몸과 마음에 남은 유신의 영향을 풍자, 성찰하기 위하여 6부작 미술 프로젝트를 공동기획 하였다. '유체이탈幽體離脫'은 본래 '몸을 벗고 떠나다'라는 뜻이니 본 프로젝트의 제목인 '유체이탈維體離脫'은 '유신체제를 벗고 떠나다'라는 의미이다.
최원준_KCIA시리즈-중앙정보부 회의실, 의릉_디지털 프린트_72×96cm_2012
최원준_KCIA시리즈-중앙정보부 대강당, 의릉_디지털 프린트_72×96cm_2012
최원준_증발_HD 단채널 영상_00:10:15_2012
최원준_증발_HD 단채널 영상_00:10:15_2012
김익현_Propagation-4_디지털 프린트_60×45cm_2012
최원준_문화공보부 1번 간행물 '이 고개를 넘으면...'_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1972~2012
최원준_문화공보부 5번 간행물 '왜 비상사태는 선포되었나?'_디지털 프린트_가변크기_1972~2012
김익현_무제_갱지에 프린트, 설치_42×29.7cm_2012
김익현_무제_갱지에 프린트, 설치_42×29.7cm_2012
구국의 영단展_스페이스99_2012
구국의 영단展_스페이스99_2012
구국의 영단展_스페이스99_2012
한홍구_아카이브, 칼럼_종이, 책장_가변크기_2012
구국의 영단展_스페이스99_2012
구국의 영단 ● 유신 40년 공동 주제기획 6부작 중 2부전시인『구국의 영단』은 역사학자 한홍구와 미디어아티스트 최원준, 김익현에 의해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이 전시를 위해 그야말로 '구국의 영단'을 결심했다. 그들은 따로따로가 아닌 한 팀으로 이 전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역할을 밝혀서 미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구국의 영단』은 당시 문화공보부가 유신을 홍보하기 위해 시리즈로 제작했던 작은 홍보책자의 제목에서 따왔다. 유신정부는 유신이야말로 대한민국을 구원하는 최고의 정치체제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체제를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 유토피아를 선전하고 건설해 나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 결과에 직면했는가? 그들이 꿈꿨던 유토피아는 한 발의 총성으로 막을 내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유토피아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자들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이 전시는 유신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상상하되, 유신의 부활조차 엄중치 경고하는 예술가들의 미학적 바리케이트이며 '구국의 영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김종길 유신 40년 공동 주제기획 6부작 전시『유체이탈 維體離脫』개요 1부 08.28–09.26『국가의 소리』/ 김정헌, 양아치 / 아트 스페이스 풀 2부 10.17–11.07『구국의 영단』/ 김익현, 최원준, 한홍구 / 스페이스 99 3부 11.10–11.28『유신의 초상』/ 양은주, 황세준, 홍성담 외 / 스페이스 99 4부 12.01–12.19 김경호, 김동규, 권동현, 서평주, 이완, 정기훈 / 스페이스 99 5부 09.20–12.19 『지금 이 곳에 어울리는 어떤 우연』/ 김소령, 지용일 공동작업 / 온라인 전시 www.haalfempty.org 『일방통행』/ 권기예, 김규림 / 온라인 전시 blog.naver.com/18oneway77 6부 10.17–자율기간 A4전『유체이탈』/ 스페이스 99, 아트 스페이스 풀 외 참여를 희망하는 전국 각지 미술공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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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함에 관하여 Eternity












양수연展 / YANGSUEYON / 梁水演 / painting   2012_1025 ▶ 2012_1123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초배지에 채색, 호분_160×130cm_2010






초대일시 / 2012_1027_토요일_12:00pm

관람시간 / 09:00am~07:00pm

월드벤처갤러리 World Venture Gallery 서울 금천구 가산동 426-5번지 월드메르디앙벤처센터Ⅱ B1 Tel. +82.2.865.2119







● '세상에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가?' 나의 작품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되었다. 세상에 정말 영원한 것이 있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지만 현실 속에서의 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된다. ● 영원함에 대한 갈망과 그것에 대한 물음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제기되었다. 우리 모두가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죽음'은 우리에게서 소중한 존재를 앗아간다. 죽음으로 인한 존재의 부재와 이따금 생을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공포는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더 영원한 것을 갈망하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태어나 삶을 살아가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서 유일무이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이 거역할 수 없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영원함'이라는 개념을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해나갔는지의 과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장지에 먹, 호분_227×180cm_2010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견에 채색_160×145cm_2010

존재의 부재 ● 나의 할아버지께서는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나던 해에 돌아가셨다. 1988년 1월 2일, 새해를 맞이하고 난 바로 다음날, 지병인 간암으로 환갑을 갓 넘긴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존재의 크나큰 공백과 슬픔 속에서 4개월 뒤 내가 태어났다. ● 내가 태어나서 지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느낀 존재의 부재란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모두가 알고 경험했던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나만 느껴볼 수 없다는 것에서 어린 나는 매우 큰 슬픔을 느꼈었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제삿날마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해마다 봐왔던 나로서는, 그 분의 부재를 너무나 극명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분께서 돌아가신 햇수가 나의 나이와 같다는 사실은 나의 슬픔을 더욱 배가 하였다. 그 사실은 내가 나의 생의 나날을 살아가는 것만큼, 그 분이 이 세상에 존재하였던 나날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사람은 어째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사람이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린 나는 한 사람의 부재로 말미암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에 더욱 매달리게 된 것 같다. 그리고 한동안 현실 속에서 겪는 사소한 변화와 상실을 굉장히 두려워하였다.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초배지에 먹, 호분_140×140cm_2011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순지에 먹_160×130cm_2012

영원함과 죽음에 대한 고찰 ● 이전의 나는 영원함을 불변함과 같은 의미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원함에 관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내가 내리게 된 결론은 '죽음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다'라는 것이었다. 죽음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과 삶의 모호한 경계를 느꼈으며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억지로 내 스스로 맞는 죽음이 아닌, 때가 되어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은 비록 삶을 앗아가고 끝없는 슬픔을 안겨주지만 다른 것의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1988년이라는 같은 해에 할아버지의 죽음과 나의 태어남이 이루어진 것처럼, 삶과 죽음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자연의 굴레 속에서 돌고 도는 과정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순지에 먹_75×160cm_2012

유한함의 목격 ● 그러나 아버지의 암 선고로 인해 나의 생각은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엄습해오는 공포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유한함이라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내가 유한함이나 영원함에 대해 내렸던 결론들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담담한 것이었다.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나로 하여금 죽음에 대하여, 내가 결론 내린 '영원함'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였다.
양수연_영원함에 관하여_순지에 먹_130×160cm_2012

結 - '살아있음'에 대하여 ● 할아버지의 존재는 여느 다른 인간처럼 유한한 시간을 살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의 존재로 인해 아버지가 세상에 나게 되었고, 나도 이 세상에 나게 되었다. 그 분의 물리적 존재는 사라졌지만, 그 분의 말과 행동, 인품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추억되고 있다. 유한한 삶을 살고 있는 미미한 인간 존재에게 영원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원함'이란, 우리의 삶이 끝난 뒤, 땅으로 돌아가 자연의 영원한 순리에 회귀하는 것, 그리고 후대에 그 영향을 전하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기억되는 것일 것이다. ● 생(生)의 필연적 결과로 끝을 맞이하고 영원함이 삶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살아있음'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한다. 순간순간에 살아있음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 당당히 존재함을 드러내며, 격렬한 생의 의지를 통해 나의 존재가 삶의 유한함을 넘어 영원함을 향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 양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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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확장












Extended Senses展   2012_1029 ▶ 2012_1119







김채원_Labyrinth_설치_450×600×500cm_2011






초대일시 / 2012_1029_월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채원_오세인_장 후에이 밍_히라노 료_토키사토 미츠루 팀 포퓰러스케이프(Team PopulouSCAPE)

주관 / 대안공간 루프_윌링앤딜링 아트컨설팅 후원 / 서울문화재단 기획 / 서진석(대안공간 루프 디렉터) 김인선(윌링앤딜링 아트컨설팅 디렉터)

강연「일본 미디어아트의 현재」/ 2012_1101_목요일_04:00pm 강연자 / 하타나카 미노루(NTT InterCommunication Center 큐레이터)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SeMA Hall(서소문 본관 지하 1층)

관람시간 / 11:00am~08:00pm

대안공간 루프 ALTERNATIVE SPACE LOOP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5-11번지 Tel. +82.2.3141.1377 www.galleryloop.com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디지털 미디어와 인간의 감각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생성되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의 감각 체계는 다양하게 분화되는 한편, 공감각·통감각·다감각 체계로의 확장을 요구받으며 진화 중이다.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은 기계적 소통이 신경 시스템의 연장이 되는 수준까지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 그에 맞춰서 인간의 지각 능력도 발달하여 우리의 감각이 확장된다고 말했다. 대상에 감응하는 메커니즘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구의 인식론이 이성과 논리에 근거하는 이분법적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돼 왔다면, 동양은 보다 다원적, 유기적인 사상 속에서 주관과 대상을 분리하지 않는 감성적 직관을 중시해 왔다. 또한 서구의 인식 체계가 경험의 분석, 가설의 입증 등을 통한 객관적 합리성에 비중을 둔다면, 동양의 인식 메커니즘은 5관의 호흡을 통한 심신의 감응에서 이뤄지는 통찰과 직관을 중요시한다. 눈앞에 있는 대상을 오감(五感)에 의존한 계측을 통해 파악하는 서양, 그리고 대상의 본질을 헤아리는 동양은 사물에 대한 인식에서 서로 확연한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서양 사상의 원류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이원론에 기초한 세계관을 제시했다.
김채원_Labyrinth_설치_450×600×500cm_2011
오세인_The Traces_이어폰, MP3 플레이어_가변크기_2012
오세인_The Traces_이어폰, MP3 플레이어_가변크기_2012

그러나 이런 이원론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양자 역학 등에서 근본적 한계를 노출했고, 현대 과학은 새로운 인식 체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 반면, 동양 사상은 순환적이면서 유기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실재와 그림자를 대비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에 비해, 불교나 노장사상은 유기적 순환이나 공존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수천 년간 이어진 동양의 사상과 문화는, 한때 20세기 서구의 눈부신 과학 문명의 그늘에 가려 전근대적인 비과학적 영역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현재, 아이러니하게도 서구의 과학이 발달할수록 오히려 동양 사상의 원리를 증명하는 결과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21세기 문화의 세계적인 흐름은 그림자와 실재의 이분법보단 그 사이의 동등함과 동반을 강조하는 동양적 시각에 무게를 둔다. 과학 문명을 꽃피운 서구의 합리적 인식이 과학 자체의 발달과 함께 그 한계에 봉착했으며, 그 돌파구로 동양의 직관과 통찰에 의한 통합적 세계관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 2012년『감각의 확장』은 미디어 아트라는 형식을 통해 이상의 변화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는 한국과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세 나라의 젊은 미디어 작가들의 참여로 이뤄진다. 그들은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작업 과정에서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들로 변환하거나, 혹은 다감각화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변환과 확장의 시도들은 20세기의 인식 구조와는 다른 동양의 감응 체계를 되새겨 볼 체험의 기회들을 제공할 것이다. ■ 서진석
장 후에이 밍_Mini Worlds-The Cliff_설치_2012
장 후에이 밍_Mini Worlds-The Cliff_설치_2012

재현(representation)을 철학적 용어로 바꾸면 표상(die Vorstellung)이다. 표상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진 나의 인식체계가 세계를 구성해내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한때 인간이 세계를 내면에 구성하는 이 메커니즘은 선험적이기 때문에 그 구성의 정도는 아주 보편타당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대륙의 관념론과 로크의 타협적 경험론이 좌초되고부터 그리스와 르네상스 이래로 지고의 가치를 부여 받았던 인간지성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표상은 보편타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살아가는 입장과 환경에 맞게끔 주관화시키는 의지일 뿐이라고 일축해버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어떤 인식 메커니즘에서 재현된 주관적 세계를 다시 주관화시키는 미술에 대해서 혐오했다. 그는 대신 재현된 세계가 아닌 추상적 예술, 즉 음악이나 건축을 사랑했다. 쇼펜하우어는 추상예술의 도래를 예고한 최초의 사람이다. 추상예술이나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술은 서로 구분되기 어려운 관련 언어이다. 장르가 장르를 침해하지 않고 자기 매체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의 역사로서의 모더니즘이라는 말이나 기존의 미적 선례(aesthetic precedent)를 창조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전환(critical shift)시키려는 시도를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태도나 비슷한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태도가 현상으로 나타난 모습이 추상예술에 다름 아니다.
히라노 료_HOLIDAY_00:14:30_2011
히라노 료_The Kappa's Arm_00:05:42_2009

우리는 실재 사물을 정확히 화폭에 옮겨 등가관계를 성립시켜가려는 노력으로 첫 번째 미술사의 네러티브를 확립하는 태도를 배웠다(바자리, 곰브리치). 매체의 특성이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가는 과정이라는 모더니즘 미술사 기술에 대해서도 잘 안다(그린버그). 그러나 예술의 의무는 어디까지나 감각을 확장시키려는 무한정의 모험정신에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인류사의 임무는 재현과 추상, 그리고 장르의 교차를 통한 새로운 통섭구조(通涉構造)의 발현이라는 세 단계의 거류를 지나 새로운 미디어의 예술내부로의 유입이라는 신항로를 확장시켰다. 마샬 맥루한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를 던지며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자동차의 바퀴는 발의 확장이며 서적은 눈의 확장이다. 의복은 피부의 확장이며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다." 맥루한의 발언 속에는 서양의 다이커터미(dichotomy)가 없다.
토키사토 미츠루_CamearA 2 CameraB_2012
토키사토 미츠루_CamearA 2 CameraB_2012
팀 포퓰러스케이프_Night Flight Over an Urbanizing World_단채널 영상_2005
팀 포퓰러스케이프_Night Flight Over an Urbanizing World_단채널 영상_2005

감각을 이성에 대한 시녀로서 하부구조적 말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양은 이성을 절대시한 적이 없다. 이성 또한 심미적 감수성이 고도로 승격된 고차원적 감각의 어떤 메커니즘 정도로 파악했다. 맥루한의 감각의 확장론이나 동양의 이성, 감각을 하나로 묶어서 사유하는 일원론은 근원적으로 통하는 바가 있다. 동양에서 산수는 정확한 관찰 이후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감을 통해서 산과 함께 호흡하며 일체화된 뒤 그 공감각적 감동과 감흥을 시서화로 묶어서 통일적으로 표현하고 기록하고자 했던 호연지기였다. 뉴미디어 아트 역시 다른 기제의 기술들을 인간의 감각으로 흡수하여 서로가 통섭하여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노정시키려는 현대판 호연지기라는 점에서 동양적 미술과 뉴미디어 아트는 맥락을 함께 한다. 2008년, 2010년에 이어 올해로 이어진 프로젝트 전시『감각의 확장』은 위와 같은 이해를 국내외적으로 알려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타이완, 일본 등의 국내외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 대안공간 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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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zers












하행은展 / HAHAENGEUN / 河杏銀 / painting   2012_1026 ▶ 2012_1109 / 일,월요일 휴관







하행은_문자도(Pictograph)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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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6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요일 휴관

두루 아트스페이스 DURU ARTSPACE 서울 종로구 부암동 278-7번지 Tel. +82.2.720.0345 www.duruart.com







예전 작업에서 무표정하거나 반항적이고 불만이 가득했던 아이의 모습은 지금의 반항적인 눈을 가진(또는 무엇을 주시하고 있는) 응시자(gazer)로 대변된다. 이 소녀의 모습은 네 살 무렵부터 그렸었던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의 모습에서 조금 변형된 것이다. 눈은 커다랗고 머리카락은 동화속의 라푼젤처럼 길다. 긴 머리카락을 그릴 때는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야 하는데, 까만 머리카락을 그리고 있으면 동양화를 배웠을 때처럼 화선지 위에서 먹을 다루고 있는 착각이 든다. 자유롭고 감정이 풍부한 소녀의 모습은 한편으로 유아스럽거나 소년스럽기도 하며, 성별의 존재를 잊고 살고 있다. 그저 한 인간으로서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의 성숙함 사이에 있는 과도기적 단계다. 이 시기는 아마도 육체로부터 정신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갑'이기보다 '을'적인 존재이며 강자이기보다 약자를 대변하는 존재인 이 소녀에게 세상은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때론 분노로 가득 찰 때도 있고 동시에 아주 아이러니한 곳이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를 관찰하거나 반항적인 눈을 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분노하거나 무엇을 응시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무기 같은 것이다. 응시와 분노는 예술의 씨앗과도 같다. 내게 응시(gaze)란 명상과도 같은데, 어렸을 적에 혼자 집 바로 뒷산 속에서 진달래꽃을 무념무상으로 바라보았던 상태를 기억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자라면서 종종 그런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분노는 세상을 새롭게 살아갈 힘이며 작업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과 같다. 분노는 저항하거나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는데 자유를 갈망하는 자에게 필요한 정서라고 생각된다.
하행은_불굴의 의지에 대한 명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1×53cm_2012
하행은_명상(meditatio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5.8×22.7cm×4_2012

도널드 덕(Donald Duck)은 장난을 좋아하고 화도 잘 내고 조금은 악당같은 면모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 겁도 많고 마음이 약하다. 나는 이런 모순됨이 재밌고 흥미롭다. 이것은 내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나 방식에 대해서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널드 덕은 쏟아내는 말이 많은 수다쟁이인데, 이런 면모는 인간이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살수 없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난 언어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가지고 있는데, 각국의 언어가 다르다거나 자신이 알고 있거나 궁금한 것을 언어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도 그렇다. 재밌는 건 그들만의 언어로 서로 알아들으며 대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마치 수다쟁이 도널드 덕이 알 수 없는 소리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 그림에서 등장하는 부처나 관료의 모습, 그리고 자화상으로 등장하는 도널드덕의 모습은 언어와 긍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현재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지만 이 또한 긍정 없이는 유머스럽게 풀어내지 못했을 거다. 나에게 예술은 뜨거운 긍정이 없이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이며 수다쟁이 오리처럼 말을 쏟아내고 싶은 표현의 욕구다.
하행은_쌍둥이(twi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7.3×44cm_2012
하행은_응시(gaze)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72.7×121.2cm_2012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유기적인 관계라는 상상의 상징물인 유기체 작업들은 현재 눈이 달린 자유로운 형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물과 같이 자유분방한 형태를 할 수 있어서 화면 안에서 재미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도널드 덕 이라는 캐릭터, 그리고 유기체는 내 작업에서 중요한 세 가지 요소다. 그것들은 내게 예술에 관한 물음을 던지며 캔버스 안에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아마도 예술에 대한 생각과 나를 나타내는 자화상의 여러 가지 모습이라고 생각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 나또한 기대된다. 세상을 살아갈 때 심심하지 않게 해 주는 건 '꿈'이고 예술은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하행은
하행은_불굴의 의지에 대한 기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45.5cm_2012
하행은_불굴의 의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7×90.9cm_2012






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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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展開 UNFOLD










김인영展 / KIMINYOUNG / 金仁英 / painting 2012_1024 ▶ 2012_1107 / 월요일 휴관






김인영_연속적 생성 continuous becoming_스틸에 혼합재료_230×12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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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024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주말_11: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포럼 뉴게이트 ARTFORUM NEWGATE 서울 종로구 명륜4가 66-3번지 Tel. +82.2.517.9013 www.forumnewgate.co.kr






시공의 주름 사이로 유출된 풍경 ● 철판 위를 여러 각도로 가로지르는 찐득한 에나멜 물감이 만들어내는 주름들은 오래된 자연 또는 인공 구조물의 주름들과 부딪히면서도 어우러진다. 김인영의 작품에서는 재료의 물성과 풍경의 요소가 동형적 구조를 이루면서 미지의 공간이 생성된다. 이러한 미지의 공간은 현실적 참조대상과 관련되면서도 회화적이다.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화면들은 작가에게 감흥을 주었던 세계 여행을 시시콜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행에 상응할만한 것을 회화라는 또 다른 어법으로 번역한다. 관객은 회화가 만들어내는 겹겹의 층을 여행하면서 작가가 새겨 넣었을 미지의 시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 한 화면에는 겹겹이 그려지고 칠해지고 흘러내린 공간이 있는가하면 텅 빈 공간도 있다. 회화의 물성과 참조대상으로부터 연원한 환영이 동시에 작동되면서 만들어진 풍경 속 원근감은 뒤죽박죽이다. 앞뒤나 상하가 바뀌는 일도 흔하다. 공간은 시간의 질서만큼이나 불확정적이다. 이러한 비균질적인 공간에는 잠재적인 흐름이 있다. 공간은 연속적으로 생성되고 증식되는 유동성을 가진다. 흐름에 내재된 시간성은 서사 또한 포함한다. 이야기는 한창 진행 중이지만, 사전에 정해진 경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 작품 속에 단편적으로 들어가 있는 건축적 구조물은 에나멜 물감에서 생겨난 마블링처럼 오랜 시공간의 켜를 둘러쓰고 있다. 2층 전시장에 걸린 실크 스크린 작품 역시 여러 시공간의 층을 중첩시킨다. 철판이건 실크 스크린이건, 이미지들은 유기적 부분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단편들이 중첩된 집합이다. 단편은 어떤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우연적 파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질적 단편과 만나는 단위로 작동한다.
김인영_연속적 생성 continuous becoming_스틸에 혼합재료_230×120cm_2012
김인영_사이 betweenness_스틸에 에나멜 페인트_100×100cm_2012
김인영_사이에 inbetween_스틸에 에나멜 페인트_117×80cm_2012

고색창연한 풍경 위나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에나멜 물감은 생경하다. 출고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철판 위를 흐르는 번질거리는 물감은 표면성과 인공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곧 녹슬 철판, 그리고 마블링 효과 및 방향성을 가진 흐름이 있는 에나멜 물감에도 작품 소재로 들어온 오래된 건축물만큼의 퇴적층이 존재한다. 밑판이나 물감에도 깊이가 있지만, 그것은 표면들이 만들어내는 깊이이다. 이번 전시에서 캔버스를 철로 바꾼 것은 에나멜 물감과의 어울림 뿐 아니라, 화면의 두께가 1-1.5mm 정도로 얇아진다는 것에서 왔다. 쇠판은 시간의 흐름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면서 물질적 깊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깊이는 얇은 층들이 집적되면서 만들어진다. ● 김인영의 작품에서 구조란 생물학적 차원 또한 포함한다. 생체의 일부로부터 추출된 유전자가 유기체를 복원할 가능성이 열린 생물공학의 시대에, 단편은 단순한 파편이 아니라 전체를 내장한다. 그것은 줄기세포처럼 무엇으로도 성장할 수 있으며, 꿈속에 등장하는 단편처럼 무엇으로 이어질지 예측 불가능한 지형도를 가진다.
김인영_사이에 inbetween_스틸에 에나멜 페인트_117×80cm_2012
김인영_연속적 생성 continuous becoming_스틸에 에나멜 페인트_150×150cm_2012
김인영_연속적 생성 continuous becoming_스틸에 혼합재료_230×120cm_2012

김인영은 회화를 통해서 연극성에 상응하는 연출을 시도했다. 주된 장치는 간격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간격들은 소통 불가능함과 공통성 없음을 나타낸다. 그녀의 작품에서 시간적 공간적 간격은 얼버무려지지 않고 최대한 드러난다. 작가는 간격으로부터 무엇인가 발생한다는 것을 감지한다. 반면 자율적이며 자족적 전체는 간격을 억압한다. 논리적 이성은 자신이 임의적으로 설정했을 뿐인 완벽한 구도 하에 잃어버린 고리가 채워지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인영의 작품에서 단편들은, 그것들이 비록 덩치 큰 인류의 기념비들로부터 온 것들이지만, 잃어버린 통일성이나 전체성을 복구, 복원하기 위한 단편이 아니다. ● 그것은 또 다른 단편과 만나 미지의 것을 형성하기 위한 단초로서의 단편, 즉 잃어버린 고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발단이다. 하나의 덩어리란 그것이 어떤 선험적 또는 추후에 획득될 조화에 기반 해 있던지 간에, 지금은 굼뜬 이데올로기로 다가 올 따름이다. 밀가루 덩어리는 수없이 치대어지고 부풀려져 수많은 겹을 가진 파이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불가능한 기획이 아니라, 한정된 유(有)의 겹을 늘림으로서 표면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이다. 표면 혹은 중층적인 표면의 시대에 깊이를 파기보다는 표면을 넓히는 것에 더 큰 창조력이 들어간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들은 비록 한정된 것일지라도 거기에는 무수한 겹과 주름을 부여할 수 있다. 자연 및 시간의 시험대에 놓인 인간 역사가 낱낱이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작가 또한 작품을 통해서 그러한 무수한 시공간을 압축 재생할 수 있다. 김인영이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의 확장은 결과적으로 진정 여행할만한 다원적 세계를 만든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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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ond Bridge










박영택 기획展 3부 2012_1031 ▶ 2012_1120 / 월요일 휴관






김도균_w.bh-1.1 (1/3)_나무틀, 플렉시글라스에 C 프린트_90×70cm_2008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도균_김병훈_안준_이경민_장문걸_홍미선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릿지갤러리 Bridg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82.2.722.5127 www.bridge149.com






회화는 종이와 캔버스의 표면, 피부위에서 서식한다. 사진 역시 인화지라는 물질, 피부위에 도포된 이미지다. 그곳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지시하는 한편 관념적인 공간이 떠오르고 소멸되기도 한다. 따라서 회화의 표면은 기이한 장소다. 서구전통회화가 그 내부로 하염없이 들어갔다면 모더니즘은 평면성이라는 물리적 조건만을 강박적으로 추구했다. 반면 오늘날 회화는 이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표면'에 주목하는 것 같다. 그 표면성은 모더니즘과는 조금 달리 안과 밖의 경계에서 간절하게 생을 영위한다고나 할까. 그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사고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다양한 방식으로 그러한 표피성, 껍질에 천착하고 있는 것 같다. 새삼 그 표면을 거점 삼아 새로운 회화, 회화에 대한 회화, 아니 회화를 넘어서는 회화(메타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회임하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도 보게 된다. 회화의 존재론적 조건인 표면에 대한 독자한 인식과 상상력 및 해석, 그리고 그것을 외화 하는 붓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표면에 부려놓는 '감각의 구현'에 의해 그런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미술이란 결국 감각이 구현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는 부단히 환생하고 새로이 호명된다. 개별 작가들의 몸과 감각에 의해 표면과 물질이 순간순간 갱신되고 또 다른 생을 부여받으면서 마구 거듭나는 것이다. 새삼 오늘날 회화는 이제 저마다 그 표면에 저마다의 방법론, 매너로써 기술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 방법론이라는 게 단지 기발하고 낯선 재료의 사용이나 전통적인 회화적 재료를 넘어서는 이질적 재료들의 접목으로 전개되는 이전의 방법론(70, 80년대 미술계에서는 흔히 '새로운 방법론'이란 제목의 전시들이 곧잘 이루어졌었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번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최근 많은 작가들이 그림의 내용, 주제보다는 방법론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다소 막연한 언어와 현학적인 개념을 빼고,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붓질을 할 것인가,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단지 망막 중심적인 미술, 이미지 작업이 아니라 몸 전체가 관여하고 감각이 편승하며 촉각적이고 통감각적인 것, 그러니까 작가의 몸이 느끼는 사물의 피부질감, 그 감각을 붓질을 통해, 이미지를 통해 온전히 전달하려는 데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작업은 결국 작가들의 감각이 세계를 보는 프레임, 표현하는 방법론, 미술을 이해하고 구현하는 매너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
김병훈_KLCP008_플렉시글라스에 피그먼트 프린트_70×53cm_2011
안준_Splash#1 (1/5)_HDR 울트라 크롬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61×91.5cm_2012
홍미선_Atacama, Chile_피그먼트 프린트_70×105cm_2007

생각해보면 미술은 무엇보다도 어떤 물질을 가공해서 또 다른 존재로 환생하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마술과도 같다. 자신이 다루는 물질의 바닥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자, 그 물질에 마음과 혼을 불어넣는 일이기도 하다. 물질은 한 작가의 육체와 정신에 의해 변형되고 변질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만남과 접촉은 불가사의하고 기이하다. 그것은 더 이상 이전의 일상적인 사물이나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무엇이라고 호명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명명命名의 체계를 흔들고 교란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새롭고 낯선 존재를 보여주는 이들이다. 그 낯설음은 기존의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습화된 안목에 회의를 갖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어쨌든 그것은 그들이 오랜 시간 다루고 애무한 연장과 물질, 감각의 차이를 통해 발화된다. 더불어 작가에게 있어 손은 온 몸과 감각의 총화이자 그것이 전적으로 외화 되어 나오는 마지막 통로에 해당한다. 따라서 손은 단순한 기관이나 특정한 육체의 한 부위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 손이란 한 작가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핵심이다. 손이야말로 작가의 얼굴이고 몸이다. 작가들은 그 손으로 특정 물질을 애무하고 그것을 현란하게 변환시키고 성형하며 또 다른 존재로 환생시키는가 하면 이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손/지문으로 물질을 소진시키는 일을 반복한다. 미술이 여전히 가능하다면 그것은 한 작가의 손으로 인해서이다. 감각으로 길들여지고 결국 그 감각이 빠져나와야 하는 마지막 출구 같은 손이다. 영상과 테크놀로지의 발달, 다양한 매체와 현란한 기술적 수단들이 압도되어도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손의 노동과 감각이 존재하는 한 미술은 죽을 수 없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 작품을 본다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육체, 몸의 놀림, 손의 흔적, 감각의 총화를 만나는 일이다. 한 개인의 몸과 감각이 물질과 연장의 힘을 빌어 응고된 결정이 결국 미술작품인 것이다. 미술이란 그 손맛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그것으로 마감되는 장르라고 말해볼 수 있다. 따라서 작가들의 손은 몽상하는 손, 꿈꾸는 손, 노동하는 손이자 물질과 뒤섞여 일체가 되는, 무척이나 감각적인 손이다.
이경민_바람, 어디에서 부는지(1/6)_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_66×100cm_2011
장문걸_505호 연구실, 17-12_사진_100×75.9cm_2012

그러니 그림이란 무엇보다도 외부 세계/대상과 작가 자신의 육체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림은 주어진 매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매체를 작가들이 어떻게 대하고 점유해나가며 해석하느냐라는 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그간 다소 폄하되거나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재 우리 미술계에서 저마다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방법론들이 없는 게 아니다. 정작 아쉬운 것은 미술에 대한 개별적인 사유가 부족하다는 점이고 그 사유에 따른 방법론의 모색이나 창안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생김새가 다르듯 다른 몸과 감각의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최근 한국 미술은 일종의 공예이고 인테리어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작가들마다 회화를 대하는 자신만의 사유, 그리고 그에 기반 해 자기 식으로 그림을 뜯어 먹는 방법론, 매너에 대한 독자성이 요구된다. 그만의 품성, 사유, 몸놀림과 재료 해석과 고도의 연마가 물씬 거리는 그림말이다. ● 인사동에 자리한 브릿지 갤러리가 개관1주년을 맞이했다. 그 1년 동안 이 갤러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 본 작가 18명을 한 자리에 모았다. 회화와 사진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다. 평면, 표면에 천착하면서 기존 미술계의 관습적인 언어, 획일적 감각과 방법론에 저장잡히지 않으려는 작가들을 선별해본 전시다. 특정 주제로 강제하거나 동일한 매너로 수렴하는 대신 동시대 현대미술이 보여주는 상투적 이미지와 클리세에서 벗어나는 통로를 찾는, 그 '다리'를 건너가려는 시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을 생각해본 전시다. ● 홍미선과 안준, 김병훈의 자연풍경을 몸으로 반응해서 이미지로 결정화하는 감각이 간직된 사진작업, 그리고 이경민, 장문걸의 오랜 시간의 흐름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세계의 파장을 담고 있는 정적인 정물 사진, 김도균의 사진만의 오랜 응시 속에 절취한 프레임의 감각적 구도를 극화하고 있는 공간 사진 등이 선보인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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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간격








熙百 서윤희展 / SUHYOONHEE / 徐侖熙 / painting 2012_1101 ▶ 2012_1110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걸음걸음마다_혼합매체_192×255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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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갤러리 쿠오리아 Gallery Qualia 서울 용산구 남영동 131-1번지 해태제과 1,2층 Tel. +82.2.709.7405





기억의 간격-"시간의 궤적너머의 기억들" ● 얼룩과 번짐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동양화가 서윤희의 개인전 『기억의 간격』展을11월 1일부터11월 10일까지 남영동 크라운제과본사 전시실인 갤러리 쿠오리아에서 연다.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한정과 받아들임_혼합매체_149×213cm_2012

"나의 회화는 시간의 활동이 만든 결과물이다"라고 말한 서윤희 작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녀의 오랜 테마는 '기억의 간격(Memory Gap)'이다. '기억의 간격'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설정하고 재현한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작가의 기억은 때로는 이중적이고, 때때로 모순되는 관계 속에서 표현된다. 즉 초현실(=추상)과 현실(=구상)의 공존이다.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한정과 받아들임_혼합매체_149×213cm_2012_부분

차와 약재들을 우려낸 다양한 재료들을 한지 위에 떨어뜨려 나타나는 그 얼룩과 번짐의 효과는 우연성과 조우한다. 이렇게 생성되는 비정형의 얼룩 면들은 십여 년에 걸친 실제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자연의 풍경처럼 퇴적된다. 이는 작가 스스로 '작업의 유적(遺蹟)'이라 일컫는 것으로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의미를 뛰어넘어 시간과 이후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의 퇴적까지를 모두 가리킨다. 다시말해 협곡의 단층이나 해안의 모래톱이 지각의 변동과 조수의 변화를 형상으로 각인해 나가는 자연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낯섬_혼합매체_94×63cm_2012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기억이 역사(Historia)라면, 작가의 연작에서 다루는 기억은 미시적 차원의 '자전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차원의 거시적 의미를 배제한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작가의 이야기(Her Story)는 '그리움'으로 환원된다. 작가에게 '그리다'는 '그리움으로 대상으로 기억하다'와 동의어다. 회화의 시작 역시 이 그리움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그리움은 작업의 화두로 남아있다. 보고 싶은 것을 그리고, 기억하는 게 본질적인 목적인 것이다.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영원히 정지_혼합매체_94×63cm_2012

작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억'과 '간격'이라는 이질적인 의미를 더함으로써 기억이 시공간적인 거리를 전제로 하는 인간의 행위임을 강변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시간대나 사건의 층위에 속한 기억의 조각들이 파편화된 기억으로 임의적이면서 일관된 허구적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는 비정형의 배경에 윤곽이 뚜렷한 점경인물의 공존을 배치시킴으로써 그림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기억이란 주제에 대한 이런 저런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그녀의 연작들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기억의 간격'을 불러일으키는 시간에 천착해 있는 것이다. 평론가 고충환은 이 '기억의 간격'을 기억과 기억 사이에는 공백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즉, 기억은 결코 원형 그대로 재생되지 않고, 현재의 판단이나 상상력이 끼어들어 그 기억을 각색, 왜곡 하거나 망각하기 때문이다.
서윤희_기억의 간격(Memory Gap)_다가올 시간_혼합매체_94×63cm_2012

바로 이 '기억의 간격'은 작가의 작품에서 비어있는 공간으로 부여된다. 전통 수묵화의 맥을 이어 비어있으되, 실제론 비어있지 않은 여백의 공간.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상상력이 발현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선 비어있는 이 공간을 단순히 '비어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 공간이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기억의 간격'을 드러내는 몸체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켜켜이 쌓인 시간이 불러낸 수많은 이야기가 그대로 응축돼 완성된 추상적 공간인 것이다. 시간의 재구성과 이를 통해 파생되는 시간의 층위와 편린의 간극을 결합해 재구성하려는 작품의 지향점이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관되게 '기억의 간격'이란 주제를 심화하고 다변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온 작가는 오늘 이곳에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생생하게 불러낸다. 단순히 복원에 그치지 않고, 그 기억이 충돌하며 새로이 생성되는 역동적인 현장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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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 dot 인 山水 dot 人






2012_1012 ▶ 2012_1127




구성수_Photogenic Drawing Series-청바지(로빈슨진)_디지털 프린트_2012



초대일시 / 2012_1012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강강훈_강준영_구성수_김동유_김세중 김용호_노자영_박선기_박승모_박은선 변재희_이관우_이길우_이이남_이재효_홍경택

관람시간 / 11:00am~07:00pm

LIG 아트스페이스 LIG ARTSPACE 서울 마포구 합정동 471번지 LIG 손해보험 1층 Tel. +82.2.333.0633 www.ligartspace.com




기억의 점묘, 마음의 산수 ● "음 음 음…" 같은 간격를 유지하고 있는 3개의 동그라미는 단지 3개의 개념을 지시하는 부호가 아니다. 흔히 "말줄임표", "말없음표"라고 불리어지는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마주치면서 생겨나는 어떤 생각의 시작일 수도, 마무리일 수도 있다. 그림 역시 세상에 대한 이 말줄임의 여운으로부터 피어난다. 특히나 동양의 산수(山水)는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현장이나 풍경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된 말없음의 꿈에서 시작되는 서사시 같은 것이다. 풍경화나 산수화나 모두 자연을 바라보고 떠오른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에 대한 근원적인 동경 혹은 향수를 품고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 서술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공간이다.
이재효_0121-1110=112054_나무(체스넛)_118×165×65cm_2012
홍경택_Jonh Lenon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45×145cm_2007
박선기_An aggregate 201103_목탄, 나일론 실 등_270×60×60cm_2011 이이남_신-단발령망금강_단채널 영상_00:05:30_2009 이이남_신-단발령망금강_단채널 영상_00:05:30_2009

화가는 마음 속에서 그 풍경과 하나 되길 갈망하며, 그 속으로 걸어들어 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 길의 시작은 궁극의 미적 이상을 내포한 하나의 점(點)이다. 그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화가는 결국 자신만의 화두(話頭)와 기법과 재료를 통해, 그것이 일상의 풍경이든, 관념의 풍경이든, 말없음의 도(道)에 도달하기 위해 애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을 지켜라.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했고, 노자(老子)는 "도를 도라 말할 수 있으면 그건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말했다. 우리의 협소한 개념과 언어로 광대한 진리를 규정지을 수는 없다. 우리는 '말없음표'로 수많은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변재희_Color Phantasmagoria_캔버스에 유채_220×220cm_2011
김용호_Pian 2011-001_디아섹_295×500cm_2011
노자영_데미안허스트 겸재를만나다_한지에 실크스크린_130×93cm_2007 김세중_공간의 재구성 No.12(초록울림+D10)_ 캔디도료, 알루미늄 망, 아크릴물감, 캔버스_100×100cm_2012

중국 송(宋)나라의 범관(范寬)이 그린 「계산행려도(谿山行旅圖)」는 이런 말줄임표의 무수한 집적을 통해 그 산의 정신, 그 물의 리얼리티를 웅변하고 있다. 범관이 체험과 기억의 혼재 속에서 그려갔을 바위산의 검은 점들과 덩어리들은 우리를 침묵의 도로 이끌고 있다. 그 숭고함의 산수 앞에서 무슨 구차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길우_색을던지다_순지에 향불, 장지에 배접 코팅_134×198cm_2011
강준영_No place like home series-I love you...(Ceramic type 1)_ 도자기에 패인팅_50×50×50cm_2011
이관우_응집_도장, 혼합재료_163×130cm_2012

이번 전시 『산수 dot 인』은 빛점으로, 색점으로 그 열려진 도를 상상하고 기록한 각 장르 16인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점의 행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뉴욕에서 떠올린 조국의 산하와 추억의 얼굴들을 점 하나하나로 응결시킨 '산수 없는 산수화', '얼굴 없는 초상화'라고 한다면, 결국 그들의 그림은 그들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마음의 풍경이며, 우리에게 열어주는 은밀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그룹 동물원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라는 노래 중엔 "음 음 음"의 가사로 넘어가는 중간부가 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첫사랑과의 갑작스런 만남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말하기에 너무 아련하고,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들…. "음 음 음"이라는 3음절에 담겨진 기나긴 추억의 이야기들을 『산수 dot 인』의 그림들 속에서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 『산수 dot 인』
박은선_연속성,무한_대리석_200×54×15cm_2004_부분
강강훈_Lost icon-Black rudolph Ⅳ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09 김동유_Mao zedong (Marilyn Monroe)_캔버스에 유채_194×155cm_2010
박승모_MAYA7657_금속망_178×234×165cm_2012



Poi ntillism of Memory, Shanshui from the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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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한 사람 ONE AND ONE


박진아展 / Jina PARK / 朴眞雅 / painting 2012_1101 ▶ 2012_1121 / 월요일 휴관


박진아_창고에서02 Packing and Checking 02_캔버스에 유채_180×25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210e | 박진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원앤제이 갤러리 ONE AND J. GALLERY 서울 종로구 가회동 130-1번지 Tel. +82.2.745.1644 www.oneandj.com


박진아 – '한 사람과 한 사람'의 분열과 증식에 대해서 ● "창고에서 01"(2012)에서 "창고에서 02"(2012)로의 진행이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는 이번 박진아의 개인전 '한 사람과 한 사람'의 핵심이 된다. "창고에서01"에서 미술품 창고를 배경으로 한 단순한 삼각형 구도 속에 꼭지점으로 여성 한 명, 그 아래 좌, 우에 각각 남성 한 명씩이던 인물의 배치가 "창고에서02"에서는 기묘한 형태로 증식해 있다. 특히 중앙에 눕혀진 캔버스를 끼고 작업중인 남성들이 "창고에서01"에서는 두 명에서 "창고에서02"에서는 네 명으로 늘어나는데, 이들은 얼굴이나 복장으로 볼 때 동일 인물이 두 번씩 앞뒤로 그려져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인물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두 인물의 화면상의 병치는 거울의 반사를 빼고는 현대 회화, 특히 현대 구상화의 계보에 있어서 거의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종의 금기시된 현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특히 사진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구상화의 경우 사진 매체의 특성상 특별한 이유 없이 같은 인물이 두 번 한 화면에 나오는 일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 작가들은 필사본 삽화나 두루마리 그림에 있어서 같은 화면 속 다른 위치에 동일한 대상을 반복해서 그림으로써 이야기를 진행 시켰는데, 박진아의 "창고에서02"에서의 반복된 등장인물들은 별다른 서술구조 속에 놓여있지 않는 듯싶다. 또한 이들을 통해 작가가 모종의 갈등구도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유체이탈을 포착하는 오컬트의 세계를 표상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 순수한 도플갱어들이 미술품 창고 안의 작업에 지장을 주는 일 없이, 그렇다고 해서 초자연이나 갈등 구도를 상징하는 일도 없이 그저 덤덤하게 현전(現前) 하고 있다는 점이 이 기묘한 화면을 충격적이고 신선하게 한다.
박진아_인벤토리 Inventory_캔버스에 유채_130×185cm_2011

사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박진아 작품의 관찰자들은 이 더블 이미지의 전조를 여러 번 목격해 왔다. 우선 그녀가 2004년경부터 사용해온 4개의 렌즈를 가진 로모 카메라의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들. 여기서는 로모 카메라 스스로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장면을 4번 촬영하는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거의 비슷한 이미지 4개가 상하좌우로 4등분 된 직사각형의 사진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이 사진을 다시 캔버스에 옮기는 작가는 사실상 한 화면 속에 같은 인물을 4번까지 재현할 수 있는 구실을 얻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는 배경도 인물과 같이 반복되어 있었으므로, "창고에서02"에서처럼 같은 화면상의 공간 속에 동일 인물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로모 연작 이후 다시 일반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그리는데, 이 때도 작가는 한 장면을 수 차례 촬영한 사진들을 각각 독립된 캔버스에 그리곤 했었다. 예를 들어 퐁피두센터의 영상전시장을 그린 '스크리닝을 기다리며'(2010)연작에서 각각 3개의 다른 캔버스 속에 같은 관람객들이 포즈만 약간씩 바꿔가며 3차례에 걸쳐 등장하고 있었으며, 그 전 '문탠'(2007)연작에서도 일부 등장인물의 위치만 다른 매우 유사한 장면들이 수 차례 반복되어 그려지곤 했다.
박진아_남색 소파 A Blue Sofa_캔버스에 유채_150×210cm_2012

박진아가 일상의 장면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그리는 것은 만년의 마네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조금씩 다른 표정의 루엥 성당을 수 십 차례에 걸쳐 그리거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늦둥이 모리츠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여러 번 화면에 담는 것과 같은 주제나 대상에 대한 집착(파라노이아)의 누적에서 오는 고전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정 반대의 확산과 증식을 지향하는 분열증적이고 발산적인 동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여러 장의 화면을 메워가는 무심한 그리기의 반복을 통해 작가는 동일 인물을 여러 번 그리는 행위에 익숙해져 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관심은 화면 내의 사건들에서 격리되어 점차로 외부로 향한 결과 회화와 외부의 경계로서의 틀에 의문을 던지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 틀에서 저 틀, 이 그림과 저 그림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되는 것이며 그 주체는 누가 되는 것인가. 실제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 찍혀진 사진, 그려진 화면, 또는 작품의 편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과 범위가 교차한다. 박진아의 이 시기 작업에 이면화(diptych)나 삼면화(triptych)가 종종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작가의 회화의 경계에 대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수장고01, 02"(2010)와 같은 이면화나 "남자와 소년 01, 02, 03"(2008)과 같은 삼면화의 경우 다면화(多面?)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나, 전통적 형식의 다면화처럼 각각의 캔버스의 공간이 시각적으로나 서술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하나씩 독립된 비슷한 장면들이 묶여 복수화 된 것에 지나지 않다. 연결된 다면화의 장점이 파노라마를 통한 주체의 시야의 확장이라면, 한 장면의 복수화된 재현을 묶은 다면화의 특징은 단일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편재하는 주체적 시각의 중복성의 인정, 즉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회화적 제도 내로 포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진아_지하실에서 준비 Preparing in the Basement_캔버스에 유채_162×227cm_2012

이러한 시각의 다이나미즘의 인정과 적극적인 적용은 점차 화면 속의 인물묘사로도 드러난다. 이번 전시의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이러한 시도라 할 수 있는데, 우선 같은 인물을 반복하되, 이들이 놓인 배경을 분리 함으로써 한 작품 안에 등장시키는 시도는 "인벤토리"(2011)에서 목격된다. 역시 미술품 창고를 배경으로, 전경에 있는 한 쌍의 여인들은 여러 개의 캔버스가 놓인 선반 너머에 위치를 바꿔 또 다시 재현되고 있다. 일견 작업중인 4명의 여인으로도 보이는 이 화면은 사실상 같은 공간에 묘사된 두 쌍의 인물들로, 같은 장소임을 상징하는 캔버스 선반은 오히려 하나의 축으로써 두 쌍들을 시, 공간적으로 분할하고 있다. 즉, 로모의 4분할 화면이나 캔버스의 프레임등 회화적 장치을 매개로 분리되어있던 시, 공간이 보다 내재적인 틀, 즉 배경의 일부, 회화의 묘사대상이 되어 서술적 맥락 속의 장치로 대체되고 있다. 여기서 이 두 쌍의 여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이 캔버스(회화의 틀)와 캔버스더미가 놓인 선반의 틀이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치 시각적 말장난(pun)과 같이 회화의 틀이 화면의 구조적 틀로 작용하고 있다. "인벤토리"가 "창고에서01", "창고에서02"의 전 단계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러한 임의적 시각 장치의 사용과, 한 쌍을 이루는 여인들의 짝을 스스로의 분신이 아닌 동료로 하고 있는 점등 작가가 분신들의 노골적인 병치를 주저함이 보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장치를 통해 똑같은 분신들을 한 화면에 표현하는 터부를 다루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심리적인 안도감을 마련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에 선행된 시도로 "두 층"(2011)이 있다. 왼쪽 상단의 안경 낀 두 여인은 같은 인물이다. 앞서 제작된 이 화면에는 1, 2층을 분할하는 틀, 보이지 않는 유리 난간의 틀, 전시 벽면과 배경의 틀, 산재된 인물 등 마치 이 돌연변이와 같은 동일한 두 여인의 존재를 수줍게 무마시키려는 듯한 의도적인 장치들이 만재하다. 건축을 빙자한 대담한 화면의 이분할, 색 면의 분할과 복수의 등장인물의 캐모플라지는 상단 중앙의 남성이 마치 놀란 듯이 입을 가리고 쳐다보는 시선만 없었더라면 분주한 전시준비광경이라는 박진아의 최근의 주제 속에 둘로 증식된 동료의 모습을 감추는데 충분했었을 수도 있다.
박진아_6채널 비디오와 남자 A Men with a Six-channel Video_캔버스에 유채_96×110cm_2012

이러한 시행착오 후에 나타나는 분신들의 존재는 보다 확신에 차 있었다. 박진아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경계선인 "창고에서01"과 "창고에서02"를 그리는데 있어서 "전형적인 삼각형구도"를 빌렸다는 것은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인물의 안정된 삼각형 구도는 그 기원으로 성모자상를 꼽을 수 있는데, 특히 라파엘의 '벨베데레의 성모'와 같은 르네상스의 전형에서는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여 풀밭에 앉은 성모의 모습을 삼각형의 틀로 보고, 꼭지점에는 성모의 얼굴, 그 아래 각각 좌, 우에 아기 세례요한과 아기 예수를 앉히는 구도가 정착되어있다. 이러한 삼각형구도는 "창고에서01"의 화면 꼭대기에서 후광 속에 서있는 여인과, 좌측에 사뭇 세례요한과 같은 포즈로 한 쪽 무릎을 굽히고 구부정하게 버티는 모자 쓴 남성, 아기예수의 위치인 우측에 허리를 굽힌 채 동료를 향하는 마지막 남성과 겹쳐진다. "창고에서02"에서 추가된 한 쌍의 남성들은 이러한 삼각의 균형을 부수는 일 없이 각자의 원전(原典) 뒤에 바짝 붙어있는데, 분신들의 대담한 등장이 안정된 가족의 삼각형에 철저히 의지한 이유는 마치 성모자상이 필요에 따라 5명 이상의 성가족상으로 확장되듯 증식된 잉여를 확대된 구도 속에 재구성시키려는 포용의 의지에 기댄 것이리라. 라파엘의 예를 계속하자면 "카니기아니 성가족상"이나 "폴리뇨의 성모"처럼 필요에 의해 성모자상은 성가족상으로 발전하여 도상화된 성인들과 패트론을 회화 내로 편입, 성모의 꼭지점 아래 좌, 우로 늘어선 들러리로 표현하곤 했다. 폐쇄적 가족의 삼각형을 분열시키고 와해시켜 외계로 향하게 하는 가장 고전적인 예이자 패트론을 포섭하는 자본의 논리적 제스쳐임이 틀림없다. 마치 들뢰즈 & 가타리가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적 가족의 삼각형의 폐쇄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분열증적 사회의 진단을 달성하듯, 수평 증식된 존재들의 상징성은 한편으로는 동시대적 증상으로서의 분열증적 증식을 표상하며 한편으로는 정체된 형식으로서의 구상회화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 하다.
박진아_3D안경 3D glasses_캔버스에 유채_91×116.5cm_2012

박진아는 분신들의 증식에 대해 카프카의 『성』에서 주인공 K를 쫓아다니는 한 쌍의 조수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 말하는데, "창고에서02"에 이어 "남색 소파", "6채널 비디오와 남자", "사진촬영"(모두 2012)의 한 쌍의 인물들의 서로에 대한 무관심과 조용한 긴장감, 그리고 일말의 동료의식과도 같이 맴도는 연대감은 소설상의 관계에서 유래한 것이리라. 들뢰즈 & 가타리는 『카프카 – 마이너 문학을 위해서』에서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이 종종 이분화, 또는 삼분화 되어 "가족적인 것을 기원으로 하는 주체의 삼각형화"를 이룸으로써 서로의 관계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한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이들은 카프카의 스토리 전개가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계열(série)속에서의 수열적인 증식(즉 두 명의 조수나 네 명의 여자, 여섯 명의 변호사 등)을 동반한다고 보는데 카프카에서 온 박진아의 증식에 대한 영감이 "창고에서01"에서 "창고에서02"로와 같이 삼각형을 기반으로 한 수열적 증식을 표상하게 된 것은 로모 페인팅에서 복수의 캔버스, 그리고 다면화로 옮겨가며 분열적 재현을 위한 장치를 모색해온 작가에게 있어 카프카의 증식하는 등장인물들이 절호의 맥락이자 의미상의 장치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주어진 하나의 화면 속에 기거하는 증식된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오히려 단일화된 상황, 단 하나의 현실과 장소, 한가지의 맥락이라는 환영에 질문을 던진다. 작가에게 있어 복수의 시각과 다중적 표현만이 보다 현실에 근접할 수 있듯이 주체의 분리를 통해서만 모색될 수 있는 불안정한 자아 또한 존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고에서02"의 미술품 창고, "남색 소파"의 딜링 룸, "6채널 비디오와 남자"의 전시장에 있어서 한 쌍의 분신들은 미술의 현장을 성공적으로 탈영토화 하고 있다. 이는 마치 회화의 소재로 미술의 현장을 그린다는 기묘하게 근친상간적이며 자기언급적 행위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듯 하기도 한데 이들의 존재에 의해 이 장소들은 원래의 기능에서 근본적으로 일탈하여 새로운 맥락으로 이동된다. 기존의 회화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분신들의 등장에 의해 이 곳은 '그려진 것'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해체하고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재고하게 만드는 새롭게 개척된 지평이 된다. 이 공간들에서 일어나는 것은 더 이상 미술의 저장도 판매도 전시도 아닌 주어진 현실에 대한 재고이며 비판이자 불신이다. ● 최근작인 두 명 연작은 이제 마치 로샤시테스트와 같이 보는 주체, 관찰자의 시각을 진단한다. "술 마시는 두 여자", "술 마시는 두 남자", "축구선수들"(모두 2012)의 등장인물들은 더 이상 복제된 분신들이 아니며, 따라서 그 동안 뒤를 돌아보거나 시선을 맞추지 않던 분신들과는 달리 거리낌 없이 정면을 바라보며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외형만 닮은 별개의 개인인 이들에게서 얼핏 더블 이미지를 보듯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표피적이며 찰나적인 주체로서의 나의 시각이다. 이제 증식된 분신의 모습은 내 안에 내재하고 그 내면의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 정신영
박진아_굿바이 Good-bye_캔버스에 유채_154×154cm_2012

Jina Park – on schizophrenic proliferation in 'one and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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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주 투 유 Homage to you


고산금展 / KOHSANKEUM / 高山金 / installation 2012_1101 ▶ 2012_1125 / 월요일 휴관


고산금_민법(802-817page)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97×153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326a | 고산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화~토_10:00am~06:30pm / 일_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GALLERY SUN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82.2.720.5789, 5728~9 www.suncontemporary.com


상실을 보는 눈은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 ● 작가가 꿈이었던 소녀는 어쩌다 보니 문학이 아닌 예술로 밀려 났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눈으로 집어/찍어 삼키는 탐욕적인 독자가 되어 세우지 못한 꿈 가까이 거처를 정했다. 그녀는 읽는 자들의 애독서인 소설, 시, 철학서 말고도 신문, 대중가요의 가사, 법전도 읽는다. 그녀에게 법전은 시취(尸臭)를 풍기는, 삶이 불가능한 글자들의 연옥이다. 마치 그녀는 삶의 비극, 희극의 비옥함 이면에 도사린 불모의 '질서'를 잊지 않으려는 듯 법전을 읽는다. 감정 이입된 글자들, 숭배되는 글자들, 공포의 글자들에 대해 그녀는 동등한 태도를 취한다. 그녀는 취향이나 감수성을 위해 읽는 게 아니다. 그녀는 싫은 것과 좋은 것을 가르는 이의 쾌락이나 욕망을 좇지 않는다. 그녀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들까지, 인간이 독자일 수 없는 것까지도 읽는다. 그녀의 일상적 '애티튜드'는 문자에의 집요함(insistence to the letter)이다. 그녀는 '다른' 곳을 주억거리는 이들의 '여행', 다른 삶을 운운하는 이들의 '만남'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의 여행, 그녀의 만남은 종이에 빼곡히 정렬한 글자들이 연출하는 떠남―그/그녀는 그녀/그를 떠난다―이나 중얼거림―너 나에게 왜 그래?―혹은 침묵에 멈춘다. 그녀의 일상은 읽는 자의 주이상스에 오롯이 바쳐진다. ● 그녀는 거의 먹지 않으며 거의 사지 않으며 거의 살지 않는다. 궁핍과 결핍뿐인 시절이 그녀에게는 길었고 혹독했다. 그녀는 차마 '말'도 견딜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세상의 밑바닥에 오래 체류했었고, 그 와중에 최소한으로 사는 법을 체득했다. 멀리 떠나는 자, 누구를 만나는 자들도 물론 세상을 읽는다. 그러나 그녀는 세상을 읽는데 별로 많은 도구나 장치, 변화를 요하지 않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했고, 그렇게 몸의 확장보다는 몸을 둥글게 안으로 말려 부피를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가'가 되었다. 읽는 자를 위한 (물리적)세계는 딱딱한 나무 의자나 작은 테이블,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한 귀퉁이로 족하다. 책상에 앉기만 해도 세상이 펜 아래로 몰려와 정렬하는 작가들처럼, 책만 펼치면 세상이 그 깊은 신음과 감탄과 고막을 찢을 듯 절규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 이의 고요가 그녀의 일상이다. 그녀는 걷기에 부적합한 다리와 보기에 부적합한 눈과 말하는데 부적합한 머리와 느끼는데 충분한 신체적 결함과 고통에 바쳐진 삶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녀는 세계를 최소로 접을 때 가능한 여행에 굴종함으로써 자신의 결핍과 무능을 환대했다. 나는 아주 어린 소녀가 해질 무렵 신작로를 바라보다가 또는 낮잠을 자고 일어나 둘러본 세상의 불운한 느낌에, 아무튼 아이의 눈물이 헤아릴 수 없는 장면에서 울었다는 이야기나 극심한 불면증에 벽장에 들어가 몸을 접고서 잔 날이 깃털 같다는 이야기를 도대체 왜 듣고 있었는지... ● 이 글은 결국 소녀가 동그랗게 몸을 말아 벽장에 들어가 먼 곳을 바라보며 수 십 년 째 울고 있는, 그녀의 겨우 살아가는 몸에 대한 것이다.
고산금_달에울다(마루야마 겐지작, 40-65page)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 60×45cm×3_2012

세계에 대한 비문자적 체험을 열망하는 자가 예술가라면, 문자에 오염되고 문자에 포획된 세계를 그림으로 재배열하는 중에 미분된(differentiated)된 세계를 전체(holism)로 체험하는 이가 예술가라면, 세계가 시각중심의 체제로 조직화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회화적 이미지에 할당된 위반의 힘이 거의 소멸된 상황에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성이 밖을 향한 문을 거의 닫고 있는 시대에, 그녀는 세계를 읽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가들의 문자적 상상력을 경험하는 데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소명, 결기를 '우선' 할애한다. 닥치는 대로 읽으려는 욕망을 지속하는 중에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완독한 텍스트의 일부분을 자신의 '이미지'로 선택한다. 읽은 부분을 본 부분으로 번역하는 중에, 그녀의 예술가적 상상력, 에너지는 종이와 여백, 글자들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가능성을 모색한다. 세계를 살되 경험의 '잔여'를 이미지로 보존하는 게 예술가의 운명이라면, 그녀는 '자기'를 관통한 삶과 다른 이들이 '글자'에 박은 삶을 섞는 중에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개성을 유지한다. ● 글자들로 된 문장들로 된 페이지들로 된 책을 덮은 뒤 그녀는 작업실 테이블에 앉는다. 작고 딱딱한 나무 의자와 마트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테이블이 그녀의 작업실 메인 풍경이다. 그녀의 작업 도구는 아크릴 물감을 100번 가량 덧칠한 나무 패널, 그 위에 부착된 모눈종이, 직각자, 4밀리 인공진주가 담긴 플라스틱 그릇, 글루건, 핀센트이다. 작업은 아주 단순하다. 읽은 책의 일부분, 자신에게 결정적인 인상을 남긴 부분을 그녀는 필사(筆寫)하기 시작한다. 패널의 크기와 진주가 대체할 글자의 수를 조정하는 데 있어서 그녀는 전문가 급의 감각을 갖췄다. 모눈종이와 직각자의 정확성을 통해 여백을 이룰 패널의 외곽을 조정하고, 몇 줄로 문장을 필사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과학자적인 엄격함을 따른다. 물론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배치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시각적 조형성이나 심미성이다. 그녀는 '모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글루건으로 패널에 글루를 찍고 왼손이 집은 진주를 핀센트를 쥔 오른손이 넘겨받아 글루 위에 붙이는 규칙적 움직임이 서서히 가동되기 시작한다. 그녀의 필사, 그녀의 진주붙이기는 글자의 수와 글자들 사이의 간격을 기준으로 진행된다. 문장의 의미론적 맥락이 사라지고 대신에 형태론적, 시각적 조형성이 나타난다.
고산금_존재의 세가지 거짓말下(아고타 크리스토프작, 50년간의 고독 113-138page)_ 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55×40cm×2_2012

그녀의 작업은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인형에 눈을 붙이는 여자들, 볼트를 조이는 컨베이어 벨트 옆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그렇듯이 극히 협소한 동선 안에서 진행된다. '노동'의 경제성에 맞춘 듯 일상적인 안락함에서는 벗어난, 극히 불편한, 따라서 '노동'에 적합한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잡생각, 딴생각, 기발한 생각이 개입하면 망칠 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에 몰입한다. 글루건에서 패널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이 패턴을 이루며 자동화되는 중에 그녀는 서서히 사라진다. 그녀는 자신을 잃어가고, 두 개의 도구와 두 손의 반복적 리듬만이 공간을 가르며 시간을 채운다-어쩌면 제스쳐로만 채워진 춤이 인간은 동작이라는 전언을 줄곧 증언하는 것일지도. 그녀는 교열사, 조판사, 감정사, 타이프라이터, 캐시어처럼 손만 있는 사람으로 환원된다. 과감한 브러시스트로크도, 창작의 고통과 희열도, 도취와 흥분을 동반하는 영감도, 과거와 현재의 싸움도 그녀를 엄습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을 비우고 운동, 흐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녀의 눈은 캐시어의 계산기처럼 글자의 숫자와 간격을 계산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녀는 없다. ● 그녀의 '반복', 그녀의 두 번째 행위는 텍스트를 지우고 동시에 텍스트를 읽으며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반응했던 자아도 지우는 행위이다. 내용, 서사, 의미, 주체가 사라진다. 대신에 읽을 수 없기에 반응할 수 없는 덩어리, 우글거리지만 고요한 삶(밀집된 진주는 심리적 동요를 일으킨다)의 리듬, 편평하면서도 오들토들한 화면, 읽고 싶은 욕망에 맹인처럼 화면을 더듬거려야 할 것 같은 감각의 교란 혹은 충돌, 나열된 침묵과 침묵에 갇힌 말들의 소란스러움이나 절규의 환영이 나타난다. 조금의 손재주만 있으면, 단순•반복적 노동의 희열을 아는 자라면, 그녀의 작업방식을 놓고 '아이디어' '흥미로운 개념', '잔재주'의 소산이라고 평가할지 모른다. 그녀의 작업은 '아무나' 필사할 수 있는 작업이다. 혹은 수십 년을 같은 일에 종사한 장인들의 근면성실함을 떠올릴 수도 있다. 축적, 확장, 도약, 증폭, 직관, 희열과 같은 예술가의 작업이 관통하는 열정의 언어가 그녀의 작업에는 부재한다. '아무나'할 수 있을 것 같은 노동, '아무나' 증명할 것 같은 근면함과 끈기, 그것이 그녀의 작업을 수공예, 산업노동의 대열에 위치시켜야 할 것 같은 인상을 자극한다. ● 복제, 필사, 반복, 대체, 원본과의 비교 대조처럼 그녀의 작업을 관통하는 단어들은 흔히 포스트모던한 차용(appropriation)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원본을 있는 그대로 반복하는 차용의 실천가들은 주지하다시피 원본/원작의 권위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개념' 미술가들이다. 차용에 근거한 작가들은 창조, 표현, 영감, 작가성과 같은 근대적인 작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 그들은 예술의 권위와 예술의 환상을 제거하는 중에 예술이 복제가능한 상품이 된 사회에서 예술이 어떻게 자신의 신화적 위상을 통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은폐하는지를 묻는다. 고산금의 작업이 일견 차용의 맥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의 작업이 인쇄술의 발명 이후 등장한 '작가'(문자적 상상력)의 신화적 지위에 대한 비판적 전유로 읽힐 수 있는 여지/과잉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작업은 예술에 대한 생각, 성찰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던 미적 전략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예술가들의 작업을 설명해온 심리주의나 표현주의가 부재하는 그녀의 화면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비판이 아니라 명상을 요구한다. 건강한 이들은 지각하지 못하는 내장의 위치를 통증이 드러내듯이, 그때 나의 일관성이 무너지고 의식이 불안을 겪듯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슬쩍 제 자리에서 벗어나 산란하기 시작한다. 있음과 없음, 부재와 현존, 침묵과 소란 사이에서.
고산금_인생사용법 1부(조르주 페렉작, 1부 15-146page)_ 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34×26cm×36_2012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예술가의 전 과정 중 말하자면 결론, 마침표 같은 것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안다고 기만하거나 모르기에 '예술가'를 숭배한다. 고산금의 작업은 작업의 방식, 작업에 사용된 오브제나 기법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업은 작가의 과정에 대한 '신비'를 유발하지 않는다. 신묘한 기법도, 기발한 배치도, 놀라운 도약도, 공정의 비의도 없다. 대신에 그녀의 작업은 왜 '노동자'처럼 지루하고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지속하는가, 를 묻게 한다. 그녀는 게으른가? 단지 자신이 읽는 사람이라는 일상적 사실을 기록하려는 것인가? 그녀는 미학적, 조형적 새로움을 통해 자신을 배반해야 하는 작가의 운명을 외면하고 대신에 진주작가라는 아이콘, 닉네임에 만족한 것인가? 책을 읽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하고, 일상의 대부분을 작업실에서 진주붙이기에 천착하는 작가의 집요함은 어떤 미학적 논리를 따르는 것인가? ● 그녀는 계속 뭔가를 숨기려 한다. 언어가 가리키는 세계, 문장의 지시체를 진주라는 동일한 오브제로 대체하고, 자신이 읽으면서 본 것을 읽힌 것의 자리로 대체하면서 결국 자신이 '본' 것을 감추려 한다. 우리는 그녀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가 읽은 것의 형식적 수열성, 순차성을 놓고 추측해야 한다. 캡션으로 명기된 원전의 그 부분을 읽은 들, 우리는 그녀가 본 것,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망막에 작가의 글자가 어떤 이미지를 걸었는지 알 수 없다. 숨긴 것이 있다는 알리바이, 보았지만 감추겠다는 의지, 현장의 지표(index)로서의 진주. 그녀는 진실, 증거, 사실, 봄, 확인과 같은 눈의 작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법(전)의 존재론, 사람들의 관계가 강화되거나 훼손되는 인식의 구조에 대해 자신의 읽기의 경험을 갖고 성찰한다. 마음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기에 증거를 통해 지속되는 삶의 형식 중 가장 취약하다. 마음은 법전에 기록될 수 없는 타자, 말하자면 법전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이고, 마음은 관계를 지속시키면서 훼손시키는 사이이다. 그녀는 본 것의 정확성, 본 것의 우선성이 어떻게 관계를 망치게 되는지를, 본 것 전부를 망치고 본 것 전부의 눈을 지우는 행위로 재연한다.
고산금_인생사용법 2부(조르주 페렉작, 2부중 146-279page)_ 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34×26cm×36_2012

우리의 시각(적 읽기)은 논리적 순서, 시각적 도식을 따라 진행된다. 보기는 거의 대체로 '두번째'의 행위이다. 보기는 이미 항상 도식에 갇혀 있다. 최초의 보기는 시각의 틀로 인해 불가능하다. 우리는 본 것을 본다. 보기는 대상, 세계, 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기의 틀에 대한 보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 뜬 장님, 못 보는 자이다. 눈은 동물적인 기능, 감각적 기능을 상실하고 차이를 읽는데 실패한 채 제대로 정확히 보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우리의 눈은 세계라는 놀람, 경이, 공포와 두려움에는 반응하지 못한다. 고산금은 읽고 보고 확인하려는 '눈'의 욕망에 저항한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읽은 것의 정확성, 가독성(literacy), 가시성(visibility)을 지운다. 그녀는 자신의 시각이 닿았다가 돌아온 것의 자리는 보존하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지워버린다. 우리의 보기와 읽기는 늘 눈의 집요함, 시각적 도식의 재확인에서 멈춘다. 선사는 늘 제자에게 물었다. 네가 본 것이 정녕 네가 본 것인가? 뭘 못보고 보았다고 너는 확신하고 집착하는가? 그러므로 본 것은 못 본 것이고 보기는 상실이고 보는 중에 우리는 거의 대부분을 잃는다. '그것'을 보는 자, 그것이 무엇인지를 본 자의 자리를 대체한 '은유'는 그러므로 장님이다. 태어날 때부터 실명한 맹인은 눈 뜬 장님들의 보기에의 집착이나 실수, 상실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장님의 은유이다. ● 고산금은 15년 전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채로 실명했었다. 몇 개월을 눈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았고 그 뒤로는 실루엣만 보이는 몇 개월, 뿌옇게 보이는 몇 달을 지나 지금 그녀는 '정상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보충하고 잠식하고 교란하는 당신처럼 언제나 현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타자이다. 그녀의 시신경은 시각적 도식에 근거한 세계와의 만남이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늘 확인시키는 내부의 무능이다. 그녀는 손으로 보고, 코로 보고, 몸으로 보는 법을 배우는 중에 눈으로 보는 법, 조건반사적인 보기의 유능을 잃었다. 온 몸으로 기어가거나, 절룩거리면서 가거나 더듬어서 찾아내는 불구의 제스쳐는 눈으로 보고 다리로 걷는 자들의 유려함 사이에서, 풍경을 어지럽게 흐트러뜨리면서 다른 존재와 다른 삶만이 증언하는 인간적 진실, 겸손, 유약함을 가시화한다. 그녀는 그렇게 이편의 사람들에서 밀려나 저편의 풍경으로 들어갔다. 은유로서의 장님의 삶을 온 몸으로 직접 살아내야 했던, 이편과 저편을 살아서 왕래했던/하는 이의 세계를 나는 '알' 수 없다. 고산금은 본 것과 읽은 것, 남은 것과 사라진 것 모두에 대해 증언하려고 한다. ● 이번 전시 제목으로 고산금은 '오마주 투 유'를 선택했다. 당신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 있다가 없어지는 것들, 읽히는 중에 사라지는 것들, 내 손을 잡고 저편으로 인도했던 당신, 거기에 있어서 내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당신, 거기서 여기로 늘 오고 있는 당신, 만났으니 헤어지는 우리, 헤어질 줄 알면서 만나는 우리, 그러므로 비극을 기다리는 우리,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당신의 놀람과 기적과 그러므로 슬픔에 대한 존경과 감사. 몸을 동그랗게 안으로 오므리고 여기서 눈을 지운 채 기다리는 자의 긍정. 떠나는 역할은 맡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앉아서 시간을 세어가며 패널을 메우는 결기와 고요. 당신은 오지 않을 것이고 왔다 한 들 온 것은 아닌 게다. '왔고 갔다'는 눈의 교란, 확신, 착란일 뿐이다. 너는 오지도 가지도 않는다. 너는 찾을 수 없는 자리, 너인 줄 모르는 나의 심연, 내 안에 동그랗게 오므리고 있는 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삶의 찬란한 은유는 기다림, 오고간 것의 증거와 무관한 약속과 신의, 기다림의 무위(無爲)까지 도달해 있다.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의 노동,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중의 침묵을 재현한다.
고산금_운명애(프르드히 니체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자유로운 죽움에 대하여, 무덤의 노래 107-111page, 124-128, 192-197page)_ 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80×120cm_2012

이번 전시는 조르주 페렉의「인생사용법」을 2부로 나누어 72개의 패널로 필사하는 '노동'을 기점으로 그녀의 작업에서 그녀도 모르게 일어난 변화가 세 점 포함되었다. 허물어져 가는 건물을 지나다 그 건물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해내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삶을 입혀 준 페렉의 대작에 대한 그녀의 화답은 은둔한 이들이 찾아낸 고독, 고통, 희열, 슬픔에 대한 오마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인생에 끌려가고 팔자에 사로잡힌 삶의 희극과 비극을 인생이란 매뉴얼의 사용방식의 차이로 번역한 페렉의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확인했다.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거해 자신의 삶을 반복 - 그리고 나누고 꿰맞추기 - 에 제한하려 했던 '바틀부스'의 주체적 능동성이 종국에는 우연에 의해 실패하게 되듯이 고산금 역시 세계를 살아내기 보다는 세계를 자신의 방식으로 구성, 조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 페렉의「인생사용법」에 대한 필사까지는 지난 번 전시와 같은 기법이 반복되었다.「운명애」,「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dispossessed」는 형식면에서 기존의 작업과 확연히 다르다. 캡션은 인용, 필사된 텍스트를 명기하고 있지만 이제 화면은 평면이 아니라 삼차원의 공간성을 갖추면서 '책'같은 패널 대신 허공을 채우는 박스들로 대체된다. 상자는 감춘 것, 비밀의 존재를 가리키려는 그녀의 일관된 제스쳐를 더 증폭시키고 가시화한다. 안에 무엇인가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없다. 박스는 감춘 것이 있다는 인식의 도식을 복기하게 함으로써 열어보려는 욕망을 자극한다. 비밀은 우리의 삶이 거기서 거기이듯이 이미 우리가 들었던 것,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비밀은 아무 것도 아니고 심지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상자를 열어보고 싶은 욕망은 비밀의 지위를 지속시키는 착란이다. 우리는 한 번 더 알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중에 직전처럼, 지난번처럼 망치고 붕괴된다. ● 그런데 작가는 상자를 재현하되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상자의 모습을 같은 화면에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시각적' 이미지, 환영으로서의 이미지의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 같은 것이 움직임, 운동성으로 인해 달라질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상자인가, 상자가 방편이 된 움직임, 흐름, 운동인가? 심지어 허공을 장소로 정한 상자는 주사위로도 보인다. 인간의 손을 떠난 주사위의 어느 쪽이 위쪽이 되어 떨어질지는 오직 저 우연한 운동만이 결정할 것이다. 그녀가 상자, 주사위, 우연, 착시, 운동성에 대한 집요한 명상을 시작할 때 선택한 텍스트가 니체였다는 것은 대단한 우연이고 기적이다.「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부를 필사하는 중에 저 유명한 '운명애'(amor fati)에 대한 부분에서 그녀는 주사위 형상을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오래전 소녀였을 때부터 외로울 때면 종이에 끄적거렸다는 상자가 결국 니체의 운명애를 만나면서 튀어나와 제 형상, 목소리, 자리를 발견한 것일까?
고산금_너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해(프르드히 니체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12-120, 192-206page)_나무패널에 아크릴채색, 4mm 인공진주, 접착제_80×168cm_2012

새로운 작업은 다음 전시에서 구체화될 것이고, 기다리는 중에 우리에게 이미 와 있는 '다음 번'은 제 자리를 찾아내고 몸을 동그랗게 오므릴 것이다. 결정적인 장면은 결정적인 문장으로 압축된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당신은 아이스크림(의 삶)만큼 아슬아슬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곧 녹아내릴 아이스크림의 운명만큼 아슬아슬하다. 아이스크림에 사로잡힌 당신은 혀이고 입이다. 아이스크림에 맞춰 당신은 축소된다. 사로잡힌 존재는 머리도 생각도 계산도 할 수 없다. 당신은 '디스퍼제스드', 무언가에 사로잡힌 딱 그만큼 실존한다. 그것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을 갖고 놀이하는 인간의 형상이다. ● 궁핍과 고통, 무능에 있어서 '대가'인 그녀가 전하는 삶에의 긍정, 그것이 어떤 것이건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환대. 그녀는 우는 자, 슬픔을 보존하는 자, 너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단 한 번도 잊지 않은 겸손한 자의 자리에 계속 머무르려고 하는 것 같다. 동그랗게 몸을 말아 제자리를 떠나지 않는 운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중에! ● P.S.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9월 말경 그녀는「피에타」를 보았다. 그녀는 통화 중에 '미안하다'고 말했다. '누구에게요?' 작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불운과 불행 중에도 그녀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의지'보다는 손이 닿는 거리에 진주라는 제품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진주를 만들어 내는 이들, '노동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김기덕 감독이 10대 시절을 보낸 청계천 노동자들에게「피에타」란 작품을 통해 어떻게 '존경과 감사'를 보내는지 확인했고, 동시에 그녀가 철강의 시대 제일 밑바닥에 배치된 이들의 여리고 고운 마음을 복원해내는 김기덕의 겸손과 그녀가 거기에 화답해 미안하다고 한 말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을 깨달을 때, '당신'이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고 느낄 때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안해는 사랑해를 더 낮은 자리에서 필사한다. 미안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산인 절망, 수치, 서러움을 동글게 몸을 오므려 안에 품고 있다. 그 말은 자주 사랑한다의 지위로 올라가지 못한 채 미끄러져 고백하는 자의 눈물을 타고 흐른다. ■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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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e Back


2012년 하반기 창동창작스튜디오 국제교류프로그램 결과展 2012_1101 ▶ 2012_1125


유리 크루착_Dotted Lines of Move_비디오_00:03:05_2012

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4:00pm

참여작가 Pavitra Wickramasinghe(캐나다)_Elif Süsler(터키) Tao G. Vrhovec Sambolec(슬로베니아)_Ištvan Išt Huzjan(슬로베니아) Yuriy Kruchak(우크라이나)_Shin-young Park(뉴질랜드) Ashutosh Bhardwaj(인도)_Sharmi Chowdhury(인도) Krupa Makhija(인도)_Tony Law(홍콩)

기획 /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문화창작스튜디오팀

관람시간 / 10:00am~06:00pm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Changdong Art Studio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서울 도봉구 창동 601-107번지 Tel. +82.2.995.0995 www.artstudio.or.kr blog.naver.com/cd_artstudio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이 운영하는 창동창작스튜디오는 하반기 창동창작스튜디오 국제교류프로그램 결과전 『Trace Back』을 오는 11월 1일(목)부터 11월 25일(일)까지 창동창작스튜디오에서 25일간 개최한다. ● 상반기 『On The Road』에 이은 이번 전시는 국립창작스튜디오가 추진한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 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 프로그램」 등 국제교류 프로그램에 참가한 작가 10명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동유럽간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슬로베니아와 우크라이나의 미술기관의 추천을 받은 젊고 유망한 미술작가들을 초청하여 양국간의 현대 미술 교류 및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유리 크루착 ● 「Dotted Lines of Move」에는 철판 위에 올라선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주변을 더듬어 나간다. 철판의 울림 속에서 움직임의 중심에 선 주인공은 오로지 자신의 힘만을 이용하여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파악하게 된다.
이슈트반 이슈트 후지안_Photocopy Book of Korean Early Arte Povera and Landart_책_30×21cm_2012

이슈트반 이슈트 후지안 ● 작가는 레지던시 기간동안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한국의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의 자취를 추적했다. 자신의 예술적 근원이라 여기는 슬로베니아의 예술 그룹 OHO와 20세기 후반 한국미술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한 그는 아르코미술관 아카이브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엮어 자신만의 책으로 만들었다. 총 2권이 제작된 이 책자는 한국에서 전시되는 동안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현대미술관(Moderna galerija, Ljubljana)에서도 동시에 선보인다.
타오 G. 베로베츠 삼볼레츠_Caressing The Studio (bed, table, window, chair)_ 멀티채널 사운드 설치_00:60:00 반복재생_2012

타오 G. 베로베츠 삼볼레츠 ● 「Caressing The Studio」를 위해 작가는 스튜디오에 있는 가구와 창문의 표면을 녹음기를 가지고 훑고 지나가면서 자신이 머물렀던 공간과의 내밀하고 물리적인 관계를 기록했다. 4대의 스피커에서는 각각 침대, 책상, 창문, 의자를 녹음한 소리가 매우 작게 흘러나오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피커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대고 소리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엘리프 쉬슬러_A Bed Time Story_신문지, 금속철망, 나무집게, 애니메이션_가변설치_2012

엘리프 쉬슬러 ● 「A Bed Time Story」는 그림형제의 우화'브레멘 음악대'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작가는 우화에 등장하는 상상속의 인물들을 한국과 터키의 신문을 비롯해 작가가 서울에서 직접 찍은 사진들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철망에 일일이 꿰매어진 하이브리드 생명체들은 나무집게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벽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개별 이미지들과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연출하면서 동화의 현대적 해석을 가능케 한다.
파비트라 위크라마싱헤_Gone_비디오/스탑-모션 애니메이션_00:06:33_2012 Sound by Ida Grandas-Rhee

파비트라 위크라마싱헤 ● 「Gone」은 창동창작스튜디오 근처에 위치한 초안산에서 찍은 사진들로 만들어졌다. 우거진 숲속에서 수세기 동안 풍화된 오래된 무덤과 비석들을 발견한 작가는 도시 속에 존재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잊혀진 것들을 주목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주인없는 무덤과 비석 위로 따뜻한 시선을 던진다.
박신영_Untitled_도자기, 나무, 스폰지, 한복천_210×210cm_2012

박신영 ● 「Untitled」은 한복천과 500개의 도자기 공으로 만들어진 '볼풀'이다. 이 볼풀은 도자기로 만든 공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들어가 놀이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단일민족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으로 인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겪는 차별과 고통을 은유한다.
샤르미 초두리_The Slow Fire_종이에 잉크_152×52cm_2012

샤르미 초두리 ● 레지던시 기간동안 작가는 한지를 가지고 인체 형상의 조각을 제작하였다. 가볍고 다루기 쉬운 종이의 물질성은 내용물 없이도 형태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피부를 대체한 종이의 부서지기 쉬운 성질은 삶과 죽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상징하며, 공중에 매달린 형태는 초월성을 의미한다.
아슈토쉬 바르드와지_Lessons_천에 아카이벌 프린트, 실, 아크릴 물감_213×152cm_2012

아슈토쉬 바르드와지 ● 다양한 매체들이 쏟아내는 대중문화 이미지에 꾸준히 초점을 맞추어 온 작가는 레지던시 기간동안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섭렵하고 수천 장의 영화 스틸 컷을 이어붙여 작품을 제작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엄청난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급속한 경제적 발전을 이룬 한국이란 나라가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한다.
크루파 마키자_Untitled_종이에 혼합재료_69×84cm_2012

크루파 마키자 ● 「Untitled」는 전쟁 이후 남겨진 것들에 대한 작품이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 독립 때 가족들과 함께 이주한 경험이 있는 작가는 전쟁과 관련된 이미지들을 가지고 추방과 이주에 대한 작품을 제작했다. 작가는 서울에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공유한 것들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자 했다.
토니 로_Collection(Seoul)_컬러 레이저 프린트_가변설치_2012

토니 로 ● 토니 로는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저작권 없는 이미지들을 수집해 일정한 A3 크기로 출력하여 제시한다. 현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내보이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벽과 같은 물리적 공간을 뒤덮고 물리적 공간의 일부가 된다. ● 지난 3~5개월여 기간동안 창동에 거주했던 다양한 국적(캐나다, 뉴질랜드, 홍콩, 터키, 인도, 슬로베니아, 우크라이나)의 작가들은 한국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문화적 차이 및 유사성을 추적하거나 자신만의 창작적 근원을 새롭게 탐색하였다. 입주기간 동안 작가들이 만들어 낸 예술적 궤적을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시와 함께 개막식 당일에는 스튜디오 개방, 작가 프레젠테이션 및 전문가 비평 프로그램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전시와 프로그램에 관한 보다 자세한 정보는 창작스튜디오 홈페이지 www.artstudio.or.kr을 통해 얻을 수 있다. ?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의 국제교류프로그램이란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는 국내작가 창작활동 지원 외에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지원프로그램」 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등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 유럽 등지의 유능한 작가들에게도 공간지원을 통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동유럽간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젊고 유망한 미술작가들을 초청하여 교류의 폭을 넓혔다.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 아시아의 한류문화를 지속ㆍ성장시키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매년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작가를 선발하여 창작활동을 지원해왔다. 2005년부터 시행된 '아시아작가초청프로그램'을 2008년부터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으로 대상 국가를 확대하여 입주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 1994년부터 UNESCO 국제문화진흥기금을 통해 운영되어온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에 2006년 한국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연수기관으로 참여하여 시각예술 분야에서 외국작가 2~3명을 선발ㆍ지원하고 있다. 동유럽 3개국 수교20주년 기념초청 2012년 한국과 동유럽 3개국(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슬로베니아)간의 수교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해당 국가의 유수한 미술기관으로부터 추천받은 작가들을 초청하여 문화 교류의 폭을 넓혔다.

부대행사 개막행사 - 일시: 2012년 11월 1일(목) 오후 4시-8시 - 내용: 스튜디오 개방, 작가 프레젠테이션 및 전문가 비평 * 04:00pm 스튜디오 개방 장소_개별 스튜디오 / 세부내용_개막 당일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공개하여 작업과정을 소개 * 05:00pm 작가 프레젠테이션 및 전문가 비평 장소_강연장 / 세부내용_입주 기간동안의 작업 활동을 소개, 이에 대한 평론가 및 큐레이터의 의견을 공유 * 07:00pm 리셉션 장소_창동스튜디오 / 세부내용_참여작가 및 방문자 교류의 시간 전시설명 프로그램 - 일시: 전시기간 내 평일 오후 1시 - 내용: 전시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전시해설 프로그램 - 대상: 일반인 및 단체(단체는 사전접수) 접수 및 문의: 창동스튜디오 박희정, 02-995-0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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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키소스의 현미경


강효진展 / KANGHYOJIN / 姜孝陳 / painting 2012_1101 ▶ 2012_1128


강효진_겁많은 토끼는 굴을 여러개 준비한다_캔버스에 유채_112×162.2cm_2012

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5:00pm 초대일시 / 2012_1115_목요일_05:00pm

2회 성남문화재단 신진작가공모 수상작가 개인展

2012_1101 ▶ 2012_1107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_10:00am~06:00pm

UNC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58-13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2012_1115 ▶ 2012_1128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성남아트센터 본관 SEONGNAM ARTS CENTER MAIN GALLERY 경기도 성남 분당구 야탑동 757번지 본관 2실 Tel. +82.31.783.8141~6 www.snart.or.kr


실존의 풍경으로서 집 ● 강효진의 작업은 집을 구축해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집은 요새나 거대한 성채가 아니라 강효진 자신의 존재를 대상화 한 것이다. 따라서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흔적들이며 정서의 울림이다. 강효진은 또 자신의 집을 만들어 가면서도 그것을 다시 해체하고 싶은 욕구를 보여준다. 완성된 집은 성취와 안전을 보장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이전의 자신과 결별한 듯한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그가 주로 표현하는 구두, 망원경 등의 인공물들이나 말벌집, 토끼굴, 누에고치 같은 자연물들도 그에게는 집이다. 다만 인공물의 집은 그가 사회 속에서 구축하여야 할 낯선 집들이고 자연물들은 그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모태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강효진의 집은 실존의 풍경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시간이 본래적으로 흐르고 있다. 집들은 시간이 머물다 간 자리인데, 강효진은 그러한 시간의 흐름을 뒤섞어 놓고 있다. '과거-현재-미래'의 시간들이 뒤엉켜 복잡한 양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집들은 개인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추억과 상처, 잊혀진 꿈과 동경, 미래의 불안들이 숨어있는 것이다.
강효진_어려운 결정_캔버스에 유채_112×162.2cm_2012
강효진_찰나의 안식처_캔버스에 유채_112×162.2cm_2012

강효진은 이번 전시에서 개인의 복합적인 심경들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된 대상들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들은 화면 속에서 돌출되기 보다는 화면 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세상으로 과감하게 나아가기 보다는 아직 숨어있고 싶어 하며 자신을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효진의 집들은 아직까지는 자신을 은폐하는 도구들이다. 그렇지만 강효진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구두는 그러한 '집'에 대한 강효진의 심경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여기서 구두는 욕망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기울어진 또는 얽혀진 시간에 대한 상징이다. 다른 대상물들 특히 인공의 대상물과 구두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톱니바퀴, 망원경, 풍선들과 달리 구두는 신체의 한 부분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강효진_위장된 질서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강효진_숨바꼭질#1_캔버스에 유채_130.3×162.2cm_2012

강효진의 구두는 어쩌면 인공물과 자연물의 중간 상태일 것이다. 단순히 도구로 이용되는 인공물과, 또 우리가 시선을 주기 전까지는 삶속에 버려지거나 숨겨져 있는 자연물들과는 달리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의 비뚤어진 욕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의 몸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따라서 강효진의 구두는 '낯섦'과 '친숙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구두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과 돌아가고 싶은 길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두는 강효진의 현재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해주며 혼란된 시간을 정리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강효진_막연한 동경_캔버스에 유채_112×162.2cm_2012
강효진_외톨이의 우주_캔버스에 유채_97×162.2cm_2010

강효진의 집은 결코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그 집은 강효진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 풍경을 담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지어졌다 부서지는 집들은 우리의 삶처럼 부질없을 수도 있다. 다만 그래도 우리의 집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흔적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강효진의 집들은 그렇게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 김진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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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아트센터 1주년, 1갤러리 개관기념 특별展 2012_1101 ▶ 2012_1130





신정필_생각의 균형을 위한 디자인 1_나무, 퍼티_69×96×12cm_2011




기념식_축하 연주회 / 2012_1101_목요일_07:00pm

참여작가 / 신정필_오정선_이도연_이이정은_이효연_허보리

관람시간 / 10:00am~06:00pm

1갤러리 1GALLERY 서울 서초구 방배동 851-4번지 유중아트센터 4층 Tel. +82.2.537.7736,7746 www.ujungartcenter.com www.1gallery.org





신정필은 사물의 본질과 지각과의 관계, 그리고 사물들 간의 관계성에 대한 탐구를 조각 및 설치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상의 사물에서 드러나는 기능성, 장식성 등을 제거시켜 사물 고유의 외형만을 남긴 채 이를 조형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오정선_The Moment_제작된 음반, 음악장치_10×22×22cm_2012

오정선은 '사람들의 시각_ 그것이 만들어내는 어떤 것'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바탕으로 일상에서 매 순간 맞닥뜨리는 사물, 사건, 공간, 그리고 타인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한 고찰을 영상 및 설치 작품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도연_The existence_벽에 목탄_300×497cm_2012

이도연은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이 지닌 자연에 대한 경험을 자연의 푸르른 생명력과 아름다움으로 표현해오고 있다. 특히나 이도연은 유중아트센터 내에 위치한 카페 드 유중 '2012 월 프로젝트' 전시작가 출신으로 전시기간동안 방문객들에게 뜨거운 호응을 받은 참신한 실력파 신진작가이다.
이이정은_Somebody else's monument 201001_캔버스에 유채

이이정은은 보여지는 '이미지'와 '소비'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대형마트에서 창출되는 소비적 이미지로 대체하여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동일한 상품이나 패키지의 집적, 또는 여러 개의 캔버스를 나열하여 만든 비정형의 캔버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효연_Empty_캔버스에 유채_112×145.5cm_2010

이효연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상황, 그리고 배경으로서의 도시 등에 주목하여 하루하루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일상의 오늘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허보리_Dreaming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2

허보리는 일상의 언어 속에 들어있는 비유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서로 어울리지 않는 배경과 사물의 조합을 통해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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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Drawing 19_돌연변이의 왕국 Kingdom of Mutation








다발킴展 / DABALKIM / drawing.installation 2012_1102 ▶ 2012_1118 / 월요일 휴관





다발킴_미혹 Delusion_철, 스테인리스 스틸, 욕조, 동물가죽, 오브제_2800×1500×8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111i | 다발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1_목요일_05:00pm

주최,주관 / KSPO(국민체육진흥공단)_SOMA(소마미술관)

관람료 성인, 대학생_3,000원(단체 1,500원) / 청소년(13-18세)_2,000원(단체 1,000원) 어린이(12세 미만)_1,000원(단체 500원) / 단체 : 20인 이상 『몸의 사유』展 관람시 무료관람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소마드로잉센터 SOMA DRAWING CENTER 서울 송파구 방이동 88-2번지 소마드로잉센터 전시실(제5전시실) Tel. +82.2.425.1077 www.somamuseum.org





국민체육진흥공단 소마미술관(이성순 명예관장)은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드로잉 전시를 지속적으로 이슈화하고자 매년 작가공모를 실시하여 최종 선정된 작가들의 전시회를 "Into Drawing"이란 이름으로 개최합니다. 올해는 2011년도 드로잉센터 작가공모에 선정된 작가 3인의 개인전으로 진행됩니다. 두 번째 전시로 11월 2일부터 11월 18일까지 개최되는『Into Drawing 19』는『돌연변이의 왕국 Kingdom of Mutation』이라는 부제로 다발킴의 드로잉, 설치 작업을 선보입니다. 다발킴은 친숙한 사물을 생소하고 엉뚱하게 배열하여 돌연변이를 탄생시킵니다. 식물적 동물적 변이를 실험하고 기록한 고고학이나 자연과학을 연구한 드로잉들처럼, 작가만의 잠재된 고고학적 정물화를 표현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드로잉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개성과 상상력 그리고 드로잉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과 실험정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본 전시는 소마미술관 메인 전시(런던올림픽개최기념_『몸의 사유』)와 함께 관람 가능합니다. ■ 소마드로잉센터
다발킴_왕국 정복자 Kingdom Conqueror_종이에 잉크_130×170cm_2012
다발킴_수탉을 품은 모나리자 Holding a Rooster in Mona Lisa_종이에 잉크, 컬러마카_77×56cm_2012
다발킴_수탉 머리의 여자 Woman of Cock Head _종이에 빨간 잉크, 컬러마카_47×39cm_2012

고고학적 정물화 ● 현대미술작품과 고대유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가지 전시품을 각각 기획하고 전시연출하는데 주안점은 무엇일까? 비슷한 듯 다른 두 뮤지엄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발 킴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데, 필자는 평소에 두 뮤지엄의 자료 연구시스템, 전시메커니즘을 적절하게 상호 보완한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다발 킴의 작품은 새로운 과거를 발굴하여 스토리를 입히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 작품의 첫인상은 동물의 그로테스크적 표현, 많이 그리기, 박물관 전시연출 등으로 요약되는데 다분히 자의식(自意識)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동물의 몸을 통해 생명, 자연(사막), 문명(기계)의 유동(flowage), 순환(circulation)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예사롭지 않은 건, 작품의 시각적인 것 보다 저변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개념)과 에너지 때문으로 확신한다. 이번 전시로 작가를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이 평면 작업만 하는 작가와 다른 에너지를 느꼈는데, 그것이 프로젝트 디렉터 및 큐레이터 활동이다. 뉴욕에서의 큐레이터 경력(2003~5), 두 번의 국제사막프로젝트(International Desert ArtProject / 몽골, 미국) 디렉터 경력(2006~9), 상하이엑스포 큐레이터 경력(2010), 오스트리아 코스타리카 레지던시, 워크숍 참가 등 작가 그 이상의 열정으로 활동한 이력들이다. 그것은 다발 킴에게 큰 장점으로 기존의 작품을 '재맥락화'(인식의 틀을 바꿈)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 손성진
다발킴_비밀의 컬렉션 Secret Collection_설치_236×538cm_2012
다발킴_달콤한 세상 Sweet Society_종이에 잉크펜, 칼라마카_65×55cm_2012
다발킴_Into Drawing 19_돌연변이의 왕국 Kingdom of Mutation展_소마드로잉센터_2012




드로잉 단상 ● 생각이 생각을 부르고, 친숙한 것인데 생소하고 엉뚱한 배열과 관계를 이룬다. 모든 것을 컬렉션한다. 꿈에서 보았던 늘 이방인의 모습으로 던져진 나 자신과 그 주변의 것들까지도 박제한다. 그것을 다시금 만져보고 느껴보고 싶을 때를 대비하고자, 해부하고 박제하는 일이 나의 작업에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오래된 것, 흔적, 시간의 나침반이 뒤로 돌아간 오랜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꾸며낸 허상을 미래의 돌연변이처럼 각색한다. 알 수 없는 과학적 명칭들, 식물적 동물적 변이를 실험하고 기록한 고고학이나 자연과학을 연구한 드로잉들처럼, 난 이것을 나만의 잠재된(혹은 이상한)정물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의 누군가에 의해 분류되고, 체계가 세워지고 필수목록의 것들을 처절한 나의 방식으로 다시 해체한다. 보았던 비전을 다시 폐쇄시키기도 하고, 억압된 것들의 촉매를 다시 희석시켜 버리기도 한다. ● 논리와 설명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그린다. 나의 작업들은 불완전한 객체로 이어져 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창출하듯 몽상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내러티브적 메커니즘의 서사적 구조를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상징과 메타포가 가득한 실재와 신화, 현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부단히 방황하는 가운데 지금 현실 밖으로 밀려나와 덩그러니 서 있게 되는 것이 나의 드로잉이다. ■ 다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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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ata No. 14 in C sharp Minor'quasi una fantasia' Op.27, No2"Moonlight"






유재연展 / YOOJAEYEON / 柳在淵 / drawing 2012_1105 ▶ 2012_1114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60×60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KOREA SAFETY DESIGN LAB CEO CHOIJUNGSU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한옥 GALLERY HANOK 서울 종로구 가회동 30-10번지 Tel. +82.2.3673.3426 galleryhanok.blog.me




그것은 낙서로 시작되었다. // 공간은 나의 것이었으나 /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고, // 인간은 모래알처럼 많았으나 / 사람은 손가락 사이로 / 빠져나가는 모래조각 들이었다. // 나의 낙서는 / 분노가 되고 / 욕망이 되고 / 치유가 되어 // 당신의 눈을 통해 읽혀지고 삼켜져 / 이내, 내면을 어루만진다. ■ 김초희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60×60cm_2010

Yungchen Lhamo- Gi pai pa yul chola 도스토예프스키(Dostoyevesky)- 악령(Besy, 惡靈)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14.5×12.5cm_2009

Beethoven- Sonata No. 14 in C sharp Minor'quasi una fantasia' Op.27, No2"Moonlight"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14.5×12.5cm_2010

Chopin- Nocturnes Op.9 No 1 in B Flat minor 기쁨과 슬픔은 찰나이며, 세상은 허무와 회의의 덩어리다.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14.5×12.5cm_2011

Mozart- Zaide, Aria, Ruhe Sanft 발밑에 흐트러진 쓰레기와 낙옆들, 언제부터인가 그들은, 떨어짐과 버려짐으로 세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14.5×12.5cm_2012

일그러져 있는 것인가. 다른 시선이 일그러뜨려 놓은 것인가. 그해 여름,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와 함께 그 형상은 증발해 버렸다.
유재연_크라프트지에 붓펜_14.5×12.5cm_2012

Beethoven- Piano Concerto #5 in E Flat Op73 "Emperor"-2 Adagio Un Poco Mosso ● 자신에 대한 관찰은 외부적으로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습득함으로, 자신의 존재와, 현재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아닌 인간과 사회, 다른 종(種), 지구, 드넓은 우주, 즉 미시세계에서 거시세계까지 그 영역을 넓혀 나간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지만 알면 알수록 복잡해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 얽히고설켜 마치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 나가려는 듯 보이는 무수한 공생관계들 등, 세상을 탐구하려면 한 인간의 일생이 마치 하루살이의 시간과 같이 짧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자신과 그 외의 것들을 알고자 하려는 노력과 궁금증은 변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간은 그런 것들을 알려 하고, 알아가는 과정의 시간이다. 그리고 표현은, 어떠한 생각이 정립되거나, 감정을 분출하거나, 표현자체가 어떠한 실험적 성향을 띠는 등 다양한 방식을 취한다. 어떤 철학자가 어제의 자신도, 오래 전의 자신도 지금 순간의 자신도 각기 틀려 보일지도 모르지만 매 순간에도 바뀌어가는 것도 자신이라 말하듯, 작가의 그림도 그때 그때의 자신과 동조(Synk,동시성) 하듯 바뀌어 나간다. ● 이번 전시는 항시 가지고 다니던 크라프트지 수첩과 붓펜으로 무심코 문질러 나타나는 붓 자국, 혹은 얼룩을 기초로 하여 어떠한 형상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인간은 얼룩이나 자국을 보고 보통 얼굴의 형상을 찾아낸다고 하는데, 작가도 이러한 실험을 하기에 작품에 얼굴의 형상이 많이 드러난다. 그리고 양손을 사용하여 우뇌와 좌뇌를 써 형상을 조합하는 실험도 하였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이나 그때그때의 감정을 섞고자 하였으며, 특히 음악으로 뇌를 더 자극하였다. 인간의 뇌는 한 영역이 아닌 여러 영역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복잡하고 정교한 그물과 같은 망을 이룬다 생각하기에 이렇게 여러 영역들이 동시에 조합되어 그리려 한 것이 이번 전시의 주된 테마이다. 그리하여 어떤 작품은 마치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과 같이 자본주의에 소외되어 내적으로 변형되어 군상을 이루는 자신의 얼굴을 표현하기도 하였으며, 원시적이고 파충류적인 자신의 본능과 감정을, 혹은 여러 감정들과 생각들이 각기, 혹은 동시에 조합된 작품 등을 만나볼수있다. 이렇듯 이제껏 작가가 표현해온 전체적인 작업들을 봤을 때, 1인칭인 '나' 라고 불릴 수 있는 복잡한 한 개체의 인간이, 자신을 이루는 물질 혹은 생명체들이 공생하며 한인간에게 삶과 생각과 감정을 주었고, 그밖에 아직 알 수 없는 무수한 것들로 이루어짐이 자신이며, 그 표현 또한 자신이 알 수도, 혹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과 자신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로 표현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내비치는듯하다. ■ 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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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 scape of City




박능생展 / PARKNUNGSAENG / 朴能生 / painting 2012_1107 ▶ 2012_1113



박능생_Seoul City Ⅶ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40×291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20728a | 박능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7_수요일_06: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0:30am~06:30pm / 일요일_12:00p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6 www.grimson.co.kr



Land scape of City ● The modern city has a distinct character of duality in comparison with the city in the past. A city is, in a way, a Janustic existence containing good and evil together, in which unreconcilable dualities such as order and disorder, balance and imbalance, openness and closure, and cosmos and chaos coexist. In particular, our cities that have gone through radical changes in the past fifty years, and also Asian cities in a larger boundary, historically have a uniquely dualistic and double-faced nature that cannot be found in European cities. As Korean cities have continued in dramatic transformation and development under the influence and methodology of the United States after the liberation, the mixed characteristic between the traditional and the contemporary, and the indigenous and the foreign, is all the more prominent. Our cities with such a characteristic call for a perspective and an approach which are different from those for looking into Western cities. (The Urban View of Korea, Lee Kyu-Mok, 2002, p.197)
박능생_Seoul City Ⅵ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40×291cm_2009
박능생_Busan City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40×291cm×3_2011~2

A city is something that is seen, and something that is seen in all sorts of circumstances at that. In other words, a city is something that is seen in night and day, with wind and rain, and even in fog. It changes depending on the viewer, the circumstances and the emotions. And within the city coexist the successive time and synchronous time. The legends or myths of the past are a part of the daily life today; the city is where the touches of the ancestors who had looked after and accustomed this city in the past are still vividly passed down; the city is the special place we still remember. Therefore, when people are in a certain place, they are attracted to that spot and feel as if they are part of that place. Louis Kahn says that a city is 'a place where a small boy, as he walks through it, may see something that will tell him what he wants to do his whole life.' (As quoted in Urban Environment Design, Ko Sung-jong. Ko Pil-jong. Mijinsa, 1992, p.132) Such a feeling is variable depending on the person, the viewpoint or circumstances, but it is undeniable that the city has played a very special role in the modern civilisation. To view and reproduce the scenes of such a city with adoring and affectionate eyes is to escape from the typical idea of landscape, and is to depict realistically the scenes of life where contemporary people energetically live together in an ensemble, and to depict that absolute space.
박능생_Banpodong_혼합재료에 먹_215×150cm×4_2010~1
박능생_Dogsandong_혼합재료에 먹_215×150cm×4_2010~1

The theme of my works is the urban landscape and the natural landscape that we commonly come across in everyday life. The main subject matters include mechanised human beings, concentrated space, the ruined nature and city that are under redevelopment, human exclusion, the scenes of life related to the modern civilisation, the forrest of massive steel-framed buildings, the river cutting across the urban centre and so on. The city is a scene where we encounter in everyday life the movement to spread an autonomous and independent viewpoint in terms of the continuous experience and expression of the reality we live in. The mind that is conscious of the harmony and order of human beings and nature is inherent within the city, and I have attempted to reveal such harmony and order, and the ultimate meaning of formation. More specifically, I look at the urban scenes spread around our everyday life with my own novel viewpoint and feelings and I believe that there is a need to look at them with more serious attention whether figuratively or abstractly. This need is made acute because of social interrelatedness or cultural compatibility that makes it impossible to proceed while denying the relation with such urban environment and external world. whether figuratively or abstractly. By directly walking in the contemporary scenes, the complex and detailed changes are sieved through sketching and the appropriate form for an ideal city can be attained. The viewpoints that allows seeing from a distance, i.e. viewpoints such as the top of a building or a peak of a high mountain, homogenise space depending on the scale. In painting, space is a method to express one's own ideology or emotions through the composition of the picture. Hence composition is always newly developed without specific rules and new compositions should always be generated in drawings of a new era.
박능생_Time square_혼합재료에 먹_106×74cm_2012
박능생_Time square_혼합재료에 먹_106×74cm_2012

In Asia, a greater emphasis has been made on the inherent true nature and subjective elements rather than pursuing accurate depiction. The blanks are expressed through being left pure, occupying space in abstract composition under conscious intention. And it attains a significance, not as space that is naturally generated after drawing a certain object, but space that clarifies the outlines of the object. ● Thus, form within composition, is as the formation of the whole, placed and transformed in accordance with the artist's subjective formative intention. In the present days, such a formative nature of space has been emerging more sensationally and variedly than it was simply recognised in the paintings of the past. In order to attempt a contemporary space composition in my works, I have shown in diverse forms the drawing work with a story through images gathered from urban or everyday scenes and experiences. Furthermore, not leaving at drawing, I have recomposed on the pictures by formative modifications, simplification or realistic description through drawing. ■ PARKNUNGSA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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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 Worlds




캐서린 넬슨展 / Catherine Nelson / photography 2012_1107 ▶ 2012_1204



캐서린 넬슨_Danube Lilies I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 / 드림액자_마로니에북스_사진예술_Pro-1

관람시간 / 10:00am~07:00pm / 12월4일_10:00am~12:00pm

갤러리 나우 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제5회 갤러리나우 작가상 ● 갤러리나우에서 매년 시행하고 있는 『갤러리나우 사진가 공모전』 수상전은 작가 포트폴리오 공모를 통하여 세계 사진계를 이끌어갈 사진가를 발굴하고 창작활동을 지원하고자 작품제작에서부터 도록제작 등 전시 진행의 모든 것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한국 사진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해외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동시에 해외 유수 갤러리와의 교류 및 국제 아트 페어 참여 등을 통해 작가정신을 고취하고, 널리 알리고자 제정 되었습니다. 2012년 제5회 『갤러리나우 작가상』은 사진평론가이자 중앙대학교 교수인 이경률교수님께서 맡아 주셨고 수상자는 호주작가 캐서린 넬슨이 선정되었습니다.
캐서린 넬슨_Danube Day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캐서린 넬슨(Catherine Nelson)전 『Other Worlds』 ● 캐서린 넬슨(Catherine Nelson, 1970년생)의 작업은 원모양으로 완성 된다. 동그라미는 선사시대 이래 수많은 문화와 역사를 거치면서 우주, 진리, 완전함, 원만함, 순환, 깨달음을 암시하거나 자연의 근원을 상징하며 종교의 초월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자연에서 채집 된 넬슨의 작품은 때로는 확대 재생산을 하기도하고 때로는 축소 재생산 하는 과정을 거쳐 원모양의 전환된 조형적인 이미지로 완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완벽한 지구, 미래의 온전한 세계를 꿈꾸고 있는 듯하다. 현대라는 삶 속에서 원시의 것이나 진리, 그리고 영속성이 불투명한 우리들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공간으로 환기되고 있는 것이다.
캐서린 넬슨_Elba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넬슨의 '다뉴브시리즈'를 처음 보았을 때 단번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머릿속의 상상력 폴더가 열리면서 나는 이미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눈 안에 들어오는 넬슨의 수많은 이미지들과 함께 어느새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뢰와 믿음이 내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호주의 야생성과 드넓은 공간에 대한 성장기의 체험은 넬슨 자신에게 솔직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하여 세계문명의 기원인 지역들을 채집하고 그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다시 창조된 이미지는 그녀만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자연환경, 더 나아가서 우주와 지구, 자연에 대한 보다 진지한 자세를 견지한 결과물인 것이다. 지구, 우주, 호수, 원시, 에코, 새, 산불, 모네의 정원, 꽃, 낯과 밤, 여름과 겨울, 산과 바다 그리고 원시의 숲과 깊은 강은 그녀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 신비스러운 노래, 시와 같은 영상으로 다시 태어난다.
캐서린 넬슨_Spring Blossoms I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캐서린넬슨은 사진과 회화를 규정하는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사진에 오랜 경험과 훈련에 의한 탄탄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결합되고, 거기에 시적인 그녀의 감성 표현이 어우러져 초현실적 풍경화를 완성한다. 즉 물감 대신 카메라로 그리는 그림인 셈이다. 촬영된 사실적 이미지는 컴퓨터 안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데는 한 달에서 두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하여 호주평론가 '헤더 제이콥스'에 의해 "신화적 현대 회화"라 명명되어지고,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테크놀러지로 그린 그림 " "카메라로 표현하는 화가" 즉 "진화된 풍경화" 라고 말한다.
캐서린 넬슨_The Kings Garden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호주 출신의 캐서린 넬슨은 호주 NSW college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물랑루즈』,『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300』,『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작가이다. 영화 작업을 통해 영상테크닉의 기본을 탄탄히 다진 작가는 2008년부터 시작하여 2010년 발표한 첫 시리즈인 「Creation」으로 호주에서 가장 큰 기업예술상인 RBS클라이언트 토이스상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를 시작으로 「Source」,「Future Memories」,「Nuit Americaine」,「Other world」과 「Danube」 등의 연작을 통해 호주, 유럽, 중국 등에서 촬영한 수 만 개의 자연의 디테일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루마니아의 흑해를 향해 흘러가는 다뉴브강 삼각주를 여행하며 채취한 수천장의 이미지들로 구성된 「다뉴브시리즈」 또한 시각적인 강한 흡인력과 일루전적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다.
캐서린 넬슨_Danube Storm_피그먼트 프린트_150×150cm_2012

하루의 변화되는 섬세한 빛의 변화 그리고 밤과 낯의 두 가지 감성이 한 작품에 녹아 있는 그녀의 놀랍고 새로운 시각적 해석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새로운 진실에 다가서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미 호주는 물론 파리와 중국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고 현재 벨기에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는 넬슨은 유럽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녀만이 갖는 서정적이며 노스텔지어적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작가의 상상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또 다른 세계 「Other Worlds」를 상상하게 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 이순심
캐서린 넬슨_Fish Pond_피그먼트 프린트_100×100cm_2012


The 5th Now Gallery Artist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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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NSTRUCTION




박찬길展 / PARKCHANGIL / 朴贊吉 / sculpture 2012_1107 ▶ 2012_1112



박찬길_홀로서기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67×37×23cm_2012_부분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 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www.insaartcenter.co.kr



자신외의 것들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상에 사는 나는 점점 고립되어간다. 현재의 불안함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며 과거의 기억까지도 흐릿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진실과 거짓의 파편들이 오버랩 되어 만들어진 온전하지 못한 나와 그대들의 형상이다. 파편들의 흔적은 본래의 것을 찾게 해주는 실마리이다. 부서져 버린 기억에 축을 세워 그들의 모습을 재구성 해본다.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 하지만 이미 본래의 것과 다르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다.
박찬길_남겨진 것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120×66×30cm_2012
박찬길_남겨진 것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120×66×30cm_2012_부분
박찬길_홀로서기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67×37×23cm_2012
박찬길_나비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110×160×55cm_2012
박찬길_채우다_포멕스, 레진, 우레탄 도장_60×30×34cm_2012

그러나 불완전한 부분일지라도 애써 본래 위치를 맞추려는 고단한 노력을 하는 이유는 과거의 회복이 매개체가 되어 현재를 치유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단초가 되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것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조각(piece)을 찾고 조합하며 불완전한 것들을 회복시킨다. ■ 박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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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크 라이프 Park Life




2012_1107 ▶ 2012_1117





초대일시 / 2012_1107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 한동석_이승주_윤세라_조민호

관람시간 / 12:00pm~06:00pm

갤러리 175 Gallery 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 Tel. +82.2.720.9282 blog.naver.com/175gallery



단체전 『Park Life』를 통해 우리는 현대인에게 일률적으로 제공되는 일상적인 삶 너머의 공간을 탐색하며 그 편에서 우리의 삶의 조건을 다시 바라보고 의문을 던지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현대사회는 우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양육하고 편리하게 하는 동시에 관리하며 우리가 자유로운 개인의 입장에서 가치 있는 삶을 모색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번 전시에 참여할 네 작가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각자의 지점에서 현대사회의 이면에 대해, 꾸며지고 조성되는 도시공간의 빈틈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
조민호_( -logue) 고요한 웃음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60×90cm_2012
조민호_( -logue) 마취된 화자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60×90cm_2012
한동석_Bartelby Street #1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97×120cm_2012
한동석_Bartelby Street #3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54×153cm_2012

바틀비 스트릿 Bartelby Street ● 허먼 멜빌 Herman Milville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 속의 주인공인 바틀비를 닮은 거리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 곳 무위無爲의 거리의 잔존물들은 과거 기능적·규범적 맥락에서 벗어나 보다 모호하면서도 함축적인 메시지와 자유로운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새로이 품게 되는 동시에, 본래 간직했던 거리의 모순적 구조도 극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여러 관공서와 고물상으로부터 폐기된 도로시설물을 수집하여 이를 간단하게나마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쳤다. ■ 한동석
이승주_Common People #2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60×120cm_2012
이승주_Common People #3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60×120cm_2012

Common people ● 이 작업은 현실과 공상의 경계인 중간세계를 살아가는'보통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중간세계의 주인공인 개인은 특별함을 꿈꾸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무관심하게 지나칠 뿐이다.'보통 사람'들은 사회라는 흐름 속에서 각자의 중간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작업에서는 실재화 된 세계와 개인의 비실재적인 공상들이 의하여 공존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연출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 이승주
윤세라_Bedding_라이트 박스에 잉크젯 프린트_80×80cm_2012

기억과 물건 ● 집안을 둘러본다. 사사로운 기억들로 가득 찬 물건들이 뒤엉켜 있는 집이 보인다. 이것은 언젠가 너의 기억 속의 것이었고 또한 나의 기억속의 것이다. 비슷해 보이는 장면 속에 무엇인가 놓여져 있다. 이것은 누구의 기억인가. 나는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가. ■ 윤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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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보다 face each other




이순구_조장은_최윤정展 2012_1107 ▶ 2012_1127 / 일요일 휴관



이순구_웃다-가족3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12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에뽀끄 GALLERY EPOQUE 서울 종로구 재동 38-1번지 B1 Tel. +82.2.747.2075 www.galleryepoque.com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주체의 존재'를 인식해 간다. 그것이 고독을 낳고 사회성을 낳으며 가지가 뻗어 세상을 만든다. 나의 존재 확인을 위한 다른 이와의 마주보기는 나를 찾아가는 방법이 된다. 존재 가치 확인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소통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 오감을 느끼고, 인간을 대표하면서 나약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 세상과 대화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얼굴을 본다. '마주보다'는 타자와의 소통 열망에 의한 시선교환이라고 생각한다. 꼭 사람과의 소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된 무엇과 마주보기도 하고 또, 마주보면서 관계가 생성 되기도 한다. '마주보다'라는 말속에 서로의 눈에 담는다는 말이 포함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오늘 '따뜻한 마주보기'를 실천하며 주위의 존재를 확인해 보자.
이순구_웃다-봄날_캔버스에 유채_53×72.7cm_2012
이순구_웃다-소년7_캔버스에 유채_116.7×80.5cm_2012

이순구의 웃는 얼굴, 행복한 그림 ● 작가는 웃음이 담고 있는 여러 의미에 주목한다. 표정에서 미소(媚笑)와 냉소(冷笑)를 동시에 포함하기도 하지만 밝은 웃음이 대표적인 코드로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표현법을 기호적으로 접근한다. 따라서 원형은 동그라미 하나와 점 두 개, 그리고 곡선 하나의 스마일 마크이다. 얼굴보다 웃는 모습은 훨씬 더 실재 그 이상으로 보이도록 생략과 과장의 여러 방향과 심미적 사유로 노력하였다.
조장은_뉘집 자식들인지_장지에 채색_100×80cm_2011
조장은_엄마의 엄마 딸의 딸_장지에 채색_72.5×72.5cm_2011
조장은_이쁜 내새끼_장지에 채색_100×80cm_2011

조장은의 태어나 바로 마주보게 되는 엄마 얼굴 ● 작가는 평범한 일상과 솔직한 감정을 담는다. 모두가 공감하는 주제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싶은 작가의 바람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는 여성이자 엄마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장 많이 마주보고 찬찬히 살펴 보지 못한 엄마의 얼굴이 아닐까? 조장은 작가는 말한다. "내 삶은 엄마로 인해 춤을 출 수 있었어요."
최윤정_pop kids#19_캔버스에 유채_73×73cm_2010
최윤정_pop kids#22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0

최윤정의 미디어를 통한 현대자화상 ● "작가의 작업에서 인위적으로 부각시킨 커다란 안경의 렌즈 속에 대중매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매스미디어라는 구조가 만들어낸 현대인의 욕망이라는 실체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장치라고 판단된다. 욕망구조를 나타내기 위한 이 아이콘들은 각자의 해석에 맞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이승훈)
최윤정_popkids#18_캔버스에 유채_100×100cm_2010

마주보기는 '마술'이라고 독일 시인 '케스트너'는 말한다. 피곤에 지친 눈을 들어 / 사랑에 주린 눈을 들어 / 너와 내가 / 당신과 당신이 / 마주 봅니다. / 마술의 시작입니다. ● 타자와의 존재 확인의 순간이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며 그 마주보는 순간이 마술이라는 것이다. 상대의 눈을 통해 다시 세상을 보고, 표정을 통해 대화한다. 작품에서 어떠한 얼굴을 보든 관람객의 주변이자 자신이 된다. 작품 속 주인공이 내 삶의 투영 되듯, 또 다른 주인공을 작가의 작품에 새겨 놓기 바란다. 누구나 작가와 소통할 수 있고 감상자가 곧 작품이 된다. 작품과 '마주보기'는 소통의 연장이다. 문득 돌아 보았을 때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들의 기다림이 있기에 완성되는 것이다. 관람객과 작품이 마주보기를 완성하는 전시가 되고자 한다. 작가의 작품을 통해 나를 찾는 즐거움, 얼굴을 마주보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갤러리 에뽀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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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day Identity




강강훈展 / KANGKANGHUN / 姜康薰 / painting 2012_1108 ▶ 2012_1122



강강훈_Modern Boy-custom made breath_캔버스에 유채_193.9×130.3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922g | 강강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박여숙화랑 PARKRYUSOOK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 306호 Tel. +82.2.549.7575 www.parkryusookgallery.com



박여숙 화랑에서는 오는 11월8일부터 22일까지 14일 동안 전속작가 강강훈의 두 번째 개인전을 개최한다. 작가 강강훈은 2008년 한국화랑미술협회(KIAF)와 독일 베를린화랑협회(LVBG)가 공동 주관하는 5인 선정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극사실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로써는 이례적으로 심사점수 1위를 차지했었다. 또한 그는 레지던시 프로그램 기간에 열린 아트포럼 베를린 초청 유일한 참가자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후 데뷔와 동시에 2009년 Larasati Hong Kong Asian auction week와 Christie's New York에서 낙찰을 기록하게 되고 특히 2009년 Hong Kong International Art Fair에서 Christie's Hong Kong 회장을 역임한바 있는 Anthony Lynn의 소장과 더불어 유수의 국제 아트페어에서 솔드아웃을 기록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성남아트센터, 대전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등 한국 유수의 미술관급 기획전시에 수 차례 초대를 받은 바 있으며 현재 한국 현대미술의 극사실 회화를 이끄는 주요한 인물로 조명 받고 있다. 얼마 전 2012 아트홍콩에서는 주체 측의 러브 콜을 받아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끝내 아시아에 그의 이름을 확고히 하였으며 코리안아이 ll 의 출판을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Modern day Identity』에서는 그 동안 그가 추구해온 극사실주의와 더불어 새로운 시도의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형식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강강훈의 작품활동의 터닝포인트라 할 수 있다. ● 극사실주의의 본질은 미국적인 리얼리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팝 아트의 영향으로 일어난 운동이기도 하므로 극사실주의는 일상적인 생활, 반복되는 익숙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한 점이 팝 아트와 공통점이기도 하다. 주로 극사실화는 사진과 같은 리얼한 표현력과 감정이 배제된 채 표현되며 특히 극대화된 화면의 스케일의 효과는 보는 이들에게 흥미와 충격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강강훈의 작품은 감정을 배제하는 극사실화의 개념에는 뜻을 달리하여 그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독창성이 있다. 그는 페인팅을 하기 전 그의 작품의 모델에 대한 500장에서 수천 장이 넘는 사진 촬영을 한다. 사진촬영은 그가 미리 정해놓은 컨셉과 소품으로 사진 속 모델의 내면 세계를 이끌어내 작가와의 감성적 교감이 이루어진 컷만이 실제 작품으로 탄생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사진촬영은 본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의 분출을 작가의 뷰파인더속에 전달해야 하는 도구이자 이용의 매개체일 뿐이며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재현의 욕망을 채워주는 사진이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전을 보여준다.
강강훈_Modern lady-Unable to cry_캔버스에 유채_194×230cm_2012

극사실주의는 실재와 가장 똑같이 그리는 것에 주력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이지만 대중들이 갖는 의문과 호기심은 항상 그의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며 사진기 셔터를 누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말했다.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모방하는가, 아니면 그렇게 보이는 것을 모방하는가? 다시 말하면 그림은 가상의 모방일까, 아니면 실제의 모방일까? 강강훈의 작품들 속에는 또한 근대화 속에 일어난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며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제3자가 존재한다. 익숙한 시각과 풍족한 물질 사회에 대해 현실을 받아들여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슬아슬한 현대인들의 모던 데이를 그가 맥주 캔, 헤드 셋, 파이프 등과 같은 소품 등을 사용하여 세련된 감각으로 표현하였으며 특히,「Sad Clown & Shadow identity」에서 보여지는 두 작품 사이의 대립적 형식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내면 속에 일어나는 복잡한 대립의 한 일면이다. 하나의 광대와도 같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보여줄 수 밖에 없는 노출된 상황과 모든 것이 감춰져서 보여주고 싶어도 표정은 물론 메세지가 차단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대립이다. 이는 현대인의 이중적 자아대립의 구도를 말해주는 것이며, 두 작품 모두 같은 극사실적 기법으로 구성했으나 최대한의 시간과 공력, 최대한의 노출된 표정과 상황은 물론 디테일을 보여주는 한 작품과 최소한의 시간과 공력, 최소한 드러나지 않는 정체를 보여주는 작품의 대립적 구도를 형성하여 현대인들의 총체적인 자아의 대립이 이루는 아이러니를 대변하려고 시도한 시리즈이다. 현대인이 필요에 따라 내면의 노출과 은둔을 두고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은 결국 자아와 대면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임을 말하고자 말하며 대비적 효과를 일으키며 시각적 효과를 증폭시킨다. 작가는 우리 시대의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극도로 정밀하게 표현하여 오히려 초 현실적 감성을 느끼게 한다. 현대인들의 불안과 고독, 감정의 억누름 등을 모공, 수염, 땀구멍 하나까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가 쏟아 붇는 노력의 가치, 인간을 향한 관찰 그리고 사회에 관한 성찰에 대해 그의 작품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서 어김없이 관람객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의 작품이 즉, 연출된 상황을 만들어낸 그의 작품 속 인물이 우리가 영화나 책 속 허구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실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빠져드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상실된 자아에게 인간의 본질을 찾아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작가에게 리얼리즘의 표현은 그에게 존재성을 확신시켜주는 진정한 리얼리즘의 추구이다. 우리사회는 해답이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가깝하고 복잡한 세상속에서 차라리 수학문제를 풀어 명쾌한 답을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강강훈이 진정한 identity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들에게 주는 힌트인 것이다. ■ 박여숙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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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éjà - View




정진展 / JUNGJIN / 廷珍 / painting 2012_1108 ▶ 2012_1123 / 일,공휴일 휴관



정진_정각.am12:00_종이에 아크릴채색_160×107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404d | 정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표갤러리 사우스 PYO GALLERY SOUTH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처포엠빌딩 B112호 Tel. +82.2.511.5295 www.pyogallery.com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살면서 여러 번 기억해 내지는 않더라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한번 뇌리에 남은 것은 잠복 기억(cryptomnesia)으로 존재하다가 비슷한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상기하여 데자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때로는 그 기억 속에서 무의식 아래 있던 또 다른 기억을 발견하기도 한다. 정진의 작품은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극히 평범한 풍경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떠나가는 여인과 남겨지는 대상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장갑, 아이스크림, 공과 같이 이전에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으나, 주인을 잃은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이 사물들은 작가의 과거 기억을 투영시킨 것이다. 무의식 속에 각인된 기억은 작품에 버려진 사물로 은유 되어 원근법에 맞지 않게 과장되거나 축소된 모습으로 캔버스의 전면에 등장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예기치 않게 등장하는 이 사물들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언캐니(uncanny)적인 낯선 감정과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정진_밤의 멜로디_종이에 아크릴채색_160×112cm_2012

정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작가가 살고 있는 주변의 모습으로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사물들을 현재의 풍경 속에 등장시킨 그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시간의 흐름을 작품에 올려놓는다. 이 시간성은 작가 특유의 날리는 듯 한 붓 터치와 한 캔버스 안의 다른 시점으로 인한 공간의 분리, 여러 번 겹쳐진 물감들로 더욱 강화된다. 특히 정진만의 강렬한 원색적 색채 밑에 언뜻 보이는 형광의 핑크 색상은 과거의 잔상, 혹은 과거와 현재가 통하는 급격한 시간의 흐름을 은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남겨둔 가장 자리의 여백 또한 완결된 것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며,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과거의 풍경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처럼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풍경에 중첩시킨 정진의 작품은 낯설지만 친밀하기도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희미한 기억의 풍경 안에는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존재하고 있다.
정진_외딴방_종이에 아크릴채색_117×163cm_2012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풍경의 한편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헨젤과 그레텔, 행복한 왕자와 같은 동화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행복한 줄거리 뒤에 비극적 운명이 깔려있는 이 동화들은 평온한 일상 이지만 곧 비극이 닥쳐오리라는 작가의 불안한 감정을 투영한 것이다. 이 암유는 행복한 일상에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을 더욱 가혹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자신의 사적인 풍경에 누구나 알법한 보편적인 동화의 풍경을 투영시킴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상황을 한 발짝 멀리서 관조하며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정진_14-1_종이에 아크릴채색_90×73cm_2010

정진은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느낀 자신의 감정을 붓터치와 색감에 표현해내며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보통의 유화나 아크릴 화처럼 면이 아닌 굵은 선들로 이루어진 이 감정의 풍경은 한번의 붓 터치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이고 감정과 가장 맞닿아 있는 색채를 만들어 낸 후 솔직하게 그어 내린 선들로 이루어진다. 또한 정진의 작품은 관찰자의 위치가 모호하게 설정 되어 일반적인 시각과 달리 화면의 중심축이 기울어져 있거나, 아주 재빨리 포착한 것처럼 스쳐가는 풍경처럼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시각은 스냅사진의 포커스와 닮아있다. 이는 마치 비밀스런 사적인 사건을 타자인 관찰자가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불안한 시각을 내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의 관찰자는 과거의 풍경을 성인이 된 자아가 다시금 조심히 돌아보는 시선일 것이리라 생각된다.
정진_246_종이에 아크릴채색_128×97cm_2011
정진_끝없는 싸움_종이에 아크릴채색_129×86cm_2012

작가가 돌아보는 이 풍경은 그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풍경이다. 불안과 공포의 순간인 이 순간은 한편으로는 자아가 형성되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라깡의 학설을 발전시킨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에 의하면, 인간은 모체와 분리되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처음으로 불안과 공포, 소외감을 느끼게 되지만, 이 공포의 순간에 자아는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게 된다. 즉 혼자가 되는 극한의 공포의 순간을 다시 돌아보고 그때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정진의 작품은 트라우마에 대한 자기 치유이자,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 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 전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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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itle Match




최종운展 / CHOICHONGWOON / 崔鍾云 / installation 2012_1108 ▶ 2012_1128 / 월요일 휴관



최종운_The love_단프라 박스, 케이블 타이, LED, LED컨트롤러_169×171×55.5cm_2012 최종운_The shark_단프라 박스, 알루미륨, 나무, 와이어, 접착제, LED, LED컨트롤러_210×500×21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618h | 최종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6:00pm

서울시립미술관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TV12 갤러리 TV12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1번지 B1 Tel. +82.2.3143.1210 www.television12.co.kr



최종운의 데스매치,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한판 싸움 ●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화두는 무엇일까? 바로 존재(being)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역사의 수많은 시간동안 철학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그리하여 사유하고 있는 그 순간을 감각으로 직관해야하는 숙명적 물음, 바로 "존재"이다. 이 물음은 어떤 답을 내놓았는가? 나의 존재와 타자의 존재, 혹은 개념의 "존재들"이 아로새겨진 사유의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음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 사유할 것이 없다는 것, 사유할 수 없다는 것은 정지, 곧 죽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은 또한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죽음과 삶, 삶과 죽음은 하나의 순환고리처럼 끊임없이 윤회한다. 그리고 또한 대립한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죽음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 존재는 단지 각각의 순간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아주 잠깐 인간의 기억에 각인시킬 뿐이다. 마치 반짝이다 사라지는 빛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화두는 무엇인가? 역시 "존재"개념을 빼놓을 순 없다. 예술은 존재개념을 어떻게 수용, 표현하였는가? 여기 두 명의 유명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로버트 인디애나와 데미안 허스트이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1960년대 기하학적 추상을 통한 미니멀리즘, 혹은 팝아트적인 요소를 통해 전 세계에 사랑 바이러스를 퍼트렸고, 데미안 허스트는 1980년대 yba를 이끌면서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하여 수많은 해골들을 선보였다. 인디애나의 사랑과 허스트의 해골은 우리들로 하여금 존재의 개념에 즉각적으로 직면하게 만든다. 최종운은 바로 이 두 예술가의 존재개념에 주목하였다. 그는 미국현대미술, 특히 모더니즘적 가치를 추구하는 로버트 인디애나의 작품 "LOVE"와 영국현대미술, 포스트모더니즘의 극한점을 보여주는 작품 "(일명)상어"(「살아있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불가능한 물리적 죽음 The physical impossibil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을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 더 나아가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아니 고상하게 그 의미들을 찾는다기보다는 치열하게 그 의미를 획득하기를 원한다. 조금 더 거칠게 말하면 최종운은 이 두 예술가에게 서로 격렬하게 한판 붙어보라고 말한다. 바로 권투경기장의 링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것이다. 그의 타이틀매치는 이렇게 시작된다. '존재'의 개념을 우리들에게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챔피언 타이틀을 누가 획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그의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승부는 지금부터이다.
최종운_The shark_단프라 박스, 알루미륨, 나무, 와이어, 접착제, LED, LED컨트롤러_210×500×210cm_2012

1라운드. 형태의 한계를 넘어 ● 인디애나 대 허스트, 허스트 대 인디애나 박빙의 승부를 펼칠 두 선수 입장한다. 인디애나의 「LOVE」와 허스트의 「(일명)상어」가 자신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로 신경전을 벌인다. 우선 청 코너의 「LOVE」부터 살펴보자. 사랑의 관념을 즉물적인 글자로 표현한 「Love」는 이미지화된 언어로 사람들의 관념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간다. 그 언어는 사람들의 뇌리에 꽂혀있는,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하는 순간 그 감성이 지나가 따뜻한 어떤 느낌만을 남겨주는 "사랑"이 된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가? 때론 부드럽게 녹아들고, 달콤하게 다가와 살며시 입 맞추고 가는 그 가슴 설레이는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하는가? 고정된 형상의 조각으로 결코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머릿속, 가슴속에 피어나는 관념의 언어인 사랑을 인디애나는 언어적 형태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읽어내게 한다. 반면 홍 코너의 허스트는 어떠한가? 허스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의 맹수 상어를 가져온다. 바다의 최고 포식자인 상어의 등장은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죽음으로 내몰 것같이 강렬하다. 그의 전략은 상어의 미메시스가 아닌 상어 그 자체의 형상을 가져오는 것에 있다. 실제 죽은 상어를 네모난 틀에 넣고 포름알데히드를 붓는다. 그리하여 죽은 상어를 영원히 박제시켜 죽음의 의미를 고정시킨다. 그러나 그는 상어 속 기계장치를 작동시켜 상어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죽음의 의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든다. 여기까지 이 두 작가의 작품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 둘은 각각 사랑(삶)과 죽음을 형상화하였다. 인디애나의 전략은 문자 그대로를 드러낸 것이고, 허스트는 형태 그대로를 가져온 것이다. 어느 것이 더욱더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가? 이를 실험하기 위해 최종운은 외형상으로 이 둘의 작품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의 전략은 두 작품의 형식 그대로를 가져와 서로 대립되게 매칭시키되 동일한 매체로 변환시키는 것에 있다. 그는 이사할 때 주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박스인 '단프라박스'로 두 작품을 형상화하였다. 또한 파란색을 불투명 흰색으로 바꾸고, 벽돌크기의 네모난 큐브와 4단계로 분할한 큐브를 사용하여 각 형태를 마치 픽셀들의 집합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큐브는 하나의 셀이 되어 거대한 형태를 만들어내되, 언제나 다시 개개별의 셀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는 디지털화된 픽셀을 상징한다. 두 작품의 외형적 형상은 그러므로 그것이 관념적이든, 사실적이든 간에 단지 네모난 픽셀덩어리로 채워진다. 1라운드 무승부.
최종운_The love_단프라 박스, 케이블 타이, LED, LED컨트롤러_169×171×55.5cm_2012 최종운_The shark_단프라 박스, 알루미륨, 나무, 와이어, 접착제, LED, LED컨트롤러_210×500×210cm_2012
최종운_The love_단프라 박스, 케이블 타이, LED, LED컨트롤러_169×171×55.5cm_2012 최종운_The shark_단프라 박스, 알루미륨, 나무, 와이어, 접착제, LED, LED컨트롤러_210×500×210cm_2012

2라운드. 의미의 함몰 ● 자. 이제 형태는 그렇다고 치고, 각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미를 확인해보자. 최종운은 인디애나의 「LOVE」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사랑의 감성을 이끌어내기에 잔잔하고, 고요한 주먹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 주먹은 사랑이라는 이데아를 상징하면서 하나의 실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 실은 강력하지 않아 흔들거리지만 단단한 결속력을 보여준다. 그는 각 큐브들을 접착하지 않고 케이블타이로 서로를 연결하였다. 그래서 LOVE는 살짝살짝 틈을 보여준다. 반면 허스트의 「상어」는 접착제를 사용하여 강력하게 각각의 큐브들을 붙잡고 있게 만들었다. 최종운은 허스트의 죽어있는 상어가 자신의 죽음을 강렬하게 부정하며 죽음의 정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동치는 존재로 보았다. 긴박하고 신경질적인 상어의 움직임은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힘든 순간인지를 지각하게 한다. 삶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혹은 죽어서까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영혼 없는 움직임을 강요당하는 상어의 애처로움을 애도라도 하듯 각 큐브들은 단단하게 서로를 끌어안는다. 「LOVE」와 「상어」는 이제 서로를 향해 한방의 펀치를 날릴 준비가 되었다. 이에 최종운은 두 작가에게 튼튼한 권투장갑을 권해준다. 바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들을 훌쩍 뛰어넘어 미래를 향한 강력한 예술의 권투장갑인 "전자적 빛"이 그것이다. 이 빛을 머금은 두 선수가 의미의 펀치를 날린다. 「LOVE」는 하얀색 빛을 조용히 내뿜다가 천천히 선분홍색 빛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차분하게 사랑의 의미, 혹은 인디애나의 「LOVE」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반면 「상어」는 미친 듯이 질주하며 순식간에 빛의 색을 바꿔버린다. 최종운의 전략은 삶의 생동감을 조용히 정지시키는 것에, 반대로 죽음의 정지는 활발하게 요동치게 하는 것에 있다. 원래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의도 그대로 말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관념과 형상의 틀을 원본에서 고스란히 차용하여 원본처럼 읽히게 하는 복사본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가? 최종운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역사적 예술의 권위와 가치의 기대를 함몰시켜,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아낸 예술작품을 다시 현재로 끄집어 당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빛은 단지 그 빛이 켜지는 순간 모든 것을 의미로 물들이고 다시 어둠속의 잠재된 빛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빛은 형태의 외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형태의 내적 구성 원리이자,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그 존재론적 개념이 형상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유출되어 형상이 가지고 있는 참 의미, 곧 정신에 도달하게 된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의 말이다. 빛은 반짝였다가 사라지지만 형상이 가진 관념, 이데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힌트를 준다. 하지만 최종운은 우리가 그 힌트에 다가가려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발목이 잡힐 수 있다고 말한다. 바로 관념과 편견의 발목이 그의 작품을 인디애나와 허스트에 머물러 있게 만든다. 또한 관객들을 붙잡는다. 존재의 개념은 관념이 아니라 실체 속에서 인식할 수 있다. 최종운의 작품은 인디애나와 허스트를 통한 삶과 죽음의 타이틀매치가 아니라, 두 개념이 서로 연합하여 다시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심장을 노리고(미술사적 이해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고), 또한 이 둘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옆구리에 강한 펀치를 날린다(의미해석의 자의성을 비판한다). 존재의 개념은 어디로 갔는가?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최종운_The shark_단프라 박스, 알루미륨, 나무, 와이어, 접착제, LED, LED컨트롤러_210×500×210cm_2012

최종라운드. 데스매치의 승자 ● 인디애나와 허스트는 단지 사랑(삶)과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선과 악, 잔잔함과 요동침, 가상과 실재의 대립되는 개념 모두를 끌어안는다. 상자를 꾸린다는 박싱(boxing)과 복싱(boxing)은 동음어로 텅 비어있는 박스이자 끊임없는 대결을 의미한다. 그는 5,000여개의 단프라박스를 가지고 견고한 집을 짓는 벽돌과도 같이 각각의 개념들을 하나씩 쌓아올린다. 그리고 한방 펀치로 그 쌓아올린 개념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이사가 끝난 박스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이다. 토사구팽의 미덕은 예술을 더 이상 예술로 인정하지 않을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최종운은 텅 비어 있는 네모난 박스를 전자적 빛으로 가득 채우고 자신이 필요 없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 가진 존재 의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디애나와 허스트의 역사적 가치들이 여전히 실재속에서 의미화 되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념을 끊임없이 복제하면서 존재를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애나의 작품이 사랑의 관념을 실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끌고 들어와 실체화 시키고, 허스트의 상어시체가 실체적 죽음이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기에 최종운의 작품은 단지 재현물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가치인가? 애초 그가 이 두 대가의 작품을 선정한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애초에 상정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은 어쩌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대립의 끝에는 반드시 시작이 있다. 삶의 이야기가 곧 죽음의 이야기이듯이 예술의 의미는 특정한 관념에 머무르지 않으며 유유히 이동한다. 빛이 어둠속에서 반짝이듯이 죽음은 삶속에서 가치를 생성한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은 작품의 존재의미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그것은 두 대립 항을 대립의 순간 속에 그대로 놔두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화해를 요구하지 않고 대립의 순간을 지속시키는 것, 이 순간이 바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인 것이다. 최종운의 타이틀 매치는 바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거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단지 상징적인 죽음과 삶이 있을 때까지, 인간의 사유가 넘치거나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싸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규칙만이 있을 뿐이다. 권투 경기장의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예술에 대해 싸울 비물질적인 타이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존재" 개념이자 자신을 증명하는 예술의 위대한 한방 펀치인 것이다. 최종운은 이를 위해 싸움을 건다. 자신의 직관이 예술의 존재와 의미의 존재를 증명해 줄 때까지, 그리고 고정화된 형상의 유연한 사유를 가져올 때 까지, 자신의 관념들과 긴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 ■ 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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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ento of Momentum 가속의 상징




장재록展 / JANGJAEROK / 張宰錄 / painting 2012_1108 ▶ 2012_1129 / 월,공휴일 휴관



장재록_Heart 2_혼합재료_260×250×250cm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311g | 장재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삶의 가속과 생명의 상징 ● 적어도 300여 년이 흐른 미래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연구하고자 발굴을 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을 잔뜩 발휘해 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대변하고자 무수히 많은 상징적인 사물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땅 속에서의 발굴이 아니라 디지털 저장장치라던가 무수히 많은 데이터들이 부유하고 있는 가상공간에서의 발굴 작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장재록 작가는 동력기관, 흔히 이야기 하는 자동차의 엔진을 그 답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자동차 엔진이 현재의 문명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작가의 의견에 즉각적인 찬성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따를 수도 있겠지만 현 시대 기술문명의 발전에 있어 동력기관의 발명 전과 후의 발전 속도를 비교해 보면 충분히 작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재록_Another landscape-Benz_면 캔버스에 먹_122×180cm_2012
장재록_Another landscape-Frankfurt HBF_면 캔버스에 먹_122×180cm_2012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를 부수면서 마치 발굴하듯이 작가는 그 안에 들어 있던 엔진을 찾았다. 콘크리트 덩어리에는 "Heart"라고 새겨져 있다. 작가는 엔진과 심장을 동일시 한다는 얘기다. 수축과 이완을 무한 반복하고 있는 심장과 피스톤 운동을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엔진을 같은 이해선상에 두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생명과 에너지의 상징이고 또 하나는 발전과 가속의 상징이다. 천 위에 먹으로 뉴욕 타임스퀘어의 밤 풍경, 자동차 등 화려한 대상들을 먹 특유의 번짐을 충분히 활용한 모노톤으로 상당히 디테일하게 묘사해 왔던 그 동안의 평면작품들을 떠올려 봤을 때, 새롭게 시도하는 장재록의 설치작품은 장르적 표현 영역의 확장과 함께 예술적 상상력의 또 다른 지평을 연 듯 하다. ● 작가의 이러한 표현 영역의 탐구는 영상작업으로까지 이어진다. 발전된 산업사회의 화려한 이면에는 늘 허무와 소외라고 하는 대립의 감정이 항상 공존해 왔다. 노동을 통한 생산의 주체가 경제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어 왔음은 근. 현대사를 거쳐오며 충분히 주지되어 왔던 부분이다. 여태 작가는 자신의 평면작품을 통해 이러한 대립의 감정을 꾸준히 표현해 왔다. 그의 영상작업은 이 양면의 감정들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엔진을 발굴하는 노동행위를 그 어떤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영상작업은 엔진을 찾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반복적으로 재생함으로써 과연 우리의 삶을 가속하고 있는 발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장재록_Another landscape-Brooklyn bridge_면 캔버스에 먹_2012
장재록_Heart 1_혼합재료_250×200×200cm_2012

오히려 작가는 기술문명의 꽃인 자동차와 그것을 가능케 했던 동력장치의 발전을 표현함으로써 삶의 인위적인 가속보다는 자연과 생명에서 느껴지는 무 동력 발전 에너지에 더 관심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통해 발굴된 엔진, 즉 자동 동력장치는 인류의 정신적, 육체적 노동의 결과물이며 그를 통해 인류의 삶에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 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일종에 인류가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자연으로부터 획득하고 배운 자원과 기술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어떠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래를 위해 개발하고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소비중심의 발전이 아니라 보존과 공존의 논리로 발전하고 개발되어야 하는 것. 작가는 자동차 보닛 위에 비춰진 다양한 풍경을 통해 이를 반추하고 있다. 이는 또한, 인류뿐 아니라 모든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생물들이 지닌 에너지의 공존과 소통을 위한 동력장치로서 생명에너지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의 발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위적인 동력장치는 에너지를 얻기 위해 연료의 소비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연은 말 그대로 스스로 순환하여 에너지를 생산한다. 오히려 거기엔 그 어떤 소비가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순환과 재생산이 전제된다. 따라서 자연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무 동력 발전기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결국 인위적인 동력장치를 표현함으로써 자연의 무한한 에너지와 그것의 순환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 온 듯 하다. ● 물론, 동력장치의 발전에 대한 긍정적인 부분 역시 쉬이 간과할 수 는 없다. 장재록은 새로운 그의 평면작품을 위해 철골구조를 지닌 교각에 관심을 가져왔다. 말 그대로 이쪽과 저쪽을 잇는 의미를 지닌 교각을 통해 작가는 현재와 미래, 과거와 현재 또는 동양과 서양 등 서로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요소들을 연결한다. 타임스퀘어의 밤 풍경이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놓여있는 산업사회의 허무함을 표현해 왔다면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철 교각은 산업사회에 대한 작가의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교각의 발달은 곧 자동차 산업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즉, 자동차를 제조하여 소비하려 할 때, 자동차를 위한 도로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 산업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현대 산업사회를 이끌어 온 동력기관과 그 동력기관을 활용하려는 다양한 부대산업들이 동시에 발전해 왔음에 주목하며 그것을 작가 특유의 감수성으로 표현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엔진과 같은 동력기관이야말로 어쩌면 미래에서 현대를 발굴하거나 시대상을 확인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찾아야 할 유물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장재록_Heart 1_혼합재료_250×200×200cm_2012
장재록_Heart 2_혼합재료_260×250×250cm_2012

장재록은 이러한 평면작품이 지닌 여러 가지 의미적 해석의 깊이를 위해 기존에 표현해 온 수묵기법을 보다 더 풍부하게 표현하는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흑백의 또 다른 화려함과 다양한 색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면 천 위에 수묵으로 작업하는 기존의 재료는 고수하면서 그 색감을 한 층 더 풍부하게 담아냄으로써 흑백이지만 강렬한 색채가 느껴지리만큼 그 디테일에 집중했다. ● 작가의 주요 테마인 자동차 역시 최신의 모델을 표현해 왔던 기존의 틀에서 클래식한 모델들을 표현함으로 인해 화려한 문명의 꽃으로서 자동차에 집중해 왔던 작가의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경쟁과 소비를 주도하고 있는 날카로운 산업사회와 그 대립적 감정을 최신의 디자인으로 무장된 화려한 자동차에서 찾았다면 클래식한 자동차에서는 보다 인간적이고 정적인 느낌으로 현 사회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미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 그 변화된 감수성으로 인해 수묵의 깊이뿐 아니라 작품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역사적 의식의 따뜻함과 품격이 느껴지는 듯 하다. 해서 이제 그의 작품을 쫓아 삶의 가속을 멈추고 우리 주변에 놓여져 있는 생명의 상징들을 찾아내는 통찰의 동력장치에 시동을 걸어야 될 듯 하다. ■ 임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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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dowless / artless / mindless creeping pieces; 몸-시간의 존재방식




홍명섭展 / HONGMYUNGSEOP / 洪明燮 / mixed media 2012_1108 ▶ 2012_1227 / 월요일 휴관



홍명섭_링반데룽/원상방황_렌티큘러_가변크기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홍명섭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8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6:00pm / 월요일 휴관

OCI 미술관 OCI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수송동 46-15번지 Tel. +82.2.734.0440 www.ocimuseum.org



홍명섭의 작업: 의미에 저항한다. 감각을 통해. ● 예술의 의미와 가치? 예술작품에는 어두운 삶과 세상을 밝게 변화시키는 어떤 계시가 담겨 있으리라 기대하는 고정관념이 생기게 된 데에는, 예술을 정신적 승화(sublimation)의 결정체로 정의하고 물신화시켜 온 서구 근대 예술가들, 문인, 철학자들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이에 더해 오늘날 후기자본주의의 예술상품화 시스템은 예술작품의 재화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상상 가능한 모든 미학과 도덕적 사상들이 예술작품 속에 담겨져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데 대성공을 이루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평론가들이 한탄하듯, 예술은 상품문화에 대응하기 보다는 최고의 상품적 가치를 구현하는 사치(럭셔리)의 세계로 진입해 버린지 오래이다. 사치로서의 예술은 기본적으로 '천재적 창조의 의미'에서부터 '인류평화와 인권', '정치사회개혁과 유토피아의 희망', 심지어 '글로벌 신자유주의와 상품자본주의의 타도라는 자아비판' 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담지 못하는 의미가 없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 약 10년간 지구촌의 온갖 비엔날레와 국제전들은 그런 달콤한 '의미의 사치'이 극을 달리며, 의미가 물신(fetish)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예술들의 패션쇼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예술작품이 그 어떤 깊은 의미를 내부에 보존하리라는 이 '심층적 읽기'(depth reading), 작가 홍명섭이 "살균된 느낌의 무게학, 혹은 방부의 정치학"이라고 적절히 비판한 바로 그것은, 마치 영험한 귀신이 예술작품 속에 강림해 있으리라 믿는 경우처럼 신학주의적인 사유이다. 그것이 정치사회비판에 대한 것이건 일상과 개인의 삶에 대한 것이건 간에 예술작품을 온갖 의미와 주제로 치장하는 것은, 사실상 작품과 관객 사이의 '정신-신체적인 교환', '시간-공간적인 교환', '작품이라는 대상과 관객 사이의 이질적 접합'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림을 의미한다. 의미는 그만큼 세계를 기호로 대체시키는 이성중심주의와 지성주의의 산물이다. ● '비정형'(formless)개념을 통해 예술에서의 형태(form)와 의미의 결합을 공격한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가 마네의 「올랭피아」(1863)에서 발견해 낸 진정한 전복적 힘이 무엇이었던가? 마네의 당대에는 "티치아노 등 기존 대가들의 명작을 빌어와 밤거리 창녀의 민망한 노출증적 초상으로 패러디한 불쾌한 도발"이라는 식의 평이 지배적이었고, 20세기의 모더니스트 형식주의자들은 깊이감이 결여된 마네의 평면적 공간이 회화적 평면성이라고 하는 매체적 조건의 전조라며 그 작품의 가치를 옹호하려 했다. 전자가 회화의 '주제'(subject)에 갇혀있고, 후자가 회화의 '형식'에 갇혀있는 관점이라면, 바타이유의 관점은 마네의 그림이 의도적으로 불성실한 회화적 묘사를 통해 '회화' 자체를 공격하는 행위였으며, 그럼으로써 회화가 지닌 의미론적 기능(말하자면 주제subject를 환기하는 기능) 자체를 와해시키는 '脫승화(desublimation)의 전략'이었다고 보는 태도였다. ● 마르셀 뒤샹의 작품 「주어진」(Etant données, 1945 - 1966)은 겨우 다리를 활짝 벌린 여자 석고상과 가스등 정도로 교양있는 미술관 관객에게 어중간한 도발을 하는 것이 목적인 그런 초라한 상상력에서 나온 작품이었던가?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말하듯이, 그 작품에는 사물을 대상으로 분리시킴으로써 정의(定義)와 의미를 부여하는 관객의 시선을, 대상에의 '과도한 몰입' 즉 감각의 과도함을 통해 와해시키려는 전략을 내포되어 있다. 「올랭피아」와 「주어진」의 공통점은 모두 물질적 신체적 감각의 과도함을 통해 의미의 결정을 지연, 분열시키고 불화를 일으킨다는 것이며, 바로 이 점이 홍명섭의 작업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바이기도 하다. ● 홍명섭에게는 '난해한 개념미술가'라는 엉뚱한 라벨이 오랜 기간 고정관념처럼 따라 다녀왔다. 사물에 개념과 의미의 측면이 수반되는건 필연적이겠지만, 개념미술을 단지 조셉 코주스(Josef Kosuth)의 경우처럼 사변적 관념이 곧 예술작품의 존재형식이다라는 식으로 정의한다면, 홍명섭은 그러한 개념미술의 정반대 지점에 위치한 작가가 된다. 홍명섭의 작업은 개념의 형식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의 '개념적' 혹은 '개념내부적'(intra-conceptual) 작업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개념초과적'(extra-conceptual)인 작업이고, 이는 바타이유의 표현을 응용하면 '개념성의 방출'(expenditure of the conceptual)이라고도 불러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개념성의 방출을 이루어내는 힘은 물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감각" 심지어 들뢰즈가 베이컨의 회화에서 언급한 "감각의 맹렬함"(violence of sensation)이다.
홍명섭_러닝레일로드/슬리퍼로드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2

홍명섭은 1977년 미술대학을 졸업한 직후부터 줄곧 "사물과 예술이 지니는 의미가 어떻게 구축되고 해체되는가"라는 포스트모던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홍명섭은 '예술적으로 유의미(significant)한 사물'이 성립하는 바로 그 경계를 탐구했다. 그 경계는 말하자면 의미의 주변, 의미를 초과하고 의미 이외의 요소들이 기생(para-site)하는 장소이며, 작가의 표현을 빌면 '작품(work)의 他者', 또는 '개념의 바깥'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이다: "내 작업을 통해서 나타나는 개념들 또는 내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내 작업 세계를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발굴된 개념들을 다시 사용하여 내 작업을 더욱 삐걱거리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결국 삶의 감각을 변화시키고 확장하게 하는 힘으로서, 개념의 바깥을 지각(각성)시키고자 함이다" (-작업 노트). ● 홍명섭이 이번 OCI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3개의 대형 설치작들은 그러한 '작품의 타자'에 대한 것이다. 이 전시는 '회고전'의 성격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고 작가는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홍명섭에게 그러한 컨셉의 전시는 전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무의미한 생각에 불과하다. 작업을 종합, 통일, 회고한다는 시도는 '예술의 영혼', '작가의 스타일' 등, 바로 그가 배격하는 환상을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는 어떤 정신도, 영혼도 없다! 그의 전시행위는 영혼의 표현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출현하는 일종의 신경증적 반복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증상 같은 것이고 관객 역시 그러한 증상적 감각에 동참하기를 권유받는다. ● 이번 홍명섭 개인전의 이해하기 위한 핵심어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감각이다. 물질이 주는 감각, 몸을 통해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 시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 말이다. 그는 말한다: "몸의 주체가 물질과 나의 현존감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몸이 바뀌어지는 경험을 통해 달라진 생명환경을 사유해 낼 수 있도록 한다. (...) 일상적 인식의 틀과 걷도는 시지각과 몸 감각의 충돌들, 몸의 일상적 인식에 저항하는 중력의 반란, 내 몸의 감각이 새로운 보철을 체험하듯 낯선 변종의 감각으로 이끈다" (작업노트 中). ● 전시작들인 「Running Railroad—Running Sound Road」(2012), 「Waterproof」(2012), 「몸-시간의 존재방식」(2012)은 하나같이 관객으로 하여금 거의 스포츠에 가까운 신체운동을 유도한다. 「Running Railroad—Running Sound Road」의 경우는, 레일 형태의 테이프드로잉이 전시공간의 네 벽을 횡단하고, 또 이를 따라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바람소리 같은 음향이 입체적으로 운동하면서 모호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관객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게 된다. 이에 더해 관객은 무거운 '무쇠 슬리퍼'를 신고 힘겹게 중력에 저항하며 시각과 몸이 결합된 운동을 수행하게 된다. 관객은 더 이상 육신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영혼'의 망루 위에서 세계를 관조하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아니라, '몸-시간-공간'의 복합체, 달리 말해 '드로잉과 무쇠신발이 되기'라는 변신의 과정을 경험한다. 이 과정 속에서 사물에 대한 인식은 총체적으로 교란된다. 순수한 시각에 몸이 더해지고 순수한 공간에 시간이 개입되고 순수한 형태가 비정형적으로 무너지고 사물의 질서정연한 의미들이 교란되는 것이다: "일상적 인식의 틀과 겉도는 시지각과 몸 감각의 충돌들, 몸의 일상적 인식에 저항하는 중력의 반란, 내 몸의 감각이 새로운 보철을 체험하듯 낯선 변종의 감각으로 이끈다"(작업노트 中). ● 시지각은 이제 생리학(physiology)에 의해 침범받는다.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적 지성에 대조해 볼 때, 생리학은 말초적 피부감각, 근육, 통증, 피곤, 스포츠적 활동에 대한 것이다. 무쇠신발을 신고 힘겹게 레일과 음향의 궤적을 따라가는 비 관습적 체험 속에서 순수시각적 이미지라는 개념은 허구로 드러난다. 대신 그것은 '시각적-몸적 체험'이라는 창발적 경험으로 변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들은 뒤샹의 유명한 「회전판 작업」(Rotorelief)과 「빈혈증 영화」(Anemic Cinema)의 계보를 잇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뒤샹의 작업은 순수한 시각개념의 비판과 아울러 시각-몸의 결합을 예증하는 작업이다. 이미지를 모터로 회전시킴으로써 시지각을 생리학적 경험으로 변화시킨 뒤샹의 작업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시각의 육화"(corporealization of vision)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모더니즘의 순수시각이라는 개념에 대한 전형적인 전복의 전략임을 말한 바 있다. 시각이란 개념에 이미 '몸의 억압'이 개입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몸을 되살려 시각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곧 서구 근대문화를 지배하는 시각중심주의의 전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정신, 형태, 의미라는 항목, 그리고 몸, 감각, 히스테리라는 이 두개의 항목 사이에는 밀접한 상호작용이 항상 일어난다. 전자는 후자를 통제, 억압하는 반면 후자는 전자를 혼돈에 빠뜨리고 거세한다. 후자의 항목, 즉 몸의 히스테리는 그것이 과도할 때 필연적으로 '의미훼손적'이고 '탈의미적'인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어 뒤샹의 「주어진」에서, 문의 구멍을 통해 내부의 벌거벗은 여체를 과하게 몰입하며 응시한다는 행위는 사실 대상을 바라보는게 아니라 대상에게 자신의 내부를 내어주는 것,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것, 결국 대상 자체가 됨으로써 대상의 의미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리오타르는 말하기를, 작품 「주어진」에서 남성관객이 그 구멍을 통해 몰입할 때 그 다리 벌린 여자의 '보지가 된다'라고 했다: "He who sees is a cunt"). "이미 권력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시선에 항거하는 불경스러움이 만들어 낼 균열과 혼돈, 우리의 감각과 몸을 불화로 이끌 소음 자체"(-작업 노트)라는 홍명섭의 언급에서, 우리는 그가 예술을 지탱하는 '상징적 질서'를 몸의 감각을 통해서 해체하는 것이 최종목표였음을 알수 있다.
홍명섭_level casting_무쇠신발_가변크기_2012

이번에 새로 시도한 렌티큘러 작업인 「몸-시간의 존재방식」(2012)과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 레지던스에서 시도한 「Waterproof」도 동일한 맥락에 위치한 작업이다. 관객의 발걸음, 이때 허공에서 발생하는 첨벙대는 물소리 음향은 우리의 의식을 채우고 있는 인식론적 질서 속에 균열을 일으키는 효과를 낳는다. 그것은 바로 사물의 친숙한 질서를 교란하는 낯설음, 즉 프로이트가 말한 '기괴함'(Unheimlich, uncanny)의 기분 같은 것이다. 기괴함의 정서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억압된 '실재의 예기치 않은 귀환' 또는 죽음충동의 엄습임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세계'라는 것은 실은 의식에 의해 지탱되는 '의미의 정치적 질서'에 불과한 것이고, 기괴함은 그것을 언제든지 와해시키는 무서운 '우연의 재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명섭의 작업에서의 생리학적 측면은 단지 몸의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믿음의 구조를 전복하는 전략인 셈이다. 작가 자신은 그것을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표현을 빌어 '불화'(mésentente, disagreement)라고 강조하곤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 작업이 일종의 불화를 촉발-촉진하기를 바란다. (...) 우리의 사유와 지각이 달라지고 새롭게 배치되는 타자적 지점을 향해 고정된 정체성의 인식에 교란을 주어 우리가 "누구인지"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꿈꾸는 체험을 관객에 의해 더불어 창출하고자 한다"(작업노트 中). 홍명섭이 말하는 불화는 물론 '사회적 불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 내의 非사회적 작용'이고 , '사유 내에서의 非사유적인 작용', '예술 내에서의 실재의 작용' 같은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 나는 홍명섭이 중시하는 '타자'의 의미를 '전적으로 새롭거나, 전적으로 이질적이거나, 전적인 차이를 지닌 존재'로 보지 않는다. 심지어 '전적으로 좋은 존재'조차도 아니며, 가장 결정적인 점은 그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적인 차이'는 전적인 동일성이라는 또 하나의 장르이고 개념일 뿐이다. 그것은 바타이유가 말한 방출(expenditure)이 철저히 제한되어 명확한 형태와 의미의 내부로 포섭되고 새로 정의된 또 다른 동일자에 불과하다. 나는 타자를 그 어떤 신천지에서 낭만주의적 해방을 가지고 도래하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둘러싼 이 뻔한 존재들 속에, 이 동일자 속에서 우연히 분출하는 기괴한 낯설음(바로 라깡이 '실재'the real라고 부른것)이라고 이해한다. 타자란 단지 갑자기 '낯설어진 존재', 이미 항상 '분열 해체되어 있어 정의불가한 존재', '자신의 장소를 가지지 않는 존재', 바타이유 식으로 표현하면 '존재 자체에 발생하는 우연의 재난, 존재의 넘침'이라고 이해한다. 타자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즉 동일하게 보존되고 이해될 수 있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일체의 '정치사회성'에 대해 저항적일 수 있고 또 그런 방식으로만 전복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저항(resistance)이 아니고 재난 혹은 테러라고 최근의 철학이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홍명섭의 작업이 어떻게 정치에 관여되는가 하는 방법론적 맥락이 드러난다. ● 홍명섭 작업의 정치사회적 측면은 그 안에 내재한 어떤 정치사회적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들이 유도하는 낯선 느낌과 반응에 있다. 홍명섭은 "현실과 다른 미술이라기보다는 현실을 다르게 구축하고자하는 미학적 저항"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러한 낯설음은 정치사회적 의식을 가진 주체 자체의 안정된 위상을 변질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섭 작업의 정치사회적 의미는 결코 '명쾌한 표현'과 '기호학적 소통'이 아니라, 단지 모호한 알레고리, 즉 통합된 정치사회적 가치나 믿음의 허망함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다. ● 이 점에서 볼 때, 홍명섭의 작업을 마치 정치사회문제와 담을 쌓고 '순수한 미학적 탐구'로 도피한 예술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문제는 예술을 정치적 의미를 담은 대상으로만 보고 이를 주체의 현존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신학주의적, 계몽주의적 예술관이다. 홍명섭은 이 점에서도 명확한 입장을 밝힌다: "비판하는 주체는 빠져나온 상태가 되는 대상주의적 선상에서 비판의 대상을 주체와 떼어놓는 그런 입장과는 다른, 비판 대상에 앞서 그 비판이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는 것의 문제... 다른 말로 하자면, 비판의 눈은 비판의 대상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양식 같은 것이 억압된 국면처럼 철없어 보였다. (...) 내 작업에는 사회비판적 관심(반영)이나 정치적 내용이나 현실이 담길 수 있는 내부가 없다. 바깥 뿐인 내 작업은 그 자체의 작동 모습과 외부로 작용하는 어떤 감응이나 마찰을 유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내 작업의 시대와 세상에 대한 꿈이고 반응일 것이고, 그것이 내 작업의 정치적 모습/이유 일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그의 '작업이 지닌 정치적 태도'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고, 그 태도란 바로 '정치에 저항하는 태도'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을 그 어떤 의미의 매개체로 예속시키는 정치'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저항의 전략은 바로 넘쳐흐르는 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것이다. 35년에 걸친 그의 전 작업은 언어의 법, 진리의 법, 정치의 법, 그 모든 '아버지의 법' 내부로 들어가고 그 내부로부터 넘치는 몸의 불경스러운 쾌락을 찾아내는 과정의 무한한 반복이어왔다. 그것은 평화로운 즐거움이 아니라, 오직 한계와 금지, 결여와 지연을 통해 얻어지는 모순적 쾌락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행위, 즉 라깡이 말한 '향락'(jouissance)이다. 그리고 작가 홍명섭의 모습은 바로 그 향락의 회로 속에서 고통스럽게 만족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 김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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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풍경




(Im)Possible Landscape展 2012_1108 ▶ 2013_0203 / 월요일 휴관



강홍구_그린벨트 세한도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강홍구_공성훈_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김동연_김범_김소라_김홍주_문범 오용석_이기봉_이불, 이세현, 정서영

전시 프로그램 특별 토크 프로그램-문학과 미술의 만남 / 2012_1207_금요일_02:00pm 아티스트 토크 이기봉 작가 / 2012_1117_토요일_02:00pm~04:00pm 정서영 작가 / 2013_0112_토요일_02:00pm~04:00pm 송년 음악회 - 피아노가 있는 풍경 / 2012_1221_금요일_07:00pm 전시설명 / 매주 화~일_02:00pm, 04:00pm * 수능 이벤트 - 11월 한달 간 수능 수험생 무료 입장

강연회·특별공연 참가신청 / 홈페이지(www.plateau.or.kr)에서 접수 문의 / 1577-7595

관람료 / 일반 3,000원(단체 2,000원) / 학생(초/중/고) 2,000원(단체 1,000원) * 20인 이상 단체 관람료 적용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PLATEAU 서울 중구 태평로 2가 150번지 삼성생명빌딩 1층 Tel. 1577.7595 www.plateau.or.kr



삼성미술관 플라토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현대미술의 상상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현실인식의 불가능성 혹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하는 『(불)가능한 풍경 (Im)Possible Landscape』展을 11월 8일 부터 2013년 2월 3일까지 개최한다. 초상과 더불어 미술사의 가장 오래된 장르인 '풍경'은 자연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 한 시대와 개인의 현실인식을 반영한 결과물로서, 오늘날 현대미술에서도 끊임없이 재탐사되고 있는 영역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풍경에 대한 인식은 '차경(借景),' 즉 펼쳐진 공간 속의 광경을 주체의 의도에 따라 선별하여 편집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연의 기운을 담은 바람(風)과 햇볕(景)을 뜻하는 본래 의미와 같이, 풍경은 바로 눈 앞에 펼쳐진 현실 그 자체가 아닌 표면 아래 감추어진 실재를 파악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의 메타포로서 예술가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강홍구, 공성훈,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김동연, 김범, 김소라, 김홍주, 문범, 오용석, 이기봉, 이불, 이세현, 정서영 등 세대와 경향을 달리하는 14명의 작가들은 '풍경에 대한 사유'라는 단 하나의 지점만을 공유할 뿐, 재현에서부터 개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각자만의 방식으로 여러 갈래로 확장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유동성을 보여 준다. 이번 전시에서 풍경은 일상적 차원으로 시점을 이동하고, 고정되지 않은 여정을 통해 획득한 경험적 정보들을 재조립하며, 더 나아가 재현 너머의 공간으로 이행함으로써, 잘려진 프레임보다는 훨씬 더 풍부하고 유동적인 범위의 풍경을 창안한다. ● 이불, 이세현, 공성훈, 강홍구, 오용석 작가에게 풍경은 사실주의 재현기법을 이용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예술가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되어지는 역설적인 거짓임을 보여 준다. 풍경의 역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과학적인 재현의 법칙에 의거한 자연주의적인 실경(實景)이거나, 또는 자연의 숭고함을 외경하는 낭만주의적 풍경 같은 어떤 전형성의 이미지인데, 우리시대의 풍경 사유자들은 이러한 풍경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패러디 방식을 통해 그 전형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이불은 20세기 근대사 속 건축, 인물, 사건들에서 차용한 풍경을 통해 시대와 국적을 가늠할 수 없고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기억의 파편들로 재구성된 작가 만의 새로운 서사를 제시하여 유토피아라는 근대의 거대담론을 해체하고 자기 의도대로 새로운 역사쓰기를 시도한다. 이세현은 동양적 시점으로 그려진 이상적 산수 풍경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밀하게 묘사된 현실의 풍경을 제시하여, 시각적 이동에 의해 여러 지점에서 획득한 풍경들을 재조립하여 일련의 관조적 풍경을 다시 만드는 작업을 보여 준다. 공성훈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화면을 압도하지만, 실제로는 함께 병치한 하찮은 일상들로 그 장대함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통해 그림 이면에 실재하는 현실 또는 불안함을 드러낸다. 강홍구는 과도한 도시 개발로 풍경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믿을 수 없을 일들에 대한 오마주를 디지털 합성이나 아크릴 페인팅으로 풍경을 새롭게 구성하여 보여 주며 오용석은 영화의 끝 장면이 줌아웃에 의해 스토리를 종결하는데 주목하여 이때 드러나는 조감의 풍경과 구체적인 삶이 삭제된 근대의 관조적인 풍경이 흡사한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 이에 비해 김범과 김홍주는 풍경을 모티브로 하여 시각적, 지각적 탐구를 보여 준다. 김범은 단 몇 줄의 문장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의 미약함을 걷어 내고 인덱스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제시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냄 으로써 '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한다. 김홍주는 회화에 있어서의 '재현'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대상을 고립시키고 조망하는 시선의 결과로 풍경은 마치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변경되는 동시에 배설물 같은 구체적인 풍경을 관객의 면전에 대면시켜 재현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문범과 이기봉, 정서영은 풍경을 묘사하지만 보여지는 외피와 전혀 연관없는 또 다른 주제로 작품을 보여 준다. 문범은 물질에 대한 사유를 통해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을 지속하고 있지만, 신체를 개입시킴 으로써 실재와 허구가 공존하는 "가능한 세계들(Possible Worlds)"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기봉은 어떤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 갈 운명의 미약한 존재들, 즉 우리의 지식과 욕망이 잠시 머무르는 장소를 풍경으로 파악하여 보여 준다. 정서영은 장소를 설정하는 지도가 질서와 지식으로 환원된 풍경의 재현임을 직시하고 지도 대신 직접 몸으로 체득한 자연들의 총합을 '괴물의 지도'로 제안하여 관객들이 주어진 단서들을 따라가며 각자 마음 속에 새로운 풍경을 그리도록 유도한다. ● 마지막으로 김나영+그레고리 마스, 김동연, 김소라는 현실 인식 그 자체를 풍경으로 해석한다. 김나영+그레고리 마스에게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매혹적인 현대도시의 풍경은 삶이 삭제되고 텍스트로 남은 허구적인 공간인 동시에 그마저도 억지로 분절된 'PERF-ECT'라는 단어처럼 불가능한 완전함으로 존재하며, 김동연에게 불완전한 도시의 형상이나 그물망처럼 이어진 교차로들로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풍경은 현대 과학 문명의 이상과는 달리, 판옵티콘에 종속되어 폐허가 되거나 추상이 되어 버린 현실이다. 또한 김소라는 '풍경'을 담아 내는 행위를 '사냥'으로 인식하여 사냥의 행위로 발생하는 소리를 채집하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믹스되고 충돌하는 사운드를 통해 구성한 유목적인 풍경을 보여 준다. 현대미술은 우리의 눈과 의식으로는 풍경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대신 뒷골목과 같은 인식의 틈과 여백, 전체의 부분을 파악할 뿐이며 그것만이 삶을 생생하게 접촉하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이라 말한다. 풍경은 더 이상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멈추고 주체의 '외부'가 의미하는 '안에 존재하지만 경험적으로 지각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은폐된 차원'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풍경'이라는 단 하나의 관심만을 공유하는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풍경에 대한 사유'가 작품이라는 체험의 수준으로 확장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불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대답이자 연속되는 질문거리로 남을 것이다. 작가들의 무한 상상력으로 채워진 이 전시는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작은 강의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사적인 장르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대미술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강홍구_그집 암벽

강홍구의 사진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추억한다. 「그린벨트-세한도」는 청정지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과 달리 폐허로 남은 그린벨트의 광경을 추사 김정희의 명화에 병치시켜 합성한 장면이다. 함께 출품된 「그 집」, 「사라지다」 시리즈 역시 이제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서울 근교 재개발 지역의 잊혀진 기억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단순한 사진 기록으로 제시하지 않고 디지털 합성으로 이미지를 연출하거나 표면 위에 아크릴로 색을 칠해 실제도 허구도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풍경으로 재구성한다. 현실의 피폐함 위에 작가의 손으로 덧 입혀진 아름다움은 우리사회의 안타까운 상황을 더욱 애잔하게 드러내며 사라지고 죽은 풍경을 애도한다. ● 공성훈의 회화는 그가 거주하는 경기도 벽제의 야경이나 여행 중 마주친 자연경관과 같이 평범한 일상에서 비롯된 풍경들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화의 이상과 낭만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화면의 빈틈 어딘가로부터 새어 나오는 어둠과 긴장감은 보이는 현실의 외피 너머의 실재를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의 「개」 연작은 그가 매일 밤 거닐던 벽제의 뒷골목에서 사육되는 개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벽제의 일상 중 작은 일부분이지만, 개들의 비루한 존재는 현대인의 삶을 비춘 알레고리로 씁쓸함을 전한다. 웅장한 자연을 그린 그의 최신작들 역시 얼핏 상투적으로 보이지만, 폭풍이 곧 몰아 닥칠 듯한 풍경과 인물들의 낙천적인 행동 사이의 부조화를 병치하며 풍경의 불안함과 불길한 기운을 증폭시킨다.
김나영+그레고리마스_Acceptance

김나영 & 그레고리 마스의 출품작 「Acceptance」는 플라토 옥외공간을 위해 제작된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으로, 눈에 띄지 않고 설치가 어려운 공간의 조건들을 제목 그대로 '수용'하고 이에 따른 풍경의 의미를 모색한 작업이다. 밝은 형광등 불빛으로 'PERFECT'라 쓴 글자들은 어둡고 비좁은 설치공간을 '완벽한'이란 단어로 새로운 풍경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한 작품의 의도를 담고 있다. 또한 작가는 오늘날 도심을 가득 메운 네온사인을 연상시키는 작품의 불빛을 통해 경제와 소비의 현대적 사회 풍경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동안 미술사에서 이상화된 '완벽한' 풍경이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존재하는가 의문한다.
김동연_Interchange 12

다양한 도시풍경을 주제로 작업해 온 김동연의 설치작품은 도시의 구조나 조형적 특성에 집중하기 보다 그 내면에 잠재한 삶의 흔적들에 주목해 왔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성스러운 도시 12」는 전쟁과 자연재해에 의해 파괴된 도시에 대한 성찰로서, 폐허인지 건설 중인지 알 수 없는 불완전한 도시의 형상을 통해 현대사회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반영한다. 「인터체인지 12」 역시 대도시를 잇는 교차로를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그물망처럼 이어진 '연결의 고리'들로 재해석 한 작업이다. 도시의 실제 인터체인지 구조를 해체시켜 재구성한 이 작품은 소통이 근절된 현대사회의 일면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와 사회 사이 '관계'의 본질을 성찰한다.
김범_Entrance Key

김범의 회화와 영상 작업들은 '다른 것을 보기'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를 통해 '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한다. 캔버스의 여백 위에 세 문장의 지시어들을 써놓은 「풍경#1」은 시각이 아닌 지각으로 푸른 하늘아래 무성한 나무들과 맑은 강물이 흐르는 심상풍경을 관객 스스로 완성하게 한다. 함께 전시된 두 개의 작은 캔버스 위에 펼쳐진 산맥들은 「자동차 열쇠 #3」, 「현관 열쇠」라는 뜻밖의 제목으로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을 드러내어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작가의 출판물인 「변신술」에서 발췌한 "풀이 되는 법", "바위가 되는 법"은 작가의 예술가적 태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로 변신을 통한 현실 저항의 방법을 제안한다.
김소라_풍경

김소라는 다양한 사회 주체들과의 교류와 협업을 통해 일상으로 조용히 침투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풍경: 한 지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멀어지는 확산운동」에서 작가는 소리라는 비물질적 재료를 이용함으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일상과 자연 풍경을 자유롭게 소요하는 체험을 하도록 이끈다. 작가는 자연을 '풍경'으로 담아 내는 행위를 '사냥'으로 인식하여 멧돼지, 까치를 포획하는 데서 발생하는 소리를 기록했다. 채집한 소리들은 작곡가 장영규에 의해 편집되어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8개의 스피커에서 다른 음량으로 뒤섞여 흘러 나오도록 고안되었다. 현실적인 시공간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믹스되고 충돌하는 각각의 사운드들은 은색의 폭포수를 연상시키는 인공 조형물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마치 소리의 숲을 걷는듯한 이색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김홍주_무제

김홍주의 작품은 회화의 근본적인 문제인 '재현'에 천착하여 이를 통해 회화의 기본 전제인 일루저니즘을 역설적으로 비판한다. 일견 한 폭의 서예작업을 연상시키는 「무제」는 사실 봄철 농사를 위해 갈아엎은 밭고랑을 그린 풍경이다. 서구적 원근법 대신 부감법을 차용하고 풍경의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생략한 그의 풍경은 서예작품과 흡사한 조형물을 창출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무의미한 텍스트 읽기에 안간힘을 쓰게 만들며 사실적인 묘사 이면에 비현실적인 풍경을 장치해 둠으로써 시각적 유희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손으로 눌러 만든 테라코타 오브제들은 신문지 위 흙덩이 그림의 배설물 같은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면서 재현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문범_Secret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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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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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iful Star






뷰티풀 스타展 2012_1109 ▶ 2012_1113




강서영_난생 처음의 새벽. 부작용의 시간



초대일시 / 2012_1109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서영_강영민_김미루_나얼_낸시랭_마나프로젝트 마리킴_반달_서동욱_아트놈_오용석_오키드레드 유창창_윤지웅_이두원_이동욱_이명복_이베르 이해민선_임지빈_원용선_왕지원_정연연_조송 차지량_찰스장_타카히토 이리에_필승_하지원_하정우

주최 / 국민일보 주관 / Beautiful star space 기획 / 마리킴 후원 / (주)벽산엔지리어링_(주)쌈지농부_(주)차오름F&B (주)YG Entertainment_조수빈 앵커_(주)BURT'S BEES 김순응아트컴퍼니_김응우변호사_(주)museum.people (주)국민비전주식회사_(주)우주아트 협찬 / (주)Byul Collection_(주)Homestead Coffee (재)여의도순복음교회_(주)Mick jones's Pizza (주)Superior Holdings_법무사정금범사무소_세무법인 다솔

관람시간 / 10:00am~06:30pm

비욘드 뮤지엄 Beyond Museum 서울 강남구 청담동 49-21번지 Tel. +82.2.577.6688 www.beyondmuseum.com




암울한 현 사회이슈를 영아티스트의 시각으로 조각하고, 한국의 아름다운 것들이 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꿈을 버리지 않고 내일을 향해 꿋꿋이 살고 있는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작가와 기업 개인 등이 후원, 협찬, 참여하여 함께 아름다운 것들을 나누는데 본전시의 목적을 두고 있다. ■
강영민_상호침투 Mutant Penetration(Navy)_캔버스에 유채_100×80cm_2012
반달_Dirty Ocean_캔버스에 스프레이_162.2×130.3cm_2012



시장 좌판에서 가지런히 죽은채 누워 손님을 기다리는 생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치열히 살았을 바다속 그들의 한 때를 그려보고 싶었다. ■ 반달

서동욱_s# 밤_성북동 거리_캔버스에 유채_97×145.5cm_2011
오용석_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_Nothing Happened_캔버스에 유채_72×116cm_2009
왕지원_Untitled-1
유창창_Minimum Fear. Come. Property_종이에 프린트, 혼합재료_15.3×29cm_2010
이동욱_순환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97×130cm_2012
이명복_바람이 분다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0×116.5cm_2012
이베르_8.3° √ THREAD POOLING 5, 3.2° √ THREAD POOLING 3, 21° √ THREAD POOLING 2, 50° √ THREAD POOLING 4, 55° √ THREAD POOLING 7, 80° √ THREAD POOLING 8, 88° √ THREAD POOLING 6, 111° √ THREAD POOLING 9, 360° √ THREAD POOLING 1 _자작나무 보드에 아크릴채색, 연필, 파스텔, 스크류, 실_2012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유기체가 내부와 외부가 한 공간에 연결되어 있는 klein bottle처럼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유기체중에서 공존하는 서로의 에너지를 자연 자각하지 못한 종류는 인간뿐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우러져 역사가 되어가는 모습도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신나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이야기는 모순이 된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 이면에는 언제나 자의식을 망각시키는 마취제가 숨겨져 있다. ● 형태와 모양은 단지, 형태와 모양일 뿐이다. 물 잔이 깨어 사라져도, 잔 속에 담겼던, 물은 바닥 위에서, 탁자 위에서, 그리고 쏟아진 물을 닦은 천 안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본연의 물질로 존재하고 있다. 다만, 다른 곳으로 잠시 옮겨간 것뿐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잊어버리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 이다. 우리는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가 지닌 본질을 자각할 수 없을 만큼 무뎌진다. 무거워 진다. 바쁘게 활동하는 만큼 내부는 잠들어 있다. ● 삶은, 어렵다, 고되고, 서글프다. 하지만 죽는 건, 더 어렵다, 그 너머에 상황이 궁금하다고 갔다 와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한번 다녀와 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볼 수도 없어서, 외롭고, 함께 나눠가질 수 없어 삭막하고 건조하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에너지를 데리고 끝도 없이 돌고 돈다. 잊어버리고 기억이 나지 않아서, 되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지난 과오를 되짚어 볼 수도 없다. 삶을 타인과 함께 나누려면, 죽음도 나누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둘레에 쳐져 내려온 그림자도 마주 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마음을 쓸 시간을 내어 주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감(感) 같은, 종류의 에너지를 돌보는 일은, 곧 스스로를 느끼고 인지하는 일이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reflection point로 바라보는 것이나,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이켜 생각해보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상황 안에 놓여진 것"뿐 이다. 이런 상황들이 절박하고 무서워지는 건, 무뎌지고 무감각 해져서 스스로를 움직이는 방법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실은 배가 고픈데, 먹는 방법을 잊어버려서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죽어있는 것 또한 모르고 스쳐 지나가버린다.

임지빈_Slave_피그먼트 프린트, 페이스 마운트_1200×53.8×80cm_2012
정연연_Addicted to herself_종이에 수채, 과슈, 잉크, 금도금_130×90cm_2011
찰스장_왕관을 쓴 하트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2×130.3cm_2012
타카히토 이리에_Human Machine_사진_110×90cm_2012
필승_피에타 조각상_pink_향(香)이나는조형물_파라핀, 향료, 투명 아크릴관_30×40×20cm_2011



나는, 서른세 살이고, 문명이란 것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인간이기에, 내가 말하고 싶은 그 모호한 감(感) 이란 것도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다듬어지고 획일화 된 것일 것이다. 그 경계를 가늠 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 나를 섬뜩하게 한다. 당연하게도, 매일을 모든 것을 실험하며 배우는 아이들의 행동을 우리는 대부분 실수라 부르고, 붙잡아 가르 친다. 어른들의 삶에 알리바이가 된 아이들에게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우리의 룰을 알려준다. 그들이 앞으로 어떤 Trauma적인 경험을 하게 될까 걱정하면서, 그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의 Trauma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어딘지도 모를 곳을 헤 메고 있다. ● 아이들은 귀족과도 같은 존재다. 이해 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을 늘어놓는 그 조그만 귀족들을 세워놓고 다그친다. 해석 한다. 통하지 않으면, 무의식적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이들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한 상태에 있다. 이는 모든 잠재력과 이성을 포함하는 사고의 영역이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 이기도 하다. 이성을 초월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 메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직관, 감(感)이라고 부른다. 알 수 없거나, 세상 속에 놓여진 채 무뎌져서 "나" 는 없고. "나" 일거라 추측하는 껍데기만 있다. "내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너" 도 "우리도" 없다. ● 시작도, 끝도, 삶도. 죽음도 동일한 선에 있고, 다 함께 사라졌다가 같은 순간으로 되돌아 온다. 인간의 몸 하나 하나가 곧 우주다. 인간의 몸은 뼈와 살, 피, 장기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꼭 그 만큼만 줄어든다던, 소실된 21g 속엔 설명하기 힘든 직관도, 감(感)도, 동일한 순수 에너지도 사이 좋게 다 살아 지내고 있지 않을까? ● 감각자체에는 크기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없다. 크기와 거리감각은 경험을 바탕으로 터득해야 한다. 나무가 빽빽한 열대 우림에서 평생 살았던 사람은 시야가 넓게 펼쳐진 야외로 나오면 손을 내밀어 산꼭대기를 만지려고 한다고 했다. 산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감(感)이 안 잡히기 때문이다. ● 나는, 당신은, 우리는, 손을 내밀어 산꼭대기를 만지려고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평생 산 곳이 나무가 빽빽한 열대 우림이라는 걸 아예 모르고 있었던 걸까? ■ 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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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의 경로들






이정배_이진주 2인展 2012_1109 ▶ 2012_1209 / 월요일 휴관




이진주_경계 당하는 기억들_천에 채색_104×117cm_2012



초대일시 / 2012_1109_금요일_05:00pm

관람료 / 1,000원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소소 GALLERY SOSO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1652-569번지 예술마을 헤이리 Tel. +82.31.949.8154 www.gallerysoso.com




갤러리 소소에서는 11월 9일부터 12월 9일까지 이정배, 이진주 작가의 2인전『단서의 경로들』을 개최합니다. 이정배 작가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과의 대립에서 화해의 지점을, 이진주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의 자취를 더듬어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_오후로 가는 길_천에 채색_130×168cm_2012
이진주_모든 입 다문 것들의 대화_천에 채색_112×69cm_2012
이정배_컬렉션 Collection_레진, 나무_80×100×25cm_2009
이정배_holliday_레진, 나무_264×15×15cm_2011_부분
이정배_My hobby_레진, 합성수지_55×70×22cm_2011

우리는 대상을 바라볼 때 심리적인 상황과 학습된 경험을 바탕으로 대상에 감정을 이입합니다. '나'와 내가 바라보는 대상 사이의 심리적 간극은 기억, 경험, 감정 등을 통해 조정되며 이 조정의 과정은 '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동시에 자기치유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정배, 이진주 작가는 현재에서 자신의 내면을 반추하고 더 나아가서는 나와 나를 둘러싼 외부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것입니다. ■ 갤러리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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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sten to - 신나리아展 』

Shin Naria Solo Exhibition :: Painting







▲ 신나리아, Listen, 146x97cm, Mixed Media on Paper, 2009






전시작가 신나리아(Shin Naria)
전시일정 2012. 11. 08 ~ 2012. 12. 04
관람시간 Open 10:00 ~ Close 18:30
∽ ∥ ∽
갤러리 아우라 플랫(Gallery AURA flat)
서울시 마포구 망원동 386-11
T. 02-334-6750
blog.naver.com/flataura







Listen to...
-미숙한 여성인체의 정신적 외상과 비 형성된 자아의 조각-

신나리아


통괄적이고 집약적인 일반적 관념의 속성들 속에서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면 뼈밖에 남아있지 않아 앙상한 인간의 어떤 양상들이 덩어리진 채 떠다닌다. 우리가 속해있는 세상은 우리 자신과 잘 어울려 융화되어 있는 한편,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잔류물들이 쉴 틈 없이 충돌하는 잔인하고 미성숙한 곳이다. 그런 충돌의 흔적들은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치 있고 아름다움의 찬미이자 선을 나타내며, 섬세한 공허함 그 자체인 인체에서 상처입기 쉬운 연약한 생물체의 창백함이 느껴진다.


▲ 신나리아, Divine Tree, 145x79, Mixed Media on Paper, 2010


본인의 작업에 있어서 인간으로써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면서 강인함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의 양면성을 보이는 ‘여성’ 이라는 비 형성된 인체의 조각들을 통해 현재와 과거, 시각적, 육체적,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와, 이질적인 편력들을 편집증 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구현하였다. 인간이기에 앞서 여성, 여자라는 성 정체성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무시하지 못할 소음들을 얼마나 쉽게 가두어버리고 묵살하는지 우리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스스로를 이질적인 공간 속에 가두고 상처입고, 치유하는 과정 속에는 연약한 정신적 존재임을 부정함과 동시에 합리화로 무장한 인체의 아름다움이 몸부림치며 공존함을 색과 공간을 통하여 시각적인 혼돈과 스탕달신드롬의 정신적 충돌을 야기한다.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진 여러 여성들을 바라볼 때에도 상당히 공격적이면서도 내 안의 여성과 같음에 끌림을 느끼게 돼는 것은 이 모든 여성성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돼있어 다른 여성에게서 나를 보게 돼는 양상이다.


▲ 신나리아, Listen, 145.3x90.2cm, Acrylic on Paper, 2012


본인 작품에서의 여성 인체들은 자신의 소리를 들으려 애를 쓰고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다른 여성의 목소리도 듣고 메아리친다. 본인 자신의 정신적 사유를 통해서 현재 많은 여성들이 겪어왔고, 겪고 있고, 겪어야 하는 불편하고 편협한 외상의 경험들은 결국에는 미숙한 여성성과 성숙한 여성 신체의 관계를 상호보완 함으로써 그 존재성을 인정받고 싶은 모호한 욕망의 주체를 말하고자 한다. 인체의 언어로 호소하고 욕망을 표출함으로써 다채로운 공간 안에서의 인간의 본질과 인체자아의 정체성의 투영함을 말하고자 한다. 이 표현함의 자체에서 그 어떤 설명도 읽으려 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 여성 그 자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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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arture




박동삼展 / PARKDONGSAM / 朴東三 / installation 2012_1107 ▶ 2012_1113



박동삼_Baggages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박동삼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1107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57th 갤러리 서울 종로구 송현동 57번지 Tel. +82.2.733.2657 www.57gallery.co.kr



박동삼-사물의 이해, 사물의 상상 ● 서구의 근대는 타자들과의 만남을 촉진시켰고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동경과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이란 것 역시 그 양가적 감정을 지닌 개념이다. 근대에 들어와 이른바 여행과 모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연히 발달한 과학기술과 교통수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여행'이란 문화가 본격적으로 촉진되었고 일상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적 도시생활과 임금노동자들의 삶은 주말과 여가, 휴가와 여행이란 것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일요일이면 가까운 야외에서 피크닉을 즐기거나 휴가철에는 비교적 먼 거리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그것이 근대인으로서의 덕목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여행을 가기위해서는 가방이란 것이 필요하다. 이전부터 물건을 담는 도구들은 있었지만 근대의 여행문화는 여행용 가방의 발명을 촉진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루이뷔똥 역시 당시 여행용 가방으로부터 출발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집을 나서면 늘 가방 하나를 들거나 매고 다닌다. 학생부터 직장인, 일반인들이 모두 가방을 필요로 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잠시 어디론가 방랑과 유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가 가방이다. 비교적 장기간의 여행을 떠날 경우 커다란 가방에 앞으로 닥칠 여정과 그곳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품목들을 예상해서 담는다. 여행은 가방으로부터 시작되고 가방에 의존해 흥분되고 불안하기도 한 여정을 꾸리는 것이다.
박동삼_Baggages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박동삼은 오랜 외국생활과 잦은 공항출입으로 인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여행자들과 그들이 가방에 주목했다. 공항터미널의 출발 Depature이라 쓰인 문 쪽으로 한 손에는 여권과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끌며 들어가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떠올려 가방을 이미지화했다. 아니 가방과 수하물로 부치는 종이박스(사과박스 등) 등을 재현했다. 그가 가방과 종이박스를 빌어 말하고 싶은 것은 가방에 담긴 무수한 사연과 그 가방과 짐을 부치는 이들의 여행과 연루된 각각의 감정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사실 누군가의 가방은 늘 궁금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고 그 공간은 한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삶을 간직하고 있다. 공항터미널이란 공간과 수많은 여행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방과 짐은 이별과 만남, 낯선 곳으로의 이주 등 저마다 다양한 내용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개별적인 사연과 감정을 가방과 종이박스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유추하게 한다. 그런데 작가가 가방과 종이박스를 재현하는 방법론이 특이하다. 그는 실제 가방과 종이박스에 'scotch 313' 투명 테이프를 여러 겹 부착해서 떠낸다. 이른바 캐스팅 기법으로 실제 사물의 피부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원본의 피부에 달라붙어 마치 사물의 허물인양 투명한 스카치테이프, 이른바 유리테이프만으로 이루어진 가방과 종이박스를 제시한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연약하고 가볍고 낯선 가방과 박스는 내부를 차단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가방과 박스의 기능 자체를 갑자기 무화시켜버렸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방, 가방으로서의 가능성을 상실한 의사가방이다. 간혹 여름철에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비닐로 만들어진 투명한 가방을 연상시지만 이 가방은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해하고 있는 가방이란 사물과는 무척 다른 존재다.
박동삼_Baggage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유리테이프를 여러 겹 발라서 두께를 만들고 조심스럽게 그 피부에 붙어 부풀어 오르면서 독립되어 떨어져 나온 자취다. 그것이 가방과 종이박스의 형태를, 외양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판화/조각적 기법이다. 캐스팅기법의 확장된 차원이자 가장 원초적인 대상의 재현술에 가깝다. 테이프로 드로잉을 하거나 주어진 화면을 덮어나가면서 회화를 만들거나 벽면에 부착되어나가면서 벽화처럼 보여주는 작업, 혹은 실제 공간의 갈라진 벽면이나 깨진 창 등을 봉합해나가면서 치유적 의미를 선보이는 여러 작업을 접했지만 테이프 자체로 이렇게 실제 사물을 캐스팅하는 작업은 새롭고 낯설다. 그리고 재미있다. 투명한 유리테이프는 일정한 면적을 지닌 직사각형 꼴이다. 긴 띠와 같은 그 테이프의 길이를 조절해 실제 사물의 피부를 감아나가면서 물리적인 두께를 만드는 과정은 시간의 경과, 노동의 흔적과 함께 내·외부 모두한 눈에 보여준다. 여행용 가방과 종이박스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그 가방과 짐에 담긴 여러 사연들의 속내를 마음껏 들어다보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은연중 관음증의 유혹을 자극한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해준다는 마술 같은 일이다. 동시에 가죽이나 천, 종이로 이루어진 가방과 박스가 갑자기 투명한 테이프로 돌변 하는 순간 우리는 기존에 사물에 대해 알고 있던, 갖고 있던 지식과 감정이 붕괴되는 체험을 갖는다. 이미 오래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물에 달라붙는 익숙하고 기계적인 감각과 피상적인 이해를 무력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사물을 그 자체로 다시 인식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사물에 이름을 지어준 명명성의 체계 또는 제한된 감각이나 고정관념, 혹은 그 사물의 기능성에 따른 이해의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인간중심적인 사유의 결과다. 그러나 사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진 기능을 실행하면서도 이미 그것 자체로 낯선 존재가 되어 현존하다. 더불어 사물을 스스로 발화하는 존재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 박동삼의 작업은 익숙한 사물의 재질을 낯설게 만들어 보이고 인간에 의해 규정된 모든 명명성과 기능성의 체계를 또한 지워버린다. 기본적으로 '사물에 부여된 물질적 특성과 기능적 속성, 완성된 고유의 기호'를 망실시킨다. 그로인해 사물 자체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하며 그 사물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해준다. 그것은 익숙함과 상투적으로 길들여진 세계에 구멍을 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미술의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의 작업은 항상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자신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연유한 문제를 주제로 끌어올리고 아울러 이를 흥미로운 판화적 공정 내지는 확장된 캐스팅 기법에 의해 공간에 설치화 되거나 이미지 재현과 관련된 흥미 있는 질문을 던지면서 전개되었다. 개별적인 작품 하나하나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복수로 연결되어 확산된다거나 사물, 존재의 피부에 붙어서 떠내는 이른바 프로타쥬적인 기법의 색다른 시도, 현실에 저장 잡힌 인간존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나 환상이란 메시지를 반복해서 유지하면서도 매번 소재와 재료를 달리해서 색다른 시각적 오브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사물들의 존재를 질문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자 한다. 그 사물에 들러붙은 모든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기의를 떼어내고 그것 자체와 대면하고자 한다. 날것으로서의 사물이자 명명서의 그물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물의 민낯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진정한 주체의 시선으로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아니다. 바로 예술가의 시선으로 말이다. ■ 박영택
박동삼_Baggages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Park, Dong Sam-Understanding of things and Imagination of things ● The modern west promoted meeting with others and gave longing for exotic scenes and curiosity and fear on foreign culture. Orientalism is also the concept with ambivalent emotion. In the modern time, the era of travel and adventure open. Of course the advanced science technology and transportation allow this. From that moment, 'travel' culture was promoted actively and placed itself in our ordinary life. In the modern city life and life of wage earners, weekend, leisure, and travel became essential elements. Sunday they enjoy picnics outside and go farther for travel on a vacation time, which became the modern people's virtue. For travel, bags are needed. There were tools containing goods but the modern travel culture promoted invention of travel bags. The well-known Louis Vuitton also started from the travel bag at that time. Today people are carrying a bag when they get out of house. From students, office worker to the ordinary people, we all need a bag. It is a container for necessary object to live life and at the same time a tool able to travel to some where for a moment. In the case of relatively long-term travel, we estimate item necessary over there for coming travel in a big bag. Travel starts from a bag, packing for a travel exciting and uneasy depending on a bag. ● Park, Dong Sam, recollecting long-term foreign life and often experience in and out airport, payed attention to traveller and their bags. Recollecting travellers entering toward the gate written 'Departure' in an airport terminal holding passport in one hand and dragging a bag in the other hand, the bag was imaged. He reproduced cardboard boxes(apple box, etc) for sending bags and luggage. what he wanted to say borrowing bags and cardboard boxes was countless stories contained in bags and curiosity on each emotion connected to their travel sending the bags and luggage. In fact, someone's bag is the space bringing curiosity and the space holds a person's stealthful, private life. Airport terminal shows that space, countless travellers, and their bags and luggage hold diverse stories of farewell, meeting, moving to foreign place, and so on. The artist implies the countless personal stories and emotions through bags and cardboard boxes, which brings analogy. By the way, the artist's methodology of reproducing bags and cardboard boxes are unique. He attached transparent tape of 'scotch 313' to actual bags and cardboard boxed and molded out. It is so-called casting method, reproducing the volume of the actual things as it is. As it is attached to the volume of the original things, it presents bags and cardboard boxes composed of only transparent scotch tape, so-called glass tape, like skin of object. The weak, light, and unfamiliar bags and boxes able to see inside clearly nullified the function of bag and cardboard to block and protect inside suddenly. Bags able to see inside clearly is the dead bag losing its function as a bag. Transparent bags made by vinyl in the summer time are recollected but the bag cannot be used. Therefore, it is very different existence than the bag we already know and understand. ● It is the trace of putting glass tape in many layers to make thickness, attaching to the volume carefully, and inflating and falling out independently, which reproduces the shape and appearance of bag and cardboard. It is interesting technique of engraving and sculpture. It is the expansion of casting and near the reconstruction of the most primitive object. While I have seen many works drawing and making a painting by covering given screen with tape, showing like fresco by attaching to walls, or presenting therapeutic meaning by sealing crack walls or broken windows of actual space, etc, the works of casting actual things like this with tape itself is new, strange, and fun. The transparent glass tape is in the shape of a rectangle with an regular area. The process of making physical thickness by adjusting length of the tape like a long band, winding volume of actual things shows all of the inside and outside in an eye along with passing time, trace of labour. While looking into the inside of travel bags and cardboard boxes, I am captured with an emotion like looking into many inside stories contained in the bags and luggage, which stimulates temptation of voyeurism. It is like a magic that is able to see what cannot be seen. At the same time, when bags and cardboard boxes made of leather, cloth, and paper transform to transparent tapes suddenly, we experience of collapsing knowledge and emotion that we have on the existing things. Already long ago, surrealists, through a series of works of nullifying the familiar, mechanical sense attached to things and superficial understanding, made us recognize the things themselves as they are again. What we know about things is only about name system named to the things, limited sense, fixed idea, or understanding by the function of the things. This is result of very human-centered thinking. However, while object are made by human and operated their function, they exist becoming alien existence themselves. Along with this, things are beings igniting themselves. What we know about things is not much. ● Park, Dong Sam's works make familiar materials of things unfamiliar and also erase system of all fames and possibilities defined by human. Basically he makes it lose 'physical characteristics and functional nature imposed to things and their own marks completed', which lets us imagine the things freely and recognize the existence of the things newly. This is to hole in the world familiar and tamed in the manner of cliche. His works were always established in such a context. The artist was pulling out issues from ordinary, concrete life as theme, installing it with an interesting engraving process or expanded casting method, or unfolding with interesting questions related to reproduction. It suggests a different trial of so-called frottage, not staying at an individual work, expanding by connecting to the multiple, or attaching to the skin of things, existence and taking out, and different visual object, image with different materials everytime, while repeating and maintaining the ideal world or fantasy that human occupied by reality dreams. And above all, he questions the world surrounding ourselves and the existence of things, and imagines them freely. He detaches all of the cliche and mechanical signified attached to the things and faces itself. He tries to look into raw things and the naked face of things not occupied by the net of name. That is the longing to meet the world in the eye of real being in the end, that is, with the artist's view. ■ Park, Young Taek

박동삼_Baggages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Departure ● 모든 사물은 '물체'라는 외형의 개념과 그것을 구성하는 특질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물질은 '형태'를 수용하며 동시에 색깔, 촉감, 기능 등을 내포하는 명사로 쓰인다. 일례로 나무로 만든 '의자'는 4개의 다리를 가진 기능적 물체이지만 그것을 거푸집으로 삼는 물질은 '나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의자를 단순한 '사물'로 보지 않고 미학적 차원에서 분류하면 소쉬르가 정의한 기호의 근본을 이루는 두 성분인 '기표'와 '기의'로 구분할 수 있다. ● 즉, 이 의자라는 기호에서의 기표는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고 이해가 되는 형질적 부분이다. 그것은 둥그렇거나 혹은 사각이거나, 아니면 다리가 없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의자'라는 물체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기호의 표현이다. 그러나 기의는 이와 대조적으로 그 의자를 의자답게 하는 것을 포함한 비물체적, 비물질적, 언어적 관계성까지 광의 한다. 그리고 이 기표와 기의는 하나의 상징이나 기호 속에 표상되며 기의는 유동적인 내용을 지정함과 동시에 어떤 외적 조건에서도 자유로운 의미를 지닌다. ● 우리는 일상의 사물을 물질적 특성, 다시 말해 사물을 구성하는 물질뿐만 아니라 사물의 기능을 통해서도 물체의 정의와 용도를 인식하고 이해한다. 나무 책상을 보면 딱딱한 느낌이 날 것 같고 공부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되고, 큰 배낭을 보면 무거울 것 같고 어디론가 걸어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렇듯 사물이 가진 기의는 표상된 기호로 완성되고 그 기호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여러 가지 개념을 던져준다. 물론 각 물체가 지니고 있는 물질적, 기능적 특성에 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을 버린다면 물체가 지닌 기의를 보다 색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박동삼_Boxes_투명 테이프 캐스팅_가변설치_2012

내 작업의 근간은 기호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기본적으로 물체에서 인식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순 없을까라는 자문에서 출발한다. 사물을 이해하는 시각을 다른 방향으로 하면 어떨까라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특히 사물의 물질적, 기능적 속성에서 이탈했을 때 비로소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유효하게 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작금 선보인「Departure」연작이다. ● 사물의 속을 비워버리고 모양으로만 존재하게 했을 때 사물은 물질적 특성과 기능적 속성, 완성된 고유의 기호를 잃어버린다. 어떤 물체에 대한 인식적 형태가 유효하다면 여전히 우린 사물 고유의 기능을 지정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사실 새로운 사물로 치환되었다 해도 그르지 않다. 가방은 가방이지만 가방이 가방의 기능을 상실한 순간 관념성과 물질로 인한 기호성은 와해되고 해체되며 여기서 물체의 본질은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인식에 대한 해체는 항상 안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안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심 없는 상황에서 더욱 증폭된다. 개념이 탈개념화 됨으로써 진정한 개념성을 띠는 셈이다. ● 나의 작업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관심 있는 사물에 적용된다. 그중 하나가 여행용 가방과 큰 박스들이며, 주제는 'Departure'이다. 이와 같은 주제는 떠남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공항에서 볼 수 있는 글자 'Departure'를 그대로 빌려왔다. ● 작업의 동기는 삶의 공간이 자주 바뀌었던 지난 시간을 바탕으로 한다. 물리적이지만 이미 지나가버려 의미화 된 시공을 밑동으로 한다. 나는 언제나 공항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궁금했다. 비슷한 가방을 들고 다니지만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가방은 무엇인가 다르게 보였고, 가방마다 담긴 이야기가 다를 것 같아 유독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곤 했다. 일반 거리에서조차 여행용 가방이나 큰 박스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여행자의 들뜬 마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의 분주함,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슬픔, 새로운 삶을 향해 떠나는 듯한 긴장과 설렘 등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그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바있다. ● 그러한 감정과 기억들을 거두기 위해 이번 작품들은 여행용 가방과 큰 박스를 유리테이프로 캐스팅해 속을 비우고 모양으로만 떠내어 실루엣으로 표현했다. 가방이라는 양태적 개념은 인식의 범주에 있지만 실제 가방의 용도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기의의 폭을 확장시켰다. 특히 여행용 가방과 박스는 대부분 불투명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작품의 내부를 투명하게 처리함으로써 관람객들이 그 빈 공간에 무엇이든 새롭게 담을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Departure」연작은 다양한 층위의 상상력과 저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는 흥미로운 창으로 자리한다. 그건 단지 가방이 아니라 해체된 기호 속 복잡하고 개별적인 기의의 부유를 거둬들이는 공간인 셈이다. ■ 박동삼
박동삼_Box_투명 테이프 캐스팅_100×50×36cm_2012


Depar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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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탈출 The Escape from Anxiety


서동민展 / SEODONGMIN / 徐東敏 / photography 2012_1114 ▶ 2012_1120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2-자유하는 선택된 시야_디지털 프린트_152×118cm_2012

초대일시 / 2012_1114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_11:00am~07:00pm

갤러리 룩스 GALLERY LUX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82.2.720.8488


'The escape from anxiety'의 서동민은 현실 속 불완전한 자아 속에 내재된 '불안'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를 다양한 상황의 서사를 통해 사진으로 표상하고자 한다. 불안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문화와 제도 그 안에서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를 찾는 과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감정이며 우리의 어두운 면인 동시에 숙명적으로 받아 드려야할 명제이기도 하다.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4-어떤 띠로부터의 회상_디지털 프린트_118×91.5cm_2012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7-또 다른 문_디지털 프린트_152×118cm_2012

일상의 공간이 아닌 숲의 공간에 이야기를 재연한 것은 굴레와 제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찾은 숲은 또 다른 굴레의 숲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시도를 통해 현실의 불안에서 탈출을 꾀하려 하지만 그것은 일련의 도피와 같은 형태로 보여지기도 한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어 주는 유토피아적 출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반복으로 오늘을 헤쳐 나가고 있는 모습은 당당함과 동시에 씁쓸한 동시대인의 모습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 순응하며 그것을 자유라 부르고'불안'을 '열망'이라 부르며 부단한 삶의 노력에 대한 위로를 삼는 것이다.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9-던져진 슬픔들_디지털 프린트_118×91.5cm_2012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6-홀로 할 수 없는 이야기들_디지털 프린트_118×91.5cm_2012

하지만 불안은 성장하는 삶으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진정한 성장은 그 순간부터 시작 된다'라는 쿠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말처럼 서동민은 'The escape from anxiety'을 통하여 두렵고 불안한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되는 여러 상황들로 부터 자아의 성장과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 서동민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3-선택의 기로와 갈등_디지털 프린트_118×91.5cm_2012
서동민_The Escape from Anxiety #13-커버린 실제의 굴레들_디지털 프린트_118×91.5cm_2012

'The escape from anx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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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lag Station, Photograph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 2012_1109 ▶ 2012_1219 / 월요일 휴관


이갑철

초대일시 / 2012_1109_금요일_06:00pm

The Flag Station, Photograph 전시기간 / 2012_1109 ▶ 2012_1125 참여작가 / 이갑철_박홍순_노순택 The Flag Station, Conceptual Art 전시기간 / 2012_1130 ▶ 2012_1219 참여작가 / 홍명섭_구현모_허구영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쿤스트독 갤러리 KunstDoc Gallery 서울 종로구 창성동 122-9번지 Tel. +82.2.722.8897 www.kunstdoc.com


"The Flag Station"은 80년대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는 한국 현대미술현장의 구체적 개념과 유형의 분기점을 찾는 것에서 출발하며 아래와 같은 질문을 통해 쿤스트독의 '한국 현대미술 역사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합니다. ● 8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양식적 문맥은 존재하는가? / 시대와 사회, 계층과 미술의 유형을 관통하는 예술/예술가의 태도는 무엇인가? / 예술가의 작업에서 자의적 해석이 지닌 특권(!?)을 수용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현장에서 예술의 문화사회적 역사성을 진단한다면 우리는 어디(예술가와 예술작품)를 바라 볼 수 있는가? ● 프로젝트의 첫 번째 전시로 사진영역에서 이갑철, 노순택, 박홍순이 참여하며, 비평가 정현이 대화와 작가연구를 통해 함께 합니다. ■ 쿤스트독 갤러리
기록 바깥의 기억, 존재 이전의 사라짐에 대하여쉴새 없이 밀려드는 (텔레비전, 스트리밍 비디오, 영화의) 이미지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는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진이 가장 자극적이다. (수잔 손탁) / 쇤베르그는 박테리아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1930년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 "라디오는 적이다. 참을 수 없는 이 적은 불행히도 그와 저항하는 모든 것들과 저항하며 주저함 없이 전진한다.", 라디오는 "우리가 음악을 인지할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음악이 듣고 싶은지 묻지 않은 채로 음악을 쏟아 낸다", 결과적으로 음악은 단순한 소음, 수많은 소음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밀란 쿤데라) / "사라짐의 문제이지 고갈, 소멸, 또는 몰살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다. 바로 거기에 차이가 있다. 인류는 분명 자연 법칙과는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 종이다. 어쩌면 사라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장 보드리야르) ● 기록성은 사진의 운명이었다. 그것은 사진기술의 탄생과 함께 등장했으나 기록의 가치가 저널리즘과 조우하자 그 만남은 세계를 인식하는 하나의 고정된 틀이 되었고, 우리들 가운데 사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의 기록성은 끔찍한 사건을 증명하는 최고의 매체로써 역사의 증거물로 스스로 역사가 되어 버렸다. 수잔 손탁은 역사적 사건의 증거물로서의 사진이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가 사진 매체가 상상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손탁은 사진 이미지와 윤리에 대한 토로를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현실 감각의 손상이었다. 과잉 이미지의 시대이지만 결국 사진은 세계의 단면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이 한계는 반대로 사진을 어떻게 다루고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간다. 하지만 손탁은 정확히 플라톤이 동굴의 비유를 통해 시사한 그림자를 통한 인식의 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진이 단순히 자아의 인식을 반영하는 매체로 호기심에 머물지 않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증폭하는 매체로서의 가능성이 그녀가 요구하려는 바였을 터이다. ● 하지만 현대사회의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는 한낱 인스턴트 커피처럼 실시간으로 전송된 후 곧바로 폐기되는 시대이다. 이미지를 대하는 윤리적 기준 또한 모호하다. 영화 속 살인 장면이나 전투 장면은 특별한 검열 없이 방송되지만 흡연 장면만큼은 반드시 검열의 대상이 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고 모든 폭력이 용인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도처에 폭력의 이미지가 남용되고 있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다. 이미지에 관한 철학적 바탕의 희박함의 원인을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이제 사진과 이미지는 숭배나 경외의 대상이라기보다 소비와 유희의 대상이란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사진과 예술의 만남은 일종의 타블로가 되어 기호의 집합체로, 동시대의 비판적 증거물로,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얘기하듯 '인덱스'가 되어 독해의 대상이 된다. 대개의 기록 사진은 독해의 틀 안에서 해석되고 분석되곤 한다. 그러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나 로베르 두아노의 기록 사진을 단순히 독해의 대상이라 부르긴 어려울 듯하다. 그것은 기록 이전에 보는 사람의 '잠재된 기억'(문화적이거나 역사적인)을 건드린다. ● 현대 기록 사진은 역사 이후의 흔적들 (전쟁의 상흔과 이데올로기의 잔여물, 과잉 생산에 따른 환경 폐해 및 과잉 개발, 세계화의 이면 등), 초자본주의 시대의 심리적 사회적 징후를 무표정하게 포착하는 냉정한 사진 (베허 부부의 사진 또는 정물화 한 인물사진 등), 은밀한 사적 삶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인티머시의 출현 등으로 나타난다. 새로운 풍경 사진의 경향도 발견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연히 작가의 관점에 있지만 사진 표현의 방식이 더 중요하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물론이고 인화와 이미지를 전시로 옮겨 공간화, 물질화 하는 방법론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현대 사진은 관점을 새롭게 만들어낸다기 보다 이미 존재하던 관념적이거나 개념적 형상 또는 이미지를 실재로부터 발췌하거나 완성하는 데에 더 큰 즐거움을 찾는 듯하다. 물론 아마추어와 전문가 사이의 사진 작가와 시장은 여전히 극적인 풍경이나 누드 사진에 열중하지만 이는 기록 사진과는 그 궤를 달리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이 세속화 된 기록 사진들 혹은 회화적 형식을 사진으로 재현한 경우는 앵글 안에서 여전히 '아름다움이란 환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의 기록은 영속함을 추구한다. 절대로 사그라지지 않는 젊음, 빛, 영광을 남기려는 태도가 바로 역사 시대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역사 이후의 시대, 과연 기록 사진은 무엇을 '기록'하려 하는 걸까? ● 사진의 포착한 찰나는 소유할 수 없는 시간을 붙잡아 순간을 영원으로 박제화 한다고 믿었고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술적 특성을 제외하고 실재 속에서 한 순간을 선택하는 행위 속에는 틀림없이 불가해한 신비로움이 있다. 보드리야르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이제 이러한 신비마저 사라져 버렸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필름 카메라의 한계이자 신비의 순간인 대상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순간만큼은 사진가도 알아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의 연금술, 인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적 연금술이 사라진 동시대가 시뮬라시옹의 철학가 보드리야르에게는 여간 못마땅한 게 아닌 듯하다. 그는 심지어 디지털 정보로 생산된 이미지는 이미지가 되기에는 모자란 것이라 말한다. 다소 추상적이지만 이미지로 (숙성될) 과정을 겪지 못했다는 것이다. ● 사라지기 위한 이미지 되기 기록 사진이라고 해서 현장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것이 보도사진이라 해도 현장성 이외에도 정치적 관점과 윤리적 태도가 강하게 내재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도 사진의 이미지는 정치적 함의를 통해 세상에 유통되고 이른바 프랑스적 인류애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속에는 불가피하게 서구인의 인류학적 관점 또한 굳게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보도 사진과 달리 기록 사진은 그보다 넓은 영역을 아우른다. 사소한 개인적 일상부터 역사의 흔적까지, 웅장한 기념비적 사건부터 사회학적 현상에 이르는 다양한 소재와 대상이 기록 사진의 영역 안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기록 사진이 보드리야르가 언급한 '이미지'가 되지는 않는다. 보드리야르의 사진과 이미지의 관계는 다소 순수한 사진의 정체성에 기대고 있기에, 손탁의 사진에 관한 의견에 비해 다소 이분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보드리야르가 얘기한 사진이 실재를 증명하는 아날로그적 이미지 매체가 대상의 죽음과 필연적으로 만난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 이미지의 상상력 자체, 그 근본적인 '환상'은 이제 끝이다. 왜냐하면 컴퓨터 합성 작업에서는, 지시 대상으로의 환원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현실 자체도 '가상의 현실성'으로서 즉각적으로 생성되기에 실제로 일어날 여지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앞서 얘기한 폭력적 이미지와 흡연 이미지를 대하는 사회적 검열의 기준을 떠올려 보자. 반면 "아날로그적 이미지는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직접적 현재함을 증언했다. 그것은 우리가 맞이하게 될 궁극적 분산과 디지털적 파도에 대한 마지막 유예였다." ● 노순택, 박홍순, 이갑철의 기록 사진은 여전히 아날로그 기술을 사용해 꾸준히 기록 사진의 영토 안에서 작업을 진행 중이다. 단지 아날로그 사진을 찍는다고 무조건적으로 현재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세 사진작가들의 행보는 현장성을 대상으로 한 사진이 '거기-있음'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다. 기록의 남용과 사진의 과잉 시대에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만큼 현대미술로서의 사진이란 패턴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우직하게 현실에 포획된 이미지가 아닌 '실재'의 시적 '추적자'를 통해 한국적 기록 사진의 단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갑철
이갑철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기록 – 이갑철 ● 이갑철의 사진은 연대기적 시간 밖에 위치한다. 성과 속 사이의 경계를 직관적으로 포착한 사진은 일상의 일부를 하나의 사건으로 작동시킨다. 크로핑 없이 완성된 사진은 동물적인 감각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된 또는 무관한 대상들과의 도상학적 관계를 자연스레 유도한다. 그의 사진은 읽는 사진이며 동시에 시적 언어로서의 이미지에 가깝다. 특히 1990년 이후의 "충돌과 반동" 연작에 담긴 현실은 사회적 이슈가 아닌 연대기적 시간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 –무당, 제의, 스님, 인간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주술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사진이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추상적인 관계를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중심에서 벗어난 기슭에서의 삶은 도시의 삶과 달리 초월적 삶, 산악신앙을 가진 원초적 삶 속에 카메라 프레임이 위치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공격적으로 슈팅을 한다고 표현을 한 적도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내게 그의 사진은 대상을 포착하기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주변의 일부를 직관적으로 발췌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발췌한 일부가 서서히 사건으로 나타난다. 아마 이갑철 자신도 촬영을 한 후 그 사건이 아련히 구체화 되는 과정을 관찰하며 이미지 속 사건을 독해하는 첫 번째 관객의 즐거움을 만끽했을 것이다. 이 같이 이미지가 되는 과정을 기록이란 시간적,·분류학적 해석보다는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이갑철의 작업이 기록이기보다 기억이란 추상을 형상화하는 사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노순택
노순택
노순택

사라진 기억을 되찾는 기록 – 노순택 ● 노순택의 사진은 역사 이후의 시대에 관한 시적 보고서처럼 보인다. 광주, 5.18 그리고 망월동은 한국현대사의 상흔이자 오늘을 이끈 결정적 순간이다. 광주에 대한 수많은 헌사와 추억, 고통을 재현하는 추모의 현상은 여전히 넘치지만 또한 여전히 모자란 것은 왜일까? 노순택의 정치적 사진들은 실제로 매우 시적 감흥으로 충만한 이미지다. 그러나 5.18은 역사로 종결된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21세기는 역사의 시대가 아닌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이 기록들은 정보화되어 측량되는 분류학의 시대다. 역사 이후의 시대에 역사의 한 켠을 차지한 기념비적 상흔을 다시 재현한다는 건 작가로서 그리고 동시대인으로 웬만한 사명감이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역시 사진 매체가 가진 기호로서의 속성을 인지하고 있으며 아픈 기억을 굳이 되살리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순택의 사진이 과거를 재현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광주의 사건이 아직 역사로 박제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의 사진이 광주를 회상하고 치유하려는 차원의 접근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그는 '망각'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민주화의 열기와 1980년의 사건 이후 급격한 민주화의 현상은 현재형의 사건이었던 광주의 이야기를 완결하고자 곧바로 기념화로 이동했기에 적어도 공적으로 광주는 '역사'가 되어버렸다고 작가는 해석한다. 역사화는 망각이란 기제로 작동할 수밖에 없고, 광주의 슬픔은 고스란히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그는 광주의 기억을 직접적으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망각의 바다에 빠진 광주의 후유증은 노순택의 시선을 동시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공정한 삶의 현장으로 이동한다. 사뭇 보도 사진의 형식처럼 보이는 그의 사진은 이질적인 현장들을 담은 이미지들의 조합, 설치에 의해 의미를 추상화하기도 하고 관점을 입체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아마도 사진과 기록의 관계가 지시하는 진실의 보도나 이데올로기의 이미지로 귀결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강제해고, 강제추방, 강정마을과 같은 작금의 사회적 이슈를 사진에 담지만 궁극적으로 이 사진 이미지들에 의해 나타내고 싶은 것은 권력에 의한 규범의 조작이자 개발의 논리에 의해 자행되는 인간애의 파괴라는 광주 이후의 징후를 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사라진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제도 밖으로 추방당한 게 아니라 제도화에 의해 추상화 된 기억이고, 노순택은 추상화 된 기억의 봉인을 풀어 역사의 모순 속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박홍순_백두대간-자병산 #06,1998_74×148cm_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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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 22:50:44 / Good : 326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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