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계 예술 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기획展
2011_1130 ▶ 2011_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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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0_1130_수요일_05:30pm
참여작가 곽요한_김경희_김미강_김지희_김태균 민지훈_박웅규_오현_이혜현_장명경 장수진_조상지_조요숙_최희진_한철희
후원/협찬/주최/기획 / 추계 예술 대학교
관람시간 / 10:00am~06:00pm
갤러리 이즈 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2층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각 전공 학생들이 2011년 전시를 갖습니다.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15명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셔서 축하해주시고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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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_#1_solar cell, led, 전선_가변크기_2011 김미강_공존_장지에 채색_80×160cm_2011
오현 ● 예술로부터 작업해 들어가 산업및 건축과의 융합을 시도해 본다. 김미강 ● 사람의 내면세계가 삶의 터전과 같은 환경을 이루는 바탕이 되고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심리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풍경안에 반영된다고 보았다. -
- 박웅규_습기찬구멍_종이에 잉크_30×190cm_2011
박웅규 ● 인간이 끊임없이 무언가(혐오, 공포, 우울, 불안 등)를 분비·배출·배제·유기하는 것은 삶을 위한 필연적 행위이다. 하지만 종종 그것에 겁에 질려 메스꺼움과 혐오감을 견디지 못해 구토를 하면서도 그것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나의 작업은 이러한 극단적 양가성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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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경_공간-피어나다_53×45.5cm_2011 한철희_게임 속 세상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6×96cm_2011
장명경 ● 흔히 공간이라 하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를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비어 있지도, 닫혀 있지도, 정지해 있지도 않다.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것들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곳이야말로 진정 동양에서 말하는 공간이다. 한철희 ● 게임 속 세상은 전적으로 인위적인 세계이지만 우리의 지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세계와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즐겨했던 게임들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현대적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 -
- 조요숙_사유의 공간_장지에 채색, 연필, 아크릴, 바니쉬_116.8×116.8cm_2011
조요숙 ● 자신을 돌아 볼 여유도 없는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자기 자신만의 사유의 공간이 필요하며, 그곳에서의 시간은 고독하지만 자신의 고귀한 꿈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함께 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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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요한_ 기독불화(基督佛畵)_장지에 수간채색_76×52cm_2011 장수진_根.심해-Ⅳ_우드컷_120×95cm_2006
곽요한 ● 소금은 스스로 썩지 않는데서 방부제로 가치를 가지며 사회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부패해버린 소금은 과연 소금일 수가 있는가. 장수진 ● 빛에 의한 생명력... -
- 김지희_Find me inside me_종이에 수채, 연필_24.5×35.5cm_2011 조상지_나를 잊지마세요_장지에 채색_100×170cm_2011
김지희 ● 분열된 자아의 조각들이 모여 다중성을 띄는 내가 존재한다. 결국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 조상지 ●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는 오랜 인연들을 물 속에서도 더이상 자라날 수 없는 시들어버린 꽃을 통해 다시 한 번 기억될 수 있길 바란다. -
- 김경희_Landscape NO.22_리넨에 대마사_85×83cm_2011
김경희 ● 가변적 풍경을 불변의 풍경으로 도시의 사라지고 잊혀 진, 혹은 잊혀 질 풍경들에 대하여 풍경을 영원하게 새기다. 재개발과 신도시로 잊혀 질 달동네, 무서운 속도로 세워지고 또 부셔지는 고층빌딩, 늘 보아오고, 인식하지 않고 지나치거나, 외면했던 일상적인 풍경들의 소중함은 대도시의 개발논리에 인하여 더욱 간절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불안정하게 소멸하고 빠르게 변하는 도시의 풍경들을 작업으로 새기고자 한다. 사라진 공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바늘끝에 담아 엮음으로써 오늘도 나는 영원이 지속될 풍경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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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현_10-8_나무_25×15cm_2011
이혜현 ● 머릿속을 간지럽히는 관대한 빛내음 있어야할 그곳을 찾아 그대로 박제되어지는 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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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지훈_슬림 매입형 형광등_혼합재료_130×162cm_2011 김태균_펭귄들 11-1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2.1×162.2cm_2011
민지훈 ● 일상적인 것, 전통적인 것의 재구성을 통한 시각적 즐거움 김태균 ●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지고, 일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처음 시작하는 일에 두려움이 앞서거나 혹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나는 이런 인간의 모습을 펭귄에 의인화 시켜서 표현하고자 한다. -
- 최희진_버려지는 이유_장지에 채색_65×65cm_2011
최희진 ● 버려졌고, 돌아갈 곳이 없었다. 오늘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인 이 작은 생명체들도 내일이면 거리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리고 반려견이자 동시에 유기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같은 자리에서 기다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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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충동
Creative Impulse展 2011_1130 ▶ 2011_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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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 충동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1
초대일시 / 2011_1130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강석현_김소연_문이삭_이남희_조소희_주라영
기획 / 주성학
관람시간 / 11:00am~06:00pm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0길 4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건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다. 그 가운데 몇몇은 우리의 심리조직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하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 잔존해 있다가 어느 순간 불현듯이 출현해 우리의 일상을 낯설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충격과 자극 상태에서 우리의 내부세계는 긴장과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에 의하면 충격과 긴장 상태에서 주체가 느끼는 불안은 내부 세계를 분열시킨다. 이는 곧 파괴된 내부세계를 회복시키려는 창조적 충동을 발생시키는데, 클라인은 예술활동의 창조적 행위 또한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했다. 특히 시각예술은 이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전시 『창조적 충동』에서 소개하는 여섯 명의 작가, 강석현, 김소연, 문이삭, 이남희, 주라영, 조소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여러 갈등과 불안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표상함으로써 분열된 내부세계를 회복해 나가는 노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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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현_Bearing Karma-Connections in Life_캔버스에 혼합매체_162×13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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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연_심장_종이에 콜라주_33×24.5cm_2010
강석현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징하는 인형을 반복적으로 그리거나 만든다. 실로 꿰맨 자국으로 가득한 그의 인형은 사춘기시절 이후 고착된 고독과 소외에 관한 긴장이 표출된 형태이며 동시에 그 때의 상처와 아픔을 싸매는 치유를 암시해 준다. 나아가서는 상실과 좌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이기도 하다.
김소연의 화면은 꿈이나 무의식의 장면처럼 초현실적이다. 인체의 기관이나 동물의 일부 이미지를 콜라주하여 낯설고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그의 작품은 불명확한 내면의 세계를 그려내며 불안과 공포를 불러온다. 이미지 파편들은 하나의 형태, 이를테면 심장과 성모 마리아의 형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긴장과 불안을 완화시키며 분열된 내적 세계를 복구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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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이삭_A Blue-Sky Landscape #1_간판_127×170×13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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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라영_Beyond Here & Now_스틸에 우레탄 열도장_각 20×15cm_2011
문이삭의 A Blue-Sky Landscape 는 도심 속 하늘 풍경을 표상한다. 그는 버려진 간판을 수집하여 일일이 잘라낸 다음, 서로 다른 조각끼리 연결하여 새로운 형태의 오브제를 만든다. 그에게 있어 간판 작업은 무분별한 경쟁을 조장하고 소비를 부추기는 이 사회에 대한 불안과 저항을 의미하며 그 속에서 놓쳐 버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주라영의 Beyond Here & Now 에서 볼 수 있는 단순화된 형태의 인간은 두 팔을 벌린 채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목적 없이 무리 속에서 그저 무의미한 달음질만 치고 있는 군상은 조직과 규율 속에서 획일화되고 자아를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대변한다. 군상은 전시 기간 동안 관람객이 한 점 한 점씩 가져감으로써 점점 해체되는데 여기에는 자신을 비롯한 현대인의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고자 하는 작가의 염원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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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희_두루마리 휴지 위에 타이프치기-진행형 프로젝트_나무책상, 램프, 타이프 기계, 두루마리 휴지, 불어성경, 거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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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희_U.F.O-unfinished object_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조소희의 관심대상은 실이나 휴지와 같은 가벼운 일상의 사물들이다. 두루마리 휴지 위에 타이프치기 와 크리넥스-문장부호 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휴지 위에 텍스트나 문장부호를 타이핑하는 것과 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시간의 무게를 싣는다. 이는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일상 혹은 삶을 성찰하며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고자 하는 작가의 상징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남희는 무제 에서처럼 쓸모 없는 사물을 감싸고 덮는 작업을 한다. 짜다 남은 실과 망쳐버린 손뜨개를 연결하여 만든 U.F.O(UnFinished Object) 또한 이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설치 작품이다. 이처럼 사소하고 버려진 사물에 대한 그의 관심은 자신을 포함하여 정치적으로 약자인 여성과 소외 받는 자들의 상처를 감싸고 포용하는 작가만의 의식인 셈이다. ● 『창조적 충동』전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선보이는 작품은 불안과 갈등으로 인해 파괴된 내부 세계를 회복하려는 창조적 충동의 시각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억이나 추억을 형상화 시키거나, 상징적 대상을 해체한 뒤 재조합 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형태로 드러난다. 또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차이와 의미를 부여하거나, 버려지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모든 예술 작품이 파괴된 내적 세계를 복구하려는 창조적 충동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창조적 충동』전의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상함으로써 파괴된 내부 세계를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작품으로 상징화된 창조적 충동은 작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불안과 긴장으로 분열된 우리의 내적 세계를 회복하기 위한 에너지가 될 것이다. ■
주성학 -----------------------
Create the Past
민경아展 / MINKYEONGAH / 閔庚娥 / printing 2011_1130 ▶ 2011_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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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The Creation_리놀륨 판화_60×18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민경아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6층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민경아, 이질적인 것들의 재정렬 ● 민경아의 작품은 종교와 예술의 접촉지점을 찾는다는 점에서 눈길을 모은다. 그의 작품테마는 성경의 이야기로 천지창조, 노아의 홍수,최후의 만찬, 그리스도의 십자가 책형, 부활승천 등으로 요약된다. 이런 테마들은 역대화가들에 의해 자주 다루어져 온 주제들로 서양미술의 고전으로 불러왔다. 그런데 작가가 이미 '명화'로 널리 알려진 것을 사용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같다. 고전의 현대화랄까, 전통회화와 만화주인공까지 불러들여 명화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 가령 「창조: the Creation」란 작품을 보면 서양의 명화와 한국의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 혹은 현대 만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승무를 추는 무희가 있는가 하면 그네 타는 여인, 장구치는 사람, 그런가 하면 원더우먼, 피노키오,슈퍼맨 등을 등장시켜 오래전의 일을 현대감각에 맞게 재해석하려는 의도를 감지할 수 있다. 작가의 말대로 "동서양과 고대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성경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노아의 방주: too much water」란 작품 역시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들판과 산하를 뒤덮는 폭우로 인해 모든 짐승들이 노아의 방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림에선 기린,사자,염소,코끼리,다람쥐,타조,토끼,도마뱀,고래,불가사리가 모두 물속에 가라앉았다. 산도 40일간 쏟아진 폭우로 인해 잠식당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림에 등장한 산이 우리 눈에 좀 익은 것같다. 그 산은 다름 아니라 겸재의 금강산도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산이다. 작가는 이를 통해 성경의 이야기를 한층 실감나게 전달한다. 시내산도 아니고 아라랏산도 아닌, 금강산을 통해 노아의 이야기를 한국인들에게 한결 친근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내고 있다. ●「최후의 만찬: Ongoing Supper」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표작 「최후의 만찬」을 새로이 번안한 작품이다. 그림뒤에는 원작의 인물들을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과 역대화가들의 초상화로 대체한 것 등 두 유형으로 나뉜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고흐와 고갱의 초상화, 베르미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우키요에 미인도, 프란시스코 고야의 초상화, 피카소의 잠자는 여인, 신윤복의 미인도, 부르헬,보티첼리의 미인도, 아르침볼도의 나무인간, 에곤 쉴레의 초상화 등이 등장한다. 사도들은 명화속 인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눈 빵과 포도주는 와인과 케익, 주병과 같은 유사한 이미지들과 바나나 우유, 커피 등과 같이 요즘 것들로 바뀌었다. 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에 더하여 엿 파는 아이, 젓 먹이는 어머니, 남녀가 밀애를 즐기는 모습, 곰방대를 물고 있는 한량 등과 같이 풍속화의 한 장면을 차용하기도 한다. ●「창조: the Creation」와 「노아의 방주: too much water」, 「최후의 만찬: Ongoing Supper」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중문화적 요소이다.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상품들이 출현한다. 이같은 대중문화적 이미지의 수용은 그가 광고나 영화, 만화,신문과 잡지 등의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차용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한 팝 아트스트들과 동일한 기반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대중문화적 요소를 인용하는 것은 상품과 대중문화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향락과 소비의 일상 및 표류하는 삶을 상징하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같다. 종래의 기독교적 이미지와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겹치고 대비시킴으로써 모종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감상자에게 우리가 혹시 현실에 눈이 어두어져 가치있는 것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넌지시 물어보고 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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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빈물항아리_리놀륨 판화_60×9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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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Too much water_리놀륨 판화_120×9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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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Mes「나들」_리놀륨 판화_120×90cm_2011
예전에는 단순히 그림에만 신경을 쓰면 되었지만 현대작가들은 범람하는 팝문화와 물질문명, 정체가 불분명한 사상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작가는 이런 세태속에서 기독교 영성에 뿌리내린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어떻게 하면 질풍노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파고를 극복하고 폭넓게 사람들과의 교감을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외부의 물결이 거셀수록 내면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에 뿌리내린 작품이 눈에 띈다. ●「나들: Mes」는 절묘한 개작이 이루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원작을 개작한 이 작품은 이색적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장면을 위에서 포착한 구도로 되어 있어 더욱 극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김홍도의 대장간에서 일하는 모습을 예수님 발에 못 박는 인물로, 서당에서 공부 못해 우는 철부지 아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돌아가심을 보며 슬퍼하는 인물로, 활 쏘는 사람을 예수의 가슴을 겨냥하는 인물로, 신윤복 단오 명절의 풍속화에서 그네 뛰는 여인을 십자가에 끈을 매달아 유희를 즐기는 인물로, 빨래하는 여인들을 예수님 손에 못을 박는 인물로 역할을 바꾸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작품의 타이틀은 「나(들)」로 되어 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십자가 사건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방관자,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모습들이 모두 내 자신의 모습들"로 여기며 제작한 작품이다. 신앙인으로서 작가의 고백이 들어 있는 특별한 작품이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예수를 부인하며 심지어 조롱하는 요즘 세태를 풍자한 작품이기도 하다. ● 그런가 하면 그의 작품 가운데는 피노키오 연작이 있다. 앞의 작품이 기독미술과 풍속화 및 만화 캐릭터와의 만남이라면, 피노키오 연작은 피노키오를 화가들의 명화와 결부시켰다. 알다시피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면 코가 길어지는 바람에 코가 신체의 특징이 되어버린 인물에 속한다. 작가는 이점에 착안해 예술가들의 초상화에다 그 사람의 특징이 될만한 것들을 덧붙였다. 가령 뒤러의 코에는 옷장식을, 베토벤의 코에는 음표를, 산책을 좋아한 슈베르트는 전원적 분위기가 나도록 나무형태로 변형시켰다. 비너스석고상에는 그녀의 꼽슬머리를 본따 웨이브 코를 만들었으며,이외에도 고흐,클림트,에콜쉴레와 같은 화가의 자화상, 다빈치의 「모나리자」, 바흐와 모차르트, 쇼팽과 같은 음악가들을 각각 코믹하게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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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피노키오「베르메르 진주귀걸이를 한소녀」_리놀륨 판화_75×5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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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피노키오「뒤러 자화상」_리놀륨 판화_75×50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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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아_피노키오「프리다칼로 자화상」_리놀륨 판화_75×50cm_2010
근래 들어 지식의 대통합을 일컫는 '통섭'(Consilience)이 폭넓은 호응을 얻고 있지만 만일 이 용어를 민경아의 작품에 적용한다면 종교와 예술의 차이,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차이를 묶어내는 말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대회화에서 거의 사용치 않는 성경의 이야기를 테마로 삼는 것이나 거기에다 콜라나 우유병같은 현대사회의 이미지, 그리고 풍속화를 등장시키는 것은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특히 기독교와 예술은 그의 작품에서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이것은 현대미술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경그림은 유럽에서 오랜 기간 중추신경역할을 해왔지만 근대 이후로는 상당히 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민경아의 작품에서 여전히 미술은 종교와의 관계속에서 얼마든지 상상력을 얻고 창조적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 민경아의 작품은 수법적으로 차용에 의한 재구성이 주종을 이룬다. 옛 것과 새 것을 뒤섞고 한편으로는 기존의 이미지의 재배열로 자신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투영하고 있는 셈이다. 원작자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상반되는 내용의 전개, 다른 기법, 시제의 차이 등 기존의 명화에 이질적인 것을 충돌시킴으로써 원래의 의미내용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감상자가 의외의 사건과 마주함을 통해 현실을 곰곰이 뒤돌아보게 만든다. 차용과 패러디와 같은 현대적 표현수법이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흐르는 주제의식이란 인간의 타락, 죄의 속량, 고통받은 삶으로부터의 구원, 메시야의 한량없는 사랑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다. ● 내용도 내용이지만 정치한 재현과 꼼꼼한 세부처리, 고도의 감각 등은 감상의 재미도 더해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특히 리놀늄에 새겨진 선의 자취들과 패턴들은 작가가 얼마나 조형구사에 능숙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작가는 어느 한 부분 소홀함이 없이 시종 차분하고 절제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전 과정이 일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번거롭고도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하지만 그것을 거뜬히 이겨내는 작가근성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적재적소의 이미지 차용과 드라마틱한 재구성까지 보태져 한편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는 잔잔한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같다. ■
서성록 -------------------
민녹주展 / MINNOHKJUE / 閔綠珠 / painting 2011_1130 ▶ 2011_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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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11
초대일시 / 2011_1130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와해(瓦解), 존재의 실체 그리고 행동 불확실성, 이상(理想)이라는 것 ● "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고하면서부터 늘 들어왔던 단어이다. 자신의 삶과 사회를 관계지워 생각하면서 그것은 고민해야하는 어떤 것임과 동시에 이루어야하는 무엇으로 여겨진다. "이데아"를 학습하거나 고려하지 않더라도 어느 시점에서 '나'/자아에 각인되어 긍정적 삶을 위한 막연한 지시어로 작용하고 있다. 인문학적 범주에서도 그 개념은 분명 추상적이다. 인간의 정신작용이 이르는 '최고와 궁극'의 지점이라는 것일 뿐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조건과 해석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면 이상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고 한 부분에 끊임없이 자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두 가지의 현상을 들어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 의미가 학문적 범위를 넘어 역사 안에서 집단의식을 조율하는 정신적 규범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어졌으며, 다른 또 하나는 인간의 사회적, 인격적 욕구가 이르는 최적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욕망은 이상이라는 것의 모호함에 성취의 심리적 구체성을 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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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94×224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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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11
비정형의 형상, 존재의 실체와 행동 ● 민녹주는 삶에 있어 "이상"이라는 것의 존재여부를 묻는다.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주체와 객체 혹은 자아와 타자로 양분하지 않고 '하나의 전체'로 의식하여, 그 안에서 욕망의 이상적 실체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를 본다. 그녀의 회화를 통해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그것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합리하다. 사회가 산출해낸 많은 제도와 개개인의 욕구가 총합을 이루는 충돌과 마찰의 세계에서 최고와 궁극의 무엇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그 실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통시적으로 인지하는 태도로서 민녹주는 그것들이 변별적 내용으로 모아지는 '순간의 지점'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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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30×38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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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유채, 아크릴채색_162×112cm_2011
민녹주의 회화에서 이미지를 특정대상과 동일시하여 받아들이기란 다소 어색하다. 인간의 표정이나 동식물의 형상이 구분되기는 하나 비인습적이고, 한 형태의 완결로 보기에는 그 틀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러한 이미지의 특성은 삶에 관해 작가의 사고가 머무는 지점을 상징한다. 그는 사회가 지닌 불합리성과 인간내면의 이율배반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방식을 유보하고, 분명한 거리두기를 전제로 그 세계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삶의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되는 모든 것은 단색조 화면이 지닌 긴장의 상태로, 그러한 시선에 의해 감지되는 내용의 표상들을 비정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주지할 점은 작가의 관점이 세상의 모호한 실체를 받아들이는 긍정적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녀의 형상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감성과 감각의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화면에서 -필자와 작가가 늑대와 오소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던- 하나의 동물체는 무엇인가를 뚜렷이 '응시'하고 있으며, 그 옆의 다른 화면에는 비대한 토끼(?)가 '배설'하고 있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러한 동물형상들은 화면의 주체로서 능동적이고 도전적으로 읽혀진다. 현실대면에서 오는 의식의 구차함을 걷어내 사고의 진정성을 담보로 세상에 다가가는 인간의 행동을 그는 이미지가 발산하는 원초적 에너지로 치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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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유채_162×26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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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녹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2×209cm_2011
제도와 물질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현실의 삶은 자연본성에 의지하여 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의 작업 중 '웃는 여자아이의 표정'은 불합리한 세계에 대응하는 감각의 밀도를 더 한다. 아이의 천진한 웃음 이면에는 인간이 창조적 긴장을 향해 삶 속으로 밀어 넣어야할 어떤 것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통섭(通涉)의 의지가 숨어 있다. 인간의 삶에서 정치와 자본이 포장하는 허위적 현실과 부조리를 직설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작가는 그것의 경험을 명확하게 집약, 비정형적 형상들을 통해 삶의 괘도에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행하는 회화작업은 불합리한 세계와 불확실한 삶에 대한 인간성과 인간조건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이러한 행동은 그 차원을 달리하며 지속적 생성과정에 놓여있다. ■
김숙경 -----------------
너무 검은 몸, 검은 물질
김성민展 / KIMSUNGMIN / 金成珉 / painting.sculpture 2011_1130 ▶ 2011_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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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잘린 생각_캔버스에 흑연_220×245cm_2011
2011_1130 ▶ 2011_1206 초대일시 / 2011_092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JEONBUK PROVINCE ART MUSEUM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인사아트센터 제1전시실 Tel. +82.2.720.4354 www.jbartmuse.go.kr
2011_1208 ▶ 2011_1214 초대일시 / 2011_1208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09:00am~10:00pm / 월요일 휴관
우진문화공간 WOOJIN CULTURE FOUNDATION 전북 전주시 덕진구 진북2동 1062-3번지 Tel. +82.63.272.7223 www.woojin.or.kr
김성민-너무 검은 몸, 검은 물질 ● 익산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 공간에는 검은 그림들이 세워져있었다. 조용하고 한가한 시간, 밝고 화사한 늦가을의 햇살을 안고 너무 검은 그림과 대면하고 있다. 그것은 검은 물질이자 동시에 검은 인간의 모습이었다. 대부분 남자의 누드인데 그것은 작가에 의해 연출된 몸짓이고 몸의 언어이자 내면을 지시하는 실루엣으로 가득하다. 벌거벗은 남자들은 등을 보여주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려있거나 누워있다. 구체적인 정보를 지워버린 얼굴과 몸은 그저 동물성의 육체, 물질성의 몸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몸짓, 몸이 발산하는 신호음에 귀 기울이게 한다. 그것은 묵언의 몸짓이자 절박한 실존의 흔들림이거나 복잡한 내면의 파열음 같기도 하다, ● 분명 작가는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 같다. 그러니까 껍질로서의 인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이거나 심리적 불안과 성적 불안, 혹은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적 고뇌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주제의 형상화인 듯 하다. 그동안 김성민은 이 같은 주제를 일관되게 형상화해왔고 따라서 자연스레 소재는 항상 벌거벗은 인간의 몸이었고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도살장의 소고기나 소머리 등이 등장했었다. 표현방법 또한 표현주의적인 붓질과 색채를 구사해왔다고 여겨지며 대상 자체를 강렬하게 묘사하고 배경은 단순하게 혹은 과감하게 생략해버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의 몸, 얼굴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도상화 하는 한편 감각적인 구성과 붓질, 색채를 연출한다는 것이 만만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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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늘어진 생각_캔버스에 흑연_112×112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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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텅빈 머리 캔버스에 흑연_37×4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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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긴 생각_캔버스에 흑연_73×91cm_2011
그는 군대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후에 우연히 에곤 실레의 화집을 접했던 그 충격에 대해 말했다. 그의 그림, 누두는 실레의 영향을 어느정도 연상시키는 편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실레나 베이컨, 프로이트 같은 작가들의 몸 그림에 경도되거나 좋아하지 않을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탁월한 재현과 형상화에 감동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사실 실레는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작가다. 특히 수많은 미술인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선 탁월한 데생력, 독특한 몸의 해석, 흥미로운 구성과 색채와 붓질의 유연함과 매력 등일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 이다. 실레의 누드, 자화상 등은 이전의 정형화되고 유미적인 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고 그만큼 강렬하고 진실하다. 그가 재현한 몸들은 불안과 고뇌,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모든 요소를 솔직하게 드러내버린다. 피부 속에 들어차있는, 알 수 없고 시각화할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발설해버리는 것이다. 특정한 관습적 틀과 유형에 매이거나 그림을 매끈하게 다듬는 조악함이나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시선 등을 지워버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본능, 욕망, 불안에 이끌려 대상을 파헤치는 무서운 눈이 그의 그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아마도 김성민은 그 실레의 그림과 같은 몸을 그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는 실레와는 다른 현재의 시간대에 당대의 인간에 대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그림을, 자신만의 방법론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가 그린 몸은 특정 모델의 몸을 아름답거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이 아니라 자기 내면이 보고 읽은 인간의 모습이다. 살덩어리의 인간이자 유한한 존재로서 죽음과 생, 리비도아 에고 사이에 부침하는 그런 유약한 인간말이다. 그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몸/ 살을 매개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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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매달린 생각_캔버스에 흑연_245×14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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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충만한 생각_캔버스에 흑연_65×53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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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민_움추린 생각_테라코타에 흑연_53×42×25cm_2005
너무 검고 짙은 색상과 거칠고 강한 질감으로 뒤덮인 그림은 인간의 몸을 암시한다. 색상과 질료는 그것 자체로 자활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지를 안기는 것이다. 그림은 이미지이기 이전에 물질이다. 그러나 그 물질은 단지 질료덩어리에 불과하지 않고 물성과 그 물성이 지시하거나 환기하는 또 다른 존재로 비약하는 신비 사이에 걸쳐있다. 그 이미지는 특정 인간의 외양을 재현하거나 묘사한 그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몸 자체를 지시하는 기호적인 상태로 화면에 부착되어 있다. 납작한 평면위에 흑연가루와 본드를 섞어 만든 기이한, 독특한 물질이 일정한 높이를 지닌 체 부착되어 있다. 두툼하고 거칠고 갈라져있다. 고부조로 튀어 올라와 거의 조각적이다. 그림이자 동시에 부조이며 이미지이자 물질 그 자체로 범벅져 있는 형국이다. 화면에 흑연가루 물질만이 급박하게 작가의 손에 이끌려 부착되고 쓸리고 얹혀져있다. 이 핑거페인팅은 검은 석탄으로 형상화한 인물을 촉각적으로 전해준다. 물질이 중력의 법칙에 의해 아래로 밀리고 흘러내린 자국, 몇 번에 거쳐 물질을 올려놓아 이룬 몇 겹의 층, 시간의 차이에 따라 굳고 갈라지고 다시 굳는 차이들의 동시적 전개, 부분적으로 튀어나온 부위들을 돌멩이로 갈아서 이룬 번들거리는 광택 등은 상당히 흥미롭다. 대부분 연필이란 재료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인데 반해 흑연가루를 물질, 안료처럼 만들어 부착하는 이 낯선 페인팅은 흑연이란 물질이 평면위에서 만들어내는 조각적 회화다. 그는 검은 물질, 흑연가루를 화면에 덮고 밀어나가거나 부분적으로 연필터치를 주고 돌멩이로 갈아내면서 인간의 몸 안에서 발산하는 내면의 소리, 심리적 메시지를 듣기를 요구한다. 그것이 어떻게 형상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분명 까다로운 문제이지만 좋은 작가,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를 가시적 세계로 끌어내고 들을 수 없고 다만 기미나 느낌으로만 전해질 수 있는 것들에 모종의 '몸'을 부여하는 이들이고 그것이 또한 그들의 일이다. 재료에서 새로움을 주는 근작은 오일페인팅에서 벗어나 흑연가루를 갖고 만든 검은 몸이고 이 검은 몸 그림은 작가의 일관된 주제인 인간의 실존이나 내면세계와 같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있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 위한 시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한 시도가 향후 어떻게 진척될 지가 무척 궁금해지는 근작이다. ■
박영택 ------------------
Christmas Art Shopping: I love Dream
2011_1201 ▶ 2011_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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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희_성탄_캔버스에 유채_45.5×38cm_2009 이국희_성탄2_캔버스에 유채_90.9×60.6cm_2011
초대일시 / 2011_1201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문정희_유갑규_이국희_이슬기_임현희_황나현
관람시간 / 11:00am~08:00pm
갤러리 예담 컨템포러리 Gallery yedam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삼청동 26-2번지 Tel. +82.2.723.6033
identity ● 현대인들은 본질적으로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나'라는 자아는 외부의 대상을 지각하고, '너'라는 타자에 대한 개념을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아가 객체로서 대상이 되어주고, 동시에 주체로서 대상을 필요로 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거울을 통해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듯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인들은 자신으로부터 아닌, 타인에 의한 이미지로 형성됩니다. 타인의,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of the other people, by the other people, for the other people)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며, 주체의 원초적인 모습인 유년기 아이들의 모습에서 비롯됩니다. ● 2008년부터 전개한 '시선'이 대상의 익명성과 호기심을 유발하여, 경험과 기억을 환원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면, 앞으로 전개될 작품 속 아이들의 시선은 대상을 응시하되 Mask는 감춰진 이미지를 형상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계 속에서 특정한 지위와 역할을 가지게 됩니다. 나로 인해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며, 타인에 의해 나의 역할이 주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폭과 깊이가 확장될수록 복잡해지고 상호 모순적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본연의 이미지를 덮게 됨과 동시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에 대한 정체성 혼란과 갈등을 야기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여주는 것의 관계, 흔히 우리가 문제로 삼는 정체성의 문제는 엄밀히 말해 자아 정체성이라기보다는 관계적 정체성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본인의 작업은 관계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바탕으로 드러냄과 드러내지 않은 상호관계를 통해 관계에서의 위기의식과 갈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 것입니다. 본인이 말하는 드러내지 않음은 역으로 드러냄을 의미하기도 하며, 드러내는 것은 또 역으로 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정체성 혼란에 의해 형성되는 이미지를 경험하고 이를 통한 반성적 사고와 함께 본 모습을 재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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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희_hidden mask N.05-1_종이에 콘테, 드라이포인트, 신콜레, 채색_29.7×21cm_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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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갑규_빙폭타다_장지에 수묵담채, 아크릴채색_72.8×60.7cm_2008
위에서 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폭포는 늘 한결같다. 그 변함없는 모습이 정말 좋았다. 위에서 부터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장마철이나 갈수기가 아닌 이상 계속해서 일정하게 수량을 유지하면서 흐르는 것이 중도(中道)를 지키는 듯 하고, 단단한 바위를 깎아내며 자신의 길을 확보하는 것이 마치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과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폭포를 소재로 삼아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폭포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감정은 매우 야성적이어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조차 싫어하는 듯, 남에게 일부러 투정부리는 듯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TV를 보는데 빙폭(氷瀑)을 오르는 사람들이 나왔다. 이것을 보면서 갑자기 이때가 폭포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듯 한 느낌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빙폭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은 위험천만한 빙폭을 오르는 두려움 보다는 스릴을 즐기는 듯, 또는 등산을 하며 자연과 같이 호흡하는 상쾌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이때부터 빙폭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업을 생각하게 되었다. ● 빙폭이라는 소재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객체로서 빙폭은 액체인 물에서 고체인 얼음으로의 변환이라는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고 있다. 시간의 변화의 따른 변환... 그것은 쉼 없이 변화한다. 이러한 점은 빙폭이 단순한 무생물이 아닌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 여겨지게 한다. 우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변화하기 때문이다. 빙폭이라는 것이 한번에 언 것이 아니고 녹았다가 또 얼고 녹았다 어는 반복된 과정에 의한 완성의 모습이 자기 자신이 세운 목표인 이상형을 이루기 위해 실패도 해보고 그 실패나 꾸지람, 배움을 통해 더 단단하게 완성 되가는 모습으로 치환 되게 느껴졌다. ● 은유적으로 빙폭은 우리 인생의 장애물과도 같다. 빙폭 등반은 인생이라는 여정 자체일지도 모른다. 순간의 잘못으로 위험에 처 할 수도 있고 긴장하고 꾸준히 오르면 결국 정상에 오르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사는 모습이다. 계속 오르다보면 끝이 있고 진정 자신이 뭘 해냈다는 보람이 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은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빙폭을 한 발씩 또 한 발씩 오른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각자의 삶의 정상을 만들어가며... 빙폭을 통해 이런 것을 얘기 하고 싶었다. ■
유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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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국희_sweet home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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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기_Another nature_캔버스에 유채_90.9×60.5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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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현희_Mother earth violet and green plant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84×68cm_2011
평일 오후 작업실로 가는 길, 나는 잉여인간이된다. 서류가방을 안고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저씨를 보거나 바닥에 뒹굴고 있는 신문 한 귀퉁이 부동산 정보를 흘낏 눈으로 스치며 난 현실에서 60도 쯤 비껴난 공간에 있다. 나는 사회와 그리 친하지 않은 듯 하다. 뉴스의 한 꼭지 조차 치밀어 오르는 화 때문에 혹은 우울함 때문에 끝까지 보지 못하고 채널을 돌려버리니… 그나마 날씨 소식이 가장 마음이 편하다. ● 내 그림도 이런 나와 닮아있다. 현실 도피라기보단 앞에서 말했듯 한 60도 비껴난 곳을 보고 있다. 이건 변명이 아니다. 전에 같이 살던 친구가 말했다. "언니, 길거리에 새들이 저렇게 많은데 온통 살아있는 것들 뿐이야. 어떻게 저 많은 새중에 단 한 마리도 죽은 새가 안 보일 수 있는거지?" 60도 비껴난 나의 현실 속에서 새들은 코끼리들처럼 그들만이 아는 죽는 장소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죽은게 아니라 하늘과 땅을 배회하는 영생하는 신일지도...그 비껴난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때문에 난 아직 붓을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 중 대부분은 런던에서 유학하며 그 곳에서 영향을 받은 그림들이다. 처음 런던을 도착했을 때 내가 그곳에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나무들이었다. 서울 역시 런던과 같이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서울의 나무는 그들에 비해 너무나 앙상하고 초라하다. 하지만 런던의 나무들은 많은 사람들과 차들에 상관없이 높게 자라있으며 풍성했다. 그 나무들은 나에게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켰다. 난 그 느낌을 생명력이 가득 찬 모습으로 내 캔버스에 담고 싶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풍성한 모습으로 말이다. ● 앞으로의 작품은 생명의 뒷 편에 있는 죽음에 대해서도 담고 싶다. 고 정기용 건축가 님의 다큐멘터리 중에 정기용 선생님께서 '시간이 멈춘 집' 이라 이름붙인 집이 있다. 어린 딸을 먼저 잃은 어머니의 의뢰로 고 정기용 선생님께서 만드신 집이다. 그 집에는 마당 가운데 죽은 딸 아이의 무덤이 있는데 무덤 위로는 성모 마리아 상이 올려져있고, 집 주위를 감싸는 높은 담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바람이 고이게 한다. 무덤을 둘러싼 풀들과 꽃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무덤을 어루만진다. 그 무덤을 보며 죽음을 바라보는 정기용 선생님의 시선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도 그 시선을 작품에 담고싶다. 차가운 땅이 아닌 생명의 근원지인 땅 속에서 그들을 어루만지길 기원한다. ■
임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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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나현_귀가歸家 Way back_한지에 혼합재료_72.7×60.6cm_2011
엷은 꿈 ● 어릴 적 나는 이따금 동화책 이야기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할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정말 '천국' 이라는 장소가 구름 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구름 위 천국'을 보려고, 옥상에 올라가 껑충껑충 뛰었던 적이 있었다. ● 비단, 어린 아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적어도 한 번은 자신만의 낙원을 꿈꾸고 찾는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곳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낙원은 우리의 상상에서 현실의 고민과 갈등 없이 최고의 행복과 기쁨만을 느끼는 장소로 귀결됨은 분명하다. 한편, 대부분 사람들의 상상 속 낙원은 실재하지 않거나,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낙원을 누리기 위해서는 늘 어떤 노력이나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 이번 작품에서는 실재하고 있지만 단지 알아채지 못한 낙원, 그리고 그 안에서 놀랍도록 행복한 에너지를 누리고 있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면서도 그들의 상처마저 편안히 보듬어 주는 착한 자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
황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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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얼굴
김정헌展 / KIMJUNGHUN / 金貞憲 / painting 2011_1201 ▶ 2011_1217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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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포근함의 미소_한지에 인두화, 혼합재료_190×120cm_2011
초대일시 / 2011_1201_목요일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일_12:00pm~05:00pm / 월요일 휴관
심여화랑 Simyo Gallery 서울 종로구 사간동 37-1번지 Tel. +82.2.739.7517 www.simyogallery.com
김정헌.. 그의 작품에 대한 단상 김정헌 작가의 그림은 쉽다. ● 나는 그림을 모른다. 유명하다는 대영박물관을 갔을 때에도 그 유명하다는 피카소의 그림에도 샤갈의 정교하고 화려한 그림 앞에서도, 영혼이 울리는 충격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다. 고흐의 그림보다 그의 삶의 뒷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본 김정헌 작가의 그림은 친숙하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그림은 잔잔한 이야기로 내게 말을 건네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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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햇빛 속에서_한지에 인두화, 혼합재료_190×120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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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김외헌_한지에 인두화, 혼합재료_240×70cm 2010
김정헌 작가의 그림은 1인칭 관점 소설이다. ● 그가 그리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특별한 인생을 품고 있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보인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의 그림에서 나와 공통된 내 삶의 부분이 보인다. 그의 그림에는 독특한 리듬감이 있다. 결코 격해지지 않으면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담담하게 인생을 그려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애쓰지 않아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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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피노키오가 된 남자_한지에 인두화, 혼합재료_64×122cm_2011
김정헌 작가의 그림은 진실하다. ● 그의 그림은 인두화다, 형영색색의 화려한 색채감도 없다. 화려한 붓의 기교도 없다. 세련된 느낌도 없다. 그러나 언제든 손을 뻗으면 힘들지 않게 닿을 것 같은 소박한 정서와 공감가는 그림 속 이야기는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 화려하지 않은 진정 성이 신뢰를 준다 그림을 통해서 한편의 영화를 보거나 좋은 노래를 들었을때의 감동이 느껴진다. 인생을 테마로한 변주곡과 같이 다양하고 변화무쌍하게 감성을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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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호랑이를 꿈꾸다_한지에 인두화, 혼합재료_122×122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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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희망_한지에 인두로 태움_240×170cm_2011
그의 그림은 토템이다. ● 그는 인두는 그림을 그리는 붓과 같다. 뜨거운 인두를 잡고 오래 작업하면 화상을 입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인고의 긴 시간을 거쳐낸 무쇄처럼 그의 그림은 셀 수 없는 인두질로 완성된 강철검같다, 그는 인물들의 인생을 인고의 인두에 담아 기도하듯 작업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가지고 있으면 상처받은 마음에 위안이 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 토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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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헌_마음으로 낳은 딸_첼로에 인두화, 혼합재료_122×44cm_2011
소외받은 인생을 노래하다. ● 뚱한 표정으로 흡사 '왜 내 사진 찍는 거야?'라고 표정으로 말하는듯한 이 아이는 김정헌 작가의 결혼기념일에 후원을 시작한 '다나 어도움 사보'라는 아프리카 차드라는 먼 나라에 살고 있는 6살짜리 아이입니다. 다나가 사는 마을에는 학교가 없습니다. 아직 인생의 선택을 할 수 없는 작고 약한 어린 아이입니다. 그는 부인과 매년 결혼기념일 마다 다나같은 아이를 하나씩 늘리기로 약속 했습니다. 그는 첼로위의 그린 다나를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결혼 20주년이 되면 20명의 아이를 후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보고 싶어요." 그는 이런 소외된 아이들을 후원하고 그들을 그림으로써 그들을 더 후원하고자 한다. (당신을 늘 응원하는 사랑하는 아내) ■ 맹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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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物의 意味:이지숙의 '꿈꾸는 책가도'
이지숙展 / LEEJISOOK / 李知淑 / mixed media 2011_1201 ▶ 2011_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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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숙_작업실에 머문 봄 농담_테라코타에 아크릴채색_88×83×3cm_2011
초대일시 / 2011_120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8:00pm
갤러리 예담 컨템포러리 Gallery yedam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삼청동 26-2번지 Tel. +82.2.723.6033
事物의 意味: 일상, 존재, 매혹 - 이지숙의 '꿈꾸는 책가도' ●
1. 테라코타 책가도: 고전에서 일상으로 민화는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에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어 왔다. '민화'라는 용어와 개념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937년 발표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라고 부르자며 그 개념을 발생시켰다. 그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겨레그림으로서 민화를 재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80년대 민중미술의 재인식과 발전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민화의 의미와 가치를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들은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팝아트의 결합과 발전은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화가 가진 전통 모티프와 단순성, 표현성과 같은 조형적 특징을 차용하거나 응용하는 시도는 비단 팝아트뿐만 아니라 미술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민화의 의미와 조형성이 인간의 기원적인 소망과 꿈을 담고, 정신을 달콤하게 매혹시키는 부정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흙으로 사물들의 가치와 의미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재구조화하는 작가 이지숙 또한 민화의 세계에 주목한다. 이지숙의 테라코타 작업은 서책이 쌓이고, 고전과 현대 문명의 사물들이 이야기를 하듯 중첩되고 구축된다. 서안, 서갑, 연적, 필통과 같은 선비와 문기(文氣)를 상징하는 문방구류들이 구성되고, 그 주위로 모란, 포도, 가지, 연꽃과 같은 부귀, 영화, 다산과 같은 인간 삶의 깊은 염원을 담은 식물들을 배치한다. 이는 전통 책가도의 책의 의미와, 부귀 · 다산의 과일과 꽃 그리고 수집과 완상(琓賞)으로서의 고동기(古銅器)가 어우러지는 고전 민화의 특징들을 농도 짖게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 테라코타 책가도가 만들어지기 까지 흙은 몇 가지의 삶으로 변환된다. 흙이 성형이 되면 건조되고 다시
2011.11.29 02:20:51 / Good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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