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요. 특히,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중요하고 새로운 발전은 없다’라고 생각해 버리는 안일함이에요. 심지어 학교가 새로운 기술력을 도입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어도 이러한 안일함은 새로움을 거부하게 되죠. 특히 음향 녹음 분야의 기기들은 노후화되기 쉬워요. 항상 최신의 장비를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Q. 학교의 현장은 과거, 우리가 실제 일하고 있는 환경은 현재,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은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무엇일까요?
- ‘Openness’. 열린 자세입니다. 변화에 대해, 예전에 일어난 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항상 열려 있는 자세가 바로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살면서 잃지 말아야 할 자세라고 봐요. 마이크로 기술 음향 녹음이 현재 제가 가르치고 있는 분야더라도, 저는 학생들에게 모든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자세를 가르치고 싶어요.
Q. ‘창조‘라는 단어는 항상 변화와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상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대답하기가 조심스러워지는데요, (웃음) 삶의 방식, 그리고 현재 기술들은 계속해서 변화되고 발전되고 있어요. 철학적, 영적, 또는 종교적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변하겠지만, 삶의 특정한 방향성과 지향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삶의 길잡이가 되는 도덕적 나침반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봐요.
Q. 음 향 디자인은 소리로 상상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화가가 그림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표현하듯이, 음향 디자이너는 소리로 상상력을 표현한다고 보는데요, 하지만 그림의 경우 눈으로 보는 것이어서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지만, 아직 음향 부분은 듣고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표현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향 디자인 분야에서도 피카소와 같은 혁신적인 대가가 나올 수 있을까요?
- 추상적인 소리 연구는 어떤 면에서 이미 50년대에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어쿠스매틱 사운드(acousmatic sound)’라고, 50년대 중후반 프랑스 음악가들 사이에서 발전되었는데요, 소리의 실체를 보지 않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소리를 만들어 내는 거죠.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실체에서부터 벗어나 소리만을 만들어 내는 건데요, 상당히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이 방향으로 좀 더 많은 실험들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우 리들의 체험 대부분이 소리보다는 시각에 상당한 지배를 받고 있어요. 시각 지배적 사고를 뛰어 넘어 시각적인 요소를 배제한 관념적 소리만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죠. 하지만 이런 실험적인 일이 가져다주는 혜택은 상당히 의미 있고 멋진 것이죠.
예 를 들면, 영화에서 사용하는 소리를 보면, 소리 자체는 어쩌면 비현실적인 소리인 경우가 있어요. 물론 이 부분에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신경 써서 들어보면 실제 삶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죠. 이 비현실적인 소리를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과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이런 소리를 관객들이 잘 이해하고 심지어 자연스럽지 않다고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 지점을 잘 활용하면 다른 창의적 분야에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요?
Q.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전기를 직접 쓰셨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 운이 좋았어요. 10대 때 거의 존 케이지를 숭배했었죠. 그리고 운 좋게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친분을 쌓았는데요. 1980년대 케이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받아들여지는 대가였어요. 그에 대한 전기가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에 대한 전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래서 케이지에 대한 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고, 그에게 인터뷰하는 내용을 책으로 써도 되냐고 직접 물어 봤어요.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그를 인터뷰하기 시작했어요. 정말 제게는 운이 좋았던 것 그 이상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죠. 그리고 또 절대 무엇이 ‘당연히 있겠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교훈도 얻었죠.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단정했다면 그에 대한 책을 쓸 생각조차 못했을 거니까요. (웃음)
Q. 존 케이지의 작품 중 <4분 33초>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것을 느끼셨나요?
- 사실 작품을 처음 접할 때 이미 그 작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순수하게 이 작품을 만나지 못했어요. 아마도 많은 청중들이 공연장에 가도, 공연장 안내 책자를 넘겨보면서 어떤 내용의 곡인지 알고 들을 거에요. 이 부분이 그의 작품 공연의 가장 큰 실수가 아닐까 생각해요.
어 쨌든, <4분 33초>는 청중들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처음 공연이 시작될 때, 청중들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아주 진중하게 공연에 임하죠. 하지만 작품의 중간 단계 즈음에 이를 때 청중들은 조금씩 몸을 움직이기 시작해요. 꿈틀대는 소리들이 들리죠. 그러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약 30~45초 정도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는답니다. 바로 이 소리의 리듬을 느끼는 것이 매우 흥미로워요.
Q. 4분 33초는 존 케이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이라고 보시나요?
- 더 길었다면 다들 지겨워하지 않았을까요? (웃음) 그리고 짧았다면 앞서 말한 청중들의 움직임이 리듬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정말 이상적인 길이인 것 같아요. 케이지는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영감을 떠올렸을 때 이미 대략 4분 30초란 시간은 정해 놓았다고 해요. 4분 33초에 침묵을 옷 입히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말이죠.
Q. 어떤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가요?
- 누군가에게 어떤 특정한 음악을 ‘들려준다’라는 표현이 마치 제가 누군가를 조종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가 어떤 음악을 들려주고 싶은 것보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소리 또는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그것이 내 작품이든, 다른 사람의 작품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아요. 진심으로 열의를 다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Q. 청각 장애인들에게 음악을 들려준다면, 어떤 감각 기관을 사용하여 음악을 전달하고 싶은가요?
-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정말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아요.
음…, 촉감이 대체 감각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블린 앤 글레니(Evelyn Ann Glennie)라는 타악기 연주가가 있는데요, 그분은 어렸을 때부터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이에요. 하지만 그의 연주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녀는 발을 통해 타악기 연주의 진동을 느낀다고 해요. 소리를 촉감으로 풀어내는 작업, 정말 흥미로울 것 같아요. 대신 저는 소리를 다른 감각기관으로 풀어낼 때, 아날로그 형식으로 풀어내고 싶어요.
Q.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무엇인가요?
- 이 질문을 들으니 갑자기 한국으로 올 때 14시간의 비행 동안 들었던 소리가 생각이 나네요. 아직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소리였어요. 에어컨 소리, 비행기 엔진 소리, 공기 주입 소리, 그리고 사람들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소리였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저 는 자연의 소리를 좋아해요. 새가 노래하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같은 거 말이에요. 아마도 시골에서 자라서 더 그럴지도 몰라요. (웃음) 특히 물이 흐르는 소리를 정말 좋아해요. 물이 흐르는 소리는, ‘물 흐르는 소리’라는 하나의 단어로 단정 지어지는 소리지만, 사실 물 흐르는 소리가 항상 같은 소리를 낸 적은 없어요. 가만히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매번 다른 소리가 들려요. 같은 강물이 흘러도 그 흐르는 소리는 들을 때마다 달라요. 매 순간마다 달라지는 소리에요. 그래서 정말 좋아요.
이 렇게 좋아하는 소리도 있지만, 소리에 대해 사람마다 상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황홀한 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듣기 싫은 소음이 되어 버리죠. 저는 모든 소리에 대해 열려 있으려고 노력해요. 더 많은 것들에 열려 있을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가 보는 세상은 더 넓어지니까요.
Q. 한국의 소리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 한국에 도착해서 느낀 건데, 한국 매미는 한국말의 악센트를 그대로 닮아 있더라고요. (웃음) 한국어만이 가지고 있는 음의 높낮이를 그대로 매미가 가지고 있는 걸 느꼈어요.
길을 걷다 보면 제가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이 도시만이 가진 소리가 들려와요.
특 히 언어에서 오는 소리가 특징적인데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특정한 모음 소리, 자음 소리 등이 만들어 내는 한국만의 소리가 있어요. 아마도 각 국가별로 그 국가만의 소리에 대한 연구를 하면 아주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
Q.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화두는 ‘다양성’입니다. 아직 한국이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에요. 다양성 획득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문화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 럽에서는 과거에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주 쉽게 저지른 실수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부정하는 태도였어요. 자기 스스로 그 자체이기를 거부하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과 다른 무언가를 좇는 거죠. 다양성을 잘못 이해한 태도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개인 하나하나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일 때, 그리고 그 모습을 서로가 존중해 줄 때 다양성이 생겨나는 것 같아요. 따라서 현재 가지고 있는 문화 그대로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 리의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동시에 우리의 모습과 다른 어떤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자세 즉, 도덕적 규율을 바탕으로 한 열린 자세가 필요한 거죠. 무조건적인 포용 또한 지난 서구 사회에서 저지른 실수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무조건적인 포용과 무조건적인 자유로움은 사회적 문화적 다양성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딱딱한 외부적인 규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기준, 즉 도덕적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Q.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재 상황을 잘 짚어내 주신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당신의 직업 철학을 세 단어로 표현 한다면 무엇입니까?
- ‘Always Be True.’ 항상 제가 하는 모든 일에 진심으로 진실하게 접근하고 싶어요.