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하거나 인구에 회자되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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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1.11.02 23: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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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 11월 전시




I see,



임형태展 / LIMHYOUNGTAE / 林炯兌 / photography 2011_1101 ▶ 2011_1110



임형태_I see, 001_C프린트_120×15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520h | 임형태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1_화요일_05:00pm 서울 시립미술관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1:00am~06:00pm CSP111 ArtSpace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88-55번지 현빌딩 3층 Tel. +82.2.3143.0121 blog.naver.com/biz_analyst


내 남은 날들을 위한 뜨거운 찬가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가. 더 이상 남은 날이 없게 되었을 때 덤덤히 웃으며 아름다운 나날이었노라 말할 수 있을까. 사진작가 임형태는 결국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과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삶의 태도에 대해 차분히 성찰해 나가는 일련의 시리즈물을 제시하고 있다. ● 임형태는 그간 소박하고도 긍정적인 삶의 가치로움을 조명해왔고, 또한 모순된 시대의 정체성을 고발하고, 인간의 가식적 행위로 인한 진정성의 표류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러한 행보의 도움닫기로 이제 그는 삶과 죽음의 평등함이라는 보다 숭고하고도 대의적인 화두를 좇으며 참된 삶의 모습에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라고 했던 니체의 말처럼 임형태는 죽음이 삶의 연장선상에 있고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에서 삶을 아름답게 완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작가 자신의 경험과 진지한 철학적 관조로부터 형성된 주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종착지의 존재에 대한 환기와 경고의 메시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메시아니즘의 차원이 아니라 '브라보 마이 라이프'나 '인생은 즐거워'와 같은 일상의 기쁨과 보람, 행복을 위한 주술적 주문에 보다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 그는 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심리학자이자 호스피스였던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Ross)의 죽음에 대한 심리학적 반응의 계통연구 사례를 자신의 작업에 접목시키고 있다. 로스는 죽음을 맞는 환자의 심리적 변화를 5단계로 나누고 각각의 단계에 맞는 정신의학적 요법을 적용하고자 했다. 즉, 죽음에 대한 판정 이후 이들은 1단계 부정(denial), 2단계 분노(anger), 3단계 교섭(bargaining), 4단계 억울(depression), 5단계 수용(acceptance)의 과정을 겪으며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단계는 정확히 구분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의 감정 상태가 혼합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는데 작가는 그 감정변이의 과정을 테마로 한 다단계의 연작을 지속적으로 보여줄 계획이다.
임형태_I see, 002_C프린트_120×150cm_2010

이번 전시 『I see』는 연작 중 첫 번째의 것으로, 1단계에 해당하는 부정의 내러티브를 시각화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시한부 선고는 가장 큰 시련이자 고통일 것이다. 결코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충격과 당혹감,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동요와 폭발,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과 동화될 수 없는 슬픔과 비애감. 작가는 이 비이성적이고 통제하기 힘든 감정 표출의 단계를, 그러나 지극히 절제되고 고요한 양상으로 풀어나간다. 이는 부정의 상황을 다루고자 하면서도 그 의미와 전혀 반대되는 긍정의 의미를 타이틀로 삼은 점에서도 반어적 제스츄어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주제마저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주제 자체를 올곧게 드러내려는 예술적 행위의 밑그림이라고도 여겨진다. ● 작품의 배경은 모두 자연이다. 숲속이나 강가, 사막과 같은 청정의 풍광이 무대처럼 펼쳐지고 거기에 전혀 이질적인 존재처럼 작가 자신이 등장한다. 지나치리만치 생뚱맞은 배합이라 배경과 인물이 몽타주기법으로 합성된 것인지 순간 들여다보게 된다. 예를 들면, 바닷가와 모래사장의 절경에 넋을 놓을 태세인데도 어느새 시선은 망연자실 쓰러져 있는 작가와 상호연관 관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케이크, 흩어져있는 장미꽃잎으로 옮겨가 버리고 만다. 그런가 하면, 우거진 수풀 안에 난데없이 과일이 가득 담긴 새장이 자리하기도 하고, 마천루 속에나 어울릴 법한 잘 차려 입은 비즈니스맨이 수풀 속을 배회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실외 골프 코스 위에 실내용 러닝머신이, 수심 얕은 폭포 밑에 스쿠버 다이버가, 원시적인 동굴 속에 캐리어를 든 도시의 여행자가 버젓이 등장한다. 무엇인가가 조금씩 뒤틀려있고 어색함이 확연하다. ● 작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자연의 공간 속에 서로 뒤섞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들, 즉 -적어도 작가의 의도에 따르면 - 작가 자신과 작가에게 소속되어 있음직한 그 조화롭지 못한 오브제들을 화면 속에 극단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에 동화되지 못하는 존재의 불편한 심리와 익숙함, 순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어두운 심상의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 지극히 연극적인 미장센의 의도와 효과를 보여주는 임형태의 사진 작업은 모두 작가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한때 건강상의 문제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던 그는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되었고, 결국 인간 모두에게 공유되는 유한의 삶에 대한 리마인드와 스토리텔링을 예술의 언어로 말하게 되었다고 한다. ● 그가 구지 대자연을 무대로 삼은 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 자연의 그것과 닮아 있고, 자연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데에 연원을 둔다. 또한 등장인물이 작가 자신뿐인 것도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 속 조형 요소들은 상상과 은유의 코드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직접화법에 가까운 설정임이 드러난다. 이는 '부정'의 의도를 보다 극명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 여기서 죽음에 대한 환기를 주제로 하는 작가의 진중한 관점과 태도를 들여다보게 된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문화 예술 속에서 수용해 온 역사를 돌이켜볼 때, 각 시대마다 각종 의례, 신화적 설명, 종교적 행위 속에서 인간은 항상 죽음의 기원과 그 대처법에 대해 갈구해 왔다. 근대기 이전에는 주로 죽음 이후의 영혼, 의식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면, 근?현대기에는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죽음 이전의 육체, 육체가 사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하겠다. 임형태는 이러한 현대적 관점을 시사하는 로스의 시각에 입각하여 연작을 진행하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적 반성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중세적 관점을 더욱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주제를 5단계로 명확히 나누고 그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으며 영혼과 육체,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함을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화의 성격과 많이 닮아 있다고 하겠다. ● 죽음을 맞는 이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조밀하게 펼쳐 내고자 하는 임형태의 여정은 단순히 경험론자의 피상적인 선택은 아닐 것이다. 죽음을 완강히 부정함으로써 삶을 온전히 긍정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일 것이며, 남은 날들에 깃든 희망과 기쁨을 뜨겁게 노래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연작이 위안처럼 지속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 최정주
임형태_I see, 003_C프린트_120×150cm_2010
임형태_I see, 004_C프린트_120×150cm_2010

여섯 번째 손가락 ● 인간이 죽기 위해서는 왼쪽 여섯 번째 손가락이 필요하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자라는 이 여섯 번째 손가락으로 벨을 눌러야만 인간의 영혼을 태우러 배인지 카누인지 요트인지 하는 탈 것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손가락은 대체로 검버섯이 피면서 서서히 자라기 시작하는데 개중에는 벽에 똥칠을 하는데도 자라지 않는 사람이 있고 날 때부터 한 마디나 자란 손가락을 달고 나오는 아기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손가락이 자라는 속도여서 사람들은 대부분 이 손가락이 서서히, 천천히 자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평범한 K 또한 마찬가지였다. ● K는 어느 날 아침 왼쪽 여섯 번째 손가락을 발견한다. 세수를 하는 참이었는데 손가락 하나가 자꾸만 콧구멍을 쑤셔서 왼쪽 손을 보니 여섯 번째 손가락이 벌써 두 마디까지 자라나 있는 것이다. K는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인다. K의 나이 이제 고작 서른일곱. ● 죽을 징조인데 죽지는 않을 거야. 의사가 K의 여섯 번째 손가락을 보며 히죽거린다. 젊으니까 쑥쑥 자라는고만. 의사가 히죽거리며 말한다. 손가락은 맹렬한 기세로 마지막 마디를 밀어내려 하는 중이다. 흔적도 없이 잘라낼 수 있겠죠? 목소리가 마구 떨렸지만 K는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었다. 마지막 마디마저 자라나면 벨이 울리고 돛단배인지 뗏목인지 빌어먹을 탈 것이 온다지 않는가. 이쁘게 잘라 줄게 내가.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손짓으로 다음 환자를 부른다. 그런데 왜 저한테 벌써. K가 다음 환자에게 엉거주춤 자리를 내주며 묻는다. 의사는 그런 K를 흘낏 보더니, 난들 아나, 라고 대답한다. K가 조금 전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진 할아버지가 앉는다. 아이고 할아버지, 이제 유람선 타실 때가 되셨다니까요. 할아버지의 왼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K를 향해 의사가 히죽, 웃는다. ● 수술은 순식간에 끝났다. K가 잠에서 깨어나자 의사가 여섯 개에서 다섯 개로 돌아온 왼쪽 손가락을 K의 눈앞에 들이대며 어때, 감쪽같지, 이제 배 타려면 멀었다고, 라며 거들먹거린다. 의사의 말대로 K의 왼쪽 손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댕강 잘려 나가고 없었다. ● 퇴원해 집으로 온 K는 이제 여섯 번째 손가락 따위는 잊겠어, 라고 결심한다. 동시에 K에게는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의 물갈퀴 같이 얇은 피부를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생긴다. 나는 아직 여섯 번째 손가락이 돋아나기에 적당하지 않은 나이야, 라고 생각하며 K는 두려움을 떨쳐내려 한다. 하지만 이제 슬슬 배 타러 갈 준비를 해야지 라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을까 생각하면 K는 그만 자신이 없어진다. 가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두려움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 K는 오늘 아침에도 눈을 뜨자마자 손가락부터 떠올렸다. 손가락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침을 경험한 이상 그렇지 않은 아침으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다. 오늘의 손가락은 몇 개일까. K는 이불 속에 있는 왼쪽 손을 천천히 꺼낸다. 잠이 덜 깨 반쯤 감긴 K의 눈에 들어온 것은… ■ 이지영
임형태_I see, 005_C프린트_120×150cm_2010
임형태_I see, 006_C프린트_120×150cm_2010

여기 리필이요. 주방장 아저씨는 다섯 번째 참치 접시를 가져다주며 치켜뜬 눈과 굳어진 입술을 숨기지 않는다. 치킨에 피자 콜. 먹고 마시는 사이 해가 뜨고 살이 오르기를 여러 날. 그땐 배고픈 만큼 먹으면 먹는 만큼 움직이는 줄 알았다. 살이 찌는 건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믿었다. 살 쪄서 스트레스 받고 스트레스 받아 살찌는 동안 계절은 돌고 세상도 돌고 나도 돌았다. ● 돌고 돌면 결국 제자리로 오는 법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이것은 돌아서 돌아오는 이야기, 그러니까 몸무게가 두 자리에서 세 자리를 돌아 두 자리로 돌아온 이야기 혹은 벨트 구멍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거나 턱이 두 개에서 하나로 돌아오는 여정의 기록이며 나에게서 시작해 당신을 돌아 나에게로 돌아올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 임형태
임형태_I see, 007_C프린트_120×150cm_2010

The Passionate Eulogy for My Residual Days     -------------------------------------------

이국화展 / LEEKUGHWA / painting  2011_1102 ▶ 2011_1108
이국화_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_장지에 채색_169×390.9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본 전시는 "畵中有詩적 人物 情景"이다. 문학과 회화의 결합은 한(漢)대에 이미 있었다. 이때의 결합형식은 문학이 회화와 협력하여 초상화의 찬(贊)을 짓거나 또는 회화가 문학작품에서 소재를 취하는 것이었다. 비록 결합되기는 하였지만 각각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시화(詩畵)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사적 고사를 인용하여 그림의 가치와 이해를 돕고 있는 반면에 시대가 내려올수록 작품이 지닌 가치 중 작가가 의도한 의미를 시각 표현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동양에서 회화와 시는 서로 뗄 수 없는 깊은 관계 속에서 예술적 성취를 함께 하며 인간의 정신성을 고취시켜 왔다.  
이국화_오늘도 난1_장지에 채색_100×100cm_2011
이국화_오늘도 난2_장지에 채색_100×100cm_2011
  이러한 정신적 의취의 세계는 회화와 시가 동일하게 이상으로 삼는 심미적 세계로써, 회화는 공간예술이고 시는 시간예술이라는 엄연한 구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화중유시 · 시중유화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회화와 시가 소통과 융합을 이루며 동양회화의 특색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 소식(蘇軾)이 왕유(王維)의 시와 회화에 대해 품평어로 사용했던 시중유화, 화중유시는 회화와 시의 상호 관련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명제이다. ● "화중유시"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뜻이고, "시중유화"라는 말은,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뜻이다. 이 두 문장에 의하면 그림과 시는 같다는 말로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 전의 화가의 마음과 붓을 들어 시를 쓰기 전의 시인의 마음의 근원에 있어서 같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나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같다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다. 즉, 시와 그림의 결합이다.  
이국화_그 여자 이야기_장지에 채색_122×242cm_2011
이국화_어쩌면 좋지_장지에 채색_162×130.3cm_2011
이국화_그리움의 향기_장지에 채색_45.5×53cm_2011
  본 전시에서는 시서화의 근원적 동질성을 현대적으로 끌어내어 회화속의 시적(詩的) 정경의 형성과정인 시적표현 요소에 의해 창조되는 상징을 인물형상과 배경의 묘사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 이국화 ----------------

I AM HAPPY


김석展 / KIMSUK / 金錫 / sculpture   2011_1102 ▶ 2011_1108


김석_I AM HAPPY 2_철판(a car bonnet),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150×130×4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석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갤러리 그림손 GALLERY GRIMSON 서울 종로구 경운동 64-17번지 Tel. +82.2.733.1045 www.grimson.co.kr

  행복한 얼굴 ? ● 김석은 조각에 과감한 색채를 덧씌웠고 평면, 표면에 고부조를 활용해 일루젼을 극대화하는 한편 균질한 붓질을 통해 굴곡이 심한 요철의 피부에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구사된 색 면, 선을 그려 넣었다. 조각적 효과와 회화적 효과가 가파르게 부딪쳐서 이룬 작업이다. ● 사실적이면서도 어딘지 추상적인 분위기로 감싸인 조각, 키치적이고 인공의 내음이 강렬한 오브제와 유사한 조각, 평면을 밀고 융기하듯 올라와 형성된 부드러운 굴절로 이루어진 조각, 그러니까 표면에 일련의 파동을 일으키는 조각, 동시대 소비사회의 강한 시각적 스펙터클과 색채감각을 연상시키면서 그 위력에 눌린 얼굴 하나를 기념비적으로 각인하고 있는 그런 조각이다.  
김석_I AM HAPPY 3_철판(a car bonnet),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155×135×35cm_2011
김석_I AM HAPPY 4_철판(a car bonnet),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160×150×58cm_2011
김석_I AM HAPPY 11_철판, 폴리에스터, 페인팅_135×135×25cm_2011
  그 안에 있는 얼굴은 대중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누군가의 얼굴이자 소비사회의 캐릭터이고 스마일이자 익명의 존재들이다. 정면의 얼굴상뿐만 아니라 측면이기에 관자로 하여금 온전한 얼굴상을 확보하게 위해 필요한 시점을 스스로 찾아 이동하고 배회하게 한다.  
김석_I AM HAPPY 12_철판,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155×140×24cm_2011
김석_I AM HAPPY 6_철판,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105×125×20cm_2011
  화려하고 강한 색채들은 소비사회의 유혹적인 색채를 연상시키는 한편 인공의 상품 디자인, 화장 등의 색채에서 추출한 것들이다. 일정한 패턴이나 줄무늬(컬러바)가 얼굴 전체를 가면처럼 혹은 분장처럼 잠식해나갔다. 그로인해 얼굴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나 표정은 가려지는 편이다. 익숙하고 친근한 캐릭터들이지만 그 위로 겹쳐지는 색채와 줄무늬로 인해 흡사 눌리거나 억압되는 듯한 느낌도 든다. ● 이 역설은 화려하게 번쩍이는 소비사회의 색채기호들이 행복과 위안을 약속하지만 실상은 웃음 짓는 얼굴을 모호하고 이상한 표정으로 만들어놓는 편이다. 자동차 본네트(후드)위에 그려진 배트맨과 차두리, 여러 스타들의 얼굴 그리고 캐머플라쥐 문양위에 그려진 스마일 형상 등은 그런 역설을 짐작케 한다. ■ 박영택  
김석_I AM HAPPY 1_철판, 폴리에스터 조각, 페인팅_90×90×10cm_2011
  HAPPY FACE     -----------------    

분열의 질주


여승열展 / YEOSEUNGYEOL / 余承烈 / painting   2011_1102 ▶ 2011_1108


여승열_어느날 거리에서2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12.1×206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19970903a | 여승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6:30pm   나무화랑 NAMU ARTIST'S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4층 Tel. +82.2.722.7760

  현실, 분열, 파편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1. 여승열이 전시를 한다. 14년 만이다. 홍대 앞에 있는 그의 작업실 찾아간다. 그림들, 캔버스들이 늘어서 있다. 그림 속의 이미지는 낯익고도 낯설다. 오래전에 그리던 그림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은 낯익고, 이미지들 자체에 집중하면서 회화 혹은 그린다는 문제에 다가서려 한다는 점에서는 낯설다. 여승열의 그림들이 가지는 기본적인 구성은 변화하지 않았다. 화면의 일부분은 인쇄된 포장지들을 붙이고 나머지는 페인팅으로 채워져 있다. 화면은 분할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분열되어 있다. 한 세계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빤한 패턴으로 이루어진 곳이고, 다른 세계는 작가의 관점에서 재현 되어 있다. 재현된 것들은 풍경과 이미지의 파편들이다. 풍경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어디엔가 걸쳐 있는 장소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풍경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안에 사람들이 움직인다. 달리고 걷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아이콘과 비슷한 닭이나 새, 조류임에 분명한 생물들은 분열된 공간에 놓여있다.  
여승열_골목길1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62.2×112.1cm_2011
  2.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초현실적 분위기이지만 정확히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지들은 라깡이 말한 상상계의 일부처럼 해석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캔버스는 하나의 거울이고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들은 사실 작가 자신이다. 단지 작가의 몸이 아니라 생각과 느낌이 이미지화 되어 비친다. 그 거울은 그러나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다. 절반 이상은 패턴화 된 무늬들로 채워진다. 그건 작가도 어쩔 수 없다. 그 무늬들은 시시하고 일상적이다. 루이 뷔똥도 애플도 삼성의 로고도 아닌 빤한 꽃과 나무의 이미지들이다. 너무 평범하므로 오히려 의미 있는, 이 제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의 틈새에 페인팅이 있다. 그것이 작가가 자신 또는 세계를 보는 시선이다. 마치 라깡이 말한 상상계의 이미지들이 아기가 보는 전체가 아니라 일부에 지나지 않고, 자신의 모습 역시 파편을 재구성해서 보는 것과도 같이. 하나의 거울로서의 캔버스는 변주되지만 결국 자신을 비춘다. 그리고 그 얼굴은 작가를 넘어서 점점 사회로 확대된다. 확대는 작가의 의도 밖에 있다. 그가 그린 과거의 그림들과 그 점에서 다르다.  
여승열_골목길2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16.8×91cm_2011
  3. 요즘과 같은 시대에 우리가 겪는 분열증, 피해망상, 관계망상 따위는 일종의 필수 품목이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루에도 정신과 감정이 몇 번씩 오락가락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마찬가지이다. 아노미라든가 위험 사회라는 말 자체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스템이 얼마나 불안한가를 말해준다. 이는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정전 사태와 최근의 월가를 중심으로한 반자유주의 시위를 보아도 명백하다. 윤리적 가치, 도덕적 지향점이 없어서 일어나는 아노미는 무수한 착각과 겹친다. 일종의 도덕적 마비에 빠져 사람들은 착각한다. 자신의 삶이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괜찮으면 그만이라고. 이는 범죄나 죄악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은 공공적 영역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확대된다. 근래의 모든 이상한 사태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점들이 있다.  
여승열_코스모스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162.2×190.5cm_2011
  4. 물론 여승열의 그림이 이러한 것을 직접 언급하고 있거나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의 그림들이 불러오는 연상에 가깝다. 패턴화된 싸구려 포장지의 세계와 손으로 그려진 이미지의 세계는 서로 충돌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충돌 속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 그 망연자실함이 그의 그림을 초현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여승열은 이를 '초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실재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가 느끼는 우리 사회의 모순, 분열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우리와 자신이 바로 초현실인 것이다. 그 초현실은 우리를 분열적인 상태로 몰아넣고 그렇지 않다고 설득한다.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삶은 모순도 분열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이런 종류의 상태를 진단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물론 제정신을 가진 경우에 말이다. 김수영식 표현을 빌면 제정신을 가진 예술은 우리가 분열과 모순 속에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스럽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예술이 가치가 있다면 그러한 경우 뿐이다. 여승열의 그림은 바로 이 지점에 서 있다. 물론 그의 인식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여승열_공간2011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3×53.3cm_2011
  5. 여승열의 그림 속에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은 완결된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의 파편이고 무대 장치이다. 여승열의 그림은 일종의 액자 소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공간 속에 벽지들로 이루어진 유사 원근법적 장소가 있다. 벽지들은 분홍색과 무채색 계열들로 밝지만 별 의미 없는 무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안에 타오르는 불과 떠오르는 풍선, 달리거나 서 있는 사람, 어슬렁거리는 개, 날아가다 벽에 부딪힌 것 같은 닭을 닮은 조류들이 있다. 이것들 간에 특별한 연관 관계는 없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들이 상징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일종의 알레고리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말에 따르자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 상징은 아니고 그림을 보았을 때 느끼는 어떤 분위기와 감정의 환기를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그가 의도한 분위기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가 의도한 것은 제정신을 가지고 살 수 없게 하는 세계의 폭력이다. 그 폭력은 일상적이고 부드러워 보여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옥죈다. 즉 생활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때문에 그것은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상은 평온하고 대단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벽지 무늬의 벽에 가로수의 그림자가 비치고, 길바닥에 별로 위험하지 않아 보이는 불길이 일고, 하늘은 푸르고 사람들은 저 멀리 걸어가거나 서있다.  
여승열_유기견_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_53.3×53.3cm_2011
  6. 이 범상한 풍경들이 환기하는 감정은 기이한 막막함이다. 뭔가 잘못되었는데 아무것도 이상한 것이 없는 세계. 즉 오래전에 이성복이 쓴 시의 표현을 빌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의 세계이다. 잠시 그의 시 '어느 날 갑자기'와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의 일부를 연결 시켜 읽어 보자. ●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 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미루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처녀는 養老院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 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 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 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 두 편을 연결 시켜 읽어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성복이 삼십년 전쯤에 쓴 이 시들의 세계는 여승열의 그림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그 세계는 얼른 보기에 초현실의 세계로 보이지만 사실은 평범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들을 나열하면 초현실적 이미지들이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분홍 벽지는 벽이 되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은 불쑥 자라고, 어느 날 갑자기 원근법은 뒤집히고, 어느 날 갑자기 길바닥에 불이 타오르는...이 아이러니. 이성복이 80년대에 쓴 시와 여승열의 그림이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사는 세계이지만 우리 것이 아니었으면 싶은 세계이다. 끔찍하게도 세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것이다. ● 7. 여승열은 최근 자신의 작업이 메시지보다는 회화 자체에 경도 되고 있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의 이전 작업들이 보여주던 다소 직설적이던 언어의 구사는 중화 되었다. 그리고 페인팅 혹은 그리기의 즐거움에 대한 추구는 더 강해졌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그런 일을 경험한 자에게 회화는 기괴할 정도의 마력을 발휘한다. 그 마력은 수렁과도 같아서 한번 빠지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지 않을지라도 마음 속에는 늘 캔버스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아직 여승열이 추구하는 그림 혹은 회화에 관해 방법적으로 이렇다거나 혹은 지향하는 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직 이를 수도 있다. 그는 13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중이고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전혀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길과도 같아서 중단 된 곳에서 반드시 다시 시작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의 물살은 빨라 대개 한꺼번에 그리지 않은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극복하지만 시작은 같은 지점이다. 어쨌든 누군가 말했듯이'오늘날의 그림은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재현이 현실을 구성한다.'더 심하게 말하면 이제 재현을 벗어난 현실은 없다. 여승열이 그림을 그리건, 다른 종류의 이미지를 만들건 아마도 이점은 변화 없을 것이고,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도 이 점이 아닐까. 물론 이 글을 쓴 나도 마찬가지이고. ■ 강홍구 --------------------------------

유리방 Yuribang


김선호展 / KIMSUNHO / 金宣浩 / photography   2011_1102 ▶ 2011_1110 / 월요일 휴관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76.2×76.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선호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온 GALLERY ON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B1 Tel. +82.2.733.8295 www.galleryon.co.kr

  유리방 ● 유리를 통해 비추어진 세상은 사물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이미지이다. 유리창에 반영된 이미지는 중첩되어 보여진다. 유리 속에 녹아 있는 이미지는 내가 다다를 수 없는 무엇과 실제 세상이 변별될 수 없는 중간 지점의 모습으로 서리어 있었다. ● 그것은 유리라는 매개의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서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해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무엇이었다.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50.8×50.8cm_2011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76.2×76.2cm_2011
  유리를 통해 보는 행위가 현실의 대상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면서 그 매개물을 통해서 나의 속뜰을 보여주는 대상들을 찾는 작업 중 유리방이란 곳을 알게 되었다. 전국의 유리방을 찾았고 버려져 비어있는 그곳의 흔적들을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 촬영을 너그러이 허락해줄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작업 기간 내내 긴장감으로 항상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긴장감은 계속되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유리방은 어둡고 우울하기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유리창 속으로 투과되는 빛 속에서 창 때가 보였고, 거미줄이 보였으며, 머리핀도 있었고, 인어공주도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보였다. 유리라는 매개를 통해 파편으로 남아있는 사물들과 나 사이에 이어져 있는 나의 삶과 세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50.8×50.8cm_2011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50.8×50.8cm_2011
  나의 세상과 그곳의 세상은 유리에 함께 스며들어 있었다. ● 계속해서 작업이 진행될수록 그것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라져갈 흔적이 아닌, 지금 이곳의 구체적인 시간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이 사라지겠지만, 나의 작업 여정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공간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내게 유리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무엇 이었다. ● 나는 이것이 그저 기억을 엿보는 유리가 아니길 소원한다.김선호(www.sunhokim.com)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50.8×50.8cm_2011
김선호_유리방_디지털 C프린트_76.2×76.2cm_2011
  Yuribang     -------------------    

끈에 매달려 현실 밖으로 올라가다


유희선展 / YOOHISUN / 兪熙善 / painting   2011_1102 ▶ 2011_1112 / 일요일 휴관


유희선_떠있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실크 의자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1128e | 유희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6:30pm / 일요일 휴관   웅 갤러리 WOONG GALLERY 서울 강남구 논현동 96-4번지 삼경빌딩 B1 Tel. +82.2.546.2710 www.woonggallery.com

  어릴 적 가슴 졸이며 들었던 옛날 동화 가운데 하나는 할머니를 잡아 먹은 호랑이에게 쫓기던 남매가 허공에서 내려 온 동아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달님, 해님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동아줄은 현실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구원의 손길이었지만 다시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말았다. 달님, 해님의 세계는 결국 이 땅의 세계가 아닌 천상의 세계이자 죽음 이후의 세계이다. 아마도 이것이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갖는 영원한 이율배반일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하지만 궁극의 벗어남은 불가능하다. 단지 동화에서나 가능하다. 혹은 그림에서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유희선_분리_캔버스에 유채_116.8×91cm_2011
  유희선 그림에 늘 상 등장하는 끈이 앞 이야기의 동아줄이다. 유희선의 동아줄은 끌어 올려지는 대상과 같이 연결되어 붉은 노끈, 신발끈, 링겔튜브, 기름호스 등으로 변화하지만 그 끈의 역할과 목적은 모두 같다. 그것은 대상을 하늘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유희선 그림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이점이 초현실주의 그림의 상징과도 같은 르네 마그리트 그림과 차이나는 부분이다. 눈밝은 감상자라면 유희선 그림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푸른 하늘과 흰 뭉게구름이 마그리트 그림의 중요 배경이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화가의 그림 소재인 빵, 자동차, 의자, 탁자, 옷, 신발 등은 사람을 은유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들은 일상에서 누구나 매일 사용하는 것들이니 현실의 가장 충실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재들은 사실기법으로 묘사해서 사진 같은 느낌이 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지만 현실감, 실재감이 느껴지는 것이 유희선 그림의 묘미이다. 또한 네 다리가 잘린 의자, 하반신만 남은 몸뚱이, 곰팡이 핀 식빵, 뼈대를 훤히 드러낸 차체 등 현실의 고통에 대한 은유 또한 생생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 끈은 구원의 필요성을 더 정당화시켜주는 대비로 작용한다.  
유희선_Fly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11
  2년 전 유희선의 첫 번째 전시를 보면 화가는 허공에 뜬 자신만의 섬에 갖혀 낚시 줄 이라는 또 다른 끈으로 수 많은 물건들을 낚아 올리는, 역시 초현실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는 땅으로 내려왔으며 사물들이 끈에 의해 하늘로 올라가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저 끈은 과연 누가 끌어올리는가 일 것이다. 이것은 그림 안에 답이 암시되어 있다. 커다란 두 개의 발끝부분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발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즉 화가는 신의 은총과 구원과 같은 의미로 끈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유희선 그림의 끈은 보는 이에 따라 여러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꼭 신이 아니어도 막연한 미래에 대한 희망, 소망일 수 있다. 이것은 동화 속의 동아줄이 남매의 염원이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유희선_rapture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11
유희선_때로는 잠시 떠있고 싶다.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11
  그런데 신에 의한 구원이든 희망에 의한 상승이든 유희선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는 현실에서 탈출하여 벗어나는 것이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나는 염세성향이 강하다. 화가는 현실에서 벗어나 위안을 삼으려는 마음으로 그림에 임하였고 작가에게 그림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탈출하는 비상구였다. 그래서 화가의 그림은 초현실이자 탈 현실이다. 하지만 화가의 그림처럼 우리는 하늘의 동아줄을 잡고 올라 갈 수 없다. 이곳을 떠나서, 여기를 떠나서의 극락의 존재는 매우 동 떨어져있다. 그래서 옛 성현은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라고 말 하였던 것이다.  
유희선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65.2×90.9cm_2011
  어쨌든 유희선은 두 번째 전시회에서 첫 번째 보다는 훨씬 성숙한 화풍을 이루었다. 이전에는 섬에 갖혀 온갖 물건들에 파묻혀 절망에 빠져 있던 상태에서 구원의 희망을 갖게 된 것은 큰 진전이며 그림 구성에 있어서도 화면을 빼곡히 채웠던 잡다한 물건들이 하나로 수렴, 정리되었으며 덕분에 사물묘사가 질감까지 느껴질 정도로 사실성을 이루었다. 결국 화가의 초현실, 탈 현실주의 화풍이 다음에는 어디로 흘러 갈지가 궁금하다. 그것은 화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장차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라는 질문과 같다. 나아가서는 초현실, 탈 현실이 아니라 다시 현실, 재 현실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아무리 삶이 고달퍼도 낙천성을 잃지 않았던 우리 민족의 깊은 뿌리를 안다면 현실을 껴안고 그 안에서 재미와 의미를 찾는 작업을 화가들이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백남준이 말하지 않았는가."인생은 싱거운 것입니다. 재미있고 짭잘하게 만들려고 예술을 합니다." 혹시 모르겠다. 유희선의 다음 전시 제목이 "굿바이, 마그리트"가 될지. ■ 탁현규 ---------------

Dreamtime_꿈의 시대


윤지영展 / YUNJIYOUNG / 尹智英 / sculpture   2011_1102 ▶ 2011_1123


윤지영_명품아기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907i | 윤지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6:00pm_갤러리 도올 2011_1102 ▶ 2011_1113 갤러리 도올 기획 초대展 관람시간 / 월~토요일_10:30am~06:30pm / 일,공휴일_11:30am~06:30pm 갤러리 도올 GALLERY DOLL 서울 종로구 삼청로 87 Tel. +83.2.739.1405 www.gallerydoll.com   2011_1115 ▶ 2011_1123 산토리니서울 공모작가 릴레이展 관람시간 / 10:00am~10:00pm 산토리니 서울 SANTORINI SEOUL 서울 마포구 서교동 357-1번지 서교프라자 B2-01 갤러리 2관 Tel. +82.2.322.8177 www.santoriniseoul.com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윤지영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인간의 욕망이 지나쳐 나의 본래 모습은 뒤로하고 타인에게 끊임없이 나를 확인시키는 자신과 마주할 때 무엇을 느끼느냐고! 그래서일까? 전시명인 Dreamtime(꿈의 시대)는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들리나, 그녀의 작품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윤지영_명품아기-Gucci_실리콘외 혼합재료_53×23×20cm_2011
  창백한 피부와 허공을 쳐다보는 눈빛,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형상은 윤지영의 조각에서 대부분 찾아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에 작품은 하나같이 직설적이고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함과 어딘지 불편한 자세의 조각들은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어떤 진실에 호소한다. 그것은 아마도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힘겨운 삶을 살기에 조금은 퇴폐적이고 강한 욕망을 드러내더라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꿈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지하기에,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면서도 연민의 시선을 담고 있다. ● 그런데 작가의 신작은 전자의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고단한 현실에 맞서 열심히 살아가자는 얘기는 잠시 뒤로하고 이대로 좋은지 되묻는다. 꿈을 이루기 위한 욕망이 지나쳐 정작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누구를 위한 삶인가?"묻고 있다. 자신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를 결정짓는 그런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윤지영_명품아기-Louis Vuitton_실리콘외 혼합재료_52×23×20cm_2011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다양한 불안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이유는 능력에 따라 인간이 평가 받으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존중 받으며 관심에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칫 사회에서 낙오자로 도태되기 쉽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인한 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 그렇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살고 있기에 나의 본래 모습은 뒤로하고 타인에게 끝없이 자신을 확인시키고 있다.  
윤지영_명품아기-Chanel_실리콘외 혼합재료_22×20×52cm_2011
윤지영_Spam mail_실리콘, 네온외 혼합재료_가변설치_2011
윤지영_Dreamtime_실리콘외 혼합재료_150×130×58cm_2011_부분
  그래서일까? 윤지영의 작품'명품아기'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이런 불편한 진실이 우리의 감성 안으로 들어온다. 명품 가방의 이미지로 제작된 이 작품들은 무표정한 아이의 얼굴 위로 명품 로고가 선명하다. ●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본주의의 대량생산물 속에서 그것들로 겉모습을 치장하고 본래의 모습을 감추며 다른 이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한 모습을 마주할 때 마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꿈을 쫒는 대한민국의 현재이며, 우리는 그래서 꿈꾸는 시대에 그렇게 살고 있다고 윤지영은 작품으로 말한다. ■ 신희원 ------------

유니콘을 보다-순환, 치유 Seeing the unicorn-cycle, healing


이유성展 / LEEYUSUNG / 李有星 / installation.printing   2011_1103 ▶ 2011_1115 / 월요일 휴관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혼합재료, 호스, 모터펌프, 가변설치_ 유니콘 150×180cm / 물틀 300×180cm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유니콘을 보다 - 순환, 치유 ● 나는 특히 저녁 하늘을 보며 별자리 찾는 것과 하늘이 비치는 강을 바라 보는 것을 좋아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상상하고 작품 구상도 물빛에 그 려본다. ● 물과 흐름을 소재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소통을 자주 표현해 왔는 데 이번 전시를 기획하며 유니콘, 물(강가) 그리고 물이 순환되는 펌프를 이용해서 전설속의 동물이 전해줄 꿈같은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르고 서로 추구하는 이상이 달라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 올리는 유니콘은 아름답고 상상 속에서나 그려지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 다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유니콘의 상징성은 그의 뿔인데 그 뿔이 물에 닿으면 독이 있던 물도 정화되어 깨끗 해지고 순수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을 야기하는 사람들 과, 생각들에 유니콘의 뿔이 닿아 정화된 물이 흘러 순수해 질수 있다 면... ● 유니콘을 아름답게 만드든 동안, 텅빈 큰 틀에 강을 채우고 길고 긴 호스 에 물과 색를 넣고 순환 시키며 작업실의 진한 안료 냄새들 속에 뭍혀 산 몇 달 동안 세상의 한가운데서 갈등하고 지쳐있던 나는 순수한 꿈을 꿀 수 있었다. ■ 이유성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혼합재료, 호스, 모터펌프, 가변설치_ 유니콘 150×180cm / 물틀 300×180cm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혼합재료, 호스, 모터펌프, 가변설치_ 유니콘 150×180cm / 물틀 300×180cm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판화, 채색, 실크스크린_84×61cm_2011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판화, 채색, 실크스크린_84×61cm_2011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에칭_10×15cm_2011
이유성_유니콘을보다 -순환, 치유_에칭_40×30cm_2011
  Seeing the unicorn – cycle, healing    

modified at 2011.11.02 23:37:40 by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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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 작성시각: 2011.11.02 23: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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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ulus – Subverting the Familiar


주도양展 / ZUDOYANG / 朱道陽 / photography   2011_1103 ▶ 2011_1123 / 일,공휴일 휴관


주도양_Flower14_C프린트_100×2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127a | 주도양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09:30am~07:00pm / 토요일_09:3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예화랑 GALLERY YEH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2-9번지 가로수길 Tel. +82.2.542.5543/3624 www.galleryyeh.com


익숙함의 흔들기 ● 183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세계 최초로 카메라의 발명이 공표된 이후, 사진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제 사진이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현재 사진 매체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현대미술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미술계에서는 장르와 전공을 불문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사진을 흥미롭게 다루면서 자신의 작업세계를 전개해나가고 있음을 본다. 나로서는 오히려 사진 쪽 작가들보다 미술 쪽 작가들이 사진매체를 자유롭고 기발하게 다루면서 이미지에 대한 풍부한 사유, 그리고 재현을 둘러싼 논의와 사진이란 매체의 의미, 조건 등에 풍요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일련의 작업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사진을 통해 허구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기존 사진이 객관적 사실의 증명 혹은 기록이거나 투명한 재현이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뒤틀거나 흔들면서 또 다른 허상을 보여주는 작업 내지 기존 사진적 시각의 반성과 사진이란 매체를 회화적 도구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시선과 재현의 문제, 작가라는 주체에 대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주도양의 작업 역시 그런 예의 하나다. ● 화면은 2차원적인 평면이다. 사진이 얹혀지는 인화지 역시 납작한 평면, 피부에 불과하다. 평면에 빛으로 그려진 하나의 '상'이 사진인 것이다. 그렇다면 2차원에서 3차원을 재현하는 것은 회화의 수법의 문제이자 사진의 문제이기도 하다. 회화와 사진은 모두 피부 위에서 환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둘 다 평면에서 보여줌과 동시에 눈으로 사물, 세계라는 3차원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미지가, 사진이 현실로부터, 우리 몸의 지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다. 아울러 그렇게 지각된 현실의 한 단면이 평면, 피부 위에서 기이한 환영적 체험을 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인 외부 환경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킨다. 그것은 사진이 지닌 미묘한, 불가사의한 힘이다. 최근 여러 작가들의 사진작업은 그 같은 실제와 환영의 경계를 문제시하고 있다. 사진이란 매체를 공유하지만 이들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나 개념의 도상화가 아니라 사진이란 매체 자체를 질문하고 사진이 구체적인 실세계를 담아내면서 그것이 평면 위로 안착되어 오는 과정에서 야기하는 지각체험 등을 문제시하고 있다. 주도양의 작업도 그 맥락에서 기능한다. 그에게 사진이란 매체는 회화의 재료로 기능한다. 그는 사진을 가지고 물감과 붓을 대신해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 연출해 보인다. 이 사진 콜라주는 여전히 화가의 눈과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업이다.
주도양_Flower1_C프린트_100×200cm_2011
주도양_Flower10_C프린트_100×200cm_2011

독일의 생리학자 페닝거(Karl Pfenninger)의 시각적 비유에 의하면 인간의 오른쪽 눈, 왼쪽 눈은 각각 2차원의 영상밖에는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두 눈에서 받아들인 조금씩 다른 2차원의 영상들이 두뇌에서 종합되면 3차원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적 비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형태로 수용된 두 데이터가 두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창조성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 눈 역시 매우 잡종적이고 그로 인해 창조적인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는 기관인 셈이다. 주도양의 사진은 우리 눈의 그 같은 속성을 끌어들여 그 환영성을 길어 올린다. 그는 사진의 '한 눈 보기'를 거부하고 다차원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실제의 세상을 바라보고 '진짜처럼 보이는 효과'를 얻기 위해 여러 장면의 사진을 사용하고 우리가 지각하는 관념적인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원 샷으로 마무리하는 원근법적 시각을 벗어나 현재의 시점, 시간을 다양화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지각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사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원형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일면이 아닌 다면의 세계이자 우리를 둘러싼 입체의 세계를 평면으로 만든다. 사진기를 360도 회전시켜 여러 장의 사진이미지를 얻은 후 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조합하고 합성을 해서 한 장면으로 만든 사진이다. 사진의 평면성과 실세계의 재현력이 결합된 불가피한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구부러지고 원형으로 기이하게 결합된 사진은 실재에 대한 왜곡처럼 보인다. 현실로부터 출발했지만 그로부터 무척 벗어나 보이는 이상한 세계상을 펼쳐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이를 다시 이어붙이면서 다면원근법으로 통합해낸 그 이미지야말로 실세계의 사실적 모습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가 찍은 대상은 자연과 도시의 비근한 풍경으로 그 자체로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사진을 보노라면 바라보는 주체의 자리가 무척이나 헷갈린다. 뒤집힌 세계이자 거꾸로 선 자리이고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자연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체험을 제공한다. 주체가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사물이, 세계가 사진 찍는 주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해주면서 작업을 주재하고 세계를 편재하는 작가의 주체적 위치 자체를 은연중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주도양_Pine1_C프린트_200×100cm_2011
주도양_Pine2_C프린트_200×100cm_2011

주도양 사진은 가상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근대 이후 서구의 시각적 재현을 일탈, 거부하는 재현 구조다. 원근법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현실 공간을 사물의 거리와 크기에 따라, 수학의 원리에 의거하여 재현하는 원칙으로 근대 미술 생산의 핵심 사안이었다. 원근법은 근대 회화가 보여주는 현실 환영주의, 즉 회화라는 재현을 바라보면서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영감을 주려는 의도가 만든 재현 원리이다. 사진 또한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을 현실계와 동일한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것의 인증의 결과이자 명징한 객관적 기록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진은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어느 한 측면의 반영이고 그것 역시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 입장, 관심 등을 여과없이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엄밀하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진, 순수한 재현적인 사진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사진 역시 그것 자체로 단일하고 완결된, 순수한 재현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재현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은 재현의 기능에만 저당잡혀 있지도 않다. 사진 역시 이미지를 다루는 수많은 매체 중 하나다. 주도양의 사진은 명료하고 선명하게 객관적 세계를 드러내는 사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재현의 투명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업이다. 주지하다시피 포스트모던 미술에서 이미지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세계에 있는 지시대상이 아니라,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 즉 텍스트로서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세계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재현하거나 기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이러한 창조 작업 속에서 이미지의 위력이 존재한다. 그에 따라 실재는 이미지에 의해 포착될 수 없고 직접적인 재현은 불가능해졌다.
주도양_Pine3_C프린트_200×100cm_2011

주도양은 공간을 평면으로 만들고 360도로 훑어나간 시선을 종합해서 원형으로 이어 붙였다. 이제 우리는 입체적 대상을 한 순간, 시간 속에서 조망한다. 이 사진은 사물을 둘러보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거나 붙여버린 셈이다. 이것은 분명 보이는 세계지만 미처 보지 못한 세계이자 그동안 사진이 보여주지 못했던 세계, 은폐시키거나 억압했던 장면을 되돌려주는 사진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세계를 새삼 재인식하고 사진의 재현술을 의심한다. 세계는 정지되거나 한 시점에서만 보여지거나 고정된 시간 속에 응고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재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끊임없이 요동치고 원형으로 선회하며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간다. 주도양은 그 세계를 여러 시간, 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나가면서 기존 사진적 시각이 왜곡된 것임을 드러내면서 허구나 판타지로 보이는 자신의 사진이 결국 사실적인 사진, 실제적인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정교한 사진은 사진적 시각을 해체하고 그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는 한편 시각적 유희를 유지하면서 탄탄한 조형적 요소와 원리 또한 한 몸으로 껴안고 있다.

주도양의 사진은 온몸으로 찍기다. 그는 외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신적인 행위이다. 몸으로 보는 것이다. 본다'voir'는 것은 안다'savoir'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전신적으로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받아들임이다. 보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본 내 몸의 신체적 지각반응을 보여준다. 또한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란 고정되거나 완결된 형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배 속에서 유동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자 가변적이고 모호한 어떤 상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특정 대상의 진실이나 본 모습이란 것 역시도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다면 대상의 본래 모습, 참모습이란 사실 부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거나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부정된다. 사진은 외부세계를 재현하지만 사실은 어느 한 시간을 찍는 것이다. 그 시간에 따라 세계의 모습은 계속 바뀌고 지연된다. 사진을 보면서 실재하는 대상, 세계를 연상하고 동일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한 순간, 어느 특정 시간의 편린일 뿐이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지배 속에서 변화를 거듭한다. 따라서 시간은 재현의 체계화된 세계를 뒤흔드는 현기증이며, 원본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엄청난 소용돌이다.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실체가 아니다. 때문에 '순간'도 없고 '영원'도 없다. 있다면 부단한 '차이화'가, 즉 차이를 발생시키며 나아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무수한 시간 속에 잡힌 풍경이 계속 접속되고 분열되듯 나아가면서 원형으로 이어지면서 세계를 보여주는 주도양의 사진은 그런 차이를 드러낸다. 그 차이와 분열은 우리가 보는 대상을 끊임없이 회의하게 한다. 그 모든 익숙함을 흔든다. 생각해보면 미술행위란 당대의 보편적인 시각적 관습을 회의하면서 낯설게 보기, 감각의 교란과 익숙함의 흔들기를 시도해나가는 일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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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울림


박형근展 / PARKHYUNGGEUN / 朴炯根 / photography   2011_1103 ▶ 2011_1127 / 월요일 휴관


박형근_Forbidden forest-2_C프린트_150×190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002i | 박형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잔다리 GALLERY ZANDARI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0-12번지 Tel. +82.2.323.4155 www.zandari.com


암흑의 순환고리로 회귀하다 ●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바다에서 중생은 그저 찰나의 시간을 살다 갈 뿐이다.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을 짐작하려 한다. 물론 그것은 알량한 경험 몇 푼 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깊은 염원이 담겨 있는 그 눈 속에 이미 영원이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미약한 마음 속에 삼라만상을 관통하는 우주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박형근_Forbidden forest-8_C프린트_150×190cm_2011

박형근의 사진이 드러내는 그 영성의 세계를 목도하면 마치 실체를 알 수 없는 우주의 표면 한 자락이 스쳐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익히 알려진 박형근의 「Tenseless and a voyage」(2003~2011) 연작은 미스틱한 분위기를 내뿜는 풍경들을 통해 인식과 감각이 교차하는 묘한 지점을 잡아내는 작업이었다. 상당한 시간 동안 지속했던 이 작업은 불편하면서도 익숙하고, 목가적이면서도 기묘하며, 불안하면서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몽환적 풍경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대상의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현장에 연출을 가미하거나 색감을 보정하는 등 약간의 제어행위를 시도했었다. 그렇게 완성된 풍경은 지극히 서정적인 형식미를 갖추면서도 잠자던 내면의 감각들을 일깨우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개인전에서 박형근은 밤의 해안선을 대상으로 한 「경계에서」연작과 함께 「무제-레이어」와 「금단의 숲」 등의 미발표 연작들을 선보였다. 새롭게 발표되는 작품들은 전작들에서 보여졌던 최소한의 개입마저 절제시킨 성격의 것들로서 박형근의 미학의 본질적인 지점과 관계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는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스스로 인식 너머의 이미지를 찾아 헤매게 만든 근본적인 동인에 대한 사유의 결과들을 보여주고 있다.
박형근_On the edge-1.3.4.5.7_C프린트_207×120cm_2010

「무제-레이어」 연작은 통상 육지에서 바다를 바라보게 되는 시선의 보편적 방향성을 역전, 바다의 위치에서 바라본 절벽을 포착한 사진들이다. 영국 남부의 이스트본(Eastbourne)과 동부 노포크(Norfolk) 지역 해안의 절벽과 해안선을 촬영한 사진들은 장구한 시간의 흔적으로 형성된 지층의 재질감을 뿜어내고 있다. 영원히 고정되어있는 것만 같은 대지가 움직였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한 이 회백색의 지층은 극적이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도 거대하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 사이에 위치한 현재의 시간성은 와해되고 그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중첩의 흔적만이 눈 앞에 펼쳐진다. 과학과 이성으로 접근하기에 대상은 너무도 깊다. 절벽의 굴곡진 면은 화산활동의 잔재이고, 짙푸른 초록의 켜는 퇴적된 플랑크톤의 집적이라는 지식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시선은 절벽의 배면으로 무한히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의 초월적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모든 감성과 인식은 그 보이지 않는 공간 속으로 함몰되어 버리는 것이다.
박형근_Untitled, layers-3_C프린트_107×135cm_2007
박형근_Untitled, layers-5_C프린트_107×135cm_2005

그가 포착하는 장소들이 내뿜는 영적 분위기는 기실 그의 '신체적' 작업 언어에서 기인한다. 그는 학습으로 취득되는 지식을 기반으로 시선을 던지며 대상에 접근해 들어가지 않는다. 어차피 그가 선택한 거대한 대상을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스스로도 이 대상에 개입할 수 있는 시선을 찾지 못했다고도 말한다.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풍경이 자신의 시선을 흡수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그 무한의 대상에 대해 정직한 몸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자신의 신체가 지시하는 투명한 본능으로 추적해 나갔다. 이것이 그의 사진이 획득한 비물질성의 물적 설득력을 이루게 한다. ● 박형근은 이 백색의 흔적들로부터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대상으로 「금단의 숲」 연작을 같이 선보였다. 문화와 고금을 막론하고 숲은 인간의 지각능력을 마비시키는 미지의 세계다. 삼가함을 뜻하는 한자, '禁'자의 형성원리가 잇닿아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제주도의 어느 한편에 존재하고 있는 이 숲은 본래 수시로 발생하는 화재에 대한 주민들의 대응으로서, 화기(火氣)를 다스리기 위해 수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방책으로 조성된 것이었단다. 사실 이것은 민간신앙이라는 문화적 규정을 넘어 제한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직면한 초월적 힘에 대응하는 보편적 방법론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러한 세계관의 틀이 붕괴된 이후 이 숲은 4.3사건의 아픔의 과정을 겪었고 개발의 환상으로 열광하는 인간들에 의한 방치의 시간도 겪었으며, 자연 보호의 명목으로 보존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다시 생태와 웰빙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관심과 주목의 대상으로 존재해왔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지나며 그 존재에 덧씌워진 가치는 변화해왔으되 그 자신의 본질은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해 온 항상성의 완전체였던 것이다. ● 이 '금단의 숲'도 '회백색의 지층'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선형적 구조에서 이탈해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미래가 갈기갈기 엉켜져 있는 곳이다. 이 숲은 사람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기세로 단단하게 닫혀져 있다. 그 안에 어떤 대상이 있겠지만, 사실 그 대상은 없다. 그것은 무한의 늪이다. 그의 숲을 목도할 때 동원되는 감각은 시각에 국한되지 않는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진녹색의 표면 위로 은은히 새어나오는 빛, 뒤엉킨 수풀 사이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음, 모든 것이 내려 앉은 검은 흙의 표면에 배어 있는 음습한 물기, 이 모든 것들을 신체는 공감각적으로 감지한다.
박형근_Untitled, Layers-1_C프린트_120×150cm_2005

이 금단의 땅은 한눈에 보기에도 섣부른 접근을 허락할 것 같지 않다. 작업의 대상으로 결정했으나 처음엔 도저히 작업의 방향을 잡지 못했었다고 작가는 토로했다. 결국 그는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 자체를 버렸다. 그 투명한 화해의 과정 후에 비로소 숲은 그 은은한 질감을 허락했다. 이 작업 또한 연출이 전무하고 컬러도 있는 그대로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존 작업들과의 시선의 층위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대상이 가진 완전체로서의 느낌을 구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상정하고 여하한 미시적 요소들을 배제한 채 전체를 조망하고자 노력했다. ● 지층과 숲이 가진 초월적 시공의 느낌은 비로소 「경계에서」 연작에서 정리된다. 칠흑 같은 검은 빛이 수만겹 중첩된 하늘은 화산석들이 조밀하게 모여있는 해안선과 맞닿아 있다. 한때 시뻘건 불덩어리는 내뿜으며 우주를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이 검은 대지는 이제 극한의 고요함으로 무한의 우주와 맞닿아 있다. 다섯 점이 나란히 배치되어 수평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을 보면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행성이 무한한 우주의 어느 한 점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대지는 물질이고 우주는 관념이다. 박형근이 말한 경계는 이렇게 공존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두 세계가 맞닿아 있는 지점일 수도 있겠다. ● 박형근의 작업은 자신의 프레임으로 포착한 대상을 사진으로 재현하여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각자의 세계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 적지 않은 밀도의 요소들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빈 공간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통해 찰나를 사는 존재론적 한계를 초월하여 무한한 시공간으로의 확장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 그의 작업은 이성과 개념을 넘어 눈과 몸이 찾아낸 풍경들이다. 그는 즉시적이고 직관적인 움직임으로 대상에 다가간다. 그의 사진들은 당대의 담론이나 이슈들로부터 비껴서 빈 공간을 유영한다. 그 보이지 않는 공간을 찾아내기 위해 그는 선험을 제거하고 투명하고 예민한 촉수를 견수(堅守)한다. ● 예술의 미덕은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를 초월한 비논리의 세계, 시각을 초월한 비가시의 세계, 관념을 초월환 무의식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길을 찾아주기보다 심연의 미로 속으로 밀어 넣어 길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그 지난한 배회의 과정을 지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세계와 조우할 수 있음을 박형근의 사진들은 암시하고 있다. ■ 고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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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wberry's Issue


션팡정展 / SHEN FANGZHENG / 沈芳正 / painting   2011_1103 ▶ 2011_1204 / 공휴일 휴관


션팡정_it were true that there is an end of world, I would jump into the sea I painted_ 캔버스에 유채_205×253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30c | 션팡정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공휴일 휴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GALLERY ARTSID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6길 15 Tel. +82.2.725.1020 www.artside.org


파도처럼 경쾌하고 별처럼 가볍게 ● 중국의 젊은 신예작가 션팡정은 우선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들 - 그것이 사물이던 인물들이던 - 을 연출하여 촬영하고 그것을 근거로 최종 회화작품을 완성시킨다. 애초부터 최종 작품을 머리 속에 명확하게 그려 넣고 모델들의 복장,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등을 감독한다. 이는 작가에게 회화의 전 작업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구상이 이루어 지는 시간이자 창작행위이기도 하다. 이때 작가는 세 대의 카메라를 운용한다. 이 카메라들은 각기 전체 제작 장면, 디렉팅된 모델 그리고 디렉팅하고 있는 작가를 촬영한다. 어쩌면 우리가 타자와 관계하는 종합적인 인식과정 즉, 대상을 통해 타자를 깨닫고, 그 타자와 소통하려고 하는 자신을 깨닫고 그 후 타자와 소통하고 있는 자신의 사고들을 객관화 하는 단계적 인식과정을 카메라의 눈을 통해 현실화 시킨다. 이렇게 현실화된 모델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다시 한번 인간 심리의 근원적인 질문, 자연이 주는 성찰의 기회 그리고 다시 인간 본성으로의 회귀를 위한 우주의 심연을 드러내기 위한 강력한 메타포로 탈바꿈된다.
션팡정_Actually, Mountain Fuji is a volcano_캔버스에 유채_110×220cm_2011

욕망, 영혼을 고갈시키다. ● 션팡정은 유아기 때의 기억과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양한 은유적 장치로 구분하여 현대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 그 심리적 상태를 좌지우지 하는 강력한 원인으로서 작가는 인간의 욕망을 그 문제의 핵심에 두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하고자 하는 요소에 따라 성취를 이룰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주로 그 반대의 역할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작가는 이를 근거하여 모델들의 다양한 행동 패턴을 연출하고 그 연출된 내용을 토대로 자신만의 다이내믹하면서 드라마틱한 회화를 완성한다. ● 욕망의 주체자로서 인간을 작가는 가능한 한 백색의 피부로 연출하고 그린다. 백색의 피부는 그의 유아기적 기억들로 대변되는 표현 방법으로서 깨지기 쉬운 유아적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말 그대로 백색은 외부로부터 오염되기 너무나 쉬운 색이다. 유아기의 많은 기억들 대부분이 막연한 상상의 시간으로 혹은 무의식의 공간으로 침잠해 버린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성장의 경험에 의해 백색의 기억들은 오염되어가며 끝내는 잊혀진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러한 유아기적 상상과 무의식에 근거하여 욕망의 근간에 놓여질 심리적 상황에 대해 다양한 액세서리와 메이크업 등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또한, 그의 작품의 특성 중 하나는 백색의 피부와 함께 남녀 구별을 모호하게 하여 거세공포와 같은 유아기적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거세 당했거나 거세 당할지 모르는 불안과 그 불안으로 자극된 욕망 그리고 그 충족의 결여는 작가로 하여금 성장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를 그려내게 한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공허하고 허탈하며 때로 공격적 성향을 띠게 된다. 작가에게 성장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상상력의 근원일 수 도 있지만 대상, 혹은 대상간의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미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결정된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작가는 사실적으로 대상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의 창문을 엿보는 듯 한 불편하면서도 은근한 떨림을 보여준다. ● 이러한 떨림은 은근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우리를 흔든다. 그 흔들림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안정과 상식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욕망의 자극에 의한 흔들림은 언제나 그 정도를 넘는다. 그것이 주는 쾌락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가 불가하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 깊이와 강도는 점점 더 깊어지고 강해진다. 헤어 나올 수 없는, 헤어 나오려 하면 점점 더 빨려 들어가는 이른바 늪과도 같다. 그리하여 작가는 급기야 영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모델들을 끄집어내 영혼의 무게를 측정하는 특별한 저울 위에 올린다. 저울의 바늘은 제로에서 꿈적도 하지 않는다.
션팡정_Went to Heaven_캔버스에 유채_255×170cm_2011

자연, 반복적으로 성찰하다. ● 션팡정은 고갈된 영혼을 위해 반복적 성찰이라고 하는 미장센을 설계한다. 작가는 그 미장센의 중심 소재로 자연적 소재를 끌어 들였다. 야채, 과일, 꽃과 같은 우리 일상에 너무나 밀접해 있는 소재들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이것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의 본래적 성질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의 관계다. 단순히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그 소재들의 기능이 이탈되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델들을 연출했듯이 션팡정은 이러한 친근하면서도 여전히 자연적 성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소재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연출한다. 그 연출의 메인 테마가 바로 기능전환이다. 작가의 연출로 인해 야채와 과일들은 거대한 산을 이루게 되고, 꽃들은 집채만한 파도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기능전환을 통했을 때, 이 친근했던 자연물들은 우리의 일반적 감정들과 대립하고 대립은 우리의 바라봄을 이끌고 그 바라봄은 성찰의 기회를 만든다. 작지만 변증법적 논리가 진행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성찰하게 되는가. 답은 의외다. 왜냐하면 그 답이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가의 연출과 계획에 의해 반복을 성찰한다? 쉬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반복은 수행이나 공부를 하는 방법의 일환이지 그것 자체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찾고자 하는 것이 인간 존재를 위한 근원적 기능이나 방법이었다면, 반복은 충분히 그 해답으로서 무게를 지닐 수 있다. 이를테면, 자연은 인간이 존재하고 영원할 수 있는 힘을 반복이라고 규정하고 끊임없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반복을 생성의 에너지로 상정하고 그 에너지가 창조하는 피조물 중에 어쩌면 인간도 포함되어 있다는 가정이다. 야채와 과일들로 만들어진 산이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이며, 꽃들이 만들어 놓은 파도는 노아의 방주를 집어 삼킬 만큼 거세고 거대하게 몰아치고 있다. 이 묘한 아이러니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반복의 에너지라면 우리는 골이 깊어 동물조차도 접근이 어려운 첩첩산중의 꽃이 왜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이유를 따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반복은 순환이고 순환은 결과론적으로 생산과 발전을 꾀하는 운동이라면 인류는 그 지난한 반복의 힘으로 인해 발전해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를 포함해 생명의 본질적인 패턴은 거기가 어딘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늘 그래왔듯이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의 시선이 우주로 향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리하자면,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반복적 성찰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은 우리의 근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욕망으로 점철된 우리의 삶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그 욕망의 충족으로 고갈된 영혼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 근거로서 작가는 자연이라는 해답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션팡정_Pinocchio's prophecy- Suke, Suke, Suke!_캔버스에 유채_140×510cm_2011
션팡정_Summer has gone_캔버스에 유채_110×220cm_2011

우주, 근원으로 회귀시키다. ● 우주의 별들과 지구의 생명체들은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사후에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별로 돌아간다는 문학적 상상력을 품어 왔다. 션팡정 역시 그 믿음을 이성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감성적으로는 굳게 믿고 있는 듯 하다. 어려서부터 늘 올려다 보던 밤하늘의 별 중에 자신이 돌아갈 별이 있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사는데 감성적으로는 매우 든든할 것 같기는 하다. 실질적으로 생명은 우주 에너지의 파장에서 비롯 되었다고 하는 다소 비현실적인 이론들이 있기는 하나 별과 우리의 생명과의 관계를 과학적으로 따지기에는 그 둘 사이의 거리가 광년처럼 멀기는 하다. 하지만 각각의 별이 생성하는 기운 즉, 에너지와 태양계 사이에 미세하나마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생명과 별은 막연하나마 나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고 점쳐볼 수는 있을 듯 하다. 작가는 우리의 생명과 일대일로 대치될 수 있는 밤하늘의 별들이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때로는 꽃처럼 예뻤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 듯 하다. 소년처럼 매우 순수한 생각이기도 하면서 우리 근원에 대한 위트 있는 고민이기도 하다. 그 달콤한 별들에 대한 상상, 그것은 우리가 에너지의 형태로 우주에 속해 있을, 시간이나 공간과 같은 개념뿐 아니라 그 떤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으로, 초콜릿처럼, 꽃처럼, 단지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작가적 해석일 수도 있다. ● 션팡정은 인간, 자연 그리고 우주를 줄곧 같은 선상에서 고민해 왔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는 믿음이 그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그는 그 세 개의 꼭지점들을 잇는 선들이 종국에는 원을 그리는 식으로 순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각각 꼭지점들의 개별적인 역할은 서로 다르나 그것이 하나의 원을 그리면서 전체적으로는 우리 인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묻는 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적으로 작가는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어떻게 이 구조를 연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제작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우리는 과연 다시 근원으로 또는 어떠한 에너지로 회귀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영혼이 지닌 에너지의 고갈로 인해 일회용처럼 소멸되어 버릴 것인가. 그 결과에 대한 결정은 우리 자신에 달려 있다. 생명임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욕망의 발현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삶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는 단서로서 자연을 매개로 하여 전체를 구상하고 있는 작가는, 그 에너지의 본원으로서 우주를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욕망하고 자연으로 성찰하고 우주로 회귀하는 순환을 그리고 있다. 살아 온, 아니 욕망한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젊은 작가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고 가볍게 풀고 있다. 그럼에도 그 주제 자체가 갖는 무게로 인해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 양쪽의 밸런스가 잘 맞아 떨어지는 작품이 바로 션팡정, 그의 작품이다. 서늘한 가을 바람을 타고 리드미컬하게 떨어지는 낙엽처럼 생명이 다해 가벼우면서도 또 다른 생명을 준비해야 하는 무게가 동시에 느껴진다. ■ 임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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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UNDARY


민성식_박상호 2인展   2011_1103 ▶ 2011_1124 / 일,공휴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6:00pm

기획 / art company H

관람시간 / 11:00am~07:00pm / 토_11:00am~06:00pm / 일요일,공휴일 휴관

살롱 드 에이치 Salon de H 서울 강남구 청담동 31-2번지 신관 1,2층 Tel. +82.2.546.0853 www.artcompanyh.com


이미지와 이미지 경계에서 익숙함과 낯섦이 혼재되어 있다. 사람들의 상상이나 꿈 속에서 볼 수 있는 공간들은 대부분 현실과 닮아 있는 듯 보이지만 현실적 재현이 불가능한 이미지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풍경과 생경한 이미지의 결합은 양면성을 내재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게 된다. 11월 3일부터 24일까지 salon de H에서 진행될 The BOUNDARY (이미지의 경계) 전시는 서로 다른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인해 경험적 인식 속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생경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또한 이를 통해 시각의 확장을 유도하고자 한다.
민성식_맥주공장_캔버스에 유채_112×194cm_2011
민성식_공사중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10
민성식_낚시가기(맑은날)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11
민성식_이것도 충분치 않아_캔버스에 유채_112×162.2cm_2010

정상적인 시점과 원근법을 벗어난 이미지들이 불안정한 구도로 결합되어져 있다. 민성식의 풍경은 기존의 사물이나 풍경을 바라보던 투시원근법으로 인식이 어려운 생경한 이미지로 읽혀진다. 이러한 풍경은 서로 양면적인 성격을 가진 도시와 자연 속 풍경들이 한 공간에 놓여진 가상의 이미지이다. 도시생활에서 느끼게 되는 편리함과 공허함 같은 서로 다른 감정의 단면들이 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도시 속에서의 자연생활로 표현되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던 일탈을 경험하게 해준다.
박상호_B.D-Stuttgart_C프린트, 디아섹_50×160cm_2007
박상호_C-1959_페이스 마운트, 피그먼트 프린트_50×70cm_2009
박상호_growing house #1_종이에 연필, 아크릴채색_83×124cm_2008
박상호_VW-T3_페이스 마운트, 피그먼트 프린트_50×75cm_2011

박상호는 일상의 이미지와 허구의 이미지 사이의 결합을 통해 비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그는 실제 이미지를 새롭게 재배치하거나 변형시켜 실재와 허구적 이미지를 연결시킨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실재와 닮아 있지만, 어딘지 모를 낯섦이 느껴진다. 마치 증명사진 속의 이미지와 같이 평면적으로 보여지는 건축물과 자동차들은 창문의 비율이나 자동차 바퀴의 위치 등이 변형된 상태로 화면 속에 배치된다. 미세하게 조작된 건물과 자동차 이미지는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이미지 인식에서의 착오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 이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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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권 : 서울, 침묵의 풍경 II


안세권展 / AHNSEKWEON / 安世權 / photography.video   2011_1014 ▶ 2011_1127 / 월요일 휴관


안세권_서울 뉴타운 시리즈, 옥수동에서 본 금호동 풍경_필름 설치_100×127cm_2009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안세권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013_목요일_05:00pm

Seoul, A Landscape of Silence

후원 / 서울문화재단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료 어른 및 대학생(20~64세)_3,000원 / 학생(초, 중, 고교생)_2,0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할인 * 65세이상 어르신, 7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입장 *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단체관람료가 적용 * 1관 전시 관람료 별도

관람시간 / 10:00am~06:00pm (종료 30분 전 매표 마감)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2.737.7650 www.sungkokmuseum.com


리트머스 서울: Before the Dawn ● 성곡미술관은 2011년 가을 전시로 『안세권: 서울, 침묵의 풍경II』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10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수상 기념전으로 수상자 안세권의 사진과 영상작업 100여점을 집중 소개한다. ● 안세권은 21세기 동시대 한국미술계는 물론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사진작가로 2003년 청계천프로젝트를 통해 기성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청계천을 모티프로 한 작업이 그러했듯 지난 10년 동안 안세권은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살아 있는 표정과 삶의 호흡을 사진, 영상으로 꼼꼼하게 기록해왔다. ● 안세권이 렌즈로 담아내는 풍경은 주로 도시풍경이다. 도시의 성장과 발전, 번영을 반영한 현대적 현재 풍경과 함께 사회경제적 발전과 개발논리에 밀려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거나 그로부터 오랫동안 소외되어 있었던 고립풍경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두 가지 종류의 풍경과 함께 안세권을 오늘의 주목받는 사진작가로 자리매김한 것은 표정이 전혀 다른, 상반된 생성/소멸 풍경이 공존하는 아름답도록 처연한 장면이다. 때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정하고 싶은 엄연한 당대의 사회현실이 동일 프레임 안에 치밀하게 중첩, 병치되어 있다. 뷰파인더로 떠낸, 개발 등 외세에 힘없이 밀려 이내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 그러나 지킬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절대적 한계상황이 화면 구석구석 절절하게 배어 있는 현실 풍경은 보는 이의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안세권_서울 청계천 시리즈_디지털 와이드 프린트_120×150cm_2004

주지하다시피 지난 10여 년 동안 각 지자체가 힘 있게 밀어붙였던 이른바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기존 삶의 풍경은 요동치듯 물리적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온 전래 도시 풍경은 마치 성형을 하듯 몇몇 세련된 현대적 미감의 표정으로 획일화되거나 생소한 질서와 표정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자연스러움이 결여된 인위적이고 낯선, 또는 경직된 신흥 풍경은 이런저런 세속적 이해관계들이 속속 개입하면서 또 하나의 도시 소외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도시 재개발 계획은 사업 대상과 장소, 규모를 바꿔가면서 마치 순회하듯 오늘도 반복되고 있다. 도시 도처에서 경쟁하듯 이어지는 개발 풍경 속에서 빚어지고 경험하는 낯선 풍경과 장면들은 해당도시나 나라 전체의 물리적 지형 변화는 물론 실제 도시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지형까지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있다.
안세권_서울 청계천 시리즈_디지털 와이드 프린트_120×150cm_2004

안세권은 소멸/생성을 반복하는 도시개발/재개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담아낸다. 그가 증거하는 도시문제,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의제는 도시재개발과 그 과정에서 노정하고 목도하는 일방적/획일적 재개발 문화에 대한 반성적 지적이다. 우리에겐 이미 익숙해진 풍경, 개발에 의해 사라지거나 사라지고 있는, 사라질 풍경에 대한 관심을 반성적으로 환기시킨다. 상황에 따라 그것은 희망의 풍경이요, 긍정적 변화일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절망의 상황이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개발을 둘러싸고 양립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충돌, 대립의 감정이 교차하듯 치밀하게 스며들어 있는, 일견 서정적인 미감을 전달하는 안세권의 깊은 침묵을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안세권_청계천에서 본 서울의 빛_디지털 C 프린트_127×287cm_2008

이렇듯 안세권의 필름은 길고도 깊은 침묵으로 잠들어가는 생성/소멸 현장의 역사적 감광에 다름 아니다. 무거운 침묵 가운데 휴식과 불안이 공존하고, 생성되는 장면과 사라지는 장면이 함께 호흡하며 생겨날 풍광과 사라질 미래적 풍광을 감광하는 안세권의 눈과 렌즈가 함께 있다. 눈을 쉽게 뗄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독특한 심리 풍경이다. 무겁도록 침묵하는 풍경, 소리 없이 신음하는 풍경이다. 어찌할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시간과 기억을 목도하며 함께할 따름이다. 답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풍경, 그 깊고 푸른 침묵과 그를 지켜보는 긴 호흡과 시선이 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대치 풍경이 미묘하게 교차 침묵하는 가운데 안세권의 눈과 카메라의 렌즈는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카메라의 눈을 빌려 담아낸 조립 풍경이자 병치 풍경, 신구가 대립/공존하는 불편한 장면 속에는 잠들지 않은 목도자로서 안세권이 있다. 그가 전하는 도시의 침묵과 호흡이 깊을 수밖에 없다.
안세권_서울 뉴타운풍경, 월곡동의 빛_디지털 C 프린트_180×230cm_2005 안세권_서울 뉴타운풍경, 월곡동의 사라지는 빛 I_디지털 C 프린트_180×250cm_2006 안세권_서울 뉴타운풍경, 월곡동의 사라지는 빛 II_디지털 C 프린트_180×240cm_2007

안세권의 힘은 생생함이다. 사진 구석구석 배어 있는 생생한 생명감과 현장감은 가히 압권이다. 도시나 특정 지역의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형을 현장감 있게 한 프레임에 병치시키는 안세권, 그는 그러한 동시적 장면을 통해 도시의, 도시 삶의 미래적 기억을 반추하고 있다. 안세권이 그러한 지형과 기억을 받아들이고 제시하는 방식은 이른바 장노출 촬영이다. 사진 작업의 속성상 안세권은 프레임과 화면 밖에 위치해 있지만, 실제적으로 사진 속 현장, 풍경과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도 현장에 장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 안세권이 현실 풍경과 만나는 시간은 주로 새벽이다. 그의 사진은 늦은 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는 시간의 기록이자, 새벽의 기억이다. 그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새벽의 서울은 과연 무엇일까. 안세권은 늘 그러하듯 매일처럼 몸을 들어 감광하듯 서울 구석구석을 스민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인적이 거세되어 텅 빈 침묵으로 남아 있는 새벽 표정을 잠 깨우듯 끄집어낸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화면은 푸른 색 주조를 보인다.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명도, 채도, 색상 범주를 넘어서는 대단히 심리적인 발색이 눈길을 잡아맨다. 원판 사이즈의 필름은 살짝 젖어 있다. 늦은 밤으로부터 동이 틀 무렵까지 새벽이슬과 함께 현장의 시공과 호흡을 빨아들인 리트머스 풍경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안세권 사진의 독특한 시각적/촉각적 질감은 그러한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화면이 촉촉하고 깊은 심연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다.
안세권_서울 뉴타운풍경, 월곡동_디지털 C 프린트_250×600cm_2007 안세권_서울 뉴타운풍경, 월곡동의 마지막 겨울_디지털 C 프린트_230×720cm_2007

안세권의 작업에는 생성으로서의 살아 있는 풍경이자 사라지는 소멸로서의 풍경, 즉 현재 진행형으로서의 소멸/생성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살아 숨 쉬는 현실 풍경, 안세권에게 그것은 강력한 매력의 작업 모티프다. 구작과 신작이 함께 하는 안세권의 이번 수상 기념전은 살아 있는 대상으로서의 장면, 작품제작 모티프로서의 풍경과 지난 10년 동안 작가가 작업을 통해 진정으로 담아내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성곡미술관은 1998년 내일의 작가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 지난 14년 동안 50여명에 달하는 다양한 젊은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주목하고 지원해왔다.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통해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는 국내 독보적인 창작지원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프로그램에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성원을 바란다. ■ 성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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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展 / OHYOUNG / ??? / painting   2011_1102 ▶ 2011_1115 / 월요일 휴관


오영_그녀의 가족사진_캔버스에 유채_60×6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217d | 오영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_10:00am~05:00pm / 월요일 휴관

아트스페이스 에이치 ARTSPACE H 서울 종로구 원서동 157-1번지 Tel. +82.2.766.5000 www.artspaceh.com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진심이 담긴 속내들은 일상에서 무시로 불쑥 차오른다. ● 그리고 그것들과 직접 마주치기는 쉽지 않다. ● 예의바르고 착하게 살아야하는 우리에게 진심은 드러내는 것이 아닌 담아 두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숙이 쌓아두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진심은 드러나 보이는 상황들보다 더 확실하게 감지되기도 하고,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무겁지만 진실하다.
오영_그녀의 아침식탁_캔버스에 유채_97×130cm_2011
오영_둥글게둥글게_캔버스에 유채_80×100cm_2011
오영_바로서자!_종이합판에 유채_100×65cm_2011

보이는 것만 보고 살기에는 불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때로는 보이지 않기에 눈감아 버릴 수 있는 구실이 되기도 하지만, 감지되어버린 솔직한 속내들은 보이는 것들과 중첩되어 우리에게 매 순간 판단을 요구한다. 보이는 것만을 볼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아줄 것인가. ● 부유하는 속내는 보이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또 보인다. ■ 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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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 Odyssey


오영재展 / OHYOUNGJAE / mixed media   2011_1103 ▶ 2011_1112 / 월요일 휴관


오영재_the Ancients, Episode Ⅰ_4채널 비디오_2011

초대일시 / 2011_1103_목요일_06:00pm

주최 / 한빛미디어갤러리 후원 / 서울시_GL Associates_streetworks

관람시간 / 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한빛미디어갤러리 HANBIT MEDIA GALLERY 서울 중구 장교동 1-5번지 Tel. +82.2.720.1440 www.hanbitstreet.net


인간은 자신의 부적(符籍)을 갖고자 욕망하는 존재이다. 부적은 일종의 자기 희망을 위한 긍정적인 신표로, 자기 최면이자 자기중심의 세계를 만들어 가려는 의지이다. 그 부적의 매체는 다양하다. 부적이라는 것이 고대에 실천했던 종교적, 주술적 관점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보다 나은 행복과 번영을 위해 문제해결 방식의 하나로 부적을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만든 모든 기호와 사물은 부적의 한 양상일 수도 있다. 부적에는 희망이 있으며, 절망을 극복할 힘을 주는 심오한 마력이 있다. 부적은 종합적인 삶을 위한 생성-생존의 철학인 것이다.
오영재_the Ancients, Episode Ⅰ_4채널 비디오_2011

고대의 인간은 현실에 대한 마음 속 이미지를 모방해 현실의 이미지로 바꾸고, 그것과의 교감을 통해 현실을 바꾸기 위해 부적을 만들었다. 이 때의 부적은 이미지를 현실로 바꿔놓는 매개장치로서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비공식적인 예술기호는 오늘날 현대예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 인간이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이미지를 얻고 형상화한다. 이는 인간이 본래의 형상을 본떠 재현된 형상을 원형과 동일시하며, 그 재현된 이미지가 축성의 과정을 통해 다수의 힘을 받고 다수의 내적인 의도와 욕구를 대변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현실로부터 받은 내적인 이미지를 외부적인 기호로 표현하면서 인간은 현실과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하고도 마찬가지이며, 부적을 그린다는 것은 형상을 통해 바로 소통하는 일이다.
오영재_the Ancients, Episode Ⅰ_4채널 비디오_2011

작가는 고유의 역사를 인식하면서 모든 종교와 사상을 포용한 기호의 예술로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집중하여 예술적 기호, 즉 자신의 부적을 만들어낸다. 국제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현대적인 시각언어를 체득해온 작가는 자신이 개성적으로 추구하는 바와 자신의 문화적 원천에 입각하여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 부적의 다양한 기호나 그림, 원형문자를 해체하고 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복합기호적인 예술로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호는 한국적 지혜와 신화를 담은 원형의 부적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지만 그것에 부적이 가진 의도적인 개념이라는 짐을 지우진 않는다. 부적은 문화적으로 매우 동질적이어서 때때로 한 단어로도 많은 것을 주고 받을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작가의 부적은 시각적 이미지와 언어를 연결했을 때 그 관계가 일의적 메시지보다 중의적 표현을 선호하는 '포스트모던'의 철학적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 ● 작가의 기호에는 '공(空)'이라는 개념이 있다. '비어 있음'속에 어떤 의미가 존재하게 된다. 기호는 문자에 의존하지 않는 선(線)의 예술로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이해와 행동으로 정신적인 의미들을 드러내며, 직관적인 지력 위에서 활성화된다. 이는 작가가 자신을 표현하는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자아중심적인 것들을 포기하여 자신을 지워버린 경지에서 본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특정한 인지작용을 일으키는 기호의 예술적 가치가 생성되는 지점이자 예술적 특성을 지닌 기호가 물질적인 다른 모든 기호들보다 우월함을 설명한다. ● 예술의 기호는 비물질적이다. 예술이 인간 앞에 등장할 때는 물질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지만 사실 이 기호는 궁극적으로 비물질적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물질이 가지는 한계성을 초월하고 정신적인 차원의 미래를 생산하게 되며 우리가 보지 못한 가능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게 된다.
오영재_A Treasure Island-1_금속판에 디지털 프린트_50×50cm_2008
오영재_A Treasure Island-2_금속판에 디지털 프린트_50×50cm_2008

전시는 부적이 지닌 형태적 물성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재인식과 그 가능성에 대한 모색으로 고정된 틀을 벗어난 표현 영역의 확장 가능성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적인 것으로 특권화되는 기호 자체가 아니라 더 진전된 기호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심리적인 사건이 인간 경험의 존재론적 심오함과 그 경험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작동시킨다. 전시를 통해 부적 이미지의 기호학적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역사적 맥락을 재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가능성을 재구축함을 다시 한번 밝힌다. ■ 조희승

 
2011.11.02 23:40:58 / Good : 551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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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an Plants







유정현展 / YOOJUNGHYUN / 劉正賢 / painting   2011_1104 ▶ 2011_1211





유정현_urban plant-오르는 식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0×13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627g | 유정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4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_11:00am~06:00pm

조현화랑 서울 JOHYUN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쳐포엠 1층 Tel. +82.2.3443.6364 www.johyungallery.com





불안과 매혹 ●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길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비가 씨앗들을 멀리까지 운반해 갔음에 틀림없다. 그 물길들을 따라가 보면 너는 흐름이 펼쳐지는 방향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그 방향을 따라 너의 식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식물을 찾아라. 거기 두 식물 사이에서 자라는 모든 악마의 잡초들이 네 것이다.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해서 물길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돈 후안의 가르침』에서.) ● 2005년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린 유정현의 개인전 제목은 『A Liminal Space』였다. '의식영역 공간' 정도로 풀이할 수 있을 제목의 이 전시에서 그녀는 일련의 '인물화'들을 보여주었다. 어린 아이, 혹은 그보다 조금 작은 인형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작가는 일종의 유형학적 보고를 하듯 동일한 포즈와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차이들을 기록하였다. 상대적으로 커다란 머리와 단순화된 신체의 대비로 인해 인형을 연상시키는 이 아이들은 무엇엔가 몰입해 있는 것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다. 이들의 머리는 사진의 음영반전(solarization) 효과 혹은 X-ray의 투과에 의한 것처럼 투명한 밝고 어두운 반점과 얼룩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떤 이들은 복면처럼 보이는 마스크로 머리 전체를 가리고 있기도 하다. 이들의 몸에는 이불보의 인쇄된 문양처럼 평면적인 꽃무늬들이 그려져 있다. 꽃무늬들은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 이 그림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부분을 이룬다. 꽃은 이 존재들의 정체성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 인형이라고 보기엔 과도할 정도로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 이 작은 인물들의 모습은 흑백의 날카로운 터치들, 혹은 강렬한 붉은 색과 녹색의 대비들로 인해 묵시(?示)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이 예감하는 것은 고통 혹은 두려움과 같은 감정이다. 고통과 두려움은 인물들의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아이는 앞을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얼굴을 가린 채 혹은 시선을 거둔 채 외부와 단절되어있는 이 인물들에게 세계와의 접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신체에 각인된 이미지들이다. 지나치리만큼 화려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 만개한 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반투명의 신체 위에서 그것은 흡사 내부로부터 떠오른 어떤 신호거나, 반대로 외부의 상(像)으로부터 맺힌 반영(反影)들처럼 보인다. 두 경우 모두 몸의 표면을 경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이 아닌 간접적 재현이다. 꽃은 어디인가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이며 신체의 표면 즉, 피부에 응결됨으로써 인물의 신체를 폐쇄적 장소가 아닌 일종의 경로로 삼는다.
유정현_cloud 구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50×140cm_2011
유정현_constellation 종이공성좌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지름 120cm_2011
유정현_u.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지름 80cm_2011

유정현은 아크릴릭을 사용한다. 회화적 미디엄으로서의 아크릴릭이 가지는 특징은 '속도'와 관련된다. 빠르게 건조하는 수용성 젤(gel)은 붓의 움직임과 결을 기록할 뿐 아니라 독특하게 번지고 닦이면서 강렬한 얼룩과 윤곽의 패턴들을 만들어낸다. 강렬하게 혼재하는 물질적 레이어들이 '무의식'의 회화적 등가물을 캔버스의 표면에 기록하는 것이다. 마블링(marbling)이나 데칼코마니(decalcomanie)의 우연적 이미지와도 같은 이 문양들은 여기서 작가에 의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통제되고 조절된다. 꽃, 열매, 이파리들과 같은 식물적 형태들이나 신체, 얼굴로 나타나는 인물의 윤곽을 통해 유정현의 회화는 끓어오르고 번지며 끊임없이 뒤섞여 종국에는 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진 내부를 표현한다. 터치의 윤곽은 아크릴릭 특유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만드는데, 이 선들은 밝은 배경과 대비를 이루면서 빛 속에 떠있는 형태들의 각각의 실루엣이 분명히 고립된 개체임을 보여준다. 2007년 Alexander Ochs Gallery에서 소개한 「Dark Flowers」 연작은 나뭇가지와 거기에 열린 잎과 꽃들을 흑백의 어두운 톤으로 그린 것이다. 먹을 연상시키는 검은 아크릴릭으로 그린 이 그림들은 실루엣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수 있을 뿐 실제로는 검은 얼룩과 반점들로 이루어진 추상적 덩어리들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꽃과 잎사귀들은 그것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배후로부터 번져 나오는 빛 속에서 만끽하고 있다. 그것들의 감각은 회화의 표면을 향해 몰려있다. 표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자 미스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또한 표면은 내부로부터 끓어오르는 운동에 의해 규정되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군집(population)이다. 식물이나 신체는 수없이 많은 기억과 관념들이 혼재하는 장소가 된다. 다시 말해 식물이나 신체가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개별적 층위들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표면이란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다. ● 기관 없는 몸체는 죽은 몸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체이며, 유기체와 조직화를 제거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생동하고 북적댄다. 이(蝨)들은 바 닷가 모래사장으로 뛰어든다. 이들은 피부를 주거지로 삼는다. 기관 없는 충만한 몸체는 다양체들로 북적이는 몸체이다. 그리고 무의식의 문제는 확실히 생식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오히려 서식, 개체군(population)과 관련된다. (질 들뢰즈 『천개의 고원』) ● 수많은 사건들의 중첩에 의해, 우연한 물길과 붓의 접면들에 의해 형성된 유정현의 어두운 사물들은 마치 끓어오르는 용암이나 복잡한 브라운 운동을 일으키는 무거운 개스의 내부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몸,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각과 운동의 소요(騷擾)가 일어나는 장소다. 무의식의 잠재태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무의미로 돌아가는 이 순환의 공간은 회화가 다루는 본질적 영역이기도 하다. ● 유정현이 그린 일련의 드로잉들은 그의 그림들을 읽는데 있어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한다. 이 드로잉들에는 작가의 알터-에고(alter-ego)인듯 한 인물과 그와 병치되어 있는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사물들은 대체로 석류, 파, 버섯처럼 보이는 식물들이거나 개와 같은 동물, 혹은 하늘의 별과 같은 형태들이다. 예를 들어 「Worker」라는 드로잉에서 인물이 삽을 들고 파내는 것은 일종의 뿌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의 머리 위에는 꼬아놓은 것 같은 식물적인 형태가 허공에 떠있다. 사물은 조금씩 변형되거나 위치가 바뀌면서 인물의 행위를 잠재적인 사실들의 징후로 드러낸다. 「Pond」에서도 역시 연못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버섯 같기도 하고 식물의 대궁에 매달린 알들 같기도 한 존재들이다. 인물은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커다란 꽃잎 안에 구토를 쏟아내기도 하고 (「Nausea」), 줄무늬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과 동일한 줄무늬의 짐승을 매달아 놓은 채 그것에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Self-pity」). 알 수 없는 타자로서의 식물들과 작가 자신의 모습을 한 인물들이 갖는 관계는 끊임없이 그것을 심거나(「Planter」, 「Man carrying a tree」), 그것이 만들어내는 형태들을 관찰하는 것이다(「Stem」, 「Fruit」).
유정현_urban plan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180cm_2011
유정현_urban plan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0×100cm_2011

2009년 조현화랑 『별과 검은 파편들 Star & Dark Spills 전』으로부터 유정현의 그림 속에는 알록달록한 색채의 형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형태들은 때로는 녹색, 때로는 붉은색 그리고 때로는 보라색 계통의 작은 원들이나 동심원, 겹쳐진 비늘 모양의 원형들로 그려지기도 하고 다른 그림에서는 끈이나 막대 모양의 긴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좀 더 초기에 이 형태들은 배경처럼 다루어졌다(「Swim」, 「Emotional Crossing」). 이전의 원초적이고 추상적인, 어두운 내부는 마치 실크스크린을 연상시키는 화학적이고 편평한 색감의 현란한 조합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역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러한 배경의 변화는 오랜 시간 독일에서 작업해 온 작가가 한국사회에서 경험한 모순된 느낌들에서 비롯되었다. 이 무지개 같은 색면들은 단순히 한국사회의 인위성, 허구적인 생동감, 다룰 수 없는 경박함을 떠올리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밝고 생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와 대비되는, 나아가 내부를 위협하는, 그것에 근본적으로 불안을 야기하며 삶과는 다른 원인으로부터 출발한 어떤 영역에 대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배경으로부터의 형태들, 외부의 파편들은 표현이라기보다는 기호 혹은 그것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표식에 가깝다. ● 이후의 그림들에서 이 화려한 색채의 형태들은 앞서 다루었던 묵색의 식물들 사이를 가로지르거나 비집고 나오는 것처럼 그려진다. 마치 곤충이나 외계의 식물들처럼 이것들이 조직의 틈과 공간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사이 한때 식물이었던 묵색의 얼룩들은 불특정한 추상적 범위로 모습을 바꾸어간다. 유정현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이 근본적 대치, 혹은 병치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어두운 내부와 현란한 외부의 대립과 혼재가, 그가 누구인건 간에, 어떤 개인에 대한 관념 속에서 항상 감지하게 되는 역설적 상태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에 대해 개인이 갖는 근본적 불안과 매혹에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는 우리의 몸 안으로, 정신 속으로, 존재의 심연 속으로 때로는 암(癌)세포들처럼, 때로는 기쁨의 날카로운 파편들처럼 파고 들어온다. 그것들은 우리와 얽혀있다. 이 파편들이 일으키는, 고통인지 환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우리는 일상이라고 부른다. 유정현의 작품은 이러한 일상적 삶이 자아내는 지속적인 긴장을 풍경으로 보여준다. ● 회화는 추상성이다. 다른 매체들과 달리 그것은 캔버스에 발린 물감을 통해 직접 추상성을 드러낸다. 형태는 이 추상성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마련할 뿐이다. 그러므로 형태는 추상성과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에 복무(服務)해야 한다. 유정현의 회화에서 추상성은 서로 다른 두 가지 형식을 통해 뒤얽혀(entangled)있다. 사실상 세계는 항상 두 가지 모습을 취한다. DNA는 우연과 반복 위에 구조화되며, 우주는 혼돈과 통일성을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시에 예외 없이 탄생이나 죽음과 같은 동일한 조건들에 의해 성립된다. 회화는 추상성을 통해 이것을 다룬다. 유정현의 회화는 이 추상성을 통해 세계 안의 수없이 많은 것들에 맞닿아 있다. ■ 유진상
유정현_urban plan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10×100cm_2011




Unease and Ch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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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展 / KIMSANGHYUN / 金尙鉉 / mixed media  2011_1026 ▶ 2011_1101

김상현_COLLECTION_혼합재료, 나무 프레임_2007



초대일시 / 2011_102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am

갤러리 도스 GALLERY DOS 서울 종로구 팔판동 115-52번지 Tel. +82.2.737.4678 gallerydos.com




사람이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동물로 정의되어 있다. 우리는 수많은 연결고리를 이루며 존재한다. 하루하루 수없이 보게 되는 '손잡이'를 보며 그것을 잡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도 사물과 인간의 관계의 한 예이다. 하물며 생각하는 동물끼리의 관계의 줄기는 없이 뻗어져있고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김상현_OPTIMISTIC DRINK_혼합재료, 배송, e-mail_2009
김상현_PROJECT NEW WORLD_혼합재료, 설치, e-mail_2009
김상현_GLOBAL REPOSITIONING 2010_나무에 혼합재료_104×106×10cm_2010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존재와 인식에 관한 질문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리고 그 답 또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매일 '현재'를 맞이하며 현세대는 가장 빠른 시대의 변화까지 실감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더더욱 엉켜있는 관계의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 연결고리를 하나 더 얹고자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판단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e-mail과 편지, 게릴라식 설치라는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김상현_MUNIL_플라스틱 가방에 혼합재료, 나무_48×34.5cm, 49×26cm_2010
김상현_MERRY CHRISTMAS 4S_나무에 혼합재료_50.5×59.5cm_2011
김상현_AMALFI COAST_나무에 혼합재료, 철_55×52×11cm_2011

결국 그 시간동안 또 하나의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사회의 사이가 결정된다. 그리고 나는 '판단'을 작업의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사용한다.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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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A Rolling Stone






김옥선展 / KIMOKSUN / 金玉善 / photography   2011_1101 ▶ 2011_1120




김옥선_green + house #1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28×35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619b | 김옥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후원/협찬/주최/기획 / 테이크아웃드로잉 takeoutdrawing

관람시간 / 11:00am~00:00am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동 TAKEOUT DRAWING hannam-dong 서울 용산구 한남동 683-139번지 Tel. +82.2.797.3139 www.takeoutdrawing.com




『Like A Rolling Stone』 전은 작가 김옥선이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동 레지던시에 대해 'No Direction Home, Hannam' 이라는 제목을 명명하고 작업의 구상을 시작하고 두 달간의 레지던시를 마치며 여는 전시이다.『Like A Rolling Stone』전은 9,10월 동안 제작한 「Green+House」 연작을 포함한 이전의 「Hamel's Boat」를 모델들의 노트와 재구성한 작업들과 「No Direction Home」을 소개한다. ● 「Green+House」 ● 「Green+House」연작은 요트를 직접 제작하는 'D'의 작업실 모습을 보여준다. 2008년과 2011년에 촬영된 서귀포 서홍동에 위치한 'D'의 작업실의 내, 외부모습을 통해 그린하우스에서 자라나는 배의 실재를 볼 수 있다. 아래 자료들은 'D'가 "배를 제작하기 위해 읽었던 책들의 표지, 내지 내용들" 과 그에 관한 김옥선의 노트로 구성된다.
김옥선_green + house #2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28×35cm_2008
김옥선_green + house #3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28×35cm_2011
김옥선_green + house #8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28×35cm_2011

「Hamel's Boat」 ● 제주도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그들이 가장 좋아하거나 소개하고 싶은 장소에서 촬영한 6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시리즈로 「함 일의 배」의 작품 다수를 만나볼 수 있다.
김옥선_Hamel's boat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50×60cm_2007
김옥선_Boris' s note_「Hamel's boat」Series_Acril, Film Seat_100×125cm
김옥선_Boris the brewer_디지털 크로모제닉 프린트_100×125cm_2007

「No Direction Home」 ● 제주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인물중심으로 촬영한 「No Direction Home」의 '멜라니 Melanie'와 외래종 야자수 '종려나무 A palm tree' 비롯한 제주의 과거이자 현재를 상징하는 장소인 4.3 유해 발굴 현장 위를 날아가는 '제주공항 Jeju airport'의 윈도우 작업을 볼 수 있다. ■ 테이크아웃드로잉




 





1st PHOTOSPECTRUM INT 2011


‘german photography now’



Emotion, Drama, Narration in the stylistic variety




● 전시제목: ‘german photography now-Emotion, Drama, Narration in the stylistic variety



● 전시기간: 2011년 11월 10일 ~ 11월 20일



● Opening: 2011년 11월 10일 6pm



● 전시작가: 나디아 마르신 Nadja Verena Marcin



필립 슈마허 Philipp Schumacher



제시카 자이단 Jessica Zaydan



● 전시주최: 갤러리 진선



● 전시기획: 김선정











● 초대의 글






그 동안 한국의 젊은 사진 작가들과 함께 성장해 온 갤러리 진선은 2011년부터 좀 더 폭을 넓혀 “PHOTOSPECTRUM INT(포토스펙트럼 인터내셔널)” 이라는 이름으로 해외 젊은 사진 작가들과 함께 하는 전시를 진행합니다.




“PHOTOSPECTRUM INT”는 현대 사진의 흐름을 다양한 해외 사진 예술의 스펙트럼을 통해 살피며 글로벌 문화 소통의 초석을 다지는 국제 기획전입니다. 그 첫 번째 프로젝트는 독일사진으로 ‘german photography now-Emotion, Drama, Narration in the stylistic variety’입니다. 이번 전시는 독일의 젊은 사진 작가를 통해 21세기 현대 사진의 또 다른 지류에 대해 조망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서울시가 주최하는 서울사진축제와 동시에 진행되는 이번 “1st PHOTOSPECTRUM INT”는 서울의 11월 문화적 컨텐츠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활발한 해외문화 교류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행사에 도움을 주신 독일문화원, 관계자와 작가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갤러리 진선 관장 허 선










필립 슈마허(Philipp Schumacher) | Lichtbild No. 1 | Digital C-print | 70×150(cm) | 2007











필립 슈마허(Philipp Schumacher) | Lichtbild No. 10 | Digital C-print | 70×150(cm) | 2007









나디아 마르신(Nadja Verena Marcin)
| Eve 2 | Digital C-print | 116×94(cm) | 2005









나디아 마르신(Nadja Verena Marcin) | Eve 1 | Digital C-print | 94×116(cm) | 2005







제시카 자이단(Jessica Zaydan)
| Saeugen from Red riding hood Series | Digital C-print | 61×41(cm)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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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진실과 허상의 전이(轉移)




난다展 / Nanda / 卵多 / photography 2011_1107 ▶ 2011_1120



난다_Pierre & Gilles 양식의 웨딩사진을 주문한 김씨부부_잉크젯 프린트_70×1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난다 블로그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9_수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주)메타로그 아트서비스

관람시간 / 11:00am~06:00pm

통의동 보안여관 Boan Inn 서울 종로구 통의동 2-1번지 Tel. +82.2.720.8409 cafe.naver.com/boaninn sohomoda.blog.me



"The Day, 진실과 허상의 전이(轉移)" 현대 생활문화에서 사진의 의미와 예술가의 작업 ● 21세기에 들어 사진은 고가의 장비와 조작의 까다로움을 수반하는 고급취미나 예술의 전유물에서 누구나 쉽게 일상을 기록하고 유희 할 수 있는 소통문화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한다. 대중의 일상에서 사진은 특히 기억하고 싶은 어떤 것을 '쉽게' 가시화하는 매체이며, 그 기능은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 개인의 개별적 사이버공간 안에서 배가된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사건을 기록-기술하는 행위의 대체물로서 사진은 그 무엇보다 빠른 속도로 보편화된 것이다. 일반사진이 지닌 지시적 성격과 언어로서의 기능은 불특정 다수 혹은 개인이 추구하는 자기발언 의지와 결합하여 사진이미지를 매개로 소통하는 현대인의 일상적 생활문화로 이어지며, 디지털 카메라와 웹 사이언스의 기술발전이 이룬 소셜 네트워크의 확장에 가시적 밀도를 더 한다. 난다는 현대 대중의 소통문화에서 사진의 의미와 예술가/자신의 사진작업과의 개연성을 묻는다. 이미지의 상징성이 일반 언어가 지닌 의사전달의 추상적 한계를 유연하게 한다는 본질적 차이와 더불어 그녀가 주목하는 점은 사진을 통해 구현되는 현대인의 기록과 자기 표현욕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 안에 용해된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허상의 현실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난다는 우리의 생활문화에서 가장 보편적인 사진의 기능을 "기념일"을 기억하는 방식에 두어 사람들의 '특별한 기념일'과 권력과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모호한 기념일'에 관한 경험과 해석을 프로젝트"The Day, 진실과 허상의 전이(轉移)" 안에 병치시킨다. 기념일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대중 속 한 인간의 삶과 현실을 공감하고, 아울러 신개념의 허울 아래 정치와 시장경제가 조작하는 기념일의 실체를 구체화하고 있다.
난다_보안여관_잉크젯 프린트_40×50cm_2011
난다_0214_잉크젯 프린트_120×150cm_2011
난다_0303_잉크젯 프린트_120×150cm_2011

그들의 기념일과 자본의 기념일 ● 본래 "기념일"은 국가와 종교체제가 만들어낸 거시적 행사방식의 하나로 그 이면에 사회통치를 겨냥한 권력의지가 작용하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정치의 제도적 산물인 기념일은 오늘날 다양한 성격을 띠며 대중의 생활양식 안에서 보편화 된다. 이는 가족, 건강, 환경, 지역문화의 범주로 확장되어 크고 작은 축제의 형식을 취하며, 나아가 개개인 다수의 참여의지를 움직이는 문화운동으로서 까지 그 기능을 넓혀 간다. 인간의 삶이 외형적으로나마 법질서의 일방적 제약에서 벗어나 사회참여의 자율성이 인식되어지면서 기념일은 대중적 일상에 유희(?)를 선사하는 '하나의 사회적 장치'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난다는 기념일에서 묻어나는 속성을 전제로 그것이 지녀야할 진정한 가치를 진단한다. 현대의 삶에서 기념일의 의미와 기능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상이한 "기념사진"들을 통해 구체화한다. 두 가지의 작업경로를 거쳐 드러나는 사람들의 사실적 초상과 상상적 무대에 의한 치밀한 연출사진이 그것으로, 그녀는 이 실행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기억의 진실과 현대인의 '어긋난 욕망'을 이야기한다.
난다_0414_잉크젯 프린트_120×150cm_2011

작업의 첫 번째 실천행위로 작가는 웹서비스가 제공하는 소셜 네트워크의 구조 안으로 들어간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내용을 공공연히 하고, 누군가로부터 기념사진 촬영을 신청 받아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의뢰인들의 어떤 특별한 날을 촬영한다. 거여동의 한 미용실에서의 초상사진은 단편영화 감독 겸 제작자인 C씨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찍은 것이다. C씨는 남편의 불안정한 수입을 고려해 미용사로 전업한 아내의 사업장에서 사진을 촬영, 이를 그들의 결혼기념행사로 대신한다. 파고다공원 앞 중년의 여성은 식민지시절 일제로부터 빼앗긴 부친의 재산을 환수 받고자 노력하는 L씨의 모습이다. 그녀에게 삼일절은 민족의 거국적 기념일이기보단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이어받은 자신의 인생을 대중에게 호소하는 특별한 날인 것이다.
난다_0505_잉크젯 프린트_각 80×83cm_2011

기념일을 통해 인간이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기억하는 행위에는 그 성격이 개인적이든 집단행동을 동반하든 이를 행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의식(儀式)을 수반한다. 이는 인습적으로 정해진 틀 안에서 이루어지나 한 시대의 문화사회적 인식과 의미규정에 따라 그 형식이 변화하기도 한다. 기념사진은 이와 같은 의식의 맥락에서 참여자를 볼거리화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들이 촬영을 위해 취하는 다소 어색한 행동은 사진이 갖는 재현의 성격과 함께 연출의 특성을 추가한다.
난다_그들의 날들(2)_잉크젯 프린트_각 18×13cm_2011

난다의 근작을 이루는 또 하나의 작업은 기념사진의 연출적 요소를 극적 상황으로까지 치환한다. 대중의 소소한 일상과 그들만의 삶에 배어 있는 기념일에 대한 의미를 기록하는 사실적 초상과는 대립적으로 범상치 않은 연출사진을 통해 작가는 현대인의 심층에 자리한 '욕망의 병리적 실체'를 신랄하게 드러낸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자본의 데이 마케팅(Day Marketing)이 조장한 발렌타인 데이의 현실과 이로부터 파생된 '변종의 데이들'은 우리 사회에 형성된 신개념의 기념일들이다. 그것은 일상의 일시적 해방을 즐기는 현대인들에게 일탈의 자극제로 작용하며, 우리의 생활문화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기념일보다 강한 중독성을 띤다. 난다는 이러한 기념일들과 이를 탐닉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냉소주의적 시각으로 해석한다. 그녀의 사진이미지에서 인간은 화려한 무대와 거기에 배치된 각종 상징물들에 종속된 하나의 물체/대상으로 여겨진다.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메커니즘으로부터 상품으로 전락한 인간내면의 실체는 '물질에 경도된 속물의 표상(White Day)'으로 드러나거나 '소유의 탐욕과 노출증(Valentine's Day)' 혹은 '성도착증적 무기력(Black Day)'의 상징체로 가시화된다. 또한 현대인의 집단의식(意識)은 영어조기교육 집착현상에서 비롯된 한국적 "할로인 데이"와 양돈농가의 소득장려로 포장된 "삼겹살 데이"에서 비문화적 제도에 함몰된 괴이한 상태로 형상화된다. 자본과 체제의 생활문화가 산출한 현대인의 의식은 그 허위적 현실 안에서 공동사회의 가치규정이 지녀야 할 기준점을 상실한 것이다. 인간은 유희와 소비의 충동 앞에서 스스로를 물성화하고, 이와 관계하는 개개인의 욕망은 성적 도착이나 물질에 의한 자기과시와 무비판적 집단동요의식 등 심리의 변질과 문화적 불균형의 구조에 놓여있는 것이다. ■ 김숙경






시간의 재배치

2011_1104 ▶ 2011_1129 / 일,공휴일 휴관


김성호_새벽_캔버스에 유채_40×32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성호_민준기_박형진_서유라_양은혜 윤두진_최양희_함영미_한슬_홍명화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거락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거락 Gallery CoLA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530-4번지 Tel. 070.4235.6483 www.gallerycola.com


시간의 재배치 ● 문제는 시간이다. 굳이 "시간은 말로써 나타낼 수 없을 만큼 멋진 만물의 소재"라 이야기 했던 아놀드 버넷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 장르에서 시간이란 화두만큼 매력적인 개념은 없을 것이다. 특히 시각예술의 경우는 필연적으로 시간적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이 의식의 세계에서 보는 비루한 현실이든, 과거에 정지된 어느 기억이든 간에 모든 작품은 비루한 현실을 보여주거나 아니면 이러한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환영을 제공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런 측면에서 결국 작품이란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혹은 담아내느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은 관념의 과잉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관념의 응집체이자 그 소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의 과잉은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공동체의 시선을 거두게 만들었다. 관념의 과잉이 만들어 낸 그 공허함은 '개념', '충격' 등으로 포장되었고 이에 합당한 전략을 취했지만 대중들의 상상력은 언제나 예술보다 앞섰고, 그들의 마음을 안치시키진 못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예술이 대중을 교화시킬 수 있다는 이러한 교조적 태도에 순응할 관개들은 없으니까.
민준기_Mia_캔버스에 혼합재료, 한지_58×110cm_2011
박형진_새싹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32×41cm_2011
서유라_조선의 화가-허난설헌_캔버스에 유채_45×53cm _2011
양은혜_해장의모든것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0.9×72.7cm_2011
윤두진_Protecting Body Series_브론즈_2010_부분

최근 그 관념의 과잉이 지나간 공허와 폐허의 자리에 형상이 자본과 대중들에게 동의를 구하며 그 자리를 비집고 있다. 이미 형상에 대한 확실한 유전자를 직시한 바 있는 관객들에게 현대사회의 거대자본이 이를 보증하면서 그 파급은 놀라우리만치 직접적이고 경이적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작동되고 목격될 수 있는 이런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허전하다. 그 이유는 작품이 사유를 제공키 보다는 욕망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의 단서를 포기하고 쾌락을 쫓은 당연한 결과일거다. 사유를 포기해 버린 순간은 안락하고 평온하겠지만 그 고통이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저 단편적인 정보나 껍데기를 알기만 했을 뿐, 깨닫고 그것이 내 삶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와 나를 성찰시킬 수 있는 진정한 의미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최양희_Sweet home, sweet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과슈_50×75cm_2011
함영미_꽃이 좋아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16.3×90.8cm_2011
한 슬_Rupert Sanderson in Show window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45×38cm_2011
홍명화_Let's party_ 천에 채색및 바느질, 혼합재료_91×168cm_2011

이 시대의 작가들은 관념과 형상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광대다. 어느쪽으로도 건너갈 수밖에 없고 그 줄 위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보여줘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어느 쪽으로 가까이 가든 혹은 어느 쪽에서 안착을 하든지 간에 그건 그들의 숙명적 선택 일테고 성향이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간절한 방식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몸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술은 진실이 될 수 없고, 철학이 될 수 없다. ■ 박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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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eSS_山水火風



송창애展 / SONGCHANGAE / drawing.painting   2011_1109 ▶ 2011_1115



송창애_아브 그라이브 4단계 변화 이미지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331d | 송창애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9_수요일_05:30pm

2011 미술공간現 기획展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아브 그라이브 스캔들 이후의 회화 MæSS 연작에 관한 연구 MASS & MESS ● MæSS는 최근 몇 년간 진행 중인 회화작업의 주요 타이틀이자 핵심주제이다. MæSS는 1) mass(군중/다수/덩어리)2) mess(혼란/카오스/엔트로피)의 합성어로 의미는 서로 다르나 발음이 같은 단어이다. 이는 기표의 다중적 해석(multiple interpretations)을 꾀하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로써 인간을 포함한 우주 자연의 '한 덩어리 의식(oneness)'을 중심주제로 삼는다. 山水火風은 부주제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 새롭게 연구하고 있는 소재이자 주요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동양예술의 진미인 1) 山水畵 양식을 의미하고, 둘째는 불가사상에서 말하는 인간과 우주를 구성하는 사대요소인 2) 地. 水. 火. 風을 의미한다. 이번 『MæSS_山水火風』展은 이전 작업에서 주로 다뤄왔던 萬物制動과 萬物流轉 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좀 더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하여 '산수화풍'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도입하였다. ● MæSS의 주요 화두는 '인간과 자연/환경'이다. 역사 이래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쟁, 테러, 폭력, 그리고 자연재해 등은 개인의 의식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 집단의식에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이나 상흔을 남긴다. 이는 나아가 미래의 개인과 집단 정체성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사회적 외상(social trauma)'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미디어를 통해 더욱 빈번하게 접하는 일련의 사건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천재지변(지진, 화산, 태풍, 쓰나미 등)을 보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다중적 본성, 삶의 터전인 환경문제, 그리고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에 내재한 복잡하면서도 필연적인 공생관계 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MæSS 연작을 통해 개인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받는 심리적 외상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살펴본 후, 이것이 어떻게 집단 사회적 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문화사회학적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즉, MæSS 연작은 이에 대한 예술적 반성의 표현이며, 상징과 은유를 통해 제시된 시각적 고찰이다.
송창애_MæSS_山水畵風 001_장지에 아크릴채색, 콜라주, 흑연_75×75cm_2011
송창애_MæSS_山水畵風 006_장지에 아크릴채색, 콜라주, 흑연_75×75cm_2011
송창애_MæSS_山水畵風 024, 025_장지에 아크릴채색, 콜라주, 흑연_160.5×130cm_2011

Abu Ghraib & Human Pyramid ● 화면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인간이다. 무수한 인간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써의 자연을 형성한다. 이중관점(dual perspectives)스케일(scale)이라는 시각적 방법론을 이용하여 인간, 자연/환경, 그리고 사회구조와의 복잡하고 밀접한 상호관계를 설명한다. MæSS 연작에서 쓰이는 인간형상은 2004년 이라크전쟁 당시, 전 세계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아부 그라이브 포로학대 스캔들(Abu Ghraib detainee's scandal) 사진으로부터 차용되었는데, 이는 지난 10여 년 간 내가 미국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경험했던 가장 충격적이고 트라우메틱한 사건이었다. 발가벗겨진 채 쌓아올려진 인간피라미드의 사진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처음 마주한 순간 느꼈던 수치감, 모멸감, 분노, 슬픔 등 매우 복합적이고 아이러니한 감정들은 단순한 감정의 동요를 넘어 심각한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외상을 입혔다. 또한 이 사건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보편적 도덕성과 믿음체계에 대한 의구심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내면의 질서를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읽은 철학서 중에 마틴 하이데거의『시간과 존재』는 당시의 고민과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새로운 가치체계를 구축하는데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현존재'와 '세계-내-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구조의 이해와 '자아-타자-대타자'에 대한 인식의 확장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MæSS라는 새로운 작업세계가 열리게 되었다. 다분히 개인적인 심리적, 정신적 외상에 대한 고민과 질문, 그리고 치유로부터 시작 된 MæSS 연작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좀 더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질문, 즉 인간의 다중적 본성과 동시대의 환경문제와 관련된 인간사 전반에 대한 주제로 진화하게 되었다.
송창애_MASS_black disaster_장지에 아크릴채색, 콜라주, 먹, 흑연_73×210cm_2008

불의 정신분석 ● 2010년까지 선 보였던 MæSS 연작이 주로 '한 덩어리 의식'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인간과 자연의 공생관계를 생성, 소멸, 변화, 순환하는 우주자연의 기본 원리에 입각하여 시각조형언어로서 탐구하였다면, 이번 MæSS_山水火風 연작은 이러한 사상을 근간으로 하되 地. 水. 火. 風이라는 사대요소를 도입하여 각 요소를 인간의 본성과 연계하여 좀 더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이번 작업에서의 두드러진 변화는 붉은 색의 전면적 사용이다. 붉은 색은 불과 열을 의미한다. 체온이 일정 수준 이하 또는 이상일 경우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열은 실체의 풍부함과 영속성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증거이자 생의 강도, 존재의 강도를 파악할 수 있는 척도이다. 불은 인간의 감정 중 뜨거운 감정, 즉 본능, 욕망, 욕구 등과 관련이 있다. 무언가 원초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과의 충돌이 존재한다. 10여 년간의 외지에서의 삶을 접고 귀국한 지 어느새 2년. 물리적 공간의 이동은 심리적, 정신적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이로 인한 또 한 번의 내적 혼란과 분열, 그리고 재귀현상을 체험한다. 마치 오랜 시간 사유공간에서 떠돌다가 이제야 비로소 땅에 발이 맞닿는 현실공간으로 들어 온 느낌이다. 귀국 이후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의 변이에 관심을 두고, 이를 맨 처음 아브 그라이브 인간피라미드 사진을 대면했을 당시에 체험했던 복합적인 감정들과 연계하여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재조명해보고자 시도하였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받았던 그 복합적인 감정들은 어쩌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 본성이 아닐는지. 작품 속의 붉은 색은 관람자로 하여금 원초적인 감정과 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수단이며, 아래로 흐르는 수직방향의 선들은 시간의 부식성과 중력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고대의 철학자나 연금술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온갖 광기어린 상상과 꿈 등을 대지, 물, 불, 공기라는 4원소에 입각하여 분류하였는데, 그의 저서『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feu』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에 의해 모든 것이 변한다. 모든 것이 변하기를 바랄 때 사람들은 불을 부른다......불에 의한 현상은 다른 어떤 현상보다도 감각적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잘 감시해야 하는 현상이다. 그것을 활활 타오르게 하거나 아니면 시들하게 가라앉혀야 한다. 어떤 실존을 표시하는 사랑의 순간(instant)처럼 어떤 실체를 표시하는 불의 점(point)을 포착해야 한다." 이렇듯 불은 죽음과 생명의 이중적 속성을 지니며, 다른 무엇보다 예민하면서도 실체의 내면 깊은 곳에 흔적을 남기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송창애_MæSS_山水畵風 004_장지에 아크릴채색, 흑연_75×75cm_2011
송창애_MæSS_山水畵風 003_장지에 아크릴채색, 흑연_75×75cm_2011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MæSS연작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한 덩어리 의식(oneness)'이다. 하지만 그 외 관람자로 하여금 기표의 다중적 해석을 유도하고자 mass와 mess를 합성하여 새로운 복합어를 만들었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관계망(network)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최근 한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SNS(Social Network System)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망이 서로 얽히고 섞여서 마치 거대한 초생물체를 형성하는 것 같다.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모든 우주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엔트로피와 같은 혼란, 마찰, 무질서의 현상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사회학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엔트로피』에서 이러한 개념(제 2열역학법칙 또는 엔트로피 법칙)이 어떻게 사회문화현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말한 바 있다. 즉, 엔트로피는 파괴와 구축이라는 양면성을 띠는데, 모든 것은 효용성의 문제가 있을 뿐 한 방향만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MæSS 연작은 이러한 속성, 즉 양가성(ambivalence)을 전제로 한다. 인간의 이중적 본성은 물론 전쟁의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최초의 인간피라미드를 드로잉한 후 복사기를 이용하여 끊임없는 반복과 축적의 단계를 거쳐 복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파괴(destruction)구축(construction)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드러난다. 이렇게 복제된 이미지는 콜라지 기법을 통해 또 다른 풍경으로 재구성(reconstruction)되고, 이 지점에서 인간과 자연은 하나의 유기체 덩어리가 된다. 자연은 인간으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변환하는 순간과 과정만이 존재한다. 경계는 모호하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와 같이 단지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다른 유기물과 별반 다름없는 유한한 생명체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좀 더 이성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가? ■ 송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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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Eye Contact




문종선展 / MOONJONGSUN / 文鍾善 / sculpture   2011_1109 ▶ 2011_1122



문종선_Tombstone-detail_합성수지, 계란판, 래커_30×30×13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문종선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12_토요일_02:00pm

관람시간 / 10:30am~06:30pm

노암갤러리 NOAM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82.2.720.2235~6 www.noamgallery.com



시선(eye contact) - 소통의 시작 ● 본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로서 관계에 있어서 소통의 시작점이 된다. 연인과 연인, 개인과 개인, 혹은 가족과 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이 관계이자 더 나아가 소통이다. 지금 너와 내가 현존하고 있는 정확한 물리적 위치와 시점이 일치하거나, 그 거리가 0이 되고, 마이너스가 되어 불일치 할 지라도, 우리가 함께 소통을 원하고자 했던 순간들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실재한다... ● 처음 우리는 타인과의 만남에서 가까워지고 싶다. 마치 몸이 하나가 될 지경으로 더욱 친밀해지고 싶다. 심지어 이 사람을 씹어 삼켜 온전히 나와 하나가 될 수 있게 만들고 싶다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적인 욕구를 투영시켜 바라본다. 그러나, 상대방의 생각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때 타자(너)에 대한 소유욕과 호기심으로 시작 되었던 나의 욕망은 상대를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
문종선_The Other 1_합성수지, 알루미늄 패널, 자동차 페인트_119×119×8cm_2011
문종선_The Other 2_합성수지, 알루미늄 패널, 자동차 페인트_119×119×8cm_2011
문종선_The Other 3_합성수지, 알루미늄 패널, 자동차 페인트_119×119×8cm_2011
문종선_The Other 7_합성수지, 알루미늄 패널, 자동차 페인트_119×119×8cm_2011

"Some of them got closer than others, Some wouldn't even brother, I never really knew how to move you. So I tried to introduce through the little holes in your vain, If you want communication, That's what you do get. I'm talking and talking, But I don't know how to connect, I've seen you, I know you But I don't know how to connect so I disconnect" 어떤 사람들하고는 친해졌고 어떤 이들은 관심도 갖지 않았어요... (중략) 그래서 당신의 상처에 끼어들어 가려고 했어요... (중략)당신이 의사소통을 원한다면 우리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을 어떻게 감동시켜야 할지 알지 못했어요. 난 당신에게 말하고 또 말해요. 하지만 당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방법은 모르겠어요. 당신을 만났고 당신을 아는데 당신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모르겠어요 그래서 이제 나는 그만둘래요. (Cardigans 「Communication」중에서) ● 이와 같이, 스웨덴의 밴드 '카디건스(Cardigans)'의 보컬 니나 페르손(Nina Person)의 달콤한 음색에서 터져 나오는 서글픈 가사들은 각기 다른 시선이 가져다주는 소통의 오류에 의한 단절의 결과를 말하며, 인간관계의 절망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상대를 제대로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태생적인 오류를 가지고 태어나, 진정한 소통을 원하기에 먼저 나의 이기적인 욕망의 내재된 시선으로 타자(너)를 바라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문종선_The Other_부분
문종선_The Other sample_합성수지, 알루미늄 패널, 자동차 페인트_10×22×4cm_2011

문종선의 이번 작업의 모티브(motif)는 시선(eye contact)으로 얼굴 원형을 복제하는 방식의 전작 소통시리즈와 작업과정은 동일하다. 계속하여 치밀하게 원형들을 거듭 복제하여 완성된 오브제들은 군집형태로 재배치되고 조합되어, 커다란 실루엣을 이루며 위협적인 느낌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 너와 내가 처음 마주했던 순간! 서로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얼굴이었다. 인간의 얼굴은 지금껏 살아오는 삶을 펼쳐 보이는 전개도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메운 얼굴들은 그저 무표정함과 외면하는 시선으로 관객과 시선이 마주 하게 될 때, 마치 쏟아질 듯 잠시 곁에 머물렀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소멸 되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런데.. 마치 도플갱어(Doppelganger)처럼 닮아 있는 수많은 얼굴들은 현실의 시공간 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며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함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배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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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N




정문경展 / CHUNGMUNKYUNG / 鄭文景 / installation   2011_1109 ▶ 2011_1127 / 월요일 휴관



정문경_HOOP_혼합재료_가변크기


초대일시 / 2011_1109_수요일_06:00pm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Insa Art Space of the Arts Council Korea 서울 종로구 원서동 90번지 Tel. +82.2.760.4722 www.arkoartcenter.or.kr



표면의 이면 ● 인사미술 공간 1층, 약간 낮은 천정의 공간에 낑겨 있는 대형 곰돌이 인형 푸(Pooh)는 안팎이 홀딱 뒤집혀 있다. 푸 인형을 잘 가지고 놀던 어린애가 봤다면 울음을 터트릴 법한 기괴한 모습이다. 워낙 커서 안 볼래야 안볼 수 없지만, 모서리에 끼어있는 모습은 사랑과 관심보다는 방치된 장난감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길가에 버려진 인형들이 종종 자아내는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캐릭터 인형이 가지는 친숙함은 크기와 안팎의 관계가 변조됨으로서 이중으로 낯설어진다. 인형은 그자체로도 인간의 무의식을 투사하는 기괴한(uncanny) 존재인데, 뒤집기 작업은 이 유사(類似) 인간의 표면 안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에서 안은 정확히 바깥의 안쪽이지, 저 깊은 곳의 내면이나 핵심, 본질, 실체 같은 것이 아니다. 뒤집어진 상태의 인형 안을 채우는 것 역시 재단된 천 쪼가리나 여타의 부산물이다. 존재는 그자체가 표면들의 중층이다. 존재의 표면들은 여기저기에서 연원한 주름들로 인해 더 활성화되어 있다. 이 주름들이 야기하는 감정의 기폭 또한 크다. ● 우리는 핵심과 표면이라는, 너무나 오래되어 친숙한 이원적 모델을 따라 주어진 것을 파악하려 하지만, 진실은 핵심이 아니라 표면 및 표면들 간에 맺어지는 관계성에 의해 구축 또는 해체 된다. 실로 심오한 것은 표면에 산포되어 있다. 해체주의로 대표되는 현대 철학은 깊이의 강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와 형이상학을 폭로 한다. 정문경의 작업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면에서, 깊이의 모델을 표면의 모델로 전환시킨다. 모델이 된 원래 인형을 뒤집어서 15배로 확대시키는 작업은 조각난 육체들이 짜깁기 하는 장이다. 일일이 수공으로 진행되는 확대 작업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흐릿해진 원본처럼 알게 모르게 변형된다. 관객의 면전에 놓인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시뮬라크르이다. 작업하다 피곤하면 그 위에서 누워 자기도 한다는 거대한 이불 같은 인조털 원단에서, 몸을 이루는 부분과 전체 간의 유기적 관계는 종종 모호해진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한손에 잡히지 않는 거대한 표면들은 길(방법)을 잃게 한다.
정문경_YFOOG_혼합재료_가변크기

속이 채워지기 전의 껍데기들이 재단되고 봉합되는 현장은 가짜 털을 이루는 나일론 섬유들이 풀풀 날리는 가내 봉제 공장 같은 분위기지만, 육신이 부위 별로 해체되고 포장되는 육가공 공장 같은 모습 또한 연상된다. 거기에는 유기적 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범람하고 흐르는 살 비슷한 것이 주는 공포가 있다. 낯설게 하기는 낯익음을 전제로 한다. 충격은 그것이 낯익은 것에서 출발한 것일 때 더욱 증폭 된다. 그래서 작가는 푸, 미키 마우스, 도널드 덕, 구피, 키티 등 잘 알려진 디즈니 캐릭터들을 사용했다. 그것들은 전시부제인 'known'이란 말 그대로, 잘 알려진 인형들이다. 전시는 알려진 것들이 알려지지 않는 것들로 전이되는 장이다. 작품들은 기존의 것을 미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예술의 기본에 충실하다. 작품 제목 또한 글자를 거꾸로 배열하는데, 발음자체가 안 되는 것도 많다. 작품 「Hoop」에서 뒤집어진 푸 인형은 플라스틱 나사 형태의 눈알이 튀어나와 있다. ● 예기치 못한 형태는 부드러움 속에 내재된 날카로움을 강조한다. 평화로움은 공격성으로 전환된다. 삶 바로 아래에는 죽음이 깔려 있다. 작품 「Yekcim」는 미키 마우스 뒤집은 것인데, 너덜거리는 시접 때문에 큰 귀가 더 커 보인다. 작품 「Yfoog」은 모서리에 앉아 있는 색 빠진 구피가 툭 튀어나온 눈 때문에 더욱 의기소침해 보인다. 그 외에 아기 사자와 코끼리, 고양이 인형 등이 뒤집혀 있다. 캐릭터의 형태와 속성을 결정하는 부위인 눈과 코는 원재료가 드러나는 이물감으로 인해, 원래의 인형에 있는 귀여움은 그로테스크하게 변모한다. 뒤집어진 부분에서 눈의 반전이 가장 충격적이다. 그러나 정문경의 작품은 애초의 원본 인형들 역시 소비자의 욕망에 의해 실재가 변형된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실상은 인형 자체가 괴물이고, 작품은 괴물화 과정을 다시 보여주거나 가속화시킨 것일 뿐이다. 뒤집힌 도날드 덕과 정상적 인 도날드 덕을 위아래로 그림자처럼 마주해 놓은 작품 「Donald Duck Dlanod」은 비정상적인 모습이 더 활기차다. 낯설게 하기는 낯익은 것의 자동성을 불연속적인 도약으로 만든다.
정문경_YEKCIM_혼합재료_가변크기

요즘 작가는 인형 뿐 아니라, 가구 같은 것도 뒤집고 있다. 최종적으로 전시장을 방 하나처럼 꾸며서 그곳을 채우는 모든 것들을 뒤집어 보겠다는 계획도 있다. 안팎 뒤집기라는 작업에서, 표면으로의 경도는 이 전시의 또 다른 작품군인 가면들에서도 이어진다. 정문경의 작품에서 표면은 또한 가면으로 간주된다. 인형 뒤집기가 봉제선의 노출로 부드러운 표면을 거칠거칠한 껍질로 만든다면, 가면은 실제의 안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가면으로서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러나 현대인의 속성을 잘 잡아내어 만화 같은 방식으로 극대화하는 가면들은 역시 그 뒤의 실체들을 의문시한다. 과연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 자체가 가면들 아닐까? 하는 의구심 또한 자아낸다. 실상을 말하자면, 현시대는 무엇이 얼굴인지 무엇이 가면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럽다. 작품 「BLINKER」는 주변의 시야가 가려진 기능이 있는 경주용 말 가면과 작가가 그것 쓰고 돌아다니는 영상이며, 작품 「SLEEP WALKING」은 베개 가면 쓰고 도심을 돌아다니는 영상이다. ● 이 두 작품에서 가면의 역할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거나 거대한 표면 위에서 길을 잃은 모습, 즉 맹목이나 백일몽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 「tin girl」은 양동이 가면 쓴 여자를, 작품 「탑」은 옷 가면 쓴 여자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물화에 내재된 수수께끼가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 미학을 계승한다. 이전 작품에서 얼굴의 모든 것이 삭제된 채 웃는 입만 강조된 가면인 「SMILE」, 자신의 이름 라벨로 얼굴과 몸을 미라처럼 똘똘 말아버린 「UNTITLED」, 창문이 눈구멍 문이 입인 포장 박스로 만든 집 가면 「Home」은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는 물신적 단편들이다. 이전 작품에서 과자 봉지들이나 영수증, 태그들은 잔뜩 수집하여 만든 것들은 현대 미술에서 예술의 상대편에 놓여 지곤 하는 사물의 면모를 드러낸다. 사물은 예술이 갖추어야 할 핵심이 부재하여, 덧없는 표면들을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최근 캔버스 천으로 만들고 있는 실물 크기의 기린은 가면이 꼭 인형일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정문경_Blinker_혼합재료_가변크기

물신주의를 조장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과 인형, 동물은 도구적으로 다루어진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정문경의 뒤집어진 인형이나 가면들은 차이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차이를 어떻게 감식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동일성과 타자, 실재와 해체, 몸과 무의식 등의 문제를 전면화한다. 정문경의 인형이나 가면들은 원래의 형태를 참조하여 그에 못지않은 꼼꼼한 재단과 봉합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를 실재처럼 응집시키는 자연스러움은 소격된다. 실재는 그 견고함을 잃고 너덜거리는 조각 잇기의 산물임이 밝혀진다. 작품들은 실재가 동질성 대신에 차이적 관계들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차이는 해체주의의 중심적 범주로, 해체의 주된 대상은 형이상학이다. 마이클 라이언은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해체론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최초의 근거 및 궁극적 요인으로, 초월적 관념이나 물질적 실체, 혹은 주관적 동일성, 직관적 의식, 선 역사적 본질, 현존으로서의 존재 등을 상정하는데, 이것들로부터 다양한 존재들이 연역되고 설명되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정문경_Sleepwalking_혼합재료_가변크기

데리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늘 세계를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월한 이항대립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둘째 항은 첫째항이 보증하는 가치를 흔들리게 하는 요소를 포함한다. 둘째 항은 이런 확실하고 유력한 가치를 와해시키는 항목들, 즉 차이, 부재, 변화성, 역사, 반복, 대체, 미결정성 등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논리 그 자체를 펼치는 태도, 즉 어떤 존재의 자기동일성에 조화되는 훌륭한 분별력을 펼치는 태도이다. 형이상학에서 실체는 존재이며, 외부의 것은 외부에 존재하고 내부의 것은 내부에 존재한다. 정문경이 시도하는 안팎 뒤집기는 형이상학의 기본 전략인 대립과 우선권을 무화시키려 한다. 가령, 풀려나가는 가장자리, 마무리 지어 지지 않은 실밥,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닌 밖에서부터 강제로 쑤셔 넣은 눈깔은 본질적 요소를 침식하는 이차적이고 파생적인 요소를 대변한다. 이 배제되고 가려진 것들의 전면화는 순수한 동일성의 밑바탕을 이루는 잡다함을 강조한다.
정문경_Tower_혼합재료_가변크기

해체주의 식으로 표현하자면, 차이는 동일성으로부터 파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차이가 동일성을 가능하게 한다. 마이클 라이언에 의하면 해체론이 와해시키는 형이상학의 모든 개념적 대립들은 내면성/외면성의 이항대립의 틀에 메여있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내면적인 것은 고유한 자기 자신이며 선하고 일차적이며, 근원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외면적인 것은 타자이고 비본성적이며, 악하고 이차적이고 파생적이고 타락한 것이다. 형식적으로 완전한 도식을 통해 형이상학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른 대립들, 즉 긍정과 부정, 선과 악, 자연과 문화, 진리와 허구, 실재와 인공물,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삶과 죽음, 현존과 재현, 이론과 실천 등이다. 부재는 현존의 외부이고 허구는 진리의 외부이며 죽음은 삶의 외부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차이화 되는 것만큼 그것이 되며, 또한 다른 것을 연기하는 것만큼 그것이 된다. 내부와 외부의 일반적인 공리적 구조가 보류되고 치환될 수 있는 것이다.
정문경_Tin girl_혼합재료_가변크기

『해체론과 변증법』은 모든 철학적 형식의 궁극성, 즉 기초적 공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 사물 자체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으로 정의되는 진리, 자기동일성, 합당성 등의 와해를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정문경의 작품에서 평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끝없는 계열은 궁극적 요인이나 목적을 와해시킨다. 뒤집혀진 인형들은 동일자의 몸통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억압되고 은폐된 요소를 드러낸다. 그 결과 작품들은 구조보다는 과정을, 의식보다는 무의식을, 정신 보다는 육신을, 유기체보다는 기관 없는 몸체를 전면화한다. 봉합되기 위해 일련번호가 매겨진 채 여기저기 널 부러진 조각난 신체들은 죽음이나 기형 보다는 과정으로서의 몸의 유연성, 또는 가변성을 강조한다. 정상적 형태를 특징 지웠던 단단한 조직화는 기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과정이 된다. 유기적 조직화가 아니라, 표면들의 절단과 연결로 만들어지는 몸이 바로 '기관 없는 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을 페미니즘에 적용시키는 엘리자베츠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육체』에서 '기관 없는 몸'은 환상, 이미지, 투사, 재현의 투자가 철회된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 그것은 또한 정신적 내부나 비밀스러운 내부가 없는 몸, 내적인 일관성과 잠재적인 의미화 작용이 없는 몸 개념을 환기시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계층화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되고 위계 질서화에 앞서는 것으로서의 몸을 속도와 강도의 표면으로 거론한다. 어느 것과도 접 붙을 수 있는 표면들은 안팎이 연결된 뫼비우스 띠처럼 이원적 구조를 해체한다. 그로츠에 의하면 이원론이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몸과 마음처럼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어떤 것이 있으며, 이런 것들이 우주라는 보편성과 주체라는 특수성을 구성한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안팎 뒤집기의 목표는 몸의 재형상화를 통해 주체성의 개념에서 마음, 정신, 내부, 의식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치를 바꾸어 놓는다. 정문경의 뒤집힌 인형이나 가면은 진부한 키치적 사물을 떠오르게 하지만, 주체성을 잠재성이나 깊이의 모델로서가 아니라 표면의 모델로 간주하는 현대 언어학, 철학,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등의 담론과 맥락을 같이 한다. ■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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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ing there

김지애展 / KIMJIEH / 金智愛 / painting   2011_1102 ▶ 2011_1127 / 월요일 휴관


김지애_코끼리와 ? 나무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129h | 김지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수요일_10:00am~08: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시작 서울 종로구 인사동 39번지 2층 Tel. +82.2.735.6266 www.artandsmart.co.kr


가고 싶은 곳, 가고 있는 곳, 가야만 하는 곳. Want to go, Am going, Must go here.
김지애_ellephant & cross 10f 1
김지애_ellephant & cross 10f 2
김지애_그들을 위한 도시 2 100m
김지애_그들을 위한 도시 100m
김지애_코끼리와 선인장100f 2
김지애_Going there展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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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R & CLOSING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2011 하반기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참여작가 창작연구 결과展   2011_1109 ▶ 2011_1123



참여작가 프레젠테이션 / 2011_1123_수요일_04:00pm~07:00pm

참여작가 친모이 파텔Chinmoyi Patel, 인도)_자일스 라이더(Giles Ryder, 호주) 펄라쉬 바타차지(Palash Bhattacharjee, 방글라데시)_팸 후이 통(Pham Huy Thong, 베트남) Andreas Zingerle(오스트리아)_Kate Tessa Lee(모리셔스)

후원/협찬/주최/기획 / 국립현대미술관

관람시간 / 10:00am~06:00pm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창작스튜디오 Goyang Art Studio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Korea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656번지 Tel. +82.31.962.0070 www.artstudio.or.kr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고 있는 창동, 고양에 소재한 국립창작스튜디오(이하 '창작스튜디오')는 2011년 하반기 『아시아퍼시픽 입주프로그램』 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 참여작가 창작연구 결과전, 『CLOSER & CLOSING』을 오는 11월 9일(수)부터 11월 23일(수)까지 고양창작스튜디오에서 15일간 개최한다. ● 이번 전시는 창작스튜디오에서 아시아, 유럽 및 아프리카 등지의 해외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추진하는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 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에 참여 하는 작가 6명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이 두 프로그램을 통해 더욱 폭넓은 시각을 기른 6명의 다국적(인도, 호주, 베트남, 모리셔스, 방글라데시,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들은 2~5개월여 기간동안 한국에 머무르며 창작한 새로운 작품들을 본 전시에서 선보인다. 이들은 한국에서 생활하며 접해온 한국의 사회구조, 전통종교 등의 소재를 채택하여 작품의 영역을 넓히는가하면, 지금까지 시도해온 예술적 실험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해왔다. 회화, 영상,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는 다국적 6명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는 동시에, 한국의 일면을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 이번 전시는『CLOSER & CLOSING』이라는 전시명처럼, 국내외 작가들이 더욱 친밀하게 예술 교류를 도모하고 입주기간 종료 시점에서 그동안의 창작 성과물들을 선보이기 위해 기획되었다. 또한 이번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각자의 작품과 창작스튜디오 입주 경험 등을 국내작가와 공유하는 시간도 가질 계획이다. 보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홈페이지 www.artstudio.or.kr를 통해 얻을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의 국제교류프로그램이란 국립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는 국내작가 창작활동 지원 외에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지원프로그램』 및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등의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 유럽 등지의 유능한 작가들에게도 공간지원을 통한 활발한 문화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 아시아의 한류문화를 지속ㆍ성장시키기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매년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의 작가를 선발하여 창작활동을 지원해왔다. 2005년부터 시행된 '아시아작가초청프로그램'을 2008년부터 '아시아퍼시픽작가 입주프로그램'으로 대상국가를 확대하여 입주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 1994년부터 UNESCO 국제문화진흥기금을 통해 운영되어온 '유네스코-아쉬버그 장학연수프로그램'에 2006년 한국기관으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연수기관으로 참여하여 시각예술 분야에서 외국작가 2~3명을 선발ㆍ지원하고 있다.
친모이 파텔_You should have put a big shiny poster up_HD 비디오_00:03:43_2011

친모이 파텔 ● (1985년 생/ 인도/ 영상/ 아시아퍼시픽) 인도출신 작가 친모이 파텔은 자신의 작업에서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이 사회에서 우리의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데 '놀이'(play)적 요소를 도입한다. 친모이는 놀이가 어떻게 촉매제 역할을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놀이는 사물을 단순한 형태로 환원시키며 이를 통해 특정한 경험이나 상황을 평가하도록 한다. 친모이는 일상사로부터 벗어나 인식, 분석, 순간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작품 You should have put a big shiny poster up에서 친모이는 창동창작스튜디오 주변 내천에 간이의자를 설치하고 행인들을 모아 '의자앉기놀이(musical chairs)'를 시도한다. 언어 혹은 언어의 장벽없이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동 그 자체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자일스 라이더_Light Pavillion [part2]_혼합재료_가변크기_2011

자일스 라이더 ● (1972년 생/ 호주/ 설치/ 아시아퍼시픽) 호주 출신의 자일스 라이더는 래커 칠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작업부터 거울이나 탄산가스 거품을 이용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작품을 창조한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공간이나 대상에 관한 최소한의 연출만을 보여주지만 최대한의 힘을 갖는 공간 설치를 통해 제시된다. 스프레이 등 산업적인 재료들의 조합을 이용하여 현대 삶에 대한 영향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매우 특별한 미학을 보여준다. 그러한 자일스 라이더의 예술적 실행은 매체, 색체, 물질적 현존 간의 융합이기도 하며, 형태, 공간, 선, 물질의 축소에 대한 개념을 보여준다. 게다가 색채의 효과는 회화의 경험적 인식 안에서 존재한다.
펄라쉬 바타차지_Whistle..._비디오_00:09:00_2011

펄라쉬 바타차지 ● (1983년 생/ 방글라데시/ 영상/ 아시아퍼시픽) 방글라데시 출신의 펄라쉬 바타차지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다양하고 많은 현상을 다룬다. 그는 작품 Whistle...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다양한 외국인(학생, 사업가, 공장노동자 등)이 휘파람 부는 장면을 촬영하고, 이를 수집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했다. 휘파람은 신체의 호흡에서 생성되는 소리로 우리의 기억에 새겨진 멜로디를 창조한다. 이 휘파람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존재로서 보편적인 언어인 소리와 음악을 창조해낸다. 그의 작품 속 휘파람 소리와 장면들은 개인적인 감성을 비롯해 언어, 경계, 피부색, 종교 등과 같은 사회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며 보편적인 유기적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계 사람들은 청각적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곤 한다.
팸 후이 통_A Scarify_캔버스에 유채_140x160cm_2011

팸 후이 통 ● (1981년 생/ 베트남/ 회화 및 드로잉/ 아시아퍼시픽) 팸 후이 통은 베트남 출신의 회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정치적, 사회적인 함의에 초점이 맞추어져있으며 Plastic Chairs, Updated, Dong Bao 등의 여러 연작들을 완성했다. 이러한 각각의 연작들은 예술가로서 그의 진화된 면모와 동시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전개해나갔다. 2010년 겨울부터, 통은 Hands라 불리는 새로운 연작을 통하여 그의 신체에 관한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사회비판가로서, 통의 작품은 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인 셈이다.
안드레아스 징걸렛_Samalu_비디오_00:02:38_2011

안드레아스 징걸렛 ● (1980년 생/ 오스트리아/ 영상/ 유네스코-아쉬버그) 오스트리아 출신의 안드레아스 징걸렛은 주로 기술이나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을 응용한 인터랙티브 설치작품을 제작한다. 안드레아스의 작업은 쌍방향 서사(interactive narratives), 착용기술(wearable technology), 쌍방향 디자인, 인간과 컴퓨터의 상호작용 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근거하고 있다. 2010년 린다 크론만 작가와 함께 Kairug,org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로 여러 작업을 공동 제작하고 있다. 이번 Samalu 작품에서 안드레아스는 한국과 오스트리아에 존재하는 산의 미신에 관한 작품을 선보인다.
케이트 테사 리_A Voice is a Void is a Voice_비디오 퍼포먼서_00:04:00_2011

케이트 테사 리 ● (1982년 생/ 모리셔스/ 영상/ 유네스코-아쉬버그) 모리셔스에서 온 케이트 테사 리는 자신의 삶과 예술의 평이한 범주화를 거부한다. 그녀의 예술작업은 위험, 조우, 사건, 여행 등을 노래한 하이쿠(haikus)에 영향을 받으며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떠돌이 마술사로부터 마술을 배우거나 유리공이 작업할 때 그의 발자국을 따라 발생하는 소리를 도표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개미의 걸음걸이와 비교해 자신의 걸음이 갖는 박자구조에 감흥을 받아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창동창작스튜디오에서는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소리유형의 본질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작업과 어떻게 이러한 소리의 유형들이 이동하며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의미를 형성하는지 제시했다. ■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문화창작스튜디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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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a (young German artists)


라이프치히 신드롬, 그 두 번째 이야기展   2011_1110 ▶ 2011_1130



초대일시 / 2011_1110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틸로 바움개르텔 Tilo Baumgartel_토비아스 레너 Tobias Lehner_마틴 갈레 Martin Galle

기획 / UNC 갤러리

관람시간 / 09:00am~06:00pm

유앤씨 갤러리 UNC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58-13번지 Tel. +82.2.733.2798 www.uncgallery.com


UNC갤러리는 오는 11월 10일부터 11월 30일까지 신-라이프치히 화파로 불리는 독일 출신 작가 틸로 바움개르텔(Tilo Baumgartel), 마틴 갈레(Martin Galle), 토비아스 레너(Tobias Lehner)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 젊은 작가들은 전통적인 라이프치히 시각 예술 대학(Academy of Visual Arts Leipzig)에서 수학하였다. 이번 전시의 작가들은 yGa(young German artists)라 불리며 원로 라이프치히 작가들과는 달리 빠른 시간에 대중에 지지를 받았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와 트레이스 에민(Tracey Emin)등으로 대표되는 영국 젊은 예술가 집단으로 칭하는 yBa(young British artists)와 비교된다. 구 동독 출신의 이번 작가들은 원로 라이프치히 화파 작가들과 달리 통독 이후 시대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며 전통적인 매체와 급변하는 기술 발달과 함께 새로운 이미지들이 지닌 특성과 결합하여 탄생된, 기존의 회화 방식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언뜻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하나의 화면에 어우러짐으로써 통독 이후 세대에 대한 작가들의 냉소적인 시선과 불안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이들의 작품 경향은 주로 구상회화의 범주에 속해있으며, 풍경이나 사람들의 소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구성되고 신중히 표현된다. 이전 독일 표현주의의 거친 붓자욱이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결여되어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주관적이지만 고도로 절제된 표현들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이프치히 화파들의 작품에는 다양한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한 새로운 개념의 이미지들에 대한 탐구와 회화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다. 더 나아가 이는 독일 현대사회의 급변이 낳은 시대적 정신과 비판을 캔버스에 나타낸다. 이들의 작업에는 개념과 철학이 담겨 있어 회화를 표현에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으며, 그들 자신을 예술가(Artist)아닌 화가(Painter)로 표현한다. ● "회화의 승리(The triumph of Painting)"라 명명된 영국의 사치 갤러리 특별전이 있었다. 2005년 1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총 3부에 걸친 대대전인 회화전으로, 로얄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 회화 전 이후 24년만의 블록버스터급 회화전이다. 이 전시는 1970년 대 회화의 부활을 이끌었던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처럼 밀레니엄 이후 이렇다 할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던 세계미술시장에서 다시 한번 회화의 재부활을 예견했다. 이 전시에 미술계의 "큰 손" 사치가 선택한 세계적인 화가들 중에 30%가 독일 작가였다. 이를 감안해 보면, 전 세계적으로 독일 현대 미술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대한지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미술의 영향력은 2006년 메사추세츠 현대미술관(MASS MoCA)에서 열린 독일 라이프치히 회화 특별전에서도 엿볼 수 있다. ● UNC 갤러리는 2007년 사간동에서 개관을 시작하여 2011년 10월 청담동으로 이전, 대중과의 호흡을 시도하고 있다. 이전 개관전으로 "Great Surprise from Leipzig" 展을 선보이며 현재 세계 미술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라이프치히 미술을 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원로작가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주목해야 할 젊은 작가까지 독일 라이프치히 미술을 총 3부에 걸쳐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yGa - 라이프치히 신드롬, 그 두 번째 이야기" 展을 통해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틸로 바움개르텔, 마틴 갈레, 토비아스 레너의 3인전으로, 2011년 11월 10일부터 11월 30일까지 작품 8점 내외를 공개한다.
틸로 바움개르텔 Tilo Baumgartel_Harzburg_캔버스에 유채_40×30cm_2008
틸로 바움개르텔 Tilo Baumgartel_tara_종이에 잉크, 목탄, 파스텔_140×100cm_2010

틸로 바움개르텔 (Tilo Baumgartel) ● 틸로 바움개르텔은 1972년 독일 드레스덴(Dresden)에서 태어났다. 그는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라이프치히 시각예술학교(Academy of Visual Arts Leipzig)를 다녔다. 그는 젊은 라이프치히 작가들로 구성된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일원으로, 마티아스 바이셔(Matthias Weischer), 크리스토프 루크해베를레(Christoph Ruckhaberle)와 함께 속한다. 이 그룹의 일반적인 특징은 구상미술로 표현된다. 그의 작품은 사회적 사실주의 작업 및 데셍실력과 극적인 그림자를 이용한 선전 포스터로부터 파생되었다. 최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작가로써, 성인동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이미지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는 그림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흔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풍부한 표현방식 때문이다. 바움개르텔은 자신이 경험했던 추억들이나 환상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접목하여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낸다. 작품을 보면 비 논리적이고 의식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의식과 무의식을 끊임 없이 넘나들며, 마치 환각 상태와 흡사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 바움개르텔은 앞서 말한 "회화의 승리"전에 참여하였으며, 라이프치히 미술관에서 전시한 "7x Malerei"를 비롯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Sandroni.Rey 갤러리에서 전시한 "Future/Five Artists from Germany"전, 런던 윌킨슨(Wilkinson) 갤러리에서 전시한 '페인팅쇼', 메사추세츠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 "죽음 뒤의 삶"전등의 에서 볼 수 있었다. 현재 그는 런던의 윌킨슨 갤러리 및 베를린에 Christian Ehrentraut, 로스앤젤레스의 Adam Biesk의 대표작가로서, 라이프치히에 거주하며 작업한다.
토비아스 레너 Tobias Lehner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30cm_2011
토비아스 레너 Tobias Lehner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80×130cm_2011

토비아스 레너 (Tobias Lehner) ● 토비아스 레너는 1974년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태어났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라이프치히 시각예술학교(Academy of Visual Arts Leipzig)에서 수학하였으며, 2005년에는 대학원에서 지카르트 길레()교수에게 사사했다. 틸로 바움개르텔과 같은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핵심적인 인물과 함께 동일한 평가를 받고 있는 다수의 화가들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토비아스 레너(Tobias Lehner)다. 추상적인 회화를 구축하는 레너는 바흐의 음악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작업한다. 현란한 색의 무리들을 마치 구멍 뚫은 것처럼 보이는 무늬들이 녹아 들어가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작가는 빈 캔버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임의적으로 색을 쏟아 부어 그 위에 여러 층의 색을 더하면서, 점과 선 혹은 격자무늬로 이루어지는 기하학적 형태들을 그려낸다. 이렇게 표현된 형태들이 추상적인 움직임과 결합하며 형태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얀 캔버스의 빈 공간에 삭막한 대조를 이루는 미니멀 아트는 그 위에서 격동적으로 표현되며 자극을 준다. 색의 추상적인 형태, 물감으로 채워진 구조상의 충돌, 대기처럼 흐릿하게 표현된 기하학적이고 기술적인 형태들, 유기 돌연변이의 커다란 덩어리, 성서에 바탕을 둔 흔적들, 말라버린 물감의 줄기, 패턴, 격자무늬등을 이용하여 작가는 표현한다. ● 레너의 최근 전시로는 비엔나 에슬 현대미술 컬렉션(Essl Collection of Contemporary Art)의 "Made in Leipzig", 런던 유니온 프로젝트의 "Paintings", 브레멘 베저브르크 신 미술관의 "Ohne Zögern, Collection Olbricht Part 2"등이 있다.
마틴 갈레 Martin Galle_luderIII_리넨에 유채_50×40cm_2011
마틴 갈레 Martin Galle_Toyhaele_리넨에 유채_120×180cm_2009

마틴 갈레(Martin Galle) ● 마틴 갈레는 1981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라이프치히 시각 예술학교 (Academy of Visual Arts Leipzig)에서 수학하였으며, 2010년에는 독일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로 불리는 네오 라우흐(Neo Lauch)에게 사사했다. 작가의 완벽한듯한 사실적 기법은 때로는 충격적이기도 하다. 많은 수의 그의 작품은 주변의 풍경을 사진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특징 짓는다. 작품을 보면 매우 사실적이지만 부조화스럽게 보이는 이미지들이 화면을 지배하며 관찰자로 하여금 상충된 느낌을 갖게 한다. 작품에 가까이 접근하면, 작가가 표현하는 이미지의 설정에 있어 모순점에 마주한다. 2010년 작 "Return of the Mac "을 보면 우리는 왜 가짜 수염을 달고 가면을 쓴 남자가 연무재통을 한 가득 담고 숲에 서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설정의 조합은 회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실제 인간의 삶과 세상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요소들을 함께 꺼내어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해학은 그의 의도로 묘사적 특징 안에 녹아있게 하였다. 그가 사용하는 포맷은 엽서크기부터 벽을 꽉 채우는 사이즈까지 다양하다. 2011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발간된 유망한 젊은 작가 100명을 소개하는 "Rising-Young artists to keep an eye on!" 도록에 참여하였다. 이 도록에 참여한 작가들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며, 설득력이 있어 컬렉터나 큐레이터, 갤러리스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독일의 ASPN 갤러리에 소속작가로 활동한다. ■ 유앤씨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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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연展 / KIMSIYEON / 金始衍 / photography.installation   2011_1111 ▶ 2011_1204 / 월요일 휴관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145×2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225d | 김시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11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11_1111_금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현대_16번지 GALLERY HYUNDAI 16 BUNGEE 서울 종로구 사간동 16번지 Tel. +82.2.722.3503 www.16bungee.com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소심한 위협 ● 인간이 거대한 사회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몸속에서 작동하는 수많은 면역체계들 그리고 심리적인 방어기제들 그리고 사회화된 여러 행동과 의식들이 개별적 존재들을 험한 생존의 각축장에서 겨우 존재를 지켜나가게 만들어준다. 여기까지는 생물학적, 의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논리의 메커니즘으로 적당히 틀을 잡아볼 수 있는 생존의 공식이다. 공식적으로만 살아간다면, 인간은 단일 세포체의 미생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 생존의 치열한 경쟁 사이에는 수많은 소통과 단절이 형성된다. '동물의 왕국'이나 기타 기록영상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듯이,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감정과 의지를 소통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모든 행위와 현상들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궁극적인 현존성이 아닐까.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큰소리나 제스처 혹은 시위뿐만 아니라, 눈 깜빡임과 같은 미세한 동작조차도 위의 맥락으로 보면, 거의 같은 의미와 무게감을 지닐 수 있다. 아주 작은 행위나 소리 그리고 감정은 그 생태적 원리부터가 매우 정교한 전개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대상에 대한 미시성은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미시적이며 동시에 우주적인 동시적 사유를 형성해 주지만, 감성적 차원에서도 보다 깊은 사유의 지도를 형성하게 해 준다. 작가 김시연의 지도는 곧 감성이 실타래가 되어 형성하는 매우 유약한, 그렇지만 의식상으로는 매우 거시적인 메시지로서 재현되고 있다.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40×40cm_2011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60×51cm_2011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 ● 김시연은 열심히 지우고 나면 종이 위에 그리고 바닥에 때처럼 쌓이는 지우개 찌꺼기를 이용하여 조형을 한다. 고무가 종이에 밀려 벗겨진 살갗은 여전히 점성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유토처럼 조형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우개의 찌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 그 목적성에 있어 철저히 비합리적이다 - 현실성에 비추어 매우 부조리해 보인다. 이 찌꺼기를 모아서 뭉쳐 실을 만들고, 이 실로 타래를 만든다. 쓸모없는 찌꺼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초 작업은 그야말로 부단한 인내와 시간을 파하는 노동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쓸모없음을 향한 이 노력은 우선 그의 작업이 가장 예술적인 행태를 띤다고 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지포스의 신화에서 나타난 무한 반복적 노동에서 부조리의 원천을 읽어냈던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의식과 만난다. ● 일상사물(object trouvé)을 원료로 하는 미술은 뒤샹(Marcel Duchamp) 이후에 별로 신기하지도 않지만, 현대 미술사를 거치면서 일상에 숨겨진 여러 감응들을 사물에서 발견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작가들에게는 매우 창조적인 실천으로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나 미니멀리즘(Minimalism)에서 일상의 물건 - 대체로 이것들은 용도를 다한 폐기물들에 가깝다 - 들은 새로운 구성과 맥락 그리고 부여된 환경 속에서 아우라(aura)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였다. 가까운 사조였던 팝아트가 대량생산된 상품이나 포장 그리고 대중적 이미지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함으로서 예술작품을 일상용품인것처럼 만들었다면, 전자는 그 맥락을 역행하는 식으로 전개했다. 모리스(Robert Morris)가 사용하는 펠트 천이나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쓰레기 더미들은 일상에 잠재된 다른 차원의 미학을 제의적 상황으로 재인식하게 만드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 남성적 대가들의 권력과 같은 거시적 시각과는 달리 김시연의 소심한 작업은 그 일상성에 너무나 서정적으로 접근하는 편이라 하겠다. 이러한 시성은 부르주와(Louise Bourgeois)의 작품이 풍기는 다중적인 상징성이나 고차원의 심리적 자극에 더 가깝다.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11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97×120cm_2011

Capriccio ● 그러나 이미 과거 소금을 이용한 설치작업에서 보여주었듯이, 작업의 미학적 속성인 멜랑콜리를 함유한 서정성과 여성적 정교함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김시연의 서정성은 말 그대로 서정적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서정적인 정조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급반전하여 초현실적인 서사구조로 바뀐다. 이러한 전환은 일종의 '카프리초(Capriccio)'와 같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래서 예상을 불허하는 파격을 가리키는 미술사적 용어인데, 카프리초는 김시연에게 약간은 심리적 공황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된다. 카프리초가 지닌 들뜬 비애감도 김시연의 작품과 곧잘 상응된다. ● 고무찌꺼기로 실밥을 만들어 타래를 형성하면서, 그 타래는 또한 슬그머니 실밥을 풀어놓음으로서 어떤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그 상황들은 매우 델리케이트(delicate)하다. 상황을 연출한 본원적 의도는 완고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실제는 우습고, 허술하고 때론 귀엽다. 작가는 자신이 기술한 몇몇 가상이야기를 통해 지루한 일상의 사건이 초현실적인 기이(奇異)로 반전되는 상황을 그려왔다. 이에 상응하는 조형언어도 가정용 물품이나 재료와 그것을 가가이하고 지냈을 법한 전업주부의 기괴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생산되었다.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98×145cm_2011

바리케이트와 부비트랩: 소심한 자기방어 혹은 우울한 새디즘(Sadism) ● 불과 몇 년 전에 김시연은 가정이라는 공간 내에서 자기만의 공간을 설정하고 긋고 그리고 방벽을 쌓았다. 그리고 마치 벽사(?邪)적인 의미를 지닌 장애물을 요소에 설치함으로서 자기 공간에 대한 배타성을 가시화하였다. 공간에 대한 조형학적 사고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찾아낸 것은 훌륭한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원래 조각을 전공했던 작가로서 공간이란 너무나 깊이 각인된 조형원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인 차별이나 균제 등으로 관념화된 공간이 아니라 매우 심리적인 공간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근원적으로 욕망하는 공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 막힌 벽이나 문지방, 창틀이나 바닥 등 집을 이루는 어떤 공간은 분할을 이루는 기점을 형성한다. 바로 이 지점에 작가는 바리케이트를 치거나 부비트랩을 설치하여 자기 외에 존재에 대한 공간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시도했다. 하얀 소금으로 이루어진 원뿔형 기둥을 가득 세운 방안이나 찬장 내부도 그렇지만 소금 가루를 이용하여 카펫의 패턴으로 덮어진 바닥은 극도의 신중함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서 작동한다. 물론 이에 선행하는 시각적인 수용은 미학적이지만, 다음 과정으로서의 행동에는 억압기제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소금이 지닌 물성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바리케이트가 지닌 허약함에 기인한 모순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 작고 부서지기 쉽고(fragile), 연약한 재료들과 겨우 한시를 버티지 못할 조형적 구조는 우리의 보편적 관념과 타성적인 현실감에 대비되어 혼란스러운 의식상태로 만든다. 이 작고 연약한 것들의 소심한 위협과 방어의식은 바로 작가의 방어의식을 보여준다. 필자는 여기서 약간 더 나아가 '우울한 사디즘'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작가가 이전에 사용했던 주제인 '우울증에 걸린 집'에서 착안한 것이다.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도 우울증(혹은 히스테리)은 여성의 전유물이었으며, 여성 특유의 정신 병리학적 방어기제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 맥락에서 김시연이 작품을 통해서 노출시키는 '우울함'은 자기의 삶을 통해 행해지거나 혹은 의도되어진 소심한 방어의지라고 본다. 그러므로 설치나 사진으로 제시되는 여러 상황들은 바로 이런 그의 미시적 심리세계의 편린이라고 하겠다.
김시연_Thread_디지털 프린트_102×145cm_2011

짧은 종언 ● 어쩌면 김시연은 필자의 예술론에 가장 근접한 행위와 사유를 하는 작가인지 모르겠다. 나는 항상 거시적인 대상이나 주제에 천착했던 예술이 가장 미시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는 맥을 못 추는 현대미술의 양상에 비판적인 거리감을 두었었다. 세계의 평화나 사회나 정치적 비평의 선상에서의 언변은 탁월하지만, 당장 제 손끝의 작은 상처에 대해서는 표현할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내가 주장했던 현대미술의 한계였다. 이 맥락에서 김시연은 매우 적절한 의미를 형성시키며, 또한 적당한 방법론을 갖추고 있다. ■ 김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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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변연미展 / BYUNYOUNMI / 卞蓮美 / painting   2011_1111 ▶ 2011_1210 / 일,공휴일 휴관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240×3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1123e | 변연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1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세줄 GALLERY SEJUL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4-13번지 Tel. +82.2.391.9171 www.sejul.com




변연미, 숲을 불러내다 ● 검은 숲은 작가 변연미가 지치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용기를 다해 그려온 유일하고도 특별한 주제이다. 1999년 프랑스에 불어 닥친 폭풍이 망가트린 숲,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로 가득 찬 황폐한 숲, 그때 작가 변연미와 숲 사이에는 일종의 강한 공모의식이 형성된다. 세잔느는 "사람은 자연에 그다지 세심하지도, 성실하지도, 순종적이지도 않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의 열정적인 주제는 셍 빅트와르 산이었다.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200×300cm_2011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200×300cm_2011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200×250cm_2011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250×200cm_2011

자연과 진리 ●"나는 셍 빅트와르 산을 그릴 수도 없고, 그릴 줄도 모르는 채 오랜 시간을 보냈다."라고 엑스 출신의 거장은 말했다. 그는 아주 조금씩 그 무게와 아름다움을 재현해 내었고 셍 빅트와르 산은 그때부터 미술사에 자취를 남기게 된다. 작가 변연미는 나무 몸체를 모래와 접착제, 커피찌꺼기로 두텁게 바르고 칠한다. 세잔느와는 달리, 나무 꼭대기는 화폭보다 더 광활한 높은 곳을 지향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나뭇가지들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색채는 단지 빛의 필터일 뿐이다. 아틀리에에서 현실의 숲은 환상의 숲으로 변모한다. 복잡하게 얽힌 가지들을 지닌 일련의 나무들을 부드럽게 스며든 빛이 안쪽에서 밝게 비추인다. 장면 포착, 빛의 작업, 하늘의 밝음의 강도 등은 기후 현상의 분위기를 표현하는 작가 내면의 감성과 연결된다. 작가 변연미가 거대한 화폭에 그려낸 사람이 살지 않는 숲은 가스파르 프리드리히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을 연상시킨다. 선의 섬세함, 세심하게 표현된 가벼움, 그리고 뎃상의 왕성함 등은 그가 동양 출신임을 미묘하게 드러내준다. 숨이 막힐듯한 황색, 그림자가 드리운 듯한 청색, 비현실을 드러내는 듯한 보라색 등은 유니크 하다. 그녀의 숲, 그녀는 그것을 항상 검은 숲이라 부른다.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150×205cm_2011
변연미_Foret noire_Technique mixte sur toile_130×162cm_2010

신낭만주의? ●이제 그녀는 그녀가 초기에 보여주었던 어두운 단면들, 부러진 선들, 묵시록적인 이미지들과는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숲들은 화폭마다 수직으로 뻗어있고 나무들도 성장한 모습이다. 신비로우면서 신화적인 이런 인적 없는 배경 속에서 영혼은 사방을 배회하는 듯하다. 전체적인 구도는 보편적 감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상과, 자연은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순수한 시적 절제와 억제된 색채로 이루어진 변연미의 낭만주의는 자연에 대한 경의, 감사, 숭배이며 자연에 대한 동일시이다. 자연과 인간 정신 사이의 일체화 된 유대 관계가 엄숙히 확인된다. 작가 변연미의 근작에는 처음으로 수풀과 야생잡초 뒤에 깊숙이 자리 잡은 작은 나무집이 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출현을 예고한다. 최근에 그녀는 특이한 듀얼크롬 작업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숲은 그녀에게 마치 무성영화처럼 친밀하다. 쟈크 모노리의 강렬한 렘브란트 블루를 연상케 하는, 그녀를 깊이 파고드는 신비스러운 차가움, 그것은 겨울이다. 오늘날 그녀처럼 한 예술가가 계속 같은 주제로 작업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데 더더욱 드문 일은, 그녀의 새 작품들 속에서는 어떤 재탄생과 예기치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 일레아나 코르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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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원






정진용展 / JEONGJINYONG / 鄭眞蓉 / painting   2011_1102 ▶ 2011_1126 / 일요일 휴관




정진용_日月五嶽十長生圖_acrylic guache &crystal bead on canvas_145×245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0827k | 정진용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02_수요일_04: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토요일_11:00am~05:00pm / 일요일 휴관

이언 갤러리 EON GALLERY 서울 종로구 팔판동 137번지 Tel. +82.2.725.6777 www.eongallery.kr




락(樂/落)원의 抒 ● 우뚝 솟은 다섯봉우리에 금빛폭포가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로 쏟아진다. 학과 사슴, 그리고 거북이들도 금빛으로 빛난다. 부귀영화, 장수번영의 상징들이 황금빛으로 섞여 노니는 곳, 일월오악십장생도의 세계다. 바로 황금의 낙원이자 권위의 상징이다. 번쩍이는 황룡이 여의주를 물고 근정전의 처마위로 승천한다. 신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안정적일 때 세상은 평화롭듯 군주의 권위가 신뢰를 얻을 때 태평성대는 이루어졌다.
정진용_金龍登天_acrylic guache &crystal bead on canvas_145×220cm_2010

...낙원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수동적이고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낙원은 현세와는 동떨어진 장소처럼 여겨지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초극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곳은 아니다. 창세기복락원이든 아미타극락정토건, 내세적 낙원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의식이 현실을 초월하게 만든다. 이것이 종교의 존립을 위한 필수조건이겠지만 종교적 낙원은 사실상 樂을 위해, 樂만이 존재하는 곳, 그야말로 樂園이다. 물질적 풍요의 낙원에 대한 갈망이 천당과 극락을 금은보화가 넘처나는 곳으로 상상해 내었지만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다만 그것에 있지만은 않다.
정진용_락원1101_墨, acrylic guache&crystal bead on canvas_160×130cm_2011
정진용_락원1100_墨, acrylic guache&crystal bead on canvas_145×210cm_2011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주변의 광기어린 종말의 징후에 대해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익숙해짐은 무관심을 낳는다. 우리가 모른 체하는 동안 인간성의 막장을 드러내는 역겨운 사건들, 아동성폭행, 연쇄살인마, 자살률급증, 영화도가니로 다시 조명된 인화학교의 참상등이 첨단의 낙원이라 여겨지는 고도의 문명사회에서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속에는 돈과 섹스와 마약에 얼룩진 향락의 뒷골목들이 고스란히 감춰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천사의 검은날개와 다르지 않다. 밝음과 어둠, 선함과 악함, 아름답고 추한 것이 뒤섞인 곳은 樂園이자 落園이다. 우리의 낙원은 사실 그런 곳일는지 모른다. 개인의 위기가 사뭇 심각하므로 부정한 부와 자격미달의 권력을 그저 즐기며 사는 자들을 경멸하거나 숱한 부정의 사건들을 우려할 여유조차 없다. 지독스럽게도 이기적인 삶에 자족하며 사는 인간들은 도처에 있다. 좀비의 낙원에는 좀비가 들끓고 돼지의 낙원에는 돼지만이 우글댄다. 아름다운 붉은섬광이 번쩍하는 순간 樂園은 落園으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환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신의 권능과도 같은 불기둥은 소멸과 정화의 상징처럼 타오른다. 우리는 솔직히 한번쯤 이런 것을 꿈꾼다. 권력의 뒤에 숨어있는 얄팍한 줄서기, 대충 눈감아주는 간통과 강간들, 그리고 더러운 합의들과 사기의 달콤한 유혹이 들끓는 세상에 대하여 말이다.
정진용_락원1103_beautiful RED_墨, acrylic guache&crystal bead on canvas_112×160cm_2011
정진용_락원1104_Seoul_墨, acrylic guache&crystal bead on canvas_145×245cm_2011

타락이 몰고 오는 재앙에 대한 이야기는 고대의 문서로부터 현대의 영화예술에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시점에서 인간존재와 인간이 제작해왔던 문명의 구조가 심각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은 신이 빚어낸 인성의 존엄을 타락시키고, 근래에 활발해진 세계각지의 기상이변은 물질의 풍요를 위해 소비한 석탄연료의 부작용 때문이다. 혹은 지난세기 이루어진 수천 번의 핵실험에 우리의 아름다운 초록별이 견디기의 한계를 보이는 것인지 모른다. ● 종교가 세속화 되고 초월의 가치관이 무너지는 극단적인 문명의 시대에 인간의 기능은 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문명의 현실은 낙원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인간을 점점 멀어지게 한다. 인간의 능력이 신의 경계에 진입한 만큼 파괴와 소멸에 대한 공포와 긴장도 신의 수준으로 커졌다. 마치 힌두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에 묘사된 아그네야(Agneya)와 유사한 파괴력의 대규모 살상무기를 현대의 인류는 이미 보유하였다. 불벼락을 내리치는 신의 파괴능력이 인간에게 쥐어진 지금, 파멸의 시계는 막장직전에 멈춰서 있다. 시한폭탄같은 괴멸의 징후는 사실 외면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예견하면서도 외면하며 살아간다. 인위의 구조와 풍요로운 물질위에 세워진 인간의 落園을 樂園처럼 유지하려 애쓰면서 말이다.
정진용_락원1102_落照_墨, acrylic guache&crystal bead on canvas_112×160cm_2011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요, 그렇기 때문에 긴장과 공포 그리고 환희와 절망은 치열한 삶의 엑스터시(ecstasy)를 제공한다. 회계의 끝에 흐르는 통곡의 눈물과 괴멸의 징후를 감지하게 하는 번쩍이는 섬광을 목격하는 순간 시간은 멈춰진다. 위대한 성상앞에서 그리고 종말의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타오르는 장엄앞에서 인간은 숙연해진다. 수호자가 된 성상들의 머리위로 폭격기들이 몰려온다. 타오르는 하늘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부정을 경계하고 욕망을 추스르는 삶의 긴장감은 우리가 그것을 놓지 않을 때 우리를 낙원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이 에덴(Eden)이건 정토(淨土)건 샹그리라(Shangri–La)건, 황량한 늦가을의 서늘한 풍경속에도 누군가 앉아 쉴 벤치가 있다. 아련한 초승달빛이 내리는 사원의 대리석이 은빛으로 빛나고, 저녁나절 호수의 낙조처럼 산자락의 어둠속에도 금빛물결로 빛나는 아름다운 평온은 있다. 밤은 여지없이 찾아오겠지만 아침은 곧 밝을 것이다. ■ 로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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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A SUTRA in SEOUL



에릭 라벨로展 / Erik Ravelo / installation   2011_1110 ▶ 2011_1125



에릭 라벨로_Union of the Scorpion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1:00am~09:00pm

베네통 코리아 서울 강남구 역삼동 662-9번지 F&F EAST 1층 Tel. +82.520.6452 benettonkorea.co.kr



LANA SUTRA in SEOUL ● 베네통 리서치 센터인 파브리카의 쿠바출신 아티스트인 Erik Ravelo 의 Lana Sutra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후 9월 6일부터 일주일간 이스탄불, 밀란, 뮌헨의 베네통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오프닝 파티와 함께 아트, 패션, 그외 각계 셀렙들과 일반인들에게 전시되었다. 총 15개의 이 전시작품들은, 컬러와 울의 조합을 통하여 화합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에릭 라벨로_Suspended Union

베네통 그룹은 이번작품을 플래그쉽 스토어에서 선보이며 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의 소통을 원했다. 베네통만의 독창성, 진정성, 예술에 대한 동경, 그리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패션산업안에서 인터넷 등의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세계적으로 더 넓게 뻗어나가려는 노력 등이 이번 프로젝트의 기획에 배경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베네통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서 베네통이라는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갖고있는 독창적인 이들만의 가치를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했다.
에릭 라벨로_Union of the Magpie

Lana Sutra는 아티스트 Erik의 시각으로 본 Kamasutra (Kama, 즐거움; Sutra, 하나됨의 연결고리인 하나의 가닥) 에 대한 정의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분류한다. 분류의 기준은 언어, 문화, 장소, 가치관, 전통 등 다양하다. 우리는 이렇게 본능적으로 서로를 틀에박힌 카테고리안에 분류하면서 이것을 차이, 다름, 다양함 등으로 이름짓는다. 하지만 Erick의 시각에서 이러한 차이나 다름은 사랑이라는 큰 컨셉안에서 경계를 허물고 하나로 우리를 묶어준다. 사랑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인류는 하나의 인종으로 화합된다는 것이다. Erik은 Lana Sutra를 기획하면서 사랑에 대한 경외와 동등하고 평등한 사회에대한 열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결국, Lana Sutra는 함께 공존한다는것에 대한 재해석이며, 각기 다른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진정한 소통을 통해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각각의 설치작품들은 총 두개의 인간의 형상이 하나로 연결되는 형태를 하고있으며, 그 연결고리로서 베네통 FW시즌에 사용된 다양한 색상의 울 가닥들이 쓰였다. 이 두개의 인간의 형상이 만나는 지점, 또한 두개의 다른 색상의 울 가닥들이 만나서 새로운 하나의 컬러로 표현되는 지점은 진정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없애는것과 동시에 휴머니티, 즉 인류를 하나로 묶어준다는 것을 상징화한다. ● LANA SUTRA IN SEOUL전시에는 아티스트 에릭 라벨로와 아트 팀이 직접 참여하여 작품 설치 및 연출을 진행하며, 또한, LANA SUTRA전시와 함께 베네통 코리아에서 지난 4개월 동안 개최한 United Colors of Photography 캠페인을 통해 선정된 TOP20 작품들이 함께 전시 될 예정이다.

베네통 그룹에서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더 나아가 인류의 하나됨, 즉 화합을 보여주고자 기획된 LANA SUTRA가, United Color of Photography의 다양성을 주제로 한 사진 작품들과 함께 어우러져 어떤 모습으로 공개될지 주목해 볼만 하다. 전시는 베네통 코리아 사옥 1층 갤러리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 베네통 코리아

Vol.20111116j | 에릭 라벨로展 / Erik Ravelo / instal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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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MIND




그 역사와 새로운 재료-국제현대금속공예展   2011_1111 ▶ 2011_1225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110_목요일_05:00pm

참여작가 Alexander Blank_Alissia Melka-Teichroew Andi Gut_Andrea Janosik_Anthony Tammaro Arline M. Fisch_Arthur Hash_Beatrice Brovia Beppe Kessler_Boris Bally_Bruce Metcalf Caroline Broadhead_Constanze Schreiber Daniel Kruger_Daniela Hedman Daniella Kerner & Stanley Lechtzin Donald Friedlich_Ela Bauer_Emiko Suo Esther Knobel_Fabrizio Tridenti Felieke van der Leest_Ford and Forlano Francisca Kweitel_Gijs Bakker_Ineke Heerkens Iris Bodemer_Iris Eichenberg J. Fred Woell_Jane Adam_Jennifer Trask Jiri Sibor_Joan Parcher_Joyce Scott Kai Chan_Karin Seufert_Karl Fritsch Katja Prins_Kiwon Wang_Lam de Wolf Leonor Hipolito_Lucy Sarneel_Lydia Hirte Maria Hees_Nadene Carr_Nel Linssen Noon Passama_Nora Fok_Nuntaka Nopkhun Pat Flynn_Ramon Puig Cuyas_Robert Ebendorf Ruudt Peters_Sam Tho Duong_Shari Pierce Suska Mackert,Atelier Ted Noten_Thomas Hill Tiffany Parbs_Uli Rapp Verena Sieber-Fuchs_Yoko Izawa

주최 / 성곡미술관 기획 /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 진행 / 왕기원(게스트 큐레이터)

관람료 어른 및 대학생(20~64세)_3,000원 / 학생(초, 중, 고교생)_2,0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할인 * 65세이상 어르신, 7세 미만 어린이는 무료입장 * 장애인, 국가유공자는 단체관람료가 적용 * 2관 전시 관람료 별도 * 도슨트 설명 매일 2회 (2시, 4시) * 단체는 사전에 전화문의(T.02.737.7650)

관람시간 / 10:00am~06:00pm (종료 30분 전 매표 마감) / 월요일 휴관

성곡미술관 1관 SUNGKOK ART MUSEUM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82.2.737.7650 www.sungkokmuseum.com



지난 50년은 금속공예디자인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시기였다. 카페트 밑에 숨겨둔 귀중하기만 했던 전통적인 장신구의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능과 의미가 재고되었다. 여기에 금속세공업의 발달은 장신구를 하나의 예술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하였다. ● 몸의 치장을 위한 오브제들은 역사가 기록되는 최초의 시기부터 세계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화였다. 권력을 부여하거나 사회적인 지위와 부(富)의 상징물로서, 또는 개인적인 치장을 위한 쥬얼리로서 장신구는 우리가 누구이고 어느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접어들어 장신구는 장신구적인 근간과 하나의 상징적인 역할을 넘어 특성이나 재료, 기술 또는 디자인 어느 것에든 한정되지 않고 하나의 창조적인 예술의 한 분야가 되고 있다. 이 변화는 귀중함을 중요시하는 전통보다는 지적 개념이 더욱 더 가치가 있었던 20세기 후반에 집중적으로 활동한 결과이다. 기계 대량생산되었던 장신구 제작은 다시 작가들 작업실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업실은 훨씬 더 광범위한 예술적인 활동과 미적 가치관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세계 각지에서 제작된 장신구는 착용자와 관람객 모두에게 예술과 장신구에 관한 기존 관념을 버리기를 요구하였고, 이렇게 대립, 해결, 그리고 화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예술의 장을 열게끔 만들었다. ● 현대 장신구 컬렉션은 1950년대 이래 장식구가 하나의 예술장르로써, 그러나 소수의 전문가들 외에는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발전해왔음을 보여준다. 이 분야의 전문가이자 박물관장인 프리츠 파크(Fritz Falk) 말에 따르면, 소수의 활동 중심지를 시작으로 다양한 나라들 그리고는 전 대륙을 넘어서서 개인적인 활동이 자리잡게 되고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제는 금세 공인들도 조각가나 화가들과 같이 인간의 몸을 치장하기 위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그들의 작품이 예술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장신구는 착용자에게 정체성과 소통을 나타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장신구는 디자이너, 고객, 그리고 카운셀러까지 모두가 관심을 갖고 대화를 통해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또 심도 깊은 토론에 참여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독일 서남부의 포르츠하임 예술학교 (Kunst-and Werkkunstschule Pforzheim)의 오랜 총장인 카를 셜마이어(Karl Schallmeyer)는 1974년 그의 책에서 새로운 장신구를 'Ornamentum humanum'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장신구 예술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오려는 노력도 꾸준히 할 뿐만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예술적 발달에도 뒤쳐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술적 장신구는 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소재에 대한 추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가들의 관심을 받고 그들을 사로잡은 지향 중 하나였다. ● 현대에 들어서서 고가의 재료의 독단적인 사용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되었다. 대신에, 인조 합성수지나 목재, 가느다란 강철, 철, 세라믹, 유리와 방직물과 같은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금, 은, 플래티넘, 값비싼 옥석이나 진주를 완전히 대체하여 아름다운 조합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특유의 매력보다 재료적인 가치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 않았던 원석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또, 우연히 찾아진 물체들은 혼합되었었는데, 많은 장신구들은 물체라는 형태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장식적 기능이 무시된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장신구의 장식적인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존의 기능을 넘어서는 연구가 연이어 실행되고 있다. 장신구라는 예술 형태는 이렇게 작가들의 창의성과 예술을 향한 대중의 관심으로 인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예술적 명성은 이미 널리 인정받은 상태에서, 앞으로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 이번 전시는 현대 장신구의 역사와 새로운 재료를 그려내기 위해 엄격히 선정된 국제적인 작가들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다양한 국가로부터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세계적인 관심을 일으킬 것이다. '오픈 마인드' 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는 현대 장신구의 역사와 새로운 재료들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뿐 아니라 일반 대중과 미술관 관람객들의 교육에 큰 이바지를 할 것이다. 현대 금속공예전시가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현상을 찾기 힘든 이 시점에서, 이번 전시가 현대 장신구 예술의 장에서 큰 역할을 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 왕기원
Caroline Broadhead_Necklace-veil_nylon_1982

캐롤라인 브로드헤드 (Caroline Broadhead) ● 지난 40여 년 동안, 나의 작업은 장신구, 의류와 같이 사람과 관계된 오브제들을 아울렀다. 나는 오브제가 몸에 밀착되는 것, 오브제가 몸에 닿아 공간을 차지할 때의 감각, 그 경계와 모서리, 존재와 부재, 그리고 물질성과 이미지 사이의 균형이 창조되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장신구 작품들은 이를 착용하고 벗는 행위, 그로부터 파생되는 잠재적인 동작, 작품을 착용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의 외연의 변화를 포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드로잉, 사진, 3차원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보다 큰 크기의 작품들은 주로 건물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으며(Breathing Space 2005, House of Words 2009, Still Light 1999), 다른 작품들은 안무가 엔젤라 우드하우스(Angela Woodhouse)와의 공동 작업으로서, 공연을 위한 디자인을 포함하고 있다(Sighted 2009, Censored 2010, Between 2011, The Waiting Game 1997). 작품들 모두 섬세하고 열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는 한편, 보는 이로부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 캐롤라인 브로드헤드
Lam de Wolf_Gardenhose Bracelet_plastic_1978

램 드 울프(Lam de Wolf ) ● 그녀의 작품들은 1970년대 B.O.E*(bond van obloerege eddelsmeden, jewelers in revolt, 저항하는 금속세공인들)(*1974년에 설립된 이 그룹은 기존의 질서에 반대하고 보다 자유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던 네덜란드 금속세공인들의 집단이었다.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잉글랜드와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으며, 많은 후배들이 이 그룹의 운동을 추종하였다.)의 느슨하고 자유로운 스타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네덜란드 틸버그에 소재한 Audax Textile Museum으로부터 임대되었다. "일상의 사물들을 고유의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서 이를 변형하고 새로운 차원을 부여하는 것, 이를 통해 내 작품이 발현된다. 1980년, 나는 '착용 가능한 오브제'라는 용어를 작업에 도입하였다. '입을 수 있는'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는 반기득권적이고 반자본주 의적인, 또한 예술적이고 사회적인 성명을 표하고자 했다. '입을 수 있는 오브제'를 착용하는 것은 특별하고도 도전적인 일이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기에 스스로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오브제들은 몸에 걸침으로써 육체를 재건축하는 구조가 될 것이며, 벽면에 걸리거나 어딘가 배치되어 전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램 드 울프
Maria Hees_Necklace Tulip_1991

마리아 히스 (Maria Hees) ● 마리아 히스의 장신구 작품들은 유기적이고 완곡하게 굽은 외양을 띠는 한편, 매끄럽고 현대적인 만듦새로 마무리 되어 있다. 나무, 고무, 도자기, 가죽 그리고 금·은을 사용해 산화시킨 알루미늄 같은 재료들을 결합한다. 그녀는 1970년대 네덜란드에서 매우 독창적이었던 디자이너 그룹 B.O.E에 속해있었으며, 정원용 호스로 팔찌 시리즈를 만드는 등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였다. 현재 마리아 히스의 작품은 미국의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이 소장하고 있다. 마리아 히스는 장신구, 오브제, 그리고 가방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매우 적극적이다. 그녀는 소재의 적용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재료를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히스는 전통, 또는 여타 표준에 의거한 생산방법에 따르는 제약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것과 맞섬으로써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자유를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을 착용하는 이들의 자유로움 역시 가능케 하는 것이다. 히스는 이 같은 작업을 비교적 작은 규모로, 그리고 오직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직접 제작하기를 고집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 안에서 작가는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 마리아 히스
Ruudt Peters_Collars_steel plaster_1984

루트 피터스 (Ruudt Peters) ● 1970년도 초, 네덜란드의 개념주의 장신구 아티스트 루트 피터스는 맥락, 내구성, 재료 그리고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경계를 넘어 장식품의 전통적인 정의에 도전했다. 네덜란드 장신구 예술의 선도자로서 피터스는 네덜란드인 다운 표현 양식을 보여주었다. 예술가로서 그는 현대 장신구 예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게리트 리엣벨드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ie)와 스톡홀름 콘스트팩 미술공예 대학(Konstfack Univ ersity of Arts and Crafts)과 같은 유럽의 일류 대학들에서 2009년까지 교수로 활동하였다. 피터스는 현재 이태리 피렌체에 있는 알키미아 현대 장신구 예술학교 (Alchimia Contemporary Jewell ery School)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워크숍, 전시, 그리고 강의는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70년대서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은 계속 발전해왔다. 그의 선구자적인 면모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다양한 문화들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현대의 대표적인 재료들을 사용하는 혁신으로부터 드러난다. ■ 루트 피터스
Esther Knobel_Snail Brooches_titanium anodized, reused tin can, stainless steel, titanium, wire_1980

에스더 크노벨 (Esther Knobel) ● 그녀의 모든 작품에서는 "high medium"과 "low medium"사이의, 때때로는 반어적이고 흥미로운 긴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고급문화와 최신문화 사이, 복잡함과 간단함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유사하다. '높은' 것과 '낮은' 것 사이의 이중성 또는 긴장감이 그녀의 작품을 포함한 대부분의 20세기 장신구 디자인 중심 주제이다. 장신구의 본래 개념과 가까운 것은 'high'이겠지만, 그녀는 'low'와 온전히 갈라선 'high'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 이중성은 1980년도 초에 만들어진 소용돌이(달팽이) 브로치 시리즈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브로치들은 매우 복잡한 산화공법(아노다이징)을 사용해서 티타늄으로 만들어졌다. 금속 표면의 장신 패턴은 금빛의 사탕 포장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염색이나 조이기 기법(납땜 등 열을 사용하지 않은)을 포함해 공업 생산의 초기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공정들을 차용하였다. 장미 브로치는 마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크노벨 대표작이다. "이 브로치는 내가 베자렐 아카데미 (Bezalel Academy)에서 진행했었던 작업 중에 만든 작품이다. 당시 주어진 주제는 '친구를 위한 장신구'였다. 우리는 공감하고 베푸는 태도와 행동이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해 보았다. (서로에 대한) 관대함을 확장시켜 나간다는 맥락에서, 학생들은 나에게 이 '숙제'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옷깃에 다는 카네이션의 기본적인 형태을 본떠서 성별, 나이, 그리고 취향을 초월하는 브로치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이 브로치 시리즈는 계속 만들어지게 되었다." 통제, 그리고 통제의 결핍이란 주제가 이 창조적인 과정의 핵심이다. 그녀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표현이 통제와 의도가 없을 때 더욱 약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몇 번이고 놀라곤 했다. 또 통제가 부족한 작업실은 한마디로 진정으로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는 유토피아이기에 순수하게 이상적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곳을 창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고 이 갈망을 지속할 수 있을까? ■ 에스더 크노벨
Felieke van der Leest_Emperor Penguin Freddie with Polar Bear Claw Necklace_ (Object with ring), plastic animal, textile, gold, cubic zirkonia_2005 Felieke van der Leest_Gusz Goosz_14kt gold, glass beads, plastic animal, topaz_2006

펠리케 반 더 리스 (Felieke van der Leest) ● 펠리케 반 더 리스에게 동물은 각별한 존재이다. 그녀는 많은 동물들에게 바쁜 일상생활의 모습을 부여해 작품으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 몇몇에게는 미술관 안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오브제든 가벼운 부착물이든, 장신구의 규모나 기능은 그녀에게 영감을 주지 못하였다. (작품을 통해)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것이 그녀가 작품을 제작하는 주된 동기이다. 그녀는 직물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장신구 디자인을 더 다채롭게 했다. 여기에 금, 은, 플라스틱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반 더 리스는 10년에 걸쳐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에멘 (Emmen)에 있는 동물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 그리고 스쿤 호벤(Schoonhoven)에서 배운 세공사 교육이 그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반 더 리스의 상상력은 암스테르담의 리엣벨드 아카데미 (Rietveld Academy)에서 꽃을 피웠다. 주로 한 손에 담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이에게 거대한 설치 작품들을 제작했다는 것은 사실상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많은 전시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암스테르담, 뉴욕, 도쿄에 위치한 갤러리들을 통해 개인들과 미술관들이 소장하는 경우도 잦다. 재미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예상치 못한 진지한 이슈를 내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환경과 동물을 비롯해 현시적이고 사회적 문제들을 다양하게 다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새로운 작품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행복을 주고자하는 열정이야 말로 반 더 리스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동기이다. ■ 펠리케 반 더 리스
Arline M. Fisch_PINK & SILVER CIRCLES_Machine knit coated copper wire with fine silver crochet edges_2005

아일린 피쉬 (Arline M. Fisch) ● 아일린 피쉬는 스키드모어 대학(Skidmoore College)에서 우연히 직조 수업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이를 인연으로 헤이스택 마운틴 학교(Haystack Mountain School)에서 계절학기로 직조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직조물의 역사가 주는 매력에 빠지게 되었는데, 특히 프리-콜럼비안 (Pre-Colombian ) 옷감은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일린 피쉬는 금속을 뜨개질로 엮어 만든 공예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70년에 직물과 편물 기법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를 금속공예에 적용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금속공예직물기법 (Textile Techniques in Metal for Jewelers)'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런던으로 거주를 옮긴 후 그녀는 직조기법과 플레이팅, 크로셰 뜨개질, 그리고 순은, 구리, 놋쇠, 수지로 레이스를 짜는 방법에 대해 조금 더 탐구하였다. 이 연구는 과학자, 디자이너, 그리고 기술자들과의 관계를 친밀히 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산업 디자인과 관련 기술들은 직조물의 무게가 균형을 이루게 하기 위해, 또 그 내구성을 위해서 3차원적 형태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직조구조에 대해 배웠고 이를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기능이나 착용감을 저해시키지 않고도 부피감을 유지하면서 장식적인 완성도를 도모할 수 있었다. "나는 항상 인체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장신구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나는 작품을 착용한 사람이 행복해지고 스스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개인용 장신구들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내 작품들은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프리-콜럼비안 문화에 대한 연구들로부터 가장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고대 문명의 문화들로부터 나는 작품의 제작 방향, 디자인적 대범함, 그리고 기술적인 정보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보다 큰 크기의 목걸이, 가슴 장식, 그리고 머리와 팔 장식품 위주로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엮고 짜는 제작 과정은 작품들로 하여금 보통의 금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지닌 유연한 성격을 지닐 수 있도록 해준다." ■ 아일린 피쉬
Joan Parcher_Graphite Pendulum

조안 파쳐 (Joan Parcher) ● 1983년, 나는 오하이오주의 에리 호수와 클리브랜드 옆에 있는 레이크우드에 거주했었다. 나는 호수 바로 옆에 위치한 어느 공원에 드나들기를 즐기곤 했는데, 이 공원은 물이 조각해낸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기이한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긴 자갈해변이 있었는데, 내가 이 해변을 거닐 적에는 자갈들이 평소에 내는 으드득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발밑의 자갈들은 너무나도 부드럽게 느껴지기만 했다. 자갈을 한 움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조약돌과 같은 모양과 크기의 알루미늄이 자갈과 함께 섞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이 바로 내가 첫 작품 "펜던트 추(Pendulum-Pendants)"에 썼던 흑연을 수집한 곳이었다. 흑연은 케이크나 원통형 모양으로 물가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몇 개의 흑연은 굉장히 연하고 미끄러울 정도로 부드러웠는데, 개중 몇몇은 거친 표면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지금 나는 로드아일랜드에 거주하고 있다. 1984년도에 이곳으로 이사했는데, 미국 독립전쟁 중에 여기에서 흑연광산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사실임이 틀림없다. 언젠가 어떤 언덕 아래 쇼핑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라 하여 절벽 끝 바위가 파헤쳐졌었는데, 나는 그 바위를 구경하러 답사를 갔었다. 바위는 매끄럽고 회색빛이 돌았으며, 미끈거리는 촉감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그 바위에 높은 양의 흑연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발견한 흑연 조각들을 가지고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연구를 해오다가 그것들로 장신구를 만들게 되었다. 흑연의 성질은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광택이 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연필에서 발견하는, 비단같이 부드러운 검은 탄소였던 것이다. 잘 번지고 쉽게 닳는 성질을 이용해서 장신구로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흑연은 접촉하는 거의 모든 것에 자기만의 자국을 남긴다. "흑연 펜던트 추(Graphite Pendulum- Pendants)"를 착용할 때에는 흑연의 흔적을 남기도록 하기 위해 옷에 문질러지도록 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초승달 모양의 까만 얼룩이 옷 위에 새겨지게 된다. 이 자국은 착용하는 사람마다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흑연 펜던트 추"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을 때까지 차츰 닳다가 없어진다. ■ 조안 파쳐
Ramon Puig Cuyas_N 601 from the Series Archipelago_silver, wood, paper, glass, gold, garnet, found objects_1988

라몬 푸위 쿠야스 (Ramon Puig Cuyas) ● 그의 작품은 다른 부호들을 결합시키고 의미를 변형시키는 콜라주 기법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신비하고 수수께끼 같아서, 마치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그리고 현실 또는 공상을 연출하는 연극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섬의 군집을 비유한 작품 시리즈는 대양, 항해, 방향 그리고 수평선을 묘사하는 동시에 거대한 공간과 지형을 제시하고, 우주와 대자연의 조화를 언급하면서 넓은 하늘과 깊은 우주의 개념을 제안한다. 해변에서 발견되는 플라스틱, 유리, 조약돌의 파편들은 지나간 세월,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진 조각, 그리고 기억의 속삭임으로서 다가오게 된다. 작가는 이것을 새로운 현실, 즉 그만의 시적인 세계에서 재구성하게 된다. 각 구성 요소들은 마치 우주에서 바라본 하나의 풍경처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배치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이 구조는 다양한 가능성을 표현하는 역동성을 가져야 한다. 채색된 목재와 금속 구조는 그에게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창작의 자유로움을 선사한다. 그는 그의 브로치를 만들 때, 마치 폴리네시안 도표가 그러하듯 기술적인 단순성을 활용하여 상징적으로 도표화 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에게 창조하는 행위는 여행과 발견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자 또는 예술가는 탐험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어디서 왔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의 여정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아무런 계획이나 프로젝트도 없이 작업을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고 계획을 세우다가 구성을 시작할 때에도 즉흥적인 것이 좋다. 방향키를 잡는다, 북쪽, 남쪽, 서쪽, 동쪽... 그러면서도 기억의 중요성에 중점을 둔다. 이 브로치 시리즈들은 도표나 나침반과도 같지만, 추억을 담은 성스러운 유물함이기도 하다. 여행하며 그린 스케치북의 각 페이지들과도 같다. 이는 방랑과 유목(노마디즘)을 말하는 것이다." ■ 라몬 푸위 쿠야스
Suska Mackert_WRAPPINGHOOD_site-related work,gold leaf_2005

수스카 맥커트 (Suska Mackert) ● 맥커트의 작품은 하나의 설치작업으로서 '위성 전시'의 일부분이다. 그녀는 게리트 리엣벨드 아카데미 (Gerrit Rietveld Academie)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작품은 장신구와 관련된 다양한 고려 사항들을 염두에 둔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예술의 전위 또는 그에 대한 사유를 적용함으로써 만들어진다. 1997년부터 그녀는 착용 가능한 '장신구'를 거의 제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진적으로 하나의 현상으로서의 장신구, 우리의 삶에서 장신구가 가지는 역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장신구의 중요함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하면서 우선적으로 찾아 나선 것은 '경계'였다. 멕커트는 장신구를 고립되고 자립적인 형체로 경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녀는 장신구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메커니즘의 지표로 여긴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녀는 장신구(쥬얼리)의 보다 넓은 지평을 추구하고 있다. 그녀가 유용하는 매체는 사진, 비디오, 설치, 문구, 그리고 프린팅이다. 그녀의 작품은 기능성을 추구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탐구나 조사와도 같은데, 이는 작품의 최종 형태가 기능성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비록 장신구가 무엇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인습적 견해가 무시되지는 않지만, 반대로 이를 입증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장신구 문화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전통은 그녀가 작품을 만드는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 그녀의 작품 속 오브제들, 문서들, 그리고 설치물들은 어떠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 하나의 물건에 대한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현재 장신구 예술의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는 움직임이다. 특히, 그녀는 공식적 의례나 사회적 행사에서는 좀처럼 인지되지 않는, 심지어 숨겨지기까지 하는 현상에 눈을 돌린다. 그녀의 작품에서 장신구는 절대적인 목표 그 자체가 되지는 않는다. 대신 세상을 이해하고 항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녀의 작품이 무심히 지나가던 관람객의 참여를 불러들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작품 설치에서 메케트는 금색 잎을 스텐실 기법으로 문질러 만든 글을 쇼윈도 앞에 적어 넣는다. 바닥에는 "반질반질한 표면의 재료들은 빛을 반사하는 반면, 다른 곳에서 빛은 완전히 흡수된다" 라고 쓰여진다. 시간이 지나면, 금색 레터링은 바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쇼윈도 앞을 서성이던 고객(관람객)들의 신발 밑창에 박히게 될 것이다. 문자로 새겨진 금색 잎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그 부분 부분이 관람객의 발길로 옮겨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연구하고 관심을 기울인 '움직임(movement)'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몸이 아닌 신발 밑창에서 장신구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의미에서는 금색으로 물들여진 이 신발들이 결국 카르티에를 착용하고자 하는 관람객의 환상을 무의식적으로 충족시켜준다고 볼 수 있다. ■ 수스카 맥커트
Alissia Melka-Teichroew_Jointed Jewels_3D Printed: Selective Laser Sintered Polyamide_2008

알리시아 멜카 테이크로우 (Alissia Melka-Teichroew) ● 자기 자신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도중, 알리시아 멜카 테이크로우는 잘 알려진 디자인 자문회사 IDEO에서 디자인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고 퓨마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세계 이곳저곳을 넘나들었던 아우르는 알리시아의 경험은 그녀의 디자인적 유동성과 유창성에 녹아들어 있다. 가장 최신의 디자인 혁신과 재료들에 익숙한 그녀는,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과 장난기를 함께 서 작품에 불어 넣는다. 일종의 관절로 연결된 장신구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유기적인 것과 산업적인 것, 기능적인 것과 장식의 조합을 상징한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에는 복잡하고 분리된 요소들을 새로운 유형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는 흔히 자동차나 엉덩이 뼈 관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볼 조인트'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분리된 부분들로 조립된 볼 조인트를 하나의 구성 요소로 만들겠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SLS(selective laser sintering 선택적 레이저 소결)기술을 사용함으로써, 그녀는 구 안에 구를 만들어 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자동차에서 볼 수 있었던) 산업적인 접속 기술은 미와 경이로움의 오브제를 만드는데 이용되게 되었다. 깔끔하고 혁신적인 이 장신구 컬렉션은 이와 같은 획기적인 개념을 토대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각 작품들은 동일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언뜻 복잡하게 조립된 물체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한번에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이다. 더구나 여러 단으로 배열된 목걸이들은 관절과도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모든 연결된 조각들은 3D로 프린트된 구형 관절 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과정으로 만들어지며, 똑같은 DNA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 알리시아 멜카 테이크로우
Katja Prins_Cocoonbrooches_silver+ silk cocoons_1999

카트자 프린스 (Katja Prins) ● 작품을 통해 프린스는 기구와 기계로서의 인간의 신체, 신체의 연장으로서의 기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의 정신의 연장선인 신체는 변화하거나 향상되곤 한다. 작가는 인체와 기계적 장치, 그리고 의학기술과 산업의 친밀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인가? 작가는 이 시대에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상호작용에 대해 사유해보고자 한다. ■ 카트자 프린스
Ted Noten_Ice cream girl 1 high_nylon 3D print_2009

테드 노튼 (Ted Noten) ● 나의 디자인은 현대의 일상, 장신구의 역사,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제품 디자인에 대한 비평으로서 역할한다. 또한 내 작품들은 건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근본적인 동시에 계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작품의 주제는 기존의 관례와 습관화 과정에 도전하는 것이다. 나는 진부한 것들과 고착화된 것들 안에 머무는 고정된 의미를 찾아 나선다. 나는 그 본질을 폭로한 후에, 재발명의 과정을 통해 이를 현실로 다시 되돌리고자 한다. 그 상정적인 가치를 오염을 시키고 영향을 가하는 동시에, 나는 사실상 그것들이 인지될 수 없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 테드 노튼
Alexander Blank_Tank_textile, silver, plastics_2006

알렉산더 블랭크 (Alexander Blank) ● "2006년 내가 첫 작품을 작업할 당시, 나는 작품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구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꽃 무늬 침대 시트처럼 부드럽고 안정적인 것과 탱크처럼 폭력적인 것을 합쳐보고 싶었다. 이 둘의 오묘한 조합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한 집에서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요즘 들어서 나는 작품들 간의 또 다른 조합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두 개의 탱크들을 곁에 놓은 후 서로 다른 위치를 부여했을 때 두 탱크가 어떤 관계를 구현할 것인지 실험해보는 것이다. 마치 싱글인 두 사람이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다. 함께 있는 둘은 서로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꽤 아름다운 모습이 되겠지만, 둘은 서로의 공격에 방어할 준비 역시 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소재가 주는 약하고 여린 느낌과 탱크라는 아이콘이 주는 강한 힘의 대비가 있다. 유머러스한 감수성 안에 날카로운 관점 또한 포괄되어 있는 것이다. 블랭크가 이미지와 개념을 다루는 방법에는 문화적인 배경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예쁜 침대 시트를 덮으며 편안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폭력 가득한 전쟁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역설적인 게 있을까? ■ 알렉산더 블랭크
왕기원 (Kiwon Wang) ● 나의 작품들은 "동양이 서양을 만나다"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한다. 종이는 은과 만나고, 버려지는 것들이 소중한 것들과 만난다. 나는 재료와 형태의 도발적인 결합을 통해서 이 모든 만남과 접촉을 찾아 나선다. 진주와 신문지를 함께 사용하고, 금을 입힘으로써 21세기의 장신구의 역할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진주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진주는 조개의 고통을 통해 세상에 나오지만, 가장 아름다운 빛을 가지고 있다. 진주의 이 역설적인 면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작품에 쓰게 되었다. 이는 약간의 대조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동시에 뜻밖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또한 나는 버려진 것 안에서 발견되는 소중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작품을 만드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대조, 긴장, 존재와 부재,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며 인체를 장식하는 오브제의 범주에서 동양의 전통적 경계와 서양의 현대적 경계를 시험한다. 내 작업은 동양인으로서 서양에서 살면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신문이 하루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듯, 나의 작품들은 내 삶의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잉크와도 같다. 이런 이유로 내 작품에 신문을 사용할 때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의 이름를 반영해) 'NY Times'를 쓰고 있기도 하다. 나는 내 자신을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장신구를 만들고 착용한다. 이 작품들은 내 생각들을 표현하고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도구들, 바로 내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펜과 잉크이다. 내 장신구들을 통해서 내 삶의 이야기를 관람객과 공유하고자 한다. ■ 왕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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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Within the City




2011_1112 ▶ 2012_0115 / 월요일, 1월1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111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아브라함 크루스비예가스(Abraham CRUZVILLEGAS) 나일라 다바지와 지아드 비타(Nayla DABAJI and Ziad BITAR) 알리시아 프란코비치(Alicia FRANKOVICH)_에밀 고(Emil GOH) 정진열+안창모(Jinyeoul JUNG and Changmo AHN)_정연두(Yeondoo JUNG) 애쉬 키팅(Ash KEATING)_김범(KIM Beom)_이주영(Jooyoung LEE)_임민욱(Minouk LIM)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_앤드류 맥쿼터(Andrew MCQUALTER) 파트타임스위트(Part-time Suite)_서현석(Hyunsuk SEO)_양혜규(Haegue YANG) 준양(Jun YANG)_윤수연+고진영(Suyeon YUN and Jinyoung KOH) 총 17명(팀)

기획 / samuso:_거트루드 컨템포러리 주최 / 아트선재센터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_캐나다예술진흥원_서울문화재단_금천예술공장 아츠 빅토리아_호주국제문화협의회/호주외교통상부_호한재단

입장료 / 성인 3,000원 / 학생 1,500원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1월1일 휴관

아트선재센터 ARTSONJE CENTER 서울 종로구 감고당길 43(소격동 144-2번지) Tel. +82.2.733.8945 www.artsonje.org/asc

사무소 samuso: 서울 종로구 화동 137-5 Tel. +82.2.733.7067 www.samuso.org



대부분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오늘날, 도시생활은 현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삶과 연관된 정치와 경제, 문화의 모든 패러다임들이 도시에서 탄생하고 전개되고 변형되었다가 때로는 소멸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변화의 속도가 빠른 도시 중 하나인 서울은 한국 전쟁 이후의 재건과 근대화 과정을 통해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이후 1970-80년대의 개발 정책으로 인해 예전의 도로나 건물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며 오늘날까지도 급속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보다 나은 삶의 환경을 제공하는 동시에 기억과 경험 속의 장소들이 사라지는데서 오는 심리적, 정신적 불안감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도시의 물리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 등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변화가 나타나는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제도나 관습은 사라진 공간-장소의 부재와 더불어 가치관의 변화 혹은 소멸을 가져온다. 한편 근대의 개발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의 등장은 도시 개발상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가능토록 했으며 이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현재의 모습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미래를 그려간다. 도시는 시대를 반영하고 그 시기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의 도시 안에서 도시화의 여러 가지 양상을 볼 수 있으며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도시들에서 공통된 이슈를 발견하기도 한다. 도시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은 도시화에 따른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문제점과 대안을 공유하며 이상적 도시로의 발전 가능성을 모색한다. 『City Within the City』전은 이러한 도시의 변화 속에서 발생하는 균열과 마찰에 주목함으로써 그 표면 혹은 이면에서 일어나는 겹겹의 움직임들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도시'라는 환경을 다시 돌아보고, 나아가 도시공간을 보다 창의적인 탐구와 도전을 가능케 하는 대안적인 현장으로 바라보기 위함이다. ● 본 전시는 우리의 경험과 이해,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들에 주목한다. 전시의 면면은 정부주도의 획일적인 도시개발과 성장정책, 그리고 이로 인해 등한시되어온 도시의 다양성과 자생력 등의 이슈들을 포함한다. 더불어 인류가 환경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살펴보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안적 가능성을 탐색하도록 할 것이다. 전시는 도시의 다양한 층위와 역사, 그리고 미래상에 대한 고찰을 전제로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17명(팀)의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구축된 환경으로서의 도시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조망하고자한다. 전시는 아트선재센터 라운지를 비롯해 2층과 3층에 걸쳐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의 이슈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소개된다. 그래픽 디자이너 정진열과 건축사학자 안창모는 한국 전쟁 이후 1970-8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그 개발상을 돌아보는 공동 작업을 진행하며 서울의 청계천과 한강을 배경으로 하는 김범과 임민욱의 영상 작업, 그리고 멕시코 시티의 아후스코(Ajusco)라는 특정 지역의 지역성을 다루는 아브라함 크루스비예가스의 작품이 선보인다. 리슨투더시티는 아트선재센터 라운지에서 '전국 개발 관광 여행사'와 '관광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여 청계천, 내성천 등 개발 지역을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편 전시는 전시장 외부로 이어지는데 파트타임스위트는 아트선재센터 인근의 사무소의 차고를 점유하는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다. ■ 아트선재센터

1. 아티스트 토크 - 2011. 11. 12(토) 오후 5시/ 알리시아 프란코비치, 애쉬 키팅, 앤드류 맥쿼터 - 2011. 11. 19(토) 오후 5시/ 아브라함 크루스비예가스 - 2011. 12. 17(토) 오후 5시/ 윤수연 - 장소 :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사전예약 press@samuso.org)

2. 이주영. 함께 걸으면서 수다도 떱시다: 정동 챕터 - 2011. 12. 11(일) 오후 2시 - 4시 (출발지 : 덕수궁 대한문) - 참가비 5,000원 (사전예약 press@samuso.org)

3. 리슨투더시티. 개발관광여행상품 1) 서울투어: 청계천 녹조 및 명동 개발 현장 - 2011. 11. 12(토) 오후 2시 - 4시 (출발지: 청계천 소라탑) - 참가비 5,000원 (사전예약 parkeunseon@gmail.com) 2) 서울투어: 한강 르네상스 - 2011. 12. 3(토) 오후 2시 - 4시 (출발지: 뚝섬역) - 참가비 5,000원 (사전예약 parkeunseon@gmail.com) 3) 4대강 투어 : 내성천 - 2011. 12. 10(토) 오전 8시 - 오후 8시 (출발지: 조계사) - 참가비 30,000원 (사전예약 parkeunseon@gmail.com)

4. 리슨투더시티. 글쓰기와 드로잉 워크숍: 남한이 상상하는 북한 - 2012. 1. 7(토) 오후 4시 - 장소 : 아트선재센터 라운지 (사전예약 parkeunseon@gmail.com)

5. 리슨투더시티. 도시영화제 - 2011. 11. 18(금) – 11. 20 (일) 5pm - 2011. 12. 16(금) – 12. 18 (일) 5pm - 장소 : 아트선재센터 한옥 (입장료 5,000원)

6. 파트타임스위트. 비디오상영회 - 2011. 11. 26(토) 오후 6시 : 비디오 패치워크 / 참여작가 강정석, 김혜원, 심래정 등 - 2011. 12. 22(목) 오후 6시 : 비디오 패치워크 오픈 콜 / 상영 비디오 모집 및 문의 parttimesuite@gmail.com - 장소 : 사무소 차고

김범_3개의 세계(에셰에 의한, 청계고가도로, 1/13/97 5:00-5:20am) Three Worlds(after Escher Chunggye Skyway 1/13/97. 5:00-5:20 a.m.)_1 channel video_00:06:35_1997
에밀 고_에밀고/에밀 고 emilgoh/Emil Goh_photograph, mycy series_37×150cm_2006
아브라함 크루스비예가스_자동건축:리소스룸 Autoconstruccion:Resource room_Courtesy of the artist and kurimanzutto_Mexico City_Photograph: Estudio Michel Zabe_가변크기_2010
리슨투더시티_강이 도시가 된다 Rivers become cities_poster for tourism on the 4rivers_Listen to the City_Autumn_2011
정연두_남서울 무지개 Southern Rainbow Seoul_photo installation_가변설치_2011
준양_서울 픽션 Seoul Fiction_super_16 mm film transferred to HD video, color, stereo sound, approx_00:15:00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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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 but Fluid

홍성철展 / HONGSUNGCHUL / 洪性哲 / installation   2011_1109 ▶ 2011_1126 / 월요일 휴관


홍성철_String hands 0065_print on elastic strings in a steel frame_120×200×15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25a | 홍성철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인 GALLERY IHN 서울 종로구 팔판동 141번지 Tel. +82.2.732.4677~8 www.galleryihn.com


이 글은 2011년 개인전에 제시될 홍성철의 근작들에 대한 가능한 한 상세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헤아려 보는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전작들에 대한 검토는 불가피하다. 2011년의 근작들은 제작태도, 형식, 의미 모두에서 전작, 특히 2007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먼저 홍성철의 근작들이 선 형태의 가는 줄(실)들을 위/아래로 평행하게 이어 붙여 만든 것이라는 데 주목하기로 하자. 작가는 철로 만든 프레임의 위/아래에 구멍을 뚫고 그 사이에 가는 줄(string)을 연결한다. 그 행위가 무수히 반복되어 100개의 줄이, 1000개의 줄이 연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들의 형태는 현악기-이를테면 하프의 외양과 닮았다. 그 가는 선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홍성철_String hands 0700_print on elastic strings in a steel frame_52×80×8cm_2011
홍성철_String hands 0736_print on elastic strings in a steel frame_120×120×15cm_2011

기본 단위를 어떤 체계/규칙에 따라 반복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홍성철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제작 방식이다. 예컨대 이 작가는 신문지를 겹쳐 하나의 덩어리(mass)로 만들거나 -「Heavy Bag」(1994), 「Red Wash」(1995), 천정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수많은 실들을 입방체 형태로 제시하거나-「White Cube」(2000), 「Green Cube」(2002), 점등하는 작은 직사각형 셀(solar cell)들을 벽면에 기하학적 형태로 배치하는- 「Perceptual Mirror Blinker」(2007) 작업에 몰두해왔다. 주목할 점은 대부분의 경우(특히 2000년 이후)에 부분(기본단위)은 전체 형태 속에 파묻혀 사라지기보다는 독자성을 지니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전체도 가시적이지만 부분(단위)들도 가시적이다. 달리 말하면 홍성철의 작업은 관객들에게 전체를 보라고 요구하면서 부분도 보라고 요구한다. 관객 입장에서 작품 가까이에서 부분을 볼 때는 멀리 떨어져 전체를 보고 싶어지고, 전체를 볼 때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부분을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있다. 그것은 부분들의 미세한 움직임/떨림이다. 부분(단위), 또는 부분들의 결합은 어떤 움직임(효과)를 창출한다. 가령 「White Cube」에서 기본 단위는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가늘고 가벼운 실이다. 가늘고 가볍기 때문에 그것은 주위 환경의 작은 변화에도 반응하여 움직인다(떨린다). 좀 더 정확히 그 움직임/떨림은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기에 그 움직임들/떨림들이라 해야 한다. 「Perceptual Mirror Blinker」에서 그 떨림들은 작은 셀들의 반짝임들이다. 여기에 더해 작은 단위들의 반복으로 인해 우리 지각 수준에서 야기되는 착시 효과들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착시 효과는 「String Mirror」로 통칭되는 근작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어떻든 부분들/부분들의 조합들이 창출하는 움직임(효과)는 앞서 언급한 부분-전체의 왕복운동을 좀 더 역동적으로, 보다 리드미컬하게 만든다. 즉 부분을 확인하고 전체를 본 다음 이 양자를 (지적인 수준에서) 연관짓는 일이 아니라 차라리 부분과 전체의 상호작용에서 창출된 어떤 리듬을 타는 일이 부각될 것이다. 언젠가 윤두현이 지적한 바 "누구나 작품 앞에서 서면 춤을 추듯 움직이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홍성철_String hands 0915_print on elastic strings in a steel frame_120×220×15cm_2011
홍성철_String hands 1284_print on elastic strings in a steel frame_160×100×15cm×3_2011

다시 말하건대 이렇듯 리듬을 타는 일(춤추듯 움직이는 일)은 고정된 실체 하나하나를 파악하고 인지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부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인식하는 일이 아니라 그 비결정적, 순간적 관계(효과들)에 반응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홍성철의 작업을 감상하는 일은 음악을 듣는 일과 유사하다. 音과 音의 결합에서 창출되는 박자와 리듬을 타는 일. 홍성철의 근작에서 그것은 줄과 줄의 관계에서 창출되는 리드미컬한 분위기와 흐름을 타는 일이다. 또는 음악에서 다음 순간 사라져 버릴 소리를 지각하듯 홍성철의 작업에서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하지만 곧 사라질 양태들을 지각한다. 그리고 다시 보면 그 줄의 배치는 악보의 그것과도 꽤 닮아있다! ● 이제 관심을 이미지/그림 수준으로 돌려보기로 하자. 거기에 어떤 이미지/그림이 있는가? 일단 근작들의 직접적인 선례라 할 수 있는 2007년 인 갤러리 개인전에 선보인 작품들을 되짚어 보기로 하자. 이 작품들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는 (줄들 위에 프린트된) '손'의 이미지다. 그것은 어떤 손인가? 내게 그것은 '연주하는 손'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하프'의 줄을 타는 연주자의 손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로서의 (고무)줄은 이미지 또는 환영(illusion) 수준에서 현악기-하프의 줄/현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양상을 염두에 두고 다시 2007년 작들에 제시된 손 이미지를 보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다. 그 배면에 또 하나의 손이 있다. 그것은 두 번째 층(layer)에 프린트된 손 이미지다. 그 손은 첫 번째 층에 등장하는 손과 유사하지만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 배면에 또 하나의 층이 있고 거기에 또 다른 손 이미지가 있다. 거기에는 많게는 10겹 이상의 중층적 손 이미지가 겹쳐 있다. 즉 이미지 수준에서도 "기본 단위(여기서는 손 이미지)를 어떤 체계/규칙에 따라 반복 배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는 홍성철 특유의 구성방식이 관철되고 있다. 이미지 수준에서 이러한 구성방식은 어떤 효과를 자아내는가? 일단 미래파 작가(Giacomo Balla)의 '연주하는 손' 이미지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층의 겹침을 통한 이미지의 중첩은 정지된 평면에 가변적 움직임(또는 시간적 경과)을 나타내는 특단의 방식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손 이미지 하나하나를 파악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손 이미지들의 겹침에서 야기되는 움직임(효과)에 반응하는 일이다.
홍성철_Solid but Fluid展_갤러리 인_2011

요컨대 홍성철의 2007년 '손 이미지' 작업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음악적인 수준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이 작품들은 시각적인 것의 청각적인 것으로의 전환에 관계한다. 볼프강 벨슈(Wolfgang Welsch)가 지적한대로 시각적인 것이 항구적,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관계한다면 청각적인 것은 일시적이고 덧없고 사건적인 것에 관계한다. 때문에 청각적으로 된다는 것은 '조사, 통제, 확인'이 아니라 "순간적인 것에 대한 예민한 집중, 일회적인 것에 대한 지각, 사건에 대한 개방성"을 추구하는 일이 된다. 반대로 시각적으로 된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객관화하기 위해 뒤로 물러남(거리두기)을 추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시각과 청각의 교
2011.11.11 15:21:11 / Good : 411 + Good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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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1114 ▶ 2011_1116





Opening Party / 2011_1114_월요일_07:00pm_VJ & DJ show

참여작가 이재형 Lee jae hyung_박사강 Sakang Park_박진훈 Park jin hoon_심상미 Sangmi Sim 김찬희 Chanhee Kim_신은희 Eunhee Shin_이미랑 Mirang Lee_이하늘 Haneul Lee 박종원 Park jong won_김태원 Kim tae won_임수연 Lim soo yeon_권현경 Kwan hyun kyung 이의영 Eui Young Lee_한예서 Ye-seo Han_김영무 Kim young moo

기획 / 이현진 Hyun Jean Lee

후원 / 한국콘텐츠진흥원_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Play Makers Workshop_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

관람시간 / 11:00am~11:00pm

플래툰 쿤스트할레 PLATOON KUNSTHALLE 서울 강남구 논현동 97-22번지 Tel. +82.2.3447.1191~7 www.kunsthalle.com



새로움의 추구, 혁신적 실험성을 전면으로 표방하지 않고도 오늘날 미디어아트가 하나의 예술 범주 안에서 그 가치와 기능을 타 예술 장르처럼 수행하고 또한 기존의 전통적 예술에 대한 취향과 감각을 지닌 이에게도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위해서 오늘날 미디어아트 교육과 연구가 함께 추구해 가야 할 디테일과 미학적 태도는 무엇일까? 이번 전시는 "Re:play"라는 제목 하에 이러한 질문의 연장선상에서 '예술 안에서의 놀이', '예술을 통한 놀이'를 탐험하고자 기획되었다. 인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놀이(play)'는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움직임과 반응을 통해 재미와 어울림을 경험하는 신체적 활동이자, 장난감 혹은 같이 노는 상대와의 상호작용적 어울림의 과정으로서의 인식되어 왔다. 또한 놀이는 그 자체가 '유희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접근될 때, 위와 같은 신체적이고 상호작용적인 경험의 과정을 통해 어떠한 인지적 이해와 깨달음을 얻는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해 정서적 감동과 공감의 차원으로도 확대될 수 있는 고도의 정신적인 유희의 과정까지로 확대되어 접근될 수도 있다. Johan Huizinga가 정의 내리듯 놀이(play)가 창조하는 공간이 상상력을 통한 만드는 하나의 '별세계 공간(the magic circle)'이라고 한다면, 미디어아트를 통해 경험될 수 있는 놀이란 어떠한 별세계 공간(the artistic magic circle)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Re;play』는 이러한 놀이의 다양한 접근과 해석의 결과물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 이현진
이재형_BENDINGMATRIX_LED, 합성수지_100×60×80cm, 설치_2010


led 매트릭스라는 디지털 매체를 구부리고 휘는 과정에서 조형적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Through bending LED matrix as a digital media, I'd like to express formative emotions.

박사강_I am complete entity_12 boxes/ 1 box_44×75cm_2009 박사강_The Masterpiece_단채널 비디오_00:12:35_2010 박사강_I have Confidence_단채널 비디오_00:06:42_2011


총 4개의 주제(꿈, 열정, 사랑, 감사) 메시지를 통해 '나의 존재가 곧 완전한 존재' 라고 선언한다. In this work big 4 themes (Dream, Passion, Love, Grateful) I am proclaiming that "My actual presence is the intact entity itself." 이 방송은 2020년에 Artertainer 박사강의 이야기가 담긴 토크쇼 「The Masterpiece」입니다. The Artertainer Sakang Park is broadcasted at this program 「The Masterpiece」 at 2020. 이 영상에서의 과거, 현재, 미래는 상호 불가침적인 종적 시간 개념이기보다는 횡적인 공간 개념에 가깝다. In this work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is akin to horizontal space, rather than vertical time concept.

박진훈_Docent_디지털 사진_105×84cm, 105×84cm, 설치_2011


작품 외부 해석의 개입은 바라봄의 인과관계를 통해 연계된 사물, 사람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들까지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The possible interference of an art piece, when externally biased interpretations are involved, often obscures the real meaning of the subjects, humans, and their spirits as the result of observation.

심상미_Quelle belle Heures 어떤 희한한 시간들_사운드 설치_920×1829×300mm_2011


문 뒤의 공간은 당신의 상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무한의 공간이다. The space behind the door, which can vary depending on your imagination is infinite space.

김찬희, 신은희, 이미랑, 이하늘_풋풋풋풋_단채널 비디오_2011


노는 게 별 건가요? 노는 게 별 거지죠./ 여기, 여기 좀 봐요./ 그래, 그러니까요. foot fun foot fun./ foot fun foot fun./ 우리 모두 걸어요./ 우리 모두 춤춰요. anything to play?/ nothing to play./ hey, look at me./ hay, that is it. foot fun foot fun./ foot fun foot fun./ walk with us all./ dance with us all.

박종원_내 등을 보았다._2채널 디지오, 2 아날로그 TV sets_2011


실제 설치TV 두 대의 거리감은 영상 속의 두 명의 내가 겪는 한계일 뿐 아니라 우리가 쫓고자 하는 욕망과 현실과의 거리감을 표현하고자 한다. the distance between two televisions installed is expressing not only a limit of two egos of mine going through on the screen but a distance between the reality and the desire we pursue.

김태원, 임수연, 권현경_THEROCHARE_In Quest of Utipia_Installation Game_2011


당신은 1984년 런던의 전체주의 사회에 당원으로 속해있으며, 당신의 모든 행동과 사상들은 당의 규제(텔레스크린)을 통해 감시되고 있다. 당신은 그곳에서 사랑하는 여인 줄리아와 함께 자유를 찾고 싶어 한다. 당신은 유토피아를 찾기 위한 Journey(여정)을 나서는데, 제시한 test를 통과 해야 당신은 당에서 탈출하여, 영웅이 될수 있다. Play '1984' is the interactive storytelling game based on George Owell's novel "1984", a political novel written with the purpose of warning people in the dangers of totalitarian government. In this story, Party(Big brother) witnesses every citizen through telescreens and manipulates individual's thoughts by force. The purpose of this game is helping Winston(main character) who wants to challenge against Party's authority to find Utopia with Julia(his love) throughout his journey.

이의영_Conversation Window_interactive installation, 2 touch monitors and etc._2011


창문에 입김 불어 글씨를 쓰는 과정을 통해 예전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체험해 볼 수 있는 설치 작업이다. 또 자신이 쓴 글씨를 다른 위치에 놓인 두 개의 같은 창문을 통해 서로 공유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만의 추억을 다른 사람들과 서로 공유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추억놀이의 형태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This is an interactive installation that allows us to draw messages on the window by blowing on it and to recall our memories as well. Moreover, we can share the messages through the two identical windows placed on the opposite side. So through this work, we can share our personal memories with others while creating a new form of play.

한예서_낯선방문(Knocking From Weird)_마주보는 스크린 dvd 플레이어 2기, 프로젝터 2기._2011


동시간대 일어난 동일한 서사를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설치작품. 관객들에게 시점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다른 의미의 interactivity를 구현해보고자 한다. It is an Installation of the same episode of the same era. It is offering various perspectives for the viewers to reach a new meaning of interactivity.

김영무_Horror House__mixed media, a monitor, sound equipment_2×2×2m_2011


본 작품은 확장되고 뒤엉킨 공간을 경험하도록 하는 새로운 형태의 실험 설치물이다. New type installation which is to be experienced in expanded and twisted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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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흔 傷痕

백유경展 / BAIKYOOKYEUNG / 白侑庚 / painting   2011_1115 ▶ 2011_1130 / 월요일 휴관


백유경_제 때 처리되지 못하고 남겨진 시선_캔버스에 유채_91×72.7cm_2011

초대일시 / 2011_1115_화요일_06:00pm

관람시간 / 12:00pm~08:00pm / 월요일 휴관

플레이스막 placeMAK 서울 마포구 연남동 227-9번지 1층 Tel. +82.17.219.8185 www.placemak.com


칼로 살을 찌르면 아프다. 가장 순수한 표피를 얻어내기 위해 겉에서부터 칼을 들이댄다. 한 겹씩 날을 세워 벗겨내다 보면 고통도 미진해지고 얻고자하는 살도 온데간데없어진다. 결국 벗기는 행위에 미쳐 남는 것 없이 자신을 소진하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진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완벽함을 지향했으나 시들어버린 살의 파편인가, 아니면 벗겨짐에 따른 고통과 후에 맞이하는 허무감인가. 결과가 어찌됐건 둘 다 감각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자는 시각적 만족을, 후자는 촉각적 가학을 충족시켜줄 뿐이다.
백유경_귀울음으로 인해 텅 비어버린 곳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1
백유경_잘못 전달될게 뻔한 이미 떠난 마음_캔버스에 유채_116.7×91cm_2011
백유경_교묘한 욼음_캔버스에 유채_145.5×112cm_2010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 진짜에 대해서 탐구했다. 작가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았고 스스로 탐구의 여정에 들어갔다. 실험의 용도로써 캔버스에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고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가 겪는 고통은 강했다. 완성된 자화상에서 진짜의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작가의 고통은 더 커져갔다. 그로인해 술을 진탕 먹은 채 그림을 그리고 그때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어두기도 하였다. 이 모든 과정이 효과가 있었을까? 괄목할만한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필을 잘 깎고 싶어 손에 너무 힘을 주다보면 흑연이 나와 버리듯 작가는 스스로 생살 파는 짓을 지속했다.
백유경_소화되지 못할 시큼털털한 것들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백유경_끝없이 빨아들이기만 하는 녀석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고백하건데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작가를 엿 먹이고 싶었다.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진짜만을 담고 싶어 하듯 나 또한 서문에 진짜만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쓰고 또 써 봐도 전부 거짓처럼 보이고 이 전시에 서문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무능력한 인간이라는 관념에 빠졌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잠식되었다. 진짜를 얻고 싶어 한 노력이 나를 오히려 가식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무의식에 의해 행해져야 할 모든 것이 의식으로 조종될 때의 끔찍한 상황을 자초한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기 폭력(self-violence)이었다. 진짜를 위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축출하는 행위. 이 때문에 나는 작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선택되어지지 않은 나머지 모습들이 자연스레 상상된다. 그리고 도리어 그 모습을 작가로부터 이끌어내고 싶은 욕구에 빠진다.
백유경_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들떠버린 노랑마음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정렬하고 다시 그림을 바라본다. 작가의 그림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존재는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진 자들이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자들이 그림 이면의 층위에 달라붙는다. 바로 이것이 그림으로부터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이유이며 그림을 본 뒤에도 끈적끈적한 점성이 눈앞에 남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전시하고자 한다. 단일 작품만이 아닌 수합된 작품들의 나열만이 아닌, 개별 그림과 그림을 연결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작가의 개인사가 가늠되길 바란다. 연결된 작품들 사이에 그려지는 드라마를 관객 나름대로 상상해 볼 수 있다면 그 또한 멋진 일이리라. ● 작가가 개인의 역사를 캔버스에 기록했다면 전시는 기록의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정돈하여 제시하는 또 다른 층위의 기록이다. 그 기록의 단편들이 관객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지기를 바란다. ■ 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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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sive Pessimist


정진갑展 / JEONGJINGAB / 鄭珍甲 / sculpture   2011_1116 ▶ 2011_1121


정진갑_몽상1_합성수지, 연필, 아크릴채색_58×31×20cm_2011_부분

초대일시 / 2011_1116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82.2.736.1020 www.insaartcenter.com


본인이 작업하는 인체 형상 작업은 폭력에 노출되어 트라우마를 가진 인체 형상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는 본인의 폭력적 트라우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에서 시작하여 인체 형상에 대한 시각적 모티브이자 시대를 불문하고 현존하는 가정 내 폭력을 주제화 하고 있다. 사회에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물리적 힘의 우위자인 남성들은 상대적 약자에 대한 지배 의식이 본능적으로 내재되어있다. 이런 의식은 한 남성의 의식 전반에서 무의식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만날 경우 극단적 행동인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정진갑_몽상1_합성수지, 연필, 아크릴채색_58×31×20cm_2011
정진갑_꼬마 반항하다_합성수지_60×15×13cm_2011
정진갑_후회_합성수지_60×17×15cm_2011
정진갑_몽상2_합성수지, 연필_22×15×20cm_2010
정진갑_untitled_합성수지, 펜_62×10×20cm_2010

이처럼 사회 내에서 발생되는 폭력은 아동의 정서적 형성에 커다란 외상적 트라우마를 형성하며, 현대인들에게 무차별하게 노출되어 있는 대중매체의 무수한 시각적 폭력성 또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상대적 약자인 아동시기에 폭력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화로 정서적인 불안기인 청소년시기에 상대적 약자에 대한 과거 권력자의 동일시를 이루게 된다. 이런 사회적 문제는 현재 청소년들의 집단체계가 일인 권력자에 대한 치밀한 피라미드 형태를 만들고 있다는 문제점에서도 시사되고 있다.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는 반복적 학습을 통해 종래에는 과거 약자에서 강자에 대한 동일시를 이루게 되어 과거의 폭력자와 같은 폭력성을 유발하게 된다. 즉 인간의 방어적 성향과 공격적 성향은 항상 불가분의 관계이며, 시대를 불문하고 끊이지 않는 인간 본연의 폭력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런 폭력적 트라우마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본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 정진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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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11


안인경展 / ANINKYONG / 安寅京 / painting   2011_1116 ▶ 2011_1122


안인경_150 - 721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160×10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80514g | 안인경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16_수요일_06:00pm

2011 미술공간現 기획展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주말_11:00am~06:00pm

미술공간현 ARTSPACE HYUN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B1 Tel. +82.2.732.5556


디자인 도시 서울, 성형도시 서울 ● 『111-111』展에서 보여지는 서울의 모습은 '익숙한 풍경'인 동시에 '낯선 풍경'이다. 닭장 같은 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고층빌딩숲은 현관문만 열면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는 정이 들만할 때 쯤이면 낡고 오래된 건축물들은 헐려 사라지고 주변에는 새로운 건물들만 우후죽순 생겨나 금새 낯선 풍경으로 변모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도시화의 특성은 '성형수술'과 닮아있다. 디자인 서울이라는 명목 하에 끊임없이 개발되어지는 서울은 마치 끊임없이 성형수술 받기를 반복하여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생경함만 지니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서울의 특성을 착안하여 이를 화폭 속으로 끌어 들였다.
안인경_137 - 965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160×100cm_2011
안인경_121 - 720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116×91cm_2011

'111-111'이라는 전시 타이틀과 숫자로 조합된 모든 작품의 제목은 우편번호 형식을 띄고 있다. 예를 들면 '137-965'라는 작품은 현재의 강남 삼성전자 빌딩과 과거 강남역 일대의 모습을 겹치게 배치하고 삼성전자 빌딩의 우편번호를 제목으로 삼았다. 작품의 주요 소재로는, 서울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혹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을 선정하였다. 서울의 주요 건축물을 소재로 한 작업 외에도 경기도 일대의 아파트를 소재로 한 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전시작 중 서울을 그린 다수 그림들과 더불어 경기도 신도시를 그린 그림이 전시된 것은 서울의 도시화가 경기도까지 확산되어,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안인경_135 - 270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116×91cm_2011
안인경_135 - 280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72.7×60.6cm_2011

작가는 한국화를 전공하였다. 그래서 먹은 비교적 사용하기에 익숙한 재료이다. 예전 작품들을 보면 종이에 먹으로만 그려진 그림들이 다수 있었다. 그런데 계속 도시 혹은 아파트라는 소재를 고집하여 반복해 그리면서도 사회적 환경과 시간의 흐름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자연스레 바꾸어 놓았다. 어떤 사유를 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소재에도 다른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작가의 변화하는 감성과 생각들을 표현하기 위해선 먼저 재료가 주는 제약에서부터 탈피하여야 했다. 예전 그림에서 일례를 들면, 차갑고 딱딱한 아파트를 그리면서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따뜻함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밝고 따뜻한 조명이 켜진 창문을 표현하여야 했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다른 재료의 필요가 절실해졌다. 이를 계기로 현재의 다채로운 전시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작가의 대상에 대한 인식 변화와 다른 의미의 부여가 다양한 재료, 색상, 그리고 재질감이나 입체감까지 변화를 주게끔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활용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보다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동일 지역의 현재의 도시모습은 유채색으로, 과거는 무채색으로 채색되었고, 주안료로는 아크릴 물감이 이용되었다. 작가가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 한국화의 배접(褙接) 기법을 이용하기 때문에, 분채(粉彩) 등 수간채색(水干彩色) 물감으로 채색한 후 작가의 기존 작업방식으로 그림위로 물기 있는 붓질을 올리게 되면 이미 그려진 물에 약한 물감들이 밀려나거나 지워질 수 있다. 그래서 물에 쉬이 지워지지 않고 덧발라지는 붓질에도 비교적 표면접착력이 강한 아크릴 물감이 이용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나서 현재 그림 밑에만 폼보드를 덧대어 높이를 만들어가며 과거그림 위에 붙여주면 화판에 요철이 생긴다. 그 위에 현재의 도시 그림에만 바니쉬를 발라 광택을 주면, 과거와 현재 그림에 재질감의 차이까지 생기게 된다. 또한 드로잉할 때에 볼펜을 사용된 것은 그 느낌이 창틀 등 차가운 철재 느낌을 표현하는데 보다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높낮이가 다른 조각난 풍경들을 교차하여 붙이기를 반복하면서 작품은 완성되어진다. 채색된 현재의 건축물들 사이사이로 과거에는 존재하였다가 사라져버린 무채색의 건축물들이 보여진다.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같은 지역의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되어 보여지는 효과와 이로 인해 왜곡되어 보이는 착시를 기대한 것이다. 마치 깨진 거울 혹은 균열이 있는 얼음장 위에 반영된 형상처럼, 작품 속 서울은 조각조각 오리고 이를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안인경_135 - 808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80×140cm_2011
안인경_111 - 111_장지에 폼보드, 혼합재료_180×1400cm_2010

서울은 지금도 계획적 도시화라는 성형수술을 받고 있다. 과거는 없고 현재만 존재한다. 익숙함은 없고 언제나 새로움만 남는 것이다. 도시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울에서 과거라는 시간은 부재한다. 우리는 그러한 시간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111-111'이라는 우편번호가 우리의 현주소를 가리키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작가는 현재 우리사회에 만연한 도시화 현상을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문제의식을 제기하였고, 이를 보고 어떠한 생각과 감정으로 해석할지는 보는 이의 몫이다. ■ 구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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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ent image




강정헌_이예린展 2011_1115 ▶ 2011_1225 / 월요일 휴관



강정헌_Nowhere (La Palma Ave, CA, United States)_Hand colouring over an aquatint_60×100cm_2009


초대일시 / 2011_1115_화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갤러리 비케이 Gallery BK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비케이 Gallery BK 서울 용산구 한남동 657-155번지 1층 Tel. +82.2.790.7079 gallerybk.co.kr



latent image: 저 너머 세계의 통로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이런 알리바이 속에서 형이상학은 생겨나고 유지된다. -레비나스,「전체성과 무한」에서 ● 진정한 삶에 대한 의문은 우리에게 저 너머의 세계, 이 세계와 다른 곳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 하는 것을 통해 또 다른 현실에 다가가려고 한다. 상투적인 일상에서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경험들의 진부함은 다른 일상을 꿈꾸게 하며,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일상에 머물러 있다.
강정헌_Nowhere (Santa Monica Beach, CA, United States)_Hand colouring over an aquatint_45×60cm_2009

기억, 현실, 그리고 비경계 ● 스치듯 바라본 일상은 바라봤던 기억 속의 이야기들이 흔적을 남기며, 조용하게 갇혀있던 일상의 찰나가 펼쳐진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일상과 풍경의 모습은 시시각각 다르다. 다양한 현상들이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시간'이 아닌 '시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일상을 인식한다. 개념이 내재된 사물의 사유는 하나의 실존적 규정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의성을 가진 일상은 다양한 사유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강정헌_Overflow (Haebangchon, Seoul, Korea)_Aquatint_60×90m_2006

이번 전시는 누구나 보고, 경험하는 '일상'의 모습을 작품으로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된 작품을 통해 내재되어 있는 일상의 모습을 포착한 작가의 다양한 내면의 이야기를 함께 사유하고 경험하며 소통한다. 작품에 대한 의미와 분석을 어떠한 담론과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본다' 라는 일차적인 행위를 통해 느껴지는 감수성과 이해에 대해 논하며, 예술의 내러티브는 담론으로 해석하기 보다 보는 이의 규정으로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강정헌_Overflow (New york, United states)_Hand colouring over an aquatint_50×90cm_2008

전시 제목인 「latent image(레이튼트 이미지)」는 잠상이라는 뜻을 가진 카메라 용어로 현상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이라는 뜻을 가진다. 감춰진 일상의 모습, 지각하지 못한 풍경들이 작품을 통해 보여진다. 그리고 우리는 문득 낯설어 보이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때론 데자뷰처럼 무의식에 처음 바라본 풍경이 익숙한 풍경으로 각인되기도 하고, 시선의 파편들을 재구성하며,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의 '시선'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일상에서 잠재적 실재, 존재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한 풍경, 존재하지 않을 듯 하지만 존재하는 풍경을 담아내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상의 풍경을 서정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는 강정헌 작가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고찰하는 이예린 작가가 참여한다.
강정헌_The universe_Hand colouring over an aquatint_60×90cm_2011

강정헌은 여행과 일상에서 본 풍경과 생각을 자신의 카메라 속에 담아 놓고, 후에 판화를 통해 그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동판화의 에퀴틴트(aqueatint) 기법을 사용하며 기억의 이미지를 그리고, 작업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작가가 느낀 일상의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다. 동판화의 기법인 에퀴틴트는 판을 여러 차례 부식시켜 생긴 층의 음영과 질감을 통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부식에 의해 생긴 여러 층의 깊이 차이는 부드러운 음영과 질감을 가능케 하여 수채화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초기 흑백으로만 표현되었던 그의 작업은 후에 채색까지 더해지며 자신의 시선을 완성시키고, 감상자의 서정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이예린_매디슨 스퀘어 파크_람다 프린트_74×101cm_2009

그의 작업 주제는 크게 일상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작게 도시와 풍경으로 나뉜다. 어찌 보면 동일하면서도 다른 작가의 주제는 기억과 인식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그의 「overflow(오버플로우)」 작업은 단편적인 일상의 도시 풍경의 이면의 모습들을 담고 있다. 일상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본 일상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인식한 풍경은 현실과 비현실 그 어디쯤에 있는 듯 하다.
이예린_붉은 하늘 녹아내리듯_캔버스에 유채_53×65cm_2010

그의 또 다른 작업인 「Nowhere(노웨어)」 시리즈는 여행을 다니면서 보았던 풍경들을 판화로 담고 있다. 여행 후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여행의 모습은 사진에만 남아 있다. 사진에 담긴 기억이 낯설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긴다. 판화로 찍은 후 채색된 이미지는 빛 바랜 기억을 담고 있으며, 아날로그적 감성이 숨어있다. 작가는 자신의 시선과 기억이 교차시켜,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다. 일상의 재현은 작가의 솔직한 감성이 묻어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일상의 경험을 깨닫는 순간을 마련한다.
이예린_소호에서_람다 프린트_59×76cm_2009

「After the Rain(애프터 더 레인)」 사진 연작으로 잘 알려진 이예린은 실제와 허구에 대해 반문한다. 작가는 비 온 후 길에 생긴 물웅덩이에 반사된 일상의 이미지를 통해 분리되어 공존하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 미쳐 지각하지 못한 세계가 시야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식 너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해 갈망한다. 실재하는 현실과 변화하는 현실 그리고 실재하는 비현실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그녀의 작업은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다. 다가갈 수 없는 물에 비친 일상의 모습이 되려 지각하지 못하는 현실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작업은 영상, 설치 작품을 통해 끊임 없이 야기되며, 이는 회화작업으로도 이어진다.
이예린_창덕궁_람다 프린트_127×95cm×3_2009

이번 전시에는 사진 작업과 함께 회화 작품도 선보이다. 실재하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주제는 회화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 꽃병의 그림자방」, 「한 의자의 그림자방」의 회화 작품은 사진에서 느끼지 못하였던 가상의 실재가 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나아가 물질의 존재와 실재에 대해 이야기 한다. ● 깔끔하게 프린트 되어 있는 사진 작업이 다가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힌 문이라면, 리드미컬하고 자유로운 붓 터치의 회화 작업은 실재 세계에 다가가는 통로가 된다. 사진과 또 다른 느낌의 표현감성을 회화 작업 안으로 가져오며 작가의 세계는 한층 더 정립되어 보인다. 특히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한 푸른 하프시코드가 있는 그림자방」는 가상의 세계에 한발 더 다가간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은 지극히 현실에 있는 순간이 작품으로 옮겨져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며, 우리가 보지 못했던 일상의 단면들이 표현을 통해 새로운 사유를 시도한다.
이예린_푸른 하프시코드가 있는 그림자방_캔버스에 유채_116×90cm_2011

공존하는 풍경 ● 내가 보는 것, 다른 이가 보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 또 다른 일상과 풍경이 존재한다. 잠재되어 있는 표면은 이미 실재하고 있는 것이며,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현실화 된다. 실재에 대한 가치판단이 작용되기 전에, 지표 없이 바라본 세상의 시선은 확장된다. 작가의 표현은 자유로워지고, 보는 이의 해석은 다양해 진다.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그 시각들이 작품을 통해 교차되는 순간 일상의 이미지 전환이 시작된다. 바깥세상이라는 현실은 일상적 경험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사유하고, 우리는 현실의 존재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실재에 대한 감수성 차원에서 저 너머의 세상을 갈망하며, 이 안의 세상과 소통한다. ● 어쩌면 우리의 삶이 자연과 상호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일상에 대한 사유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관계들 속에 있기에 미쳐 인식하지 못한 일상의 또 다른 단면에 대한 사유는 우리의 시각과 관계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존재하는 사물의 내적인 표면을 읽어내어,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을 표현한 그들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작가가 바라본 세상을 함께 바라 본다. ■ 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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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 IN A POINT OF TIME




서민정展 / SEOMINJEONG / 徐旼廷 / sculpture.installation 2011_1116 ▶ 2011_1216 / 일,공휴일 휴관



서민정_SUM IN A POINT OF TIME_installation, expanded polystyrene, steel cable, nylon cord, ca_2011


초대일시 / 2011_1116_수요일_06:00pm

2011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_10:00am~06:00pm / 일,공휴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번지 B1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순간의 총체 ● 하얀색의 집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흩어진다. 파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지해있다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얽혀 언제든 다시 본래의 형상으로 돌아갈 듯하다. 서민정은 사회적 의미와 상징성을 가진 모든 대상들을 전시장 안으로 가지고와 무색의 재료로 재현한다. 실제의 사물들이 축소되어 사실적인 모형으로 재탄생된다. 하지만 그 사물은 곧 파괴되고 파편화 되어 공간에 흩뿌려진다. 그녀의 작업에서 보이는 이러한 창조, 유지, 파괴의 행위들은 아름다운 하나의 순환 과정이다. 파괴하기 위해 창조를 하고 파괴했기 때문에 창조를 한다. 창조는 선이고 파괴는 악이 아니다. 긍정과 부정의 이항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창조와 파괴는 유기적인 순환이고 합일논적 의미이다. 힌두교에서 창조의 신 브라만,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는 삼위일체(Trimuriti)인 하나의 존재이다. 즉 창조, 유지, 파괴는 순환의 의미를 넘어 상보적인 것이다.
서민정_SUM IN A POINT OF TIME_installation, expanded polystyrene, steel cable, nylon cord, ca_2011

사물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 형상은 그 사물의 상징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사물을 해체시켜 형상을 지우고 나면 그 사물들은 물질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형상을 벗어난 물질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순간의 총체」작업 시리즈에서 사물들을 복제하고 재현하는데 있어서 하얀색의 폼을 사용한다. 「The remains」시리즈 작업에서와 같이 색이 없는 무색의 재료를 사용한다. 하얀색은 순수한 백지를 의미하며 무념무상의 여백을 제공한다. 이 공간은 해체라는 폭력적 행위에 미를 침투시킬 수 있는 여분이 되고 파괴에 대해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서민정_SUM IN A POINT OF TIME_installation, expanded polystyrene, steel cable, nylon cord, ca_2011
서민정_SUM IN A POINT OF TIME_installation, expanded polystyrene, steel cable, nylon cord, ca_2011

그녀에겐 창조와 해체는 하나이다. 파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조이다. 창조도 아름답지만 파괴도 아름답다. 「순간의 총체」작업에서 폭발되어 분열된 사물의 파편들은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의 한계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파편들 간극의 중용은 그녀의 작업을 바라볼 때 관객들로 하여금 그녀의 작업이 폭발이 아닌 수축일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폭발은 파괴이지만 수축은 또 다른 창조를 의미한다. 다양한 파편들이 퍼져있는 순간의 설치전경에는 생성과 소멸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그 구분이 모호해진다. 양자역학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시공간을 넘어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서로 얽혀있는 동시성의 합일 수도 있다. 창조, 유지 파괴는 순간의 총합으로 하나인 것이다.
서민정_SUM IN A POINT OF TIME_installation, expanded polystyrene, steel cable, nylon cord, ca_2011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_『잡아함경 』 서민정에게 생성과 소멸, 창조와 파괴, 삶과 죽음은 하나이다. 합일논적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주역에서 말하는 대대성(對待性)의 세계관이다. 선과 악, 밝고 어두움, 환희와 두려움의 구분은 사라진다. 서민정은인간과세상의모든것들의의미를그녀만의방법으로바라보고타자에의해규정되는관념적정체성들을해체시킨다. 유한의 영역을 무한의 영역과 연결시켜 생성과 소멸의 본질을 이해하려하고 있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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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s with Arario 2011_Part 2




2011_1117 ▶ 2011_1231 / 월요일 휴관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김한나_이동욱_이지현_이진용_한성필 가오레이_미야오샤오춘_에코 누그로호 탈루 L.N_아리아디티아 프라무헨드라

기획_아라리오 갤러리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청담 ARARIO GALLERY SEOUL CHEONGDAM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82.2.541.5701 www.arariogallery.co.kr



『Artists with Arario 2011_Part 2 』가 2011년 11월 17일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청담에서 열린다. 본 전시는 지난 9월 아라리오의 새로운 공간인 청담점을 오픈하며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던 Artists with Arario 2001_Part 1에 이은 두 번째 개관전이다. ● 지난 1부에서 아라리오와 함께하는 아시아 현대미술의 주요작가 30여명 중 9명의 작가가 선보였다면, 이번 2부에서는 아라리오 갤러리가 역점을 두고 있는 이동욱, 김한나, 가오레이, 에코 누그로호와 같은 새로운 아시아 미술을 선도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 30여 점이 대거 선보인다.
김한나_보고싶어 Miss you_캔버스에 유채_73×60.5cm_2008

김한나 는 상상 속 친구이자 작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토끼와의 일상을 유화, 드로잉, 조각, 애니메이션들로 표현한다. 이들 작품들은 마치 그림일기처럼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된다.
이동욱_I know everything_혼합재료_20×15×17cm_2010

이동욱 은 정교한 극사실적 묘사와 초현실적 환상이 응축된 미니어처 인간 개체들을 통해 부조리하게 설정된 상황들을 충돌시킨다. 이들 작품들에서 일상은 음산하지만 서정적인 호러로 탈바꿈된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참혹함, 문명과 야생,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교차된 그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외부로부터 단절된 인간이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해준다.
이지현_Threshold:Sandy beach 1_캔버스에 혼합재료_diptych_162.5×183cm / 81.5×183cm

이지현 은 자신이 방문했던 공공 장소들과 지극히 사적인 장소들을 뒤섞는 방식으로 가상의 풍경화를 만들어 낸다. 유명한 여행지의 장소들이 옷장 개인적 용도의 공간과 연결되어 회화 평면 안에 펼쳐지며 다중적인 동시에 하나인 독특한 시공간이 형성된다.
이진용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 97×130cm_2011

이진용 은 오래된 책, 사진기, 시계 등의 오브제를 폴리코트로 화석화 하거나 극도로 치밀한 묘사를 거듭하여 하이퍼리즘을 구축하는 페인팅 작업을 선보인다. 화면 속 사물들은 작가를 알게 해 주는 개인의 히스토리이며 기억의 저장고라고 할 수 있다.
한성필_Shadow_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_191×150cm_2007

한성필은 사진이라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상적인 매체를 통해 완성될 건물의 가상 이미지 혹은 눈속임회화를 그려놓은 특수한 방진막이 설치 된 건축물 혹은 문화재의 보존공사 현장을 사진에 담아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교묘하게 뒤섞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
가오레이_ NS24_혼합재료_300×600×280cm_2010

가오레이 는 회화, 사진과 설치를 포괄하는 혼합 미디어 작품을 통해 권력 체계가 어떻게 개개인의 사고 방식을 특징짓고 사회의 외부적 환경을 규정하는지를 비의인화 등의 방법으로 탐구하고 있다. 작가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일상적인 사용처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해 내고 있다.
미야오샤오춘_The New School of Athens_캔버스에 디지털 페인팅_205×300cm_2009

미야오 샤오춘 은 최첨단의 디지털 기술을 사용해 과거의 명작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낸다. 과거의 역사적인 이미지와 현대의 이미지, 고전회화와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 현대미술, 현실과 가상현실, 동양과 서양 등 우리가 흔히 상반되는 개체로 생각하는 요소들을 한 작품 안에 조화시키며 관객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에코 누그로호 Dungu, embroidery_혼합재료_201×131cm_2011

에코 누그로호 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의 삶 속에서 다양한 작업의 영감을 받는 작가는 정치, 사회, 현실의 문제점들을 그만의 만화적 언어를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벽화 프로젝트, 페인팅, 그림책,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자수, 조각에 이르기까지 현대적 해석을 선보이는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교적 소수자인 카톨릭 신자라는 독특한 배경을 갖고 있는
탈루 L.N_Graft(Part_1_2_3)_나무_2010

탈루L.N. 은 인도 정통조각과 건축에서 빌려온 종교적 도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정치적인 자본주의와 글로벌리즘이 어떻게 예술과 우리의 일상에서 보편화 되어 있는지를 설치작품을 통해 비판한다.
아리아디티아 프라무헨드라_See no evil_캔버스에 목탄_190×150cm_2011

아리아디티야 프라무헨드라 는 흑백의 강렬한 대비가 돋보이는 목탄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에서 신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구속, 가르침, 상징, 혹은 단순한 종교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적인 물건들과 각 개인들의 종교적 연대에 의한 것이라는 신념이 담겨있다. ● 미술계에서 아시아의 현대미술의 영향력은 제도적으로나 시장적으로나 이미 빠르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서구 유명작가들에 비해 아시아의 주요 흐름들을 살펴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시아의 각 국가들에서도 갤러리, 미술관들이 대부분 자국 작가들을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 2, 3부로 나누어져 총 30여명의 대표 아시아 작가들을 함께 선보이는 이번 Artists with Arario 전을 통해 세계미술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한국, 중국, 인도, 일본, 동남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직접 경험하고 비교하며, 아시아 현대미술과 문화의 쟁점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아라리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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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It Count




선호준展 / SUNHOJOON / 宣鎬準 / painting 2011_1117 ▶ 2011_1125 / 일요일 휴관



선호준_w2w11-#1_장지에 혼합재료_162×13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11026h | 선호준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17_목요일_06:00pm

주최 / 국민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주관 / 국민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이론전공

관람시간 / 10:00am~05:00pm / 일요일 휴관

국민아트갤러리 KOOKMIN ART GALLERY 서울 성북구 정릉동 861-1번지 국민대학교 예술관 2층 Tel. +82.2.910.4026



작가 선호준은 관객이 자신의 작품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에서 고민을 시작한다. 그는 그의 작품들에서 사람들이 작가 자신과 관객, 우리가 기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내용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고정관념을 부수려는 이러한 행위는 그동안의 작업에서 이미지의 상이함과 음가적인 언어의 유사함에서 오는 언어유희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바퀴벌레가 주는 혐오감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바퀴와 바퀴벌레의 모습은 관객에게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작품의 의미에 위협을 미치는 것 역시 바퀴벌레가 가진 강력한 인상이다. 그의 작업이 가진 고정관념을 부수고자 한다는 근본적인 의미는 관객의 인식 속에서 바퀴벌레의 이미지, 그 기호가 가진 강력한 힘에 쉽게 전복된다.
선호준_w2w11-#2_장지에 혼합재료_140×210cm_2011
선호준_w2w11-#3_장지에 혼합재료_210×140cm_2011
선호준_w2w11-#4_장지에 혼합재료_210×140cm_2011

몇 년 동안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소위 바퀴벌레 그림을 그렸던 선호준작가는 사실 이러한 바퀴벌레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기호, 이미지와 투쟁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투쟁은 미술의 입장에서 끊임없는 미학적 실험이며, 이것이 미학적 실험일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한쪽이 전복되는 상황이 아니라 실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일상과 예술의 미학적 실험을 인식하고, 그의 작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인식적인 변화를 통해 이러한 미학적 실험에 동참할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선호준_w2w11-#5_장지에 혼합재료_140×210cm_2011
선호준_w2w11-#6_장지에 혼합재료_140×210cm_2011
선호준_w2w11-#6_장지에 혼합재료_210×140cm_2011

이번『Make it count』展에서 작가는 바퀴벌레 이미지에 전복되기 쉬운 언어유희라는 투쟁의 방식을 버리고, 바퀴벌레의 입장으로 돌아서보기를 선택했다. 이는 그가 바퀴벌레라는 기호를 포기함으로써 투쟁을 포기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새롭게 그러나 지속적으로 실험에 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퀴벌레가 꿈꾸는 유토피아'와 같은 그의 접근방식들은 아직 표현적으로 보완해야할지는 몰라도 그가 바퀴벌레라는 기호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과정으로써 소중하다. ■ 김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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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eyscape, seoul




이동준展 / LEEDONGJUN / 李東俊 / photography 2011_1117 ▶ 2011_1127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09


초대일시 / 2011_1117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pm~06:00pm

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Tel. +82.2.720.5114 www.kumhomuseum.com



'칙칙한 리얼리즘'의 아름다움 ● 꾸준하게 한국의 도시와 건축물의 기록 작업에 천착해 온 이동준이 1993년의 첫 개인전 이후 세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이번에 발표하는 신작들은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서울의 달동네를 담은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동안 그가 '일'로 기록해 왔던 도시의 모습에는 대상에 대한 사진가 고유의 관점이나 감성이 상당부분 배제되어 있었다. 정보가치를 중시하는 공적(公的)기록은 대상에 충실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료'로 남겨두기 위해 그가 찍었던 사진들은 냉정한 관찰의 결과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정함과 객관주의적 시각이 배어있었다. 물론 그 사진들에도 작가의 개인적인 감성과 주관이 바탕에 깔려있을 테지만 기계 종속성이 강한 사진에서 그것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대상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한계,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대상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 카메라 워크에 대한 제한 등이 굴레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한편 이번에 전시하는 사진들은 이런 제약으로부터 거의 자유로워 보인다. 공적(公的)기록에서 벗어난 사적(私的)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시각적으로만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의 주체에게 그 차이는 너무도 큰 것이어서 사진 한 장이 불러일으키는 의미의 파장과 감흥의 밀도는 측정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세계관, 감성, 취향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공적 기록에는 그런 것들이 빠져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마땅히 배제되어야만 한다. 반대로 사적 기록에서는 그것들이 곧 작업의 추동력이 된다. 그런 것들을 읽어내어 우리가 작가와 교감할 수 있다면 이 사진들은 단순한 정보 이상의 것이 된다.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0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0

재개발 지역을 사적으로 기록한 이번 작업에는 작가의 관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이 지역이 지녔던 공간으로서의 지위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놓은 삶의 체취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집과 골목, 주거환경보다는 지역주민들의 발길이 수도 없이 오갔던 길바닥과 계단, 녹슨 호미와 모종삽, 때묻은 장갑, 각종 청소도구 등이 사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거공간이 사진에 담겨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열악한 삶을 이 소품들을 통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0

담벼락의 칠은 흉측하게 부르튼 상태이고, 벽 자체가 갈라져 임시방편으로 땜질해 놓은 모습도 눈에 띈다. 여기저기서 주워온 듯한 판자로 대충 막아놓은 문, 툭 치면 떨어져 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녹슨 자물쇠는 그야말로 '대충'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의 삶에 대한 구슬픈 상징이다. 그래도 더 나은 삶을 꿈꿨던 이들의 몸부림이 곳곳에 묻어 있다. 얼마나 많은 흙과 돌을 치웠을지 모를 부러진 삽, 한 쪽으로 쏠리고 닳아 더 이상 아무 것도 쓸어 담을 수 없어 보이는 플라스틱 비, 심하게 녹슨 쓰레받기, 팽개쳐진 호미, 벽에 기대어 놓은 대걸레 등이 그것이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이 곳을 얼마나 열심히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을 것인가. 어쩌면 그들은 그러기 전에 우선 살아남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한겨울의 맹추위로부터 간신히 온기를 전해주었을 다 탄 연탄재 위에는 녹지 않은 눈이 얼음으로 남아있고, 냉기 때문에 집안에서 말리지 못한 양말은 처량하게 밖에 걸려 있다. 그들에게 겨울은 재앙이었을 것이다. ● 이 사진들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재개발 지역의 모습은 어둡고 칙칙하다. 사실 도시의 대부분은 본래 잿빛 건축물로 뒤덮여 있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화사하고 현란한 모습도 함께 있다. 오래되거나 실용성이 떨어지면 개축을 하는 탓에 도시의 모습은 쉴 새 없이 바뀐다. 도시는 늘 새 것을 꿈꾼다. 하지만 이 사진들에 나타난 재개발 지역은 낡은 차원을 한참 벗어나 거의 부패해 있다. 손을 대면 부스스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담벼락의 페인트칠, 썩어서 푸석푸석해진 판자, 깊이 녹슨 각종 철재, 한번도 물청소를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콘크리트, 이 모든 요소들은 이 곳이 버림받은 지역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 이 곳은 버림받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개발의 손길이 닿지 못했고, 어떤 점에서는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악착같이 살았고, 그 흔적들은 곳곳에 남아있다. 이동준이 꼼꼼하게 채집해낸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0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1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그들 "삶의 흔적과 손길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을 담아보려 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진은 오히려 음습하고 칙칙한 인상을 짙게 풍긴다. 아마도 작가는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자 했던 삶을 향한 건강한 의지를 그들에게서 보았기 때문에 그리 표현했을 것이다. 여전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어둡지만 작가의 시각은 밝다. 작가가 '밝게' 보았던 '어두운' 이 사진들에서 무엇을 보고 느낄 것인지는 전적으로 수용자에게 달려있다. 그것이 사적(私的)기록의 매력이자 딜레마이다. 이는 공적(公的)기록에 오랫동안 매달려 왔던 작가가 앞으로 진행해 나갈 작업의 과정에서 부딪히게 될 고민거리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동준의 이번 작업을 일종의 '칙칙한 리얼리즘'이라 부르고 싶지만 사적(私的)기록에 결정된 의미는 없다. 거기에서 건강한 삶과 '아름다움'을 읽어낸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다. ● 버려진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기이하지만 그런 감성이 그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의 질긴 삶에 대한 애정에서 온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아름다운 대상이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대상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감성에 따라 이 사물들을 아름답게 보았다. 그런 감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까움 때문일 수도, 연민 때문일 수도, 혹은 애정 때문일 수도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그것들을 기록해 오면서 몸에 밴 본능적인 집착일 수도 있다. 어쨌든 관건은 그가 버려진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따뜻한 심미안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칙칙한 리얼리즘'의 심미적 차원이 여기에 있다. ■ 박평종
이동준_Alleyscape_seoul_90×60cm_2011

도시라는 역동적인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의 삶을 만들어간다. 삶이 담긴 공간 또한 그 삶의 형태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갖추어간다. 해질 무렵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의 화려한 모습은 절대 멈추지 않을 거대한 현대 문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달빛도 어두운 밤 아스라한 불빛 아래 어둠을 벗삼아 걸어 돌아가는 서울의 뒷골목은 또 다른 도시의 모습을 전한다. 서울의 주거 형태를 기록하면서 낮은 곳에서 쉼 없이 움직여야만 하는 고단한 삶이 깃든 사실적 공간들이 내게 조금씩 다른 시각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우연히 마주치는 담벼락, 무심히 세워져 있는 도구, 금방 벗어놓은 듯 뒷축이 구겨진 신발, 일을 마치고 가지런히 널어 놓은 지저분한 장갑, 차가운 회색 벽, 우리 시야에서 오래 전에 이미 멀어진 낡고 오래된 사물들이 어느 순간 내게 무언가 또 다른 새로움으로 반전되어 다가왔다. 세월과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빛 바랜 벽, 덧칠한 페인팅 사이로 배어 나오는 미묘한 명암, 다양한 삶의 오브제 등 그 거칠한 질감에서 오는 색들의 정겨운 맛을 가장 사실적인 매체, 사진의 틀 속에 담았다. ■ 이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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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hos and Small Narratives

Japanese Contemporary Art 일본현대미술展   2011_1118 ▶ 2011_1211


Tomoko Nagai_Puppet and Various Countries_Oil, glitter, modeling paste on canvas_162×194cm_2011

초대일시 / 2011_1118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타케오 하나자와 Takeo Hanazawa 花澤武夫_미츠히로 이케다 Mitsuhiro Ikeda 池田光弘 존 이토 Zon Ito 伊藤存_이즈미 카토 Izumi Kato 加藤泉_마키코 쿠도 Makiko Kudo 工藤麻紀子 마사히코 쿠와하라 Masahiko Kuwahara 桑原正彦_나오후미 마루야마 Naofumi Maruyama 丸山直文 카에 마스다 Kae Masuda ?田佳江_쿄코 무라세 Kyoko Murase 村?恭子 유코 무라타 Yuko Murata ムラタ有子_토모코 나가이 Tomoko Nagai 長井朋子 히로시 스기토 Hiroshi Sugito 杉?洋

후원/협찬/주최/기획 / 가나아트

관람료 / 3,000원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센터 GAN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파토스와 약함: 1984년 이후 일본의 회화에 대해_전시서문에서 발췌 ● 살아남기 위한 '작은 이야기'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나 동시다발적 테러 사건에서 알게 되는 것은, '거창한 이야기'가 그 효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위안거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대에 화가는 얼마나 부응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회화를 통해 사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 나라나 무라카미조차도 전시, 혹은 미술 시장이라는 소비사회와의 연대 말고는 다른 참여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글로벌 체계가 바뀌어 개별 주체들과 국가간의 거리감을 가늠하기 어려워진 때에도 여전히 어떻게든 '작은 이야기'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작가들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 ● 예를 들면 시몬 미나미가와는 2008년 자신의 전속 갤러리에서 『핑크와 블랙, 전쟁과 평화』라는 전시를 열었다. 뉴스캐스터와 전투기, 전차가 그려진 이 화면에서 사실 어떤 뉴스나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사실 전쟁을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들과 나란하게 줄무늬와 물방울이 무늬가 그려진 캔버스를 보고 있노라면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뤽 튀망이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그들에 작품에 뉴스의 단편들을 사용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이슈들도 일종의 특이한 형식 속으로 흡수된다. 미나미가와의 이미지들의 병치가 만들어낸 의미의 공허함은 마치 공기를 마시는 듯이 매우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흥미로운 점은 미나미가와와 같은 세대에 속하는 존 이토와 유코 무라타 또한 이와 유사한 형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세 작가의 화면 구성은 '강렬'하기보다는 오히려 탈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Takeo Hanazawa_At Dinner with Diana_Oil and silverleaf on canvas_131.5×194cm_2010
Mitsuhiro Ikeda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45.5×227.3cm_2011
Zon Ito_Squirrel Spirit_천에 자수_80×118cm_2009

또 다른 유형으로, 이즈미 카토나 신타로 미야케의 경우, 그들은 회화라는 가상의 공간 속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출현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작가가 2차원적 화면 안의 생명체를 입체적인 형태를 통해 삼차원의 현실 세계 안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로써, 회화(이미지)와 입체(현실) 사이의 관계는 심하게 흔들리게 된다. 회화가 현실을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이 회화를 모방하고 있는지가… 원본과 복제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생명체의 이미지가 근거 없다는 사실 또한 망각된다. 이 가운데, 생명체는 스스로의 규칙을 발전시켜 나간다. ● 미츠히로 이케다나 타케오 하나자와는 자신만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한다.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데 불리할 수도 있는 이런 태도는 어떠한 성숙함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러한 긴 과정으로부터의 일종의 도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는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려는 의도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가령 이케다는, "혼돈은 보다 혼돈스러운 것 가운데에서만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것의 구조를 알고자 이를 언어화시키며, 미분화하는 것으로는 그 형체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의 혼돈스러움을 자신의 작품 안에 (혹은 작품에 담아내고자 하는 본연의 자세 속에) 담아내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자신 스스로를 바꾸어서라도 세상과 동행하려는 것이다.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상황과 타협하며,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존재의 거부'(R.D.레인)라는 방법을 취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Izumi Kato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94×130.3cm_2011
Makiko Kudo_Time to Sail_캔버스에 유채_227×365cm_2010
Masahiko Kuwahara_Lanoli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91×116.7cm_2009

정신분열증적인 분열은 카시키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원근법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드를 사용하면서도 이를 비틀거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면서도 현대 일본화의 마티에르나 구도에 근접해가거나, 혹은 멀어지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공간, 마티에르, 채도에 대한 그의 예술적 감각은 자신의 신체와 이념 속에 뿌리 박혀있는 감각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일본인(혹은 일본인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 다양한 취향으로 분리 가능한 여러 단편들을 보여주는 카시키와는 반대로, 마사히코 쿠와하라나 토모코 나가이는 단 하나의 성향으로 모아진다. 그들은 다양한 사물들을 하나의 취향으로 통합하는가 하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사물의 계층구조를 배제해 가는 철저한 기준을 갖고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취향이라는 층위에서 적용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취미(선택)를 받아들이는 그 품의 넓이를 가늠할 수 있다.
Naofumi Maruyama_Puddle in the Woods 4_Acrylic on cotton_227.3×181.8cm_2010
Kae Masuda_everlasting green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11
Kyoko Murase_Lily_코튼에 유채, 색연필_200×190cm_2010

약한 일본의 회화 ● 이러한 사회 참여를 위한 예술적 수단들은 자칫하면 이탈로 보여질 수 있다. 사회에 직접 손을 대서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복잡다단함에 공감을 가지며 그 모습을 가시적인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형태의 사회 참여이다. ● 일본의 회화에서 또 다른 특징적인 점은 나오후미 마루야마나 히로시 스기토의 작품이 발산하는 분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의 작품에는 밀도의 높고 낮음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는 비시간 예술이기에 더욱 견고히 이어져 내려온 회화의 구조를 살짝 뒤흔든다. 그들은 해체 혹은 재구축이란 강한 행위가 아닌, 어디까지나 구조의 힘과 그것에 의한 편리함은 인정하면서도, '약함'이라는 성질을 회화에 부여하고자 한다. ● 마루야마나 스기토 작품에서 드러나는 분위기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오늘날 일본 건축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준야 이시가미가 분위기에 잠재하는 비가시적인 구조에 집중하는 것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산소, 질소나 먼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원자나 분자, 혹은 소립자라고 하는 구조를 지닌다. 따라서 우리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빈 공간도 실은 거대한 구조체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스케일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스케일을 바꿔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관심이 많다."라고 이시가미는 말한다.
Yuko Murata_Vitamin Juice_캔버스에 유채_53×65.1cm_2011
Hiroshi Sugito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 그래파이트_140.5×260cm_2011

강함에 대한 요구를 뛰어넘으려는 의도에서, '약하다'라고 보여졌던 것들 중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태도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주목 받고 있다. (적어도 철학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알아차렸다.) 예를 들어, 철학자 유우지로 나카무라 (b.1925)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랑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는 열린 감수성이야말로 파토스라고 말했다. ● 일본의 몇몇 화가는 지난 3월 11일 이후 타인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긍정적으로 약해졌다. 예를 들면 마키코 쿠도가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지진 재해 이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열린 개인전에서 일찍이 그녀의 작품 중 분명한 특징이었던 심상 풍경 성향이 옅어지고 있었다. 그림 안에 등장하는 사물 간의 스케일이 정연해진 결과, 풍경의 리얼리티가 높아졌다. 다시 말해, 우리들의 마음 안으로 (쿠도에게서 보자면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작품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 또한 카에 마스다도 변하고 있다. 광물이나 지층구조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그야말로 회화스러운 지층을 보여주는 작업들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다소 회화의 세계 그 자체에 갇혀있는 듯한 경향을 보였다. 그런 그녀가 최근에는 무의식적으로 한 그룹의 초상을 화면 속에 그렸다고 들었다. 이처럼, 다른 이의 아픔을 느끼고 이에 공감하며, 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마음가짐이 일본 회화를 (혹은 1984년 이후의 회화를) 지탱해 왔다. 그렇다고 한다면, 일본 회화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 켄지로 호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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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mate beings



2011_1116 ▶ 2011_1127 / 월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116_수요일_06:00pm

참여작가 김용재_박도윤_박원철_박유미 이기보_이인아_장보현_장윤

주최 / 한빛미디어갤러리 후원 / 서울시_GL Associates_streetworks_한성대학교

관람시간 / 10:00am~09:00pm / 월요일 휴관

한빛미디어갤러리 HANBIT MEDIA GALLERY 서울 중구 장교동 1-5번지 Tel. +82.2.720.1440 www.hanbitstreet.net



21세기의 인간은 생성적이고 창발적이다. 그래서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되어 무한히 새로운 것을 생성하고 진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막연한 방향성 추구는 인간이 자신의 방식과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어 나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실험이 제3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민첩하게 시각을 바꾸면서 탐구해야 할 기회와 극복해야 할 장애의 영역을 점검하는 부분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예술적 생산도구인 애니메이션 예술이 새로운 존재론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변화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적응을 돕고, 둘 사이를 조정하고 화해시키는 도구로 활용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김용재_용궁탕_Clay Animation_00:10:10_2010
장보현_오지마을의 닭실종사건_2D Animation_00:05:16_2005

연속적 움직임을 표현해내는 '애니메이션(Animation)'은 영혼, 정신, 생명을 뜻하는 라틴어 'anima'란 단어에서 유래되어 생명이 없는 사물이나 형태에 생명을 불어넣고 정신을 부여하는 행위를 뜻한다. 실상이 아닌 하나의 프레임마다 사람 손으로 직접 생명감 있는 동작을 만들어가는 방식은 애니메이션이란 매체를 아방가르드 또는 전위적인 형식의 실험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삶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려는 초기 예술가들의 맥락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현실의 실재와는 전적으로 다른 비사실적인 시공간의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세계를 상상하는 방식을 바꿔놓는 예술적 가치에 주목하게 한다.
박원철_Mouse Without a tail_Clay Animation_00:13:24_2001 박원철_Drawing the Freedom_Clay Animation_00:17:11_2003
박유미_Europe trip_2D Animation_00:02:30_2010 박도윤_봉만이의 생활계획표_2D Animation_00:08:20_2005

이번 전시의 화두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고정된 관념과 인식을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애니메이션의 미적 가치를 고찰해보고자 생명을 부여하는 작가의 사유하는 손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술적이고 지적인 고유한 작업 방식, 표현에서 독특한 개성, 의미 형식을 통해 발현되는 내적 의미와 심미적 감동이라는 기준에 따른 2D, 3D, Clay Animation으로 구성되어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그들의 작품이 예술적 독창성과 상상력에서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몰두한다.
이기보_the Doll_3D Animation_00:04:20_2004 장윤_Fantasy_3D Animation_00:05:32_2002

본 전시는 애니메이션이 담고 있는 유쾌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나의 예술적 혁명을 보여준다. 생명력을 가진 움직이는 가공의 영상 이미지는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예술임에 분명하며, 공간과 시간이 뒤바뀌는 미래의 시대에는 다름아닌 상상력이 미학의 한 영역임을 상기시킨다. 애니메이션의 살아있는 상상은 기술을 거쳐 현실로 진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생산력이 되어 삶에 무한한 생명력을 더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오는 값진 사유의 단초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는 현실을 구부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으로써 애니메이션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밝히고자 함에 있다. ■ 조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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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신展 / CHOMYONGSHIN / 趙明信 / painting  2011_1123 ▶ 2011_1128
조명신_그섬 이야기-첫번째_장지에 수묵_162×260.6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GANAART SPACE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1층 Tel. +82.2.734.1333 gana.insaartcenter.com


자연은 인간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외형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내면세계로의 유도를 꾀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또한 자연의 존재는 우주 만물에 생명의 가치를 부여하는, 존엄한 생명력 그 자체 이며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부터 동양인들은 영원한 존재가치로서 자연을 숭배하고, 이에 조합·합일하고자 하는 의식이 강하였다. 그들은 자연과 더블어 생을 영위하고, 그 속에 담긴 섭리를 관조하면서 이에 순응하고, 귀일 하고자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 하였다.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표현에 있어서 여러종류의 소재가 있는데 그중 산(山)과 수(水)에 중점을 두었다.
조명신_그섬 이야기-두법째_장지에 수묵_162×130.3cm_2011

산수화의 주된 소재인 산과 물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으며, 물은 산의 혈맥(血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은 놓여진 모양과 기후환경에 따라 그 형태가 변형되어 동양의 산수화에서 다양한 의미와 표현으로 나타났다. 물의 형상은 계곡의 물과 시냇물, 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가서 바다에 닿으며 자연스럽게 바다와의 관계가 같아지고 화면에서 공백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명신_그섬 이야기-세번째_장지에 수묵_40×40×5cm×4_2011
조명신_그섬 이야기-네번째_장지에 혼합재료_40×40×5cm×3_2011

유가(儒家), 도가(道家), 선가사상(禪家思想)은 산수화 발생의 철학적 배경이 되며 산수화 화론의 이해에 중요한 해법을 지니고 있다. 공자는 "현자(賢者)는 산(山)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水)을 좋아하는데 산은 정적(靜的)이고 물은 동적(動的)이다" 라고 하였으며, 노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여 좋은것은 물과 같다고 하였다. 물은 생명이고 도(道)의 흐름과 같으며, 부쟁(不爭)의 덕을 찬양하였다. 물은 무미(無味), 무색(無色), 무형(無形)을 상징하며 결국 무(無)를 의미하는데 무는 결국 도를 가리킨다.
조명신_그섬 이야기-다섯번째_혼합재료_24×65cm_2011

특히 도가사상(道家思想) 의 도(道)는 자연의 원리, 모든 생성 변화의 법칙이며 존재의 근원을 지탱하고 있는 개념으로서, 본인 작업의 밑거름이 된다. 도(道)란, 공(空)과 무한함을 수용함으로써 존재의 참모습을 띠는 무(無)와 일치한다. 여기서 무(無)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하여 본인은, 소박한 본성을 기반으로 참된 이치로 깨우치려 하는 동양정신과 시각으로 자연을 바라보려 한다. 아울러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을 통해 자아 정체성 역시 학립하고자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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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間性


하대준展 / HADAEJOON / 河大俊 / painting   2011_1123 ▶ 2011_1129


하대준_애기_순지에 수묵_아교_35×35cm_2011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2011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0:00am~06:00pm

부남미술관 BUNAM gallery 서울 종로구 경운동 63-7번지 이양원빌딩 B1,1층 Tel. +82.2.720.0369 www.bodaphoto.com


...우리 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흔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지금 우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모임을 만들며 집단을 꾸려가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개인의 개성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드러내는 역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뿌리 깊은 집단성이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이 도시가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대준_사람들_순지에 수묵_아교_130×190cm_2011
하대준_사람들_순지에 수묵_아교_130×190cm_2011
하대준_PIETA_순지에 수묵_아교_190×130cm_2011
하대준_사람-들_순지에 수묵_아교_130×640cm_2011
하대준_나쁜 이야기_순지에 수묵_아교_190×910cm_2011

그것은 '나'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이야기이며, 또 역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는 나의 작업이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숭덩숭덩 썰어내어 그 단면들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열심히 달리다가 잠시 쉬며 자신의 그림자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인디언처럼 조금 더 균형 잡힌 인간성을 위한 하나의 노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 하대준




 


 

modified at 2011.11.20 18:42:36 by z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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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1.11.23 22: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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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SUBMARINE



천눈이展 / CHUN NUNN / painting   2011_1119 ▶ 2011_1209



천눈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각 110×200cm_2009


초대일시 / 2011_1119_토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11:00pm / 일요일_05:00pm~11:00pm 쇼윈도우 24시간 관람가능

텀갤러리(플레이스막) TERM GALLERY(placeMAK) 서울 강남구 역삼동 834-5번지 라피스라줄리 Tel. +82.2.554.1155 placemak.com/term_gallery



천눈이 작가는 서문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사실은 작가 본연의 명확한 작업적 분석이 제대로 되지 못한 채 남겨질 텍스트의 잔재가 걱정되는 것이다. 전시를 만드는 디렉터로서 만족스런 믿음을 드리지 못한 마음도 있지만, 작품의 실체에 접근할만한 재량의 부족함도 이번 전시를 디렉팅하며 함께 느낀다.
천눈이_Untitled_혼합재료_20×20cm_2008 천눈이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20×20cm_2008
천눈이_생성의 기록들_캔버스에 유채_230×340cm_2011

처음 작품을 보고 나 역시 천눈이 작가의 장르를 '추상'이라 생각하며 감상했다. 정형화된 선입견의 잔눈으로 감상한 것이다. 기본적인 추상의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론 따위가 존재하겠는가? 누구나 말하는 것처럼, 세상 속에 표현된 무엇이라는 이 무한대적 조형성을 어떻게 함축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저 구상과 비구상의 차이로만 눈대중할 것인가? 어린아이들의 알 수 없는 '비정형스러운' 흔적들도 가치를 담고 가야 하는 것인가?
천눈이_Dancing on the beach_캔버스에 유채_각 지름 40cm×5_2009
천눈이_나의 수족관_캔버스에 유채_112×162cm_2011

작가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보던 중, 완성된 한 작품을 보며 설명을 부탁드렸다. 내 딴에 완성도란, 그나마 형태적으로 명확한 조형이 보이는 결과물 이었나보다. "그거 아직 한참 미완성인데요." 작가의 비구상적 조형의 완성은 점, 선, 면의 알 수 없는 유기적 표현이 아닌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작가의 신기루들이 캔버스에 전체적으로 겹치며 나오는 진득한 자기 치유적인 표현의 결과인 것이다. 육체적 언행으로서의 소통방식을 취하지 않고 누가 봐도 근거를 이해할 수 없는 형상들로 본인의 자아를 세상과 공유하려 한다. 오히려 그런 노력의 화폭들로 비이상적인 세상의 잣대를 포용해 보려고도 한다. 작품의 녹아 흐르는 듯한 형상들은 거친 소용돌이 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간 후로도 편안히 숨을 쉬며 관망할 수 있는 물결과 같은 편안함을 안겨준다. 작가의 작품을 보며, 이해할 수 없음이 아닌 현재 작가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갈등과 갈증을 필연적 관계의 터치와 구도로 나열됨을 느낄 수 있다.
천눈이_Oh my paradise_캔버스에 유채_70×90cm_2010
천눈이_남겨진 것들_캔버스에 유채_120×220cm_2011

추상은 불분명하고, 불명확함 따위가 아니다. 더함과 덜함의 경계에 서 있는 작가들의 심미안적 선택으로 표현된 결과일 뿐이다. ■ 유디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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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




박혜신展 / PARKHYESHIN / 朴惠晨 / painting   2011_1123 ▶ 2011_1129 / 월요일 휴관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70×140cm_2011


초대일시 / 2011_1123_수요일_06:00pm

후원/협찬/주최/기획 / LEE's Studio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가회동60 GAHOEDONG60 서울 종로구 가회동 60번지 Tel. +82.2.3673.0585 www.gahoedong60.com



코끼리는 이상향理想鄕을 찾아 떠난다. 육중한 몸으로 광활한 공간을 헤맨다. 코끼리의 이상향은 어디일까? 파란 하늘에 푸른 야자수가 드리워진 너른 대지일까? 모두의 본질本質이 구현된 공간일까?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130×160cm_2011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130×160cm_2011

때로 목적지 없이 서성임을 즐기고 순간 어느 곳을 향하여 달려간다. 이렇게 걷다가 마음이 조용해지면 관조觀照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조하면 세상의 본성本性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본질을 찾으면 인생이 즐거워 질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황금시대처럼 진정하고 조화로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다.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130×160cm_2011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50×70cm_2011

어디에 있을지 모르고, 없을 수도 있는 그곳을 향하여 코끼리는 계속 걷는다. ■ 박혜신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50×70cm_2011
박혜신_상구원질도 象求原質圖 An elephant seeking the truth_한지에 수묵채색_50×70cm_2011


An elephant is leaving for the Utopia. She wander in a vast space. Where is the Utopia of the elephant? Is an open field impended green palm tree under blue sky? Is a space embodied the nature of everything? ● She enjoy wandering without destination sometimes and suddenly run to somewhere. It could contemplate nature when the mine become calm while walking. It would know the nature of world through the insight meditation. It could be happy if one find the truth. ● The elephant is still walking to somewhere not knowing where it is and may it is nowhere. ■ PARKHYE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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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다




인경展 / INKYEONG / painting   2011_1123 ▶ 2011_1211 / 월요일 휴관



인경_心다_핀_60×16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인경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23_수요일_06:00pm

Bridge Generation 선정작가展

협찬 / 화신공업주식회사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릿지갤러리 Bridge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82.2.722.5127 bridge149.blog.me



prick_상처를 心다 ● 손가락 두 마디가 채 안 되는 길이의 가늘고 뾰족한 핀들이 한데 모여 섬세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마치 비단에 수를 놓듯 그녀가 하나하나 핀으로 놓은 형상은 복잡 미묘하고 질척한 감정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자신의 상처이기도 하다.
인경_Yeon Yip圖1_핀_90×90cm_2011
인경_Yeon Yip圖_2_90×90cm

여기 저기 치여 부딪치거나 넘어져 입은 상처들이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까지거나 찢어져 피가 나고 진물이 흐른다. 그리 새삼스럽지 만도 않은 일이었다. 두 다리가 성한 날이 없다. 며칠, 시간이 지나면 찢어지거나 까진 살갗 위로 흐르던 피도, 진물도 멈추게 된다. 손도 될 수도 없이 따끔거렸던 자리는 딱지가 앉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간지러운 고통으로 찾아온다. 다 나아가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그 얼마간을 못 참는다. 따가운 고통만큼이나 간지러운 고통도 참기 힘든 고통이다. 무참히 긁어 딱지를 떼어내고는 또 다시 상처 위로 피를 보고 만다. 항상 이 과정의 반복인 것 같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를 내는 것, 이는 이전의 고통을 망각하기 위해 또 다른 상흔을 남기는 일이다. ● 작가 인경의 작업은 그 조형 언어부터 주제에 이르기 까지 철저히 자신의 개인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알다시피 핀은 임시로 무언가를 고정시키거나 이을 때 쓰는 도구이다. 핀이 물질과 물질을 관통하면서 생기는 구멍에 꽂이면서 서로를 고정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양쪽에 동일한 상처를 남기게 된다. 핀으로 서로를 연결하기 위해 찌른 구멍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점점 헐거워져 더 이상의 연결이 불가능하게 돼버리기도 한다. 핀은 무언가를 완전하게 고정시키거나 연결시키기에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다. 여기서 핀이 가진 원리와 그 연결 속성을 토대로 '관계 맺음'이라는 흥미로운 지점을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이는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해 관계를 맺는 '인연因緣'이라 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관계 맺음'은 작가의 작업과 중요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녀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 그것이 친구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주변과 자신이 관계를 이루는 방식이 핀의 연결속성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말과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그녀에게는 상처이고 고통이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린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을 좀 더 꽁꽁 싸매면서 강하게 보이려 노력했고, 아무렇지 않게 주는 상처들에 그녀 또한 아무렇지 않은 듯 맞받아치고 때론 공격하기도 한다. 마치 금방이라도 빠질 듯 헐거워진 핀처럼 자신과 주변과의 아슬아슬한 관계에서 결국 그녀와 주변, 어느 쪽이든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경_파圖1, 2, 3, 4_핀_73×28cm×4_2011

인경에게 핀은 자신의 복잡다단한 개인사를 함축시키는 도구이다. 스스로를 인식하고 이입시키는 중요한 조형언어로써, 사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형상으로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작가에게 핀으로 무언가를 찌르는 행위는 다분히 일상적이고 일방적인 것이다. 그녀가 살아가면서 대인관계로부터 생기는 마찰과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상처를 준 '누군가'를 대신해 다른 '무언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행동으로 나아갔다. 이는 다분히 폭력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녀가 엄지손가락으로 일정한 힘을 가해 핀을 찌르는 행위 또한 작가 스스로에게도 적당한 아픔을 가하는 일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혹은 억눌린 무언가에서 벗어나고자 소리를 지르거나 무언가를 부수거나 하는 행동이 아닌 작업실에 앉아 핀을 꽂는 것, 그리고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름 반듯한 삶을 살아온 작가에게 허락된 유일한 폭력행위이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인 것이다. 남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에게도 적당한 아픔을 가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적지 않은 희열을 느끼는 것은 작가가 가진 잠재된 가학적·피학적 성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경_Yip圖_핀_53.5×27.2cm_2011 인경_banana圖1, 2_핀_28×73cm_2011

인경이 핀으로 심어놓은 형상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사실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서 치유 받을 수 없는 것들로, 그 이면은 찔리고 찔린 흉터투성이다. 평면 위를 핀으로 박아 올린 상처들을 통해 작가는 진물이 베어 나올 정도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파와 군데군데 시퍼렇게 멍이 든 바나나를 재현했다. 이미 버려질 것들이다. 그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 상처가 나 온전치 못한 것, 썩어있거나 죽은 것들에게서 사물을 더욱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어쩌면 치유 될 수 없는 이러한 상처들을 형상화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될 수 없음을 스스로 각인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평면 위에 '심는 행위'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새기는 일, 즉 상처를 각인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 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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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전_익숙함과 낯설음(Shrine, the familiar and unfamiliar)




신하정展 / SHINHAJUNG / 申荷姃 / painting   2011_1123 ▶ 2011_1129



신하정_거대한 기둥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30×162_2011


초대일시 / 2011_1123_수요일_06:00pm

2011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관람시간 / 10:30am~06:00pm

관훈갤러리 KWANHOON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82.2.733.6469 www.kwanhoongallery.com



교각, 기둥들, 문명의 묵시록 ● 서울 시내에는 교각이 많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29개의 대교를 지탱하고 있는 교각을 포함하여 고리처럼 서울 내부를 큰 원으로 연결하고 있는 내부순환도로의 교각은 서울을 특징짓는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교각의 기능은 위의 도로를 떠받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이나 바다 위에 건립한 교각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내부순환도로와 같은 도로의 교각은 다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 주변에는 무수하게 많은 교각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학교를 다닌 신하정이 매일 보던 교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교각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도로 위에 촘촘하게 세워진 육중한 체적의 교각 사이를 다니노라면 내가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창살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풍경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동일한 형태가 반복되는 풍경은 그 나름대로 심미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특히 굽은 도로 아래 세워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도열해 있는 교각 사이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공간을 원근법에 따라 지각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한때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던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일부를 남겨두었다.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남겨둔 이 교각은 과거 그 위를 달렸던 무수한 차량의 행렬과 그 아래 복개된 청계천 위를 점거하다시피 했던 노점, 자전거, 오토바이 등 이륜차량의 행렬, 삶의 시끌벅적함을 뒤로 한 채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그렇다면 남겨둔 교각은 발전과 폐허의 증거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발달한 토목공학을 과시하던 고가도로가 뜯겨나간 후 고도성장의 과거를 증명하는 잔해로 남아있는 교각은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게 만든다. 그러나 청계고가도로는 기껏 반백년 만에 해체되었고, 주변풍경조차 현격하게 바뀌었기 때문에 이 볼썽사나운 물건이 먼 훗날 청계천의 역사를 회고하는 유물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신하정_숨겨진 시간Ⅰ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30.3×162.2_2011
신하정_신神전_익숙함과 낯설음_견에 먹, 석탄 설치_300×1100_2011

한때 견(絹) 위에 먹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태백의 풍경을 표현한 신하정이 교각을 주목한 것은 현대도시의 한 풍경이 되다시피 한 교각의 육중함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일상적으로 교각과 마주치지만 무심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당장 내부순환도로만 하더라도 그 위를 달릴 때 교각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설령 교각 아래의 도로를 달리거나 보도 위를 걸을 때도 통행에 방해가 되고 시각을 가로막는 교각의 존재에 불만을 보낼지언정 그것이 도시의 일부란 사실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한강다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다리가 교통을 편리하게 해준다는 사실만 중요하다. 그러나 강물 위에 세워놓은 교각, 아직 상판을 올리지 않는 그 거대한 기둥들을 보면 생경함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시공 중인 다리의 일부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건설하고 있는 과학기술의 신전을 위한 기둥으로 비쳐질 수도 있고 또는 미래에 현재를 기억하게 만드는 21세기 문명의 잔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신하정이 그려놓은 무수한 교각 기둥들은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진행형이라기보다 파괴된 후의 폐허를 연상시킨다. 터키의 에페소스에 도열해 있는 무수한 기둥들. 그것은 헬레니즘으로부터 로마시대에 이르는 과거의 영화(榮華)를 증명하려는 듯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프랑스의 퐁 뒤 가르(Pont du Gard) 또한 퇴락한 채 남아있지만 아치를 본격적으로 건축공학에 도입한 고대 로마의 영광을 추억하게 만든다. ● 그러나 신하정의 작품 속에서 이 기둥들은 추억할 영광의 과거가 없다. 저 멀리 도시풍경을 배경으로 홀로 물 위에 서있는 기둥은 고요하고 쓸쓸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고 있는 교각들의 행렬은 낯선 세계로 들어섰을 때의 두려움마저 자아내게 만든다. 교각을 성형(成形)하던 거푸집이 내버려지듯 방치된 풍경 위로 어렴풋이 솟아오르고 있는 기둥은 '문명의 폐허'에 바치는 레퀴엠일까. 아니면 현대문명의 승리를 과시하는 기념비일까. 내가 보기에 이 작품들이 대체로 무채색조로 그려졌고, 더욱이 화재로 전소된 강원도 낙산사의 주춧돌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한 폐사지 풍경 등을 고려할 때 신하정의 작품 속에서 문명과 기술공학을 예찬하는 흔적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이 확대된 교각을 통해 문명의 묵시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때 견 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석탄가루가 풀풀 날리던 태백의 풍경을 아름답게 표현했던 그는 여러 겹의 견을 켜켜이 쌓아 영롱하고 섬세하며 좌우대칭 구도가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미세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전통적인 재료기법을 사용하되 현대적으로 해석한 방법도 참신하고 몇 겹의 레이어가 만들어내는 환영효과 역시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신하정_바람이 불다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91×116.7_2011
신하정_독립된 조각_한지에 먹, 연필, 목탄_193.9×130.3×3_2011

그러나 오랫동안 한 가지 기법에 매진하는 것이 젊은 작가에게는 심리적 부담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변화를 모색한 결과가 교각으로 나타났다. 그러다보니 개별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과거의 작품보다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을 불식시킬 수 없다. 그러나 양식화되기 전에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비록 자기생각을 조형적으로 훌륭하게 구현하기 위해 더 많이 그려야 하고 더 많은 조형적 고려, 적절한 재료와 기법을 개발해야 하겠지만 주제에 있어서는 보다 자기언어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과거의 낙원과도 같은 풍경이나 섬세한 이미지 또한 기본적으로 먹으로 표현한 것이었으나 교각을 소재로 한 그림처럼 낯설거나 쓸쓸하고 위압적이지 않았다. 시선을 압도하는 기둥과 검은 배경은 토목과 건설의 미래를 낙관하는 것이라기보다 붕괴된 후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길한 예언처럼 보인다. 그것은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인간이 쌓았다는 바벨탑의 기둥도 아니고, 알렉산드리아에 세웠다는 전설적인 '파로스의 등대'도 아니다. 더 많은 편리를 위해 대지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마구 박아대는 인간의 이기심이 가져올 파국에 대한 증거물인 이 기둥들, 그것은 자연을 역행하는 인간을 의인화한 것은 아닐까. 신하정이 그린 어두운 풍경은 문명의 이름 아래 한없이 수직적으로 성장하기만을 추구한 인간의 추락, 즉 욕망을 위해 더 멀리 날아가려다 결국 추락하고 마는 이카루스의 무모함에 대한 묵시록적 전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최태만
신하정_거기 있었던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90.5×72×2_2011

거(巨?)하고 신비로?운 것을 발견하?다. 그것은 현대의 실질적 모뉴먼?트로 자리매?김한 다리, 즉 교각(?橋脚)?이다. 물리적 소통의 구현인 다리, 그 하단부?인 교각이 작품의 소재이?다. 흡사 신전의 기둥부?와 겹쳐지?는 다리의 교각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가상적 재현이다. ● 이제는 역사서 한 켠의 삽화로 실린 로마의 아퀴덕?트(a?que?duc?t)처?럼, 그 기능성?은 잊혀진 채 조형성 또는 문화재?로서만 이를 생각하?게 되듯 먼 훗날 우리 문명이 쇠하고 교각만?이 잔존하?여 미래의 세대들?이 그 교각을 바라보?며 흡사 우리가 로마의 수로를 생각하?듯 교각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즉 그 교각하?부의 조형성 또는 문화재?로서의 상징만?이 남게 된다. ●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접하고 있어서 달리 생각해 보지 않았던 교각이?라는 소재로?부터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낯설음 또는 이질적?인 풍경을 그린다. 특히 그리스 또는 로마 신전 기둥부?의 환영을 주는 기둥의 개체들?은 하나의 완성된 조각품?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 공간이 주는 시간성?.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물성에?서 느껴지?는 경이로?움. 상판부?를 잃은 혹은 갖지 않은 독립된 개체의 존재감 허공 속 나의 존재는 흐르지?만 무(無) 아닌 공간 -- 유(有) 에의 엄숙함 그리고 여타의 巨함을 위한 잔해물?들 가볍지?만 무거운 존재들?의 이야기 홀로 의미가 새로워?질 개체들 움직이?지 않았으?나 움직여?진. 만들어?진 풍경이 곧 있어왔?던 풍경이 되고 이질적?인 것이 익숙해?지는.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 신하정
신하정_있었던, 그리고 있을Ⅰ_캔버스에 먹, 아크릴채색_162×112_2011


Piers, Pillars, the Apocalypse of Civi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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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Work


최대진展 / CHOIDAEJIN / 崔大珍 / mixed media 2011_1124 ▶ 2011_1225


최대진_Museum of contemporary art_LYON_2008

초대일시 / 2011_1124_목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 / 2011_1208_목요일_03:00pm

주최,기획 / 대안공간 루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시간 / 11:00am~08:00pm

대안공간 루프 ALTERNATIVE SPACE LOOP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5-11번지 Tel. +82.2.3141.1377 www.galleryloop.com


"모든 예술은 어느 정도 프로파간다이다." 인간의 권력과 그에 대한 욕망을 신랄한 문체로 고발했던 조지 오웰의 말이다. 물론 그였기에 할 수 있었던 말이지만, 이 말에는 상당한 일리가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더욱이 '선전'의 의미를 더는 집단적 의미로 해석하기 어려운 때가 되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예술의 기원을 따질 때, 어김 없이 '주술적 의미'를 든다. 그리고 여기에 최초의 프로파간다가 함유되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16세기 로마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프로파간다'는 나열된 단어들 속에서 해방되어 '신앙을 전파하는 메시지'를 뜻하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으며, 인간사의 우여곡절을 겪어내며 결국 포괄적인 일반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 안에서 방점을 찍던 집단성이 그 무게를 덜어냄으로써 보다 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단어로 화했다.
최대진_Panmunjom_혼합재료_28×130×45cm_2009

우리는 현재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인류 최초의 예술행위들 속에서 프로파간다를 발견할 수 있으며, 단적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고대 벽화를 말할 수 있다. 거친 필선과 치졸한 표현법 거기에다 당대에 약속된 상징성을 드러내는 형상 혹은 문자들의 나열. 이러한 벽화는 가장 이해되기 쉬운 방식으로 그려졌고, 또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장르의 특성으로 멕시코에서는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지금도 수많은 익명의 예술가에 의해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전달하는 생생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나 긴 시간을 통한 이해 덕분일까? 작가 최대진의 벽화와 드로잉 작업에서는 매체와 메시지가 일치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는 작업 자체를 노동으로 해석하는 작가의 의지가 발현된 타이틀 'Human Work'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최대진_Museum of Contemporary Art_SAINT-ETIENNE_2009

우선 최대진의 작업을 해석할 때 가장 먼저 상기하게 되는 것은 칼 마르크스와 한나 아렌트의 '노동에 대한 생각들'이다. 작가가 '노동'에 대해 지니고 있는 견해는 마르크스의 '노동과 소외'의 문제와 일견 유사해 보인다. 우선 예술가가 창조한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 된다는 것이 그것이며, 여러 예술인으로 하여금 창작 행위를 가능토록 하는 동인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두 번째이며, 창작 행위 자체가 순수한 쾌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것이 세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빌리자면, 예술가가 행위하는 '제작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하는 '동물'로 취급될 때, 부분적으로 느끼고 있던 고립 상태는 고독감으로 발전한다는 것 또한 그러하다. 결국 아렌트는 이러한 고독이 대중으로 하여금 전체주의를 요청하였으며, 강한 독재자의 등장을 초래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음을 역설한 바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최대진의 작업 속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인과 결과가 서로 맞물리는 상태로 등장하고 있다.
최대진_Metropolis Gallery_PARIS_2010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노동하는가? 노동을 위해 생존하는가? 노동의 소외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이후부터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얻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인간은 집단 속에 머무르며, 하나의 원자로 행위하기를 원하는가? 또렷한 개체로 탈출하기를 원하는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번에 그가 보여주게 될 작업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볼 수 있는 전쟁 이후의 카셀의 풍경에는 전체주의의 모순이 단적으로 표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그러한 거대 사건을 가능케 한 개인들의 인정에 대한 욕망 역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시대적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작품에 반영하는 이가 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괴리감은 현재 이곳에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통해 역사와 사건 그리고 지금껏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는 여러 요소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고 의미 부여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어주고 있다. 어찌 보면, 악셀 호네트의 말처럼 인정에 대한 욕망이 개인을 집단 속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그 안에서 역사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최대진의 'Human Work'는 지극히 개인적인 노동으로부터 시작되어 인류의 거대한 사건에 이르는 포괄적인 이야기들을 지극히 개인의 시각과 감성으로 필터링하여 세상에 내어놓은 한 편의 서사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지혜
최대진_Louvre Museum_PARIS_2011

"All art is propa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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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FORM GAME


강미혜展 / KANGMIHYE / 姜彌惠 / painting 2011_1124 ▶ 2011_1202


강미혜_위대한 순간_캔버스에 유채_112.1×162.1cm_2011

초대일시 / 2011_112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공휴일 10:00am~05:00pm

한전아트센터 갤러리 KEPCO ARTCENTER GALLERY 서울 서초구 쑥고개길 34(서초동 1355번지) 2층 기획전시실 Tel. +82.2.2105.8190~2 www.kepco.co.kr/gallery


내게 회화란 이야기 그림과 같다. 이야기의 소재는 주로 동시대적 사회현상에 관한 것들이다. 나는 특히 신문의 보도 사진을 회화 공간 속으로 이동시키는데, 내가 개입될 수 없는 공적인 보도 사진이 회화 공간으로 넘어오게 되자 나는 가상적으로 현실의 사건 이미지 속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인용한 사건의 이미지는 희화화 되는데, 그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거나 주변인으로 등장한다. 나는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초현실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면서 나 자신 또한 풍자극 속 인물이 되어 웃지 못 할 상황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강미혜_꿍꿍이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 유채_112.1×162.1cm_2011
강미혜_no cut story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 유채_112.1×162.1cm_2011
강미혜_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_캔버스에 유채_90.9×116.7cm_2011
강미혜_받아쓰기_캔버스에 유채_80.9×116.7cm_2011
강미혜_최고의 만찬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 과슈_60.2×62cm_2011
강미혜_스트레칭_종이에 디지털 프린트, 과슈_59×98cm_2011

현대미디어로서 신문은 지나치게 일방적인 관점만을 보도하면서 대중은 점점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다. 공공미디어의 변질은 내게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었고 이어 적극적으로 사회적 현실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쫓아가게 했다. 진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경제적 상황은 비현실적인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것만 같다. 나는 이와 같은 현실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 지나친 욕심을 익살스러운 코미디로 풍자한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 그림은 분노와 조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인간 세계에 대한 불신, 절망이기 보다는 인간의 굴레에 둘러싸여 몸부림치고 있는 나약한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자 나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다루고 있다. ■ 강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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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시각: 2011.11.25 18: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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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a Contemporary 3


박경선_정성원展   2011_1124 ▶ 2011_1211


박경선_Echo of Communion #1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1

초대일시 / 2011_1124_목요일_05:00pm

기획 / 가나아트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가나 컨템포러리 GANA CONTEMPORARY 서울 종로구 평창동 98번지 Tel. +82.2.720.1020 www.ganaart.com


Gana Contemporary 시리즈, 그 세 번째 이야기, 박경선 & 정성원 ● 가나아트는 역량 있고 참신한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는 Gana Contemporary 시리즈의 세 번째로 박경선(1983- )과 정성원(1983- ) 작가의 2인전을 선보인다. 첫 번째 시리즈인 강영민의 개인전 『Combat』 에서는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드러냈고, 두 번째 시리즈인 신예작가 김희연, 이수진, 이혜선, 장고운 4인의 그룹전 『The Intersection』 에서는 서로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된 현실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는 인간과 동물을 소재로 한 따뜻한 휴머니즘적 작품으로 주목 받아 온 박경선, 정성원 두 동갑내기 작가의 2인전으로, 어린 시절 내면의 상처나 삶을 살아가면서 잃기 쉬운 순수성과 꿈 등을 예술을 통해 치유하고 회복하는 여정을 밟아가는 작가의 성장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다.
박경선_Echo of Communion #3_캔버스에 유채_145.5×112.1cm_2011
박경선_Egocentric Speech #8_캔버스에 유채_97×97cm_2011
박경선_Egocentric Speech #10_캔버스에 유채_72.7×91cm_2011
박경선_Egocentric Speech #13_캔버스에 유채_91×91cm_2011
박경선_Egocentric Speech #15_캔버스에 유채_162×130.3cm_2011
박경선_Freezing-self Soothing #11_캔버스에 유채_130×130cm_2011

내면의 상처를 보듬기 위한 그들의 동화박경선, 내면의 아이에게 말을 걸다. 마음이 춥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박경선은 내면의 아이에게 스스로 말을 건다. 'Egocentric Speech'라는 제목이 붙여진 시리즈에서 작가는 자신만이 불러낼 수 있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상처 입은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시도한다.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결핍된 마음을 가진 어린 아이를 사랑으로 감싸주는 곰 인형과 곰 인형의 탈은 어른이 되어 내면을 치유하고자 하는 현재 자신의 상징이며, 실 전화기는 과거 자신과의 교감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심리적 안정을 되찾기 위한 통로이다. 한없이 투명하면서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감으로 그려진 그녀의 작품은 화면 속 상처받은 어린 소녀, 곧 자신과의 조심스러운 만남의 장소이자,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애뜻한 감정의 은유이다.
정성원_Antic and Deer_캔버스에 유채_163×112cm_2011
정성원_Antic and Deers_캔버스에 유채_193×260cm_2011
정성원_Antic and Dolphin_캔버스에 유채_163×112cm_2011
정성원_Antic and Lambs_캔버스에 유채_80.3×116.7cm_2011
정성원_Antic and Lambs_캔버스에 유채_91×116.7cm_2010
정성원_Antic and Lambs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정성원_Antic and Rabbits_캔버스에 유채_64×193cm_2011

정성원, 인간의 순수한 행복을 꿈꾸다. 정성원은 인간에게 친근하고 다소 연약하게 느껴지는 사슴, 토끼, 양 등의 동물들을 통해 인간의 때묻지 않은 순수와 행복을 갈망한다. 'Antic and – '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뿔에서 꽃이 피어나는 사슴, 긴 귀 대신 예쁜 글라디올러스를 달고 있는 토끼, 맑은 눈망울을 지닌 양들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며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정성원은 시간에 쫓기며 각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감정이 메말라가는 현대인에게 달콤한 상상의 여행에 동승하기를 권한다. 인간이 회복해야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서, 되찾아야 할 행복을 동화처럼 그려낸 그의 작품은 일상에 쫓겨 상처받은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포근함을 전해준다. 예술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마음 속 따뜻한 울림 ● 저마다의 트라우마(trauma)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박경선, 정성원 작가에게 회화란 단순히 그리는 행위가 아닌, 내면의 상처를 보듬기 위한 수단이자 감성의 표출이며 생존의 방법이기도 하다. 두 작가의 동화적 풍경 속에서 관객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어린 날에 대한 기억과 이상향에 대한 순수한 갈망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 전시는 소통과 치유, 행복과 순수 등의 소망을 쉽게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울림을 전할 것이며, 앞으로 더욱 성장해 나갈 젊은 두 작가의 가능성을 짚어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 가나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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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fting Images


the Korea x Japan Exchanging Photography Exhibition   2011_1125 ▶ 2011_1203 / 일요일 휴관



초대일시 / 2011_1125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Kazuhito Nakazato_Hitoshi Kuriyama_Shoko Ogushi

큐레이터/디렉터 / 에미코 카토(Art Autonomy Network [AAN] )

관람시간 / 10:00am~06:00pm / 토요일_10:00am~03: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보다 컨템포러리 GALLERY BODA CONTEMPORARY 서울 강남구 역삼로 북9길 47(역삼동 739-17번지) boda빌딩 Tel. 070.8798.6326 www.artcenterboda.com


Drifting Images : The New Asian Photography Network ● 비주얼아트센터보다와 Art Autonomy Network[AAN]은 2009년부터 문화교류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습니다. 이 두 예술 기관들은 사진과 연계된 창조적 활동을 통해 문화적 친분을 촉진시키며 문화적인 발전에 공헌해왔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보람 찬 학제적 경험을 고취시키기 위해 몇몇의 학술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진행해왔습니다.

다음은 기획 및 진행 된 프로그램입니다. ● 사진 워크숍 (일본 사진작가들이 한국에 체류하며 진행) ● 사진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2011년 8월에 3명의 일본 사진작가들이 한국에 체류하며 작업했고,     2012년 2월에 2명의 한국 사진작가들이 일본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을 진행 예정) ● 사진 전시회 개최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서울에서의 전시에서, 3명의 사진작가들은 일본에서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 작품들을 출품합니다. Kuriyama Hitoshi, Nakazato Kazuhito and Ogushi Shoko의 세 일본 사진작가들은 그들의 새로운 프로젝트을 위해 각각 2주간 한국에 머무르며 작업했고, 동시에 비주얼아트센터보다에서 강의와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각각의 워크숍은 참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성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마지막으로, 비주얼아트센터보다의 김수혁 대표와 이용완 이사, 기획팀의 윤민화 씨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에는 그들의 도움이 매우 컸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이번 전시회에 관련된 모든 분들에게 나의 큰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에미코 카토

Hitoshi Kuriyama_∴0=1 -light from the earth: Seoul_디지털 프린트_150×198.7cm_2011
Kazuhito Nakazato_R Korea_디지털 프린트_58×172cm_2011
Shoko Ogushi_Brazilian JuJitsu_디지털 프린트_33.3×56cm_2011

기획 및 진행 Emiko Kato / curator&director of Art Autonomy Network [AAN] YongWan Lee / COO of the Center of Visual Art boda MinHwa Yun / Planning&Coordinating team
Drifting Images : Workshop (1) Katsuhito Nakazato 18th, 20th August, 2011 (2) Hitoshi Kuriyama 22th , 24th August, 2011
워크숍 참여자 금헤정, 김도희, 김미동, 박정규, 서정욱, 소지은, 송수령, 양린, 양현준, 오묘, 이다연, 이상미, 조재영, 최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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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presentation


박기일_윤상윤展   2011_1125 ▶ 2011_1223 / 월요일 휴관


박기일_Holder 5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80.5cm_2011

초대일시 / 2011_1125_금요일_06:00pm

TV12 Gallery 청담동 이전 재개관 기념 첫번째 기획展

관람시간 / 11:00am~07:00pm / 월요일 휴관

TV12 갤러리 TV12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81-11번지 B1 Tel. +82.2.3143.1210 www.television12.co.kr


사람이 '보는' 행동, 즉 시각적 감각은 인간의 그 어떠한 감각보다 강렬하다. 현대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엄청난 시각적 정보를 접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 사람들에 비해 몇 십 배나 많은 수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시각적 정보들은 보여주는 사람의 의도에 맞추어 생성, 편집되기도 하고 대량생산 되기도 한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은 우리가 자의적으로 혹은 원초적으로 보고싶어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보여주는 사람의 욕망이 담겨있는, 타의적이고 의도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많다. 사물이 가진 본질성은 "언어의 순환"을 통해 혹은 "이미지 복제"란 행동을 통해 사물이 본연에 가진 순수성에서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인간의 '보는' 행동, 즉 무척 원초적이고 자의적인 행동이 이제는 더 이상 자의적, 혹은 선택적일 수 없다는 얘기다. ● 『Re-Re presentation』는 이미지가 생성되고 또 보여지는 과정(Presentation)에서 선택자의 입장을 재정의한다. "Re-Re" 란 단어를 통해 선택되어 보여지는 이미지들을 작가의 눈으로 재해석해서 순화하는 행위인 것이다. 즉 보여주는 사람의 선택권을 보는 사람이 다시 가져오는 행위이기도하며 그렇기 때문에 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작가의 감정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박기일_Plastic Memory 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46×89cm 2011
박기일_Plastic Memory 4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80cm 2011

박기일(b. 1981)은 모형 장남감인 피규어(Figure)시리즈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는 인간의 시각에 의해 파생되는 다양한 현상에 주목해왔는데 그동안 선보인 마스크(Mask)시리즈와 기계(Complex)시리즈, 엔진(Engine)시리즈에서도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전작에서 소재가 되어 왔던 마스크, 기계, 엔진은 캔버스에 마치 사진처럼 그려진 작품이었다. 사진처럼 그려졌다고 하여 극히 리얼하고, 완벽하게 묘사되는 극사실주의를 고수한다는 입장은 아니며 작가는 자신의 시각이 비친 사실성만을 그려내고자 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피규어 시리즈는 시중에 나와 있는 피규어가 아닌 작가가 선택한 특정 인물(스티븐 잡스, 데미안 허스트 등)들이며, 그 인물과 관련된 사물들을 함께 배치하여 그려낸 작가만의 피규어로, 피규어라는 형식의 특성만을 작업에 이용하였다. "...(중략)...박기일의 작업은 시각적 재현에 대한 욕망이라는 단순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본다는 것, 무엇인가를 관찰한대로 평면에 옮겨 갖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망. 원시 예술의 발생과 함께 이야기되는 이 전통적인 동기는 이 동시대 작가에게도 역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회화는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대상에 대한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인류의 영리한 발명품일 것이다. 어떤 물리적 상처도 남기지 않은 채 오로지 시신경의 힘만으로 대상을 갈취하는 방법...(중략)..." ('소유한 것을 다시 소유하는 방법'中_유혜인) 어떠한 소재에 대한 반복적인 접근은 그 대상에 대한 소유욕, 욕망을 드러내는 방법일 수 있다. 위의 글처럼 박기일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욕망을 회화란 매체를 통해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윤상윤_Sub bike_캔버스에 유채_90×65cm_2011
윤상윤_Sub bike2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11
윤상윤_Protem9_캔버스에 유채_112×193cm_2011

윤상윤(b. 1978)의 작업은 "개인과 군중", "개인과 도시", "자아와 군중", "개체와 주변풍경", "군중과 주변사회" 등이 등장한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개인"은 작가자신이거나 주변지인 혹은 동물 하나를 지목하여 중심에 위치하고 그에 대립 혹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초현실적 주변풍경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회상의 한 장면인 듯 기묘하다. 이처럼 작가는 자기정체성의 영역과 자기 에고에 대한 고민과 의견을 다양한 이미지들을 통해 보여준다.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해석과 경계는 현대인이 지극히 공감하는 현재이며 과거이다. 작가들은 다양한 사회에 적응해가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고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문제의식을 드러내곤 한다. 윤상윤은 "…(중략)…그룹이 공유하는 정체성은 곧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룹이 형성한 패러다임을 위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곧 정체성에 대한 거부, 권력에의 대항이기 때문에 개인의 개성은 점점 다듬어져가고 평범해진 정체성만 남는 상황이 현대사회구조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작가는 현대사회에서 일반화된 개념과 정체성으로 인해 익명화된 개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현대사회의 단점을 말하기보단 익명화된 주변인물과 함께 자신도 안정적인 사회적 노선에 위치하고픈 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윤상윤은 새로운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겪어야 하는 고독의 상황을 화면구성의 직접적인 요소로 연출한다. 주로 캔버스의 중앙에 위치하는 인물은 수많은 자전거 속에서 홀로 서있거나, 책상 위에서 사색하는 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 TV12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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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뺨에 석양


이혜인展 / LEEHYEIN / 李惠忍 / painting   2011_1124 ▶ 2011_1211 / 월요일 휴관


이혜인_네 뺨에 석양展_브레인 팩토리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1210h | 이혜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112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작가 이혜인은 사회를 지배하는 제도와 정치적 권력에 의해, 또는 자본의 힘에 의해 기계적으로 본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종당하고 지배당하는 구조 속에 처해 있다고 보고 있으며 특히 한정된 조건 하에 처해 있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의 방법에 대하여 고심하고 있다. 단순한 인물이 아닌 이미 결정지어진 형태의 뼈대를 지닌 미디어를 통해 자본주의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들이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면 그들의 정보를 통해 짓이겨진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고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가상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세우듯 직접 사생한 풍경의 재해석을 가하여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불안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직접 드러내고 있다.
이혜인_붉은 눈 Red eyes_캔버스에 아크릴, 유채_150×200cm_2011

그 동안 작가는 일련의 표현성이 강한 드로잉과 회화, 그리고 회화적 상징 체계를 은유하고 있는 설치 작업을 통하여 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리가 결국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게 규정지어진 특정한 조건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표현해 오고 있다. 작가의 세계관은 서울 근교 '능곡(陵谷)'을 배경으로 과거 기억 속 인물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상징화한 이미지들의 탄생과 소멸이 순환되는 구조로 펼쳐진다. 언덕과 골짜기를 이르는 '능곡'은 옛 왕들의 무덤이 가까이 있는 유래가 아주 오래된 옛 고을이다. 또한 그 곳은 작가가 나고 자란 고향이며 기억이 켜켜이 누적되어있는 하나의 세계이자 우주를 이르는 공간이다. 그러나 수도권의 살기 좋은 땅들이 그러하듯이 그리 멀지도 않은 과거의 그 땅은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 밀려 원래의 모습이 처절하게 깍여 나갔으며 콘크리트의 해일은 붉은 흙의 대지를 덮어버렸고, 그 파괴는 여전히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이혜인_합창 choru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30×450cm_2011

옛 사자성어에도 능곡지변(陵谷之變)이라고 했다. 높은 언덕이 변(變)하여 깊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變)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극심하게 뒤바뀜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저런 건설에 의해 지형이 변하고 수고롭고 어렵게 세워진 집들이 세워졌다 부숴지기를 무수히 반복하는 사이 어쩔 수 없이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 했던 경험은 역설적으로 작가가 다시 능곡 주변을 서성이도록 이끄는 수구지심의 원심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곳에서 작가가 목격한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풍경들은 작은 사생으로 옮겨지고, 굴절된 시선으로 번안된다. 그곳의 절개된 언덕과 얕은 골짜기 마다 깃들여 있는 본래의 것에 대한 흐릿한 기억은 상처처럼 남아있지만 작가의 거친 그림 속에서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 돌아와서 불완전한 존재들에 대한 의인화된 상징으로 대치되어 재 탄생한다. 불도저에 의해 파헤쳐진 대지와 그 살점을 긁어 나르는 중장비의 굉음, 거대한 황토 먼지 꼬리가 달린 위압적인 덤프 트럭의 도로 질주, 뻘건 흙 무덤들, 그런 들판 가운데 홀로 남겨진 촛불처럼 불타는 목조 집, 잘려나가는 숲, 뻥 뚫린 검은 구멍, 그림 가운데를 뚫고 나오는 또 다른 공간과 함께 중의적인 상징으로 의인화 되고, 과거의 친구와 이웃과 가족들은 바로 비극적인 표정을 짓는 인물들의 초상이 되었다.
이혜인_흰 그림자 white shadow_캔버스에 아크릴, 유채_230×450cm2011

이번 브레인 팩토리에서의 개인전은 전체의 공간이 이글거리는 실루엣의 풍경 3면화로 뒤 덮인 상태로 보여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거대한 양 옆 회화는 긴 벽을 거의 덮을 크기(230×450cm)로 가로 세워 설치되며, 전시장의 중앙 벽에는 능곡의 한 풍경을 사생한 드로잉들을 바탕으로 자동기술적으로 그린 그림 '붉은 눈'(150×200cm)이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이 그림에서 관객을 향해 두 개의 붉은 눈이 형형한 안광을 내뿜고 관객을 쏘아본다. 이 3면화는 석양이 내려 앉는 언덕과, 그 빛 속에 물들어 있었던 옛 친구의 모습, 그의 뺨에 머금어졌던 홍조를 되새기며, 기억 속에서 뭉개져 가던 능곡의 풍경을 하나씩 토해내고 또 다시 되삼켜간 것이다. 작가가 그 동안 지속해 온 인물 초상 드로잉 시리즈와 사생 드로잉 작업들을 대형 화면에서 다차원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 뭉개진 색의 덩어리들로 겹쳐진 풍경과 곳곳에서 현수된 인물들은 어떠한 힘에 의해 짓이겨져 해체되고 기괴한 풍경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 뒤섞이는 것들은 작가가 정해놓은 순환의 법칙에 따라 고립되고 파열되어 또 다른 탄생의 순간으로 이행한다. 그곳 지표 아래에 잠들어 있는 기억 속 이웃들의 모습과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풍경들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덕지덕지 짜여 있다. 이 낯설고 기괴한 신세계는 생성과 동시에 이미 녹아 내리고 있고, 직선들이 쪼개지는 듯 교차하는 공간의 표면 아래에서 파열이 시작되고 있다. ● 유리질 기억의 파편들은 더 작은 조각들로 잘게 부서지며, 허공에 떠있는 어떤 힘에 의해 파열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림의 가운데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구멍이 깨지고 부숴지는 세상의 파편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또 다른 지점에서 생성되고 있는 블랙홀의 등장으로 인해 이와 같은 카오스는 결코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점점 가속될 것을 예감케 한다. 결국 작가 자신과 가족, 그녀가 속한 세상의 파괴를 통해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의 실상을 벗겨낸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면서 예술가의 의지를 스스로 고통스럽게 고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 최흥철
이혜인_네 뺨에 석양展_브레인 팩토리_2011

Sunset on Your Cheeks



 

2011.11.25 18:34:39 / Good : 347 +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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