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 SPACE
캐논플렉스 2주년 특별展 2011_0331 ▶ 2011_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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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참여작가 / 정연두_예기_이지회
총괄디렉터_엄태성
주최_캐논플렉스 주관_에이비군단
관람시간 / 11:00am~08:00pm
캐논플렉스 서울 강남구 신사동 664-12 Tel. +82.2.2191.8559 www.canon-ci.co.kr
캐논코리아 컨슈머이미징(주)은 캐논플렉스 개관 2주년을 기념하여 '캐논플렉스 2주년 특별전시 『SCENE & SPACE』展'을 준비하였습니다. 작품성과 완성도를 고루 갖춘 최고의 현대 미술가 3인이 '장면과 공간'을 모티브로 작업한 영상과 사진을 감상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꿈을 창조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기록적인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예리한 관찰자 '예기',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을 조명하여 재구성하는 연출가 '이지회'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상상의 공간, 낯선 장면, 관념적 상황 속에서 세 명의 작가는 카메라가 단순히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기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의 철학과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디지털 허브로서의 가능성을 여는 도구라는 것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지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번 전시의 목적을 철학 또는 미학의 주제로서 작품을 담론, 비평하는 자리가 아닌 편안한 마음으로 예술가들의 생각과 철학을 함께 공유하는 장면과 공간의 시간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 엄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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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연두_Ordinary Paradise 일상 속 낙원_영상_2010
Ordinary Paradise 일상 속 낙원 ● "누군가의 낙원은 또 다른이의 일상이다." 2010년 싱가포르와 서울을 오가며 만든 이 작품은, 서울 공덕동에 사는 준하씨의 낙원과 싱가포르의 차이나 타운에 사는 Rika씨의 낙원을 각각 그들의 집앞에서 구현한 작품입니다. 집앞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온 도시가 물에 잠겨있어 한살난 아이와 물속에서 수영을 하는것을 꿈꾸는 준호씨. 어릴적부터 대만 일본 미국 유럽 등지를 이사하며 살아온 Rika씨는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친한 친구들과 추억의 물건들을 한곳에 모으고 싶어합니다. 싱가포르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마리나 샌더스 베이 호텔 옥상 수영장에서 찍은 이미지와 비치 파라솔 아래 구명튜브를 들고 서있는 친구의 모습을 공덕동 준하씨의 집 앞에서 구현하였습니다. 서울의 한 영화 소품 창고에 Rika씨의 소중한 추억의 물건들을 모아 찍은 사진과 인터넷을 통해 받은 친구들의 사진을 출력해 입간판처럼 Rika씨의 집앞에 새워서 촬영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낙원이 일상 속에서 점차 구현되가는 동영상 작품입니다. ■
정연두 -
- 예기_르페브르 극장-3년_영상&사진_2010
르페브르 극장-3년 ● 「르페브르 극장_3년」은 관음증에 대한 작업이다. 인간이 가진 시각적 충동과 시각 애호(scopophilia)증에 대해 심리학자들은"인간은 늘 주위의 사물과 이미지를 쳐다보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보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해왔다. 나는 파리에서 살면서 3년에 걸쳐 건너편 건물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몰래 관찰해서 사진으로'기록'했다. 나는 건너편 건물의 발코니를 내가 살던 파리의 거리이름을 따서'르페브르 극장'이라 지칭하고, 그곳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을 내'마음대로 상상'하고', 그들의 대화를 나의 대화와 섞으면서'나만의 작은 세계를 만들었다. 나는 이 작은 세계를 관찰하면서 지극히 내적이고 섬세한 인물이 되어갔다. 나는 그들에게 일어나는 작은 사건 하나로도 흥분하였고, 그들의 작은 변화도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르페브르 극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텔레마케팅 회사의 직원들이다. 회사건물의 발코니에 그들이 나타나면 '공연'은 시작된다. 바쁜 하루 일과 중 매우 짧은 순간동안 그들은 이곳에 등장한다. 담배 한대, 전화 한 통화, 한 숨 돌리기, 짧은 동료간의 수다 만큼의 길이. 「르페브르 극장」은 그들에게 있어 일종의 오아시스이고 하나의 여백이다. 그것은 공적 시공간의 틈새에 마련된 사적 시공간을 의미하며, 치열하고 매정한 하루 일과 중 단 1분간의 휴식과 여유를 되찾기 위해 벌어지는 단막극을 보여준다. 나는 "나"를 숨기고"남"을 엿보는 이 바라보기(looking)에 기묘한 쾌감을 가졌다. 관음증은 우리가 가진 가장 본능적인 욕구이다. 관음자는 언제 들킬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더 스릴있으며 긴장감을 느낀다. 그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흥미로워진다. 지나치게 사소한 사건이라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된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관음증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갖게 되었다. 결코 욕망에 의해 뒤틀리지 않으며 피상적 엿보기와도 다른 의미의 엿보기의 가능성에 관해서 말이다. 이 관(음)조증은 도덕적으로는 바르지 못하다는 모순을 내포한다. 그러나 모순은 때론 매우 고무적인 것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의 경계에서 위태하나마 대상을 유희하는 것이 이 관음증의 내용이다. 이것을 새로운 의미의'관(음)조'라고 해도 좋겠다. 긴장감, 위험을 포함하는 의미의 관조 말이다. 이러한 관음-관조(관음조)는 그야말로 타자에 대한 짝사랑이야기이다. 그것 앞에서 대상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
예기 -
- 이지회_Boy Ascending a Staircase No.2 계단을 오르다_영상_2011
Boy Ascending a Staircase No.2 계단을 오르다 ● 나의 작업은 건축의 영화적 적용이라고 할수 있다. 건축적 구조가 주는 특유의 감성이 주인공이 되는 단편영화를 찍어오곤 했는데, 이번 캐논을 위한 작품을 위해 60-70년대 지어진 여러 거주 공간 및 공공 공간의 계단을 모티브로 짜여진 시나리오가 구성된다. 영화는 마치 고고학 탐사를 하듯, 이제는 도시의 유령이 되어 버린 공간의 건축적 구조를 기념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촬영되지만, 그 다른 공간들이 영화적 기법을 통해 하나의 혹은 연결된 건축물인듯 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건축적 구조를 둘러싼 움직임, 그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면서 영화는 긴장감, 유머 그리고 반전을 유도한다. ■
이지회 기억을 그리다
이지연展 / LEEJIYEON / 李知娟 / painting 2011_0421 ▶ 2011_0503 / 일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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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2558100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33×77×4cm_2010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90422d | 이지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2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보다 컨템포러리 GALLERY BODA CONTEMPORARY 서울 강남구 역삼로 북9길 47(역삼동 739-17번지) boda빌딩 Tel. +82.2.3474.0013 www.artcenterboda.com
이지연의 기억이 가진 서사적 특이성 ● 기억은 이야기와 닮아있다.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그리고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빚어진 것이 기억이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라는 기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곧 이야기의 기본 기둥이 되며, 따라서 기억을 말할 때 우리는 이야기꾼이 된다. 예술가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이고 예술은 달리 표현하면 기억을 말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실재의 기억일 수도 있고 꿈의 기억이나 무의식의 기억일 수도 있으며 개인적인 기억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기억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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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2558101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33×77×4cm_2010
이지연이 그려낸 기억은 실재적이며 동시에 사적인 기억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촉발된 자신의 유년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그려내었다. 『기억을 그리다』 그런데 그가 기억을 그려내는 방식은 독특하다. 기억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시간과 인물이라는 두 요소를 소거하고 그 자리를 공간으로 채워낸 것이다. 『Recollecting Spaces』 전시의 제목에 주목하는 관객들은 이 부분에서 의문을 품게 된다.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기억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가? 이지연이 기억을 그려내는 방식의 특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작품의 출발점인 그의 유년의 기억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은 이 지점에서 유효해진다. ● 앞서 말했듯이 작가는 실재적이고 사적인 기억에서 이 시리즈를 시작하였는데, 1970년대 초반 부산시 수영구 광안1동에 지어진 주택과 그 안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그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들과 함께 하였던 유년의 기억을 그려내기 위해서 이지연은 공간이라는 요소를 작품의 전면으로 내세운다. 공간 그 자체를 기억이자 서사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기억-서사 안에 다시금 시간과 인물을 배치한다.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하는 것은 색과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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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292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100×60×5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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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2923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34.8×27.3×4, 77×33×4cm_2011
「Recollecting Spaces - 기억을 그리다」의 주조를 이루는 보라색은 공간의 주된 인물인 작가의 할머니이다. 보라색은 신비하고 오묘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기억의 색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꽃으로 치자면 할미꽃인 보라색을 받쳐주는 보조 인물은 개나리꽃 같은 노란색이다. 어리고 생동감 넘치는 노란색은 할머니의 손길 아래 있는 아기를 나타내며 이는 작가 스스로를 상징하기도 한다. 할머니와 아기가 공존했던 유년의 기억이 공간 안에서 서사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가는 1970년대 초반이라는 시간을 침착한 직선으로 표현한다. 작품의 배경이 된 주택이 지어진 것이 1970년대 초반인데, 이 시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대개 그렇듯 이 공간 역시도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계획이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 양산된 실용적인 주택들의 특징을 가진다. 직선적이고 단단하면서도 이후에 등장하는 아파트에 비해서는 전통가옥의 정서와 완전히 유리되지는 않은 것이다. 작가는 이것을 공간의 연속성에 초점을 둠으로써 강조하였다. 단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와는 달리 복층 구조의 주택은 계단과 복도가 필수적인데, 이를 통해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는 가능성이 생겨난다. 이지연은 문이나 복도, 창문, 계단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서 모든 공간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또 다른 공간으로 연속된다는 암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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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861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77×49×4cm_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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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연_기억을그리다#1_8612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라인테이프_53×33.3×4cm_2011
이처럼 작가가 의도한 서사는 상당히 내밀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독립적으로 이지연의 작품은 그 자체로 충분히 심미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조형의 기본 요소에 충실한 이지연의 공간들은 차분하고 청결하다. 수없이 정제된 것임을 느끼게 하는 균형과 조화가 흐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작가가 의도했던 서사를 읽어나가든지 혹은 관객 나름의 서사를 만들어가든지 간에, 이지연의 공간은 보는 이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다음에는 어떠한 서사를 지닌 공간으로 우리를 끌어들일지 기대해본다. ■
박성진 민병헌展 / MINBYUNGHUN / 閔丙憲 / photography 2011_0421 ▶ 2011_0520 / 일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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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MG004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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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11_042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6:30pm / 일요일 휴관
카이스 갤러리 CAIS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82.2.511.0668 www.caisgallery.com
민병헌의 작품에 대하여_풍경과 누드 : 시선의 방법론 ● 민병헌의 최근 풍경사진들은 흐릿한 겨울의 바닷가, 끝없이 눈발이 흩날리는 깊은 계곡의 산자락과 같은 아스라한 공간들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을 기억할 때마다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 짙은 회색의 공기는 여기에서도 예외 없이 대기를 부드럽고 희미한 톤으로 뒤덮고 있다. 그의 사진들에서 풍경들은 희박하다. 그리고 이 희박함은 세 가지 방향에서 민병헌의 사진을 교직(交織)한다. 첫 번째는 대기를 채우고 있는 습한 빛에 의한 희박함이고, 두 번째는 시야(視野)가 남기는 여백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시선과 대상 사이의 거리에 의해서 생겨난다. 대상은 시선에서 최대한 먼 곳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특이성을 요구한다. 이 세 가지의 희박함- 빛, 여백, 거리-의 중첩은 민병헌의 사진을 구조적으로 완결하는 요소다. 다시 말해, 그의 사진은 희박함으로 구축되어 있다. 왜 그럴까? 어째서 사진은 희박해야 하는가? ● 희박함은 호흡을 가쁘게 한다. 이 중첩된 희박함은 주변의 공기를 물들인다. 민병헌의 사진이 전하는 역설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볼수록 시선의 현전을 강렬하게 감지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은 숨을 멈추게 한다. 시선이 흔들리거나 대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 숨을 참으면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혹은 바라보아야 할 뚜렷한 대상이 없다. 그곳에 있는 것은 풍경의 일부, 다른 풍경의 부분들과 동일한 평범한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전체를 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치 프랙탈 효과처럼, 부분은 전체의 반복이다. 사진가는 공간 전체를 개관(槪觀)하는 대신, 집요하게 부분을 응시한다. 텅 빈 희박한 공간의 미세한 점을 뚫어지도록 보는 것이다. 역으로, 먼 곳에 있는 대상은 강렬한 시선을 요구한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더 집요하고 명료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조금만 방심해도 금방 어디에 있는지 잃어버리거나 식별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흔들림 없이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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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SS098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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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SS108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먼 곳의 풍경이다. '멀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시선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 인해 시선이 소멸하는 (눈이 머는) 것이다. 먼 곳의 풍경은 손에 잡힐 듯 하지만 매번 그 곳에 없는,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을 속성으로 한다. 먼 곳을 바라보는 이유는, 그 곳에 갈 수 없거나, 가서는 안 되는 곳이거나, 혹은 먼 곳에서만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세 가지 모두가 이유일 수도 있다. 어떤 장소를 먼 곳에서 바라보기 위해서는 넓은 시계 안에서 그 장소를 찾아야 하고, 이어서 그 곳을 집중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그 곳은 넓은 연속성의 일부이지만 나의 시선에 의해 다른 모든 장소들로부터 구별된다. 시선은 거대한 공간의 일부를 커다란 거리를 가로질러 다른 부분으로부터 떼어낸다. 시선이 세계를 분절하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분절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Sea」 연작은 바닷가에서 바라 본 수평선 아래의 거친 바다의 표면과 파도가 부딪히는 연안의 바위들, 모래사장과 그 위로 날아가는 물새들의 흐릿한 그림자들을 포착하고 있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겨울풍경 안에 서있는 작가와 그의 고막을 때리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그가 들여다보고 있는 뷰파인더 안에는 망원렌즈가 포착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바다의 비밀스런 표면이 확대되어 나타나있다. 덧없을 만큼 먼 곳의 덧없는 작은 풍경의 덧없이 짧은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작가는 아무도 없는 겨울 풍경 속에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본다. 그의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공감각적 장면을 공감(共感)한다. 민병헌의 사진은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 산, 나무들, 새들은 구체적 맥락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들은 아무리 봐도 작가의 시선 속에서 특이성을 과시하는 피사체들이 아니다. 그의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구체적 풍경이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멂'이다. 사진을 보는 관객의 위치로부터 사진이 보여주는 피사체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는 아득한 공간이 위치하고 있다. 사진은 피사체를 가리키는 대신 이 빈 공간을 가리킨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빈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대신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기와 시간의 흔적, 입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카메라는 그 시선을 기록한다. 빛이 드러내는 것 역시 이 비어있는 거리다. 사진은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기록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진가의 의도가 빈 공간을 향할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계'로서 무엇인가를 기록한다. 사진의 '기계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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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SL205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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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SL359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1
세 개의 막(膜) : 1) 격막(diaphragm), 2) 망막(retina) 혹은 감광면(photosensitive plane) 그리고 3) 투명한 원근법적 피라미드의 밑면이 있다. 격막은 카메라의 내부에 존재하는 사각형의 암막으로, 초-고속으로 열렸다 닫힘으로써 시간을 선택하고 분절한다. 망막은 이미지가 성립되는 장소이며, 반사거울(reflector)에 의해 사진의 감광면과 일치한다. 사진이 눈이 본 것을 기록한다는 표현 속에는 망막과 감광면 사이의 미세한 시차, 간격이 무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진이 사진가가 본 것이라고 믿는다. 사진가가 이 차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투명한 원근법적 사각뿔의 밑면이란, 카메라가 구조적으로 내포하는 일안적(monocular) 투시에 의한 가상의 투명한 막, 피사체 앞의 절단면(virtual cut)을 가리킨다. 이 투명한 막은 사진기를 통해 망막 혹은 감광면에 기록되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사진은 이 가상의 막(virtual layer)을 기록한다. 이 세 개의 막은 각각 상이하지만, 카메라에 의해 동일한 위치에 놓인다. 자연에 내재하는 무한한 지속, 비-가시성, 공간의 연속성(continuum)으로부터 시간의 분절, 가시화 그리고 불-연속성을 추출해내는 프로메테우스적 장치로서의 사진이 지니는 경이는 이 '막'들의 중첩에서 비롯된다. 망원경이 두 개의 렌즈를 중첩함으로써 거리를 소멸시키는 것처럼, 사진은 세 개의 막을 중첩시킴으로써 세계와 시선을 일치시킨다. 사진의 기계성은 이 일치의 과정이다. ● 「Snowland」 연작은 앞서의 「Sea」 연작에서처럼, 뚜렷한 피사체를 찍은 것이 아니다. 절벽이나 숲, 눈 덮인 들판, 나무 한 그루, 전봇대가 서있는 도로 따위는 서로 필연적인 연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눈이 흩날리고 있거나 쌓여 있다는 것이다. 눈은 흰색과 밝은 회색의 톤을 사진의 전면에 부여하여 전체를 흐릿하게 만들 뿐이다. 눈은 빛을 대체한다. 눈에 덮인 세계는 사진을 최소화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나무와 산비탈의 흙은 마치 가볍게 긁힌 자국들처럼 희미하게 화면을 덮고 있다. 눈이 내린 세계는 어디를 보아도 균일한 거리의 음영(陰影)들만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카메라는 어디를 바라보건 상관없다. 그것은 다만 어딘가를 바라볼 뿐이다. 사진의 기계성에도 불구하고 이 시선 속에는 어떤 다른 것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시선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혹은 무엇이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지, 등의 질문들과 연관된다. 시선의 욕망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대신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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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MG134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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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헌_MG209, MG210_젤라틴 실버 프린트_2010
「포트레이트」 연작은 여성을, 그것도 옷을 반 쯤 걸쳤거나 벗은 여성의 누드를 찍은 사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사진들은 다른 민병헌의 사진들과 달리 구체적인 욕망의 대상을 적시하고 있다. 피사체인 여성의 몸은 마치 목탄으로 그린 것처럼 상대적으로 뚜렷한 부분들과 흐릿하게 번진 듯한 모호한 그림자들로 묘사된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이 '포즈'에 있다고 보았다. ("나는 과거에 찍은 현전하는 사진의 부동성(immobility)을 다시 바라본다. 포즈는 바로 이 정지상태에 의해 구성된다."(Roland Barthes, "Chambre claire", ed. du Seuil, p. 123)) 무엇보다도 사진은 '인물의 예술(art de la Personne)'로 시작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인물사진은 두 가지 상반된 대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했던(ça-a-été)' 대상으로서의 피사체, 즉 사진이 가리키는 의식의 대상인 '노에마(noème)'로서의 인물을 적시하지만, 동시에 현재 '살아있는(vivante)' 것으로 되살려진 대상을 눈 앞에 제시한다. 그것은 죽은 것의 살아있는 이미지이다. 사진이 영화와 다른 점은 정지를 통해 이 역설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그리고 '포즈'는 이 이미지 이후에 다른 어떤 다른 이미지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 '존재했던'과 '살아있는' 것 사이의 거리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몇 초 사이이건 아니면 한 세기를 넘게 지난 것이건 사진은 대상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며 동시에 그것을 생생하게 지금-여기에 되살린다. 시선이 사진 앞에서 존재감을 잃는 것은 바로 이 사진의 이 끔찍한 이중성(시체-생생함) 때문이다. 민병헌의 사진 속에서 '포즈'는 또 다른 거리 (반투명한 스크린)에 의해 멀어진다. 사진의 이중성이 만들어내는 신체의 생경함은 '멂'에 의해 시선의 소멸로 이어진다. 대상에 대한 시선의 욕망이 사진의 이중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시선의 소멸 혹은 희박함은 사진의 이중성 그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생생한' 대상이 아니다. 대상은 사라지거나 멀어지고 있다.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것이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흐릿해지고 있다. 남은 것은 사진의 표면과 그 표면에 기록된 시선의 흔적이다. ● 「포트레이트」 연작은 다른 풍경사진들처럼 텅 빈 공간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피사체인 여성들의 모습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에로틱하다. 아무리 멀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흐릿하게 기록된다 해도, 이 인물들이 남기는 최소한의 윤곽은 그 자체만으로 시선의 욕망을 강렬하게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풍경사진과 인물사진의 차이이다. 그러나 주체는 욕망이 아니라 시선이다. 풍경과 누드. 이 두 가지 범주 사이를 오가면서 민병헌이 드러내는 시선의 모습이 곧 이 전시의 테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주체로서의 시선이야말로 사진이 생산하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
유진상 화해 花解 Reconciled
한원석展 / HANWONSUK / 韓沅錫 / installation 2011_0422 ▶ 2011_0519 / 일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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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Reconciled_1,6360개 스피커, 종이지관, 앰프_300×500×100cm, 종이지관 300×12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061006a | 한원석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22_금요일_05:00pm
후원 / 서울문화재단_BH 어쿠스텔_하나은행
관람시간 / 10:00am~07:00pm / 토요일_10:00am~06:00pm / 일요일 휴관
갤러리 압생트 gallery absinthe 서울 강남구 신사동 630-21 B1 Tel. +82.2.548.7662~3 www.galleryabsinthe.com
화해(花解) Reconciled ● 2003년 처음 만난 한원석은 경계성 성격장애, 대인기피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수틀리면 버럭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귀에 거슬렸고, 안되는 것도 될 수 있다는 고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었다. 그러다가도 혹 길에서 껌 파는 할머니라도 만나면 꼬옥 돈을 쥐어 준다. 그것도 천진한 얼굴을 하며 "할머니 오래오래 많이 파세요". 좀 전까지만 해도 에스프레소 사먹을 돈이 없다 투덜대던 사람이 어디서 만원짜리 선심이 나온 것인지. 비상금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그의 언어와 행동의 진폭은 보통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당황스럽고, 그래서 이해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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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Reconciled_1,6360개 스피커, 종이지관, 앰프_300×500×100cm, 종이지관 300×12cm_2011
그에게 있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해야될 것과 해선 안되는 것에 대한 경계선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화가가 되고 싶어 노가다판에 뛰어 들더니 진짜 건축가가 되었고, 음악이 좋아 소리를 쫒더니 꽤 괜찮은 소리작업도 만들어 냈다. 한 동안 베이징 798에선 대안공간도 운영했었고 거기서 패스티벌도 기획했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과 가고 싶은 길을 가는게 중요하지 사람들의 시선따윈 무시해도 좋다는 식이다. 괜히 고집피우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쌓이게 될 오해 역시 신경쓰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한 "실수"도 많았다. 필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한동안 그를 멀리하고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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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Sound Forest_종이지관_310×12cm_2009
2010년 가을 한원석 작가를 다시 만났다. 작품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3년 죄수복을 입고 담배꽁초 수십만개를 쌓아 올린 "악의 꽃"으로 출발했을 때만해도, 다시는 버려진 오브제(사람들은 이를 "쓰레기"라고 부른다.)를 예술품으로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막대한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야 할 수 있는 전시였기 때문이다. 예상은 빗나갔다. 2006년 1374개의 버려진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모아 첨성대 작품 "환생"을 만들더니, 2년 뒤 2008년에는 3088개의 스피커를 모아 선덕대왕신종을 재현한 "형연"을 선보였다. 사회로부터 버려진 것들을 모아 예술작품으로 환생시키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지켜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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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나래쇠북_3,088개 스피커에 도색_375×227cm_2008
말 그대로 "꽃을 풀어내다"란 뜻에서 출발한 전시 "화해"는 그 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속 마음을 털어 놓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40여일간 1만 6000여개의 스피커를 전시장 벽면에 붙혀 나갔다. 처음에는 큐레이터(필자)와의 작은 화해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세상과의 화해, 환경과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 그리고 작가 자신과의 화해로 확장되었다.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1만 6000개의 검은색 스피커에 둘러 쌓인 소리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자 희미한 울림이 점점 커진다. 그러나 소리의 출처를 찾기 쉽지 않다. 벽면의 수많은 스피커들 중 어느것 하나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두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소리와 침묵하고 있는 스피커란 아이러니한 상황이 말을 건네고 싶지만 머뭇거리고 침묵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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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형연 泂然_3,088개 스피커에 도색_375×227cm_2008
첨성대, 성덕대왕 신종 등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상징하는 형상을 만들었다면, 이번에는 형상 자체를 지워 버렸다. 그래서 소리에 좀 더 몰입 할 수 있도록 했다. 대신 인공적 소리의 원리와 자연의 소리의 원리 사이에서 접점을 발견하는데 집중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했다. 일반적으로 스피커가 특정 방향으로 소리를 전하는 지향성이라면, 그가 만들어 내는 옻칠된 지관 스피커는 인간의 목소리처럼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무지향성이다. 1만 6000개의 스피커 중 달랑 1개를 떼어와 전시장 중앙에 위치한 둥그런 지관 울림통에 설치했을 뿐인데 효과는 일 당 백이다. 작은 스피커 하나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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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환생 Rebirth_1,374개 폐헤드라이트_917×493×493cm_2006
쓰레기와 예술, 인간과 자연, 문명과 환경, 전면과 후면, 빛과 그림자 등 한원석 작품의 큰 특징은 이원론적 구조 사이의 경계 위에 있다. 그리고 이를 건축가답게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이 그려진 전면만 강조하는 회화에 반기를 들고, 냄새나는 담배꽁초 작업으로 전면과 이면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작가에게 있어 냄새나는 이면이 진실이고 화려한 꽃이 그려진 전면이 허상이다), 폐 헤드라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LED 빛을 통해 첨성대의 역사적, 공간적 한계상황을 극복하며 미래의 빛을 만들어 냈고, 폐 스피커 작업을 통해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영역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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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원석_환생 Rebirth_1,374개 폐헤드라이트_917×493×493cm_2006_부분
이렇듯 냄새, 빛, 소리 등을 고집스럽게 수집해온 한원석의 일관된 주제는 욕망이다. 그는 그것을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욕망으로 나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개인의 욕망으로, 사회적 욕망은 출세욕, 권력욕, 물욕 등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점차 괴물처럼 거대해지고 있는 사회적 욕망과 점차 사라져 가는 개인의 욕망 사이의 불균형을 회복할 처방제를 "쓰레기" 더미에서 찾는다. 인간의 쾌락과 사회적 편의를 위한 욕망에 의해 태어났지만, 그 기능을 다하고 버려져야만 하는 "쓰레기"야 말로 최적의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냄새, 빛, 소리 모두 생명의 상징이기에 버려진 오브제가 쉽게 탈맥락화하되어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쓰레기를 작품으로" 바꿀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만들어 낸 편집증적인 수집 보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기꺼이 스스로를 "죄인", "회개자"로 명명하며 죄수복을 입고 작업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일시적이면 퍼포먼스라고 말할텐데, 벌써 10년째다. 언어로 진심을 표현할 줄 모르는 이 괴팍한 아티스트가 세상과 화해하는 방법 역시 꽤나 유별나다. 그래서 힘들 사람들보다 그래서 바뀔 세상에 대한 가치가 더 크다고 믿는 한원석이다. ■
이대형 재매개: 모형주의 사진학 입문
아트라운지 디방 2011 출사표 선정展 2011_0422 ▶ 2011_0522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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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매개: 모형주의 사진학 입문展_아트라운지 디방_2011 이문호_임선이 하태범_김정주
초대일시 / 2011_0422_금요일_06:00pm
참여작가 / 이문호_임선이_하태범_김정주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5월 5,10일 휴관
아트라운지 디방 ART+LOUNGE DIBANG 서울 종로구 평창동 435번지 Tel. +82.2.379.3085~6 www.dibang.org
재매개: 모형주의 사진학 입문 - Remediation: An Introduction to Modelism Photography ● 밀레니엄 이후 한국현대사진 지형도 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도시와 건축, 그리고 장소와 공간의 시각성에 집중한 작품 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진들은 후기산업사회 혹은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한 일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예술생산 주체들에게 강한 지적, 미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사진의 기록성, 재현성을 넘어선 일단의 연출사진이 제공한 시각적 이미지는, 부지불식간에 의식화된 도시의 역사성을 해체하는가 하면 때때로 건축이 가진 압도적 물질성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특정 건축물의 표피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거나 익명적 공간의 무표정한 현장성을 강조한 경우다. ● 한편, 이러한 의도적 또는 우연적 사건성에 비하여 직접 모형을 제작하고 촬영한 사진을 최종단계로 전시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있어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데, 다만 이들의 모형은 실재 건축을 축소해 재현한 미니어처(miniature)가 아니며, 일반적 건축 설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형 연구 작업과도 별개인 출발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시각문화의 특성인 수용자 중심의 시각체험은 이들의 작업은 건축가(architect)의 그것과 크게 구별하지 않고 건축 모형과 결부시키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의 작업이 실제 건축계의 모형 제작 형태와 합치되는 부분이 있어 보다 정밀한 탐색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모형의 재료 선택 문제, 제작 공정의 유사성, 더군다나 사진의 최종적 활용은 이미 건축 일반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어온 상식적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일반적 건축 모형과 미술의 영역으로 넘어온 이들 모형 작업 간의 차별점과 변별력은 무엇인지 검토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적일 텐데, 상이한 제작환경에서 탄생한 각각의 모형이 생산한 의미는 당연히 다를 것이란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기왕의 이들 작품 해석에서 간과되어온 측면이며, 모형이라는 물건에 대한 건축적, 미술적 역사성 개념을 도외시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의 작업이 모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진으로 옮겨지는 일종의 재매개(remediation), 즉 사진이라는 매체(media)로 모형의 표현양식과 시각적 인식을 차용함에야 이러한 상호매체적 탐구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수불가결한 과정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일차적으로 모형을 문제화시키고, 나아가 사진으로 재매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론적 쟁점과 비평적 핵심, 그리고 관람(spectatorship)의 전환에 논의를 집중해보고자 한다. ● 아울러 이들의 작업이 전통적 사진에서 중요시되던 카메라, 렌즈, 필름 등의 도구적 측면과 초점, 노출, 감도, 인화 등의 기술적 측면에 절대적으로 부합하지 못한다고 가정한다면, 과연 현재 사진 환경의 어느 위치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지, 그 지형적 배치 변화를 면밀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한 이번 전시는 이러한 일군의 작업을 '모형주의 사진'으로 명칭하고 기존 사진학에 당당히 첨가되기를 희망하며, 이들의 사진 작업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후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답변의 초점을 이동시킬 것이다. 심도 있고 실천적인 연구에 대한 참여작가 개개인의 입장과 관점은, 각자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인식틀과 방법론을 제시하여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본질적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는 민주적 담론을 생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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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호_Space1_람다 프린트_97.5×80cm_2004
작가
이문호는 그간 우드락을 이용하여 모형을 제작하고 육중한 조명을 설치해 사진과 함께 전시하는 형식을 취했다. 우드락은 얇은 두께의 스티로폼이지만 매우 섬세해서 재단 과정에서 칼질에 따라 절단면이 매끄럽지 않다거나, 미세한 마름질 표시들이 확연히 드러난다. 직각의 절단면을 얻지 못할 경우, 접합 과정에서 애로점이 발생하는 쉽지만 어려운 재료다. 이를테면 모형의 기초이자 정석인 재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젯소(gesso)를 칠하면 마치 석고와 같은 질감과 견고함을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신속한 결과를 위해, 혹은 수정의 용이함을 들어 스터디 단계의 모형 제작에 이용한다. 재료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유사점은, 이문호의 작업을 건축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져왔다. 실제로 이문호의 모형과 사진은 모든 관람자에게 보편적인 접근을 한다기보다, 이문호가 의도한 쟁점들에 공감하는 특정 관람자들에게 말을 건다. 이를테면 관람자가 사진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처럼, 사진 역시 관람자들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사진의 의미가 복합적 사회관계를 통해 생성된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의미는 이문호의 의도 외에, 관람자의 사진 인식과 경험, 그리고 시각성의 맥락 내에서 결정될 수 있다. 이문호가 모형의 효과를 차용하며 동시에 배반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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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선이_기술하는 풍경_라이트젯 C 프린트_123×180cm_2008
작가
임선이의 작업을 살필 때마다 간과되어온 부분은, 풍부한 서사성(narrativity)이다. 다만 일종의 사회적 발언, 혹은 현실참여의 내포적 의미(connotative meaning)가 시각적으로 즉각 전달되지는 못하는데, 임선이의 모형과 사진에 대한 오해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소위 '콘타(contour)'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콘타'란 중학교 사회시간에서부터 건축설계 실무현장에서까지 사용하는 등고선 모형을 지칭한다. 이 지점은 관람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하는데, 겹겹이 종이를 집적시킨 콘타의 대형 프린트를 보는 시각적 경험은, 모형의 물리적 입체만 부각될 뿐 순간적 감흥이 덜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관람 초점이 모형에 집중해 있었다는 이유다. 우선적으로 임선이의 콘타는 특정 지형의 정직한 재현물이 아니다. 게다가 콘타를 뜨고 남은 부분의 판을 쌓아 얻은 모형은, 오히려 새로운 지형의 탄생에 버금간다. 여기서 임선이의 콘타, 그리고 사진으로 재매개되는 것은 주류적 시각 원리이자 세계관인 원근법의 해체와 새로운 보기 방식의 제안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임선이는 그의 모형 콘타를 사진으로 매개하면서 이러한 현상 이면의 보이지 않는 부분들, 즉 가시광선으로는 보이지 않던 부분을 적외선으로 비추며 보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본다는 것의 의미가 달라진 것이다. 원근법이 사라져 부조리해 보이는 사진은, 섬뜩하고 불편한 진실, 혹은 남루한 현실의 세계다. 소수, 타자, 외부가 사회를 구성하는 역사의 공간, 임선이의 감춰진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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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태범_White-1_디아섹_100×150cm_2009
작가
하태범은 파괴된 모형을 만든다. 종이를 포함해 기성의 플라스틱 모형 재료 등을 이용 제작한 물건을 다시 사진 찍는 과정은, 재현의 재현이라기보다 표상의 재매개에 가깝다. 이를테면 하태범이 애초에 수집한 투쟁적 현장 사진들은, 그러한 이미지를 실어 나른 통신사의 전략에 따라 조절된 진실일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의 사진이 같은 수 없다는 전제다. 이렇게 제작한 모형 사진은, 이미 겹겹의 표상 장치를 내장한 채 특별한 관람(spectatorship)을 요구한다. 기왕의 하태범의 모형과 사진이 표상한 전쟁과 대재앙의 잔혹성, 참혹함은 단색조의 흰색으로 탈색되었다. 흔히 하태범의 모형에 대한 오해는 이 흰색에 기인하는데, 사진 촬영시 깊은 명암과 음영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흑백사진의 경우에 이러한 효과는 배가되는데, 하태범의 사진이 명백히 컬러사진인 것을 감안하면 이 흰색은 탈색이 아닌 오히려 도색한 위장(camouflage) 에 가깝다. 즉 흰색 아래에 숨겨져 있는 얼룩덜룩한 문제의 양가성(ambivalence)이다. 하태범 사진의 핵심은 바로 이 과정에서 명백해지는데, 사진이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닌 망각을 매개하는 지점이다. 구제역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번 전시작은 텅 빈 축사로 표상된 시대적 상실, 그것을 극복할 치유의 재매개로 관람의 지평을 확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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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주_Magic Land 8_디지털 C 프린트_75×100cm_2007
작가
김정주는 흔히 '호치키스(Hotchkiss)심'으로 불리는 스테이플(staple)을 소재로 모형을 제작한다. 작고 흔해 눈여겨보지 않는 재료를 이용해 구축한 조형의 힘은, 건물을 짓고 다리를 만들며 도시를 형성해 세계를 축조한다. 그러나 기왕의 관람은 수공적 노동집약에 집착해 모형의 물질성과 대형 프린트의 시각적 효과에 교란되어, 정작 사진의 매개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특별한 해석을 내놓지 못한 채 염세적이고 편집증적 이미지로 축소시켰다. 그런데 김정주의 모형 언어에서 자주 등장하는 '타워 크레인'과 'H 형강((H-beam)'은, 철골구조(steel frame structure)의 대표적 요소들로 근대적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해결 못한 건축의 수직성을 만족시킨 획기적 시공기술이었다. 인류의 짓기 욕망과 김정주의 쌓기 욕망이 교접한 이 지점은 결코 가상현실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중세 시대의 성채나 고딕식 첨탑, 롤러코스터의 조형성은 과거도, 상상도, 환영도 아닌 정확한 현재적 시점으로, 당장의 서울 잠실, 석촌호수 근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시각사건이다. 그렇다면 모형이 표상하는 바는 가상의 도피처가 아닌, 오히려 도시적 삶을 긍정하는 '여성 산보객(flâneuse)'의 태도에 가깝다. 김정주의 모형에서 소비되는 시각적 욕망은 도시의 곳곳에 침투한 미디어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즉 조작된 판타지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사진이 매개하는 것은 이러한 욕망의 표현(expression), 혹은 그런 욕망의 표상(representation)이다. 김정주의 모형 사진 관람에서 영화나 텔레비전이 연상 가능한 것은 이런 작용 때문이다. ■
김회철 매뉴얼의 복수 (Revenge of the Manuals)
이소정展 / LEESOJUNG / 李素汀 / painting 2011_0421 ▶ 2011_0508 /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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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정_Interpreter_한지에 수묵담채_120×120cm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20100512i | 이소정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21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브레인 팩토리 BRAIN FACTORY 서울 종로구 통의동 1-6번지 Tel. +82.2.725.9520 www.brainfactory.org
01. 제주도에서 자란 이소정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3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초기의 극히 개인적 서사는 이후 개인전을 통해 사회적 관계와의 동일화 혹은 이탈을 반복하며 새로운 형태로 변이했다. ● 02. 첫 번째 개인전 『name me』(2005, 우석홀갤러리)에서 작가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절단된 신체의 재조합을 통한 비언어적 서사를 구축했다. ● 03. 최종 결과물은 신체의 형상을 지닌 괴기스런 생명체의 탄생을 알렸다. 이와 어우러진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용부호는 작품 자체가 비밀스러운 발설을 하는듯한 묘한 심상을 야기했다. ● 04. 두 번째 개인전 『눈밭의 비겁자』(2007, 금호미술관)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을 배태하고 숙주처럼 자란 괴기스런 생명체의 죽음 혹은 해체를 알리는 듯했다. 다양한 발묵의 우연적 효과는 형상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혈흔처럼 보였다. ● 05. 자동발생학적으로 무한 증식하던 신체는 인정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통제하려는 강한 자의식을 지녔다. 이 두 길항의 긴장은 전체적 형상뿐만 아니라 세부 조직의 구성에도 영항을 미치며 작품의 완결성을 성취했다. 굳이 승자를 따지자면 통제하려는 자의식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그 자리를 다양한 발묵의 우연적 효과가 차지했다. 화면의 효과는 극대화 됐으나, 강한 자의식의 발현처럼 보였던 세부조직의 구성은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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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정_Dancing with the interpreter_한지에 수묵담채_120×120cm
06. 세 번째 개인전 『낯선 명절』(2009, 갤러리2)에서는 탄생과 죽음을 경험한 괴생명체는 유령이 되었다. 명증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현실에 철저하게 개입한다. (전시 제목은 '낯설 명절'이었고, 전시 개막일은 4월 3일 이었다. 제주 출신인 작가에게 이날은 직접적이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현재의 삶에 개입한다.) ● 07. 작품의 큰 변화는 단일한 형상에서 뻗어가던 그림에서 그림이 그림을 배태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괴생명체를 만들어가던 시기에서 괴생명체가 스스로 숙주가 된 시기이다. 변형 논리의 토대는 의외로 객관적 지표인 보슈(bosch) 드릴 '사용설명서'였다. ● 08.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이미지의 부분을 취했다. 그리고 그것을 부품으로 상정하고 화면 위에서 조립했다. 그렇다고 '완성'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상위 부품(다음 그림의 뼈대)이 된다. 완성이면서 완성이 아닌 이 모호한 순간은 오른쪽으로 돌리시오, 왼쪽으로 돌리시오, 화살표 방향으로, 주의하시오, 재생하시오, 잠시 멈추시오, 이렇게 여섯 가지의 매뉴얼 부호와 만나 다음 그림의 단초가 된다. 혹은 그 역이 되기도 한다. ● 09. 사용설명서에 등장하는 작동, 회전, 역회전, 경고 등의 기호는 작업의 논리이자, 작업 설명의 단서가 된다. ● 10. 매뉴얼에 기초하며 자가 증식 하는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이러한 의도는 배신당한다. 여전히 즉흥적인 선이 등장하고 상황 상황에 개입한다.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의 시간은 지속되지만 작가는 그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고 유희 한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불안. 네 번째 개인전 『매뉴얼의 복수』(2011, 브레인 팩토리)는 이에 대한 작업이다. ● 11. 작가는 이전 작업에 기초하여 '원판'을 만든다. 원판의 기본 요소는 '완성'이라는 최종의 단계를 지연시켰던 스스로 자라난 것들과의 싸움에서 획득된 전리품이다. 전리품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하나의 생명체를 만든다. 이 원판은 다시 해체되어 다시 원판과 만난다. 태어나서 죽고 다시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이다. 원판의 특질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레이어가 쌓이면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에서 원판의 형질들은 변형된다. 이번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원판과 원판에서 해체된 부분이 만나는 경계이다. 경계는 있는 그대로 만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형질의 변형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자가 증식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면서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라 객관적으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과정에서 유일하게 벗어나 있는 지점이다. 유희의 지점이자, '완성'의 지점이다. ■
이대범 -
- 이소정_Audience_한지에 수묵담채_120×120cm_2011
01. Lee So-jung
사슴숲 Deer Forest
이소연展 / LEESOYEUN / 李素蓮 / painting 2011_0414 ▶ 2011_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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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연_사슴숲 Deer Forest_캔버스에 유채_225×350cm_201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20100514c | 이소연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 / 2011_0414_목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일~월_11:00am~06:00pm
조현화랑 서울 JOHYUN GALLERY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8-17번지 네이쳐포엠 1층 Tel. +82.2.3443.6364 www.johyungallery.com
2011년 4월, 조현화랑 서울에서는 이소연의 개인전을 선보인다. 독일 뮌스터 국립 미술학교 회화과를 졸업 후 뒤셀도르프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의 아름답고 기이한 자화상들은 2007년 콘라드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지기 이전부터 여러 미술관 전시와 아트페어에서 선보이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국내에서는 『너, 나, 우리』 전시를 통해 2008년 조현화랑에서 처음 소개되어 현재 높은 인지도를 얻고 있으며 유럽과 일본 등 국제 미술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다. 늘 화면 중앙에 등장하는 작가의 초상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 속에서 맹수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동그란 이마, 뾰족한 턱의 상기된 얼굴로 외모적 특성을 과장하여 만들어낸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가면이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항상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속 작가의 서늘한 시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든다. 때로는 당당하게, 때로는 부자연스럽거나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의상, 액세서리, 배경이 어우러져서 친밀하면서도 낯선 장면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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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연_꽃머리띠 Flower Headband_캔버스에 유채_120×90cm_2011
10여 년 동안의 독일에서의 생활은 작가에게 동질성과 이질성, 친밀함과 낯섦, 그리고 그 유동적인 경계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캐릭터화한 '나'를 등장시켜 우리의 일상과 기억을 환기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내적인 삶을 기록한다.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강한 아우라는 단호한 형태, 놀라운 질감 표현, 명쾌한 색채, 확고한 화면 구성 외에도 이러한 일상 속의 낯선 친밀함과 내면의 심리적 묘사에 기인한다. "그림에서 보여지는 옷, 액세서리 그리고 여러 가지 소품들은 내 작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은 단순히 흥미에 의해 모아지고 아껴지게 되었지만 나의 생각, 감정 상태, 심지어 어느 시간에 있는지 조차 얘기해 준다. 나는 옷과 액세서리, 소품들을 내 몸을 장식하는 장신구로 또는 풍경의 일부로 화면 속으로 끌어 들이고,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회화적 언어가 되도록 구성한다. 이것들은 내 기억과 경험의 구성물이면서 동시에 회화적 모티브로서 포즈, 공간 등의 다른 요소들과 결합되어 분명히 정의될 수 없는 미묘한 심리적 감상적 세계의 일부가 된다." ● 작품의 배경은 평소 여행을 즐기는 작가가 방문했었던 실존하는 장소들이다. 작가는 특정 장소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기억 속 감정과 이미지들로부터 시작하여 그것에 연관된 의상과 소품을 고르고 조합하여 작품을 구상한다. 또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습과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 알맞은 장소를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다. 이렇듯 작가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토대로 그린 자화상은 작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자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우리의 자아가 '나'로서의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주변의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반응하고 변화하듯 변장을 통하여 작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녀의 작품은 작가 내면의 본질을 표현함과 동시에 타인의 시선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수용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
조현화랑 -
- 이소연_사슴뿔 Deer Antlers_캔버스에 유채_100×75cm_2011
작가로부터 '따뜻한 글'을 부탁 받았다. 글이 온도가 있으리 만무하지만 그의 작품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한 적이 있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작가를 위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 2003년 8월 어느 날, 가방 하나 달랑 들고 Annandale-on-Hudson 이라는 뉴욕주의 외딴 마을에 도착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떠난 유학 길, 학교에서 임시로 마련해준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아직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캠퍼스는 한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미국 동부지역에는 전례 없는 대규모 정전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숲으로 둘러 쌓인 캠퍼스에는 달빛만 고요하고, 가끔 오가는 자동차 불빛이 아직 문명세계에 있다는 것만 확인시켜주었다. 전기가 없으니 시력을 잃은 것과 다름 없고, 문명의 소리는 사라지고 자연의 소리만 들려오는 시간이었다. TV도 컴퓨터도, 전화기 조차 없는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 시커먼 적막감.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외로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이없음, 바로 그런 경험이었다. ● 2006년 3월 어느 날, 뉴욕의 한 아트페어를 어슬렁거리던 중, 어떤 그림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3년 전 바로 그 암흑 속의 밤, 가방 하나 들고 방향을 잃은 내 모습, 두려움이나 당황스러움보다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린 듯한 표정 없는 나의 모습. 그렇게 내 발길을 잡은 작품이 이소연의 2006년 작품 「On the Way」이다. 인적 없는 시골길, 해는 어둑어둑 저물고, 동양인으로 가늠되는 한 여인이 여행 가방을 들고 길 위에 서있다. 그녀의 뒤로 뮌스터 Münster라는 지명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고, 동네를 배회하는 여우 한 마리도 등장한다. 그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혹 표지판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갑작스런 불빛에 노출되어 얼어붙은 듯 하다. 순간 방향도 시각도, 청각도 사라져버린 듯한 이 그림을 만나면서 나의 어이없던 경험이 나만의 것이 아니
2011.04.21 21:06:30 / Good :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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