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WARS EPISODE Ⅴ
스타워즈-에피소드 Ⅴ展 2012_0308 ▶ 2012_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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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리셉션 / 2012_0308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 김경민_민성식_이지영
관람시간 / 09:00am~06:00pm / 주말_10:00am~06:00pm
유엔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58-13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Focus on Exhibition ● UNC갤러리는 오는 3월 8일부터 30일까지『스타워즈 에피소드 Ⅴ』展을 개최한다.『스타워즈 에피소드』展은 2007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번째를 맞이하는 UNC갤러리 연례 기획전으로, 현재 촉망 받는 컨템포러리 작가들만을 엄선하여 선정해 소개하는 전시이다. 매 해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展은 주목해야 할 전시로 입지를 다지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소개된 작가들은 국내뿐만 아니래 해외에서 까지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해 나아가고 있다. 올해는 좀 더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구성하였고, 각 장르 (조각, 회화, 사진)를 대표하는 작가들을 엄선하여 소개한다.
- 김경민_외출_청동에 아크릴채색_125×95×24cm_2011
- 김경민_기념일_청동에 아크릴채색_150×90×45cm_2011
- 김경민_2011 서울모터쇼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100×300×180cm_2011
- 김경민_친한 사이_청동에 아크릴채색_44×55×23cm_2011
일상을 해학적으로 담아내는 조각가
김경민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포착해 구성하는 작가이다. 특히 가족이나 사회의 관계 속에 꼭 필요하지만 놓치기 쉬운 요소들을 알기 쉽게 풀어내며 흥미를 유발한다. 일상은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매일 같은 형태로 반복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데, 이처럼 간과하기 쉬운 일상의 중요한 요소를 작가는 자신만의 감성으로 유쾌하게 표현해낸다.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현대작가로서 - 사회와 제도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내면 및 정체성 고찰에 진중히 빠져들기보다는 - '일상의 삶' 자체에 집중해 이를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고 쉽게 다가간다.
- 민성식_캠핑가기_캔버스에 유채_162.2×112cm_2011
- 민성식_수영장_캔버스에 유채_162.2×112cm_2012
- 민성식_목수의 집_캔버스에 유채_65×91cm_2011
사회의 현대화 및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삶은 신속하고 편리해졌지만 우리는 삶의 소중한 부분을 잃어가고 있다.
민성식 작가는 현대 사회에 나타난 이러한 양면성을 의식하며, 자연으로 회기하고 싶은 소망을 고도에서 바라본 비현실적 풍경의 이미지로 캔버스에 담아낸다. 작품에서 보이는 화려한 색대비나 원근법을 무시한 불안정한 공간구성은 도시와 자연, 현실과 비현실의 대비를 드러내며, 그 사이를 통해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은 실제의 공간과 소품을 모티브로 삼아 그려지는데, 여기의 소품은 작가의 욕망과 기호를 반영해 현실 속 작가의 이상을 대변하는 모티브로 사용된다. 이러한 실제 소품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작품 속 현재 상황에 대한 추론 가능한 단서를 제공한다.
- 이지영_The little match girl_디지털 프린트_128×160cm_2008
- 이지영_Neverending race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8
이지영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 속담, 어릴 적 기억, 직면한 현실 등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이미지 세트를 구성해 사진으로 표현한다. 이지영의 작업은 풍경 및 인물 중심의 전통적 방식을 떠나, 작가 스스로 세트부터 소품 하나까지 직접 제작, 구성, 촬영한 구성사진(fabricated photography)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지영의 작품 속 이야기들은 지극히 개인적인데, 작가가 과거 직접 경험했던 사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극복해야 할 문제에 대한 스토리를 재현한다. 마치 작가 스스로 맞닥뜨린 온갖 상념들을 각각의 공간에 구현하고 지워버리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닥쳐 온 시련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지영_The Best cure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07
- 이지영_Treasure hunt_디지털 프린트_96×120cm_2010
일상을 알기 쉽고 유쾌하게 풀어낸 김경민, 현대 사회의 양면성을 보색 대비나 독특한 공간구성으로 나타내는 민성식,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제작한 세트와 소품들로 구성하여 촬영한 이지영, 이번『스타워즈 에피소드 Ⅴ』展에서 선보이는 작가들은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을 어렵게만 생각 하는 이들도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며, UNC갤러리가 소개하는 3명의 작가의 작품을 통해 3월의 봄바람과 함께 잊혀졌던 다양한 감성을 경험하길 희망한다. ■
UNC 갤러리 ------------
열꽃
송진화展 / SONGJINHWA / 宋珍嬅 / sculpture 2012_0308 ▶ 2012_0401 / 월,공휴일 휴관
- 송진화_너를찾아서_70×15×1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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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통의동 33번지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홀로서기, 그것은 나에게로 향하는 지난한 여정 ● 삶에서 가장 신비로운 일은 나의 몸이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자신의 몸의 기능들을 자신의 의지대로 작동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맥박이 뛰고 있는 심장에게 갑자기 멈추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심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의 눈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존심을 내세워 억지로 눈을 뜨고 있으면, 우리의 눈은 이내 눈물이 글썽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그러한 현상은 신경 생리학에 의하면 두뇌의 신경 기능의 작용에 의해 생기는 생리현상이라고 말하며, 또한 심리학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심약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설명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몸은 서구 근대와 모던 철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우리의 정신이 사용하고 나면 폐기처분 해버리는 물질에 불과한 것인가. 물질은 미시 물리학에 의하면 바라보는 이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홀로그램의 원리를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마이클 탈보트(Michael Talbot)에 의하면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를 품고 있다.""
(마이클 탈보트, 홀로그램 우주, 정신세계사, p.80.) 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몸은 마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과 자연의 모든 행위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침으로써 각자의 몸에 기록되는 것이다.
- 송진화_봄날은간다_37×35×7cm_2011
송진화의 조각은 삶을 통해 느껴지는 그러한 내면의 심리적인 상황을 여성의 다양한 신체적인 동작으로서 풀어헤치고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현대 미술에서 주된 논의가 되는 몸을, 그것도 여성 신체의 표정을 주된 소재로 하여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논의하고 있는 젠더(gender)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의 인체 조각은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생리적인 신체 조건을 있는 그대로 들추어냄으로써 본질적인 실체를 인식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며, 사회··문화적인 체계에 의해 여성의 신체를 상품화함으로써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인체 조각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별성을 벗어나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몸과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그러한 그의 인체 조각은 「가슴이 터지도록, 2010」의 작품에서 보듯이 「카니발의 저녁, 1886」에서 몽환적인 풍경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작품과 같이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에서 달리고 있는 여성과 개의 모습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심성을 느끼게 한다. 그의 그러한 모습은 앙리 루소와 같이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이국적인 풍경과 합일된 남녀의 모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무소유와 무위(無爲)의 정신을 통해 일상의 삶 속에서 '나'와 자연의 모든 것들이 일체화된 세계를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이다.
- 송진화_나천사_108×70×50cm_2012
무위와 쓸모없음 ●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가하지 않는 동양의 무위 사상은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의 작품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 등에서 보듯이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 전반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0」에서 보듯이 나체 여성의 등의 한 가운데에 패인 골들이나, 또는 「기다렸어, 2011」에서 보듯이 나무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 여성의 얼굴과 검게 몽우리가 진 여성의 젖가슴은 나무가 본래 지닌 특성과 지나온 삶의 시간들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모습을 여성의 신체적인 형상을 통해 있는 그대로 조각해낸 것이다. 그의 인체 조각은 오귀스트 로댕의 「신들의 사자, 1890-91」의 조각에서 보듯이 건강한 여성의 음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청동의 인체 조각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는 달리
(톰 플린, 조각에 나타난 몸, 김애현 옮김, 예경, 2000. 참고) 김일용의 「체적(體積)-신체의 기억, 2002」의 라이프 캐스팅과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시간을 통해 인체에 기록된 상처와 흔적들을 통해 근원적인 실재로 나아가는 것과 닮아있다. 하지만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김일용의 조각과는 달리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축적된 삶의 시간들과 심리상태를 나무의 성질과 그 나무가 살아온 삶의 이력을 빌어 형태를 제작하는 것이다. ● 즉 그의 인체 조각은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여성의 심리상태와 축적된 삶의 무게가 지닌 작가 자신의 내밀한 속내를 「똥밭에 굴러도, 2011」, 「또 다시 봄, 2011」, 「살아내기, 2010」에서 보듯이 있는 그대로 들추어내고 있는 것이다. 「똥밭에 굴러도, 2011」는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삶의 집착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은 나이가 들어도 봄이 오면 사춘기의 소녀와 같이 곱게 차려입고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선은 어딘가로 향하는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다.
- 송진화_따끈따끈_90×45×30cm_2011
그의 작품에 스며있는 사상은 또한 작품에 사용된 재료들의 지나온 이력을 볼 때 장자의 내편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下有之鄕)』
(나무 줄기가 옹이투성이고 구불구불해서 목수들이 사용할 수 없는 나무일지라도 넓은 벌판에 심어두면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한다.)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그가 사용한 나무들과 돌과 뿔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나서 폐기처분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나, 또는 작가가 여행하면서 길에서 주운 것들을 사용하고 있다. 「L1020583」은 꽃다운 25살에 주운 꽃다운 돌이며, 「또 다시 봄, 2011」은 조계사 벤치에 사용되었던 팽나무이다. 그러한 사연들은 그의 인체 조각 작품들의 곳곳에 스며있다. 누군가의 집 자개 장농 문짝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봄, 2009」의 작품으로, 상계동 어린이 놀이터 늑목으로 사용되었던 나무는 「똥밭에 굴러도, 2011」의 작품으로, 가운데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로 사용되었던 것은 「살아내기, 2010」의 작품으로, 그리고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이다. ● 살아온 삶의 시간들과 흔적들을 지닌 폐기처분 될 나무는 그의 인체 조각이라는 창을 통해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다시 숨을 쉬는 것이다. 「힘겨움이 내 등을 밟고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당진의 서민 집의 기둥으로 사용된 나무는 홀로서기를 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다시 생명을 얻고 있으며, 「살아내기,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가운데에 손가락만한 굼벵이가 살았던 호두나무는 눈먼 강아지를 등에 업고라도 그 무언가를 부여잡고자 작가 자신에게 남아있는 그 애착의 미련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의지를 투영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목수에게 쓸모 없는 나무는 장자의 시선에서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하는 존재로 비추어지듯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폐기처분 될 나무들은 작가에게 홀로 서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작가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잣대는 작가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잣대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정신과 물질이 이원화된 인식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송진화_바람에실려_50×100×30cm_2011
홀로서기와 무소유 ●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2012」의 조각 작업에서 보듯이 불교 최초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과 같이 그 누구에게도 애착을 갖지 않고, 무소유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의 일체를 이루는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는 작가에게 있어서 「빨간신,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집착이나 욕망을 끊임없이 정화시키고 홀로 서고자 하는 몸부림과 같은 것이다. ● 홀로 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자 하는 경제적인 독립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년 여성의 신체를 통해 홀로서는 여성의 심리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홍현숙의 홀로서기의 모습과는 유사하나 처해있는 상황과 심리적인 지향점은 다르다. 홍현숙의 홀로서기는 「체조, 2005」의 단채널 비디오에서 보듯이 TV의 에어로빅 장면을 속옷만 입고 따라하는 중년 여성의 영상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머리를 깍고 물을 주는 영상들을 통해 집안에 갇힌 중년 여성들의 홀로서기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 데에 반해, 송진화의 홀로서기는 「가슴이 터지도록, 2010」에서 보듯이 집안에 갇혀 있는 여성이라기보다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의 노는 행위와도 같다. 그 모습은 남성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여성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혼자 짖고 까불며 노는 행위처럼 보이는 것이다.
- 송진화_힘겨움이내등을밟고지나가기를기다린다_13×39×13cm_2010
그것은 송진화의 홀로서기가 남편이나 자식이나 그 밖의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행위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집착하는 행위로 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홀로서기는 타자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이다. 타인의 시선과 마주하여 자아를 찾는 행위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 데 반하여 자신의 시선과 마주하는 행위는 역동적이고 외향적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시선들과 마주하게 될 때 그 심리적인 상태는 정반대로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전자가 역동적이고 외향적인 데 반하여, 후자는 정적이고 내향적인 것이다. ● 그러한 심리적인 상태는 송진화의 인체 조각에서 사용되는 색채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의 색채의 특징은 본래의 바탕을 덮지 않고 그 위에 색을 덧칠해가는 동양의 채색화의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한 색채의 질감은 「히~,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나무 바탕의 질감이 잘 드러나도록 사용하고 있으며, 「또 다시 봄, 2011」의 작품에서 보듯이 화려한 듯이 보이나 수수하고 담백한 인물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듯이 보이나 튀지 않으며, 그 바탕이 감추려 하지 않고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 신체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면 하나의 문화적인 기호이지만, 몸은 자신의 시선으로 향하는 순간 문화적인 기호나 소유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몸은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field)이며, 자연의 모든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나'를 만나는 장이다. 누군가나 무언가에, 설령 그것이 자신의 신체라 할지라도 집착한다는 행위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들을 과거의 행위들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끝없이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들과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그것 또한 현재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다. 송진화의 인체 조각은 무위와 무용론과 무소유라고 하는 동양 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의 삶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상황을 때로는 기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여성의 신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조관용 -----------
Cube-Nature
구현모展 / KOOHYUNMO / 具玄謀 / installation.drawing 2012_0308 ▶ 2012_0407 / 일요일 휴관
- 구현모_들 野_혼합재료_133×80×80cm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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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2_03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비원 Gallery b'ONE 서울 종로구 화동 127-3번지 Tel. +82.2.732.1273 www.gallerybeone.kr
도치된 풍경을 바라보다 ● 근대화된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본능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을 억제하고 견고하게 축조된 비물질적 구조 속에 신체를 부합시키는 행위다.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 맞춰 진화해온 신체를 인위적으로 재편한 노력은 동시대 문명의 물적 풍요를 견인한 동력으로 기능했지만, 동시에 신체에서 발화하는 다층적인 감각들과 추상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은폐시켜버린 것이기도 했다. ● 그러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구현모는 감각으로 접근하는 조용한 경험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 작가다. 그는 사물과 풍경에 대한 관찰과 사고의 과정을 스스로 관조하는 독특한 습성을 지니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특정한 접촉들을 즐기는 구현모는 모호하고 비논리적인 사유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 그의 작업은 명백한 답변의 여지가 적은 모호한 질문들을 연속적으로 제기해온 것이었다. 분명한 응답의 여지를 고려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언어적 모호함의 토대 위에 서 있는 물음들을 던져왔던 것이다.
- 구현모_집_혼합재료_110×28×34cm_2012
'집'이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의 작품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속성을 반영하는 일차적 풍경이자 환경으로서 존재하는 집의 속성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한다. 집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구역 내에서 확장된 자아이면서 동시에 외부로부터 그 한정된 영역을 방어하는 대상이다. 이 본질적인 중의성으로 인해 집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 물질과 비물질과 같이 항시 마주쳐야 하는 어떤 경계의 느낌을 내재하고 있다. 구현모가 집이라는 대상에 몰두해온 이유는 바로 그러한 중의성에 대한 선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안과 밖의 경계'의 느낌을 도치시켜 새로운 풍경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그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이번 개인전에서 구현모는 종이와 나무를 주된 재료로 하여 축조된 세 종류의 집을 보여주고 있다. 일종의 모델링과 같은 스케일의 작은 규모로 만들어진 이 집들은 신체의 스케일을 넉넉히 수용하되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는 존재성이 역전된 것들이다. 그 크기는 집으로 표현하는 어떤 풍경의 느낌을 관객이 한 눈에 조망하게 하기 위한 작가의 선택이다. 작게 축소된 집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의 집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마치 모형장난감과 같이 핸디한 오브제로 인식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즉 집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유의 과정이 왜곡되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니쉬를 엷게 바른 종이와 같이 그가 선택한 재료와 기법은 원래의 고유한 느낌을 차단시켜 결국 작품의 물리적 특질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상화의 왜곡을 고려하여 내린 작가의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구현모_굴뚝집_드로잉
그가 전시장에 오브제로 구현한 집은 이끼집, 눈집, 번개집 등이다. 이끼집의 내부에는 녹색의 이끼가 조밀하게 들어차있다.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끼라는 소재가 실내에 한정되어 펼쳐진 느낌은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초원과도 같은 풍경 한 자락이 실내로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방들을 가로지르며 펼쳐지는 초원의 느낌이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눈높이에서 펼쳐져 있다. ● 눈(雪)집의 내부에는 흰 눈이 가득 깔려 있다. 이끼집이 어떤 시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면 눈집은 온도나 계절감과 같은 촉각적 풍경의 도치를 표현하고 있다. 작은 집의 안쪽에 쌓여진 흰 눈의 느낌은 외부의 풍경과 햇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전시장의 느낌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 구현모_박제_목제, 나무, 철_70×12cm_2012 구현모_달_종이, MDF_74×74cm_2012
번개집의 안쪽에서는 계속해서 번개가 치고 있다. 자연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공감각적 현상이 집 안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끌어와 실내에 두는 구현모 작업의 기본적 토대를 설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즉 외부에서 경험하는 번개에 대한 신체의 수동적 기억은 번개를 집 안으로 들여와 재현시킨 대상을 관조하게 되는 새로운 상황으로 인해 전혀 다른 감상의 차원으로 반전되면서 새로운 관찰의 시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 이 세 집은 공히 관객의 시야를 고려한 높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것들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받침대 위에 올라가서 집의 스케일이 부여하는 비례에서 살며시 벗어나 있다. 그의 집들은 공히 물리적인 제약으로서의 공간이 구획되어 있고,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자연의 느낌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것들이다.
- 구현모_번개집_2012
오브제의 형식으로 배치된 세 종류의 집들 외에도 함께 벽면에 배치된 드로잉들을 통해 그의 자유로운 사고의 면면을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계단으로 만들어진 집, 구름을 안고 있는 집, 숲을 끌어온 집과 같이 흥미로운 집의 이미지들은 그의 관심이 가진 연속성과 감각적 사고의 단면을 들춰보게 한다. 구현모의 간결한 드로잉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오브제로 재현한 집들 또한 3차원적 형태로 구현한 드로잉에 가깝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모호한 정신세계의 이미지들을 절제된 형식으로 재생하겠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끝을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불가지의 영역을 수용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에는 완성된 사고의 결과물을 관객 앞에 내어놓겠다는 의도보다 관객의 사고가 중첩될만한 여지를 조성하고자 하는 작가적 태도가 깔려있다. 이것은 드로잉이 보유한 특질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인데, 본질적으로 과정과 결과의 미학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드로잉 미학의 특징에 잘 부합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과잉의 상태로 존재하는 이 시대에 밀도 높은 결과물을 추가함으로써 또 하나의 과잉을 초래할 필요가 있느냐고 구현모는 말한다. 고백 같기도 하고 질문 같기도 한 그의 언어는 그의 작업에 내재한 본질적인 태도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그가 만든 작은 집들이 근대화된 삶의 패턴을 거스르는 사고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은 그 작은 집들과 조우하는 시선의 토대 위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
고원석 -------
Twilight zone
김을展 / KIMEULL / 金乙 / drawing 2012_0308 ▶ 2012_0422 / 일,공휴일 휴관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26×3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325i | 김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08_목요일_06:00pm
『My Great Drawings』 출판기념회가 리셉션과 함께 열립니다.
후원 / 로얄&컴퍼니(주)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요일_11:00am~05: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로얄 GALLERY ROYAL 서울 강남구 논현동 36-8번지 로얄TOTO빌딩 2층 Tel. +82.2.514.1248 art.royaltoto.co.kr
저 들판에 야산(野山)을 짓고, 너머의 바람을 쐰다. ● 김을은 작업실에서 하루 온종일 그리고 만들고 붙이는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틈틈이 사색(思索)하며 즐긴다. 삶의 무게보다 예술의 무게가 무거워진 지금 지루한 일상은 유토피아로 바뀌어가고 있다.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마음가는대로 고집스럽게 살아온 그는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한국미술의 관습을 역순으로 걸어왔다. 생(生)의 한 바퀴를 돌아온 시점, 그에게는 '드로잉'이라는 것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김 을 드 로 잉!" 그만큼 자기의 위치에서 드로잉의 존재감은 깊게 뿌리박혀 끊임없이 확장해나가고 있다. 그가 향유하는 예술의 끝, 드로잉의 끝은 어디쯤일까?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2002년을 기점으로 그의 드로잉은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거의 매년 '작업-전시'를 지속하며, 더불어 드로잉북도 만들어냈다. 처음과 달리 주변인들로부터 '이제는 그만하지'라는 우려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또 그리며 점점 더 예술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솔직히 우리들은 김을 드로잉의 실체를 가늠할 수 없다. 지인이라는 덕에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나 또한 잘 모른다. 하지만 그를 믿는다. 어떤 기회주의자보다, 전략적인 사람보다, 정치적인 사람보다,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보다, 미술사를 믿는 사람보다, 주제를 만들어내는 사람보다는 저 들판에 구름을 쫓는 野人 같은 김을의 진정성을 믿는다. 우리가 만들어놓고 정해놓은 언어와 행동의 규칙아래 우리는 무수히 지나치는 무의식보다 확연한 이미지와 글 그리고 말을 믿고 그것이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행해왔던 드로잉의 행간을 너무 쉽게 간과하거나 그 드로잉 너머의 생각을 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김을은 저 들판, 저 野人 같은 삶을 위해 '날 것'으로써의 드로잉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는 예전에 '혈류도'를 그린 후 특정한 주제에서 벗어나 세상 전체를 아우르는 것을 그리는 고민에 빠졌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드로잉으로 풀고, 현재 그 판타지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마도 그 판타지는 그의 나이 불혹의 끝자락에서 시작되어 이미지 언어를 다시 쓰듯 하나씩 언어를 찾아갔고, 십년이 흘렀다. 빠른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로 역주하듯, 가볍고 느린 언어의 질주는 인생역정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 한계를 넘은 자연스러움과 자율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26×36cm_2011
삶이 예술의 무게로 바뀌다보니 온갖 상념들이 뒤섞인다. ● 사랑, 농담, 정념, 눈물, 도덕, 욕망, 아름다움, 상상, 영혼, 종교, 웃음, 진실, 꿈, 분노, 바람, 피, 장난감, 시간, 세계, 물리, 자연, 우주, 공간, 몸, 본질, 이상, 생명, 존재, 가치, 의문, 죽음, 현실, 원리, 그림, 정의, 역사, ... ● 이것이 김을의 생각으로 뒤범벅되어 화두라는 '빈 그릇'에 오랜 숙성을 거친 후, '드로잉'이라는 다양함의 변주에 리듬을 타게 된 것이다. ● 그 시작은 작았고 낱낱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 낱낱들이 모여지면서 거대한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2009년 김을이 부여한 'my great drawings'이다. 뒤늦게 깨달은 드로잉은 그동안 그가 품어왔던 미술 아니 예술의 모든 것들을 되돌려 놓는다. 드로잉이 단순히 '긋기'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척탄병처럼 김을은 세상의 모든 대상을 사유(思惟)함으로써 깨닫고 얻어지는 존재감을 찾고 재해석한다.
- 김을_무제_종이에 수채_36×26cm_2011
김을은 그 어느 때보다 의욕도 많고, 작업할 것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매일 해가 뜨고 저물어가는 자연의 순리에 난감해한다. 하지만, "김을은 김을이다!", "그림 이 새끼!"라는 글자드로잉에서 그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김을은 현실에 안주하는 꿈을 꾸지 않고, 들판에 야생하는 그냥 풀처럼 野人의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자 한다. 그는 넓은 들판에 조그마한 野山을 만들어 그 위에 홀로 서서 동쪽 한 번 바라보고, 서쪽 한 번 바라보고, 구름 따라 바람을 쐬며 새처럼 날고 싶어 한다. ■
이관훈----------------
Reproduction & The Paradox Problem
한인규展 / HANINGYOO / 韓印奎 / painting 2012_0307 ▶ 2012_0313
- 한인규_Propriety(禮)_캔버스에 유채_162.2×130.3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The K Gallery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_12:00am~06:00pm
갤러리 더 케이 GALLERY THE K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6번지 Tel. +82.2.764.1389 www.the-kgallery.com blog.naver.com/gallery_k
아이러니스트의 서가 – 역설과 이중성의 장면 ● 인적이 드문 곳에서 세속의 삶들이 지분대는 도시 한 가운데로 작업실을 옮기는 중에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불태우는 다비식을 3박 4일 동안 치렀다. 떠남도 멈춤도 이별도 정지도 없는 모든 흘러감을 일시적으로 묶기 위해 죽은 자(것)와 산 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별리(別離)의 의식은 망각과 재생을 위한 것일 텐 데, 그 모든 무상함(의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극적)의식을 치른 자가 며칠 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무엇을 겪었고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뭔가 다른 것, 지금껏 하지 못했던 것, 그러나 그에게 이미 있었던 것을 기꺼이 감행하기로, 대면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리라. 작가는 다시 시작하기로, 자기를 지우고 다시 생겨나기로 약속한다. 그가 화면에 마치 최초의 시작인 듯 '세우고' 자신의 버팀목으로 의지한 것은 서가(書架)이다. 세상을 사는 것과 세상을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였을까. 근대는 읽는 것에 헌신한/매몰된 자들의 시대이다. 세상을 사는 데 읽기가 무용했던 시절 '시각'은 절대적 감각이 아니었고 인간은 여타 다른 동물과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 시각이 절대화되고 인식과 앎에의 욕망이 요구되면서 탄생한 '인간'의 서가는 인간적인 세계의 크기를 과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읽는 자는 무지(의 무능)에 대한 공포를 강요당한 자이고, 읽는 자는 지성이 세계와 동시에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확신하는 신경증적 주체이다. 책을 통한 세상의 전유는 심지어 세계보다 세계에 대한 표상이 더 우월하다는 자만심/낙관을 깔고 있다. 삶은 책 뒤로 물러났거나 책 속으로 포획되었거나 책 너머로 숨어들었다. 책을 읽는 자는 그럼에도 책에 세상이 있다고 책과 세상이 똑같다고 믿는/착각하는 자이다. 책은 세상을 반복하면서 은폐하고 세상을 가리키면서 세상을 살해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다.
-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책의 집/무덤, 서가. ● 이미지로 세상을 재연/재현하는 작가는 책의 집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예술은 지성에 대한 비판이며 감각의 집요함이며 (근대적)인간의 궁핍에 대한 증언이라는 근대적 선언은 예술이 지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작가는 읽되 그 읽기가 감각의 힘을 파괴할 만큼 지성에 가까워도, 감각의 논리가 구성될 수 없을 만큼 광기에 접근해도 안 되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광기와 지성 사이에서 광인의 상태를 갈망하는 자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지성의 견제력일지 모른다. 예술가를 광인으로 묘사하는 일은 근대에 흔한 일이었으니. 따라서 예술가는 책에 대해 양가적이다. 읽는 자는 감각을 지성화하는 데 능숙하고 예술가는 자신의 광기를 형식에 가둠으로써 경계 없이 날뛰는 광인과는 지위를 달리한다. 예술가는 읽되 다르게 읽어야, 비스듬히 읽어야 하는 자이다. ● 새로 옮긴 인가(人家) 안 작은 작업실에서 일년 간 그가 서가와 벌인 '전투'는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했다. 우선 작가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촘촘하게 꽂혀 있는 책들을 배경으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한국어판 겉표지를 병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동시대에 들뢰즈만큼 예술가들을 매혹시키는, 예술을 위한 철학자로 거론될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인간을 위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인간이 부재하는, 인간이 사라진 풍경을 만들려는 반(反)-근대적 인간 들뢰즈의 사투는 곧 예술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렇기에 들뢰즈는 예술가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근대적 아카이브였다. 들뢰즈를 읽지 않아도 예술가는 이미 들뢰즈-되기를 육화시킨 인간 유형일 텐 데, 박사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문이나 이론서를 접했던 작가에게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들뢰즈를 읽어야 한다는 압박은 들뢰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낳았을 것이다. 독해가능성과 독해불가능성이 중첩된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은 작가에게는 읽기의 공포와 매혹이 중첩된 장면이었다.
-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앎의 탐욕과 무능에 대한 비판이면서 읽기의 희열(jouissance)을 증언하는 텍스트를 시각적 이미지로 선택하는 최초의 장면 뒤에, 작가는 미군부대 내 도서관에서 경험한 일화를 화면 안으로 불러들인다. 작가는 '닭 생산Poultry Production'과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When I grow up I want to be a...'란 제목이 닭과 송아지 이미지와 병치된 책의 겉표지를 서가 위에 중첩시킨다. 근대적 이념/이데올로기로서의 '생산'은 생산 제품이 닭이란 생명체가 되면서 작가에게 낯선 공포와 기이함을 유발시켰고, '커서 나는 ..이 될거예요'란 아이들이 쓰는 문장이 송아지의 말이 되면서 우스꽝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외국어의 이질감, 인간과 가축, 언어와 이미지의 기괴한 충돌이 갖고 온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연상들을 가시화했다. ● 이제 화면 속 서가는 현실적인 서가가 아닌 작가가 상상으로 구축한 비현실적인 서가로 바뀌어간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인용한 서가가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상태가 투사된 서가로 장면을 전환한다. 책 제목이 거의 '무감각한 사회'로 통일된 서가에 작가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수평으로 병치시킨다. 흥미로운 것과 에로틱한 것, 신기한 것에 몰두했던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게르니카」라는 지명으로 고발했었다. 아이같은 피카소가 현실의 비극에 진지함으로 반응한 결과물인 「게르니카」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치적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감각한 사회'라는 책 제목과 '감각'의 산물 게르니카 이미지의 병치는 향수병, 미니어쳐 소품들, 그 외 평범한 인테리어 소품들과 공존하게 되면서 모호한 맥락으로 들어간다. 그는 진지한 발언을 애써 가벼움과 경박함, 천진함의 이미지로 덮으려 한다. 덧없이 휘발하는 삶의 찬란함과 허무함을 상징하는 향수병들, 아직 삶의 비극에 노출되지 않은 이들의 장난감, 애써 삶의 무거움을 외면하는 소품들은 전쟁의 참극을 재연한 '피카소'를 하나의 실내 장식품의 지위로 추락시키면서, 작가 스스로의 진지함 마저 희화화해버린다. 이는 비극과 소극(笑劇)이, 진정성과 허세가 극단에서는 하나로 겹친다는 것을 '본' 자의 '반성'과 관련이 있을 것인데, 말하자면 작가는 '아이러니스트'인 것이다.
- 한인규_PEEP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감정이나 인식에 확신을 갖고 몰입하지 못하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나르시스트가 아니며, 자신마저도 의심하는 자이며, 몰입과 초연을 동시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는 자이다. 몰입은 비지성적이고 초연은 무감각적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몰입하는 자신을 동시에 보는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사물과 인간의 진실을 상호모순적인 역설의 상태에서 찾아내려는 자이다. 변증법적 종합이 불가능한 모순의 상태에서 사물과 세계의 느낌을 유지하려는 아이러니스트의 태도는 지나친 진지함, 지나친 이성, 지나친 대립으로는 삶의 진실이 드러날 수 없다는 이유에 근거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진지하면서 희극적이고 몰입하면서 초연한 자이다. 아이러니스트는 모호성, 양가성, 역설을 실천하면서 일관성, 인과성, 정합성, 종합과 같은 근대적 인식론을 전복시킨다. 아이러니스트는 결론을 내리거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는 동시에 두 가지 상황을 보려는 중에 장면을 열어놓는다. ● 작가는 도덕 혹은 윤리에 대해 역시나 양가적이다. 작가는 교육자였던 아버지를 존경한다. 이것은 흔치 않은 경험인데, 교육자가 곧 아버지이고 그 둘이 중첩된 존재를 아들-학생이 존경하기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이는 예술가에게는 곤궁을 만들어내는데, 예술가는 동시대의 상식과 규범이 어떻게 욕망과 성을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지를 '고발'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반-도덕적이기에 반-시대적이라는 일종의 예술의 규범과 아버지-살해를 실현하지 못한 아들의 무능은 작가의 화면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 현실에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할/가져야할 윤리적 덕목을 압축한 공자의 사자성어를 시각화한 「인의예지 仁義禮智」는 아버지-법을 위반해야하는 아들-예술가의 어려움에 대한 장면이다. 규범에 대한 위반을 미적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로서의 작가는 아버지-법에 대한 공포와 매혹을 「인의예지」의 풍경에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상태로 담아냈다. 한자 인, 의, 예, 지를 책으로 형상화한 장면은 그 사자성어가 자신을 얼마나 괴롭힌 '아버지'의 말씀인지를 구체적으로 반복한다. 그러나 그 사자성어에 갇힌/반복하는 도덕적 존재도 그 사자성어에 혐오감을 갖는 부도덕한 존재도 못된 작가는 이번에도 자신의 도덕적 모호성을 유아적 소품들을 통해 드러낸다. 장난감 주사위, 미니어쳐 용, 양, 기린, 기차, 소방차, 불상, 비밀(욕망의 기표들)이 가득한 가방, 미니어쳐 화분, 등등은 어른들의 삶에 대한 책임을 강요하는 도덕적 규범을 하나의 농담으로 재배치시킨다. 작가는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으면서 아버지를 가볍게 만들면서 아버지를 벗어버리려고 한다. 그는 다 큰 아이처럼 아버지-되기에서 슬쩍 미끄러진다.
- 한인규_Wifman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PEEP」은 peep란 단어의 좌우대칭 구조 때문에, 또 '엿보다'란 단어가 갖는 의미망 - 비밀, 포르노적 시선, 여성/타자의 대상화 - 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주는 연작이다. 여기서도 서가는 작가의 상상의 서가로 전환되었고 P E E P를 시각화하며 인포커스된 책들과 후면으로 아웃포커스된 책들 사이에 형성된 깊이/공간은 흐릿한 후면을 엿보고 싶은 욕망을 발산시킨다. 물론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는, 우리의 엿보기의 대상은 인포커스된 책 제목들이고 「페미니즘의 거울」, 「정복의 법칙」, 「국가 이미지 전쟁」, 「레닌」, 「매맞는 여성」, 「Answer to History」과 같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는 진지한 책들과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제목이 유발하는 웃음 사이에서, 화면은 농담과 진지함이 뒤섞인 모호한 장면으로 전환된다. ● 작가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특권)으로 산다는 것, 남성이 이미 항상 갖는 유리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남성이다. 작가는 여성이 억압당하는 사회, 여성의 곤궁에 대해 배운 자이고 그것이 여성에 대한 자신의 남성적/포르노적 욕망/환상을 반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자신의 화면에 드러낸다.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남성이고자 한다. 인의예지가 극히 일부유교사회 기득권의 덕목이었음을, 그것이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와 억압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였음을 성찰하면서 작가는 '아버지'보다 더 윤리적이고 올바른 인간이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peep이란 단어와 병치시키는 이중적 존재이다. 그는 욕망과 의식, 앎과 감각,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이 벌이고 있는 '전투장'으로서의 삶을 상연한다. 그의 화면은 의식적이고 성찰적이면서 희극적이다. 그는 그런 면에서 '인간적'이다. ● 그의 1년여에 걸친 작업의 맨 마지막은 「여성 wifmann」이 차지한다. 고대 영어 wifmann은 글자그대로는 '여자남자'로 번역될 수 있을 텐 데, 이는 모든 사람은 남자mann이고 그 중에 '여자남자'와 '남자남자'가 있다고 생각한 고대인의 생각의 방식을 확인시켜준다 – 물론 한국어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wo'man'도 그런 표식을 갖고 있다. 앞서 분석한 작품 「PEEP」의 구조를 상하 대칭의 구조를 통해 반복하고 있는 「wifmann」은 베르미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와 고흐의 자화상이 인포커스와 아웃포커스의 방식으로 중첩되게 되어 있다. 예술가로서 고독하고 궁핍한 길을 걸었던 고흐를 하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미적으로 승화시킨 베르미어의 저 유명한 걸작을 상단의 인포커스 화면으로 배치하면서 작가는 예술과 관련한 자신의 욕망의 이중성을 가시화한다. 즉 오직 자기자신을 위해 그렸던 작가가 되고 싶은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성/사랑의 승화로서의 예술이라는 저 오래된 '남성' 작가의 욕망을.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과 자신이 그리고 싶은 환상 사이에서 작가는 자신이 되고 싶은 환상을 저 '아래'에 뒤집어 배치함으로써 '위대함'의 자리에 대한 통념을 배반하고, 그럼으로써 작가의 지위를 희화화하고, 그럼으로써 나르시스트적 진지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그럼으로써 기이한 존엄성을 성취한다.
- 한인규_Wifmann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12
책과 이미지, 성과 윤리, 규범과 위반, 진지함과 가벼움, 비극과 희극. 작가는 양립불가능한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설적인 장면이 자신의 삶의 풍경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결백, 순수, 진지에의 수사(rhetoric)에, 더 우월하고 위대하고 선한 지위에 이르려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삶을 보존하려고 한다. 삶은 본래 모순되고 모호하고 양가적이고 그래서 어려운 타자이기 때문이다. 양 극 중 어느 하나를 더 우위에 두지 않은 채 두 극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싸움이 아니라 놀이이다. 싸움은 타자를 적으로 상정한 자들이 벌이는 맹목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타자를 살려두고 나의 힘을 최소화하면서 공존하는 방식이다. 작가가 벌이는 싸움은 전쟁이 아닌 놀이를 삶으로 환대하려는 이가 경계해야 하는 근대적 구도와의 싸움이다. 아이는 그냥 놀지만 어른은 놀기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 적과 아군, 나와 너, 옮은 것과 틀린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려는 인식적 폭력을 경계하면서 놀기. ● 그것이 새로 태어난 사람, '신생아'로서 기억과 싸우고 인식의 집요함과 싸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 모순과 비일관성의 삶을 환대하려고 하는 작가의 1년의 결과물이다. ■
양효실 -------------
Climbing Up!
이가경展 / LEEKAKYOUNG / 李佳景 / video.installation 2012_0308 ▶ 2012_0401 / 월요일 휴관
- 이가경展_브레인 팩토리_201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40403b | 이가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2_0315_목요일_06:00pm
기획 / 오숙진(브레인 팩토리 디렉터)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이미지의 중첩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학 ● 벌거벗은 아이가 비스듬히 세워진 나무막대 위를 오른다. 두 팔 벌려 막대 양쪽을 잡고 다리에 힘을 주어 제법 가뿐하게 막대등반을 즐기던 아이는 중반에 다다르자 갑자기 두 팔을 모으고 쭈-욱 위로 헤엄쳐 솟아 오른다. 아이의 귀엽고 앙증맞은 뒷모습에 매료된 관객을 뒤로하고 아이는 다시 막대를 잡고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가 사라져버린다. 목탄으로 그려졌던 주인공이 사라진 막대 위에는 회색의 지우개 자국이 그 여운을 대신한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채택된 2009년도 작 「Climbing Up!」이다. 스토리의 전말은 막대위로 자취를 감춘 아이의 모습이 다시 막대 아래에서 출현하여 1분 남짓한 그의 여정이 반복되면서 다시 시작한다. Two-Channel로 제작된 이 영상작품의 왼쪽은 클로즈업된 아이의 무브먼트가, 그리고 오른쪽에 막대 전체가 담겨 아이가 등반하는 모습을 원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작가가 '일상'이라고 명했던 아이의 움직임은 우리의 매일을 상징하는데, 일상과 일상의 반복 그리고 일상의 열정을 드러낸 이가경의 작업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 그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9점의 비디오 작업은 연필드로잉이나 드라이포인트로 제작된 무채색의 판화를 이어 붙여 완성된 애니메이션 작품들인데, 내용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뉴욕에 거주중인 작가의 관찰 대상이 되었던 그저 평범한 뉴욕커들의 '일상'이고, 둘째는 작가 자신의 '심리적인 일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퍼포먼스'로 나뉜다. 전자는 「Untitled-Grand Army Plaza, Brooklyn.NY.03.09」등과 같이 주변의 매일을 묘사한 작품들이고, 후자는 「Dance, Dance, Dance」, 「Walk-2010」등과 같이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촬영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업들인데, 퍼포먼스는 대부분 반복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소재로 한다. 한편, 연필로 벽에 창문을 그려 넣고 창문의 열려있는 틈에 미니프로젝트로 동영상을 투사하는 설치작품「Window View」도 출품된다. 오전10시경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의 광경을 묘사한 이 작업 외에 또 하나의 설치작품 「Days in New York – Horizontal」은 각기 다른 지하철역 다섯 군데를 촬영하여 제작한 Five-Channel 애니메이션이다. ● 대부분 초기에 연필 드로잉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이미지들을 연속시키기 위해 한 컷의 드로잉을 촬영한 후 지우개로 지우고 그 종이 위에 시퀀스를 그려 넣어 다시 찍는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의 자취를 지우개의 흔적으로 고스란히 화면 안에 남기는 결과를 낳는다. 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이러한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기술적으로 얇은 라인드로잉을 기본으로 한 판화기법인 드라이포인트의 특성상 한 이미지가 아크릴판에 새겨지고, 그 다음 시퀀스가 같은 판 위에 새겨졌을 때 그 전의 이미지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고 자국이 제법 선명하게 남기 때문에 화면 안에서의 시간은 흐르면서도 그냥 흘러가 없어지지 않고 현재와 과거가 기술적으로 혼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효과는 그가 표방하는 일상성의 기본 전제가 되는데, 이를테면 우리의 매일이 일어남과 동시에 스러지고 다시 같은 일상이 같은 공간 안에서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의 테크닉과 절묘한 연계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업 안에서 시간의 개념은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여 인식의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매력을 지닌다. ●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판화(혹은 드로잉)를 무빙이미지로 만들기 위해 초당 다섯 프레임의 판화를 시퀀스로 찍어 연결하는 노동집약적 과정은 화면 안에 창조된 일상의 세계와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작가 이가경의 일상이 유기적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우리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37초의 영상 「Untitled-Grand Army Plaza, Brooklyn.NY.03.09」를 만들기 위해 156개의 판화를 하나하나 제작한 수고로움이 이가경에게는 '산다는 것'과 '살아있음'을 매 순간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그리고 최대한의 방법인 것이다. ■
오숙진
- 이가경_Climbing Up-2009_다채널 비디오, 칼라, 사운드, 나무막대 위에 목탄_00:01:00 loop_2009
The Mechanism of Time Created by Superimposition of Images
modified at 2012.03.07 21:29:59 by zabel
2012.03.07 14:08:03 / Good :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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